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특별 형무소는 사실상 완전히 괴멸되었다. 또한 쌍둥이 건물로 붙어 있던 델타 수용소의 피해도 막심했다. 탈출한 델타는 총 서른일곱 마리. 그중에서 절반 이상의 행보가 오리무중인 상태다.
왓슨의 눈에 따르면 그들은 아직 모래의 도시 내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상층부까지는 올라오지 못하고 하층부나 미들 타운 내에 숨어 있는 것으로 사료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심각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엘 카인은 결국 낙원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주민과 언론에는 델타에 관한 사항을 철저히 함구한 채 연쇄 테러로 인한 조치임을 강조했다.
에덴 타워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보안 등급이 최고 레벨로 올라가자 S관은 완벽 봉쇄되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태양의 도시로 복귀하는 건 불가능했을 확률이 컸다. 간발의 차로 돌아온 메리는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엘 카인은 예상보다 그녀를 일찍 소환했다.
“어서 와요, 메리.”
낙원에 이런 소동이 벌어졌음에도 그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자주색 소파에 앉아 있던 엘 카인은 메리에게 맞은편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메리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더군요. 낙원 내에서는 유명 인사던데 사람들은 그녀를 뭐라더라…… 브루클린의 성녀라고 부른다죠?”
메리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 제인의 생일 파티 때 대역을 자청해 그녀를 구해 준 것도 그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주 용맹한 사람이더군요, 메리의 여동생은.”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번 테러 사건의 유력 용의자 중 하나였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메리의 눈이 커졌다. 엘 카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진범은 좀 전에 체포되었다고 하니까 걱정 말아요. 오베론의 기사단 수장이 현장에서 검거되었다는군요. 호크 대령과 메리의 여동생이 있는 부대에 잠입해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아까의 폭발음은 유림의 일행과 관련이 있었던 걸까? 메리는 초조한 듯 깍지 낀 손마디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드레이크 앤더슨과 나츠 시게노 중 하나가 오베론의 첩자였단 말인가? 유림은 괜찮은 걸까?
엘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잔을 든 그는 천천히 걸어 명화들이 걸린 벽으로 다가갔다.
“메리는 혹시 시체의 기억도 볼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테이블 아래쪽을 응시하던 메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시체는 갑자기 왜…….”
“누가 내게 선물을 보냈거든요.”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왓슨이 초록빛 홀로그램으로 허공에 나타났다. 왓슨의 가상실체화 모습은 의외였다. 아직 성년에는 미치지 못한 듯, 그러나 아이라고 보기에는 성숙한 소녀의 모습. 메리는 소녀 왓슨을 보며 왠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왓슨은 메리를 빤히 쳐다보더니 엘 카인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에게 보여 줘.”
─ 알겠습니다.
왓슨이 띄운 홀로그램을 본 메리의 눈이 흠칫 커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뇌였다. 뇌 주인의 이름을 확인한 메리는 또 한 번 놀랐다.
우리야 세르게이.
‘설마 그럼 시체의 주인이…….’
함께 뜬 기다란 막대기에는 업로드 현황이 표시되고 있었다. 업로드 완료까지 앞으로 21퍼센트.
“이 수사 기법의 경우, 피살된 의원들 사건에는 쓸 수 없던 방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암살범은 반드시 피해자의 머리에 총탄을 박아 뇌를 손상시켜 놨거든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더군요.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보란 듯이 내게 메시지를 남긴 것 같단 말이죠.”
죽은 시신의 뇌 기억을 컴퓨터로 복사하는 것은 뇌 프린팅 방식의 일환으로 인명 사고가 났을 때 쓰는 수사 기법 중 하나다. 뇌에 별다른 손상이나 질병이 없다면 최근 기억의 구십 퍼센트 이상까지 복구가 가능하다.
이러한 수사 기법에는 현재 사생활 침해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적용할 수 있도록 세계 각국 정부가 수사기관에게 ‘뇌 정보의 분석 및 열람’을 승인하고 있다. 낙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류가 쌓아 올린 ‘과학’이란 건 정말 놀랍습니다. 죽은 자의 기억을 엿본다니……. 그건 메리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인류는 이미 우리를 뛰어넘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나약한 육체의 한계를 과학 기술로 극복하고 있죠. 고작 백 년이 한계였던 수명도 앞으로 얼마나 늘어날 수 있을지 기대되는 바입니다.”
메리의 눈이 움찔 굳었다.
‘우리.’
방금 엘 카인은 그녀와 그를 ‘우리’라고 칭했다. 메리의 표정을 본 그가 웃었다.
“메리는 더 이상 그들의 일원이 아닌 게 당연해요. 당신은 우리의 권속 중 하나잖아요. 아닌가요? 그래서 메리를 이 자리에 부른 거예요. 나는 우리들 방식을 더 신뢰하거든요. 무엇보다도 난 저들이 숭배하는 ‘과학’과 ‘기술’이란 게 싫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용해서 주제넘게 진화란 걸 꿈꾸는 모습이 짜증나 미치겠어요. 짓밟아 버리고 싶을 만큼 혐오스럽죠.”
엘 카인은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잔학해 보이는 눈빛은 아름답게 웃고 있지만 소름 돋을 만큼 섬뜩했다. 메리는 확신했다. 그는 지금 머릿속으로 아주 잔인한 상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인류 전부를 학살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메리는 내가 무섭지 않나요?”
“제가요?”
혹시 생각을 읽혔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엘 카인은 그런 그녀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웃었다.
“메리는 모든 걸 봤다고 고백했잖아요. 그런 걸 목격해 놓고 나를 평범하게 대하는 건 이상할 듯싶은데.”
카인은 웃음기 밴 입술 새로 읊조리듯 속삭였다.
“내 과거, 내 비밀, 내가 저지른 죄까지 다 봐 버렸잖아요.”
엘 카인이 저지른 죄, 그것은 피를 나눈 존재를 꺾는 참혹한 살인. 하지만 비단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메리는 아랫입술을 이로 꾹 누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더한 것들도 봤는걸요.”
여유롭게 웃고 있던 카인의 입매가 움찔 굳었다.
“저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많은 것들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카인 씨가 생각한 것보다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요. 제가 주로 목격하는 것들은 아름다운 것보다 무참한 것들이 대부분이죠. 인간 이하의 행실들이요. 저는 타인의 치부를 봐요. 그들의 비밀을 보고 그들의 두려움을 들어요. 그들의 가장 나약한 면을, 그리고 가장 추악한 면모를 봐요. 외롭고 두려운 사람일수록 더 깊은 과거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일 어둠 속에서 과거를 곱씹고 되새기거든요. 본인들이 저지른 짓과 스스로의 죄를 떠올리며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요. 때로는 스스로 기억을 더 과장시키기까지 하죠. 그러면서 그들의 영혼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 갇혀 더 깊은 구렁 속으로 빠지게 돼요. 구덩이가 깊은 자들의 기억은 저도 보기가 두려워요. 그들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수렁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요. 반면 올곧고 강한 사람들의 기억은 별로 볼 게 없어요. 어쩌다 엿보게 되면 보이는 것들이라고는 방금 전 먹은 점심 메뉴라든지, 오늘 아침 오다가 본 창밖의 풍경 같은 소소한 것들뿐이죠.”
메리는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엘을 향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카인 씨가 제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본인 스스로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계시기 때문은 아닐까요? 무서우신가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언젠가 치러야 할 대가가 두려우세요? 죄책감을 갖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누구나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되짚으며 후회하니까요. 카인 씨 역시 그날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를 동족들의 질타를, 혹은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했던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매일 악몽처럼 떠올리며 스스로를 탓하고 계신다면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환이랍니다.”
부우욱.
메리는 흠칫 말을 멈췄다. 찢어진 명화 위로 그의 살기 어린 표정이 보였다. 흉기처럼 손톱을 세운 그의 손에 갈기갈기 찢긴 그림 조각들이 쥐여져 있었다.
메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춤 몸을 일으켰다. 너무 자극한 것일까? 그의 눈빛이 좀 전과 달리 섬뜩했다.
“후회? 스스로를 탓한다고?”
엘 카인이 조소를 터뜨렸다.
“메리는 기억만 훔쳐보는 게 아니라 아예 상대방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건가요?”
감히 주제넘게 말이지.
그의 성난 눈초리가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죄, 죄송해요. 기분을 상하게 만들 생각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그가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잿빛에 가까운 애쉬드 블론드 헤어. 가까이서 보니 그는 더더욱 마이클을 닮았다. 차갑고 냉소적인 면모의 마이클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나는 후회나 죄책감이란 감정이 뭔지 배운 적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 걸 왜 느끼게 되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생각조차 없어요. 그저 그것들은 가장 불필요하고 퇴화되어야 할 감정이라고 여길 뿐이죠.”
역시 닮은 건 외모뿐, 다른 영혼의 소유자가 분명하다. 마이클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꺼내는 걸 보니.
“메리? 무슨 생각해요?”
“네?”
“아까부터 날 보면서 다른 사람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누구를 그렇게 떠올리고 있는 거죠?”
그가 웃었다. 눈가를 찌푸리는 듯싶더니 금세 화사한 눈웃음을 머금는다. 도무지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폭발할 것처럼 분노를 비추더니 어느새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기분 좋은 듯 싱긋거렸다.
그런 모습이 소름끼쳤다. 감정이란 그렇게 가면을 쓰듯 순식간에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이 남자는 삽시간에 얼굴을 바꾼다.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에 새겨지는 인위적인 표정들.
불현듯 스치는 깨달음에 메리는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카인 씨는 혹시 한 번도 제대로 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나요?”
“그게 무슨 소리죠?”
“그래서 자꾸 이렇게 어색한 표정들을 지으시는 건가 싶어서요. 미소란 그렇게 짓는 게 아닌데…….”
카인은 말문이 막힌 듯 굳은 눈으로 서 있었다. 메리는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 봤을 땐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미소였는데, 지금은 더없이 처절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감정이란 억지로 흉내를 낸다고 훔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녀의 눈에는 그가 필사적으로 감정을 모방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 하하!”
공허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겁에 질린 채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고 있는 이 여자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미카엘은 아주 재미있는 권속을 두었구나.’
조금 탐이 나기 시작할 정도였다.
“메리의 구렁은 얼마나 깊은가요?”
“네?”
“아니면 구렁이 아직 없으려나? 그럼 내가 하나 만들어 줘도 될까요?”
무슨 소리냐는 눈빛을 짓는 그녀에게 엘 카인은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그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구보다도 깊고 아득해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구렁, 내가 줄게요.”
“그, 그게 무슨…….”
그는 대답 대신 돌연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메리는 확장된 동공으로 멍하니 앞을 쳐다보았다. 눈앞에는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눈을 감고 입을 맞추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막듯 그의 손이 그녀의 목을 조르며 움켜잡았다. 숨이 컥컥 막혀 왔다. 입가에 축축한 것이 닿아 입술을 할짝였다. 등허리의 모골 하나하나가 곤두서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또 그 남자 생각해요?”
턱 주변에서 서늘한 숨결이 맴돌았다. 그가 관찰하듯 빗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였다. 메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능적으로 부인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목을 조르고 있는 이 손이 목구멍에 손톱을 쑤셔 박을 것만 같았다.
엘 카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고선 목 조른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드레스 뒤쪽 단추를 투두둑 떼어 냈다. 찢어진 드레스가 바닥에 툭 떨어지자 메리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그는 감상하듯 시선을 아래위로 훑으며 그녀의 젖가슴을 기타 줄처럼 튕기듯 건드렸다. 출렁이며 움직인 가슴이 꽤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는 다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먹지 말아요. 이번에는 메리가 떠올렸던 그 남자처럼 아주 다정하게 해 줄 테니까.”
그는 눈초리를 얇게 늘어뜨리며 즐겁다는 기색으로 웃었다. 온기 없는 눈동자에는 지독한 심술이 어려 있었다. 메리는 그가 여전히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카인이 눈짓을 하자 침실 문이 활짝 열렸다. 그는 그녀의 맨 허리에 팔을 둘렀다. 딱딱하게 얼어 있는 메리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엉덩이를 어루만지다 꽉 움켜쥐었다.
“공주님처럼 안아서 데려가 줄까요?”
그가 다소 서늘한 눈초리로 물었다. 머뭇거리던 메리의 눈이 커졌다. 그걸 원하냐는 듯 쳐다보는 카인은 벌써 흥이 식어 가는지 눈길에 그늘이 어리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메리는 고개를 젓더니 자진해서 걸음을 옮겼다. 공기는 서늘한데 온몸에선 진땀이 흘렀다. 눈앞에 보이는 적보라색 침대 시트가 핏빛 웅덩이처럼 끔찍한 느낌을 선사했다.
“어때요? 내 구렁 속에 온 느낌이?”
메리는 창백한 안색으로 주춤 양팔을 들어 가슴 둔덕을 가렸다. 그러자 엘 카인은 그녀의 알몸을 뒤에서 끌어안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이제부터 메리의 구렁 속에 진입해 볼 생각인데…… 부디 잘 품어 줘요. 예전에 그 남자에게 해 줬던 것처럼.”
기록일자: 미상 | 분류: 기밀문서
2073년 러시아 시베리아 연구소에서 열린 학회에 정식 발표된 솔로몬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뇌 프린팅 기술에서 일보 나아간 뇌 이식술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 솔로몬 프로젝트를 후원한 그룹 스타시티에서는 은밀하게 클론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클론은 결론적으로 부작용이 많아 상품화시키기에는 무리가 뒤따랐고, 아브라함 회장은 사업에서 손을 떼는 듯해 보였다. 이후 솔로몬 프로젝트가 성공함에 따라 컴퓨터에 뇌 정보를 옮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바야흐로 천 년 수명 시대의 장이 열린 것이다. 아브라함 회장은 대중에게는 비밀로 붙인 채 클론과 뇌 이식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명 연장 사업을 벌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뉴 라이프 프로젝트였다.
유림과 케이는 일단 본부로 복귀했다. 세르게이 총사령관의 시신과 전투 중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은 모두 거두어져 무사히 본부로 귀환 조치되었다. 나츠 시게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검거에 응했다고 한다. 탈옥한 호크 대령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이미 낙원을 뜬 게 아니냐는 추측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의 행방을 쫓을 유일한 단서는 현재 나츠 시게노뿐이었다. 그러나 붙잡힌 나츠는 본 테러 사건과 호크 대령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평의회 측에서는 만일 호크 대령이 죄가 없다면 그가 왜 탈주를 했겠냐고 반박하며 되묻는 상황이었다.
유림 역시 그 점이 의문이었다. 억울함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밝혀지지 않은 다른 연유가 있는 것일까? 노아 호크, 그 양반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수면 밑의 진실이 드러난 이상 평의회는 골머리를 꽤 썩고 있을 것이다. 오베론에게 전투 병기를 공급하고 테러를 부추긴 게 안드로이드 회사 위즈덤이라니, 잠겨 있던 빙산의 뿌리가 거대해도 너무 거대했다.
─ 어서 오십시오, 정유림 소위님. 검진을 위해 의류 및 액세서리 보호구 등을 모두 탈의하신 다음 준비된 소독복으로 환복해 주십시오.
속옷만 입은 채 맨발로 선 유림은 고민하듯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쪽 눈에 붙인 거즈를 떼어 냈다. 숨겨져 있던 붉은 동공이 긴장한 듯 일렁이고 있었다.
─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검사대 위에 누워 녹색 점을 바라봐 주십시오.
하얀 검사대 위에 올라간 유림은 등을 대고 누웠다. 천장에 비친 녹색 점을 응시하자 허공에 하얀색 글자가 입체 영상으로 떠올랐다.
─ 검진 중입니다. 13퍼센트 진행 중. 움직이지 마십시오.
델타와 전투를 한 병사들은 복귀 후 반드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 혹시 모를 감염에 의한 2차 피해를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검사 결과: 정유림 소위】
혈압: 정상
심박 수: 정상
혈당치 : 정상
…….
