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잔상 @AW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길게 누워 서류를 보고 있던 문도는 잠깐 시선을 들어 벽시계를 보았다. 11시 52분.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문도는 보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두툼한 묶음으로 이루어진 서류는 목요일 정기 주총을 대비한 질의응답지였다.
정기 주총을 앞두고 4월로 예정된 서도 솔루션의 상장 이슈에 대한 예상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들을 정리한 것이다.
11시 반 정도까지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지 최종 체크만 해 볼 생각이었는데, 읽다 보니 시간이 또 훌쩍 흘러 버렸다.
“전무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전략부문장인 문도를 보좌하는 전략본부1팀의 송정태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차 한잔 들일까요?”
송 팀장의 질문에 문도는 피식 웃었다. 잘 마시지도 않는 차를 마시겠냐고 물어오는 건, 그의 퇴근이 자정을 넘길 것인지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 그만하고 퇴근하면 안 되겠니, 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뇨, 이제 퇴근해야죠.”
문도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뻐근한 목을 뒤로 젖혔다가 양옆으로 한 번씩 꺾는데, 송 팀장이 말했다.
“많이 피곤하시죠? 목요일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문도를 위하는 것처럼 말을 했지만 사실은 송 팀장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깃든 말이었다.
정기 주총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가 송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긴 하지.
보통은 형식적인 질의응답이 오갔던 정기 주총이지만 올해는 달랐다.
서도 케미컬의 핵심 사업 분야인 전지 부문을 통째로 들어내서 상장을 하는 것이기에, 이번 정기 주총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질문이 많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거기다 부회장은 서 전무를 앞세우기를 좋아했다. 특히나 기자들이 모이는 자리나 카메라가 돌아가는 장소에서는 어김없었다.
원래 사람을 쪽쪽 빨아먹는 게 부회장 특기였다. 그런 사람이 잘생긴 자기 자식을 그냥 두고 볼 리 있나.
서문도 전무를 서도의 ‘얼굴’로 야무지게 활용을 하며, 정기 주총에서도 갖은 질문이 오는 자리에 서 전무를 세워 둘 터였다.
서 전무도 그걸 알기에 야근을 거듭해 가며 빈틈없이 준비를 하는 거고. 그러니 목요일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울 아버지는 참 좋을 거예요. 그죠?”
송 팀장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문도는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같은 아들 둬서 좋을 거야.”
그리고 느슨하게 내려 두었던 넥타이의 매듭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잘생겼지, 일 잘하지, 출근은 일찍 해, 퇴근은 늦게 해.”
송정태 팀장은 조금 난감했다. 대답을 바라는 말인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인지 구별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도가 후, 하고 크게 숨을 뱉고는 한 손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며 말했다.
“씨발, 더럽게 피곤하네.”
순식간에 서늘해진 눈빛에 정태는 잠시 움찔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그랬다. 묵묵히 재킷의 앞단추를 채운 서문도가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는 송 팀장을 보며 슬쩍 웃었다.
“송 팀장님도 퇴근 준비해야죠.”
그 와중에 웃는 얼굴은 기막히게도 잘생겨서 다정한 느낌까지 주었다.
냉탕과 온탕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니, 정신을 못 차리겠네. 송 팀장은 잠깐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했다.
“네, 저도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문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뵙죠.”
매끄러운 미소에 적당히 무심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조화가 매력적이었다.
바늘 한끝도 안 들어갈 것 같은 철벽같은 미소임에도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었다.
저러니 부회장님이 대놓고 앞에 세우는 거겠지. 정태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도에게 묵례를 하였다.
* * *
서도 케미컬 본사는 광화문 사거리에 있었다.
원래는 서도 그룹의 본사였는데, 그룹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룹 본사는 서초동 신사옥으로 이전을 하고, 보라매에 있던 케미컬의 본사가 광화문으로 이전을 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두고 본사 자리를 물려받았다, 고 표현을 했다. 큰아버지가 중공업의 반토막을 날려 먹은 직후였다.
물려주신 본사 자리를 잘 지켜 내겠노라고 카메라 플래시를 팡팡 받으며 겸손하게 말씀하셨지.
그러나 본사 자리를 두고 아버지가 얼마나 침을 흘렸는지는 문도가 제일 잘 알았다.
이순신 장군이 칼을 차고 있는 저 넓은 광장이 쭉 뻗은 16차선 대로였을 때부터 서중호는 광화문 본사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으니까.
