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18/21)

Chapter 3

“이쪽입니다.”

발을 내딛자 철퍽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내하던 안드로이드 헌병이 바닥에 불빛을 비추며 설명했다.

“파기된 안드로이드에서 흘러나온 수액입니다. 미끄러질 수 있으니 발밑을 조심해 주십시오.”

파기된 병기형 안드로이드 수는 총 서른 기, 그리고 발견된 시체가 하나.

총알이 시신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이래서야 뇌를 꺼내서 조사해도 효과가 없겠군. 부대는 완전 괴멸에 지휘관은 암살되었다. 비밀리에 거행된 미궁 소탕 작전이 대실패했다는 뜻이다.

솔로몬은 헌병과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걸었다. 이윽고 나타난 광경에 모두 걸음을 멈췄다. 양 갈래 길이 교차하는 길목에 델타의 사체가 너부러져 있었다. 사체가 쓰러진 벽에는 그녀의 피로 쓰인 글귀가 섬뜩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There is a judge for the one who rejects me and does not receive my words; The word that I have spoken will judge him on the last day.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들지 아니한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내가 행한 말이 결국 그를 심판하리라.69)

솔로몬은 얼굴에 쓴 가면 구멍 너머로 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대니얼은 말이지, 위대한 예언가였단다. 그는 신의 대리인 같은 존재였어. 그에게는 신을 대신해서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

글귀 속 심판자는 그를 빗댄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를 심판한다는 의미일까?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은 경고문이었다.

한편 돌무더기 사이에 숨어 있던 셰인은 고개를 빼꼼 내밀며 갸웃거렸다.

‘솔로몬?’

황금 가면의 솔로몬이라면 소돔의 포주로 유명한 자였다. 황금의 바벨탑의 실세인 그가 위즈덤의 대표이자 알렉스 아브라함이라는 사실은 얼마 전 그가 스스로 언론에 밝혔다.

며칠 전 실제로 본 알렉스 아브라함의 신장은 최소 6피트가 넘는 거구였다. 그런데 눈앞에 황금 가면을 쓴 그의 키는 그에 한참 못 미치는 듯했다. 마른 어깨는 왜소한 편이고 신체 비율도 전체적으로 달라 보였다.

“어떤 새끼가 이랬어!”

고함을 친 솔로몬은 우리야의 시체를 걷어차며 광분했다. 셰인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멍청한 놈이 뒈질 곳이 없어서 이런 데서 뒈지고! 뒈지려면 혼자 곱게 뒈질 것이지, 도대체 박살 난 기기가 몇이야? 손해가 막심하잖아!”

그는 이미 차가워진 우리야의 시체에 거듭 발길질을 하며 성질을 부렸다. 못쓰게 된 병기들이 못내 아까워서 저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전투 중 전사한 군인을 저런 취급하다니, 셰인은 주먹을 쥔 채 분을 삭였다.

과격하게 날뛰던 솔로몬의 얼굴에서 가면이 덜렁거리다가 툭 떨어졌다. 숨어서 지켜보던 셰인은 미간을 좁혔다. 벗겨진 가면 속의 얼굴을 본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숨을 들이켰다.

‘낙원 뉴스의 조셉이잖아?’

그는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줍더니 흙을 탈탈 털었다. 한쪽 발은 여전히 숨진 우리야의 얼굴을 밟고 있었다.

‘저 녀석이 솔로몬이라고? 그럼 알렉스 아브라함은 뭐지?’

다시 가면을 고쳐 쓴 그는 안드로이드 헌병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멀어서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셰인은 몸을 낮춘 채 그들 가까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체 델타들은 또 어디로 숨은 거지? 역시 모래의 도시인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이참에 델타 청소도 할 겸 고스트들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게 낫겠어.”

혼잣말을 하는 건가? 아니면 누구와 대화 중인가? 조셉은 가면을 쓴 채 웅얼거리며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 글을 남긴 녀석도 찾아야겠군.”

그러더니 돌연 제자리에서 멈췄다. 그는 뒤를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셰인은 흠칫 굳어서 허공을 응시했다. 등을 바짝 붙인 돌무더기 너머로 조셉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셰인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설마 아니겠지. 숨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눈치챘을 리가 없어.’

그의 바람과 달리 머리 위에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 손바닥으로 돌무더기를 짚고 그의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셰인은 덜덜 떨리는 오금에 힘을 주며 이를 사리물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델타와 마주친 것보다 더한 압박감이다. 쭉 찢어진 가면 구멍 사이로 무표정한 시선이 느껴졌다. 조셉은 쪼그리고 앉은 셰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필란 중위님?”

“그, 그게…….”

셰인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바로 저승길이다.

“나, 나츠 시게노가 탈주했습니다!”

“…….”

“아직까지 에덴 타워 밖으로 나간 흔적은 없어서, 가장 높은 확률의 도주로인 미궁을 조사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혼자서 말입니까?”

조셉이 의심스럽게 묻자 셰인은 난감한 눈초리로 시선을 회피했다.

“나츠 시게노를 감시하는 건 제 소관이었던지라…….”

긴장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호흡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 녀석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야 하는 거지? 저놈은 그냥 낙원 뉴스의 편집장일 뿐이잖아. 존칭을 해 줄 필요도 없어. 솔로몬인 척 허세를 부리는 거야! 하지만 일개 기자가 미궁 안까진 어떻게 들어왔을까?

“필란 중위.”

“예?”

조셉은 셰인을 빤히 응시하더니 물었다.

“출세하고 싶지 않습니까?”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조셉은 허공에서 엄지와 검지로 스냅하며 ‘딱!’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전투형 안드로이드들이 두 줄로 열 맞춰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조셉은 얼굴에 쓴 가면을 정수리 뒤로 젖혔다. 얇은 입술이 모습을 드러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중위가 지휘할 새로운 부대입니다. 이번 작전만 성공한다면 2계급 특진을 약속하죠.”

셰인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이 녀석이 솔로몬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수의 병기들을 보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조셉이 떼 부자여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럼 이자가 정말 솔로몬이자 위즈덤의 대표란 말인가?

“평소 알려진 필란 중위의 특기니 어려울 건 없을 겁니다. 가서 고스트들을 쏴 죽이고 오세요. 한 놈도 빠짐없이 씨를 말리고 와야 합니다. 잘하실 수 있겠죠?”

* * *

밀착형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제인은 하얀 에어쉽에서 내리자마자 가게 앞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내린 멜리사는 경계 어린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돼지 모형의 간판이 정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 어서 오세요! 갓 구운 빵, 신선한 재료! 하늘은 나는 돼지입니다.

“제인! 이쪽이야!”

원형의 유리 테이블 위에 따뜻한 블랙커피 한 잔이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었다. 사샤는 제인을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하얀 의자에 앉은 그녀는 평소처럼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있었다.

제인은 문 쪽을 힐끔거리며 불안한 눈초리로 사샤의 맞은편에 앉았다. 빵집 주인인 폴이 나와 출입문에 ‘Closed’ 전등을 올리며 영업 마감을 알렸다.

“오늘은 숙녀분들께 전세를 내 드리지요.”

그는 커피 한 잔을 더 내오며 빙그레 웃었다. 제인은 폴을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미간에 인상을 쓴 채 맞은편 사샤에게 속닥였다.

“사샤, 저 사람…….”

“걱정 마. 좋으신 분이야. 어디 가서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분은 절대 아니니까.”

“여긴 사람들이 너무 오가는 장소인 것 같아.”

제인은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람의 도시 내 상업지구 한가운데였다. 폴이 ‘Closed’ 전등을 켠 순간, 가게 유리창들이 불투명하게 변했다. 덕분에 밖에서는 가게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제인은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사샤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네가 타고 온 에어쉽은 추적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어. 평의회도 군부도 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그래도 왓슨의 눈까지 속일 순 없어. 알렉스 아브라함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야.”

“모를 거야.”

사샤가 커피 잔을 들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제인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모를 거라니, 그게 무슨…….”

“그나저나 뒤에 계신 분은 클라크 장관님 아니신가요?”

“반갑습니다, 피보바로바 양.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죠?”

제인의 뒤로 걸어온 멜리사는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제인보다 훨씬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사샤는 흥미롭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간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던 두 사람이 손을 잡다니 재밌는 조합이었다. 물론 주로 제인이 사고를 치고 멜리사가 비난을 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샤, 역시 여긴 안 되겠어. 사람들 눈에 띌 가능성이 너무 높아. 저 빵집 주인도 왠지 석연치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엘 카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여긴 너무 오픈된 장소 같습니다. 현재 낙원 내에선 제인의 신변도 안전하진 않으니까요.”

아브라함이 보낸 안드로이드가 왓슨 본가까지 들이닥친 판국에, 그들의 본거지로 자진해서 납셨으니 목숨이 두 개라도 위험했다.

