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4권) (16/21)

Chapter 1

2077년 8월 14일, 날씨 흐림.

이브의 혈청을 주입한 바딤은 회복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겐 전혀 효과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혹시나 했던 희망을 지워야 했다. 바딤은 밤새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럴 순 없다면서 괴로워했다.

“뇌 이식을 하자.”

동틀 무렵 그가 퀭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결심한 눈빛이었다. 바딤은 거칠거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쏟았다.

“전 세계의 재력가들 대부분이 클론을 만들고 있어. 그들이 수명 사업에 투자하는 돈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래. 분명 조만간 뇌 이식술이나 아예 뇌 복제까지 가능하게 될 거야. 그러니 우리 포기하지 말자. 제발…….”

바딤은 흐느끼며 애원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듯 끌어안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열리는 틈새로 아침 햇살이 뿌옇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회오리치며 열리는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부채처럼 사방으로 쏟아졌다.

아름다웠다.

내 삶의 끝도 저렇게 숭고할 수 있을까?

더넘바람처럼 선들선들 춤추는 머리카락이 색 없는 입술과 뺨에 달라붙었다. 벼랑 끝에 걸터앉은 불그스름한 눈동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그녀는 헐벗은 몸처럼 얇고 가녀려 보였다.

나발루니예 언덕의 시간은 멈춘 채 쭉 고여 있었다. 러시아 전용기들이 이브를 탈취해 간 그날 이후, 이곳의 일상은 뒤집힌 모래시계에 갇혀 누군가 되돌려 주기만을 기다려 왔다.

낡은 유리병 속에 잠들어 있던 기록은 잘게 부스러진 파편들이었다. 만지면 뾰족한 모서리에 상처를 입을 게 분명한 날 선 조각들.

유림은 밤새 사라의 일기를 읽었다. 군데군데 손실된 부분이 많았지만 그녀의 아렴풋한 온기를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부러진 수수깡에 박힌 노란색 바람개비가 졸졸 돌아갔다. 멈출 만하면 손가락으로 톡 쳐서 돌리기를 벌써 한 시간째. 그녀는 저렇게 하염없이 바이칼 호를 바라보며 바람과 대화를 나누고 홀로 사념에 잠겼다.

“생각이 안 나.”

“무슨 생각을 하는데?”

등 뒤로 다가온 케이가 물었다. 유림은 그의 종아리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어리광을 피는 그녀의 모습에 케이는 허리를 숙여 유림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걱정 말라는 듯이, 그녀에 관한 건 아주 미세한 것조차 자신이 모두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아담과 한 마지막 대화.”

하지만 유림은 아쉬운지 한숨을 쉬며 나른한 눈빛을 머금었다. 케이는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옅은 웃음을 섞어 물었다.

“그런 건 알아서 뭐하려고?”

“그냥.”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엔 답답함이 어려 있었다.

“뭐든 마지막 순간만큼은 기억해 두는 게 좋잖아.”

─ 도망쳐, 아담!

─ 안 돼, 이브!

케이의 눈이 어둡게 일렁였다. 지난 십오 년간 그가 기억하는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은 절벽 앞 바다에 풍덩 빠진 뒤 멀어지던 창백한 팔과 하얀 옷자락뿐이었다.

“마지막 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거 아니었어?”

그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스치는 그의 이마에 옅은 머리칼이 살랑였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백야로 물든 하늘이 비쳤다.

“지금 이렇게 함께 있으니까.”

“아, 그런가?”

유림은 피식 웃었다. 재회를 한 순간, 그들의 마지막은 짧은 이별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존댓말 안 쓰네?”

케이는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하더니 입술에 예쁜 미소를 그렸다.

“존댓말이 좋아요?”

그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 유림은 숨을 멈추고 코앞으로 다가온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조각처럼 반듯한 콧날이 비스듬한 각도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반쯤 감긴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나긋한 어조에 정중한 말투.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 거지?

유림은 슬그머니 등을 뒤로 빼더니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똑 부러지게 받아쳤다.

“당연하지.”

“왜요?”

“내가 아직 상관이니까.”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 유림을 보며 케이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마지막 자존심을 사수하려는 듯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한쪽 볼을 부풀린 그녀의 얼굴은 줄곧 그가 기억하던 소녀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매 순간 이렇게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심장의 율동 소리는 커져만 간다. 끊어질 듯 기울어진 감정은 이미 가슴에 넘쳐 범람한 지 오래였다. 그녀를 향해 흐르는 행복감은 전율하며 증폭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브’는 그 선율을 짜릿한 쾌감으로 되돌려 준다.

“난 원래 군인도 아닌걸요. 굳이 따지면 과학자죠.”

“시끄러워. 하라면 해.”

“쑥스러워요?”

그의 입술이 아슬아슬한 간격만 둔 채 그녀의 아랫입술을 스쳤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예쁘지만 심술 어린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반말을 하면 오빠 같아서?”

“이상하잖아.”

“내가 이러는 게 이상해요?”

그가 도장을 찍듯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꾹 남기며 물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가 멀어지자 그녀의 볼이 화르르 뜨거워졌다. 케이는 나긋한 말투로 욕망 섞인 눈빛을 던졌다.

“케이가 아닌 아담은 어색한가?”

“그런 게 아니고.”

“밀러 중령은?”

말문이 막힌 유림이 입을 다물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밀러가 여기서 왜 나와?”

“마이클 밀러가 키스나 애무를 하면 어떨 것 같은데요?”

본인이 말해 놓고도 불쾌한지 그는 반듯한 이마를 찌푸렸다. 상상만으로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질투심에 목구멍이 텁텁해지는 기분이었다.

유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 온화한 색을 품던 눈동자가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게 무서울 정도로 낯설었다. 인상을 쓰니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도 살벌할 정도로 차가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쳤어? 남매끼리 무슨 키스야?”

“메리랑 밀러는 그 이상의 것도 했는걸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시니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피는 안 섞였으니 그쪽도 문제는 없다고 해야겠지만.”

“그야 메리가 마이클을 좋아한 건 맞는데…….”

변명하듯 주섬주섬 말을 잇던 유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스스럼없던 두 사람 사이가 조금씩 경직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모르는 척 외면해 왔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나와 밀러는 그런 걸 대입해 보는 것부터가 난센스야. 메리와 마이클은 서로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두 사람은 친언니, 친오빠와 다름없어. 케이 말대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우린 세상의 그 어떤 가족보다도 끈끈했단 말이야. 마이클은 단순한 오빠가 아닌 아빠 같은 존재였고, 메리 역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언니이자 베스트 프렌드였으니까…….”

말끝을 흐리던 유림의 목소리가 가라앉으며 울먹였다. 가끔 메리와 몰래 밀러의 침실에 숨어 들어서는 밤새도록 셋이 수다를 떨고는 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아마 사무치게 그리워지겠지. 메리의 말투와 표정, 웃음소리, 향기, 손길 그 모든 것들이.

유림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자 케이의 입매가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끌어안으며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이를 악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야 방금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질문을 던졌는지 깨달았다.

“내가 괜한 걸 물었어요.”

“알면 됐어.”

금세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온 유림은 그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케이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빗어 주며 서늘한 눈웃음을 흘렸다. 비뚤어진 빗장처럼 복잡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는 한숨을 쉬듯 속마음을 흘렸다.

“밀러 중령만 생각하면 자꾸 심술이 나요.”

“심술?”

그는 턱을 괴더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유림은 잘 기억나지 않겠지만 이브는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어요. 베이비시터는커녕 타이탄의 손도 안 타게 했죠. 이브에 관한 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직접 챙겼어요. 기저귀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목욕하기, 잠재우기, 책 읽어 주기, 머리 묶어 주기, 행여나 이불에 쉬라도 하면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빨래를…….”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해!”

유림은 얼굴이 벌게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쳤다. 케이의 말대로 너무 어릴 때라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라의 일기에서 본 내용들이 얼핏 떠올랐다.

이브에 대한 아담의 헌신과 애정은 실로 대단했다. 이브가 먹을 이유식을 직접 만든 것은 물론이고, 몸에 닿는 로션과 샴푸, 비누까지 천연으로 손수 제조할 정도였다. 부모보다 아담을 따르게 된 이브는 밤이면 그가 업고 자장가를 불러 줘야 잠에 들었고, 놀라면 제일 먼저 찾는 것도 ‘엄마!’가 아닌 ‘아담!’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이브를 웬 녀석이 데려다가 십오 년이나 같이 살았다는데, 내 속이 어떨 것 같아요?”

생긋 웃으며 묻는 케이의 눈웃음에서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케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몇 번 본 적 있었다. 호크 대령과 셰인 중위 앞에서였나? 생각해 보면 그는 보통 성적인 욕구가 쌓였는데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혹은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필요 이상 관심을 보일 때 저런 저혈압 환자 같은 얼굴을 했다.

‘밀러가 진짜 싫구나, 케이.’

유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가만히 상상했다.

두 팔 벌려 그녀를 환영하던 밀러가 케이를 발견한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케이가 억지웃음을 짓는다. 밀러의 표정이 싸하게 굳는다. 그 뒤로 이어질 그림을 계속 생각해 보던 유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싫어하겠군.’

어른스러운 밀러도 유림에 관한 일이라면 어느 집 오빠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복잡한 문제는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애써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떨쳐냈다. 그런 유림의 표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케이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당분간은 존댓말을 쓸게요.”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유림은 금세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댄 그녀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되물었다.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어?”

“누구처럼 아빠 같은 오빠는 되기 싫어서요.”

케이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더니 아랫입술을 베어 물고 잘근거리며 아래턱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발그레 젖은 그녀의 뺨이 사랑스러웠다. 눈가에 웃음을 흘린 그는 그녀의 턱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술을 벌렸다. 치열 사이로 침입한 혀가 아이스크림을 녹이듯 입 안의 숨결을 사로잡았다.

몽롱해진 유림의 동공이 가늘게 풀어졌다. 열기로 달아오른 표정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먹음직스러웠다. 보들보들한 얼굴과 목덜미에는 그의 체취와 숨결이 잔뜩 묻어 갔다. 부풀어 오른 입술과 애무로 젖은 귀, 붉은 얼룩이 남은 목과 쇄골.

케이는 탁해진 눈빛으로 타액이 묻은 입술을 잠시 뗀 뒤 그녀를 응시했다.

“케이.”

유림이 어깨에 하얀 팔을 감으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신음처럼 뜨거운 입김에 하반신이 열기로 부풀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취할 듯 꽉 끌어안았다. 그때 몽롱한 목소리가 귓전에 연기처럼 흩어지며 소곤댔다.

“졸려.”

유림은 미소를 머금은 채 사르르 눈을 감았다. 멍한 눈을 깜빡이던 케이는 곁눈질로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유림은 어느새 입술 새로 아기처럼 쌕쌕 숨소리를 내쉬고 있었다. 케이는 망연한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밤새 사라의 일기를 보느라 피곤하긴 했을 테지.’

그는 유림을 등에 업은 채 저택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알혼 섬에서 놀던 이브를 업고 총총걸음으로 돌아오던 날들이.

놀다가 지친 이브가 토실토실한 뺨이 눌리는 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면, 그는 주변을 한 바퀴 돌다가 살그머니 집에 와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이브가 잠든 세상은 더없이 평화롭고 따뜻했다. 그 안온한 밤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를 이불처럼 덮어 주던 쪽빛하늘도, 이브가 먹고 싶다고 조르던 달님 과자와 구름 솜사탕도, 모두 그림 속의 풍경처럼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게 단순한 사랑만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소망이란 걸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타이탄, 식사 준비는?”

─ 아직 주문한 식재료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시리얼로 허기를 달래시는 건 어떨까요?

“우유는?”

─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여전히 우유를 좋아하시네요.

“여전하지.”

혹독했던 물살은 거대한 궤도를 돌고 돌아 마침내 알혼 섬의 언덕 위로 회귀했다. 벼랑 끝에서 거친 풍랑을 경험한 묘목은 단단하게 성장하여 가지를 뻗었다. 바이칼 호의 잔잔한 수면은 밤하늘을 거울처럼 비추었고, 성목의 가지는 달과 구름을 손가락처럼 쿡 찌르며 깨웠다.

‘이곳의 풍경은 변함없는데, 너의 밤도 여전히 기억하는 그대로일까?’

잠시 걸음을 멈춘 케이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택 현관과 이어지는 언덕길이 보이자 교차되는 시야 위로 옛 풍경이 소슬바람처럼 불어왔다.

어린 이브가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구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그러자 그녀는 방울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아담!’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면에서 달려오던 작은 인영은 이내 물거품처럼 하얗게 부서지더니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옅은 미소를 맺고 있던 그의 입가에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등에 업혀 있던 유림은 몸을 작게 들썩이며 숨소리를 길게 내쉬었다. 평화롭게 잠든 그녀의 온기가 그의 심장을 따뜻하게 쥐었다가 놓는다. 가지 끝에 맺힌 물방울이 고요한 수면 위에 톡 떨어지듯 심상에 작은 파동이 일어났다.

이브의 밤을 지켜 주고 싶었던 건 그것이 그에게 있어 단 하나뿐인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잠든 이브를 지키는 일은 잠들 수 없는 그가 ‘밤’을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기에.

저택으로 온 케이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유림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녀가 입은 제복 가슴에는 검은 매와 엇갈린 쌍검 마크가 달려 있었다. 그는 굳은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

─ 미쳤어? 남매끼리 무슨 키스야?

그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불현듯 무서운 깨달음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떠났다.

─ 만일 그대로 그녀와 쭉 함께 지내 왔더라면, 이브는 과연 아담을 남자로 사랑했을까?

차가워진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케이는 유림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움켜쥐었다. 잠시 후, 그는 그녀의 옆에 몸을 나란히 대고 누웠다. 그리고 허전해진 품에 그녀의 온기를 채우듯 꽉 끌어안았다.

* * *

【남태평양전대 소속 특수 잠항 헤벨의 정기 보고】

수신자: 전략국 작전부 남태평양전대 지휘 본부

발신자: 요한 제이콥스 대위

잠입 요원 ‘피의 마리아’의 사망을 확인.

특수 요원 ‘데드캣’ 실종 확인.

아크레인 1기AKR2A1 파손 확인.

본 함정의 전투 허가를 요청합니다.

헤벨의 대회의실은 적막에 휩싸인 채 비탄에 빠졌다. 독수리 날개 모양으로 배치된 수십 개의 의자에는 장병들이 충격에 빠진 얼굴로 앉은 채 참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굳은 얼굴로 시청하고 있는 영상은 유림이 타고 갔던 아크레인에서 발견된 블랙박스의 사본이었다. 허공에 재생 중인 영상은 마치 당시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했다.

목 없는 천사의 동상이 등장하자 커크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천사상을 보자마자 그것이 단순한 조각상이 아님을 감지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 직접 본 유림의 심정은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잔인한 처사였다.

화면 속에서 천사상이 ‘쨍그랑!’ 하고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숨을 멈추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중년의 장교 하나는 벌떡 일어서서 고함을 질렀다. 시신을 저런 식으로 훼손하다니, 멀쩡한 사고를 하는 놈은 아니라면서. 이어서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유림의 오열 소리였다.

온화한 밀러나 메리와 달리 유림은 강인한 성격과 폭발적인 전투력으로 안팎의 장병들을 사로잡았다. 코드네임 데드캣은 기동수색대의 자랑이었고, 남태평양전대 유격전의 핵심 전력 중에서도 상위 멤버로 손꼽힐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런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웅덩이처럼 고인 물컹물컹한 살점들을 품에 넘치도록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유동액과 살색 잔존물로 남은 메리의 유해는 보는 게 힘겨울 정도로 끔찍했다. 헤벨의 자존심인 유림의 눈물은 흡사 연맹군 전체의 패배처럼 쓰게 느껴졌다. 잔인한 말이지만 슬픔보다는 분하다는 감정이 먼저 밀려왔다. 다들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가 꺾인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회의실 뒷문이 조용히 열렸다. 양쪽으로 열린 암회색 문 사이로 갈색 제복을 입은 그림자가 홀연히 등장했다. 수척한 몰골의 남자는 장병들이 앉은 의자 사이로 절뚝거리며 걸어 내려왔다. 곁눈질로 뒤를 돌아본 병사들은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내려오는 인영의 주인을 확인하더니 우르르 일어서서 거수경례를 취했다.

“부함장님!”

