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루 종일 무엇을
선우의 퇴근 시간은 밤 10시였다.
그때쯤이면 방에 들어가 TV를 보고 있는 유라에게 이만 가 보겠다고 인사를 한 뒤 별채를 나오는 게 평소의 패턴이다.
‘아, 맞다. 옷장 정리 좀 하고 가.’
퇴근을 알리는 선우에게 유라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다. 그러고는 TV에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 웃었다.
선우는 한 시간 남짓 다시 차곡차곡 드레스룸 정리를 했다.
미등이 켜진 정원을 가로지른 시간은 11시를 넘긴 시간. 그쯤에는 숙소동의 불빛도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배추 절인 것만 건져 놓고 자러 가야겠다는 장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2층의 방에 돌아와 짐을 정리한 뒤 샤워를 했다.
기본적인 속옷을 빨고, 내일 아침에 내어놓을 세탁물을 정리하고 나니 12시.
자정을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선우는 편한 원피스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서문도에게서 언제 호출이 올지 모르기에, 핸드폰을 옆에 두고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화장품이 발린 이마를 문지르던 선우의 손이 느려졌다.
‘누나,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귓가에 민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부모님의 기일을 맞아, 간단하게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날이었다.
나란히 앉아 TV를 보며 꼬치에 맛살과 파를 끼우던 중에 민우가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었다.
‘저기 인터뷰에서 여자친구 없다고 손을 내젓는 저 배우 있잖아, 재벌집 딸이랑 사귀는 중이다? 서유라라고, 좀 유명한 사람인데 누나도 알아? 암튼 비밀 연애 중이래.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TV 화면 안에는 한 남자 배우가 있었다. 리포터가 요즘 화제의 남자라며 소개한 배우는 새까만 바둑알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영재가 그러는데, 놀 땐 장난 아니래.’
그때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말을 자르지 않았더라면.
헛바람 든 영재랑 어울리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더라면.
하다못해 저 배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들어 두었더라면. 뭐라도 달라졌을까.
민우가 죽은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것도 이해되는 것이 없었다.
등록금을 벌겠다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민우는 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까.
어째서 친했던 영재와 약에 취해 싸웠을까. 머리의 상처는 정말로 영재가 만든 것일까.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던 너는 왜 난잡한 클럽의 VVIP룸에 있었니. 왜 겁도 없이 약을 했니.
정말로 영재와 다툼이 있었니. 손에서 떼지 않았던 핸드폰은 왜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는 거니.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선우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서도 그룹이라는 거대한 벽이 서유라를 보호하고 있었다.
사망 시간, 사망 원인, 목격자과 진술들. 마치 누군가 짜 맞춘 것처럼 들어맞았다.
단 한 가지, 어디에서도 죽은 두 사람의 핸드폰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빼고.
그날, 여러 개의 핸드폰이 분실되었다고 했다. 서유라는 강박증이 있어 룸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핸드폰을 모두 걷어 한자리에 둔다고.
그중 여러 개가 사라졌다고 했다. 하필 사건이 벌어진 날에 우연의 일치로.
내가 너를 아는데. 민우야, 누나가 너를 아는데.
모두들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라는데, 선우 혼자만이 이러고 있었다. 그저 핸드폰이 없어졌다는 사실과 민우는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믿음만으로.
길게 한숨을 내쉰 선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어플을 열어 배우 최지상의 계정을 찾았다.
최지상의 계정에는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 가득했다. 사진 밑에 달린 팬들의 댓글에도 한 번씩 센스 있게 답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스탭이며 동료들과 찍은 사진들엔 칭찬만이 가득했다.
선우는 한쪽으로 보이는 다이렉트 메시지 탭을 열었다. 평소 예의가 바르기로 유명한 배우는 선우의 메시지에 여전히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한숨을 쉬는데 벨 소리가 울리며 화면이 바뀌었다. 까만 화면 위로 ‘서문도 전무님’이라는 글자가 떴다.
“네. 이선우입니다.”
선우는 기계적으로 전화를 받으며 시계를 보았다. 12시 49분. 엄밀히 말해, 내일이 되어버린 시간이었다.
— 건너오시죠.
“네.”
남자는 시간 같은 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고,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우는 카디건을 입고 숙소동을 나섰다.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에 카드를 대자 삐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주방 아일랜드에 불이 켜져 있고, 서유라가 귀신 같은 얼굴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왔냐.”
살짝 꼬인 발음으로 유라가 말했다. 선우는 고개를 잠깐 숙이며 인사를 했다.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기어코 오래? 도칸 새끼.”
유라가 떡볶이에서 넓적한 당면을 건져 먹으며 말했다. 커다란 유리잔에 따라 놓은 소주를 꿀꺽 마시더니 푸, 하고 숨을 내쉬었다.
