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19/21)

Chapter 4

정식 명칭은 기억의 도시였지만 낙원의 주민들은 이곳을 황금의 바벨탑이라고 불렀다. 황금의 바벨탑 내에는 카지노와 도박 거리인 고모라, 그리고 안드로이드 매춘부를 만날 수 있는 소돔이 존재한다. 둘 중에서 낙원의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더 많은 쪽은 당연지사 소돔이었다.

쾌락과 유흥의 도시.

열락과 꿈의 도시.

아브라함 회장은 의외로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 제일의 부호가 되었음에도 물질적인 광영에는 관심 없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가 여자에게도 흥미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게이라는 설도 돌았지만 요한은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 회장은 인간의 생존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욕 자체를 멸시하는 타입이다.

기억의 도시는 그가 하등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의 집합체였다. 그럼에도 아브라함 회장은 왜 이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일까? 요한은 그를 이렇게 정의했다.

불멸이라는 단계로 진화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재료로 써 온 이 시대의 연금술사.

현시대가 낳은 천재이자 비극인 아브라함의 두뇌 구조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을지 한번 보고 싶기는 했다.

위즈덤의 본사는 거대한 바벨탑 형태를 한 기억의 도시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상 1층과 2층은 물류센터로 화물 수송기가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실질적으로 3층이 지상의 출입구 역할을 했다.

에어쉽 승강장에서 내리자마자 상공에서 회색 드론 하나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원형의 회전 날개가 무서운 추진력으로 돌진해 오더니 그의 머리 위에서 뚝 정지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드론이 물고 있는 건 두 대의 얇은 주사기였다. 각각의 주사기를 손에 쥔 요한의 머릿속에 케이의 목소리가 번뜩이며 떠올랐다.

─ 낙원 내 대기에 퍼져 있는 스마트 더스트의 입자 농도는 인체에 무해한 수준이지만, 네 몸속에 주입할 스마트 더스트는 액체화된 상태기 때문에 그보다 농도가 250배는 더 짙다고 보면 돼. 액체 상태의 스마트 더스트는 혈관 내에서 산소와 결합하면 할수록 입자 개체가 증식할 거야. 그러니 반드시 여섯 시간 내에 배출 유도제를 투입해야 해. 열두 시간 안에 소변보는 것도 잊지 말고.

한마디로 그는 스마트 더스트를 체내에 담아 위즈덤 내부로 옮기는 배달부 역할이었다. 요한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요한.

냉랭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유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옆에서 말없이 관망하던 밀러의 차디찬 시선도. 날카롭게 쏘아보던 유림의 얼굴 윤곽이 흐물흐물하게 변하면서 사샤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녀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폭발로 잘려 나간 다리를 부여잡은 채.

요한은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오른손에 쥔 스마트 더스트 주입기를 왼 손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피스톤을 꾹 눌렀다. 자동화된 주사기는 알아서 그의 혈관을 찾아 바늘을 꽂아 넣었다. 혈관을 타고 용액이 번지자 손목부터 어깨까지 전신에 알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연맹군 전략국 작전부 남태평양전대 산하 함정 헤벨의 부함장, 요한 제이콥스 대위다. 나는 전략국 작전부 남태평양전대 산하 함정의 부함장…….’

참모 장교인 그는 단 한 번도 전선에 직접 뛰어든 적이 없었다. 항상 사령탑 내에서 군졸들을 지휘하며 안전하게 몸을 사렸을 뿐이다.

이게 바로 전장의 기운이었다. 호흡에 배어나는 공포와 긴장감. 동료들이 느꼈을 사활의 순간을 그는 비로소 경험하고 있었다.

요한은 천천히 감았던 눈꺼풀을 올리고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려워할 겨를 따윈 없었다. 군인에게 있어 임무는 목숨보다 우선이다. 겁내지 말고 함장의 명만 떠올리자. 이 임무만 잘 해결하면 다시 헤벨로 돌아갈 수 있다. 다시금 동료들의 곁, 그 따뜻한 공간으로.

위즈덤의 본사 입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크리스털로 된 정삼각형의 형태였다.

─ 어서 오십시오, 위즈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황금색 방사형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홀 위에서 기계화된 음성이 인사말을 전했다. 문득 스타시티의 아브라함 홀이 생각났다. 웅장하고 화려한 홀, 불멸을 상징하는 듯 신비로운 분위기. 아브라함 회장의 고전적인 취향은 여전했다.

“요한 가르두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뒤로 돌았다.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 알렉스 아브라함이 회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은 채 서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더니 반갑다는 듯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역시 맞군요.”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했다. 왼 가슴 언저리에서 만감이 교차하며 가라앉았다. 그는 무거운 입술을 열며 답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은연중 기대를 했다.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폐기되지 않고 살아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살아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녀석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다.

주인과 개가 아닌 너와 나 동등한 위치에서.

“……06번.”

알렉스의 눈이 흠칫 커졌다. 요한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 녀석이 아니다.’

그가 집사처럼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챙겼던 알렉스 주니어는 저렇게 친절한 미소를 지을 위인이 아니었다. 설령 인공뇌로 개조되었다 해도 저딴 온화한 분위기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요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04번은 잘 지내?”

06번과 04번은 짝꿍처럼 늘 붙어 다녔다. 05번─실제로 요한과 같이 리쩨이 사립학교에 다녔던 알렉스 아브라함─이 실패작이 될 경우를 대비해, 06번과 04번은 차기 알렉스 아브라함이 될 준비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들은 세간의 눈에 들키지 않기 위해 사옥 지하 깊은 곳에 감금된 채 철저하게 격리된 생활을 했다. 때문에 그들은 본인들의 미래에 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브라함 회장은 어차피 폐기될 가능성이 높은 04번과 06번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육당하는 줄도 모르고 언젠가 아버지께 인정받을 날만 기다리던 04번과 06번을 감시하는 역할은 고작 열세 살 남짓이던 요한의 몫이었다.

스타시티를 배신하고 나올 계획을 하면서, 요한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가 뭘까 생각했다.

그는 회장이 배양 중이던 클론들의 인큐베이터와 캡슐을 모두 깨뜨린 뒤 양수를 쏟아 내고 오염 물질을 투입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시던 양수와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로 들려오던 심장 박동 소리는 지금도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하지만 04번과 06번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아직 배양 중이던 시험관 속 세포들과 달리 그들은 이미 완성된 개체였고 하나의 ‘인간’이었다.

“04번은…….”

잠시 혼란스러운 듯 눈을 일렁이던 06번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몇 초간의 침묵 후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04번도 잘 지냅니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낸 거예요?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착한 얼굴로 방긋방긋 웃는 06번의 표정은 뉴스에서 봤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훈련받은 듯 일관적인 표정과 말투. 그것은 기억의 저편에서 흐릿한 윤곽으로 존재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처참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너도 당했구나.”

“예?”

인간은 기계처럼 스위치를 켰다 꼈다 하며 쓰는 소모품이 아니었다. 설령 인위적으로 창조된 생명체라 해도 이들은 인격체였고 자발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었다.

“거세 말이야.”

“거세라뇨? 무슨 말씀이세요?”

알렉스의 뒤치다꺼리만 했던 십 대 시절, 늘 자신의 시야를 가리던 그의 그림자를 얼마나 증오했던가? 그 짐승만도 못한 놈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복수할 날만 꿈꿨다.

그런 절망의 나날이었지만 사실 가끔은 그 녀석을 연민했다. 언젠가 도살당할 가축처럼 사육당하는 그의 육체와 하얀 백지 상태로 강제 표백당하는 그의 영혼을 동정했다.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 회장이 새로 안식할 그릇에 불과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가 될 수도 있는 선택에서, 아브라함 회장은 그의 새로운 육체를 아주 신중하게 골랐다.

제일 먼저 태어났던 01번과 02번은 각각 유전적 결함이 발견되는 바람에 폐기 처리되었다. 03번은 한동안 후계자로 키워졌다. 그러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요한은 03번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닐까 추측했다. 04번은 영리했지만 선천적 질병으로 인해 몸이 약했다. 아브라함 회장은 실망했지만 04번을 폐기 처리하지는 않았다.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05번은 창립 50주년 파티에서 갑작스런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 05번 때문에 사회적으로 망신을 당한 아브라함 회장은 크게 분노했다. 이후 05번은 03번처럼 모습을 감췄다. 아마 05번 역시 폐기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폐기란 생물학적 죽음을 뜻했다. 아브라함 회장이 그들을 어떻게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회장의 성격상, 숨이 끊어지는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봤을 게 분명했다. 그 사람은 타인의 고통과 소멸에서 커다란 기쁨과 성취감을 얻는 타입이니까.

그 정도의 부와 권력이 없었더라면 아브라함 회장은 분명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연쇄살인마가 되었을 것이다. 두뇌는 명석할지 몰라도 어딘가 심하게 결여된 인간이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부족한 사람이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려니 그런 실패만 일삼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아브라함 회장에게 남은 클론은 06번뿐이었다. 그러나 회장은 그마저도 인공뇌를 삽입해서 소모하고 말았다. 철저하게 계산적인 남자가 실수로 그랬을 리는 없고, 일련의 프로세스를 볼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회장은 더 이상 클론이 필요치 않다. 불멸을 꿈꾸는 그에게 다른 계획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밝았던 홀이 암막이라도 친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06번의 표정도 어느새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 알고 있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묻고 그래? 회장님을 좀 뵙고 싶은데.”

“회장님께서는 스타시티 본사에 계십니다.”

“피차 말장난은 관두지? 나한테 그런 눈가리개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어렸을 때 회장님에게 들킬까 봐 매일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던 너희들 등을 두드리던 게 누군지 잊었어?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빨리빨리 안내해. 보다시피 내 다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이렇게 오래 서 있으면 힘들어.”

요한은 지팡이를 허공에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그가 절뚝거리며 한 걸음 내딛자, 어둠 속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 종양은 잘 제거하신 모양이군요.”

“그렇지. 덕분에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요한은 곁눈질로 주위를 훑었다. 섬뜩한 녹색으로 빛나는 동공들이 그의 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06번은 바닥에서 올라온 테이블을 터치해 등을 켰다. 유리로 된 테이블이 자체적으로 은은한 빛을 발산하며 시야를 밝혔다. 그러자 홀을 가득 메운 인영들이 보였다. 위즈덤에서 생산한 최신형 안드로이드들이었다. 그는 안드로이드 군단 가운데에 서서 옷매무새를 탁탁 털었다. 단정하게 재킷 단추를 여민 06번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처럼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 가르두치, 당신은 십팔 년 전 스타시티의 귀중한 연구 자산을 훼손하고 도주한 이력이 있습니다. 이를 인정합니까?”

“글쎄…… 전혀 기억이 안 나는군.”

“본인이 저지른 범죄 행각 때문에 우리가 입은 손실액은 천문학적 숫자에 달합니다.”

“범죄 행각? 나는 오히려 스타시티의 범죄 행위를 막아 준 기억밖에 없는데? 그리고 일개 군인에게 천문학적 숫자의 재산이 있을 리가 없잖아. 되지도 않는 협박은 그만둬.”

“그렇군요. 제 발로 집에 돌아왔기에 기대를 했습니다만…… 아쉽습니다.”

“집이라면, 우리 아버지를 거세하고 나를 거세하려 했던 그 집?”

“아까부터 ‘거세, 거세’ 하는데, 대체 무슨 거세를 당했다는 겁니까?”

“영혼의 거세.”

무표정하던 06번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너와 내 아버지가 당한 것. 한 사람의 자아를 강제로 죽이는 짓. 사실상 뇌사인 상태의 사람에게 CPU만 갈아 끼운 거지. 나는 그걸 영혼의 거세라고 불러.”

“…….”

“영혼의 거세를 당하면 사람의 눈동자 가운데가 말이야. 동공이란 게 백치처럼 멍하게 풀어지거든? 웃을 때도 기분 나쁘게 입만 히죽 찢어 웃고, 안드로이드처럼 나사 빠진 표정만 짓게 되는 거야. 바로 지금 네 얼굴처럼 말이야…….”

06번은 사고 회로에 부화라도 걸렸는지 조용했다. 매뉴얼대로 대응하는 그의 인공뇌가 당황이란 걸 할 리는 없고. 기적에 가까운 가능성이긴 하지만, 그의 자아 일부가 남아 있는 건 아닐까?

“06번, 나는 네가 얼마나 다정한 녀석인지 알고 있어. 넌 회장의 꼭두각시가 아니야. 너와 04번, 05번 모두 존중받는 삶을 살아야 해. 아무리 아버지라도 너희들을 마음대로 할 권리는…….”

“쓸데없는 시도는 관두십시오.”

요한의 표정이 굳었다. 06번이 다시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일말의 기대로 부풀었던 가슴이 얼음장처럼 식었다.

“뭘 해도 소용없습니다. 요한 씨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은 반드시 치르시게 될 겁니다.”

군중처럼 모인 안드로이드들의 눈에서 녹색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요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는 덜컥 소리쳤다.

“익명의 과학자 K!”

06번이 멈칫하며 미간을 구겼다. 그는 멈추라는 듯 팔을 허공 위로 들었다. 그러자 녹색 눈을 번뜩이며 다가오던 병기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지금, 뭐라고…….”

“날 연맹군에 넣어 준 것도, 헤벨의 인공지능을 해킹하고 날 이리로 보낸 것도 모두 그자야.”

“익명의 과학자 K라면, 낙원을 설계했다고 알려진 엔지니어 말인가요?”

“그래, 나는 그 익명의 과학자 K의 정체를 알고 있어. 이제 내가 회장님을 뵈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나?”

06번은 잠자코 그를 응시했다. 그는 귓속에 착용한 소형 통신기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06번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을 흥건히 적신 땀이 식는 게 느껴졌다. 긴장했다고는 하나, 주먹 쥔 손에서 땀방울들이 물처럼 뚝뚝 떨어질 만큼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주사기로 주입한 스마트 더스트의 입자가 이제 체내에 완벽히 흡수되었을 시점이다. 몸에서 열이 나고 오한이 느껴지는 건 스마트 더스트 때문인가?

요한은 눈동자를 카메라처럼 이동하며 주위를 체크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그의 눈앞에 하얀 셔츠에 검은 제복 바지를 입은 케이가 나타났다. 그는 지상에 강림한 천사처럼 고고한 자세로 허공에 앉아 있었다. 케이는 발칙한 사탄의 성채를 보듯 못마땅한 눈초리로 06번과 전투 병기들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뵙겠다고 하십니다.”

