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시스템】
새로운 관리자 선출을 위한 주민 투표를 진행 중입니다.
투표율 67%., 투표 종료까지 남은 시간 2시간 12분.
“단 한 명의 후보에게 실시하는 찬반 투표라니.”
커크는 맥주를 마시며 비웃었다. 민소매를 입고 두꺼운 팔 근육을 내보인 채 앉은 그의 뺨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술은 한 잔도 못하는 체질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랜스는 허공에서 홀로그램으로 방송되고 있는 뉴스 화면을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저게 낫지 않아? 후보자 둘을 내세우고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게 더 불만스러웠을 것 같은데? 찬반 투표는 어쨌든 반대표가 더 많으면 무효가 되는 거니까 여지는 있는 거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커크는 반쯤 풀린 눈으로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맞네요, 형님 말이 맞아.”
“취했냐?”
랜스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커크는 고개를 풀썩 조아린 채 답이 없었다. 완전 맛탱이가 갔군. 맥주 한 잔에 뻗는 놈이 허구한 날 센 척이나 하고. 그래도 취하면 존댓말로 ‘형님’ 하는 게 귀여웠다.
“가서 얼른 씻고 와라. 전투태세 중인데 너 이런 꼴인 거 들켰다간 바로 징계감이다.”
“알렉스 아브라함이라고?”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귀를 쫑긋 세운 랜스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몸을 돌렸다. 거들먹거리기로 유명한 라이언 중위였다. 또 무슨 잘난 척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 랜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알아?”
“좀 오래전이긴 한데 본 적 있거든. 아브라함 주니어.”
“어디서 봤는데?”
“스타시티 창립 기념 파티였던가?”
벌써 이십 년 전인 스타시티의 50주년 창사 기념 파티 얘기였다. 하와이에 있는 스타시티 본사에서 열렸는데 전 세계 정·재계 거물들이 한곳에 모여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런 곳에 네가 초대받아 갔다고?”
“왜? 거짓말 같아?”
정·재계 거물들만 초대받았던 자리라면 저 녀석은 문 앞에서 쫓겨나고도 남았을 텐데, 자신의 말이 얼마나 앞뒤 맥락을 배반하고 있는지 알고나 말하는 걸까? 랜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잠자코 들었다.
스타시티 본사 사옥은 최초의 공중 건물이며, 낙원의 공중 정원은 스타시티 본사 사옥의 기술력보다도 한참 하위라는 둥, 건물 내부는 또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관해서 그는 한참 동안 주절주절 떠들었다. 하여간 자기 자랑을 위해서라면 제가 입은 팬티도 금빤스라고 사기 칠 새끼였다.
랜스는 양 갈래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지루한 눈으로 들었다. 얼마 전 유림에게 콧수염을 인정사정없이 뜯긴 뒤로는 에센스까지 바르며 더 소중하게 기르는 중이었다. 마침내 나불거리던 중위의 입에서 귀담아들을 만한 정보가 튀어나왔다.
“그날 외부로 기사는 나지 않았는데 사고가 있었거든.”
“무슨 사고?”
“아브라함 주니어 말이야. 파티 도중에 마약 했거든. 난리도 아니었지. 막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지 않나, 혼자 바닥에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울고… 대체 약물중독이 얼마나 심한 건지 완전 미친놈이었어. 행사가 도중에 중단되는 바람에 아브라함 회장이 엄청 열 받았대. 그래서 주니어를 그날 바로 리햅rehab68)에 보내 버렸다지 뭐야. 어쨌든 이후로 사교계에선 종적을 감췄어. 우리 어머니 말씀으론 그렇더라고.”
랜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젠체하는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모친이 어디 유명한 사립학교 선생인가 교수인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 더럽게 잘난 척하는 면상은 그의 모친을 닮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랜스는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했다. 허공에서 3D 입체로 움직이며 주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알렉스 아브라함의 모습은 엘리트 남성의 표본이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당시 소문으론 다니던 학교에서도 여러 차례 폭행 사건을 일으켜서 아브라함 회장이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했어. 동급생 하나를 병신 만들어서 정학도 받았다나?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그런 망나니라서 아브라함 회장도 정식으로 후계 절차를 밟지 않고 있는 거란 말도 돌았고.”
“그런데 아브라함 회장은 소문대로 정말 죽은 게 맞아? 아니면 진짜 냉동 캡슐에 들어간 거래?”
랜스는 단춧구멍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라이언은 짧은 머리칼을 슥슥 문지르더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누설해서는 안 될 천기라도 입에 머금은 양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앞에 앉은 사람의 애간장을 태웠다.
“이런 거 그냥 말해도 되나…….”
“궁금해 죽겠네. 동성애자라며? 그래서 알렉스 아브라함도 사실은 아브라함 회장의 클론이라며?”
랜스는 팔꿈치로 라이언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놈은 군인이 아니라 제 엄마를 따라 교수를 했어야 했다. 얄팍한 지식수준을 뽐내는 걸 얄팍한 좆으로 딸 치는 것보다 좋아하니, 원.
“하여간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루머는 다 퍼뜨리고 다닌다니까. 이리 가까이 와 봐, 어떻게 된 건지 얘기를 싹 풀어 줄 테니까.”
랜스는 의자를 드르륵 끌어서 라이언 중위의 옆으로 이동했다. 키는 작지만 덩치는 권투 선수처럼 우람한 그가 학생처럼 의자에 몸을 꽉 끼워서 앉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통로를 지나가던 밀러 중령은 과외 수업을 하듯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특히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의자에 몸을 맞추는 랜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
“알렉스 아브라함 말씀이십니까?”
“그래, 뭔가 이상하지 않아?”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요한은 식당 안을 흘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라이언 중위의 말은 사실입니다. 화면 속의 알렉스 아브라함은 예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죠.”
“리햅을 다녀왔다고 해서 본성이 바뀌진 않지.”
“인공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공뇌?”
두 사람이 서 있는 복도 허공에 홀로그램이 ‘핏’ 하고 떠올랐다. 아벨이 띄운 낙원 뉴스 영상이었다. 밀러는 뉴스에 보도된 관리자 후보, 알렉스 아브라함을 관찰하는 눈초리로 응시했다. 순한 눈매에 선한 미소, 단정한 옷차림. 그는 자선 사업가로 보일 정도로 착한 얼굴을 겉에 걸치고 있었다.
“아브라함 회장은 특이한 사람입니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밀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스타시티의 몸집이 커져 가자 그는 전처럼 본인의 뜻대로 회사를 장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주요 간부들을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그들의 머릿속에 인공뇌를 이식할 생각을 하죠. 약 십 년에 걸쳐 아주 철저하게 짠 플랜이었습니다. 간부들은 뇌종양, 뇌출혈 등의 사유로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의료 수술을 받았고, 병원과 의사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아브라함 회장은 그렇게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만의 조종기를 하나씩 심어 넣었습니다. 인공뇌 수술을 받게 될 경우, 환자의 성격은 미리 설정해 놓은 성격 중 하나로 세팅되어 매우 단조롭게 바뀌게 됩니다. 기억은 보존해 놓지만 인격과 행동거지가 획일화된 반응으로 나타나죠. 의학계에서도 인공뇌를 가진 사람을 과연 자아를 가진 인간이라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 중에 있으니 말입니다.”
평정을 잃지 않기로 유명한 요한이 웬일로 핏발 선 눈을 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회장과 무슨 원한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공뇌에 반감이라도 있나? 요한이 저렇게까지 속내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위즈덤에서 개발한 신 안드로이드 모델은 인간의 뇌파를 이용해 안드로이드를 신체의 일부처럼 조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걸 핑계 삼아 위즈덤 측에서 신형 안드로이드를 의료 기기로 등록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병기형 안드로이드로 개발한 거니까 즉각적인 반응을 낼 수 있는 지휘 시스템이 필요했겠지. 저걸 의료용으로 개발하진 않았을 거야.”
“물론입니다.”
자원 전쟁으로 피폐해진 세계는 이제 막 달콤한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의 병기화는 새로운 로봇 전쟁의 시대를 열게 된다. 그것만큼은 막고자 연맹군은 그동안 안드로이드의 병기화를 철저히 통제해 왔다. 그런데 스타시티의 자회사인 위즈덤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스타시티는 그동안 연맹국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때문에 위즈덤이 낙원의 우산 밑에 숨어서 병기형 안드로이드를 몰래 생산해 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도대체 저걸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테러리스트들에게 팔아서 수익을 남기겠다는 심산 같지는 않았다. 저들도 연맹군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공뇌란 인간을 안드로이드화시킨 느낌이군.”
“아브라함 회장은 본인을 제외한 전 인류를 안드로이드화시켜 지배하는 게 꿈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만을 남기고요.”
“아브라함 회장에 대해 잘 아는 듯한 말투인데?”
“아, 그에 대해 연구를 좀 해 봤습니다. 워낙 흥미로운 인물이라서요.”
“인공뇌를 이식해서 안드로이드처럼 지배한다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은 아니군.”
요한은 낯선 눈빛으로 밀러를 쳐다보았다. 의식을 찾은 그는 쓰러지기 전과 묘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좀 시니컬해졌다고 해야 하나? 모든 일에 뾰족하다 싶을 정도로 냉소적이다.
메리의 죽음 때문일까? 정신적 쇼크가 상당했을 텐데, 그래도 생각보다 잘 버텨 주고 있었다.
유림 덕분일 것이다. 그녀마저 잃었다면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유림은 밀러의 전부였다. 그녀만큼은 헤벨을 위해서라도, 연맹군을 위해서라도 무사해야 했다. 앞으로 유림이 헤벨을 떠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이참에 그냥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지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처럼 다른 이들을 희생시킨 삶의 반석 위를 다시 걷고 싶지는 않았다. 밀러는 헤벨의 심장이고, 헤벨은 그가 겨우 찾은 마지막 안식처였다. 이 따뜻한 보금자리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이곳만큼은, 이곳 사람들만큼은 반드시 지켜 내야 했다.
【알림】
에어쉽 1기 접근 중.
착함을 요청합니다.
착함을 승인하시겠습니까?
아벨이 띄운 시스템 메시지가 허공에서 붉게 깜빡였다. 요한은 메시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로스트 헤븐의 에어쉽인가?”
─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인식 코드 불명.
아벨은 함 내에 대기 중인 장병들에게 ‘정체불명의 에어쉽 접근, 실전 대비.’라는 경고 창을 띄웠다. 여유를 부리던 사병들은 전투가 임박했음을 깨닫고 각자 위치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식당 앞 통로에 서 있는 함장과 부함장 앞에 멈춰서 거수경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군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군도 아닌 것 같은데.”
밀러의 말에 요한도 동의한다는 듯 눈짓을 보냈다.
“아벨.”
─ 예, 함장님.
“해당 에어쉽과 통신을 연결할 수 있겠나?”
─ 상대측으로부터 연결 요청이 들어와 있습니다. 연결하겠습니다.
밀러는 함미에 위치한 중앙조종실로 향했다. 절뚝거리며 그 뒤를 따르던 요한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밀러의 얼굴을 보니 짚이는 게 있는 눈치였다.
“착함 승인.”
요한은 갑자기 승인 명령을 내리는 밀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밀러는 허공에 뜬 통신 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요한도 그의 어깨 너머로 영상을 함께 시청했다.
‘맙소사!’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밀러는 영상 속 주인을 보며 기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까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밀러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요한은 피식 웃으며 지팡이를 벽에 세웠다. 긴장을 좀 풀어도 될 듯싶었다. 적어도 전투 상황은 아니란 거니까.
밀러는 영상 속 주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전하게 귀함하도록.”
─ Aye aye, sir.
상대는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통신을 종료했다.
주 격납고에 모인 장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전투가 터지는가 싶더니 30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어수선한 기류 속에서 등장한 정체불명의 에어쉽에 눈길을 모았다.
날렵한 디자인의 붉은 에어쉽.
확실히 연맹군의 기체는 아니었다.
“로스티아벤 건가? 쟤네는 취향도 특이하네.”
“멍청아! 저렇게 화려한 군용기가 어디 있냐?”
“그럼 민간기라고?”
에어쉽을 발견한 격납고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옥신각신 설전이 이뤄졌다.
“아벨의 분석에 따르면 껍데기는 러시아제 블랙 티타늄 합금이고 내부엔 불가시 모드에 스텔스 모드까지 탑재했대. 게다가 총탄까지 두둑하게 싣고 있단다. 이런 민간기 봤냐?”
“어느 돈 많은 재벌이 취미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
“저걸 취미로 어떻게 만들어! 돈만 있다고 저런 기체가 뚝딱 나오는 게 가능하냐고!”
한발 늦은 랜스는 술 취한 커크를 질질 끌며 격납고에 도착했다. 그는 머리를 낮춘 채 살금살금 도둑 걸음으로 열 맞춰 선 장병들 사이를 걸었다.
“함장님께 경례!”
요한이 명령하자 다들 관자놀이에 손을 붙이며 경례를 올렸다. 깜짝 놀란 랜스는 해롱거리는 커크를 바닥에 내팽개친 뒤 다리를 붙이고 경례했다. 그 바람에 정신이 퍼뜩 든 커크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풀린 눈으로 ‘딸꾹’ 하고 트림을 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랜스가 ‘쉿’ 하고 빨리 일어나라며 발길질을 했다.
“등신아, 함장님 오셨잖아!”
“함장님?”
고개를 빼꼼 내밀던 커크는 장병들 앞에 서 있는 밀러를 보고선 해롱거리던 눈을 비볐다.
“헉, 함장님!”
그는 스케이트장에서 미끄덩거리는 아이처럼 허둥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나, 내가 여기엔 왜 있지? 뭐, 뭐야?”
헐레벌떡 일어서서 거수경계를 한 커크는 랜스를 흘끔거렸다. 고작 술 한 잔에 필름까지 끊긴 커크를 보며 랜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저러니 유림에게 고자 소리나 듣지. 혼자 자위하다 걸리질 않나, 하여간 허술한 새끼.
“중얼거리는 거 다 들린다, 이 콧수염 대마왕아. 그러는 넌 유림한테 거시기 털이란 털은 죄다 잡아 뜯겼잖아.”
“거시기 털은 아직 안 뜯겼어, 새끼야!”
“그랬나?”
커크는 코를 후벼 파며 실실 쪼갰다.
“근데 다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커크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멀리 보이는 붉은 에어쉽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게 뭔데 함장님까지 오신 거지?
그때, 빨간 에어쉽의 문이 날개처럼 위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커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느닷없이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언젠가 유림에게 그의 ‘애장 히어로 속옷 1번’을 들키고 강탈당한 뒤 놀림감이 되었던 그날처럼 식은땀이 났다.
‘설마…….’
그는 불길한 눈초리로 정면을 응시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몇 년 전 혼자 자위하다가, 문 앞에 서 있던 유림이 피식 비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래로 처음 느끼는 공포였다. 커크는 퀭한 눈으로 랜스에게 말했다.
“랜스, 나 속이 안 좋아.”
“술 한 잔에 오바이트까지 하시려고?”
랜스는 실실 웃으며 이죽거렸다. 영상으로 남겨서 유림 오면 보여 줘야지. 신나서 스마트 워치의 각도를 맞추는 랜스를 보며 커크는 이를 바득 갈았다.
‘저 망할 놈의 리본 콧수염! 확 다 뜯어 버릴라.’
문 열린 에어쉽 안쪽에서 검은 전투복을 입은 매끈한 몸이 폴짝 뛰어내렸다. 군살 하나 없는 허벅지와 엉덩이가 탱탱한 살을 출렁이며 등장하자, 남자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즐기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야, 내 환영식이야? 완전 감동인데?”
다들 입을 딱 벌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유림은 이제 그만 쳐다보라며 눈을 찌릿 부라렸다. 그러자 장병들은 흠칫하며 고개를 냉큼 숙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정확히 두 부류였다. 하나, 헤벨의 고양이에게 물려 봤거나 둘, 헤벨의 고양이에게 물려 본 이의 처참한 몰골을 목격했거나. 어느 쪽이든 저 예쁜 얼굴이 얼마나 지랄 맞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유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밀러!”