사샤가 입을 열었다.

“아브라함 회장은 아직 정식으로 낙원의 관리자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시스템 관리자로 이름을 올리려면 설계자의 승인이 필요하죠. 엘 카인은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관리자 권한’을 이행할 수 있었지만 알렉스 아브라함은 그조차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곧 무슨 수를 쓰긴 하겠지만요.”

“낙원 내부 사정을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군요. 그런 정보는 어떻게 입수하는 겁니까?”

커피 향을 음미하던 사샤는 치켜뜬 눈초리로 멜리사를 응시했다. 좀 전까지 극도로 불안해하던 제인도 어느새 차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알려 줘, 사샤. 누구로부터 그런 걸 듣는 거야?”

“누구로부터라니?”

사샤는 커피 잔을 내려놓은 뒤 장미 문양이 새겨진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느덧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썰물처럼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허공에 맴돌았다.

“날 떠본 거구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제인이 중얼거리며 사과했다. 그녀는 양손을 매만지며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

“누구?”

“로스트 헤븐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리 박사.”

사샤는 아무런 말없이 담배만 피우며 침묵했다. 제인은 절박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도와줘, 네 도움이 필요해.”

“낙원의 홍보부에서 외주나 받는 일개 아티스트가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어?”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멜리사가 나섰다. 그녀는 사전에 조사한 사샤의 개인 정보 문서를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펼쳤다. 본인의 이력이 연도별로 나타나자 사샤는 곁눈질로 흘끗 관심을 가졌다.

“피보바로바 양은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의 리쩨이 사립학교를 나오셨더군요. 리쩨이 사립학교는 예술계와 과학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이지요. 재밌는 것은 알렉스 아브라함 또한 이곳 출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재학할 당시 왓슨 그룹에 몸담고 있던 리 박사도 리쩨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초청 강연을 한 적 있었죠. 결론적으로 피보바로바 양은 이들 모두와 인연이 있는 셈입니다.”

“글쎄요, 그냥 우연 같은데요?”

“그렇다면 피보바로바 양이 낙원에 있는 것도 우연일까요? 조사해 보니 영주권도 없으시던데요? 정기적으로 게이트를 들락날락거리면서까지 로스트 헤븐에 머무는 이유가 뭡니까? 제인 왓슨 양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아요. 왓슨 양은 위장이고, 당신이 진짜 의리를 지키고 있는 대상은 따로 있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아마도 당신이 낙원의 내부 정보를 상세하게 아는 것과 관련 있는 자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멜리사 클라크. 평의회의 능구렁이 같은 노인들을 상대로 혼자 버티다가 결국 의원직을 때려 쳤다고 들었다. 낙원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다. 제인에게는 아마 좋은 선생이 될 테지.

사샤는 조용히 담배를 내려놓았다.

“제인.”

“어?”

“넌 이곳을 어떤 곳으로 만들고 싶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인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사샤는 한쪽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그녀는 지난 십여 년간 더 야위어 버린 허벅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나는 실패한 웬디야. 피터 팬을 따라서 네버랜드에 왔다가 후크 선장에게 두 다리를 잃고 말았거든. 그 뒤로 난 네버랜드에 속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이렇게 배회하고 있어.”

아담은 이브를 찾았다. 하지만 춤추던 소녀는 여전히 넘어진 채 울고 있었다. 꿈도 잃고 어른도 되지 못한 그녀는 영원한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낙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왓슨 그룹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야. 입실론, 델타, 고스트, 그들 모두 네버랜드의 피해자지. 어찌 되었든 넌 왓슨가의 공주님이고, 그들의 증오는 결국 널 향하게 될 텐데, 굳이 낙원을 되찾으려는 이유가 뭐야? 네가 책임을 떠안을 필요도 없잖아.”

“알고 있어.”

어차피 그녀는 낙원을 장식해 온 인형에 불과했다. 스스로도 그 위치에 만족했고 그렇게나마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었다. 무엇이 자신을 그리도 결핍하게 만드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동안 난 그들을 못 본 체 했고, 지금도 사실 그 사람들을 위해 뭘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낙원을 잃으면 왓슨은 무너지게 될 거야.”

제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바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동안 난 할아버지와 카인의 그늘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살았어.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무너지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두려움과 함께 죄책감이 들었어. 어쨌든 그 두 사람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나니까……. 할아버지가 낙원을 세운 건 좋은 취지에서였어. 왓슨이 낙원을 망친 못된 회사라는 결말만은 막고 싶어. 로스트 헤븐을 실패작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아.”

잠시 후 사샤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샤는 벌써 출구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었다. 제인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얼른 고쳐 쓰고선 일어섰다.

멜리사는 케이크 진열대 뒤에 서 있는 가게 주인 폴을 향해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위생복 차림의 폴은 빙그레 웃더니 그녀에게 초콜릿 피규어 하나를 건넸다. 멜리사는 이게 뭐냐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비매품이지만 하나 드릴 테니 한번 드셔 보세요.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도 나는 법이죠.”

“고맙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재킷 주머니에 초콜릿을 쑤셔 넣었다. 급히 가게를 빠져나오다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예민해진 눈초리로 입술을 곱씹었다.

‘저 사람, 어디서 봤더라?’

먼저 에어쉽에 올라탄 사샤는 밖에 서 있는 제인을 쳐다보았다. 제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샤가 평소 타고 다니던 블랙 스완과 닮긴 했지만 다른 기체였다.

낙원의 주민이 아닌 외부자는 낙원 내에 개인 전용기를 2기 이상 반입할 수 없다. 구매는 가능하지만 이럴 경우, 게이트를 통해 출국할 때까지 사용이 금지된다.

제인은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로 사샤를 쳐다보며 맞은편에 앉았다. 뒤따라온 멜리사는 제인의 옆자리에 탑승했다.

에어쉽의 엔진은 이미 가동되어 있었다. 목적지도 설정하지 않았건만 하얀 에어쉽은 알아서 둥실 떠올랐다.

【알림】

안전 운행 모드로 항행합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십시오.

잠시 후 불가시 모드로 전환합니다.

알림 메시지 창을 본 멜리사는 깜짝 놀라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군용 에어쉽도 아니고 일반 자가용 에어쉽에 불가시 모드라니? 설마 군용 에어쉽을 몰래 빼돌린 건가?’

그녀도 불가시 모드 기체는 처음 탑승하는 것이었다. 멜리사는 잔뜩 긴장한 채 안전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반면 맞은편의 사샤는 익숙한 듯 편안한 자세로 찻잔을 들었다. 제인은 사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샤.”

“응.”

“낙원을 떠나던 날 네가 그랬잖아, 기다릴 남자가 있다고.”

“남자라고는 안 한 거 같은데.”

사샤가 무표정한 얼굴로 부인하자 제인은 모르는 척 웃었다. 사샤가 좋아하는 남자라면 왠지 아주 어른스럽고 근사한 분위기일 것 같았다.

“그래서 만났어?”

창밖을 내다보던 사샤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사샤의 옆모습에서 과거 엘 카인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인 탓일까? 제인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에어쉽 내부에는 뉴스 속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번쩍이는 빨간 글씨가 시야를 어지럽히자 그들은 잠시 굵은 헤드라인으로 장식된 기사에 눈길을 모았다.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 델타와 교전 중 전사.

고즈넉한 공기가 흘렀다. 누구도 침묵을 깨지 않았다. 멜리사는 다시 에어쉽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관찰했다. 사샤는 찻잔을 홀짝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인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이 작은 인공 섬 안에서 전쟁과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밧줄 심지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의미 없이 반복되던 줄다리기는 곧 결착을 맺게 될 것이다.

멀리 에덴 타워가 보였다. 에덴 타워 꼭대기를 고리 형태로 감싼 태양의 도시는 구름 속에 휩싸여 있었다. 제인은 문득 에덴 타워 위로 커다란 벼락이 내리꽂히는 상상을 했다. 저 거대한 타워가 장작처럼 두 쪽 나서 쪼개진다면 꽤 볼만하겠지.

“사샤, 난 말이야. 누구나 이브가 될 수 있는 낙원을 만들고 싶어.”

제인은 멀어져 가는 에덴 타워를 매만지듯 창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모두가 이브가 되길 선망하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이브가 될 수 있는 곳.”

“…….”

“모두가 앞다투어 오길 원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떠나고 싶지 않은 곳.”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텅 빈 낙원에 홀로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네가 존재하는 낙원.

우리가 꿈꾸는 낙원이란 그런 것이니까.

“가능할까?”

제인이 자신감 없는 어조로 자그마하게 묻자, 사샤는 찻잔 뒤로 미소를 숨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기대되긴 하네.”