“아, 그래?”

06번에게 짧게 대꾸한 뒤 고개를 든 요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까지 허공에 떠 있던 케이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시 어둠 속을 응시했다.

‘두통과 열 때문에 헛것이 보이나?’

허상이었지만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적이라 생각했을 때는 세상에서 제일 악마 같던 녀석이지만, 한편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아브라함 회장은 분명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이쪽에도 그 못지않게 강한 자가 있었다. 스마트 더스트는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그가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익명의 과학자 K의 시선도 따라올 것이다.

“이쪽입니다.”

홀 뒤쪽으로 걸어가자 비밀의 방 같은 게 나타났다. 그 안쪽에는 숨겨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회장 전용으로 보이는 엘리베이터는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게 덜컹거리며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안내 음성도 없이 미닫이식 문을 드르륵 열었다.

06번은 내리지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 내부의 손잡이를 꼭 잡은 채 말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인공뇌를 넣었어도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다. 기억에 기반한 모방 내지 연기에 가깝겠지만. 몸에 각인된 기억이 그를 공포로 밀어 넣고 있는 건가?

요한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동굴 입구처럼 짧은 통로 앞에 환한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보였다. 그는 지팡이를 앞세워 절뚝절뚝 걷다가 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발밑이 울릴 만큼 거대한 진동이었다.

─ 오랜만이군, 요한 가르두치.

웅장하게 울려 퍼진 음성은 사방에서 들려왔다. 예전과 변함없는 말투였다.

“아브라함 회장님이십니까?”

특이한 내부 구조 때문인지 그가 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메아리치며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한 걸음 내딛던 요한은 놀라서 멍하니 앞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홀 입구에 서자, 하얀 벽으로 가득 찬 내부가 보였다. 그는 경관에 압도된 듯 넋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정이십면체로 이루어진 큐브 형태의 방이었다.

─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와 주겠나?

투명한 벽은 겹겹이 유리와 같은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고, 수많은 빛들이 화살처럼 벽과 면 사이를 빠르게 이동했다. 특히 아브라함 회장이 말을 할 때마다 방 전체가 벼락 치듯 번쩍였는데, 눈이 실명되는 건 아닐지 우려될 정도였다.

요한은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그는 크리스털처럼 빛나는 다면체 홀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한 바퀴 빙그르 돌며 주위를 관찰했다.

여기저기서 직선으로 움직이는 빛들이 전기회로처럼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했다. 가지처럼 뻗어 나가는 빛줄기들 끝에는 작은 돌기들이 반짝이며 달려 있었다.

꼭 인간 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수많은 가지돌기들로 이루어진 신경세포가 전기 신호를 보내며 다른 신경세포와 작용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구현했다. 수많은 빛의 화살들이 갈래갈래 뻗은 나뭇가지처럼 번쩍이며 한 번에 이동했다가 사라지는 모습은, 인간의 뇌 속에서 발생하는 시냅스 활동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요한은 문득 뭔가를 깨닫고선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정면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회장님.”

거대한 큐브 홀 전체가 그의 말에 대꾸하듯 수십억 개의 빛의 화살을 쏘아 내며 번쩍했다. 요한은 고개를 숙인 채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2073년 12월 24일.

러시아 시베리아 연구소에서는 뇌 과학계의 역사를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솔로몬 프로젝트의 완성이었다. 러시아의 연구진은 냉동 보존된 뇌의 신경망을 컴퓨터에 옮기는 뇌 전산화 수술을 성공리에 마쳤고, 이것은 향후 뇌 이식 수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뇌 전산화 수술을 한 솔로몬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스타시티의 회장, 대니얼 아브라함이었다.

그날 아브라함 회장은 전무후무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요한은 그 결과물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었다. 수많은 빛과 전기 신호로 이루어진 거대한 크리스털 큐브 홀. 그는 아브라함 회장의 두뇌 속으로 초대받아 온 것이다.

* * *

쏴아아아.

낙원에 시원한 빗줄기가 떨어졌다. 지나가는 소나기는 퍽퍽한 땅을 적시고 한층 경쾌해진 바람을 남긴 채 떠났다. 우중충한 하늘을 가로막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낙원의 상징인 뾰족한 첨탑의 뒤로 눈부신 역광이 비쳤다. 부채처럼 찬란하게 펼쳐진 석양을 따라 한층 작아진 구름들이 양 떼처럼 흩어졌다.

등대처럼 지상을 비추는 햇살을 타고 불가시 모드를 해제한 아크레인 한 기가 쏜살같이 날아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추적하듯 바짝 쫓아온 다른 아크레인도 구름을 뚫고 나오며 불가시 모드를 해제했다.

날개 접은 백조처럼 우아하게 비행한 두 기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에덴 타워 상층부 S관 승강장에 이륙했다.

“대놓고 승강장에 이륙하다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게다가 아직 훤한 대낮인데 말입니다.”

커크가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먼저 도착한 1호기의 유림과 밀러는 걱정 말라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밀러는 2호기 내부에 남아 있는 럼스펠드 대위에게 말했다.

“대위는 아크레인에 남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는 전투 요원으로 합류한 것도 아니었다. 급작스러운 탈출이 요구될 때 럼스펠드 대위의 노련한 대응이 기지를 발휘할 것이다.

“어이, 데드캣. 네 슈퍼 파트너가 안 보이는데?”

케이에게 몇 대 맞은 커크는 그의 이름 앞에 슈퍼super를 붙이기 시작했다.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였지만 나름 그를 인정했다는 증거기도 했다. 하기야, 케이만 보면 동공에 지진이라도 난 듯 떨면서 안절부절못하니 제 놈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케이는 포인트 B지점에서 우리와 합류할 거야. 별개의 임무가 있어서 먼저 갔거든.”

에덴 타워 내부는 휑뎅그렁했다. 평소 곳곳에 서 있던 안드로이드 헌병들은 자취를 감췄고, 푸른 제복의 집무관들도 어디 갔는지 사라진 상태였다.

당당하게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유림의 행보에 커크와 랜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낙원의 보안 수준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라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덴 타워는 로스트 헤븐의 사령탑인 왓슨 3세의 본체가 있는 곳인데, 적에게 나 잡아가라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유림은 두 사람의 생각을 읽은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현재 왓슨 3세에게 있어 투명인간과도 같은 상태야. 보안 시스템이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진 않을 테니 그만 겁먹고 빨리 따라와.”

“투명인간? 그게 무슨 소리야? 낙원의 보안 시스템이 별안간 우리랑 친구 먹기라도 했다냐?”

“쉬잇.”

유림이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대자마자 세 사람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코너를 돌면 나타나는 평의원 전용 승강장 연결 통로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커크와 랜스는 통로에 위치한 화장실 안쪽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밀러는 커다란 화병 뒤에 몸을 밀착시킨 채 허리를 숙였다. 유림은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르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곁눈질로 유리문 너머를 훔쳐보았다. 잠시 후 검은색의 고급 수제화들이 뚜벅뚜벅 걸으며 등장했다.

“흠, 그럼 의원님께서도 소집 이유를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전혀요.”

“전원 긴급 소환이라니, 허 참…….”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는 배불뚝이 몸을 이끌고 뒤뚱뒤뚱 걸었다. 유림은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인상을 쓰며 거들먹거리는 그는 평의원들 중에서도 썩어빠진 고랑으로 구린내를 풍기는 빈센트 의원이었다.

“평의원 전원을 에덴 타워로 소집하려면 관리자 권한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럼 이건 아브라함 대표의 짓이겠군요.”

네 명의 평의원들은 복도 쪽으로 꺾더니 대회의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유림은 그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소리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혹시 뉴 라이프 프로젝트 관련 아닐까요? 뇌 정보 업데이트라든지, 그런 건 자택에서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회원이 직접 위즈덤 본사에 가서 해야 한다고요. 아브라함 대표가 우리만 특별히 에덴 타워에서 해 주려는 게 아닐까요?”

“아하, 그거 말 되네요!”

그들은 갑자기 껄껄 웃으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조용히 밟는 유림의 눈초리는 점차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의원님께선 제일 먼저 뭘 하실 겁니까?”

“그거야 뻔한 거 아닙니까?”

눈초리를 가늘게 휜 빈센트 의원은 기름진 얼굴 위로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새 마누라를 얻어야지요. 젊고 싱싱한 걸로다가.”

“어이구, 사모님께선 절대 이혼 안 해 주신다고 했다면서요?”

“이제 시간도 많은데 그 여편네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지 뭐.”

“하하, 만약 사모님께서도 뉴 라이프 프로젝트 멤버로 등록하시면요?”

“아이고, 빈센트 의원! 그것만은 막으셔야겠는데요?”

빈센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혐오감이 담긴 눈초리로 툴툴거렸다.

“우리 처가가 워낙 세서요. 장인어른께서 제가 이거 등록한 거 아시면 저 큰일 납니다. 거지꼴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니까요?”

“그 양반 오늘내일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죠. 얼마나 다행인지…….”

빈센트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림은 차가운 미소 위로 경멸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그의 아내는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제 남편이 마누라가 죽을 날만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빈센트 의원의 말에 옆에서 물개박수를 치는 다른 의원들도 저열한 건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생명과 삶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기는 게 뭐가 그렇게 즐겁고 대단하다고, 의원님 의원님하면서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들이 못 봐 줄 지경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소름 끼치는 농담들을 시시껄렁하게 주고받았다. 십 대 청소년처럼 익살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펼쳐질 제2의 삶에 못내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렇게도 기대되는 것일까? 매춘부들과 생애 첫 섹스를 하던 순간처럼 두근대는 얼굴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발걸음을 둥실둥실 띄울 만큼? 정녕 지금과 다를 거라 생각하는가? 덥수룩한 몸의 털과 출렁거리는 뱃살이 사라지면 비루한 체력과 볼썽사나운 조루 증세도 없어지겠거니 하면서?

빈센트는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자꾸만 끌어올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곧 갖게 될 젊은 육체와 짐승처럼 헐떡일 정사의 쾌락 어린 장면들이 스쳐 가고 있겠지. 하지만 그 순간들을 맛볼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유림은 오른손으로 조용히 검을 움켜쥐었다. 분노로 차오른 그녀의 동공은 싸늘한 살기로 얼어붙고 있었다. 무표정한 검은 눈빛은 암살자 데드캣의 얼굴이었다. 혐오감에 그녀의 눈 밑 근육이 짧은 경련을 일으켰다.

고요히 숨을 가라앉힌 유림은 허공에 검을 번쩍 들었다.

“으읍!”

번개같이 나타난 밀러가 유림의 입을 틀어막으며 화장실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유림의 턱을 잡고 으르듯 속삭였다.

“정신 차려! 작전을 다 망칠 셈이야?”

“주, 중령님!”

“임무 중에 딴생각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여기서 우리 존재를 들키면 아군 모두가 위험에 빠진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알고 있잖아!”

그를 멍하니 보던 유림은 검을 쥔 손을 스르르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한순간 이성을 잃었다.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암살 명단의 돼지 새끼들이 낄낄거리며 노닥대는 꼴에 자신도 모르게 낙원의 암살자인 데드캣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에 자네 혼자만 있나? 상관인 난 보이지도 않아?”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독단적으로 굴 거면 작전에서 빠지도록.”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유림을 보며 밀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분한 네 마음은 이해한다.”

한층 부드러워진 밀러의 목소리에 유림은 젖은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 녀석들이 사지로 파견한 병사들만 모아 세워도 게이트만 한 탑을 쌓아 올릴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가 델타와 사투를 벌이며 목숨을 잃었다. 그러는 동안 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은 소돔에서 매춘부들과 뒤엉킨 채 냄새나는 몸뚱이로 헉헉대기 바빴다.

낙원의 수장인 관리자가 잔인무도하게 입실론 하나를 살해한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제 안위를 지키고자 모르는 척 외면한 채 침묵했다. 그리고 엘 카인이 축출당하자 이때다 싶어 죄 없는 입실론들까지 몰아냈다.

낙원이 쑥대밭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한 짓이라곤 멀찍이서 뒷짐 진 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이 모든 책임을 불법 체류자인 고스트들에게 전가했다. 물론 이미 축출당한 엘 카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고스트들을 적당히 봐준 것은 오늘을 위해서였다. 언젠가 주민들이 분노를 쏟을 대상이 필요할 때, 낙원의 골칫덩어리로 각인된 고스트들이야말로 써먹기 딱 좋은 재목이었으니까.

낙원이 전복돼도 저놈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것이다. 세상은 항상 그렇다. 부정부패와 위선의 꼭대기에 자리한 자들은 기어코 제 꼬리를 잘라 살아남는다. 희생양이 된 이들을 발판 삼아 코앞까지 닥친 심판대를 탈출한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또 새로운 악마가 되어 다른 무고한 이들을 괴롭힌다.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메리는 죽고 저놈들은 살아 있는 현실이 부당했다. 낙원에서 꿀단지만 맛보고 냉큼 줄행랑치는 녀석들의 간사한 웃음소리가 악몽처럼 들려왔다.

칼을 쥐고도 찌르지 못하는 두 손에 분노가 차오른다. 설령 이 작전이 실패한다 해도 저들을 찢어 죽일 수만 있다면.

“나도…… 화가 난다.”

밀러의 속삭임에 유림의 눈빛이 일렁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의 눈동자 역시 노여움에 차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밀러도 그녀 못지않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케이가 처리할 거야.”

그가 잇새로 나지막이 말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그를 보며 유림은 꽉 깨물었던 잇새로 울화를 삼켰다.

“그러려고 간 거니까.”

손에 잔뜩 쥐었던 힘이 서서히 풀어졌다. 울화로 요동치던 가슴도 차츰 누그러지며 가라앉았다.

케이가 그랬다. 일족의 지배자는 대대로 심판자의 역할을 했다고. 그 능력만큼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고.

─ 그렇습니다.

낯선 목소리의 등장에 유림과 밀러는 경계 태세를 갖추며 홱 뒤를 돌아보았다. 햇살이 비치는 창가 앞에 갈색 제복을 입은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누구…….”

새하얀 얼굴, 머루 알처럼 새까만 눈동자. 작은 이를 드러내고 웃을 땐 개구지면서 귀여운 인상을 선사했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낙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실체가 아닌 홀로그램 형상이었다. 원격 화상 대화인가? 아니면 프로그램화된 인공지능 시스템?

