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2화 (12/168)

12. 메시지

“사람이 있는 듯 없는 듯해. 조용하고 얌전하고. 가정교육은 잘 받은 거 같아요. 밥 먹으면 꼭 그릇 가져다 담가 두고, 속옷 빨래는 본인이 다 하고.”

장 여사가 문도의 앞에 딸기와 오렌지가 정갈하게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장한다, 음식 재료 손질한다, 주말에 바쁠 때는 와서 돕기도 잘하고. 오늘도 일찍 일어났다면서 콩나물 다듬는 거 돕는다고.”

오늘 아침 메뉴는 쑥국에 봄동 샐러드, 버섯전이었다. 장 여사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본인의 손으로 아침상을 차려 주곤 했다.

그런 날이면 별채를 휘휘 둘러보기도 하고,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들을 양념처럼 착착 뿌려 주기도 했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이선우에 대해 말을 해 주고 있었다.

“막내 아가씨를 어떻게 잘 달래 놓은 건지, 이젠 행패도 안 부리는 것 같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요, 저는.”

장 여사가 행주로 아일랜드를 훔치며 말했다. 문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수저를 들었다. 깔깔한 목을 국으로 축인 뒤 밥을 떴다.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하고, 남의 집 더부살이하는 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야. 그이도 그 집에선 귀한 딸이었을 텐데. 아버지가 빚을 많이 지고 죽었나 본데.”

이선우의 처지에 장 여사 본인의 과거를 겹쳐 보고 있는 것을 알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문도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장 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사님. 그만.”

무표정한 문도의 얼굴에 장 여사가 아차 싶었는지 얼른 말을 돌렸다.

“출근하는 사람 두고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어서 드세요. 전 이만 건너갈게요.”

문도는 묵묵히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장 여사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공간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따금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말고는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모든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졌을 때, 문도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아침을 많이 먹지 않는 그를 위해 서너 숟갈 정도 담긴 밥이었다.

문도는 마지막으로 딸기 두 알과 오렌지 한 조각을 먹었다.

맛이 있건 없건 주어진 양을 깨끗하게 비운다는 건, 그의 몸에 밴 식사 예절이었다. 밥을 먹으면 그릇을 가져다준다는 여자가 받은 가정교육처럼.

상큼한 오렌지를 목으로 넘기며 문도는 여자를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여자와 나누었던 대화와 그 대화 끝에 보았던 여자의 표정을.

춤을 보았노라 말했다. 제법 잘 추더라고. 무대에 계실 분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안타깝다고.

여린 목소리로 겨우 한 대답이 괜찮다는 말이었다.

사정없이 후려치는 말에 목덜미까지 희미하게 붉어져서는, 마른침만 삼키며 괜찮다는 말만 겨우.

그때 보았던 여자의 표정이 밤새 그를 쫓아다녔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나. 아니다.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수치심에 물든 얼굴이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 표정은……. 그래,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콩나물을 다듬고 있다고.

문도는 시계를 보았다. 6시 51분. 여자의 출근 시간까지는 9분이 남았다.

평소 남는 게 시간이라는 듯, 대중없이 건너오던 여자였다. 이른 출근을 하면서도 얼굴을 본 게 몇 번은 되었으니까.

오늘은 몇 시에 건너오려나.

문도는 핸드폰을 들어 뉴스 섹션을 열었다. 9분 정도 늦게 출근을 할 생각이었다.

* * *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예상대로 7시 정각이었다.

고요한 공간에 삐리릭,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도는 재킷을 팔에 걸치고 핸드폰을 들었다.

거실로 나가자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던 여자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잘 잤어요?”

문도가 묻자, 바로 대답을 찾지 못한 여자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대답을 한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7시 정각이네요.”

문도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고 선우를 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물었다.

“아침에 콩나물 다듬었다면서요.”

“아…….”

말을 잇지 못하는 이선우에게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시 물었다.

“나랑 마주치기 싫어서?”

당혹스런 표정의 여자는 귀가 빨갛게 익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이번에 문도는 말을 자르지 않았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여자가 도리어 말을 잇지 못했다.

문도는 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황하던 여자의 눈동자가 문도를 향해 고정이 되었다. 대답을 잃어버린 눈동자는 깊은 갈색이었다.

“이따 보죠.”

순식간에 시선을 거둔 문도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여자에게 말했다.

네, 하고 대답하는 여자를 스치는데 짙은 꽃냄새가 났다.

독한 향수 냄새에 문도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며 망연히 서 있는 여자의 모습도 사라졌다.

향수를 얼마나 뿌렸기에.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문도는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했다. 불쾌할 정도로 짙은 꽃냄새가 코끝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 * *

“우리는 어제 만들어 두었던 동치미 국물에 시원하게 국수 말아 먹으려 하는데, 선우 씨도 한 그릇 할래?”

점심시간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서유라를 두고 식사를 하러 건너온 선우에게 조리사 아주머니가 물었다.

