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Seonwoo
선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선우는 누운 채로 가만히 생각을 했다.
숙소방의 벽 한쪽에는 전에 쓰던 사람이 걸어 놓은 엽서 크기의 액자가 있었는데, 눈을 뜰 때마다 그게 제일 먼저 보였다.
밤의 강가 풍경을 담은 자그마한 그림엽서는 여기가 서도 회장가의 숙소라고 알려 주곤 했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일어나 정신을 차리라고.
선우는 일어나서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평소보다 부은 눈꺼풀 때문에 눈을 반만 뜬 기분이었다.
서너 번 꾹 눌러 지압을 한 뒤에 수건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서유라와의 수업에 쓸 물건들을 챙겼다.
방문을 열고 나서니 계단에서부터 밥 냄새가 풍겨 왔다. 조리사 아주머니가 챙겨주는 따뜻한 국과 밥으로 식사를 한 뒤, 선우는 숙소동을 나섰다.
별채로 건너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서문도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선우에게 문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하던 대로 거실 소파에서 유라를 기다리려고 걸음을 떼는데, 서문도의 시선이 선우를 따라왔다.
뭐지. 얼굴에 뭐가 묻었나.
어색한 기분에 선우가 괜히 에코백의 끈을 힘주어 쥐었을 때였다.
“혹시 울었습니까?”
서문도가 물었다. 빤한 시선을 선우의 눈동자 위에 맞추고서.
울었다니. 내가?
별채에서 서유라에게 숱한 괴롭힘을 당했지만 운 기억은 없었다. 그런 정도로 울 거였으면 애초에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니.
“아니요.”
선우의 대답에 문도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본 거지? 라고 선우가 생각할 때였다. 문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눈이 부었길래.”
아.
그제야 어젯밤 생각이 났다. 그렇게 많이 부었나. 선우는 눈가를 더듬어 보았다. 눈이 부을 정도로 오래 울지는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연습을 하며 수백 번, 수천 번을 들었던 곡이 새벽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선율이 끝나 갈 때, 뒤이어 기억이 밀려왔다. 입단 후 첫 번째 공연이었고, 부모님이 아주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서 응원을 왔었다. 마지막 가족사진을 찍은 날이었다.
“아뇨. 울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했지만, 남자는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린 뒤였다.
울지 않아요. 나는.
선우는 소리가 되지 않은 말을 꿀꺽 삼켰다.
눈물은 지겹도록 쏟았다.
아직도 어느 순간 눈물이 흘러나올 때가 있지만, 그건 어젯밤처럼 방심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 집에서 나는 울지 않아.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 막막했지만 하나는 알았다. 우는 건 제일 마지막에 할 일이었다.
여기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서유라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일단은 살아남자.
선우는 다시 한번 다짐하며 소파에 에코백을 내려놓았다.
책을 꺼내는 대신, 머리를 단단히 동여매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늘은 첫 수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 * *
퉁퉁 부은 모습으로 일어난 서유라가 샐러드를 끼적거렸다. 포크로 이리 휘적 저리 휘적거리더니 식욕이 없다는 듯이 밀어내 버렸다.
“컨디션이 존나 바닥이야. 나 물 한 잔만.”
머리를 감싸 쥐며 서유라가 말했다. 선우는 물을 떠서 식탁 위에 내려 주며 유라에게 물었다.
“머리 지압 좀 해 드릴까요?”
“어. 그래.”
유라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선우는 유라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꾹꾹 눌렀다.
“으. 시원해. 어, 거기. 거기.”
눈을 지그시 감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서유라는 확실히 지난 금요일 이후로 심술이 많이 줄었다.
“엄마 졸라서 스파나 다녀올까.”
유라가 느릿느릿 말을 할 때였다. 식탁 위에 놓인 서유라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울 쟈기’라는 글씨가 떴다. 유라가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촬영을 밤새서 하냐? 기다리다 잠들었잖아.”
