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15/21)

Chapter 4

─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구렁, 내가 줄게요…….

타락은 일순간이지만 남는 후회는 영원하다. 하룻밤 그와 살을 섞고 나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는 모순의 집합체라는 걸.

남자의 생은 끝없이 깊었다. 그가 말했던 구렁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했다. 관계를 하는 내내 그녀는 아득히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질척질척한 어둠이 몸을 늪처럼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욕정과 애욕을 알았다. 그는 인간이 지닌 가장 날것의 본성, 그런 것들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열망을 파악했다. 어디를 후비고 벌려서 넣어야 할지, 또 어디를 까뒤집어 들여다봐야 할지, 그저 훑는 시선만으로도 눈치챈 듯 잘게 웃었다.

온몸이 흐느적거리며 녹았다. 남녀 간의 교접이란 육체가 부서지고 상대에게 흡수된 뒤 의식이 증발하는 것이다. 숨을 옥죄고 사지가 저릿해지는 쾌감. 그녀는 번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남자는 피를 좋아했다. 아마도 그건 그의 본성인 듯했다. 붉은색은 그를 흥분시키고, 어둠은 그를 진정시킨다. ‘피와 어둠을 섞으면 무엇이 되는 줄 알아요?’ 첫 관계 후 그가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내 그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더니 미약 에센시스57)를 물었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연기에 가물가물한 눈빛이 어렸다.

그에게 여자는 휴식과 놀이터였다. 곡선이 주는 풍만함과 촉촉하게 조여 오는 온기. 부드러운 풍미와 가녀린 혈관들. 간혹 그와 몸뿐만 아니라 지성의 쾌락도 나누는 이들이 있었다. 메리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그들의 대화는 종종 시큼한 향기 사이사이를 오갔다.

마지막 관계를 가진 후 그녀는 지쳐 잠에 들었다. 눈을 뜨자 남자가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쥔 채 사색에 잠겨 있었다.

“왜 안 자고 깨 있어요?”

“나는 원래 잠을 안 자요.”

“불면증? 아니면 생물적으로 아예 수면을 안 한다는 건가요?”

“가끔은 잠 비슷한 걸 청해 보지만 정확히 수면 중인 상태는 아니죠. 예전에 어떤 여자가 그러더군요. 옆에 누웠으면 잠자는 시늉이라도 해 보라고. 그때 이후로 가끔 흉내는 내 봅니다. 꽤 고집 센 여자였죠, 내 최초의 권속은.”

“최초의 입실론이라면…….”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금세 기억해 냈다. 티끌 하나 없던 피부와 어둠을 삼킨 눈동자, 밤하늘에 휩싸이는 듯한 머리칼. 어쩌면 그는 원래부터 흑발을 선호했는지도 모른다. 일본계의 아담한 여자는 유순하기보단 앙칼진 눈초리가 인상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유림과 닮은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이 좋아하셨나요, 그분?”

메리의 질문에 엘 카인은 쿡 웃었다. 그녀가 본 그의 기억 속 많은 곳에는 그 여자가 있었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과 잤지만 대부분이 단발성에 그쳤다. 제인 왓슨을 예외로 친다면 그가 장기간 연인으로 곁에 두었던 사람은 그 일본 여성이 유일했다.

온기가 남은 침대 위에 두 사람은 알몸으로 누웠다. 그는 그녀를 향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손으로 머리를 받친 카인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메리는 살그머니 가슴을 덮은 이불을 움켜쥐었다.

빛을 차단한 자주색 커튼과 크림슨 톤의 침대는 주인의 강박적인 취향을 보여 주었다. 검은 대리석 바닥 위에는 남자가 쏟은 와인과 크리스털 장식들이 붉은 성운처럼 번져 있었다.

이곳은 제단이었다.

낙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장 가파른 낭떠러지. 그리고 가장 깊은 절망이 기다리는 곳.

“인간은 마음에 드는 상대와 잠자리를 하죠. 우리도 비슷한 방법으로 구애를 합니다. 결국 호감이란 건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일 뿐이거든요.”

메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 과거의 잠자리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 이 상황을 일컫는 것일까?

“카인 씨는 늘 애매하게 말을 하시네요.”

“어차피 메리는 모든 걸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한 건 카인 씨였는데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메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메마른 채 건조한 웃음소리.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며 조롱하듯 웃는 곡선. 아마 저게 그의 진짜 미소인 모양이다. 그녀는 운 좋게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메리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였어요. 메리의 그 특별한 능력은 타고난 호기심 덕인 것 같지만…… 대개 호기심이란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거든요.”

그는 웃음기 남은 얼굴로 말했다. 말하면서 문득 뭔가를 깨달았는지 묘한 눈빛을 지었다.

“어쨌거나 누군가 나를 들여다본다는 게 생각보다 불쾌하진 않았어요.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예요. 메리와 이렇게 닿아 있는 것은 의외로 아주 편안하고 중독적이기까지 해요.”

수차례 관계를 맺은 밤이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별처럼 수많은 것들을 들었다. 그것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고요한 대화였다.

“어쩌면, 내가 메리의 구렁에 갇혀 버린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메리 역시 아주 의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손길이 편안했다. 모든 것은 단 하룻밤 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카인 씨는 왜 그렇게 많은 분들을 권속으로 만든 거죠?”

후회할 줄 모른다던 그는 본인의 구렁 속에 많은 이들을 끌어들였다. 거침없이 드러내는 욕망과 달리 그의 속마음은 늘 켜켜이 가려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를 들어앉힌 그 구멍 속에 무엇을 채우고 싶었던 것일까?

가슴 꼭지에 입술을 대던 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의 눈빛을 읽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메리는 궁금한 게 너무 많은 사람이군요. 내 기억 속을 들여다본 것만으로는 부족했나요?”

“보면 볼수록 알고 싶고,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더라고요. 카인 씨는 절 권속으로 삼고 싶으신 건가요? 후손을 갖기 위해서요?”

“아쉽게도 메리는 내 권속이 될 수 없어요. 권속을 뺏어 오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메리와 내가 아이를 갖는 건 이론적으로 가능해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메리를 임신시키거나 할 일은 절대 없을 터이니.”

“이브…… 때문인가요?”

그는 서늘한 눈으로 메리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서리 내린 듯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불편한 침묵 사이에 그가 긴 호흡을 내뱉었다.

“거기까지 들여다본 겁니까?”

“미안해요, 깊게 캐물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사과를 하면서 메리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그의 구렁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아마 그 심연에는 그가 모른다고 부정했던 감정들이 묻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이 그가 말한 타락의 밑바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갑자기 방 안에 왓슨의 보고가 떠올랐다.

─ 실례합니다, 아담.

“무슨 일이지?”

─ 헤벨의 함장이 조금 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일로 평의회는 오후에 이어 갈 예정이던 회의를 급작스레 연기했습니다. 오늘 회의에는 제인 왓슨 양께서도 예고 없이 참관을 하셨는데, 왓슨 양께서 의원님들에게 헤벨을 낙원의 독립 수사기관으로 승인하라고 강요하셨습니다.

그의 사적인 시간을 방해했기 때문인지, 왓슨은 영상과 사진을 빠르게 넘기며 간략하게 정리했다.

“잠깐, 방금 전 영상 다시 띄워 봐.”

카인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들었다. 그가 멈춘 곳은 밀러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장면이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카인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내가 알던 헤벨의 함장이 아닌데.”

─ 전 함장인 아서 밀러는 은퇴했고 그의 아들인 마이클 밀러 중령이 작년에 함장직을 이어받았습니다. 밀러 중령은 남태평양전대의 총사령관직도 겸하고 있습니다.

“아서 밀러의 아들?”

엘 카인의 입매가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천천히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메리가 알몸으로 앉아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친자식은 아닙니다. 입양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마이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저렇게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다니, 이십 년 넘게 그를 봐 온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건강에 큰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혹 낙원의 누군가가 그를 해하려 든 것일까? 그녀는 문득 든 생각에 엘 카인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가 마이클을?’

카인과 눈이 마주치자 메리는 흠칫하며 황급히 표정을 감췄다. 그는 화를 억누르듯 잔근육으로 꿈틀대는 뺨에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이고 있었다.

“왓슨, 헤벨의 함장에게 혹 연인은 없었나?”

─ 그런 가십 기사가 나온 적은 없습니다. 그간 사교계 여러 모임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본인이 모두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왓슨의 말에 그는 골난 어린애처럼 굴던 눈초리를 지웠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쾌한 기색이 만연했다.

왓슨은 밀러의 사진과 프로필 정보를 펼쳤다.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던 그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이클 밀러 중령이라. 설마 연맹군의 사령관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메리는 긴장한 채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두 사람을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정말 많이 닮았다. 피부색과 머리색, 눈매와 이목구비, 가만히 있을 때 풍겨지는 분위기라든지. 입을 연 순간부터는 딴사람처럼 돌변하지만.

그녀는 곁눈질로 침대 옆 협탁을 쳐다보았다. 연꽃 모양의 대리석 꽃병 아래, 미리 벗어 둔 흰 레이스 장갑 한 켤레가 보였다. 장갑 안에는 사샤가 준 금색 칩이 들어 있었다. 메리의 눈동자가 갈등하듯 일렁였다.

몇 분간 침묵하던 엘 카인이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날렵한 콧날 위로 그가 양손을 모으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복잡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메리는…… 연맹군 쪽 사람이로군요?”

양 가슴을 가리듯 팔을 모은 채 앉아 있던 메리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카리브 해처럼 푸른 그의 눈동자 속에 우울한 안개가 껴 있었다.

“내가 메리를 이용하려 했던 게 아니라, 메리가 나를 이용하려 했던 거였어요. 그렇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메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밀러 중령 말입니다. 그가 메리를 이곳에 보낸 거죠?”

“오해를 하신 듯해요. 저는 모르는 분인걸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턱 끝이 떨렸지만 애써 힘을 주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공허하게 물들었다. 왜 그렇게 실망한 표정을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 카인은 검은 대리석 바닥 위 붉은 성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메리가 나의 구렁이 되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말끝을 흐리던 그의 눈동자가 점차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쓴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구렁이 아닌 무덤을 파고 있었네요.”

돌연 메리의 어깨를 잡은 그는 그녀를 침대 위로 거칠게 밀어뜨렸다. 등을 대고 털썩 쓰러진 메리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초리에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메마른 감정에 젖은 얼굴이 버석거리며 웃었다.

“메리는 이런 걸 좋아하죠? 매춘부처럼 학대하듯 다뤄 주는 것 말이에요.”

“카, 카인 씨!”

“아니라고요? 이런 곳을 물어뜯거나 때리면서 박아 주면 엄청 흥분해서 교성을 부리잖아요. 더 해 달라고 흐느끼며 애원한 적도 있으면서…….”

그는 그녀의 가슴에 남은 보랏빛 멍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메리의 양 허벅지 안쪽에는 그가 벌릴 때 움켜쥔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엉덩이는 빨갛게 부어오른 채 생채기 사이사이로 핏방울이 맺혔고, 어깨와 목에는 거칠게 물어뜯긴 잇자국이 남았다.

“아마 그 녀석은 모를걸요? 메리가 이런 취향이란 걸.”

그의 서늘함 입김이 귓불을 스쳤다. 엘 카인은 헐벗은 가슴을 움켜쥐던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렸다.

“나를 봐요, 메리.”

시선을 회피했던 그녀의 앞에 그가 입술을 가져왔다. 메리는 혼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와 입을 맞추더니 거칠게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메말라서 까끌까끌한 입술에 피가 맺혔다.

마치 의식처럼 관계를 맺기 전에 반복적으로 하는 것. 별다른 전희는 필요치 않다. 붉은 피는 그를 순식간에 흥분시키는 각성제였다. 회색빛 섞인 연한 금발 사이로 천사가 희열 어린 미소를 지었다. 엘 카인은 천천히 몸을 겹치며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미카엘은 알고 있을까요? 메리가 이렇게 다리를 찢어 벌린 채 제 형과 맨살을 맞대고 있다는 걸.”

“……형?”

메리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봉긋 솟은 맨가슴은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부푼 채 멈춰 있었다.

“몰랐어요? 그와 난 쌍둥이예요.”

그녀는 벌린 다리를 맥없이 떨어뜨렸다. 충격으로 커진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르르 흔들렸다.

“딱 봐도 많이 닮지 않았나요? 메리도 날 보면서 계속 미카엘을 떠올렸잖아요. 물론 나도 그가 밀러 중령이란 사실을 몰랐지만.”

말도 안 돼. 마이클은 고아였다. 아서 밀러 함장은 그가 부모형제뿐만 아니라 고향도 없는 혈혈단신의 몸으로 헤벨에 왔다고 했다.

“생사도 모르던 동생을 메리 덕분에 찾았네요?”

그녀의 얼굴이 괴로움에 일그러졌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은 말도 잇지 못한 채 가쁜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쌍둥이라니, 그럼 지금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게 마이클의 친형 것이라고?

구역질이 쏟아져 나왔다. 미칠 것만 같았다. 허리에 딱 붙어 있는 그의 하반신을 밀어내려 해도 한 몸처럼 얽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더 꽉 잡으며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메리는 밀러 중령을 모른다고 했잖아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그렇게 충격받을 필요는 없어요. 그러지 말고 밤새 내게 안겨 황홀해하던 표정을 보여 줘요. 죄지은 얼굴보단 그 모습이 훨씬 예쁘니까. 게다가 난 이제 메리가 미카엘의 권속이건 말건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귓가에서 악랄한 속삭임이 조롱하듯 웃었다.

“메리는 이미 날 좋아하고 있잖아요.”

마지막 말 한마디가 심장에 못 박히듯 정곡을 찔렀다. 머릿속이 얼어붙는 것처럼 사고 회로가 멈춘 느낌이었다. 피맺힌 아랫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드나드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넋이 나간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맨살에 닿는 체온은 항상 정직했다. 다정함을 가장한 교활한 남자에게 그녀는 바보처럼 설레고 있었다. 서로 깊은 교류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육체적 교접보다 진한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다고 착각했다. 심지어 여태까지 엘 카인이란 남자를 오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의문마저 품었다.

메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가랑이 사이를 가렸다.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당당하게 부정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가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자 몸을 들썩인 메리는 안간힘을 쓰며 이를 사리물었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알 수 없는 신음 소리가 눈물로 터져 나왔다. 카인은 경직된 그녀의 골반을 잡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눈으로 질질 잡아당겨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점차 우악스럽게 울려 퍼졌다. 마지막 박차를 가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엉덩이도 마구 흔들렸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 메리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목을 살짝 젖힌 엘 카인의 눈이 잿빛으로 흐려졌다. 아무런 여운도, 카타르시스도 없는 짧은 감흥이었다. 그는 즉시 몸을 빼더니 침대에서 내려갔다. 메리는 풀린 조리개처럼 벌어진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빠져나간 온기만큼 허전함이 밀려왔다. 공허한 허공 위로 마이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환멸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가운을 입던 엘 카인은 말없이 그녀의 마른 등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굽은 등뼈와 얇은 어깨가 바스스 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눈 속엔 흐릿흐릿한 감정이 어리며 일렁였다.

“왜 울어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거짓말한 게 들통나서요?”

침묵 속에 숨죽여 우는 소리만이 흘렀다. 그는 메리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붉은 머리칼. 그가 그녀의 몸뚱이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다.

“그에게 미안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버티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해서 그래요?”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연이어 질문을 던지던 그는 지루한 눈빛을 짓더니 결론을 통보했다.

“내 권속이 되도록 해요.”

그 말에 그녀의 울음이 뚝 그쳤다.

“화가 많이 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난 여전히 메리가 탐나요. 그만큼 메리가 나에게 특별하다는 거겠죠. 아까 말했다시피 메리는 이미 미카엘의 권속이니 내 것으로 만들 순 없어요. 그러니 메리가 자율적인 의지로 내게 와 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의 권속이 되어 줘요.”

말없이 고개를 묻고 있던 메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자포자기한 듯한 어조의 목소리였다. 카인은 승낙을 예감한 듯 자신만만한 미소로 농담을 던졌다.

“언제는 내 허락을 구했던 것처럼 묻네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는 충혈된 그녀의 눈을 바라보더니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카인 씨와 최초로 권속을 맺었던 분이요. 시베리아 연구소 출신의 일본인 여성분. 카인 씨는 아니라 하셨지만 그분이 특별했었다는 거 알아요. 카인 씨는 정말 그분에게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었나요?”

“있었어요, 느낌.”

메리의 눈이 멈칫 커졌다. 그녀는 일말의 기대감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지겨운 느낌.”

짧게 일축한 그는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없었다. 미련이나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눈빛만이 보였을 뿐. 그가 침대 뒤에 위치한 높고 널찍한 와인 랙 쪽으로 사라지자, 그녀의 눈은 불 꺼진 듯 절망으로 어둡게 일렁였다.

“그럼 이브는요?”

“이브는.”

그는 잔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와인을 따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아끼는 걸 보니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과 기억이 뒤엉킨 듯했다.

“이브는 글쎄요. 반드시 가져야겠다는 본능이랄까…….”

그는 새삼스레 처음으로 그녀에 관한 마음을 정리해 보는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모호해진 눈빛은 잠시 의식을 더듬는 중이었다.

“그녀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나는 파멸이다, 라는 경각심이 머릿속에서 울리는데 희열과 공포가 뒤섞인 광기에 가까웠죠.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다시 말하지만 이건 감정이나 느낌 따위가 아니에요. 생존 본능에 가까운 겁니다.”

붉은 와인이 크리스털 잔 안에서 찰랑찰랑 흔들렸다. 다시 침대 쪽으로 걸어오던 그는 침대에 앉아 빤히 쳐다보는 메리에게 잔 하나를 건넸다.

“받아요.”

그의 재촉에도 그녀는 말없이 잔만 쳐다보았다. 침대를 짚고 앉은 그녀의 알몸을 내려다보던 카인의 눈초리가 점차 가늘게 좁아졌다.

“메리?”

그 순간이었다.

퍽!

‘쨍그랑!’ 하고 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술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멍하니 눈을 깜빡인 카인은 이마 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포도주 방울을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뒷골이 싸하게 울리고 있었다.

퍼억!

다시 한 번 뒤통수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밝은 금발이 검붉은 와인에 흠뻑 젖은 채 얼굴에 달라붙었다. 붉은 술이 끈적하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포도주가 아니었다. 이건 피다. 잔을 떨어뜨린 그는 휘청거리며 침대를 짚고 털퍼덕 쓰러졌다.

뒤로 다가온 그림자는 양손에 쥔 와인 병을 높이 들더니 엎드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쨍그랑!

퍽!

쨍그랑!

몸이 몇 차례 들썩인 그의 양옆으로 깨진 병 조각들이 산개했다. 와인 병을 들고 있던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대리석 꽃병이 들려 있었다. 돌보다 묵직한 화병이 그의 머리통을 향해 절구를 찧듯 ‘쿵!’ 하고 떨어졌다.

퍽!

훨씬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꽃병 바닥에 젖은 머리칼이 엉켜 붙었다. 짓눌린 살점 사이로 피가 튀어 오르자 그녀는 얼굴을 닦아 내며 굽혔던 허리를 들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무참한 공격을 당한 그는 시트에 코를 박고 쓰러진 채 멍하니 눈꺼풀만 움직이고 있었다. 술잔이 닿을 듯한 그의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알몸인 메리가 보였다. 그녀는 측은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뺨 옆으로 금색 칩 하나가 툭 떨어졌다. 동시에 알몸으로 앉아 있던 메리가 아른거리며 형체를 잃더니 연기처럼 모습을 감췄다.

‘허상?’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던 카인은 곤죽이 된 머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시루떡처럼 눌린 뒤통수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가자미처럼 눈을 찢어 곁눈질을 하니 등 뒤를 밟고 선 인물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과 입매가 굳은 채 옴짝거렸다.

“메…… 리…….”

그녀는 깨진 와인 병의 뾰족한 부분을 흉기처럼 쥔 채 서 있었다. 독하게 입술을 앙다문 눈초리가 살기등등하게 빛났다. 그녀는 손에 쥔 병 조각을 그의 목에 ‘푹’ 찔러 넣었다. 하얀 피부 위로 금세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비명조차 없었다. 오히려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더니 피범벅이 된 얼굴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게…… 메리의 답이군요?”

입술을 사리문 채 참던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메리는 흐느낌을 억누르며 꽃병을 든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어리석었다. 이 남자는 감정이란 걸 모른다. 야생의 짐승은 길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감히 교요해 보겠다고 손을 내밀다 그에게 잡아먹힌 이들이 몇이나 될까? 짐승의 아름다운 용모에 홀린 채, 남자의 아가리 속에서 씹어 먹히는 줄도 모르고 다들 넋을 잃었으리라. 좀 전까지 모든 걸 까마득히 잊었던 그녀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메리를 보며 카인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것 봐요, 내가 뭐랬어요? 결국 감정은 본능을 이길 수 없다니까…….”

뭐가 웃긴지 큭큭거리는 그의 얼굴을 향해 그녀는 높게 든 대리석 꽃병을 ‘쿵’ 하고 떨어뜨렸다. 비명도, 미동 하나도 없었다. 붉게 칠한 침대 위에서 그는 그렇게 참혹한 결말을 맞이했다.

메리는 침대 밑으로 내려가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입을 틀어막은 손이 온통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몰아쉬는 숨 사이로 고인 눈물이 주르륵 턱에 맺혔다. 대리석 바닥에는 유리 조각들과 와인이 한데 모여 또 하나의 붉은 성운을 이루고 있었다.

─ 피와 어둠을 섞으면 뭐가 되는지 알아요?

문득 그가 물었던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어째서 지금 그 질문이 떠오른 것일까? 그녀는 비로소 그 답을 깨달았다.

그것은 죽음이다.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처럼.

참혹한 얼굴을 숙이던 그녀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뒤에서 왠지 모를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설마 착각이겠지? 머리 위에서 누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오싹한 시선이 느껴진다.

‘설마…… 그럴 리가…….’

메리는 더듬더듬 바닥의 유리 조각을 쥐었다. 숨을 꾹 참았다. 누군가 거칠게 호흡하는 숨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긴장한 눈으로 천천히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더운 입김이 느껴진다. 돌아볼수록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뒤덮는 그림자가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엘 카인이 몸을 일으키고 선 채 갸웃거리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목까지 새빨간 핏물을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눈자위만 쭉 찢어 놓은 구멍처럼 하얗게 끔뻑였다. 그는 목을 관통한 병 조각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팍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우린 이런 걸로 안 죽어요. 미카엘이 날 죽이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죠?”

그가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아아악!” 가늘고 짤막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을 날아간 메리의 몸이 침대 뒤에 벽처럼 위치한 와인 랙에 꽂히듯 걸렸다. 배를 움켜쥔 메리는 풀린 동공으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장식용 갈고리가 그녀의 몸뚱이 한가운데를 부욱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옷걸이처럼 벽에 걸린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그는 입꼬리를 찢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별로 세게 던진 것 같지도 않은데 어쩜 저리 기가 막히게 딱 꽂혔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갈고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향긋하게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희열에 찬 그의 눈이 흥분한 듯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메리의 몸은 우리와 달라서 죽기가 아주 쉬워요. 때문에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하죠. 안 그러면 정말 허무하게 끝나거든요. 지금 그 갈고리로 메리의 배 속을 벅벅 긁으면 온몸의 내장과 장기가 찢어진 복부 사이로 와르르 쏟아질 거예요. 통증이 심해서 쇼크사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버틴다면 매우 아름다울 겁니다. 아니면 메리가 내게 했던 것처럼 꽃병으로 두개골을 찧는 건 어때요? 예쁜 뇌가 두부처럼 으깨지는 게 좀 아깝긴 하지만…… 음, 메리의 뇌는 희소가치가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나는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편이라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은데 말이죠. 메리? 내 말 듣고 있어요? 아 이런, 벌써 정신을 잃었나…….”

천진난만하게 묻던 그는 아쉽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 * *

광장 앞 승강장에 도착한 유림은 에어쉽에서 내리자마자 주춤거렸다. 멀리 게이트 쪽에 몰려 있는 인파가 보였다. 시위는 한결 수그러든 듯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출국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였다.

유림은 고민하는 눈빛으로 서성이며 광장 내로 들어섰다. 그녀는 광장 중심에 심어진 아름드리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거대 석조물인 게이트는 온종일 군중과 소음에 시달리며 고생 중이었다. 브루클린의 성녀가 나타났다고 하면 또 한 번 소란이 일 것이다. 어떻게든 헤벨에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나? 케이에게 부탁할걸 그랬다. 그러고 보니 S관에서 나온 이후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 어디야?”

유림은 목소리를 낮추고 스마트 워치에 속삭였다.

─ 빵집이요.

“거긴 왜 가 있어?”