같은 시각, 폐쇄 도시 대피소의 입구로 나온 나츠와 드레이크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의료품들, 푸르스름한 비상등이 켜져 있는 복도. 깨진 창문 사이로 쉭쉭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드레이크는 농담조로 물었다.

“폐쇄 도시의 망령이던가? 모래의 도시 고스트들은 그런 걸 진짜 믿는 거야?”

“모르겠어요. 아이들보고 이 근처엔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는 걸 보면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 같긴 해요.”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연구소 A동을 향해 이동했다. 경보기가 울리지 않는 걸 보니, 밧세바와 웁실론들은 이미 그들의 얼굴을 카메라로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앙 계단 쪽으로 가자 보초를 지키고 있던 웁실론 하나와 마주쳤다. 나츠를 알아본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길을 터 줬다.

“이상하네요.”

“뭐가?”

“보통은 둘 이상 짝 지어서 길목마다 지키고 서 있잖아요.”

나츠가 갸웃거리며 묻자 드레이크는 흘끗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홀로 서 있던 웁실론이 하품을 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나츠!”

그들이 도착한 걸 미리 지켜본 밧세바가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걸어와 나츠를 품에 안았다. 밧세바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눈시울을 뜨겁게 붉혔다.

“유메는요?”

“안쪽에 있다.”

유메부터 찾는 나츠를 보며 밧세바는 대견한 듯 웃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반즈 박사가 나츠를 불러 세웠다.

“시게노 대원.”

“어, 반즈 박사님?”

그녀가 여긴 어쩐 일일까? 나츠는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반즈 박사를 쳐다보았다.

“무사히 빠져나온 모양이군요.”

드레이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박사님 덕분입니다. 필란 중위가 뒤통수를 치긴 했지만요. 박사님께서도 이제 에덴 타워는 가지 마십시오. 필란 중위가 상부에 벌써 다 보고를 올렸을 겁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츠는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에덴 타워 지하에 위치한 반즈 박사의 연구실은 텅 비어 있었고, 미궁으로 통하는 대피로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박사님께서 도와주셨던 건가요?”

나츠의 질문에 반즈 박사는 옅게 웃었다. 그녀의 눈 밑에 짙게 드리운 그늘과 창백한 안색을 보아하니 꽤 피곤한 모양이었다. 나츠는 그녀의 실험실에서 보았던 기괴한 신체 조각들을 떠올렸다. 반즈 박사는 대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던 것일까?

나츠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반즈는 뭔가를 발견한 듯 미간을 좁혔다.

“다쳤군요. 출혈이 있네요.”

“네?”

나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몸 여기저기를 내려다보았다. 드레이크도 곁눈질로 나츠의 상반신을 확인했다. 다쳤다고? 그랬다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따라 오세요.”

나츠는 머뭇거리며 드레이크의 눈치를 살폈다. 드레이크가 가 보라고 턱짓을 하자, 그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았다. 나츠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드레이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반즈 박사가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말했다.

“드레이크 씨는 거기서 기다리세요. 시게노 대원 혼자면 됩니다.”

“하지만…….”

드레이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자, 그녀는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아빠도 아니고 뭘 그렇게 졸졸 따라와요? 시게노 대원과 단둘이서 할 말이 있으니 밖에서 기다리세요.”

“예? 아, 아빠요?”

드레이크는 충격을 받은 듯 석상처럼 굳었다. 귀까지 빨개진 건 오히려 나츠 쪽이었다. 그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반즈 박사를 따라 고장 난 유리문 안쪽으로 향했다. 버려진 연구실을 개조해 박사의 개인 진찰실로 탈바꿈한 방이었다.

“저기 박사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저 다친 곳 없어요. 완전 멀쩡해요!”

반즈 박사는 길쭉한 침대형 치료대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누우라는 시늉을 했다. 나츠는 머뭇거리며 치료대 위에 누웠다.

“일단 초음파 검사부터 할 테니 상반신 걷어 올리세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녀는 탐촉자를 그의 복부에 대고 살살 문질렀다. 나츠는 잔뜩 긴장한 채 차렷 자세로 눈을 질끈 감았다. 화면을 보던 박사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을 불쑥 뻗어 그의 가랑이 안쪽을 짚었다.

“바, 박사님?”

화들짝 놀란 나츠가 몸을 일으키자 반즈 박사는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손바닥을 펴서 보여 주었다.

“이거 보여요?”

눅눅한 바짓가랑이에서 묻어나온 핏물이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나츠는 멍한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나츠 씨.”

“네?”

“근래에 혹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나요?”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신지…….”

반즈 박사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나츠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나츠 씨의 몸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자가 되고 싶다고, 나는 여자라고.”

“그, 그럴 리가요. 저는 남자인데요?”

저항하듯 작게 중얼거리던 나츠는 슬쩍 반즈 박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손에 묻은 혈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 피는…….”

“월경이에요.”

“네?”

나츠는 까만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두어 차례 깜빡였다. 반즈 박사는 소독된 거즈로 손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나츠 씨 몸속에서 줄곧 휴면 상태처럼 잠자고 있던 부분이 어떤 계기로 인해 깨어난 것 같아요. 그 결과 이렇게 ‘펑’ 터진 거죠. 피 검사를 좀 해 볼게요.”

그녀가 주사기를 들고 오자 나츠는 덥석 박사의 팔을 붙잡았다.

“바, 박사님!”

여자가 되고 싶다니, 월경이라니, 알 수 없는 말들에 목소리가 덜덜 떨려나왔다. 그의 눈 속에 담긴 두려움을 읽은 반즈 박사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주사기를 내려놓았다.

“예전에 리 박사가 작성해 놓았던 비공개 연구 자료들을 본 적 있어요. 그것들을 살펴보던 중 아주 신경 쓰이는 기록을 발견했죠. 그건 어느 입실론이 임신한 쌍둥이 태아에 관한 것이었어요.”

사라의 딸인 이브는 심신 모두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녀는 오히려 신종 바이러스에 뛰어난 면역성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당 바이러스의 돌연변이형과 그 외 질병들의 치료제 개발에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 준 케이스였다.

반즈 박사는 이브와 대조적인 쌍둥이 태아 기록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더 이상의 연구 기록을 찾을 수 없어 포기했다.

“나츠 씨는 태어날 때부터 양성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나츠 씨의 몸은 자신이 원하는 진짜 성을 택하려는 거예요. 나츠 씨가 로스티아벤에 입대할 때만 해도 이런 증후가 전혀 없었으니, 입대 후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진행이요?”

“뭔가 심적으로 동요할 만한 일들은 없었나요? 본인이 여자가 되고 싶다고 느낄 법한 환경적 요소나 상황, 혹은 사건들이요.”

조리개처럼 벌어졌던 그의 동공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나츠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였던 제가 여자가 되고 싶어 할 만한 심적 변동이나 사건이라면 뭐가 있겠는가? 너무도 뻔한 답이었다.

진찰실 밖으로 나온 나츠는 하의를 갈아입은 채 엉거주춤 걸어 나왔다.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나 입을 법한 회색 면바지는 가랑이 부분이 필요 이상으로 헐렁했다. 게다가 반즈 박사가 속옷에 부착해 준 여성용품이란 게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리고 불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괜찮아?”

드레이크였다. 나츠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기웃거리며 나츠의 얼굴을 살피던 드레이크는 양손으로 나츠의 볼을 찐빵처럼 눌러 잡으며 재차 물었다.

“괜찮냐고.”

“괘, 괜찮아요!”

그는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요.’라는 말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여기서 또?’라는 생각에 묘한 기대감이 솟구쳤다.

“둘이 뭐하는 거야?”

피식 웃으며 나츠를 허공으로 들어 올리던 드레이크는 흠칫 놀라 그를 툭 떨어뜨렸다. 느닷없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츠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 유메…….”

부유 체어에 앉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남자끼리 뒹구는 걸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나츠가 그러고 있으니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평소 동성애를 혐오하던 유메의 화살은─사실 그녀는 이성 간의 관계도 경멸하는 편이다─ 곧바로 드레이크를 향했다.

“이 변태 같은 놈이 나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유메의 부유 체어가 드레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황한 나츠가 황급히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비켜, 나츠!”

나츠는 말없이 선 채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자 사납게 치켜뜬 유메의 눈초리가 확 누그러졌다.

“나츠?”

“미안해. 미안해, 유메…… 미안해…….”

울먹이며 사죄를 하던 나츠는 휘청거리며 무릎을 꺾었다. 밀려든 어지럼증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자위가 뒤집어지면서 천장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츠!”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그러나 까맣게 닫혀 가는 시야 너머로 멍해진 의식의 끈이 이내 실처럼 툭 끊어지고 말았다.

─ 근래에 혹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나요?