영상 통화가 시작되자마자 유라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을 했다.
— 에이, 그러게 기다리지 말고 자라 그랬잖아요. 끝나면 바로 전화한다고. 기다리지 말고 자요. 뭐 하러 기다려. 피곤하기만 하지.
눈웃음을 생긋 치며 화면을 보는 남자는 배우 최지상이었다.
최지상.
선우가 그렇게 여러 번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던, 그 최지상.
유라가 선우의 손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을 얼굴에 맞추어 높이 들고 화면 안의 남자를 보며 걸었다.
화면 안의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더니 눈을 좁히며 유라에게 물었다.
— 뒤에 누구?
“아, 쟤? 나 요즘 봘~뤠 하잖아.”
— 응?
“봘~뤠~ 쟤는 내 봘뤠 쌤. 입주 트레이너야. 신경 안 써도 돼.”
유라가 낄낄 웃으며 말하고는 선우에게 따라올 필요 없이 거기 있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거실 소파에 털썩 누워 핸드폰을 높이 들며 말했다.
“하, 나가고 싶다. 만난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상대방 남자가 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멀어져서 그런지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선우는 천천히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 누나가 나와야지 만날 수 있을 텐데. 아직도 외출 금지?
“몰라. 서문도 그 새끼는 노답이라. 그래도 엄마 아빠 다 돌아왔으니까 어떻게든 나가 봐야지. 아빠한테 좀 살랑거리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서유라가 다리를 소파에 걸치며 한숨을 쉬었다. 선우는 일부러 느리게 소파 뒤를 지났다.
— 나와요, 빨리. 그래야 같이 있지.
“나두 그러구 시펑. 울 쟈기 넘 보구 싶당.”
서유라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 꼬면서 남자에게 투덜거리다 말고 머리를 세워 선우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화장실로 쪽으로 향하는 선우를 보고는 다시 소파에 풀썩 누웠다.
— 그런데 우리 통화하는 거 들어도 괜찮은가?
“뭐, 서문도가 붙여 놓은 애긴 한데, 괜찮아. 내 편 하기로 했어. 그리고 쟨 짤릴까 봐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해.”
대화를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천천히 걸었지만, 화장실까지는 금방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통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선우가 괜히 물을 한 번 내리고 나오니 통화는 벌써 끊겨 있었다.
“야, 나 언박싱 영상 찍어야 하거든? 드레스룸 가서 엄마가 사 온 거 가져오고, 거기 옷장 옆에 반사판도 가지고 와 봐.”
최지상은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날 밤 서유라와 함께 있었던 게 분명한데.
“네. 가져올게요.”
선우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첫 수업은 아무래도 요원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 *
딱, 소리를 내며 슬레이트를 친 막내 작가가 큰 소리로 촬영 중단을 알렸다.
“쉬셨다가 4시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스탭들이 우르르 나와서 점심 먹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름에 한 번씩 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은 보통 2박 3일로 진행이 되었다.
전국 각지의 시골을 돌아다니며 허름해진 집을 간단히 수리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출연진은 최지상을 포함해서 세 명이었다.
미니시리즈 조연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배우 최지상, 유튜브로 화제가 되고 있는 개그맨 오주혁, 아이돌 선발 프로그램에서 준우승을 하며 데뷔한 이강.
라이징 스타들이 오지 산간을 캠핑카를 타고 떠돌아다니며 허름한 집을 수리해 주고, 그 기간 동안 앞마당에서 캠핑을 하며 지내는 것이 프로그램의 내용이었는데, 눈에 띄는 스타가 없어서인지 시청률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오주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밴으로 향했고, 강 역시 자신의 차량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상도 자신의 차량으로 돌아왔다.
“성원아, 나 잠깐 통화 좀 할게. 쉬는데 미안하다.”
지상은 털털한 미소를 지으며 운전석의 매니저에게 말했다. 의자를 한껏 젖힌 상태로 유튜브를 보고 있던 성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에요, 형.”
