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6화 (6/168)

6. 마지막 기회

새벽의 정원에서는 풀 냄새가 짙게 났다. 동이 막 트는 시간, 문도는 뒤뜰을 지나 별채의 후문이 있었던 자리를 통과했다.

현관문을 열어 다이닝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멸치 육수로 끓인 김칫국 냄새가 물씬 밀려들었다.

다이닝룸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막 샤워를 마친 듯한 모습의 서중호 부회장이 식탁 상석에 앉아 있었다.

“잠은 좀 주무셨어요?”

문도는 아버지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약 보름간의 유럽 지사 순회를 마치고 돌아온 서중호는 평소보다 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중호가 문도에게 앉으라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잠이야 뭐, 죽으면 실컷 잘 거. 그나저나 수술을 좀 할까 봐.”

반찬으로 깔려 있는 멸치볶음에서 아몬드를 집어 먹으며 서중호가 말했다. 실없는 농담하기로는 일등인 사람이라 문도는 대답하지 않고 의자를 빼서 앉았다.

“쌍꺼풀 수술을 해야겠어. 이 눈 처지는 거. 이거 이거, 이걸 좀 들어 올렸으면 좋겠는데. 날이 갈수록 내려오는 것 같아. 이러다 붙겠어.”

피곤으로 두툼하게 부어 있는 자신의 눈꺼풀을 집어 올리면서 서중호가 말했다. 우스운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 안의 눈빛은 노련한 독사를 연상케 했다.

“아유, 또 그러신다. 지금이 딱 잘생기셨다니까요.”

마침 트레이를 밀고 들어오던 장 여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왜요, 장 여사님은 내가 잘생겨지는 게 싫으신가?”

“잘생겨지셔서 뭘 하시려고요.”

장 여사의 말에 서중호가 낄낄 웃었다. 펄펄 끓고 있는 뚝배기가 문도와 서중호 앞에 놓였다.

“크, 바로 이거거든. 이 맛이거든. 이야, 기똥차네 기똥차. 문도 너도 한술 떠라. 국물이 끝내주누만.”

갱시기국을 후후 불어 한술 입에 넣은 서중호가 말했다. 멸치 육수에 콩나물과 김치를 넣고 찬밥과 얇게 뜬 수제비를 넣어 끓여 낸 갱시기국은 서중호가 귀국 후에 꼭 찾는 음식이었다.

“어머니는요?”

문도는 수저로 수제비를 뜨면서 물었다.

“곧 내려온단다.”

칼칼한 게 당긴다며 청양고추 다진 것을 갱시기국 안으로 털어 넣으며 서중호가 말했다.

국을 몇 술 뜨고 있자니 슈트 정장을 차려입은 우현희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오며 주방 쪽을 향해 말했다.

“여사님, 나는 커피 한 잔만 내려 줘요. 뜨겁게.”

서중호의 옆자리에 앉은 우현희는 자리에 놓여 있던 신문 중 하나를 펼쳤다.

기사를 훑는 우현희의 앞에 장 여사가 뜨겁게 내린 커피와 자그마한 쿠키 하나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세 식구만이 다이닝룸에 남았다.

“서유라는 어때, 잘 지내고 있나?”

무심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 서중호가 동치미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문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잘 지냈죠. 트레이너를 한 일곱 명 갈아 치웠나. 이만하면 병원 보내도 될 정도로 잘하고 있습니다.”

문도의 말에 서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문도는 국을 뜨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다시 병원으로 보내려고요.”

“조금 더 데리고 있어야겠다.”

서중호의 말에 문도는 눈을 들었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친다. 빤히 바라보자 반찬을 집어 먹으면서 서중호가 말했다.

“회장님 퇴원하신단다.”

문도는 속으로 욕설을 씹으며 짧게 웃었다. 우현희가 신문을 읽던 눈을 들어 서중호를 보았다.

“언제요?”

“이것저것 체크하고 나면 월요일쯤?”

타이밍 한번 기막히네. 문도는 실소를 했다.

“박소영이도 불러들여야겠고, 간병인도 구해야겠고. 우리 대표님 신경 쓸 일이 많아져서 어떡하나. 살살해요, 무리하지 말고.”

서중호가 우현희에게 말하며 웃었다. 우현희가 덤덤한 표정으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다워지겠네요.”

그렇겠지요? 서중호가 웃으며 답했다. 얼핏, 사이 좋아 보이는 가족의 아침 시간이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땐 새벽의 푸른 기가 완전히 걷힌 아침이었다.

햇볕은 엷고 길게 정원에 드리워져 있었다. 문도는 본관에서 별채로 향하는 문 앞에서 핸드폰을 들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두 번의 신호음이 울리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네, 전무님.

부드럽지만 어딘가 건조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잠깐 뵙죠. 지금 괜찮은가요?”

— 네. 건너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문도는 담을 따라 걸었다. 애초에 서로 다른 집이었던 세 채의 집은 여전히 각자의 담을 가지고 있었다. 집 안팎으로 공사를 하면서 담은 그대로 살려 두었기 때문이었다.

담을 따라 걸으면 아치형의 문이 나온다. 숙소동에서 별채로 오는 길에 지나야 하는 문이었다.

