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황금의 바벨탑 3층, 위즈덤 본사 앞.
승강장도 아닌 곳에 하얀 에어쉽 한 대가 급히 도착했다. 투명한 문이 열리고 검은 하이힐 굽 소리가 빠르게 울려 퍼졌다.
─ 위즈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홀로그램 문구가 멋스럽게 조각조각 떠다니며 인사했다. 사샤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훑었다. 천장의 크리스털 조명과 번쩍이는 금색 인테리어가 눈부셨다.
널따란 홀 중앙으로 향하자 테이블 옆에 커다란 대리석 화분이 보였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의 시선이 수줍게 오므린 꽃봉오리로 향했다. 백조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태가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곁을 지나며 곁눈질로 흘끔거리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봉오리가 난데없이 활짝 만개했다. 깜짝 놀란 사샤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조화?’
그녀의 입가에 픽 조소가 걸렸다. 너도 겉모양만 여자구나. 암술, 수술도 없이 향기 있는 척 오므린 몸짓이 처량하다.
안드로이드와 클론 사업을 하는 위즈덤 본사. 사방이 반짝거리는 이곳은 화려한 무덤 속처럼 보였다. 온통 생기가 없는 반짝임. 늙은 별의 최후처럼 가련했다.
사샤는 눈살을 찌푸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알렉스가 걸어 나왔다. 그녀를 발견한 그는 놀란 눈으로 멈칫 걸음을 세웠다.
“사샤?”
사샤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에게 그는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말끔한 양복을 입은 알렉스는 기억 속 모습보다 조금 더 마른 체격에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아, 으응.”
맞잡은 손에서 극명한 온도 차가 느껴졌다. 사샤는 식은 눈빛으로 예의상 한번 웃은 뒤 손을 거뒀다. 엉덩이 뒤로 손바닥을 슥 문질러 닦았다. 불편한 기분에 목울대가 울렁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날 보러 온 거야?”
“아니, 여긴 손님으로서 온 거야.”
“손님?”
“좀 수리할 게 있어서.”
사샤는 아트피셜인 두 다리를 내려다보며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알렉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아…….”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거 전문이잖아, 위즈덤이.”
“그렇지.”
그의 눈초리가 허공에서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를 흘끔거렸다. 미간이 급한 기색으로 구겨진다. 알렉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비서에게 안내하라고 지시해 둘게. 내가 지금 급히 가 봐야 해서, 다음에 따로 차라도 한잔하자. 만나서 반가웠어.”
“그래, 어서 가 봐.”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출입구 너머로 사라졌다. 사샤는 끝까지 환한 표정을 잃지 않는 그의 등을 쳐다보다가 허공을 응시했다.
리쩨이 스쿨 시절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는 없다. 기억만으로 감정까지 변이시킬 수 있다면,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다면 저건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 걸까? 저 남자는 아브라함 회장의 클론이자, 그녀가 만났던 05번 알렉스의 기억을 이식한 복사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정말 아는 것처럼 웃었다. 오래전의 첫사랑과 재회라도 한 듯 소년 같은 얼굴로.
“사샤?”
또 다른 이가 그녀를 불렀다. 사샤는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하며 돌아섰다. 지팡이를 짚고 선 요한을 보자마자 그녀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안드로이드의 안내를 따라 나오던 요한도 창백한 얼굴로 놀란 채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사샤는 잘 다듬어진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좀 전에 봤던 06번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비로소 06번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웃은 것인지 깨달았다. 감정을 속이는 건 영혼을 팔아먹는 것보다 힘들다. 사샤는 싸늘한 입매를 끌어올려 한껏 거짓된 곡선을 그렸다.
“안녕, 요한?”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상냥할 수 있다고 하는 거구나.
“그간 잘 지낸 것 같네.”
중화제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녀석의 목을 졸랐을지도. 세월은 감정을 부식시킨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이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잘려 나간 두 다리가 다시 끊어질 듯 아팠다.
사샤는 향기 없는 웃음 속에 목소리를 담았다.
“아담의 말을 전하러 왔어.”
기도했다. 이 미소가 부디 그에게도 아주 끔찍한 것으로 보이기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엘 카인의 실추가 낙원에 더 큰 그늘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는.
연맹군은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로스트 헤븐을 탐내서가 아니었다. 입실론과 치료제를 독점하고 있는 왓슨 그룹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위즈덤 측은 다른 이유에서 그의 몰락을 바랐다. 각자의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낙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낙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뉴스에서는 델타를 탈취하고 고스트들과 함께 낙원을 전복시키려 했다던 브루클린의 성녀에 대한 기사가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동조한 특별수사대 대원들도 함께 수배범으로 지목됐다.
주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뉴스를 시청했다. 낙원의 영웅인 브루클린의 성녀가 평의원들을 암살했고 부대원들을 구슬려서 델타를 탈취한 뒤 아군을 공격했다니? 게다가 불법 체류자들을 선동해서 전쟁까지 일으키려고 한다고?
바람의 도시에 떠 있던 빌라들이 모두 지상에 착륙했다. 사람들은 밖에서 총을 들고 돌아다니는 헌병들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 대피소로 이동합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방탄복을 착용하신 뒤 현관 밖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전투용 에어쉽들과 수송기가 온 하늘을 누비며 날아다녔다. 가정에 비치된 방탄복을 착용한 주민들은 바람의 도시 한가운데에 모여 헌병들의 지시를 따르며 수군거렸다.
“브루클린의 성녀가 고스트들과 한패였다는데요?”
“제가 듣기론 무슨 스파이였다고 하던데.”
“말도 안 돼요! 예전에 뉴욕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요. 델타하고 싸우다가요. 이번에 공중 정원에서도 모델 이브를 구했다면서요. 무슨 스파이가 그렇게까지 해요?”
“그러니까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헌병들 뒤로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이 소총을 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삼백여 명의 주민들을 에워싸더니 딱딱한 말투로 안내했다.
“대피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저기, 게이트로 가는 건 안 되나요? 차라리 낙원을 잠시 떠나 있고 싶은데요.”
누군가의 용기 있는 발언에 다들 이때다 싶어 말을 얹었다.
“저도요!”
“부모님 댁에 가 있는 게 낫겠어요.”
“외부와 연락은 왜 안 되는 건가요? 지금 낙원 내 상황이 밖에 보도되는 건 맞아요?”
“불안해서 여기 못 있겠어요.”
삽시간에 술렁임이 번졌다. 동요하던 주민들 몇 명이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자가용 에어쉽으로 게이트에 갈 심산이었다. 그러자 헌병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위협적으로 총을 들었다.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지금은 누구도 낙원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뭐, 뭐야…….”
“당신들이 뭐라고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내 마음대로 어디 가지도 못해?”
“주민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위즈덤은 여러분의 생명 보호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꼼짝없이 지하 대피소로 끌려갔다. 다들 억압적인 분위기에 분노한 표정이었지만 저항은 없었다.
제1대피소는 수면실과 식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수면실의 2층 침대들 위에는 얇은 모포가 차곡차곡 접혀 쌓인 게 보였다. 식당에는 진공 포장된 식품들이 선반을 빼곡하게 채운 채 진열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식당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몇몇은 진공 포장 식품들 앞을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잿빛 벽면 화면에 뉴 라이프 프로젝트 광고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영상을 시청하기 무섭게 광고 속으로 빠져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인간의 무기력함을 이용한 광고는 자괴감에 빠진 주민들의 심리를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그래, 맞아. 여분의 목숨을 준비해 놨다면 이토록 두렵지만은 않았을 거야. 제2의 삶, 뉴 라이프 프로젝트에 가입되어 있었더라면.
누군가 곱씹듯 중얼거리며 한숨과 함께 머리를 쥐어뜯었다. 진작 클론을 만들어 둘 걸 그랬다. 미리 대비해 둘 것을…….
“안 됩니다, 여러분.”
구부정하게 굽힌 몸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나타난 여자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화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즈덤의 농간에 속지 마세요. 그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여러분에게 뉴 라이프 프로젝트를 홍보하려는 겁니다.”
제인을 본 주민들의 눈이 커졌다. 모델 이브다. 엘 카인하고 같이 떠난 거 아니었나? 그녀가 여기 왜 있지?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불신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뉴 라이프 프로젝트는 여러분에게 헛된 희망을 내주고 돈을 갈취하는 사업입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저게 성공적이었다면 아브라함 회장이 솔선수범해서 성공 케이스로 등장했겠죠. 클론과 본체는 서로 달라요. 쌍둥이라고 서로 같은 사람은 아니잖아요.”
누군가가 눈썹을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당신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엘 카인하고 같이 간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요. 입실론들은 다 어디 갔대요? 저들끼리만 홀라당 도망간 거 같던데.”
결국 너도 저들과 한편이지 않느냐는 비난이 홍수처럼 들이닥쳤다.
“미즈 왓슨,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왓슨 양은 낙원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뒤쪽에 서 있던 남자들이 주민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제인과 함께 함정 헤벨을 외부 수사기관으로 추천했던 고모라의 사업가들이었다. 그들은 제인이 낙원을 떠난 뒤, 특보대의 감시를 받으며 스파이 취급을 받는 생활을 해 온 탓에 까칠한 태도를 보였다.
“스파이는 저 여자겠죠. 엘 카인하고 결혼할 사이였잖아요.”
“알렉스 아브라함하고 재혼이라도 하려나 보죠.”
주민들의 비웃음에 제인은 수치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군중의 차가운 시선이 이렇게도 혹독할 줄은 몰랐다. 언론과 미디어가 늘 그럴듯한 포장지를 입혀 줬기에 세상은 그녀에게 있어 언제나 달콤한 솜사탕처럼 상냥한 존재였다.
제인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다. 이런 걸로 나약해져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아버지도, 로스트 헤븐도,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도 절대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타인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때 멜리사가 제인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붉은 암사자를 본 주민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다들 뾰족한 표정이었다. 멜리사는 능숙하게 미소를 지었다. 주민들은 집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멜리사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엘 카인은 죽었습니다.”
충격적인 첫 마디에 다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저지른 수많은 죄가 부메랑이 되어 그를 살해했죠.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제인은 그걸 눈앞에서 다 지켜봤어요.”
멜리사의 목소리는 천장이 낮은 대피소 안에 충분히 울릴 만큼 메아리쳤다. 다들 놀란 얼굴로 제인을 쳐다보았다.
제인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엘 카인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던 웁실론들과 달랐다. 계속 태양의 도시에 있었다면 그녀 역시 모래시계 속에 갇혀 있던 웁실론들과 다를 바 없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모델 이브가 아닌 제인 왓슨이었다. 더 이상 낙원의 환영 속을 사는 건 사양이었다.
제인은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민들을 보며 곁눈질로 멜리사를 응시했다. 전 홍보부 장관이었던 멜리사는 주민들을 주무르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엘 카인과 솔로몬도 군중의 사랑을 얻는 데 천재적인 사람들이었지.
멜리사는 그들과 같은 수법을 쓰고 있었다.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가여워라,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식으로 등을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에 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이를 악 물고 멜리사에게 속삭였다.
“멜리사,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 어떤 훌륭한 양치기도 양들의 협조 없이는 협곡을 지나기 어렵다. 대중을 선동하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길 잃은 그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도 리더들의 의무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럴듯한 드라마를 쓰고, 그에 맞춰 연기를 하고, 인위적인 감동과 눈물을 자아내는 방식은 더 이상 싫었다.
문득 자신만만한 눈초리로 도도하게 웃던 유림의 모습이 떠올랐다. 브루클린의 성녀라면 이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제인도 안하무인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기적이었던 그녀는 늘 주변의 반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유림은 반대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제멋대로인 성질머리를 좋아했다. 그녀의 고집에는 신념이 있었다. 대중은 뚝심대로 밀고 나가는 그녀의 시원한 행보에 환호성을 지르고 응원했다.
신뢰가 우선인 거다. 브루클린의 성녀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 해.
제인은 혀로 입술을 축인 뒤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알렉스 아브라함은 제 조부에게서 낙원을 강탈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제게는 더 이상 아무런 권한도 없어요. 그럼에도 제가 낙원에 돌아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곳이 제 집이기 때문이죠. 또 조부의 꿈이었던 장소고요. 지금은 제 꿈이기도 합니다. 전 낙원을 지킬 겁니다. 왓슨가는 끝까지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비록 저 하나뿐이지만, 제가…… 여러분 곁에 끝까지 남겠습니다.”
주민들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그들의 표정에 감동과 미소 따위는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실망감이 몰려왔다. 강렬한 전투 장면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던 유림처럼 쉬이 되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아쉽다.
누군가 더운지 방탄복을 벗어 손부채질을 하며 물었다.
“아까 전 공습경보는 뭡니까?”
“낙원이 대치 중인 건 고스트들뿐만이 아닙니다. 새 관리자인 아브라함은 연맹군과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낙원이 궤멸되고 말 겁니다. 여러분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어요.”
“연맹군이 낙원을 공격한 거라고? 연맹군이 대체 왜 우리를…….”
“브루클린의 성녀 때문 아닐까요?”
“설마 소문이 다 진짜였던 건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머뭇거리던 제인은 삽시간에 번져 가는 추측성 이야기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멜리사를 쳐다보았다. 멜리사는 알아서 하라는 시늉으로 팔짱을 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제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민들을 응시했다.
