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공기 반 소리 반
“뭐래, 병신이.”
유라는 코웃음을 쳤다. 하룻밤 갇혀 있더니 처돌았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던 이선우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서 유라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저 그만두면 전무님이 바로 서유라 씨 병원으로 보내신다고 하셨대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병원이라는 단어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은 것 같았다. 유라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그래? 이게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여? 야, 너 그렇게 잘리기 싫냐? 아직 서문도 포기 안 했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 유라의 눈에 식사를 가지고 들어오는 옥수댁이 보였다.
“아줌마!”
“예?”
“진짜야? 서문도 그 새끼가 나 병원 보낸댔어? 진짜로 그랬어?”
어찌 대답을 해야 하나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옥수댁은 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뭐 들은 말 있을 거 아니야! 장 씨가 뭐래? 진짜래?”
저도 여기서 살아남아 보겠다고 말을 했겠지. 옥수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어즈껜가……. 그제였나……. 선우 씨 그만하라구 말하면서 그러더라구요. 그래야지 병원 보낸다나…….”
와씨. 유라는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뭐야, 저년이 그만두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이제껏 그러려고 계속 트레이너를 보낸 거고?
유라는 계단을 오르며 비스듬히 자신을 내려다보던 서문도를 떠올렸다.
피식 쪼개는 그 미소가 그런 뜻이었을까. 한 명 한 명 그만둘 때마다 속으로는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던 걸까?
서문도가 쳐 놓은 덫에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뜨거워지며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을 이어 가던 유라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유라야. 잘 있지? 엄마는 지금…….
태평한 박소영의 목소리를 들으니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엄만 대체 언제 들어오는 건데? 내가 빨리 들어오라고 몇 번을 말해? 어? 서문도 그 새끼가 나 병원 처넣으려고 하는 거 알아 몰라? 언제 오냐고!”
— 아유,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넌 그 성질 좀 죽여. 엄마 지금 짐 싸고 있잖아. 이제 곧 비행기 탈 건데 뭐가 그렇게 급해.
어?
유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비행기를 탄다고? 며칠 전만 해도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했었는데?
“엄마 들어와?”
— 들어가야지, 그럼. 회장님 퇴원하시는데 내가 없으면 얼마나 기운 빠지시겠니. 얘, 끊어. 엄마 바빠.
“잠깐만. 아빠 퇴원해?”
— 응. 너 몰랐어?
하…….
유라는 비식 웃음을 물면서 전화를 끊었다. 뜨거웠던 머릿속이 천천히 식어 갔다.
앞에서 알랑거리면서 애교를 떨면 그저 예쁘다 하는 아버지였다. 최대의 우군이 돌아오니, 일단 숨통은 트이겠지만…….
아버지. 서문도. 아버지. 서문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비밀을 쥐고 있는 서문도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
아우씨. 핸드폰만 안 뺏겼어도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텐데.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던 유라는 고개를 돌려 거실을 보았다. 어디 가지도 못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이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야, 너 이리 와 봐!”
선우가 퍼뜩 고개를 돌려 유라를 바라보았다.
“앉아.”
아일랜드를 가운데에 놓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유라는 선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말이야.”
말을 꺼낸 유라는 입술을 씹었다. 욕을 하고 물을 퍼붓는 건 쉬웠다.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다가 갑자기 사람 대접을 해 주려니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핸드폰만 뺏기지 않았어도.
아니, 사진만이라도 찍히지 않았어도.
후회를 해 봤자 늦은 일이다. 자신이 가진 마지막 기회는 눈앞에 있는 이선우뿐이니……. 이걸 어쨌든 내 편으로 만들어 놔야 할 텐데.
좀 잘해 줄 걸 그랬네.
유라는 욕을 씹어서 삼킨 뒤 선우를 보며 히죽 억지웃음을 웃었다. 선우가 왜 이러느냐는 듯한 눈으로 유라를 보았다.
“그……. 머냐. 그……. 아, 그게……. 에이씨. 야, 너는 어? 그런 중요한 얘기는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어? 그걸 알았으면 어?”
어? 를 세 번쯤 말하는 유라를 보며 선우가 말했다.
“저도 어제 알아서요. 알았으면 말씀드렸을 거예요.”
“니가?”
“저도 잘리기는 싫으니까요.”
아. 맞다. 돈. 돈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모르긴 몰라도 서문도가 인심은 후하게 썼을 거였다. 그러니 여섯 명이 줄줄이 잘리고도 뒤탈이 없는 거겠지. 여러모로 참 치밀한 새끼였다.
“그럼 골라. 서문도야, 나야.”
유라는 퉁명스럽게 선우에게 말했다. 선우의 눈이 커졌다.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다는 표정으로 유라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서문도랑 나 둘 중에 고르라고. 누구 편 할 건지.”
선우가 가르쳤던 유치원 꼬마 아이들이나 할 법한 멘트를 던져 놓고도 서유라는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내 편 들어준다고 하면 계속하게 하고, 서문도 편들 거면 병원이고 뭐고 확 잘라 버릴 거고. 무슨 뜻인지 알지?”