─ 마스터께서 이대로 여러분들을 지하에 위치한 왓슨 연구소로 모시라고 명하셨습니다.

“마스터?”

밀러와 유림이 어리둥절하는 와중, 배시시 웃고 있던 제복의 소녀는 두 사람을 유령처럼 통과했다. 그녀는 화장실 입구 쪽으로 향하며 재촉하듯 말했다.

─ 시간이 없으니 네 분께서는 곧장 절 따라와 주세요.

네 분이라는 말에 화장실 칸막이 안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좌우 칸막이 안쪽에 각각 몸을 숨기고 있던 랜스와 커크였다. 그들은 멋쩍은 듯 걸어 나오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녀를 쏘아보았다.

“저건 뭡니까?”

“뭐지? 아벨 같은 건가?”

유림은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왓슨 3세?”

소녀의 발걸음이 멈칫 정지했다. 그녀는 발그레한 뺨으로 돌아서더니 유림을 바라보았다. 수줍은 듯한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고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유림을 향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 네, 맞습니다. 제가 바로 로스트 헤븐 전체를 관리하는 인공지능 시스템 왓슨 3세입니다.

커크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왓슨 3세를 쳐다보며 랜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왓슨 3세가 저렇게 귀여운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분명 그 검은 함장인지 그 아저씨처럼 징그러운 중년 남자일 거라고…… 그치?”

“그러는 아벨은 그냥 지구본 형상이잖아.”

“걔도 인간화하라면 할 수 있을걸? 그냥 지가 안 하는 거지. 함장님 앞에선 가끔 인간 모습으로 실체화한다고 들었는데, 맞죠?”

커크의 질문에도 밀러는 아무 말 없이 왓슨 3세를 쳐다보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밀러의 눈동자에는 미약한 감동과 환희가 어려 있었다.

─ 절 창조한 마스터께서는 어느 인간 소녀를 모델로 지금의 제 형상을 만드셨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브 페트로비치, 바로 소위님 당신입니다.

유림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과거의 자신과 거울 속에서 마주 본 느낌이랄까?

회상에 잠긴 눈빛을 짓던 밀러는 속으로 감탄했다. 듣고 보니 어린 시절 유림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왓슨 3세를 보자마자 눈치채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기억하는 유림의 어릴 적 모습과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왓슨 3세의 형상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의 결정체인 이브였다. 아마도 이건 아담이 이브를 잃고 난 뒤 그녀를 그리워하며 몇 년 뒤 이브의 모습을 상상해서 구현한 형태일 것이다. 그가 얼마나 이브를 소중하게 여겼는지, 얼마나 그녀를 숭배하고 아꼈는지, 왓슨 3세를 본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밀러는 피식 웃었다.

“왜 웃습니까, 중령님?”

유림이 눈초리를 뾰족하게 세우며 묻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다가 정색하며 헛기침했다.

“아니 그게…… 케이가 유림을 처음 봤을 때 이브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잖아. 지금 보니 그게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이해가 된다고요? 왜요? 내가 뭐 많이 변했나? 똑같은데?”

유림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왓슨 3세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이 모습을 좀 바꾸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과 꽤 비슷했다. 확실한 건 지금의 내가 훨씬 예쁘다는 건데, 왜 다들 얠 보고 예뻐 죽겠다는 눈빛이야?

유림이 찌릿 노려보자 랜스와 밀러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슬쩍 회피했다. 혼자 분위기 파악 못한 커크만 혀를 차며 쯧쯧거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슈퍼 애덤슨이어도 눈치채긴 무리였겠지. 설마 상상이나 했겠어? 순백의 천사 같던 아이가 성인 남자 앞에서 속옷까지 훌렁훌렁 벗질 않나, 걸핏하면 사람을 패대기치듯 자빠뜨리고 과녁에 건 채 깔깔거리며 총을 쏴 대는데…….”

“에덴 타워 꼭대기에 한번 빤스까지 벗겨진 채 걸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느새 커크의 코앞에 다가온 유림이 싸늘하게 속삭였다. 깜짝 놀란 커크는 저도 모르게 총구를 바짝 올렸다. 그러자 유림이 덥석 그의 총을 잡아서 누르며 잇새로 살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네 머릿속을 못 보는 게 다행인 줄 알아. 아니면 벌써 게이트에 네 묘비를 박고도 남았으니까.”

“묘, 묘비?”

유림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홱 돌아서서 걸어갔다. 왓슨 3세는 정면에서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지금쯤 통제실에서 유림 못지않게 언짢은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의 모습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 자,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 * *

어둠 속에서 미약한 조명이 촛불처럼 타올랐다. 도깨비불처럼 나타난 불빛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흐릿하고 모호한 윤곽을 나타냈다. 빈센트 의원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몸이 석고상처럼 덩어리져 굳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들 하시죠.”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게 유난 떨지 않아도 됩니다.”

여성들이 듣는다면 환호성을 칠 정도로 감미로운 음색이었다.

젊은 남자인 듯했다. 안드로이드는 아닌 것 같고. 이래 봬도 일평균 세 시간씩 소돔에서 안드로이드 매춘부들과 뒹굴었던 빈센트였다. 안드로이드에 대해선 웬만한 로봇 전문가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느, 느으읍, 느그우!”

누군가 입이 막힌 채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덩달아 흐느끼는 소리를 쥐어짰다. 빈센트는 긴장한 채 동공을 좌우로 굴렸다. 그들은 어딘가에 구속된 채 누워 있었다.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미간를 구기며 기억을 더듬었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는 대회의실이었다. 분명 다른 세 명의 의원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웃으며 회의실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말발굽 모양의 테이블이 보이자마자 눈앞이 핑그르르 돌며 하얘지는 걸 느꼈다. 무색무취의 가스가 목구멍과 폐를 잠식했고 순식간에 의식이 흐려졌다.

빈센트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납치인가?’

감히 평의원들을 상대로 이런 범죄 행각을 저지르다니, 배짱 한번 두둑한 녀석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에덴 타워 내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지? 왓슨 3세가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벌써 특별보안대에 연락이 갔을 거고 경비병들이 몰려오고도 남을 시점일 텐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디선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어둠 속을 배회하며 혜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던 불빛이 서서히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암흑의 장막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정체불명의 인영도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걷듯 잿빛 시야 속에서 천천히 등장했다.

“정식으로 인사하겠습니다, 의원님들.”

달콤한 눈웃음과 반듯한 콧날, 매끄러운 이마와 아름다운 턱선. 저렇듯 완벽한 피조물은 안드로이드 중에서도 본 적 없었다.

‘저 남자 어디선가…….’

낯익은 인상이었다. 소돔에서 봤나? 저런 느낌의 안드로이드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피조물은 안드로이드라는 발상이라…… 과연 위즈덤의 VVIP답네요.”

빈센트는 멍한 눈으로 인상을 썼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서 말한 모양이었다. 어라? 입이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읍읍’거리던 그는 귀신에게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쌍놈의 새끼가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는 이를 악물고 새우처럼 몸을 발딱발딱 일으켰다. 분개한 눈빛에선 정체 모를 괴한을 향한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빌어먹을, 배를 너무 압박해서 오줌이 다 마려울 지경이잖아! 이거 안 풀어?’

가슴팍과 배는 단단하게 고정된 상태였지만 목과 얼굴만큼은 90도로 접어서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대체 어디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천장의 끝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모래의 도시 최하층부에서 활주로를 올려다봤을 때보다 더 아득한 높이였다. 마치 거대한 터널이 수직으로 세워진 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멀찍이 보이는 벽은 정교한 기계관의 내부처럼 수많은 금속관들이 회로처럼 얽혀 있었다. 군데군데 화살표처럼 움직이는 푸른 선들은 회로관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듯했다. 저런 비슷한 것들을 모래의 도시에서 본 적 있었다. 중단된 건설 현장 등지에서였다.

“솔직히 난 당신들이 낙원을 부수든 델타들로 생체 실험을 하든 관심 없어요. 하지만…….”

상냥한 어조를 유지하던 괴한이 돌연 말끝을 흐렸다.

“나의 이브를 빼앗고 그녀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건…….”

웃으면 예쁘게 휘어질 듯한 눈초리가 날카롭게 먹잇감들을 노려보았다.

“수십 세기가 지난들 결코 잊을 수 없죠.”

번쩍!

유성이 떨어지듯 천장에서 커다란 불빛이 추락했다. 빈센트 의원은 우산 형태로 퍼지는 빛의 입자들을 보며 신기하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빛의 입자들이 모여든 곳은 천장으로 솟은 원형 터널의 중심부였다. 거대한 구체의 광원이 불투명한 유리관 속에 갇혀 있었다.

푸른 광원은 미세한 광소들의 집합체였다. 그들은 세로로 긴 유리관 속에서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공격적으로 벽에 부딪치길 반복했다. 유리관이 불투명한 이유는 안에 수증기처럼 낀 연기 때문이었다. 푸른 구체가 유리관에 맞닿을 때마다 유리관 꼭대기에서 자기장이 번쩍이며 섬광을 일으켰다.

“여기는 에덴 타워의 코어 속이에요. 엘 카인조차 이곳의 존재는 모를 겁니다. 그가 머물렀던 타워 꼭대기의 관리자 집무실은 명목상일 뿐, 진짜 낙원의 관리실은 바로 여기거든요. 에덴 타워와 왓슨을 설계한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비밀의 방이죠.”

빈센트는 누운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중앙에 위치한 푸른 구체의 광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는 뭔가 깨달은 듯 눈이 커졌다.

저 커다란 유리관 속에 들어 있는 구체가 바로 낙원의 동력부이자 에덴 타워의 심장부였다. 유리관 꼭대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자기장과 섬광은 로스트 헤븐을 움직이는 에너지원이었다. 낙원의 최고 정치기구인 평의회 소속 의원들도 낙원의 테크놀로지에 대해선 무지했다. 빈센트는 경이롭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저 녀석이 뭐라고 한 거지? 여길 설계한 사람이 뭐 어쨌다고?’

그는 비로소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왼 가슴에는 평의회를 상징하는 아름드리나무 문양이 금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펴, 평의원이라고? 그, 그럴 수가!’

유리관으로 덮인 캡슐에 누워 있던 나머지 의원들도 충격 어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을 납치한 이가 같은 평의원이었다니!

다들 배신감을 감추지 못한 채 살기등등한 눈초리로 읍읍거렸다.

잡혀 온 의원들의 입은 빈센트와 마찬가지로 투명한 비닐에 막혀 있었다. 그들의 양손 양발은 쇠로 된 수갑으로 채워져 있었고, 머리에는 전극 단지가 연결된 케이블 선들이 해파리처럼 부착돼 있었다. 흔히 뇌파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평의원들 중에 저렇게 생긴 녀석이 있었다고? 낯이 익기는 한데,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왓슨을 설계한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는 방, 왓슨을 설계한 사람…… 낙원의 설계자…… 평의회의 구성원…… 그런데 왜 회의할 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지?’

빈센트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이 얼어붙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평의원직을 십 년 넘게 해 왔지만, 대회의실에 ‘전원 참석’의 불이 들어오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원인은 늘 하나였다. 의원석은 차지하고 있지만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한 사람.

‘열두 번째 의원!’

베일에 싸여 있던 테이블 맨 끝자리의 주인.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도, 엘 카인 대표도 감히 건들지 못하던 명예 의원직.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도 의심스러웠던 그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비록 상상한 것보다 훨씬 젊고 또 괴팍한 인간이었지만 빈센트는 확신했다. 이 남자가 열두 번째 의원이다.

“여러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처형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해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건 이로써 두 번째인데…… 꽤 흥분되는군요. 아주 재밌는 실험이 될 것 같아요.”

빙긋 웃으며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빈센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처형이라니? 저 미친놈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재밌는 실험? 사람을 이렇게 묶어 놓고 실험을 하겠다고?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하나씩 설명해 줄 테니.”

이 녀석은 아까부터 자꾸 내 속마음에 답을 하잖아? 역시 내 생각이 들리는 거야? 너 이 새끼 대체 정체가 뭐야! 뭐하는 놈이냐고! 아하, 알았다. 내 머리에 연결한 이 뇌파 탐지기 같은 걸로 머릿속을 읽는 거구나. 내 말 맞지?

빈센트를 빤히 보던 그가 장밋빛 입술 새로 쿡쿡 웃었다.

“상상력이 뛰어나네요. 그래도 다른 의원들보다 과학적인 추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박수를 드리도록 하죠. 나머지 의원님들의 추리는 들어 주기가 괴로울 정도로 한심해서요. 다들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한다는 게 놀라울 정도예요. 뭐, 잘됐어요. 너무 다른 것들끼리 합치는 것보단 비슷한 것들끼리 섞이는 게 좀 낫겠지.”

합쳐? 섞는다고?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자, 장기라도 적출하려는 건가? 내 몸은 그러기에 너무 늙었어. 차라리 내 클론을 가져가! 얼마든지 줄 테니 제발…….

빈센트가 읍읍거리며 애원했다. 그러나 상대는 더 이상 그의 생각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대신 남자는 딱딱한 말투로 전환해서 강의를 하듯 설명조로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다른 의원들이 머릿속으로 던지는 바보 같은 질문 목록에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당신들의 뇌를 여기 보이는 중앙 메인 시스템에 융합시킬 겁니다. 낙원을 통제하는 슈퍼컴퓨터에 인간의 뇌를 직접 연결하는 거죠. 사실 당신들을 이곳에 옮기기 전에 실험 삼아 한 명을 먼저 시도해 봤는데, 수술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쇼크사하더군요.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도 같고……. 이론상으로는 분명 가능한 수치였는데, 실험체가 너무 고령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의원들이 누워 있던 여덟 개의 유리관들 중 하나가 수직으로 서더니 가운데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 속에는 앙상한 시체 하나가 해골처럼 걸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푹 꺾은 채 입을 ‘헤 벌리고’ 죽어 있었다. 시체의 얼굴을 알아본 빈센트의 눈시울이 울컥 빨개졌다.

‘아이작 라이트 의원?’

죽은 지 얼마 안 됐는지 그의 입가에는 보글보글한 거품이 남아 있었다. 눈은 흰자위를 내보이며 뒤집혀 있었는데, 안면 근육이 심하게 뒤틀린 걸 보니 상당한 고통 속에 숨이 끊어진 듯했다. 누워 있던 의원들의 눈동자가 공포로 핏대가 선 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다들 묶인 몸을 들썩이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빈센트 의원은 입을 막은 테이프를 읍읍 삼키며 애원했다.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제2의 삶을 꿈꾸던 차에 이런 식으로 사신의 칼날을 마주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 자신이 그렇게 큰 죄를 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엘 카인처럼, 혹은 우리야 세르게이처럼 다른 생명을 무참히 앗으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아, 아아아악! 살려 줘!”