왜 브루클린의 성녀를 탓하지? 그녀는 당신들의 영웅이잖아. 낙원의 일원으로서, 브루클린의 성녀를 아끼던 팬으로서 화가 나야 정상 아닌가?
답답했다. 그렇게 아무 종소리에나 홀려서 따라가는 양들이니까 여기저기서 늑대처럼 달려드는 거다.
“정말 그렇게 믿으세요? 브루클린의 성녀가 여러분에게 칼을 겨눴다고요?”
숙연한 분위기 속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동요하며 옆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던 사람들은 제인과 눈을 마주치자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던져 본 한마디가 모여서 여론이 되는 거예요. 생각보다 말의 힘은 엄청나요. 하지만 그게 다 진실은 아니죠. 여러분들이 진짜로 믿는 건 뭔가요?”
제인의 질문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옆 사람들과 대화를 멈추자 각자 홀로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마 처음일지도 모른다. 언론의 추측성 기사도, 미디어의 쏟아지는 정보도, 주변의 ‘그렇다더라’라는 이야기도 차단한 채 오롯이 자신의 생각이 뭔지 정립해 보는 기회를 가져본 것은.
로스트 헤븐은 여신의 낙원이었다. 입실론들의 성역인 이곳은 ‘이브의 가호’를 받은 파라다이스였고, 공식 홍보 모델인 제인은 입실론들을 대표해 이브의 미모와 여성성을 연기했다. 하지만 그런 여신들을 보호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브루클린의 성녀였다. 그녀는 낙원의 수호신으로 숭배받던 이브를 지키는 ‘여신의 방패’로서 추앙받았다.
제인은 침묵하는 주민들을 보며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저만 해도 허구한 날 영상 속에서 이브나 연기할 뿐, 실제로 제 목숨 깎으면서 낙원을 지켜온 건 블랙 호크나 브루클린의 성녀와 같은 승전 영웅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켜온 것은 저나 입실론들이 아니에요.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의회와 군부의 부조리를 눈감아 주지 못한 채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
“지금도 그들은 낙원 어딘가에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제 우리들이 도와줄 차례예요. 여러분께서 도와주세요. 더 이상 언론과 정치인들의 거짓 선동에 넘어가지 말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세요.”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좀 들어 볼 의향이 생겼다는 듯 누군가 팔짱을 풀며 눈썹을 까닥거렸다. 제인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믿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받은 건 다들 처음이었다. 낙원에서는 뭐든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건 슈퍼컴퓨터 왓슨이 알아서 해결해 줬기 때문이다. 완벽한 시스템 속에서 의심이란 건 피어오를 틈이 없었다.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들 스스로가 현명해져야 했다. 블랙 호크가 떠나고, 브루클린의 성녀마저 쫓기는 현실 속에서 이제 자신들이 직접 이곳을 지켜야 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개개인이 판단할 일이었다. 입실론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낙원도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진정한 낙원의 가치란 무엇일지 각자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손을 뻗었나? 에덴 타워가 보여 준 허상에 눈이 멀어 이면에 커 가는 그림자를 보지 못한 채 도시에 암흑을 가져오고 말았다.
지금 이 사태는 그들 모두의 책임이었다.
“낙원 밖에서는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어요. 평의회가 낙원과 외부를 철저하게 단절시켜 놨기 때문이죠. 저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알려야 해요. 여러분께서 증언하고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의 이야기를 밝혀 주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가기만 해 봐요! 평의회고 위즈덤이고 내 이걸 가만두나 봐라!”
“그럼요.”
주민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자 멜리사는 미소 지었다. 불가능할 거라 믿었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을 때, 그 바람을 알아채는 건 선장이 할 일이다. 제인 왓슨, 당신은 그런 선장이 되어야 한다.
제인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 나는 기분이었다.
─ 고생이 많으십니다, 미즈 왓슨.
지직거리는 음성과 함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감동적인 연설이었습니다. 정 소위를 대신해서 감사를 표하도록 하죠.
밀러로부터 받은 원형 통신기에서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헤벨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해서 가져온 건데, 허가도 없이 멋대로 작동되는 거였나?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제인은 멜리사의 손바닥에 올려진 통신기에 대고 불만스럽게 쏘아붙였다.
“호크 대령?”
─ 지원 부대로 왔습니다. 합류 가능하십니까?
이 남자가 반가울 때도 있다니, 제인은 헛바람 섞인 웃음을 흘렸다. 명장 블랙 호크의 명성이 거짓부렁은 아닌 모양이다. ‘호크’라는 이름에 주민들의 안색도 한층 밝아졌다.
“뭐야, 당신. 어디 있는데?”
─ 해저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민들과 함께 바람의 도시 지하 대피소에 있어요. 헌병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고.”
─ 알고 있습니다. 모래의 도시 하층부에 있는 해군기지 아시죠? 그곳으로 가면 잠수정들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 빨리 오십시오.
“뭐? 아니, 밖을 헌병들이 지키고 있다니까…… 잠깐, 호크 대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신이 뚝 끊겼다. 홱 돌아선 제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몇백 명의 주민들이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하얘지고 숨이 턱 막혔다. 이런 거구나, 낙원을 이끈다는 무게감. 이런 거였어.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 있는 그녀의 어깨를 멜리사가 가만히 움켜잡았다.
“거, 걱정들 말아요. 다 방법이 있으니까.”
제인은 애써 웃으며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녀는 초조한 속내를 달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때 자신도 브루클린의 성녀처럼 뛰어난 전투 능력이 있었더라면. 유림이었다면 벌써 저 문을 때려 부수고 헌병들 따위 가볍게 제압했을 텐데.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제인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배 아픈 연기라도 해서 주의를 끌어 볼까? 안드로이드 헌병에게 이런 꾀병이 먹힐 리는 없지만 뭐라도 시도해야 했다.
브루클린의 성녀,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나도 당신처럼 목숨을 걸고 모두를 지켜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그런 각오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콰쾅!
소형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식당 선반에 쌓여 있던 진공 포장 음식물들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깜짝 놀란 주민들은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대피소 입구의 쇠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머리가 잘린 안드로이드 헌병이 데굴데굴 구르며 쓰러졌다. 그 뒤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게 보였다.
검은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등장했다. 주민들은 몸을 웅크린 채 겁먹은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연맹군입니다. 주민 여러분들을 헤벨까지 무사히 호위하라는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다들 일어나시죠. 그렇게 겁먹은 얼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맹군?”
총구를 내린 그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미어캣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안심 어린 미소가 번져 나갔다.
* * *
상아색 에어쉽 한 기가 폐쇄 도시 상공을 독수리처럼 빙글빙글 돌며 정찰하고 있었다. 그 안에 탄 셰인은 께름칙한 얼굴로 아래를 내다보았다. 먼저 도착한 피닉스 부대가 바둑판처럼 정렬한 채 폐쇄 도시 입구에 집합해 있는 게 보였다.
복잡한 표정을 짓던 그는 “윽!” 하고 고개를 젖히며 손등으로 코를 막았다. 붉은 코피가 인중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젠장!”
머리가 띵했다. 머릿속에 흘러드는 안드로이드 병사들의 메시지가 뇌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두통이 지끈지끈 끊이질 않았다.
‘이러다가 나 죽는 거 아니야?’
특진에 눈이 멀어서 제 생명을 깎아내리는 짓을 하고 있었다. 이딴 작전을 맡는 게 아니었다. 뇌출혈이라도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높으신 양반들이 줄 서서 등록했다는 뉴 라이프 프로젝트의 멤버도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안드로이드들과 이어진 뇌파 인식이란 걸 끊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중위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공격 준비 완료입니다.
피닉스 부대원들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명을 요청하고 있었다. 셰인은 관자놀이를 부여잡으며 괴로움에 신음을 흘렸다. 끙끙대던 그는 폐쇄 도시의 철조망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철조물과 에어쉽 잔해 외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광경이 어지러운 시야 속에 울렁거리며 다가왔다.
─ 중위님.
─ 명령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될 대로 되라.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자.’ 셰인은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공격해!”라고 소리쳤다.
대열을 이루고 있던 오백 기의 안드로이드가 앞줄부터 차례차례 뛰어가기 시작했다. 선봉에 선 건 피닉스 부대였다. 그들은 금색 불사조 마크가 달린 전투복을 입고 몸을 낮춘 채 무섭게 달려갔다.
구 연구 단지를 에워싼 철조망이 끽끽거리다가 쓰러졌다. 가시덩굴처럼 날카로운 철조망은 안드로이드 군단에 의해 무참하게 밟혔다. 납작 찌그러진 철조망 사이에는 과거 델타들이 이로 물어뜯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때도 굳건하게 버텨 준 울타리건만 날카로운 엄니도 발톱도 없는 안드로이드에게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피닉스 부대가 제일 먼저 연구 단지 앞마당에 들어섰다.
“최우선 순위는 정유림 소위를 생포하는 거다. 그다음이 연맹군의 마이클 밀러 중령의 생포다. 나머지는 사살해도 좋다.”
─ 알겠습니다. 제1소대 연구소 A동 앞입니다.
─ 제2소대 에어쉽 승강장이 보입니다.
─ 제3소대 연구소 A동 뒷문 포위 완료.
열원이 감지되는 A동 앞에 전력의 90퍼센트가 배치됐다. 제1소대가 정문을 가로막은 채 대기 중이었다.
황량한 바람에 날아온 나뭇잎들이 시멘트 바닥을 까끌까끌하게 긁으며 가랑가랑 굴러갔다.
“쉬잇.”
상공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셰인이 대기 신호를 보냈다. 얼룩으로 거뭇거뭇해진 건물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나오던 인영은 센서가 망가진 유리문을 걷어차고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임부복처럼 헐렁한 환자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할짝 혀로 핥았다. 달콤한 맛에 취한 눈빛치고는 사뭇 담담한 기색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그녀는 여유롭게 반원을 그리며 주위를 응시했다.
철컥.
총을 겨누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뺨을 긁으며 무신경하게 서 있던 눈초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풀어헤친 긴 머리칼은 피딱지가 엉킨 채 바람에 자유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정 소위다.”
셰인이 목울대를 꿀꺽 삼키며 속삭였다. 그녀와 대치한 채 서 있던 피닉스 부대가 눈알을 ‘윙’ 하고 돌렸다. 그들의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변하는 걸 본 유림의 표정에 언짢은 기색이 어렸다.
─ 목표 대상 발견, 최우선 타깃 정유림 소위. 포획 작전에 돌입합니다.
─ 포메이션 A, 제압 부대 돌격합니다.
유림은 맨 앞에서 달려오는 안드로이드 부대를 빤히 응시했다. 이들의 움직임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연습 대전으로 상대했던 케이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수준이었다.
그녀는 뺨과 턱에 튄 핏물을 손등으로 슥 훔쳤다. 차분하게 뛰는 맥박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고요했다.
수면 위로 고개를 처든 소녀는 코까지 물에 담근 채 핏빛 눈동자를 드러냈다. 소녀가 다시 머릿속에 속삭인다.
‘다 없애 버려.’
귓가에 닿는 듯한 가녀린 입김, 잠겨 있던 광기가 깨어나는 신호였다.
유림은 옷자락 뒤에 감추고 있던 은색 검을 꺼내 들었다. 가늘지만 힘 있는 손목에 피가 묻어 있었다. 새까만 먼지 터럭이 묻어 있는 발목이 뽀얘서 유난히 돋보였다. 여기저기 긁히고 상처가 난 발등 아랜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탕!
허공에서 날아오는 마취탄이 마른 바람을 안고 포물선을 그렸다. 유림은 정면에서 날아오는 탄환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까딱 움직여서 피했다. 오른뺨을 스치듯 지나가는 주사기를 본 그녀의 눈초리가 사납게 이지러졌다.
숨을 훅 들이마시고는 양손의 쌍검 자루를 날개처럼 움켜쥐었다. 맨발로 다다다 뛰면서 번개처럼 날아올랐다. 그녀는 정면에서 뛰어오는 안드로이드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제비 돌며 무용하듯 검을 휘둘렀다. 그 뒤에서 일렬로 쫓아오던 녀석들의 머리가 촤악 베이며 수액을 뿜어냈다.
짜릿한 쾌감에 입가가 붉은 곡선을 그렸다.
사각지대에서 빈틈을 노리며 뛰어오른 안드로이드가 목에 검이 대롱대롱 박힌 채 허우적댔다. 유림은 칼을 뽑으며 안드로이드의 가슴을 발로 밟아서 걷어찼다. 그가 ‘끼깅’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산 채로 목 잘린 노루의 목덜미처럼 녀석의 목에서도 물줄기가 푸슉 뿜어져 나온다.
귓등에 튄 회색 수액을 소매로 슥 훔쳤다. 흘끗 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검붉게 타올랐다. 평소 타이트한 전투복을 입었을 땐 그렇게도 육감적이던 몸이 헐렁한 환자복을 입으니 소녀처럼 가녀려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르던 손이 칼자루를 손안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어디를 겨누는지 알 수 없던 그녀의 칼끝이 텅 빈 허공을 찌르고 나갔다. 그러자 양옆으로 달려들던 안드로이드들이 썰린 갈대밭처럼 풀썩 쓰러졌다.
“유림!”