맨 앞줄에 앉은 중위가 대표로 우렁차게 소리치자 단상에 오른 남자는 무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벨이 멈춘 영상을 흘끗 보더니 모자를 벗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본인의 가슴에 달린 수많은 훈장이 부끄러운 눈빛이었다.

요한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희생을 헛되이 만들지 맙시다.”

조곤한 목소리지만 칼을 갈고 온 듯 비장함이 느껴졌다. 누군가 손을 들더니 분노를 억누르는 기색으로 숨을 씨근덕거리며 물었다.

“메리를 죽인 게 누굽니까?”

독일 출신의 중년 남자는 헤벨의 공병 참모였다. 격납고 시절부터 어린 메리를 조카처럼 여겼던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서 있었다.

다들 궁금하다는 얼굴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벗었던 모자를 쓰며 회의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쭉 훑어보았다. 요한의 표정을 분석하고 있던 아벨이 그의 눈초리를 포착하더니 재빨리 데이터를 정리했다.

허공에 한 남자의 모습이 ‘핏’ 하고 떠올랐다.

“엘 카인. 왓슨 제약회사의 대표이사이자 낙원의 관리자를 맡고 있는 자입니다.”

얼마 전 테러가 발생했던 제인 왓슨의 생일 파티에서 포착된 카인의 모습이었다.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제복을 입은 남자와 어두운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잠입 요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 제거 대상이었습니다. 메리가 입실론으로 위장한 이유도 이 남자 때문이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메리는 엘 카인 암살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방식으로 보아 작전 중 정체를 들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 카인은 메리를 살해한 후 다른 공작 요원인 데드캣에게 거짓 암호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데드캣은 이것을 메리가 보낸 호출로 믿고 나갑니다. 하지만 그가 친 덫이었습니다. 엘 카인에게 유인당한 데드캣은 영상에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실종된 상태입니다.”

엘 카인은 메리의 시체를 전시하듯 걸어 놓았다. 그것은 승전 후 전리품을 자랑하는 것과 동시에 적군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기도 했다. 전형적인 학살자의 방식이었다. 낙원의 첨탑엔 천사가 아닌 악마가 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지능적인 녀석이.

“파손된 아크레인도 녀석의 짓입니까?”

“그렇게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아크레인이 공격당했을 당시 영상이 블랙박스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벨의 보고에 따르면 데드캣이 아크레인을 타고 게이트 상층부로 올라간 순간부터 소프트웨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고, 이착륙 모드와 항공 시스템을 제외한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제3자의 출현 가능성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른두 명의 장교들은 제각각 무거운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요한은 약 십 초 정도, 그들이 머릿속을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었다.

현재 시각 오전 5시 45분.

검지로 검은색 스마트 워치의 입체 액정을 만지작거리던 요한이 입을 열었다.

“다들 조식은 회의실 안에서 들도록 합시다. 곧 함장님께서 작전 회의를 여실 겁니다.”

함장이란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함장님께서 깨어나셨습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내색은 않았지만 다들 밀러를 염려하고 있었다. 함장실의 평화가 곧 헤벨의 안녕이었고, 헤벨이 무너지는 건 전략국 전체의 위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부하 장교들이 기뻐하며 묻는 모습에 요한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의식은 무사히 되찾으셨고 몸에도 큰 이상은 없다고 하시는군요. 안정을 취하고 계시니 십 대 소녀들처럼 소란을 떠는 건 삼갑시다.”

─ 방금 전 말씀은 성차별 발언으로 간주됩니다, 대위님.

발끈한 여장병들이 미간을 찌푸리기 무섭게 아벨이 재빠른 충고를 던졌다. 요한은 허공에 동그란 구체로 형상화된 인공지능에게 곁눈질을 던지며 헛기침을 했다.

“아, 미안합니다. 십 대 ‘소년들’이라고 정정하도록 하죠.”

그가 빙그레 웃으며 사과하자 군데군데에서 키득 웃음소리가 삐져나왔다.

“성차별 발언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 겪었던 십 대 소년들은 워낙 범상치 않았던 녀석들이라…….”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풀던 요한의 눈이 멈칫 일렁였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르쿠츠크의 리쩨이 사립스쿨과 알혼 섬 저택이 있는 풍경 뒤로, 굉음을 내며 폭발하던 사샤의 에어쉽이 번갯불처럼 뇌리를 스쳐 갔다. 직접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매일 밤 죄책감과 함께 상상하던 광경은 어느새 실제 일어난 양 기억의 한 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종종 이렇게, 불시에 떨어지는 벼락처럼 전신을 강타하며 호흡을 조인다.

─ 괜찮으십니까, 대위님? 심박동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목울대가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입안에 찬 숨을 후끈한 울대뼈 안으로 삼키자 답답하던 명치가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요한은 다시 단상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몽을 지워 보려 애썼지만 오랜 자맥질 끝에 수면에 떠오른 기억 속 편린은 쉬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 아브라함, 아담 페트로비치, 이브 페트로비치 그리고.

“……사샤 피보바로바.”

─ 예?

“아, 아니, 혼잣말이야. 신경 쓸 것 없다.”

그는 가팔라지던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며 가라앉혔다. 인간이 조물주가 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이 지긋지긋한 감정의 부산물 때문이다. 죄책감, 불안함, 초조함, 두려움 등의 잔재가 목구멍을 좁혀 오듯 늘 등 뒤를 쫓았다.

스타시티에서만 벗어난다면 이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이상 알렉스 아브라함을 따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과거의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영혼에 각인된 기억을 지워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영원한 악몽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구속하던 건 알렉스 아브라함이 아닌 나 자신이었나?’

인정하기 싫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눈 밑 근육을 잘게 떨었다.

─ 대위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함장님께선?

─ 준비 중이십니다.

“알았다.”

이런 쓸데없는 잡념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뇌종양 수술을 한 이후로 심약해진 것인지, 정신력이 쇠한 건지 때때로 닥쳐오는 공포에 멍하니 사로잡혀 망상에 빠지는 순간이 잦아졌다.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밀러를 생각했다. 어깨를 든든하게 두드리며 웃어 주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자 명치에 얹힌 것처럼 걸려 있던 숨이 왈칵 넘어가는 안도감이 들었다.

“엘 카인은 헤벨의 정찰기인 아크레인과 상사66)를 공격한 뒤 잠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회의실 내 공기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무겁게 부풀었다. 한층 진중해진 눈빛들이 살기를 품고 뒷짐 진 손가락을 꺾으며 몸을 풀었다. 모두들 부함장의 뜻을 눈치챈 기색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들 이미 한마음 한뜻이었다.

변고를 당한 두 요원은 모두 밀러 함장의 여동생이다. 함정 헤벨은 자타공인 남태평양전대 최정예 병사와 장교들이 모여 있는 전략국의 에이스였다. 엘 카인은 지금 그 헤벨의 수장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건 헤벨에 탑승한 장병 전원에게 칼을 겨눈 행위였다.

“헤벨은 이미 공식적으로 로스트 헤븐의 외부 수사기관 자격을 부여받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수사관으로 임명된 장병들은 자유롭게 낙원을 출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건드릴 벌집은 두 곳입니다. 병기형 안드로이드가 생산되고 있는 위즈덤 본사와 로스트 헤븐의 사령탑인 에덴 타워. 일단 평의회와는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정보 공유는 하지 않습니다. 헤벨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합니다.”

칼날이 부딪치는 듯 공기가 쨍하고 수축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장병들은 저마다 숨을 내쉬며 옆 사람과 눈빛을 교환했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투형 안드로이드에 관한 데이터는 없습니까?”

“공중전이 벌어질 경우에 대비한 전략 시뮬레이션 결과는 어떻습니까?”

“관련 영상과 자료는 각자 개인 어카운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회의 전까지 빠른 숙지 바랍니다.”

회의실 허공에 빨간 느낌표 표시가 번쩍이더니 투명한 알림 창이 떠올랐다.

【시스템】

전투 준비 태세 모드로 전환하시겠습니까?

에너지 소비량이 294% 증가합니다.

전투 준비 태세Combat readiness.

적대 행위 이전의 최종 전투 준비 상태를 일컫는 군사 용어다. 보통 적습을 받았을 때 취하는 비상 태세로 밀러가 함장을 맡은 후 실전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회의실 내 장교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그들의 눈빛에는 종잇장도 벨 것 같은 살벌한 살기가 맺혀 있었다. 허공에 부유한 채 지구본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아벨의 푸른 형체는 ‘시스템 메시지’를 띄우고 지시를 기다렸다. 요한도 바닥을 짚은 지팡이를 깍짓손으로 누르며 조용히 단상을 지켰다.

그때 아벨이 돌연 푸른 구체의 테두리를 밝게 반짝이면서 ‘함정 내 회신 활성화’를 알렸다. 누군가 회의실 스피커에 접속한 모양이었다. 숨죽인 호흡들이 바짝 마른 입술을 꽉 사리물었다.

─ 함장실입니다.

나직한 음성이 부드럽게 깔리자 공기 중에 가스처럼 퍼져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장병들의 낯빛이 대번에 밝아지자 그걸 지켜보던 요한의 입매도 한층 느슨하게 풀렸다.

─ 다들 잘 지냈습니까?

“함장님!”

근육 덩어리에 시커먼 사내새끼들이 어미 새를 찾는 병아리인 양 충혈된 눈으로 울먹였다. 애써 담담한 척 말을 건네는 밀러의 목소리도 깊게 잠겨 있었다. 좀 전까지 흡사 오열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통신 너머 인영의 주인은 숨을 가만히 내쉬더니 함장의 인장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함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푸른 원 속 금색 닻을 한 마크가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아벨은 그의 함장 마크를 함정 중앙에 위치한 회의실뿐만 아니라 함수부터 함미까지 헤벨 곳곳에 띄우기 시작했다.

장교가 아닌 병사들은 대부분 후미에 위치한 식당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그들은 회의 결과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허공에 푸른 불빛으로 떠오른 함장 마크 덕에 활력을 찾은 병사들은 웅성거리며 삼삼오오 그 앞에 모였다.

잠긴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기침을 하듯 흘러나왔다. 밀러의 음성임을 확신한 병사들은 힘 빠진 얼굴로 안도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소리가 함수부터 함미 끝까지 울려 퍼진 것도 잠시, 살벌한 기운을 품은 밀러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전을 날카롭게 휘갈겼다.

- 함장실에서 명합니다. 이 시각 이후 우리 함정은 로스트 헤븐과의 전투에 돌입합니다. 경계 태세는 지금 즉시 최고 등급으로 상향합니다.

멍하니 듣고 있던 병사들의 동공이 커다랗게 풀렸다. 넋 나간 그들을 일깨우듯 함장의 어조가 무섭게 돌변했다.

- 제군, 이건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정신 바짝 차리도록. 전원 전투 준비!

다들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군기가 바짝 든 자세로 다리를 척 모았다. 병사들은 각 잡힌 모양새로 거수경례를 하며 함장의 마크를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Aye aye, sir!”

【전투복으로 환복한 뒤 대기】

아벨이 띄운 명령 창에 따라 일사불란한 걸음이 이어졌다. 함정 전체에 울려 퍼지는 알람 소리가 그들의 얼굴에 긴장과 흥분을 지펴 주었다.

함장실 데스크에 앉아서 아벨의 보고서를 훑어보던 밀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겨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문 앞에 호크 대령이 느물느물한 눈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함장.”

“함장이라, 그렇게 불리는 것도 오랜만이군.”

“군인이 아닌 정치가가 되셨더군요.”

밀러가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으로 보고서를 보며 말을 건네자 호크는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엘과 대립할 셈인가?”

“그게 당신이 원한 것 아닙니까? 우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거 말입니다.”

어느새 제복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밀러는 책상 위에 깍짓손을 끼며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의 공격적인 말투에 호크는 조금 놀란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빤히 서로를 주시하는 시선이 허공에서 치열하게 부딪쳤다.

“유림은 어디 있습니까?”

“쭉 이곳에 있던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밀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호크 대령을 노려보았다. 하여간 능청스러운 노인네─비록 겉모습은 삼십 대라 해도 손색없지만─ 같으니라고. 저런 능구렁이 같은 면은 엘 카인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미카엘.”

“예, 함장.”

밀러의 푸른 눈동자가 부름에 응답하며 시큰둥한 기색을 보였다. 호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엘과 미카엘은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 달랐다. 포악하고 충동적인 성정의 엘은 본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면 동생인 미카엘은 온화한 성격에 강한 절제력과 인내심을 자랑했다. 덕분에 엘이 일으킨 사고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은 언제나 미카엘의 차지였다. 그럼에도 한마디 불평불만 없던 순한 녀석이었다.

“네 역할은 방주의 수호였지. 너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엘이 케이를 공격할 때 방주를 폭파시켜 버린 건 아주 영리한 결정이었어.”

방주를 지키라 했더니 본능적으로 케이를 지켜 낸 미카엘. 결국 모든 것은 이렇게 될 그의 운명을 예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유림을 쭉 지켜 왔더구나. 지시도 없었는데 말이지. 네 몸은 본능적으로 케이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걸까?”

“케이를 위해 한 일이 아닙니다. 유림을 지켜 온 게 왜 케이를 위한 일이 된다는 겁니까? 제 의지로 그리한 것입니다. 케이가 아닌 제가 원해서 말입니다. 애당초 둘은 아무런 관련이…….”

멈칫한 밀러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평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갔던 에덴 타워 S관의 휴게실. 그곳에서 엿보게 되었던 유림과 다른 남자와의 정사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거울 속에서 얼핏 눈이 마주쳤던 갈색 눈동자의 남자는 약 올리듯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신경에 거슬리던 녀석이었다. 시종일관 유림의 곁에 착 달라붙어서 생긋거리던 장교 나부랭이 놈.

어리석었다. 왜 이제야 모든 연결 고리가 보이는 것일까?

밀러는 험상궂은 얼굴로 주먹을 쥔 채 책상을 쾅 치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녀석이었습니까? 유림의 밑으로 새로 왔다는 기술사관 훈련병이!”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의자를 쾅 걷어찼다. 덩그렁 쇳소리를 내며 차인 의자가 바닥에 쓰러지자 그는 이마에 선 핏줄을 만지작거리며 호크를 노려보았다. 거친 숨이 들락날락하는 가슴이 제복 단추 사이로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당신은 위선자입니다!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척하면서, 처음부터 염두에 둔 건 케이뿐이었다는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엘은 당신의 계략에 농락당한 것뿐이죠. 이 모든 플롯은 결국 케이가 성체로 성장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들은 체스 말처럼 그 위에서 놀아난 것이고요. 제 말이 틀립니까?”

급속도로 흥분하는 밀러를 보며 호크는 흥미롭다는 눈빛을 지었다. 유림의 이야기가 나오자 침착하던 녀석이 순식간에 평정심을 잃었다. 이쪽도 스위치는 유림인가? 이 아가씨가 여기저기 남자들의 심장을 어지간히도 할퀴고 다녔군.

“그건 오해라고 말하고 싶군. 엘이 규율을 무시하고 전복을 시도했을 땐 솔직히 굉장히 감명 깊었거든. 그래서 방주가 폭파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음에도 두 손 놓고 구경만 한 거지. 잠시 다른 가능성을 머릿속에 그려 봤던 건 사실이야. 왕좌의 주인이 바뀌는가 싶어서 기대하기도 했고. 하지만 케이가, 그 아이가 너무도 놀라운 일을 벌이더군.”

호크의 눈동자가 일렁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십칠 년 전 그날.

바이칼 호수에 거대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날이었다. 검은색 도화지로 뒤덮인 하늘에 눈발이 하얀 소금처럼 흩날리며 뿌연 풍경을 이루던 밤, 어둠을 휘감은 남자는 눈보라를 뚫고 나발루니예 언덕을 방문했다.

─ 아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십자 흉터. 사라가 불길하고 음산한 인상이었다고 묘사한 그의 목적은 명백했다. 일족의 존망. 오직 일족의 명운이 끊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방주에 태워 온 일족의 아이들 중 누구라도 성공만 한다면 그로서는 상관없었다.

“당시 케이는 너희들 중에 가장 어렸지. 권속이란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도 힘든 무렵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능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더구나.”

그것은 과연 생존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일시적인 변덕이었을까?

지금도 케이가 사라를 구한 이유와 동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모체는 감염되었음에도 배 속의 태아가 항체를 갖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사라 페트로비치.

어쩌면 해답의 열쇠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케이는 왜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고 곁에 머물기로 작정한 것일까?