─ 유림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미리 좀 사 놓을까 해서요. 슬슬 단 게 당길 때가 됐잖아요.

유림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제가 뭔데 남의 생리 주기까지 다 꿰고 있는 거지? 기분이 나쁜 것 같으면서 좋기도 하고, 괜히 뺨이 화끈거렸다.

─ 유림은 어디예요?

“지금 성목의 광장인데 도저히 게이트 앞까지 갈 수가 없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 혹시 헤벨에 연락을 좀 취해 줄 수 있어?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했으면 좋겠는데.”

─ 헤벨은 왜요? 밀러 중령 때문에요?

“응, 밀러가 저렇게 아픈 건 처음 봐.”

쓰러지기는커녕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한 번 아프면 큰 병이라던데.

─ 아파서 저러는 거 아니니까 염려 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시체처럼 얼굴색이 막…….”

─ 그냥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해요. 저런다고 안 죽어요.

“왓슨이 진맥이라도 한 거야? 듣기로는 헤벨에서 치료를 일절 거절한 채 이송해 갔다고 하던데.”

─ 진맥은 내가 눈대중으로 했어요. 이러다 시체는 내 쪽에서 나올 것 같은데, 그 남자 걱정은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부드럽지만 질투 어린 목소리였다. 열 받았을 때 나오는 케이의 생긋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딱 그런 얼굴을 하고 있겠군.

“알았어, 이만 끊어.”

─ 벌써요? 잠깐만, 유림…….

“바쁘니까 이만 끊으라고. 이따가 얘기해.”

─ 그게 아니고 지금 아크레인이…….

마지막에 급히 덧붙이던 케이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유림은 못 들었는지 답답한 얼굴로 머리를 수그린 채 앉아 있었다.

‘눈대중 진맥 같은 소리 하네. 그게 감기 걸린 사람의 얼굴이야? 감기 두 번 걸렸다간 골로 가겠다.’

복잡한 표정을 하던 그녀의 시선이 땅에 떨어진 열매로 향했다. 누군가 먹다 남긴 잇자국이 움푹 남아 있었다. 관광객인가? 아스포델로스의 열매는 함부로 따먹으면 안 된다는 걸 숙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상징하듯 광장 노목의 붉은 과실은 독과로 유명했다. 공식적으로 먹고 죽은 인간은 없지만, 낙원의 주민들이라면 독버섯처럼 멀리하는 게 바로 이 붉은 열매였다.

─ 소위님, 들리십니까?

스마트 워치에 붉은빛이 깜빡이며 통신이 들어왔다. 아군의 통신이라면 녹색 빛이어야 하는데 누가 보낸 거지? 벌떡 일어난 유림의 눈이 허공을 훑었다.

─ 좌표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히 와 주십시오.

수신된 좌표는 게이트와는 반대 방향에 위치한 광장 출구 쪽이었다. 해변가로 이어지는 길인데 인적이 드문 길이라 현재는 임시 봉쇄를 해 논 상태였다.

양옆으로 심어진 벚꽃나무를 따라 걷던 유림은 심호흡을 하더니 멈춰 섰다. 숨 한 번 쉬지 않고 뛰어온 터라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똥개 훈련 끝났으면 그만 나오시지?”

유림은 팔짱을 낀 채 정면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그녀의 급한 성질머리를 잘 아는 듯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불가시 모드 상태로 대기 중이던 은색 비행정은 물에 비친 수조처럼 아른거리며 나타났다. 백조의 우아한 목처럼 매끈한 기체. 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크레인?’

도어가 개폐되자 요한이 모자를 벗으며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유림은 반가운 얼굴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크레인에 올라탄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게이트 안에 멋대로 들어와도 되는 거야?”

“헤벨의 아크레인은 수사 목적으로 낙원 내 자유 출입을 허가받았습니다. 아크레인의 통신 채널은 슈퍼컴퓨터 왓슨이 수집하지 않을 거라는 약조도 받았고요.”

“평의회가?”

“저도 믿진 않습니다만 본인들이 그렇게 약조한 이상 뭔가를 알게 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모른 척을 해야 할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요한은 예의 바른 어조로 비웃었다. 그는 여전했다. 직급도 더 높은 주제에 그녀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것도 변함없었다. 유림뿐만 아니라 메리에게도 깍듯한 그의 태도를 아니꼬워하는 이들은 그를 ‘밀러가의 집사, 밀러의 개’라고 부르며 비하하기도 했지만 본인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건 요한을 몰라서 하는 말들이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게 그의 신조였지만 건넌 돌다리는 반드시 폭파하여 다음 사람을 엿 먹이는 게 요한이다. 치밀하고 이성적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비뚤어진 못이 박혀 있는 인간. 나사못 치고는 배배 꼬여서 어디 한 군데 오래도록 반듯하게 박혀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밀러는 그를 신뢰할지언정 유림은 늘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중령님은 좀 어떠시고?”

“함장님의 상태는 유림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굳이 마중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이니까요.”

“직접 보라고? 헤벨에서?”

“네.”

아크레인은 이미 이륙하고 있었다. 다시 불가시 모드로 모습을 감춘 비행정은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유림은 밖을 쳐다보더니 당황한 듯 말했다.

“내가 낙원 밖에 나갔다 온 걸 알면 나중에 평의회 녀석들이 건수 생겼다고 난리칠 텐데.”

“나중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부로 데드캣은 로스트 헤븐 내 잠입 임무를 종료하고 헤벨로 복귀하라는 함장님의 명령입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농담을 즐기는 인물은 아니었다. 장난이나 치자고 아크레인까지 끌고 와서 그녀를 태우고 갈 정도로 두 사람 사이가 두터운 것도 아니었고.

“중령님께선 지금 의식이 없으신 것 아니었어? 그런데 함장명이라니?”

요한은 잠시 말을 아끼더니 입을 열었다.

“근시일 내로 함장님께서 데드캣과 블러디 마리아를 불러 드릴 계획이셨다는 건 사실입니다. 정식으로 지시가 떨어진 건 아니지만, 상황이 워낙 긴박한지라 제 독단으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후에 그 어떤 징계가 내려진다 해도 유감없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놀란 듯 가만있던 유림은 말없이 턱을 괴고 밖을 쳐다보았다. 요한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아크레인에 말했다.

“데드캣이 동의했다. 헤벨에 귀함 요청을 보내도록.”

【왓슨의 기밀 파일 No. P27】

이름: 유림 J 밀러

※ 소속1: 의회 직속 특별수사대 육전지휘관

계급: 소위

콜사인: 세인트1

별칭: 브루클린의 성녀

특이 사항: 단일 델타 포획 수 최고 기록 보유 중, 훈련병 구타와 과한 체벌로 유명

※ 소속2: 연맹군 전략국 산하 작전부 남태평양전대 지휘직속 헤벨 기동수색대

계급: 상사

연맹군 코드네임: 데드캣

지령 코드: 붉은 장미

특기: 근접 전투

특이 사항: 신종 바이러스 항체 보유자

범죄 기록: 없음

헤벨은 게이트 밖 해변에 정박 중이었다. 하얀 모래사장 위로 올라온 먹색의 잠수함은 거대한 고래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헤벨을 본 유림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침착해 보였지만 창 너머를 바라보는 그녀의 가슴은 북 치듯 뛰고 있었다. 아크레인이 근접하자 헤벨의 꼬리 쪽에 위치한 게이트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열렸다.

─ 어서 오십시오, 요한 제이콥스 대위님.

아벨의 환영 인사가 울려 퍼지고 제3플랫폼이 등장했다. 두 사람이 내리자 빈 아크레인은 어두운 터널을 타고 격납고로 이동했다.

“아벨, 나한테는 인사도 없는 거야?”

유림이 플랫폼을 나서며 투덜거렸다. 불청객 대우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벨이 그녀를 달래듯 바로 허공에 메시지를 띄웠다.

─ 어서 오십시오, 데드캣.

“아벨은 아직 상사를 잠입 수사 업무 중으로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요한의 설명에 유림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리사보다도 눈치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거대 잠항 헤벨의 꼬리 쪽에는 식당과 휴게실, 목욕실 등 부대시설이 몰려 있었다. 식당가를 지나는 유림의 모습을 본 장병들은 유령이라도 목격한 듯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설마 유림?”

“헤벨의 고양이?”

“유림 맞아?”

“유림이 왔다고?”

삽시간에 모여든 남자들 사이에서 유림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오랜만.”

제일 마지막으로 야단법석을 떨며 달려온 건 삼 년 전, 그녀가 속해 있던 팀의 팀원들이었다. 사령부 직속 기동수색대, 임무 수행 능력치가 가장 좋은 병사들로 꾸려진 특수부대이자 헤벨의 전투 선발대였다.

덩치 큰 녀석들이 좁은 복도에 껴서 허둥대며 굴러 왔다. 반가운 기색이 완연한 그들을 보며 유림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중에 가장 키가 큰 사내가 다른 장병들을 젖히고 나오더니 거들먹거리며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게 누구야! 일 년 안에 임무 마치고 돌아올 거라며 큰 소리 치더니 왜 이리 늦었어? 가서 뒈지기라도 한 줄 알았잖아.”

“어이, 커크! 뒈진다가 뭐냐? 성녀님께 교양 없게.”

“내가 얘 때문에 알몸으로 식당에 묶여 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데, 무슨 얼어 죽을 성녀야. 너 설마 거기 가서도 그런 짓 하고 다닌 건 아니지?”

“사내새끼들은 어딜 가나 똑같더라고. 그러니 똑같이 대접해 줬지.”

유림이 붉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하자, 근육질에 호남형인 백인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질색이라는 듯 미간을 구겼다.

“너 무슨 남성혐오증 있냐? 아니면 사디스트인가 그거 아니야?”

“사디스트가 좋다고 따라다닌 게 누군데?”

유림이 쿡쿡 웃으며 말하자 커크는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

“내, 내가 언제 좋다고…….”

“듣자 하니 예전에 내 이름 부르면서 몽정도 했다며? 흐음, 그렇게 내가 좋아?”

“누가 그래! 어떤 미친놈이!”

“아, 헛소문이었어?”

유림은 상체를 굽히며 그의 턱 밑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코앞에 다가온 향기에 커크는 얼어붙었다.

“커크는 예나 지금이나 참 귀엽다니까.”

놀리듯 속삭인 그녀는 깔깔 웃으며 돌아섰다. 멍하니 서 있던 커크는 완벽하게 전의를 상실한 표정으로 울먹이며 고개를 풀썩 숙였다.

“쟨 도대체 왜 저렇게 성격이 나쁜 거야? 함장님과 가면 갈수록 딴판이잖아.”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장병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커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게진 채 코피까지 쏟을 기세였다. 그는 삼 년 전보다 더 육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유림에게 다시 반한 듯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울분을 터뜨렸다.

“어우, 저 못된 계집애! 심술 맞은 계집애! 얄미운 계집애!”

“커크, 너는 백날 덤벼도 유림이 못 이겨.”

“저 녀석은 마조히스트인가 봐. 유림에게 맨날 당하면서도 좋다는 거 보면.”

말은 그래도 다들 헤벨의 고양이를 사랑했다. 연기 반, 진심 반으로 눈물을 짜내며 욕하던 커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림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비로소 헤벨이 꽉 찬 느낌이었다. 저렇게 여기저기 할퀴고 다니는 고양이가 없어서 다들 그동안 얼마나 심심했는지 모른다.

한편 다른 팀원들은 그제야 유림의 복장이 눈에 들어온 듯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오, 그게 낙원의 군복이야? 하여간 간덩이도 크네. 감히 헤벨에 로스티아벤 마크 따위를 붙이고 오다니.”

유림은 왼쪽 팔의 마크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로스티아벤의 문장은 기본적으로 방패 형태였다. 방패 중심에는 아름드리나무 형태를 한 여신이 눈을 감고 서 있는데, 그녀는 곧 이브를 상징했다. 아름드리나무 앞에는 수많은 검들이 울타리처럼 쭉 세워진 채 낙원 그 자체인 이브를 지킨다. 방패와 검은 모두 용병대 로스티아벤을 뜻했다. 즉, 그들이 검과 방패가 되어 낙원을 수호한다는 의미였다.

“이건 에덴 타워에 출입할 때만 입는 정복이야. 거기 갔다가 제이콥스 대위님한테 바로 잡혀 와서 그래.”

“헤벨의 고양이가 왓슨의 용병이 다 됐군 그려.”

“소문으로는 유림이 뉴욕의 성녀라던데?”

“브루클린의 성녀겠지, 멍청아.”

정말이지 다들 여전했다. 티격태격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홧김에 몸싸움을 하다가 맥주를 마시며 화해하고, 다 같이 격납고에 숨어들어서 낮잠을 자고. 이런 광경이 그리웠다.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따뜻한 정경들.

그런 감동도 잠시였다. 평균 나이 서른다섯인 남정네들이 어찌나 유치하게 노는지 유림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환영회는 나중에 할게. 어째 못 본 사이에 다들 아저씨가 되었어.”

“그래, 그 옷부터 좀 갈아입고 와라. 눈꼴시어 죽겠다. 백의의 천사도 아니고 그게 뭐냐?”

“유림팅게일인가 보지. 낙원에서 데드캣이 엔젤캣이 되었나 봐.”

“데드캣이었나? 데빌캣 아니고? 아 헷갈린다.”

“쟨 진짜 악마고 저승사자야. 대체 누가 쟬 성녀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얼굴부터가 사악하기 그지없잖아, 안 그래?”

콧수염 대장인 랜스가 낄낄대며 웃자 나머지 장병들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 짜증 나.’

인상을 구긴 유림은 돌아서다가 못 참겠는지 다시 홱 돌아서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눈물을 뽑으며 웃던 랜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녀의 손이 그의 커다란 얼굴을 향해 불쑥 다가오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아아악! 아악! 내 수염! 아아악!”

유림은 덥수룩하게 나온 그의 배를 한 발로 밟더니 콧수염을 양 갈래로 잡고 사정없이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로 누르는 배 때문에 팔만 버둥거리는 랜스의 모습은 가련할 정도였다. 다들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외면하며 물러섰다. 몇몇은 제 얼굴에 난 수염을 더듬으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잠시 후 허공에는 갈색 콧수염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유림은 불결하다는 얼굴로 손을 털며 눈초리를 치켜 올렸다.

“성녀는 털을 싫어하거든. 성녀는 거시기도 싫어해. 그러니 다음번에 또 성녀 어쩌고 지랄하면 가랑이 사이 걸 뽑아 버릴 줄 알아.”

렌스는 무릎을 살포시 모으고 주저앉아 훌쩍였다. 다들 그를 위로하며 안쓰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안 그래도 대머리여서 수염 기르는 것으로 심리적 위안을 얻는 랜스인데, 유림이 좀 잔인했다면서.

“말이 더 험해졌어.”

“힘도 더 세졌어. 완전 괴물이야.”

그때 몇 발짝 물러나 뒷짐 진 채 지켜보던 요한이 그녀를 불렀다.

“유림! 인사 다 했으면 이만 가죠, 이쪽입니다.”

“아, 예.”

둘만 있을 때를 제외하고 유림은 대위인 그에게 꼬박꼬박 경어를 사용했다. 그녀는 묘한 분위기의 장병들을 흘끔거렸다. 요한은 아직 공식적으로 밀러의 상태를 밝히지 않은 듯했다. 개중 몇몇은 팔짱을 낀 채 곁눈질로 두 사람 쪽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찔끔찔끔 울던 랜스를 비롯해 소대장급 장교들도 어느새 무거운 눈빛을 짓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핵심 간부들은 대충 헤벨의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함장실 앞에 도착한 유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무실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짤막하게 대답한 요한은 절뚝거리며 먼저 안쪽으로 들어섰다. 뒤따른 유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낯익은 풍경임에도 낯선 공기가 느껴졌다. 어스름한 나이트 스탠드 하나만이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들어가 보시죠.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요한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앞으로 다가온 유림은 잠든 듯 누워 있는 밀러를 내려다보며 경례를 올렸다.

“귀함 보고합니다. 유림 J 밀러, 코드네임 데드캣. 로스트 헤븐 내 잠입 및 공작 임무를 일시 중지, 지금 막 본함으로 복귀를 완료했습니다.”

보고를 마친 그녀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고요한 침묵 속에 유림은 다시 한 번 입술을 열었다.

“헤벨의 고양이가…… 중령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로 말을 마쳤다. 손을 내려 그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끝에 닿는 밀러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 어서 와, 나의 고양이.

다정하게 웃으며 팔 벌려 안아 줄 그의 모습을 기대했었다. 메리와 셋이 식당에 모여 앉아 밤새도록 맥주를 마시며 수다 꽃을 피울 거라 예상했다.

밀러의 얼굴 위로 도드라진 실핏줄들을 살피던 유림은 인상을 썼다. 눈 주위에 몰린 혈관들이 심하게 부풀어서 팽창한 상태였다. 치료도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두는 까닭이 무엇일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아벨, 중령님 몸 상태가 어떤지 보고부터 올려 봐.”

“곧 좋아질걸세.”

아벨 대신 누군가 굵은 목소리로 답했다.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인기척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유림은 재빠르게 돌아서서 등 뒤 남자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남자는 예상했다는 눈빛으로 허공에서 가볍게 그녀의 주먹을 막았다.

“며칠 새 직속상관의 목소리도 잊은 건가, 소위?”

그녀의 주먹을 따뜻하게 감싸 쥔 남자는 웃음기 밴 어조로 물었다.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칼, 뺨에 커다랗게 새겨진 십자 흉터, 거칠거칠하게 성대를 긁는 웃음소리.

유림은 놀란 얼굴로 들었던 팔을 스르르 내렸다.

“호크…… 대령님?”

그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그러는 소위는 뭘 하고 있나?”

그가 되묻자 유림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흘끗 밀러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나처럼 도망쳐 온 건 아니겠지? 그래도 자네는 끈질기게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군복을 벗은 호크 대령의 모습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헐렁한 반팔에 슬리퍼를 신고 선 대령님이라니. 헤벨의 다른 장병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모습이지 않은가? 이곳에 있는 게 아주 당연한 듯 그는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유림은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경계하는 눈빛의 그녀를 보며 그는 흥미롭다는 미소를 머금었다.

“왜 그러지, 소위?”

“제이콥스 대위입니까?”

“뭐가 말인가?”

노아 호크는 로스티아벤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현직 의원이다. 그런 그가 헤벨의 함장실에 떡 하니 들어와 있다니, 누군가 들여보내 준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대령님을 탈출시키고 헤벨로 들인 사람 말입니다. 제이콥스 대위님의 계획인 거냐고요.”

“계획? 그건 왓슨 3세와 로스티아벤을 너무 우습게 보는 발언처럼 들리네만. 아무리 헤벨이라도 낙원의 보안을 그리 쉽게 뚫을 수 없다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벨보다 왓슨이 한 수 위니까 말이야.”

─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겁니다, 대령님.

아벨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나름 연맹군 내에서는 최고의 AI라는 평을 받고 있는 모델인데 자존심이 퍽 상한 모양이었다. 인공지능 주제에 긍지와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게 웃겼지만 유머 지수도 설정하는 판에 뭘 못하겠는가?

“그럼 도대체 헤벨에는 어떻게…….”

─ 호크 대령님께선 이곳에 직접 오셨습니다. 형무소에서도 자력으로 탈출하셨을 거라 예상합니다.

“그건 불가능해.”

유림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특별 형무소와 델타 수용소는 절대 혼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살을 각오하고 아예 건물을 무너뜨릴 생각으로 포탄을 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뭐든지 단언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소위.”

호크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내가 탈출한 직후 누군가가 형무소를 바로 박살 냈다고 들었는데?”

“그건…….”

유림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또 저런 얼굴이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사람 약 올리듯 바라보며 웃음 짓는 것. 낙원에서 흔히들 오싹하다고 말하는 호크의 검은 미소였다. 뺨에 팬 흉터 때문인지, 아니면 구릿빛 피부와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외모 때문인지 대부분의 장병들은 블랙 호크의 미소마저도 섬뜩해하며 무서워했다.

“건물 자체가 아예 소멸된 수준이라지? 소위의 논리에 따르면 그건 미사일이라도 쏜 게 되는 건가?”

유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영감탱이가 또 놀려먹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둘 중 하나겠죠. 왓슨 3세가 협조를 했든가, 아니면.”

“아니면?”

“뭐…… 인간이 아니라든가.”

능글맞게 웃고 있던 호크의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죽지 않는 몸이라거나.”

“안드로이드처럼?”

“안드로이드를 말하는 게 아니고요, 입실론들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든지…….”

유림은 복잡한 눈빛을 지었다. 스스로도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는데, 호크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기 마련이다. 불과 며칠 전에 경험하지 않았던가? 유림은 아직도 물린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 나는 불사신이거든요.

불현듯 케이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순간적으로 그와 호크의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둘 다 얄미울 정도로 오만하고 여유로운 면이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죽을 때까지 그놈의 허세를 못 버린다.

“죽지 않는 몸이라.”

호크는 한쪽 입매를 끌어올린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이었다.

“아니 뭐,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녀석이 주위에 있다고요……. 농담입니다, 농담.”

유림은 민망한지 붉어진 얼굴로 신경 쓰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호크는 이미 벽을 짚고 큭큭대며 웃는 중이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고개를 들더니 풀어진 눈초리로 물었다.

“주변에 있는 녀석이라면 혹 애덤슨 중사 말인가?”

“아, 예…… 뭐…….”

유림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호크 대령은 다시 꾹 참았던 웃음을 풉 터뜨렸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호크가 저렇게까지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얼어 있던 분위기가 한층 녹았다.

“그렇게 웃으시니 대령님께서도 딱 평범한 동네 아저씨처럼 보이십니다.”

“아저씨 맞는데?”

“그렇긴 하죠. 종종 그 사실을 깜빡해서 문제지만.”

“젊고 잘생긴 아저씨라 그런가?”

“아, 또 징그러운 발언. 스스로 젊어 보인다고 하지 좀 마시라니까요.”

그녀가 질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호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역시 옷차림 때문일까? 그가 정말 평범한 남자처럼 보였다. 지금 이 상황 때문인지 대화 주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주변에 아주 낯설고 부드러운 공기가 형성되어 있는 건 확실했다.

“애덤슨 중사가 정확히 뭐라 했는지 궁금하군.”

“불사신이랍니다, 자기가.”

“불사신?”

눈이 동그래진 그는 다시 한 번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림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케이를 저렇게 비웃는 게 아무리 호크라도 불쾌했다.

“뭐가 그렇게 웃기십니까?”

“중사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런 소리를 다 하겠나 싶어서 그만…….”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입가에 남은 웃음기를 정리했다.

“내가 아는 중사는 그다지 말수가 없는 남자다. 허황된 말로 허세를 부리는 것보다 실체를 보여서 공포를 각인시키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지. 그런 남자가 소위에게만큼은 도무지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는 게 보이는데, 내 입장에선 그게 참 기쁜 일이거든. 자네의 애정을 갈구하는 중사의 모습이 더없이 인간적이라서 말이야.”

잔잔하지만 따뜻한 음성이었다. 유림은 내심 놀란 눈으로 호크를 쳐다보았다. 케이를 그만큼 꿰뚫어 본 것도 놀랍지만 왠지 모를 애정이 느껴지는 그의 어조가 더 의외였다. 그가 저렇게도 케이를 아끼고 있었던가? 정작 애덤슨 중사는 그와 마주치기만 하면 까칠한 태도로 냉랭하게 굴던데.

갸웃거리던 그녀는 복잡한 생각은 일단 지우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대령님께서 여기 계신 진짜 이유는요? 괜히 탈옥하셔서 혐의만 짙어졌다는 거 아십니까? 공중 정원의 테러범은 나츠 시게노로 밝혀졌습니다. 그 녀석이 자수했어요. 상관으로서 면목 없습니다.”

유림의 눈빛에 속상한 기색이 어렸다.

“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나쁜 녀석은 아닙니다. 제가 조금만 빨리 눈치챘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어요. 나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고요. 모든 게 미숙한 제 불찰입니다.”

“시게노가 자네를 많이 따랐던 모양이군. 자수를 했다는 건 그만큼 소위를 존경했기 때문이겠지. 지휘관과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도 있을 테고. 본인 스스로도 내적 갈등이 심했을 텐데 어린 녀석이 보기보다 강단이 있는데? 스파이로서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자네가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는가? 어쨌든 고생이 많았다. 나 없이도 잘 해결해 줘서 고맙군.”

호크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묵직한 온기에 유림의 눈이 동요로 일렁였다.

늘 뒤에서 얼굴을 붉히며 따라오던 나츠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경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던 소년의 눈동자. 그 순간 그 아이의 마음가짐은 분명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호크의 말대로 그녀는 누구보다 나츠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와 그녀 사이를 묶고 있는 이 전우애처럼, 나츠도 특별수사대 안에서 점차 유대감을 느껴 왔을 것이다.