A동 출입구 앞에 선 커크가 갈비뼈를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뒤따라 나온 랜스도 다리를 절뚝이며 정면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멍해졌다. 순식간에 약 오십 기의 안드로이드가 쓰러진 광경은 헤벨의 정예 요원마저도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유림이 피와 수액으로 얼룩진 얼굴을 손등으로 훔치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흠칫한 커크는 슥 돌아서더니 괜히 옆구리를 붙잡고 엄살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야, 나 7번 갈비뼈가 부러진 거 같아.”
“너만 다쳤냐? 나도 지금 왼쪽 다리 두 동강 났다.”
“괜히 나왔다. 다시 들어가자.”
커크가 옆구리를 움켜잡으며 팔꿈치로 쿡 찌르자 랜스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아 세웠다.
“어디가? 유림 혼자 싸우게 놔두려고?”
“지 혼자 우리 둘 패 죽이고 나갔잖아! 몰라, 난 감당 안 돼.”
“야, 그래도!”
“그럼 어떡할 건데? 때려서 막을래? 동료도 못 알아보고 죽일 듯 덤비는 애를 무슨 수로 막아! 우리 둘이 죽기 살기로 덤벼도 쟤 하나한테 안 되는 실력인데. 그렇다고 총을 겨눌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커크가 버럭 소리쳤다. 랜스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씨근덕거리는 커크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눈시울을 훔치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저러다 돌아오겠지.”
“그게 무슨…… 어라, 두 시 방향, 커크!”
오른쪽 상공에서 불가시 모드로 있다가 번쩍 등장한 안드로이드 병기가 커크를 향해 돌진했다. 홱 돌아선 그가 당황한 채 주춤거렸다. 총을 겨눌 새도 없었다. 안드로이드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흉기로 변환시킨 손을 날카롭게 뻗었다. 표창처럼 서늘한 칼날이 콧등을 베며 안구로 향했다. 커크는 “으악!” 하고 소리치며 팔을 휘둘렀다.
“커크, 숙여.”
등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커크는 재빨리 허리와 머리를 구부렸다.
허공에서 나타난 밀러가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팔을 뻗었다. 전투복을 입은 그의 몸은 검게 갈라진 공간 안쪽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 밀러는 안드로이드의 머리통을 움켜쥔 채 비틀린 공간 사이로 몸을 빼내며 커크의 등을 밟고 뛰었다.
“꽥!” 소리를 낸 커크는 바닥에 엎어졌다.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뒤통수를 더듬거리던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드로이드의 머리통을 뜯어낸 밀러가 상공에 점프해 비스듬히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불가시 모드로 숨어 있던 안드로이드들을 향해 빔 건을 ‘지잉’ 하고 발사했다.
하얀 레이저포가 허공을 가르자 순식간에 녹아내린 안드로이드들이 흐느적거리며 바닥에 추락했다. 밀러는 은색 빔 건을 빙그르르 돌리며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옅은 머리칼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커크는 침을 꼴까닥 삼키며 일어섰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중령님의 능력인가? 순간이동을 하듯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타난다던.
유림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밀러는 자리에 못 박힌 채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펄럭이는 옷과 함께 흩날리는 머리칼을 대충 귀 뒤로 넘겼다. 고집스러운 눈매가 바람 사이로 인상을 썼다.
유령처럼 하얀 그녀는 그날과 모습이 비슷했다.
2085년, 요한을 따라 아크레인을 타고 나갔던 그는 낙원에 몰래 숨어 들었다. 소란에 휩싸여 있던 에덴 타워의 언덕. 그곳에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소년소녀가 있었다. 소년을 보호하며 달리던 소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절뚝거리며 뛰었다. 얇은 잠옷처럼 흩날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서.
군인들과 에어쉽에 쫓기며 달리던 두 사람은 절벽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소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년을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또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거니?’
일렁이는 밀러의 눈빛에 응답 없이 서 있던 유림은 차갑게 돌아섰다.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커크는 자기한테 말하는 줄 알고 울컥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랜스가 가만있으란 듯 그의 뒤통수를 총자루로 후려쳤다.
“아프잖아!”
“조용히 좀 해 봐, 눈치 없는 새끼야.”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다시 머릿속이 흐릿해지려고 해.”
유림은 핏줄이 도드라지는 눈가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머릿속 누군가가 보글거리는 물밑에서 비명을 지른다. 수면 위로 고개를 처든 이브가 붉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죽여, 다 죽여 버려!’
이브의 분노가 커질수록 감당할 수 없는 살의에 휩싸였다. 호수에서 건져 낸 소녀는 여전히 수면 한쪽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호수는 이브의 기억과 절망의 웅덩이다. 안개가 자욱한 그곳은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던 유림은 쓰러질 듯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낮게 떠 있는 에어쉽 한 기가 보였다. 저 안에 지휘관이 있을 것이다. 숨을 한 줌 들이마셨다. 마지막으로 삼킨 맑은 정신이었다. 그녀는 감기는 눈을 뜨며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관을 잡을게. 밀러는 여기에서 남은 녀석들을 처리해 줘.”
“잠깐, 나도 같이…….”
밀러가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돌아선 유림은 모호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염이 연기처럼 흩날리는 그녀의 동공 속에 끊어질 듯 요동치는 물결이 있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거친 파랑이 불어닥쳤다. 점차 가팔라지는 호흡처럼.
유림은 밀러의 양 볼을 움켜잡았다. 마지막 한 줌의 시야가 옅어져 간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발뒤꿈치를 들었다. 부르튼 입술이 그의 입술을 스치고 뺨에 입을 맞췄다.
“밀러는 오지 마.”
바람 속에 사라질 듯 투명하게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개구진 얼굴로 헤벨에서 놀던 그 시절처럼.
“절대 오지 마. 약속이야.”
고집스럽게 외친 그녀는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밀러는 멍한 얼굴로 아랫입술에 남아 있는 감촉을 매만졌다. 일순간이나마 스치듯 닿았던 그녀의 온기가 몸의 절반을 잡아 뜯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모습, 밀러에겐 보여 주기 싫었어.
작게 속삭이던 유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붉어진 눈시울에 물기가 차올랐다. 뺨을 적시는 눈물 사이로 검을 들고 뛰어드는 그녀의 모습이 가슴을 저며 왔다.
그러니까 밀러는 오지 마.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이 어쩌면 유림과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럼에도 차마 그녀의 손을 붙잡을 수 없었다.
유림은 스스로도 멈추는 방법을 몰라서 울고 있다. 넘어질 듯 위태롭게 달리는 그녀를 잡아 세우는 건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녀가 달려가 안기길 원하는 사람도, 그녀를 어둠 속에서 꺼내 줄 수 있는 사람도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기에.
유림에게는 늘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위치한 검은 호수의 존재를 모른 척했다. 그녀가 울부짖을 수 있는 곳은 그보다 더 캄캄하고 아득한 절망을 가진 이의 품속이었다.
그런 숨 막히는 절애로 그녀를 속박하는 것은 곧바른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스스로를 떨어뜨리고, 끝없는 심연 속으로 함께 잠기고 나서야 ‘이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마 알았어도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상공에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던 아크레인 한 기가 곤두박질치며 A 연구동 옥상 위로 떨어졌다.
쾅!
폭발과 함께 착륙한 아크레인에서 거뭇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끼긱’거리며 접혀 있던 문이 ‘퉁강!’ 하고 떨어져 나갔다. 케이는 깨진 계란처럼 찌그러진 은색 기체 안에서 굽힌 등을 펴며 뻐근한 목을 들었다. 스트레칭을 하듯 고개를 한 바퀴 돌린 그는 반듯하게 걸어 나왔다.
“주, 중사님?”
나츠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그는 저격 소총을 어깨에 얹은 채 대기 중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아크레인에 혼비백산한 얼굴로 ‘꽈당’ 하고 뒤로 자빠지기 전까진 말이었다.
나츠는 찌그러진 아크레인을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기체 안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몸을 들여다보던 나츠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시체다.
그것도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아주 참혹하게 살해당한 주검이었다. 조각난 몸이 입고 있는 군복을 보니 연맹군 쪽 사람인 듯했다. 아마 저 기체의 조종사일 확률이 높았다.
‘설마 중사님께서?’
나츠는 긴장한 표정으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다가온 케이는 나츠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며 고즈넉한 음성으로 물었다.
“유림은?”
“네? 아, 그, 그게…….”
나츠는 대답을 주저하며 난간 너머를 흘끗거렸다. 거짓말을 못하는 나츠의 얼굴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한 케이는 시선을 옮겼다.
사실 아크레인에서 내렸을 때부터 알아챈 상태였다. 주변에서 그녀의 기척이라고는 털끝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는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소나기라도 내렸던 건지 옥상 여기저기에 작은 물웅덩이가 괴어 있었다. 찰팍거리며 걷던 케이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콜릿 피규어를 발견했다.
“아까 클라크 의원님께서 나눠 주신 거예요.”
나츠는 물에 젖은 채 떠 있는 피규어를 보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입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는데, 케이가 타고 온 아크레인에 놀라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케이는 말없이 피규어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츠의 눈동자가 파도치며 흔들렸다.
중사님의 저런 표정, 일전에도 본 적 있다. 소복한 눈길처럼 금방 쓸려 갈 듯한 슬픔이 어린 눈동자. 사격 연습장에서 셰인의 부대와 마주쳤던 날, 중사님과 함께 갔던 바람의 도시 빵집 앞에서였다. 뭉개진 케이크 상자를 보며 케이는 그날도 저렇게 비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거, 유림도 먹었어?”
잠겼지만 나긋한 목소리가 물었다. 나츠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의 대답에 케이의 눈빛이 일렁였다.
“그건 브루클린의 성녀 시리즈가 아니고, 이번에 새로 만든 상품이래요. 풍차 모양이 알록달록해서 귀엽죠?”
“…….”
“중사님?”
옥상 난간 위로 올라간 케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듯하게 선 몸은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나츠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사님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주변 온도가 뚝 떨어진 듯 한기가 느껴졌다. 차분하게 선 케이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얀 설원에서나 볼 수 있는 냉기가 아름답게 피어오른다. 케이는 곁눈질로 나츠를 응시하며 옅은 입김이 서린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유림이 네 이상형이야?”
“예?”
투명한 빛이 스며든 다색 눈동자가 진홍빛으로 물든다. 나츠는 두근거리는 얼굴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의 중사님이다. 이럴 때의 중사님은 숲 한가운데 자리한 호수처럼 아주 고요하고 깊게 상대를 사로잡는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숲의 요괴처럼 웃는다.
“유림은 안 돼, 내 거야.”
“네? 제, 제가 감히 소위님을…… 저, 전혀요!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이…….”
“그래, 안 돼.”
“그리고 소위님께서는 중사님을…….”
나츠의 눈이 커졌다. 붉은 눈초리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가늘게 웃고 있었다.
“소유하고 있지. 내 영혼과 육체,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사랑마저도.”
침이 꼴까닥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저 두 사람은 보는 사람의 애간장을 바짝 녹였다. 서로가 서로 없이는 절대 안 될 것 같은데, 어쩔 때는 서로를 파멸시킬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케이는 뭔가를 감지한 듯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사라질 듯 여운처럼 맺힌 곡선이 미소를 그렸다. 애틋한 눈빛에 환희가 차오른다. 유림을 바라볼 때나 보여 주는 그런 애타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먼 허공을 향했다. 나츠는 멍한 얼굴로 케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공에 몸을 툭 내려놓는 듯한 그의 몸짓이 월광처럼 아름다웠다. 정면에서 돌풍이 불어왔다. 얼굴에 부닥치는 바람에 나츠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찰나, 바람을 휘감은 그는 난간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중사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츠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옥상 아래를 응시했다.
“끼이이익!”
“끼에엑!”
정문에서 드레이크가 델타들을 이끌고 출격하는 게 보였다. 그 뒤로 커크와 랜스가 레이저 건을 든 채 따라 나오고 있었다. 후방 지원을 맡은 나츠는 엉겁결에 저격 소총을 움켜쥐었다.
‘중사님은?’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눈 뜨고 꿈이라도 꾼 건가 싶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찌그러진 아크레인은 여전히 옥상 출입구 쪽 벽을 박은 채 연기를 뿜고 있었다. 문밖으로 툭 튀어나온 시체의 팔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마지막에 어딘가를 바라보던 케이는 뭔가를 찾아낸 듯한 표정이었다. 몸을 허공에 수직으로 뚝 떨어뜨린 그는 중력을 무시한 채 바람을 밟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 아직도 유림이 네 이상형이야?
참 이상하다. 심장 떨리게 만들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서편에 부서지는 노을처럼 가슴을 알알하고 먹먹하게 만들었다. 장난스럽게 보이던 눈웃음도, 그녀는 내 거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던 목소리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을 보고 온 기분이었다.
나츠는 불안한 생각을 떨치려 총을 움켜잡았다. 몸을 낮추고 저격 자세를 취하자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
스코프 너머에서 빛들이 번쩍였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게 뭐지 싶어서 찌푸리던 눈동자가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커졌다.
“저게 뭐지?”
하늘 위를 벌 떼처럼 까마득히 채운 에어쉽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상공을 낮게 배회하는 에어쉽은 초조한 기색이 다분했다. 그 속에 탄 셰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무섭게 질주하는 유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뒤로 머리가 두 동강 난 안드로이드들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와, 쟤 진짜…….”