귀와 목에서 후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몸살이라도 난 건가?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침대 밑으로 무겁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른한 몸을 일으키자 정신이 멍했다. 나츠는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어두운 방 안을 응시했다.

잠들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아주 깊은 숙면을 취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꿈을 꾸듯 어지러웠다.

아랫배가 묵직하고 알싸했다. 화장실에 가야 하나? 찝찝한 표정으로 배를 문지르던 나츠는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눅눅함에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끈적끈적한 핏물이 더듬거리는 손바닥에 묻어나왔다.

─ 이건 나츠 씨의 몸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자가 되고 싶다고, 나는 여자라고..

나츠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다리 사이에 묻었다. 꿈이 아니다. 정말 생리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나츠는 어두운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바라보았다. 비상 전등이 비춘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차, 신발을 신고 나오는 걸 깜빡했다. 발밑을 조심하며 걸었다. 폐쇄 도시 내 연구소 건물들에는 유리 파편들이 지뢰처럼 깔려 있어서 잘못하면 발바닥을 베일지도 몰랐다.

몇 발자국 걷자마자 나츠는 금세 깨달았다. 여긴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4층, 혹은 웁실론들조차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5층이다. 아니면 A동이 아닌 다른 연구동일지도.

나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벽에 몸을 기댔다. 어디선가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반대편 복도 끝에서 소곤대는 목소리가 길쭉한 복도를 따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자 목소리?’

느낌이 불길했다. 대화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괴로움에 짓눌린 듯, 뭔가 심상치 않은 목소리였다.

망설일 틈 없이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고 뛰었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차 커져 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동공이 부릅뜬 채 앞을 노려보았다. 땀으로 젖은 머리칼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건드렸다.

“쉬잇.”

당황하며 홱 돌아선 그의 입을 쉿 소리로 틀어막은 건 유메였다. 그녀는 부유 체어에서 나오는 소음을 최대한 줄인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더 이상 가지 마. 저긴 소각장이야.”

“소각장?”

나츠가 호흡을 낮추고 물었다. 그는 가쁘게 뛰는 숨을 참으며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사람들이 더 있었다. 다들 조용한 어둠 속에서 장승처럼 자리를 잡고선 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응, 오염된 곳이야.”

나츠는 눅눅한 가랑이를 손으로 더듬더듬 붙잡았다. 오줌이라도 샌 듯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타구니 쪽에서 시큰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낯선 감각에 그는 가랑이를 벌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왜 그래? 다리 아파?”

“아, 그게…….”

다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메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둠 속으로 스르르 물러섰다. 나츠는 커진 눈으로 뒤를 돌았다.

문제의 방은 복도를 향해 문이 나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가느다란 교성과 끊어질 듯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츠는 문틈을 향해 다가갔다. 녹슨 문틈에 바짝 댄 그의 눈동자가 이내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살갗이 거무튀튀하게 변한 남자가 알몸으로 누워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사지가 잘린 채 몸뚱이와 사타구니만 남아 있었다. 남자의 몸 위에 탄 웁실론 하나가 둥근 가슴을 출렁이며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황홀감에 취해 쥐어짜는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나츠는 짐승처럼 헐떡이는 그녀를 바들바들 떨며 훔쳐보다가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넋을 잃던 그는 다시 바닥을 기어서 문틈 사이로 오른쪽 눈을 붙였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틀림없었다.

엘 카인이다.

그는 움푹 팬 볼 위로 풀린 동공을 멍하니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그가 괴로운 듯 움찔하며 사정하자 여자는 오르가즘에 몸을 떨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제 그만 나와.”

다음 여자가 알몸으로 올라탔다. 그는 괴로움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뺨을 철썩 때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빨리 세우지 않고!”

그녀는 축 늘어진 음낭 위에서 몸을 비비며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그는 지친 듯 고개를 옆으로 꺾은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의 목을 가축처럼 묶어 놓고 폭행과 강간을 일삼았다. 나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하며 기어 나왔다. 결국 ‘웩’ 하고 구토가 쏟아져 나왔다.

“추악하지?”

그렇게 묻는 유메의 목소리에서 웬일인지 경멸 아닌 연민이 느껴졌다.

“그토록 증오한다고 했으면서 그녀들은 저 남자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어.”

유메는 부유 체어의 라이트를 켰다. 그러자 어둠에 잠겨 있던 인영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나츠는 지친 얼굴로 그들을 보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밧세바나 반즈 박사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그림자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저분들이 여긴 어쩐 일로?’

여자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방 안에서 웁실론들의 쾌락 어린 신음 소리가 나올 때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보지 마, 제인…….”

다른 한 명은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하며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분명 케이 씨와도 아는 사이였던 ‘사샤’란 이름의 사람이었다. 나츠는 그들에게 선뜻 인사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어색하게 주위를 맴돌았다.

한편 몇 발자국 떨어져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드레이크는 유일하게 무관심한 눈빛이었다. 마침 중앙 계단으로 올라오던 밧세바는 드레이크의 옆을 절뚝절뚝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그렇게만 보지 말게. 원래 애증이란 저리도 뒤틀린 모습인 거니까.”

그는 밧세바가 불쑥 던진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 포착한 그녀의 얼굴은 희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름진 눈초리에 언뜻 보인 건 질투와 부러움이었고, 입가에 맺힌 미소는 복수심과 분노로 비뚜름하게 짓눌려 있었다.

인간은 짧은 생을 이유로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대단하다. 질투, 소유욕, 원망, 슬픔, 분노 그 모든 감정들이 소망하는 대상에 대한 결핍에서 파생된다.

인간이 내린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이형이자 괴물이다. 혹은 신이고 악마다. 혹은 경외의 대상이자 극복할 대상이다.

‘만일 신이 권능을 잃고 추락한다면.’

과연 괴물이 되고 악마가 되어서 피바람을 일으키는 건 어느 쪽일까? 불현듯 던져 본 의문에 드레이크는 오한을 느꼈다. 이런 불길한 예감, 오래전 유림에게 갑자기 주사를 맞았을 때와 비슷했다.

태풍의 눈이 주먹을 쥐듯 작아지고 있었다.

* * *

함정 헤벨의 인공지능인 아벨이 정체불명의 해커에게 점령당한 지 한 시간째, 격벽으로 차단된 격납고 밖에서 안절부절 대기하던 장병들의 눈이 커졌다.

두꺼운 쇠문으로 막고 있던 격벽이 마침내 올라가고 있었다. 제일 앞에 서 있던 커크와 랜스는 몸을 낮추고 총을 잡았다. 두 사람이 전투 자세를 취하자,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던 엔지니어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투대원이 아닌 그들이 크게 도움될 일은 없었다. 엔지니어들은 통로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커크와 랜스 그리고 럼스펠드 대위는 해제되는 격벽 양측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총을 장전했다. 럼스펠드 대위가 손을 들어 수신호를 하자, 문 옆 좌우로 각각 서 있던 두 사람은 총을 쥔 손을 앞가슴에 붙인 채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커크가 먼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랜스도 뒤따라서 두툼한 손으로 총구를 겨눴다.

“중령님!”

“무사하십니까?”

마지막으로 들어온 럼스펠드 대위는 두 사람 뒤에서 총을 들었다. 육전 경험이 많지 않은 그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왜 가만히들 서 있나? 함장님은?”

“예? 아, 그게…….”

제일 먼저 들어왔던 커크는 머리를 긁적이며 총을 내려놓았다. 떨떠름한 표정의 랜스도 전투 의욕을 상실한 눈치였다. 럼스펠드 대위는 미간을 구기며 둘 사이를 어깨로 치고 나갔다.

“뭔데 그래?”

헤벨 최고의 전투 요원들만 모아 놨던 전 기동수색대 소속 대원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머뭇대는 모습에 럼스펠드 대위는 오히려 자신감을 얻은 듯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밀러 중령님!”

붉은 경고등이 돌아가는 천장 아래 서로의 얼굴을 바짝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건 나와 유림만 할 수 있는 작전이라고 몇 번을 말해? 애당초 케이 넌 따로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

밀러가 불쾌한 얼굴로 소리치자 케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너와 유림 둘이서?”

“그래. 이건 헤벨의 작전이니 넌 빠지란 의미다.”

둘이서.

둘이서라.

케이는 불쾌함을 참으려는 듯 잇새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밀러는 팔짱을 낀 채 함장다운 여유를 보이려 했다. 둘 사이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기류가 가까스로 수위를 유지한 채 수평선을 이뤘다. 금방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가열된 온도였다.

“함장이 배는 안 지키고 물 밖으로 기어나가려고? 경계 등급이 전투태세로 되어 있는 걸 봐서 자리를 비울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케이의 지적에 밀러는 말문이 막힌 듯 선뜻 답이 없었다.

“설마 부함장이 배신하고 탈출하니까 함장마저 배를 버리려는 거야? 나빴네, 미카엘은.”