유림의 눈이 의문을 품고 호크에게로 향했다.

헤벨과 낙원 사이의 물살을 조정해 왔던 그의 마음은 과연 어느 쪽 파도를 타고 있을지 궁금했다.

─ 노아 호크 대령님은 아서 밀러 함장님 시절부터 저희 헤벨과 로스트 헤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 오시던 분입니다. 쉽게 말해서 동맹군입니다.

전 함장인 아서 시절부터라면 꽤 오랜 시간이었다.

“그걸 왜 나는 모르고 있었지?”

─ 검은 함장의 존재는 기밀 사항으로 함장과 최측근 참모장교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블러디 마리아도 모르고 있는 일입니다.

“그럼 제이콥스 대위님도 진작 알고 계셨다는 거네?”

─ 그렇습니다.

“흐음…… 그런데 나한테 이렇게 술술 불어도 되는 거야?”

─ 대위님께서 승인하신 일입니다.

함장에게 갑작스러운 변고가 생긴 경우, 지휘권을 비롯한 전권은 부함장에게 이임된다. 현재 헤벨의 부함장은 요한 제이콥스 대위였다. 그녀는 흘끗 문 쪽을 쳐다보았다. 함정 내 다른 장병들은 아직 호크 대령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요한이 그녀를 함장실로 데려온 건 밀러의 상태를 확인하라는 게 아니라 호크와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데드캣의 임무는 완벽하게 종료하고 그녀를 귀함 조치시키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럼 대령님께서는 처음부터 제 정체를 알고 계셨다는 겁니까?”

호크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자 유림은 헛웃음을 흘렸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는 그녀 앞에서 얼마나 많은 웃음을 참아 왔을까? 유림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쳇쳇’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애덤슨 중사를 보내신 거군요.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입대 테스트에 여섯 번이나 떨어진 녀석을 굳이 제게 붙이시다니……. 저 같은 일류 교관에게 말이죠.”

“일류? 훈련병들이 평가한 자네 점수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건가, 소위?”

“그딴 걸 뭐하러 봅니까? 합격률만 보면 되는 거지. 제 훈련병들은 낙방이 없기로 유명하거든요.”

“듣자 하니 다들 탈락할 시엔 브루클린의 성녀로부터 당할 후사가 두려워서 죽을 각오로 테스트에 임한다더군.”

“바람직하네요.”

유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난 교관이 천직인데 다들 왜 그렇게 날 최전선에 못 보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호크는 할 말을 잃은 듯 웃고 말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건방진 그녀가 귀여운 모양이었다.

“전장의 성녀가 전장에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 아닌가?”

“브루클린의 성녀라면 그렇죠. 그녀는 낙원을 위해 검을 들고 주민들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릴 용병이니까요.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데드캣에게 그런 의리는 없다는 걸. 헤벨의 고양이는 첨탑의 쥐새끼들만 사냥하면 그만이거든요. 그녀의 최종 임무는 다른 무엇도 아닌 ‘낙원을 살해’하는 것. 낙원은 제 전장입니다. 첨탑 주인의 목이 게이트 위에 걸릴 때까지 말이죠.”

호크는 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핏빛 눈동자를 가진 이들은 모두 잔학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건 그녀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녀의 놀라운 전투력은 결국 스스로의 본능을 따른 결과적 능력치에 불과하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언제 데려오는 겁니까?”

유림은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호크의 눈빛이 굳었다.

“다른 사람들?”

“저만 혼자 쏙 빠져나온 게 걸려서요. 지금 낙원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라 좀 걱정되는데……. 아벨, 대위님께 보고 드렸어? 배달원보다는 메리가 걱정이야. 아무래도 첨탑 꼭대기에 불려 간 것 같아.”

─ 배달원은 사망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배달원을 파견한 적은 없으니, 불러들일 요원은 블러디 마리아뿐입니다. 마리아는 중령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구조 작전을 세울 예정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배달원이 죽었다니?”

아벨은 허공에 사진을 띄웠다. 일전에 배달원으로서 위장 잠입했던 우딘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 우딘 헤르만, 본명은 알리 무하마드. 로스트 헤븐에 잠입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아, 저 녀석 입대 테스트 때…….”

─ 맞습니다. 델타 난입 사건 때의 피해자입니다.

유림은 기억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대 테스트 때 케이와 같은 팀에 있던 녀석이었다. 시뮬레이션 훈련장에 난입한 델타에게 당해 꽤 처참한 몰골로 죽었지. 그의 시신을 떠올리던 유림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녀석이 배달원이었다고?”

─ 네, 이후 데드캣은 장미를 받았다는 암호를 헤벨에 수신합니다. 하지만 배달원이 사망했음에도 답신이 온 것을 수상히 여긴 중령님은 데드캣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헤벨이 데드캣과 블러디 마리아를 회수하기 위해 로스트 헤븐에 올 빌미를 모색하던 차에, 마침 공중 정원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럼 케이가 온 건…….”

“기억나는군, 입대 테스트 때 그런 사고가 났었지. 소위가 문을 폭파하고 개입하지 않았나? 훈련병들 사이에선 아직도 그 영상이 도는 것 같던데.”

유림은 미간을 구긴 채 호크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가 중간에서 말을 끊고 끼어든 기분이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입을 틀어막으려는 것처럼. 허공에서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멈칫 굳었다. 몇 년간 상관으로 모셨던 남자였다. 그가 저런 눈빛을 할 때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경계 및 대기.

그녀는 차분히 서서 곁눈질로 주변을 확인했다. 지구본처럼 동그란 구체 형태의 아벨이 빙글빙글 돌며 그들의 대화를 모두 수집하고 있었다. 지금 함장실에서 나누는 대화는 숨소리 하나까지도 모두 아벨에 의해 기록되는 중이었다.

유림은 입술을 다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을 아끼고 신중해야 할 상황이었다. 호크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막은 건 그런 의미다.

“배달원의 죽음은 유감이네, 아벨. 그건 내가 어찌해 볼 틈도 없었어.”

─ 아닙니다, 대령님. 다행히 평의회 측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아벨, 혹시 정보국에서 내게 따로 요원을 붙인 적은 없었어? 그리고 혹시 ‘낙원의 설계자’가 정보국 출신이라는 설에 대해 아는 건 없고?”

호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유림은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케이에 관한 것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니, 아벨도 그녀가 한 질문의 진짜 의도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확인은 해야 했다. 그냥 이렇게 넘기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 정보국에서 최근 일 년 사이 로스트 헤븐으로 요원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물론 그들이 저희 쪽에 비밀로 한 채 독단적으로 사람을 심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에는 전략국과 공식적으로 협의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쪽 대원에게 접근을 할 권한이 없습니다. 애당초 데드캣이나 마리아의 존재 자체도 모를 테지만요. 그리고 낙원의 설계자가 정보국 출신이라는 건 허위 정보입니다. 낙원의 설계자는 익명의 과학자 K라고 불리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은데, 익명의 과학자 K는 정보국 쪽에서도 오랫동안 추적 중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림이 멍한 눈빛을 지었다.

“그럼…….”

그녀의 시선이 호크에게로 향했다. 느른한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던 그는 확신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던 수많은 질문들이 거품처럼 녹아내렸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장미꽃이 전달된 적은 없었다.

‘케이가 배달원이 아니라고?’

유림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왜?’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도대체 왜?’

그럴 이유가 없다. 케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자신을 죽이고자 했다면 그에게는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다. 스파이인 그녀의 정체를 고발하고자 했다면 소돔에서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델타에게 물린 그녀에게 목숨을 걸고 달려들 이유도 없었다.

─ 나 버리지 마요.

─ 내가 케이를 왜 버려?

─ 내가 유림한테 잘못한 게 많아서요.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얽힌 채 우르르 밀려와 눈앞을 캄캄하게 가로막았다.

‘그때 한 말이 이런 의미였어?’

허탈한 감정에 억지웃음이 흘러나왔다. 눈시울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얼른 손등으로 훔친 유림은 흘끗 침대를 쳐다보았다. 밀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어쩌면 밀러가 몰래 보낸 요원일지도 몰라. 아벨도 모르게 극비로 말이야. 그 유명한 익명의 과학자 K잖아. 낙원의 설계자인지 창조자이기까지 하다며? 상부에서 아군까지 속여 가며 위장시켜 보낸 게 아닐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혼잣말을 하던 유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쪼그리고 앉은 그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한심하다, 정유림.

현실을 부정하는 건 나약해 빠진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흔들리지 마라, 무너지지 마라, 외면하지 마라, 이성을 잃지 마라,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마라, 군인은 어떤 순간에도 냉정해야 한다. 훈련병들에게 수없이 가르쳤던 말들이었다.

그제야 그동안 훈련병들에게 얼마나 교과서적인 내용을 가르쳐 왔는지 깨달았다. 사람인데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슴에 구멍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아픈데 감정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때라도 냉정을 잃지 않는 건 피 대신 수액이 흐르는 안드로이드나 가능한 일이다. 인간이니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우린 인간이니까 화를 내고 슬픔에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애덤슨 중사에게 숙제를 하나 내준 적이 있었지.”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호크가 말했다.

“브루클린의 성녀는 결코 시시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는다면 중사는 원하는 바의 절반 이상을 이룬 것과 다름없다고.”

케이가 원하는 것?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림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올라섰다. 얇아진 호크의 눈초리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한 건지 소위에게 잔뜩 혼만 나고 쫓겨나지 뭔가?”

“아, 그때 일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유림의 입술이 머뭇거리며 다시 닫혔다.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내 마음을 얻겠다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여간 의외로 여자에 서툰 녀석이었다.

“애덤슨 중사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제가 사적인 일로 흥분해서 조금 과한 체벌을 내렸습니다.”

“그 체벌 너무 오래 주지는 말게. 녀석은 이미 십오 년 넘게 벌을 받아 왔거든.”

오늘 호크 대령은 정말 이상했다. 평소에도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속내를 읽기가 힘들었다.

“더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의무실로 오도록. 난 좀 쉬어야겠군.”

그는 피곤하다는 듯 목 뒤를 주무르더니 통로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함장실 밖으로 나서던 그는 뭔가 잊었는지 ‘아!’ 하고 돌아보았다.

“참고로 애덤슨 중사는 그 뭐라고 하더라? 시스터 콤플렉스? 그게 좀 심한 편이라서 말이야.”

그는 우려가 담긴 눈빛으로 밀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곧 그에게 닥쳐올 재앙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혀를 끌끌 차면서.

“듣자 하니 밀러 중령도 비슷한 증세가 있는 것 같던데 가급적이면 애덤슨 중사 앞에서 중령에게 너무 잘해 주지 말게.”

“시스터 뭐요?”

“시스터 콤플렉스.”

“그 녀석 시스터 병을 왜 저와 중령님께서 조심해야 합니까?”

“내가 명령하니까.”

호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유림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만한 상관 같으니. 그녀는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예.” 하고 구시렁거리며 대답했다.

유림은 타당한 근거 없이 행위를 제한당하는 것에 굉장한 반발심을 갖는 여자였다. 그걸 잘 아는 호크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던진 뒤 재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한 게 분명했다.

“저 아저씨가 또 징그러운 짓을 하고 가네.”

유림은 토할 것 같다는 얼굴로 웩웩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뭔가를 깨닫고선 이마를 찌푸렸다.

“명령 좋아하시네. 제복 벗었으면 그냥 아저씨지. 우리 둘 다 이제는 탈낙원 분자고만.”

좀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모든 게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호크의 꼴 보기 싫은 재롱 때문인지 진지하고 애절했던 기분이 모두 날아가 버린 채였다.

게다가 가만히 들어 보니 이 두 남자,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게 분명하다. 그간 모르는 척 서로에게 이죽거리더니 그게 다 보기 좋은 쇼였다.

유림은 다시 슬퍼지려는 눈초리를 손가락으로 잡아서 밀어 올렸다. 케이에 대한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그러고 싶었다. 떠올려 봤자 화가 나기도 전에 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고 마니까.

유림은 문을 벌컥 열고 나섰다. 통로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요한이 보였다. 그의 발 옆에는 그가 늘 수족처럼 짚고 다니는 지팡이가 있었다. 십 년 전 뇌 수술 이후 생긴 후유증으로 그는 왼쪽 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

“배고프다! 오랜만에 식당 밥을 먹고 싶은데.”

“가죠. 제가 사겠습니다.”

그가 절뚝거리며 다가오자 유림은 그가 지팡이 짚기 편하도록 한발 늦추어 걷기 시작했다.

“가다가 커크 녀석 보이면 잡아서 끌고 가자. 그런데 걔는 여전히 캡틴 Z 팬티만 입어?”

“커크 상사가 그런 팬티를 입습니까?”

요한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메리가 알려 줬어. 어쩌다 손이 닿았었나 봐. 질색을 하더라고.”

유림은 긴 머리칼을 높게 포니테일로 묶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쾌활하게 웃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마리아 구출 작전은? 내가 사라진 걸 알면 메리가 제일 먼저 의심받게 될 거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내일 움직이도록 하죠. 도시가 잠든 후에 실행하는 걸로. 작전은 식사 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이라……. 그때까지 별일 없겠지?”

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림은 쓴 입술을 깨물며 걸었다. 불안하게 뛰는 가슴이 턱밑에서 숨을 잡아당겼다.

* * *

황금의 바벨탑 어딘가에 있는 거울이벽의 신전. 삼각 타일로 이루어진 거울의 방은 보고 있으면 정신이 사나워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이곳에 한 번 초대받은 적 있던 유메는 거울이벽의 신전을 나오자마자 헛구역질을 하며 욕설을 지껄였었다.

─ 역시 저놈은 미치광이가 틀림없어. 수천수만 개의 거울 속에서 가면을 쓰고 무슨 변태 놀이를 즐기는 거야? 여기서 로봇들하고 섹스 파티라도 벌이는 건가? 안에 잠깐 있었는데도 어지럼증에 토할 것 같아. 나츠가 아닌 내가 오길 잘했어. 나츠였다면 제대로 말도 못했을 게 분명해. 그 녀석 비위도 약한 데다가 쉽게 패닉에 빠지곤 하니까…….

거울이벽의 출입구는 수많은 거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문이 열려 있어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또 얇은 거울이벽 사이사이에는 섬뜩한 칼날이 꽂혀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자, 이제 하나씩 설명을 해 봐. 차근차근 하나도 빠짐없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조명이 켜졌다. 격자무늬 의자에 앉아 있는 솔로몬이 황금 가면을 쓴 채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의자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바닥에 뭔가를 털썩 내려놓았다. 목 잘린 안드로이드의 몸체 부분이었다. 찢어진 양복, 손과 발에 남아 있는 총상. 흔히 ‘사회자’로 알려져 있는 위즈덤의 엔터테인먼트용 안드로이드였다.

솔로몬은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팔걸이에 기대 턱을 괴었다.

“목은?”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코어도 잃었다는 소리네?”

그는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남자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줄 알아? 그 녀석은 내 반쪽 뇌나 다름없다고!”

“죄송합니다.”

버럭 소리치던 그는 두통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솔로몬은 정보나 기술력의 손실을 두려워했다. 단순히 기업가적 마인드에서 나오는 경쟁심이나 위기의식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을 수집하고 싶어 했다. 개개인의 정보와 은밀한 비밀들, 더 나아가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역사를,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하게끔 해 주는 과학기술까지.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그가 꿈꿔 왔던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려던 참이었다. 단 하나의 보물만 손에 넣게 된다면.

왓슨 3세와 스마트 더스트.

그가 낙원에 온 목적도 바로 이들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몇 년을 숨죽인 채 지켜봤지만 도무지 원천기술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스마트 더스트의 경우 백 년을 앞서 갔다는 평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적인 발상도 놀랍지만 그걸 구현해 낸 엔지니어의 실력에 전 세계 과학계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그는 왓슨 3세를 차지하기 위해선 ‘관리자 권한’을 손에 넣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최소 ‘낙원의 관리자’를 그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어떤 길을 택하든 낙원을 장악해야 하는 것만은 변함없었다. 핵심은 정체를 들키지 않고 첨탑의 꼭대기에 이르는 것이었다.

낙원은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주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의 권력층─평의회와 로스티아벤의 지도층─은 왓슨 그룹 본사의 핵심 인사들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로 형성된 상태였고 이방인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분위기였다.

솔로몬은 당황하지 않았다.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건 그의 전문 분야였다. 다들 그가 건설업으로 성공한 줄 알지만, 그의 진짜 특기는 사회의 지하 깊은 곳에 이어져 있는 수맥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표면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그 이면의 연결 고리를 장악하는 능력이랄까?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천국이든 지옥이든, 의회든 카지노든, 귀족이든 노동자든 상관없었다. 세계는 철저하게 계층화되어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신분과 사회를 구별하지만 이 모든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가 존재했다.

바로 섹스다. 시대를 불문하고 포주와 매춘부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권력자의 뒷문을 두들길 시엔 반드시 아름다운 창녀를 준비하라. 로비스트라면 자나 깨나 기억하고 있어야 할 법칙이었다.

낙원은 좀 특이한 케이스긴 했다. 입실론들이 성녀처럼 숭배받는 이곳에서 여성이 몸을 파는 게 허용될 리 없었다. 모래의 도시 하층부에는 매춘부들이 존재했지만, 높은 곳의 양반들이 그런 범법 지대에 행차하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을 모래의 도시 밖으로 불러내면 왓슨의 눈이 불법체류자를 알리는 사이렌을 울렸다.

낙원 전체에 퍼져 있는 결벽증이 주민들의 숨을 점점 옥죄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욕망이 고일 웅덩이가 필요했다. 왜냐면 그 썩은 웅덩이가 반대로 그에게는 달콤한 오아시스가 되어 줄 테니까.

─ 그렇다면 안드로이드 매춘부는 어떠십니까?

솔로몬이 낙원의 평의원들과 처음 화상 대화를 나눴을 때 건넨 말이었다. 그는 기억의 도시에 새로이 적용될 기술이라는 ‘드리밍 플라워’를 보자마자 아주 멋진 계획이 떠올랐다고 덧붙였다.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를 모델로 한 성매매 거리 소돔의 건설안이었다. 그게 바로 낙원에 세울 검은 오아시스의 정체였다.

“저, 사장님…… 혹시 이 녀석 몸에 자동자폭 시스템은 탑재하지 않으신 겁니까?”

사회자의 몸뚱이를 가져온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솔로몬은 그의 질문에 침묵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진작 자폭을 명하지 않았을까? 사회자는 그가 특별히 아끼는 모델이었다. ‘W-Judge’ 모델 중에서도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오리지널 형이라 더 애착이 갔다. 첫 아이 같은 느낌이랄까?

“폐쇄 도시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녀석과 연결이 되어 있었어. 이후 총격전이 벌어지더니 연결이 뚝 끊겼다. 거긴 미궁도 아닌데 왜 갑자기 연결이 끊겼을까?”

솔로몬은 눈치를 살피고 있던 남자에게 그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남자가 머뭇거리자 그는 손바닥 반만 한 검은 봉투를 바닥에 툭 던졌다. 코카인이 들어 있는 봉투를 확인한 남자의 입가가 금세 좋아서 찢어졌다.

“유령의 군주가 어디 숨어 있는지 소재 파악부터 해 봐. 팔다리 없는 여자애가 혼자 지내고 있을 리 없어. 누군가 보살펴 주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알겠습니다.”

상황이 자꾸만 꼬여 가고 있었다.

처음 계획은 완벽했다. 테러 사건의 배후자인 블랙 호크가 제거당하고, 브루클린의 성녀는 연쇄 살인범이란 낙인이 찍힌 채 미궁에서 델타와 교전하다가 사망한다. 피해자들 구조 작업에 앞장선 위즈덤의 대표 솔로몬은 호크를 대신해 평의원 자리에 오르고, 그가 만든 병기형 안드로이드는 로스티아벤에 납품되어 대대적인 안드로이드 군단을 이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야는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비싸게 넘긴 정보에 따라 평소 눈엣가시로 여기던 호크를 형무소에 가두고, 브루클린의 성녀를 잡기 위해 미궁에 델타를 풀었다. 그 결과 브루클린의 성녀는 델타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과다 출혈로 죽든지, 살아남는다 해도 델타가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감염은커녕 얼마나 쌩쌩한지 펄펄 날아다니면서 오베론의 기사들만큼이나 델타를 처리했다고 한다.

잘못 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델타가 그녀의 목을 물어뜯고 피가 튀기는 것까지 확인하지 않았는가? 손발을 물리는 경우에는 감염 부위를 절단하고 살아남는 일도 있다지만 목덜미나 복부 같은 부위는 감염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폐쇄 도시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기서 벌어진 일들과 대화를 알 수만 있다면 모든 실마리가 풀릴 텐데. 웬일인지 거기서부터 사회자와 연결이 끊기고 말았다. 당연히 명령 전달도 할 수 없었고, 사회자의 눈을 통해 상황을 엿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연결이 끊긴 걸로 모자라 형무소 앞에서는 명하지 않은 짓거리도 벌였지.’

그는 허공에 뜬 영상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형무소 앞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이었다. 목 잘린 사회자가 더듬거리며 오베론의 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낙원에서 안드로이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인공지능은 크게 둘로 나뉜다. 낙원의 슈퍼컴퓨터 왓슨 3세와 안드로이드 제조사인 위즈덤. 상위 인공지능이라면 누구나 하위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리사가 왓슨의 명령을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회사로 비유하면 왓슨은 사장이고 리사는 수행 비서인 셈이다. 즉, 리사의 코어58)를 위즈덤에서 제조한 제품으로 바꾸면, 리사는 왓슨이 아닌 위즈덤이 내리는 명령을 따르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설명으로는 간단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코어를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누군가가 해냈다. 사회자의 코어를 손보고 명령 체계를 감쪽같이 바꿔 놓은 것이다.

반나절 만에 위즈덤 최고의 두뇌를 가진 안드로이드를 수술시켰다. 그것도 다른 정보는 거의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낙원에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의사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인공지능에 대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순발력, 이 삼 요소가 천재적인 수준으로 갖춰지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지 않나?’

천재 공학자이자 프로그래머인 엔지니어. 가상세계와 AI59)에 대한 이해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사고의 전환과 발상은 기발함을 넘어서 신을 우롱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단순한 과학이 아닌 예술이라 불리고 있다.

솔로몬은 가면 속에서 침묵한 채 수천 개의 거울이벽을 응시했다.

‘낙원의 설계자.’

왓슨 3세와 스마트 더스트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익명의 과학자 K.

‘설마 그가?’

솔로몬은 희열에 차오른 눈동자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자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만졌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제 수면 속의 시간은 막을 내릴 타이밍이 왔다.

【소환장】

수신인: 알렉스 아브라함

발신인: 특별보안대 소속 셰인 필란 중위

최근 발생한 연쇄 테러 사건과 우리야 세르게이의 살인 사건에 위즈덤이 연루되어 있다는 정황과 증거가 제시되었습니다. 이에 관해 조사하고자 귀하께 출석 요구서를 발송하오니, 2100년 3월 11일 15:00시까지 로스티아벤 특별보안대로 출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에 응하지 아니하면 규정에 따라 체포될 수 있습니다. 출석 일시는 소환장 수령 후 12시간 내 요청할 시 1회 조정 가능합니다. 또한 수사에 지장이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법률적 자문을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본 수사는 낙원의 외부 수사기관인 헤벨과 공동으로 진행합니다.

소환장을 읽은 그는 가벼운 조소를 흘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이 순간을 위기로 여겼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건 계기다. 지면을 찢고 나올 기회. 낙원 내에 익명의 과학자가 머물고 있다. 그것만으로 동기는 충분했다.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만간 물밑에서 헤엄치는 건 그만두려고 했으니까. 바야흐로 오랜 잠수를 마칠 시간이 온 것이다.

“결국 의원님들께서 절 버리시기로 한 겁니까?”

─ 나는 반대했소. 결코 내 뜻이 아닙니다, 솔로몬.

빈센트가 영상 통화 화면에서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지중해 출신의 배불뚝이 대머리 의원은 손까지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그럴 테지, 의원들 중에서도 당신은 특히나 소돔을 많이 찾던 사람이었으니까. 솔로몬은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긴 시늉을 했다.

“알겠습니다. 의원님의 마음 씀씀이는 제가 기억해 두도록 하지요. 어쨌든 제 입장에서는 이게 낙원의 관리자의 뜻이라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 그렇소. 아이작 라이트 의원 혼자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클라크 의원! 그 여편네가 제일 큰 문제요. 아이작 의원은 그 여자 혓바닥에 놀아난 것뿐이지. 관리자께선 이 일에 별 관심이 없으신 눈치였어. 오히려 제인 왓슨이 더 적극성을 보이는 듯했으니 말이야.