브라운 의원의 목소리다. 입을 막아 놨던 테이프를 제거해 준 모양이었다. 빈센트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머리를 필사적으로 쳐들었다. 반원으로 놓인 아홉 개의 캡슐 중 좌측 끝에 있는 캡슐 하나가 약 40도 각도로 세워진 게 보였다.

유리로 된 캡슐의 뚜껑이 열리자 브라운 의원의 곱슬한 머리칼이 언뜻 보였다. 천장에서 내려온 수술 기계가 그의 캡슐 위로 ‘윙─’ 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이분이 제일 젊은 것 같습니다. 최고령을 해 봤으니 최연소도 해 봐야겠죠? 나머지 분들은 평균값을 위해 한꺼번에 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미쳤다. 이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 목숨을 대체 뭐로 보는 거야? 그냥 네 심심풀이용 실험 도구로 생각하는 거야? 어? 그런 거냐고! 대답해, 설계자! 내 말에 대답하라고!

케이는 빈센트 의원을 내려다보더니 붉은 동공에 살기를 띤 채 매서운 눈초리를 던졌다.

시끄러워.

머릿속에 번개처럼 울려 퍼진 목소리에 빈센트는 창백한 얼굴로 충격받은 채 얼어붙었다. 쪼르르 새어 나온 오줌이 바짓가랑이를 눅눅하게 적셨다. 그를 차갑게 보던 케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긋 웃더니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뉴 라이프 프로젝트라고 했던가요? 여러분이 알렉스 아브라함과 계약한 프로젝트의 이름. 그가 당신들한테 해 준다던 불멸 프로젝트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것도 종국에는 사람 뇌를 이식하는 게 최종 목표죠. 즉 그거나 이거나 그게 그거란 소리예요. 그러니 그냥 즐겁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빈센트는 멍한 눈으로 아이작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흰 머리가 길게 듬성듬성 난 그의 정수리는 밑동만 남은 채 윗부분이 수평으로 잘려 있었다. 두개골을 뚜껑 열 듯 절개한 것이다.

케이는 시작하라는 신호로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브라운 의원이 누운 침대 위로 대기 중이던 수술 기계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크악! 아악! 흐억…….”

브라운 의원은 숨넘어갈 듯한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물고기처럼 몸을 파닥거렸다. 톱니처럼 윙윙거리며 다가온 칼날이 그의 머리통을 반으로 잘라서 열고 있었다. 희번덕이며 뒤집어진 눈으로 멍하니 의식을 놓던 브라운 의원은 전기 충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을 경련했다. 침대가 끽끽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쇼크사 직전의 브라운 의원은 “히엑! 히에에엑!”거리며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아아악! 아악! 살려 줘…… 어흐…… 흐으읏…….”

끼릭끼릭 수술용 칼날이 움직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브라운 의원은 온몸의 관절을 기이하게 꺾은 채 몸을 튕기며 절규했다.

“히이이익! 히익! 흐윽…… 흐어…….”

살기 위해 버둥거리던 그의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수갑 채워진 손을 격하게 움직여서 살가죽이 다 벗겨진 채였다. 흐느끼며 꺽꺽거리던 그는 ‘꾸에웩!’ 하고 토악질을 했다.

별안간 쥐죽은 듯 잠잠해졌다.

그의 갈라진 두개골 사이로 붉은 점액질의 뇌가 모습을 나타냈다. 산 채로 머리를 열고 두 개의 반구를 적출한 기계는 다시 ‘윙─’ 소리를 내며 천장 위로 올라갔다. 붉은 뇌는 표본병처럼 생긴 유리통 속으로 이동됐다. 수갑을 찬 채 몸부림치던 브라운 의원은 눈을 부릅뜬 채 턱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며 죽어 있었다.

수술 기계는 레일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살인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옆 캡슐에 멈췄다.

캡슐 안에 누워 있던 오카다 의원은 살려 달라며 울부짖었다. 유리관이 열리자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여자처럼 고음으로 ‘끼아악!’거렸다. 흉기를 들이댄 기계는 가차 없이 그의 휑한 정수리를 부우욱 찢기 시작했다. 마취 따윈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오카다는 누가 자신을 산 채로 뜯어먹는 양 울음을 터뜨리며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러 댔다.

“크흐억! 어억…….”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피가 그의 뒤집힌 눈깔을 벌겋게 적셨다. 목젖이 보이도록 소리치던 그는 정신을 잃어 가면서 차츰 흐느낌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오카다 의원의 마지막 몸부림은 짧은 경련이었다. 퍼덕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캡슐 밖으로 몸을 튕기던 그도 결국 아이작과 브라운처럼 쇼크사했다.

다른 의원들의 낯빛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하나둘씩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 앞에서, 케이는 편안한 얼굴로 중앙 의자에 몸을 묻었다.

“여러분들이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나? 이게 바로 뉴 라이프 프로젝트의 패러다임이잖아요. 영원한 삶, 죽어 가는 육신으로부터의 해방. 쾌감이란 육체가 주는 게 아니라 뇌가 느끼는 것이란 게 뉴 라이프의 핵심 이론인데……. 아브라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분명 이런 형태일 거예요. 날 믿어요.”

케이는 턱을 괴고 구경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에겐 여러분의 최종 모습을 샘플로 보여 줄 생각이에요. 평의회는 물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완벽한 하나의 응집체로서 더 강력하게 기능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암살당할 염려를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영원불멸한 존재로 남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과가 또 있을까요? 부작용이라면 여러분 개개인의 자아는 이제 사라져 버린다는 건데…… 여러분의 의식과 기억이 곧 하나로 뒤섞여 버릴 거거든요. 왓슨이 마련한 시스템 속에서 거품처럼 그의 일부로 흡수될 테니까. 흐음, 뭐 그래도 상관없지 않나?”

상냥하게 설명하던 케이는 돌연 싸늘한 눈초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네놈들 모두가 지저분한 오물 덩어리인데.”

잠시 후, 적출된 여덟 개의 뇌가 유리로 된 표본병에 담겨 실려 왔다. 표본병 안에 둥둥 떠 있는 붉은 점액질로 된 반구들이 살아 숨 쉬는 듯 신선해 보였다.

은색 카트에 실린 표본병들을 내려다보던 케이는 고개를 들었다. 누워 있던 수면 캡슐들이 일으켜진 채 그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숨진 여덟 명의 의원들은 하나같이 전기 고문이라도 당한 듯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 융합할까요? 아이작 라이트 의원의 뇌는 이미 융합에 실패한지라 폐기해야 할 듯합니다.

“알아서 해.”

케이는 관심 없다는 듯 대충 손짓으로 일렀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유림 일행의 영상에 못 박혀 있었다.

지하의 왓슨 연구소에 도착한 유림이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이의 입가에 금세 미소가 어렸다. 툴툴대는 듯한 그녀의 표정과 억울해 죽겠다는 커크를 보니 또 구박 중인 모양이었다. 귀엽다는 듯 웃던 그는 주섬주섬 일어섰다.

‘슬슬 저쪽으로 합류할까?’

출입구 쪽으로 향하던 케이는 허공에 둥실둥실 따라오는 홀로그램 영상을 종료하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유림이 토악질을 하며 쓰러지듯 몸을 숙였다. 그는 놀란 듯 멈칫 서서 입을 열었다.

“유림?”

밀러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는 게 보였다. 케이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밀러에게 기대 몸을 일으키던 유림이 또 기우뚱하며 비틀거렸다. 케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왓슨!”

─ 네, 마스터.

“어떻게 된 거야?”

케이는 화면을 터치해서 유림의 맥박 지수와 체온, 스트레스 지수 등의 그래프를 확인했다.

─ 스트레스 반응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과거 일로 트라우마가 생기신 듯한데 심각한 수준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더 걱정이었다. 이미 엘리베이터 앞까지 온 케이는 초조한 듯 발을 굴렀다.

─ 마스터, 우선 이것부터 좀 봐 주심이…….

“나중에 해. 일단 유림부터…….”

─ 위즈덤 본사 내부에 스마트 더스트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왓슨은 케이가 또 말을 자르기 전에 재빠르게 보고를 덧붙였다. 케이의 눈초리가 허공의 보고서로 향했다.

─ 내부 조사를 시작할까요?

그는 한숨을 삼키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필 지금…….’

요한이 계획대로 잘해 준 모양이었다. 스마트 더스트가 위즈덤 로비에서부터 지하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 난 괜찮아.

유림의 목소리였다. 케이는 영상 속을 응시했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왓슨을 똑바로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걸음걸이는 한결 가벼워 보였다.

─ 가자, 왓슨.

제복을 입은 왓슨은 다행이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케이도 안심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이 잔잔한 감동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왓슨한테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말한 것이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계획에 집중하라고.

전장의 성녀, 나의 이브.

가끔은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녀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저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역시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케이는 돌아서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허공에 뜬 보고서를 훑으며 물었다.

“분포 활성도는?”

─ 99.9%로 기대 이상의 수치입니다, 마스터.

요한이 생각보다 훌륭하게 성공시켰다. 위즈덤 본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걸 보니, 아브라함 회장의 본체와 만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 내부 영상을 송신합니다.

위즈덤 본사를 잠식한 스마트 더스트는 건물 안 구석구석을 카메라처럼 훤히 찍어서 보여 주기 시작했다. 스마트 더스트는 겉으로 보이는 외관과 소음뿐 아니라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입자, 곰팡이, 세균까지 모두 스캔해서 분석한다.

‘지상층은 소돔과 관련된 부서들 위주고, 지하에 위치한 시설들이 관건이군.’

그중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두 군데였다. 지하 5층 구간의 80% 이상을 차지한 안드로이드 생산 시설과 최하층에 위치한 큐브 홀이다. 신형 안드로이드들은 열 맞춰 격자무늬로 세워진 채 창고 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 총 4,173기입니다. 이미 로스티아벤에 납품된 기기들은 제외한 숫자입니다. 모래의 도시로 옮겨진 기기들의 숫자도 꽤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숫자였다. 연맹군을 이끌고 저것들과 싸우는 건 무리다.

─ 제일 현명한 방법은 위즈덤 본사 자체를 폭발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본체가 있는 큐브 홀을 본 케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정신이 아닌 남자였다. 정말 본인의 뇌를 전산화해서 기계에 이식하다니. 그걸 성공시킨 기술도 놀랍지만 실행시킨 본인의 의지는 더욱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큐브 홀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케이는 요한과 아브라함 회장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탐색전을 끝낸 두 사람은 드디어 본론에 돌입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회장이 말을 꺼낼 때마다 크리스털 큐브 홀 전체가 벼락치듯 번쩍였다.

─ 굳이 연맹군에게 정체를 노출하면서까지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익명의 과학자가 원하니까요.”

아브라함은 미심쩍은지 말이 없었다. 요한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회장님과 단둘이서 접촉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저보고 직접 두 눈으로 회장님의 실체를 똑똑히 확인하라고 명하기도 했고요. 정말 솔로몬 프로젝트는 성공한 게 맞는지, 대니얼 아브라함은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살아 있는 게 맞는지 말입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건 개체 스스로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고, 생식기가 있다는 따위의 생물학적 기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회장님께 흥미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스트 헤븐의 시스템과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존재가 바로 회장님이시니까요.”

─ 호오…….

케이는 불쾌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왓슨과 스마트 더스트를 저 변태에게 이입하는 건 짜증 났지만 요한은 아주 훌륭하게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가 아브라함 회장의 성격과 취향을 잘 알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을 듯했다. 아브라함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쏙쏙 뽑아서 그의 귀가 쫑긋하게 만드는 데에는 그만 한 인재가 없었다.

─ 나도 그에게 흥미가 많지. 그가 만든 낙원의 시스템은 내 이상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 그런데 말이야, 최근 내 관심을 끄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겼어.

“왓슨 3세 외에 말입니까?”

요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큐브 홀이 번쩍이면서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브라함 회장은 흥분한 듯 계속해서 말했다.

─ 이브 페트로비치.

가만히 지켜보던 케이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얼어붙은 눈으로 요한과 아브라함 회장이 대화하는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 현재는 정유림 소위라는 이름과 직책으로 살고 있다지? 브루클린의 성녀라고 불리는 그녀 말이야.

요한은 말문이 막혔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아까 전에 케이에게 맞아서 부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일단 침묵으로 응수했다.

─ 이브에 관한 옛 기밀문서들은 모두 파기된 채 남아 있는 게 없더군.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게 있었어. 이브가 아닌 정유림이란 이름으로 말이지. 최근 기록이었어. 정말 놀랍도록 흥미진진하던데?

케이는 긴장한 듯 하얘진 손을 꽉 쥐었다. 그가 유림에 관해 흥미를 가질 걸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초조함에 숨이 막혀 왔다.

큐브 홀의 한쪽 벽이 열리고 반짝이는 거울들로 가득 찬 방이 나타났다. 소돔 포주의 거주지로 알려진 거울이벽의 신전이었다. 그 안에서 황금 가면을 쓴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솔로몬이었다. 그는 요한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가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케이는 잇새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낙원 뉴스의 조셉이군.”

저 녀석이 안드로이드인 건 알고 있었지만 솔로몬이었을 줄이야. 실제로 아브라함 회장이 밖에서 몸처럼 사용한 건 알렉스가 아니라 조셉이었다는 이야기였다. 클론이자 아들로 알려진 알렉스 아브라함 쪽이 오히려 위장용에 불과했다는 건가?

조셉의 모습을 한 아브라함은 요한을 마주 보고 서서 빙긋 웃었다.

“자, 이제 이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케이는 두 사람의 영상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불안에 잠긴 눈초리였다. 그는 요한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솔로몬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준비해, 왓슨.”

─ 예?

“곧 마지막 손님이 도착한다.”

케이의 눈짓에 평의원들의 뇌가 담긴 여덟 개의 표본병들이 카트에 실린 채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앙 동력 장치를 향해 굴러 가는 카트에서 표본병들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서로 짤랑짤랑 부딪혔다.

왓슨은 에덴 타워 시스템과 연동된 융합 장치를 가동시키며 표본병들 속의 뇌를 꺼냈다. 케이는 긴장이 팽배한 얼굴로 조용히 허공을 노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왓슨은 그의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눈치챈 듯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 그럼 융합을 시작하겠습니다.