“무슨 소리야, 배를 버리다니 내가 언제…….”

“그게 아니라면 굳이 유림과 단.둘.이. 팀을 이뤄서 낙원으로 가려는 까닭이 뭘까? 지휘라면 헤벨에서도 할 수 있을 텐데.”

“헤벨의 시스템인 아벨을 종료시켜야 하니까 현장에서 직접 지휘를 하겠다는 거다.”

바닥에 털퍼덕 앉은 유림은 턱을 괸 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두 남자가 옥신각신하는 꼴을 바라보았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아벨의 중계가 없어도 현장과 통신할 수 있도록 해 줄 테니까.”

예쁜 얼굴로 생글거리며 남의 속을 뒤집는 게 케이의 특기이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못된 말투로 이죽거리는 경우는 드문데. 밀러도 그렇다. 늘 반듯한 존댓말을 구사하는 그가 저 정도로 흥분해서 이성을 잃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 네가 내 대신 헤벨에 남으면 되겠군. 생각해 보니 올라운드70)가 가능한 건 너뿐이지 않나? 유명한 익명의 K 씨?”

“굳이 헤벨에 남을 필요가 없는 게 원격으로도 가능한 일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밀러는 그의 어깨를 턱 하고 붙잡는 케이의 손을 내려다보며 흠칫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케이는 밀러만 들릴 법한 거리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투 능력 역시 미카엘보다는 내가 쓸 만할 거고.”

밀러의 동공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듯 굳은 채 벌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좀 전의 싸움을 생각하면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역린을 건드리듯 조롱하는 그의 웃음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가라앉혔던 심상의 수면이 폭뢰라도 맞은 듯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폭발했다.

결국 또 먼저 주먹을 휘두른 건 밀러였다. 케이는 예측하고 있었는지 여유롭게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휘청거림 하나 없이 다시 자세를 잡는 그의 움직임은 허공에 뜬 것처럼 가볍고 날렵했다.

“미카엘도 근접전이 약점이구나? 이 거리에선 네 공간이동 능력을 쓰는 것도 무의미하니까.”

쿡쿡 웃던 케이의 눈이 의외란 듯 커졌다. 날카로운 눈초리를 뜬 밀러의 손에 총이 쥐여져 있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전사 미카엘이란 이름이 울겠다. 그런 장난감 같은 무기에 의존하다니…….”

“그런 장난감 같은 무기를 만드는 과학에 매료된 건 너잖아.”

“그럼 미카엘은 내가 만든 장난감하고 놀고 있는 건가?”

“뭐?”

그래, 저 녀석의 눈웃음은 노아의 교만한 눈빛과 닮았다. 그리고 엘 카인의 비뚤어진 심보도 닮았다. 어찌 보면 제일 짜증 나는 타입이었다. 예전처럼 자그마한 몸으로 방주에서 잠이나 잘 때가 예뻤는데.

“다시 잠이나 자라니 서운하네. 날 지키는 게 네 의무였으면서.”

서운하긴 무슨. 이 녀석은 연기조차 성의 없다. 애초에 나나 엘 카인이 살아 있든 말든 관심조차 없었으면서. 저렇게 이죽거리는 것도 유림의 앞이니 장난질을 치는 거다. 실제 적이었다면 눈이 마주치는 즉시 살해했겠지.

그게 우리들의 본성이었다. 동족의 생사 따위는 관여하지도 않을뿐더러 귀찮아 한다는 게 맞는 말이다. 어차피 혼자서도 완벽한 개체니까.

“방주가 폭발했을 때 날 구속하던 의무도 함께 사라졌어. 지금의 난 미카엘이 아닌 마이클 밀러 중령이고 현재의 날 구속하는 건…….”

밀러의 눈길이 케이의 어깨 너머에 있는 유림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케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헤벨과 이곳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

정확히 말하면, 헤벨과 그녀지만.

끼이익. 불쾌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밀러는 손안에 쥔 총을 내려다보았다. 총구가 기역 자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총구를 구부러뜨린 케이의 손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주먹 쥔 손을 스르르 펴며 손바닥에 묻은 총구의 잔해를 털고 있었다.

“그녀에게 구속당할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야.”

그 외에는 누구도 허락할 수 없다. 그녀에게 매료되는 것도, 감히 그녀를 바라보는 것조차도.

밀러는 케이의 말에 반박하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십오 년간 그녀와 함께 지냈어. 너보다 오래 알아 왔다고.”

가족으로서, 오빠로서, 그녀를 지켜왔던 남자로서 유림을 쉽게 넘겨줄 순 없었다. 저 둘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과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치졸하지만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다. 울면서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허락해 달라고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흐음…… 그런 걸 원했어? 울며불며 애원하는 거?”

밀러는 인상을 쓰며 이를 사리물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사람 생각을 읽으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딱히 남의 속마음에 관심 있는 타입도 아니면서. 유림 외엔 세상사 무관심한 놈이니 오히려 남의 생각을 아는 걸 귀찮아하면 했을 성격이었다.

“그런 식으로 선점 논리를 주장하는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누구? 엘 카인?”

“그 변태는 논외고. 끝까지 제가 이브에게 구애를 했다고 믿는 미치광이 놈이니까.”

쌍둥이 형제지만 엘 카인이 정신병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채 점점 왜곡된 생각만 품어 갔다.

“유림에게 딸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상처받은 뒤로 독점욕의 화신이 된 남자가 있어. 내가 최후로 상대해야 할 사람은 아마 그쪽일걸.”

밀러는 케이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 보고 잔뜩 긴장한 눈빛을 지었다.

“강해?”

“아니, 약해 빠졌어.”

“지휘하는 군대나 배후 세력이라도 있나?”

“글쎄, 이름뿐인 명예 정도?”

밀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그냥 가서 쓰러뜨리면 되잖아.”

“문제는…… 내가 상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거야.”

“뭐? 어째서?”

“유림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거든. 미카엘, 네가 할래?”

당연하게 답하던 케이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상냥한 눈웃음을 짓는 케이를 보며 밀러는 찝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누군데?”

유림에 대한 독점욕이 그렇게나 상당한데 케이가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지금 자신에게 하는 걸 봐서는 유림 주위에 다른 남자가 있는 걸 절대 보고만 있을 녀석이 아니었다.

‘건드렸다간 유림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나 말고 그럴 만한 사람이 또 있나?’

밀러는 멈칫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설마…….”

케이는 그 설마가 맞을 거란 표정이었다. 밀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유림은 알아?”

“글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케이의 눈빛이 그렇게 답하는 듯했다.

한편 당사자인 유림은 바닥에 앉은 채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두 사람의 신경전은 언제쯤 끝나는 거야?’

그녀는 따분함 끝에 흘끗 곁눈질을 던졌다. 그러다가 케이가 은근히 던지는 시선과 마주치고선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내 쪽을 보고 있지?’

그의 눈웃음에 쪽빛 하늘을 적신 감색 노을이 수채화처럼 걸려 있었다. 케이는 낮에 뜬 달을 생각나게 한다. 푸른 하늘에 뜬 구름 사이, 희게 보이는 연한 달빛은 그의 눈동자를 쏙 빼닮았다.

─ 내가 널 몹시도 사랑한다는 의미야.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온몸이 뜨거워진다. 유림은 뜨거워지는 뺨을 양 무릎 사이에 묻으며 식혔다.

아름다운 아담, 나의 아담. 아담이 너무나도 좋다.

심지어 저렇게 밀러와 바보같이 티격태격하는 그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평소 절대 기품을 잃지 않는 그가 자신을 위해 유치해지고 야만인처럼 굴 때, 그녀는 그만큼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꼈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케이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유림을 갸우뚱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녀가 비닐봉지에 머리를 박고 숨는 고양이처럼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자, 그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중령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밀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돌아섰다. 어느새 격벽이 해제되어 있었다. 케이와 옥신각신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럼스펠드 대위가 다가와 물었다. 커크와 랜스는 도무지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뒤를 따라왔다.

“제이콥스 대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위는 이곳에 없다.”

럼스펠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밀러는 말없이 서 있는 케이와 눈빛을 교환했다. 밀러의 뜻을 눈치챈 케이가 미리 맞춰 놓은 말을 꺼냈다.

“제이콥스 대위는 함정 밖으로 탈주했다.”

“뭐?”

“그게 가능한 겁니까?”

헤벨 내에서 압도적인 전투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바로 밀러였다. 그리고 2순위는 유림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한자리에 있는데 따돌리고 탈주라니? 하지만 세 사람은 밀러의 몸에 묻어 있는 피와 상흔들을 발견하고선 할 말을 잃었다.

“중령님, 설마 이것도 제이콥스 대위가?”