“왓슨 양께서 말입니까? 그나저나 관리자께서는 요즘 낙원의 정치사에 소홀하신 듯한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으신지요?”

─ 그게 말이야. 며칠째 개인 집무실에만 틀어박히신 채 평의회의 보고도 받지 않으신다 하네.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소. 그러고 보니 제인 왓슨이 이상한 말을 하긴 했었지. 관리자께서 무슨 계집애 하나와 시시덕거리는 중이라며 잔뜩 샘을 부렸다니까?

“여자와 있다?”

가면 속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왓슨가의 공주님은 여전히 엘 카인을 열렬히 사모하고 있었다. 그녀의 열정과 집착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제인 왓슨은 본래 패악스럽기 그지없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젊은 사업가를 짝사랑한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사교계를 점령했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금방 그에게 질리거나 자존심을 짓밟혔다며 열렬한 복수를 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뜨리고 그녀는 기어코 그와 약혼까지 했다. 이후 제인 왓슨은 이십 년 넘게 한결같이 엘 카인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게 아직도 사랑인 건지, 아니면 생에 있어 유일하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집착인 건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었다.

“입실론입니까?”

─ 그런 것 같더군.

엘 카인이 관심을 갖는 대상이라니 누굴까? 솔로몬의 입가에 잠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니까 조사위원회에서는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을 암살한 범인이 위즈덤에서 만든 안드로이드라고 여기고 있다는 거군요. 그것도 단순한 안드로이드가 아닌, 회색 기사단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 회색 기사단을 사들인 오베론은 이번 테러 사건의 주동 세력이었고, 따라서 위즈덤은 그 배후 세력으로 의심받고 있다. 대충 이런 시나리오인 게 맞습니까?”

─ 의심이라기보다는 좀 물어볼 게 있다는 거지. 일단 출석에는 응하시게. 그다음에 아이작 라이트와 협상을 보는 게 좋겠소. 다 죽어 가는 노인네, 이젠 서지도 않으니까 소돔은 못 가지만 뒷구멍으로 받아먹는 건 우리 중에 제일이요. 황금의 바벨탑 사업주들은 죄다 한 번씩 아이작에게 사적으로 악수를 건넸지. 이번 사건으로 피해를 본 사업주들이 아이작에게 따로 압력을 가해서 밀러 중령을 조사위원회에 합류하게 만들었소. 물론 제인 왓슨도 힘을 보탰지만, 어쨌든 그들의 입김이 컸소.

“일단 그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릅니다. 지상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믿어 왔던 낙원이 불바다가 되는 걸 눈앞에서 지켜봤으니, 사업이고 뭐고 지금 당장은 이곳을 탈출하는 것밖에 눈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사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첨탑의 관리자입니다. 이런 비상시국에 여자와 침실에 틀어박혀 있다니 그는 낙원을 통치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니, 왓슨 3세의 주인이 될 그릇조차 못 되는 사람이죠.”

경멸 어린 어조로 중얼거린 솔로몬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출석에는 응하겠습니다. 그러니 의원님께서도 걱정 말고 기다리고 계십시오.”

─ 솔로몬, 나는 당신이 세르게이를 죽인 게 아니라고 믿고 있소.

“물론이죠. 제가 제 고객을 뭣 하러 죽이겠습니까?”

─ 고객? 세르게이 총사령관도 소돔에 출입했었단 말인가?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묻자 솔로몬은 가면 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죠, 그쪽 고객이 아닙니다.”

─ 그쪽 고객이 아니라니?

솔로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결심한 듯 집무관을 호출했다.

“들여보내세요.”

유리거울 중 하나가 병풍처럼 접히면서 문을 열었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제복을 입은 채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영상 너머로 그 광경을 보던 빈센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남자의 얼굴을 본 그의 낯빛이 경악으로 물든 채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 백 퍼센트 완성된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군요.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일단은 살인 누명부터 벗고 봐야겠습니다.”

빈센트 의원은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쥔 채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 이게 어, 어떻게 된 일이오?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죽었어, 죽었다고! 분명 내가 시체까지 확인했는데!

“아이고 우리 의원님, 촌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목숨이 하나뿐인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야 세르게이는 항상 본인에게 닥칠 ‘죽음’에 대비해 왔죠. 아마 주변에 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그를 죽인 암살범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가 또 하나의 목숨을 미리 준비해 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솔로몬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쓰고 있는 가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결정을 앞두고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사실 이러면 안 되는 거지만 의원님께서는 저희 VVIP 회원 중에서도 특별한 분이니까요. 정말 예외적으로 드리는 기회입니다만, 어떠십니까? 지금이라도 저희 ‘뉴 라이프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뉴 라이프 프로젝트에?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의원님이 아니시더라도 대기 중인 분들이 너무 많거든요. 하지만 의원님께서는 저와 워낙 각별하시고, 또 위즈덤을 끔찍하게 생각해 주시는 분 아닙니까? 원하신다면 제가 일 순위에 넣어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솔로몬과 대화할 때마다 느끼지만 그의 말에는 힘이 있다. 신뢰를 주는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저 남자는 악마였다. 그건 모두가 인정했다. 다들 그걸 알면서도 그가 건네는 제안에 매번 굴복했다.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데. 백날 신께 기도해 봤자 영혼 아닌 육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 영혼? 그런 눈에 안 보이는 것 따위 알게 뭔가?

어쩌면 신이 최초의 인류에게 선악과를 금한 건, 바로 이러한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지식을 깨우친 인류는 이토록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앞서 내다본 게 틀림없었다. 더불어 신의 권위가 추락하게 되리란 것도.

솔로몬은 최초로 신이 될 인간일지도 모른다.

* * *

바람의 도시는 적막에 휩싸였다. 이 시간이면 반딧불처럼 공중을 수놓으며 떠다녔을 공중 저택들이 죄다 불 꺼진 상태로 지면에 착지해 있었다. 상점가의 술집도 텅 비었다. 안드로이드들은 호객이라도 해 보고자 밖에 나왔지만 길가는 휑뎅그렁하니 오가는 주민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에어쉽의 엔진 소리도 잠잠하니 바람마저 고요했다. 다들 겁에 질린 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테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도시의 빛과 생기를 앗아 간 듯했다.

유림의 자택 역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가에 달린 작은 조명들만이 밤길을 달리는 열차처럼 조르르 빛을 밝혔다. 냉장 박스에 담긴 케이크는 줄곧 식탁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케이는 유리로 이루어진 벽에 기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컴컴한 도시 저편으로 에덴 타워가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 소위님께서 헤벨로 이동하셨습니다.

“알아.”

그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유리창에 이마를 툭 대고 있는 눈동자는 아까부터 한 방향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났습니다. 차라리 소위님께 연락을 넣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럴 필요 없어.”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침울한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케이는 갈라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유림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딱 잘라 말한 것과 달리 그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눈동자가 유리에 비친 어둠을 응시하며 일렁였다.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마스터는 불합리와 모순을 싫어하신다. 그럼에도 어제오늘 그의 말과 행동은 엇갈림의 연속이었다. 평소 감정을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이성적이었던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어제 유림이 헤벨로 간 이후부터 그의 심박동 수는 계속 160 이상을 상회하고 있다. 만일 이게 유림의 심장 박동 수였다면 리사는 당장 그녀에게 안정을 취하라 했겠지만, 빠르게 뛰는 케이의 심장 소리는 기묘하게도 조용히 숨죽인 채 지켜보게 만들었다.

─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경우, 제일 좋은 방법은 즉시 만나러 가는 겁니다. 24시간 안에 직접 만나서 설득을 시도할 때 재결합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케이는 불쑥 조언을 던지는 리사를 뜬금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얼굴형 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그녀의 머리 위에는 데이터를 분석할 때 발사되는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단순히 잘못했다고 용서만 구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정확히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실수하는 점이 이겁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과만 하면 되는 줄 알죠. 하지만 여성들은 말뿐인 사과를 할 바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녀들이 중시하는 건 상대방의 공감이니까요.

그녀는 아예 제가 교수라도 된 듯 이별학 개론을 펼치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그 입 좀 다물어.”

─ 평소처럼 키스부터 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소위님께서도 일단 여자니…….

“뮤트.”

무음 모드가 되자 종알거리던 리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이제 좀 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금쯤 유림은 모든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상상도 못했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녀가 받았을 배신감과 상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노아가 오랜 시간 거짓말을 해 왔다는 걸 알았을 때, 당연한듯 밟고 있던 발밑이 무너지는 느꼈다. 믿고 있던 세상 모든 게 부식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아픔을 그녀에게 주고 만 것일까?’

얕게 토한 한숨이 매캐한 담배 연기처럼 허공을 가르며 흩어졌다.

‘직접 만나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유림이 받아 줄까?’

마디마디 아름다운 손가락이 유리 벽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리사의 말이 정답이란 건 알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벌써 백만 번도 넘게 헤벨로 달려가서 그녀를 만났다. 다만 발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유림의 냉담한 눈초리를 떠올리면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 아담 겁쟁이! 이런 것도 못 올라오는 거야?

높다란 절벽 위에 올라가 까르르 웃던 어린 이브의 모습이 떠오르자 힘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은 그녀에 관해선 여전히 겁쟁이였다. 자칫 그녀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속을 애태우는 것도 그 시절과 변함없었다. 한 번 잃어 봤기에 조금 어그러진 감정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케이는 손을 활짝 펼쳐 힘을 꽉 주었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눌린 유리 벽 위로 쩌억쩌억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향한 강박증에 가까운 소유욕, 초조함과 불안함,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섞인 눈동자가 소용돌이치며 일렁였다.

유림이 그의 이런 비틀린 면모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갖지 못해 안달 난 몸은 때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폭력성을 발산했다. 그 모습은 광기에 가까웠다. 이걸 본 그녀가 자칫 겁을 먹거나 경멸할지도 몰랐다.

사나워진 눈빛이 평정심을 찾기 위해 고요히 눈을 감았다. 스스로를 통제할 때 떠올리는 건 알혼 섬의 기억이었다. 그럼 신기하게도 속을 까맣게 태우던 감정들이 증발해 사라져 갔다. 얼른 몸에 붙어 있는 이 어둠을 털어 버리고 그녀에게로 가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지금 당장 유림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뺨을 맞더라도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는 편이 훨씬 행복했다.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격렬하게 입을 맞추고 싶다. 몽롱한 눈빛으로 신음을 흘리는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퍼붓고…….

─ 평소 습관대로 키스부터 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일침을 놓던 리사의 목소리가 번뜩 뇌리를 번쩍이며 스쳤다. 움찔한 케이는 긴장한 눈빛으로 목울대를 꿀꺽 삼켰다. 평소 습관대로 야한 짓부터 상상했다. 그는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부터 하랬지? 공감이었나?’

잘못한 게 뭔지 먼저 이실직고를 하고, 그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다정하게 위로할 것. 그는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학생처럼 중얼거리며 공식을 외웠다. 하지만 곧 갸웃거리며 께름칙한 의문을 품었다.

‘유림은 그냥 평소대로 애무하면서 사랑을 표현해 주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말초적인 자극에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결코 그런 화학작용을 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과 결부시켜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편이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연애 철학이 존재했다.

의문 어린 눈초리로 고민하던 케이는 갑작스레 허공에 떠오른 알림 창을 보고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알림】

방문자1가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공중에 떠 있는 아파트 앞에 익숙한 외형의 빨간 에어쉽 한 기가 정차하고 있었다.

“사샤?”

현관이 열리자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사샤가 긴박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목 뒤 단추 하나가 풀린 게 보였다. 평소 옷맵시에 예민한 그녀인지라 얼마나 서둘러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소파에 털썩 앉은 사샤는 가사로봇이 가져온 물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긴장으로 인해 목이 바짝 마른 듯한 기색이었다. 케이는 다리를 꼰 채 맞은편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의 아름다운 눈매가 흐드러지듯 냉기를 흘렸다.

“무슨 일이야?”

“큰일 났어, 아담.”

사샤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고요한 얼굴로 앉아 있던 케이의 눈빛에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어제 제인이 첨탑 꼭대기에 두 번이나 다녀왔어. 두 번 다 씩씩거리며 돌아왔지. 엘 카인이 만나 주지 않았나 봐. 잔뜩 약이 올라 가지고 보이는 물건은 다 집어던지고 난리도 아니었어. 메리 씨를 낙원에서 쫓아 버릴 거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거든. 나는 그런 제인의 곁을 밤새 지켜 주었어. 왠지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든 게 화근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들린 건 깊은 새벽 무렵이었다. 거실에서 잠든 사샤는 몽롱한 표정으로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가 보였다. 얼핏 보인 불빛에 비친 제인의 얼굴은 뭔가 작정한 듯 무시무시한 눈초리였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빈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제인은 개인 경호원들을 이끌고 밖을 나선 후였다.

“제인은 엘 카인의 집무실로 향했어. 여전히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 제인은 술에 취해서 문을 열라고 소리쳤어. 하지만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대. 결국 제인은 정식으로 왓슨에게 문을 열어 달라 요청했어. 하지만 왓슨은 관리자의 권한이 필요하다면서 거절한 모양이야.”

제인은 결국 이성을 잃었다. 카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유리로 된 문을 두들기던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녀는 데리고 온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

“부숴 버려.”

경호원들은 즉시 소형 폭탄을 설치했다. 예전에 유림이 훈련병들 입대 테스트장에 진입하기 위해 사용한 것과 비슷한 종류의 폭탄이었다.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복도에 비치된 화병들이 산산조각 나고 벽에 걸린 그림들이 까맣게 타서 찢어졌다.

제인은 연기 속으로 입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발밑에 밟힌 유리 조각들은 바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끝까지 막아설 줄 알았던 왓슨은 의외로 조용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뒤따르자 벽 쪽에서 적색 광선이 지그재그로 뿜어져 나왔다. 제인은 그들에게 물러서란 손짓을 했다. 경호원들까지 데리고 들어오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왓슨의 경고 메시지였다.

어두침침한 집무실 안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고등어 썩는 비린내 같기도 하고 쇠 냄새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쪽으로 갈수록 곰팡이 핀 식초 냄새가 풍겨 왔다. 역해서 숨 쉬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침실 쪽의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그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적막에 휩싸인 공기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턱 밑에 맺힌 땀방울이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이상하리만큼 호흡과 맥박이 가파르게 뛰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북소리를 내며 가슴 판막을 두들겼다. 코끝을 찡하게 하는 악취, 문틈으로 보이는 흥건한 바닥.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라 속삭였다. 오감을 찌르르 자극하는 이 불쾌한 방으로부터 당장 벗어나라고.

“카인?”

몇십 초간 머뭇거리던 발걸음은 주춤주춤 침실로 향했다. 머릿속을 뒤덮는 두려움보다 그를 향한 사랑이 더 컸던 모양이었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젖은 안색이었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걸어 나갔다.

“나예요, 이브.”

가녀리게 떨려 나온 목소리에는 눅눅한 숨소리가 묻어 나왔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찼다.

철퍽거리는 대리석 바닥은 온통 흥건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깨진 술병들. 침대에 튄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발밑을 적시고 있는 액체는 와인이었나 보다. 그런데 이 불쾌한 냄새는 뭐지? 마치 난투라도 벌어졌던 양 여기저기 부서진 파편들이 난무했다. 그녀는 침대 뒤에 위치한 와인랙 앞으로 향했다. 희미한 조명 아래 아른거리는 인영이 보였다. 구부린 어깨, 푹 숙인 몸. 다리를 벌린 채 앉아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남자.

“이브?”

제인의 눈가에 기쁨이 어렸다. 하얀 셔츠를 입은 그가 쓰러진 와인랙 위에 걸터앉은 채 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인!”

“뭐야, 이브가 아니잖아…….”

그의 말투가 평소와 좀 달랐다. 술에 취했나? 제인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몰골이 왜 그래요? 어디 다친 거예요?”

그를 향하던 그녀의 손이 굳은 채 허공에 멈췄다.

비딱한 눈초리, 차갑게 굳은 입매, 경멸이 담긴 표정. 그렇게 그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화났어요?”

카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제인의 손을 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좀 마.”

“그게 무슨……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낯설었다. 그녀를 대하는 말투도, 표정도 전에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경직되고 차가운 면이 있긴 해도 항상 반듯한 기품과 예의 바른 모습을 잃지 않던 남자였는데.

“나예요, 낙원의 모델 이브요. 당신 약혼녀요.”

“이브?”

카인이 조롱하듯 쿡 웃었다. 그 모습에 억지로 웃던 그녀의 표정도 굳었다. 분노가 확 치밀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던 제인은 턱을 부르르 떨더니 갈래갈래 찢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대체 왜 그러냐고요!”

악 소리를 지르던 그녀의 눈이 멈칫 얼었다. 홱 돌아서는 그의 품에서 뭔가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제인의 눈알도 함께 데룩거리며 움직였다. 그녀는 바닥을 굴러 가는 구체의 궤적을 빤히 쫓았다. 그것은 터진 축구공처럼 가운데가 북 찢어져 있었다. 동그란 형체는 진물 같은 걸 뚝뚝 흘리며 멈췄다. 곁눈질로 훔쳐보던 그녀의 동공도 얼어붙은 채 정지했다.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이 가슴을 뒤흔들었다.

사람의 머리였다. 칼자국을 낸 겉가죽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누가 속을 파먹기라도 한 것처럼 내용물은 깨끗하게 제거된 채였다. 힘없이 펄럭거리는 두피엔 머리털이 없었다. 찌그러진 채 뒤집힌 머리통의 앞면엔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든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제인은 얼굴의 주인을 재깍 알아보았다.

“메, 메리?”

붉고 풍성했던 머리칼은 가위로 싹둑 잘려 있었다. 짧게 남은 털마저 전동식 이발기로 빡빡 밀어 버린 듯했다. 그리고 두피를 갈라서 두개골을 절제한 뒤 뇌를 꺼냈다. 직접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조심스럽게 다룬 흔적이었다. 그게 더 소름 끼쳤다.

“이런. 미안해요, 메리.”

엘 카인은 떨어진 머리를 줍더니 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눈 감은 메리의 얼굴은 잠든 것처럼 평화로웠다. 카인은 목 잘린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어딘가 뭉개진 듯한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게 다 메리 덕분이에요.”

그는 이제 뒤에 서 있는 제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언제 올까요? 재회의 인사로 선물도 보냈는데 기뻐할지 모르겠어요. 기다리는 게 고통스러울 지경이에요. 직접 마중이라도 나가고 싶은데 말이죠.”

제인은 경련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섰다. 악몽이라도 꾸는 게 아닐까? 눈앞의 광경은 뼈가 시릴 만큼 끔찍한 공포였다.

이 남자는 미쳤어. 목을 자르고 뇌를 꺼낸 시체에 대화를 속삭이는 그의 모습은 광기, 그 자체였다. 그의 손바닥 위에 잠든 메리가 금방이라도 눈을 번쩍 뜨고 이쪽을 노려볼 것만 같았다.

뒷걸음치던 제인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이 떨어지는 바닥에 검붉은 카펫이 질척질척하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푹 찔러보았다. 손가락 끝에 점액처럼 끈적끈적한 응괴가 들러붙었다.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자 강한 비린내가 톡 쏘듯 코를 찔렀다.

놀란 얼굴을 한 제인은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멍하니 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이 온통 어둡고 붉었다. 멍해져 가는 그녀의 눈동자가 겁에 질린 채 커져 갔다.

대량의 피가 웅덩이처럼 고이면 표면은 고체처럼 굳고 저변은 젤리처럼 덩어리가 진다. 침실 바닥을 뒤덮은 건 와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밟고 있던 건 피로 된 웅덩이였다.

사샤의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담배를 물었다.

“그 남자는 메리 씨의 뇌를 엿본 거야. 제인이 그랬어. 그녀의 두개골 안이 텅 비어 있었다고. 하, 아담…… 이브가 정말 살아 있는 거야? 난 믿을 수가 없어.”

케이는 대답 대신 창백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좀 전까지 담담했던 그의 눈동자가 금이 간 유리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리사, 혹시 엘 카인이 왓슨에게 새로이 내린 명령 같은 건 없었나?”

─ 오늘 새벽 3시 15분에 관리자에게 올라간 ‘왓슨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관리자의 명으로 정유림 소위의 마지막 위치를 추적하고 이동 방향을 확인했습니다. 좌표를 송신합니다. 포인트 좌표 N.19.245.324. 성목의 광장 북쪽 출구에서 약 350미터가량 떨어진 벚꽃나무 길 지점입니다.

케이의 동공이 멍하니 풀렸다.

─ 유림은 어디예요?

─ 지금 성목의 광장인데…….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현기증과 함께 목구멍에서 낮은 신음이 일었다.

사샤는 담배를 내려놓으며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물었다.

“엘 카인이 브루클린의 성녀는 왜 찾는 거지?”

케이는 홱 돌아서며 현관을 향해 뛰었다.

“리사, 에어쉽 준비시켜!”

─ 어디로 가십니까?

“헤벨로 간다.”

녀석이 유림을 찾아냈다. 그녀가 이브란 것도 알아차렸다. 다행히도 유림은 직전에 낙원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걸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아니, 엘 카인은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녀석의 성격상 유림을 데리러 헤벨로 직접 찾아갈 것이다.

─ 게이트 밖으로 이동하는 건 출입국 관리소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왓슨에게 승인 명령을 내리도록 해.”

─ 관리자는 현재 집무실에서 실시간으로 왓슨의 명령 프로세스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스터께서 새로운 명령을 내리신다면 엘 카인의 눈앞에 명령 창이 뜨고 말 겁니다. 본인은 내리지도 않은 명령 창이 말입니다.

멈춰 선 케이는 얇게 늘어진 눈초리로 리사를 노려보았다.

“그럼 다 때려 부수고 내 발로 게이트를 걸어 나갈까? 둘 중 뭐가 더 소란스러울 것 같아?”

─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관리자는 아직 에덴 타워에 있는 걸로 나타납니다. 지금 바로 헤벨로 갈 의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안 움직였다고?”

케이의 눈이 의아함으로 번졌다. 그녀의 위치를 아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브를 데려오고 싶어서 좀이 쑤시고 있을 텐데 무슨 꿍꿍이인 거지?

리사의 얼굴이 다시 허공에 나타났다. 그녀는 적색 알람 표시를 띄우며 다급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 보고 드립니다! 낙원 내 상공에 불가시 모드인 아크레인 1기 확인.

사샤도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은 스마트 더스트가 왓슨에게 보고 중인 영상에 꽂혔다. 아마 카인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게이트 주변 하늘은 깨끗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건 에어쉽이 아니라 위성 불빛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잠잠했다. 하지만 그건 가시적인 눈속임일 뿐, 아크레인은 분명 저 안에 있었다.

─ 낙원 내 출입 등록 기체 AH-12, 게이트 앞에 착륙을 시도합니다.

긴장으로 뭉친 십 초가 모두의 심장을 움켜쥔 채 지나갔다. 케이와 사샤는 동상처럼 굳어서 화면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불가시 모드를 해제한 은빛 비행정이 지상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백조의 날개처럼 우아하게 열린 문 뒤로 한 여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용맹한 자태의 걸음걸이였다. 시원시원하면서 망설임 없는 움직임은 잘록한 허리선 때문인지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헤벨에서 온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로스티아벤의 전투복 차림이었다. 전신이 방탄 재질로 이루어진 타이트한 전투복은 그녀의 탄탄하고 육감적인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가슴에 새겨진 검은 매와 엇갈린 쌍검은 SITF의 상징, 손등을 감싼 보호대에 수놓인 성목의 가지와 지면에 꽂힌 검은 로스티아벤의 상징이었다.

높게 묶은 머리칼이 요염한 꼬리처럼 바람에 흩날렸다. 매섭게 올라간 눈초리도 그와 함께 치켜 올라가며 높다란 게이트를 올려다보았다.

“브루클린의 성녀…….”

사샤는 비로소 모든 걸 이해했다는 얼굴로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메리를 아끼는 모습에 그녀가 따뜻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조금 건방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 재회의 인사로 선물도 보냈는데 기뻐할지 모르겠어요.

얼어붙은 눈으로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던 케이는 현관 밖으로 향했다. 그는 번개 같은 속도로 사샤의 에어쉽에 올라탔다. 엘 카인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 녀석은 굳이 헤벨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녀를 이쪽으로 불러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한 선물이었다.

‘제발!’

절박한 눈빛을 한 케이는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외쳤다. 타이밍에 관해선 늘 운이 없는 편이었다. 숨이 차도록 달려가면 운명은 꼭 얄궂게도 한 걸음 차이로 그녀를 앗아 가 버렸다.