유림은 너른 가슴을 향해 폴짝 뛰어들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뺨을 부비며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행복한 미소로 눈을 감고 속삭였다.
“다녀왔어.”
이제야 집에 온 기분이었다. 이렇게 그의 온기에 안기고서야, 비로소.
“어서 와, 내 고양이.”
밀러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서 말없이 긴 여운을 나눴다.
“누굽니까? 함장님 애인입니까?”
얼마 전에 이란에서 새로 왔다는 기술 장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지 예쁘지 말입니다.”
“죽고 싶다면 가서 고백해라.”
“예?”
“여기서 고양이에게 안 물려본 사람은 없지. 헤벨의 신고식 같은 거야. 사랑의 세레나데가 아니고 피의 세레나데지.”
파머 대위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하며 하품을 했다. 다들 킥킥거리며 웃었다. 기술 장교는 일렬로 서 있는 다른 장병들을 좌우로 쳐다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흐뭇한 얼굴로 유림을 보며 웃었다.
한발 늦게 에어쉽에서 내린 케이는 허리를 들자마자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망막에 비친 광경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유림과 밀러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특히 유림의 정수리에 입술을 대고 있는 밀러의 표정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인내는 반복과 연쇄의 고통이다. 치워 버리고 싶은 것들을─혹은 놈들을─ 보고 또 봐야 하니까.
낯선 인물을 본 장병들은 본능적으로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의 좁혀진 미간은 유림을 끌어안은 밀러의 팔만 노려보고 있었다.
“유림.”
밀러의 품에 꼭 안겨 있던 유림은 고개를 들더니 손을 흔들었다. 케이가 옅은 갈색 머리칼 아래 예쁜 얼굴로 생긋 웃으며 서 있었다.
“뭐하고 있는 거예요?”
“응?”
“아무 남자나 그렇게 덥석 안고 그러면 안 돼요.”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다가온 케이는 팔을 들더니 순식간에 유림을 밀러에게서 떼어 냈다. 어깨를 잡힌 채 허공에 ‘붕’ 들린 유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였다. 화분 하나를 옮기듯 유림을 번쩍 데려온 케이는 그녀를 뒤에서 가두듯 껴안았다.
“아무 남자가 아니라 밀런데…….”
“나 빼곤 죄다 아무 남자예요.”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밀러의 눈초리가 공격적으로 변했다.
“유림.”
“응?”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최대한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이쪽으로 와.”
“어?”
유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밀러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팔을 벌리며 빙긋 웃었다.
“어서.”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긴 한데 눈빛이 묘하게 살벌했다.
“다른 남자면 몰라도 저 남자는 위험해. 오빠가 많이 걱정되니까…….”
“오빠?”
바로 되묻는 케이의 입가에 비딱한 미소가 일었다. 밀러는 여유로운 얼굴로 한술 더 떠서 덧붙였다.
“그만 내 동생한테서 그 손 좀 떼어 줬으면 하는데, 애덤슨 중사?”
케이는 눈을 가늘게 휘며 웃더니 보란 듯이 유림을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유림이 기분 좋은지 등을 비비며 웃자 그는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밀러의 눈이 분노로 뒤집혔다.
“당장 유림에게서 떨어져! 당장! 그렇지 않으면…….”
“않으면?”
그가 피식하며 도발하듯 물었다. 밀러는 입을 다물었다. 살기 어린 눈초리만 갈무리하며.
장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 격납고 내에 전장보다도 더 무서운 바람이 일고 있었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저 두 사람,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오!”
그때였다. 입구에서 나타난 인영이 감탄사를 외치며 격납고 한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남자는 유림을 보더니 박수를 치며 환영인사를 건넸다.
“귀환했군, 정 소위.”
노아 호크였다. 다른 장병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제복 차림, 그는 낙원에서 보았던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케이와 밀러 사이에 떡하니 끼어든 호크는 유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내게도 감격의 재회를 안겨 줘야지 않나?”
“노망났나, 이 아저씨가!”
유림은 코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호크의 면상을 질색하며 밀어냈다. 턱과 뺨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유림을 보며 호크는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는 호크를 향해 꺼지라며 발길질하는 유림을 안고 한 걸음 물러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 숨어 있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노아.”
호크는 능글능글한 어투로 두 사람만 들리도록 낮게 대답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내 권주에게 더러운 성희롱이나 그만하지?”
“하하, 성희롱이라니요. 권주…… 예?”
웃음을 터뜨리던 호크가 놀란 듯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그는 유림과 케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마스터께서가 아니고 정 소위가 권주가 되었단 겁니까?”
“불만 있나?”
케이는 생긋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예쁘게 휜 눈웃음 속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내 권주에게 손대는 놈은 다 쳐 죽인다.’란 눈초리.
호크는 난감한 듯 허공을 응시했다. 유림은 아리송한 눈빛으로 갸웃거렸다.
밀러는 얼어붙은 채 대화를 듣고 있었다. 유림과 케이가 권속 관계가 됐다. 그 말인즉슨…….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닥치니 가슴이 묵직하게 저려왔다. 호크는 당황했지만 노련하게 표정 관리를 하더니 ‘큼큼’ 하고 유림의 어깨를 두들겼다.
“잘했다, 정 소위.”
“예? 뭘요?”
“애완병 하나는 탁월하게 잘 골랐다는 뜻이다.”
“예?”
‘노아, 저 빌어먹을 자식이…….’
케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며 잇새를 사리물었다. 호크는 피식 웃으며 격납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상황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주먹에 잔뜩 힘을 준 채 서 있는 밀러와 어깨를 스치며 속삭였다.
“선수를 뺏겼군, 미카엘.”
모두의 혼을 쏙 빼놓았던 호크가 퇴장하자마자 유림은 케이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케이가 배를 잡고 쓰러졌다. 유림은 엄살 부리지 말라며 그의 무릎을 다시 한 번 세게 걷어찼다.
“엄살 아니고 정말 아픈데.”
“웃기지 마, 에덴 타워 위에서 거꾸로 떨어뜨려도 멀쩡할 몸이 아프긴 뭘 아파!”
“잠깐, 맞기 전에 이유부터 좀……. 왜 화가 났어요?”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다들 쳐다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짓을…….”
“아, 그런 짓.”
케이는 바닥에 안짱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쑥스러워요?”
그가 투명한 눈가에 조각달처럼 완벽한 눈웃음을 머금었다.
“좋아하잖아요. 꼼짝 못하게 꽉 안고 키스해 주는 거…… 읍!”
“입 다물어!”
유림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주변을 확인했다. 씨근덕대던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서 있는 커크와 랜스를 보고선 움찔 동요했다. 두 사람 모두 넋을 잃은 고릴라처럼 양팔을 늘어뜨린 채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길!’
유림은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천천히 떼었다. 여태까지 쌓아 온 데드캣으로서의 카리스마와, 까불거리며 남성 장교들의 성적 자존감을 밟아 왔던 그간의 악동 짓거리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유혹과 수치심을 당근과 채찍처럼 번갈아 사용하며 저들을 조련해 왔건만 이렇게 무너지다니.
이제 곧 데드캣이 계집애처럼 남자 품에 안겨 희롱당하며 로맨틱 영화의 주인공처럼 몸을 꼬았네, 소녀처럼 볼을 붉혔네 하는 스토리가 헤벨 곳곳에 피어날 것이다.
케이는 흘끗 커크와 랜스 그리고 그 외 전 기동수색대 팀원들 쪽을 쳐다보더니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눈을 휘며 웃었다.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울상 짓고 있는 유림의 뒷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들 앞에서는 여자가 아닌 군인이고 싶은 그녀인데.
“걱정 마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뭘 어떻게 알아서 할 건데?”
“지금 이 순간부터 난 브루클린의 성녀에게 꼼짝도 못하는 애덤슨 중사예요. 맞아서 빌빌대고 과녁처럼 걸려서 벌 받는 성녀님의 골칫덩이.”
유림이 우울한 표정으로 돌아서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속상해하지 마, 내가 잘못했으니까.”
낮게 달래는 목소리가 가슴 한 구석을 덜컥, 우묵하게 휘저었다. 맥박이 두근거리며 요동친다.
생각보다 반응이 유순하자 케이는 그녀를 빤히 관찰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발그레 뺨을 붉히는 유림의 모습에 그는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넋을 잃고 유림의 얼굴을 쳐다보던 케이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쪽’ 입을 맞췄다.
“바보! 뭐하는 거야?”
“아…….”
그의 얼굴을 밀쳐 낸 유림은 버럭 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케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순 이성을 잃은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듯, 그저 일말의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여간 잠시만 틈을 주면 시도 때도 없이 저런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좋아하시네, 변케이 같으니!
유림은 밀러의 곁으로 가더니 뭐라고 종알종알 성을 내며 함께 걷기 시작했다. 케이는 모르는 척 떨어져 걸으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열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유림이 바로 옆에서 재잘거리는 것처럼 잘만 들려왔다. 그녀는 ‘케이, 케이’거리면서 그에 대한 불만을 와르르 쏟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흡족한 듯 입꼬리를 실룩 움직였다.
반면 유림의 어깨를 안은 밀러의 눈초리에서는 질투심이 묻어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케이는 투명한 눈동자로 생긋 무시했다. 유림도 회포를 풀 시간이 필요하긴 할 테니까, 잠시 그녀를 뺏겨도 참아야겠다. 케이는 억지로 두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안 보는 게 상책이다.
격납고 내로 시선을 옮기던 케이는 뭔가를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췄다.
함장이 나가자, 대열을 지키고 있던 장교들도 해산하기 시작했다. 랜스와 커크는 제일 먼저 총알같이 유림과 밀러의 뒤를 쫓았다. 몇몇 엔지니어들은 이때다 싶어 붉은 에어쉽 주위에 왁자지껄 모여들었다.
텅 빈 공간에 홀로 멍하니 서 있던 요한은 휘청거리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지팡이를 놓친 그는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동공이 커다랗게 질린 요한은 잔뜩 겁을 먹은 기색이었다.
정면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백짓장처럼 파리한 낯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케이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채 그의 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 아담…….”
그는 사색이 된 요한을 향해 담백한 눈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야, 요한 가르두치.”
* * *
낙원을 떠난 제인 헬렌 왓슨이 찾은 곳은 미국의 시카고였다. 시카고는 왓슨 그룹의 수장인 램지 왓슨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램지는 그가 태어난 하이랜드 파크의 저택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그를 본 제인은 그 자리에서 탄식을 흘렸다. 오랜만에 본 조부는 많이 야윈 상태였다. 뒤늦은 회한이 밀려왔다. 그 이기적인 남자를 갖겠다며 ‘이브’란 이름으로 철딱서니 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를 길러 준 조부는 홀로 외롭게 삶의 마지막 날을 세고 있었다.
“미안해, 할아버지. 내가 잘못했어.”
제인은 서글픈 얼굴로 램지의 얇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그마저 떠나면 그녀는 진정 세상에 혼자였다. 앙상하게 툭 튀어나온 그의 쇄골을 어루만지며 제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정작 램지는 괜찮다면서 검버섯이 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며 위로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패악질이란 패악질은 다 부리고 다닌 제인이었다. 그렇게 비뚤어져 가는 손녀의 성질머리를 알면서도 램지는 오히려 그녀를 더 애지중지 키웠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탓이라며, 그게 되레 그녀를 망치는 길이란 걸 알면서도 딱한 마음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할아비는 괜찮은데 힘들게 뭣하러 이리 먼 곳까지 왔어? 카인 이사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야?”
“흐흑…… 할아버지!”
“뚝, 울지 말고…….”
북받쳤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제인은 고목처럼 마른 램지의 팔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왜 그렇게 공허한 애정을 갈구했을까?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온기는 이곳에 있었는데.
겉보기엔 아름다웠던 남자였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을 거치고서야 깨달았다. 그는 설원처럼 봄이 오면 녹아 없어질 환상이었단 것을.
“회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저택 집사인 로버트가 누긋한 목소리로 알렸다. 육십 대 정도로 보이는 그는 사실 삼십 년 가까이 된 고물 안드로이드였다. 몇 차례나 폐기될 위험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램지는 그를 고치기 위해 단종된 부품들을 찾아 전 세계를 헤맸다.
로버트가 다가와 귓속말을 하자 램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을 보며 제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알았다. 조부는 고독한 것이다. 외롭고 외로운 삶의 끝에 오니, 오랫동안 곁에 둔 안드로이드가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었을 정도로 적적한 인생이었다.
“네가 오니 좋구나.”
램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제인은 누워 있는 그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앞으로는 쭉 할아버지 곁에 있을 거예요.”
“그래,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엘 카인에 관한 소식은 전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그를 아들처럼 여겼던 램지였으니 적지 않은 충격을 받으리라.
제인이 그렇게 마음먹기가 무섭게 침실 문이 열렸다.
집사 로버트 옆에 웬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흑갈색 머리에 아담한 체구인 백인 여자는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창백한 뺨에 촘촘히 박힌 주근깨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조금 시대가 지난 듯한 디자인의 정장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디서 재단을 했는지 몸에 맞춤처럼 어울렸다. 오래된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클래식한 옷과 구두, 머리 모양새였다.
“회장님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제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보고 나가라고?”
여자는 램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느새 몸을 주섬주섬 일으키고 있었다. 램지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제인,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거라.”
제인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문밖을 나섰다. 저택 밖으로 나오자 정원 너머 커튼이 걷힌 창문을 통해 램지의 침실이 보였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은 그는 여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인은 잔디밭에 놓인 벤치에 앉아 두 사람을 빤히 주시했다.
‘처음 보는 여잔데.’
제인이 의문 어린 시선을 던지자 옆에 따라온 로버트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처음 뵙는 분입니다. 회장님의 개인 기록 어디에서도 그녀에 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인은 ‘그럼 그렇지, 고철 덩어리인 네가 아는 게 뭐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낙원에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니 과학 기술이 수십 년은 후퇴한 느낌이었다. 안드로이드부터 에어쉽, 홈 케어 시스템, 건물과 도시 설계까지 로스트 헤븐은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지?’
제인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짜증 섞인 눈초리로 로버트를 째려보았다. 왓슨의 눈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로버트의 눈이나 활용해 볼까 했더니, 저 늙은 안드로이드의 눈은 없느니 만도 못하다.
“무슨 도움이라도 필요하십니까?”
“됐어. 가서 밥이나 해.”
“이미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럼 다시 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라도…….”
“토 달지 말고 다시 하라면 그냥 다시 하라고!”
“어차피 같은 메뉴가 될 텐데요. 정확히 어떤 점에서 마음에 안 드시는지 말씀을 해 주시면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제인은 “악!”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씨근덕대며 로버트를 노려보았다.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어 가지고! AI 주제에 진짜 노인네처럼 무슨 똥고집을 부리는 거야? 이거 불량 아니야? 제조사가 대체 어디야!’
그녀는 다짜고짜 로버트의 뒤통수를 낚아채서 옷깃을 뒤집었다. 목 주변을 이리저리 뜯어봤지만 어디에도 제조사나 모델명은 없었다. 아, 구식 기기들은 발뒤꿈치에 나와 있던가?
화난 얼굴로 기웃거리는 그녀를 보던 로버트는 인자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절 만드신 분은 시베리아 연구소 소속의 과학자셨습니다. 나노 과학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셨고,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기도 한 분이셨지요. 전 박사님께서 취미로 개발한 ‘실수가 만들어 낸 완벽한 결함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네이밍 센스 한번 괴상망측하다. 제인은 ‘그 로봇에 그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눈초리를 가오리처럼 흘겼다.
“취미로 만든 모델인 주제에 어떻게 왓슨 본가에 와 있는 거야?”