…….
감염 여부: 음성
변이 여부: 음성
종합 소견: 입실론 후보자로 분류. 추가적인 항체 보유 여부 검사를 요함.
유림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었다. 대체 개인 소지품을 왜 샤워실로 옮겨 놨다는 거야? 거기까지 가려면 한참인데.
“유림.”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유림은 어깨를 움찔했다. 슬그머니 곁눈질로 보자, 하얀 소독복을 입은 채 서 있는 케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검진은 잘 마쳤어요?”
“아, 응.”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기, 나는 화장실이 급해서 이만 먼저 실례…….”
“화장실은 이쪽이에요.”
케이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에게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유림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요?”
“괜찮아.”
“지금 이곳에는 우리 둘밖에 없어요. 왓슨의 눈도 차단하고 왔으니까.”
유림은 한쪽 손으로 오른눈을 가린 채 침묵했다. 케이는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유림을 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검사 결과 때문에 그래요?”
“…….”
“나 좀 봐요. 이제 눈도 안 마주칠 생각이에요?”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유림이 설령 델타로 변한다 해도 곁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 내게 무언가를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마요.”
다정한 목소리가 심장을 어루만지듯 말했다. 유림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이 남자는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지.
“델타로 변할 일은 없어. 감염조차 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다행이네요. 정말 델타로 변하면 앞으로 어떻게 키스하나 싶었는데.”
유림은 샐쭉한 눈초리를 짓더니 피식거리며 물었다.
“키스만 문제겠어?”
“차라리 섹스는 쉽지 않을까요?”
진짜로 자세와 방법을 고민하듯 생각에 잠기는 케이를 보며 유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유림이 소리치며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케이는 그런 그녀에게 순순히 맞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불그레한 뺨으로 소리쳤다.
“상상하지 마. 그런 거 상상하지 말라고!”
그는 순식간에 한 손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포박했다. 그러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품에 끌어당겼다. 돌연 정색하듯 웃음기 지운 눈빛이 나른하게 속삭였다.
“상상하는 게 어때서요? 유림이니까 하는 건데.”
그를 두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유림이 아차 싶어 황급히 팔을 들었다. 그러자 케이가 양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움직일 수 없도록 그녀의 팔을 눌렀다.
먼 곳의 행성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결국 유림은 포기한 채 붉은 눈을 치켜떠 그를 응시했다.
사막의 밤처럼 새까만 눈동자와 설원에 뿌려진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
케이는 할 말을 잃은 듯 넋을 놓았다. 그는 호흡하는 것도 잊은 채 얼어붙은 눈길로 아득한 기억 속을 헤매었다.
─ 이름을 불러 줘야 아기가 눈을 뜬단다.
─ 안녕, 아담 오빠. 나는 이브예요.
“케이?”
그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허리를 꽉 잡은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안고 또 꽉 안는 그의 손짓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왜 그래? 괜찮아?”
무겁게 일렁이던 눈동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유림의 눈두덩에 쪽 입을 맞췄다. 여신의 조각상에 숭배하듯 조심스럽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한 입맞춤이었다. 유림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 뺨에서 느껴진 물기는 설마 눈물인가?
“예전에 종종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는 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깊게 잠겨 있었다.
“뭐 때문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유림을 제대로 받아 줄 수가 없어서, 약한 내가 한심해서요.”
유림은 그의 말을 곱씹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젠 유림이 에덴 타워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받아 줄 자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
“난 내가 알아서 낙하 장비 잘 착용하고 뛸 테니, 케이야말로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언제부터 제가 나를 받아 줬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날이 갈수록 실력이 아닌 허세만 늘어가는 게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케이는 충혈된 눈으로 유림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눈에는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아마 자신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 그런들 어떠랴, 그는 마냥 좋다는 눈빛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심장이 찔려도 여한이 없었다. 그 죽음마저 행복할 테니.
“왜 그렇게 봐?”
“어떻게 봤는데요?”
“좋아 죽겠다는 눈빛이잖아. 설마 이런 눈동자가 취향이었어?”
“말했잖아요, 나는 유림이 델타여도 변함없이 예뻐할 거라고.”
그는 깊게 감명받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눈가에 밴 다정한 웃음 속에는 한없이 깊은 마음뿐이었다. 생긋거리며 능글맞은 고백을 할 때와는 눈길의 무게부터 달리 느껴졌다.
유림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그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모든 걸 포용했다. 붉은 눈도, 델타의 감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만일 그가 말한 ‘받아 주겠다’가 이런 의미의 것이라면, 그녀는 그를 향해 맨몸으로라도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가슴이 묵직해진 유림은 케이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나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소위님?”
드레이크의 목소리였다.
케이는 움찔 놀라는 유림을 품에 감추듯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온 드레이크는 케이의 가슴팍에 파묻히듯 안긴 유림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라…… 소위님? 괜찮으신 겁니까?”
“아주 괜찮지. 그냥 너무 좋아서 이러고 계신 것뿐이니 신경 쓸 것 없어.”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케이는 생긋 웃었다. 드레이크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기가 막힌 건 유림이었다. 그녀는 케이의 ‘너무 좋아서’란 대목에서 소리 없이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드레이크는 미심쩍은 눈길로 요리조리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코 박고 안겨 있는 유림의 모습이 수상했다. 그러자 케이의 표정에 차츰 짜증이 섞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쳐다볼 거지? 혹시 우리 소위님께 관심 있나?”
드레이크는 흠칫 놀라서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어디가 좀 안 좋으신 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난 괜찮으니까 그만 가 봐, 드레이크.”
유림은 케이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팔을 꽉 잡은 케이는 피식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을 멍하니 보던 드레이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그럼 저는 먼저 복귀하겠습니다.”
평소 두 사람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조합이었다. 원래는 소위님 손에 중사님이 꼼짝도 못하는 느낌이었는데. 그것보다 애덤슨 중사님은 저렇게 소위님을 한 손으로 제압할 능력이 되면서 왜 여태까지 매번 맞고 질질 끌려다닌 거지?
드레이크는 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마지막에 ‘소위님께 관심 있느냐’고 묻던 케이의 목소리에는 묘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가끔 느끼지만 애덤슨 중사는 좀 섬뜩한 면이 있었다. 잘 생각해 보니 그가 달콤하게 웃으며 녹아들 듯한 목소리를 내는 건 오직 유림 앞뿐이었다.
그럼 저 온기 없고 싸늘한 눈빛이 애덤슨 중사의 본모습인가? 소위님께는 의도적으로 그런 일면을 감추는 것일 테고. 드레이크의 눈가에 흥미가 어렸다.
“드레이크 앤더슨.”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케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서늘한 표정으로 걸어가던 드레이크는 삽시간에 표정을 밝게 바꾸며 돌아섰다.
“예, 중사님.”
“그때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연맹군이 귀환한 후에도 보이지 않던데.”
“아…… 격벽 잔재들 사이에 갇혀서 못 나오고 있었습니다. 꼼짝없이 매몰될 뻔했거든요.”
케이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멀뚱히 선 드레이크가 묻자, 묘한 눈초리를 하던 케이는 알았다며 가 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정 소위님, 애덤슨 중사님.”
장난스러운 어조로 인사하고 가는 드레이크를 보며, 케이는 조용히 왓슨을 불렀다.
“저 녀석 좀 잘 지켜봐. 24시간 내내 어디서 뭘 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체크하도록.”
─ 예, 알겠습니다.
“왜 그래, 케이?”
케이의 품에 안겨 대화를 듣고 있던 유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별건 아니에요. 그냥 타이밍이 좀 묘해서요. 우리도 이만 집에 갈까요?”
케이는 그녀를 공주님처럼 번쩍 품에 안으며 물었다. 화들짝 놀란 유림은 주위를 살피더니 홍당무처럼 벌게진 얼굴로 버둥거렸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빨리 내려놓지 못해?”
“싫어요.”
생긋 웃은 케이는 그녀를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유림은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총으로 쏴 버리겠다며 온갖 육두문자를 터뜨렸다. 그러나 훈련병 시절부터 그녀의 걸쭉한 입담과 매타작에 강한 면역성을 갖춘 그가 그리 쉽게 굴할 리 없었다. 바닥에 얼굴을 갈아 버리겠다느니, 귓구멍에 수류탄을 처박아 버리겠다느니, 무시무시한 발언들이 쏟아져 내렸지만 케이는 피식 웃어넘겼다.
“사랑해,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내려줄게요.”
오늘 이 자식이 진짜 약을 잘못 먹었나? 유림은 이마에 힘줄을 세우고 분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인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경종처럼 울려 퍼졌다. 하지만 케이는 훈련병 때의 고충을 벌써 까마득하게 잊었는지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여전히 그녀를 안고 해사하게 웃었다.
“케이, 어금니 꽉 물어.”
유림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케이는 멈칫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쇠파이프보다도 묵직한 주먹이 그의 명치를 강타했다. “으윽.” 하며 무릎을 꺾은 그는 팔을 풀었다. 손을 털며 일어선 유림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잠시 후, 유림이 성큼성큼 앞서가는 걸 본 케이는 고개를 들며 픽 웃었다. 명치를 어루만져 본 그는 전보다 더 강해진 듯한 그녀의 주먹에 기특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하여간…… 지는 건 죽기보다 싫어한다니까.’
* * *
“유림, 멀었어요?”
“벌써 다 됐어?”
욕실에서 후다닥 나온 유림은 타월로 몸을 가린 채 식탁을 향해 뛰었다. 미끄러질 듯 말 듯 슬라이딩을 하며 달려온 그녀는 1.5초 만에 식탁 앞에 당도했다.
“냄새 좋다.”
유림은 코를 킁킁대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었다. 앞치마를 하고 국자를 든 채 서 있던 케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리사도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유림, 옷은요?”
“타월로 가렸잖아.”
식탁 앞에 앉은 유림은 남의 속도 모른 채 생긋거렸다. 훤히 보이는 복숭앗빛 가슴골 사이에는 물방울이 성글성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케이는 탁해진 눈빛으로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손등으로 올라왔던 힘줄이 옅어질 무렵, 그는 이마에 참을 인을 새긴 채 평정심을 유지했다.
“케이는 안 먹어?”
“전 됐어요.”
“왜?”
“지금 먹고 싶은 건 카레가 아니라서요.”
과할 정도로 해맑게 웃는 케이에게서 말을 비꼬는 게 느껴졌다. 그의 눈웃음 속에 담긴 불만을 감지한 유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데? 왜 그러는데?”
본인은 다른 메뉴를 원했는데 억지로 카레를 했다고 항변하는 건가? 유림은 짜증 난 고양이처럼 눈초리를 세웠다. 배고파 죽겠는데 냄새로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이왕 음식을 했으면 그냥 좀 기분 좋게 먹지?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되레 눈을 부라리는 유림을 보며, 케이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토했다.
“계속 그렇게 노팬티로 있을 거예요?”
“뭐?”
흠칫한 유림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앉아 있던 유림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일어섰다. 엉덩이를 뒤로 빼는 그녀를 보며 케이는 눈빛을 서늘하게 일렁였다.
“알았어, 입고 오면 되잖아.”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까지 빨개진 유림은 홱 돌아서서 가슴께를 움켜잡았다. 예전에는 케이 앞에서 훌렁 벗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의 지적 한 번에 왜 이렇게 민망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한 얼굴로 걷던 유림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그가 어느새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뜬금없는 생각인데, 이 남자는 앞치마도 근사하게 소화한다.
“입고 온다니까.”
유림은 툴툴거리며 그의 어깨를 지나쳐 걸었다. 그러자 케이가 유림의 팔을 잡아 세우며 달콤하게 웃었다. 너무 예쁘게 웃는다. 하지만 케이가 저렇게 심장 떨릴 만한 미소를 지을 때면 대개 속에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유림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대로 보내기는 아쉽네요. 유림이 스스로 속옷까지 벗는 건 좀처럼 마주할 수 없는 기회인데.”
유림은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고개를 숙였다. 예상대로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해맑게 웃는 케이를 보며 유림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의 해사한 미소가 이성을 잃은 미친놈처럼 보였다. 기분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절제하다가 나사가 빠진 거다.
“너무 배고파서 그랬다니까.”
유림은 헤실헤실 웃으며 살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케이가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단번에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도 너무 배가 고파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힘만 센 놈 같으니. 한 팔로 허리를 감싸 안았을 뿐인데 그의 품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저항하려고 입을 벌렸던 유림은 입술을 덮쳐 온 키스에 ‘읍’ 하고 소리 없는 반항을 남겼다. 하지만 간질이듯 움직이는 그의 혀에 금세 아찔하니 몽롱한 감각이 전신을 덮치기 시작했다.
“이건 물기예요? 아니면 유림이 흘린 건가?”
미끄덩한 다리 안쪽을 쓸던 검지가 다리 사이 접점을 향해 쿡 찌르고 들어왔다. 덥석 케이의 팔을 잡은 유림은 입술을 깨물며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심술 맞은 눈빛으로 얄미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물기야.”
“아닌 것 같은데?”
유림은 발그레 젖은 채 딱히 말을 잇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당혹이 뒤섞인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일렁였다. 말간 뺨에 점점 번져 가는 홍조는 그녀의 분홍빛 입술까지 바르르 흔들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는 침이 가쁜 호흡으로 이어졌다.
손가락이 조금 더 깊숙이 여문 속살을 헤집고 들어오자, 참았던 신음이 망울 터지듯 새어 나왔다. 끊어질 듯 ‘케, 케이…….’ 하고 그의 이름을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의 눈이 허공에서 멈칫 멈췄다.
그녀는 가까스로 지면에 두 발을 붙이고 서 있었다. 잘 보니 뒤꿈치를 세우고 엉덩이를 들었다. 매달리듯 그의 팔을 움켜쥔 자세가, 마치 기분 좋은 고양이가 꼬리를 세운 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
웃음이 흘러나온 케이는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케이?”
그가 쇄골 사이에 뺨을 대고 실성한 놈처럼 낮게 웃고 있었다. 가슴을 움켜잡은 손에 꽉 힘을 준 케이는 탁해진 눈에 즐거움을 담았다. 겨우 이 정도에 흥분해서 절제력을 잃을 뻔한 게 본인 스스로도 황당한 모양이었다. 잠시 하반신의 열기를 식힌 그는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타월을 벗겨 내렸다. 그리고 잘 여문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가슴을 쥐어짜듯 거세게 주무르며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소리 참지 마요, 유림.”
그는 거칠어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분홍빛으로 부푼 정점을 미친 듯이 물어뜯었다. 붉게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살점을 잇새로 물고 빨던 그는 뜨거운 숨을 내쉬더니 혀로 탐스러운 돌기를 건드리며 핥기 시작했다. 동시에 꽉 오므린 그녀의 속살 사이에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깊은 고살이 화끈거리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오른 물기에 금세 찰팍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들뜬 신음이 섞여 나왔다. 케이는 살결을 긁어내듯 휘젓던 손가락에 힘을 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움직인 손가락 마디를 구부리더니 달라붙는 유액 사이로 거칠게 뽑아내었다.
“하읏!”
유림은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숨소리를 뱉었다. 찌르며 파고들던 손가락이 물린 살을 뚫고 나가는 순간, 간신히 버티던 다리의 힘도 쭉 빠져 버렸다. 숨이 차오르자 흐느끼는 것처럼 신음이 흘러나왔다. 막고 싶어도 터져 나오는 숨소리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호흡이 빨라질수록 그의 손가락도 빠르게 들락날락거렸다. 목덜미를 깨물며 빨아들이는 잇새로 그의 뜨거워진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에 온몸을 기댄 그녀는 축 늘어진 채 안겼다. 케이는 고개를 들어 촉촉하게 젖은 손끝을 바라보았다. 진득하게 엉킨 꿀이 손가락 사이에 달라붙어 입맛을 자아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귓가에 교성을 흘리던 유림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다시금 시야가 혼탁해졌다. 그는 느른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바라보며 끈적하게 엉킨 손가락 끝을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뜬 유림이 그의 손을 낚아채어 잡더니 꽉 쥔 주먹 안에 넣고 닦아 내듯 비볐다.
