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엘 카인.
낙원의 관리자로서 ‘아담’이라 불리는 남자다. 그는 왓슨 그룹의 상속녀인 제인 왓슨의 연인이자 왓슨 그룹의 실세이고 후계자였다. 현재 국제 연맹은 신종 바이러스를 창궐시킨 배후 세력으로 왓슨 제약회사를 의심하고 있었다. 사실상 의심이 아닌 확신하고 있는 단계라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왓슨 그룹은 신종 바이러스를 만든 주범이 아니었다.
주범은 엘 카인이다. 아니, 주범들 중 하나라고 정정한다. 권주들은 각자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왕좌는 하나뿐이었고, 권좌를 차지하지 못하면 도태될 게 뻔했다. 엘 카인은 정해진 왕좌를 빼앗기 위해 동족상잔을 저질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설령 죄를 지어도 죄질을 다룰 자가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왕좌는 아직 비어 있지 않은가?
─ 메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상당히 즐겁네요. 그러니 오늘 밤에 또 오도록 해요.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거든요.
아담의 집무실을 나온 메리는 멍한 얼굴로 복도에 섰다. 밤에 또 오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가슴이 얇은 판막처럼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단순한 두려움만이 아닌 복합적인 감정이 용솟음쳤다. 악인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남자였다. 그의 일그러진 미소가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쯤은 어루만져 보고 싶다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들 정도로.
외모 때문이다.
마이클을 쏙 빼닮은 그의 이목구비 때문에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게 분명했다. 결코 그에게 끌리는 건 아니었다. 메리는 동요하는 속내를 가지 치듯 그렇게 단언했다.
─ 입실론 메리 님께서는 앞으로 S관 출입이 가능하십니다. 태양의 도시에서 관리자 직무실 직속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겠습니까?
뱀의 목구멍 속을 들어갔다 나온 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온몸의 모골이 찌릿찌릿 서 있는 느낌인데, 담력 시험을 통과한 듯 묘한 성취욕도 들었다.
엘 카인, 그 남자의 존재감은 화사하지만 늘 빛에 휩싸여 경계가 불명확한 마이클과 달리 어둠에 잠겨 있지만 수면 위로 비친 윤곽처럼 뚜렷했다.
“메리 님.”
어디선가 나타난 집무관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뭐죠?”
“이브께서 찾으십니다.”
메리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안드로이드 집무관을 응시했다. 아담을 만나고 왔더니, 이번에는 낙원의 이브께서 자신을 찾는다고? 엘 카인을 짝사랑하기로 유명한 그 성질 나쁜 왓슨가의 공주님이?
메리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었다.
제인이 지내는 곳 역시 에덴 타워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엘 카인과 마찬가지로 에덴 타워의 층 하나를 전부 개인 공간으로 사용했다. 하얀 숲처럼 순백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인테리어. 그녀의 공간은 얼음 궁전처럼 차갑고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문득 유림이 툴툴거리며 욕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 지가 무슨 천사인 줄 알아. 마녀처럼 못돼 처먹은 주제에, 광고 영상 속에서는 무슨 숲 속의 요정인 양 하고 나온다니까?
유림은 제인 왓슨의 이중성을 늘 역겨워했다. 이브의 광고 영상이 나오면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웩웩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메리는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까칠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리는 경직된 얼굴로 발을 멈췄다. 안쪽에서 제인이 팔짱을 낀 채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입실론 메리?”
“네.”
“앉아요.”
아이보리색 쉬폰 원피스를 입은 제인은 밝은 금발을 틀어 올린 채 가녀린 목선을 내보이고 있었다. 과연 낙원의 요정이라 불릴 만했다. 청초한 자태, 불면 날아갈 듯 얇은 몸. 메리는 화사한 조명 아래 놓인 상아색 가죽 소파에 앉으며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특별할 건 없어 보였다. 여성스러운 인테리어,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산뜻하다. 한쪽 벽면에서는 광고 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고, 햇살이 비치는 유리 벽 쪽에는 화려한 드레스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다시 테이블 위를 응시하던 메리는 흠칫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원목으로 된 의자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에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 그리고 모델처럼 훤칠한 체격. 아담한 제인과 달리 성숙한 미를 뽐내는 여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메리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으며 눈인사를 나눴다. 먼저 와 있던 손님인 모양이었다. 무안해진 메리는 맞은편에 앉은 제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얼굴 좀 보려고요.”
제인은 톡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메리는 피로감을 느꼈다. 역시 안 좋은 예감은 늘 적중한다. 낙원의 요정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해 보였다. 벌떡 일어나 뺨을 한 대 쳐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눈초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인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죠?”
사샤는 의외라는 얼굴로 제인을 쳐다보았다. 저 성격파탄자가 나름 화를 누르며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속에서는 천불이 나서 콧김이 나와도 벌써 나왔을 텐데, 이제야 저 공주님께서도 철이 좀 드는 건가? 아니면 엘 카인에게 미움받을까 봐 최대한 참고 있는 건가? 철부지 어린애인 건 여전하니까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제 능력을 필요로 하신다고 하셨어요.”
제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능력? 무슨 능력?”
“저는 접촉으로 타인의 기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인의 얼굴색이 조금 밝아졌다. 본인이 예상한 것과 다른 상황으로 보이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러니까 카인은 그녀에게 성적 호감을 느낀 게 아니고, 단순히 능력을 필요로 해서 불렀단 말이지.
제인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누구의 기억을 엿보라고 하던가요?”
“델타의 기억을 엿보길 원하셨습니다.”