“2072년 2월 16일, 스위스에서 정기 나노 학회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박사님께서도 물론 참가하셨지요. 학회 발표가 끝난 뒤 박사님께서는 여흥으로 본인이 만든 창작품 몇 개를 뒤풀이에서 선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그 자리에 계시던 회장님께서 박사님의 발명품 중 하나에 눈독을 들이신 겁니다.”
“그게 너라고?”
“그렇습니다. 전 페트로비치 박사님께서 만든 최초의 ‘실수를 할 줄 아는 안드로이드’입니다. 저는 제 자신도 예측하지 못하는 확률로 오류를 범하고, 그 오류를 유머로 넘길 줄도 압니다.”
“안드로이드에 그런 기능은 필요 없어.”
제인이 따분하다는 얼굴로 말하자, 로버트는 가만히 웃었다.
“그게 바로 박사님께서 일반인들과 다르신 점이겠지요. 박사님께선 기능만 하는 AI가 아닌 인간적인 AI를 창조하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실수를 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유머를 즐길 줄 안다는 겁니다. 이 녀석을 사람처럼 대해 보십시오. 그럼 로버트와 조금 더 재밌게 지낼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박사라는 자가 할아버지한테 전했다는 말이었다. 제인은 코웃음을 쳤다. 안드로이드를 사람처럼 대해 보라니, 그럼 그냥 사람을 쓰지 누가 안드로이드를 쓰겠어?
안드로이드는 기계고 프로그램이다. 기계는 정해진 알고리즘대로 일 처리를 하고, 내려진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 실수는 곧 결함이자 오류고, 감정 없는 로봇에게 농담이란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다. 그 박사라는 작자는 기적이라도 행하고 싶었던 것일까? 제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로버트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더니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램지가 있는 침실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낯선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장미 문양이 새겨진 자그마한 전자담배를 입가에 물었다.
“오랜만이구나, 램지.”
램지는 혼란스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레이첼 씨,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있느냐고?”
레이첼이 웃으며 되물었다. 램지는 현기증이라도 느끼는 듯 관자놀이를 짚으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그의 동공이 아득한 기억 속으로 침식했다.
‘벌써 팔십여 년이나 흘렀나.’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온 하늘은 비도 내려 주지 않았다. 레이첼의 장례식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다니던 교회에서 치러졌다. 하얀 대리석 교회는 잿빛 하늘을 향해 슬픈 종소리를 울렸다. 관 속 그녀의 얼굴은 소녀처럼 평온했다. 고되고 서러웠던 삶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램지, 아직도 신을 믿니?”
레이첼은 굳은 표정의 램지를 향해 시니컬하게 웃었다.
“난 믿지 않아. 다 부질 없었어. 내 기구하고 억울한 삶의 끝을 믿음 하나로 돌려보고자 했지만 결국 처음부터 외면당한 인생에 반전 따위는 없었지.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고 봉사했건만 무엇 하나 내게 돌아오는 건 없었어.”
“믿음의 대가로 뭔가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니?”
그녀는 검버섯투성이인 그의 늙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대로 죽지 않고 제2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다 늙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는 몸뚱이 대신 젊은 시절의 육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매일 죽음을 기다리며 두려움 속에 잠드는 대신 창창한 앞날을 기약할 수 있다면?”
삐쩍 마른 고목처럼 누워서 듣던 램지의 동공이 굽이치며 일렁였다.
“세상에 신은 없어. 적어도 우리 같은 이들에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지. 네 어머니를 떠올려 보렴. 그렇게 독실한 교인이었는데 결국 그 젊은 나이에 가 버렸잖니? 네 손녀인 제인은 어떻고? 엘 카인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봐. 신이 존재한다면 네게 이럴 수는 없겠지…….”
밖에 앉아 있던 제인은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손에 턱을 괴었다. 무슨 얘기를 저리 길게 하는 것일까?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램지가 있는 창가 쪽을 응시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갑자기 휘둥그레진 눈으로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지?”
창밖에서 본 램지가 등을 보인 채 벽에 걸린 모포처럼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레이첼의 좁은 어깨에 팔을 매달고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제인은 험상궂은 눈빛으로 이를 사리물었다. 그녀는 한달음에 저택 안으로 뛰어가 침실 문을 박차고 열었다.
“할아버지!”
때마침 레이첼이 또각또각 문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마주친 제인을 보며 생긋 웃었다.
“덕분에 이야기 잘 나눴습니다.”
“거기 멈춰.”
제인의 싸늘한 목소리에 레이첼은 어깨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로버트는 램지의 침상에 다가가 힘없이 누워 있는 그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제인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한 제인은 문을 닫고 레이첼을 끌고 나왔다.
“할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했어?”
“아, 그거요.”
레이첼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살려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회장님께서…….”
그녀는 조롱을 담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제게 목숨을 구걸하시더군요.”
철썩! 레이첼의 뺨을 때린 제인은 씨근덕거리며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제인은 눈을 부라리며 다시 손을 올렸다. 레이첼은 불시에 얻어맞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멍하니 제인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얼빠져 있는 틈을 타 제인은 레이첼의 뺨을 다시 한 번 ‘철썩!’ 후려쳤다. 휘청거리던 레이첼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네 까짓 게 감히!”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던 제인은 멈칫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얼한 감촉과 함께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뭐지?’
제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레이첼을 쳐다보았다. 욱신거리며 부은 그녀의 손과 달리 레이첼의 뺨은 벌건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설마…….’ 하고 크게 일렁였다.
제인은 어려서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다. 온화하고 차분한 램지의 핏줄이란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아이였다.
성형수술을 한 뒤 모델 이브로서 청순한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제인의 성질머리를 아는 에덴 타워의 관계자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껏 그녀가 분풀이 대상으로 부순 안드로이드만 수십 대, 그녀의 히스테리를 못 견디고 나간 경호원의 수만 서른 명이 넘었다.
에덴 타워로 납품되는 안드로이드들은 대개 위즈덤에서 제조된다. 위즈덤에서 생산된 안드로이드의 인공피부는 다른 제조사들의 것보다 훨씬 인체에 가깝다고는 하나, 소돔에서 매춘부로 쓰는 용도가 아닌 이상 일반 가정용이나 사무용 안드로이드의 피부 조직은 피부의 탄성이나 감촉 면에서 뻑뻑하고 두터운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직접 만져 보기 전까지는 눈치챌 수 없었다. 사람처럼 실수를 하고 농담을 하는 로버트도 특이했지만 그를 포함한 AI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패턴이란 게 존재했다.
인간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또 그것에 희열을 느끼는 로봇은 심지어 낙원 내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제인의 뇌리 속에 불현듯 공중 정원에서 사회를 보던 사회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능수능란하게 행사를 이끌던 그 남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안드로이드였다. 그리고 그것 역시 위즈덤에서 제조한 안드로이드였다.
“너 정체가 뭐야?”
레이첼은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나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안드로이드잖아! 속일 생각 하지 마.”
“…….”
“우리 할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했어?”
램지는 이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녀석을 제작해 조부에게 접근시켰다는 의미다.
레이첼은 의외라는 눈빛을 지었다. 성질 더럽고 욕심 많은 왓슨가의 공주님이라고만 들었는데 생각보다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타입은 호불호가 분명하다. 적은 많지만 제 사람에게는 확실히 의리를 지킨다.
에밀리 로즈와 닮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의 고집스러운 면이.
그녀도 그랬다. 온 세상에 제 매력을 발산하고 싶어 하면서 정작 본인이 갖고 싶어 했던 것은 ‘한 남자’에 불과했다. 철부지 아가씨의 순정은 사랑스럽고 순수했다. 그래서 이용하기도 쉬웠다. 엘 카인도 제인 왓슨의 그런 점을 꿰뚫어 본 게 아닐까?
“인간은 죽음 앞에 당면하면 태어날 때 모습 그대로 헐벗은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습니다. 신들은 결코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 따윈 주지 않는다는 걸.”
레이첼의 말에 제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동요했다.
일평생 자존심과 긍지만은 누구보다도 곧고 높았던 램지였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그리 절박하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모습은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그러게 왜 그렇게 회장님을 홀로 오랫동안 내버려 두셨나요?”
제인은 얼어붙은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또각또각 멀어져 가는 발소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제인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돌아섰다. 로버트가 서 있었다. 감색 바지에 베이지색 체크 조끼를 입은 단정한 모습으로.
“로버트.”
“예, 아가씨.”
“저 여자…… 누구야?”
“누군지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위즈덤에서 보낸 이인 듯합니다.”
그는 제인의 눈앞에 램지의 개인 문서 창을 띄웠다.
【알림】
새로 온 메일1
뉴 라이프 프로젝트에 가입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램지 왓슨 회원님!
“뉴 라이프 프로젝트?”
램지의 메일함을 열자마자 첨부된 계약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맨 아래에 있는 특약 사항을 읽어 보십시오, 아가씨.”
“최우선 순위로 가기 위한 특약 조건…….”
파란 윤곽선의 문서 내용을 빠르게 읽던 제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램지 왓슨과 제인 헬렌 왓슨의 이름 앞으로 되어 있는 로스트 헤븐의 지분과 권리를 전부 알렉스 아브라함에게 양도할 것에 동의한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하, 할아버지…….”
뉴 라이프 프로젝트에 최우선 순위로 가입하는 조건으로 로스트 헤븐의 지분과 권리를 양도했다는 건가?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던 조부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그때 저택 상공에 긴 꼬리구름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나타났다. 파란 하늘에 엔진 소리를 울리며 등장한 에어쉽은 문에 익숙한 마크를 달고 있었다. 진주색 기체는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정문 앞에 멈추더니 서서히 하강을 시도했다.
“이런, 제가 한발 늦었나 보군요.”
에어쉽에서 내린 여자는 반대편 상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쪽은 방금 전 레이첼이 타고 간 에어쉽이 사라진 방향이었다.
“클라크 의원? 당신이 여긴 어쩐 일로…….”
멜리사는 대답 대신 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인은 그녀가 내린 에어쉽의 마크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황금색 아름드리나무 문양. 제인은 이를 바득 갈았다.
“평의회가 보냈어?”
“설마요. 방금 막 의원직을 때려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멜리사의 입가에는 속 시원하다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인은 의아한 눈초리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재킷에 늘 달려 있던 평의회 배지가 보이지 않았다.
“뉴스를 못 보신 겁니까?”
“무슨 뉴스?”
“위즈덤 대표인 알렉스 아브라함이 낙원의 새 관리자로 선출되었습니다.”
제인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낙원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러는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세상이었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럼 카인은?’
새로운 관리자가 뽑혔다는 건 이전 관리자가 자의가 됐든 타의가 됐든 물러났다는 의미였다. 낙원에 제 편이라곤 하나 없을 텐데 엘 카인은 무사할까? 제인은 입 안에서 맴도는 질문을 차마 묻지 못한 채 속으로 삼켰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엘 카인 전 대표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제인은 다행이란 듯 한숨을 내쉬었다. 멜리사는 바로 본론으로 돌입했다.
“이대로 그들의 손에 낙원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계실 작정입니까?”
“어쩔 도리가 없어. 할아버지의 환후가 위중한 데다가 카인은 연락조차 닿질 않는걸.”
“엘 카인이 낙원의 관리자로 인정받았던 건 왓슨 회장님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낙원의 관리자는 왓슨가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로스트 헤븐은 왓슨가의 재산이니까요.”
“왓슨가의 재산이라……. 더 이상 그렇지도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인은 그녀에게 뉴 라이프 프로젝트 계약서를 보여 줬다. 멜리사는 허공에 뜬 계약서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시선이 아래로 향할수록 그녀의 눈동자는 점차 커진 채 굳었다.
“이제 낙원은 놈들 거야.”
솔로몬이 뭔가 선수를 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이 남자는 오래전부터 램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치밀한 인간이었다.
“빼앗겼다면 다시 탈환하면 됩니다.”
“뭐?”
“아가씨께서 직접 낙원을 되찾으십시오. 저 멜리사 클라크가 보좌하고 돕겠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아가씨를 찾아온 이유입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인은 바닥을 짚고 일어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버트는 미소를 띠운 채 저택 내로 돌아갔다.
“아이작 라이트 의원을 포함해 우리야 세르게이까지 평의원들 모두가 솔로몬과 한통속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도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발언권을 행사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의장인 세르게이 총사령관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란 건 확실합니다.”
“그게 누군데?”
멜리사가 무거운 눈빛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자는 낙원의 설계자라 불립니다.”
“낙원의 설계자?”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그녀는 그간 백방으로 그에 대해 수소문을 해 보았다. 그러나 뜬구름 같은 소문을 제외하고서, 실질적으로 그에 대해 획득할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회장님께서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실까요?”
“할아버지는 낙원에 관한 모든 사항을 카인에게 전임했었어. 실제로 할아버지께서 로스트 헤븐에 대해 아는 건 나보다도 없을 정도야.”
“확실한 건 왓슨 3세를 다루려면 관리자 권한이 필요하고, 관리자 권한을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낙원의 설계자뿐이라는 겁니다. 아마 그가 왓슨 3세의 창조자일 테지요. 결국 알렉스 아브라함도 낙원의 설계자를 포섭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제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낙원에 있을 당시에도 정치판에서는 발을 빼고 있었던 그녀였다. 경황이 없을 게 당연했다. 멜리사는 일단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엘 카인 전 대표를 찾는 수밖에요.”
“카인도 로스트 헤븐을 기획했던 장본인은 아니었어. 당시 로스트 헤븐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이는 따로 있었는데…….”
제인은 손톱을 깨물며 기억을 곱씹었다. 흐릿한 기억 너머로 하얀 연구복을 입고 다니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번 본 적 있었어. 로스트 헤븐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라면서 인사를 나눴거든. 동양인이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리? 리 박사였나?”
“리 박사란 말이지요?”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트 헤븐은 곧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겁니다. 연맹군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고 있어요. 우리도 발을 담가야 합니다. 이러다간 자칫 낙원이 연맹군이나 위즈덤 손에 떨어질 거예요. 혹 낙원 내부에 믿고 도움을 청할 만한 인물은 있으신지요?”
제인은 순간 마지막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던 사샤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 명 있기는 한데…….”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까?”
멜리사의 눈빛에 걱정이 스쳤다. 워낙 폐쇄적인 삶을 살아온 제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대로 사람을 볼 줄이나 알까? 주위에는 순 아첨꾼들밖에 없었을 텐데.
제인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답했다.
“내게 유일하게 쓴소리와 막말을 하는 친구야. 날 싫어하거든.”
* * *
한편 헤벨의 식당에서는 작은 환영회가 열렸다. 전 기동수색대 대원들이 귀환한 유림을 위해 준비한 조촐한 선물이었다.
“어이, 데드캣!”
커크가 다가와 옆자리에 앉자 유림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와 잘 붙어 다니는 랜스도 맞은편에 앉았다. 랜스의 콧수염을 본 유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이건 안 돼.”
랜스가 콧수염을 잽싸게 손으로 가리자 유림은 코웃음을 쳤다.
“더러워서 만지기 싫어, 나도.”
“더럽긴 뭐가 더러워! 매일 씻고 에센스도 발라 주는데.”
“그게 더럽다는 거야! 그냥 면도를 하란 말이야. 설마 가슴 털도 그렇게 소중히 기르는 건 아니겠지?”
“또 그런 성차별적인 발언을…….”
랜스는 씨근덕대며 콧김을 내뿜었다. 유림은 혀를 끌끌 차며 맥주를 들이켰다. 생긴 건 대장장이같이 우락부락하면서 속은 여려 가지고. 옆에서 눈을 흘기며 기회를 엿보던 커크는 이죽거리며 물었다.
“그 남자는 뭐냐? 애인이냐? 아주 폭 안기더니 가슴을 막 흔들면서 애교를 떨던데…… 크헉!”
‘퍽!’ 소리와 함께 유림의 왼 주먹이 커크의 배에 박혔다.
“내 가슴이 흔들리는 걸 네가 봤어?”