그는 에어쉽 문을 수동으로 벌컥 열었다. 휘몰아치는 광풍에 문짝이 덜컹거릴 정도였다. 기체 옆면에 달린 발판을 밟고 도약해 에어쉽 뚜껑 위로 올랐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기체 앞쪽 멀리 게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길게 호흡한 그는 몸을 바짝 낮추고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 * *

가시에 찔린 마리아는 포도 덩굴에 묶였네.

게이트 앞까지 걸어온 유림은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위하던 군중은 집에 돌아간 모양이다. 출입국 관리소의 직원들은 일찌감치 퇴근을 했을 테고. 즉, 아무도 없다. 찝찝할 만큼 고요한 정적이었다.

“아, 가려워.”

손등으로 오른쪽 눈을 문지르던 그녀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오른쪽 눈의 시야가 물에 번진 것처럼 아른거렸다. 어제부터 부스럼이라도 난 것처럼 가렵더니 왜 이러지? 충혈된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일 이상한 건 24시간 이곳을 지키는 헌병 안드로이드들의 부재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마트 워치를 눌렀다. 낙원에 별다른 뉴스는 없다. 딱히 사건 사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헌병들이 없다는 건 굉장히 인위적이었다.

“마리아?”

유림은 조심스럽게 소리쳤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스마트 워치의 라이트를 켰다. 높이 97미터에 달하는 게이트 입구는 포도 덩굴로 얽힌 창살대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낙원 내에 포도 덩굴이라면 그녀가 기억하는 한 이곳밖에 없다.

메리는 어째서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낸 것일까? 여긴 너무 탁 트인 공간이었다. 혹시 함정은 아니겠지? 유림은 긴장한 얼굴로 정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불빛을 쏘자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리암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은 지중해 위로 뜬 태양에 비친 신전처럼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경건한 심정으로 기도라도 올려야 할 분위기가 형성되자 유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숱하게 사선을 넘다 보니 위험을 감지하는 촉만큼은 동물적인 수준으로 발달한 그녀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유림은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게이트 끝을 올려다보며 살그머니 총자루를 움켜쥐었다.

‘저건 뭐지?’

매끄러운 게이트 표면 중간쯤에 뭔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스마트 워치로 아크레인을 불렀다. 소리 없이 다가온 아크레인은 발판 위에 선 그녀의 발등에 안전벨트를 감았다. 유림은 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비행정 측면에 매달렸다.

“올라가 봐.”

생체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허벅지에 감은 총집에 총을 넣고 대신 트레이드마크와 다름없는 은색 쌍검을 꺼내 잡았다.

아크레인이 둥실 떠오르자 지면의 잔디가 바람 소리를 내며 누웠다. 유림은 서핑보드를 타듯 허리를 낮추고 중심을 잡았다. 비행정은 대형 묘비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은 게이트를 따라 ‘부웅’ 날아올랐다.

미심쩍었던 물체는 멀리서 봐도 단순한 조형물이었다. 알몸의 여자를 빚어 놓은 조각상은 등 뒤로 펼친 날개와 양손을 모은 자세가 신성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었다.

‘날개라…… 천사상인가?’

낙원의 홍보부에서는 매년 3월이면 미술품들을 사들였다. 제인 왓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례행사였는데 정작 당사자인 제인은 회화나 조형물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고가의 미술품들은 일정 기간 낙원의 랜드마크들에 전시되어 이브의 품격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건 구실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이유는 미술품 매입을 통한 예산 횡령이었다.

─ 그런 곳에 쓸 돈 있으면 방위비에나 투자를 할 것이지. 신병 훈련소는 지금 실탄을 아끼느라 연습탄으로 실전 교육을 한다는데.

─ 왜 아니겠어요? 호화스러운 미술품이 낙원에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 주는 것은 아니죠. 여긴 맨해튼의 소호가 아니니까요.

에덴 타워 앞에서 투덜거리던 유림에게 재치 있게 대답한 여자는 이번에 새로 부임했다는 멜리사 클라크 장관이었다. 붉은 암사자라 불리는 그녀는 제인 왓슨과 엘 카인의 눈치만 살피던 전임 장관과 달리 소신 있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녀는 제인의 고집이나 떼쓰기에도 강경한 자세를 취하며 무서운 엄마 노릇을 했다. 따라서 멜리사가 제인의 슈거 대디Sugar Daddy60) 혹은 산타클로스를 자청하는 아이작이나 빈센트와 등을 돌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노선이었다. 미술품 매입은 올해부터 클라크 장관이 폐지한 것으로 아는데 잘못 들었나? 유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이트 정중앙에 조금 못 미친 43미터 지점.

아크레인은 공중에 멈춘 뒤 전조등의 밝기를 낮췄다.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유림은 수그렸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었다. 눈앞에는 창백한 빛깔의 천사가 날개를 펼친 채 걸려 있었다.

알몸의 천사는 양손을 합장하듯 가슴 위에 모으고 깍지를 끼었다. 살짝 틀어진 어깨와 몸을 숙인 각도가 흡사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상61)을 떠올리게끔 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목이 없었다. 양손 양발 다 달려 있는데 머리만 깔끔하게 절단된 상태였다. 조각가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목 없는 모습을 기획했나? 그렇다고 보기엔 왠지 모를 부조화가 느껴졌다. 만약 얼굴이 있었다면 성모처럼 겸손하면서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어울렸을 것이다.

“날개가 원래 저랬어?”

자세히 보니 날개 모양이 좀 이상했다. 나무 살처럼 직선으로 뻗은 날갯죽지는 등 뒤에서 여러 개가 솟아올라 있었다. 거기에 가죽 같은 게 덧대 있는데 멀리서 봤을 때와는 달리 박쥐 날개처럼 흉물스러웠다.

오른쪽 눈이 다시 가렵기 시작했다. 유림은 눈두덩을 비비며 흐릿한 시야를 구겼다. 렌즈가 말썽인가 보다. 눈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던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명했다.

“바짝 앞으로 가 봐. 잘 안 보여.”

─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잠자코 있던 아벨이 웬일로 토를 달며 재고를 권했다. 눈을 거세게 문지르던 유림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왜?”

─ 귀함하시죠. 이건 다른 대원을 시켜서 떼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대원? 흥, 커크한테 시키면 딱 좋아하겠네. 가슴과 아랫부분이 적나라한 게 딱 그 녀석 스타일이야.”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아벨의 권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귀함이라니 웬 쌩뚱 맞은 소리냐’는 눈초리로 매섭게 째려보았다. 아벨은 입을 쏙 다물었다. 상사의 뜻대로 하시라는 기색이었다.

석고상처럼 하얗다고 생각한 조각상은 의외로 푸르스름한 색을 띠는 재질의 유리 조형물에 가까웠다. 드라이아이스로 냉동시킨 듯한 표면에서는 한기가 피어올랐고 매끄러운 광채가 느껴졌다. 의문의 천사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좀 섬뜩한데? 진짜 시체라도 얼려 놓은 거 같잖아. 모양이나 크기가 굉장히 현실적이야. 표면은 유리처럼 보이는데 속은 그렇지 않아. 잘 들여다보면 피부에 난 솜털까지 보여.”

아벨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유림의 입가도 서서히 굳어 갔다. 갑자기 목멘 것처럼 숨이 답답했다. 좁쌀 같은 소름이 등골을 살살 긁어내리며 돋았다. 유림은 잇새를 사리물며 나직한 목소리로 명했다.

“분석해 봐.”

─ 일단은 귀함하시는 게…….

“분석해 보라고!”

─ 소위님.

“이거…… 조각상 맞아?”

그녀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올랐다.

“우욱!”

유림은 메스꺼운 기분에 구토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칼바람이 휭휭 불어 대는 발밑이 보였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젖었다. 50m 아래에 위치한 지면이 울렁이며 시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망할 아크로포비아62).’

특별한 장비 없이 높은 곳에 있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만큼 좀 전까진 뭔가에 홀린 것처럼 의문의 조형물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크레인은 그녀의 명대로 조각상 코앞까지 바짝 이동하기 시작했다. 속을 게워 낸 유림은 불편한 눈빛을 지었다.

델타와의 전투에서나 느낄 법한 긴장이 호흡을 조였다. 괴수의 침이 목 뒤로 뚝뚝 떨어졌을 때 느꼈던 공포와 비슷하다.

토악질을 한 몸은 뭔가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항상 몸보다 한발 늦게 깨닫는다. 본능적으로 속을 비운 위장은 이제 편안하게 닥쳐올 충격을 기다렸다. 반면 지끈거리는 측두엽은 뒤늦게 경고 알람을 삐삐 울리는 중이었다.

─ 대상 분석 완료. 보고를 받으시겠습니까?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현실을 마주하는 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유림은 차분히 눈을 감더니 심호흡을 하며 대답했다.

“보고해 봐.”

─ 분석한 대상은 조형물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체입니다. 액체 질소로 시신을 급속 냉각시켜서 유리결정화했습니다. 혈액은 모두 제거한 뒤 부동액을 주입했으나 미세혈관과 세포 조직의 손상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사후 처리이다 보니 사체의 보존보다는 시각적인 효과를 내는 데 주된 목적을 둔 듯합니다. 액체 질소로 냉각시킨 시신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히 다뤄야 합니다. 옮기려면 전문 장비와 인력이 필요합니다. 더 면밀한 조사를 위해서는 샘플의 채취가 필요합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림은 충격으로 굳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시야를 가리던 셀로판지를 누군가 제거해 준 것처럼 비로소 대상의 실체가 똑바로 보였다.

날갯죽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척추에서 잘라 낸 갈비뼈였다. 거기에 찢겨진 나비의 날개처럼 흐물흐물한 형태로 응고되어 있는 것의 정체는 더 기가 막혔다.

─ 허파입니다. 정면에서는 안 보이지만 시신의 등 쪽은 가죽이 벗겨져 있습니다. 늑골은 척추에서 끊어 낸 다음 날개 형태로 벌려 놓았습니다. 갈라놓은 피부 틈으로 폐를 늘어뜨려 독수리 날개 형상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시신을 이렇게 꾸며 놓은 것 같습니다.

“의도적이라니?”

─ 고대의 노르만 일족63)의 처형 방식인 ‘피의 독수리’를 재현한 걸로 보입니다. 처형 시 갈비뼈를 잘라서 펼치고 허파를 어깨에 얹는데, 이때 죄인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최고신 오딘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아, 하아.

아벨의 말을 들을수록 숨이 가빠져 왔다. 눈을 벅벅 비비던 유림은 결국 오른쪽 눈에 낀 렌즈를 빼 버렸다. 후련한 느낌과 함께 맑아진 시야는 생각했던 것보다 끔찍했다.

이걸 어떻게 조각상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합장한 양팔 사이로 보이는 복부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뭔가에 관통당한 상처였다. 그 외에도 온몸에 난도질을 당한 흔적이 있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조형물은 잔인하게 살해당한 주검이었다.

유림은 입술을 꽉 깨물고 턱에 힘을 주었다. 눈시울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목은…… 목은 왜 없어?”

─ 함께 전시하지 않은 듯합니다. 아마도 머리 쪽은 냉각을 시키지 않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목 부분의 잘린 모양새를 보니 혈관과 근육 세포가 균일하지 않게 찢긴 흔적이 남은 게 보입니다. 이는 목이 베일 당시 피해자가 살아 있었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만!”

멍하니 듣고 있던 그녀의 눈시울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만하면 됐어, 아벨.”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울먹이는 입술 위로 뚝뚝 떨어졌다. 가슴이 미칠 듯 답답했다. 참담함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입가에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짓을…….”

그녀는 비통한 얼굴로 울먹였다. 하지만 대답할 입술조차 남아 있지 않는 시신은 침묵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 가시에 찔린 마리아는 포도 덩굴에 묶였네.

유림은 차갑게 굳은 시신을 향해 팔을 뻗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격한 감정으로 경련을 일으킨 그녀의 손이 천사상의 손을 잡았다. 합장한 두 손은 살갗이 에일 정도로 차가웠다.

‘얼마나 추웠어? 얼마나 고통스러웠어? 이렇게 손에 닿는 냉기만으로도 피부가 쓰라리고 아픈데. 얼마나 끔찍하고 힘들었어?’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벨이 황급히 소리쳤다.

─ 상사, 조심하십시오!

흠칫 손을 뗀 유림은 고개를 홱 들었다. 머리 위에서 뭔가가 반짝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휘둥그레 커진 동공에 작고 동그란 물체의 상이 맺혔다. ‘땅!’ 하고 경쾌한 마찰음이 들리자 유림은 퍼뜩 시신을 쳐다보았다. 시신의 어깨 위로 떨어진 금속 물체는 바닥에 ‘땡그랑!’ 하고 떨어진 채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고 있었다.

─ 액체 질소로 냉각시킨 시신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질 수 있기 때문에…….

아벨의 경고가 섬뜩하게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파지직!’ 하고 뭔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프고 잔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신께서 사랑하는 이의 식어 버린 온기조차 느낄 겨를을 주시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녀의 간절한 소망과 달리 냉동 주검은 충격을 받은 어깨부터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거북이 등껍질 무늬처럼 번지던 균열은 순식간에 허벅지와 팔꿈치까지 이어지더니,

쨍그랑!

파열음을 내며 폭발하듯 ‘펑’ 터졌다. 수백 개의 파편으로 부서진 유해는 순식간에 잿더미처럼 가루가 되어 폭삭 가라앉았다. 혈관에 주입했던 부동액 글리세롤은 잘게 조각난 결정체들과 뒤엉켜 바닥에 얕은 웅덩이를 형성했다.

유림은 발밑에 떨어진 파편들과 용액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 삼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얼어붙은 살점들과 녹아내린 용액 사이에서 반짝이는 뭔가가 눈길을 끌었다. 유림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속을 헤집었다. 그러자 작은 금색 칩이 보였다. 방금 전 메리의 어깨 위로 떨어진 것의 정체였다.

─ 이게 뭐야?

─ 조력자가 준 부적.

검은 에어쉽, 블랙 스완을 타고 온 여자가 준 거였다. 사샤라고 했던가? 이걸 소중히 쥔 채 불안한 미소를 감추던 메리의 모습이 떠오르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누가 가슴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욱신욱신 저린 심장을 쥔 유림은 힘없이 뻐끔 벌어져 있던 눈꺼풀 사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형체조차 남지 않은 부스러기들.

이 속에 메리의 손발이 있고 척추가 있고 심장이 있다. 점액질로 엉킨 웅덩이 속에, 누가 버린 음식물 쓰레기처럼 쌓인 이 안에 ‘나의 메리’가 있다.

“아아…….”

빨개진 눈시울 밑으로 참았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등지고 있던 진실을 돌아보는 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스스로 그런 훈련을 아주 잘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괴로운 장면이라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그렇게 심신이 강한 군인이라고.

“아아아악!”

비명 섞인 울음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유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허둥지둥 용액과 섞인 잔존물을 주워 모아 봤지만 물컹한 잔해는 손가락들 사이로 주르르 빠져나가고 말았다. 황망한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흐리멍덩하게 풀어졌다.

그녀는 연신 깨진 부스러기들을 주섬주섬 모으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부인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게 메리일 리가 없어. 이런 게 메리일 리가 없어! 고작 이런 게…….

“으흐흑…….”

오열이 터져 나왔다. 유림은 바닥에 쏟아져 버린 유해를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그녀를 보며 아벨은 전조등을 서서히 어둡게 가라앉혔다.

─ 성질 더러운 고양이 같으니. 네가 내 여동생이라고? 마이클한테 동생은 나 하나로 충분해. 친한 척 마이클이라고 부르지도 마! 그는 장차 헤벨의 함장이 될 사람이란 말이야!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가 의식적으로 마이클을 밀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막상 당사자인 밀러는 서운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메리의 마음을 눈치챈 유림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좁은 잠수함 내에선 도망갈 곳도 없는데 되도록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었다.

당시 메리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클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헤벨의 막내로서 온갖 특권을 다 누려 온 그녀였다. 그게 하루아침에 낯선 꼬마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얄밉지 않다면 거짓이었으리라.

유림은 메리의 상실감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렇기에 신데렐라 언니처럼 구는 그녀의 심술을 말없이 감내했다. 사실은 뭐가 되었든 관심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메리는 단지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녀 역시 입양아였다. 갑자기 나타난 유림이 다른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할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메리는 애당초 독한 성격이 아니었다. 헤벨에서 군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왈가닥처럼 행동한 것뿐이지 그녀는 본래 심성이 여리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반면 유림은 사나운 야생 고양이였다. 곁에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발톱을 세우고 가르랑거렸다. 마이클의 다정함도 소용없었다. 아서 함장의 불호령도 무용지물이었다. 친절한 여성 장교 언니의 미소도, 무서운 격납고 반장님의 호랑이 눈초리도 효과 없었다. 그녀는 매번 ‘흥!’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보통 고집 센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그런 완고한 면이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얼굴에 카레를 잔뜩 묻히고선 고개를 처박은 채 밥을 먹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도도한 얼굴로 시치미를 떼는 유림의 모습에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초리로 살금살금 주위를 경계할 때마다 다들 킥킥거리며 모르는 척을 해 주었다. 그녀에게는 묘하게도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사랑스럽다는 건 아마도 저런 걸 뜻하는 거겠지. 그 모습을 훔쳐보던 메리는 풀 죽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녀가 없어도 헤벨은 봄이 온 듯 화기애애했다. 모두들 불현듯 나타난 작은 고양이와 사랑에 푹 빠진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메리는 돌연 얌전해졌다. 유림을 괴롭히던 것도 그만두었다. 본인이 아무리 싫어해도 다른 사람들은 예뻐하니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격납고에서 메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장병들과 어울리는 대신 그녀는 교양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사교계 준비라도 하는 듯 외모를 가꾸고 책을 읽었다. 짧게 잘랐던 머리를 다시 길렀다. 낡은 군복 대신 여성용 제복을 입고 다녔다.

그녀는 흡사 여자 마이클 밀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대할 때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륜이 깊은 장교들에게는 깍듯한 공손함을 보였다. 때로는 예전처럼 호방하게 굴었지만 전과 다른 기품이 그녀의 몸에 배어 있었다.

왈패 대장이 요조숙녀가 되었다며 놀려 대던 장병들도 차츰 그녀의 앞에서 머쓱하게 굴기 시작했다. 다들 어느새 그녀를 함장님의 딸, 혹은 헤벨의 아가씨라 불렀다. 앞집 동생 같던 그녀가 꽤 어려워진 분위기였다.

그런 메리를 유일하게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 유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둘 사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메리는 유림에게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이클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유림을 일컬어 자신이 ‘책임’져야 할 헤벨의 일원이라고 했다고 한다.

듣기 싫다며 귀를 막고 도망가는 유림을 붙잡아서 공부를 시킨 것도 메리였다. 그녀는 삐죽거리는 유림을 억지로 끌어안고 같이 목욕을 했다. 같은 방에서 함께 자고 가사로봇 대신 엉킨 유림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떽떽거리며 뛰어가는 유림과 팔을 걷어붙인 채 쫓아가는 메리의 모습을 보는 건 이제 헤벨의 일상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굴던 유림도 메리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유림이 처음 월경을 시작한 날 메리는 그녀에게 새 속옷을 선물해 주었다. 작은 케이크로 축하해 주는 메리를 보면서 유림은 멍한 눈빛으로 기억에도 없는 엄마를 떠올렸다.

그 후 유림은 오리 새끼처럼 메리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저씨 냄새나는 장병들에게서 언니를 보호해야 된다며 유난을 떨기도 했다. 밤마다 두 사람의 침실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를 보면 으르렁대기 바빴던 자매는 이제 혼자가 되면 다른 한쪽을 찾기 바빴다. 그들은 서로에게 있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오히려 마이클이 소외감을 느낀다며 서운해할 정도로 두 사람의 자매애는 헤벨 내 그 어떤 전우애보다 끈끈했다.

─ 유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낙원을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그러니 너는 이참에 헤벨로 복귀하도록 해.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올 때 함께였으니 나갈 때도 함께야.

─ 유림…….

─ 알겠지, 메리? 우리는 언제나 함께야.

“메리…… 흐흑…….”

엎드린 채 흐느끼던 유림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와 눈앞이 하얘져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메리.

“미안해, 메리…… 미안해, 미안해…….”

그렇게 홀로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혼자 임무를 하겠다고 했을 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메리는 내가 지켜 줘야 했는데!

“아아…… 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움켜쥐던 유림은 자해하듯 바닥을 쾅쾅 손으로 내리쳤다.

─ 상사, 그만두십시오! 상사!

“아아아! 아악! 메리! 메리를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눈물로 애원하며 울부짖던 고함 소리가 멈칫 수그러들었다. 고개를 처든 그녀의 동공이 어딘가를 향한 채 멈춰 있었다. 멀리서 뭔가를 포착한 홍채는 조리개처럼 서서히 수축하며 눈초리를 좁혔다.

환해진 게이트 꼭대기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곳을 빤히 보던 그녀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녀석이 아래를 흘끗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슬쩍 웃었다. 광대처럼 입꼬리를 찢어 올리며.

유림의 눈에 번뜩 살기가 어렸다. 그녀는 날렵한 표범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아크레인에 올라탔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문손잡이를 잡은 채 바깥에 매달리며 양손에 낀 장갑을 꽉 조였다.

유림은 눈가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쓱 문질러서 닦았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저 개자식, 놓치지 마.”

아크레인은 폭발하는 기류를 타고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몸을 낮춘 채 올라탄 그녀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죽여 버리겠어.’

유림은 칼집에 꽂은 은빛 검을 꺼내어 손에 꽉 쥐었다. 거센 바람이 뺨에 부딪치며 가슴을 서늘하게 할퀴고 달아났다. 이건 메리의 영혼이다. 그녀가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남기고 간 손톱자국이다.

‘울지 마, 메리. 내가 복수해 줄게.’

게이트 꼭대기에 도달한 아크레인이 ‘위우우웅’ 소리와 함께 지면으로 착지했다. 유림은 기체가 착륙하기도 전에 바람을 휘감듯 가뿐한 몸짓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잿빛이 섞인 옅은 금발을 갖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주위가 환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음영진 채 잘 보이지 않았다. 쭉 찢어진 그의 입매가 더없이 기쁜 듯 웃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맥박은 차분하게 뛰고 있었다. 혈관에 흐르는 피가 서늘하다. 잠겨 있던 의식이 깨어나듯 가슴은 붉은 것으로 출렁였다. 불길이 점차 거세게, 강렬하게 타오른다. 억누를 수 없는 무언가가 심장을 태우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가 검붉은 눈초리에 맞춰 칼을 들었다. 그리고 허공에 날카롭게 휘두른 순간, 남자는 흠칫 놀란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자는 긴장한 채 목에 난 털들을 바짝 곤두세웠다. 싸늘한 표정의 유림이 어느새 그의 코앞에 다가와 살기 어린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더니 무표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가 엘 카인이지?”

“크윽…….”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황홀한 듯 웃었다. 훌륭해. 정말 훌륭하다. 그녀는 그야말로 검을 든 여신이었다. 움직임을 감히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었다.

바로 저 눈이었다.

십오 년간 잊을 수 없던 눈초리.

그는 붉게 물든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흐트러짐 없이 굳건한 눈빛엔 베일 듯 날카로운 살기가 아름답게 얽혀 있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 건가?”

엘 카인은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한 눈빛으로 물었다. 유림은 대답할 가치도 못 느낀다는 얼굴로 그를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채찍질을 하듯 허공에서 팔을 휘둘러 그의 안면에 주먹을 콱 날렸다. ‘퍽’ 하고 살과 뼈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검을 쥔 그녀는 바닥을 짚고 물구나무서듯 몸을 뒤집어 그의 턱에 발차기를 날렸다. 그가 뒤로 붕 떠서 날아가자 유림은 도약하여 날아오르며 허공에서 그의 갈비뼈를 걷어찼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털썩 떨어진 엘 카인은 힘없이 대大자로 누웠다. 그는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힘 빠진 듯 웃었다. 천천히 걸어온 유림은 경멸 어린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총탄도 아까운지 검을 들어 그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그가 팔을 번쩍 들어 맨손으로 그녀의 칼날을 잡았다.

“잠깐.”

유림은 냉랭한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운한데? 마치 처음 본다는 표정이잖아.”

“처음 보니까.”

“미카엘보다 내가 널 먼저 만났는걸. 기억 안 나?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시베리아 연구소였어. 그곳에서 내가 널 직접 데리고 나왔지. 정말 다 잊어버린 거야?”

그녀는 높게 묶은 머리를 찰랑이며 그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호기심 어린 고양이처럼 보였다. 유림은 코웃음을 쳤다.

“전혀 모르겠는데? 그런데 너 생긴 게 밀러를 많이 닮았네?”