그녀의 붉은 눈을 본 셰인은 껴입은 방탄복을 확인했다. 그가 도주할 준비 중이라는 걸 눈치챈 유림은 걸음을 멈추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 멈춰.
셰인은 “아악!”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섬뜩한 목소리가 두개골을 열고 직접 속삭인 것처럼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귀에서 ‘삐이이이’ 하고 이명이 울렸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언어가 두개골을 조이며 흘러들고 있었다.
Καταστρέφεστε τον εαυτό σας…….72)
지상의 안드로이드 병사들이 별안간 관절이 꺾인 것처럼 팔다리를 끼릭끼릭 움직이며 오작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셰인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격해! 공격하라고!” 그가 날뛰며 명했지만, 전달이 되지 않는 건지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건지 안드로이드 병사들은 기름칠이 필요한 철가면처럼 바닥에 끽끽거리며 엎어졌다.
코어 이상이었다. 접속 단자나 회로에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뇌파 신호를 전달받는 코어가 과부하라도 걸린 것처럼 ‘푸시식’ 하고 망가졌다. 원을 그리며 쓰러진 안드로이드들 중심에는 유림이 서 있었다. 그녀는 울분에 찬 눈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금은 속이 시원하니?’
어디서부터 이 마음의 빗장이 풀린 건지 모르겠다.
이브가 수면 밖으로 나오면, 그때부터는 태풍 속에 갇힌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또 번쩍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가슴의 들판에 걷잡을 수 없는 화염이 치솟는다. 온몸을 열기로 태워 버릴 것 같은 분노는 상대의 끈적끈적한 잔해를 뒤집어써야 소강된다. 핏줄이 도드라진 붉은 눈은 동공을 잡아먹고 정신까지 갉아먹지만 광기 속에서 단 하나, 선명하게 다가오는 감각이 있었다.
피.
그것이 유일하게 그녀를 흥분시키고 또 진정시켰다.
셰인은 비틀거리며 에어쉽 문을 열었다. 쪼개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밖을 내다본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유림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뭐야, 어디 갔…….”
‘쾅!’ 하고 부닥쳐 온 무언가에 에어쉽이 출렁이며 흔들렸다. 셰인은 바닥에 넘어지며 천장에서 내려온 안전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유림이 문밖에 매달려 있었다. 펄럭이며 흩날리는 하얀 위생복이 검은 머리칼과 대조되었다. 붉은 눈과 창백한 입술. 무채색의 그녀는 얼음장 같은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다리에 쥐가 난 셰인은 주저앉은 채 바닥을 더듬으며 총을 찾았다. 안쪽으로 들어온 유림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총자루를 에어쉽 바깥으로 걷어찼다. 그러고는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놔! 안 놔?”
셰인은 속절없이 끌려가면서도 거세게 반항했다. 그녀는 곁눈질로 문이 활짝 열린 에어쉽 밖을 내다보았다. 질주하는 에어쉽은 어느새 바람의 도시에 도달해 있었다. 그 많던 구름 떼 빌라들은 어디 갔는지 없고 텅 빈 하늘에는 건물 몇 개만 호젓하게 서 있었다.
십오 년 전, 실험실에 갇혀 있을 땐 나비가 되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상상 속 서풍은 그리운 향기들을 실어 날라 주었다. 사라의 자장가와 바딤의 연장 소리, 아담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는 눈을 감고 붉은 언덕에 오를 때마다 언제든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은 자유로웠다.
“야, 너 미쳤어? 미쳤냐고!”
유림은 발버둥을 치는 그를 데리고 에어쉽 문 앞에 섰다. 얼굴에 부딪혀 오는 파풍이 시원했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셰인은 그런 유림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안색이 파리하게 젖었다.
평소 정 소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눈동자에 초점도 없고, 핏기 없는 보랏빛 입술은 섬뜩했다. 그녀 특유의 상대를 도발하는 눈빛에 생기 넘치는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까부터 몽유병 환자처럼 넋을 잃고 있는 게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셰인은 발악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정유림! 정신 안 차릴래? 미쳤어? 죽으려면 혼자 죽어! 왜 사람을 물귀신처럼 잡고 난리야? 돌았냐고! 아아악, 씨발! 이거 놔아아아! 놓으라고!”
높은 곳이 왜 두려운지 궁금했다. 바람과 하늘이 이토록 좋은데 어째서 높은 곳에만 오르면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쯤은 ‘둥실’ 불어오는 바람결에 ‘풍덩’ 하고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두려움 따위 훨훨 날려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날개를 펼치듯 뛰어 보고 싶었다.
그러면 분노와 울분으로 터질 듯한 가슴이 조금 시원해질지 몰랐다. 이 고통과 외로움을 영원히 끊어 내고 가슴을 뻥 뚫을 수만 있다면, 이 끔찍한 감각과 악몽을 종결시킬 수만 있다면.
다 끝내고 싶다, 자유롭게 날아서.
셰인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듯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유림에게 잡힌 채 허공에 기우뚱 떨어지는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확장되었다. 상공에서 발버둥 치던 그는 등에 착용하고 있던 낙하산복을 떠올렸다. 셰인은 옆구리와 등을 더듬다가 얼른 낙하산복 버튼을 눌렀다.
추락하는 두 사람을 포착한 건물들 사이에서 안전 그물망이 ‘팡!’ 하고 튀어나왔다. 촘촘한 그물망은 손처럼 뻗어 와 유림의 몸을 홱 낚아챘다. 그물망에 돌돌 휘말린 유림은 뒹굴거리며 그물 안에서 통통 튀어 오르다가 스펀지형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녀는 사지를 펼친 채 하늘을 바라보며 멍한 눈을 깜빡였다.
‘땅인가?’
등에 닿는 안전한 감촉이 느껴졌다. 답답한 기분에 실망스러운 눈빛이 지어졌다.
날개 없는 비상은 불가능하다. 속박된 채 덜컹거리는 부서진 마음을 끊어 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자유를 만끽할 시간조차 없었다. 온몸이 솟구치는 피로 뜨거운 가운데 여전히 가슴 한가운데는 황량하고 덧없는 느낌이었다. 온갖 감정이 꾸역꾸역 차오르는데 채울 곳이 없어 허망하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셰인이 보이지 않았다. 잽싸게 낙하산을 펼친 그는 그물망을 피해 다른 곳으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유림은 손등과 팔다리에 든 보랏빛 멍을 내려다보았다. 금세 사라질 멍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문득 저 멍이 그냥 쭉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바닥이 새까만 걸 확인하고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며 발바닥을 찌르는 돌멩이가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상처는 흉이 남을 때나 걱정되는 법이다.
멀리 빵집이 보였다.
서서히 늦추던 걸음을 멈췄다. 하늘은 나는 돼지 간판이 오늘따라 풀죽어 보였다. 불 꺼진 조명 때문일까? 늘 유쾌하게 웃고 있던 돼지가 시무룩한 눈길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나? 환각과 망상에 미쳐 가는 머릿속에선 이제 돼지 간판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혼잣말을 하던 유림은 실소를 터뜨렸다. 허탈한 눈빛으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로 젖은 손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녀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아이구, 우리 성녀님 아니세요?”
창밖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본 폴이 얼른 가게 문을 열며 소리쳤다. 유림은 깜짝 놀라 양손을 뒤로 감췄다. 그녀를 본 폴이 위생모를 벗고 걸어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상에 이 피 좀 봐! 다치셨어요? 괜찮으세요?”
폴은 입고 있던 하얀 위생복 소매로 유림의 뺨을 슥슥 문질렀다. 유림은 당황한 눈초리로 굳은 채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다친 것도 아닌데 그의 얼굴은 온통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폴의 커다란 덩치 뒤로 유리 케이스에 덮인 케이크 진열대가 보였다. 유림은 얼굴의 피를 닦아 주던 그의 손을 뿌리치고 빵집 안으로 들어섰다.
케이크 진열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은은한 조명에 반짝이며 피어올랐다. 삼단 진열대에 나열된 케이크들은 제각각 알록달록한 색감을 뽐냈다. 바람의 도시 내에서 유일하게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 폴의 케이크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가.
어느새 종류가 더 다양해진 피규어들이 진열대 맨 위층에 쪼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쌍검을 든 브루클린의 성녀 시리즈.
이제는 바람의 도시의 명물이 된 상품이었다. 진한 초콜릿색 피규어를 바라보던 유림은 못 보던 피규어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초콜릿 언덕 위에 피스타치오색 바람개비 모양 피규어들이 금방이라도 수레바퀴처럼 졸졸 돌아갈 듯 우뚝 서 있었다.
“아, 이번에 새로 만든 아이들인데 아직 못 드셔 보셨죠? 곧 아내 기일이 돌아오길래 뭘 할까 고민하다가 만들어 봤어요.”
일렁이던 눈동자가 흐려졌다. 가슴에 누가 뜨끈한 물을 붓는 것처럼 심장이 뻐근하게 팽창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유림은 목멘 울음을 억누르며 어금니를 있는 힘껏 사리물었다.
“아저씨, 여기서 뭐해요? 다들 대피한다고 난린데.”
“우리 성녀님이 지켜 줄 건데 뭐.”
폴은 격자무늬 커튼이 쳐진 조리대 안쪽 서랍에서 하얀 구급상자를 꺼냈다. 느긋한 말투로 푸근하게 웃으며 커튼 사이로 나오던 그는 허겁지겁 상자를 열다가 물건을 와르르 쏟았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림은 ‘풋’ 하고 작게 웃었다. 여전했다, 곰 같은 몸으로 서툰 면모는.
빨개진 코끝으로 쿡쿡 웃던 그녀는 금세 어두워진 표정을 지었다. 잠긴 목소리가 입술 새로 중얼거리듯 흘러나왔다.
“성녀는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라서 낙원 여기저기를 부수고 다닐 거야. 도망가요, 아저씨. 얼른 도망쳐.”
“에이, 이래 봬도 내가 자칭 성녀님 팬 1호인데 가길 어딜 가.”
그는 바닥에 떨어진 구급약품을 주워 담으며 주름진 눈으로 웃었다. 걱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든 그는 유림을 향해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태평해 보이는 폴을 보며 유림은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다치거나 잘못되면 어쩌려고?”
“우리 성녀님이 내 걱정을 다 해 주고, 내가 참 영광이네. 허허, 더 바랄 게 없어.”
“아저씨!”
깜짝 놀란 그가 놀라서 다시 상자를 떨어뜨렸다. 유림은 뭐라고 말하려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 못할 상황에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가슴에 누가 불구덩이를 쑤셔 넣은 듯했다. 뜨겁고 답답한 게 목구멍을 콱 틀어막고 목젖을 수도꼭지처럼 비틀었다. 왈칵 명치에서 뭔가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성녀님?”
그녀는 도망치듯 가게 밖으로 나왔다. 폴이 그녀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그는 성큼성큼 따라와 유림의 어깨를 덥석 잡아 세웠다.
“괜찮아요? 아니, 치료는 하고 가야지…… 서, 성녀님?”
그는 흐느끼듯 고개를 떨어뜨리는 유림을 보며 머뭇머뭇 손을 놓았다. 처연하게 떨어진 그의 눈썹이 한동안 그녀의 여린 어깨를 지켜보았다. 안아 주고 싶어도 안을 수 없는 손이 오갈 곳 없이 괜히 주머니만 푹 찔렀다.
“성녀님, 나는요…… 난 어디 못 가요. 우리 가족이 여기 다 있거든.”
유림은 어깨를 떨었다. 숨죽여 우는 울음소리가 입을 틀어막은 손등 사이로 새어 나왔다. 폴은 슬픈 미소로 애써 밝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성녀님 왜 울어! 눈물 뚝 하시라니까? 내 걱정은 마요. 우리 아들 녀석이 노상 투덜거려도 날 끔찍하게 챙겨요. 아주 귀찮을 정도예요. 날 닮아서 싸움은 더럽게 못하는데 비상한 데가 있거든. 이 녀석이 우리 빵집은 미사일이 날아와도 안전하게 지어 놨다고 했어요. 주민들이 대피한 방공호보다 여기가 더 안전할걸? 그러니까 성녀님…… 난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릴 거예요. 우리 성녀님이 무사히 올 때까지 어디 안 가고 기다릴 테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성녀님이나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등 돌린 채 서 있는 그녀의 손에 덥석 구급약을 쥐여 주었다. 유림은 그냥 가려는 그의 옷소매 끝을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폴의 눈이 멈칫 커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소매를 잡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게 적셨다. 피와 수액이 잔뜩 묻은 손, 얼마나 아팠을까?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잠긴 목을 삼키던 둘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속내를 힘겹게 억눌렀다.
“이 옷 말고 전투복 입어야죠. 브루클린의 성녀는 그걸 입어야 멋진데.”
“……알았어, 잔소리 되게 많네.”
유림은 구급약을 받은 손등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코를 훌쩍이며 가던 그녀는 어깨 너머를 흘끗 돌아보았다. 폴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치지 말라고, 그 말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유림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군인은 감정적이 되어선 안 된다. 군인은 그래야 한다지만 지금 그녀의 손은 누구를 위해 총을 잡고 있는가?
손안에 꽉 쥔 연고가 터져서 손가락 사이로 하얀 크림이 줄줄 새어 나왔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울먹임을 참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줄도 모른 채 그녀는 설움을 참는 아이처럼 턱과 미간에 힘을 주었다.