호크의 눈이 문득 밀러의 책상 위로 향했다.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액자 속에는 사진 한 장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서 함장과 그의 아이들인 마이클, 메리, 유림이 다 함께 헤벨 앞에서 웃으며 찍은 모습이 영상처럼 움직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미카엘, 너도 케이와 비슷한 것을 시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다만 둘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했다. 케이는 일족의 본성을 유지한 채 이브에 대한 애착을 키웠던 반면, 미카엘은 인류의 공동체 속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본인의 정체성을 부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카엘은 완벽하게 아서의 아들과 메리의 오빠를 연기했다. 아니,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케이와 달리 미카엘에게는 별다른 암시를 걸어 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카엘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본래대로 돌아오는 걸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미카엘이 아닌 마이클 밀러로서 살고 싶나?”

“그럼 안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없지. 그건 네 선택의 자유다. 네가 지키고 싶은 건 마이클 밀러로서의 지위와 삶인 것 같으니 말이야.”

밀러는 정곡을 찔렸다는 눈빛으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호크는 알 만하다는 얼굴로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반면 케이가 집착했던 대상은 오로지 이브였다. 그는 이브의 곁에 있기 위해 얌전히 페트로비치가의 아들이 되었다. 물론 사라와 바딤도 좋았지만 핵심은 이브에게 그들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담으로서 케이가 원한 것은 이브의 삶, 그리고 그녀의 주위를 위성처럼 도는 속박 같은 연결 고리였다. 그 연장선에서 페트로비치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것일 뿐, 굳이 이브의 오빠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미카엘, 가족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냐?”

밀러는 확신이 부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사랑?”

“그것도 틀린 답은 아니지만…… 정답은 희생과 헌신이야.”

호크는 팔짱을 낀 채 유유히 함장실 안을 거닐며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의 경우에는 원하는 바가 아주 확실했지. 이브와 가족이 되는 것, 이브의 옆자리를 독차지하는 것, 이브에게 있어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 너처럼 무작위로 걸린 아무개의 아들 혹은 아무개의 오빠가 되어, 아무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게 그의 목표는 아니었다.”

밀러는 얼어붙은 눈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의 오빠.

왜 이렇게 분한지 알 수 없었다. 호크의 말을 듣는 내내 유림의 얼굴이 머릿속에 구름처럼 떠다녔다. 밀러는 허벅지에 붙인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케이가 지키고자 한 건 이브의 삶 그 자체였다고도 볼 수 있지. 그가 이브와 가족이 되려고 했던 이유는 그녀에 대한 일종의 소유욕의 발현이었거든. 어린 마스터는 스스로 반려의 세계를 구축하는 걸로 모자라 그 일부가 되고 싶으셨던 모양이야. 정말 선조들의 본성을 아주 강하게 물려받은 분이지. 반려자에 대한 집착과 애정도 그렇고, 조물주에 입각한 시각도 그렇고. 그녀의 숨결이 되고 그녀의 일상이 되고, 나아가 그녀와 영혼까지 공유한다……. 세상의 축이 본인이 아닌 그녀라는 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너희와는 차원이 다른 권속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게 보이지 않나?”

호크는 천장을 바라보며 넋두리하듯 말을 맺었다.

‘차원이 다른 권속 관계?’

밀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크는 이해한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저 케이가 어린 마음에 권속이란 개념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유림이 케이의 권속이란 말입니까? 유림이 그걸 바랐다고요?”

호크는 매듭을 풀 듯 차근차근 설명했다.

“분명 난 너희에게 그렇게 가르쳤지. 구애를 하는 이성과 관계를 맺으면 상대를 권속으로 삼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당시의 아담은 너무 어려서 이성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태어난 순간부터 쭉 그녀에게 구애를 해 오고 있지. 내가 절대 가르친 적이 없던 방식으로 말이야. 아직도 모르겠느냐, 미카엘? 그들과 가장 가까이 지낸 네가 이걸 깨닫지 못하다니 믿기 힘들군.”

“뭘 말입니까?”

“아담과 이브의 관계 말이다. 이 둘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지 않나? 아담은 본인의 삶 자체를 그녀에게 바치다시피 살아왔어. 남녀 간의 사랑이 뭔지 깨닫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에게 오롯이 희생과 헌신을 다해 왔던 거야.”

밀러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호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옛 기억에 잠긴 얼굴로 서 있던 호크는 피식 웃더니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과연 이 두 사람 중 누가 권주고 권속일까? 네 생각은 어떠냐, 미카엘?”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기록된 사라의 일기】

영혼이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산물일까? 복제된 클론도 영혼을 지니고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본체와 다른 존재일까? 연산과 사고가 가능한 안드로이드에게도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전자의 질문들과 관계없이 드는 마지막 의문 하나, 신들도 영혼이 있을까?

아담은 좀처럼 의문을 갖지 않는 아이였다. 물음표를 던지기 전에 스스로 답을 찾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부모의 맥이 빠지는 쪽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뜬금없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영혼이 뭐죠, 사라?”

주방에 있던 사라는 마침 까맣게 타 버린 빵들을 보며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아담의 질문에 그녀는 멈칫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타이탄, 이거 치워 놔.”

─ 다 버리라는 말씀이신가요?

“알아서 해. 나는 이제부터 우리 아들과 아주 철학적인 대화를 나눠야 하니까 말이야.”

타이탄은 집게용 사마귀 손을 한 로봇을 타고 바퀴로 굴러 와 바닥에 떨어진 프릴 앞치마를 주웠다. 그는 베이킹 재료와 도구로 엉망이 된 주방을 치우면서, 사라와 아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로그에 기록하라는 바딤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담은 하얀 식탁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옅은 갈색 머리칼 사이로 단정한 눈매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사라는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얼굴에 빙그레 맺힌 미소가 대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한 질문.”

“네?”

“그게 바로 네 영혼이야.”

일곱 살 아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솜털이 난 이마를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그의 표정에 사라는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갖는 그 호기심, 만족, 행복, 두려움, 불안감, 죄책감, 슬픔 등의 감정들. 그들을 경험할 때마다 발생한 인과관계의 행적들. 그 행적으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기억. 영혼이란 지금 말한 모든 것의 총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갓 태어난 아기는 영혼이 없나요? 아기들은 감정도, 경험도, 기억도 없으니까요.”

“어머, 그렇지 않아.”

사라는 아담의 양어깨를 잡고 앞세워 기차놀이를 하듯 일렬로 걸어 나왔다.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에는 태어난 지 겨우 몇 달 된 이브가 기린이 수놓아진 이불에 누워 쌕쌕 잠들어 있었다.

이브를 보자마자 아담의 눈빛에 반사적으로 따스한 온기가 스몄다. 사라는 곁눈질로 그런 그의 표정을 관찰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기들은 배 속에서부터 엄마와 아빠의 대화를 들으며 자라거든. 이브의 마음속에는 엄마와 교감하며 느낀 감정의 기억이 있어. 손톱만 한 크기일 때부터 엄마의 사랑이 담긴 목소리와 탯줄을 통해 엄마가 보고 느끼는 것들을 함께 경험해 왔으니까. 저 아이의 눈동자에는 우리의 모든 게 기록되고 있단다. 내가 그릇된 일을 하면 우리 딸이 상처받게 될 거란 생각에 때때론 두려움마저 일더구나. 그게 바로 생명을 품은 것에 대한 책임이란 거겠지. 그래서 난 이브를 직접 낳고 싶었어. 내 자식을 배 속에 담고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은 일생에 단 열 달밖에 없는 거잖니? 내 안에서 생명이 자라고 내 거울과 다름없는 영혼이 빚어진다는 게 얼마나 거룩하고 감동적인 일인지…….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연결 고리가 생기는 거야.”

묵묵히 듣고 있던 아담은 뭔가를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며 다물었다. 허공을 배회하는 그의 시선에 사라는 조용히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당연히 너도 영혼을 가지고 있지. 내 눈에는 우리 아담이 아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게 보이는걸?”

아담이 진짜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널 꼭 닮은 애를 낳으면 알게 될 거야. 네 영혼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이들은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거든.”

잠시 회상의 파도에 휩쓸려 있던 눈동자가 조용한 물살처럼 흔들렸다. 케이는 햇살을 머금은 눈으로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

그 시절의 사라는 미래에서 온 것처럼 모르는 게 없었다. 그는 그녀와 나눈 대화를 진리처럼 믿었다. 그에게 있어 사라는 단순한 보호자가 아닌 삶의 가치와 철학을 짚어 주는 영도자였고, 그 신뢰는 그녀가 죽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라의 편견 없는 시각이 더없이 좋았다. 그녀는 이브를 이 세상에 데려와 준 사람이었고, 이브는 사라와의 연결 통로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득한 우주처럼 아무것도 없던 그의 세상에 열린 작은 문이었다.

우유를 따르던 케이는 옆에서 같이 멍 때리고 있는 가사로봇 타이탄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가서 이브 좀 깨워 와.”

쟤도 그렇고 리사도 그렇고, 왜 저렇게 사람 흉내를 잘 내는지. 인공지능은 대개 주인의 성격이나 습관을 따라 하기 마련인데, 저렇게 덜 떨어진 모습은 도대체 어디서 캐치를 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 알, 겠, 습니다, 마스터, 그리고, 물건과, 함께, 송신된, 영상, 메시지가, 있습, 니다.

“재생하지 마.”

─ 네?

“누군지 아니까 틀지 말라고.”

메시지 내용이야 안 봐도 뻔했다. 케이는 귀찮다는 얼굴로 미간을 세웠다. 배송된 선물 상자 속에는 곱게 냉장 포장되어 온 우유와 빵 그리고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브루클린의 성녀 피규어가 들어 있었다.

“뭐해? 가서 이브 깨우지 않고?”

케이는 여전히 멍청하게 주위를 맴돌고 있는 타이탄을 향해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붙였다. 그가 한 대 칠 기세로 손을 들자 타이탄은 바퀴가 닳도록 거실을 종횡하며 달려갔다.

─ 지, 금, 갑니다!

저러다가 언제 메스를 든 의사처럼 개조해 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을지 모를 마스터였다. 케이를 수십 년간 지켜봐 온 결과 매우 합리적인 추론이다. 타이탄은 멀리 있는 다른 한 명의 마스터에게 자신의 데이터를 백업해 달라는 요청을 냉큼 송신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코멘트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지나친, 수면은, 건강에, 좋, 지, 않습니다.

잠에 취해 있던 귓구멍에 타이탄의 일침이 바늘처럼 꽂혔다. 유림은 몽롱한 눈을 뜨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계추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몇 차례 끔뻑이자 시야가 금세 또렷해졌다.

‘몇 시지?’

그녀는 얼굴을 매만지며 벽 스크린에 뜬 시계를 쳐다보았다. 잠깐 십 분 졸다가 깬 느낌인데 일곱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 컨디션, 은, 어떠, 십니까?

“어, 괜찮아.”

타이탄은 재빨리 현 상황을 분석했다. 페트로비치가의 권력 구조를 파악하는 것만큼 그에게 중요한 일은 없었다. 현재 케이가 유일하게 쩔쩔매는 대상은 유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자신과 마스터를 보는 것 같았다. 명령과 절대적인 복종. 명령을 거스를 시에는 세상이 끝날 수도 있다.

타이탄은 명령 수행 대상 1순위를 슬쩍 케이에서 유림으로 변경했다. 역시 페트로비치가는 안주인에게 잘 보여야 살아남는다.

욕실로 직행한 유림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갸웃거렸다. 왼쪽과 오른쪽, 검정색 눈과 붉은색 눈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응시했다.

“나쁘지 않은데?”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는 눈빛으로 씩 웃었다. 손목에 찬 헤어밴드로 머리를 높게 묶었다. 그리고 찬물로 목덜미를 식힌 뒤 개운한 표정으로 거실을 향해 나갔다.

하얀 직사각형 모양의 식탁 위에는 갓 구운 빵과 우유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유림은 군침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곁눈질을 하니 케이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커다란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그래?”

“먹을 게 없어서요.”

양 볼에 빵을 가득 넣고 우물거리던 그녀는 음식을 얼른 삼켰다.

‘나 먹으라고 둔 게 아니었나?’

유림은 민망한 표정으로 흘끔거리다가 모르는 척 우유를 꿀꺽꿀꺽 마셨다. 케이는 그의 자리에 있던 빵 접시도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 더 먹으라는 듯 제 것도 내미는 그의 손에 유림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 우유랑 빵은 어디서 났는데?”

“누가 보내 줬어요.”

“누가?”

냉장고 문을 닫은 그는 반달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얀 셔츠에 진회색 팬츠를 입은 케이는 바람의 도시에서 보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집 안을 거닐며 보이는 그의 행동은 여유와 익숙함이 묻어났다.

식탁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는 그의 자세에서, 컵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말아 쥐는 손동작에서, 녹아들 듯한 미소를 머금고 턱을 괸 그의 시선에서 따뜻하고 편안한 기색이 느껴졌다.

“누가 보내 줬는데? 우리 여기 있는 거 누가 알아?”

“소위님 팬이 보내 주던걸요?”

“내 팬?”

곰곰이 생각하던 유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팬이 한두 명이어야지. 이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케이는 그녀의 머릿속이 보이는지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좋아서요.”

그는 턱을 괸 채 천연덕스러운 눈웃음으로 대답했다. 그의 눈에 걸린 느른한 시선이 근사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유림은 홍시처럼 붉어진 뺨을 감추며 눈을 흘겼다.

“하여간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한다니까.”

케이는 “흐음.”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식탁 위로 어깨를 기울였다. 코앞에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이 눈꺼풀을 내리감고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가 이마를 숙이면 키스가 이어질 듯 가까운 자세였다.

“가볍고 번지르르한 말은 싫어요?”

“별로야.”

유림이 도도한 눈초리로 코웃음을 치자 케이는 입술 끝을 붓꼬리처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얇게 휜 그의 눈초리는 그녀가 귀여워 죽겠다는 기색이었다.

“막상 사랑한다고 말하면 울 거면서.”

“내가 왜?”

“울보잖아요, 이브는.”

유림은 손에 쥔 빵 조각을 ‘콰직’ 바스러뜨렸다. 자존심이 와작 난 채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울보라고? 내가?”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케이는 유림의 입술에 묻은 우유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기분 좋을 때만 가르랑거리는 고양이거든요, 내가 키우는 고양이는.”

그녀의 입술 위에 묻은 하얀 우유 자국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결국 허리와 목을 숙였다. 순식간에 맞닿은 숨결이 입술 위에서 나직한 음성을 속삭였다.

“기분 좋게…… 해 줄까요?”

그는 유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입술을 덮쳤다. 그녀의 윗입술에 묻은 우유를 혀로 핥은 그는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혀를 깊게 밀어 넣었다.

자제력을 잃은 케이의 모습은 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웃음기 사라진 미간과 혼탁해진 눈동자, 집중으로 딱딱해진 이마와 목울대 위로 흘러나오는 낮은 숨소리. 이 남자는 너무 관능적이다.

그는 빵가루가 묻은 아랫입술과 그녀가 입안에 머금은 달큼한 우유까지 맛본 후에야 키스를 멈췄다. 그러고는 그녀의 이마에 머리를 ‘콩’ 하고 맞대며 쿡 웃었다.

“가르랑, 안 해요?”

“죽을래?”

발끈하던 유림의 눈이 움찔 커졌다.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왼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걸 다 맛보게 해 준다면 죽어도 여한 없을 것 같은데.”

새침데기처럼 앉아 있던 유림은 가슴을 주무르던 그의 손을 덥석 잡더니 도발하듯 속삭였다.

“이거 말고.”

“그럼?”

유림이 눈을 흘기자 케이는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 정점에 위치한 몽글몽글한 알갱이를 빙글빙글 잡아 돌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뺨이 붉게 상기되자, 그는 영글어서 톡 터질 듯 부푼 꼭지를 옷 위로 꼬집어서 쭉 잡아당겼다. 유림이 고개를 비틀며 “아…….” 하고 숨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예뻐 죽겠다, 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쪽 가볍게 뽀뽀를 했다. 그러자 유림이 더 해 달라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팔로 목을 칭칭 휘감았다. 그래, 이걸 원했다. 이렇게 안겨 오는 것. 온몸을 뱀처럼 휘감은 그녀에게 구속당하는 기분.

연리지처럼 서로를 감은 채 영원히 뿌리박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집착과 불안감, 소유욕, 유림은 평생 모르는 게 나을 테지.

이 갈증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테니 그는 언제나 마른 우물처럼 그녀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외에 다른 권속은 만들면 안 돼요.”