엘 카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히려 시큰둥한 태도로 노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더 가슴이 뛰었다. 사사로운 정 따위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려고 하다니, 그건 과거 여자들이 그에게 써먹어 왔던 방식이었다. 그딴 걸 흉내 내려고 한 스스로가 수치스러웠다.

그녀의 냉혹한 면은 일족의 순수한 본성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우리와 닮았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너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겠지. 이브, 너라면.

“그와 난 형제거든. 너와 메리와 달리 진짜 형제 말이야.”

유림의 눈이 놀란 듯 흠칫 커졌다. 카인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그래, 그 표정! 메리도 처음엔 그런 얼굴을 했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면서 안 믿으려고 하지 뭐야? 하지만 곧 내게 측은한 마음을 갖더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아주 착한 여자였어. 내 모든 어둠과 구렁을 제가 다 채우고 지워 주겠다며 발버둥을 칠 정도로…….”

쿡쿡 웃는 그의 이마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칼날을 막아 쥔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유림은 의아한 눈초리를 지었다.

‘꽤 깊게 베였는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그는 화가 난 아이처럼 눈썹을 잔뜩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여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좋다고 매달릴 땐 언제고 나중에는 꼭 원망을 품어. 메리는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말 아쉽고 화가 날 정도야.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참, 내 선물은 어땠어? 아주 예술적인 소멸이더군. 그녀의 품격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죽음이었지.”

유림은 어금니를 꽉 사리물었다.

가여운 메리, 분명 망설였을 것이다. 힘들었겠지. 밀러와 이토록 닮은 얼굴이라니……. 그녀에게 있어 너무 잔인한 임무였다. 그걸 알고도 직접 하기로 마음먹은 메리의 심정은 얼마나 처참하고 괴로웠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울분이 끓어올랐다.

“메리도 좋아했을까? 죽은 뇌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참 슬프네.”

“메리의 목은? 어디에 뒀어?”

“그건 내가 잘 보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뇌를 제거한 머리만이라도 괜찮다면 가져가도 좋아.”

유림의 입매가 뒤틀렸다. 미친놈, 이 새끼는 정신병자다.

“그녀의 뇌는 정말 최고였어.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하더군. 다른 녀석들의 기억과 본인의 기억이 혼합된 채 엄청난 양의 정보가 뒤엉켜 있었지. 꽤 애를 먹었지만 결국 그 속에서 네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어. 착한 메리는 시체가 되어서까지 날 도와주려 한 것 같아. 뭐 이제는 쓸데도 없지만.”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아?”

유림은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엘 카인은 홀린 듯 붉은 열매처럼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아니면 후회라도 하고 있는 건가? 주절주절 변명이 늘어지네.”

키스할 듯 다가온 그녀의 숨결이 입가에 와 닿자 그는 이성이 마비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피식.

비웃는 웃음소리 위로 붉은 살기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그의 손을 썩둑 베어 냈다. 허공에 잘린 손가락들이 흩어지자 당황한 그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은빛 검이 이미 코앞에 시퍼런 서슬을 휘두른 후였다.

“크헉!”

그의 눈두덩을 베어 낸 칼날에서 피가 뚝뚝 흘러 맺혔다. 엘 카인은 양 눈을 부여잡으며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네 품격에 어울리는 죽음은 뭔지 생각해 봤어?”

유림은 검은 사신처럼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다시 양손 검을 휘둘렀다. 눈에서 피를 흘리던 엘 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녀의 칼날이 그의 목을 스치며 살갗을 베었다. 잘려 나간 성대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니면 혹시 너도 불사신이야?”

유림은 피범벅이 된 칼을 허공에 털어 내며 물었다.

“아, 대답을 못하겠구나.”

엘 카인은 바닥을 짚고 허리를 꺾은 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목에서 쿨럭이며 쏟아지는 핏물 때문에 말은커녕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유림은 이마를 훔쳤다. 손등에 땀이 흥건히 묻어났다. 너무 흥분했나? 그녀는 칼날을 거울삼아 얼굴을 비췄다. 눈 주변에 수십 개의 실핏줄이 모인 채 터질 것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뭐지?’

아까부터 눈가가 뜨거웠던 건 눈물이 아니라 혈관이 부은 탓이었다. 유림은 검붉게 물든 눈 밑을 매만지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네. 두 눈을 다 베어 버리면 널 볼 수가 없잖아.”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림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려 엘 카인을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일어선 그가 생긋 웃고 있었다. 그를 본 유림의 눈이 흠칫 커졌다. 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말도 안 돼. 치명상만 몇 군데를 입혔는데 저렇게 빨리 회복할 리가…….’

자신도 회복이 빠른 편이긴 했지만 저 정도 출혈을 당하고 겨우 수십 초 만에 원상태로 복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전사형이 아니라 싸움을 잘 못하거든. 회복도 느리기 때문에 다치는 걸 안 좋아해. 그런 건 미카엘이 다 가져가 버렸으니까. 우리 둘이 한 몸이었다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던 유림은 경직된 얼굴로 손에 쥔 은색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검으로 왼 손목을 홱 그었다.

아프다. 피가 흐른다. 꿈이나 무의식 세계가 아니다. 이 통각도 거짓일 수가 있는 건가? 눈앞이 어지러웠다. 급속도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 약물인가? 아니면 가스?

손으로 입을 막은 유림은 주변을 한 바퀴 훑으며 관찰했다.

“아벨.”

아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주변이 환하지? 분명 한밤중일 텐데. 휘청거린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핑그르르 돈 머릿속이 눈꺼풀을 닫았다.

“여기서 그만큼 날뛴 것도 대단한 거야. 아주 밀도 높게 만들었거든. 행여나 이브 네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 말이야.”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유림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만족감에 웃었다.

“상처내지 마. 어쨌거나 지금은 널 회복시켜 줄 생각이 없으니. 사실 처음부터 승패는 결정된 거였어. 네가 내 구렁에 들어온 순간부터…….”

‘구렁? 함정을 뜻하는 건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산소가 부족했다. 공기가 인위적으로 어디론가 빨려 나가고 있다. 그녀는 가쁜 호흡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만 돌아갈까? 더 놀고 싶다면 다음에 또 상대해 줄게.”

유림은 쓰러진 채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손으로 날 만지지 마. 메리를 죽인 그 손으로 날 만지지 말라고!

슈우우웅!

뒤에서 빛의 속도로 날아온 뭔가가 그녀의 앞에 서 있던 그를 ‘즈퍽!’ 하고 들이받았다. 유림은 홱 고개를 들었다. 시뻘건 핏물이 파바박 튀었다. 엘 카인은 붕 떠올라 게이트 끝까지 날아가더니 바닥에 내리꽂히듯 추락했다. 그를 날려 버린 물체도 속도를 이기지 못한 채 함께 날아가 버렸다.

땅에 떨어진 엘 카인은 쿵 소리와 함께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는 관절이 기이하게 꺾인 채 바닥에 툭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굴러 모서리 끝에 다다라 게이트 아래로 휙 떨어졌다.

유림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쳐다보았다. 터널 입구처럼 동그랗게 난 구멍 사이로 누군가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

어둠 속에서 남자의 두 눈만큼은 형형히 빛났다. 암홍색으로 붉게 칠한 동공은 섬뜩한 살기를 휘감은 채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다. 화이트 채플에서 자신을 구해 줬던 사람.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그때의 저 붉은 눈을, 연기처럼 사라지던 그의 움직임을.

그는 말없이 시선을 던지더니 그녀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거지? 유림도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너머로 떨어졌던 엘 카인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모서리 끝에 매달린 채 기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유림은 힘 빠진 손으로 악을 쓰며 검을 쥐었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몸을 일으키다가 놀란 듯 얼어붙었다. 두 남자는 서로를 알아본 듯 눈빛을 주고받았다.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서 있던 붉은 눈의 남자에 비해 엘 카인은 주춤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만 갈까요?”

등 뒤로 다가온 그가 낮고 부드러운 선율의 어조로 물었다.

‘이 목소리…….’

역광으로 인해 남자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림은 온몸의 긴장이 쭉 풀리는 걸 느꼈다.

‘역시…… 그랬던 거야?’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힘없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응.”

그는 유림을 번쩍 들어 안더니 천장을 향해 가볍게 도약했다. 뭔가 부욱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을 빠져나온 것처럼 진짜 밤하늘이 펼쳐졌다.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온 에어쉽은 공중에서 ‘끽’ 정차하며 문을 열었다.

“멈춰! 멈추라고!”

뒤쫓아서 달려오던 카인은 하늘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며 부르짖었다.

“멈춰! 이브! 이이이이브!”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는 그의 절규가 거세게 기류를 갈랐다. 유림은 진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흐릿한 시야에 남자의 모습이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붉은 눈 대신 다정한 암갈색 눈이 그녀를 보며 예쁘게 웃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그가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녀석은 더 이상 쫓아올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안심해도 돼. 그렇게 다독인 음성이 키스를 하며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눈을 감은 그녀는 깊은 우물에 빠지듯 곧 잠이 들었다. 미약하게 깨어 있는 의식 속에 투닥거리며 다투는 말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 아니, 세상에…… 무슨 투포환도 아니고 아크레인을 그렇게 야구공 쥐듯 던져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어.”

케이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카인 녀석이 유림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본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아크레인이 없었다면 게이트의 대리암을 뜯어내서 던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리사는 할 말을 잃은 채 폭삭 찌그러진 아크레인 기체의 영상을 수신했다. 아크레인은 게이트 옆에 추락한 채 ‘푸슉’ 하고 연기를 뿜어내며 사망 신고를 띄우는 중이었다.

─ 보이시죠? 저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렇게 박살 난 아크레인을 본 연맹군 쪽에서 대체 무슨 상상을 하겠느냔 말입니다. 저건 누가 봐도 기습을 당한 모양새라고요. 낙원 내에서 불시의 공격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녀는 영상을 보고 반성 좀 하시라며 쫑알쫑알 잔소리를 해 댔다.

“시끄러워, 리사.”

가식적인 미소로 생글거리던 케이는 짜증 섞인 눈웃음으로 그만하라며 일축했다. 마스터께서 이렇게 성격 나쁘신 걸 소위님께서 아셔야 하는데. 리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못다 한 말을 구시렁구시렁 이었다.

─ 일단 소위님은 헤벨로 모시겠습니다. 지금 보니 체온과 맥박 수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방금 전 전투에서 무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일단 헤벨에서 진단부터 받으신 후에 행보를 결정하시죠. 저는 스마트 더스트를 벗어나면 더 이상 마스터와 통신을 할 수 없으니 데이터는 아벨 측에…….

“헤벨로는 가지 않는다.”

─ 예?

“지금 찍는 좌표로 이동해.”

─ 어, 여기는…….

좌표를 본 리사는 잠시 침묵했다.

─ 알겠습니다.

【기체 내 안내 메시지】

목적지를 변경합니다. 예상 소요 시간은 3시간 30분 내외입니다. 본 기체는 초음속 항공 모드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초음속 항공 모드 시에는 반드시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가시 모드로 전환합니다. 에너지 소모가 크므로 절전 시스템을 가동하겠습니다. 5초 후 스마트 더스트의 감시망을 벗어납니다. 곧 본기와 낙원 사이의 접속이 끊어집니다. 카운트다운 5초, 4초, 3초…….

에어쉽 내부에 리사의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그녀는 케이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 마스터…… 돌아오실 거죠?

턱을 괸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리사는─아마 착각이었겠지만─ 슬픈 눈빛으로 그와 유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평소 두 사람이 출근할 때와 다름없는 미소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정 소위님, 애덤슨 중사님.

3초, 2초, 1초…… 피빗.

우리 기체가 로스트 헤븐을 떠납니다.

* * *

피부에 닿는 이불 느낌이 보송보송하고 기분 좋았다. 유림은 눈을 감은 채 킁킁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오래된 면 냄새, 거의 사라진 세재 냄새,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 나무 냄새, 온실에서 키우는 화초 냄새, 그리고 이건…… 막 지은 고슬고슬한 밥 냄새.

집은 늘 부산스러웠다. 소음 대부분의 원인은 괴짜 천재라 불리던 바딤이었지만 가끔은 사라도 그 소란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요리를 잘했다. 그런데 자꾸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해서 문제였다. 주방에서는 종종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발생했는데, 그럴 때마다 타이탄과 바딤이 한숨을 내쉬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물론 이건 사라가 그 정도의 기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드르륵, 드르륵.

아빠가 또 에어쉽을 분해했다가 재조립하는 모양이었다. 킥킥 웃음이 새어 나오던 입가에 꼬르륵 배꼽시계가 알람을 올려 보냈다.

으음, 그만 일어나야겠다.

오늘은 간장 맛이 나는 카레를 먹고 싶은데.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할까?

“배고파…….”

군침을 다신 유림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누군가 스피커를 꺼 버린 것처럼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뚝 끊겼다.

고요하다.

차분한 아침을 맞은 기분이었다. 무거운 몸과 달리 머리는 맑고 가벼웠다. 그녀는 살짝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몽롱한 동공을 움직였다.

제일 먼저 높다란 천장이 보였다. 따뜻한 상아색 벽지엔 연보라색 줄기와 꽃이 그려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낡은 담요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휘청거리며 침대를 짚고 앉은 그녀는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내 방인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여긴 그녀가 지냈던 공간이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방 안에는 아기 분 냄새 같은 은은한 향취가 배어 있다. 왠지 마음이 아늑해지는 걸 느꼈다. 침대에서 내려온 유림은 덮고 있던 이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 헤진 이불은 누군가 손수 꿰매었는지 바느질 솜씨가 삐뚤빼뚤 엉망이었다.

─ 사라는 퀼팅에 소질이 없네요.

─ 흥, 두고 봐. 다음번에는 찍소리 못할 작품을 보여 줄 테니까.

─ 하지만 따뜻해요.

─ 그래?

─ 사라가 만들어 준 이불을 덮으면 저도 언젠가는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대화에 그녀는 멍한 눈을 깜빡였다.

“아…… 왜 이러지?”

어느새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손등 위로 떨어졌다. 유림은 영문도 모른 채 젖은 손등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슴 한쪽이 시큰시큰하게 저려 왔다. 그런데 속이 우묵한 나무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허하다.

웅덩이에 떠다니는 부목처럼 무기력한 눈동자엔 채워진 게 없었다. 머릿속에서 웅얼거리는 잡음들은 라디오 주파수처럼 잡힐 듯 말 듯 지직거렸다.

‘엄마? 아빠?’

유림은 불안감에 휩싸인 얼굴로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자동인식 센서가 부착된 미닫이문이 열리자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텅 빈 거실엔 가사로봇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사마귀처럼 생긴 로봇은 집게 모양의 팔 하나를 움직이며 몸을 회전시켰다. 다른 한쪽 팔은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좋은, 아침, 입니다, 아가씨. 아침, 식사는, 카레로?

‘반말하네?’

유림은 눈썹을 까딱 치켜세우며 로봇을 노려보았다. 구체 화면으로 된 그의 얼굴에는 타이탄Titan이라는 글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을 스캔한 타이탄은 감정 추론을 하더니 바퀴가 달린 발로 굴러다니며 말했다.

─ 제가, 나이가, 더, 많습니다.

“닥쳐. 인공지능한테 나이가 어디 있어.”

─ 말버릇이, 안 좋아, 지셨군요. 예절, 수업을, 넣겠습니다.

“뭐?”

─ 저희도, 나이를, 먹습니다. 인공지능에게도,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누가 그래?”

유림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 아가씨의, 아버님이신, 페트로비치, 박사님께서, 그러셨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타이탄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핑계를 대다니 약삭빠른 녀석. 엄청 재수 없는데 딱히 뭐라고 반론할 수가 없다. 인공지능 주제에 이렇게까지 짜증 나게 하다니, 어떻게 보면 대단한 놈이었다.

홱 돌아선 유림은 다시 한 번 타이탄을 찌릿 째려보고선 걸어갔다.

“그런데 이건 뭐야? 벽에 웬 구멍들이 이렇게 나 있어? 이런 거 없었잖아.”

벽을 매만지며 자연스럽게 묻던 그녀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반대쪽 벽에도 있다. 바닥에도, 모서리에도, 가구에도 손가락이 쏙 들어갈 법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그것들을 가만히 쓸어 보던 유림은 어두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총탄 자국…….”

무슨 일이 있었나?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2080.07.21.

그날 집 곳곳에는 구멍이 생겼다. 슬픔이 남기고 간 빈자리, 상실의 고통이 남기고 간 갈증이다.

─ 마다Mada!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울컥 차오른 눈물이 턱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유림은 양 손바닥을 적신 물기를 내려다보았다. 멍한 눈동자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이러지? 답답한 가슴을 저도 모르게 쥐어뜯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슬픈 목소리가 자꾸만 감정을 북받치게 만들었다.

“네가 남기고 간 구멍이야.”

창문이라도 열렸는지 시원한 바람결이 느껴졌다. 파도를 타듯 다가온 목소리가 등 뒤에서 안아 주며 속삭이듯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날 이후로 쭉 내 심장에 남아 있던 구멍.”

유림은 커다랗게 뜬 눈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오페라 무대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벽 전체가 커다란 아치형 창문으로 이루어진 채 달빛을 투과시키며 반짝반짝 빛났다. 얕은 창턱은 무릎에도 닿지 않는 높이였다. 그 위에 그가 걸터앉아 있었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월광 아래, 옅은 머리칼이 빛을 머금은 채 은은하게 춤췄다. 달빛이 스치는 그의 눈가에 미소가 어렸다.

─ 엄마, 아담의 눈동자는 토성이랑 목성을 닮았어. 왜 나랑 다른 색이야?

─ 왜냐하면 오빠는 우주에서 온 왕자님이거든. 어린 왕자처럼 말이야.

온몸이 오색 빛깔의 감정으로 찬란히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조각난 기억들이 수렴하듯 마구마구 모여든다.

어린 왕자를 믿고 있던 건 사라였다. 그녀는 모자를 보아 뱀이라고 믿었고 자신이 발견한 소년을 머나먼 행성 혹은 네버랜드 같은 이상향에서 온 아이라고 생각했다.

사라가 떠나고 홀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채 살아오던 소년은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지만, 그는 몸에는 아직도 요정의 가루가 남아 있던 모양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여전히 먼 우주 행성의 왕자님으로 보였으니까.

담갈색 눈동자가 암홍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홍채가 붉어질 때는 그녀의 것보다 더 어둡고 깊게 덩어리지듯 가라앉는 걸 볼 수 있었다. 좀 더 잔혹하고 포악한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눈동자.

“잘 잤어?”

얇은 미성의 목소리는 어느덧 낮고 그윽한 음성으로 변해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웃는 그의 미소가 바람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입가에도 물그스레한 미소가 번졌다. 홍시처럼 노을 색으로 번진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럼에도 기쁘게 웃는 그녀는 수줍은 듯 뒷짐을 지며 작게 대답했다.

“응.”

웃고 있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유림은 배시시 웃으며 손등으로 눈가를 쓱 훔쳤다.

케이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눈썹달처럼 웃었다. 다정한 웃음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심장 고동 소리도 그에 맞춰 쿵쿵 뛰었다.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입술 사이로 노래하듯 말을 건넸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이브.”

그리고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멈칫 웃음이 끊겼다. 그의 목소리가 잊고 있던 이름을 부른 순간, 가슴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다. 멍하니 서 있던 그녀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울먹이던 유림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이 작은 들꽃처럼 가련했다. 브루클린의 성녀답지 않게 나약하고 여린 모습. 하지만 그에게 있어선 모두 똑같은 이브일 뿐이었다. 눈물 콧물 쏙 빼며 서럽게 우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그녀였다.

케이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유림을 보며 픽 웃었다. 그는 다 울었냐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살짝 팔을 벌렸다.

“얼마나 힘이 세졌는지 한번 볼까?”

빨개진 코를 문지르던 유림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진심이냐는 듯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그러자 케이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유림이 작정한 듯 몸을 낮추자 케이의 눈이 흠칫 커졌다. 그는 불현듯 뭔가 생각난 표정으로 등 뒤를 홱 돌아보았다. 창문 하나 없이 휑하니 뚫린 아치형 벽으로 절벽에서 흘러온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바닥에는 어둠 속에 깔린 검은 암초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케이는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잠깐만, 이브! 뒤에 낭떠러지가…….”

돌아본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포자기한 눈빛을 지었다. 뒤로 한 발 물러선 유림은 이미 그의 말은 귓등으로 무시한 채 지면에서 발을 떼고 있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캥거루처럼 그의 품을 향해 와락 뛰어내렸다. 케이는 하체에 힘을 주고 오른팔로 그녀의 몸을 받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왼팔을 뻗었다. 휘청, 창밖으로 넘어간 두 사람은 시소처럼 기우뚱거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는 180도 가까이 눕혀진 허리에 힘을 주며 왼손으로 창틀을 움켜쥐었다.

“허리 힘 좋네.”

유림은 윗몸일으키기를 하듯 몸을 접는 그를 보며 감탄했다. 허공에서 그녀를 안은 채로 누운 몸을 들어 올릴 정도면 하체와 허리 근육이 얼마나 유연하고 강해야 하는 건지.

“그런데 입대 테스트 때 기록은 대체 왜 그런 거야?”

몸을 일으킨 그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시치미를 뚝 떼며 생긋거리는 그의 모습에 유림은 “흐음.” 하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긴 옛날에도 운동을 못하긴 했지.”

중얼거리던 그녀에게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바로 며칠 전까지 봤잖아.”

괜히 장난치듯 받아쳤지만 그녀도 겸연쩍은 표정이었다. 찡하게 코끝이 울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

미소가 사라진 그의 목소리가 갈라진 채 젖었다.

“죽을 수 있다면 죽어서 만나고 싶을 정도로.”

모든 걸 마치면 정말 그녀를 보러 가려고 했다. 노아에게 부탁해서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었다. 이브와 사라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내 세상의 종말은 너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어.”

케이의 나직한 목소리에 아픈 기억이 스며들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절망.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꽉 껴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숨결에 울음이 섞였다.

“그런 고통은 두 번 다시 겪기 싫어.”

절실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부딪치듯 입을 맞췄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키스였다. 거칠게 숨결을 나눈 두 사람은 흐려진 눈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건 네가 될 거야.”

케이의 말에 유림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비스듬히 숙여 깊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신음에 케이는 흐릿한 눈으로 입술을 비스듬히 늘렸다. 애가 타듯 조심스럽게 다루던 그의 키스가 점차 격정적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가슴골이 흔들리며 얽힌 혀 사이로 열기가 타오르자 그는 결심한 듯 단호한 눈초리로 말했다.

“나를 네 권속으로 삼아.”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서늘하게 그었다. 폐부가 뒤흔들리면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강렬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담의 눈동자가 붉은 은하수처럼 묽게 일렁였다. 그의 체취로 젖어 있던 그녀의 입술이 잘게 호흡했다.

“사랑해, 이브.”

멍하니 굳어 있던 유림의 눈시울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계속 울컥거리던 심장이 원했던 한마디가 무엇이었는지.

“내가 널 몹시도 사랑한다는 의미야.”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어루만지듯 고백했다. 세상에 더없을 아름다운 미소와 오롯한 애정이 가슴을 휘감았다. 망연히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서 서서히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에게 폭 안긴 유림은 결국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외전 A Midsummer Night’s Dream

【특종! 단독 보도】

각종 루머가 난무했던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의 생존 소식!

“이곳은 낙원입니다, 여러분. 하지만 낙원을 다스려 왔던 건 천사가 아닌 악마였습니다.”

잠적해 있던 그가 고백한 낙원의 이면! 그 충격적인 진실을 전하다.

관리자 아담의 정체와 그가 저지른 잔인무도한 행실들, 입실론들의 실상과 허울뿐인 이브의 실체, 그리고 평의원들의 더러운 추태까지…….

「낙원 뉴스: 조셉 에반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우리야 세르게이의 뉴스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낙원 뉴스의 편집장인 조셉 에반스는 그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 왓슨 3세는 외부 기자들이 정보를 밖으로 유출하는 걸 막기 위해 주민이 아닌 자들은 모두 게이트 내 대합실로 이동시켰다. 거센 항의가 잇따랐지만 평의회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낙원 내에서 연이어 테러가 발생한 마당에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고자 보안을 강화시키는 것은 당연지사. 단, 외부 수사기관으로 임명한 헤벨은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했다.

인터뷰 장소는 기억의 도시의 상징인 황금의 바벨탑 앞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울어져 보이는 바벨탑은 최근 아슬아슬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는 낙원의 운명을 조롱하듯 비스듬히 등을 숙이고 있었다.

