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3화 (3/168)

3. 투명인간

물줄기는 이선우의 몸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거실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정수리 위로 마지막 한 방울이 툭 떨어지자, 서유라는 생수병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명 실장이 한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건을 가지러 욕실로 향했다. 문도는 서유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왜!”

서유라가 턱을 쳐들며 어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눈알을 굴리는 걸 보니 겁은 나나 보지. 일을 저질렀으면 밀어붙일 배짱이라도 있든가.

몇 초 지나지 않아 서유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문도의 시선을 피하더니 몸을 휙 돌렸다. 쫄기는. 문도는 피식 웃으며 입가를 쓸었다.

“아아아악!”

울컥 치솟는 분노. 그보다 더 큰 두려움.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좌절.

그 모든 것에 대한 짜증을 못 이긴 서유라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 방으로 퇴장했다.

서유라가 퇴장한 뒤, 문도는 물벼락을 맞은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서류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희게 질린 여자의 얼굴을 보아하니 오늘이 마지막이지 싶다.

“이런. 손수건이…….”

있을 턱이 있나.

평소에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손수건이 집에서 입는 팬츠 주머니에 있을 리 만무했지만, 문도는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 찾는 시늉을 했다.

그사이 여자는 정신이 들었는지, 손을 들어 얼굴로 흘러내린 물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마침 욕실에서 수건 몇 장을 급히 들고나온 명 실장이 보였다. 문도는 명 실장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실장이 건네는 새하얀 수건을 받아 맨손으로 물기를 닦고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여자의 모습은 가까이서 보니 더 처참했다. 머리카락은 볼에 들러붙었고, 젖은 블라우스엔 속옷이 비쳤다.

말없이 물기를 닦아 내는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문도는 여자에게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답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의외로 침착했다. 문도는 여자가 수건을 꾹꾹 눌러 물기를 닦아 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 목덜미, 블라우스, 핸드백과 스커트까지.

대강의 물기를 훔쳐 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도는 여자 앞에 마주 섰다. 세탁비, 옷값, 진심 어린 사과와 넉넉한 위로금으로 오늘의 마무리를 할 차례였다.

통상의 절차가 그러했다. 서유라는 전임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커피도 들이부었다. 이선우의 앞에 생수병만 놓인 이유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유치하고도 치졸한 일들이 있었지만, 깍듯한 사과와 넉넉한 위로금이면 무사히 마무리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저희 고모님의 결례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사죄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오늘 일에 대해선 따로 충분한 보상을 해 드리겠노라 말할 차례였다. 문도가 막 입을 떼려던 순간, 여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문도의 시선이 여자를 향했다. 조금 오래, 여자에게 문도의 시선이 머물렀다.

“괜찮을 리가요.”

가늘게 웃으며 말하는 문도를 여자가 마주 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예쁜 얼굴이었다. 가련하리만치 곱고도 어여쁜 얼굴.

타고난 분위기 따위 있을 리 없는 서유라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얼마나 괴롭혀 댈지 눈에 선했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아야 할 텐데.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여자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한다. 서유라는 알까. 이 여자가 자신의 자유를 하루 더 연장해 주었다는 걸.

쯧, 문도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 * *

새벽 6시, 선우는 감고만 있던 눈을 떴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알람이 울리기 전에 알람을 해제했다. 작게 켜 놓은 수면등이 밝히고 있는 공간은 낯선 집의 낯선 방.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에 트렁크 하나를 들고 들어온 곳은 직원용 숙소동이었다. 방의 내부는 비즈니스호텔과 비슷했다. 싱글 침대와 책상, 옷장이 있고 욕실이 있었다.

단출한 짐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옷장에 옷을 걸고 안쪽의 서랍에 속옷을 정리한 게 전부였다.

선우는 샤워를 한 뒤 별채로 건너갈 준비를 했다. 수업용으로 가져온 레오타드와 발레슈즈를 챙기고 스트레칭용 매트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일찍 일어났네요?”

환하게 불이 밝혀진 주방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장영순 여사가 먼저 선우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제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은 세 채의 집을 하나로 묶어 놓은 곳이었다.

원래는 본관만이 회장의 자택이었는데, 부회장 내외가 들어오면서 옆집 두 채를 매입해 하나의 필지를 통째로 쓰고 있다고 했다.

길고 길었던 담은 그 세 채의 건물을 하나로 묶어 놓은 울타리였고, 서문도 전무와 서유라가 쓰는 흰 건물이 별채였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우는 장 여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텀블러에 따뜻한 물을 담고 있는데 장 여사가 커피를 홀짝이며 선우에게 말했다.

“그 밑에 보이는 수납장에 차 종류 있으니까 편하게 먹어요.”

“감사합니다.”

선우는 인사를 하고는 수납장 안에서 옥수수차 티백을 꺼내 텀블러 안에 넣었다. 조리대에서는 아주머니 두 분이 부지런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침 먹을 거죠?”

