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우
이태원동 27길.
선우는 핸드폰에 메모해 두었던 주소를 들고 고개를 돌렸다.
택시 기사가 바로 여기라며 내려 주었는데, 한참을 걸어도 주소가 적힌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높은 담장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높이가 3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벽은 골목을 따라 이어졌지만 걸어도 걸어도 대문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따라 걷다 보니, 안으로 쑥 파인 문이 보였다. 대문인가 보다. 선우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
문 앞에 선 선우는 작게 탄식을 했다. 커다란 대문처럼 보였던 입구는 주차장 출입구였다. 철옹성 같은 셔터가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선우는 걸음을 뒤로 물러 높디높은 벽을 올려다보았다. 적고벽돌로 된 까마득히 높은 담 위로 정원수의 머리 부분이 보일 뿐이다.
재벌가 저택이라 그런가. 맞은편의 다른 집들도 저택 수준이었지만, 이 집 같은 곳은 없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기분이었다.
얼마를 더 가야 대문이 나올까.
맞게 찾고 있는 건가 생각을 하는데 몇 미터 앞에서 덜컹 소리가 나더니 주차장 셔터와 같은 재질로 되어 있는 작은 쪽문이 열렸다.
단발머리의 아주머니가 지갑을 쥐고서 문을 닫는다. 선우는 목소리를 높여 아주머니를 불렀다.
“저기, 말씀 좀 여쭐게요.”
선우의 말에 아주머니가 뒤를 돌았다.
“실례지만 여기가 서명구 회장님 댁이 맞을까요?”
아주머니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선우는 말을 이었다.
“11시에 뵙기로 약속을 했는데, 잘못 찾은 건가 해서요.”
“오늘 회장님 손님 스케줄 없는 걸로 아는데, 누구 찾아오셨어요?”
“아, 그게…….”
선우는 핸드폰 연락처를 열어 며칠 전에 저장했던 이름을 찾았다.
“명규진 실장님과 통화했어요.”
“아, 전무님 손님이시구나. 저 아래로 내려가면 큰 길가에 대문 있어요. 여긴 뒤쪽이라 한참 멀지. 벨 누르고 약속 잡았다고 하면 열어 줄 거예요.”
아주머니가 길 아래를 가리켰다. 선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담을 따라 마저 걸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대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대문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쪽 길에서 내렸으면 좋았을 것을.
대문 앞의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선우는 벨을 눌렀다. 양옆으로 달린 CCTV가 선우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 네, 말씀하세요.
“이선우라고 합니다. 11시에 명규진 실장님 뵙기로 했습니다.”
지잉-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지만 보이는 것은 잿빛 계단뿐이었다.
화강암 재질의 폭넓은 계단이 선우의 눈높이만큼 이어져 있었다. 선우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를수록 정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운동장만 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드넓은 정원이었다.
그 넓은 정원의 절반은 잔디였고, 절반은 검은색에 가까운 화강암 데크였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키가 큰 정원수는 담을 따라서만 심겨 있었다.
정원 건너편으로 직사각형의 2층 저택이 보였다. 얼룩 한 점 없을 것 같은 흰색의 외벽과 커다란 창. 차가울 정도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느낌이었다.
선우는 계단에서부터 이어진 화강암 길을 걸었다. 정원을 지나 현관문 앞에 닿을 때까지, 그 넓은 공간에 움직이는 존재는 선우뿐이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려는 찰나, 기다렸다는 듯이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이선우 씨? 통화했던 명규진입니다. 들어오세요.”
* * *
선우는 규진의 뒤를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인상적인 것은 햇빛이었다.
2층 천장에서부터 1층 바닥까지 건물의 전면부 전체를 차지한 거대한 유리창으로 햇살이 여과 없이 들이치고 있었다.
공간의 중앙에 놓인 소파에서부터 벽에 걸린 액자까지 들이치는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선룸이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규진이 소파 쪽으로 선우를 안내했다.
“서류 먼저 검토하고 계시면 전무님 곧 내려오실 겁니다.”
비어 있는 자리와 선우의 자리 앞에 각각 작은 생수 한 병과 유리컵, 서류 한 부와 펜이 놓여 있었다.
선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열어 보았다. 제일 먼저 계약 당사자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갑 서문도, 을 이선우.
이어지는 항목들을 하나씩 읽어 내리는 선우의 머릿속에 선배 은정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말도 마. 서유라 완전 미친년이래. 자세한 건 말 안 하는데, 개차반도 그런 개차반이 없나 봐. 돈을 그렇게 많이 주는데도 2주 동안 세 명이나 그만뒀단다.’
입주를 조건으로 한 서유라의 개인 트레이너.
은정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급여에 관한 조항, 비밀 유지 조항, 개인 정보 활용 동의 조항 등의 서류를 대강 훑었지만, 어디에도 서유라의 이름은 없었다.
‘하기야, 서도가 원래 콩가루 집안이잖아. 회장부터 자기 딸보다 어린 여자를 세컨드로 들였는데, 뭐.’
은정은 핸드폰을 두드려 무언가를 찾더니 화면을 돌려 선우에게 보여 주었다.
‘서유라 SNS. 한참 뜸하더니 다시 올리더라. 예쁘장하지? 엄마 닮긴 했어.’
서유라의 사진을 훌훌 넘기며 보여 주다가 은정이 잠시 화면을 멈추었다.