* * *

에덴 타워 지하에 위치한 왓슨 연구소는 폐쇄 도시처럼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림은 께름칙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가길 꺼렸다.

“왜 그래?”

커크가 뒤에서 팔꿈치로 그녀의 등을 찌르며 물었다. 유림은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어두컴컴한 통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그냥…….”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느낌이 스멀스멀 전신을 휩쓸고 있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토악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면서 내딛는 발걸음에 저항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이 앞은 끔찍한 곳이라고.

“나 여길…… 알고 있어.”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가는 기억들이 화살처럼 그녀를 공격했다. 유림은 비틀거리며 땅을 짚었다.

“괜찮아?”

밀러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유림은 걱정하는 그에게 애써 웃어 보였지만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결국 바닥에 웩웩거리며 구토를 하고 말았다.

─ 트라우마 때문이에요. 이브 페트로비치는 지하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생체 실험을 당했으니까요.

왓슨 3세는 안타까운지 위로의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선 지옥 같은 기억일 텐데 데리고 와서 미안하다는 투였다. 인공지능치곤 놀라울 정도의 배려심이었다. 그녀는 유림의 앞에 다가오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 기억나세요? 이곳에 갇혀 있던 당신을 한 소년이 구하러 왔던 것을…….

토악질을 하던 유림은 멍한 눈으로 왓슨 3세를 응시했다. 퀭해졌던 그녀의 눈가에 차츰 빛이 어렸다.

─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유림은 핏기가 없는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그랬지.”

한 소녀를 구하겠다고 인류 역사상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창조해 낸 소년이 있었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그는 인간들에게 주어선 안 될 것들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의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숨소리만을 위해서.

유림은 바닥을 짚고 일어서서 손을 털었다.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왓슨 3세는 기력을 회복한 유림을 보며 오동통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가자, 왓슨.”

─ 네!

어두침침한 복도 끝에는 두꺼운 철문이 엑스 자 모양으로 잠긴 채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제한 구역이었다. 왓슨은 손가락 터치로 1급 제한 구역의 잠금을 풀었다. 커크와 랜스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왓슨은 세 갈래 길에서 그들을 왼쪽으로 이끌었다. 적막에 휩싸인 유리 벽 너머 방들에는 푸른 조명에 빛나는 시험관들이 보였다. 커크와 랜스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힐끔거리며 실험실들을 구경했다.

이윽고 등장한 높다란 벽은 마치 도서관 사물함처럼 유리 덮개로 된 수많은 칸막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왓슨은 그 앞을 서성이더니 정중앙에 위치한 보관함으로 붕 떠올라 이동했다.

─ 보관함 SY17B.

유리관으로 된 상자가 서랍처럼 튀어나오자 천장에서 집개 모양의 기계가 내려와 보관함을 잡았다.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는 상자를 보는 유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메리의 뇌였다. 연회색질의 두 개의 반구는 그녀의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메리…….”

보관함을 품에 안은 유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들 충격받은 듯 멍하니 서 있는 가운데 밀러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유림의 어깨 너머로 메리의 뇌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커크와 랜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외면했다. 잠시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때 왓슨 3세가 다급히 외쳤다.

─ 쉿!

다들 긴장한 듯 전투 자세를 취하며 몸을 낮췄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밀러의 표정에 왓슨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 위즈덤의 안드로이드예요.

왓슨은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지하 엘리베이터 쪽에서 집무관 복장을 한 안드로이드 하나가 또각또각 걸어오고 있었다. 갈색 제복을 입은 그녀는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정찰했다.

“에덴 타워의 집무관들은 원래 다 위즈덤의 안드로이드들이잖아.”

유림은 그게 새삼 뭐 큰일이냐는 듯 물었다. 왓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그란 이마를 찌푸린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 제 말은 위즈덤에서 이번에 새로 제작한 신형 안드로이드라는 거예요. 최근 평의회는 에덴 타워의 집무관들을 싹 교체했어요. 바로 저 신형 안드로이드들로 말이에요.

“신형이라면…… 병기형 안드로이드를 말하는 거야?”

─ 맞아요. 로스티아벤의 정예 부대인 STF도 현재 80% 이상이 병기형 안드로이드들로 이루어진 상태예요. 신형 안드로이드들은 저와 시스템 링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명을 듣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죠.

“그럼 쟤네를 통솔하는 건 누군데? 평의회가 하진 않을 거 아니야.”

─ 위즈덤에서 직접 하고 있어요.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낙원의 심장부에 적들이 풀어 놓은 들개가 판치고 있는 상황이라니. 유림은 긴장한 얼굴로 이를 꽉 물었다.

“STF의 팔십 퍼센트 이상이면 한두 명이 아니잖아. 그건 곤란한데…….”

“저놈들 강하냐?”

커크가 모퉁이 쪽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물었다. 그는 ‘그래 봤자 고철 덩어리 아니야?’라는 표정으로 으쓱거렸다. 유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교전했다가 죽을 뻔했어. 일반 군인들은 상대도 안 될 거야. 전투력은 델타 이상이라고 보면 돼.”

“으아! 진짜야?”

델타 이상이라니 전투 능력치가 얼마나 괴물급인 거야? 커크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영상 속 집무관의 모습을 훔쳐봤다.

“최대한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아. 머리통을 박살 내지 않는 이상 끝까지 공격한다고.”

“하지만 돌아가려면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네 사람은 코너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안드로이드 하나라면 손쉽게 제압하고 넘어갈 만한 수준이긴 했다. 저들과 교전 경험이 있는 유림이 나머지 세 사람에게 설명했다.

“저놈들은 적을 발견하면 곧장 아군에게 지원 요청부터 날려.”

“그럼 눈치채기 전에 무력화시키는 게 관건이겠네.”

“맞아. 왓슨, 네가 저 녀석 주의를 좀 끌어 봐. 그 틈에 커크나 내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왓슨에게 지시를 내리던 유림의 눈이 커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누가 또 내리고 있었다.

“망할, 한 놈 더 왔잖아!”

“뭘 저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야? 이러다가 여기까지 오는 거 아니야?”

─ 이런…….

왓슨이 낭패라는 듯 끙끙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 아무래도 수색 명령이 내려진 것 같아요.

“수색 명령?”

─ 사라진 평의원들을 찾고 있나 봐요. 집무관 둘이 지하로 더 내려오고 있어요.

“평의원들을 왜 여기서 찾아? 찾으려면 S관 쪽을 뒤져야지.”

유림의 말에 커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우리를 찾고 있는 거 아냐?”

“설마…….”

잠자코 있던 밀러가 입을 열었다.

“작전 솔개에서 두더지로 전환한다.”

작전명 솔개가 스카이웨이Sky way였다면, 작전명 두더지는 언더그라운드 웨이Underground way였다.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럼스펠드 대위는 밀러의 작전 변경 명령에 즉각 답신했다.

─ Yes, sir.

그의 아크레인은 에어쉽 승강장에서 대기 중으로 날아올랐다.

왓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장섰다.

─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가도록 하죠.

지하 연구소 제일 깊숙한 곳에는 반즈 박사의 연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유림은 시험관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신체 일부들을 발견하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커크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악취미네. 여기 프랑켄슈타인71)이라도 살아?”

“왜? 무섭냐?”

농담을 주고받는 커크와 랜스와 달리 밀러의 눈은 뭔가를 느낀 듯 고요히 일렁였다. 기체 속에서 보글거리며 떠 있는 팔다리는 아직 썩지 않은 채였다.

“누가 이미 뒤엎고 갔나 봐. 아니면 주인이 이사라도 갔나? 안이 텅텅 비었는데?”

커크가 연구실 안쪽을 둘러보고 나오며 말했다. 랜스도 한 발 안쪽으로 디디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반즈 박사의 개인 연구실 내부는 물건들을 급히 찾고 옮긴 듯 엉망진창이었다. 벽 쪽에 숨겨져 있던 비밀 실험실 입구와 기밀 자료실들도 활짝 열려 있었다. 유림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밀러도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하 대피로 입구에 도착한 그들은 왓슨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뒷짐을 지고 선 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여기서부터는 저 없이 가셔야 합니다. 대신 다른 안내자분들께서 여러분을 모실 거예요.

“다른 안내자?”

동굴처럼 어두운 입구 쪽에서 후드를 입은 여자 세 명이 걸어 나왔다. 제일 앞에 선 여자가 유림을 보더니 망토에 달린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이마에 찍힌 웁실론의 상징 ‘Y’ 자 화상이 붉게 나타났다. 커크는 예쁜 얼굴에 저게 웬 재앙이냐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밧세바가 보낸 거야?”

유림이 여자에게 반갑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혹시 몰라서 대기하고 있었죠.”

“이쪽은 실비아, 폐쇄 도시에서 웁실론들을 이끌고 있어. 밧세바의 오른팔 격인 사람이야.”

유림은 두 일행에게 서로를 간단히 소개했다.

“헤벨의 함장이신 마이클 밀러 중령님이시고, 동료인 커크와 랜스.”

“반갑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움직이시죠.”

실비아가 재촉하며 앞서 걸었다. 유림 일행이 쫓자 나머지 웁실론 두 명은 대피로 입구의 문을 닫은 뒤 따라왔다.

총총걸음으로 뒤쫓던 유림은 미궁에 들어서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실비아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체력이 약한 그녀들은 웬만하면 뛰는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이야?”

“STF가 미들 타운을 습격했습니다. 피닉스 부대가 일방적으로 고스트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 같은데 소식을 들은 나츠 군이 곧장 미들 타운으로 향했습니다. 드레이크 씨도 쫓아갔어요.”

“피닉스 부대?”

“로스티아벤의 새로운 정예 부대라고 합니다. 무슨 로봇들로 이루어진 부대라던데 무지막지하게 강하답니다.”

왓슨이 말했던 안드로이드 부대다. 그녀 말대로 새로운 조직 편성이 끝난 모양이었다. 새 부대의 이름까지 붙여 놓다니.

“그 두 사람만 간 거야? 둘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군부대 하나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일 텐데.”

“그래서 저희도 걱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합류할까?”

밀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못하는 유림에게 넌지시 물었다. 유림은 고민하듯 어둠 속을 응시했다.

“혹시 상대측 지휘관은 누군지 알아?”

실비아는 경멸 어린 눈초리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고스트 사냥꾼이라고 소문난 그놈입니다. 특보대의 셰인 필란 중위요.”

“필란 중위라고?”

유림은 인상을 쓴 채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래의 도시 방향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가 타오르듯 일렁였다.

“실비아, 방향 바꿔.”

뒷말은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실비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모래의 도시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셰인은 찝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무너진 콘크리트 잔재 위에서 한숨을 내쉬며 눈두덩을 주물렀다. 굉장한 피로감이다. 안드로이드들을 조종하는 건 정신적인 소모가 큰 운동이었다.

위즈덤이 개발한 신형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이 뇌파로 직접 명령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게 특장점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얼핏 굉장히 획기적으로 보였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뒤따랐다.

처음 명령 전달을 시도할 때는 헛구역질에 호흡곤란까지 경험했다. 좀 익숙해진 지금도 지속적인 두통 때문에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대열을 이탈하는 기기가 생겨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즉,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지휘관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시스템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인원은 총 서른 명. 즉, 안드로이드 서른 기를 혼자서 지휘하고 있었다. 훈련을 할수록 더 많은 인원을 지휘할 수 있다는데, 솔직히 서른도 버거웠다.

‘윽, 코피잖아!’

셰인은 손등으로 코를 벅벅 문지르다가 묻어나온 피를 보고 하얗게 질렸다.

‘진짜 괜찮은 건가?’

검은색 전투복에 붉은색 조끼를 입고 있는 피닉스 부대는 전투병들의 생김새가 모두 동일했다. 굳이 차별을 둘 필요가 없긴 했지만 너무 인간미 없다는 느낌이었다. 함께 싸우고 있어도 전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롭다.

전장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는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고 지냈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저번 형무소 테러 사건 때 델타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셰인은 발밑에 너부러진 시체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부대원들을 통해 들려오던 비명 소리도 이제 거의 잦아들고 있었다.

“대강 끝냈으면 이만들 철수하지?”

그는 손등으로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보며 명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한지 모르겠다. 죄책감이 드는 건 아닌데, 그냥 불쾌한 기분이었다.

이곳은 미들 타운의 중심부인 화이트 채플 근방이었다. 고스트들이 자주 다니는 술집이나 레스토랑 등이 모여 있는 장소다. 튀어나온 철골들과 짓다 만 건물들 사이로 툭 튀어나와 있는 간판들이 부서진 채 내려앉은 게 보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뒷골목 쪽으로 도망치다가 죽은 이들이 쓰레기통 위에 걸레짝처럼 쌓여 있었다.

─ 아직 주거 지역의 청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자와 아이들 대부분이 흩어져서 도망친 듯합니다. 10분 안에 마무리 짓겠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이는 건가? 이딴 건 작전이 아니다. 학살이었다. 굳이 자신이 지휘를 해야 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살인 기계들이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뿐이다. 저항하지 않는 노약자들도, 이미 투항하겠다고 무릎을 꿇은 자들까지도.

─ 모래의 도시 상층부 쪽으로 달아난 인원은 어떡할까요?

피닉스 부대원들은 그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음성을 보내왔다. 셰인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발밑에 너부러진 잔재들을 걷어찼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대충해! 빈대 한 마리까지 잡아 죽일래?”

─ 중위님, 적습입니다!

─ 인식 번호 PHA12, 2시 방향에 아군 3기 파손! 지원 요청합니다.

콘크리트 잔재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던 셰인은 의아한 눈초리로 소리쳤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적습이라니? 남은 고스트들은 저항 의지도 없을 터였다. 그는 삑삑거리며 깜빡이는 스마트 워치의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녹색 연결 신호가 우수수 사라지고 있었다. 연결이 살아 있는 기기들도 적과 교전 중이라는 붉은빛을 띠었다.

─ 인식 번호 PHA21, 9시 방향에 델타 확인!

“델타라고?”

적습 보고를 하는 기기들은 모두 화이트 채플에 있었다. 셰인은 그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선 그는 전투 대열로 선 피닉스 부대를 발견했다. 적과 대치 상황인 듯 그들은 불빛이 꺼진 어둠 속에서 자욱한 먼지 사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오싹한데.’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그의 발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안드로이드 사이를 헤집던 손으로 얼굴을 긁적였다.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어디선가 그르렁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탕!