“먹지 마.”
케이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말했잖아요, 배고프다고.”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지, 왜 그걸…….”
“창피해요?”
유림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쿡 웃던 케이는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으스러질 듯 껴안던 그는 아쉬운 대로 그녀의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어차피 곧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맛볼 텐데.”
“곧 맛본다고?”
“너무 맛있는 게 눈앞에 있으면요, 먹기조차 아까워서 입맛만 다시게 돼요. 한 입 맛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을 안겨 주거든요. 유림이 그래요. 진짜 요즘에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케이는 한숨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난 이 허기짐을 오래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누구 마음대로 못 참아?”
서늘하게 되받아치는 유림의 목소리에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언제는 지켜 주겠다느니 헛소리를 하면서 제 입으로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조만간 맛볼 거라고? 내가 네 냉장고 속에 넣어 둔 아이스크림이라도 되는 줄 알아? 네 마음대로 먹었다 뱉었다, 다시 넣어 두었다가 빼서 맛보고 그래도 되는 줄 아냐고? 꿈도 크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말이지.”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요.”
유림을 끌어안은 케이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너무 소중해서 그랬어요. 유림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날카롭게 눈초리를 세우던 그녀의 표정도 덩달아 흔들렸다. 이럴 때는 사정없이 쏘아붙이며 걷어 내야 하는데, 심장이 쿵쾅거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런 포옹은 반칙이야.’
케이에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딱히 향수를 쓰는 것도 아닌데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은은한 향기가 체향처럼 늘 배어 있다. 그의 체취가 좋았다. 입 맞출 때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좋다. 남들 앞에서는 조각 같이 완벽하게 웃으며 뒤에서는 천연덕스럽게 밀어를 속삭이는 뻔뻔함이 좋다. 늘 태평한데 가끔 참을 수 없다는 듯 신음을 흘릴 때의 눈빛이 좋다.
“나는 유림이 너무 좋아요. 유림하고 떨어져선 아마 하루도 못 살걸요?”
“나도 케이가 좋아.”
유림은 황급히 입술을 포개어 벙어리처럼 안쪽으로 말아서 오므렸다. 실수로 그만 소리 내어 말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선 냉정하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케이의 입가에 곡선이 맺히는 게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그의 입가가 춤추고 있을 게 빤히 보였다.
“그래요?”
이것 봐, 목소리 톤부터 바뀌었다. 다 죽어 가던 목소리가 벌써 달콤한 생기로 젖었다.
“나는 좋다는 말로도 부족해요. 내가 유림에게 느끼는 건…… 좋다, 원한다, 그 이상의 감정이니까.”
그녀 역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가 좋았다. 그 마음만큼은 가리거나 거짓으로 꾸밀 수 없을 정도로.
방금 전까지 솟구쳤던 분노는 어디로 사라지고, 절박하게 안고 있는 그의 몸짓이 되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매달리듯 안긴 채 두려움에 휩싸여 애원하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죄책감마저 일게 만들었다.
언짢음이 좀 풀리자 유림은 한층 누그러진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키스해 줘.”
새침하게 고개를 외면한 채 기다리는 그녀를 보며 케이는 입가에 예쁜 호선을 그렸다. 기다렸다는 듯 턱을 잡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어느새 서로의 목을 휘감은 두 사람은 깊게 입술을 겹치며 뜨거운 숨결을 삼켰다.
“그래도 역시 키스만큼은 케이를 따라올 사람이 없단 말이야. 여태까지 해 왔던 다른 어떤 녀석들보다 케이가 최고야.”
유림의 아랫입술을 빨며 잘근잘근 깨물던 그가 멈칫 그녀를 쳐다보았다. 쾌락에 젖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다른 어떤 녀석들…… 보다요?”
“응, 케이가 제일 잘해.”
유림은 살그머니 눈웃음을 쳤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칭찬인 건 확실한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다른 녀석들 누구요?”
“말하면 케이가 알아?”
“알아보면 되니까 아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케이는 억지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이미 질투로 비딱해진 그의 눈초리를 눈치챈 유림은 약 올리듯 생긋 웃었다.
“내가 언제 케이의 과거 여자들에 대해 물은 적 있나? 난 과거사는 따지지 말자는 주의야.”
“나는 전생, 현생, 내생 통틀어 유림밖에 없어요.”
“또 허풍 친다.”
“정말 없어요.”
유림은 진실인지 아닌지 뜯어보듯 케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이내 질색하듯 변했다. 떫은 감이라도 주워 먹은 것처럼 어두워진 그녀의 안색에 케이는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그는 긴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난 숫총각은 질색이라서.”
그녀는 그의 어깨를 홱 밀치고선 품에서 빠져나갔다. 실망스럽다는 듯 눈을 흘기던 그녀의 표정에 케이는 뺨 맞은 것처럼 충격받은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숫…… 총각?”
─ 숫총각이란 여성과의 성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남자를 일컫는 말로, 버진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남성들은 여전히 버진인 여성을 선호하는 반면, 여성들은 버진인 남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잠자리를 할 시 여성을 능숙하고 노련하게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란 우려에서 발생…….
“입 다물어, 리사.”
─ 예, 중사님.
케이는 물끄러미 유림의 뒷모습을 보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런데 중사님, 정말로 숫…….
“다물라고.”
─ 네, 죄송합니다.
침실로 온 유림은 곁눈질로 케이 쪽을 보더니 혀를 쏙 내밀었다. 배시시 웃는 그녀의 입가에는 심술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 나는 전생, 현생, 내생 통틀어 유림밖에 없어요.
알몸으로 침대에 누운 그녀는 입을 막고 웃었다. 혼자 뒹굴고 있는데도 케이가 안아 주는 것처럼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침대 위에서 좌우로 데굴데굴 구르던 유림은 베개에 코를 박은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았다. ‘큼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런 얼굴, 케이에게 들키면 곤란한데.
한편 방문이 닫힌 침실 쪽을 보던 케이는 앞치마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 보니 줄곧 앞치마를 두른 것도 잊고 있었다. 하여간 유림하고만 있으면 미쳐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그동안 그는 누구에게도 권속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칙상으로는 권속을 통하지 않고선 엘 카인을 없앨 수 없다.56) 그리하여 노아가 그에게 첫 권속으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유림이었다.
케이는 이마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성을 능숙하고 노련하게 만족시키지 못할 것에서 빚어진 우려와 실망스러움이라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본래 그와 엘 카인을 비롯한 일족 전체가 대체적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미혹의 힘으로 이성을 사로잡아 권속 관계를 맺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감히 성애와 정사情思를 논하다니,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 기억의 도시에 가셔서 딱지를 떼고 오시는 건 어떨까요?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 더 입 열면 폐기시켜 버릴 줄 알아.”
─ 죄송합니다. 아, 이건 입을 연 게 아닙니다.
리사는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핏’ 하고 사라졌다.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유림은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케이를 훔쳐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심기가 언짢은 게 분명했다. 유림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른 케이가 그녀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곁눈질로 그녀를 발견한 그가 먼저 손짓했다.
“옷 다 입었으면 나와요.”
“왜?”
“카레 안 먹어요?”
뭐 다른 걸 기대했냐는 눈빛으로 묻는 그를 보며 유림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순식간에 태연해지다니, 방금 전까지 자신뿐이라고 애원하던 남자가 맞나 싶었다.
유림은 눈을 흘기며 케이를 슥 지나쳐 걸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케이의 눈이 일순 파문을 그리듯 일렁였다.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또다시 열기가 치솟는 걸 느꼈다. 이제는 아주 자동적이었다. 발정 난 짐승도 아니고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성의 끈이 팽팽해진다.
타이트한 운동복 바지에 브라만 입은 차림. 뭘 좀 걸치고 나오라고 했더니 저런 걸 입고 나왔다. 사과처럼 볼록한 엉덩이 사이로 갈라지는 골과 탄탄한 허벅지 근육의 움직임이 오히려 더 두드러지는 재질의 옷이었다. 속옷만 입은 가슴 쪽은 가린 건지 덧댄 건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으니,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불이 붙은 그는 잇새로 심호흡만 내뱉었다.
케이는 호흡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냥 빨리 가서 국자 들고 카레나 퍼야지, 생각하며 애끓는 속에 스스로 얼음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경험도 없다면서 키스나 애무는 왜 그렇게 잘하는 거야?”
“타고 났어요.”
생긋 웃는 케이를 보며 유림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정한 눈빛의 케이는 어느덧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해 보였다. 그는 카레를 뜬 그릇을 유림의 앞에 놓은 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에 앉아 냄새를 맡은 유림은 그가 애무해 줬을 때처럼 달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허무해서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열락에 취한 눈빛을 짓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여 그녀의 몸을 애무했던가? 고작 카레 하나로 이리 쉽게 되는 것이었다니.
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바람 빠지듯 웃고 말았다. 그래도 여전히 저렇게 카레 하나에 눈을 빛내는 유림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간질이며 행복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정말이지 승부욕을 자극하는 여자였다. 아무리 그래도 연인의 애무가 먹을 것보다는 우위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케이는 잘라 놓은 토마토부터 아삭아삭 먹는 유림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말을 건넸다.
“일단 해 보고 판단하는 게 어때요?”
“뭐를?”
“정말 별로일지, 아니면 황홀함에 흐느끼게 될지는 경험해 보면 알게 될 텐데.”
카레를 한 숟가락 뜬 유림은 고양이처럼 도도한 눈초리를 치켜세우며 그를 쳐다보았다. 케이의 조각 같은 얼굴에 실린 건 여유로운 눈빛이었다.
‘자신 있다, 이거네.’
붉은 입술에 미소를 띤 유림은 약 올리듯 대꾸했다.
“싫어.”
그리고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눈빛을 쏘더니 먹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유림을 보며 물 잔을 슥 밀어 준 케이의 입가에 맥 빠지는 미소가 어렸다.
‘미치겠네, 진짜.’
그는 웃음기 어린 턱을 괴었다.
이러나저러나 정말 쉽지 않은 여자였다, 나의 이브는.
【Breaking News: 속보입니다. 어제 특별 형무소 폭발 현장에서 체포된 테러 용의자는 불법 조직인 오베론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베론은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모래의 도시 미들 타운을 본거지로 두고 있으며 많은 불법 체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불량 집단입니다. 놀랍게도 용의자는 아직 열일곱 살에 불과한 소년으로 밝혀졌는데요. 그는 로스티아벤 내부에 병사로 잠입해 그간 이중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평의회는 전담 수사기관인 특별보안대의 지휘관인 셰인 필란 중위에게 잔당과 배후 세력을 잡는 데 주력을 다하라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어서 현장 리포터 소식입니다. 이틀간 연쇄 테러가 발생한 데 불안감을 느낀 일부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게이트 앞에 모여 밤샘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출입국 관리부의 키퍼 장관이 게이트를 봉쇄한 채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리포터가 더 자세한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형무소에서의 2차 테러 발생 이튿날, 낙원의 출입국 관리부가 있는 게이트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었다.
“당장 여객기를 띄우란 말이야!”
“게이트를 열어!”
게이트 앞에 모인 군중들은 성난 목소리로 외쳐 댔다. 출입국 관리부는 아예 게이트의 출입구를 굳게 걸어 잠근 채 사람들을 광장에 세워 둔 상태였다. 흥분한 이들 중 몇몇은 게이트 입구를 지키는 헌병 안드로이드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 지금은 보안상의 문제로 게이트가 봉쇄된 상태입니다.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는 누구도 낙원을 떠나실 수 없습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일단은 자택으로 귀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가? 미친 거 아니야? 가만히 앉아서 개죽음이라도 당하라고?”
“책임자 나와! 키퍼 장관은 어디 있어!”
“돈은 얼마든지 낸다고 하잖아!”
“너희들만 꽁무니 빼려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아?”
게이트 내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키퍼 장관은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함에 발을 굴렀다.
“장관님, 평의회에 가실 시간입니다.”
보좌관의 말에 그는 창밖을 다시 한 번 내다보았다. 아치형 게이트 꼭대기에 위치한 키퍼 장관의 집무실에서는 낙원의 상징인 아름드리나무와 게이트 사이에 위치한 녹색 광장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아니, 저렇게들 모여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다 본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러는 것도 모르고, 에잇! 여기에 폭탄을 터뜨려 주십사 절하는 게 아니라면 빨리들 해산하라고 해! 끝까지 말을 안 들으면 헌병들을 동원해서라도 귀가 조치시키고!”
“공권력을 투입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들 극도로 불안하고 예민한 상태입니다. 낙원 내 어디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설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르게이 총사령관님의 죽음에 대한 소문마저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뭐? 그게 어떻게 새어 나간 거야?”
“연맹군 쪽에서도 총사령관님의 죽음을 목격했고, 또 우리 사병들도 시신을 보았으니 완벽하게 입단속을 시키는 건 어렵습니다. 고스트들도 봤을 수 있고요. 호크 대령님마저 낙원을 버리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 여론이 상당히 동요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아 호크의 일이 치명적이었다. 그를 체포한 것이 평의회의 오단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주민들의 불신이 무섭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확실히 노아 호크는 낙원의 영웅이었어. 이럴 때 그가 있었다면 여론을 진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맞습니다. 하다못해 브루클린의 성녀라도 내보내는 게 어떨까요? 그녀도 호크 대령님 못지않게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와장창!
“이게 뭔 소리야?”
시위하던 군중이 드디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헌병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며 억지로 게이트 문을 열기 위해 건물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키퍼 장관은 파리한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건가? 일반인들에게 무력행사라니, 어쩌다가 낙원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장관님! 저기 좀 보십시오.”
보좌관이 당황한 얼굴로 상공을 가리켰다. 창문에 다가선 키퍼 장관의 눈이 커졌다.
은색 비행정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었다. 일반 에어쉽과는 비교 불가 수준의 속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음 없이 고요한 접근을 유지하는 걸 보니, 스텔스 모드가 기본으로 장착된 정찰용 비행정이 틀림없었다. 우아한 깃털처럼 회전하여 지상에 착륙한 비행정 꼬리에는 푸른 삼각형 안에 날개 달린 황금 돛 마크가 붙어 있었다.
“헤벨의 아크레인이군.”
키퍼 장관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연맹군 전략국의 비장의 무기, 함정 헤벨.
헤벨에 관한 소문은 군부 소속이 아닌 그조차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연맹군의 온갖 신식 무기와 기체는 헤벨이 늘 우선적으로 시범 사용을 하며, 함정 관리자 시스템은 낙원의 왓슨 3세와 맞먹을 수준으로 뛰어나다고. 일설에 의하면 낙원의 설계자라고 불리는 익명의 과학자가 헤벨을 제조하는 데도 일조했다고 한다.
흡사 어뢰처럼 생긴 비행정의 문이 열리자, 제복을 입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으며 지면에 내렸다. 군중은 돌연 나타난 그를 해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연맹군의 갈색 제복을 입은 남자는 검은 지팡이를 짚고 선 손에 힘을 준 채 허리를 세웠다. 갈색 제모를 쓴 머리 아래 또렷한 눈동자가 고개를 들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였지만 당당한 자태였다. 군중 사이를 걸어온 그는 주위를 슥 훑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다들 이러셔 봤자 소용없습니다. 테러범이 잡히기 전까진 누구도 출국 승인을 받을 수 없으실 겁니다. 그러니 다들 진정하고 물러서시죠.”
뜬금없이 나타나서 교통정리를 하는 장교에게 사람들은 우악스러운 표정으로 거친 반응을 내보였다.
“시끄러워!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막말로 출입국에서 여객기를 띄워 줬다고 칩시다. 테러범이 여러분들과 함께 기내에 탑승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습니까?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상공에서는 도망칠 구멍도 없습니다. 꼼짝없이 죽는 거죠.”