뒤에서 폴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웃는 게 보였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풍경이니까. 폴한테선 늘 딸기 케이크 냄새가 났다. 나비가 된 그녀에게 상상 속 바람이 실어다 주던 그것과 똑같은 냄새.
“흐…… 흐윽…….”
참던 울음이 터지자 그녀는 억지로 뛰었다. 발바닥이 아팠다. 상처가 낫지 않을 것 같았다. 피딱지가 진 발로 돌아가면 폴 아저씨가 약을 발라 줄 거다. 그건 그거대로 괜찮았다.
─ 성녀님 나는요…… 난 어디 못 가요.
긴 시간의 고독 속에서 가족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혹시 날 잊어버린 건 아닐까, 이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포기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홀로 분노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몰랐다. 파도가 쓸고 가 버린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했던 이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이번에 돌아오면, 그때는 다 함께 케이크를 먹을 거다. 다 함께 카레도 먹고, 다 함께 식탁에 옹기종기 앉아서 옛날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다 해 볼 것이다.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어. 이번에는 꼭 돌아올게.
뿌옇게 된 시야를 비비며 달려가던 그녀는 정면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와 쾅 부딪혔다.
“아야!”
“찾았다.”
나직한 음성이 손목을 잡고 품 안으로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달밤의 공기처럼 선선한 향기가 그녀를 한가득 끌어안았다.
“그렇게 눈 질끈 감고 달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눈을 뜨자 고요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조각 같은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내가 속 타서 미치는 꼴 보려고 그래요?”
벌에 쏘인 듯 시큰시큰하던 코끝에 힘없는 웃음이 실렸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이 전신을 녹여 내린다. 유림은 비로소 긴장하던 온몸에 힘을 쭉 뺐다.
“케이…….”
그는 엉망이 된 그녀의 몰골을 훑으며 속상한 눈빛을 지었다. 몸 여기저기가 피와 수액에 젖어 있었다. 손발은 시커먼 때로 모자라 자잘한 돌멩이와 유리 조각이 콕콕 박혀 있고. 이런 것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악몽 속을 헤맨 거다. 가슴이 꽉 쥐어짜이듯 욱신거리며 아려 왔다.
유림이 목멘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릴 듯 힘겨운 말들을 쏟아 냈다.
“케이, 나 자꾸 화가 나. 이상한 게 보이고…… 머릿속에서 나 아닌 누군가가 계속 말을 걸어와.”
그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다.
“밀러랑 커크랑 랜스를 때렸어. 커크 녀석 갈비뼈랑 랜스 다리를 부러뜨리고 칼도 휘둘렀어.”
“…….”
“웁실론들도 공격하고, 또 내가…….”
머뭇거리던 유림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요한 눈길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엘 카인도…….”
그의 눈빛이 잠시 일렁였다.
“엘 카인도 죽였어.”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손에 고깃덩이가 되었던 엘 카인의 시체가 피 냄새까지 고스란히 눈앞에 재현되는 것 같았다. 말없이 서 있던 케이는 그녀의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 있던 피딱지를 어루만지며 쓸어내렸다.
“녀석에게는 황홀한 죽음이었겠네요.”
잔잔한 음성에 유림은 감았던 눈을 살포시 떴다.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은 부럽다는 듯이.
“나…… 괴물이 된 거 같아.”
유림이 괴로운 얼굴로 눈물방울을 큼직하게 뚝뚝 떨어뜨렸다. 케이는 웃음 밴 얼굴로 유림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내 눈 봐요. 붉어요?”
“아니.”
“붉은 눈은 분노의 증거예요. 평소에는 그걸 이렇게 억누르고 평온한 척하고 있지만, 내면 깊은 곳은 늘 어둠과 광기가 몰아치고 있어요. 유림은 아직 그게 조절이 안 되는 것뿐이에요. 아이처럼 불안정한 상태니까…….”
“나도 엘 카인처럼 된 거야?”
케이는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더니 정수리에 턱을 대고 속삭였다.
“예전에 나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기억나요? 그 답을 유림이 줬던 거.”
“내가?”
“내가 짐승이 아니라는 증거. 나에게도 온기를 주고 간 사람이 있다고.”
유림의 눈동자가 멈칫 일렁였다. 케이는 그런 그녀의 뺨을 쥐더니 고즈넉이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입을 맞추려던 그의 눈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혼란을 안고 소용돌이치며 어그러졌다.
유림은 스스로를 체벌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처럼 자기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그녀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나다.’
유림은 천성적으로 순수하고 선한 존재였다. 혼돈과 어둠 속에서 태어난 그와 달리, 빛과 질서를 따르며 살아갈 사람이었다. 그걸 억지로 물들인 게 자신이었다. 사라의 깨끗하고 곧은 마음씨에 붉은 광기를 끌어안으려니 이렇게 괴롭고 힘든 거다.
하지만 미안하진 않았다.
이기적이라 욕해도 할 말은 없다. 그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는 오히려 지독한 고독과 절망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기에.
“그냥 다 그만두고 나랑 떠날래요?”
그가 흐릿한 눈으로 말했다.
“낙원도 버리고, 로스티아벤도, 헤벨도 다 잊고…… 알혼 섬으로 돌아갈까?”
유림의 눈동자가 점차 커졌다. 놀란 듯 굳은 그녀의 눈이 물끄러미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뭔가를 발견한 듯 젖은 눈을 일렁였다. 그의 반듯한 콧날 위로 가로지른 눈물 자국이 옅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콧날과 뺨을 어루만졌다. 아직 녹녹하다. 물기가 남아 있는 온기에 그녀의 눈시울도 시큰해졌다. 담담해 보였던 그의 눈빛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늘 다정하고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 안던 그의 고통이 가슴에 가시처럼 따끔하게 박혀 왔다.
유림을 깨질 듯 소중하게 안은 케이가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서 우리 그냥…… 결혼할까?”
유림의 눈에 고인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를 향해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차갑지만 다정한 숨결이 입술을 한 입 베어 삼켰다. 하아, 둘 중 누군가의 한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바람에 실려 갔다. 입술 사이를 오가던 그의 혀가 안타까우리만큼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바스러질 듯 빨아 삼킨 입술이 들뜬 숨을 불어넣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유림?”
그녀의 손이 그를 멈춰 세우듯 밀어냈다. 케이는 뭔가로 끈적끈적한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과 손등 새로 하얗게 터져 나온 연고가 그의 옷에까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던 건지 눅눅해진 연고가 난로처럼 따뜻했다.
유림은 괴로운 눈으로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폴 아저씨가 기다릴 거래.”
줄곧 충혈된 채 괴롭게 타오르던 그녀의 눈동자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꽝꽝 얼어 있던 것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듯 끝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보같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대.”
멍하니 듣던 케이가 충혈된 눈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이 영감이…….’
덜 떨어진 훈련생 하나를 구하기 위해 델타들로 득실거리던 입대 테스트 장에 뛰어들던 여자였다. 불법 체류자인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 검을 뽑고, 적이라 할지어도 약한 여자애를 구하려 몸을 날리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만신창이가 되어 마음이 부서진 채 울고 있었다.
“울지 마.”
세상 누구보다도 이브를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다시 만난 유림은 그에게 또 다른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가르쳐 준 온기로 그녀를 다시 녹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8분 31초.”
그가 ‘쉬이’ 하며 바람처럼 그녀를 안았다.
“눈 감아, 무서운 생각들…… 내가 다 없애 줄 테니.”
입을 꾹 다문 채 흐느끼던 유림은 주문처럼 속삭이는 케이에게 안겨 스르르 눈을 감았다. 손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연고가 툭 떨어졌다. 몽글몽글하게 덩어리진 크림을 떼어 내며 그의 허리를 감은 주먹을 옹송그렸다.
─ 만 번을 기도하면, 만 번을 소망하면, 만 번의 바람개비를 돌리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보게 된 풍경은 노을도 지고, 달도 지고, 별도 진 뒤였지만 소망하던 바람만은 남아서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가 남겨 둔 다정한 한 줌만은.
“아직도 이브가 머릿속에서 속삭여?”
“응.”
“뭐라고 하는데? 나도 좀 듣자, 우리 이브가 뭐라 하는지.”
유림은 소리 없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사랑한대.”
담운이 남긴 곡선처럼 웃던 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이브가 모두를 사랑한대. 엄마도, 아빠도, 아담도, 케이도, 아서도, 마이클도, 메리도…… 정말 많이 사랑한대.”
소녀는 물안개가 걷힌 호수 위로 뛰쳐나왔다. 손안에 쥔 바람개비가 졸졸 돌아가며 노래했다. 첨벙거리는 호수 위로 한 줄기 햇살이 내려앉았다. 검은 수면이 반짝이는 입자를 뽐내며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빙판처럼 맑은 면을 밟고 빙글빙글 돌며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한 손을 잡은 바딤이 같이 돌며 웃었다. 반대편 손을 잡은 사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다가온 아담이 그녀를 높이 들어 안으며 입을 맞췄다.
어둠이 사라진 호수가 거울처럼 부서진 채 드넓은 초원으로 변했다. 언덕 위를 물들인 석양이 따스하게 그들을 비췄다.
케이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처럼 말했다.
“나만 사랑해 줬으면 좋겠는데.”
유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케이의 겨드랑이 사이를 손으로 파고들며 간지럼을 폈다.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간지럼 피우는 손을 피해 그녀의 귓불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은 장난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캬득캬득 웃었다. 그녀는 그의 뺨을 잡아당기며 ‘쪽’ 하고 입술 도장을 눌렀다. 뭔가를 한 꺼풀 탈피한 듯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맑게 빛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노을처럼 잔잔한 곡선이 걸렸다.
이브는 더 이상 젖은 몸으로 웅크리지 않는다.
더 이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눈빛의 소녀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행복한 것은…… 그녀가 조각난 시간 속에서 잃어버렸던 모습 그대로 기지개를 켰기 때문이다.
돌개바람이 눈두덩을 스쳤다. 서풍이 춤을 추듯 불어와 입을 맞췄다.
“사랑해.”
누구의 고백일지 모를 속닥거림이 하얀 숨결이 되어 머물렀다. 진주구름을 수놓은 기억이 나비처럼 날갯짓을 하며 흩어졌다.
이브가 웃고 있었다.
* * *
아수라장이 된 낙원 전 지역에 왓슨 3세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홀로그램 메시지 창이 하얗게 반짝거리며 시선을 끌더니 그 위에 정장을 입은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주민 여러분. 관리자 알렉스 아브라함입니다.
폐쇄 도시에서 델타를 이끌던 드레이크가 인상을 쓰며 허공을 응시했다. 연구동 옥상에서 총을 겨누던 나츠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바람의 도시 주민들을 이끌고 미궁을 통과하던 제인은 어둠 속에서 황급히 달려온 고스트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제인과 멜리사에게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며 부릅뜬 눈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가 죽게 될 거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 분 뒤, 낙원 내 스마트 더스트의 농도를 200%까지 올릴 예정입니다.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안전을 위해 호흡기를 착용하신 뒤 대피소 내에 꼼짝 말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낙원 내 스마트 더스트의 농도를…….
유림은 허공에 미친 듯이 떴다 사라지는 아브라함의 메시지를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지었다. 그녀는 손에 쥔 은색 검을 빙그르 돌렸다.
“아브라함이 왓슨 3세와 동기화를 마쳤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케이가 속삭였다. 유림은 굳은 턱을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에어쉽들이 먹구름처럼 몰려와 하늘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위즈덤의 에어쉽들이잖아.”
에어쉽들을 빤히 쳐다보던 케이의 눈동자가 흠칫 커졌다. 폐쇄 도시 쪽으로 출격한 편대의 수송기들이 발사관을 열고 뭔가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콰쾅!
쾅!
폭발음이 연이어 터졌다. 발밑에서 느껴진 지면의 충격에 돌 부스러기들이 탁탁 튀어 올랐다. 붉은 화염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안드로이드들이 자폭을 하고 있어.”
유림이 결심한 듯 허리를 안은 케이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실행하자.”
그녀의 말에 고요히 일렁이던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브라함은 끝없이 밀려드는 빛의 물결 사이에 의식을 놓고 눈을 감았다. 극치의 쾌감이 전신을 관통한다.
낙원 전체가 손바닥처럼 훤히 내려다보였다. 조물주가 된 것처럼 지상 곳곳의 모든 정보가 쉴 새 없이 생생하게 흘러든다.
왓슨 3세는 어둠 속에 잠긴 채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는 아무 통제권도 없다. 그녀는 이제 그의 명령어를 듣는 하위 AI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통쾌하게 웃었다.
그는 낙원을 떠도는 한 줄기 바람이자 낙원의 모든 것을 적시는 빗물이고 낙원 전체를 비추는 태양이었다.
폐쇄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스마트 더스트를 통해 상황을 내려다본 아브라함은 혀를 끌끌 찼다. 겨우 델타 몇십 마리에게 밀린 피닉스 부대는 전멸 수준이었다. 전투력은 비슷할 텐데 이상하다. 병기형 안드로이드 부대의 진면목은 지휘관의 능력에 크게 좌지우지된다. 그런데 그 지휘관이 보이지 않았다.
‘셰인 녀석, 어디로 내뺀 거지?’
하늘을 까맣게 메운 수송기들이 발사관을 열었다.
“그만둬, 아브라함!”