“봐, 봤는데…… 진짜 출렁출렁 흔들리던데…….”
“죽어! 그냥 죽어, 이 변태 새끼야!”
“허억! 크흡!”
커크의 등에 발길질을 해대는 유림을 보며 랜스는 야금야금 땅콩을 입에 집어넣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다른 대원들도 턱을 괸 채 한심하다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몇 분 뒤 커크는 쌍코피가 터진 채 팬티만 입은 몸으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식당에 드나들던 병사들은 이마에 ‘고자 새끼’라고 써 놓은 그의 얼굴을 보며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고자냐?”
랜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커크는 유림을 향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것 봐, 다들 내가 진짜 불능인 줄 알잖아! 소문이라도 나면 어쩔 거야? 당장 지워 달라고!”
“닥쳐, 이 고자 새끼야! 네가 고자니까 내 가슴만 보고도 흥분하지. 진짜 여자랑 해 봤으면 그러겠어?”
유림은 그의 허벅지 사이를 내려다보며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갈겼다. 커크는 울먹이다가 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렸다. 분통하지만 덤벼 봤자 또 얻어터질 게 뻔했다. 저 괴물은 낙원에 가더니 몇 배 더 진화해서 돌아왔다. 주먹의 강도와 타격감이 예전과는 비교 불가의 수준이었다.
“등신같이 이젠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네. 예전엔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지 않았냐?”
랜스가 완전 곤죽이 된 커크를 보며 불쌍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동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아예 상대가 안 되네.”
“사자와 호랑이도 아니고, 마치 종이 다른 생물체끼리의 싸움을 보는 것 같달까?”
“사자와 사마귀 이런 거?”
“그렇지. 육식동물 발밑에 깔린 가련한 벌레 한 마리의 버둥거림 같은 거.”
“야! 너희는 뭐 다를 줄 알아? 쟨 여자도 아니야. 뼈의 강도가 다르다니까? 한 대 맞자마자 바로 뇌진탕 오는 줄 알았다고…….”
커크는 얼얼한 뺨을 쥐어 잡고 울상을 지었다. 랜스는 두더지처럼 고개를 들고 그의 정수리를 들여다보았다. 알감자만 한 혹이 볼록 올라와 있었다. 그는 아프다고 엄살을 피워 대는 커크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통에 난 혹을 식혀 주기 위해 차가운 맥주 캔을 올려놓았다.
“저렇게 여자를 밝히는 녀석이 군대엔 왜 온 거야?”
“고자인 거 숨기려고 그랬겠지.”
유림이 당연하지 않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네가 내 불알 봤냐? 고자인 거 봤냐고?”
“내가 더럽게 그걸 왜 봐? 치워, 술맛 떨어져.”
유림은 눈초리를 날카롭게 구기며 그의 허벅지 사이를 흘겨보았다. 커크는 저도 모르게 가랑이를 오므렸다. 아, 자존심 상한다. 왜 유림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걸까? 진짜 불알도 콩알만 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귀함하는 날만 기다리며 매일같이 열심히 훈련했는데, 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도 나니까 이 정도지…… 케이가 들었으면 진짜 고자가 됐을 거야.”
“케이? 그게 네 애인 이름이냐?”
커크가 눈에 불을 켜고 쏘아붙였다. 유림은 무시한 채 주위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케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격납고를 나올 때부터 못 본 것 같은데 어딜 간 거지?
두리번거리던 유림은 여전히 씨근덕대고 있는 커크를 보며 피식 입가에 곡선을 머금었다. 그녀는 맥주잔을 들고 배시시 웃었다. 유림이 느닷없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웃자 커크는 뺨을 붉히며 홀린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몸은 좀 좋아졌네.”
그녀가 툭 던진 말 한마디에 우울하던 그의 낯빛이 환히 밝아졌다. 취기에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일순 정말 그가 귀여워 보였던 건지, 유림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곱슬거리는 커크의 머리칼을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커크는 두근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맞은편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랜스는 혀를 쯧 찼다. 저 바보 같은 녀석은 입만 살았지, 다른 여자와는 섹스도 못할 게 뻔했다. 저렇게 얻어터지면서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있으니 평생 유림만 짝사랑할 팔자였다.
개와 고양이의 싸움에 종지부가 찍히자 비로소 화기애애한 간담이 이어졌다.
베일에 싸인 낙원에 관해 호기심이 꽃피는 건 헤벨의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간 유림이 보냈던 낙원 생활에 대해 쉼 없이 질문을 던져 댔다.
“진짜야?”
“그렇다니까. 안드로이드 매춘부랑 결혼하겠다고 자살 소동까지 벌여서 난리도 아니었어.”
유림은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안드로이드와의 결혼을 인정해 달라며 반나체로 총을 들고 자살 협박을 하던 돼지를 생각하니 다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하여간 위즈덤은 왜 안드로이드 매춘부 따위를 만들어서 일거리를 늘리는지 모르겠다.
“와, 낙원에는 진짜 미친놈들 천지네.”
“난 좀 이해되는데? 그렇게 예쁜데 밤 기술까지 죽여주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 것 같지 않아? 생각해 봐. 쭉쭉빵빵인 와이프가 말도 잘 듣지, 바람피울 염려도 없지, 게다가 평생 늙지도 않을 거 아냐.”
커크가 실실 쪼개자 랜스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너는 로봇 가랑이 사이에 좆 박으면서 그렇게 좋다고 쪼개라. 병신아.”
“미친놈아, 당연히 농담이지. 근데 안드로이드랑 결혼하는 거 합법인 나라 있지 않아? 네덜란드였나?”
“있을걸? 그냥 개, 돼지하고 결혼하는 것도 합법화시키지 왜 안 하나 몰라. 안드로이드랑 결혼하는 거나 짐승하고 하는 거나 뭐가 다른지 난 도통 모르겠다.”
“안드로이드는 예쁘잖아.”
“넌 예쁘기만 하면 쑤실 거냐?”
“예쁘고 구멍만 있으면 되지.”
“남자도 구멍은 있어. 가서 박아 보든지?”
“미쳤냐?”
또 바보 같은 공방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나머지 대원들은 실없이 웃으며 일어섰다. 슬슬 제 위치로 복귀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유림도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키다가 뭔가를 발견하고선 눈을 크게 떴다.
“중령님?”
출입구 쪽에 밀러가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티격태격하던 랜스와 커크도 벌떡 일어나서 다리를 척 붙였다.
“함장님!”
“누구 제이콥스 대위 못 봤나?”
“이곳에는 안 계십니다만.”
“격납고에 계신 것 같습니다.”
유림은 덩달아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케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헤벨은 익숙하지도 않을 텐데 어딜 가서 안 오는 거지?
“그런데 네 애인 녀석은 어디 있냐?”
유림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커크가 속닥거리며 물었다. 유림은 눈을 깜빡이며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식당을 비롯한 함 내 전체 조명이 별안간 어둡게 내려앉았다. “위이잉!”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붉은 경고등이 머리 위에서 번쩍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들 술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적색경보잖아.”
적색경보는 적습과 같은 전투 상황 시에만 발령되는 부함장급 이상의 명령 신호다.
쾅!
함미 쪽에서 발생한 소리였다.
─ 주 격납고 내 3-A 구역에서 화재 발생.
─ 주 격납고 내 3-A 구역에서 화재 발생.
밀러와 유림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사롭지 않은 폭발 소리와 의심스러운 경보. 혼란스러운 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식당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 주, 중령님?”
“유림?”
커크와 랜스도 허둥지둥 의자를 넘어뜨리며 둘을 따라나섰다.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나머지 장병들도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내던지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빠르게 달렸다. 유림은 통로 곳곳 모서리마다 설치된 경고등을 보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검은 동공에 반사된 붉은 사이렌 조명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회전하고 있었다.
“아벨, 상황 보고부터 해!”
밀러는 유림의 등을 보며 명령했다. 그러나 아벨은 묵묵부답이었다.
주 격납고 입구에 도착하자 웅성거리며 모인 정비부사관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유림과 밀러를 보더니 동아줄을 발견하기라도 한 양 우르르 몰려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밀러는 조금 구겨진 제복의 어깨선을 툭 털며 물었다. 에어쉽 조종사 중 한 명인 럼스펠드 대위가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예정에 없던 대피 훈련이 실시되어서 다들 일단은 격납고 밖으로 이동했는데, 느닷없이 적색경보가 발령되더니 격납고 내부에서 폭발음이 들려왔습니다. 훈련 상황이 아님에도 격벽은 차단 조치된 채 꼼짝도 않는 상태입니다.”
“아벨이 명령 불복종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럼스펠드 대위는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지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밀러는 방금 전에도 그의 명령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벨을 떠올렸다. 격벽 앞에 모여 있는 장병들의 얼굴에 붉은 경고등이 살벌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는 왼손에 찬 스마트 워치를 열었다. 아벨이 무반응이니 수동으로 대원들과 통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수함의 수뇌부인 조종실에 비상 연락을 취했다.
“헤벨의 경계 등급을 최고 수준으로 올리고 조종실과 기관실은 격벽을 폐쇄 조치합니다. 부함장 제이콥스 대위는 어디 있습니까?”
─ 조종실입니다! 함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 시스템에 명령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커맨드를 할 수가 없다고?”
─ 지금 저희도 사태 파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아무래도 해킹을 당한 것 같습니다. 블랙햇입니다.
“블랙햇?”
옆에서 듣고 있던 유림을 비롯해 에어쉽의 조종사인 항공 장교들과 정비부사관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막 도착한 커크와 랜스도 밀러가 고함친 마지막 말에 놀라서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블랙햇black hat이란 타인이나 다른 기관에 피해를 주는 불법적인 해킹을 뜻한다. 즉, 누군가 보안을 뚫고 헤벨의 시스템을 장악했다는 의미였다.
─ 그, 그런 것 같습니다. 현재 조종실은 지휘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입니다. 일단 아벨을 완전 무력화시키는 게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밀러는 창백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목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손에 땀을 쥔 채 긴장을 삼켰다.
헤벨에 실린 무기와 장비는 연맹군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능과 파괴력을 자랑하는 것들이다. 행여나 이것들로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해치려 든다면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시스템을 탈취한 자에 대한 역추적은 가능합니까?”
─ 시도해 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최대한 서둘러서…….”
“중령님! 저길 보십시오!”
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허공에 파란 영상이 ‘피빗’ 하고 떠올랐다. 영상 옆에 뜬 마크는 푸른 원 안에 황금 돛이 박혀 있는 함장의 인장이었다. 명실상부 함 내 최고 권위를 뜻하는 함장실 권한 마크다.
모두들 밀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린 적 없는 명령이 자신의 계급 마크를 단 채 떠 있었다. 아벨을 해킹한 녀석의 짓인가? 감히 전략국의 작전부장을 농락하다니 목숨 줄이 여러 개인 모양이다. 밀러의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영상 속은 어두컴컴했다. 붉은 경고등은 그 속에서도 번쩍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 용서해 줘.
누군가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제발…… 용서해 줘.
이윽고 화면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얼굴의 반밖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참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뾰족한 콧날과 얇은 입술 그리고 날카로운 턱 선. 그는 마른 얼굴에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흐느끼며 계속 용서를 빌었다.
─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정말 뉘우치고 있어. 단 하루도 편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정말이야.
격벽 밖에서 대기 중이던 장병들은 굳은 눈으로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충격 어린 표정의 밀러와 유림도 섞여 있었다.
─ 벗어나고 싶었어. 스타시티로부터, 알렉스 아브라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어. 내 인생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어. 그래서 그랬어. 두렵고 무서워서…….
“누구하고 얘기하는 거지?”
“장교 같은데?”
─ 내가 이기적이었어. 나만 생각했던 게 맞아. 너와 사샤에게는 죽을죄를 지었다.
“사샤?”
“그게 누구야?”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누구지?”
─ 처음엔 정말 도울 생각이었어. 그런데 헤벨에 오고 나니 불안해졌어. 간신히 정착한 보금자리를, 이곳 동료들을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자, 잠깐!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린 동공 속에 남자를 향해 다가오는 인영의 모습이 맺혔다.
─ 살려 줘! 뭐든 할 테니, 제발…….
“어이, 저 사람!”
“잠깐만, 잘 안 보여…….”
커크가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랜스는 작은 키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지 기웃거리며 까치발을 했다.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커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 이브를 구하는 건 불가능일 거라 생각했어. 결코 그녀를 죽이려 했던 게 아니야. 난 그저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여겼어. 미안해……. 정말 면목이 없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여기는 지옥 같던 스타시티를 떠나 마침내 찾은 장소야.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그러니 제발…….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화면이 밝아졌다. 남자의 얼굴을 본 장병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제이콥스 대위님이잖아!”
“부함장님?”
누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긴장이 목구멍 뒤로 호흡하듯 넘어갔다. 다들 말문이 막힌 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요한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알렉스 아브라함이라면…… 위즈덤의 대표 아닌가?”
“맞아, 이번에 낙원의 새 관리자로 뽑혔다는 녀석.”
커크가 심드렁한 어조로 답하며 불쾌함을 내비췄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랜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예전에 스타시티를 위해 일했었다고?”
영상은 격납고 출입구 앞뿐만 아니라 헤벨 전체에 방송되고 있었다. 멀리서 장병들의 술렁임이 파도처럼 크게 번지며 들려왔다. 분노가 뒤섞이는 건 삽시간의 일이었다.
유림은 벗은 장갑을 손안에서 구깃구깃 움켜쥐었다. 검은 렌즈를 낀 그녀의 동공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뇌리에 스치는 과거의 영상이 책장처럼 좌르르 펼쳐지고 있었다.
─ 우리 오빠를 저렇게 만든 게 너지?
─ 쿨럭! 너 당장 내려오지 못해!
─ 아담을 괴롭히는 놈들은 내가 다 혼내 줄 거야.
─ 망할 계집애…… 가만두지 않겠어.
처음으로 알혼 섬 밖을 나갔던 날, 바이칼 호 카페 근처에서 피투성이가 된 아담을 발견했다.
그들의 앞엔 그녀보다 덩치가 두 배는 족히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은 금발의 청년은 저보다 작은 소년을 쓰러뜨린 게 못내 뿌듯한지 우쭐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는 수행비서처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정리하던 또 한 명의 남학생이 있었다.
─ 알렉스! 저런 어린애랑 뭘 다투고 있는 거야? 그만 가자.
그는 알렉스를 말리며 끝까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경솔한 성격의 알렉스와 달리 신중하고 직관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다. 마른 얼굴에 도드라진 눈 밑 진한 다크서클이 기억났다. 바로 요한이었다.
유림은 격벽에 다가가 바짝 몸을 붙이고 속삭였다.
“문 열어.”
그녀는 분노를 지그시 누른 목소리로 다시 으르렁거리며 위협했다.
“당장 이 문 열라고!”
그러자 거짓말처럼 쇠로 된 두꺼운 격벽이 스르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른 정비사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라가는 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해제된 격벽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함장인 밀러의 명령은 들은 척도 않던 아벨이 유림의 으름장 한마디에 바로 문을 열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뭐야, 유림이 중령님보다 권한이 더 높아진 거야?”
커크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물었다. 랜스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유림이 매번 이 녀석의 안면을 구타한 뒤 닥치라고 하는 이유가 급속도로 이해되었다. 그는 고개를 내젓다가 답답한 듯 커크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아, 뒈질래? 왜 때려?”
“시끄럽고 빨리 따라오기나 해!”
유림이 격납고 내부로 진입하자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밀러도 뒤를 쫓았다. 눈치를 보던 커크와 랜스, 램스펄드 대위도 빠르게 뒤따랐다. 그 순간, 격벽이 다시 쿵 닫히며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뭐, 뭐야?”
─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전원 이곳에서 대기 조치합니다.
“무슨 소리야? 이 문 열어, 아벨! 럼스펠드 대위다! 주 격납고에 내가 출입 권한이 없으면 대체 누가 있다는 거냐?”