우리야는 경호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군청색의 정복 차림이었는데 왼쪽 가슴에는 총사령관 마크가 달려 있었다. 그 아래 빼곡하게 박힌 약장들은 그의 신념이었고 어깨 휘장에 새겨진 네 개의 별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준비된 단상 위에는 낙원 뉴스의 편집장인 조셉 에반스가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원형의 크리스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과의 단독 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낙원의 주민들은 대부분 집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회견을 시청하고 있었다. 로스티아벤의 장병들 역시 모래의 도시 술집에 모여 말없이 인터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총사령관의 얼굴을 쳐다보며 술렁거렸다.

“총사령관님은 전사하시지 않았나?”

“어이, 나는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형무소 앞에서 말이야…….”

“그러게, 나도 분명 죽었다고 들었어.”

에덴 타워의 대회의실도 긴급 소집등이 들어와 있었다. 회의실에 접속한 평의원들의 낯빛은 시체처럼 파리했다. 다들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 분명 우리 다 같이 우리야 세르게이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 뿐만 아니라 그가 살해당할 당시의 영상까지 시청했지요.

아이작은 두 손을 모아 턱을 괴고 말했다.

─ 일단 지켜봅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나서 대응을 생각해도 늦지 않소.

다들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폭탄을 껴안은 자가 이쪽으로 뛰어들지 저쪽으로 달려들지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초점은 다시 조셉 에반스와 우리야 세르게이의 단독 회견장으로 향했다. 조셉은 능숙하게 회견을 이끌어 나갔다. 그의 얼굴은 초지일관 뻔뻔할 정도로 태연하고 차분했다.

“장군님께서 오늘 인터뷰를 통해 꼭 밝히고 싶으신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야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모래의 도시 술집 ‘울부짖는 인어’에서 이를 지켜보던 장교 하나는 갸웃거리며 말했다.

“총사령관님께서 어딘지 좀 평소와 다르시지 않나?”

우리야는 평소 말할 때 특유의 묵직하고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엘리트 모범생 같은 이미지였다. 단정한 어투와 꼿꼿한 자세는 꼭 신입 장교처럼 딱딱해 보였고 말할 때 간혹 보이는 미소는 정치인들의 계산된 표정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러게, 꼭 살아 있는 안드로이드 같네.”

“그래서 옆에 심박동 수가 표시되고 있잖아. 안드로이드는 아니야.”

거짓말 반응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야의 심장 박동 수가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그가 로봇이 아닌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는 오랜 시간 낙원의 꼭대기에서 많은 것을 목격해 왔습니다. 권력층 내의 비리라든지, 쉬쉬하며 덮인 살인과 억울한 죽음이라든지 말입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지금,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참혹한 죄인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죄인이라면 낙원의 군권을 쥐신 총사령관님께서 검거를 하면 될 일인데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 폭로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말씀드릴 사람은 여러분 모두가 이곳에서 가장 믿고 존경해 마지않아 왔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낙원에서 유일하게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분이 대체 누구죠?”

“그동안 그는 낙원의 관리자라는 미명하에 왓슨 3세와 스마트 더스트를 손에 거머쥐고 독재자 못지않은 권력을 남용해 왔습니다.”

“관리자라면…… 설마 에덴 타워의 ‘아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관리자 아담의 죄를 고발하려 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부터 털어놓는 이야기는 모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임을 맹세합니다.”

회견을 시청하는 자들 중 누구도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맥주를 마시며 웅성대던 군인들조차 넋이 나간 얼굴로 술잔을 툭 내려놓고 있었다.

낙원의 관리자, 아담.

어찌 보면 낙원의 교황과도 같던 자였다. 정·재계와 동떨어져 하나의 신앙으로 군림하던 남자의 이야기가 막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우리야는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낙원의 관리자 본명은 엘 카인입니다. 그의 이름을 익히 들어 본 분들도 계실 겁니다. 왓슨 그룹 내에서 그는 ‘성공의 아이콘’과 같은 인물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램지 왓슨 회장이 병석에 있는 지금, 엘 카인은 실질적으로 왓슨 그룹의 수장이죠. 왓슨가의 상속녀인 제인 왓슨의 약혼자라는 타이틀도 그 점에 한몫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군요.”

회견 영상을 보던 제인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주먹을 쥐며 벌떡 일어났다.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사샤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흥분하지 마. 저자가 원하는 게 뭔지 들어 봐야지.”

부들부들 떨던 제인은 마지못해 다시 앉아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우리야 세르게이, 네가 감히 우리들 등에 칼을 꽂아?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들개 같으니.

“슈퍼컴퓨터 왓슨 3세에 관리자로 등록된 이름은 아담인데 이걸 변경하려면 관리자 권한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엘 카인은 그게 불가능합니다. 패스워드를 모르거든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담이라는 이름을 이어서 써 왔던 겁니다. 다행히도 낙원의 설계자는 왓슨 3세를 처음 선보일 때 엘 카인을 공동 사용자로 등록시켜 줬습니다. 이런저런 기능을 맛봐야 왓슨 3세를 비싼 값에 사 줄 테니까요. 즉, 엘 카인은 관리자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만 있었던 겁니다. 진짜 관리자 권한을 실행시키려면 패스워드가 필요한데 설계자가 그것까진 알려 주지 않았던 거죠. 엘 카인은 그저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조셉이 놀란 척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문했다.

“그럼 진짜 관리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원래 로스트 헤븐의 프로젝트 개발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섬의 소프트웨어를 구축한 왓슨 3세의 설계자 정체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리 박사만이 알고 있죠. 엘 카인은 그들에게서 낙원을 강탈한 겁니다. 그는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로스트 헤븐에 담긴 그들의 신념과 이상을 짓밟았습니다. 낙원을 도둑맞은 그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우리야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에덴 타워가 있는 쪽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손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영상을 보고 있을 주민들과 눈을 맞추듯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쉬이 믿기진 않으시겠죠. 엘 카인이란 남자가 얼마나 비정한지를 보여 줄 반증이 있습니다. 이번에 테러 용의자로 잡힌 나츠 시게노, 그는 사실 엘 카인의 자식들 중 한 명입니다.”

적막이 불던 바람의 도시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양 떼처럼 상공에 떠 있는 아파트 안에서 조용히 인터뷰를 시청하던 주민들이 동요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에어쉽을 타고 기억의 도시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직접 회견장으로 가서 이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낙원의 권력층이 심장부에 숨기고 있던 이면의 진실이란.

“자식들이라면 나츠 시게노 외에 아이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십칠 년 전, 태양의 도시에 있던 입실론 하나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엘 카인의 오랜 연인이고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기밀문서 밧세바. 비공식적인 최초의 입실론이자 엘 카인의 첫 여자. 그리고 그녀가 낳은 쌍둥이 나츠와 유메.

“그 아이들이 설마 낙원의 고스트들을 이끄는 오베론의 수뇌부가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화면에 비친 우리야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조셉과 우리야는 준비된 각본을 읽어 나가듯 시종일관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오히려 보는 이들이 더 손에 땀을 쥐며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지?’

허공에 뜬 부유 의자에서 ‘윙’ 하고 엔진 소리가 났다. 유메는 뉴스 영상에 가까이 다가가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몇 번을 노려봐도 우리야의 얼굴이 확실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우리야 세르게이는 죽었을 텐데…….”

“맞아. 우리야는 죽었어.”

유메는 뭉뚝한 몸을 재빠르게 회전시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밧세바였다. 이곳은 폐쇄 도시 내 연구소 A동의 대형 세미나실이었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방 안쪽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오더니 회견 영상을 바라보았다. 뒤쪽 의자에는 웁실론들이 숨죽인 채 앉아서 인터뷰를 시청하고 있었다.

“유메, 네가 그랬지? 솔로몬은 기이한 연구들을 하고 있다고.”

밧세바가 주름진 눈초리를 예리하게 늘어뜨리며 물었다. 내리깐 그녀의 시선에서 서늘한 기운이 묻어났다. 유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몬이 준 회색 기사들은 일반 안드로이드들과 달랐어. 낙원에서 쓰는 안드로이드들은 최대한 인간을 닮도록 설계되었잖아. 그런데 위즈덤의 안드로이드는 뭐랄까, 인간의 신체 일부로 작동하기 위한 부품처럼 느껴졌어.”

“인간의 신체 일부?”

유메는 한숨을 내쉬며 속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형무소 전투에서 봤겠지만 회색 기사단은 오직 나츠의 명령만 들어. 왜냐하면 그 녀석들 코어가 나츠의 뇌파를 ‘최우선 명령어’로 인식하거든. 위즈덤의 병기형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의 뇌파가 직접 코어에 접속할 수 있어. 그리고 안드로이드를 제 몸처럼 움직이거나 그 안드로이드가 보고 듣는 걸 뇌로 직접 전달받을 수 있지. 솔로몬 말에 따르면 마치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한 아바타와 같은 논리랬어. 집에 앉아서 가상현실을 통해 바닷속을 체험하고 우주를 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현실에서도 안드로이드를 이용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 거라고.”

유메는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땅을 쳐다보았다. 어린이처럼 작은 참외 배꼽 아래로 다리 없는 발이 뭉뚝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씁쓸하게 제 몸을 바라보는 유메의 모습에 밧세바의 눈이 점차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 비열한 놈이 이 아이의 마음을 이용했구나.’

그녀는 주름진 손으로 유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흠칫하며 고개를 회피하던 유메가 입술을 깨문 채 밧세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후회된다는 표정으로 왈칵 치밀어 오른 눈물을 꾹 참고 있었다.

“솔직히 혹했어. 위즈덤의 안드로이드를 이용하면 이러한 몸뚱이로도 남들처럼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그와 계약을 했다.

빼돌린 델타에 관한 실험이나 시범 경기를 벌일 수 있게 협조할 테니 위즈덤의 신병기 안드로이드를 오베론에 제공할 것.

“솔로몬은 내가 아직 어린 데다가 남들보다 신체적으로 불안정하고 미숙하기 때문에 회색 기사단을 통솔하기엔 무리일 거라고 했어. 뇌에 크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그랬더니 나츠가 그럼 자기가 하겠다면서…….”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던 유메의 눈동자가 붉게 젖었다.

“나츠는 내 이기적인 바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거야. 우리에겐 기사단을 통솔할 카리스마 있는 지휘관이 필요했어. 그래야 고스트들이 우리를 따를 테니까. 물론 나츠는 오로지 날 위해 그런 것이겠지만…….”

밧세바의 손에서 지팡이가 툭 떨어졌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다가와 유메를 와락 끌어안았다. 밧세바의 가슴에 묻힌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썩거리며 울려 퍼졌다.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그녀의 검버섯 진 뺨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던 유메의 입술 사이로 간절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제발 나츠를 구해 줘.”

밧세바는 고개를 들어 화면을 노려보았다. 안드로이드 헌병들에게 끌려온 나츠가 수의를 입은 채 단상 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두리번거리는 그의 시선에서 커다란 동요가 느껴졌다.

등 떠밀려 주춤주춤 걸어 나온 나츠는 불안한 표정으로 좌우를 흘끗거리더니 머뭇거리며 마른 입술을 열었다. 누군가 억지로 입을 떼라고 종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아, 안녕하십니까? 나, 나츠…… 시게노입니다.”

* * *

나츠의 유년 시절은 길고긴 터널이었다. 습기로 가득 찬 어둠 속에서 그는 늘 쌍둥이 누이의 손을 이끌어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생존과 직결되는 삶. 정글 속에 버려진 작은 짐승처럼 그들의 앞길은 순탄치 않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어릴 때 유메는 종종 헛것을 보곤 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그녀는 영양실조까지 겹쳐서 자주 몸이 아팠다. 유메가 환각을 보기 시작한 건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였다.

“나츠, 저기 괴물이 있어.”

“저건 그냥 그림자잖아. 여기엔 우리 둘밖에 없어. 우리 둘뿐이야, 유메.”

미궁에서 자란 쌍둥이들은 네 살이 될 때까지 세상 밖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어두컴컴한 지하 미궁 위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을 보살핀 건 일련번호가 제거된 낡은 육아용 안드로이드와 두 달에 한 번씩 박스로 배급되던 영양 캡슐뿐이었다.

캡슐과 함께 온 작고 동그란 탭을 누르면 여러 가지 재미난 것들이 나왔다. 음악과 영상들, 아름다운 풍경과 신기한 이야기들. 무엇보다도 쌍둥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낙원의 홍보 영상이었다. 미모의 여성이 높다란 에덴 타워를 배경으로 지상의 천국을 소개했다. 그럴 때마다 쌍둥이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 바깥에는 저리도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하는가?’

언젠가 그들이 살아가게 될 곳이었다. 작게 웅크린 그림자들에게 있어 낙원이란 박탈감보다 미래를 약속해 주는 장소였다.

“괴물이 쫓아오면 나는 죽고 나츠만 살아남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칠 다리가 없는걸. 맞서 싸우고 싶어도 싸울 손이 없잖아. 결국 난 여기서 비참하게 죽고 말 거야. 나는 미궁의 미노타우로스니까.”

유메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더니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나츠는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지켜 줄게. 내가 유메를 지켜 줄 거야. 그러니 같이 에덴 타워로 가자. 아담을 만나러 가자.”

나츠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하듯 ‘만나러 가자’라는 말을 반복했다.

언젠가 우리를 감시하는 저 육아용 안드로이드보다 힘이 더 세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저것을 때려 부수고 유메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갈 거야.

그리고 그가 그 다짐을 실행에 옮긴 건 그로부터 삼 년 뒤였다.

화이트 채플은 미들 타운의 중심지였다. 그곳은 온갖 정보가 오가는 불법 거래의 광장이었는데 고스트들은 이곳에서 도박을 즐겨 했다. 이때만 해도 고스트들의 수가 지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었다.

최초의 고스트들은 태양의 도시 입실론들의 관계자이거나 주민들의 친인척들이었다. 혹은 관광객을 빙자해 낙원에 들어온 후 불법체류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평의회도 이들을 소탕하려고 했다.

그들은 군인을 보내 미들 타운 구석구석을 뒤지며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대량의 마약과 탈취한 총기, 훔친 에어쉽 등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모래의 도시는 쥐죽은 듯 잠잠해졌지만 대신 로스티아벤과 바람의 도시 내부에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성매매, 마약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모든 것은 왓슨의 눈에 의해 낱낱이 발각되었다. 윗선에서 덮으려 해도 왓슨 3세가 다 보고를 해 버리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엘 카인은 평의회를 소집하고 비밀리에 중대 발표를 했다. 더 이상 고스트들을 사냥하지 않겠다는 것. 모래의 도시 하층부는 앞으로도 왓슨의 눈이 닿지 않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즉, 미들 타운을 낙원의 할렘가로 방치한다는 이야기였다. 주민들에게는 위험 구역으로 알리고, 범법 지대라는 이미지를 조장하기로 했다.

세상에 완벽한 장소는 없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오물과 폐기물이 나오기 마련. 낙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낙원은 인종, 국가, 성별, 종교, 직업, 교육 수준 등에 의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완전한 평등을 혐오한다. 누군가의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었다. 하여 낙원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특권 의식을 실체화해 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 답이 바로 고스트들이었다.

엘 카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주민들은 미들 타운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을 소탕하지 않는 평의회를 비난하지 않았다. 저런 것들이 낙원에 기생하고 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분노할 뿐, 누구도 어찌하여 왓슨이 그들을 방조하는지에 관해서는 큰소리 내지 않았다.

미들 타운은 다섯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맨 아래층과 맨 위층은 통과 구역으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고, 위에서 두 번째 층은 모래의 도시 상층부와 제일 가까워 여러 상점과 음식점이 즐비했다.

가운데 층은 화이트 채플과 마약상들의 본거지가 자리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인 그 아랫층은 고스트들의 거주지가 몰려 있었다.

나츠와 유메가 미궁을 나와 마주한 세상은 여전히 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낙원의 그늘에 가려진 미들 타운은 짙은 어둠에 휩싸인 채 절망만을 안겨 주었다.

“나츠, 여기가 에덴 타워야?”

“아니, 여기는 에덴 타워가 아니야. 우리가 있던 곳은 생각보다 깊은 구렁텅이였나 봐. 아직도 저렇게나 높이 올라가야 해.”

나츠는 손가락으로 나선형 도시 중간에 뻥 뚫린 활주로 위를 가리켰다. 나츠의 품에 매달린 유메는 고개를 기린처럼 쭉 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 밖으로 올라왔지만 여전히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멀고 구름은 아득하다. 통풍구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기류만이 쌍둥이들의 뺨을 거칠게 때릴 뿐이었다. 그래도 나츠는 미소 지었다.

“가자, 유메.”

“괴물은 없어?”

“그런 건 없어. 우린 이제 미궁 속에 사는 게 아니니까.”

이후 두 사람은 노숙을 하며 미들 타운 거리를 전전했다. 몇 달 뒤 그들이 몸을 맡기게 된 곳은 화이트 채플 인근의 술집이었다.

주인 여자의 이름은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사십 대 중반의 흑인 여성으로 이백이십 파운드64)를 넘는 몸집에 머리는 삭발을 하고 다녔다. 크리스티나는 몽둥이만 한 팔뚝에 시커먼 문신을 새겼는데 그 해괴한 문신은 고스트들의 비밀 조직을 상징한다고 했다. 마약상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인 듯했고, 이들은 궁극적으로 화이트 채플의 도박장까지 관리했다.

그들의 주 고객층은 낙원의 용병들이었다. 군인들은 모래의 도시를 감찰한다는 목적으로 자주 순찰을 돌았다. 그들을 대상으로 비밀스러운 마약 거래가 시작되었다. 고스트들은 처음에 매춘으로 그들을 유혹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매춘부를 찾게 된 군인들에게는 적절한 시기를 봐서 코카인을 팔았다.

마약을 들여오는 유통로는 주로 기억의 도시 쪽이었다. 약물은 관광객과 외부 기업들을 통해 들여온 다음 모래의 도시에서 정제한 뒤 가공해서 판매했다.

기억의 도시 내 누군가가 배후에서 마약 유통을 통제하는 듯했지만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수많은 마약상들의 체인 어딘가에 존재할 그 남자는 아주 영리하게 유통망을 조종했고 커다란 이득을 취해 갔다. 이쪽 업계의 순리를 빠삭하게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임에는 틀림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나츠에게 자잘한 심부름들을 시켰는데 주로 은밀하게 물건을 배송하거나 받아 오는 일이었다. 사실 시답지 않은 일이었고 고작 그런 걸 시키려고 쌍둥이를 돌봐주는 수고를 감수할 여자는 아니었기에 나츠는 늘 그녀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몇 년이 지나고서야 풀렸다.

“안녕 나츠? 키가 또 자랐구나.”

남자는 늘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츠는 정확히 그를 언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묵은 기억 속에는 언제나 제복을 입고 찾아오던 우드 향의 사내가 존재했다.

언젠가 크리스티나가 대마를 피우며 고백한 적이 있었다.

“너희 둘을 부탁한 건 키가 이렇게 큰 장교였어. 로스티아벤 제복을 입고 있었지. 설마 내가 자선가도 아닌데 미쳤다고 너희를 그냥 거뒀겠니?”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쌍둥이를 쳐다보며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저런 애물단지들을 맡게 되었는지 후회 막심하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크리스티나는 제복의 남자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백 파운드가 넘는 거구의 여자가 겁낼 정도의 사내라니, 남자는 군부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츠가 기억하는 남자의 커다란 손은 언제나 다정했다. 유메는 그가 올 때마다 보조의자에 앉아 적당히 거리를 둔 채 낯을 가렸다. 그녀는 그에게 한 번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자는 그녀보다 나츠를 더 귀여워했다. 그가 정기적으로 방문을 할 때마다 몰래 나츠만 사격장으로 데려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츠, 호흡이다. 사격은 호흡이 중요해.”

“네, 아저씨!”

“모래의 도시에서 살려면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해. 나츠, 너는 사격에 재능이 있어. 아마 좋은 저격수가 될 거다.”

남자는 사격의 귀재였다. 총을 쥔 순간 그의 눈빛은 제복 입은 사내의 것으로 돌변했다. 날카롭고 비정했지만 나츠의 눈에 더없이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금빛 견장의 군복에 달린 수많은 훈장과 별. 나츠는 그게 제 것인 양 자랑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남자와 함께 사격장에 간 나츠는 저도 모르게 그의 제복에 달린 견장에 손을 뻗었다. 남자는 웃으며 그를 번쩍 품에 안아 올렸다.

“제복을 입고 싶니?”

“네!”

“그럼 군인이 되어야겠구나.”

나츠는 만약 아버지가 존재했다면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다. 나츠에게 있어 그는 든든하고 자상한 느티나무 같은 존재였다.

그가 갑자기 발길을 끊은 후에도─그래서 크리스티나가 유메를 구타하고 두 사람을 내쫓은 후에도─ 나츠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를 그리워했다.

유메는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았다면서 구시렁댔지만, 나츠의 가슴 한구석에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느티나무의 뿌리가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 선 나츠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조셉과 세르게이 총사령관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래전에 본 남자의 얼굴은 이제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저 사람인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수천 번 더듬어본 기억 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남자의 빳빳한 제복 어깨에서 빛나던 네 개의 별.

로스티아벤에 입대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군대 내에서 ‘네 개의 별’을 달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로스티아벤의 사령탑, 군부의 총사령관직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핏.

평의회 대회의실에 조명이 켜졌다. 중앙 화면에 푸른색 홀로그램 창이 열리자 위즈덤 로고와 함께 뉴 라이프 프로젝트의 광고가 재생되었다.

─ 뉴 라이프 프로젝트. 세르게이 총사령관을 되살린 건 바로 그겁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빈센트 의원이었다.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자꾸 헛기침을 했다. 뭐가 그렇게 찔리는지 뾰족한 눈초리로 연신 주변을 살피며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멜리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되물었다.

─ 뉴 라이프 프로젝트라면 위즈덤에서 만든 클론 사업 말입니까? 전 세계 상위 0.01퍼센트만을 대상으로 은밀히 진행한다는 수명 연장 상품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세르게이 총사령관이 우리 몰래 클론을 복제해 뒀다고요?

─ 비단 클론만 복제해 둔 게 아니고 그는 정기적으로 뇌 스캔을 진행해 본인의 기억을 철저히 업데이트시켜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낙원의 관리자도 몰랐던 것 같고요.

─ 그럼 의원님께선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멜리사의 질문에 빈센트는 입을 다물었다. 솔로몬과 은밀하게 접촉한 건 죽었다 깨나도 비밀이었다.

줄곧 침묵하던 최고령 의원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 그 참, 난감하군요. 클론이 있다고 해서 ‘사망 사실’이 무효가 되지는 않습니다. 법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이 사망한 건 기정사실입니다. 이제 와서 그의 ‘기억’이 이식된 클론이 존재한다 한들 세르게이 총사령관의 죽음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지만 주름진 눈빛은 동요로 일렁였다. 화면 속 우리야는 원래의 몸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고스란히 옮겨 받은 상태였다.

삶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총집합이다. 지식도, 사랑도, 아픔도 모두 경험을 통해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 기억이 없다는 것은 자아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는 것이고, 타인의 기억을 훔치는 건 상대의 인생을 앗아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것은 제2의 우리야 세르게이로 보는 게 옳은 것일까? 그나저나 뉴 라이프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아주 성공적인 연구 결과로 보이는군.’

아이작은 검버섯이 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늙은 의원의 눈은 강렬한 유혹에 흔들리며 고뇌에 잠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야의 단독 회견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한층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화면을 향해 탄원했다.

“나츠 시게노는 낙원의 피해자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그를 용서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우리들이 단죄해야 할 대상은 이 어린 쌍둥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비정하게 버리고 낙원에 어둠을 조장한 한 남자죠.”

갓 태어난 아이들을 버린 남자와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몰래 지켜 준 남자.

‘사람들은 과연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까?’

조셉은 친절을 가장한 미소로 나츠를 향해 물었다.

“시게노 씨, 우리야 세르게이 장군께서 지금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입니까?”

나츠는 몸을 움츠리며 우리야를 쳐다보았다. 그는 의자에 태연히 앉은 채 나츠를 향해 부드러운 눈매를 보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제부터 내가 너와 유메를 지켜 줄 테니.”

나츠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유메의 이름이 싸늘하게 다가왔다. 네 약점을 쥐고 있으니 꼼짝 말라는 듯이.

“나츠, 이제 모든 걸 밝힐 때가 된 것 같구나. 네가 누구인지, 낙원의 밑바닥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너희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야의 재촉에 나츠는 앞에 모은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수갑이 채워진 것처럼 손목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조셉이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나츠의 어깨에 손을 걸치더니 친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게노 씨,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나츠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대처하는 게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했다.

‘어떻게 하지?’

조셉은 그런 나츠의 갈팡질팡한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음흉한 속내를 감춘 채 용기를 주며 그의 등을 두들겼다.

“아무 걱정 말고 모든 걸 털어놓으면 됩니다. 눈앞을 보세요! 다들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함께할 겁니다.”