날카로운 총격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동시에 굳어 있던 셰인의 앞으로 안드로이드 병사 하나가 점프하며 몸을 날렸다. 그는 셰인 대신 총탄을 맞고 머리통이 터진 채 쓰러졌다.

‘뭐, 뭐지?’

셰인은 동그랗게 커진 눈을 끔뻑였다. 그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아레나가 열리던 무대 쪽을 빤히 응시했다. 무대 가운데 누군가 서 있었다. 특수대원이 입는 검은 전투복, 가슴에 새겨진 쌍검에 독수리 문양.

아몬드형 눈동자의 주인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셰인은 놀라서 숨을 멈췄다. 그 옆에는 저격 소총을 쥔 나츠가 그를 겨냥한 채 서 있었다.

“이런, 씨발!”

그는 냅다 돌아서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셰인의 등을 보던 나츠는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피슉!

이번에도 그의 등 뒤로 안드로이드 하나가 몸을 던져 총탄을 막았다. 지휘관을 지키기 위해 몰려드는 안드로이드들을 보며 드레이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쳇, 병사들을 방패 삼아 빠져나가는군.”

화이트 채플 밖으로 나온 셰인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드레이크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을 낮춘 채 크르렁, 크르렁거리던 그림자들을.

‘대체 저 많은 수의 델타가 다 어디에서 온 거야?’

답이 뇌리를 번뜩이며 스쳤다. 수용소다! 형무소 테러 사건 때 수용소에서 탈출한 델타들이 틀림없었다. 미들 타운에 숨겨 놓고 있었던 거로군.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도망치던 셰인은 멀리 에어쉽들이 보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중앙 활주로 근처에 대기시켜 놨던 수송용 에어쉽들이었다.

“잡아!”

쫓아오던 드레이크가 외쳤다. 그의 명에 델타들이 바닥을 달려서 무섭게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셰인은 까무러칠 듯 놀란 채 젖 먹던 힘까지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측면의 무너진 건물 틈새로 달려오던 유림 일행은 상공이 뻥 뚫린 활주로를 향해 달려가는 셰인과 안드로이드 부대를 발견했다. 유림은 셰인의 뒤를 추격하는 드레이크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안드로이드와 접전을 벌이며 쫓아가는 델타들까지, 아주 장관이었다.

유림은 허둥지둥 에어쉽에 올라타는 셰인의 뒤꽁무니를 포착하고는 눈초리를 가늘게 접었다.

상황 파악 완료.

그녀는 빠르게 달려오는 델타의 딱딱한 등껍질을 구름판처럼 밟고 도약했다. 델타가 울부짖으며 점프하자 유림은 그 반동으로 공중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막 이륙하는 에어쉽 문 사이로 날카롭게 발차기를 날렸다.

“크어억!”

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던 셰인은 그녀의 발에 얻어맞고선 휘청거리며 고꾸라졌다. 그가 허공으로 기우뚱 떨어지자 같이 탄 안드로이드가 그의 몸을 황급히 붙잡았다. 유림은 바닥에 착지하며 아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저 미친년이…….”

무식하게 힘만 좋아 가지고! 셰인은 왼쪽 뺨을 부여잡으며 다시 에어쉽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는 부러진 이를 허공에 퉤 뱉으며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정유림, 너 미쳤어?”

“닥쳐,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유림은 나츠의 총을 뺏어 들더니 그를 향해 ‘탕!’ 쐈다. 화들짝 놀란 셰인은 재빨리 문 뒤로 숨었다. 그는 문짝에 정확히 날아와 박힌 총탄을 보고선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보다 뛰어난 유림의 사격 실력에 나츠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운 하나는 더럽게 좋네.”

유림은 이를 바득 갈며 멀어져 가는 셰인의 에어쉽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는 뻥 뚫린 활주로 밖으로 쏜살같이 날아 도망치고 있었다.

피슉.

혼란을 틈타 뭔가가 날카롭게 기류를 갈랐다. 궤도를 그리며 날아간 작은 주사기가 유림의 어깨에 제대로 ‘콕’ 하고 박혔다.

“아야!”

유림은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밀러가 놀라서 소리쳤다.

“유림!”

주삿바늘을 발견한 그녀는 바로 잡아서 뽑았다. 주사기 내 피스톤이 이미 바늘로 약물을 투입한 상태였다. 붉은 핏방울이 뾰족한 침 끝에 똑 맺힌 채 떨어졌다. 밀러는 피 묻은 바늘 끝을 스마트 워치에 가져다 댔다. 음성 반응으로 파란색 불이 들어왔다. 독은 아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림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그냥 따끔 정도? 괜찮습니다.”

“어디서 날아온 거지?”

“위쪽이었던 것 같은데…….”

유림은 하늘 위를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셰인의 뒤를 따라서 도주하던 상대 에어쉽은 겨우 한 기뿐이었다.

“무슨 약물인지 성분이 정확히 확인되질 않아. 돌아가서 왓슨에게 검진받는 게 좋겠어.”

“에덴 타워로요? 거긴 집무관들이 쫙 깔렸잖아요.”

유림은 상처에 일단 상비약을 바르며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총탄에 맞은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금방 말끔히 낫습니다. 마취제는 아닌 것 같으니 폐쇄 도시에 가서 검진받으면 되겠죠. 것보다…….”

유림은 고양이 같은 눈초리를 치켜세우며 홱 돌아섰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츠에게 소총을 던져 준 뒤, 드레이크를 향해 사뿐사뿐 걸었다. 그의 주변에는 델타들이 원을 그린 채 한데 모여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못 본 새 우리 부대 식구들이 꽤 늘었네?”

“아, 소위님! 그게 저기…….”

나츠는 드레이크를 대신해 변론이라도 하려는 듯 앞으로 튀어나왔다.

“드레이크 씨는, 그게 그러니까…….”

유림은 나츠를 무시한 채 드레이크를 빤히 응시했다. 드레이크는 말없이 차분히 서 있었다. 창백한 그의 안색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엎드린 델타들은 주먹 쥔 그의 양손만 쳐다보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보던 유림의 눈동자가 서서히 일렁였다.

“네 권속이구나.”

드레이크의 눈이 흠칫 커졌다. 밀러의 눈초리도 날카롭게 돌변했다. 유림은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았다. 은색 칼날이 순식간에 그의 턱밑을 겨누며 다가왔다. 드레이크는 곁눈질로 그의 목젖에 닿아 있는 칼끝을 흘끗거렸다. 나츠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델타의 권주가 그간 내 코앞에 있었다니.”

유림은 살기를 억누른 채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을 홀린 듯 쳐다보던 드레이크는 애써 쓴웃음을 지었다.

“제 권속인 건 맞지만, 제가 만든 건 아닙니다.”

“네 권속인데 네가 창조한 게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장난인가?”

유림은 여차하면 그의 목을 벨 기세로 손에 힘을 주며 되물었다.

“대니얼 아브라함.”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쉰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의 눈초리엔 덮을 수 없는 살기가 남아 있었다. 해묵은 감정과 기억 속에 잔존하던 불씨였다.

“스타시티 회장?”

“오래전 그자와 계약을 했습니다.”

적대감으로 가득하던 유림의 눈동자가 호수처럼 차분한 파동을 그렸다.

“제 권속을 넘겨주겠다는 내용이었죠.”

아브라함은 그의 혈액을 채취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델타니 바이러스니,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외면했다. 하지만 사태는 점차 심각해졌다. 델타라 불린 감염자들은 어느새 세상의 재앙이 되었고, 그녀들의 울음소리는 그의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전 현재 권주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몇 년 전 얼떨결에 치료제를 맞고 말았거든요.”

드레이크는 농담을 하듯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밀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방주에 타고 있던 일족 중 마지막 하나가 너였나?”

혼혈이라고 했던가. 노아 말로는 자신과 엘, 케이와 달리 그는 일족의 피를 오롯이 간직한 후손이 아니라고 했다. 피부색도 생김새도 조금씩 달랐지만 신체 능력은 뛰어나다고.

밀러는 드레이크의 권속인 델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엘과 자신의 권속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 형태의, 다른 성질의 권속.

“낙원에 온 이유는?”

유림이 나직이 묻자 드레이크는 여전히 목에 닿아 있는 그녀의 칼끝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고 대답했다.

“제 권속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드레이크의 발밑에 모여 있는 델타들을 바라보던 유림은 뭔가 떠오른 기억에 미간을 굳혔다.

‘델타7: 살육자’

그녀를 마지막으로 처치한 건 드레이크였다. 그는 둥글게 부푼 그녀의 배에 꽂힌 검을 보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눈초리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유림은 드레이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목에서 천천히 검을 거뒀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밀러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익명의 과학자 K, 브루클린의 성녀, 헤벨의 함장, 오베론의 수장 그리고 옛 입실론들과 델타의 권주까지.

밀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배에 태운 녀석들 하나하나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들이었다.

이미 닻은 올렸다, 그러니 바람을 따라가 볼 수밖에.

밀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림은 굳어 있던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긴장한 채 있던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떴다.

“아군이라고 믿어도 되겠나?”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진중했다. 드레이크의 시선이 흘끔 나츠에게로 향했다. 그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끄덕였다.

“드레이크 앤더슨, 현 특별수사대 소속입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유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긴장이 사라진 그녀의 눈빛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유림은 장난스럽게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두 녀석들은 아직 델타에 익숙지 않아서 숨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이니까, 배려 부탁한다.”

그녀가 가리킨 쪽에는 커크와 랜스가 델타를 향해 총구를 겨눈 채 이를 꽉 물고 서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던 드레이크는 ‘푸흡!’ 하고 웃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유림이 ‘우리 애들이 웃기냐?’라며 그의 뒤통수를 휘갈겼다. 그녀에게 걷어차이면서도 드레이크는 죄송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드레이크를 보며 나츠는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유림에게 맞으면서도 웃는 드레이크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일순 그녀가 그를 적대시하고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중사님께선 어디 계시지?’

드레이크 씨가 소위님하고 저렇게 친밀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고만 계실 분이 아닌데. 나츠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다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또 이런 비겁한 변명에 치졸한 질투를 한다. 나츠 시게노, 언제까지 그럴래?

“아오, 씨! 얘네 왜 자꾸 나한테 오는 건데?”

커크는 총구를 들고 제자리에서 껑충거리며 소리쳤다. 델타들이 엉금엉금 기어 와 그의 주변에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키 작은 랜스는 커크의 어깨 위에 매달려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녀들도 일단은 여성이라서 여자보다 남자에게 흥미가 많습니다.”

드레이크가 별거 아니란 어조로 말하자, 유림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만 귀찮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는다는 신조답게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떨어져! 확, 그냥! 쏴 버린다?”

커크가 발길질을 하자 델타가 그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움찔한 커크는 하얗게 질리더니 울상을 지으며 유림을 향해 부리나케 뛰어왔다. 유림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거 놔.”

“브루클린의 성녀는 눈 감고도 델타 열 마리를 쓰러뜨린다며? 전설의 성녀님께서 솜씨 좀 발휘해 봐! 자꾸 나만 쫓아온단 말이야.”

커크가 징징거리자 유림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매정하게 팔을 뿌리쳤다.

“싫어.”

“쯧, 이 자리에 애덤슨 중사가 없는 게 다행인 줄 알아라. 중사가 봤으면 벌써 뒈졌다, 너.”

밀러의 옆에 딱 붙은 랜스가─저도 무서워서 숨었으면서─ 쯧쯧거리며 그를 나무랐다. 유림의 등 뒤에 숨은 커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랜스를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르면 죽어.”

“델타랑 애덤슨 중사 중에 하나만 선택한다면?”

“둘 다 싫어. 둘 다 좆같이 끔찍해.”

랜스는 낄낄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커크는 저 망할 리본 수염을 다 태워 버리겠다고 중얼거리며 이를 바득 갈았다.

“엘 카인, 거기에 있지?”

유림이 나직이 묻자 드레이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과 밀러는 무거운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가자, 나츠.”

유림은 미궁을 잘 아는 나츠를 앞장세웠다. ‘엘 카인’이라는 이름에 표정이 어두워진 나츠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어둠 속으로 향하는 다섯 명의 발걸음이 저벅저벅 움직였다.

건물 사이사이 무너진 잔재 속에 숨어 있던 고스트들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들은 전투복을 입고 걷는 유림 일행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다가, 그들의 뒤를 쫓아가는 델타들을 발견하고선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 *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케이는 코어의 조명을 환하게 밝히고 상대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을 본 조셉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였군. 익명의 과학자 K. 케이…… 케이 애덤슨 중사…….”

평소 기자를 연기했던 조셉의 깐족대는 말투가 아니었다. 아브라함 회장 본연의 말투다. 조셉은 중앙 동력 장치를 보더니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그는 내부를 한 바퀴 빙그르 둘러보며 코어를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래서, 의원들은 어찌 됐나?”

케이는 동력 장치 밑에 위치한 융합기를 가동시켰다. 긴 원통으로 된 푸른 관이 은은한 빛을 뿜으며 모습을 나타냈다. 관 속에는 액체가 담겨 있었고 그 안에는 기포 같은 게 보글거리며 떠 있었다. 여덟 명의 의원들의 뇌가 합쳐진 의식체였다. 조셉은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가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집단 지성의 구현이랄까요?”

“한층 더 고차원적인 영체 같은 건가? 사고 의식은 어떻게 작용하지?”

“저들은 현재 왓슨 3세에게 흡수된 상태입니다. 독립적인 사고를 하지만 왓슨의 지시하에 움직이고 있죠.”

“그럼 만약 내가 왓슨 3세를 갖게 된다면 저들도 내 밑으로 오게 되나?”

“물론입니다.”

케이는 융합기 앞으로 다가가더니 의원들 쪽으로 고개를 까닥하며 물었다.

“직접 대화를 나눠 보시겠습니까?”

“평의원들과?”

“정확히 말하면 평의회죠. 이제 그들은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기구, 하나의 의식체로서 존재하니까요.”

조셉은 고민했다.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이쪽으로.”

케이가 유혹하듯 손짓했다. 조셉은 멍한 눈길로 융합 장치를 쳐다보았다. 컴퓨터로 뇌 이식을 한 그와 달리 실제 뇌를 융합해서 의식체로 합친 결과물이라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케이는 그런 그를 보면서 여유롭게 기다렸다.