‘이번에 본가 들어갔다더니, 진짠가 봐. 여기 지나가는 남자가 서도 부회장 아들.’
손가락으로 톡 누르자 화면 안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어머나, 우리 문도 조카님 퇴근했나 봐요. 궁금해하시는 친구님들 위해서 자암깐 보여 드리겠습니다. 잘 보이시나요?’
화면을 돌리며 서유라가 말했다.
‘이 영상 떠서 한동안 난리 났었잖아. 그냥 지나가는 건데도 장난 아니지?’
앵글에 잡힌 남자는 카메라를 치우라는 듯 손을 저으며 쓱 지나갔다. 그게 전부였다. 그때 잠깐 들었던 남자의 이름이 계약의 당사자로 서류 위에 쓰여 있었다.
해야 하는 일과는 크게 상관없겠지.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덮었다. 옆에 서 있던 명규진이 선우에게 말했다.
“고용 계약 서류에 최종 사인을 하시게 되면, 저희 측 변호사가 몇 가지 간단한 사실 확인을 할 수 있다는 점 유념해 주시구요. 전무님 내려오시네요.”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장신의 남자가 햇볕으로 얼룩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선우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말했다.
“앉아요.”
남자는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저 멈추지 않고 내려온 것이니 거침없다는 표현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선우의 느낌이 그랬다.
강렬한 햇빛을 태연히 맞으며 걸어오는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군살 하나 없이 쭉 뻗은 몸이 매끄러웠다.
“매번 명 실장님께 신세를 지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남자가 선우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짧게 웃는 모습은 어느 배우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닙니다.”
“어디 보자…….”
명 실장의 대답이 남자의 목소리에 가려졌다. 남자는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었다.
“이선우 씨.”
이름을 확인한 남자가 선우를 서류 너머로 흘깃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어 주기도 했다. 친절하게 대할 테니 안심하라는 듯이.
“발레 전공하셨고…….”
“네.”
“좋네요.”
뭐가 좋다는 건지. 남자의 눈은 건성으로 그녀의 이력을 건너뛰고 있었다.
뒷장은 넘겨 보지도 않고 남자는 펜을 들었다. 제일 마지막 장을 펼치고 거침없이 사인을 하며 말했다.
“자세한 건 명 실장님께 들으시고, 내일부터…….”
사인을 하는 동안 말을 끌다가 마지막 점 위에 펜을 세운 채, 선우의 눈을 보며 물었다.
“괜찮죠?”
오늘이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면접을 통과해서 입주를 하게 된다면 막연히 월요일부터일 거라 생각했던 선우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빤히 자신을 보는 문도의 눈빛에 선우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남자가 매끄럽게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서문도.
남자의 이름이었다.
* * *
공란에 또박또박 이름을 쓰고 있는 여자의 목덜미가 희고 가늘었다.
“이쪽에도 사인을 하시면 됩니다. 여기도 체크해 주시고요.”
명 실장이 말했다. 여자가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문도는 생수병의 마개를 돌려 땄다. 앞에 놓여 있는 유리컵에 따르자 꼴꼴꼴꼴— 소리를 내며 물이 컵 안으로 흘러들었다.
문도는 컵을 들어 물을 마시다가 잠깐 웃었다.
왜, 그런 여자들 있지 않나. 저 몸 안에 오장 육부가 들어 있긴 한가 싶은. 저 가냘픈 목쯤은 한 손으로도 으스러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필라테스 강사가 한 명, 헬스 트레이너가 두 명, 요가 강사도 한 명.
3일을 채우지 못했던 전임자만 네 명이고 면접 당일에 포기를 선언한 사람이 두 명이다.
눈앞의 여자가 하루 만에 눈물 흘리며 그만둔다 해도, 문도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하루도 길지. 반나절이면 녹다운하지 않을까. 하루든 반나절이든 상관없었다. 아니, 빨리 그만둘수록 좋았다.
저 비실비실한 여자는 서유라가 모르는 서유라의 마지막 기회였다. 일곱 번이나 기회를 주었으니 병원으로 보내 버릴 명분은 충분했다.
서유라가 거품 물고 까무러친다 해도 다음은 다시 재활원이 될 것이다. 이번에 보내면 회장이 퇴원을 할 때나 꺼내 줄 생각이었다.
“그럼 먼저.”
물로 목을 축인 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심 약속이 1시였던가. 손목시계를 볼 때였다.
쾅, 하고 안쪽의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헝클어진 머리의 서유라가 복도 건너편의 문도를 보더니 욕설부터 내뱉었다.
“아, 씨바, 진짜. 블라인드 달으라고오! 미친놈아!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내 얼굴 다 타면 책임질 거야? 어? 책임질 거냐고?”
쿵쾅거리며 거실로 나온 서유라가 소파에 앉은 여자와 명규진 실장을 보고는 인상을 팍 썼다.
“이건 또 뭔데? 너 또 새로운 애 데려왔어? 내가 구한다고 했지? 왜 내 트레이너를 니가 구하고 지랄인데? 그게 트레이너야? 감시인이지?”
“조카 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문도는 담담히 말했다. 유라가 코웃음을 쳤다.
“도리는 지랄.”
쿵쾅 소리를 내며 소파로 다가간 서유라가 생수병을 들었다. 문도를 보며 우두둑 돌려 따더니 그대로 이선우라는 여자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콸콸콸콸- 여자의 온몸으로 투명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