순식간에 군중이 고요해졌다. 누군가 불쑥 외쳤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저는 연맹군 내 전략국 작전부 소속 참모인 요한 제이콥스 대위라고 합니다.”
연맹군이라는 말에 술렁임이 일었다.
“연맹군에서는 이번에 일어난 낙원의 비극적인 사태에 관해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저희는 이번 테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의 대다수가 낙원의 주민이 아닌 외부인이라는 점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낙원에서는 외부인이지만, 우리 연맹군에게 있어서는 보호해야 할 대상인 자국민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 연맹군이 우리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겠다는 의미입니까?”
요한은 남자의 질문에 침묵했다. 말을 아끼는 참모 대위의 행동에 다시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평의회의 승인 없이 저희 멋대로 낙원의 게이트를 열고 닫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곳에 온 것은 분명 여러분 모두의 안위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 또한 여러분들을 돕기 위함이지요.”
“결국 연맹군도 우리 보고 여기 남으라는 소리 같은데, 돕긴 뭘 어떻게 돕겠다는 거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멋대로 로스트 헤븐의 법과 질서를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저희에겐 그럴 권한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저희에게 그런 권한을 주시면 됩니다.”
요한의 시선이 앞에 나와 있는 남자들에게로 향했다. 값비싼 슈트와 구두를 신고 있는 이들은 아까부터 제일 큰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남자들은 기억의 도시에서 카지노와 도박 업소들을 운영하는 사업주들이다.
“권한을 주다니?”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사업주들에게 요한은 계산적인 미소를 보였다. 그는 지팡이를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을 펼치며 외쳤다.
“지금까지 평의회와 로스티아벤이 여러분께 보인 대처 능력을 판단해 보십시오. 얼마나 한심합니까? 감히 스스로를 ‘지상 유일무이한 낙원’이라 칭하며 모두의 안전을 장담하더니 이런 참혹한 결과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들께서 주신 신뢰마저 저버리려 하고 있죠. 더 이상 그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목숨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분노에 찬 눈빛을 지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맞는 말이야!”라며 소리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부 수사기관을 조직해야 합니다. 낙원 내 수사기관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이번 테러 사건을 조사할 수 있게 하는 거죠. 평의회로 하여금 여러분들이 지정한 수사기관이 낙원 내에 관여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십시오.”
사업주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비로소 참모 대위가 말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이해했다.
“새로운 외부 수사기관이라면 설마…….”
요한은 당연하지 않겠냐는 눈빛으로 웃었다.
“저희가 여러분들의 등을 떠밀어 놓고 뒷짐 진 채 보고만 있겠습니까? 연맹군 최고의 전력과 기술력을 갖춘 헤벨이 기억의 도시분들의 안위와 이익을 대표하여 본 사건을 조사할 것입니다.”
사업주들의 얼굴색이 돌변했다. 시세에 밝은 그들이 연맹군의 헤벨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문제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평의회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낙원은 굉장히 폐쇄적인 곳입니다. 외부 수사기관의 개입은 아마 절대로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제가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압력을 가하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번 테러 사태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본 게 누굽니까? 바람의 도시에 살고 있는 낙원의 주민들?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이죠. 기억의 도시는 현재 심각한 물리적, 인명적 피해를 입어 가동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평의회는 아직까지도 기억의 도시 상권이 입은 피해 보상 대책에 대해 가타부타 언급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분들의 손발마저 이곳에 묶어 놓고 사건 조사도, 대책 마련도 지지부진한 상태죠.”
요한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는 사업주들에게 느긋한 어조로 제안을 던졌다.
“만약 평의회가 끝끝내 타 수사기관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당장 낙원 내 모든 사업들을 철수하겠다고 하십시오. 자본 유입은 동결하고 뉴 에너지 공급 거래도 끊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사업주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들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는…….”
“그렇게 하는 시늉이라도 해 두라는 겁니다. 압력이란 원래 극단적으로 넣는 겁니다. 상대가 동요하지 않는다면 실패니까요. 여러분들은 낙원의 돈줄입니다. 이 정도의 떼쓰기는 괜찮을 거라 봅니다.”
사업주들은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철컥.
요한의 뒤에 있던 아크레인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줄곧 비행정 안에서 대화를 엿듣던 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햇살에 비친 남자의 금발이 화사하게 반짝였다.
남자가 걸어 나오자 요한이 정중히 목례를 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아크레인의 주인은 요한 제이콥스 대위가 아닌 가슴에 별을 단 이 남자였다. 그는 군인 특유의 자세로 서더니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 걱정하고 계신 게 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의 요청을 정당하고 합당한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헤벨의 함장, 마이클 밀러 중령.
그의 믿음직스러운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에 다들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래, 이 남자라면 어느 정도 명분을 세울 수 있다. 마이클 밀러 중령은 연맹군 안팎에서 인정받으며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그는 차기 연맹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를 인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벌써부터 굵직한 인맥들이 줄을 대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든다는 소문이었다. 그만큼 낙원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사업주들은 여전히 고민하며 저울질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도 그러고 싶지만 평의회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낙원의 경제 시스템을 마비시킨다 해도 쉽게 굽혀 주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낙원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건 왓슨 그룹이지 평의원들이 아니니까요. 평의회를 한 방에 움직일 수 있는 건 관리자인 아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만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죠.”
“낙원은 왓슨 그룹의 소유라……. 그럼 선택지는 하나군요.”
요한이 지팡이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눈초리를 좁힌 사업주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모두 알고 있지만 늘 배제하는 인물이 있죠. 그룹의 경영과 낙원의 정치에는 관심 없다며 틀어박히신 분 말입니다. 사실상 진정한 낙원의 소유주는 그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왓슨가의 유일무이한 상속녀라면 어떻습니까?”
제인 왓슨인가? 사업주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밀러와 요한은 옅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요한이 전략적으로 몰아붙이면 밀러가 실행에 옮긴다. 협상에 있어서 늘 9 할 이상 성공하는 조합이었다.
그때 밀러의 눈초리가 군중 속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사제 복장을 한 남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이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아크레인을 향해 걸어가던 밀러는 멈칫 서서 다시 사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기억의 도시의 안드로이드일 겁니다. 사창가인 소돔에서 일하는 안드로이드들은 저렇게 고대 성직자 차림을 하죠.”
요한이 밀러의 시선을 눈치채고 설명했다. 밀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요한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설마 가 봤나?”
“예? 그럴 리가요. 낙원에 관해서 꼼꼼하게 알아봤을 뿐입니다.”
당황한 요한은 진땀을 빼며 손사래를 쳤다. 밀러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몰아붙였다.
“안드로이드와 잠자리라니, 취향이 대단한데? 건장한 남자라면 충분히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지 뭘 그래?”
“아니라니까요. 누가 듣겠습니다, 중령님!”
요한은 결국 발끈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밀러는 개구쟁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옛날부터 주변 시선 하나는 엄청 의식하는 녀석이었다. 야망도 크고 그걸 현실화할 능력도 있는 반면 담력은 약하다. 요한은 천성적으로 눈치가 빨랐다. 평생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온 녀석처럼 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체면 차림도 심하고 무엇보다도 본인의 평판이 떨어지는 걸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 알았어. 네가 자꾸 이러니까 우리 둘을 놓고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거야.”
“예에?”
멍하니 넋을 놓던 요한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중령님과 자신을 두고 그런 류의 소문이 돌고 있단 말인가?
밀러는 입술을 검지로 쓸더니 갸웃거리며 말했다.
“조금 의외인 건 네가 공이고 내가 수라나?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지?”
요한은 아예 돌처럼 굳었다. 지팡이를 짚은 그의 손등에서 미세한 경련이 이는 걸 보니,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밀러는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중령님, 이게 지금 웃으실 상황이십니까?”
“우리끼리만 아니면 됐지, 뭘 그렇게 신경 써?”
밀러는 괘념치 말라는 듯 요한의 등을 툭툭 치더니 먼저 돌아섰다. 그러나 요한의 표정은 탐탁지 못했다. 그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밀러는 예나 지금이나 그를 놀려먹는 걸 좋아했다. 남들 앞에서는 완벽해 보이는 헤벨의 함장이었지만, 그와 둘만 있을 때는 종종 아크레인을 몰래 타고 나가던 악동 시절의 마이클로 돌아오고는 했다. 아마 유림도, 메리도 없는 헤벨에서 그가 유일하게 위안을 삼는 존재가 자신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헤벨을 이끈다는 막중한 위압감에서 그가 가끔이나마 저렇게 숨을 돌릴 수만 있다면, 요한은 얼마든지 그의 놀잇감이 되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황당한 소문까지 눈감아 줄 생각은 없지만.’
헤벨의 2인자, 요한 제이콥스.
실질적으로는 밀러보다도 헤벨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종 자리를 비우는 밀러 대신, 그는 1년 365일, 헤벨의 살림살이 하나하나를 책임지고 살폈다. 따라서 헤벨 내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아주 대담한 짓이었다. 소문의 근원지가 누군지 잡히기만 해 봐라. 이를 갈며 허공을 노려보던 요한의 눈초리가 멈칫 멈췄다.
“중령님? 거기서 뭘 하고 계신…….”
아크레인에 탑승했을 거라 생각했던 밀러가 낙원의 성목 아래 서 있었다. 그는 붉은 과실이 주렁주렁 맺힌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상대는 조금 전에 보았던 사제복의 남자였다.
밀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소돔의 안드로이드가 이곳까지 나와서 돌아다니다니, 프로그램 오류인가?”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저는 안드로이드가 아닙니다.”
밀러는 지혜로운 눈빛의 사제를 바라보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사과를 건넸다.
“이런,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로스트 헤븐에 종교인이라니 더 큰 호기심이 일었다. 이곳은 인류 과학 기술의 궁극적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신의 가호보다 이브의 가호를 믿는 곳이다. 이브는 곧 낙원의 상징이며 마지막 남은 인류의 저력을 뜻했다.
“사제님께서 낙원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저는 이 노목을 돌보고 있습니다.”
금발의 사제는 터슬터슬한 나무 기둥 껍질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노모를 돌보듯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종교 단체가 기부했다는 천년 묵은 성목.
그는 그쪽에서 파견된 모양이었다. 혹은 이런 선물을 빌미로 누군가 낙원에 스파이를 심어 놓은 것일지도.
밀러를 응시하던 사제는 머리까지 뒤집어쓴 외투를 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은 밝고 단정한 인상이었다.
“하나 드셔 보시겠습니까? 좀 전에 딴 겁니다.”
젊은 사제는 소매에서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붉은 열매 하나를 꺼내 건넸다.
“오래전 신들이 먹던 음식입니다. 인간들에게는 철저히 금지된 과실이었다고 하지요.”
“신들의 음식?”
밀러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가지가 흔들렸다. ‘쏴아아’ 바람을 타고 멀어지는 갈잎들 사이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잎사귀를 올려다보던 밀러는 거대한 우산처럼 드리운 성목에서 문득 성스러운 기운을 느꼈다.
‘내가 귀신에 홀린 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에게 젊은 사제는 빙그레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먼 옛날, 고대의 신들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지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계율을 내려 인간을 엄히 가르치고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존재였습니다. 결국 몇몇 이들은 간사한 뱀의 꾐에 넘어가 경거망동하고 말았죠. 뱀이 이들에게 ‘이 과실을 먹으면 너희도 불로불사의 몸이 될 수 있다, 신들의 지혜를 획득할 수 있노라.’며 속닥였습니다. 너무나 유혹적인 그 간사한 속삭임에 결국 인간은 계율을 어긴 채 금단의 열매를 삼키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 이야기입니까? 결국 신이 진노하여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냈다는 결말이었던가요?”
“아니요. 신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밀러의 눈빛이 의아하게 변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이곳을 떠난 건 신들이었으니까요.”
“제가 아는 이야기와는 좀 다르군요.”
“그럴지도요.”
사제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보였다. 그는 탄식이 섞인 어조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 낙원을 차지한 건 인간이었답니다. 인류는 정녕 신들의 터전을 빼앗은 것일까요? 아니면 신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일까요? 그들은 우리보다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였고, 우리는 그들의 지배를 받을 만큼 나약했는데 말입니다.”
밀러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었다. 정확히 어떤 종교 단체인지는 모르겠으나 정통 교리를 따르는 것 같지는 않다. 이단이지만 꽤 재밌는 여담이었다.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꺼림칙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이런 무서운 것을 내게 건네는 이유가 뭡니까? 먹어서는 안 될 것을 권하다니, 사제님께서 설마 그 유혹의 뱀인 겁니까?”
밀러는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사제는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신화 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하, 누가 들으면 사제님께서 신을 부정하신다 여기겠습니다.”
“그분들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지요. 하지만 ‘신’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란 창조주이고 조물주입니다. 그렇다면 정녕 신께서 우리를 만드신 걸까요?”
“신화 속 이야기에 따르면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벽안의 사제는 빙그레 웃었다.
“만일 신들이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22세기의 인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과거 선조들처럼 그들을 ‘신’이라 칭하며 숭배할까요? 아니면 미지에서 인류를 위협하기 위해 온 ‘적’이라 간주하며 맞서 싸우게 될까요?”
“군인인 저는 맞서 싸울 거라고 답해야겠군요.”
사제는 손안의 붉은 과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물음이었습니다. 과연 인간은 신이 빚어낸 존재인가? 아니면 반대로 인간이 신을 지어냈는가? 우리는 혹 스스로 꾸며 낸 신화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먼 미래에는 소돔의 안드로이드들 역시 이와 같은 의문을 품게 되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하고요.”
유림이 그랬나? 철학과 사상을 논하는 녀석들 대부분이 하릴없이 시간을 세는 놈들이라고. 그런 녀석들의 궤변을 막고 싶으면 하루만 전쟁터에 던져 주라 했다. 몸에서 피똥이 질질 흐르는 걸 봐야 정신을 차린다면서. 목숨의 위협이라곤 받아 본 적 없는 태평한 녀석들이 대개 제 머릿속에 쑤셔 넣은 뫼비우스의 띠를 쳇바퀴처럼 돌면서 대우주의 이념을 논하는 법이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글쎄요. 그들이 인간을 창조주로 여긴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밀러는 얼떨결에 과일을 건네받으며 중얼거렸다. 유림이라면 지금 이 사제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할 일 없는 놈이라 비웃으며 콧방귀부터 뀔 게 뻔했다.
손안에서 달큼하고 맛있는 향이 났다. 그는 별일 있겠나 싶은 표정으로 열매를 입에 가져갔다. ‘와삭’ 하고 한 입 베어 물자 향긋한 과즙이 입안에서 풍겼다.
그 순간, 사제의 목소리가 미풍처럼 그의 귓가를 스쳤다.
“곧 이 모든 답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머지않은 시간 내에 말이죠. 그때 중령님께서는 누구와 싸우고 계실지 궁금해집니다.”
* * *
제2차 긴급 총회가 열렸다. 일곱 명의 평의원들이 접속했다. 말발굽 모양 테이블의 상석은 빈 채로 대회의실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홀로그램 형상의 평의원들 표정에도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집무관이 중앙으로 나와 의원들의 출석을 확인했다.
─ 공석 하나,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님. 공석 하나, 노아 호크 대령님. 공석 하나, 익명. 공석 하나, 케빈 키퍼 출입국 장관님, 공석 하나…….
그때 테이블 오른쪽에 접속해 있던 클라크 홍보부 장관이 손을 들더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 대체 저 익명의 의원은 왜 매번 공석인 겁니까?
그녀의 질문에 몇몇 의원이 헛기침을 하더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클라크 홍보장관은 평의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었다. 그녀는 몇 달 전 에덴 타워 내에서 살해당한 의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발탁되었다. 클라크 의원은 홍보장관에 임명되자마자 대담한 추진력과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전례에 없던 관광 매출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붉은 암사자’란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터프한 별명에 걸맞게 꽤 직설적이고 대담한 성격의 리더라는 평론이었다.