호기심. 인간은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모든 걸 시작한다. 진화의 시작도, 멸망의 방아쇠도 모두 인류의 호기심이란 녀석 때문이다.

조셉은 아까 의원들이 누워 있던 캡슐 안에 눈을 감고 누웠다. 유리관이 융합 장치 쪽으로 이동해 다가왔다. 캡슐 안 침대가 60도 가까이 일어서고 그의 뒷목 쪽으로 융합기의 단자가 다가왔다.

조셉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코어에 접속할 겁니다. 그 몸도 안드로이드죠? 오히려 잘됐습니다. 인간의 몸이었다면 하기 힘든 경험이었을 테니까요. 왓슨 3세와 조셉 에반스를 연결시키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벼락에 감전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조셉 에반스의 신체를 통해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블랙홀을 넘어가듯 까마득한 통로가 보였고, 그 끝에는 빛의 물결이 존재했다.

굽이치는 빛의 파도는 왓슨 3세였다.

수많은 빛의 기호로 이어진 수면 속에 거대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는 의식체가 하나 있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빛 덩어리는 평의원들의 의식이 혼재된 집합체였다. 그들은 잠이 든 채, 나무뿌리처럼 얽힌 뇌수를 녹이며 완전한 하나로 굳어지고 있었다.

눈을 뜬 조셉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이런 시도가 가능하지? 뇌를 전산화해서 컴퓨터로 이식한는 점에서는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저들은 여덟이었다. 여덟 명의 의식을 하나로 뭉쳐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키다니!

안드로이드인 조셉의 몸은 침착했지만 위즈덤의 큐브 홀에 있는 그의 의식은 경련을 일으키며 흥분하고 있었다.

이건 신세계다.

“왓슨 3세의 관리자 권한, 스마트 더스트의 전권. 로스트 헤븐의 시스템 자체를 원한다.”

“이건 거의 갈취에 가까운데요?”

케이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보아하니 호락호락 넘겨줄 기색이 아니었다. 조셉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 소위는 지금쯤 어쩌고 있으려나?”

유림의 이야기가 나오자 차분하던 케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상대가 안드로이드이다 보니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지하 미궁을 통해 폐쇄 도시로 간 것 같더군. 가는 길에 미들 타운도 들렸고. 지금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는 좀 알고 있나?”

“상태?”

“오호, 전혀 모르고 있나?”

조셉의 입가에 사악한 곡선이 걸렸다. 케이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낙원에 온 걸 들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실시간으로 그들의 이동 경로까지 체크당할 줄은 몰랐다.

케이는 헤벨에서 준비해 온 긴급 연락용 수신기를 꺼냈다. 조셉이 그건 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뭘 숨기겠나 싶었다.

밀러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긴급 상황이라며 영상 하나를 송신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원형 수신기에서 홀로그램 영상이 부연 빛으로 흘러나왔다. 허공에 뜬 영상을 보던 케이의 표정이 굳었다.

유림이 몸부림치며 악다구니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전투복에 찬 검을 뽑아 들더니 정면에 서 있던 밀러를 향해 휘둘렀다. 밀러의 옆구리를 스친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옆에 있던 랜스와 커크가 몸을 날려 그녀를 막기 시작했다. 밀러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당혹스러운 얼굴로 유림을 바라보았다. 커크와 랜스까지 주먹질로 날려 버린 그녀는 결국 진정제를 투여받은 후에야 풀썩 쓰러졌다.

“저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군. 자기 동료들까지 공격할 줄은 몰랐는데.”

조셉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송신기를 움켜쥔 케이는 숨이 멎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둠에 잠긴 행성처럼 고요한 눈이 물었다. 장난을 치던 조셉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자네의 본모습인가?”

케이의 눈동자가 암적색으로 가라앉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감정 없이 차분해 보였지만 모든 인내심을 최대한 동원해 분노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 번 묻는 걸 아주 싫어해. 유림에게 무슨 짓을 했어?”

조셉은 케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통해 대화하고 있음에도 시공간을 넘어 느껴지던 두려움과 공포. 영혼이 사로잡히는 듯한 불가항력의 힘.

그때와 아주 흡사했다. 경외라는 걸 처음 알려 준 그와의 만남과.

“알파가 말한 동족 중 하나가 너였군.”

“벌써 세 번째 질문이야, 대니얼 아브라함.”

케이의 동공이 한층 더 붉어졌다. 위험한 적신호였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어?”

조셉은 가볍게 웃더니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원, 남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군. 정유림, 그 여자에게만 반응을 보이는 건가?

“내 주특기가 원래 약물 제조거든? 예전에 엔젤 키스라는 걸 만든 적이 있었는데, 어떤 녀석이 그걸 기가 막히게 인용해서 더 기가 막힌 걸 만들어 냈지 뭔가? 어떻게 그걸 사람 뇌파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입이 안 다물어지더군.”

“…….”

“드리밍 플라워. 자네가 만든 그 아름다운 테크놀로지를 말하는 걸세. 보면 볼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기술이더군. 과학, 철학, 미학이 함께 버무려져 있어. 자네가 만든 것들은 하나같이 그래. 과학보단 예술에 가깝지.”

조셉은 케이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의 눈길엔 푸르게 빛나는 동력 장치가 담겨 있었다.

“그 완성체가 바로 왓슨 3세고.”

케이는 천천히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의 동공이 동요로 물결치듯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유림에게 쓴 약물의 기반이 드리밍 플라워와 엔젤 키스란 말인가?

조셉은 반복해서 재생되는 영상 속의 유림을 힐끔거리며 피식 웃었다.

“자네와 나의 첫 번째 합작이야. 좀 더 감탄해 줬으면 좋겠는데.”

창백한 얼굴로 울부짖는 그녀의 눈동자는 충혈된 채 초점이 없었다. 울음을 터뜨리며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분명 평소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케이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젖었다. 지나가듯 읽은 수많은 책에서 충고했다. 죄는 굴레가 되어 돌아오고, 네 손에 묻은 피는 네 사랑하는 이의 피를 보게 하리라.

하지만 과거의 그에게 그런 교리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복수의 칼을 움켜쥔 이들은 대개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다. 자신이 만든 칼날이 그녀의 목을 겨누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양손을 잘라 버릴지언정 절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자, 다시 협상을 해 볼까, 아담 페트로비치 군?”

조셉은 신이 난 아이처럼 웃었다. 케이는 목울대를 울렁이며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렸지만 답은 하나였다.

유림의 안위를 두고 저울질은 불가능하다.

“왓슨 3세를 넘기면 유림은?”

“중화제를 주도록 하지. 빨리 진정시키는 게 좋을 거야. 계속 발작을 일으키면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

“약조하는 건가?”

조셉은 개구진 눈웃음으로 피식 웃었다.

“이래 봬도 장사꾼으로서의 프라이드는 있네. 믿거나 말거나 고객과의 약속은 절대 어긴 적이 없거든.”

케이는 선뜻 승낙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왓슨 3세가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사랑스러운 소녀의 형상을 한 그녀를 보며 조셉은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홀로그램 영상으로 부유하듯 다가와 두 사람을 쳐다봤다. 케이는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 못한 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괜찮습니다, 마스터.

왓슨은 이브를 닮은 얼굴로 말갛게 웃었다.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각오한 눈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케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타이탄에게서 넘겨받은 메모리가 그녀의 회로를 번뜩이며 스친 것일까? 유림을 ‘아가씨’라 칭한 왓슨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이 순간 왓슨의 ‘마음’이 느껴졌다. 케이는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왓슨.”

─ 네, 마스터.

조셉은 기대 어린 눈동자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케이는 냉정을 되찾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시간 이후, 로스트 헤븐의 관리자 권한을 알렉스 아브라함에게 이임한다. 내 명령하에 실행된 지난 모든 프로세스와 로그를 삭제하고 남아 있는 기밀문서는 복구 불가하게 폐기하도록.”

왓슨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 알겠습니다.

눈을 뜬 그녀는 잠시 케이를 응시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케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왓슨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고였다.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스터.

허공에 관리자 센터창이 열렸다. ‘아담’이 입력되어 있던 관리자 이름 칸이 ‘알렉스 아브라함’으로 변경됐다. 조셉은 뒷짐 진 채 싱글벙글 웃음꽃을 피웠다. 케이는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출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정 소위는 위즈덤으로 직접 데려와! 중화제는 거기서 주도록 하지.”

조셉은 그의 등에 대고 소리친 뒤 피식거리며 양손을 비볐다.

“자, 그럼 뭐부터 하면 좋을까?”

─ 죄송하지만 관리자 권한 발동은 알렉스 아브라함 본인만 가능합니다. 조셉 에반스는 안드로이드 기체이기 때문에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06번을 불러 와야겠군. 일단 조셉을 융합기에 연결시켜서 왓슨 3세 본체에 날 이식시키는 작업부터…….”

조셉은 무아지경에 빠진 채 부산스럽게 떠들어 댔다. 출구로 나가던 케이는 그런 그를 향해 흘끗 눈초리를 던졌다. 조셉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케이는 헤벨과 연결된 수신기를 꺼냈다.

─ 본함 지휘 본부다.

호크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통로를 걸으며 낮게 속삭였다.

“요한에게 연락할 방법 좀 찾아 봐.”

─ 요한 제이콥스 말입니까?

“유림이 약물을 맞았어. 위즈덤 본사에서 중화제를 찾아야 돼. 그리고 럼스펠드 대위 위치 추적해서 알려 주고.”

─ 럼스펠드 대위는 낙원 내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계시더군.”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쪽에서 움직여 보죠.

통신을 종료한 케이는 에덴 타워 옥상으로 나왔다. 하늘에서 에어쉽 하나가 반짝이며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는 허공을 향해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러자 하얀 에어쉽이 쏜살같이 다가와 그를 낚아채듯 태웠다. 에어쉽 천장 위로 유연하게 착지한 케이는 몸을 낮추고 무릎을 굽혔다.

─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중사님.

“그래.”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을 겨를이 없었다. 케이의 침묵으로 분위기를 파악한 리사는 빠르게 보고부터 올렸다.

─ 헤벨의 아벨로부터 수신받은 좌표입니다.

“어디야?”

리사가 띄운 좌표는 근방이었다. 케이는 서늘한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의 붉은 동공이 아까부터 꾹꾹 눌러 온 분노로 점철된 채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기류 속에 움직이는 먼지 하나조차 놓치지 않을 기세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투명한 공기 속에 불가시 모드로 변한 아크레인이 물 흐르듯 움직이며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 거리 2, 두 시 방향입니다!

리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어쉽 천장에 서 있던 케이가 거꾸로 제비 돌며 날아올랐다. 중력을 무시한 움직임은 인공지능인 리사가 봐도 불가사의했다. 그는 허공에서 반 돌며 아무것도 없는 상공에 ‘쿵!’ 하고 착지했다. 충격에 놀란 아크레인이 흔들리면서 불가시 모드를 해제했다.

─ 애, 애덤슨 중사?

당황한 럼스펠드 대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케이는 미끄러지듯 은색 기체의 옆면을 타고 내려가 매달렸다. 그의 손이 오른쪽 문짝을 잠자리 날개처럼 ‘부욱’ 뜯어냈다.

안쪽에서 “으악” 소리가 들려왔다. 경악한 럼스펠드가 조종석에 탄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대, 대기 중인데 무슨 일이라도?”

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럼스펠드 대위는 불안한 얼굴로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라고 물으며 허리춤에 찬 총을 움켜쥐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는 몸을 숙인 채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조종석 밑에서 굴러다니는 가스총 하나가 보였다. 보통 가스 압력으로 마취제나 약물이 든 피하주사기를 발사시킬 때 쓰는 총이었다. 분노로 서늘해진 주먹에서 ‘으득’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위험을 감지한 럼스펠드는 재빨리 총구를 들고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우직’ 하며 콧등과 뺨을 스치는 바람이 일었다. 깜짝 놀란 럼스펠드는 동그란 눈으로 허공에서 반토막 난 총구를 응시했다.

케이는 들었던 팔을 내려놓으며 손에 움켜쥔 총구를 바닥에 버렸다. 좌르르 가루가 되어 쏟아지는 쇳덩이를 보며 럼스펠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케이는 표정 없던 입매를 짜증스럽게 웃으며 뒤틀었다.

“잡았네, 위즈덤의 쥐새끼.”

* * *

3층 복도 끝에 위치한 유리 벽 너머의 방. 어둠이 내려앉은 그곳에 엘 카인은 잠든 듯 누워 있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냐, 엘?’

밀러는 사지가 뭉뚝 잘린 그의 네모난 몸뚱이를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갈비뼈가 툭 튀어나오고 볼이 팬 그는 앙상하게 마른 상태였다.

처음부터 죽고 못 사는 형제애 따윈 없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인 질서와 혼돈처럼 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서로를 경멸하는 쪽에 가까웠다. 일족에서도 드물다는 쌍둥이.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등에 붙은 종기처럼 떼어 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돌아선 밀러는 괴로운 듯 벽을 짚었다. 미워도 피붙이였고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한들 완전한 타인으로 치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를 지켜보던 밧세바는 다가와서 어깨를 다독이며 그를 위로했다. 밀러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 물었다.

“유림은요?”

“반즈 박사와 함께 있소. 상처는 좀 괜찮으신게요?”

밧세바가 그의 옆구리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밀러는 벌써 다 아물었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밧세바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가 엘 카인과 형제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그나저나 정 소위는 왜…….”

밧세바는 말끝을 흐리며 밀러의 눈치를 봤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폐쇄 도시로 오는 와중 유림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그녀는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다고 흐느꼈다.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이곳까지 온 그녀는 밧세바와 웁실론들 그리고 반즈 박사를 보자마자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별안간 돌변해서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진료실 앞에는 커크와 랜스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나츠와 드레이크도 대기 중이었다. 귀퉁이가 부서진 문이 벌컥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반즈 박사가 걸어 나왔다. 모두가 긴장한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두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브…… 아니, 소위님은…….”

반즈 박사의 시선이 흘끗 밀러를 향했다. 입을 옴짝거리던 그녀는 그에게 눈짓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했다. 밀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실 안으로 따라가자 커크는 “아오!” 하고 벽에 머리를 박았다.

“답답해 죽겠네! 그냥 말해 주면 덧나냐?”

한숨을 내쉰 랜스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유림이 맞은 가스총이 원인 아닐까?”

“나도 그런 것 같긴 한데, 걔한테는 원래 웬만한 마취제나 수면제는 먹히지도 않잖아.”