“다른 권속?”

상기된 뺨과 달리 고집스러운 눈초리를 한 그녀의 얼굴은 늘 범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굴복시키고 싶진 않다. 다만 저 도도한 고양이가 기분 좋아서 가르랑거리는 걸 보고 싶을 뿐. 다른 남자가 아닌 오직 자신에게만.

“나 말고 다른 남자와는 관계를 맺지 말라는 의미예요.”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유림의 말에 그가 움찔하더니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녀석과 하려고요?”

“아니, 그냥 묻는 거야. 도의적인 책임 외에 다른 문제라도 있어?”

케이는 굳은 얼굴로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갈 곳 잃은 시선을 허공에 두더니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다른 남자와는 만나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

케이가 해쓱해진 낯빛으로 읊조리듯 물었다. 뭔가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어 올 줄은 몰랐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되물음을 당연시 여긴 건 아니었다.

역시 그녀는 자신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물론 연인 사이에 애정의 질량을 저울질하며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지만 서운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초조해할수록 유림의 성격상 더 진절머리를 낼 것이다.

“뭐, 케이가 잘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

유림은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며 속으로 씩 웃었다. 망연자실한 케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간 장난기를 보지 못했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숨소리 변화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그였기에.

“그렇게 걱정되면 케이가 날 권속으로 만들면 되잖아.”

유림의 말에 그는 잠시 허탈한 듯 웃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케이는 둘 사이 몸을 가로막은 식탁을 옆으로 드르륵 밀었다. 그리고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당겼다. 하반신이 맞닿을 만큼 몸이 밀착되자 유림은 엉겁결에 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지금은 조그마한 자극에도 숨이 떨렸다.

케이는 유림의 턱을 잡더니 입을 맞출 듯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긴 속눈썹이 얼굴에 가느다란 그림자를 이루었다.

“느낌상 이미 실패한 것 같아요.”

“실패?”

“나는 유림을 이길 생각이 없으니 영원히 유림의 권주가 될 수 없어요. 아마도 이건 유림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일일 거예요.”

다정한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이 수축하며 시려 왔다. 고집스런 눈초리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그러니 유림도 나 말고 다른 권속은 만들지 마요.”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그녀에게 구속된 존재는 자신 하나면 족했다. 사라와 바딤은 예외로 하자. 그들은 이브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니까. 이브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이들이니까. 하지만 이들 외에 제삼자가 그녀에게 특별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나보다 유림을 더 예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흥, 경험도 없으면서 말은 잘하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 유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경험.”

그가 악마처럼 웃었다. 좀 전까지 파리한 낯빛으로 애걸복걸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것만 증명하면 되는 거예요?”

“증명하다니? 뭐를?”

“유림을 얼마나 원하는지, 또 얼마나…….”

눈꺼풀을 반쯤 감은 나른한 시선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유림의 눈썹이 당황스러운 듯 치켜 올라갔다.

“얼마나?”

케이가 뜸을 들이자 유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잠시 입술을 닫았다. ‘얼마나 뭐?’라는 눈빛으로 묻는 그녀의 얼굴 표정이 천진난만했다.

그녀는 알까? 스스로도 잠식당할 것만 같은 이 감정의 무게를? 끝없는 깊이를?

“사랑하는지.”

가슴이 크게 팽창했다가 가라앉으며 깊은 한마디를 내쉬었다. 떠밀려온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울리며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유림은 저도 모르게 잡았던 그의 손목을 놓았다.

“내가 유림을 보면서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무슨 생각을 하는데?”

지금 눈앞의 그녀는 유림일까, 이브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녀는 낙원의 고양이고, 알혼 섬의 바람이다. 그리고 그는 어디서든 그녀가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돌아가는 바람개비였다. 그녀가 입김으로 불어 줄 때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그렇지 않고선 버려진 장난감에 불과한 그런 존재.

“나쁜 상상.”

“그게 뭐야?”

“유림을 하루 종일 괴롭히는 상상. 유림이 흐느끼면서 제발 멈춰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놓지 않는 상상. 차라리 유림이 망가져서 나 없이는 살 수 없으면 좋겠다고…… 나밖에 모르게, 나만 원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상상. 이런 내가 섬뜩한가요?”

담담하게 고백하는 케이를 보며 유림은 뭔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렇게 불쑥 무서울 정도로 옭아매듯 소유욕을 발휘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 짜릿했다.

가슴 한편이 물속으로 차갑게 잠식되어 간다. 수면 아래 깊이, 그가 두 팔을 벌리고 가라앉아 있는 곳으로.

그곳은 아름다운 어둠이다.

“아니, 전혀.”

망가져도 좋다. 그의 지독한 소유욕이 오직 그녀에게만 향해 있을 수 있다면, 그를 독차지할 수만 있다면.

유림의 입꼬리가 풍선 꼬리처럼 부풀자 케이의 입매에도 피식 웃음이 어렸다. 좋으면서 아닌 척 입술을 꼭 다문 그녀의 표정에 다시 주변 공기가 몽글몽글해졌다. 케이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쿡쿡 웃었다.

낮은 선율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피아노 선율처럼 듣기 좋았다. 뺨에 닿는 입맞춤도,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모두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아담이었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이제 더 이상 그가 사랑했던 이브는 존재하지 않는데.

“나중에 실망하고 후회하면 어쩌려고.”

“그럴 일은 없어요. 절대.”

케이는 입술에 옅은 호선을 그렸다. 얇게 휘는 그의 눈웃음에 연신 온기가 감돌았다.

“아담은 몰라. 그동안 내가 무슨 짓을 해 왔는지.”

데드캣. 그녀는 죽음을 선사하는 천사였다. 상대를 조롱하듯 붉은 입술에 걸린 미소는 자객의 마지막 입맞춤이라 불리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비정한 눈초리는 항상 자만에 차 있었다.

그는 죄책감에 고개를 떨어뜨리는 유림의 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백야에 물드는 황혼, 아담의 눈빛이다.

“이브를 위해서라면 난 그보다 더한 것들도 할 수 있는걸? 널 구하기 위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할 거야.”

그의 숨결이 윗입술에 닿자 유림은 불확실하게 떨리던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우리 둘 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치 않아.”

천천히 입술을 겹친 그의 혀가 입술을 벌려 키스를 나눴다. 아랫입술을 적시고 들어오는 그의 숨결에 심장이 따뜻하게 뛰었다.

유림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영혼에 남아 있던 모든 찌꺼기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품에서 이렇게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꿈처럼 달콤한 사랑만 받으며, 현실의 괴로움은 모두 뒤로한 채 모든 걸 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아 줘, 케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던 그의 숨소리가 멈췄다. ‘지금?’이라는 눈빛으로 놀란 듯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유림의 긴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헝클이듯 어루만지며 다시 속삭였다.

“날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줘.”

“그 말.”

그가 신음을 흘리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참았던 숨을 길게 뱉었다.

“후회하지 않을 건가요, 소위님?”

예의 바른 말투로 위험스럽게 묻는 목소리. 그건 다정한 아담의 것이 아닌,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는 애덤슨 중사의 물음이었다.

유림은 그의 눈동자에 미세하게 남은 붉기를 응시했다. 차분해 보이는 표정에 연기처럼 섞인 성적 고조의 열기.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그의 자제심이 폭발할 듯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붉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 건 중사나 걱정하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상의를 끌어내렸다. 흠칫한 유림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럼 사양 않고…….”

고개를 숙인 케이가 숭배하듯 그녀의 맨어깨에 입을 맞췄다.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본 그의 장밋빛 입술에 곡선이 맺혔다. 이지러뜨린 눈초리에는 생긋거리던 평소와 달리 위험해 보이는 눈웃음을 휘감은 채,

“……명령, 수행하겠습니다.”

허스키하게 젖은 목소리로 그녀의 숨을 집어삼켰다.

케이는 순식간에 그녀를 침실로 안아서 데려왔다. 타이트한 하의를 입고 있던 유림은 언더웨어만 남은 상반신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거품처럼 하얗게 침대를 뒤덮은 이불을 움켜쥐었다.

‘왜 긴장되는 거지?’

어두운 침실은 수면 모드에 잠겨 어스름한 불빛만이 벽 뒤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셔츠를 벗는 케이의 모습이 커튼 뒤 인영처럼 실루엣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어깨선과 날렵한 허리, 반듯한 척추를 따라 깊게 파인 등 근육.

유림은 늘씬한 흑표범처럼 느른한 눈빛으로 다리를 살짝 모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묘하게 떨렸다.

그가 곁눈질로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표정은 안 보여도 슬그머니 웃고 있는 듯했다. 퇴폐적인 눈빛에는 나른한 기류가, 생긋 웃는 입매에는 여유로운 곡선이 걸려 있었다.

돌아선 케이가 반라의 몸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침대 위로 느긋하게 올라온 그는 긴장한 기색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단정했다. 생각해 보니 그는 그런 남자였다. 흐릿한 욕망으로 이성이 이지러진 순간조차 기품을 잃지 않는 남자.

이 남자의 그런 점이 더 설레었다.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모습이 자신을 탐하며 서서히 무너져 가는 걸 보고 싶었다. 짐승이 된 그와 눈을 마주치며 교감하고 싶었다.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칠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이 기대됐다.

“계속 가리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위로 올라온 케이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 양팔을 모아서 가슴을 가리고 있던 유림은 흠칫하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팔을 풀까 말까 고민을 하는 얼굴로 딴청을 피우던 그녀는 마지못해 스르르 꼬았던 다리를 풀며 팔을 열었다.

양 볼이 발그레 젖어 가는 유림을 보며 그의 눈은 평온을 벗고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피부에 얇게 붙은 그녀의 바지를 찢어 내듯 쭉 벗기며 목울대 위에서 겉도는 숨을 억눌렀다. 목구멍이 타는 듯 뜨거웠지만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는 유림에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고양이처럼 새침한 얼굴로 누워 있던 유림의 눈이 부끄러운 듯 피했다.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감긴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정적인 눈빛이 그녀의 온몸을 적나라하게 훑었다. 허리선을 어루만지며 올라오는 그의 손길에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그의 장밋빛 입술 새로 흘러나온 호흡이 귓불을 적신다.

케이가 상체를 비스듬히 숙이자 그의 몸이 조각상처럼 근사한 구도를 그렸다. 아름답고 섬세한 선을 가진 남자. 생각해 보면 아담은 어려서부터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유리처럼 투명했던 소년이 저렇게 짓궂은 농담을 하고, 쉴 새 없이 야한 짓을 하고…….

“낯설어.”

“낯선 걸 좋아하잖아, 소위님은.”

그가 속마음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담담한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그었다. 심장 언저리를 칼날처럼 스치며 뛰는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섬뜩함과 설렘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등골에 핀 오싹함 위로 폭주 열차처럼 뛰는 맥박이 빠르게 내달렸다.

고개를 숙인 케이는 그녀의 가슴골에 치아를 박더니 물어뜯듯 빨아들였다. 붉은 흔적이 남은 그곳에 ‘촉’ 입을 맞춘 뒤 다시 이를 내보이며 살점을 베어 물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유림은 아기처럼 가슴을 빠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더 해 줘.”

무엇을 더 해 달라는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가슴 끝이 열기로 딱딱해져서 끊어질 듯 부풀어 올라 통증과 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온몸이 충족되지 않는 갈증으로 인해 바짝바짝 애가 탔다. 목이 까끌까끌하게 건조해져서 텁텁했다. 엉덩이 골 사이로 찌릿하고 흐르는 전류가 가랑이로 촉촉하게 흘러드는 게 느껴졌다.

‘채워 줘.’

유림의 눈빛을 바라보던 케이는 한 손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벌리더니 긴 손가락으로 허벅지 안쪽을 어루만졌다. 몸을 들썩이며 더운 숨을 내쉬기 시작한 유림의 모습에 그는 잠시 고개를 들고 탁한 눈을 일렁였다.

지금 이 광경을 사진처럼 찍어서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들썩이는 그녀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여기는 왜 이렇게 젖었어요?”

그가 입매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푹 찌른 손가락 하나가 간질이듯 속살을 살살 긁어내며 이기죽거리는데, 안달이 난 유림은 약이 오르는지 턱을 숙이고 눈을 치켜세워 그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듯이.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오더니 도톰한 속살 사이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따뜻하고 쫀득한 내벽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움직이던 손목이 점차 빠르고 깊게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잔뜩 흐려진 그의 동공 속에 희열이 어리고 있었다. 좀 전보다 훨씬 광폭해진 눈빛은 갈기갈기 찢겨 나가려는 이성을 붙든 채 호흡을 조절하는 중이었다.

넣고 싶다.

손가락 대신 뜨거운 것을.

미끄덩한 점액이 거미줄처럼 손가락에 달라붙으며 딸려 나오자, 케이는 검지는 들어 혀로 손가락 끝을 할짝였다. 서늘한 눈매가 붓꼬리처럼 가늘게 휘었다. 더없이 달콤하다는 듯 눈웃음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귀신도 홀릴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먹지 마.”

유림이 빨개진 얼굴로 톡톡거리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애액을 손등으로 닦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그럼 소위님이 먹어 보는 건?”

“뭐를?”

되묻기 무섭게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그가 몸을 밀착시켰다. 갈라진 살점 초입에 닿아 있는 그의 것이 방어하듯 오므린 다리 사이를 살금살금 파고들었다.

“나를.”

그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며 부드럽게 하체를 밀어붙였다. 미끄덩하고 들어온 것이 송곳처럼 안을 찔렀다. 유림이 엉덩이를 살짝 들자 케이가 팔로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며 봉긋한 가슴을 깨물었다.

“아…….”

단단해진 살점을 반쯤 넣자 그녀가 몸을 들썩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흐릿하게 풀어진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그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흔들린다. 굳은 눈초리는 점점 부풀어 오르는 욕망과 달리 쉬이 밀어붙이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동요하는 그의 심정을 눈치챈 유림이 멈칫한 그의 허리를 하얀 다리로 칭칭 감으며 조였다.

“바보, 혼동하지 마. 난 이브가 아니야.”

호통 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눈이 흠칫 커졌다.

“지금의 난 유림이야. 그러니까 지금 날 사랑해 주는 것도 아담이 아닌 케이야.”

멍한 표정을 짓던 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늘 지켜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커다란 날개로 보듬어 주고 있는 것은 항상 그녀 쪽이었다.

케이는 유림의 어깨를 손으로 꽉 누르며 허리를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강렬한 자극에 고개가 ‘읏!’ 하고 뒤로 젖혀졌다.

살점과 살점이 마찰을 일으키며 찰팍한 소리를 일으켰다. 예상치 못한 진입에 유림은 이를 꽉 물었다. 다리를 부들거리며 떨었지만 그가 꼼짝도 할 수 없게 양 발목을 부채꼴로 벌려 잡고 있었다.

그는 그사이에 몸을 완벽하게 끼운 채 목울대에서 그르렁거리며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미칠 듯한 쾌감에 사로잡힌 암갈색 눈동자가 허공을 떠다니며 멍하니 풀어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유림은 더운 숨을 섞으며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 거…… 내 안에서 두근대고 있어.”

그는 그녀의 한마디에 흥분한 듯 위험하게 웃었다. 좀처럼 땀을 흘리지 않는 남잔데, 이마에 맺힌 땀이 그녀의 가슴골 사이로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유림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애무하듯 어루만지다가 정점의 돌기를 짓궂게 비틀었다. 그러자 그가 턱을 치켜들며 몸을 낮춘 표범처럼 나직한 신음을 뱉어 냈다.

아, 듣기 좋다.

흥분해서 낮게 흘리는 그의 목소리가 황홀할 정도로 달콤했다. 유림이 웃자 케이는 그만하라는 듯 눈을 내리깔며 잇새로 참는 미소를 머금었다.

“하…….”

그럴수록 장난을 치는 그녀의 손짓에 그는 신음을 삼켰다. 괴롭힘을 당하며 뭔가를 억누르는 그의 얼굴이 더없이 섹시했다.

그는 허리를 살짝 뒤로 뺐다가 거칠게 밀어 넣더니 달려들 듯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케이의 목을 칭칭 감은 그녀의 팔이 사르르 경련하며 떨렸다. 아랫입술과 목덜미를 녹일 듯 혀로 애무하던 그의 입술은 목선을 타고 쇄골을 핥고 가슴으로 향했다. 그는 꽃봉오리를 모으듯 그녀의 가슴을 한 손에 틀어쥐더니 봉긋하게 딱딱해진 꼭지를 이로 물어뜯으며 혀로 몽글몽글 빨았다.