“네. 조금만요.”

“그쪽으로 앉아요.”

밑반찬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 앉자, 아주머니 한 분이 따뜻한 밥과 국을 선우의 앞에 놓아주었다.

선우는 밥을 국에 말아서 천천히 씹었다. 입이 깔깔했지만 억지로 먹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려면 속이라도 든든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내 아가씨 일어나면 이쪽으로 인터폰 해요. 별채는 주방에서 불 안 쓰거든. 그때그때 인터폰 하면 이쪽에서 가져다줄 테니까, 챙겨만 줘요.”

“네.”

선우의 업무는 단순했다.

평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서유라의 식사와 건강을 책임진다. 매일 서문도 전무에게 하루 일과에 대해 빠짐없이 보고한다. 토요일은 6시까지. 일요일은 휴무.

다시 말하자면 서유라의 관리인이자 감시인인 셈이다.

“잘 먹었습니다.”

선우가 자신이 먹었던 밥그릇과 국그릇을 모아 개수대에 넣었다. 장 여사는 잠시 선우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관심이나 친절도 한두 번이지. 하도 여러 명이 오가서 이제는 오면 오는가 보다, 가면 가는가 보다 심드렁하게 여길 뿐이다.

어차피 하루 이틀일 거, 이제는 시시콜콜한 설명이나 안내도 생략하는 편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선우가 가만히 인사를 건네고 주방을 나섰다. 별채로 향하는 선우의 뒷모습을 보며 장 여사는 남은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 * *

‘언제든 그만두고 싶어지면 연락 주세요.’

단단한 현관문 앞에서 선우는 명 실장이 카드 키를 건네며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생각했다.

이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선우를 그만둘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선우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카드 키를 댔다.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엷은 아침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넓은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쪽으로 걸어가자 은은하게 클래식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이끌리듯 음악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자 커다란 주방과 주방에서 이어진 다이닝룸이 나왔다. 색이 짙은 원목 식탁이 놓인 다이닝룸에서 서문도가 홀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우는 가볍게 묵례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서문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깨끗하고도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리곤 이내 시선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태블릿 위로 돌렸다.

선우가 어디에서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이쪽저쪽을 둘러볼 때였다.

“편히 있어요.”

목소리가 들려와 선우는 고개를 돌렸다. 서문도가 의자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태블릿을 한 손에 들고 재킷을 팔에 걸치며 말했다.

“긴 하루가 될 테니까.”

그러고는 유유히 선우를 스쳐 지나갔다.

“네, 감사합니다.”

선우가 대답을 했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이닝룸을 나가는 서문도의 무심한 뒷모습이 그 증거였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 * *

남자가 틀렸다.

선우는 들이치는 햇빛을 고스란히 맞으며 생각했다.

하루가 긴 게 아니었다. 오전부터 길었다. 출근을 한 6시 40분부터 정오를 조금 넘긴 지금까지, 선우는 거의 여섯 시간을 생으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망설이다 서문도가 먹고 간 그릇을 치운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8시쯤 들른 조리사 아주머니가 자신의 일이니 다음부터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했다.

또 다른 아주머니가 9시쯤 건너와 두어 시간가량 2층과 지하를 오가며 청소를 하고 세탁물을 거두어 물러간 뒤부터 선우는 오롯이 혼자였다.

계약상 별채에는 핸드폰도 들고 올 수 없었기에 시간은 더욱 길고 지루했다.

정물처럼 앉아 있기를 몇 시간째. 복도 너머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암.”

서유라가 크게 하품을 하며 복도로 나오다가 우뚝 멈췄다. 그 자리에 서서 한참 선우를 노려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는, 다시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안녕하세요. 이선우입니다.”

서유라는 인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선우를 지나쳐 어슬렁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홈바를 열고는 오렌지주스를 커다란 컵 가득 따랐다.

서유라의 뒤를 따르던 선우는 아침에 장 여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유라가 깨어나면 식사를 차릴 수 있게 알람을 달라고 했었다.

인터폰이 어디 있더라, 찾다가 거실 벽에 패널로 붙어 있는 인터폰을 찾았다.

“네, 별채인데요.”

서유라 씨라고 해야 하나, 장 여사처럼 막내 아가씨라고 해야 하나 잠깐 고민을 하는데 다이닝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야.”

잠시만요, 선우는 인터폰을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그래, 너.”

서유라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의미심장한 미소와 커다란 컵 가득 들어 있는 오렌지주스가 선우의 미래를 알려 주었지만,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걸음 앞에 섰을 때, 서유라는 선우에게 조금 더 가까이 오라고 손을 까딱였다. 선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서유라가 싱글싱글 웃으며 컵을 높이 들었다.

“꺼지라고, 미친년아.”

주르륵, 샛노란색의 오렌지주스가 선우의 머리 위로 부어졌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번째 물벼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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