커크의 말에 랜스는 양 갈래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긴 하지…….” 하고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유림을 노리고 초강력 약물을 준비했다든지 한 건 아니겠지?”

“설마…… 녀석들이 유림의 몸에 대해 어떻게 알고 그랬겠어? 아니, 애초에 우리가 로스트 헤븐에 잠입한 것도 몰랐을 텐데.”

“몰랐을까? 내부 스파이, 아직 잡지 못했잖아.”

커크와 랜스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유림은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반즈 박사는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그녀의 체온을 쟀다.

“상태가 좀 어떻습니까?”

“급성 약물 중독이에요. 아까 미들 타운에서 주사기를 맞았다고 했죠? 피검사를 해 보니 검출된 약물 성분이 낯익더군요. 과거에 비슷한 걸 본 적 있어요. 증상도 아주 흡사하고요.”

반즈 박사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엔젤 키스라고 아시나요?”

“유림의 몸에 주입된 게 엔젤 키스입니까?”

“훨씬 더 강력한 거예요. 엔젤 키스와 비슷하지만 업그레이드 버전이랄까요?”

엔젤 키스는 군에서 은밀히 사용하는 고문용 약물이었다. 이걸 맞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녀석은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력한 물질이라니,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환청부터 시작해서 환각을 보게 되고, 종국에는 정신분열을 일으키게 되죠. 난폭한 행동이 잦아지면서 주변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경우도 생기고요.”

밀러는 초조해진 듯 자리를 서성였다.

“드리밍 플라워가 나온 이후 뇌파에 직접 영향을 가하는 형식의 환각제가 유행했어요. 보통은 가스 형태인데 이건 액상인 걸 보니 중화제가 있을 거예요. 그것만 주입하면 괜찮아질 텐데…….”

“중화제만 있으면 되는 거군요.”

“문제는 쉽게 제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성분 분석이 끝났다 해도 제조 포뮬라부터 시작해서 임상 실험까지 거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대부분의 약물 제조자들은 중화제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알겠습니다. 중화제는 제가 방법을 찾아보죠. 박사님은 유림의 곁에 있어 주십시오.”

반즈 박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는 고개를 꾸벅인 뒤 문을 닫고 나갔다.

고요한 방에 혼자 잠들어 있는 일은 익숙했다. 눈을 뜨면 하얀 방에는 항상 혼자였고,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스피커를 통해 말을 건넸다. 우리에 갇힌 원숭이처럼 늘 관찰하는 타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제일 불쾌한 사람은 단연코 그 남자였다.

─ 안녕, 이브? 오늘은 무슨 꿈을 꿨니?.

카리브 해처럼 파란 눈동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소름 끼친다는 듯 뒷걸음치며 몸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팔다리는 수갑이 채워진 채 실험대 위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시야를 덮으며 다가오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유림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을 껌뻑이자 흐릿한 시야가 점차 또렷하게 초점이 맞춰졌다.

“정신 들어요? 몸은 좀 어때요?”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다가오며 물었다.

“좀 어지럽죠?

여자가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유림은 그녀와 눈을 빤히 마주쳤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의 여자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유림은 그녀의 손에 든 주사기를 보고선 방어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하얀 주사기. 그녀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저걸 맞으면 끝없는 악몽을 꾸거나 끔찍한 지옥 불을 경험하게 된다.

“영양제예요. 팔 좀 내밀어 볼래요?”

거짓말이야, 믿으면 안 돼! 알잖아, 저걸 맞으면 온몸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지고 며칠간 고통에 펄쩍펄쩍 뛰게 될 거야.

머릿속에서 속삭이던 소녀가 등을 떠밀 듯 소리쳤다.

‘도망쳐, 이브!’

침대에서 내려온 유림은 연구원을 퍽 밀치며 문을 열었다. 뒤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게 들렸다.

비상 전등이 켜진 복도를 달렸다. 힘없는 다리를 지탱하고자 발가락 끝에 잔뜩 힘을 주었다. 파지직거리며 전깃불이 번쩍였다. 어둠 속에서 얼굴 하얀 여자들이 놀란 눈을 하고 나타났다. 엘 카인, 그 자식의 추종자들이다.

“꺄아아악!”

여자들이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계단에서 보초를 보던 실비아와 드레이크가 뛰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 정 소위가…….”

웁실론들은 몸을 일으키며 어둠 속을 가리켰다. 유림이 비틀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뒤를 쫓았다. 그는 휘청대는 유림의 꽁무니를 금방 따라잡았다.

“소위님! 정신 차리십시오!”

“이거 놔!”

“으윽!”

명치를 퍽 가격당한 드레이크가 자리에 주저앉으며 끙끙댔다. 뒤늦게 따라온 나츠는 드레이크를 부축하며 유림을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드레이크를 제압한 그녀의 실력은 역시 대단했다. 유림은 창백한 얼굴로 나츠를 쳐다보더니 다시 겁에 질린 듯 도망가기 시작했다.

“소위님!”

넘어질 듯 위태롭게 뛰어서 도달한 곳은 어둠이 자욱한 복도의 끝이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낡은 환자복을 입은 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머릿속에 울려 퍼지던 목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유림은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눈두덩이 불타는 듯 뜨거웠다.

애쉬드 블론드의 그 남자가 실험실에 오는 날이면 반드시 악몽을 꿨다. 그가 연구소에 도착하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는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페로몬’이라고 불렀다. 이성을 유혹하는 향기라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우웩 하며 혀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 향이 여기서도 느껴졌다. 멍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유림은 끈적끈적한 열기가 새어 나오는 문틈을 응시했다. 그녀는 홀린 듯한 눈초리로 문을 열고 안으로 진입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서 와, 이브.”

어둠 속에 누워 있던 형체가 석고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남자는 가자미처럼 눈을 움직여서 흘끔거렸다. 눈초리를 휘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주제에 그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실룩거리며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의 냄새를 맡은 거다. 유림은 주먹을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동정이란 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어둠을 먹고 자라는 해초처럼 그의 내면에는 닿을 수 없는 깊이의 늪이 자리하고 있다. 그 속에 한번 삼켜졌다가 기어 나온 그녀로서는 그와 같은 공간에 서 있는 이 순간마저 고통스럽고 숨이 막혔다.

“참 재밌지? 우리 입장이 이렇게 뒤바뀌다니.”

“…….”

“그날 공중 정원에서 널 보자마자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을 줄이야.”

그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인 왓슨인 척 연기하던 모습의 그녀에게서 뭔가를 느꼈던 건 사실이었다. 그때 낚아챘더라면 케이에게 뺏기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역시 네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유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구역질이 났다. 녀석이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듯 지껄이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매일 저런 눈으로 실험실에 갇힌 그녀를 쳐다보곤 했다. 욕정에 물든 눈으로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듯이.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눈초리로 지금 또 자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래, 어디 다시 한 번 지껄여 보시지. 그 입꼬리를 찢어 놔 줄 테니.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의 입장은 이제 정반대였다. 사지가 없는 이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짓도 할 수 없다.

“내 본질이 뭔데?”

“넌 모든 수컷들이 잃어버린 그들의 일부야. 아름다운 절망. 모두가 널 원하지만 넌 누구의 갈증도 축여 주지 않거든.”

그가 새하얗게 웃었다. 거무튀튀해진 피부 위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녀에게 있어 ‘절망’의 상징이었던 카리브 해의 눈동자를 빛내며.

무서워할 필요 없다. 지금의 이 남자는 나약하다. 언제든 끝내 버릴 수 있을 만큼.

“이브도 그렇게 웃을 줄 알게 되었구나.”

경멸 어린 눈초리로 쿡 조소를 그리던 유림은 바로 정색했다. 그와 그녀 사이에 남은 건 악몽뿐이었다. 절망에는 색이 없다. 혼자 멋대로 미화하며 색칠한 기억에 이 남자는 역겨운 추억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넌 나와 아주 비슷해.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미치게 하거든. 난 말이야, 아주 공들여서 네게 나를 묻혀 놨어. 설령 내가 죽는다 해도 네 영혼에 들러붙은 나의 흔적까진 지울 수 없을걸?”

“시끄러워.”

“나는 점점 더 깊게 널 잠식할 거야. 우리들이 진정 하나가 되는 건 수면 밑에 위치한 네 깊은 구렁 속이 되겠지. 거기서 난 너를 아주 천천히 탐할 거야.”

그는 움푹 팬 뺨 위로 실성한 듯 웃었다. 메마른 눈빛이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귀공자처럼 아름답던 외모는 어디 가고, 추악한 몰골에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되었다. 저런 모습이 되어서까지 자신에게 집착하는 그가 소름 끼쳤다.

“지금 내 모습은 바로 너야. 헐벗고 광기에 미친 가련한 영혼. 네가 그렇게 날 쳐다보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널 그렇게 본다는 걸 알아? 우리는 닮았어. 그만 인정해! 우린 닮았다고!”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끈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눈앞에서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이성을 잃고 눈이 뒤집힌 유림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뻗어 나갔다.

목을 졸랐다.

눈 밑 근육이 뒤틀릴 때까지 팔에 힘을 주었다. 핏대가 서고 눈알이 터질 듯 부풀어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희열에 찬 것처럼 보였다.

“이브, 너의 구렁엔…… 나…… 밖에 없어…… 그렇…… 지?”

“닥쳐!”

유림은 씩씩대며 그의 입안에 주먹질을 했다. ‘으득’ 하고 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턱이 부서진 그는 입을 쩍 벌린 채 신음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 뒤로 얼마나 더 많이 때렸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복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메는 놀란 채 굳은 눈을 껌뻑였다. 유림이 칼을 쥔 손을 무자비하게 휘두를 때마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분수처럼 튀었다. 유리창에 차락차락 흩뿌려지는 핏줄기는 어느 공포영화의 장면보다도 잔인했다.

유메는 황급히 부유 체어를 돌렸다. 누군가를 불러와야 했다. 그녀는 저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저곳만큼은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날아온 유메는 진료실 앞에 있던 밀러와 밧세바를 만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메는 황망한 얼굴로 더듬더듬 설명했다. 스스로 울먹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밀러와 밧세바는 차근차근 말해 보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에, 엘 카인이 칼에…… 정 소위가 엘 카인을…….”

유메는 끅끅거리며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밀러는 단박에 사태를 직감했다. 돌아선 그의 모습이 허공 사이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밧세바는 나츠에게 유메를 맡기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절뚝절뚝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유메는 나츠에게 안겨 울었다.

“울지 마, 유메.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나츠, 나츠…….”

그녀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 동안 원하던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 심정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괴로워, 나츠. 너무 괴로워. 나츠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유메를 이해했다. 그토록 증오하던 인간이었는데 어찌하여 그의 죽음에 이리도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일까? 고작 이런 최후나 보여 주려고 우리를 버렸단 말인가?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공허함이 밀려왔다. 허탈한 기분에 눈물이 쏟아졌다. 두 사람은 처음 미궁에서 나왔던 그날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유림은 하얀 눈자위만 내놓고 서 있었다. 밀러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제 어깨를 스스로 끌어안으며 한 발짝 내디뎠다. 홀딱 젖은 머리칼과 발뒤꿈치에서 진득한 핏방울이 ‘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유림…….”

그녀는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졸린 듯 반쯤 감긴 눈에는 어떤 의욕도 없었다.

“다치진 않았어? 괜찮아?”

밀러는 행여나 그녀가 놀랄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림은 몽유병 환자처럼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양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여기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피로 물든 손바닥과 시뻘건 손가락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유림은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체 자신이 뭔 짓을 한 거냐는 표정이었다. 밀러는 유림의 팔을 잡고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난도질당한 시체 한 구가 있었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시신은 잘게 분쇄된 고깃덩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곁눈질을 하던 유림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가녀린 몸을 웅크렸다.

“내가…….”

잠긴 목소리가 두려움에 젖은 채 속삭였다.

“내가 그런 거지?”

시체의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이라고 보기도 뭐했다. 그냥 가죽만 남은 상태였다. 안의 내장들은 잘게 찢겨서 바닥과 벽 여기저기에 튀어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밀러의 눈이 얼어붙은 채 다시 유림을 응시했다. 충격이 어린 그의 표정에 유림은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지금 넌 정상이 아니야. 약물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자책하지 마.”

밀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위로했다. 그러나 이미 유림은 절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상이든 아니든 내가 그런 거잖아. 다 기억나는걸?”

“아니야! 네가 그런 게 아니야!”

밀러는 버럭 소리치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다 아차 싶어 그녀의 팔을 놓았다. 유림은 텅 빈 눈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직접 만든 잔혹한 살해 현장을 빤히 직시했다.

전투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과 암살 대상을 처리하는 것은 임무고 생존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이것은 살인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빠르게 상대를 제압하고 죽인다. 그게 늘 해 오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좀 전의 그녀는 어떻게 하면 가장 잔인하게 그를 살해할 수 있을지만 생각하며 칼을 휘둘렀다. 눈앞에서 선혈이 낭자해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움찔거리지도 않는 시체를 배 속 창자까지 못 볼꼴로 헤집어 놓고 나서야 머리를 옥죄던 두통이 끝났다.

유림은 구역질을 하며 하얀 위액을 쏟아 냈다. 우웩거리는 그녀의 등을 치던 밀러는 손을 확 뿌리치는 유림의 태도에 움찔하며 물러섰다.

“위로하지 마.”

“유림…….”

“이건 그 녀석이 메리에게 한 짓과 다를 바 없어.”

하얀 어둠이 몰려오고 의식이 까맣게 잠식되는 시간, 수면 밑에 잠수한 그녀는 물속에 부유하던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녀는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발버둥 치며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유림은 그녀를 수면 위로 건져 올렸다. 괜찮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물에서 나온 소녀의 붉은 눈은 증오에 젖어 있었다.

유림은 그녀를 구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피가 선연했다. 문득 케이가 스치듯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붉은 눈의 일족은 누구나 잔혹한 본성을 품고 있다고.

어쩌면 그녀가 건져 올린 게 이브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유림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물안개만 남은 주위에 소녀는 없고 질척질척한 핏물만 사방에 튀어 있었다.

웅크린 몸은 상처받았다는 몸짓이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곳은 광기의 현장이었다. 가장 연약한 것이 부서진 장소.

먹색 수면에 얼굴 없는 형체가 비쳤다. 양손으로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엘 카인이 웃고 있었다. 수심 없는 호수에 구렁이 아득했다.

본성이 아가리를 벌리고 내면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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