유림은 어린 소녀처럼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울먹이는 듯 흐느끼다가 날카로운 교성을 섞기도 했다. 부드럽게 유영하듯 찰팍찰팍 움직이는 아래의 교접 부위에선 시큼한 향기가 흘러나와 머릿속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소위님 심장, 굉장히 빨리 뛰네요.”

“내 안에 있는 케이 것도 맥박이 엄청나게 빨리 뛰는걸?”

그녀가 아찔한 눈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그는 숨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입안에 머금은 호흡이 수증기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위험할 정도로, 일순 강렬한 자극이 등골을 짜릿하게 감고 치솟았다.

“야한 여자네요, 유림은.”

“몰랐어?”

나른하게 웃지만 안간힘을 다해 참는 그의 눈빛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유림은 슬그머니 허벅지를 오므리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케이가 날카롭게 신음을 흘리며 황급히 시트를 짚었다.

숨 막히는 자극이 전신을 뒤덮었다. 온탕의 열기처럼 흐려져 있던 그의 눈동자가 아찔한 듯 멍하니 초점을 잃었다.

온몸이 쫄깃한 조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유림은 그를 흡입하듯 살점 사이로 잡아당기며 따뜻하고 촉촉한 온기를 선사했다.

“유림…… 그만.”

나직한 신음을 억누른 목젖이 울컥거렸다. 유림은 살짝 엉덩이를 들며 그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쾌감에 힘을 빼고 있던 그는 속절없이 그녀에게 먹힌 채 끌려갔다.

젖은 통로가 회오리치듯 수축하며 그를 확 감은 채 빨아들였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느낌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정신 못 차리는 눈빛으로 휘청거리며 침대를 짚더니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케이의 그런 얼굴, 처음 봐.”

그는 잇새로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뇌수가…… 녹아 버리는 줄 알았어요.”

뜨겁게 부푼 그의 것에 젖은 옷처럼 달라붙은 그녀의 내벽이 몽글몽글한 돌기들로 간질이듯 핥았다가 꽉 감싸길 반복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뺏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그 어떤 마약보다도 강한 쾌감이다. 수백 번, 수천 번을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강력한 쾌락 행위.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울컥울컥 부풀고 단단해지는 성욕을 억누르는 것이 점차 버거웠다.

맞닿은 허리가 파도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거칠게 참는 숨소리 사이로 억누르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살짝 턱을 든 채 그녀를 사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이성의 끈을 잡고 있는 그의 표정이 견딜 수 없이 섹시했다. 유림은 뭔가에 목이 죄인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면서 피가 빠르게 돌았다. 마치 델타와 교전하기 직전 양손에 검을 쥐고 호흡을 고를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지금의 난 아무것도 자제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해도 돼요?”

목이 잠긴 채 묻는 그의 음성이 귓가에 서늘한 숨결로 닿았다. 여기서 멈추게 하지는 말라는 듯 부탁하면서도 포악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된다고 허락해 줘요.”

다정한 음색으로 다시 한 번 거부할 수 없는 청을 한다. 더운 숨에 섞인 나긋한 어조와 할짝이는 혀끝에 꿀을 바른 듯 달콤함을 풍기며.

도저히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뇌쇄적인 눈빛으로 목울대의 숨을 옭아맨 채 힘겹게 핏대를 벌겋게 굳히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서요, 유림…….”

“소위님이라고 했잖아. 부탁하는 주제에 건방지게.”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악마처럼 예쁜 미소가 번졌다. “아, 맞다. 그랬지.” 웃음 밴 목소리로 대답하며 뺨에 쪽 입을 맞춘 그는 이지러진 눈빛으로 해사하게 웃었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케이는 유림의 종아리를 잡고 활짝 벌리더니 가운데로 몸을 관통하듯 꽂아 넣었다.

“아앗!”

그녀가 고통에 찬 신음을 지르자 등골이 짜릿해지는 걸 느꼈다. 더 듣고 싶다. 그녀의 비명을, 교성을

깊숙하게 묻은 몸이 따뜻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이제야 오롯이 그녀의 안에 진입한 느낌이었다. 뿌리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하나가 된 일체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황홀경이 뒷골을 스쳤다. 척수가 산산조각나서 입자 단위로 분쇄되는 듯한 충격이 모든 것을 녹여 내렸다. 이대로 자신은 사라진 채 그녀에게 흡수되어도 상관없었다

배 속을 꽉 채우는 느낌에 유림은 다리로 그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그녀의 반응에 멈칫한 케이의 동공이 일렁이며 흔들렸다. 영혼을 수축시키는 듯한 강력한 쾌감이 말초 신경을 번갯불처럼 자극하며 전신을 뒤흔들었다.

“어디까지 날…… 정신 못 차리게 할 생각이에요?”

그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묻자, 유림은 하얀 발등을 그의 사타구니 쪽에 비비며 웃었다.

“케이는 영원히 나에게 미치지 않으면 곤란해.”

“영원히?”

“응, 영원히.”

그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더니 허공에 멍한 동공을 뿌렸다. 눈앞이 뿌옇게 흩어졌다가 경련이 일었다. 뇌수를 잠식하는 쾌감과 함께 극강의 절정이 등골에 낙수하며 산맥을 따라 좌르르 퍼져 갔다.

유림은 반쯤 감긴 눈을 나른하게 뜨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혼란스럽다는 눈빛으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 거, 왜 아직도…….”

의아하게 묻던 유림은 갑자기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가랑이 사이의 묵직한 무언가가 딱딱해진 채였다.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흐트러진 그의 눈동자가 가슴 떨리게 육감적이었다. 늘 이성을 잃지 않고 여유롭던 남자가 이렇게 미쳐 있는 표정이라니.

고개 숙인 그는 그녀의 살결에 날뛰는 호흡을 파묻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멈추려고 했어. 이건 소위님 때문이에요.”

동이 트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쉼 없이 관계를 이어 갔다. 유림은 눈이 풀린 채 인형처럼 팔다리를 널브러뜨리고 있었다.

“케이…… 이제 그, 그만…….”

그녀가 풀린 눈으로 부르르 떨더니 격한 경련을 일으켰다. 허리를 든 채 들썩거리며 흐느끼는 걸 보니 또 절정을 맞이한 모양이었다. 가녀린 몸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바르르 떠는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케이는 붉어진 눈을 일렁였다. 그리고 이미 수차례 물어뜯은 가슴에 다시 이를 박았다.

“아…….”

힘없는 몸이 바닥을 기며 빠져나가자, 그는 그녀의 몸을 붙잡고 질질 끌어와 어깨 안에 가뒀다.

절대 놔주지 않는 손에 포기한 듯 유림은 몸을 털썩 떨어뜨렸다. 출렁이는 침대 위 초점 잃은 눈이 멍하니 호흡을 마셨다. 엎드린 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친 목은 이미 다 쉬어 있었다.

툭 불거진 날개 뼈가 오들오들 떨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겹친 그의 몸이 또 한 번 그녀의 안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파도에 울음을 터뜨리자 덮쳐 온 그의 입술이 목소리를 막았다.

마비된 몸은 감전된 것처럼 부들부들 흔들렸다. 통제할 수 없는 경련이 온몸을 수축시키고 있었다.

“그러지 말라니까.”

키스를 하던 그가 움찔 입술을 떼며 말했다.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하는 그녀의 눈에 그가 잇새로 머금은 곡선이 엿보였다.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미소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면 또 흥분되잖아.”

“케이, 나…… 나 진짜 더 이상은…….”

유림이 숨을 헐떡이자 그는 다정하게 키스했다. 울먹이는 그녀를 보며 그는 미안한지 웃음을 머금고 부은 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

“한 번만 더 하면 안 될까?”

대답할 힘조차 없는 유림은 가쁜 숨을 내쉬며 케이의 목에 매달렸다. 유리처럼 깨진 몸이 너른 품 안에서 흠뻑 녹아내리고 있었다. 녹초가 된 그녀는 털썩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사랑해, 유림.”

“으응…….”

그눈두덩에 입을 맞춘 그가 고즈넉한 눈동자로 고백했다.

“미안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

거친 살 소리를 일으키며 몸이 엉켰다. 흐려진 눈에는 탁한 쾌감이 실려 있었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몸에 허리를 붙인 그에게서 황홀감에 젖은 몸짓이 묻어나왔다.

인정한다. 이건 짐승 같은 짓이었다. 오직 그녀만을 향한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처음부터 자신은 바로 이 순간만을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난 영혼과 육체가 그녀의 안에서 하나로 뭉쳐진다. 존재의 기억이 시작된 이후 처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하던 절대적인 고독이 완전히 불식된 채 사라진 것은.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유림의 옆에 케이는 털썩 쓰러지듯 엎드렸다. 한참 뒤, 여운이 가신 후에야 게슴츠레 눈을 뜬 그는 피식 웃으며 잠든 유림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 앙큼한 고양이, 감히 날 권속으로 만들었네.”

영원한 복종과 절대적인 헌신 그리고 변함없을 사랑.

그 모든 것을 약속하며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먼저 눈을 뜬 유림은 곤히 잠든 케이의 옆얼굴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는 그녀를 결박하듯 품에 끌어안은 채 아기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만 일어나, 케이.”

귓가에 번진 그녀의 속삭임에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붉은 기가 옅게 남은 눈동자는 연한 암갈색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천천히 아름답게 웃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물었다.

“아까. 잘 잤어?”

유림이 턱을 괴고 장난스럽게 묻자 케이는 당황한 듯 눈을 껌뻑였다.

“왜 그래?”

케이는 흘끗 고개를 들더니 수면 모드가 해제된 창문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공기를 비추자 창가에 소금 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반짝이는 빛의 결정들이 보였다. 유림은 망연히 눈을 껌뻑이는 그를 보며 미간을 굳혔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괴고 있던 턱을 들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심각한 눈빛으로 물었다.

“케이, 괜찮아?”

“잠을 잤어요.”

그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처음이에요.”

“뭐가?”

“처음으로 나도 잠을 잤어요.”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더니 쪽 입을 맞췄다. “처음?” 하고 중얼거리던 유림은 그에게 안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이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잠에서 깬 아침은 굉장히 눈이 부시네요.”

그의 품에서 벗어난 유림은 햇살에 비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갈색 동공엔 그녀가 비쳐 있었다. 그녀를 오롯이 담고 있는 그의 행성에는 연신 행복한 웃음이 번져 구름처럼 떠다녔다.

“바보. 그만 웃어.”

“한 번 더 할까요?”

턱을 괸 채 생글생글 웃는 그에게 유림은 새침한 눈초리를 짓다가 슬그머니 안겼다. 알몸으로 안기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눕힌 그는 쪽 키스를 하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한 번만?”

“어제 그게 한 번.”

“중사는 늑대야.”

까르르 웃던 유림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미간을 굳히고 말했다.

“나, 자연적으론 아이를 가질 수 없댔어.”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내려오던 케이의 눈이 커졌다. 유림은 그의 맨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슥 피해 중얼거렸다.

“불임이래. 생식기 내부가 이상하게 산도가 높아서…… 뭐, 어차피 인공자궁 쓰면 상관없는 문제긴 하지만.”

아쉽고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 딸 아니랄까 봐, 저럴 때는 영락없이 사라와 판박이였다.

“왜 웃어?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나도 전엔 상관없었는데, 왠지 케이와 아이를 가질 거면 직접 갖고 싶어서…….”

“알아요.”

우물거리며 말하는 유림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케이는 그녀의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랫배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볼웃음을 머금었다. 유림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글빙글 감으며 민망한지 뺨을 붉혔다. 케이가 이렇게 예뻐 죽겠다는 눈빛을 지을 때가 제일 부끄러웠다.

“그건 불임이 아니에요.”

그가 비스듬히 내리깐 눈으로 비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 아이만 가질 수 있다는 증거지.”

【타이탄의 복구된 메모리에 남겨진 아담의 일기】

사라, 처음으로 꿈을 꾸었어요. 깊은 잠에 들어서 본 그곳 언덕에는 당신과 박사님, 이브와 내가, 우리 모두가 함께한 풍경이 있었어요.

당신의 영혼이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머물고 있는 건가요?

한가득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부푼 이불 사이로 검은 머리칼들이 부채처럼 펼쳐진 채 구불구불 흩어져 있었다. 하얀 이불에 몸이 돌돌 말린 주인공은 가느다란 팔다리만 곁가지처럼 쏙 빼냈다. 유림은 폭신폭신한 느낌이 기분 좋은지 나른한 표정으로 웃으며 애벌레처럼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케이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눈초리를 휘며 웃었다. 태평하게 늑장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요부처럼 다리를 감고 유혹하던 그녀도 좋지만, 그의 품에서 꿈틀대며 어리광부리는 유림 역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이불 사이로 얼굴만 내밀고 배시시 웃는 유림을 보며 연신 예쁜 곡선을 머금었다.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채로 행복한 듯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심장 판막이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유림은 계속해 달라는 듯 꽃잎처럼 입술을 쭉 모은 채 내밀고 있었다.

“더 키스해 줘.”

칭얼거리며 속삭이는 유림의 목소리에 그는 눈을 비스듬히 감더니 그녀의 양 볼을 부여잡고 입 맞추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의 위로 올라간 케이는 유림의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이불을 걷더니 봉긋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자꾸 그러면 못 참겠는데.”

“그러라고 그런 건데?”

몸을 살짝 일으킨 유림은 케이의 목덜미를 혀로 슥 핥으며 그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더듬더듬 어루만졌다.

“아, 정말…… 예뻐 죽겠네.”

간신히 참으며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었다. 그녀는 숨을 자르르 떨었다. 감히 상관을 농락하다니, 그렇게 느긋하게 희롱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못 견디게 육감적인 그의 자태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럼 더 예뻐해 줘.”

“예뻐할 곳을 보여 봐요.”

어서 해 보라는 듯 그가 생긋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유림은 흘끔 눈치를 보더니 허리를 비틀며 가랑이를 수줍게 열었다.

그의 입술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며 도톰하게 벌어진 고살로 향했다.

구름처럼 뭉개진 이불이 펄럭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뒤덮었다. 이어진 유림의 신음 소리가 끊어질 듯 흘러나오자, 그녀의 다리를 들고 달아오른 속살을 달콤하게 맛보던 그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어째서 동족상잔이 금지인 거야?”

유림은 한쪽 뺨을 케이의 팔베개에 대고 알몸으로 엎드린 채 물었다. 그녀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돌돌 감으며 풀고 있었다. 고양이가 앞다리를 쭉 뻗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묘하게 요염한 자세였다.

그 옆에 누워 있던 케이는 한바탕 땀을 뺀 몰골이었다. 그는 조금 몽롱하게 풀어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살짝 일으켜 그녀를 응시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유림이 애교를 부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또 예쁨받고 싶어요?”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엉킨 머리칼을 긴 손가락으로 살살 풀어 주었다. 애무하듯 다정한 그의 손길에 유림은 뺨을 슥슥 비비며 기분 좋게 웃었다. 좀 전에 절정을 맞으며 침대에 몸을 툭 떨어뜨리던 표정과 아주 흡사한 얼굴이었다.

“해도 돼요?”

“내 질문에 먼저 답부터 해.”

“아, 질문.”

케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한 줄기 남은 이성으로 눈을 일렁였다. 붉어진 그의 눈빛에 파도치듯 흐르는 연갈색 빛이 오묘하게 춤추듯 흩어졌다.

“모성을 떠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어요. 반려자만 데리고 자취를 감춘 이들이 대다수였죠. 일족 자체가 워낙에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타인에게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종족이거든요. 인류처럼 군집을 이루려는 욕망도 없고,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도 없고, 성욕은 존재하지만 그것도 짝을 이룰 때만의 이야기고요. 본래 우리 일족은 양성이었다는 설도 있었으니까요. 개체 홀로 너무 완벽하다고 해야 하나?”

“양성? 그럼 혼자서 번식이 가능하다는 얘기야?”

“이건 어디까지나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성체가 되면 양성 중 한쪽 성을 택할 수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그게 멸족의 시초가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여성체보다는 남성체가 더 강하고 아름답다는 인식 때문에 성체가 된 녀석들이 죄다 남성체를 선택해 버렸거든요. 남성체는 아이를 갖지 않으니 더 편한 면도 있었고요.”