─ 그렇게들 눈치 주지 않으셔도 저도 압니다. 낙원의 설계자이자 천재적인 프로그래머라는 익명의 과학자 ‘K’ 아닙니까?
─ 클라크 장관, 그분은 그렇게 막 함부로 거론해도 되는 분이…….
─ 이런 상황일수록 그분께서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낙원의 설계자라면 모래의 도시 미들 타운과 미궁에 대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쪽의 건설 사업을 중단한 것도 관리자 엘 카인과 익명의 과학자 아닙니까?
이제는 관리자의 이름까지 입에 마구 올리고 있었다. 다들 심기가 불편한 눈빛으로 곁눈질을 해 댔다.
「누가 저 붉은 암퇘지 입 좀 막아 보세요!」
의원들 중 누군가가 띄운 익명의 메시지가 클라크 장관을 제외한 모든 의원들 창에 떠올랐다. 하지만 다들 쉽사리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채 못마땅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붉은 암사자는 계속해서 비판을 이어 갔다.
─ 지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다들 감이 안 오시나 봅니다. 올해 예약되었던 투어의 89퍼센트가 취소된 상태입니다. 평의회 예산의 절반 이상이 관광 수입으로 채워진다는 건 알고 계시죠? 기억의 도시에 머물고 있던 관광객들의 약 90퍼센트가 지금 낙원을 떠나겠다며 게이트 앞에 모여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손님을 다 잃은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의 바벨탑에는 지금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숨도 쉬지 않고 쏘아붙이던 클라크 의원은 심호흡을 하며 붉은색 재킷의 깃을 바로잡아 세웠다. 그러자 오른쪽 가슴에 달고 있는 평의회 배지가 깃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의 대쪽 같은 성품처럼 티끌 하나 없는 배지는 반짝거리며 윤을 뽐냈다.
─ 클라크 장관께서 의석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이 늙은 노인네가 한 마디만 보태자면, 평의원이라고 해서 다 같은 평의원이 아니랍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웃음 속에 회초리를 들었다. 졸지에 손녀딸 취급을 당한 클라크 장관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재정부 장관인 아이작 라이트, 올해로 여든여덟. 평의회 의원들 중 최고령이다. 인자한 얼굴 뒤로 온갖 부정부패는 다 저지르는 독사 같은 늙은이. 클라크 장관은 경멸 어린 눈빛을 감추며 침묵했다.
─ 낙원의 설계자께서는 실질적으로 평의회에 참석하신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늘 그 자리를 비워 두는 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겁니다. 명예의원처럼 명패를 남겨 두는 것이지요. 고故 세르게이 총사령관도 저 자리만큼은 항상 비워 두었습니다. 감히 언급조차 하지 않았지요. 로스티아벤의 총사령관으로서 관리자 아담의 오른팔이라 불렸던 사내입니다. 그자의 위치가 일개 장관과 같겠습니까? 그 세르게이 의원이 유일하게 존중했던 의석이란 말씀입니다. 클라크 장관, 패기가 넘치시는 건 좋지만 의원석에 앉은 이상 재채기 한 번을 할 때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합니다. 올라올 때는 치열해도 내려갈 땐 미끄럼틀을 타듯 순식간인 것이 바로 정치판이지요. 클라크 장관뿐만 아니라 평의회 모두가 반성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다들 호크 대령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기를 바라며, 늘 겸손하고 언행에 주의하여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 아이작 라이트 장관님, 길게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장관님의 삶을 살펴보면 굳이 말씀을 듣지 않아도 깨닫는 바가 많으니 말입니다.
시큰둥하게 대답한 클라크 장관은 언짢은 얼굴로 화면을 꺼 버렸다. 접속까지 끊은 것은 아니고 영상만 단절한 상태였다. 명백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상대하기 싫다는 의미였다. 다른 의원들은 그녀의 무례한 태도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괜찮다며 허허 웃던 늙은 아이작의 눈초리엔 남들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다시 집무관이 화제를 전환시키며 나섰다.
“그럼, 오늘 긴급 총회에 소환된 분들부터 모시겠습니다. 먼저 본 테러 사건의 수사를 맡은 특별보안대 소속 셰인 필란 중위입니다. 그 외에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특별수사대 소속 정유림 소위와 케이 애덤슨 중사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앞에 세 사람의 프로필과 사진이 떠올랐다.
─ 들어오라고 하게.
몇 마디 했다고 목소리가 쉰 모양이었다. 아이작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명했다. 다른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집무관은 지체 없이 회의실 문을 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보고서로 뭔가 ‘핏’ 하고 들어왔다.
“아.”
집무관은 빠른 몸짓으로 돌아서더니 잠시 휴회하기 위해 접속을 끊던 의원들을 멈춰 세웠다.
“죄송합니다. 급히 한 분 더 추가합니다.”
그의 보고에 다들 의아한 눈초리를 지었다.
【알림】
셰인 필란 중위, 정유림 소위, 케이 애덤슨 중사.
평의회 전용 대회의실로 곧 입장하십시오.
유림은 하품을 하며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렌즈를 낀 오른쪽 눈이 따끔따끔한 게 불편했다.
“피곤해요?”
“누구 때문인데?”
케이는 그런 그녀를 보며 슬쩍 웃었다. 모처럼 유림이 머리를 올리고 군모를 썼다. 하얗고 긴 목선이 돋보이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연신 만족스럽다는 눈웃음을 지었다.
“유림이 먼저 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보고 싶었단 말이야. 케이가 앞치마 한 모습.”
케이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아쉬워하는 그녀의 눈초리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듯했다.
“남자한테 알몸에 앞치마 한 걸 보여 달라는 여자는 유림뿐일 거예요.”
“결국 안 보여 줬잖아.”
유림은 불만족스럽다는 듯 뺨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찌르면 터질 듯한 복어가 된 얼굴을 보며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렇게 정복을 딱 갖춰 입은 모습으로 애교를 부리는 유림이라니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케이? 뭐하는 거야?”
“그런 얼굴 하니까 못 참겠잖아요.”
장소 구분 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건 유림도 마찬가지지만 여기는 평의회 회의실 앞이었다. 지나다니는 집무관들만 몇인데. 유림이 끔찍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평의회 노인네들의 잔소리였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떨어져!”
“싫은데.”
유림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은 케이는 그녀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것만으로 모자라서 허리를 숙여 목덜미에 잔키스를 남겨 갔다.
“한 번만 더 해 봐요, 방금 전 볼 부풀리기.”
“무슨 헛소리야, 떨어지라니까!”
유림이 버둥대며 난리치자, 케이는 느른한 미소로 더 힘껏 안았다.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주먹 쥐고 힘을 주던 유림은 부르르 떨며 손을 풀었다.
“힘장사 다 됐다? 언제부터 완력이 이렇게 세진 거야?”
“원래 셌어요.”
그는 생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유림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이 늘어 가고 있었다.
케이가 원래 힘은 셌던가? 맷집만 센 게 아니었나? 멍한데 반응은 빨랐던 것도 같고, 몸치였던 것 같은데 요즘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최근에는 단순히 공격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공도 가끔 날리던데…….
“그래서 좀 세졌다고 이제 기어오르는 거야?”
여전히 케이의 팔 안에 갇혀 있는 유림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협박했다. 온갖 기술을 다 써 봐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당하는 느낌에 자존심마저 짓밟히는 느낌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게 협박해도 소용없어요.”
그가 입술에 얄궂은 곡선을 띄우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8분 31초 동안 이러고 있어 볼까요?”
유림의 입가에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이거 안 놔?” 하고 협박하는 그녀는 잔뜩 약이 오른 기색이었다. 팔만 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쏘아붙이는 유림에게 케이는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사르르 녹아들 듯한 입맞춤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유림의 미간이 서서히 풀어졌다. 옆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키스를 한 케이는 혀끝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건드리며 윗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치열을 핥던 그는 사탕 빨 듯 그녀의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머금다가 놓아주었다.
“왜 이러는 건데?”
그녀가 사랑스레 혈색이 도는 뺨으로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케이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어제 일에 대한 심술.”
“왜 케이가 심술을 부려? 부리려면 내가 부려야지.”
“유림이 왜요?”
유림은 정말 모르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미간을 구긴 채 자존심 상한 눈빛을 지었다. 케이는 안았던 팔을 풀며 물었다.
“뭔데요? 말해 봐요.”
그녀는 팔짱을 끼더니 심보 사나운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세웠다.
“아무리 내기라지만, 내가 그렇게 만지고 애무하는데 어쩜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그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유림을 쳐다보았다.
“태연?”
죽을힘을 다해 버틴 자신에게 표창이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인데 태연했다고? 이를 악물고 참느라 손바닥으로 짚고 있던 소파의 가죽까지 다 뜯고 말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그녀의 속옷까지 갈기갈기 찢어 버렸는데, 그걸 태연한 반응이라 보는 건가?
“솔직히 말해 봐. 경험 없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그렇게 느긋한 얼굴일 수가 없어. 제발 해 달라고 애원을 해도 모자랄 판에…….”
순간 케이의 눈이 슬쩍 커졌다. 그의 입술 새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원하면 허락해 줄 거예요?”
“아니.”
칼같이 대답한 유림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혈색 오른 뺨으로 애써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저렇게 느른하게 내려다본다.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입 맞출 것처럼 다가왔다.
“그럼 유림이 애원하게 만들어야겠네요.”
속삭임을 남긴 체취가 향긋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유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또 무슨 말장난을 치는 건지, 분위기에 넘어가면 안 되는데 페로몬처럼 홀리는 그의 향기에 달큼한 감흥이 올라왔다. 이 남자를 장악하고 싶다. 한 번만이라도 꼼짝 못하게 굴복시키고 싶다. 저 얄미운 표정을 물 흐리듯 흐려 놓고 싶다.
“내가 정말 매번 태연해 보여요?”
“응.”
“아닐 텐데?”
“그렇다니까.”
“잘 생각해 봐요. 내가 어제 정말…… 태연했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치열하게 얽혔다. 서로 맞물린 눈빛은 어제의 열기를 떠올리며 다시 불붙은 불씨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제 저녁, 두 사람이 먹은 카레 향이 미처 다 사라지기도 전에 발생했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유림의 호기심이었다. 케이가 던져 놓은 앞치마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흘끗 보더니 대뜸 무릎 위에 올라탔다. 웬일로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유림의 모습에 케이도 기분이 좋아서 입매가 사르르 녹았다.
“키스해 줘요?”
“응.”
유림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쾌감 어린 신음을 흘렸다. 그것도 모자라 목에 칭칭 감은 팔을 비비며 더 해 달라고 졸랐다. 그는 아예 유림을 소파에 눕혔다. 혀를 넣던 케이는 쿡쿡 웃으며 옴짝거리는 그녀의 골반을 눌렀다.
“알았으니까 그만 졸라요. 원할 때까지 해 줄 테니까.”
“그게 아니고.”
유림이 해맑게 웃더니 등에 깔고 누웠던 앞치마를 불쑥 내밀었다. 케이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건 왜요?”
“옷 벗어, 케이.”
그 순간 그의 낯빛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앞치마를 내려다보던 케이는 유림이 뭘 하려는지 단숨에 파악했다.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는 케이였지만─실제로 그는 죽는 게 쉽지만은 않다─ 지금은 그녀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앞치마라니…….
“이걸 왜 보고 싶어요?”
“케이가 당황해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가끔 엉뚱한 심술보를 터뜨리는 여자란 건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마저도 사랑스럽지만 그래도 이건 피하고 싶었다.
앞치마를 받은 케이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유림의 관심사를 돌려야 했다. 그는 내기를 제시했다. 평소 그를 괴롭히기 좋아하는 유림이 혹할 조건의 게임이었다.
“신음 소리를 내면 지는 거지?”
“맞아요.”
“시간은 8분 31초?”
“유림이 좋을 대로 해요.”
그들의 벌칙 시간은 언제부터인가 늘 8분 31초였다. 합의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각자 음흉한 생각을 품고 웃었다.
유림은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벗고 속옷 차림으로 섰다. 브라와 팬티만 입고 당당하게 선 그녀는 늘씬한 몸매를 과시하며 그의 상반신에 올라탔다. 엉덩이를 세우고 허리를 낮춘 유림의 모습은 한 마리의 흑표범처럼 우아하고 매혹적이었다. 소파에 누운 케이는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차분한 눈빛 속에 옅은 갈망이 일렁였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유림은 즐겁다는 듯 눈웃음을 머금었다. 목울대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장난치듯 그의 가슴을 할짝 핥으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좀 전까지는 그렇게 사랑스레 뺨을 붉히던 여자가 순식간에 요부가 됐다.
“자꾸 내 몸에 손대면 반칙이야. 만지지 마.”
“내가 만졌어요?”
“지금도 만지고 있잖아.”
“아, 정말이네요.”
돌아 버릴 것 같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머릿속을 서늘하게 비워도 목구멍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올라왔다. 케이는 주먹 쥔 손으로 소파 가죽을 움켜쥐었다. 필사적으로 짜릿한 쾌감에 뒷목이 꺾이는 걸 견뎌 내면서.
유림은 고개를 들어 그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슬금슬금 밑으로 몸을 빼기 시작했다. 탄탄한 복부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배꼽 아래 허벅지를 만지고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케이는 무념무상인 듯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반에 오르기라도 한 듯, 그는 초점 없이 흐리흐리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 순간 반쯤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이를 악물며 황급히 하반신 쪽을 내려다보았다. 흘끗 눈을 치켜뜬 유림과 마주친 케이는 흠칫 떨더니 얼어붙었다. 그녀가 요염한 눈초리로 붉은 입술을 할짝거리며 다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맙소사, 유림!
─ 8분 31초 종료.
리사의 목소리와 함께 유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숨을 토했다. 그의 잇새엔 죽다 살아난 미소가 어렸다. 등에서 진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면서 쾌락에 식은땀을 흘려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몸에 아직도 남은 잔경련이 흥분의 정도를 일러 주고 있었다. 낮게 터져 나오려던 신음을 참느라 목에 힘줄이 시뻘겋게 올라온 상태였다.
걸레 조각이 된 소파 가죽을 내려다보던 케이는 멍한 동공에 초점이 돌아오자, “하…….” 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좌절감에 머리를 숙이던 그는 곁눈질로 흘끗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 하고 있었다. 눈초리를 접은 케이는 유림의 팔을 덥석 낚아챘다. 사람 피를 쫙 말려 놓고 깜찍한 고양이께서는 어딜 도망가시나?
“내 차례네요?”
유림은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다. 영혼 없이 생긋 웃는 그의 미소가 오싹하리만큼 낯설었다. 해사한 웃음 속에서 느껴진 살기가 정신 나간 놈처럼 살벌했다. 유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누워요, 당장.”
평소 온유하던 그의 눈빛이 어그러진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런 광폭한 눈초리는 델타에게 물린 놈들 빼곤 처음 보는데.
유림은 방어하듯 소파 위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의 등 위로 올라탄 케이는 속옷부터 툭 벗겼다. 평소라면 괴롭히듯 야금야금 벗겼을 텐데, 일단 벗기고 보더니 그녀의 맨 등에 ‘쪽’ 하고 입술부터 맞췄다. 유림은 자존심이 무너진 얼굴로 인상을 팍 구겼다. 등에 닿는 키스 때문이 아니라, 가슴을 쥐어뜯을 듯 잡은 손 때문이었다. 엎드린 채 눌린 가슴을 저렇게 거세게 주무르는데, 어째서 고통이 아닌 쾌감이 느껴지는 거지? 벌써부터 신음이 흘러나오려고 했다.