서 회장의 변덕스런 입맛에 직원들만 호강을 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전복죽을, 하루는 소고기 육회를, 또 다른 날에는 진하게 내린 양지 국물과 동치미 국물을 섞은 메밀국수를, 회장은 골고루 돌아가면서 찾았다.

“네. 반 그릇만 먹을게요.”

“지금 바로 내줄까?”

“네. 방에 가서 핸드폰만 가지고 내려올게요.”

선우는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며 대답을 했다.

“요즘 사람들은 핸드폰 없이 못 산다는데, 매번 불편하겠어.”

“괜찮아요. 이렇게 틈틈이 확인하면 돼요.”

조리사 아주머니의 말에 선우는 웃으며 대답을 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에는 스팸 메시지만 한 통 와 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증거든 무엇이든 밝혀지는 게 있다면 꼭 좀 연락을 해 달라고 담당 형사에게 부탁을 해 두었지만, 아직까지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

성의 없는 표정으로 빨리 마무리 짓기만을 원했던 형사가 해 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혹시 몰라서 꼬박꼬박 확인은 하고 있었다.

“제가 뭐 도와 드릴 거 있을까요?”

핸드폰을 가지고 내려온 선우는 국수를 삶기 위해 커다란 냄비에 물을 받는 조리사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응, 별일 없으면 저기 삶은 계란 좀 까 주면 고맙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그릇 안에 삶은 달걀이 소복하게 들어 있었다.

선우는 쟁반과 빈 그릇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톡톡, 삶은 달걀을 그릇의 가장자리에 부딪힌 뒤 금이 간 부분부터 벗겨 냈다.

‘콩나물 다듬었다면서요.’

뾰족하게 각이 진 부분을 들추며 껍데기를 벗기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쓱 훑어보는 눈에 서린 희미한 웃음기.

서유라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오전 내내 생각났던 건 창피한 자신의 모습들이었다.

아, 네……, 하고 쪼그라든 대답을 했던 것. 묻는 말에 제대로 답도 못 했던 것.

‘나랑 마주치기 싫어서?’

에둘러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이 자란 사람인가.

타인의 감정을 배려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면 서문도라는 남자처럼 되는 걸까.

남자의 앞에만 서면 꼭 이렇게 삶은 달걀이 된 기분이었다. 얄팍하게 두르고 있던 껍데기들이 파삭파삭 깨지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몇 마디 말로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껍데기를 가차 없이 깨트리고 함부로 벗겨 냈다. 그리고 애써 숨겨 놓은 마음을 쿡쿡 찔렀다.

한숨과 함께 삶은 달걀 껍데기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하얗고 매끈한 살갗을 드러낸 달걀이 그릇에 소복하게 담겼을 때, 조리사 아주머니가 선우를 불렀다.

“자, 선우 씨 먼저.”

살얼음이 언 동치미 육수 속에 얌전히 말린 메밀국수가 앉아 있었다. 고명으로 올라온 얇게 썬 동치미 무와 소고기 양지까지, 꼭 식당에서 파는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겠어요.”

선우는 젓가락을 들었다. 동그랗게 말린 메밀국수를 흩뜨려 국물과 함께 잘 섞은 뒤 면을 들었다.

톡 쏘는 맛이 도는 시원한 국물과 메밀 특유의 투박한 면이 선우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때? 맛이 괜찮아?”

“맛있어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 조리사 아주머니에게 선우는 활짝 웃으며 대답을 했다. 시원하고 청량한 맛이 텁텁했던 기분까지 씻어 내려 주는 것 같았다.

“아유, 꽃 피는 것 좀 봐. 이제 조금 봄 같고 그렇다. 그치?”

조리사 아주머니 두 분이 국수를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식탁 너머 유리창으로 숙소동 담벼락을 따라 피어난 개나리가 보였다. 양지바른 쪽의 나무에는 벌써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삶은 계란도 더 얹어서 먹어. 단백질을 먹어야 힘을 쓰지.”

“네.”

맛있게 먹던 선우가 대답을 하면서 반으로 잘린 삶은 달걀을 집으려 할 때였다.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또 스팸 메시지려나.

대수롭지 않은 생각으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을 때였다. 메시지를 열어 본 선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선우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민우 핸드폰 서문도가 가져갔습니다.]

낯선 번호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의 내용이었다.

앉아 있는 선우를 중심으로 집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느낌이 들었다. 글자들은 눈에 읽히는데 무슨 말인지 머릿속에서 해석이 되지 않았다.

민우 핸드폰을 서문도 전무가 가지고 갔다고?

커다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까맣게 암전이 되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선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배가 불러? 그만 먹으려고?”

“그렇게 새 모이만큼만 먹으니까 살이 붙질 않잖아. 막내 아가씨 상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해. 조금만 더 먹어 봐.”

걱정하는 얼굴로 보는 조리사 아주머니들에게 선우는 간신히 웃어 보였다.

“아침부터 속이 조금 안 좋았었는데,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아요. 올라가서 쉬었다가 건너갈게요.”

아주머니들이 뭐라 말을 하고, 선우도 다시 대답을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오직 하나. 민우 핸드폰이 서문도에게 있다는 메시지의 내용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