어디선가 고래고래 외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스마트 더스트에 편승하고 있던 아브라함은 A 연구동 입구 쪽을 돋보기처럼 확대에서 들여다보았다. 잔뜩 흥분한 델타 사이에 서 있는 드레이크 앤더슨이 보였다. 그는 건물 그늘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성난 얼굴로 다시 외쳤다.
“네 녀석은 신이 아니야! 이 미친 짓거리들은 당장 그만둬!”
아브라함은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놀랐다. 아몬드형의 새까만 눈동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그를 따르듯 주변에 엎드린 델타들. 설마…….
“알파?”
반신반의하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브라함은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낙원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연구동 밖으로 나온 웁실론들은 곳곳에 떠 있는 아브라함의 얼굴을 한 홀로그램들을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웁실론 무리 제일 앞에 서 있던 밧세바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불길한 남자다. 주변을 모두 불행하게 만들 것 같은, 검은 기운으로 그득한 사내.
─ 난 새로운 인류다. 신이었던 그대는 지렁이처럼 지상에서 꿈틀대고 인간이었던 나는 육체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이제 나는 그대를 내려다보고 그대는 나를 올려다본다. 기구한 운명 따위로 설명할 것이 아니지. 난 스스로 올라섰고, 그대는 스스로 추락을 택했으니까.
신나게 웃던 아브라함은 정색한 얼굴로 눈썹을 비스듬히 추켜세웠다. 그는 지구본처럼 동그란 홀로그램 형태로 지상에 내려오더니 드레이크와 마주하며 조롱 어린 표정을 지었다.
─ 신들도 별거 없더군.
하늘에 떠 있던 수송기에서 은색 안드로이드들이 출격하며 허공에 몸을 말았다.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지상에 착지한 그들은 달려오며 초록색 눈깔을 ‘삐삐’ 경보음과 함께 빛내기 시작했다.
─ 본기는 5초 후에 자폭합니다…….
─ 자폭을 실행합니다.
쾅!
콰쾅!
다들 귀를 막았다. 파도처럼 연이어 달려오는 안드로이드들이 폭발할 때마다 델타들이 조각조각 찢기며 피를 쏟았다. 드레이크의 옆에 있던 델타들은 겁먹은 듯 끽끽대며 머리를 처박았다. 옥상에서 총을 겨누던 나츠도 당황한 채 서 있었다.
그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밤바람처럼 흩어졌다. 쾌감과 흥분으로 번쩍이던 회로가 잠시 우뚝 멈췄다. 아브라함은 우왕좌왕하며 사고 회로를 다시 가동시켰다.
‘뭐지?’
그의 본체인 뇌 회로가 있는 큐브 홀에 긴장이 어렸다. 자폭 명령을 내린 안드로이드들이 일제히 멈춘 채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하늘에 뜬 수송기들은 발사관을 접고 대기 상태였다.
‘방금 무슨 일이…….’
자신도 모르게 정지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럴 생각이 전혀 아니었는데 불가항력으로 모든 것을 멈췄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큐브 홀 허공에 사람의 형체가 안개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앉은 자세로 등장한 케이가 무릎에 댄 팔에 턱을 괴며 생긋 웃고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친 아브라함의 뇌 회로가 충격을 받은 채 번개처럼 번쩍이며 요동쳤다.
‘낙원의 설계자? 저놈이 여긴 어떻게…….’
그가 요물처럼 섬뜩하고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조각 같은 입술이 천진난만한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 대니얼 아브라함.”
대체 큐브 홀 내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잠깐, 저 모습은 실체가 아니다.
문득 스타시티 창립 파티에서 후계자였던 05번이 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알렉스의 뇌파에만 작용했던 환각 매체. 그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내 뇌파에 개입을 했다고?’
케이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듯 아무 말도 없었다. 아브라함을 빤히 쳐다보던 그의 눈가에 달콤한 눈웃음이 번졌다.
“이번에 네가 개발한 뇌파 인식 안드로이드의 코어를 해독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한 시간. 사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뇌를 융합한 평의원들의 의식체를 왓슨 3세의 새로운 코어로 만드는 데에는 과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아브라함은 당황한 채 할 말을 잃었다.
‘설마 평의원들의 의식체를…… 바이러스로 심어 놨다는 건가? 그 단시간에 그들을 왓슨 3세의 코어로 만들었다고?’
큐브 홀 전체에 빛이 번쩍이며 충격파가 진동을 했다. 케이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혀를 찼다.
“아브라함, 네가 간과하고 있는 게 뭔지 알려 줄까? 넌 인간이 아니야. 오히려 거대한 인공지능에 가깝지. 네 뇌는 전산화된 빛의 기호들로 움직이고 있어. 그게 왓슨 3세와 뭐가 다르지? 위즈덤에서 만든 안드로이드들처럼 너 역시도 명령어를 받으면 따를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에 불과해.”
‘마, 말도 안 돼!’
“말도 나오지 않지? 왜냐면 내가 널 지금 뮤트 상태로 지정해 놨거든. 회로가 번쩍이고 난리치는 걸 보니, 충격이 꽤 큰가 보군.”
케이는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큐브 홀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바로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눈초리에서 서늘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헤집는 건 내 특기지. 이제부터 네게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공포를 선사하려고 해. 네가 남들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나도 네 영혼을…… 아주 잘게 도륙 내 볼 생각이거든.”
나긋하게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흐르는 물처럼 의식 곳곳에 스며들었다.
‘말도 안 돼, 이건 악몽이야!’
물방울이 수면 위로 ‘똑’ 하고 떨어진다. 범람한 채 광활하게 펼쳐져 있던 그의 호수가 우묵한 바닥을 드러냈다.
그득하던 그의 의식이 물길을 따라 어디론가 끌려갔다. 가뭄처럼 갈라진 토양 사이로 흐르던 물길마저 마르자 호수 밑바닥에는 죽은 잡초만이 무성하게 남았다.
그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이 밀려왔다.
‘안 돼!’
아브라함은 고함치며 절규했다.
‘안 돼애애! 그만둬!’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가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비눗방울처럼 부풀던 마지막 물방울이 ‘톡’ 하고 터졌다.
위즈덤의 수송기들이 황금의 바벨탑을 향해 화살처럼 모여들었다. 떼 지어 날아오던 그들은 날개 밑에 위치한 발사관을 열었다. 각각 여섯 기의 안드로이드를 실은 수송 에어쉽들은 그들을 지면에 우르르 떨어뜨린 뒤 우회해 건너편 하늘로 사라졌다.
지상을 가득 메운 안드로이드들은 착지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위즈덤 본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쾅!
본사 내에서 함께 움직이던 요한과 사샤는 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굳은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서둘러야 돼.”
마침 두 사람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사샤는 검은 대리석 바닥 위를 뛰었다. 요한은 지팡이를 짚으며 절뚝절뚝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지하 2층은 위즈덤의 연구소와 실험실이 위치한 곳이었다. 아브라함 회장이 이곳에 있으니 분명 가까이 두는 연구원들도 스타시티에서 위즈덤으로 소속을 옮기고 따라왔을 거란 게 요한의 추측이었다.
회색 천장에 단조롭게 박혀 있는 동그란 조명들.
오페라 하우스처럼 화려하던 본사 입구의 외관과 달리 이곳은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안드로이드 비서관들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복도 끝에는 작은 연구실 하나가 숨어 있었다. 감옥처럼 네모난 철문으로 이루어진 연구실 문은 비밀스러운 느낌을 선사했다.
“스마트 더스트가 아니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거야, 이런 곳에 위치한 비밀 연구실 따위.”
숨 가쁘게 쫓아온 요한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직사각형 쇠문을 쳐다보았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위즈덤 내에 이런 구식 수동 문이라니, 홀로 동떨어진 무인도 같은 공간이었다.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던 사샤는 주먹을 쥐더니 문을 ‘쾅쾅!’ 두들겼다. 요한은 놀란 표정으로 “쉬이!” 하며 사샤의 팔을 붙잡았다. 뒤를 흘끗거리며 경계하는 그에게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문틈으로 눈알을 굴리며 빼꼼 밖을 내다보았다. 듬성듬성 빠진 머리칼 사이로 휑한 정수리가 보였다. 끝이 헤져서 낡은 소매가 문틈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 사이로 나온 앙상한 손가락들이 거미처럼 기어다니며 벽을 짚었다.
수척한 몰골의 남자를 본 요한은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04번?”
검게 그늘진 눈 밑 지방이 불룩 튀어나온 남자는 오랜만에 듣는 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요한을 본 남자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채 파동을 그렸다. 수술로 생김새가 많이 달라졌지만 04번은 요한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요한의 눈시울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살아 있었구나.’
약한 몸이라 걸핏하면 폐기당할 위기에 처했던 아이였다. 영특한 두뇌 덕분에 아브라함 회장의 주목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유전적 결함 때문에 바로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어릴 때도 체구가 작았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04번의 키는 그의 어깨에 겨우 닿는 정도였다.
요한은 지팡이를 문틈 사이에 끼우며 안으로 들어섰다. 04번은 주춤거리며 벽에 등을 붙인 채 두 사람에게 길을 내줬다.
따로 통로라고 할 것도 없는 연구실 내부는 두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왼쪽 실험실에는 기다란 테이블 위에 시험관들과 삼각 플라스크가 즐비해 있었다. 유리 벽으로 나뉜 오른쪽 방에는 간이용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하나는 이곳을 지키는 04번의 것일 테고, 또 하나는…….
“06번의 것이니?”
요한의 질문에 04번은 홀쭉한 뺨을 패며 웃었다. 그는 실험대로 가더니 조르르 세워진 시험관들 중 하나를 뽑아서 내밀었다.
“이걸 찾으러 오신 거죠?”
긴 시험관 속에 담긴 투명한 액체는 중화제였다. 선뜻 받지 못하고 서 있는 요한 대신 사샤가 냉큼 시험관을 가로챘다. 그녀는 손아귀에 시험관을 꼭 쥐고선 요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곁눈질로 출입구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얼른 나가자’고 속삭였다.
콰쾅!
밖에서 다시 폭발음이 들려왔다. 삼각 플라스크들이 충격에 잘랑잘랑 흔들렸다. 04번은 퀭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리와 함께 가자.”
문 앞에 선 요한이 돌아서며 말했다. 04번의 푸른 눈동자가 동요로 크게 일렁였다. 오랜 시간 햇빛을 보지 못한 그의 등은 곡선으로 굽어 있었다.
요한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04번의 얼굴은 깊은 주름과 머리숱이 없는 탓에 더 늙어 보였다. 어느 누가 그를 이십 대 청년으로 보겠는가? 하얗게 센 머리칼이 저렇게 몇 가닥밖에 없는 그를 어느 누가…….
괴로운 낯빛으로 갈등하던 04번은 힘없이 웃으며 실험대를 짚은 손에 몸을 기댔다.
“두 분은 가세요. 전 이 친구가 오면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그가 곁눈질로 유리 벽 너머의 빈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04번과 06번은 어려서부터 동고동락하며 서로를 한 몸처럼 여기던 사이였다. 죽을 때 같이 죽더라도 혼자만 빠져나갈 수는 없겠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사샤는 주머니에 넣은 중화제를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아까부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06번이라면 낙원의 관리자인 알렉스를 뜻하는 거지? 그는 이제 에덴 타워 꼭대기에서 생활하잖아. 게다가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위즈덤의 대표고 아브라함 회장의 후계자인데 저렇게 구석진 감옥 같은 곳에서 지낸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사샤의 말에 요한의 눈빛도 의아한 파동을 그렸다. 두 사람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로비인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띵’ 하고 열렸다. 두 사람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란히 내렸다. 정면을 본 사샤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낯빛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안드로이드 병사들이 개미 군단처럼 로비를 꽉 채우고 있었다. 노랗게 번뜩이는 눈알들이 일제히 데룩데룩 굴러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소속된 편대가 없고 지휘관도 없는 안드로이드들은 적을 보면 자폭하도록 설정된 상태였다.
“도망쳐, 사샤!”
요한이 그녀의 앞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그는 허둥대며 총을 뽑았다. 절뚝대는 그의 주머니 안쪽에서 주사기 한 대가 툭 떨어졌다.
“뭐하고 있어? 빨리 가!”
부릅뜬 요한의 눈이 충혈된 채 그녀에게 소리쳤다. 사샤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를 주웠다. 요한은 그녀가 손에 쥔 주사기를 보더니 애써 웃으며 가라고 손짓했다.
“버리고 가. 어차피 쓸모없는 거니까.”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진 그는 진즉부터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혈중 스마트 더스트 농도가 위험 수치에 다다른 것이다.
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요한의 눈에 비친 그녀의 미소가 끔찍해 보이길 바랐다. 불구덩이 속을 사는 게 어떤 건지 그가 똑똑히 봤으면 했다. 자신은 두 다리를 잃었는데, 고작 절름발이 신세로 불우한 척 절뚝거리는 제 놈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깨우치길 원했다. 수도 없이 많은 밤을 다짐했다. 다시 만나면 반드시 이 손으로 복수해 주겠다고.
피에 젖은 엘 카인을 보고 넋을 잃었던 제인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두 팔 두 다리 모두 잘려 나간 엘 카인과 몸을 섞던 웁실론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들의 이해할 수 없던 행동들이 입가의 경련으로 와 닿았다. 세상에서 제일 죽이고 싶은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고, 때로는 사랑을 느낀다. 인간은 모순의 동물이다.