“강이 팬클럽에서 보낸 커피차 왔더라. 가서 한잔 마시고 와.”
매니저가 알았다고 대답을 하며 커피차를 향해 뛰어갔다. 지상은 뒷자리에 앉아 주변을 확인하고 창문을 가릴 수 있는 커튼을 쳤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서유라와 영상 통화를 했을 때 잠깐 보였던 여자의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직접 만났던 사람의 얼굴은 잘 잊지 않는 편이었다.
분명 만난 적은 없는데, 어딘가 눈에 익는 건 무슨 까닭일까.
발레 강사.
발레.
분명, 어딘가에서.
누구였더라.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어떤 여자를 생각하면서 지상은 가방 안쪽에 넣어 두었던 서유라 전용 세컨드폰을 꺼냈다.
본가에 감금된 이후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해 대며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서유라였다. 틀림없이 부재중 전화가 찍혔을 것이다.
그 지랄맞은 성격을 일일이 맞춰 주는 게 피곤하고 귀찮아 죽겠지만, 자신의 알리바이를 대 준 여자였다.
‘네가 룸에 들어왔을 때 애들은 이미 쓰러져 있던 걸로 해. 들어왔더니 둘이 쓰러져 있어서 바로 나갔다고 말하면 돼. 죽기 전에 나갔다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서유라의 한마디에 그는 혐의를 벗었다.
어떻게 벗어나긴 해야 할 텐데.
서문도에게 핸드폰을 빼앗긴 지금, 그는 서유라에게 목줄이 꽉 잡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빨라면 빨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할 수밖에. 지상이 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어?”
지상은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벌떡 세웠다. 갑자기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서문도. 핸드폰. 서유라. 엎어져 있던 시체.
김영재와…….
그럼 그 여자가 설마?
지상은 들고 있던 세컨드폰을 던지고 배우 최지상의 공식 핸드폰을 주머니 안쪽에서 꺼냈다. SNS 어플을 열고 훌훌 넘겼다.
한 달 전쯤이다. 그래, 이거.
[안녕하세요, 며칠 전 클럽에서 사망한 이민우 누나 되는 이선우라고 합니다. 동생의 사망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디엠, 전화, 이메일 모두 괜찮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제 번호는 000-0000-0000입니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 클럽에서 사망한 이민우 누나 되는 이선우입니다. 답이 없으셔서 디엠 보냅니다.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디엠이나 메시지, 모두 가능합니다. 제 번호는 000-0000-0000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는 그 뒤로도 여러 번 더 왔었다. 지상은 다이렉트 메시지 앞에 붙은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여자의 SNS 계정이 떴다. 계정 주인의 이름은 ‘Seonwoo’.
최근에 올라온 게시물은 하나도 없었다. 업로드는 오래전에 멈춘 듯 보였지만, 예전에 올려 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발레 공연 후에 찍은 단체 사진. 팸플릿을 찍은 사진. 발레단 연습실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꽃다발을 들고 남동생과 찍은 사진.
지상은 남동생이 나온 사진을 클릭했다. 키가 크고 선하게 생긴 젊은 남자와 꽃다발을 들고 환히 웃고 있는 여자. 날짜를 보니 4년 전 여름이다.
사진을 옆으로 넘기니 부모님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넷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다.
단란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사진 아래는 ‘첫 공연 끝내고. 가족들과 함께.’라고 쓰여 있었다.
서유라의 집에 있는 여자가 이 여자가 맞다면……. 그런 거라면…….
하, 씨발. 잠깐만.
지상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갈 때였다.
[자기 뭐 해? 나 지금 라방 할 건데 시간 되면 들어와~]
던져 놓은 세컨드폰이 진동하며 서유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일단 저 여자가 맞는지 확실하게 확인부터 해야겠지.
지상은 다시 핸드폰을 바꿔 잡았다. 그리고 유라의 라이브 방송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