럼스펠드 대위는 광분하며 소리쳤지만 아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격납고 안으로 들어온 유림과 밀러는 어둠 속에서 경계 자세를 취했다. 천장에서 붉게 돌아가는 경고등이 앞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했다. 앞서 걷던 유림이 뭔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조심스럽게 뒤를 엄호하며 따르던 밀러도 가늘게 뜬 눈초리에 힘을 주었다.
수리 중인 전투용 에어쉽 덮개 위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교수대 위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모가지를 축 늘어뜨린 채였다.
“어서 와, 이브.”
천장 와이어에 높게 매달린 아크레인 위에 걸터앉아 턱을 괸 케이가 예쁜 웃음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의 뒤를 따라온 밀러를 발견하고선 곧바로 냉랭한 눈초리를 머금었다.
유림은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는 아담이다. 그리고 아주 화가 많이 난 상태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밀러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물었다. 케이는 자세 그대로 턱을 괸 채 보면 모르겠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죄인을 처벌하는 중이야.”
“죄인?”
“방해하지 마, 미카엘. 아직 이 녀석을 어떻게 죽일지 생각 중이니까.”
밀러는 에어쉽 위에 앉아 어깨를 떨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군복을 입은 그는 무릎 꿇은 다리가 불편한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요한!”
천장에 매달린 와이어 줄을 따라 흔들흔들한 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케이는 허공을 밟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요한이 있는 에어쉽 덮개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고는 고개 숙인 요한의 목을 조르듯 움켜잡았다.
“그만둬, 케이!”
밀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쳤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잃었던 요한이 힘없이 얼굴을 들었다. 그는 눈자위를 하얗게 뒤집은 채 핏물이 고인 입술 새로 타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케이는 손을 스르르 풀었다. 그러자 요한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며 쿨럭쿨럭 핏물을 뱉었다. 빨간 핏물에 깨진 치아가 섞여 나왔다.
그는 무릎 꿇은 다리를 붙잡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리를 펴지도 못한 채 끙끙대던 그는 케이의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에어쉽 위에서 쿵 하고 떨어진 그의 손이 기괴하게 꺾인 다리를 부여잡고 흐느꼈다.
밀러와 유림이 달려왔다. 요한은 괴로움에 흐느꼈다. 이미 불편했던 다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부러졌나?”
“아니야, 이쪽 다리는 원래 불편한 쪽이야.”
기역 자로 꺾인 다리를 살피던 유림은 고개를 돌려 케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덮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한 가르두치, 넌 너무 욕심이 많아. 죄 없는 사람의 두 다리를 잃게 했으면, 너도 뭔가를 내줘야지 않겠어? 용서를 구할 때 사람들은 보통 제물이란 걸 바치잖아. 아니면 네 목숨을 제단에 올릴 셈인가?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지만.”
유림은 할 말을 잃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그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도륙할 가축을 내려다보듯 무심한 눈빛이었다. 그런 그가 섬뜩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북치듯 두근거리며 뛰었다.
상공에 걸터앉아 웃는 그는 기이한 태도만큼이나 신비로웠다. 잠들 수 없던 밤, 때때로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릴 듯했던 소년을 불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던 사라의 심정을 유림은 비로소 공감했다.
아담은 아름답다.
오싹하리만큼 가혹한 미소와 공허한 눈빛은 인간들에게 있어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 주겠지만, 유림은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는 느낌이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가 그녀를 보고 달콤하게 웃는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뛰어들 듯 안겨 입을 맞출 것이다. 상상 속 광경은 잔혹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완벽한 그림이었다.
“거기까지. 애덤슨 중사, 당장 멈추지 않으면 함장 권한으로 이 자리에서 처벌하겠다.
밀러는 요한의 앞을 지키듯 막아서며 경고했다.
“처벌? 나를?”
“그래.”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동공에는 긴장이 어리고 있었다.
케이는 눈초리를 예쁘게 휘며 웃었다.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그의 태도에 밀러는 인상을 쓰며 나직이 읊조렸다.
“지금 네 모습…… 마치 엘과 같다는 건 알고 있나?”
엘 카인의 이름이 나오자 케이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놀면서 조롱하는 그 태도, 그 녀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군.”
밀러의 말에 충격받은 얼굴은 한 건 유림이었다. 그의 질책이 마치 그녀를 향한 비수처럼 느껴졌다. 처형을 내리는 아담의 모습에 매료된 그녀를 힐난하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기억 속 아담은 항상 또래보다 작고 약해서 주먹 싸움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었다. 로스티아벤에서 다시 만난 케이는 최악의 훈련병이란 별명을 귀에 딱지처럼 달고 살 만큼 전투에 재능이 없었다. 물론 다 거짓부렁인 연기였지만.
어쨌든 그의 손은 총자루를 쥐는 대신 국자를 들고 요리를 하는 게 더 어울렸다.
반면 밀러는 전투의 귀재였다. 유림이 헤벨에서 유일하게 비등한 대결을 벌인다고 인정하는 상대가 바로 마이클 밀러 중령이었다.
어차피 아담은 요한을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가 저렇게까지 적개심을 드러낸 상대는 엘 카인 외에 거의 보지를 못했으니. 즉, 말려 봐야 소용없다는 의미였다. 아담의 고집은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유림은 포기한 표정으로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실력 구경이나 해 볼까? 케이가 과연 밀러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
여유로운 그녀와 달리 밀러의 눈동자는 어느새 붉은 살기로 물들고 있었다. 그는 총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자마자 번개 같은 속도로 케이를 향해 뛰었다.
누군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턱을 괴고 있던 유림의 눈이 커졌다. 등골에 서늘한 감각이 땀방울처럼 흘러내렸다.
어느새 바닥에 내려온 케이가 천천히 밀러의 옆을 스치듯 걷고 있었다. 살짝 올라간 입매 위로 가련한 짐승을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가 이지러졌다.
밀러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주위의 광경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멈춘 것처럼 보였다. 움직임이 마비된 듯 멈춘 채 꼼짝도 할 수 않았다. 어깨와 팔꿈치의 관절이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삐걱거렸다.
케이는 그런 밀러의 모습을 느긋이 감상하더니 그의 뒷목을 향해 손을 가격했다. 밀치듯 손등으로 친 가벼운 타격에 밀러는 허공을 가르며 격벽까지 날아가 ‘쿵!’ 하고 부딪혔다.
“밀러!”
유림이 놀라서 외쳤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망부석처럼 얼어붙었다. 격벽에 처박힌 채 주르르 쓰러진 밀러는 바닥에 힘없이 너부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이는 요한의 머리채를 덥석 잡고 바닥에 질질 끌면서 걸어갔다. 그는 쉽사리 일어서지 못하는 밀러를 향해 조언을 던졌다.
“네가 그렇게 무르니까 엘 카인이 뒤통수를 친 거야. 아까 그 영상을 보고도 이 녀석을 믿어? 그건 인간적인 게 아니야, 어리석은 거지.”
밀러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밀러의 머리맡까지 다가온 케이는 그를 내려다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미카엘, 넌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 하지만 삶이란 단 한 사람만 지키기에도 짧은 시간이야.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이 되는 거야.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가혹하고 아름다운 거고. 전력을 다해 진심으로 손을 뻗거든.”
인류의 역사는 상실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들이 진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유한한 생명력과 모자란 자원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한 동족 간의 경쟁이었다. 하나를 갖기 위해서는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내가 궁극적으로 획득하고자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게 바로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직면하게 되는 과제였다.
“나는 이브에게 닿기 위해 죽기 살기로 손을 뻗어 왔어. 너는 어때, 미카엘? 그녀를 갖기 위해 손에 거머쥔 모든 것들을 놓을 수 있겠어?”
허를 찌르는 질문에 밀러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요한을 벌하는 게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행위라고 생각하겠지. 오히려 그 반대야. 내가 이 녀석을 보고도 아무 짓을 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행위인 거야. 그건 이브에 대한 배신이거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밀러를 보며 케이는 잠시 온화한 눈빛을 지었다.
“내게 각인된 ‘인간성’은 시작점과 소실점 모두 이브로부터 비롯돼.”
사라의 부푼 배를 끌어안았던 순간부터 델타에게 물려 피투성이가 된 유림에게 입을 맞추던 순간까지, 수없이 많은 ‘내가’ 탄생과 소멸을 반복했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행복했다.
갈 곳을 잃은 행성처럼 방황했지만 우습게도 그는 쭉 그녀의 주위만을 빙글빙글 공전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 사랑이 늘 같은 지점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나는 불멸이 되었다.
“만약 내가 요한을 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인간성의 상실이고, 내 인간성의 상실은 이브에 대한 내 모든 감정의 소실이야.”
한때 호크는 케이가 이성을 잃고 세상을 파멸로 이끈다든지, 애꿎은 이들에게 화풀이처럼 분노를 쏟아 낼 것을 우려하며 그를 지켜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곧 그게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방주의 기억은 돌아왔으되 케이는 여전히 아담이었다.
이브가 죽었다고 여겼을 때에도─그녀의 죽음을 눈으로 굳이 직접 확인하려 하지 않았던 건 현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그의 마지막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분노하고 상실의 고통에 허덕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내하고 견뎌 냈다. 스스로도 어떻게 버텨 왔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난 결코 이브를 지울 수 없어. 그러므로 내 인간적인 면들은 내가 이브를 기억하는 한 영원토록 지속될 거야.”
유림이 그랬다. 사람의 마음이란 태어날 때부터 받은 온기로 차곡차곡 형성된 무언가라고.
두 번 다시 누군가가 잠든 모습을 밤새 지켜보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이브를 잃고 난 후 그의 영혼과 마음은 모두 죽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길이 가슴 한 곳에 불쑥 닿던 순간, 말랐던 수분이 온몸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그의 영혼은 두 번 다시 이브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유림은 그의 영혼을 또 다른 빛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지금의 그는 눈밭에서 발견된 벌거숭이 아이도 아닌, 알혼 섬에서 백야를 바라보던 소년도 아닌, 케이 애덤슨, 오롯이 그 자신이었다.
“인간적이란 건 그런 거 아닐까? 그것이 얼마나 밝고 따뜻한 감정인지, 아니면 얼마나 어둡고 질척한 감정인지는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는 거지. 인간은 아주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집단을 형성해. 그 커다란 무리 속을 잘 들여다보면, 그들 개체 하나하나가 잡고 있는 손이 있어. 그게 바로 인간으로서 그들을 지탱해 주는 온기일 거야.”
대답해 봐, 미카엘. 인간으로서의 네가 가장 절실하게 잡고 있는 손이 그녀라고 말할 수 있겠어?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무거운 종소리처럼 두개골 안쪽을 부딪치며 메아리 쳤다.
‘이게 노아가 말하던 케이의 능력인가?’
밀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안압까지 높인 뇌리의 충격에 중심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대개 일족의 지배자가 될 후손들은 타인의 정신을 사로잡거나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여기서 타인이란 동족을 내포한 범위였고, 실제로 선조 중 하나는 일족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능력마저 있었다고 전해졌다.
한쪽에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림은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메리가 그랬다. 케이의 머릿속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고. 오히려 그의 기억을 엿보려는 그녀의 머릿속에 그가 역으로 들어와 있었다고. 그는 어둠 속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상대방의 머릿속을 장악하는 것. 그게 케이의 능력이다. 가끔 타인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행동한 것도 그 때문이었구나.
이들에게 있어 동족상잔은 금지다. 그리하여 권속으로 삼은 이들로 하여금 서로를 겨눈다. 멸족의 위기에 처한 그들이 본능적으로 세포에 새긴 생존 본능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겨눌 수 없던 상황은 종결됐다. 케이가 그녀의 ‘권속’이 된 시점에서 그들 사이의 균형이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권속이 된 케이는 오히려 우위를 점령하게 되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을 것이다. 일족의 지배자가 될 예정자였던 그가 다른 이의 권속으로 굽히고 들어가다니.
이쯤 되면 밀러도 눈치를 챘을 게 분명하다. 그를 향해 아랑곳 않고 살기를 뿜어내는 케이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그만둬, 케이!”
유림의 다급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그의 눈동자는 희열을 담고서 점차 선혈로 붉게 일렁였다. 입가에 맺힌 미약한 곡선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그렸다.
반면 밀러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대항은커녕 몸을 피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케이는 뒷목을 잡은 채 끌고 온 요한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양손을 비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밀러를 처리하기 위해 돌아섰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림은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내달렸다.
“네가 간절히 원한 존재가 유림이었다면 어째서 네 권속은 그녀가 아닌 다른 이가 된 거지?”
밀러는 얼어붙은 눈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치부를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단 하룻밤이었다. 술에 취한 채 안기던 메리와 관계를 맺은 것은. 하지만 실수는 아니었다. 메리를 그렇게 내칠 수는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다. 그렇다고 해서 유림에게 떳떳이 밝힐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계속 모른 척해 왔다. 메리가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없었던 일인 양 외면했다.
─ 그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네 기억을 되찾는 데 걸림돌이 되어 온 거군. 권속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권주라니, 특이해. 정말 특이하단 말이야, 너도.
능글능글 웃으며 아픈 곳을 쿡쿡 찌르던 호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결국 메리를 죽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그녀를 그렇게 쫓아내듯 보내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유림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그녀를 억지로라도 안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맛봤겠지.”
허리를 숙이고 다가온 케이가 고요히 속삭였다. 무표정한 눈초리에는 예리한 단검보다도 싸늘한 살기가 녹아 있었다. 그의 동공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번뜩이자, 밀러는 자포자기한 듯 질끈 눈을 감았다.
“케이!”
흠칫 놀란 케이가 멈춰 돌아섰다. 그의 눈이 굳은 채 커졌다. 무섭게 달려온 유림이 눈앞에서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했잖아!”
퍽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가떨어진 케이는 멍하니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실질적으로 아픈 강도의 주먹은 아니었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유림, 그게…….”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그게 요한 가르두치가…….”
“아벨은 또 왜 해킹했어?”
그녀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다다닥 쏘아붙였다. 케이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얻어맞은 뺨을 멍하니 문질렀다. 몹시 억울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밀러는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눈을 감았더니, 상대가 유림에게 먼지 나게 맞고 있었다. 그 한심한 광경에 허망한 기분이 전신을 휩쓸었다.
“헤벨의 함장이야. 함장이라고! 네가 한 짓을 군법에 부치면 최소한 사형인데 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할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유림의 앞에서 케이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주먹질 하나에 정신이 돌아온 양 매 맞는 아이처럼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유, 유림, 내 말부터 좀…….”
“아무리 이성을 잃어도 그렇지, 이렇게 떠들썩하게 일을 벌이면 아무리 나라도 덮어 줄 수가 없잖아, 이 멍청아!”
유림은 밀러와 요한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쩔 거냐고 다그쳤다. 헤벨의 함장과 부함장을 저렇게 나란히 줘 패 놓다니 가관이었다.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놀라고 감탄하기도 했지만, 이 일을 헤벨 내 장병들이나 상부에서 알면 어떻게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속상했던 건.
“다들 내 가족이란 말이야!”
노발대발하던 그녀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멍하니 풀려 있던 케이의 눈동자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굳었다.
“이런 걸 기대하고 함께 오자고 한 게 아니었어. 이런 걸 기대하고 온 게…….”
그녀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헤벨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들과 무슨 추억을 쌓아 왔는지 모두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유림이 울상을 진 채 고개를 숙이자 케이는 안절부절못하는 자세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유림, 울어요?”
맙소사, 그녀가 진짜 울고 있었다. 옛날부터 이브가 울기 시작하면 사색이 되었던 그였다. 케이는 전전긍긍하며 강아지처럼 그녀의 주위를 초조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응? 그러니까 울지 마요.”
곁눈질로 그를 슬쩍 본 유림은 평소대로 돌아온 케이의 모습에 일단 안심했다. 그의 눈초리를 휘감고 있던 살기가 어느새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의 싸움은 이미 까마득히 잊은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카엘이 걱정돼서 그래요? 봐요, 멀쩡하죠?”