“사샤?”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가 그의 팔뚝에 주사기를 꾹 찔러 넣고 있었다. 사샤는 빈 주사기를 바닥에 내던지며 공허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너 따위가 날 어떻게 지킨다고.”
“사샤…….”
목이 멘 요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너답지 않은 영웅 놀이는 그만둬.”
경멸 어린 표정으로 말한 사샤는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로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몸을 꼿꼿하게 편 그녀는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요한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크리스털 가지 등들이 휘청휘청 흔들리고 있었다. 건물 밖에서 불어오는 파풍과 진동 때문이다.
‘진동?’
요한은 미간을 좁혔다. 출입구 쪽 위에 통유리로 된 벽이 덜컹거리며 위태롭게 바람을 막아내고 있었다. 닥쳐올 무언가에 대비하는 것처럼.
사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의 영웅이 달려오기라도 한 것일까?
와장창!
강풍에 무너진 유리창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비처럼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방사형 샹들리에가 충격으로 깨지며 요란한 마찰음을 이뤘다. 바닥에 ‘쿵!’ 하고 내려앉은 샹들리에 밑에는 안드로이드 수십 기가 깔린 채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사샤!”
요한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귀를 막고 있던 사샤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그들 앞으로 안드로이드 하나가 초록색 눈을 ‘삐빅’거리며 등장했다.
─ 본기는 3초 후에 자폭합니다. 2초 후에 자폭합니다, 1초 후에 자폭…….
“피해, 사샤!”
사샤를 덥석 밀친 요한은 ‘삐이이’ 하며 눈을 붉게 번뜩이는 안드로이드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설픈 영웅 놀이가 아니다. 이제 와서 예전 일을 합리화시킬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냥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십오 년 전에도 그랬다. 도와준 친구들을 배신한다는 죄책감보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담의 말에 꼼짝없이 따랐지만 계속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쥐새끼처럼.
그런데 로비에서 사샤와 만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노를 억누른 채 독 장미처럼 웃던 그녀를 보면서 그는 십오 년 전, 피눈물을 흘리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를 구해 준 것은 사샤였다. 그렇다면 지금 절망 속에 갇힌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건가?
“요한!”
입을 틀어막은 사샤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서 일어난 먼지바람에 그녀는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콰쾅!
거대한 폭발과 함께 뒤로 쓰러진 사샤는 혼미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켰다. 귀에서 ‘삐이이’ 하고 이명이 들렸다.
불가시 모드를 해제한 아크레인 한 기가 안드로이드를 밀어 버린 채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아크레인 밑에 깔린 안드로이드는 부서진 채 턱만 남은 입구멍에서 연기를 ‘푸슉’ 뿜어냈다. 은색 에어쉽이 날개처럼 문을 열었다.
유림이 안쪽에서 문을 걷어차며 등장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사샤를 보더니 생긋 웃었다. 그 뒤로 따라 나온 케이가 고요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까만 얼룩이 덕지덕지한 사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담…….”
케이는 사샤의 앞에 다가와 몸을 숙였다. 그는 주먹을 쥔 채 펴지 못하는 그녀의 손가락들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하나씩 부드럽게 손가락을 펴주는 그를 보며 사샤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줄곧 목숨처럼 손안에 부서져라 쥐고 있던 중화제는 무사히 그의 손에 건네졌다.
“고생했어, 사샤.”
나직한 속삭임에 사샤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윽!”
아크레인에 깔린 채 쓰러진 안드로이드들 사이에서 요한이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오른쪽 눈두덩과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한을 죽일 듯 노려보던 사샤는 성큼성큼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워 동아줄처럼 쑥 내밀었다.
“잡아.”
“고맙다.”
케이를 본 요한은 다친 어깨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케이는 인상을 쓰고 있는 사샤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먼저 탈출하도록 해.”
“하지만…….”
사샤가 당황한 얼굴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요한이 그녀의 팔을 잡고 에어쉽 쪽으로 이끌었다.
“가자, 우리가 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 그래도…… 아담!”
사샤의 외침에 케이가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했다.
“잘 가, 사샤.”
가슴이 시소처럼 덜컹 내려앉았다. 사샤는 주춤거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뒤를 흘끔거리며 아크레인에 올라탄 그녀는 손바닥으로 창을 짚은 채 밖을 내다보았다. 무너진 벽 사이로 날아오르는 아크레인을 향해 유림이 짧게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왼쪽 가슴에 올린 오른손이 불길한 예감으로 떨렸다.
‘아담…….’
속눈썹이 눈을 찌르듯 따가웠다. 물기로 흐려진 시야를 손등으로 지운 사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온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멀어지는 황금 탑에 애써 등을 돌렸다.
두 다리를 잃고 난 후 그를 향해 다가가던 걸음도 멈췄다. 늘 일정한 궤도를 맴돌며 바라볼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다. 달처럼 위성이 되어 연모했지만 그는 결국 다른 별에 사로잡힌 행성이었기에.
이것은 결코 마지막 이별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했다. 보이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 그게 그를 공전하는 그녀의 역할이니까.
‘그렇지, 아담?’
위성은 행성의 중력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사라지지 말아 줘, 늘 그 자리에, 그 궤도 위에 있어 줘.
케이는 유림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의 성녀님께서는 대미를 장식할 준비가 되셨나?”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다는데?”
그가 차분한 숨결을 귓불에 가져왔다.
“유림은 검을 들고 달리기만 하면 돼요. 길은 내가 열어 줄 테니.”
유림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끌어안은 그의 온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케이의 눈두덩 주변에는 울긋불긋한 혈관이 도드라져 있었다. 유림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옆에 서 있는 그의 전신에서 숨 막히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짓눌릴 것 같은, 공기가 팽팽하게 압축되는 느낌.
그의 눈가에 모인 혈관은 터질 듯 팽창한 끝에 급격히 진정되었다. 비스듬히 내려뜬 눈동자에 쏠린 혈류는 그녀의 것보다 훨씬 짙고 어두웠다. 평소 은근하고 부드럽게 포장하고 있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외모 이면에 숨어 있던 그의 잔혹한 본성이 이미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는 얕은 호흡을 내뱉었다. 가느다란 입김을 따라 주변에 한기가 내려앉았다. 으슬으슬해진 온도에 공기 알갱이가 서리꽃처럼 얼어붙었다.
긴 세월 억누르고 감춰 왔던 그의 또 다른 얼굴은 낯설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붉은 눈으로 잔인하게 웃는 그의 위험한 면모 또한 그녀를 설레게 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아름답다 하여 모두 선량한 천사는 아니다. 상대를 녹일 듯 눈부시게 웃는 얼굴 뒷면엔 항상 무자비하고 변덕스러운 얼굴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대부터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숭배의 대상이자 공포의 존재로 군림해 온 것이다.
케이는 우르르 몰려오는 안드로이드들의 중심으로 도약해서 가볍게 착지했다. 그가 원을 그리며 팔을 휘두르자 안드로이드들 목에서 ‘뻑!’ 소리가 났다. 목이 꺾인 안드로이드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의 손에는 회로까지 뽑혀 수액을 뚝뚝 떨어뜨리는 안드로이드의 목이 잡혀 있었다. 깔끔하게 잘린 모가지는 번개 같은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더니 멀리 위치한 유리문을 ‘쨍그랑!’ 하고 뚫고 사라졌다.
“Σας διατάζω τώρα.” 그대들에게 명한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나직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주변을 짓눌렀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공기 입자들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면서 ‘드드드!’ 하고 지면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초록 눈을 끔뻑거리던 수십 대의 안드로이드들이 ‘어라?’ 하며 일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한 손을 가볍게 들었다.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살기와 함께 다시 숨을 한 입 들이마셨다.
“Αέρας, χτύπησε το έδαφος.”바람은 지면을 흔들어라.
광풍이 몰아닥쳤다. 바닥이 지진 난 듯 흔들리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정지한 채 서 있던 안드로이드들의 동공이 휘둥그레 커지며 얼어붙었다.
끼이잉.
공기 입자가 부닥치는 소리가 귓전을 찢어발기고, 몸을 짓누르는 중력이 땅 위의 모든 것들을 내리눌렀다. 압력을 못 이기고 주저앉은 안드로이드들은 입을 뻐끔거리며 기괴한 소음을 내질렀다. 끼긱대던 그들은 떼 지어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푹 꺼진 바닥과 함께 지하로 추락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림은 검을 들었다. 잔해 위에 서 있던 케이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유림은 잠시 허공을 보며 일전에 엘 카인을 향해 아크레인을 날려 버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중력을 무시하는 능력.
케이의 투명한 눈동자는 공기 입자처럼 깨끗하고 소리 없이 상대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다. 물 흐르듯 유연한 그의 움직임은 다정하지만 때로는 광풍처럼 매섭고 잔인하다.
그는 바람이었다.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바람.
유림의 입가에 소소한 웃음이 어렸다. 그녀는 바닥에 생긴 커다란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뒤에서 따뜻한 서풍이 안아 주는 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하얀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 반경 15미터의 검은 홀은 두 사람을 흡수하듯 빨아들이자마자 ‘콰쾅!’ 하며 폭발음을 일으켰다.
지하에 떨어진 안드로이드들은 고장 난 나침반처럼 사방을 돌아다니며 멋대로 자폭하기 시작했다.
─ 그만해! 그만두지 못해? 내 명을 들으란 말이야!
큐브 홀 내로 들어와 벽면 회로에 ‘쾅!’ 부딪치며 폭발을 일으키는 안드로이드의 모습에 아브라함은 전기를 계속 번쩍였다. 그는 노여워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자폭하는 안드로이드들은 이미 죄다 코어가 망가져서 폭주 상태였다.
“이 홀 전체가 아브라함 회장이란 말이야?”
유림은 돔 모형으로 된 천장 위에 서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덴 타워에 있는 왓슨 3세의 본체가 떠올랐다. 하얀 방에 무수히 떠 있던 홀로그램 창들. 거대한 슈퍼컴퓨터 왓슨과 아주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게 인간이라니.’
아니, 스스로 여전히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니! 그녀는 서늘한 눈초리로 검을 들었다. 이 사태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은 슈퍼 인공지능의 반란이다.
─ 이러지 마,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손톱으로 벽을 긁는 듯한 소리가 ‘끼기기긱!’ 하고 울려 퍼졌다. 유리로 된 거대한 회로판을 가른 검에서 마찰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큐브 홀 천장까지 닿아 있던 아브라함 회장의 뇌 회로판 중 하나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지는 소리였다.
─ 안 돼애애애!
까마득한 암흑 속에서 피가 튀었다. 제 몸을 내려다본 아브라함은 공포에 차서 비명을 내질렀다.
“왜 그래, 자기?”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고개를 든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검은색 레이스 슬립을 입은 여자는 쇄골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내며 요염하게 웃었다.
“에밀리?”
고개를 홱 돌린 아브라함의 동공이 멍하니 커졌다. 뉴욕의 마천루가 보이는 유리창에 알몸으로 주저앉은 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에밀리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그의 가랑이 사이를 핥았다. 유리창으로 그 광경을 보던 아브라함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네가 여긴 어떻게…….”
“뭘 어떻게야? 오늘 우리 첫날밤이잖아. 자기의 처음은 나라고 한 거 잊었어?”
“넌 죽었어. 분명 그날 내 손으로 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죽긴 왜 죽어, 이렇게 자기랑 있는데.”
다시 고개를 든 에밀리는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본 아브라함의 눈이 경악하며 커졌다. 그녀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점을 물어뜯어 질겅질겅 씹는 그녀의 눈초리에 독기가 서렸다.
황급히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본 아브라함은 “끄아아악!” 하고 소리치며 에밀리의 머리를 밀어냈다. 축 늘어진 고환 위, 그녀가 애무하던 성기가 어금니에 물어뜯긴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에밀리는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달려들었다. 그의 어깨를 넘어뜨린 그녀는 다시 날카로운 이로 음낭을 거세게 물어뜯었다.
“아아악!”
아브라함은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 비명을 질렀다. 가랑이를 부여잡은 그는 핏물이 엉덩이 사이를 흠뻑 적실 때까지 절규했다. 고통에 울부짖던 그는 눈깔을 뒤집고 몸을 펄떡거렸다. 맑은 대리석 바닥에는 에밀리가 ‘퉤’ 하고 뱉어 낸 살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잇자국으로 움푹 팬 고환이 완전히 찢겨 나갈 때까지 그녀는 끔찍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비명 소리도 목이 쉴 때까지 끊일 줄 몰랐다.
2023년 어느 날 밤, 대니얼 아브라함은 에밀리 로즈를 살해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날 밤은 달랐다. 아브라함은 반대로 그녀가 그의 에로스73)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리비도는 평소 수면 밑에서 잠든 채 고요했다. 그것을 깨우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했고, 그는 그것을 ‘심판’이라 칭하며 정의롭게 여겼다.
아브라함은 본인이 내린 첫 번째 심판이 레이첼의 연인이었던 조셉 에반스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심판을 내린 대상은 모친인 레이첼이었다.
“괜찮니, 대니얼?”
끊어질 듯 연결되는 시야 속에서 빛이 쏟아졌다. 아브라함은 흐릿한 의식을 복구하고자 이를 악물었다. 한 점으로 모인 빛줄기 속에 나타난 여인의 정체는 레이첼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채 다정하게 웃었다. 언젠가 그가 수학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며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온 날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어, 어머니…….’
