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5화 (5/168)

5. 여기까지만 합시다

웬일인지 오늘은 서유라가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려 놓으라 명령하더니, 선우에게 핸드폰을 던지며 사진을 찍으라 할 뿐이었다.

“야, 똑바로 찍어.”

선우는 열심히 서유라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린 스무디를 마시는 척 컵에 입을 대는 모습도 찍고, 주스를 입가에 묻힌 채 눈웃음을 짓는 모습도 찍었다.

“됐어.”

어느 정도 찍고는 핸드폰을 가져간 서유라가 말했다. 한참이 지나도 남은 음식을 먹을 생각은 없어 보여, 선우는 확인차 서유라에게 물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응. 그거? 너 먹어.”

서유라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선우는 서유라를 바라보았다. 서유라가 어서 먹으라며 손짓을 했다.

1시가 넘도록 식사를 못 하긴 했지만, 서유라가 손으로 주물러 놓은 음식을 먹을 기분은 아니어서 선우는 가능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따 숙소 건너가서 먹을게요.”

“모태 마름인 척 가증 떨지 말구, 얼른 처먹으라고. 왜, 이것도 서문도에게 일러 보지 그래?”

선우는 망설이다가 포크를 쥐었다. 바로 앞에 놓인 오믈렛을 잘라 입에 넣었다. 서유라가 잔뜩 짓이겨 놓은 음식 중 하나였다.

“근데 넌 여기 뭐 하러 왔어?”

서유라가 자신에게 하는 첫 질문이었다. 선우는 오믈렛을 꿀꺽 삼켰다. 대답이 없자 서유라가 샐러드 위의 방울토마토를 쥐고서 다시 묻는다.

“뭐 하러 왔냐고. 어? 대답 안 해?”

휙 날아온 방울토마토가 선우의 어깨를 맞췄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또 시작이구나 할 뿐.

“그냥……. 돈 벌러 왔어요.”

“돈?”

“네. 많이 준다고 하셔서.”

서유라가 풉, 하고 웃었다.

“아아, 돈. 돈 좋지. 너 같은 애들 많아. 돈 주면 뭐든지 하는 애들.”

서유라가 접시 위의 샐러드를 한 줌 가득 쥐었다.

“이렇게.”

양상추와 로메인 레터스가 선우를 향해 휙휙 날아왔다.

“쓰레기 취급당해도 좋다고. 그치?”

서유라는 킥킥 웃으며 연어도 하나씩 던졌다. 입고 있는 티셔츠에 연어가 철썩 붙었다가 기름기를 남기며 아래로 떨어졌다.

“이건 뭐, 벨도 없고요.”

히죽히죽 웃은 서유라가 이번에는 시럽에 절은 팬케이크를 던졌다.

“자존심도 없고요.”

팬케이크는 선우의 얼굴을 정통으로 맞췄다. 뺨에 붙었던 팬케이크는 중력을 못 이기고 떨어졌지만, 끈적한 시럽이 볼에 묻었다. 선우는 손으로 뺨을 닦았다.

“이런 꼴 당해도 좋다고 버티면서 안 가요.”

킥킥 웃은 서유라가 팬케이크를 던지고 또 던졌다.

“그 새끼가 밤에 부를 때마다 아주 심장이 벌렁벌렁하겠어? 걔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내가 뭘 하고 다니는지 나발나발 불어 대는구나?”

여기서 아니라고 말한들 믿지도 않을 거여서 선우는 가만히 있었다. 그저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아, 혹시 너 서문도 노리니? 그런 거야? 야, 진짜 너 야망 크다?”

얼굴이 온통 끈적해졌을 때, 서유라가 샐러드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가왔다.

통째로 선우의 머리 위로 들이부으며 웃는다. 선우는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샐러드를 그냥 맞았다.

“재미없네. 이따 저녁에 보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서유라가 퇴장했다. 선우는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고 싱크대로 향했다.

쏴아아—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손을 헹구며 가만히 숨을 골라 본다. 서유라를 만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건너갔을 땐, 장 여사와 조리사 아주머니 한 분, 별채에서 보았던 옥수댁 아주머니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선우와 눈이 마주친 옥수댁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선우 씨, 커피 한 잔 내려 줄까?”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옥수댁에게 선우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제가 할게요. 커피 드세요.”

머그잔을 꺼내 캡슐커피머신으로 향하는데 옥수댁 아주머니와 장 여사의 눈길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전기 포트의 전원을 켜자 불빛이 들어오며 부그르르 물이 들썩거렸다. 선우의 등장으로 잠깐 끊겼던 대화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전무님은 대체 어쩌실 생각이시래? 막내 아가씨 저렇게 계속 두실 건가?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신 거야?”

