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몹시도 비현실적인
“임자……. 옥돔은……. 고만…….”
서명구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박소영은 서 회장의 입 가까이에 가져갔던 숟가락을 도로 물리며 살갑게 물었다.
“옥돔 질리세요? 그럼 뭐 올릴까요? 시금치 연하게 무친 거 너무 맛있는데, 시금치 올릴까?”
박소영은 소화가 잘 되도록 질게 지은 찰밥을 올려놓은 숟가락에서 얼른 옥돔구이의 살을 내렸다.
그리고는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젓가락을 요리조리로 가져갔다.
아기처럼 턱받이를 하고 입만 벌려 밥을 받아먹던 회장이 기력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잘 드셔야지 얼른 기력을 차리실 텐데. 회장님 아프시면 내가 정말 너무 속상하잖아. 딱 한 숟갈만 더 드셔요. 오래오래 사셔야잖아요. 나랑 우리 유라 생각해서라두. 응? 이번엔 우리 뭐 먹을까……. 명란젓이랑 드릴까아? 요 갈비찜에 들어 있는 무우로 드릴까?”
회장의 눈빛이 무우로 향하니, 박소영이 재빨리 푹 익힌 무를 집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숟가락 위에 예쁘게 올려놓고 아아, 소리를 내면서 회장의 입가로 가져갔다. 회장이 입을 벌려 받아먹은 뒤, 막 씹어 넘기려 할 때였다.
“쿨럭, 쿨럭! 쿠울럭!”
목으로 넘기다 사레가 들렸는지 식탁 위로 밥알을 흩뿌리며 회장이 기침을 크게 했다.
“어머, 회장님! 어떡해!”
깜짝 놀란 박소영이 벌떡 일어나 회장의 입으로 냅킨을 가져갔다.
“장 여사님, 여기 따뜻한 물 한 잔 가져와요!”
서중호도 벌떡 일어나 회장의 곁에서 등을 쓸며 난리를 피울 때였다.
생각이 없는 서유라가 잔여물이 튄 식탁 위가 더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마침 그 모습을 본 회장이 박소영의 손을 매몰차게 쳐내면서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르게 내 이제 쿨럭! 그만, 쿨럭, 먹는다고! 쿨럭!”
수치심으로 귀 끝이 빨개진 회장이 쌕쌕 큰 숨소리를 내면서 씨근거렸다. 자식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이 몹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회장님. 죄송해서 어떡해요.”
연신 사과를 하던 박소영이 노여움으로 붉어진 회장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나는 이래서 안 되나 봐요. 내가, 흑, 내가 이러니까 회장님이 못 미더워하시는 거지. 내가 이래서 우리 유라까지 천대를 받고……. 밥 한술도 제대로 못 떠 드리는 등신 천치라서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기가 막힌 웃음을 삼키느라 여러 개의 콧구멍이 벌렁거리며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지만 같잖은 연극에도 눈물 흘려 주는 사람이 있는 법.
“아니야……. 내 말은 그것이 아니고…….”
회장이 조금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지었다. 박소영의 나이가 쉰셋. 고모인 서미경의 나이가 쉰일곱이니 자신의 막내딸보다 어린 여자애를 첩으로 삼은 셈이다.
갓 스물을 넘긴 여자애를 데려다가 살림을 차리고 피임도 제대로 못 해 아이까지 낳게 한 뒤 기어이 집에 들여앉힌 그 추태는 부끄럽지 않고, 밥풀 튀긴 추태는 그토록 수치스러운가.
문도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노인네의 추잡스런 성욕이란 애초에 논리나 이성으로 이해되는 영역이 아니니, 그저 한심하다 여길 뿐이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면 노련한 너구리 같은 서 회장이 박소영 앞으로는 재산 한 줌을 쥐여 주지 않으며 헛된 희망만 심어 주는 것이랄까.
“아이구, 우리 작은어머님 왜 또 말씀을 그렇게 하시나. 회장님이 피곤하셔서 그러신 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소. 아버님, 이제 그만 식사 물리고 작은어머님이랑 오붓하게 쉬시는 게 어떠세요?”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회장이 큼, 하고 헛기침만 했다. 서중호는 손짓으로 식사 시중을 들던 직원을 부르며 말했다.
“여기, 간병인 호출하고 상은 다시 차려요. 회장님 방으로 후식 준비하고. 빨리.”
직원들이 재빠른 손길로 상을 다시 차려 냈지만, 모처럼 삼 남매와 그 배우자가 모두 모인 서도 오너가의 저녁 식사는 회장이 퇴장하면서 끝이 난 것과 다름없었다.
회장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서용호가 숟가락을 딱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너 이 새끼야, 너는 돌아가신 어머님께 부끄러운 줄 알아. 어디서 저런 창녀 같은 년한테 어머님 운운이야.”
그 말에 서중호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서용호를 보았다.
“아니, 형님 말을 참 이상하게 하시네. 여생도 얼마 남지 않은 아버님께 최선을 다해 효도를 해 드리는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할망정, 왜 욕지거리를 하실까.”