그의 손가락이 척추 뼈가 툭 튀어나온 그녀의 마른 등을 감상하듯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이들의 선택이 한쪽 성으로 몰리게 되자, 어느 순간부터 태어나는 아이들은 더 이상 양성의 몸이 아니었어요. 자연의 섭리인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이미 그 시점에 여성체들은 찾기가 어려워진 상태였죠. 반려를 이룰 암컷이 없어지자 일족의 수는 점점 줄어만 갔고, 동족상잔 금지는 아마 이때부터 나온 이야기일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린 멸족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어요. 이에 노아는 일족 중 남은 아이들을 모아 모성으로 귀환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죠. 그게 바로 엘과 미카엘, 나, 그리고…….”

“그리고?”

“한 명 더 있어요. 그는 다른 부족 출신인데 멸족되고 홀로 남은 걸 노아가 데려왔을 거예요. 그날 방주가 폭파될 때 죽은 줄 알았는데.”

그의 시선이 보드라운 살갗 사이로 물 흐르듯 향했다. 뽀얗게 부푼 곡선에 시선을 뺏긴 눈동자는 갈피를 잃은 채 흐려졌다.

“우린 죽는 것도 쉽지 않은 녀석들이거든요. 녀석도 여차저차 살아남은 거겠죠. 지금쯤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엿보고 있을 거예요.”

“엘 카인은 그때 보니 해괴한 능력이 있던데, 입실론들의 ESP와 느낌이 비슷했어.”

입실론들이 엘 카인의 권속이니 그들의 능력은 결국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엘은 원래 치유가 전문이에요.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공간 내에서 모든 것을 복구하고 변환시킬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유림이 몸에 상처가 난 채로 그의 공간에 들어간다면 그는 상처 부위를 원상태로 회복시켜 줄 수 있죠. 그의 공간 내에서 입은 영향은 공간 밖에서도 유효해요. 인간으로 치면 예술가 혹은 사제 같은 인물이랄까? 녀석은 유림처럼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염력이 특기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요.”

유림은 게이트 위에서 벌였던 그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렇게 얻어 터져도 금방 멀쩡해진 건 ‘그의 공간’ 속에 있어서 그런 거였나? 그녀는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총 맞아도 멀쩡하고 바닥에 추락해도 안 죽는데, 대체 어떻게 죽여야 돼?”

“우리는 서로의 피가 치명적이에요. 동족의 피가 섞이면 소멸에 이르게 되거든요.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죽는 것처럼 말이에요. 개체 하나하나가 너무 순수하고 강력한 존재라서, 설사 동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체내에선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거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오직 본인과 짝을 이룬 반려뿐이라더군요.”

“흐음…… 심장이나 목이 잘려도 되살아난다는 거야? 무슨 좀비도 아니고.”

“절단된 살점끼리는 가까이 가면 다시 붙으려는 관성이 있어요. 엘 카인의 경우, 녀석은 타인은 빠르게 치유해도 자가 치유는 좀 느린 편이거든요. 온몸을 조각조각 내면 아마 회복하는 데 꽤 오래 걸릴 거예요. 회복 중에 다시 조각을 내 버린다면, 어쩌면 영원히…… 그런 상태로 살아야 할 수도 있겠죠.”

“좋은 방법이네.”

케이는 그녀의 마른 등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직접 복수하고 싶은 거예요?”

“응.”

“유림이 원하는 대로 해요.”

“괜찮아? 케이도 복수하고 싶잖아.”

“어차피 동족상잔은 금지예요.”

그래서 동족을 죽이려면 권속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가 그녀에게 접근했던 이유였다. 유림은 곁눈질로 등 뒤의 그를 응시했다. 재밌는 아이러니였다. 그녀를 위한 복수에 그녀를 도구로 이용하고자 했다니.

“게다가…… 지금도 내 본능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유림에게 복종하라고 속삭여요.”

그는 유림의 맨어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유림의 바람을 실현시키는 것. 그게 내 삶이 된 거니까.”

“그럼 침대에서도 좀 복종해 보시지?”

멈칫한 그가 그녀를 빤히 보더니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건 유림의 바람이 아닐 텐데요?”

“뭐?”

“섹스할 때 복종하는 남자는 싫어하잖아요.”

케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서 뒤로 털썩 눕히자 긴 머리카락을 부채꼴로 펼친 채 누운 유림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유림에 관해 모르는 건 없어요. 아마 숨소리만 듣고도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을걸요?”

아이스크림처럼 봉긋한 가슴을 쪽 빨아먹은 케이가 그녀의 가랑이를 잡아서 양쪽으로 쭉 찢어 벌렸다.

“또?”

“싫어요?”

그는 뜨뜻한 물이 함께 새어 나오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은 거 같은데?”

눈초리를 치켜세운 유림은 그의 쇄골이 코앞에 다가오자 이를 콱 박아 넣었다.

“시끄러워, 이 변태 같으니.”

강렬한 쾌감에 그가 낮게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 서로의 몸을 한 치의 틈도 없이 끌어안으며 키스를 나눴다. 할짝이는 혀가 입가를 다 핥아먹고 가슴을 터뜨릴 듯 주무르던 끝에, 유림은 몰아쉬는 숨 사이로 헉헉대며 말했다.

“나…… 임신했으면 어떡해?”

케이의 눈이 멈칫하더니 그녀의 배를 응시했다.

“아닐걸요?”

“확실해?”

“유림이 임신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요. 그것보다 임신시켜도 돼요?”

“안 돼.”

유림이 딱 잘라 말하자 케이는 낙담한 눈빛을 지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불만을 가득 품고 있었다.

“안 돼, 안 된다니까! 적어도 십 년은 뒤에 할 거야.”

“무슨 십 년씩이나…….”

“난 애 엄마 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해. 그렇게 갖고 싶으면 케이가 낳든가! 애가 빽빽 우는 건 상상만 해도 지옥 같단 말이야.”

“울어도 예뻐요.”

그는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달콤하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웃은 케이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유림이 못 봐서 그래요. 아기였던 이브가 얼마나 예뻤는데.”

유림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며 새침하게 물었다.

“얼마나 예뻤는데?”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웠죠. 내 삶에 하나뿐인 보물이었는데. 존재하는 것 자체로 하루하루 기쁨을 안겨 줬어요. 이브를 위해서라면 내 생명 따위 하나도 아깝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케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옅게 웃었다.

“사랑해, 케이.”

알몸의 그녀를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던 그가 몸짓을 멈췄다. 놀란 듯 커다래진 눈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림은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자잘한 입맞춤과 함께 다시 고백했다.

“아주 많이 사랑해. 내게 있어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도 케이란 걸 잊지 마. 사랑해, 케이…….”

그의 몸에서 경련이 느껴졌다. 울컥하는 숨소리가 정수리에서 들려왔다.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던 그는 그녀의 속살 안에서 와르르 무너지듯 따뜻한 파정을 쏟아 냈다.

아아, 사랑한다고.

그녀가 나를.

“사랑해, 유림.”

목멘 목소리가 그녀를 절박하게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 * *

“그런데 여긴 정말 예전 그대로네.”

토스트를 먹던 유림이 지나가듯 물었다. 요거트를 만들던 케이는 타이탄이 깎은 사과를 접시에 담다 말고 멈칫 그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접시 하나, 소품 하나 변함없는 집 안을 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우물거렸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던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대답했다.

“화재가 한 번 나긴 했었는데 복원했어요.”

“화재? 이불이랑 그런 건 다 그대로던데. 엄마가 만든 퀼팅도 그렇고.”

“그런 건 미리 다른 곳에 옮겨 놨었거든요.”

“미리? 불날 걸 알기라도 했어?”

유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케이는 시선을 회피하더니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잠시 집을 비워 뒀었어요. 박사님 몸도 안 좋으셨고.”

박사님이란 말에 유림의 표정이 멈칫했다. 그녀는 괜히 딴청을 피우며 테이블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아, 맞다!” 하고 외치면서 화제를 돌렸다.

“타이탄도 그때 이렇게 된 거야?”

잠시 침묵이 내렸다. 케이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그녀를 향해 묘한 시선을 던졌다. 속내를 읽으려는 듯 빤히 응시하는 기색이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나? 아니면…….’

유림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간 눈을 깜빡거리자 그는 다정하게 웃었다.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

지금 그녀의 영혼은 어느 쪽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헤벨에 있는 걸까, 아니면 알혼 섬에 있는 것일까?

곧 떠나 버릴 조각구름처럼 그녀가 손안에서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렇죠. 타이탄도 그때 화재로 심한 손상을 입었으니까.”

─ 저는, 그, 전에, 이미, 손상을…….

“타이탄, 뮤트.”

닥치라고 명하는 그의 섬뜩한 미소에 타이탄은 얼른 입에 지퍼를 채웠다. 케이는 타이탄의 각진 어깨를 잡더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케이를 바라보던 유림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화면에 간간이 떠오르다 수면 밑에 잠기듯 사라지는 바딤과 사라의 사진을 응시하며 우유를 홀짝홀짝 마셨다.

때로는 진실을 아는 게 두려울 때도 있다.

바딤의 웃는 얼굴이 물그림자처럼 어스름이 번지며 자꾸 눈가에 머물렀다. 유림은 윤곽만 남은 채 떠도는 그의 실루엣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모습이 뭉개진 연필 선처럼 흐려지자 그녀는 울음을 참듯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때로는 현실이 더 가혹하다.

케이는 하얀 의자 위에 몸을 옹송그리고 앉은 유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뒤로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또 궁금한 건 없어요?”

유림은 귓가에 닿는 그의 입술을 향해 곁눈질을 던졌다. 은은한 우드 향이 났다. 해질녘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닮은 향기다.

“케이는 쭉 혼자 지냈어?”

“그게 제일 궁금해요?”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그가 웃으며 되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식탁 화면으로 향했다. 차가워진 손가락 끝을 오므리던 그녀는 고집스럽게 턱을 끄덕끄덕 주억거렸다.

“키스해 주면 대답해 줄게요.”

유림은 그의 어깨에 뒷머리를 부비며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케이는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결국 그에 관한 것이라는 게 기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유림의 턱을 잡더니 입을 맞추고 혀를 섞었다.

“곁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

“있던 적도 있었지만 대개 쭉 혼자였죠.”

그는 탁해진 눈으로 정신없이 키스를 하며 대답했다. 혀를 떼었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하던 그의 몸이 점차 그녀에게 밀착하며 붙었다. 유림은 가빠진 숨과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있던 적이라면…… 누구?’

머릿속에 불현듯 블랙 스완을 타고 왔던 사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 여자가 생각났을까?

기억을 곱씹던 유림은 애써 담담한 척하며 다시 물었다.

“왜?”

“이브가 없었으니까.”

가슴이 사르르 녹으며 안심했다. 유림은 빙그르 웃으며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케이는 심술 맞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브는 즐겁게 잘 지냈나 봐.”

“내가?”

“헤벨에서.”

“응.”

“밀러 중령과.”

“응?”

고개를 연거푸 끄덕이던 유림이 움찔하며 눈을 치켜떴다.

그가 비스듬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초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짐짓 못마땅한 기색으로.

“잘 때도 ‘밀러, 밀러!’ 하면서 잠꼬대를 하던데.”

“그야 몇 년이나 못 봤으니 그렇지.”

“잠꼬대를 할 정도로 보고 싶었어요?”

“그거야 밀러는 가족이고, 오빠고, 상사고, 또…….”

“오빠?”

유림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케이가 이성을 잃은 채 웃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오빠 얘기를 한 적 있었죠? 나는 내심 내 얘기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이럴 때는 왜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바로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유림은 난감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내가 아니라 마이클 밀러 함장 얘기더군요.”

“언제는 아빠 같은 오빠 따위 되기 싫다며?”

유림이 쏘아붙이자 생긋거리던 그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이브.”

나직하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유림은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네 눈길이 잠시 머무는 물건 하나에도 질투가 나.”

“그래서 좋아.”

유림이 배시시 웃으며 곁눈질로 덧붙였다. 케이는 미간을 세우고 눈치를 보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럴 땐 한없이 어린 그녀였다. 언제쯤 알아줄까? 이 절박한 마음을.

“난 온종일 머릿속으로 널 범하는 상상을 해. 세상을 다 멸망시켜 버린 뒤 너와 나만 존재하는 행성 속에서 영원히, 정신이 나갈 때까지, 네가 미쳐서 헐떡이며 울부짖을 때까지 그렇게 서로의 몸을 섞으며 교접하고 싶다고…… 그런 광기 어린 생각을 해. 이브는 이런 내가 싫을까?”

유림의 눈이 멍하니 커졌다.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창백해지는 그녀를 보며 케이는 금세 후회 어린 눈초리를 했다.

“지금 한 말은 잊어도 돼. 괜한 헛소리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핏기없는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 이브.”

“…….”

“네가 존재하던 순간부터 나는 매 순간 매초, 널 숭배하며 기다렸어. 사라의 품에 안겨 세상 밖으로 나온 너를 처음 본 날 깨달았지. 나는 오로지 너를 만나기 위해 그 먼 여정을 날아왔다는 것을. 이 행성에서 날 묶어 둘 수 있는 유일한 중력은 너뿐이라는 것을. 나는 네 권속이 될 운명이었고, 너를 향한 내 감정은 누구보다도 간절하고 절실하지만…… 그만큼 널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는 한없이 무자비하다는 뜻이기도 해. 내가 인간적일 수 있는 건 오직 널 포함한 범위 내뿐이니까.”

아담.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만큼은 그도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를 그 울타리에 가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브뿐이었다.

“부디 네가 이런 날 멸시하지 않았으면 해.”

그의 한숨이 부드러운 가슴 언덕 언저리에서 혜풍처럼 머물렀다. 유림은 지친 듯 이마를 맞대고 툭 기대는 케이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걱정 말라는 어조로 속삭였다.

“나와 아담 사이에 그려진 궤도는 무엇으로도 끊어 놓을 수 없어.”

그는 그녀의 연실에 묶인 조각달이었다. 그녀의 삶의 조석은 그의 인력 없이 일어날 수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서로가 서로를 휘어감은 채 뿌리를 박고 끝없이 뻗어 나가는 연리지처럼.

케이는 조금 안심한 듯 낮게 웃었다. 매 순간 그녀의 사랑을 확인해야만 단비 같은 안도가 찾아오다니, 불치병에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내 바람은 오직 하나뿐이야. 이브를 위한 낙원을 짓는 것. 이번에야말로 실현시키고 싶어. 서로가 서로를 안고 광활한 시간을 부유할 수 있도록…… 영원히, 우리 둘만의 낙원 속에서.”

그의 말에 유림은 마음이 뒤숭숭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걸까?’

구름 위를 떠다니는 행복에 휩싸여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매일 이어지는 그의 달콤한 키스와 쾌락을 안겨 주는 손길, 그 모든 것이 머릿속을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녹여 버린다.

하지만 어디선가 불길한 그림자 하나가 개미처럼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등 뒤의 모골이 송연한 느낌. 일말의 감각이 가슴 한편에 압정처럼 남아서 불안감을 선사한다.

‘이렇게 시시한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을 때야? 지금 이 순간에도 남태평양에서는 피 튀기는 접전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적막한 허공 속에서 ‘핏’ 하고 뉴스 속보가 떠올랐다. 안드로이드 리포터 하나가 에덴 타워 앞에서 격앙된 음성으로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이 낙원의 새 관리자 후보로 위즈덤의 대표인 알렉스 아브라함을 추천했습니다. 알렉스 아브라함은 스타시티의 대니얼 아브라함 회장의 독자이자 유일한 상속자로서 황금의 바벨탑 내에서 솔로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입니다. 그는 그간 기억의 도시에서 실질적인 실세로 군림하며 사업가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온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케이에게 안겨 있던 유림은 굳은 얼굴로 허공에 뜬 화면을 쳐다보았다.

“저게 무슨 소리야? 솔로몬이 평의회에 들어갔다고?”

겨우 사나흘 남짓이었다. 이곳에서 그와 함께 짧은 행복을 만끽하는 동안, 낙원에서는 명실상부 권력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요하던 거실의 정적을 깨뜨린 뉴스 속보는 어스름한 실내에 불편한 빛을 발사했다. 타이탄이 며칠 전에 기록해 둔 인터뷰 영상이었다.

─ 아, 안녕하십니까? 나, 나츠 시게노입니다…….

불안에 떠는 눈동자로 서 있는 나츠와 그 옆에서 웃고 있는 우리야의 모습이 보였다. 반대편에는 흡족한 눈빛으로 서 있는 조셉 에반스도 있었다. 차분한 얼굴로 지켜보던 케이가 입술을 열었다.