밀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밀러와 유림의 실력을 몸소 경험한 바 있던 커크와 랜스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 이 친구는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커크가 웬일로 날카롭게 물었다. 케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께름칙한 기분이 들던 그였다.

“영상에서 제이콥스 대위를 심문하던 자가 혹시 이 녀석 아닙니까?”

커크는 잔뜩 성난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칫 한 대 칠 기세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상대를 무시하는 케이의 반응이 그를 더 자극했다.

“인마! 대답해 봐! 네가 대위님께 그런 거 아니냐고!”

케이는 무심한 눈초리로 커크를 쳐다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중령이 알아서 잘 설명해.”

케이는 귀찮은 어조로 말한 뒤 유림을 향해 걸어갔다. 커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설마 지금 날 무시한 건가? 것보다 중령님께 저 싸가지 없는 말투는 뭐야? 설마 하극상, 뭐 그런 거야?’라는 생각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릎을 모으고 꾸벅꾸벅 졸던 유림은 케이가 와서 덥석 뒤에서 끌어안자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야, 끝났어?”

“바보들은 상대하기가 너무 피곤해요.”

유림은 밀러 쪽을 쳐다보더니 커크와 랜스를 발견하고선 민망한 미소를 머금었다. 랜스는 몰라도 커크는 확실히 케이가 상대하기조차 싫어할 타입이긴 했다.

럼스펠드 대위를 비롯한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밀러의 말을 경청하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케이와 밀러가 미리 전후 사정을 맞춰 놨었지?’

제이콥스 대위는 외부의 해커를 이용해 아벨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애덤슨 중사가 이를 눈치채고 그를 붙잡아 심문한다. 이후 밀러와 유림이 가세한 뒤 요한은 자발적으로 해킹된 아벨의 시스템을 종료했다. 요한의 다리가 불편한 걸 감안한 밀러는 그를 풀어 주지만 요한은 오히려 그 틈을 타서 함정 밖으로 탈주하고 말았다는 시나리오였다.

“저걸 믿으려나? 누가 봐도 일부러 놔준 것처럼 보이는데.”

유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품을 하며 물었다. 케이는 그녀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눈을 감으며 답했다.

“믿을걸요? 바보들이라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단순한 녀석들은 아닐 텐데.

“맙소사! 그럼 대위님 다리도 원래는 정상이었던 겁니까?”

고함치듯 터져 나온 커크의 목소리에 유림은 움찔하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커크와 랜스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럼스펠드 대위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분통해하고 있었다.

케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피식 웃었다.

“내 말이 맞죠?”

“하하…….”

헛웃음을 짓던 유림은 평소와 다름없이 반듯한 미소로 설명하는 밀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마 커크 일동은 밀러가 자기들에게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거겠지. 그만큼 헤벨의 가족에게 있어 밀러는 절대적인 신뢰의 기둥 그 자체였다.

“밀러 좀 그만 괴롭혀, 케이.”

“괴롭힌 거 아니에요.”

케이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 듯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유림은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가 기분 좋은 듯 입가에 곡선을 머금었다. 그녀는 못 말린다는 눈초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저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속은 비뚤어졌다니까.

“어허, 손!”

그녀가 매섭게 혼을 내자,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하던 케이는 곁눈질을 하더니 아쉽다는 표정으로 침울하게 말했다.

“슬퍼요.”

“뭐가?”

“낮에는 전장의 성녀인 유림이 밤에는 알몸으로 수줍어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게 굉장히 자극적이었는데.”

“그런데?”

“당분간은 그런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어서요.”

기분 탓인가? 멀리서 밀러가 은연중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또 어딜 봐요?”

질투심이 짙게 밴 목소리가 낮게 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케이가 가늘어진 눈초리로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림도 내게만 구속되었으면 좋겠어.”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 그는 눈빛에 언뜻 붉기를 띠며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자꾸 그렇게 한눈팔면, 다들 보는 데서 알몸으로 범해 버릴지도 몰라.”

“미쳤어.”

“그러게…….”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웃었다.

“나도 인정해, 미쳤다는 거.”

케이는 유림의 턱을 잡은 채 입술을 할짝였다. 장난치듯 속삭인 그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미친놈에게는 달콤한 약이 제일인데…….”

요사스러운 악마처럼 웃는 그의 눈초리가 의식을 흐릴 듯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새끼가!”

커크의 외침에 흘끗 뒤로 돌아본 밀러의 눈초리도 불쾌하게 굳었다. 옆으로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몸을 틀고 키스를 하는 게 보였다. 특히 유림의 뺨을 잡은 케이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과 허리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아니, 누구 앞이라고!”

“커크!”

“랜스 이거 놔! 가서 저 발정한 새끼가 아주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줄 테니까! 중령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가서 저놈을 꼬챙이 산송장으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감히 중령님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신데…… 저런 불한당 같은 새끼는 먼지 털리게 맞아 봐야 돼!”

밀러는 발광하는 커크의 뒷목을 잡더니 질질 끌며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야말로 누구보다도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안 보는 게 상책이었다.

“랜스, 전 기동수색대 대원들 전원 함장실로 소집이다.”

“알겠습니다.”

커크는 밀러에게 도축되는 짐승처럼 끌려가면서도 케이와 유림을 향해 절규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죽여 버릴 거야! 유림한테서 손 떼! 떼라고, 새끼야!”

커크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케이는 유림에게서 입술을 떼며 쿡쿡 웃었다.

“심술쟁이.”

“저 녀석 머릿속은 온통 발가벗은 유림뿐이야. 나는 사실 미카엘보다 저 커크란 놈을 먼저 때려눕히고 싶었는걸?”

“하지 마, 커크는 진짜 죽을 수도 있어.”

“내 권주는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아.”

케이는 도톰하게 부푼 유림의 입술을 엄지로 만지작거리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신 해 달라는 것도 많잖아.”

유림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눈초리를 치켜 올렸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그녀의 모습에 케이는 느른한 눈빛으로 다시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뭘 해 줄까요?”

다정하게 되묻는 그의 귓가에 유림은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를 속닥였다.

“여기서?”

그가 커진 눈으로 묻자 그녀는 심통 반, 부끄러움 반 섞인 뺨을 붉히며 말했다.

“케이 말대로 당분간은 기회가 없을 수도 있잖아.”

“아…….”

난처한 듯 주변을 보던 케이는 뭔가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그는 유림을 품에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정비 중인 에어쉽 뚜껑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아크레인 한 기의 문을 열고 그녀를 안에 앉혔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개방되어 있는 격납고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불안한데…….”

헤벨에 커크 같은 놈이 하나라는 보장도 없고.

유림은 격납고 출입구를 응시하는 케이를 보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설마 누가 여기까지 올라와서 훔쳐보겠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

웃으며 말하던 케이의 얼굴에서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아크레인 밖을 흘끗 보며 “우연이라도 엿보는 녀석은…….” 하고 끝말을 흘렸다.

그의 마지막 말을 캐치한 유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본 케이는 다정한 눈웃음으로 말을 정정했다.

“농담이에요.”

“거짓말.”

때때로 나오는 그의 잔혹함은 그녀를 기점으로만 발산된다. 그 점에 안심이 되고, 그 점에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거짓말 같은 진담이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글쎄.”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크레인 문을 닫고 들어와 그녀의 위로 몸을 겹쳤다. 몸을 바짝 포개고 누워도 비좁은 공간이었다.

“아, 케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케이는 볼록하게 부푼 정점을 혀로 핥으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헤벨엔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도 밀러에게 한 것처럼 하면 안 돼.”

“안에 사정하게 해 줄 때마다 한 명씩 봐 줄게요.”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몇 명인데?”

“한 놈은 아크레인을 타고 도주했으니 이제…….”

케이가 웃음 띤 목소리로 귓가에 속닥이자 유림은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쳐다봤다.

“그건 헤벨에 있는 남자 수 전부잖아.”

그는 대답 대신 흐려진 동공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치듯 키스했다. 흐느끼는 듯한 유림의 신음 소리에 묻힌 그의 쾌락 어린 음성이 속삭였다.

“하는 데까지 해 봐도 돼요?”

“미쳤어?”

그는 눈초리를 얇게 휘며 웃었다. 유림은 갑작스럽게 파고 들어오는 그의 것에 몸을 들썩이며 소리를 질렀다. 케이는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조용히 하라는 듯 ‘쉿’ 하고 속삭였다.

정작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유림은 욕설을 삼켰다. 그녀의 권속은 때때로 그 잔혹성을 권주에게도 쏟았다. 집요할 정도로 깊은 사랑과 복종을 선사하면서.

2100년 5월 14일 13시 04분.

헤벨의 인공지능 시스템인 아벨이 강제 종료되었다. 함정의 모든 기능이 수동화로 전환된 지 불과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 함 내의 선원들은 모두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제일 큰 난관에 부딪친 건 조종실이었다.