케이는 그녀의 몸을 미카엘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덕분에 몸을 일으키던 밀러는 엉겁결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유림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그랬잖아요. 엘 카인도 그렇고, 미카엘도 그렇고 웬만해선 죽지도 않을뿐더러 맞은 흔적도 안 남아요. 요한도 괜찮아요. 목숨에는 지장 없을 테니 걱정 마요.”
케이는 턱짓으로 바닥에 처박힌 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밀러는 요한을 보더니 잠시 잊고 있었던 게 미안한지─실제로 반송장이 된 것은 밀러가 아닌 요한 쪽이었다─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안 그럴게요. 전장의 성녀가 이런 곳에서 울면 어떡해요?”
실은 코를 박고 훌쩍이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이대로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타이탄이 있었다면 바로 기록해 두라고 했을 텐데, 하다못해 리사라도 있었더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침대 위에서 꼭 울려 보리라 결심하며 케이는 그녀의 목 뒤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좀 풀렸어요?”
유림은 가슴을 휘감은 그의 팔을 잡으며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케이의 말대로 멍들고 터졌던 밀러의 얼굴이 어느새 감쪽같이 멀쩡해진 상태였다. 손등으로 얼굴의 피를 닦던 밀러는 유림을 보고서는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가 혀를 쏙 내민 채 배시시 웃고 있었다.
밀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케이도 천방지축 유림 앞에서는 저렇게 바보가 되는가 싶었다. 그녀가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는 것도 모른 채 그는 열심히 그녀의 등에 대고 사죄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케이의 저런 모습은 유림의 앞에서만 볼 수 있는 거겠지. 그가 정의한 ‘본인의 인간적인 면모’란 게 바로 저런 모습일 테니까. 오직 그녀가 끌어안는 바람에만 파도치는 바다처럼.
물론 밀러도 할 말은 많았다. 그를 데려온 아서는 커다란 조직의 수장이었고, 그 속에서 자란 그는 늘 어깨가 무거웠다. 사람들은 아서 함장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고, 그런 존경과 선망 어린 시선은 우쭐함을 주는 동시에 숨 막히는 부담감을 선사했다.
“유림, 아직도 울어요?”
“몰라.”
“이제 내 얼굴 봐 줄 거예요?”
“생각해 보고.”
“그럼 내 얘기는 들어줄 마음이 생겼어요?”
“글쎄.”
케이는 여전히 유림의 등에 이마를 댄 채 싹싹 빌며 그녀의 심기를 달래고 있었다. 바닥에 앉은 밀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얘기라는 건 나도 좀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유림에게서 떨어진 다음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어떨까?”
밀러의 말에 흘끗 돌아선 케이는 아직도 거기 있었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유림은 원래 이렇게 해 줘야 풀려서.”
“애초에 풀릴 것도 없어 보이는데.”
밀러는 케이 몰래 실실 웃으며 혀를 쏙 내밀던 그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케이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갸웃거리며 유림의 어깨에 대고 소곤거렸다.
“유림은 미카엘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데 정작 당사자는 매정하기 짝이 없네요, 그렇죠?”
밀러는 혈압이 상승하는 걸 느끼며 욕설을 삼켰다. 그가 기억하는 케이의 마지막 모습은 방주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작은 소년이었다. 여정 내내 단 한 번도 깬 적이 없던, 일족의 지배자가 될 아이. 멸족 위기에 처한 일족을 다시 부흥시킬 희망.
그 가냘프던 소년이 저렇게 이죽거리는 성격이었단 걸 알았더라면 자신 역시 엘 카인처럼 노아의 명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버릴 걸 그랬다. 왜 그렇게 최후까지 엘 카인을 저지하려고 애를 썼는지 후회가 밀려오는 중이었다.
“화났어, 밀러?”
유림이 살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평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그녀가 이렇게 말을 놓을 땐 애교를 부린다는 증거였다. 밀러는 케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살랑살랑 눈꼬리를 휘며 보란 듯이 유림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저 자식이…….’
평소 바른 청년의 표본이라 불리는 밀러였지만 저 밉살스러운 얼굴을 보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밀러는 심호흡을 하며 생긋 웃었다.
“내 고양이가 와서 한 번만 안아 주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유림의 표정이 대번 환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케이의 팔을 풀고 밀러에게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앉아 있는 그의 품으로 폴짝 안겨 목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아프지는 않아?”
“저런 녀석 주먹이 뭐 그리 아프다고. 괜찮아.”
“다행이다.”
유림을 끌어안은 밀러는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케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유치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피식거리며 케이에게 조롱 어린 미소를 내보였다.
“흐음…….”
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유림은 원래 애교가 많은 편이었지만, 지금 보니 밀러에게 특히나 귀엽게 칭얼대는 편이었다. 그런 류의 애교는 아직 자신도 받아 보지 못한 것인데…….
케이는 눈가에 차오르는 살기를 애써 억누르며 미소를 머금었다.
“유림.”
“응?”
“이쪽으로 와요.”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던 유림은 머뭇거리며 쉽게 발을 옮기지 못했다. 그러자 케이가 쐐기를 박듯 부드럽게 타일렀다.
“남매끼리 그렇게 친밀한 스킨십은 하는 게 아니에요.”
“선임과 후임 사이에도 친밀한 스킨십은 하지 않지.”
“헤벨의 함장님께서 모르시나 본데 낙원의 용병대에서는 전우들 사이의 성관계가 허용됩니다. 그러니 아무 문제없죠.”
케이의 말에 밀러의 미간이 충격으로 굳었다.
‘선후임 사이의 성관계…….’
밀러가 넋이 나간 사이 케이는 슬그머니 팔을 뻗더니 유림의 손목을 잡고 그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질투 나니까 이제 중령 쪽으론 가지 마요.”
그가 속삭이자 유림이 웃음을 터뜨렸다. 밀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저렇게까지 행복하게 웃는 유림을 보니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머리 위에서 붉은빛을 내며 돌아가는 적색경보를 올려다보면서 다시 무거운 눈빛을 지었다.
“그나저나 케이, 일단 이 상황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일 듯한데.”
그의 말에 케이의 표정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확실히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이 사태가 가장 혼란스러운 건 함장인 밀러일 테니.
“그래서 네가 정말 아벨을 해킹한 거라고?”
밀러가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벨은 자타공인 연맹군 최고의 보안 시스템을 가진 인공지능인데…….’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던 밀러는 아차 싶어 고개를 홱 들었다. 역시나 그가 눈앞에서 얄밉게 사르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왓슨 3세보다는 사양이 낮다고 할 수 있지. 왓슨의 보급형 버전이라고나 할까?”
또 생각을 읽혔다. 이젠 아예 대놓고 능력을 쓰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입실론이나 델타도 아니고 동족의 머릿속을 훔쳐 읽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주의가 산만한 녀석의 머릿속은 빗장이 활짝 열려 있거든. 그러게 누가 그렇게 유림의 엉덩이를 흘끗흘끗 쳐다보랬나?”
“내, 내가 언제!”
유림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밀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밀러는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고개를 외면했다.
“역시 아벨도…… 아담, 네가 만든 거였나?”
대화에 불쑥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요한이었다. 그는 곤죽이 된 얼굴을 들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밀러의 뒤통수를 보며 승리감을 만끽하던 케이는 비스듬한 눈으로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요한은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익명의 과학자 K.
그의 유명세에 관해선 연맹군에 온 뒤로도 종종 심심치 않게 듣곤 했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그의 정체에 관해선 사교계에 여러 풍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2085년 에덴 타워의 해킹 사건 이후, 익명의 과학자는 소리 소문도 없이 잠적해 버렸다. 당시 사라진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모두가 그의 소식을 기다리는 와중에 유일하게 안심했던 자가 있었다. 바로 요한이었다. 익명의 과학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담이 그날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잠적은 시늉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뒤에서 연맹군을 비롯한 여러 군수업체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니. 자신은 처음부터 그의 손바닥 위에서 뛰어다니고 있을 뿐이었나?
무표정한 얼굴로 요한을 보던 케이의 눈길이 흘끗 다시 밀러에게로 향했다.
“또 빗장이 풀려 있네.”
유림을 보고 있던 밀러가 흠칫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는 욕설을 삼키며 곁눈질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조심해, 미카엘. 나는 두 번 경고하는 걸 싫어해. 그렇지, 요한?”
요한은 깜짝 놀라 표정이 굳었다. 예쁜 얼굴로 서슴지 않고 불쾌함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자그마한 소년일 무렵과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으응…….”
그는 긴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고개를 숙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즈넉이 내려다보는 그의 눈총이 따갑게 느껴졌다.
요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입안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져서 제대로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벨은 왓슨 3세를 기반으로 만든 거지?”
“왓슨 3세를 기반으로 만들긴 했지만 내가 직접적으로 설계한 건 아니야. 옆에서 훈수를 둔 정도지.”
“왓슨 3세를 기반으로 만들다니…….”
밀러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요한과 케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마지막으로 유림을 응시했다. 세 사람 사이에 무슨 과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만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사절이었다.
유림은 지루한 얼굴로 세 남자 사이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밀러의 시선을 받은 유림은 케이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입을 열었다.
“케이가 만들었어. 왓슨 3세도, 스마트 더스트도.”
그녀는 충격 어린 표정으로 있는 밀러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자신도 케이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어찌나 놀랐던지.
“그리고 이건 나도 지금 안 거지만 아벨의 탄생에도 케이가 한몫한 듯하고.”
“말도 안 돼……. 헤벨이 완성된 건 십수 년도 더 전의 일인데.”
작은 소년에 불과했던 녀석이 인류 최고의 과학적 산물이라는 왓슨 3세와 아벨을 만들었다니. 일족의 지배자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과학자가 된 상황에 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슬슬 상대측에 보고가 올라가겠군.”
“보고?”
“헤벨의 AI는 해킹을 당했고, 부함장인 요한 제이콥스 대위는 전 스타시티 소속의 사람이었다는 내용이겠지.”
케이는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더니 놀랍다는 듯 말을 이었다.
“벌써 누가 잽싸게 암호화된 데이터를 송신 중이야.”
“뭐? 누가?”
유림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의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케이는 낙원에서 사용하던 스마트 워치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겉모양만 비슷할 뿐 안은 다 개조한 것이지만.
“발신인이 함 내 인물인 건 확실한데…… 아벨.”
그의 부름에 붉은 경고등 빛으로 차 있던 격납고에 아벨의 구체가 나타났다. 푸른 구체로 등장한 아벨은 360도 회전하며 응답했다.
─ Yes, sir.
“아까 그거 다시 틀어 봐.”
─ 음성파일 LOS_CL00A21을 재생합니다.
아벨의 구체가 반짝이며 빛을 발하자, 로스티아벤 총사령관인 우리야 세르게이의 음성 메시지가 허공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전한다. 지금 이 시점부터 SITF 소속 정유림 소위와 케이 애덤슨 중사를 아군에서 제외토록 한다. 이들은 연맹군에서 보낸 공작원으로 그동안 우리 군의 전략 및 기밀자료를 은밀히 유출해 오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노아 호크 대령 역시 현재 연맹군에서 보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든 앞으로 이 세 사람과 맞닥트릴 경우엔 발견 즉시 사살할 것을 명한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유림의 붉은 입꼬리가 조롱하듯 말려 올라갔다. 감히 누가 누굴 사살해? 낙원 내에 블랙 호크와 브루클린의 성녀를 대적할 만한 인재가 어디 있다고?
─ 이상, 로스트 헤븐의 관리자 시스템인 왓슨 3세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입니다.
로스티아벤의 총사령관인 우리야가 군부에 공식적으로 명을 내렸다. 그는 유림과 케이 그리고 호크 대령이 연맹군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헤벨에 스파이가 있다는 건가?”
잠자코 듣고 있던 밀러가 날카롭게 물었다. 유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예상했을지 몰라도 케이가 헤벨에 온 건 아무도 몰랐을 거야. 그런 최신 정보까지 파악하고 있는 걸 보면 헤벨 내에 정보원을 심어 둔 게 확실해.”
케이는 유림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은 아마도 이곳에 숨어 있는 쥐새끼에게도 당황스러울 거예요. 아벨이 해킹을 당했다는 건 호소식이겠지만 요한 제이콥스의 정체는 변수와도 같은 요인일 테고, 과연 그가 그들에게 있어 플러스 요인이 될지 마이너스 요인이 될지는 예측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정보원을 심은 건 로스티아벤 측인가?”
밀러의 질문에 케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를 곁눈질로 응시하던 유림은 대신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케이가 몰랐을 리 없어.”
스마트 더스트가 닿는 물리적 거리 내, 혹은 에덴의 전산망이 통해 있는 모든 사이버 공간 내의 상호작용은 왓슨의 눈에 의해 수집된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궁극적으로 낙원의 설계자인 그에게 흘러 들어온다.
“그럼 누가…….”
“기억의 도시!”
유림은 번뜩 뭔가 생각난 듯 밀러의 말을 뚝 잘랐다.
“사창가인 소돔은 왓슨의 눈이 통하지 않잖아. 사생활 침해 관련 법안이 통과된 이후 그곳은 왓슨이 정보를 수집할 수가 없게 됐으니까.”
그리고 그곳엔.
“위즈덤 본사가 있죠.”
케이도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는지 대견하다는 듯 유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즈덤의 모회사는 대제국 스타시티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기업체인 스타시티라면 연맹군 내에 정보원들을 수십 명 심어 놓았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케이는 요한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는 필사적으로 부인하며 팔을 내저었다.
“맹세코 전 절대 아닙니다!”
“그래, 넌 아닐 것 같아.”
그럴 배짱이 있는 녀석은 아니지. 케이가 서늘한 눈초리로 답했다. 요한은 잔뜩 긴장한 채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케이는 한층 무거워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어때, 요한 가르두치? 다시 한 번 사자의 발톱 속으로 가 보는 건?”
요한은 그를 쳐다보고 있는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밀러에게 머물렀다. 무심한 듯 가장했지만 밀러의 푸른 동공이 안타까움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네게 조금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용서는 내게 구할 게 아니지 않나?”
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최종 결정은 그녀에게 맡길 생각이거든.”
“그녀?”
요한은 눈을 크게 뜨며 두리번거렸다.
‘설마 사샤가 이곳에?’
바닥을 짚고 주위를 둘러보는 그 앞에 누군가 한 걸음 다가왔다. 유림은 양 눈에 손을 가져가더니 검은 렌즈를 벗겨 냈다.
“케이를 말리기는 했지만 나 역시 굳이 당신을 살려 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레드 베릴의 붉은 눈동자.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핏빛 광요의 발현. 요한은 멍한 눈으로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 찧듯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유림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은 케이의 팔에 뺨을 기대며 미염한 교소를 머금었다. 놀라 자빠지는 요한의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통쾌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니,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이브가 살아 있을 거라고, 살아서 눈앞에 숨 쉬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거겠지. 함정 밖으로 정찰을 나갔던 밀러가 구출해 온 소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의심에 휩싸였다. ‘혹시나, 설마’ 하는 생각으로 그녀를 유심히 지켜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단검으로 성장한 이브와 칼날에 베일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녀라는 검을 끌어안는 아담.
두 사람의 모습은 한 편의 명화처럼 잘 어울렸지만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될 것만 같은 위험한 기류를 품고 있었다. 서로를 절박하게 결박한 채 무너져 내릴 듯한 절벽에 뿌리를 박고 있는 두 사람. 그만큼 둘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게 했다.
요한은 이제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떼어 놓을 수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행여 그런 시도라도 하는 인간은 분명 아담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서 살점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유림은 어깨를 으쓱이며 붉은 눈으로 밀러를 응시했다.
“내 정체, 밀러는 알고 있었지?”
“……어느 정도는.”