“가서 말 잘해라. 나 운동 졸라 열심히 한다고 하고, 지랄도 안 한다구. 아, 맞다. 남친이랑 통화한 얘기는 빼궁.”
유라가 질겅질겅 당면을 씹으며 말했다. 선우는 유라가 끄윽, 트림을 뱉는 소리를 들으며 계단으로 향했다.
똑똑.
선우는 반쯤 열려 있는 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거실은 어두웠고 드레스룸만 불이 밝혀 있었다. 여느 때처럼 커프스링크를 빼고 있는 서문도 전무의 모습이 보인다. 선우는 보고를 시작했다.
“서유라 씨는 오늘 9시에 기상하셨습니다. 아침으로 샐러드 드셨고, 친구분과 통화를 하셨습니다. 언박싱 영상을 찍으셨고, 저녁으로 곤약 젤리 드셨습니다. 지금은 소주에 떡볶이 드시고 계시고요.”
선우의 보고에도 문도는 묵묵히 소매의 단추만을 풀 뿐이었다. 철저한 무관심이 무엇인지 저 남자를 통해 배운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이선우 씨는요.”
서문도가 커프스링크를 진열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네?”
“이선우 씨는, 하루 종일 무엇을 했죠?”
서문도가 몸을 틀어 선우를 바라보았다. 칼날같이 서늘한 눈빛이 선우를 향했다.
서문도가 싱긋 웃는다. 무엇을 알고 하는 말일까.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 * *
“저는…….”
선우의 마른 입술이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나는 무엇을 했었지. 생각을 더듬는데 괜히 심장이 뛰었다. 웃으며 자신을 보는 남자의 눈빛이 자신을 꿰뚫는 것 같았기에.
“서유라 씨를 도와서, 촬영을……. 아, 그 전에 머리가 아프시다고 해서.”
서유라의 일과에 대해서 보고할 땐 줄줄 나왔던 말들이 두서없이 뒤섞였다.
하루 종일 한 일은, 서유라의 통화를 엿들은 일. 최지상이 남자친구인 것을 확인한 일.
서유라의 하루와 이선우의 하루가 뒤섞이며 선우의 대답이 흐려졌을 때였다.
“아프다고 해서?”
서문도가 재촉하듯이 말했다. 선우는 머리를 잘게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서문도를 바라보면서 하나씩 기억을 정리해 본다.
“지압을 해 드렸습니다. 커피를 타 드렸고, 방송 촬영을 도왔습니다. 옷장 정리를 해 드렸고.”
“발레.”
서문도가 선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왜 그만두었죠?”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워진 선우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아……. 그건,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은 선우에게 발레를 그만두었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발레단을 그만두긴 했지만 생업으로 발레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다 발레단을 그만두었냐고 물을 뿐이었다.
“부상이 있었습니다.”
“부상이 있다고 다 그만두진 않을 텐데요.”
시계를 풀면서 서문도가 말했다. 관심이 왜 이쪽으로 기울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선우는 숨을 깊이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부상이 있었고, 재활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 다요.”
선우의 설명이 끝나기 전에 서문도가 맥을 짚듯이 되새김질을 했다. 차분해 보이는 눈빛이 왜 이렇게 서늘하게 느껴지는지.
“네. 두 분 다요.”
“유감입니다.”
서문도가 담담히 말했다.
“아니에요.”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기도 했다.
시계를 풀고, 커프스링크를 풀고, 넥타이까지 풀어 내린 남자는 이제 하얀 셔츠에 짙은 네이비색의 슬랙스 차림이었다.
호기심은 여기까지일까. 이젠 내려가도 되는 건가.
선우가 서문도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남자가 성큼 걸어왔다.
선우가 서 있는 거실까지 내려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생수를 집었다. 우두둑, 뚜껑을 돌려 따면서 다시 묻는다.
“그만둔 지는 얼마나 되었죠?”
그런 게 왜 궁금한 건데요.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데요. 선우는 되묻고 싶어지는 마음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4년쯤 되었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을 마시고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선우를 보며 말했다.
“그런 것치곤, 잘 추던데.”
“네?”
“어젯밤에요, 테라스에서.”
남자가 턱짓으로 유리창 너머를 가리켰다. 당황한 선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다.
“안타깝네요. 공연장에서 계셔야 할 분이 이런 데서.”
“괜찮습니다. 저는…….”
목이 메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선우에게 서문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괜찮을 리가요.”
언제였더라.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것과 똑같은 표정으로 남자가 웃었던 날이 있었다. 처음 물벼락을 맞은 날이었나. 그래. 그때였던 것 같다.
차라리 물을 뿌리지.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이 조각조각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선우는 욱신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서문도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