함장의 지시하에 긴급회의가 열렸다.

“위기 상황입니다.”

회의실 내 간부들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타원형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상석에 위치한 밀러를 불안한 듯 쳐다보았다.

“작전 요원들을 선발해 낙원으로 잠입할 생각입니다. 본 잠입조의 임무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블러디 마리아의 유해를 찾아올 것. 둘째, 엘 카인을 제거할 것. 셋째, 위즈덤의 병기를 조사하고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을 것.”

“중령님께서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함정의 조종은 누가 맡습니까?”

각본이라도 쓴 듯 마침 회의실 문이 열렸다.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등장한 남자는 노아 호크 대령이었다. 통칭 검은 함장, 블랙 호크. 로스티아벤의 제복을 입고 나타난 그는 옅은 미소로 눈인사를 했다. 다들 기함해서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됩니다!”

“저자는 외부인이 아닙니까?”

“반대합니다! 절대 반대합니다!”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용병 따위에게 헤벨의 조타기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예상했던 반응들이었다. 밀러는 테이블 위에 깍짓손을 놓고 다들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호크 대령은 유유히 걸어 밀러의 옆자리에 앉았다. 본래 부함장인 요한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제 부친이신 아서 밀러 함장 시절부터 우리와 인연을 맺은 사람입니다. 저를 믿고, 제 결정에 따라 주지 않겠습니까?”

돌연 숙연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평소 능글능글한 미소로 장난을 치던 호크도 이 순간만큼은 사뭇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가 반쯤 내리감은 눈으로 간부들을 훑어보자 다들 형언할 수 없는 그의 기운에 압도당한 듯 침묵했다.

눈빛 하나로 기선 제압을 하는 호크를 보며 밀러는 문득 유림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호크의 능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던 일화였다.

약 이 년 전, 유림이 호크의 부대에 속해 있을 때 일이었다. 맨해튼에서 한창 델타 포획 작전을 수행하던 그들은 각각 소규모의 팀을 이끌고 움직였다. 특히 늘 선봉대에 섰던 유림은 다른 팀원들과 별개로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사실 다른 팀원들을 위해 앞서 델타들을 처리해 남은 대원들이 최소한의 숫자만 상대하게 해 준 것이었지만.

어느 날, 홀로 유유자적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던 유림은 뒷골목 안에서 호크 대령을 발견했다. 그는 델타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대령님?’

그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쌍검을 꺼내 쥐고선 살금살금 그들 뒤로 다가갔다.

─ ……입시스티스ὑψίστοις.

호크의 잇새로 흘러나온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게 델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했다. 그르렁대던 델타들이 갑자기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의 협박에 지레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꽁무니를 빼는 델타들을 바라보던 호크는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잎담배였다. 그는 천천히 그들의 뒤를 쫓아가는 듯싶더니 담배 연기 사이로 오른팔을 들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허공을 가르듯 짧고 날카로운 섬광이 일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유림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진 델타들의 유해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줄곧 그 일을 못 본 척, 모른 척을 해 왔다고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에 짜릿한 전율이 이는 것 같다고.

─ 밀러, 블랙 호크의 블랙black은 검은 재를 뜻하는 애쉬Ash의 블랙이야.

밀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군의 지원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은 아닙니다. 현재 로스트 헤븐의 내부 사정은 어수선합니다. 그 점을 이용하면 우리끼리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작전입니다.”

그는 왼손으로 앉아 있는 호크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호크는 팔짱을 낀 채 즐겁다는 듯 웃었다.

“전쟁인가? 흥분되는데?”

그동안 밀러는 노아가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깨달았다. 방주의 길잡이는 이미 오래 전에 열쇠를 찾은 상태였다. 그는 줄곧 유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녀를 각성시키고, 그녀와 영혼으로 맺어질 자를 기다려 온 것이었다. 노아는 그들 모두에게 기회를 주었다. 자신에게도, 엘에게도, 그리고 케이에게도.

“자, 움직입시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밀러의 명령에 회의실 내 장교들은 모두 일어서서 거수경례를 했다.

“Aye aye, sir.”

회의가 끝난 후, 헤벨의 공기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일반 병사들은 아직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제이콥스 대위의 영상은 봤지만 부사관들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적과 대치할 상황이 올 거라는 건 다들 말해 주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다. 병사들은 알아서 전투복으로 환복한 뒤 각자 위치에서 총과 장비를 점검했다.

격납고의 분위기도 분주해졌다.

“2호기 상태가 왜 이래?”

허공에 와이어로 매달려 있던 아크레인이 바닥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 상태로 덜렁이고 있었다. 문짝도 열린 채 덜렁이고 있었고, 안쪽 시트의 일부도 찢겨져 나갔다. 손으로 쥐어뜯는다고 뜯길 게 아닌데, 꼭 누가 움켜잡고 뜯은 것 같은 자국이었다.

“의자는 아예 푹 꺼졌는데요?”

“큰일이네, 이거…….”

당황한 정비병들은 기체 안쪽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좀 전의 사태로 식사를 못한 밀러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제자리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주방에 자리를 잡고 선 케이가 유림을 앉혀 놓은 채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는 중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여기서?”

“오, 이거 카레 냄새 아닙니까?”

커크는 코를 킁킁거리며 황홀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는 유림의 옆으로 다가와 드르륵 의자를 당겼다. 테이블 위로 그릇을 내오던 케이는 코너를 빙그르 돌더니 커크가 앉을 의자를 발로 뻥 차 버렸다. 히죽거리며 앉던 커크는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뭐야!”

케이는 손에 들고 있던 그릇 하나를 바닥에 댕그랑 떨어뜨렸다. 그는 ‘거기가 네 자리’란 듯 고갯짓을 하며 초승달 눈으로 예쁘게 웃었다.

“개는 개답게 바닥에서 먹지?”

“뭐? 이 자식이…….”

벌떡 일어나는 커크를 보며 하품을 하던 유림의 눈이 흠칫 커졌다. 그녀는 그릇을 테이블 위에 놓고 빈손으로 주먹을 쥐는 커크의 모습에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커크, 그만둬!”

“아악!”

이미 한발 늦었다. 눈앞에서 사람 하나가 어뢰처럼 발사되어 날아가는 걸 본 장병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코를 찌르는 향긋한 냄새에 부풀었던 가슴을 가라앉히며 냉큼 뒤로 돌았다. 카레도 좋지만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케이, 내가 쟤는 죽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죽지 않을 정도로만 했어요.”

그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유림은 벽에 처박힌 채 기절한 커크를 보며 못 믿겠다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걱정 마요. 안 죽었으니까.”

“그래도 힘 조절은 해야지. 쟤가 나한테 하도 맞아서 맷집 하나는 수준급이긴 한데…….”

“저 녀석 머릿속만 보면 화가 나서요.”

커크를 바라보는 케이의 얼굴엔 어느새 또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유림은 이러다 송장 치우겠다 싶어서 얼른 그의 허리를 감았다.

“나 배고픈데.”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며 케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뺨에 쪽 입을 맞추는 유림에게 사르르 녹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매번 속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예쁜 고양이한테 몸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사로잡혀 버렸으니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 수밖에.

아까 격납고에서도 유림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바람에 목표치의 10퍼센트도 채우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밥 먹고 계속하는 거라고 다짐을 받긴 했지만 그건 실현되지 않을 약속이란 걸 알았다. 그 짜증과 분풀이가 커크에게 향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림은 불쑥 허리를 숙여 키스하는 케이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뜬 채 어깨 너머로 몰래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뒤에서 눈치를 살피던 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잽싸게 커크에게로 달려갔다.

“야, 괜찮냐?”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기절한 커크의 귀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커크의 얼굴을 확인한 랜스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입가에 게거품이 보글보글 맺혀 있었다.

“인마! 커크! 죽으면 안 돼!”

그의 뺨을 철썩철썩 때리던 랜스는 흐느끼며 기절한 커크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눈을 떠 보라고! 커크!”

“흐윽…….”

“일어나 봐, 새끼야! 커어어어크!”

뺨을 얼마나 때린 건지 커크의 볼이 벌침이라도 맞은 듯 벌겋게 부풀었다. 랜스에게 멱살 잡힌 채 한참을 흔들리던 그의 목에서 마침내 쿨럭이며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때문에…… 숨넘어가시겠다…….”

커크가 하얀 침을 흘리며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랜스는 울음을 터뜨리며 엉엉 오열했다. 그에게 안긴 커크는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웩웩거리며 몸을 풀썩 숙였다.

키스를 하다 말고 구경하던 유림은 “봐요, 멀쩡하죠?”라며 생긋 웃는 케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웃지 못할 광경을 보던 럼스펠드 대위는 조용히 식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완전 미친 괴물이네.’