영원히 혼자만 알고 싶었다. 차마 붙이지 못한 뒷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유림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뽀얗게 웃는 그녀를 향해 밀러는 허탈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중하게 지키고 감춰 왔던 보물을 다른 이의 손에 홀라당 뺏긴 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정을 누구에게 한탄해야 할까?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유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그건 그렇고.”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요한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건 이브로서의 의견이고, 데드캣의 생각은 좀 달라.”
요한은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제이콥스 대위는 유능한 인재고 밀러에게도 없어선 안 될 사람이야. 분명 요한은 과거에 졸렬한 방식으로 동료들을 배신했지만 헤벨에 온 이후 그의 업무 능력은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또 모르지.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또 아군을 배신하는 행동을 할지도…….”
그가 억울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입을 벌리자 유림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니 이번에 증명해 봐. 요한 가르두치는 비겁자였지만 요한 제이콥스는 그렇지 않다고. 만약 입증한다면 나는 당신을 요한 가르두치가 아닌 요한 제이콥스로 인정할 거야. 내가 봐 온 제이콥스 대위의 모습도 다 거짓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을 마친 유림은 의견을 묻듯 밀러를 쳐다봤다. 그는 묵묵히 듣다가 유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요한은 안도와 긴장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대로 처리해서 미안해.”
유림의 말에 태연한 표정으로 있던 케이는 고개를 저으며 생긋 웃었다.
“권주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는 그녀의 귓불과 뺨에 복종의 입맞춤을 선사하며 속삭였다.
“권속은 그에 따를 뿐이죠.”
요한은 아벨이 허공에 띄운 아브라함 회장에 관한 정보들을 훑어보며 빠르게 브리핑을 해 나갔다. 확실히 참모로서의 그의 능력은 출중한 편이었다.
“아브라함 회장은 이미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신인류라고 봐야 합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고, 또 고도의 지능을 지닌 천재이기도 합니다.”
신이 되고픈 남자. 이자의 오만함과 잔인함은 아마 자신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터였다.
“위즈덤의 모든 안드로이드는 아브라함 회장의 수족과 마찬가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회장이 만든 인공뇌를 심은 클론이고, 낙원의 관리자로 선출된 알렉스도 그의 클론이니, 이미 낙원의 수뇌부는 아브라함 회장의 수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회장의 최종 목적은 왓슨 3세와 본인을 합일시키는 것일 겁니다. 그가 낙원에서 탐낼 것이라곤 그것과 스마트 더스트밖에 없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
허공을 응시하던 케이는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파리해진 그의 안색을 보며 유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브라함 회장이 궁극적으로 집착하는 건 ‘불멸’이란 키워드예요.”
만일 그가 이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그리고 유림이 이브와 동일 인물이란 걸 눈치챈다면.
“유림을 노릴 거예요.”
케이가 두려움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자 남은 이들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오직 그녀가 존재할 이 세계의 안위였다. 세상에 혼란이 존재하는 한 ‘이브’는 안전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 회장은 엘 카인과 달리 왓슨 3세에 관심이 지대하다. 그 미치광이의 손에 왓슨 3세와 스마트 더스트가 넘어간다면 추후 어떻게 악용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단언컨대 그 남자의 상상력은 자신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라지 않았다. 그건 황금의 바벨탑 내 지어진 소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케이는 고민에 빠진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쩔 셈이야?”
밀러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두 단계로 접근할 거야. 일단 아브라함 회장의 본체를 찾는 게 우선인데…… 거기엔 요한, 네 역할이 중요해.”
소돔엔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다. 일단 그 전제부터 갈아치울 필요가 있었다.
“트로이 목마 작전이야. 위즈덤 본사로 진입하면 내 지시에 따라 저들 모르게 내부에서 스마트 더스트를 활성시켜 줘.”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아브라함 회장에게 이렇게 전해. 과거에 익명의 과학자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이번 해킹 사건 역시 네가 그에게 직접 의뢰해 꾸민 짓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아브라함은 널 다시 거둘 가치가 충분하다 여길 거야.”
“익명의 과학자는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비밀로 감추는 거 아니었어?”
유림이 만류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아브라함 회장이 넘어올 거예요.”
“케이가 전에 말했던 미끼가 이거야? 익명의 과학자가 직접 나서는 거?”
그녀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케이는 걱정 말라는 듯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익명의 과학자는 나 혼자만의 이름이 아니니까.”
유림과 밀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케이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흘끗 천장을 응시했다.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그사이에 나와 데드캣은 매듭짓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도록 하지.”
밀러가 경고등 불빛이 비친 유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림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재깍 알아차렸다. 복수심 어린 눈초리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메리.”
그녀가 아직 저곳에 있다. 편히 눈도 감지 못한 채, 끔찍하게 유린당한 모습 그대로.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처단해야 할 원수 놈의 죗값도. 밀러는 비장함과 슬픔이 교차하는 얼굴로 유림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리아를 데려오자.”
유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며 긴 속눈썹을 내려감았다.
* * *
피닉스 부대, 델타 포획률 312% 상승!
STF 내에서도 델타 포획조는 늘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죽음의 부대였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닉스 부대는 병기형 안드로이드들로 이루어진 불사조 부대입니다. 두려움도 실패도 모르는 로스티아벤의 새로운 최정예군 피닉스 부대를 직접 경험해 보십시오!
태양의 도시 입구에 선 나츠는 초록색 홀로그램으로 떠다니는 기획 광고 영상을 보며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불사조Phoenix 부대?’
관리자가 된 알렉스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군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위즈덤의 전투형 안드로이드들을 로스티아벤의 정규군으로 편성했다. 주민들의 지지는 뜨거웠다. 그들은 감정이 배제된 군인 인형이라면 엘 카인처럼 그들을 기만하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낙원 밖 고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피닉스 부대에 대한 주문이 폭주했다. 알렉스 아브라함의 첫 번째 계획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나츠 시게노 씨께서 지낼 곳입니다. 필요하신 사항은 홈 AI나 개인 경호원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안드로이드 집무관은 상냥하게 웃으며 하얀 유리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츠는 원통형의 유리 통로에 멍하니 서 있다가 발밑을 쳐다보았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에 휩싸인 상공이 발아래 시야를 뿌옇게 차단하고 있었다.
에덴 타워의 꼭대기에 위치한 태양의 도시.
한때 낙원의 꽃이라 불리던 입실론들만이 거주하던 성역이었다. 일반인들은 철저하게 접근이 제한되었고, 가끔 극소수의 정·재계 인사들만이 태양의 도시 입구까지 관광차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들이 거주하던 거처 중 하나를 그에게 호텔 방처럼 쉽게 내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직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입실론들은 모두 쫓겨났어. 엘 카인의 후궁이라 불리던 곳이었으니 그의 축출과 함께 몰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바이러스 항체를 가진 생존자들로 낙원의 상징이었던 그녀들은 한순간에 폭군의 첩실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나츠는 투명한 바닥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닫고선 고개를 홱 들었다.
“어? 드레이크 씨?”
“생각보다 무사해 보이는데, 나츠 시게노.”
그의 아몬드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며 웃었다. 제복을 입은 그를 빤히 쳐다보던 나츠는 드레이크에게 등을 떠밀려 거처 안으로 엉거주춤 진입했다.
“설마 제 개인 경호원이란 게…….”
“그래, 나야.”
“예? 하지만 제 경호는 특별보안대에서 맡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필란 중위가 특별히 널 배려해서 동기인 나로 보직을 바꿔 줬거든.”
전체적으로 여성스러운 방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실론들이 쓰던 곳이니 당연하긴 했지만 나츠는 어색한지 뒷목을 긁적이며 거실 소파로 향했다. 베이지색 협탁 위에 올려진 실크 장식과 인디핑크 톤의 가죽 소파라니, 이렇게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속에서 지내다간 닭살이 올라올지도. 두리번거리며 불편해하는 나츠의 모습에 드레이크는 현관에서 들어오는 길목에 서서 피식 웃었다.
가정용 로봇이 다가와 협탁 위에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다. 나츠는 민망한 듯 다리를 모으고 앉아 찻잔을 홀짝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왓슨 그룹은 입실론들을 통해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었잖아요. 그녀들 없이 대체 낙원을 어떻게 꾸려 가려는 걸까요?”
“왓슨은 더 이상 낙원의 소유주가 아니야. 램지 왓슨은 위즈덤에 본인 소유의 로스트 헤븐 지분을 양도했어. 알렉스 아브라함은 태양의 도시와 입실론들을 없애고 새로운 낙원을 세울 생각인가 봐. 벌써부터 새 입주자 신청을 받는 거 보니.”
나츠는 방 안 벽면 스크린에 물결치듯 떠다니는 광고 영상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로스트 헤븐의 새로운 패러다임, 영원의 오아시스!
죽음도 질병도 고통도 없는 영혼의 파라다이스. 15년 만에 열린 낙원의 영주권 신청 기회, 절대 놓치지 마세요!
알렉스 아브라함은 이곳을 불로장생의 실현처로 삼으려는 것일까? 이미 기존의 주민들도 뉴 라이프 프로젝트에 가입하기 위해 줄서서 대기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방을 빙그르르 둘러보던 드레이크는 아이보리색 꽃무늬 찻잔을 들고 있는 나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엘 카인과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네. 진짜 그 녀석 딸 맞아?”
“예? 저, 저는 남자인데요…….”
“가슴 달린 남자가 어디 있어?”
그가 쿡 웃으면서 말하자 나츠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 어이, 검진 시간이다.
드레이크가 찬 스마트 워치에서 필란 중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레이크는 나츠의 팔을 잡으며 일어섰다.
“어, 검진이라면 이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던 나츠는 드레이크의 묵직한 눈빛과 눈이 마주치자 멈칫 말을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츠의 어깨를 누르는 드레이크의 손에 힘이 실려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조용히.
마치 작전 수행 때처럼 엄격한 눈초리였다. 나츠는 의아한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방을 빠져나와 태양의 도시 내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실론 전용 엘리베이터는 지하 연구소와 낙원의 관리자가 있는 최상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 B3 왓슨 연구소. 제한 구역입니다.
어두컴컴한 지하 연구소는 현재 임시 봉쇄가 된 상태로 연구원들도 강제 휴무를 즐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던 셰인 필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른 대원들 없이 혼자였다.
나츠는 불안한 듯 드레이크를 쳐다보았다. 한참 키가 큰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올려다봤지만 무표정한 옆얼굴의 턱선 빼고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믿음직스러웠다.
셰인 필란의 통행증으로 세 사람은 무사히 제한 구역 내부로 진입했다. 파란색 비상 레이저 조명들이 어둠 속의 지표가 되어 주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츠는 드레이크의 손을 내려다보며 북치듯 뛰는 가슴을 반대 손으로 움켜쥐었다.
반즈 박사의 실험실은 열려 있었다. 유리문으로 된 실험실 입구를 지나자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그녀의 개인 업무실로 이어지고 가운데는 생체 실험실, 오른쪽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긴 통로였다.
“반즈 박사는?”
드레이크가 묻자 셰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도 잘 모른다는 눈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나츠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오른쪽 뺨에 느껴지는 차가운 한 줄기의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정면에 위치한 생체 실험실이 까마득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츠는 주춤거리며 빨려 들어갈 듯한 어둠 속으로 향했다.
“드레이크 씨, 이것 좀 보세요.”
실험실 입구로 향하는 중간에 개방되어 있는 무균실은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드레이크는 두리번거리며 활짝 열려 있는 무균실 유리문 사이를 걸어왔다.
생체 실험실 내부에서 알코올 냄새가 풍겨 왔다. 희미한 푸른 전등 불빛만이 어렴풋이 시야를 밝혔다. 어둠 속에 완전히 진입한 드레이크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는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유리관으로 된 스테이시스 캡슐 안에는 인간의 신체 일부로 보이는 살점들이 보글거리는 기포 사이로 떠다녔다. 캡슐 앞 플라스틱 정보란에는 ‘실험체 EK’라는 글씨가 연한 빛으로 반짝였다.
“성인 남자의 팔 같은데.”
깔끔하게 절단된 면엔 근육과 신경다발 조직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옆 시험관 속에는 무릎 위에서 절단된 허벅지도 떠 있었다.
“온몸을 조각냈군.”
“대체 누구를 이렇게 만든 걸까요?”
나츠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물었다. 드레이크는 겁도 없이 유리로 된 시험관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시험관 하단 버튼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음성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실험체 EK의 3차 생체 실험. EK의 절단된 신체 중 일부는 스테이시스 캡슐에 보관하고 일부는 캡슐 밖에 방치한 채 만 하루를 관찰했다. 공기와 접촉한 신체는 조직 손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포의 변형과 손상, 감염 등이 발견됐다. 본체의 재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단절된 신체 일부를 접합 수술 없이 본체와 다시 붙여 보았다.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직 추론에 불과하지만 EK는 무한 재생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봐, 뭣들 하는 거야? 이쪽이야!”
셰인의 목소리였다. 그는 실험실 밖에서 손짓하며 재촉했다. 반즈 박사의 음성 파일을 들은 나츠와 드레이크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가자.”
드레이크의 손에 이끌려 나오면서도 나츠는 의혹 어린 눈길로 실험체 EK의 시험관을 흘끗거렸다. 불길한 생각으로 가득한 그의 표정에는 우울감이 번져 있었다.
셰인을 따라 오른쪽 갈림길로 온 드레이크와 나츠는 지하 미궁으로 이어지는 대피로 입구에 도달했다.
“구조용 함정 하나를 빼놨어. 훈련 중이라고 보고해 놨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도 스마트 더스트권 밖으로 나가면 자동으로 추격대가 따라붙는다는 건 알고 있지? 그때부터는 뭐 알아서들 하고. 아무 일 없이 낙원 밖으로 탈출한다는 것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나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탈출이라뇨?”
“델타들은 어쩔 셈이야? 설마 다 두고 가려고?”
셰인의 질문에 드레이크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셰인은 턱을 긁으며 머쓱하게 물었다.
“아무리 지능이 없다지만 그래도 너를 주인처럼 따르던데…… 애초에 낙원에 온 것도 그녀들을 구하러 온 거 아니었어?”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드레이크가 싸늘한 눈빛으로 잘라 말하자 셰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살기 어린 눈초리에 대번 등골이 오싹했다.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드레이크 씨!”
“세르게이 총사령관과 알렉스 아브라함은 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어. 지금 낙원은 자칫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야. 현재 저들이 가장 위협적으로 여기는 건 고스트들이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오베론은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지. 그래서 널 손에 쥐고 언론을 통해 보여 주려는 거야. 너희를 굴복시켰다는 것만으로도 고스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이 될 테니까.”
“유메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럼 바보같이 저 녀석들에게 이용당할 셈이야? 이러다가 쓸모가 없어지는 날에는 살아남기 힘들 거야.”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어쨌든 제가 테러리스트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에요. 저 때문에 정 소위님, 애덤슨 중사님, 호크 대령님까지 곤란해지셨는데 제가 또 이렇게 탈출한다면…….”
“그 사람들은 지옥 불에 떨어져도 제 앞가림은 알아서 잘할 인간들이야. 우리가 걱정을 하든 안 하든 죽을 일이라곤 없는 사람들이라고!”
“자, 잠깐만요! 이것 좀 놓고…….”
드레이크는 막무가내로 나츠의 손목을 잡고 미궁 안으로 진입했다. 나츠는 양발을 힘줘 모으고는 제자리에 버티면서 신발 밑창 닳는 소리를 내며 질질 끌려갔다.
그런 두 사람을 대피로 입구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셰인은 좌우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뭐야?”
어둠 속에 멈춰 선 드레이크의 얼굴이 굳었다. 미궁 벽 곳곳에 부착된 휴대용 라이트가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걸어 나온 병사 하나가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돌아가 주십시오. 여기부터는 작전 구역입니다.”
“작전 구역?”
발버둥을 치던 나츠도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을 막아 선 병사의 가슴에는 STF의 황금 날개 로고가 박혀 있었다.