아무도 없던 회견장에는 어느새 인파가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창공에는 아직도 날아드는 에어쉽들이 보였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 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츠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제, 제게는 쌍둥이 누나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는 태어나자마자 지하 미궁에 버려졌어요. 거기서 베이비시터인 안드로이드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님은 그런 저희를 거두어 주고 보살펴 주신 분입니다. 반면 낙원의 관리자라는 친부는 저희를 버린 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오베론 소속인 것을 숨기고 로스티아벤에 입대한 이유는…….”

유메는 엘 카인에게 증명하고 싶어 했다. 여기 당신의 아이들이 살아 있노라고. 당신이 낙원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버린 생명들이 무엇을 이룩했는지 한번 보라고. 그녀는 엘 카인뿐만 아니라 낙원의 주민들에게까지 파멸이 닿기를 원했다. 유메가 증오하는 건 낙원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츠는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낙원의 용병이 되고 싶었다. 비록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는 군인이 되는 걸 꿈꿨다. 캄캄한 지하 미궁에서 홍보 영상을 봤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낙원의 일원이 되는 날만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로스티아벤에 입대한 후 그는 평생 꿈꿔 온 이상형을 만나게 되었다.

브루클린의 성녀. 그녀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던 거군요. 본인들을 버린 엘 카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죠?”

조셉은 사탕을 주며 다그치는 광대처럼 대답을 강요했다. 곁눈질로 흘끗거리던 나츠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실 따윈 의미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답만 들으려 할 테니까.

“가엽기도 하지. 여러분, 누가 이 아이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는 없지만 나츠의 쌍둥이 누나인 유메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의 변형을 앓고 있었거든요. 여기 있는 나츠 시게노 군은 그런 누나를 보살피고 지키며 미궁 바닥에서부터 아등바등 살아온 겁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모래의 도시를 수호하는 회색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죠.”

‘기특하게도? 모래의 도시를 수호했다고? 회색 기사단은 악의 축이라며 피를 토하듯 앞장서서 비난하던 게 낙원 뉴스였으면서?’

칼보다 무서운 게 펜이라고 했다. 나츠와 유메의 삶은 조셉이 한마디를 덧붙일 때마다 점토처럼 빚어지면서 점차 대단한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낙원의 언론을 움직이는 남자의 세 치 혀는 순식간에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세기의 테러리스트를 나약하고 어린 소년으로 둔갑시키는 데 성공했다.

회견장 허공에 유메의 모습이 입체 사진으로 나타났다. 나츠는 당황한 듯 눈을 부릅뜬 채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비참했던 어린 시절을 다큐멘터리처럼 다루고 자신을 동물원 우리의 짐승처럼 구경거리로 만들더니, 이젠 유메의 사진까지 띄워 놓고 서커스 쇼의 한 코너처럼 소개를 하고 있었다. 수치심이 몰려왔다. 자신이 이런데 자존심 강한 유메는 아마 지금쯤 죽고 싶은 심정일지도 몰랐다.

나츠는 충혈된 눈을 감으며 눈물을 애써 참았다.

사진을 바라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들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조셉은 남몰래 만족스런 웃음을 머금었다. 해표지증65)을 앓고 있는 소녀의 뭉뚝한 몸은 예상대로 효과 만점이었다. 사연을 알기 전에는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봤을 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애틋한 드라마가 알려지자 소녀는 세상에서 제일 불우한 천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나츠가 오베론의 기사단장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또한 그의 쌍둥이 누나의 정체가 낙원 내 암흑 조직의 수령이었다는 것도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 버렸다.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이들은 그저 어린 소년과 소녀일 뿐. 낙원이란 울타리 밖으로 내쳐져서 정글 속에 살아야 했던 작은 짐승들이었다. 낙원의 주민들은 이미 쌍둥이에게 완전히 감정을 이입한 상태였다. 그들은 이제 이 아이들을 지켜 줘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채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엘 카인을 몰아냅시다!”

한 중년 여성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첫 번째 도미노가 넘어졌다. 이제 급물살을 탈 일만 남았다.

“그럽시다! 끌어내립시다!”

“못돼먹은 남자 같으니!”

“엘 카인은 사죄하라!”

성난 군중들의 외침과 함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나츠는 떨떠름한 눈으로 주위를 쳐다보았다. 우리야가 일어서더니 그의 옆으로 걸어와서 말을 건넸다.

“이제부터 내가 네 보호자가 되어 주마. 그러니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런데 유메는 어디에 있니?”

빙그레 웃는 그에게서 우드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친절하고 인위적인 미소는 기억 속 시원하게 터뜨리던 웃음소리와 달랐다.

나츠는 동공을 잘게 떨었다.

우리야와 조셉은 군중을 이끌고 에덴 타워로 향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들은 이대로 기세를 몰아 엘 카인을 축출하려는 심산이었다. 먹구름이 낀 높다란 첨탑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우리야는 군사력을 동원해 에덴 타워를 포위하라 명했다. 갑작스러운 총사령관의 복귀에 군부는 잠시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였지만, 금세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깔끔히 정리됐다.

감히 낙원의 관리자에게 총탄을 들이밀다니. 경악할 수준의 하극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지지를 얻은 우리야는 당당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을 정당한 내란이라 치부하며 정의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태양의 도시 입실론들도, 사태를 지켜보는 제인 왓슨도 모두 손에 땀을 쥔 채 타워 밖을 훔쳐보고 있었다. 제인은 황급히 짐을 꾸리며 홈 AI에게 물었다.

“카인은 어디 있어?”

─ 집무실에는 안 계십니다.

“대체 어딜 간 거지?”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는 잠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고는 간밤의 기억을 되새기며 고민에 빠졌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메리의 목을 안고 있던 카인. 침실에서 진동을 하던 피비린내가 아직도 코끝에서 맴돌았다. 목이 잘린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메리의 얼굴. 그렇게 참혹하고 평화로운 시신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제인은 양팔에 오돌토돌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서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가던 사샤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불빛이 번쩍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야 세르게이.

수십 년간 로스티아벤의 총사령관직을 독점해 온 그는 엘 카인의 오른팔이자 가장 충직한 심복이었다. 죽었다 살아온 그가 진짜든 아니든 간에 군부의 수뇌부는 여전히 그에게 충성할 게 분명했다. 그만큼 군권에 있어서 그는 독보적인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카리스마만큼은 아무리 낙원의 아담이라고 해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솔로몬이 그를 통해 손에 넣으려는 것도 바로 이 군권이었다.

이쯤 되면 왓슨 3세가 조치를 취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카인 측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게 아닐까? 솔로몬과 달리 카인은 낙원에 대한 장악력을 서서히 잃어 가고 있었다. 주민들이 맹목적으로 신뢰하던 ‘왓슨 3세의 주인’은 사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는 게 수면 위로 점차 또렷하게 드러나는 형국이었다.

“엘 카인은 물러나라!”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라!”

“관리자는 사퇴하라!”

군중의 성난 아우성은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제인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선 에어쉽 승강장을 향해 부리나케 걸었다.

“사샤 넌 어떡할래? 같이 갈 거야?”

“나는 이곳에 남을 생각이야.”

“뭐?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하얀 에어쉽에 올라탄 제인은 문밖에 선 사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샤는 잘록한 허리에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우아한 발레리나 사샤. 비록 꽃잎은 잃었지만 헐벗은 봉오리와 가시만으로도 그녀는 여전히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난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어.”

“기다려야 할 사람?”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제인은 “남자야?” 하고 물었다. 사샤는 가만히 웃었다. 상처를 많이 받은 꽃처럼 가시가 뭉툭한 미소였다. 제인은 머쓱한 듯 손을 거두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샤가 나보다 낫구나.”

“뭐가?”

“사실 나 말이야. 그 사람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런데도 혼자 가는 거야. 나도 내가 도망치는 이유가 우리야 때문인지, 카인 때문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제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카인이 메리의 잘린 목을 안고 있었는데, 난 그게 내 얼굴로 보였어. 곧 닥칠 내 미래 같았어.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어.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분명 사랑하고 있는데…….”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사샤는 말없이 들었다.

“그 사람은 아마 지금쯤 그곳에 있을 거야. 난 거기가 늘 찝찝해서 발걸음하기가 싫었는데, 카인은 지하 연구소에 내려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 보였어. 꼭 보물 창고에라도 놀러 가는 것처럼 천진한 표정을 짓곤 했다니까?”

에덴 타워의 최하층부인 그곳은 피 웅덩이가 가장 깊게 고인 장소였다. 왓슨 연구소의 본부, 일명 제한 구역. 델타를 포함한 온갖 생체 실험이 난무하고 낙원에 기록되지 않은 묘비들이 자리한 곳.

제인은 사샤를 꼭 끌어안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할아버지한테 가려고 해. 꼭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 안전하게 있어야 해, 사샤.”

“그래. 회장님께 안부 전해 줘.”

제인은 아쉬운 손길만 남긴 채 에어쉽과 함께 사라졌다. 사샤는 손을 흔들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철부지 말괄량이 아가씨가 갑자기 철이 든 느낌이었다. 엘 카인의 본모습을 엿본 충격이 그녀를 되레 성숙하게 만든 것일까?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제인에게 비로소 겁이 나는 존재가 생겼다는 건 오히려 극약 처방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난생처음으로 맛본 극강의 공포였을 터. 탈왓슨을 주장하던 공주님이 결국 돌팔매질을 피해 도망친 곳은 제가 버리고 온 램지 왓슨의 곁이라는 것도 재미난 결과였다.

사샤는 승강장에 정차되어 있는 자신의 에어쉽, 블랙 스완을 바라보았다.

‘아담, 이브는 찾았니?’

말려 볼 새도 없었다. 붉은 에어쉽에 올라타던 그의 얼굴에는 지난 십오 년간 볼 수 없었던 절박함이 가득했다.

어둠에 잠겨 있던 고독한 행성이 마침내 빛을 찾아가는 듯해 보였다. 그렇게 공전하며 멀어지는 그의 모습이 서운하면서도 기쁘다니 자기 스스로도 웃겼다.

사샤는 허벅지를 주무르며 에어쉽에 몸을 기댔다.

줄곧 성치 않은 다리를 핑계로 그에게 달려가는 걸 주저했다. 불우한 몸뚱이를 방패 삼아 어중간하게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브는 거침없는 몸짓으로 그에게 돌진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흑조였다. 망설임 없는 눈빛으로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몰아치는 파도처럼 다가와 그를 향한 모든 감정을 쏟아 내었다.

그렇게 격정적이던 소녀는 얼어붙은 바이칼 호를 적시는 백야가 되었고, 검은 별밤에 피어난 오로라가 되었다. 아담은 그녀가 팔 벌려 누운 하늘 위에서 노를 저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노래를 짓고 음악을 연주했다. 눈썹처럼 얇은 초승달은 그의 조각배였고 작은 뿔피리였다.

사샤는 블랙 스완을 어루만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담, 나는 아직도 종종 알혼 섬을 떠올려.’

부채처럼 펼쳐진 동산은 초승달 모양의 절벽을 형성했다고 해서 ‘나발루니예 언덕’이라고 불렸다. 언덕 위 작은 블록처럼 세워진 저택은 바이칼 호수를 향해 난 커다란 아치형 창이 특히 아름다웠다.

밤이면 얇은 붓으로 그린 듯 불어오는 바람 속에 비처럼 쏟아지는 달빛이 유리창을 투과하며 저택을 비췄다. 하얀 창턱 위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월광으로 빚은 듯 신비로운 색채의 소년은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절벽 아래를 내다보았다.

암초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에 그의 옅은 머리칼이 흔들릴 때마다 사샤의 가슴도 물결치며 울렁였다.

그렇게 그와 그녀는 늘 일렬로 누군가의 뒷모습만 쳐다보며 밤을 지새웠다. 서로를 마주 보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 적막 어린 시간이 좋았다.

그런 가혹하고도 아름다운 밤들이었다.

─ 사샤.

스마트 워치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굵게 울려 퍼졌다. 정신을 차린 사샤는 주위를 홱 둘러보더니 손목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세요?”

─ 괜찮은 거니? 지금 에덴 타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방금 전 제인 왓슨의 에어쉽이 낙원을 떠났더구나.

왓슨 3세가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전 괜찮아요. 지금 어디 계세요? 혹시 아담한테 연락은 없으셨어요?”

─ 1호기를 가지고 튀더니 그대로 잠적했다. 망할 녀석 같으니라고.

“죄송해요. 제가 괜히 1호기를 가지고 가서는…….”

구름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지던 붉은 에어쉽이 떠오르자 그녀는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마트 워치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상관없다. 그런 에어쉽 따윈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엷은 설렘이 묻어났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안한 얼굴로 서 있던 사샤의 얼굴에도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그리로 갈게요. 저와 같이 기다려요, 박사님.”

* * *

“이제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화면을 응시하던 엘 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반즈 박사의 개인 연구실에 와 있었다. 하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그는 기자회견을 시청하며 생각에 잠겼다. 반즈 박사는 주민들이 에덴 타워 앞까지 몰려와 헌병들과 대치 중이라고 보고했다.

돌아가는 형세가 심상치 않았다.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천하의 엘 카인이 이런 피투성이 모습으로 쫓기고 있는 것일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녀는 현명하게 침묵을 지켰다.

카인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용병대와 주민들까지 우리야의 편이라니 별수 없군요.”

바닥을 짚고 선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척추가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게이트에서 케이에게 당한 게 결정적이었다.

‘괴물 같은 녀석.’

회복할 새도 없이 계속해서 상처와 피로가 쌓이고 있었다. 본래 그의 특기는 전투가 아닌지라 더더욱 힘에 부쳤다.

평의회에서도 연락이 없는 걸 보니 그들마저 등을 돌린 모양이었다. 카인은 쓰게 웃었다.

‘솔로몬의 짓인가?’

전부터 심상치 않은 놈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낙원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도 강한 놈이었다. 우리야에게 클론을 만들고 대비하라고 유혹한 것도 녀석이겠지. 아무리 클론이어도 그렇지, 우리야의 기억을 가진 놈이 솔로몬의 사냥개로 전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르게이 총사령관이 에덴 타워 내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이동하시죠.”

반즈 박사가 연구실 문을 열며 말했다. 카인은 의욕 없는 눈초리로 그녀의 등을 응시했다. 반즈 박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몰래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누군가에게 ‘출발’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에덴 타워와 이어진 미궁의 입구였다.

눅눅한 어둠 속에서 흐릿한 빛이 등대가 되어 걸음을 이끌었다. 두 사람의 신발 밑창에서 새어 나오는 라이트 불빛이 간신히 앞을 비추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카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선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잠수정이 있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에어쉽은 너무 눈에 띄니까 이쪽으로 탈출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탈출?”

그는 생각지도 못한 선택지를 듣고 멍하니 되물었다. 얇은 입술 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기야 더 이상 낙원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이브가 살아 있고 누군지 아는 이상 쓸데없는 것들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문제는 케이였다.

그 녀석이 살아 있다는 건 뜻밖의 변수였다. 성체가 되기 전의 그는 정말이지 나약했다. 작은 몸뚱이는 인간의 아이와 다름없을 정도로 볼품없었다. 하지만 노아가 그랬다. 우리 중 일족의 지배자가 될 사람은 오직 케이뿐이라고.

─ 그러니 엘.

─ 네.

─ 가장 연장자인 네가 무사히 그를 각성시켜서 보필해야 한다..

노아는 의도적으로 경쟁 심리를 조장했다. 일부러 케이를 싸고돌면서 다른 형제들의 불만을 축적시킨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보좌한 것도 계획의 일부였나? 이브의 죽음을 보고한 사람은 노아였다. 그러고 보니 이브를 구하러 왔다는 그 소년, 아담 페트로비치…….

녀석은 처음부터 이브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노아는 그 사실을 숨긴 채 줄곧 그들을 보호해 왔다.

‘십오 년 전의 섬광, 그건 각성의 징조였나?’

온몸의 솜털 하나하나가 벼락 맞은 듯 찌르르 곤두섰다. 엘 카인은 눈을 부릅뜨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렇다면 이브는 이미 케이의 권속인 건가?

“네?”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질문에 반즈 박사가 동그란 눈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엘 카인은 멍하니 어둠 속을 응시했다.

성체가 아니어도 권속을 만들 수 있다고? 생식 능력도 없는 미성체가 권속을 이루는 건 말도 안 된다. 노아는 그런 걸 가르쳐 준 적이 없다.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도 없다.

목구멍이 바짝 메말랐다. 카인은 갈라진 혀끝으로 까칠한 입술을 적셨다. 이브가 케이의 권속이라면 그에게 있어선 위협이었다.

이브를 죽여야 하는 건가?

정말 그러길 원해요?

엘 카인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의 심상에 동그란 파문이 일었다. 메리가 매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깊은 웅덩이 사이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물이 잔뜩 고인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사람 머리? 핏덩이? 카인은 얼어붙은 채 서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메리, 뭘 하는 거야?’

이건 환영이다. 머릿속에서만 보이는 허상이다. 사라져, 메리! 사라지라고!

피 웅덩이를 마구 파헤치던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쫓아 움직이던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버드나무 잎처럼 가늘게 야지러졌다.

“누군가 있군요. 동료입니까?”

그의 목소리에 반즈 박사가 걸음을 멈췄다. 카인은 정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체불명의 그림자들이 짙은 암흑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인영들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불빛에 비친 얼굴 하나가 후드를 벗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엘 카인.”

여성들을 이끌고 나타난 여자는 쓴웃음과 함께 인사말을 건넸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여자들은 하나같이 험상궂은 눈빛이었다. 그녀들은 적개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엘 카인은 주위를 둘러싼 여자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더니 아리송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Y’ 자 알파벳이 불로 지진 듯 새겨져 있었다.

“당신들이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리더의 상징으로 손목에 붉은 팔찌를 찬 여자가 실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살아 있냐고 묻는 것으로 해석하겠습니다. 놀라셨을 테죠. 오래전에 죽인 여자들이 살아 돌아온 꼴일 테니까.”

입실론이라 불리던 그녀들이 늙기 시작하자 엘 카인은 그들을 ‘폐기 처리’ 하라고 명했다. 폐기가 확정된 입실론들은 몸에 낙인이 찍힌 채 지하 연구실로 보내졌다. 그러면 반즈 박사는 연구 목적으로 사용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을 소각장으로 이동시켰다.

‘설마!’

카인은 고개를 홱 돌려 반즈 박사를 쳐다보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조이 반즈, 당신…….”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양 무릎을 쥔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몰래 입실론들을 빼돌렸던 겁니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응시했다. 초췌한 안색 위로 보이는 눈가의 주름이 괴로움에 얼룩져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델타처럼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폐기라니요. 이유도 없이 무고한 분들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엘 카인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배신은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폐기 처리를 하기는커녕 살려 주고는 몰래 미궁으로 도망치게 했다는 건가?’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였다. 줄곧 기회를 엿보던 반즈 박사는 주머니에서 재빠르게 총을 꺼내 방아쇠를 쥐었다.

철컥.

엘 카인의 눈초리가 움찔 굳었다. 뒤통수에서 서늘한 금속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는 곁눈질로 오른쪽 귀 뒤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대표님이라도 머리를 맞으면 치명상이라는 건 압니다.”

죽지는 않으시겠지만요. 그녀는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고는 손이 떨리지 않게 왼손으로 오른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었군요, 반즈 박사.”

“그만큼 많은 걸 잃었습니다.”

엘 카인은 피곤한 듯 눈을 잠시 감았다. 서서히 다시 뜬 그의 눈동자가 붉은 풍랑에 몰아치고 있었다. 분노와 후회로 점철된 눈초리가 웁실론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들은 긴장한 듯 뒤로 움찔 물러섰다.

애쉬드 블론드 머리칼 아래 혼야의 달빛 같은 눈웃음이 피식 어렸다. 엘 카인 특유의 미소였다. 요물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진눈깨비 같은 달콤함을 뿌리는 눈웃음. 그걸로 얼마나 많은 입실론들의 마음을 흔들었던가? 붉은 팔찌를 한 실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이 반즈, 지금 그만두면 모두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총을 내려놓으세요.”

카인의 말에도 반즈 박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총구를 쥔 손에 더 힘을 주었을 뿐, 각오에는 변함이 없다는 눈빛이었다. 더 이상 누구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지 않게 할 것이다.

‘사라, 이브가 살아 있어.’

반즈 박사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카인의 뒤통수만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 무거운 돌덩이는 이미 오래 전에 그녀의 영혼마저 불구로 만들었다.

엘 카인은 비스듬한 시선으로 생각에 잠겼다. 반즈 박사는 리 박사처럼 야심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 양심과 도덕성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가슴에 품은 학구열만은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꿈꿨던 건 명예였다.

언젠가 인류의 과학사에 새겨질 제 이름 하나만을 소망해 온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저 풍파 속에서 위태로워진 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보다 넓고 커다란 지붕을 선택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소심한 여자가 어쩌다 이렇게 큰 용기를 내게 되었을까? 게다가 이렇게 많은 입실론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다니, 저 붉은 팔찌의 여자가 그런 우두머리의 재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반즈 박사와는 눈인사 한 번만 까닥했을 뿐, 둘 사이에 별다른 유대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카인.”

바닥을 툭 짚은 지팡이 뒤로 구부정한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녹슨 듯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를 친숙하게 불렀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카인의 눈이 망연자실하게 커졌다. 그는 곧 헛웃음을 내뱉었다. 비로소 오늘 처음 예상이란 게 들어맞은 순간이었다.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편안한 표정이 지어졌다.

“안녕, 밧세바.”

카리브 해의 수면처럼 해사한 미소였다. 그와 마주한 그녀의 머릿속에는 인턴 시절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당신은 어쩜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누가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한때는 당신이 나보다 연상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의 살을 품던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노쇠해 버렸는데, 당신은 십칠 년 전과 변함없는 모습이라니.”

어린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남자는 그때의 아름다운 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늙고 주름진 그녀의 심장을 이토록 다시 두근두근 뛰게 만들 정도로.

잠들어 있던 피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주책이지만 일순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끌림이 피어올랐다. 아마 다른 웁실론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반면 별 감흥 없는 눈빛으로 서 있던 엘 카인은 뭔가를 발견했는지 밧세바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어둠 속을 주시하며 정신을 뺏긴 듯한 눈빛을 지었다.

그곳에는 부유 체어를 탄 채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소녀가 있었다. 곱슬머리를 양옆으로 묶은 그녀는 그가 한 걸음이라도 다가올 시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듯 크르렁거렸다.

“유메!”

밧세바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다고 진정시키는 그녀의 손길에도 유메는 이를 바득 갈며 살기를 내뿜었다.

카인은 말없이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바다색 눈동자는 아주 희한한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호기심이 가득했다.

“당신 딸이야.”

잠시나마 설렜던 가슴이 두려움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밧세바는 그에게 위협조로 경고했다.

“당신에게 부성애 따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 난 그냥 이 아이들과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야.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은 목숨, 이 애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행여나 아이들을 해치려 든다면 난 여기서 당신을 죽일 거야.”

“날 죽일 생각을 하다니.”

카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는 유메를 보호하듯 안은 채 턱에 힘을 단단히 준 밧세바를 가만히 응시했다.

“확실히 이젠 내 권속이 아니구나, 마야.”

그녀의 눈동자가 굽이치듯 일렁였다.

마야.

그것은 기묘하게도 가슴속에 말뚝처럼 박혀 있던 그와의 쇠사슬이 뚝 끊어지는 소리로 들려왔다. 멍울처럼 먹먹해진 가슴이 저미는 듯 아려 왔다.

눈시울에 바늘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밧세바는 유메와 카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부녀지간인 두 사람은 비딱한 시선으로 서로를 경계하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새삼 이렇게 놓고 비교하니 두 사람의 눈초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카인, 나는…….”

그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허억!’ 하고 가쁜 숨을 내질렀다. 엘 카인은 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이마와 눈알에 도드라진 혈관이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는 호흡 곤란 증세를 호소하며 목을 움켜쥐었다.

“카인!”

몸을 벌떡 일으킨 밧세바의 눈이 멈칫 굳었다.

힘없이 총구를 내려놓는 반즈 박사의 손에서 투명한 주사기가 투둑 떨어지고 있었다. 텅 빈 주사기는 바닥을 도르르 구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브인가?”

“이브의 혈청이죠.”

반즈 박사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엘 카인을 내려다보았다. 몇 개 남지 않았던 혈청을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리통이 으깨져도 멀쩡했던 남자가 주사기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불사신에 가까운 그가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녀는 가운을 고쳐 입고선 눈을 부릅뜬 채 버둥거리는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사망 선고를 내리듯 그에게 속삭였다.

“이것이 왓슨 연구소의 마지막 생체 실험이 될 것입니다, 실험체 엘 카인EL Kain.”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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