애무하는 입술은 또 왜 이렇게 녹아들 듯 달콤할까. 화가 난 게 아니었나? 그의 혀끝이 두근거리는 맥을 따라 그녀의 목덜미를 핥아 내렸다. 팔딱거리는 맥박이 느껴지는 곳을 머금고 물어뜯듯 빨아들였다. 거친 숨결이 닿는 곳마다 성감대였다. 피부를 쪽 빨아들이는 잇새에 씹힐 때마다 쾌감이 찌릿찌릿 느껴졌다. 자극이 전류처럼 온몸을 관통하며 엉덩이를 짜릿하게 긁는다.
케이는 몸을 일으켜 유림의 어깨와 골반을 잡더니 손쉽게 홱 뒤집었다. 그리고 반동으로 튕긴 그녀의 허리를 잡고 활시위처럼 올라온 가슴 둔덕을 주물렀다. 유림은 허리가 휜 채 허공에 들린 자신의 몸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가 솜사탕을 머금듯 살캉거리며 그녀의 젖가슴을 입안에 물고 있었다.
“거기는 그만…….”
“여기가 좋아요?”
그는 봉오리처럼 오므린 정점을 달콤하게 핥으며 웃었다. 유림이 발가락 끝을 힘껏 접자, 그는 즐거운 듯 예쁜 눈웃음을 맺었다. 유림은 원래 가슴이 민감하다. 특히 이렇게 빳빳하게 선 순간에 혀로 건드리면 앙칼진 교성을 꾹 참으며 몸을 비트는데, 그게 미치도록 자극적이어서…….
“계속 괴롭히고 싶잖아.”
그는 그녀의 귓속에 더운 숨을 훅 불어넣었다. 꽉 깨문 입술 새로 신음을 힘껏 바스러뜨린 유림이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케이의 눈초리가 재밌다는 듯 휘었다.
그는 이번에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어디까지 가려고…….”
그는 대답 대신 근사하게 웃었다. 두 다리를 잡은 손이 골반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 깊숙한 곳에 붉은 열흔을 새기던 입술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유림은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혼탁함에 흐트러진 그의 눈과 마주치면 온몸의 혈류가 거꾸로 치솟을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럼 더 이상 참기가 힘들어질 테니까.
그때, 케이가 몸을 일으켜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열락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유림이 끝까지 참는다면 8분 31초, 한 번 더 할까요? 수성전과 공성전을 하듯이…… 그리고 유림이 밤새 참아 낸다면, 그때는 유림이 원하는 대로 앞치마든 뭐든 하루 종일 입는 걸로. 어때요?”
“하루 종일?”
“하루 종일.”
그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한 그녀를 보며 사랑스럽다는 듯 ‘쪽’ 입을 맞췄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악마의 농간에 놀아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딴 내기,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제의 기억을 되돌려보던 유림은 팔짱을 낀 채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얄궂게 웃더니 달래듯 말했다.
“그럼 반대의 제안을 하지 그랬어요.”
“그 순간에는 좋았단 말이야.”
유림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흘겼다.
“케이도 그걸 노리고 그런 거잖아.”
그가 더 해 줬으면 했던 건 사실이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유림을 보며 케이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곁눈질로 노려보던 유림이 불쑥 재도전장을 던졌다.
“오늘 밤에는 반대로 해.”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뚝 굳었다.
“만약 케이도 밤새 참으면 나도 케이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이번에는 그녀가 악마같이 붉게 웃었다. 오기가 담긴 눈초리였다.
“나는 태연하고 느긋했던 케이밖에 기억이 안 나거든. 그러니까 이번에는 케이가 누워.”
케이는 유림을 빤히 쳐다보더니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못 참으면요?”
“앞치마 입는 거지.”
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거지?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생긋 웃더니 그를 끌어안았다.
“할 거지?”
“유림, 잠깐만…….”
“한다고 약속해.”
“밤새워 한다고요? 어제 했던 그걸?”
“당연하지. 왜 그렇게 낯빛이 사색이 됐어?”
어제 내기는 결국 새벽녘에야 종결되었다. 유림은 땀에 젖은 몸으로 끊어질 듯한 교성을 흘리더니 그의 품에 안겨서 울기 시작했다. 분해서 우는 건지, 쾌감에 흐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기에 그는 그냥 말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침대에서 남자한테 안긴 채 운 건 처음이란 말이야.”
지금 표정을 보니 분해서 운 것도 있는 것 같군. 그래도 처음이라며 굴욕적인 눈빛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흡족했다. 유림은 그의 허리를 안은 채 짜증 섞인 어조지만 귀여운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할 거라니까!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해야지. 항거 불능일 때 계약한 건 무효야. 어제 나는 항거 불능이었어.”
“항거 불능?”
“아주 교활한 방식이었다는 의미야. 그러니까 오늘 다시 해.”
쿡쿡 웃던 케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들어 그가 자주 이렇게 웃는다. 낮은 울림소리가 청량할 정도로 듣기 좋았다. 게다가 아름다운 얼굴에 번지는 커다란 미소가 두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내가 진짜 못 참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못 참으면 앞치마 입는 거라니까.”
“앞치마 말고 다른 거로…….”
“둘이 뭐하냐?”
불쑥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셰인 필란이었다. 그는 코너에 기대서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듯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케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다 살다 셰인 필란이 도움되는 순간도 있다니, 세상사 모를 일이었다.
“둘 다 아주 태평하네. 같은 부대 소속인 나츠 시게노가 테러범으로 검거되어 조사받는 마당에 웃음꽃이 잘도 피는구나.”
유림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정 소위 너도 여전히 의심받는 상태야. 들어가서 해명 잘해야 할걸? 그렇지 않으면 나츠 시게노랑 손잡고 나란히 구금되게 될 테니까.”
“아, 예. 제가 구금될까 봐 염려를 다 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서른 마리 남짓의 델타들은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는데 중위님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언제 저 녀석들이 나타나 출동하게 될지 모를 상황이라죠? 웬만한 STF 대원들도 똥줄이 바짝 타는 중일 텐데 우리 중위님은 실전에 잔뼈가 굵은 분이니 델타들이야 뭐 나타나기만 하면 파리 목숨 아닙니까? 어제 중위님께서 ‘차랏! 찻차랍찹!’ 발차기를 델타의 등에 내리꽂는데, 발차기로 그 두꺼운 철갑을 뚫어 보겠다는 발상을 다 하시다니. 저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전략이라서 감탄했습니다.”
유림이 원숭이처럼 허공에 헛발질을 하며 셰인 흉내를 내자, 케이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러니 어제처럼 제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정말 우연히 지나다가 중위님을 발견해 도움을 드린다거나 목숨을 구해 드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아, 상부에는 중위님께서 이미 보고를 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상황이 거의 다 종결되었을 때 등장했다고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보고인 것 같기는 한데, 저도 그냥 그렇게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건 정 소위, 네가!”
발끈하여 외친 셰인은 유림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홱 붉히며 말을 이었다.
“일찍부터 와서 있었다는 것도 웃기잖아. 그럼 나츠 시게노가 개입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는 건데.”
유림의 눈이 살짝 굳은 채 커졌다.
“넌 몰랐잖아, 나츠 시게노가 오베론 소속이었다는 것.”
“그건…….”
“난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고, 네 말대로 네가 날 구해 줬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나는 것도 쪽팔리니까 그냥 이렇게 한 거야. 그러니 어디 가서 좆도 안 먹히는 영웅담 늘어놓지 말고 안에서 해명이나 잘해라. 괜히 나까지 엮이게 하지 말고.”
해명이라, 유림의 눈이 일렁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안드로이드 집무관이 등장했다.
“세 분, 입장하십시오.”
세 사람은 집무관을 따라 한 줄로 입장했다. 정면에 높게 솟아 있는 말발굽형 테이블 앞에 일자형 테이블이 따로 낮게 마련되어 있었다. 판사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의원들의 눈초리는 죄인을 심문하듯 고압적인 분위기였다.
착석하기 무섭게 집무관은 다음 참석자를 안내했다. 시간에 쫓기듯 숨 가쁜 진행이었다.
“마지막으로 참석하실 분은 연맹군 측의 마이클 밀러 중령님이십니다. 연맹군의 함정 헤벨은 본 테러 사태의 외부 수사기관으로 발탁되기 위해 평의회에 승인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아직 승인이 나기 전이지만, 밀러 중령님께서도 사건 현장에 계셨기에 이번 회의에 참석 요청을 드렸습니다.”
회의실에 입장한 밀러는 뚜벅뚜벅 걸어 중앙으로 나왔다. 집무관 옆에 선 그는 거수경례를 하더니 테이블에 접속한 평의원들의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의원들의 표정에 다소 불편한 심기가 어려 있었다.
“일전에는 시커먼 화면으로 대신하더니 오늘은 이렇게 얼굴들도 보여 주시고, 영광입니다.”
밀러가 정중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 밀러 중령, 이게 무슨 짓입니까? 중령은 우리 평의회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무시라니요?”
─ 낙원 내에서 일어난 사건은 평의회 관할 수사기관이 조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로스트 헤븐의 법이고 규율입니다. 그걸 연맹군 측에서 무시하고 자체 수사팀을 낙원에 쑤셔 넣으려 하다니, 지금 외압을 넣으려는 겁니까? 어차피 이건 승인되지 않을 사항입니다. 그리 아십시오.
“승인될 겁니다.”
의원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평의회의 승인 따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절차상 올려놓은 것뿐이죠.”
─ 밀러 중령, 지금 우리와 말장난이나 하자고 이곳까지 와서 시간을 축내고 계신 겁니까? 우리가 그리 한가해 보여요? 아무리 헤벨이라 해도 평의회의 정식 승인 없이는 낙원에 발도 붙일 수 없으니 억지는 그만 부립시다.
빈센트 의원은 골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잠자코 앉아 있는 아이작의 눈치를 살폈다. 의원석 정중앙에 앉은 아이작은 침묵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검버섯이 핀 뺨을 손으로 긁더니 가늘어진 눈초리로 물었다.
─ 헤벨의 함장이자 전략국 작전부장인 분께서 우리를 앉혀 놓고 허세나 부리려 행차하신 건 아닐 테고…….
밀러는 부드러운 미소로 대응했다. 그를 빤히 보던 아이작은 족제비를 닮은 눈으로 지그시 캐물었다.
─ 중령의 호언장담 뒤에는 혹, 관리자께서 계신가?
옆에서 아니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빈센트가 흠칫 놀라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다른 의원들도 다소 긴장한 얼굴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추론이었다. 관리자 권한이라면 평의회의 승인이 없어도 외부 수사기관을 들일 수 있다.
“아담이 아니고 내가 해 줬죠.”
당당한 목소리가 아이보리색 실크 드레스와 함께 등장했다. 홀로그램 형상의 평의원들은 놀라 회의실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집무관이 허둥지둥 들어와 의원들에게 꾸벅거리더니 난데없이 등장한 제인 왓슨의 옆으로 달려갔다.
“낙원의 공식 모델, 이브 님께서 오셨습니다.”
제인은 여신처럼 화사한 옷차림이었다. 그녀는 유림 일행이 앉아 있는 일자형 테이블 앞에 서더니 팔짱을 끼고 의원들을 노려보았다.
“당신들 하는 짓이 하도 답답해서 내가 승인했어요.”
의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낯빛이었다. 제인의 뒤통수를 보고 있는 유림과 셰인도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관리자께서는 이브 님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계시는지…….
“내가 어디 가는 것까지 일일이 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요? 그 사람은 지금 침실에서 웬 계집애와 희희낙락 중일 테니 내가 뭘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죠.”
그녀는 버럭 승질을 내더니 밀러를 쳐다보았다.
“밀러 중령은 공정한 수사를 할 겁니다. 그러니 그에게 특보대와 동등한 수사 권한을 부여하세요. 평의회도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시리라 믿어요.”
─ 이브 님, 이 일은 이렇게 논할 사항이 아닙니다. 낙원에 외부 수사기관이라니, 이건 유례에 없던 일일뿐더러…….
“유례에 없던 일이 일어났으니 하는 말이죠. 이브의 생일 파티에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2차 테러 현장에서는 로스티아벤 총사령관인 우리야 세르게이 장군이 살해당했다면서요? 지금 우리가 자존심 세우면서 알아서 코 닦겠다고 할 상황이에요? 연맹군에서 도와주겠다고 손 내밀 때 받아서 하루라도 빨리 사태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콧대만 세우고 있을 일이냔 말이에요!”
유림은 의외라는 눈빛을 지었다. 낙원의 공주가 웬일이래, 저런 대사를 치고? 누가 써 준 대본을 읊는 느낌이었지만 놀랄 노 자인 건 확실했다. 저 오만한 공주님을 움직일 만한 수완가라면…… 헤벨의 참모 요한인가?
제인이 저렇게 펄펄 뛰는 걸 보니 엘 카인에게 제대로 무시를 당한 모양이었다. 다른 여자와 있는 그에게 잔뜩 화가 난 듯한데,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든 거라면 나쁘지 않은 작전이다. 엘 카인에게 있어 본인의 가치는 왓슨 그룹의 상속녀, 그 타이틀뿐이라는 걸 드디어 자각한 건가?
유림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턱을 괴었다.
‘그나저나 엘 카인과 함께 있는 여자라니……. 설마 메리는 아니겠지?’
의원들은 난색을 보이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결국 그들의 시선이 몰린 곳은 아이작 라이트 장관이었다. 우리야가 없는 지금은 아이작이 이들을 이끄는 축과 다름없었다.
─ 알겠습니다. 이브 님 뜻대로 승인하도록 하지요.
제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밀러를 쳐다보았다. 역시 제 뜻대로 되지 않았느냐는 무언의 의기양양함이었다. 밀러는 예의 바르게 웃어 보였다.
─ 단, 만일 밀러 중령과 헤벨이 문제를 일으킬 시에는 그 모든 책임을 이브께서 지셔야 합니다.
“내가?”
─ 저희가 이브 님의 뜻을 존중해 승인은 해 드리겠지만, 이게 평의회의 뜻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책임까지 떠맡진 않겠다? 하여간 늙은이들……. 마음대로 하시죠.”
제인은 불쾌한 눈초리를 구기며 돌아섰다. 빈센트는 이마까지 핏줄이 올라 빨개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조카뻘 나이인 제인이 비아냥대는 모습에 혈압이 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기세였다. 반면 아이작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을 마셨다. 그 옛날, 램지 왓슨 회장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시절부터 오만방자했던 아이였다. 그 말본새가 어디 가겠는가?
발걸음을 옮기는 제인의 시선이 길쭉한 테이블로 향했다. 유림이 턱을 괸 채 하품을 하며 앉아 있었다. 제인의 눈초리를 느낀 그녀는 눈을 치켜세웠다.
“오늘 평의회에서 뭐 재밌는 게 있나 보네요? 손님들이 많은 걸 보니.”
제인의 말에 유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 하품을 했다. 제인은 대뜸 셰인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나도 참관하겠어요.”
─ 참관이요? 하, 하지만…….
빈센트가 당황해 만류하자, 제인은 신경질적인 눈초리를 던졌다.
“왜요? 내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있나 보죠?”
─ 그럴 리가요. 어차피 낙원의 모든 곳에는 왓슨의 눈이 닿아 있는데 저희가 무얼 숨기겠습니까?
빈센트는 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그럼에도 제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이작이 중재에 나섰다.
─ 허허, 우리 이브 님께서 이제야 낙원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군요. 만약 회장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아주 흡족해하셨을 겁니다. 평의회는 본래 왓슨 본사의 이사회가 그 시발점이었답니다. 그러니 이곳 의원석이야말로 이브께서 앉아 계셔야 할 자리임이 마땅합니다.
아이작의 말에 다른 의원들은 입을 다문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인 역시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오늘 한 번만 재미 삼아 참관하겠다는 거지, 매일 이곳에 출근해서 저 늙은이들과 입씨름을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집무관은 유림 일행이 앉은 긴 테이블 좌측에 붉은 벨벳으로 세공된 의자를 하나 더 놓았다. 이어서 간단한 음료 정도만 놓을 수 있는 테이블도 가져왔다. 헤벨의 밀러 중령이 앉을 좌석이었다.