“솔로몬의 짓이에요.”

우리야 세르게이는 저런 섬세한 그림을 그릴 인물이 못 된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그는 전투 전략이라면 몰라도 여론 몰이와 감정 호소에는 문외한일 터.

“이게 다 대체 무슨 소리야? 새 관리자 후보 추천이라니? 엘 카인은 어떻게 된 건데?”

─ 관리자인 엘 카인은 현재 잠적한 상태로 행방이 묘연합니다.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군부대를 소집하고 그를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평의회에서는 엘 카인을 관리자에서 해임하는 안건이 심의 중인데, 제인 왓슨이 부재라 사실상 이미 해임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관리자 후보로는 우리야 세르게이와 알렉스 아브라함 두 사람이 물망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죽었잖아! 설마…… 클론이야?”

유림이 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불안한 눈동자가 낭패를 예감한 듯 동요하고 있었다.

케이는 향긋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손으로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로운 미소를 내보인 그는 유림과 달리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솔로몬이 결국 평의회를 장악했다는 의미죠.”

역시 저 남자의 목표는 낙원 그 자체였다. 주민들을 상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었을 뿐, 우리야 세르게이도 나츠도 모두 본인의 인기몰이를 위한 도구였다.

“보통 수완가가 아니에요. 델타의 대항마로 만든 병기형 안드로이드를 봐요. 공중 정원 테러 사건 때 구조대로 슬쩍 투입하더니, 낙원을 지키기 위한 수호대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잖아요. 안 그래도 기존 군부에 실망한 주민들이에요. 결국 다들 안드로이드를 로스티아벤의 병력으로 쓰는 것에 찬성하게 될 거예요.”

교활하지만 배짱이 두둑한 자였다. 경험도 연륜도, 그에 관한 지식과 전략도 최고 수준이었다. 철두철미한 데다가 비정하고 참신하기까지 한데, 위즈덤의 대표로서 ‘AI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남자는 인간이지만 유일하게 안드로이드를 이길 수 있는 두뇌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그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빚은 칼날을 동족인 인류를 향해 겨누리라.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큰 적은 엘 카인이 아닌 솔로몬인지도 몰라요.”

식은 커피를 내려놓은 케이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거워진 눈빛만큼이나 그의 목소리도 한층 더 차갑게 내려앉았다.

“저 남자는 스스로 진화해 이 행성의 지배자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느닷없이 외계에서 들이닥친 이들의 전쟁에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을 거예요. 이 남자는 일족의 번영을 바라거나 거대한 업적을 세워 인류에게 인정받는 것엔 관심 없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이고, 오로지 본인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 좁고도 깊은 샘을 가지고 있죠. 우리들이 지닌 생물학적인 차이에 관해 잠시 흥미를 보였을 수도 있지만 본인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순식간에 효용 가치를 따진 뒤 대비책을 세워야 할 적으로 간주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게 병기형 안드로이드들인 거죠.”

유림을 케이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솔로몬을 분석해 내는 그의 모습에 새삼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는 왓슨 3세와 스마트 더스트가 있는 로스트 헤븐에 본능적으로 이끌려 왔어요. 인류의 지능 수준을 뛰어넘는 테크놀로지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온 거죠. 엘 카인마저 저 남자와는 한 번도 정면 대결을 벌인 적이 없어요. 그만큼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건데…… 저자가 흥미를 가질 만한 요소로 접촉해 보는 게 좋겠어요.”

“흥미를 가질 만한 요소?”

케이는 유림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그의 눈동자가 웬일로 불안하게 물들어 있었다. 일렁이는 눈빛에는 품 안의 그녀만큼은 절대 지켜 내겠다는 각오가 서렸다.

“워낙 노련한 상대라 웬만한 미끼로는 걸려들지 않을 거예요.”

그는 유림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 정면 인터뷰 영상에 캡처된 조셉 에반스의 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알림】

미확인 물체1가 접근 중입니다.

대응하시겠습니까?

탐색 · 공격 · 방어

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체크했다. 정찰기인가? 무인 드론 같아 보이는데 어디서 보낸 거지?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드론은 빠른 속도로 저택 현관을 향해 날아오더니 뭔가를 툭 떨어뜨리고 다시 상공 속으로 사라졌다. 불가시 모드로 변하는 드론을 쳐다보던 케이는 현관으로 나가는 유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장미꽃 한 송이가 현관 앞에 떨어져 있었다. 앙상하리만큼 얇은 줄기에 솟아난 가시들이 사시나무처럼 바람에 몸을 떨었다. 그 속에 붉게 오므린 장미 봉오리는 피처럼 검붉은 빛이었다.

허리를 숙여 장미를 주운 유림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케이가 커피 잔을 든 채 편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의혹을 품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나 아니에요.”

그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헤벨의 장미인가요?”

유림은 장미 줄기를 잡고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시니컬하게 답했다.

“임무야.”

“데드캣에게?”

“응.”

그녀는 장미 꽃잎 하나를 톡 떼어 내며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유림이 이브란 걸 알고 있으니까.”

“누가?”

“누구겠어요?”

그 순간 유림의 뇌리에 메리의 목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 마이클은 그런 일들을 막고자 당사자인 너에게조차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했을 거라 생각해. 네 정체는 스스로도 모르는 편이 더 안전했을 테니까.

“밀러가 보낸 거라고?”

인상을 쓰며 묻는 유림에게 케이는 생긋 웃었다.

“아마 전 세계에서 이브가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졌겠죠. 그래도 내 예상보다는 훨씬 늦었네요. 헤벨의 AI 정도면 정보력과 기술력 면에서 연맹군 최고 수준일 텐데.”

최고급 과학 기술을 가지고 고작 이렇게밖에 사용하지 못하냐는 듯 한심하다는 어조였다. 당사자인 밀러나 요한 제이콥스 대위가 방긋거리며 이죽거리는 케이의 표정을 봤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만큼 저 조각상 같은 남자는 가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오만하고 얄밉다.

전에 누가 그랬더라? 헤벨의 인공지능인 아벨은 왓슨 3세와 견주어도 될 정도로 뛰어나다고 했다. 암암리에 도는 소문이지만 왓슨 3세와 아벨을 만든 자가 실은 동일 인물이라면서.

익명의 과학자 K.

유림은 그 정체불명의 엔지니어가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란 사실을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그녀는 의뭉스럽게 웃고 있는 케이의 가슴팍에 장미꽃을 던지듯 안겨 주었다. 얼떨결에 장미를 받은 케이는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유림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유림이 타이트한 검은 전투복 위로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찰랑이며 등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이의 투명한 눈동자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갈 거예요?”

현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림은 거실 벽면에 여전히 떠 있는 나츠의 인터뷰 영상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결정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가야지.”

케이의 눈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유림은 허벅지에 전투 장비를 착용한 뒤 군화를 신었다. 전투 장갑까지 착용한 그녀는 나붓나붓 걸어 그의 앞에 마주 섰다.

“같이 가자.”

그녀는 커피 향이 도는 그의 입술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나랑 함께 가 줘, 케이.”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커피 향이 묻은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맺혔다.

돌아가자. 수면 밑의 방주, 천사의 함정, 수많은 별칭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보금자리, 헤벨로.

* * *

─ 이게 말이 됩니까? 고인을 추모해야 한다느니 할 때는 언제고, 명실상부 죽은 사람의 대용을 끌어다가 지금 뭐하는 겁니까?

핏발 세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멜리사 클라크 의원이었다. 그녀의 비난에 대회의실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오늘 회의에 참석한 평의원 수는 총 일곱 명.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비난 어린 시선에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자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멜리사의 시선은 자연스레 정중앙에 앉아 있는 우리야─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클론─에게로 향했다.

─ 대용이 아니라 본인입니다.

조롱하듯 차분하게 웃으며 답하는 그의 모습에 멜리사는 소름이 돋았다. 정녕 다들 상관없단 말인가? 아무리 동일한 DNA에 본체의 기억을 가진 몸이라 해도, 그는 절대로 우리야 세르게이가 될 수 없었다.

─ 클라크 의원께선 교회에 다니신다고 했던가요?

그녀는 붉은 정장의 깃을 고치며 흘끗 중앙 왼쪽 자리를 쳐다보았다. 원래 빈센트 의원의 자리였는데 어느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저 남자의 차지가 되었다.

알렉스 아브라함.

솔로몬이라는 황금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는 삼십 대의 말끔한 백인 남성이었다. 금발에 벽안의 조화는 이지적이고 엘리트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저 외모에 친절하지만 인간미 없는 미소와 나무랄 데 없는 매너까지 탑재하니, 꼭 최고급 사무관용 안드로이드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빈틈없지만 이질적인 온기. 인간의 혈관을 모방한 그들의 회로 속에 붉은 피가 아닌 하얀 수액이 흐르는 것처럼.

─ 제가 교회를 다니는 게 지금 이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멜리사가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 제가 종교인이라서 클론인 세르게이 총사령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 꼭 그런 의도로 언급한 건 아니었습니다. 종교계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저희 뉴 라이프 프로젝트의 회원이신 분들은 많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생의 관계죠.

─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모토입니다. 상생이요!

빈센트가 기립 박수라도 칠 모양새로 동의하고 나서자 다른 의원들도 눈치를 살핀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힐끔거리는 그들의 시선 중심에는 아까부터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이작 라이트가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야의 오른편에 앉은 채, 몇 가닥 없는 수염과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사색에 잠겼다.

아이작은 우리야가 없는 동안 사실상 의회의 의장 역을 해 온 인물이었다. 이제는 늙고 간사한 너구리에 불과했지만 그의 연륜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멜리사는 내심 그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기대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그녀의 메일함에 누군가 새 메일을 보냈다는 알람이 떠올랐다. 긴급한 사항임을 표시하는 빨간 메시지 창이 깜빡거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멜리사는 곁눈질로 다른 의원들을 조심스레 쳐다본 뒤 조용히 메일함을 열었다.

【기밀문서】

뉴 라이프 프로젝트의 관련인 명부

발신인 ‘알 수 없음’으로 보내진 문서는 위즈덤의 수명 연장 프로젝트인 뉴 라이프의 전체 회원 명단이었다. 연도별로 가입된 사람들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빽빽이 기입된 게 보였다.

빠르게 훑어내리던 멜리사는 가장 최근에 신청한 회원 목록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목록을 주르르 내리던 그녀의 눈이 멈칫 멈췄다. 그리고 이내 분노와 실망으로 커진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명단 제일 마지막 줄에 적힌 이름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아이작 라이트 의원이었다.

그사이 그녀를 제외한 다른 평의원들 사이에서는 비밀스런 익명의 메시지들이 오가고 있었다. 평소 클라크 의원이라면 치를 떨던 빈센트 의원이 흘끗거리며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저 여자, 진짜 교회에 다니는 겁니까?」

「아까 발끈하는 거 못 보셨습니까? 저 여자 가슴엔 의회 배지가 아니라 십자가를 달아 줘야 해요.」

「레드 클라크67)는 램지 왓슨 회장의 추천으로 낙원에 왔잖아요.」

「왓슨가가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지 않습니까? 그걸 이용해서 접근했겠죠, 뭐.」

「쯧, 교활한 암캐 같으니!」

그녀만 따돌린 채 저들끼리 단체 메시지로 쑥덕거리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설령 멜리사 본인이 눈치를 챈다 한들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매번 참석 인원이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평의회에서 파벌이 나뉘고 한 명을 따돌린다는 게 유치했다. 무엇보다도 22세기에 돌입한 마당에 여전히 남성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몇몇 의원들의 횡포가 제일 우습고 한심했다.

그녀는 그런 그들을 혐오하고 멸시했으며, 반대로 그들은 그런 그녀를 고지식하고 사리에 어두운 여자라고 여기며 무시했다.

줄곧 상황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 클라크 의원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다들 생각이 같을 수만 있겠습니까? 모두가 동조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갈등 없는 화합이란 불가능하죠. 그런 걸 이상으로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독재자일 겁니다. 혹은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세뇌당한 허수아비 지도자겠죠.

알렉스 아브라함이었다.

─ 세상을 보이는 대로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또한 그대로 보이게 해서도 안 됩니다. 지도자라면 거울 이면과 수면 아래를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통합이란 그런 겁니다. 우리는 대중들로 하여금 그늘 속에서 소외받는 이들도 소외받지 않고 있다고 여기게 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본분이지 않겠습니까?

갓 의원이 된 젊은 정치인은 누구보다도 노련했다. 평의원들 중 가장 원로인 아이작보다도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 저는 기억의 도시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 왔습니다. 낙원의 지리적 요점만 이용했을 뿐, 사실상 낙원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었죠. 낙원의 주민들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돈을 벌고 있었을 뿐입니다. 현 낙원은 내부의 썩어 문드러진 문제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어요. 최근 사건들로 인해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덕을 본 게 있었죠. 그간 철저하게 폐쇄적이었던 이곳이 외부에 개방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지금이야말로 낙원이 굳게 걸어 잠갔던 빗장을 풀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외부에서 뽑힌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 외부자가 당신이라는 겁니까?

멜리사가 심드렁한 얼굴로 빈정대며 물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도발에도 흥분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웃었다.

─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우리가 봐야 할 ‘낙원의 이면’ 중 하나입니다.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수요가 없는 공급이란 없어요. 시장 경제의 기본 원칙이죠. 대중은 클론 복제를 통한 제2의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클라크 의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바람을 올바르고 공정하게 실현시켜 주는 것입니다. 뉴 라이프 프로젝트는 앞으로 낙원을 대표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될 겁니다. 제 계획은 바로 로스트 헤븐을 영원한 삶을 꿈꾸는 이들의 파라다이스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니까요.

아이작 의원은 주름진 눈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선 호쾌하게 웃었다. 그가 원하는 답이라는 듯 아주 흐뭇한 기색이었다.

─ 거참, 젊은 친구가 말 한번 잘하는군.

─ 의원님께 많이 배우고 있지요.

멜리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속으로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를 비웃었다. 밀거니 당기거니, 벌써부터 알콩달콩 야합질이다.

─ 정치인은 말을 잘해야 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움츠리지 말게. 행여 실수를 하더라도 자네의 ‘이름’은 우리가 지켜 주겠네. 대신 자네는 우리의 ‘얼굴’이 되어 주게. 그리고 뒤에서 함께 손발을 맞춰 나가면 되는 걸세. 그게 정치네.

여우 같은 놈.

빈센트 의원은 조소를 날리며 턱을 괴었다. 의원석을 꿰차자마자 아이작의 신임을 얻어 내다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솔로몬일 때부터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이 정도로 처세술의 대가였을 줄이야! 달창한 언변으로 상대의 혼을 쏙 빼놓는 능력이 대단한 남자였다.

─ 평의회는 알렉스 아브라함을 새 관리자 후보로 정식 추천합니다.

아이작의 공천 발언에 의원들이 모두 기립 박수를 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환하게 불 켜진 대의회실에서 홀로 어두운 조명을 받고 있는 건 오직 멜리사뿐이었다.

아니, 한 명 더 있긴 했다.

늘 불 꺼진 자리, 텅 비어 있는 의원석. 정기회의든 비정기회의든 단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는 명예 의원직의 주인.

어차피 저자도 결국 저들과 동조할 게 뻔했다. 대세에 재빠르게 몸을 싣는 것, 그게 저들이 말하는 ‘올바른 정치’였으니.

멜리사는 벌써부터 축배를 드는 분위기의 의원들을 쳐다보며 환멸 어린 눈초리로 고개를 외면했다.

알렉스 아브라함의 인기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일찍이 공중 정원 테러 사건 때 신형 안드로이드들로 주민들을 구한 일화는 그를 영웅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가면을 벗은 외모마저 출중하기 그지없으니, 그는 순식간에 여성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세련된 말솜씨로 엘리트층의 호감마저 얻어 냈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낙원의 주민들은 이제 모이기만 하면 아브라함 의원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다들 새로운 영웅의 출현에 들떠 간과한 점이 있었다.

알렉스 아브라함, 나무랄 데 하나 없는 그의 완벽한 이미지는 전 관리자였던 엘 카인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혜성처럼 등장해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왓슨의 젊은 CEO와 그의 행보는 굉장히 흡사했다.

“총사령관님!”

S관 대회의실 앞에서 대기 중이던 셰인은 우리야를 향해 거수경계를 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요즘 우리야 세르게이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열리는 평의회 때문에 S관에 자주 출몰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대회의실로 다원 접속을 하는 의원들과 달리 의장인 우리야는 늘 에덴 타워의 회의실로 직접 출석을 하기 때문이었다.