그의 식판 위에는 기계로 깎은 사과 세 쪽과 커피 한 잔이 올려져 있었다.

“대, 대위님? 이거만 드시게요?”

“조용히 해. 그냥 요기만 하고 갈 거니까.”

그는 옆자리에 앉은 격납고 엔지니어에게 목소리를 낮춘 채 대답했다.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엔지니어는 대위의 사과 한 쪽을 탐내며 손을 뻗었다.

“대위님, 저도 한 쪽만…….”

럼스펠드 대위는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네가 직접 가져와! 이게 어디서 남이 목숨 걸고 가져온 걸 넘보고 있어?”

“죄, 죄송합니다!”

“야, 근데 너 저쪽 딸기는 건드리지 마라.”

“예?”

럼스펠드 대위는 사과 한 쪽을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으며 심드렁한 눈초리로 조언했다.

“저건 난이도 최상급의 타깃이야. 괜히 집으러 갔다간 뼈도 못 추스를 수 있어. 정유림 상사가 딸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럼스펠드 대위의 시선을 따라 돌아서던 엔지니어의 동공이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렸다. 식기들이 놓인 선반 너머로 딸기 바구니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황금 바구니의 본체는 주방 안쪽에 있었다. 용암을 뿜어내며 보물을 지키는 드래곤, 케이 애덤슨 중사의 오른팔의 비호를 받으며.

엔지니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저, 저는 사, 사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 사과는 그냥 밖에 꺼내 놨더라고.”

그럼 그건 그냥 가져오면 되는데 왜 목숨을 걸고 가져오셨다는 거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식판 하나를 꺼내서 가던 그는 창백한 얼굴로 멈춰 섰다. 거기에는 드래곤을 무찌르는 것조차 엄두를 못내는 지역 용사들이 떼거리로 몰려 있었다.

유림이 배시시 웃으며 제안했다.

“케이, 양도 많은데 다 같이 먹자. 케이가 요리 실력 하나는 일품이잖아. 사실 밀러는 다 잘하는데 요리가 젬병이거든.”

그녀의 말에 케이가 멈칫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 그가 망설이는 게 보였다. 특히 마지막 대목에서 혹한 게 분명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있는 밀러를 빤히 쳐다보더니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럴까요, 그럼?”

유림은 그런 그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케이의 목을 냉큼 끌어안고선 별안간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한편 식당 앞에 선 호크는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안쪽에서부터 줄이 쫙 늘어선 걸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줄 서 있는 병사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식량난이라도 났나?”

“아, 그 낙원 용병대에서 왔다는 엔지니어가 카레를 했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고 합니다. 다들 먹어 보려고 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레?”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인산인해를 비집고 진출한 호크는 앞치마 차림으로 배식 중인 케이를 보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랜스와 커크도 옆에서 앞치마를 쓴 채 배식을 돕고 있었다. 특히 커크는 얼굴이 벌집처럼 부어올라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상태였다. 호크와 눈이 마주친 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국자를 들었다. 호크는 옆에 서 있던 병사의 손에서 식판을 뺏더니 재빨리 내밀었다.

“저도 한 그릇 주시죠.”

카레가 담긴 국자를 식판을 향해 천천히 기울이던 케이는 호크의 얼굴을 향해 국자를 ‘퍽’ 집어던졌다.

왁자지껄하던 식당 내에 정적이 일었다. 호크는 얼굴을 부여잡은 채 일어섰다. 푹 젖은 정수리부터 입술까지 노란 카레가 죽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엄청 뜨거울 텐데 비명 하나 없는 게 대단했다. 그는 티셔츠를 벗어서 얼굴을 대충 닦아 냈다.

“제게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호크는 유림 쪽을 쳐다보았다. 벌써 두 그릇째 비운 그녀는 무섭도록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유림은 호크와 케이 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퇴장했다.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네가 원하는 것은 일족의 후손을 보는 것뿐이라는 걸 알아.”

“그게 노아인 제 사명입니다.”

케이는 미간을 구겼다. 치밀어 올랐던 전의마저 상실케 하는 답변이었다. 철저하게 일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남자다.

케이는 짜증이 인다는 눈초리로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유림을 따라 식당 밖으로 나갔다.

멀뚱히 서 있던 호크는 손에 쥔 국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케이가 던진 앞치마를 목에 걸고 카레를 푸며 줄 선 병사들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나? 식판들 내밀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모여들었다.

통로로 나온 케이는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유림을 발견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더니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같이 훈련이나 할까?”

유림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함미에 위치한 체육관이었다. 두 공간으로 나뉜 체육관의 좌측에는 개인 운동기구들이 즐비해 있었고, 우측에는 사격 연습장과 대련실이 위치해 있었다. 유림은 기지개를 펴듯 스트레칭을 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녀가 등장하자 운동을 하고 있던 장병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예전에 유림과 밀러가 대련실에서 몸을 풀곤 했을 때 다들 교육 삼아 두 사람의 대련을 관람하고는 했다. 오랜만에 나타난 유림의 모습에 그들은 신이 난 얼굴로 운동기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월드컵 경기라도 시작된 듯 우르르 대련실을 향해 몰려갔다.

헤벨의 체육관은 로스티아벤의 훈련 시설과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잠수함이라는 공간적 한계 때문에 뭐든 소규모일 수밖에 없었다. 대련장도 그랬다. 낙원 체육관의 화장실만도 못한 크기였다.

“케이!”

“네?”

대련장 위로 올라온 유림은 허공에 뜬 홀로그램에 훈련 난이도를 설정하며 시큰둥한 눈초리로 말했다.

“밀러랑 붙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그동안 잘도 날 속였겠다?”

케이는 난감한 듯 웃었다.

“진심으로 해.”

유림의 눈이 붉게 빛나자 케이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요.”

두 사람 다 대전용 차림이었다. 유림은 특수 재질로 된 검은색 올인원 수트였고 케이는 진회색 상하의를 착용했다.

난이도는 상.

장애물과 핸디캡 없음.

안면 보호대 없음.

자율 심판제.

흰색 바닥이 쿠션으로 물렁해지자 허공에 ‘시작’ 신호가 초록색 등으로 떠올랐다. 유림은 몸을 튕기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가 공중에서 옆차기를 날렸다. 케이는 가볍게 뒤로 한 걸음 뛰어서 피했다. 바닥에 착지한 유림은 슬라이딩하며 몸을 360도 회전시켰다. 다리를 뻗은 채 아래에서 그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릴 작정이었다. 공격을 읽은 케이는 피식 웃으며 바닥을 짚고 물구나무서듯 몸을 뒤집었다.

‘어?’

유림은 인상을 쓰며 시선을 올렸다. 그사이 케이는 몸을 반대로 뒤집은 채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확 잡아 당겼다. 다리를 잡힌 유림은 그대로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짧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닥에 뒤통수를 박은 유림은 질끈 감은 눈을 떴다. 그러자 위에서 안면을 향해 내리꽂히는 팔꿈치가 보였다.

‘벌써?’

피할 틈이 없었다. 유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항복?”

케이는 팔꿈치로 그녀의 콧등 대신 바닥을 찍으며 속삭였다. 입술에 ‘쪽’ 하고 살포시 닿는 입맞춤은 덤이었다. 유림은 약이 바짝 오른 듯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항복 같은 소리 하네.”

그녀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으며 다시 거세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채 삼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또 그의 품에 결박당했다. 뒤에서 목을 조른 채 정확히 명치 위를 겨눈 그의 손이 배를 쿡 찔렀다. 유림은 짜증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쪽.

빙그르르 돌아간 몸에 두 번째 입맞춤을 당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달콤하게 베어 물며 은은한 목소리로 권했다.

“그만 항복해요.”

바닥에 쾅 눕혀진 유림은 몸을 비틀며 신음을 뱉었다. 팔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몸을 좌우로 비틀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 옆으로 꺾고 움직임을 멈췄다.

피식 웃던 케이는 세 번째 키스를 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의 팔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유림이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케이는 당황한 눈초리로 얼어붙었다.

“유림?”

그는 인상을 쓴 채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케이의 얼굴색이 창백하게 젖었다.

“유림? 괜찮아? 정신 차려 봐!”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던 순간이었다. 눈을 번쩍 뜬 유림이 재빠르게 케이의 멱살을 낚아채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무릎으로 명치를 가격해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케이는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유림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고전 중에서도 고전인 미인계에 당하다니, 어리석네,”

넋을 놓고 있던 케이의 입술에서 ‘하?’ 하고 기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승리감에 도취한 유림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그는 바닥에 드러누워서 허탈함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 두 분! 출격 준비하시랍니다.”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엔지니어가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소리쳤다. 멈칫한 유림은 케이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삽시간에 무거운 눈초리로 돌변했다.

작전 수행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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