서 부회장에게 광화문 본사는 일종의 상징 같은 거였다.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어떤 상징 같은 것.
아버지의 야망은 현실이 되었고, 덕분에 출퇴근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광화문 앞의 대로는 광장에게 점점 그 자리를 내어 주더니 지금은 처음의 반쪽도 안 되는 홀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도는 뒷좌석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창밖의 풍경을 흘려보냈다.
새로울 것 없는 풍경들이 느리게 스쳐 간다. 창문이 닫힌 차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반의반이 되어 버린 도로. 자정에도 사람들이 제법 보이는 광화문 광장. 공사 중이라 써 붙인 현수막과 안내 표지판들.
생각 없이 그런 것들을 보는데 신호에 걸린 차가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문도의 시선이 건너편의 세종문화회관에 무심히 닿았다.
‘지젤. 상트페테르부르크 내한 공연’
커다란 현수막이 바람을 따라 펄럭였다. 목을 한쪽으로 기울인 발레리나가 우아한 손동작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도는 나직이 욕설을 씹었다.
하루 종일 눌러 두었던 장면이 기어코 튀어나온다. 나 여기 있는데 왜 무시하고 있냐는 듯이.
‘울었습니까.’
왜 튀어나왔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질문과 둥그렇게 눈을 뜨고 자신을 보는 여자의 얼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걸 왜 묻냐는 얼굴로 자신을 보던, 그 고요한 눈빛.
왜는. 우는 것처럼 얼굴을 파묻었으니까 물었지.
문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떤 장면이 자꾸만 재생이 된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빔프로젝트를 허락 없이 틀어 버리는 기분이다.
밤, 달빛을 받은 가는 실루엣과 여자의 선율 같은 움직임.
숨이라도 크게 쉬었다가는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릴 것 같았던 그 밤의 순간들.
눈을 뜨고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잔상이 아주 오래 남는 꿈을.
순도 높게 정제된 것들이 마음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다. 한 편의 시가 그렇고, 한 장의 그림이 그랬고, 몇 분에 불과한 음악이 그랬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흔히 예술이라 일컫는 것들.
순간에 응축된 감정의 정수들이 사람의 마음을 관통하는 순간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들을 감동이라 부른다는 것도.
문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바람에 현수막이 펄럭이며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니 발레든 한국무용이든 현대무용이든 춤에 관련한 공연은 본 적이 없었다.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클래식 음악 공연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한자리에 앉아 귀만 열어 두면 되었기에. 그나마도 딱 필요한 만큼만 참석하는 편이고.
펄럭이는 현수막을 보며 문도는 반성을 했다.
컨텐츠 사업이니 OTT 사업이니 기획사를 차리네 마네 수백억을 쏟아부어 남의 배만 불려 주는 멍청한 사촌들이나 공연을 쫓아다니다 감동에 젖어 브라보를 외치는 줄 알았더니.
발레 문외한이 춤 같지도 않은 춤에 홀려서는, 울었네 말았네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문도는 이선우를 머릿속에 제대로 띄워보았다. 선이 가는 몸. 맑은 느낌을 주는 얼굴.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 조용히 별채와 숙소동을 오가는 여자. 발레를 전공한 서유라의 일곱 번째 트레이너.
국립 발레단의 이력이 있었으니 여자는 뛰어난 무용수였을 것이다. 거기다 밤, 바람과 봄. 그딴 것들을 끼얹어 놓았으니 예술 점수는 10점 만점에 10점.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니었다. 음악을 듣던 여자가 잠깐잠깐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춤이라도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작은 움직임에 홀려버린 건 아마도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차라리 박수를 칠 걸 그랬지. 그 밤에 창문을 열고,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쳐 줄 것을.
거기까지 생각한 문도는 픽 웃었다. 화들짝 놀라 낯뜨거워하는 모습의 여자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랬어야 했다.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어 줄 것을. 훌륭한 공연이었다고, 엄지를 치켜세워 줄 것을.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지는 않았을 텐데.
신호가 바뀌었는지 차가 다시 천천히 속력을 냈다. 문도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왠지 오늘 밤 여자를 보게 되면 몹시 거슬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 불러야지.
거슬림을 마주하고 똑바로 쳐다볼 것이다. 마침내 그것이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지금 시간이 12시 15분. 집에 도착하면 30분이 넘을 테지. 몇 시가 되었든 문도는 여자를 불러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