슬슬 웃으며 말을 하던 서중호가 눈빛을 바꾸었다.
“형님이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만날 그 돌아가신 어머니의 헛된 망상이나 붙잡고선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중공업이 그 모양 그 꼬라지가 된 것을.”
“야 이 새끼야, 여기서 왜 그 얘기가 나와? 뭐, 네 녀석이 도와줘서 살려 놨다, 그 말을 하고픈 거냐? 그런 거야? 그깟 도움 안 받고 만다고 내가 몇 번이나…….”
서명호가 고개를 쳐들고 빳빳하게 핏대를 세울 때였다.
“그러면 받지를 말았어야지!”
단전에서 우렁차게 뿜어져 나오는 서중호의 커다란 목소리가 다이닝룸을 우렁우렁 울렸다. 그 소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지며 눈동자만 굴러다녔다.
“그지 새끼처럼 도움 받아먹을 땐 언제고, 이제 와 지랄이야, 지랄이.”
낮게 읊조린 서중호가 쯥, 소리를 내며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빼 냅킨 위에 퉷, 하고 뱉었다.
“아니, 이 새끼가 그래도…….”
한순간 제 동생에게 주눅이 들었던 것이 창피해진 서용호가 얼굴이 빨개져서 뭐라고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제 몫의 식사를 마친 문도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야간 회의가 있어서요.”
서용호의 째진 눈꼬리가 문도를 향했다. 문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슈트의 단추를 잠근 뒤 서용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뒤에서 터져 나오는 욕설을 들으며 문도는 뚜벅뚜벅 걸었다.
드라마 감독들은 뭐 하나. 여기에 카메라만 세워 놓으면 그게 막장 드라마인 것을.
* * *
별채의 밤은 고요했다.
1층 게스트룸에 머무는 서유라가 새벽까지 깨어 있는 일이 많아도 2층으로 올라오면 소음은 뚝 끊긴 것처럼 사라지곤 했다.
애초에 시끄러울 수 있는 공간들은 2층 메인 침실과 서로 가장 먼 대각선으로 설계한 공간이라 소리가 전달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유난히 적막하게 느껴지는 건 밤이 깊을 대로 깊었기 때문일까.
새벽 3시가 가까워져서야 퇴근을 한 문도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슈트 차림 그대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IR팀과의 회의는 평소에도 한번 시작했다 하면 밤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는데, 오늘은 중간에 문도가 집으로 돌아와 식사까지 하느라 회의는 자정 너머까지 이어졌다.
거기에 따로 자료와 보고서를 살펴보느라 3시를 넘겨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문도는 소파에 등을 깊게 묻고서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렸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보았다.
어둠 속에 달빛만이 고요했다. 천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조명을 멍하니 응시하다 피곤한 눈을 감았다.
‘아…….’
눈을 크게 떴던 여자의 얼굴이 감긴 눈꺼풀 위로 떠올랐다.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 보았던 놀란 표정이었다.
여자의 놀랐던 표정은 이내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만두라는 말에 흔들렸던 갈색 눈동자가 클로즈업되었다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하다 하다 별.
피곤하면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다니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돈이 급해 비굴할 정도로 버티고 있는 직원에게까지 닿을 일인가.
어이가 없어 기가 찬 웃음을 웃으며 문도는 눈을 떴다. 뒷목을 주무르며 생각의 물꼬를 돌렸다.
이번에 불쑥 떠오른 건, 바닥에 엎어진 젊은 남자 둘의 뒷모습이다. 그 앞에서 창백하게 질려 있던 최지상의 얼굴이 요즘 부쩍 TV에 자주 보였다.
이것도 그리 바람직한 상념은 아닐 테니.
문도는 고개를 바로 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건물의 불이 모두 꺼지는 것이 마땅한 시간에 불빛이 보였다. 숙소동 2층 제일 끝 방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가, 라고 무심히 생각을 할 때였다. 방 앞쪽에 난 자그마한 테라스 공간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실루엣만으로도 구별이 되는 여자였다.
이선우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도, 이슬이 내려앉은 정원의 나무도 아닌, 아득히 먼 곳.
혹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곳을, 여자는 머리카락을 날리며 보고 있었다.
2층 테라스 서 있을 뿐인데 눈을 뗄 수 없는 건, 여자가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소리 없이 흩어져 버릴 것 같기 때문일까.
문도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등을 떼며 몸을 세울 때였다.
바람이 불어오는가. 여자가 움직인다.
팔을 들어 올리다 말았고, 발끝을 세우는 듯하다 다시 내렸다. 머리를 돌리려다 말고 손끝을 부드럽게 움직이다 말았다.
불 듯 말 듯 살랑이는 바람처럼, 손을 대면 아스라이 흩어질 것만 같은 안개처럼 여자가 움직였다.
춤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그럼에도 물결 같은 멜로디를 들려주는, 흐린 달빛 같은 춤.
그러다 여자는 움직임을 멈추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치 울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더니 테라스 너머로 퇴장을 하였다.
한 편의 꿈인가 싶은, 몹시도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