우여곡절의 긴 서론을 마치고 비로소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 그럼 안건을 진행하겠습니다. 지금 보여 드리는 자료는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이 살해당할 당시의 기억 복구 영상입니다.
영상을 본 평의원들은 술렁였다. 죽은 우리야의 고통이 느껴지듯 화면에는 격한 진동이 일고 있었다. 좁아지는 시야에 휘청거리는 움직임이 출렁이며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맥없이 털썩 쓰러진 우리야의 감기는 눈동자 뒤로 범인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집무관은 영상을 다시 앞으로 돌린 뒤 화면을 확대시켰다. 빈센트 장관이 입을 열었다.
─ 저건 오베론의 회색 기사가 아닙니까?
위즈덤이 만든 병기형 안드로이드. 목 잘린 사회자가 회색 기사단을 소집했고, 그중 하나가 로스티아벤의 총사령관을 살해했다. 그럼 위즈덤이 우리야의 죽음에 일조를 했단 말인가?
─ 집무관, 위즈덤의 안드로이드가 맞나?
“범인의 영상을 분석한 결과 신체의 탄력성, 공격 속도와 골격근의 강도가 인체의 한계를 웃도는 수준으로 판단됩니다. 확률적으로 따진다면 세르게이 총사령관님을 살해한 범인은 인간일 확률보다 안드로이드일 확률이─합리적 추론에 의해─ 더 높습니다.
─ 정확한 사인은?
“심장 파열로 인한 즉사입니다. 살해 방식은 단순하지만 아주 잔인합니다. 맨손으로 흉부를 꿰뚫고 산 채로 심장을 꺼냈습니다.”
─ 맨손으로? 그게 가능한가?
“그러니 안드로이드일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이쯤 되니 의원들 얼굴에 난색이 번졌다. 이런 증거가 나왔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서로서로 눈짓을 교환한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솔로몬으로부터 은밀한 연락을 받은 건, 다행히도 저 자신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말이 연락이지 협박과 다름없었다.
─ 거 참…….
배가 불룩한 의원 하나가 답답한 듯 혀를 차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자책 어린 한숨이었다. 옆의 누군가 이어받듯 신음을 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앞날이 아찔했다. 어느 쪽에 발을 담가도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다.
한편 영상을 본 셰인은 테이블 위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저 녀석!’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비상한 몸놀림에 유령처럼 사라지는 속도, 게다가 비무장 상태로 총기를 지닌 상대를 제압하는 실력까지!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로스티아벤 내 최고의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총기의 귀재라 불리던 그의 사격 실력은 안드로이드마저 능가한다고 했다.
녀석의 모습을 보는 게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처음은 의원 연쇄 살인범을 쫓아갔던 기억의 도시에서, 두 번째는 테러가 난 공중 정원 상공의 에어쉽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세르게이 총사령관의 살해범으로.
틀림없었다. 그 녀석이다. 몇 번이나 눈앞에서 놓쳤던 붉은 눈의 남자.
셰인의 입가에는 두려움에 젖은 미소가 맺혔다. 역시 녀석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회색 기사단의 옷이라니, 대체 저런 걸 왜 입고 있던 거지? 정말 병기형 안드로이드였단 말인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회색 기사단 옷을 입고 있던 케이의 모습이 스치듯 떠올랐다. 불에 타고 있던 에어쉽 잔재에 구겨서 버리던 단복. 거기에는 분명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었다.
굳은 채 생각에 잠긴 그는 곧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정 소위라면 몰라도 특수대 최고 약골인 애덤슨 중사라니,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는 광대뼈를 실룩거리며 개운치 못한 표정을 지었다.
“위즈덤을 조사해야겠군요.”
침묵 끝에 밀러가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빈센트는 의자에 몸을 기우뚱 기대며 말했다.
─ 위즈덤의 대표인 솔로몬은 평의원 후보자로서 곧 인사청문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조사는 평의회에서 직접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그럼 저희는 저희 쪽 나름대로 위즈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미안하지만 그건 승인을 못해 드리겠습니다, 밀러 중령.
“평의회 승인이 필요하지 않으니 알아서 조사하겠다는 겁니다. 좀 전에 헤벨은 독립적인 수사 권한을 받지 않았습니까?”
밀러의 시선이 흘끗 제인에게로 향했다. 제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물론이죠.”
─ 헤벨이 아무리 수사 권한을 손에 쥐었다 한들, 평의회 동의 없이 낙원 내 조직 및 단체를 멋대로 조사할 수는 없습니다.
“위즈덤이 낙원 소속이었습니까? 위즈덤의 모회사는 왓슨 그룹이 아닌 스타시티로 알고 있습니다만.”
밀러의 말에 빈센트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군인 주제에 정치인 못지않은 말솜씨였다. 이래저래 얄미운 녀석이다.
“엄밀히 말하면 위즈덤은 저희 연맹군 수사 관할입니다. 다만 그 본사가 로스트 헤븐에 있으니 예의상 협조를 구하자는 건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들 구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들은 병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연맹군 입장에선 쉬이 눈감아줄 수 없는 사항이라는 말입니다.”
밀러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을 마쳤다. 의원들은 움찔거리며 목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아이작 라이트 장관과 멜리사 클라크 의원 정도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들은 전투 병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URN은 이유를 불문하고 어느 단체나 조직도 멋대로 무기 제조 및 군대를 양성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세계 최초로 제작된 병기형 안드로이드 군사라면 더더욱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평의회가 계속 수사 협조를 거절한다면, 연맹군 측에서는 낙원이 위즈덤을 보호한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밀러의 질문에 의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답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연맹군 내에서 남태평양전대의 사령 본부를 지휘하고 헤벨을 이끄는 남자. 늙은 너구리들을 상대하는 데는 저쪽도 이골이 났을 것이다.
줄곧 침묵하던 아이작이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긴 회의가 될 분위기였다. 체력이 떨어진다며 껄껄 웃은 그의 제안으로 결국 두 시간의 휴회가 이루어졌다.
연신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제인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퇴장했다. 밀러도 집무관과 함께 나가고 하품하던 유림도 일행과 자리를 비웠다. 남은 의원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의견을 나눴다.
─ 솔로몬을 버려야 할 수도 있겠소. 그자는 위험한 인물이요.
아이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심은 머리가 어깨 위로 듬성듬성 빠지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태연한 척했지만 오늘 회의가 과중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멜리사 클라크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그녀도 저 늙은 오소리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 밀러 중령의 말은 일리가 있어요. 병기형 안드로이드라니, 저런 걸 낙원 내에서 생산하게 둘 수는 없죠. 어찌 보면 위즈덤은 로스트 헤븐의 보안 시스템을 악용해 온 거잖습니까? 소돔을 만든 것도 고객의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왓슨의 눈’을 해제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뒤로 몰래 병기형 안드로이드를 생산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녀의 정확한 지적에 나머지 의원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관리자에게 보고를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위즈덤을 낙원에서 내보내야 한다면 결국 그의 승인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아까는 금방이라도 치고받을 것처럼 싸우던 아이작과 멜리사가 죽이 척척 맞아 가는 걸 보면서 빈센트는 못마땅한 눈빛을 그렸다.
‘아이작 라이트 장관은 솔로몬의 메일을 받지 못한 건가? 멜리사 클라크야 저 깔끔병 떠는 성격으로 소돔과 얽혀 있을 리는 없고.’
다른 의원들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다들 비슷한 심정으로 바늘방석에 앉은 양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고 있는 상황이었다. 곁눈질로 서로를 살피던 의원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소돔의 상징인 ‘V’ 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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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돔의 총지배인 솔로몬입니다. 저희 소돔을 애용해 주시는 회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소돔은 c뿐만 아니라 낙원 내 모든 가정의 행복과 안녕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늘 최상의 서비스와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비밀은 절대 엄수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함께 첨부한 영상은 지난 몇 년간 회원님께서 소돔의 사제들과 보낸 기쁨의 시간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특별히 VVIP 회원님들께만 드리는 제 선물이니 흡족한 마음으로 받아 주십시오. 앞으로도 저희 소돔은 회원님의 은밀한 행복을 위해 한층 더 진일보한 봉사를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많은 이용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소돔과 낙원 사이에 맺은 제휴 협정에 의해 본 메일은 왓슨의 눈에 수집되지 않습니다.
빛나는 우정을 위해,
솔로몬 드림.
촤르르르.
황금색 특별수사대 배지가 테이블 위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다가 멈췄다. 유림의 검지가 배지의 정중앙인 황금 날개 부분을 꾹 누르고 있었다.
“대체 나는 왜 오라고 한 거야? 두 시간 동안 멀뚱멀뚱 앉아만 있게 할 거면서.”
“아마 휴회 이후부터 유림의 차례일 거예요.”
제2휴식실 내에는 유림과 케이뿐이었다. 셰인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나가 버렸고, 밀러는 말 붙일 틈도 없이 집무관과 함께 사라졌다.
“뭐라고 해명할 생각이에요?”
“사실대로 말해야지.”
유림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던 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화이트 채플에서 병기형 안드로이드와 델타의 도박 경기를 봤고, 그것을 단서로 위즈덤을 조사하기 위해 소돔에 잠입했다. 이런 식으로요?”
“그렇지.”
“그럼 살해된 의원은?”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하지, 뭐.”
“솔로몬 측에서 증거 영상을 넘겼을 텐데요.”
케이의 말에 유림이 가슴에 배지를 달며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야 세르게이에게 유림이 데드캣이란 사실을 알린 건 솔로몬일 거예요. 그걸 빌미로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호크 대령을 잡아들였을 테고, 유림을 죽이기 위해 델타 부대를 풀었겠죠.”
“사실 나도 증거 영상이 있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고맙게도 행운의 여신은 아직 우리 편인 것 같아. 지금 솔로몬은 모든 혐의의 주역이잖아. 이런 상황에서 그 녀석이 넘겼다는 증거가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 정유림 소위는 위즈덤이 몰래 제조해 오던 전투 병기의 단서를 잡았고, 그 사안을 조사하기 위해 소돔에 잠입했다. 그걸 눈치챈 솔로몬이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상황과 증거를 조작했다. 죽은 우리야 세르게이는 솔로몬과 한패였거나 그에게 이용당하다가 살해됐다. 이런 시나리오로 덧칠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유림이 피식 웃자, 가만히 듣던 케이는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방심하진 마요. 어차피 의원들도 솔로몬과 한통속일 테니까.”
“죄다 썩었지. 여긴 에덴 타워의 꼭대기 층부터 지하 미궁까지 구린내로 가득 찼어. 뭐 그 와중에 괜찮아 보이는 녀석도 있지만.”
유림은 붉은 재킷을 입고 앉아 있던 멜리사 클라크 장관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이따가 회의실에서 봐.”
“어디 가요?”
“잠깐 메리 좀 보고 오려고.”
아무래도 아까 제인이 한 말이 계속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는 길에 밀러도 살짝 만나고 올까?”
유림의 입에서 밀러의 이름이 나오자 케이의 눈초리가 돌변했다. 그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걸어 나가는 유림의 뒤를 쫓아 일어서더니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 그래?”
“밀러 중령도 보려고요?”
“좀 위험하려나? 그래도 보고 싶은데…….”
유림이 망설이는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케이의 안색이 서늘하게 굳었다. 유림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모르는 둘만의 추억이 담긴 눈빛과 입가에 우물우물 번지려는 기대 어린 미소.
심히 거슬렸다. 케이는 유림의 몸을 돌려 턱을 잡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림은 눈을 크게 떴다.
“케이?”
“입술 열어요.”
허리를 숙인 그가 서분서분한 숨결로 간질이며 속삭였다. 유림은 코앞에 다가온 그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케이의 입가에 심술로 비뚤어진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지금 뭐하는…….”
유림이 놀라서 뭐라 말하려 입술을 툭 벌리자, 그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이 치열 사이를 훑으며 진입했다.
“으읍!”
천장을 간질이던 혀가 그녀의 혀를 삼키듯 흡입했다. 빨려 들어가듯 호흡을 넘긴 유림은 비틀거리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촉촉하게 젖은 채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것마저 집어삼키며 부딪치는 숨결은 뜨겁고 거칠었다.
달뜬 두 눈이 반쯤 감겨 쾌감에 흐려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유림은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러자 케이의 손이 덥석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그의 하반신에 바짝 밀착시켰다. 타액에 젖은 두 입술이 촉 소리와 함께 떨어질 때마다 그의 호흡에도 억누른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와 달리 그에게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숨을 쉬려고 입술을 열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먹던 그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덮쳐 왔다.
숨이 막혔다.
그게 숨 막히게 좋았다.
유림의 허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그녀의 몽롱한 시선과 붉게 벌어진 입술이 그를 향하자 케이는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잠시 입술을 뗀 두 사람의 숨소리가 하얀 입김처럼 터져 나왔다. 케이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목울대를 울컥이며 자제하는 그에게서 격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비스듬히 감은 속눈썹 아래 그의 예쁜 눈동자가 고요히 일렁였다. 차분하고 무심한 표정에서 비치는 흐릿흐릿한 욕망.
아이러니하게도 유림은 케이의 그런 이중성이 좋았다. 생긋 웃으며 태연히 스스로를 미친놈이라며 칭하는 뻔뻔함. 조각처럼 반듯한 얼굴 뒤로 숨겨 둔 느른한 눈웃음이라든지. 그런 양면성이 그녀에게는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멍한 표정을 짓던 유림은 애가 탄 듯 그를 끌어안았다. 잠깐 열기를 식히던 케이는 곁눈질로 그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유림이 잘록한 허리를 세우며 앙탈부리듯 그의 몸에 그녀의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케이의 동공이 붉게 일렁였다.
예쁜 고양이가 아직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렇지, 숨 고르며 자제하는 남자한테 그렇게 작정하고 유혹하면 어쩌자는 건지.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어요?”
가만히 웃는 그에게서 살벌한 질투심이 묻어났다. 전부터 궁금하긴 했었다. 유림이 남자를 쥐락펴락하며 자극하는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니.
“타고난 거야.”
그녀의 말에 케이는 눈을 살짝 치켜뜨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 귀엽게 금세 인용하기는. 과거 운운하는 남자는 질색이라 했으니 넘어가긴 하겠지만, 계속 이렇게 웃어넘길 거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자신 말고 다른 남자도 이렇게 그녀를 탐하며 미쳐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머릿속에는 온통 그놈을 시체로 떠서 몸을 조각조각 낼 생각뿐이었다. 사실 속으로는 이미 ‘유림만 모르게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간사한 생각을 품은 지 오래였다.
섬뜩한 계획을 세우던 그의 눈길이 멈칫 그녀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휴게실 출입구를 향해 꺾이는 모퉁이 뒤에 인기척 하나가 머무르고 있었다. 멈춰 선 그림자의 불규칙한 호흡이 느껴졌다. 불청객의 상기된 맥박이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분노로 높아진 체온, 미세한 손발의 경련. 상대의 격한 감정을 느낀 케이는 ‘흐음’ 눈초리를 좁혔다. 그는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곡선을 머금었다.
그는 유림의 옷깃을 쥐더니 양옆으로 쫙 벗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의 목덜미와 봉긋한 가슴 사이를 천천히 핥아 내리기 시작했다.
“케이? 뭐하는…… 아…….”
그녀의 가슴 정점에 다다르자 그는 탁해진 눈을 흘겨 떴다. 석류처럼 톡 터질 것 같은 연분홍빛 돌기가 탱글한 젖가슴 끝에서 달콤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동그랗게 솟은 알갱이를 입안에 머금고 할짝였다.
유림은 숨을 헉 들이켜며 허리를 튕겼다.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린 신음이 흐느끼듯 흘러나왔다. 애써 참는 그녀의 반응에 케이는 흐무러지게 부푼 돌기를 혀끝으로 건드렸다. 그러자 유림이 손등에 하얀 마디가 드러나도록 힘을 준 채 파르르 떨었다. 생긋 눈웃음을 머금던 그는 혀끝에 닿던 둥근 낟알에 콱 이를 박아 넣었다.