7월이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벽에 기대어 서자 숙소동 정원을 건너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문도는 담배를 빼 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원피스에 카디건 차림이었다. 걸음걸음마다 원피스 자락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곧은 자세, 우아한 걸음걸이.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말갛고 연한 얼굴.

그런 것들을 바라보다 불을 당겼다. 불이 닿은 담배의 끝에서 하얗게 연기가 피어났다.

“안녕하세요.”

문도를 발견한 여자가 몇 미터 앞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문도는 여자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끌까요?”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까딱이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시 웃으며 여자를 보다가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는 듯이 물어보았다.

“짐 쌌어요?”

“이제 싸려고요.”

선우는 대답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남자가 싱긋 웃는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선우는 생각했다. 남자는 웃고 있는데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난 듯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선우 씨만 괜찮으면 계속 일해 달라고 부탁을 드릴까 하는데.”

“아…….”

하루 만에 뭔가 바뀐 걸까. 선우가 생각하는데 서문도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예, 저는…….”

더 일하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느 대답이 나을지 몰라 잠깐의 사이를 띄우는데 문도가 말했다.

“회장님 퇴원하시면 서유라 보고 싶어 할 거거든.”

퇴원을 한다는 건, 서명구 회장이 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일까.

회장이 거의 환갑에 본 막내딸 서유라를 예뻐한다고 여러 매체가 비슷하게 말하곤 했었다.

대답을 고르는 선우의 눈에 남자의 손에 걸린 담배가 보였다. 하얗게 타들어 간 재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서문도가 싱긋 웃었다. 눈이 휘어지며 옆으로 작게 주름이 잡혔다. 순간 선우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에 서문도가 눈썹을 치켜뜨며 선우를 바라보았다. 입꼬리에 엷은 웃음을 매달고서 묻는다.

“열심히요? 뭘 더 얼마나 어떻게 열심히 하시려고요?”

어딘가 모르게 비웃음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화장실에 무력하게 갇혀 있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까.

그사이 길게 매달려 있던 담뱃재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여전히 빨간 불은 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하얀 연기를 피우면서.

두 번째 기회였다.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엔 정말 잘 해내야 했다. 선우는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서유라 씨 건강을 챙겨 보겠습니다. 가벼운 운동도 하고, 식단 조절도 하면서요.”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그럼. 힘들겠지만 수고 좀 해 줘요.”

“네. 감사합니다.”

선우가 인사를 하자, 남자는 툭, 담뱃재를 털고 필터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선우를 보며 깊이 연기를 들이마신다.

남자의 얼굴 위로 하얀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선우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 * *

점심을 먹고 왔는데도 서유라는 자고 있었다.

선우는 에코백을 옆에 내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와 몸에 내려앉았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지고 온 소설책을 꺼냈다. 책을 무릎에 얹어 놓고 고개를 들자, 통창 너머로 푸르른 정원이 가득이었다.

화강암 데크, 드넓은 정원을 차지한 푸른 잔디, 멀리 보이는 높은 담과 정원수.

선우는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를 생각했다. 후우, 자신을 보며 가만히 내뱉던 숨과 그 숨을 따라 피어난 하얀 연기도.

연기에 갇힌 선우를 보면서 싱긋 웃은 남자는 그 한 모금을 위해 불을 붙였다는 듯, 미련 없이 담배를 비벼 껐다.

흰색의 회벽에 까만 그을음이 생기고 불똥은 잔디 위로 떨어졌다. 구둣발로 지그시 불씨를 꺼트린 남자는 꽁초를 바닥에 놓인 작은 그릇에 버리고 몸을 돌렸다.

가능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직선의 눈빛은 선우의 속을 뚫어 볼 것만 같았고, 매끄러운 웃음은 잘 벼린 칼날 같았다.

언젠가 모든 것이 들통난다면, 서문도 전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뭐야, 너 또 왔니?”

햇볕을 마주한 선우의 상념은 유라의 목소리로 인해 깨졌다. 인상을 찌푸리며 복도를 걸어오는 유라를 향해 선우는 고개를 돌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야 뭐야.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주방으로 향하며 유라가 비아냥거렸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유라가 기상했음을 알렸다. 물을 마시던 유라가 그런 선우의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던졌다.

“이번엔 어디다 가둬 줄까. 화장실이 너무 넓었지? 옷장은 어때?”

인터폰을 내려놓은 선우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에게 잘해 보겠다고 했다. 열심히 하겠다고.

또다시 잘리지 않으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선우는 소파에 놓아두었던 에코백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가볍게 운동을 해 볼까 해요. 스트레칭을 하고, 발레 기초 동작도 몇 가지 해 보고요. 레오타드는.”

선물로 가져온 것이니 입으셔도 좋고, 안 입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선우가 꺼내 드는 레오타드를 유라가 함부로 잡아서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꺼지라고. 병신아. 내 트레이너는 내가 구한다고.”

선우는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던져진 레오타드를 주워 아일랜드 위에 올려놓고, 유라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참아 주는 건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마지막 기회예요.”

“뭐?”

선우의 말에 유라는 눈썹을 치켜떴다.

“제가 서유라 씨 마지막 기회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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