옥수댁이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얼굴로 장 여사에게 물었다.

“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장 여사는 말을 하다 말고 선우를 다시 보았다.

가녀린 몸에 고운 얼굴. 사정이 딱하다 듣긴 했어도, 무엇 하러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텐데.

장 여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말해 주기로 했다. 그래야 마음의 준비라도 하지.

“전무님은 선우 씨만 그만두면 막내 아가씨 바로 병원 보내실 거야. 처음부터 막내 아가씨를 오래 거둘 생각은 없으셨던 거지. 그러니까 그만 애쓰고, 더는 못 하겠다고 해요. 그게 두루두루 나아.”

모두의 시선이 선우를 향했다. 선우는 그저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 * *

“전무님, 도착했습니다.”

박 기사의 목소리에 문도는 눈을 떴다.

유럽 출장을 간 아버지를 대신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모시고 오송 공장 시찰을 하고 온 날이었다.

뻔한 설명과 뻔한 칭찬, 뻔한 기대를 받은 뒤 뻔한 사진을 찍고 마무리로 뻔한 술자리를 가졌다.

정종을 한 병쯤 마셨나.

어지간히 마셔서는 취하지 않는 주량을 가진 덕분에 정신은 멀쩡했다.

목구멍에서 화하게 흘러나오는 술 냄새만 빼면 몸도 멀쩡하고. 다만 어딘가 조금 느슨해진 기분이 들 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박 기사님도 올라가서 쉬세요.”

박 기사에게 수고했다 인사를 하고 문도는 별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습관처럼 시계를 보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문도는 트레이너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보통 서너 번의 신호음 전에 전화를 받던 여자인데 여섯 번이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이 들었나.

비록 며칠이긴 하지만 매일 하루를 성실하게 마무리하던 여자였다. 별일이라 생각하면서 문도는 1층 버튼을 눌렀다.

그날이 그날인 보고야 내일 들어도 되고, 하루쯤 건너뛰어도 된다.

사실 안 들어도 그만이긴 했다. 별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장 여사로부터 넘치게 듣고 있으니.

매일 밤 굳이 여자를 불러들여 보고를 받는 건, 서유라를 긴장시키려는 형식적인 쇼였다. 내가 매일 너를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쇼.

술도 마셨겠다, 호출하기도 귀찮고, 그날이 그날인 이야기를 듣는 건 더 귀찮고…….

오늘은 패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결론을 지은 문도는 미등만 켜 놓은 주방으로 향했다. 한 병도 술이라고 꽤 갈증이 일었다.

문도는 얼음을 가득 내리고 물을 받았다. 아일랜드에 반쯤 기대서서 단숨에 꿀꺽꿀꺽 마셨다.

흐릿한 소리가 들린 건, 탁, 하고 유리잔을 아일랜드 위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같기도 하고, 쿵쿵 벽을 치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가만히 서서 소리를 기다렸다.

똑똑. 똑똑똑.

저기, 저기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문도는 걸음을 옮겼다. 게스트룸으로 가는 길고 좁은 복도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선명해졌다.

화장실 문을 열지 못하도록 놓인 의자 두 개를 본 순간 문도는 헛웃음을 웃었다.

똑똑.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손잡이가 덜컥덜컥 움직이기도 했다. 복도의 폭에 맞추어 딱 끼워 놓은 의자 때문에 열리지 않는 문을 붙잡고 여자는 말했다.

“저기요. 혹시 누구 계신가요? 문이 열리지 않아서요.”

지친 목소리였다. 문도는 목을 뒤로 젖혔다.

하……. 이런 건 또 말을 너무 잘 듣네, 서유라가.

한숨을 내쉰 문도는 끼어 있던 의자를 빼냈다. 문을 열자 여자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습니까.”

문도의 질문에 여자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고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8시 조금 넘어서부터요.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이 부추긴 일인 줄 꿈에도 모르는 여자가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기분이 묘하게 더러웠다.

네 시간이나 갇혀 있었으면서도, 여자는 그만두겠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서유라는 더 심하게 괴롭힐 테고, 그럼 이런 얼굴을 며칠 더 봐야겠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냥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어야겠다고 문도는 생각했다. 어차피 그만둘 여자, 며칠 이르게 해고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

“이선우 씨, 여기까지만 합시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아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여자의 눈망울이 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여태껏 온갖 괴롭힘도 말없이 참아 내더니, 해고 통보에 당황을 하나.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여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고생하신 거 생각해서 위로금 넉넉히 챙겨 드릴 테니, 짐 싸세요.”

마지막 통보를 한 뒤 문도는 몸을 돌렸다. 내일 아침 병원에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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