확, 하고 손을 쳐드는 시늉을 하면서 유라가 말했다.
이런 질문을 눈앞에서 받고 누가 서문도 편을 들겠다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선우는 유라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당연히 유라 씨가 최우선이에요.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담담한 말투였다. 유라는 선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이 대답에 있어서만큼은 어째서인지 믿음이 갔다.
“잘해라. 어?”
유라는 마지막으로 선우를 을러대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엄마도 들어오겠다, 아버지도 퇴원하겠다, 서문도가 붙여 놓은 감시인은 제 편으로 돌려놨겠다…….
조만간 이 집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유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이닝룸을 나왔다.
* * *
회장의 퇴원을 준비하는 이틀간 저택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돌아갔다.
회장이 머무는 1층은 안전장치 공사를 싹 마쳤을 뿐 아니라, 정원에는 디딤돌을 들어내고 휠체어로 다닐 수 있는 산책로 데크를 새로 깔았다.
몸보신을 위한 식재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고, 회장이 특별히 좋아하는 밑반찬들이 손 빠르게 만들어졌다.
장 여사가 섭외한 간호사 경력의 간병인과 식단 관리를 위한 영양사가 새로 들어왔고, 박소영도 서둘러 귀국을 했다.
“문을 열어 볼까요.”
우현희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체크하며 말했다. 조금 전 병원에서 출발한 회장의 차량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양 실장이 스위치를 올리자 차고의 거대한 문이 옆으로 밀리며 넓게 개방이 되었다.
“날이 많이 풀렸네요.”
초저녁에 가까운 시간, 주차장의 문을 열어도 많이 쌀쌀하지 않았다. 3월도 벌써 끝나 간다.
회장이 협심증으로 쓰러지며 수술을 받은 게 벌써 두 달 전의 일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고 생각하는 찰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5분 정도? 곧 도착합니다. 당신이 고생이 많아요♡]
애인인 송 마담에게도 이렇게 곰살맞게 굴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현희는 피식 웃었다.
듣자 하니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권위적인 남자란다. 수저만 비뚤게 놓여도 상을 뒤엎는다고 했던가.
하기야 거기서라도 그렇게 지내야 속이 좀 풀리겠지. 현희는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후 양 집사에게 말했다.
“곧 도착하신답니다. 내려들 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장 여사님한테도 언질 주시고요.”
맞은편 저택의 담장 너머로 산수유 노란 꽃이 보였다.
이른 봄이다. 정기 주주 총회가 열리는 계절. 멀리서 검은색 세단이 줄을 지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 * *
“에…….”
회장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흔을 목전에 둔 서 회장은 본관 다이닝룸에 놓인 긴 식탁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앉았다기보다 기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태로 회장은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최고의 의료진이 붙어 막힌 혈관을 뚫어 주는 수술로 살려 놓긴 했으나, 목숨을 이어 준 대신 기력을 모두 앗아 가 버린 느낌이었다.
“에……. 오느흘……. 이 애비……. 본다고……. 다드흘……. 모이느라……. 고오생이……. 마안핬고…….”
공기 반 소리 반이 이런 거였나.
문도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상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회장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기념사를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절반인 기념사가 모기 소리처럼 가느다랗게 공간을 떠돌았다.
퇴원 기념사를 들으며 문도는 자리에 앉아 있는 면면을 훑어보았다.
회장을 꼭짓점으로 하여 우 소영 좌 유라를 시작으로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서중호 부회장 내외와 문도, 다음으로 서용호 건설 중공업 사장 내외와 사촌인 서창도와 서준도. 마지막 끝자리에는 서미경 관장과 그 남편인 구장현 교수가 앉아 있다.
가족 순서대로 늘어놓았다고 보기엔 차남이 상석에 앉았고, 그룹에서의 지위 순서로 보기엔 문도가 서용호 사장보다 상석에 앉았다.
이 자리 배치가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인지는 뻔했다. 회장의 기념사가 끝나면 한마디 얹고 싶어 눈썹을 들썩거리고 있는 아버지가 지시했을 것이다.
문도는 맞은편에 앉은 서용호 사장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서용호는 아래위로 눈동자를 굴리며 어딜 똑바로 쳐다보고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서중호가 직원에게 무언가 가져오라고 손짓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하는 우리 회장님, 건강을 회복하신 것을 감축드리면서 한잔 따르겠습니다. 에, 또, 회장님의 보석 같은 인연, 우리 작은어머니. 오래오래 회장님 잘 모셔 주십사 부탁을 드리면서 한잔 올리겠습니다.”
서중호가 팔을 걷어붙이며 금빛 산삼주를 작은 크리스털잔에 조르륵 따랐다. 어머, 내가 이걸 받아도 될까, 박소영이 환한 복사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자자, 좋은 날에 축배부터 듭시다. 우리 서명구 회장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건배.
술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문도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