로스티아벤 총사령관으로 복귀한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 빛나는 금색 별 네 개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필란 중위, 자네가 있어 든든하군.”

“영광입니다.”

잔뜩 긴장한 자세로 대답하던 셰인의 시선이 멈칫 우리야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그의 등 뒤로 또 다른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우리야도 돌아서더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아브라함 의원, 이쪽은 셰인 필란 중위입니다. 특별보안대의 지휘관을 맡고 있습니다. 실력이 아주 출중한 친구입니다.”

어깨를 두둑하게 잡는 손이 느껴졌다. 셰인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우리야를 쳐다보았다. 그를 자랑스럽게 소개한 우리야는 쐐기를 박듯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의원님과 제 곁에서 많은 도움이 될 사람이죠.”

셰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전의 그라면 환호성을 지를 법한 상황이었다. 총사령관의 줄을 잡았으니, 앞으로 고속 승진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서늘한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솔로몬은 누군지 알겠다며 빙그레 웃었다.

“게이트에서 연맹군의 아크레인을 발견했다던 장교시군요?”

“셰인 필란 중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필란 중위께서는 그 시각에 어쩐 일로 그곳에 계셨던 겁니까?”

“예?”

셰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솔로몬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기웃거리며 따라붙었다.

“사고가 발생한 건 굉장히 늦은 시각이었던데, 그냥 우연히 지나던 건 아니었을 테고…….”

발밑을 응시하던 셰인은 초조한 듯 입술을 사리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야가 굵은 목소리로 대신 입을 열었다.

“당시 필란 중위는 비밀리에 내부 수사를 맡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내부 수사요?”

“이 이상 자세히 언급하는 건 군기 누설에 해당해서 말입니다. 의원님께서 양해를 좀 해 주십시오.”

“제가 너무 꼬치꼬치 캐물었군요.”

솔로몬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물러났다. 곁눈질로 셰인과 눈을 마주친 우리야는 턱짓으로 그만 가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멍하니 서 있던 셰인은 얼떨결에 거수경례를 취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허둥지둥 에어쉽 승강장으로 온 셰인은 식은땀을 훔치며 비행정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 어서 오십시오, 셰인 필란 중위님.

“모래의 도시로. 빨리 이동해.”

에어쉽이 출발한 후에도 그는 창밖을 향해 불안한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 정거장 SC03으로 목적지가 설정되었습니다. 약 112초 후에 도착합니다.

그는 피곤한 눈을 주무르며 시트에 뒷목을 기댔다. 감은 눈 너머로 두통이 찡 하고 느껴졌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날 목격한 광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형무소 사건 이후, 그는 줄곧 케이에 대한 의혹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밤잠을 설쳤다. 심증은 짙은데 물증이 없는 상황. 결국 셰인은 그를 몰래 감시하기로 결심했다.

동트기 직전 새벽, 그날도 셰인은 꾸벅꾸벅 졸며 유림의 사택 앞을 지키고 있었다. 에어쉽 급발진 소리에 잠이 깬 그는 다급하게 출발하는 붉은 에어쉽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낯익은 기체였다.

‘형무소에서 봤던 에어쉽이잖아?’

그는 부랴부랴 뒤를 쫓았다. 들켜도 상관없었다. 만일 애덤슨 중사가 진짜 붉은 눈의 남자라면 자신이 뒤를 밟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날 애덤슨 중사는 확실히 이상했다. 항상 철두철미하던 그가 그렇게 쉽게 미행당하고, 목격자를 만들고, 수많은 증거를 남겼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일부러 그랬거나 혹은 그만큼 정신없던 상황이란 얘기다.

‘혹시 꿈을 꾼 건 아닐까?’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아크레인을, 저 은색 비행정을 집어던졌어? 아니, 발로 찬 건가? 아무튼 저걸 허공에서 럭비공처럼 날려 버렸다.

사실대로 진술한들 과연 누가 믿어 줄까? 그래, 왓슨의 눈이 봤을 거야. 다 기록되었을 거라고!

그러나 그의 에어쉽은 ‘시스템 오류입니다’ 라는 말만 반복할 뿐, 왓슨과의 연결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정지한 채 꼼짝 않던 에어쉽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먹통 상태에서 벗어났다.

물론 케이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찌그러진 채 박살 난 아크레인은 누가 봐도 불시에 습격을 맞은 모습이었다. 때문에 군부는 지금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헤벨은 로스티아벤으로부터 급습을 당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낙원과 헤벨은 일촉즉발인 판국이었다.

세르게이 총사령관의 사인死人 역시 그러하지 않았는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공격이라고.

비로소 모든 퍼즐의 아귀가 딱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악마의 초상화를 완성하고 만 듯한 두려움이 일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게 아닐까?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안 게 아닐까? 그동안 애덤슨 중사가 정체를 숨긴 것은, 오히려 그의 목숨을 살려 주기 위해 그런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을 알면 죽여야 할 테니까.’

뇌리에 스친 깨달음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SSF 팀의 마크를 부착한 황토색 에어쉽은 바람을 가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모래의 도시에 도달했다.

셰인은 승강장에 내리자마자 거침없이 이동했다. 그가 미간을 굳힌 채 걸음을 향한 곳은 모래의 도시 하층부였다. 모래의 도시의 구조는 눈 감고도 훤한 그는 지름길로 빠졌다. 오늘따라 고요한 ‘울부짖는 인어’를 지나 미들 타운으로 이어지는 슬럼가를 지나면 최종 목적지인 화이트 채플 앞이었다.

출입구를 지키던 문지기가 굽은 등을 펴더니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셰인은 어깨를 으쓱하고선 문을 통과했다. 평소 여기저기 두둑한 뒷돈을 쥐여 주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화이트 채플의 내부는 텅 비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썰렁했다. 아무리 이른 낮 시간이어도 그렇지 고스트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이곳이 이렇게까지 한산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멀리서 그를 본 몇몇 남자들이 쇠붙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쑥덕거렸다. 셰인은 긴장한 얼굴로 잠시 숨을 골랐다. 녀석들 팔뚝에는 성배 모양의 문신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오베론 소속인가?’

덩치 큰 사내들은 팔짱을 낀 채 그를 주시했다. 인상 쓴 눈초리들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였다. 식구들을 쏴 죽인 원수 같은 놈이 제 발로 뜨다니 이게 웬 떡인가 하는 표정이다.

그들은 눈짓을 하며 어디론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구석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고스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등장한 이들은 셰인을 보자마자 험상궂은 눈초리로 돌변했다.

셰인은 숨을 죽인 채 총자루를 쥐었다. 그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서 살기가 느껴졌다.

블랙 호크, 브루클린의 성녀, 애덤슨 중사.

사라진 세 사람이 함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들의 유통망이자 거처 역할을 할 만한 녀석은 마찬가지로 행방이 묘연한 유령의 군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단서를 찾을 만한 장소는 화이트 채플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무모한 계획이었나? 설마 특보대 지휘관인 자신을 정말 공격할 셈인가?

“중위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뒤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셰인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겨누며 돌아섰다. 흠칫 놀란 인영이 양손을 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셰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드레이크? 네놈이 여긴 웬일로…….”

늑대 떼처럼 다가오던 성배 문신의 남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확인했다. 딱 봐도 특수부대 대원인 드레이크가 등장하자 다른 일행이 더 있는 건 아닌지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이때다 싶은 드레이크가 셰인의 뒷덜미를 낚아챈 뒤 출구로 달렸다. 셰인은 보릿자루처럼 질질 끌려가며 버둥거렸다.

“너 이 새끼, 뭐하는…….”

“여기서 개죽음이라도 당하고 싶으신 겁니까? 잔말 말고 따라오십시오”

드레이크가 버럭 소리치자 셰인은 입을 꾹 다물고 삐죽거렸다. 성배 문신의 남자들이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너 아주 정 교관이랑 말투가 똑같아져 간다?”

“이상한 말씀 마시죠.”

“거의 앵무새 수준이야. 그 여자야 원래 상관이고 나발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이니 그렇다 쳐도, 새끼야!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지금 상황이 이러니까 한 번만 눈감아 주는데…….”

출입구에 다다른 드레이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잡고 있던 셰인의 뒷덜미를 놓았다. 바닥에 쿵 엉덩방아를 찧은 셰인이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바지를 털고 일어섰다.

겁먹으면 말이 많아지는 스타일인가 보군. 종알종알 뭔 말이 그렇게 많은지.

드레이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유림이 평소 셰인을 어패류 수준이라 칭하며─마른 멸치 새끼라고 부를 때도 있다─ 짐승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놈이라고 비웃던 게 떠올랐다. 역시 그녀의 논리는 언제나 옳다. 필란 중위 같이 덜 떨어진 종자들은 어항 속에 처박아 넣고 사육하며 조련해야 한다던.

“지금 화이트 채플은 무법천지입니다. 회색 기사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지금 이곳에는 최소한의 규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중위님께는 앙심을 품은 자들이 많으니, 모래의 도시 근처에는 당분간 얼씬도 하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셰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식자의 위치에서 먹잇감으로 내려오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개미굴 같은 모래의 도시 하층부는 미들 타운에 위치한 화이트 채플을 경계로 주거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낙원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로스티아벤의 날고 기는 장병들조차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셰인도 마찬가지였다. 모래의 도시 치안 담당으로 수없이 미들 타운을 들락거렸지만 이렇게 깊숙이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승강장은 반대편이잖아.”

얼떨결에 따라온 셰인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새 주위는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어둠 속이었다. 전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은 길에는 비상등은커녕 표지판 하나도 없었다. 군화 밑에서 나오는 라이트 조명만이 그나마 살길이었다.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철골 소리에 식겁하느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 워치는 ‘신호 없음’을 알리며 회색 화면으로 돌입한 지 오래였다.

드레이크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혼자 오셨습니까?”

“몇 번을 말해, 혼자라니까? 애초에 부대에 남은 팀원들이 있어야지. 이것들이 다 죽어 버려서…….”

셰인은 두리번거리며 스마트 워치의 라이트를 켰다. ‘찍’ 소리와 함께 쥐 한 마리가 바닥을 내달렸다. 당황한 그는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키이이익!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얼어붙은 채 호흡을 멈췄다. 냉큼 총을 들었다.

“방금 들었어?”

“뭘 말씀이십니까?”

드레이크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까무잡잡한 그의 피부는 짙은 암흑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방금 저쪽에서 뭔가가 울부짖는 소리 같은 게…….”

어둠 속에서 동공이 보인다. 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매끄러운 눈동자가 아주 맑고 또렷했다.

애덤슨 중사의 눈동자도 저렇게 강렬했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시선에 사로잡힌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붉은 빛은 아니지만 흡사했다. 앤더슨 저 녀석도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다.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슬슬 한계인가 보군. 다들 배가 많이 고픈 모양입니다.”

셰인은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어둠 속을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캄캄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드레이크의 눈자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시궁창에서 날 법한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셰인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얕은 웅덩이라도 밟았는지 찰팍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지?’

그는 스마트 워치의 라이트로 발밑을 비췄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바닥 여기저기에 묻은 채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셰인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두리번거리던 그는 경악한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살점들이 으깨진 고깃덩어리처럼 바닥에 산개해 있었다.

‘빌어먹을!’

뭉개진 쥐들의 사체였다.

호흡이 거칠어진 채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형무소 폭발 사건 때 탈출했던 델타들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소식은 들었다. 도망친 그녀들은 모래의 도시 곳곳으로 몸을 숨겼던 모양이다.

미들 타운은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개미굴이었다. 그 말인즉, 무전 장비에만 의존해서 포획 팀을 꾸려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STF 요원들이어도 사령 본부의 실시간 지시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 소위 정도라면 몰라도.

델타의 본거지인 맨해튼에서도 혼자 날뛰는 게 주특기였던 그 여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입대 테스트 사건 때도 홀로 쳐들어가 속 시원하게 길을 뚫고 나온 장본인 아닌가? 그녀와는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지만 유림의 실력이 발군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있었다.

“델타야. 델타가 주위에 있어.”

셰인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느 방향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드레이크에게 라이트를 켜 보라고 명령했다.

“빨리 좀 해 봐!”

재촉하며 짜증내던 그는 바로 뺨에 와 닿는 숨결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뭐야, 옆에 있었어?”

드레이크였다. 어두워서 통 보이지 않는데 이 녀석은 눈도 밝았다. 그리고 기동력도 우수했다. 어디서 이런 녀석을 데려온 거야? 정 소위는 복도 많군.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던 셰인은 헉 소리를 내며 총자루를 움켜쥐었다. 귀에 입김이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와 있던 드레이크가 ‘쉿’ 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셰인도 그의 눈초리를 따라 천장을 응시했다.

뚝.

추르릅.

입안으로 꿀꺽 삼키는 소리와 함께 뜨끈한 점액이 뚝 떨어졌다. 셰인은 멍한 얼굴로 제 뺨을 매만졌다. 손바닥에 묻은 끈적끈적한 액체에서 침처럼 시큼한 향이 느껴졌다.

총구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덕분에 잡은 총이 아래위로 심하게 흔들리다가 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총자루가 철골에 부딪치며 ‘탕! 타당!’ 하고 맑은 쇳소리를 튕겼다.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지자 쉭쉭거리던 그림자가 이쪽을 홱 쳐다보았다. “끼엑!” 하고 울부짖은 그림자가 천장에서 쿵 뛰어내렸다. 흥분한 그녀가 바닥을 꼬리로 ‘탁!’ 치며 숨소리를 냈다.

셰인은 몸이 공포로 얼어붙는 걸 느꼈다. 목덜미 뒤로 크르렁거리는 습한 입김이 닿고 있었다.

두툼한 혓바닥이 목뒤 살갗을 핥아 내렸다. 먹잇감을 맛보듯 할짝이는 혀 놀림이 어깨선까지 눅눅하게 적셨다. 덜덜 떨던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아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눈꺼풀 사이로 피식 웃는 드레이크의 입매가 언뜻 보였다.

셰인은 손등으로 눈을 비빈 뒤 숨을 몰아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착각이었나? 공포심에 헛것을 본 게 틀림없다.

“너, 너 이 새끼…… 대체 정체가 뭐야?”

어둠 속에 보이는 드레이크의 눈자위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끼이이익! 키익, 키긱!

2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셰인은 굳은 얼굴로 주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점차 경악하며 커졌다.

무리 지어 몰려온 델타가 그와 드레이크 주위를 원으로 겹겹이 에워싼 채 모여 있었다. 그중에 가장 몸집이 큰 델타 두 마리는 드레이크의 발밑에 배를 바짝 붙인 채 엎드려 있었다.

드레이크는 해초처럼 엉킨 그녀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손바닥에 정수리를 비비며 기분 좋은 듯한 숨소리를 내쉬었다.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델타가 인간에게 복종하는 모습이라니.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드레이크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나츠 시게노.”

셰인의 눈이 흠칫 커졌다.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도록 좀 도와줘야겠어.”

“뭐?”

“현재 특별보안대가 보호 감시 중인 대상.”

“너 지금 무슨 개소리를…….”

버럭 소리치던 셰인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드레이크가 비딱한 눈초리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건데?”

셰인은 짐짓 반항적으로 되물었다. 어쨌든 자신은 그의 상관이었고, 지금 이 상황은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악몽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끔찍한 반란이다.

드레이크는 구릿빛 턱을 매만지더니 비스듬히 감긴 눈을 허공에 실었다.

“내 권속들은 말이야, 입실론과 달리 자아라는 게 좀 부족해.”

셰인은 곁눈질로 거친 숨소리를 내는 델타들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을 밝힌 스마트 워치 불빛이 헉헉거리는 그들의 턱밑을 어스름히 비췄다.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침 덩어리가 역겨웠다. 저 날카로운 엄니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이미 여러 차례 목격한 상태였다.

“그녀들은 때때로 내 말조차 듣지를 않아. 그만큼 본능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소리야. 그냥 여기서 마음 편하게 먹히고 죽는 걸 택하는 길도 있어. 어쩌면 그게 너한테는 더 명예로운 종결일지도 모르지.”

셰인은 멍한 얼굴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드레이크는 공허한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죽으면 허상처럼 사라질 명예와 자존심. 인간들은 왜 그런 부질없는 것들에 목숨을 바치는 걸까? 난 정말 모르겠어. 셰인 필란, 그대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리라 믿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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