‘필란 이 새끼가 뒤통수를…….’
드레이크는 이를 바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끼이이에엑!”
“키긱, 키갸갸갹!”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나츠는 움찔하며 드레이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괴수의 울음소리. 나츠는 겁에 질린 어조로 속삭였다.
“드, 드레이크 씨! 이 소리…….”
드레이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곁눈질하며 STF 병사에게 물었다.
“델타와 교전 중입니까?”
“그렇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 백인 남성 군인은 검은색 특수 재질의 전투복을 입고 오른손에는 총을 쥐고 있었다.
그간 미궁이 폐쇄된 상태였던 이유는 왓슨의 눈이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병들끼리 작전을 수행하기에 애로 사항이 많았고 엘 카인과 우리야도 굳이 미궁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서 작전이라고? 용병들 중에서도 제일 비싸다는 STF 특수대원들만 투입해서?
“작전 지휘관은 누굽니까?”
“세르게이 총사령관님께서 직접 지휘하고 계십니다.”
그는 딱딱하고 일정한 톤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그를 드레이크의 등 뒤에 숨어서 관찰하던 나츠가 뭔가를 발견한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쳤다.
“어, 저기!”
어둠 속에서 나타난 델타 두 마리가 천장을 빠르게 기어 오고 있었다. 침을 뚝뚝 떨어뜨리던 그들은 도마뱀처럼 꼬리로 벽을 ‘탁!’ 치면서 병사의 머리를 덮쳤다.
이미 늦었다. 아무리 뛰어난 STF 요원이라도 대응하긴 힘들 거다. 델타의 운동신경은 인간의 수준을 갑절 이상 뛰어넘는다.
병사는 델타의 습격을 눈치채자마자 허리를 아치형으로 젖히며 재빠르게 피했다. 그는 바닥을 구르며 허리에 찬 총을 뽑아 들었다. 유림 정도의, 아니 어쩌면 더 굉장한 수준의 반사 신경이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델타의 뒤로 이동하더니 폭발성 탄환이 장전된 총을 델타의 목덜미에 들이밀고 발포했다.
탕!
순식간에 델타 한 마리의 숨통이 끊어졌다. 나츠는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며 미간을 좁혔다.
‘드레이크 씨?’
옆에 서 있던 그가 어느새 병사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다. 어둠을 등진 그는 살기로 점철된 눈초리를 싸늘하게 드리운 채 총을 꺼냈다.
숨진 델타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던 병사는 녹색으로 번쩍이는 동공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왼쪽 관자놀이에 닿는 차가운 총구를 그제야 느낀 모양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총구를 쥔 손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피슉.
무음 탄환이었다. 소리 없이 발사된 총탄은 드릴처럼 회전해 병사의 머리통을 관통했다. 털썩 쓰러진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눈알이 스프링처럼 튀어나온 와중에도 병사는 몸을 뒤틀며 꿈틀거렸다. 드레이크는 손을 뻗는 남자의 손목을 발로 걷어찬 뒤 총을 집어넣었다.
점액처럼 끈적끈적한 핏물이 손등 위로 튀었다. 드레이크는 불쾌한 표정으로 바지에 손등을 비볐다.
나츠는 고개를 외면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숨진 병사의 몸에서 나온 핏물이 시냇물처럼 바닥에 물길을 이루고 있었다. 말없이 땅을 쳐다보던 나츠의 눈이 일순 굳었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스마트 워치에서 나온 라이트 불빛이 지면을 비췄다.
바닥에 번져 가는 병사의 피가 우유처럼 허연 빛깔이었다.
‘수액?’
나츠는 드레이크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침착한 반응이네? 놀라서 까무라칠 줄 알았더니.”
드레이크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충격으로 벌벌 떨 거라 예상한 나츠가 생각보다 차분했다. 하긴, 평소에도 벌레 한 마리 못 잡아서 질질 짜던 놈이 극한의 상황에서는 반전을 보여 주곤 했으니까.
“사람이라면 몰라도 안드로이드라면 익숙하니까요.”
아, 나츠가 회색 기사단의 단장이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유령의 군주의 친위대인 기사단은 모두 솔로몬에게 공급받은 안드로이드였으니 누구보다 전투 로봇에 익숙한 녀석이었다.
“한 마리 더 있어요.”
나츠가 긴장한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곧 수중에 총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현재 그는 전투복 차림도 아닐뿐더러 무기가 될 만한 건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동족의 사체를 킁킁거리던 델타는 어둠 속에서 몸을 낮춘 채 이쪽을 빤히 주시했다. 쉭쉭거리는 숨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오자 나츠는 심장이 터질 듯 팽창하는 걸 느꼈다. 문득 입대 테스트 때의 사고가 떠올랐다. 눈앞에서 처참히 찢겨 죽던 동기 훈련병의 모습. 물 위로 둥둥 떠오르던 우딘 헤르만의 시체가 생각났다. 숨이 턱 막혀 왔다.
“드, 드레이크 씨, 일단 제가 주의를 끌 테니까 그 틈에 얼른…….”
나츠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이 와중에 저런 용기는 어디서 나왔는지 그의 앞을 보호하듯 가로막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나츠의 옆으로 다가온 드레이크는 안심시키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츠는 천장으로 폴짝 뛰어올라서 거친 숨소리를 내는 델타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벽을 기어서 빠르게 이동한 델타는 그들의 배후로 ‘쿵!’ 하고 착지했다.
나츠는 드레이크의 소매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등 뒤에서 금방이라도 달려들 델타의 엄니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등골이 축축하게 젖었다. 반대로 입가는 바짝 말랐다.
‘죽는다. 이대로 죽게 될 거야!’
팽팽한 긴장감 속에 묘한 정적이 이어졌다.
눈을 감은 채 턱에 힘을 주고 있던 나츠는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그는 겁먹은 눈꺼풀을 천천히 끔뻑였다. 열렸다 닫히는 시야 사이로 드레이크와 델타가 서로 마주 본 채 대치한 모습이 보였다.
“γονατίσει μπροστά μου.יי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알 수 없는 언어가 나지막한 음성을 타고 진정조로 울려 퍼졌다. 흥분한 채 숨소리를 내던 델타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듯 호흡을 낮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복종하듯 드레이크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나츠는 그 광경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잘못 본 것일까? 어둠 속에서 언뜻 본 그의 눈동자가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츠의 뇌리 속에 셰인의 목소리가 번뜩 스쳤다.
─ 델타들은 어쩔 셈이야? 설마 다 두고 가려고? 아무리 지능이 없다지만 그래도 너를 주인처럼 따르던데…….
델타를 내려다보던 드레이크는 가 보란 듯 턱짓을 했다. 그러자 몸을 낮추고 있던 델타가 “끼에엑!” 괴성을 지르며 천장을 타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가자.”
드레이크의 말에도 나츠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망부석처럼 자리에 서 있었다.
“뭐해? 빨리 따라오지 않고.”
“드레이크 씨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 있어요.”
나츠의 소매를 잡아당기던 드레이크는 멈칫거리며 굳었다. 그가 천천히 돌아보자 나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붉은 눈, 델타조차 두려워하는 존재요.”
그러고 보니 입대 테스트 때도 그랬다. 델타들이 난입하던 상황 속에서 드레이크는 모습을 감춘 채 보이지 않았다. 사태가 진정되자 그는 다리를 다쳤다면서 한쪽에서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놀랍게도 큰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한 모습이었다. 그 당시에는 운이 좋았다는 그의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츠는 자신의 손목을 응시했다. 가느다란 팔목에 비치는 혈관들, 팔딱팔딱 뛰는 맥박,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핏줄.
자주 악몽을 꾼다. 이 혈관을 잡아 뜯으면 피로 연결된 선상에 그 남자가 서 있는 꿈을. 애쉬드 블론드에 카리브 해를 담은 눈동자의 주인을. 입실론들에게 둘러싸인 채 해사하게 웃으며 “나츠!” 하고 자상하게 그를 부르는 모습을.
“드레이크 씨인가요?”
“…….”
“여자들을 델타로 만든 바이러스요! 드레이크 씨인 거예요?”
“그렇다면?”
나츠는 숨이 멎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그럼…….”
드레이크는 무거운 눈빛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감염시킨 건 아니야. 나도 그자가 내 피로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자요?”
“아브라함.”
“아브라함이라면…….”
“정확히 말하면 그의 부친으로 알려진 대니얼 아브라함. 델타 바이러스를 퍼뜨린 장본인이지. 대니얼 녀석, 뉴욕 출신에다가 그쪽 마약상들을 잘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최초의 델타가 맨해튼에서 발견된 거야. 녀석이 뉴욕 뒷골목에서 활동하는 마약상들을 매수해서 바이러스 섞인 약을 공급했으니까.”
아브라함은 세상의 혼란을 원했다. 물론 그걸 가능토록 해 준 건 자신이었다.
그는 자만하고 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아브라함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상에 낙하한 신神이라 해서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순 없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안에서 그 또한 인간들처럼 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델타를 만들어 냈어. 녀석의 파멸적인 욕망은 끝이 없었지. 그럼에도 난 그를 막을 수 없었어. 더 이상 내게 그런 힘은 없었으니까.”
“왜요?”
그는 침묵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회상에 잠긴 눈빛은 씁쓸한 여운을 보였다.
─ 내 이름은 유림이다. 로스티아벤 정예부대인 STF의 델타 포획조 소속에서도 에이스인 몸이지. 그리고 오늘 널 구한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시다. 알겠나?
그녀가 놓은 주사에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 땐 이미 인근에 있던 병원으로 옮겨진 뒤였다. 몸을 일으킨 드레이크는 옆자리에 누워 있는 병사를 보며 깨달았다. 자신은 그 병사와 같은 몸이 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드레이크 씨, 혹시 로스트 헤븐에 온 이유가…….”
그는 나츠를 흘끗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웃음으로 무마하는 그를 보며 나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요. 아브라함이 델타를 만든 원흉이란 걸 밝혀야죠!”
“이제 와 그런 사실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려고 온 거잖아요. 델타를, 그녀들을 구하고 싶어서 낙원에 온 거잖아요!”
드레이크는 말없이 나츠를 바라보았다. 제자리를 서성이던 나츠는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기억나세요? 폐쇄 도시에서 소위님을 공격했던 델타요. 그녀는 인간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었어요.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델타들을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요!”
“겁쟁이 주제에 그들을 구하고 싶은 거야?”
“사실 무서워요. 델타하고는 눈만 마주쳐도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가엽기도 해요. 게다가 드레이크 씨가 그렇게 괴로운 눈빛을 하는 건 저도 싫으니까요.”
나츠는 고개를 숙인 채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레이크는 그런 그를 잠자코 응시했다. 허공에서 배회하던 손이 천천히 나츠의 머리 위로 향했다. 커다란 손길이 모자처럼 그의 정수리로 털썩 내려앉았다. 그는 나츠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또 계집애 같은 표정 짓기는.”
“제가요?”
드레이크는 킬킬 웃었다. 개구지게 웃는 그를 보며 나츠는 저도 모르게 홍조를 띠었다. 왠지 뿌듯했다. 그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것도, 숨겨져 있던 그의 얼굴을 발견한 것도 모두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콰쾅!
멀지 않은 곳에서 난 폭발음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끼기기긱!”
“키아악!”
델타로 추정되는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죽기 전 단말마의 울음소리였다. 나츠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드레이크를 보며 대신 결정을 내려 주듯 단호한 눈빛을 지었다.
“저도 함께 갈게요.”
가만히 손을 잡는 나츠의 온기에 드레이크는 눈을 흠칫 떴다.
“‘델타는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델타는 흉포한 짐승에 가깝다.’ 저들이 맹신하고 있는 전제 속에 오류가 있다는 걸 적들은 죽었다 깨나도 모를 거예요. 이걸 이용하도록 해요.”
‘이 녀석이 정말 내가 알던 그 겁쟁이 나츠가 맞나?’
드레이크는 얼빠진 표정으로 나츠를 보다가 주저하며 물었다.
“오류?”
“드레이크 씨의 존재요. 델타를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마 상상도 못할걸요?”
나츠는 묘하게 흥분한 듯했다. 왜 저렇게 기뻐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면서 드레이크가 대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 일도 아니면서 두 주먹을 꽉 쥔 채 의욕에 차올라서는 말이었다.
드레이크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어둠 속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병기형 안드로이드의 약점 같은 건 없어?”
“저들의 장점이자 약점은 철저한 지휘 체계예요. 근접 전투는 각기가 반응해서 움직이지만 기본 대형과 위치는 지휘관이 정해 줘야만 해요. 전투 시 명령을 전하고 포메이션을 결정하는 건 지휘관만이 할 수 있는데, 그 역할은 반드시 사람이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뇌파로만 수행할 수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지금 이곳에 저들의 지휘관이 있다는 건데, 그 사람만 제거하면 대열이 무너질 거란 의미예요.”
그게 누구일진 뻔했다.
“우리야겠군.”
드레이크는 나츠를 보며 말했다.
“나는 델타를 맡을 테니 너는 우리야를 맡아.”
“네?”
그는 놀라서 되묻는 나츠의 손에 총을 쥐여 주었다.
“어두워도 가능하지?”
나직하게 묻는 드레이크의 눈동자를 보며 나츠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총사령관님인데…….”
“총사령관은 이미 죽었어. 저기 있는 놈은 그와 똑같은 면피를 뒤집어쓴 가짜다.”
드레이크는 나츠의 양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소위님과 중위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 것 같아?”
“그, 글쎄요…….”
“가서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오라 했겠지. 물론 소위님이라면 직접 목줄을 따러 갈 확률이 높겠지만. 저 초록 눈깔 인형들 주의는 내가 끌 테니까 넌 그 틈에 우리야를 처치하도록 해.”
손에 쥔 총을 내려다보던 나츠는 불안한 눈초리로 드레이크를 쳐다보았다. 드레이크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가와 나츠의 턱을 들어올렸다.
“드, 드레이크 씨?”
그는 허리를 숙여 나츠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췄다. 나츠는 빨개진 얼굴로 코앞에 보이는 드레이크의 속눈썹을 응시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과 함께 등골과 척추가 찌릿찌릿 감전되듯 자극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과 혀의 감촉이 혈관을 타고 전신을 휩쓰는 느낌이었다.
“나츠 시게노.”
입술을 뗀 드레이크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따뜻한 숨이 입술 밖으로 멀어지자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반 뼘 간격으로 멀어진 드레이크의 미간이 부드럽게 웃었다.
“낙원에 널 이길 스나이퍼는 없어. 겁먹지 말고 다녀와.”
드레이크가 준 총을 쥐고 돌아선 나츠는 복숭앗빛으로 젖은 뺨을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훑었다. 심장이 폭주하는 열차처럼 뛰고 있었다. 머뭇거리며 걷던 그는 멈칫 서서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드레이크가 어둠 속에 선 채 아몬드처럼 새까만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 가고 뭐해?”
“지, 지금 갑니다!”
등 뒤에서 그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츠는 두근두근한 얼굴로 뛰며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어둠 속을 달리는 건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남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곳일지라도 그의 눈에는 항상 길이 보였다.
어릴 땐 지상 위 환한 세계를 동경했다. 미궁에서 나와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를 걷고 싶었다. 낙원의 주민들처럼 반짝이는 삶을 꿈꿨다. 하지만 그와 유메를 지켜 준 건 결코 밝은 빛이 아니었다.
애덤슨 중사님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오후의 빛이라면, 드레이크 씨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긴 밤이다.
빛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둠의 온기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다들 어둠을 만져 본 적도 없으면서 어둠은 춥고 고독할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츠는 잘 알고 있었다. 어둠을 끌어안는 게 얼마나 아늑한 일인지, 조용한 암흑이 얼마나 커다란 위안을 가져다주는지, 밤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오늘 그는 어둠과 입을 맞췄다. 그것은 빛보다 더 눈부시고 찬란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