아브라함은 신음하듯 그녀를 불렀다.
큐브 홀 내 회로판들을 죄다 베어 내던 유림은 손안에서 검을 휘리릭 돌리며 돌아섰다. ‘아브라함 회장의 머릿속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유림이 궁금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케이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케이의 어깨에 기댄 유림은 뭔가를 발견하고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퍼즐 조각처럼 떨어져 나온 회로판 하나가 아직 작동하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작은 유리판 위에선 빛의 화살들이 올챙이처럼 구불거리며 사방으로 부딪쳤다.
“날 두고 가지 말렴, 대니얼.”
레이첼이 슬픈 눈으로 애원했다. 그녀의 동공이 녹색으로 번쩍이며 자폭 카운트를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입을 쩍 벌렸다. 두꺼비처럼 벌린 입 안쪽에서 ‘삑삑’거리며 경고음이 흘러나왔다. 동공의 깜빡임이 멈췄다. 레이첼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다가 마지막 남은 회로판을 향해 달려갔다.
“대니얼! 내 아들! 사랑한다!”
그녀는 양팔을 활짝 벌린 채 그를 향해 온몸을 부딪쳤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아브라함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에서 폭발한 레이첼의 몸은 수액과 함께 여기저기 음식물 찌꺼기처럼 튀었다.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사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판단되질 않았다. 상실의 고통도, 두려움도, 슬픔도 아닌 백색 감정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부식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아버지.”
공허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남은 빛의 회로 한 줄기를 버팀목 삼아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알렉스가 노곤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빗뜨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손바닥만 한 크기로 깨져 나온 회로판이 몇 개 안 남은 빛의 회로들을 반짝이며 남아 있었다.
─ 06번이냐?
알렉스의 두 손에는 어항처럼 큰 표본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일반 뇌보다 크기가 약 1.8배 정도 크게 부푼 회색 점안질의 뇌가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아브라함은 고장 난 형광등처럼 발광하며 흥분했다.
─ 그래, 그것만 있으면 돼! 그것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알렉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막만 한 회로판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일그러진 조소가 어렸다. 그는 천천히 양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표본병에서 ‘와작’ 소리가 나더니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이 놀라서 소리쳤다.
─ 무슨 짓을…….
‘쨍그랑!’ 하고 깨진 표본병 사이로 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알렉스는 유리 조각 사이로 받아 든 아브라함의 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콰직!’ 하고 두부처럼 으깨진 뇌가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렸다. 알렉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누런 치아를 드러내며 웃자 사이사이로 썩어서 까맣게 부식된 이들이 보였다. 아브라함이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설마…… 05번인 거냐?
알렉스는 침을 삼키며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낄낄거리며 웃던 그는 바닥에 쏟아진 뇌를 미친 듯이 밟았다. 으깨진 뇌가 신발의 낡은 굽창에 지렁이처럼 들러붙었다. 밟고 또 밟아도 물컹거리는 뇌수는 여전히 미끄덩거리며 주변에 떠다니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회로판이 점차 빛을 잃고 뿌옇게 깜빡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미쳐 날뛰며 그의 뇌를 짓밟는 알렉스를 바라볼 뿐. 마지막 남은 빛의 회로는 느릿하게 반짝이다가 끊어질 듯한 희미한 선을 그렸다.
─ 어리석은 녀석…….
한숨처럼 토한 음성이 졸린 듯 버벅거렸다. 역시 저 녀석은 진작 폐기했어야 했다. 은혜도 모르고 등에 칼을 꽂다니.
마지막으로 감기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 꺼진 회로판 뒤에 숨어 있는 04번의 모습이었다. 눈 주위가 퀭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수많은 클론들 중 쓸모 있었던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성에 차는 녀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똑같은 유전자인데 어째서 자신만큼 뛰어나지 못한 것인지, 왜 하나같이 저렇게 감정적인 녀석들뿐인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 인류는 틀렸어, 모두 틀렸어, 가망 없는 족속들 같으니! 나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최대 비극으로…… 남을…… 것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던 목소리가 점차 웅얼거리며 사라졌다. 부릅뜬 눈으로 발을 구르던 알렉스는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버지! 아버지! 더 후회하셔야지요! 더 말해 보세요! 아버지!” 원망 어린 목소리는 목이 쉴 때까지 증오에 찬 대상을 부르짖었다.
건물 전체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가 지하에서부터 솟구쳤다. 유림과 케이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천장으로 올라가려던 두 사람은 차단벽이 생기는 걸 보고 눈이 커졌다.
큐브 홀 입구에는 04번이 서 있었다. 그는 이미 마지막 불빛마저 꺼진 회로관을 주먹으로 부수고 있는 05번을 바라보며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 끝났어, 모두 다…… 비로소 우리는 자유의 몸이야.”
그는 씁쓸한 눈빛으로 손 안에 쥔 원격 조종 버튼을 꾹 눌렀다. 그의 신호에 지하에 대기 중이던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이 눈을 번쩍 떴다.
“저 녀석이 안드로이드의 개발자였군.”
케이는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저 녀석은 아브라함 회장을 뛰어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못 알아본 아브라함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그때 진동으로 크게 출렁이는 바닥을 느낀 케이는 유림을 확 끌어안았다. 바닥에 떨어진 크리스털 조각들이 쨍그랑거리며 튀어 올랐다. 거울 조각처럼 얼굴을 비추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유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속삭였다. 꼭 안아 주는 그의 품속에서 유림은 안도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눈을 감았다.
* * *
─ 대령님, 스마트 더스트와의 연결이 완료되었습니다.
헤벨의 조종실, 아벨이 푸른 지구본 형태로 나타나 빙글빙글 돌며 보고했다. 그 앞에 뜬 상태 막대기 창은 녹색으로 끝까지 차오르더니 ‘100% 완료’ 메시지를 띄웠다.
럼스펠드 대위가 스파이였다는 게 밝혀지자마자 호크는 아벨의 시스템을 재가동시켰다. 그리고 왓슨 3세를 통해 스마트 더스트와 동기화 작업을 시작했다.
─ 주민들은 모두 격납고로 이동 조치시켰습니다. 부상자 0명,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몇 차례 잠수정을 통해 온 주민들을 모두 수용한 뒤, 헤벨은 로스트 헤븐의 해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수면 위로 긴급 부상했다. 낙원 곳곳에서 구출 작업을 한 아크레인과 에어쉽들을 귀함시키기 위해서였다.
─ 모든 기체 귀함 완료. 경미한 손상 외에 큰 문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호크 대령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긴급 부상 종료. 수심 70까지 긴급 잠항한다.”
─ Aye, sir.
수심을 표시하는 숫자를 빤히 보던 호크는 조종실 전면 화면에 파란색으로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왓슨 3세로부터 공격 요청】
공격 대상: 위즈덤 본사 지하 4F 안드로이드 생산 시설
공격 수단: 우라노스2 순항미사일
폭격 지점 좌표 수정 완료.
공격을 승인하시겠습니까?
조종실 내 잠시 침묵이 가라앉았다. 조종석에 앉아 기다리는 장교들은 곁눈질로 호크의 눈치를 살폈다.
주민들은 무사히 구출했고, 기체들도 모두 귀함했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밀러 함장과 함께 갔던 전 기동수색대 대원들이었다. 유림, 커크, 랜스가 아직 낙원 내에 있었다. 그중 밀러에게는 즉시 귀함할 것을 전했지만 문제는 통신이 두절된 유림과 케이 쪽이었다.
“공격 요청이라…….”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호크는 손으로 거칠거칠한 뺨을 쓸어내렸다. 함장석 팔걸이에 홀로그램으로 붉은색 승인 버튼이 떠올라 있었다. 지문 형식으로 반짝이는 승인 버튼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주저하며 일렁였다.
위즈덤의 안드로이드 생산 시설은 폭격하는 게 마땅하다. 왓슨 3세의 요청은 곧 낙원의 설계자의 뜻이었다.
망설이던 그의 손이 승인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 승인 완료. 미사일 발사관을 선택해 주십시오.
“3번, 4번으로 하지.”
─ 3번 발사관의 미사일 준비 완료입니다.
“해치 개방.”
─ 3번 해치를 개방합니다.
“스텔스 모드는 탑재했나?
─ 스텔스 모드가 탑재되어 있습니다. 결과 시뮬레이션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목표 지점 반경 500m가량 완전 괴멸이 예상됩니다.
화면을 바라보던 호크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폭격 즉시 미사일 낙하 지점으로부터 반경 500m 지점은 초토화. 즉, 기억의 도시 자체가 완전 소멸된다는 뜻이다.
눈꺼풀을 연 호크는 입술 새로 나직이 명했다.
“발포하도록.”
─ 발포 명령 확인,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동그란 해치가 수중에서 기포를 생성하며 드르르 열렸다. 코가 뾰족한 미사일이 발사관에 실린 채 빙글빙글 돌아가며 모습을 드러내자 아벨이 ‘3, 2, 1…….’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 카운트다운 완료, 3번 미사일 발사.
해치 내 기압에 의해 ‘펑’ 하고 발사된 미사일이 수면을 박차고 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컨테이너를 해체합니다.
미사일을 감싸고 있던 외부 컨테이너가 쪼개지며 해체되자,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꼬리에서 불꽃이 점화되며 로켓처럼 연기를 뿜어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오른 미사일은 섬광을 그리며 상공으로 사라졌다.
“4번 해치 개방.”
─ 4번 해치를 개방합니다.
“4번 미사일 발사.”
─ 4번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연이어 발사된 두 번째 미사일이 수면 밑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제트엔진 소음을 일으키며 등장한 우라노스274)는 컨테이너 해체와 동시에 ‘콰앙!’ 소리와 함께 혜성처럼 뻗어나갔다.
─ 발포 완료. 폭격 지점까지 예상 시간 5분 29초.
조종실의 선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같은 시각, 폐쇄 도시 상공을 떠나던 에어쉽들은 황급히 우회해 반대 방향으로 부리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밀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등골이 서늘했다.
하늘 저편에서 긴 빛 꼬리 하나가 유성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회색 연기를 몰고 추락하는 비행 물체가 보이자 밀러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는 황급히 돌아서며 에어쉽 내 웁실론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손잡이 잡고 기체 흔들림에 대비하십시오!”
밧세바와 웁실론들은 안전벨트를 확인한 뒤 천장에서 내려온 손잡이를 잡았다. 당황한 그들이 고개를 들고 무슨 일이냐며 밀러를 찾았다.
“하, 함장?”
기체 문 앞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미사일이다, 헤벨에 탑재된 순항미사일, 우라노스2가 틀림없다. 대체 누가 발포 명령을…… 설마 호크 대령인가? 유림과 케이는? 설마 아직 기억의 도시에 있는 건가?’
쿠과쾅! 콰쾅!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첫 번째 미사일이 황금의 바벨탑 옆구리를 파고들 듯 꿰뚫었다. 천둥소리보다도 큰 폭발음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시커먼 연기와 분진 구름 사이로 빛의 기둥이 창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이어서 두 번째 미사일이 가파른 각도의 포물선을 그리며 내리꽂혔다.
슈우우웅! 콰쾅!
번쩍이는 섬광이 반원을 그리며 주위를 휩쓸었다. 섬광 속에서 재처럼 까만 윤곽을 내보인 바벨탑은 녹아내리듯 붕괴했다. 형체를 잃고 스러져 가는 모습 속에서 붉은 화염이 ‘쾅!’ 하고 폭발을 일으켰다. 가스 폭발처럼 연쇄적으로 콰르릉거리던 불꽃은 거대한 버섯구름을 형성했다.
지상에 버려진 에어쉽들은 덜컹거리며 뒤집혔다. 근방 가로수들이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기억의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바람의 도시 빌라들마저 지면에서 드드득거리며 흔들림을 느꼈다.
사샤는 화염에 휩싸인 바벨탑을 보며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그녀는 에어쉽 창문을 짚으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저앉았다.
“아, 아담…….”
바닥을 짚은 그녀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기체 문 앞에 다다랐다. 수동으로 문짝을 열려는 그녀의 팔을 요한이 덥석 잡아 세웠다.
“사샤! 위험해!”
“이거 놔! 저기 아담이…… 이브가 있단 말이야!”
“진정해, 사샤! 문을 열고 어쩌려고?”
“이거 놔! 내가 가서 구해 줘야 돼! 놓으라고! 아담!”
그녀는 오열하며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아아악! 아담!” 하고 몸부림치는 그녀를 요한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만둬, 사샤!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
땅이 울부짖듯 흔들렸다.
쿠르르릉.
황금의 바벨탑을 지탱하던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와르르 붕괴한 탑은 싱크홀처럼 움푹 가라앉은 지면 아래로 ‘콰쾅!’ 추락했다. 검은 구멍만 남긴 채 사라진 건물은 지하에서 내뿜는 연기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벨의 보고】
미사일 폭격으로 파손된 안드로이드 기체 수 4,173기.
목표 대상 완전 궤멸에 성공했습니다.
럼스펠드 대위 작전 중 사망.
정유림 상사, 케이 애덤슨 중사, 작전 수행 중 연락 두절.
로스트 헤븐 구출 작전을 종료합니다.
남태평양전대 사령 본부로 귀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