“아악! 흐읏…….”
마침내 그녀의 입술에서 가느다랗게 끊기는 듯한 교성이 터져 나왔다. 도도록하게 솟은 젖가슴은 그의 입술에 희롱당하는 와중에도 예쁘게 출렁였다.
“일부러 그렇게 소리 내는 거예요? 나 흥분하라고?”
케이가 느른하게 웃으며 놀리듯 속삭였다. 유림은 분한지 불그스름한 뺨에 눈초리를 세웠다.
“너…….”
유림이 쏘아붙일 듯 입을 열자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한 뭉텅 움켜쥐었다. 그는 손아귀에 가득 찬 말랑말랑한 살덩이를 쥐어짜듯 주무르다가 잡아당기길 반복했다. 특히 정점 부분을 끊어질 듯 잡아당기며 손톱으로 살살 긁자,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척추를 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쿡쿡 웃던 케이는 조각처럼 다문 입술 사이로 이를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가슴 가운데를 한 입 베어 물더니 앵두 꼭지를 따먹듯 아삭 물어뜯었다. 유림은 간드러지는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흐느끼듯 새어 나오는 교성은 쾌감에 젖어 있었다.
케이는 그런 유림이 사랑스럽다는 듯 눈초리를 연하게 휘며 웃었다. 짓궂은 괴롭힘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의 솔직하고 민감한 반응이 예뻐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유림은 멍하니 눈에 초점을 모았다. 어느새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 누워 있었다. 어깨를 살짝 일으키자 벽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느긋하게 몸을 숙인 채 그녀를 애무하고 있었다. 나른하게 감긴 속눈썹, 수려한 콧날, 비스듬히 숙인 턱 선과 희열에 찬 입술. 지극히 욕망에 충실한 그의 옆모습은 아름다운 짐승처럼 보였다.
쭉쭉 물고 빠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케이는 시종일관 태연한 기색이었다. 중간중간 거울 너머로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는 천연덕스러운 눈초리에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하흣…….”
유림은 허리를 비틀며 탈진한 듯 팔다리를 툭 떨어뜨렸다. 이제는 정말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다.
케이는 손등으로 입가를 슥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흘끗 출입구 쪽 모퉁이를 본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솔직히 중간부터는 유림의 몸에 완전 취해서 엿보던 그림자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아마 꽤 충격을 받고 돌아갔을 것이다. 실제로 눈앞에서 본 광경은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던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었을 테니까.
그는 잠든 듯 축 늘어진 유림을 소파에 눕히고 일어섰다. 그녀의 목과 뺨에는 땀과 타액으로 머리카락과 옷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비치된 위생용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 주었다. 입술과 가슴 정중앙의 여린 살은 부풀대로 부풀어서 아직도 탱글탱글하게 윤기가 돌았다.
그는 아쉬움을 담은 채 웃었다. 그녀의 벗은 가슴을 보니 그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는 다시 열기가 엇비쳤다. 그는 아직도 촉촉한 그녀의 가슴 끝 부분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쓸었다. 손끝에 닿는 보들보들한 감촉에 금세 신경이 쏠리며 하반신에 열기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지친 듯 눈을 감고 있던 유림이 눈꺼풀을 들었다. 황갈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림은 손을 뻗어 케이의 어깨와 쇄골을 어루만졌다. 섬세한 얼굴선과 달리 그의 몸은 군더더기 없는 근육과 힘줄로 빚어진 조각처럼 단단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왜 멈췄어?”
담담하던 그의 눈동자가 농밀하게 흐려졌다.
“못 참을 것 같아서요.”
천천히 그녀를 떼어 내는 그의 손길이 꽤 매정했다. 다정하게 웃지만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걸 증명하듯 탁하게 잠긴 목소리였다. 유림은 손가락으로 장난치며 그의 목선을 어루만졌다.
“그럼 더 해 줘.”
“더요?”
시계를 본 케이는 당황스러운지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그녀는 그의 어깨를 잡아끌더니 입술 가까이로 데려왔다.
“응, 더.”
뺨을 발그레 적신 유림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도도한 눈초리가 유혹하듯 올라가자 케이의 눈동자에 잔물결이 일었다.
“케이?”
그가 반응 없이 침묵하자 유림은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비로소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왜 이렇게 조용해? 화났어?”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재미 삼아서?”
케이가 어둡게 물든 눈으로 물었다. 그의 싸늘한 태도에 유림의 눈이 멈칫 커졌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금 억울한지 미간을 힘껏 찡그리더니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재미 삼아…… 그런 것도 있지만.”
입술을 옴짝거리던 유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냥 좋아서 해 달라는 건데, 그게 이상해?”
케이는 황량한 눈빛으로 천천히 바닥을 응시했다. 다시 눈을 마주친 그는 어느새 평소의 온유한 얼굴이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에요, 내가 잠시 이기적인 생각을 했어요.”
스스로를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케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키스해 줄게요’ 속삭이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유림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케이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얌전히 기다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유림은 콧잔등을 매만졌다. 잠시 이마를 짚고 망설이던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난 단순히 애무가 좋은 게 아니고, 케이가 좋은 거야.”
고요하던 그의 눈이 점차 커졌다. 유림은 커다란 눈망울을 잠시 굴리더니, 번뜩 떠오른 생각에 인상을 쓰며 물었다.
“내가 자꾸 해 달라는 게 귀찮아? 싫어서 그래?”
“아니…… 아니에요, 전혀.”
케이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부인했다. 그의 대답에 안심한 유림은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다가 슬쩍 다시 눈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었다. 유림이 저렇게 수줍어하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인데. 케이는 불시에 공격을 당한 것처럼 넋이 나간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케이가 날 만지는 게 좋아. 케이가 해 주는 키스가 좋고, 케이와 이렇게 있는 게 좋아. 다 좋아. 이렇게까지 누가 좋은 건 아마 처음인 것 같아.”
속삭이듯 고백한 유림은 말간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호기심과 흥미로 가득 찬 그녀의 눈망울은 항상 솔직했다. 자유분방하지만 바이칼 호의 수면처럼 순수함의 결정체인 여자. 그 아름다운 영혼만은 변함없는 그대로였다.
─ 케이와 이렇게 있는 게 좋아.
그 한마디에 온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 벅차오르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감격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을 쏟아 낼 뻔했지만 가까스로 진정했다.
케이는 붉어진 눈시울을 흐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리 와요.”
그가 팔을 벌리자 유림은 의심 어린 눈초리를 지었다. 팔짱을 낀 그녀는 슬쩍 협상부터 제시했다.
“키스 열 번 해 주면.”
“열 시간도 해 줄 테니까 이리 와요.”
심술보를 잔뜩 달고선 저렇게 귀엽게 굴면 어쩌자는 건지.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부드럽고도 근사한 소리였다. 약속받은 유림은 그제야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두 뺨을 쥐고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녀도 그의 입술에 짧게 쪽 입을 맞췄다. 서로 연달아 주고받는 자잘한 입맞춤에 그의 눈초리가 기분 좋게 휘었다. 유림은 이런 뽀뽀 열 번을 원한 게 아니었다며 불평을 해 댔다.
“이보다 더한 걸로 열 시간은 녹여 줄 테니, 나 버리지 마요.”
“내가 케이를 왜 버려?”
“내가 유림한테 잘못한 게 많아서요. 나 버리고 밀러 중령한테 갈까 봐 무서워요.”
케이가 옅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무섭다면서 웃는 그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리고 밀러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케이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만큼 그 남자는 견제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예전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니까.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유치해질 수 있는지 몰랐어요.”
단순한 질투심 때문에 그녀의 몸을 물어뜯고, 여기저기에 진한 영역 표시를 남기고. 어린애처럼 유치한 짓거리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슴과 목에 남긴 자신의 마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 잘했다고 여기고 있다는 게 우스웠지만,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는 존재이기에 당연한 조치였다.
“몰랐어? 케이랑 리사 싸울 때 보면 진짜 유치한데. 케이는 말문 막히면 리셋해 버린다는 레퍼토리밖에 없잖아. 잘 보면 리사가 한 수 위 같아.”
“아무래도 에러가 난 것 같아요. 조만간 진짜 리셋하든지 해야겠어요. 인공지능 주제에 유머 욕심만 많아 가지고.”
“케이가 그렇게 만든 거 아니었어? 왓슨 3세는 성격이 좋은가 보지?”
“같이 만들었어요. 나는 그런 인간적인 것들에 서툴러서요.”
순간 ‘누구와 같이 만들었는데?’라는 질문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유림은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케이는 그녀를 안은 채 반쯤 감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자문하듯 물었다.
“감정이란 선천적으로 지닌 본능일까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익힌 학습일까요?”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혼란이 담겨 있었다. 유림은 혀를 ‘쯧’ 차며 위로했다.
“리사와 비교당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어? 리사가 케이보다 말싸움도 잘하고 가끔은 더 웃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걔가 케이보다 인간적인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유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신경을 썼던 눈치였다. 케이가 이런 것에 콤플렉스가 있는 줄은 몰랐다. 인간적인 매력을 갖고 싶은 걸까? 하긴, 가끔 보면 안드로이드 수준으로 무신경한 면을 보이는 남자니까.
장난은 이쯤 하고 사뭇 진지하게 생각하던 유림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리사는 수치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일 뿐이야. 정보를 수집하면서 제 나름대로 감정의 공식을 익히긴 하지만 거울처럼 우리를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해. 어떻게 보면 욕망이란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지도 몰라. 안드로이드는 욕망이 없잖아. 감정이야 흉내라도 내 본다지만, 욕망은 거울에 비쳐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짐승도 욕구는 있어요.”
“맞아. 하지만 지성이 없지. 안드로이드는 똑똑하지만 욕망이 없고. 감정은 욕망에서 오는 거야. 갖고 싶다는 건 생존 본능에 의해서도 느낄 수 있어. 하지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거잖아. 짐승은 행복이 아닌 오로지 생존만을 추구하니까……. 그래서 흔히들 감정이나 마음이 없는 인간은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유림의 눈동자가 잠시 깊게 일렁였다.
“군인은 특히나 이 마음이란 걸 잃기가 쉽거든. 사람을 죽이다 보면 내가 짐승인지 인간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생기고는 해. 난 이대로 흉기를 든 괴물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워질 때도 있지. 가끔 이런 고민 때문에 괴로워하는 병사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어. 그럴 땐 네 옆자리 전우의 손을 꼭 잡아 보라고. 네 손에 담긴 그들의 온기가 너희들은 아직 괴물이 아닌 증거일 테니. 물론 무슨 말이지 이해 못하는 녀석들이 태반이지만…….”
“난 알 것 같아요.”
뭔가를 떠올린 그의 입가엔 슬픈 미소가 어렸다.
“누군가의 온기가 나는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
케이를 보던 유림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그의 손을 응시했다. 왠지 외로워 보이는 그의 손을 데려와 가만히 맞잡았다. 문득 그의 손이 그녀의 것보다 조금 차갑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렇게 잡고 있으니 두 손이 같은 온도로 물들어 간다. 애당초 한 몸이었던 것처럼.
“감정은 결국 대상이 없으면 배우기 힘든 거야. 사랑도 받아 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다고 하잖아.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세상에 혼자라면 결국 짐승처럼 살게 되지 않겠어? 마음이란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 주는 온기로 차곡차곡 빚어진…… 그런 따뜻한 것이라고 생각해.”
유림을 바라보던 케이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미소가 어린 그의 갈색 눈동자에 편안한 온기가 어렸다.
“꼭 사라 같네요, 유림…….”
“사라?”
“있어요, 나한테도 온기를 주고 간 사람이.”
유림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와 목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괴물이 되었을 거예요.”
그녀의 배 속에서 들었던 그 작은 심장 고동 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는 생존만 추구하는 짐승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온기를 나눠 준 그녀는 그 대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린아이처럼 안긴 그가 애처로워서 유림은 케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고자 농담조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평의회가 정말 날 구금하면 어떡할 거야?”
“그럼 거기도 부숴 버리죠 뭐. 한 번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할까.”
“미쳤네.”
“욕망밖에 없던 짐승이 감정을 배우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케이가 욕망 하나는 확실하지.”
“그리고 유림 주변에 그런 짐승은 나 하나로 충분해요.”
슬쩍 고개를 든 그는 암갈색 눈동자로 유하게 웃었다.
“……유림의 온기는 모두 내 것이니까.”
* * *
휴게실을 나와 화장실 입구로 온 밀러는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선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애덤슨 중사에게 가르랑거리듯 안겨서 매달리던 유림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우욱…….”
구토가 일었다. 바닥에 빈속을 하얗게 게워 낸 밀러는 구역질을 하며 허리를 굽혔다.
“중령님, 괜찮으십니까?”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 정도로 충격이었던 건가? 확실히 헤벨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던 광경이긴 했다. 다른 남자에게 그렇게 매달리며 안기는 유림의 모습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중령님.”
“제 말 들리십니까?”
“밀러 중령님!”
집무관의 목소리가 귓가에 먹먹하게 흩어졌다.
─ 반드시 돌아올게. 헤벨로, 우리들의 집으로.
너무 소중해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꽃이었다. 그녀의 가시 하나하나조차도 그에게 있어서는 솜털처럼 보드랍고 애가 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의 손으로 꺾어 버렸을지언정 다른 놈의 손에 안겨 주지 않았을 텐데.
‘케이 애덤슨 중사였던가.’
처음 본 순간부터 유림의 옆을 지키고 있던 남자였다.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앉은 밀러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달려가 그놈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녀를 탐하고 희롱하던 녀석의 입술과 손을 잘라 내고, 그녀를 담은 두 눈알에는 총구를 박아 넣고 싶었다. 죽여 버릴 것이다. 죽여서 그 시체의 피를 뽑아 말린 뒤 바닷속에 처박아야 이 분노와 질투가 그나마 무마될 것 같았다.
정신이 멍했다. 손등을 내려다보니 혈관이 팽창한 채 피부 위로 퍼렇게 비치고 있었다. 화장실 유리문에 비친 얼굴을 보니 도드라진 핏줄이 그물처럼 갈래갈래 떠 있었다. 누가 보면 독극물이라도 먹었다 여길 법한 모습이었다.
“평의회 소속 집무관ESS14. 응급 환자 발생. 본 집무관 위치로 의료용 들것을 요청합니다.”
캄캄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밀러는 그를 내려다보는 여성 집무관을 향해 가물가물한 눈을 빗뜨며 말을 뱉었다.
“헤벨로…… 연락을…….”
“중령님! 중령님, 정신 차리십시오!”
집무관은 일단 그를 바닥에 똑바로 눕혔다. 그녀는 바로 응급처치에 돌입하며 상부에 보고했다.
“집무관ESS14. 응급 환자, 마이클 밀러 중령님입니다.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헤벨 측에 빠른 전달 바랍니다.”
밖이 어수선하자 옆 휴게실에 있던 유림과 케이도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쪽에서 집무관이 소란스럽게 떠들며 고함을 외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의 앞으로 집무관이 호출한 응급용 들것이 날아왔다. 부유 들것을 본 집무관은 밀러의 맥박과 호흡을 체크한 뒤 들것 위에 그를 올렸다. 유림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다가왔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중령님이 왜…….”
부유 들것은 밀러를 실은 채 비상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정확한 상태나 원인은 아직 불명입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집무관은 유림에게 간략하게 대꾸를 한 뒤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서 있던 유림은 황급히 집무관의 뒤를 쫓았다.
케이는 방금 전 스치듯 지나가던 밀러의 얼굴과 손등을 떠올렸다. 퍼렇게 팽창한 혈관이 특히 그의 눈 주위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헤벨의 함장이 쓰러졌으니 회의는 연기되겠군.’
지금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는 고즈넉이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