“델타? 아, 델타는 말이 안 통하니까.”
그럴 수 있지.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곁눈질로 흘기는 눈초리에는 여전히 의심 한 터럭이 묻어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고?”
“네, 없었습니다.”
“델타의 기억에 뭐가 있었죠? 그가 뭘 찾던가요?”
“죄송합니다.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메리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제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화기애애하던 대화가 뚝 끊겼다.
메리가 다시 고개를 든 순간, 노여움에 찬 손이 날아와 그녀의 뺨을 ‘철썩!’ 때렸다. 가녀린 손이 어찌나 맵던지 고개가 홱 돌아갈 정도였다. 뺨을 어루만진 메리는 터진 입술에 맺힌 피를 훔쳤다. 제인의 살벌한 눈초리가 그녀의 정수리를 찍어 내릴 듯 노려보고 있었다.
“말씀드릴 수가 없어? 태양의 도시가 누구의 소관이야? 모든 입실론들을 관리하는 건 이브인 나라는 걸 잊으면 곤란한데요, 입실론 메리?”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함구하는 것 또한 이브 님을 위한 행동임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를 위한 행동?”
담담한 어조로 답하는 메리를 보며 제인은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그녀가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게 어지간히 꼴 보기 싫은 눈치였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손찌검은 날아오지 않았다.
제인 역시 이런 화풀이 따위는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내기가 아닌 듯한 메리를 더 갈구어 봤자 얻을 건 없었고, 그러다가 엘 카인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곤란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가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찾은 입실론이었다.
제자리에서 씩씩거리던 제인은 결국 문을 박차고 나섰다. 제 화를 못 참고 직접 엘 카인을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메리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에는 머리채를 잡힌 채 관리자 집무실까지 끌려가는 걸 상상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빤히 구경하던 사샤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냥 대충 둘러대서 말하지 그랬어요. 어차피 제인은 가서 묻지도 못할 텐데. 당신이 그렇게 감싸 줘도 제인은 아마 계속 이렇게 불러서 괴롭힐걸요? 쓸데없는 배려예요.”
“제인 왓슨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관리자께 괜한 의혹을 심어 드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왜요? 카인 대표는 당신을 꽤 신뢰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집무실까지 들이고 살려 보냈을 리가 없죠. 대부분은 시체가 되어서 나오거든요.”
사샤의 말에 메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역시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더한 불운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 나의 ‘무엇’을 봤죠?
메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파리한 낯빛에 두려움이 안개처럼 번지다가 사라졌다. 첨탑 꼭대기에는 악마가 산다. 신이 실수로 빚어 버린 괴물, 인간은 그런 것과 싸우고 있다.
“그는 제가 아직 쓸모 있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신뢰를 얻는 것보단 가치를 어필하는 쪽이 낫겠죠. 존재 자체로 유용할 테니까요.”
사샤는 빙긋 웃었다. 현명한 처사다. 대부분의 입실론들은 제인에게 아부를 떨고 시녀처럼 충성을 바치기 바쁜 반면 그녀는 판도 전체를 한눈에 파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허울뿐인 ‘퀸’ 따위는 일찌감치 배제하고 있다.
결국 제인은 엘 카인과 평의회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존재였다. 낙원의 상징적인 인형일 뿐, 허수아비에 불과한 그녀가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 카인은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제인은 정치적 발언권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 회사 운영 같은 건 머리가 아프다고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대중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엘 카인뿐이었다.
“입실론들은 늘 감시받고 있어요. 특히 메리, 당신처럼 특별한 사람은 더더욱 말이죠. 이제 카인 대표의 집무실에 들락거리게 되었으니 전보다 더 움직임에 제한이 가해질 거예요.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인물이 된 걸 축하해요. 축하할 일이 맞는지 모르겠지만요.”
메리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충고 감사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사샤가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새끼손톱만 한 금색 칩이 놓여 있었다. 메리는 얼떨결에 그걸 손에 받아 쥐었다. 그 순간 칩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허공에 인간 형상을 한 홀로그램이 윤곽을 갖추며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 초도 채 되지 않아 그곳에는 메리와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의 여자가 나타났다.
“이건…….”
“섀도우51), 기억 형상 홀로그램이란 것이에요. 낙원 내에서는 왓슨의 눈이 닿는 한 완벽하게 유효하죠. 타인은 직접 만지지 않고서야 그게 홀로그램이란 걸 알 수 없답니다.”
메리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섀도우 메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메리는 ‘섀도우’의 몸 중앙을 관통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말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그럼에도 육안으로는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실물처럼 완벽했다.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거죠?”
그것보다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더 궁금했다. 사샤는 팔짱을 끼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내 이름은 사샤 피보바로바예요. 낙원의 광고 영상을 제작하는 감독이자 홍보부의 고문이기도 하죠. 그리고 왓슨 3세와 낙원을 설계한 익명의 과학자와는 둘도 없는 절친 사이랍니다. 따라서 아주 조금은, 익명의 과학자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어요. 이를테면 이 섀도우 칩은 그가 내게 준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이거든요.”
낙원의 설계자.
왓슨 3세의 창조자.
일명 익명의 과학자.
도시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었단 말인가? 로스트 헤븐의 설계자가 존재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타시티가 낙원을 설계 및 건설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제게…….”
“나보단 당신에게 더 쓸모가 있을 듯해서요.”
메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초리였다. 사샤는 알 만하다는 얼굴로 피식 웃더니 눈을 흘기며 넌지시 물었다.
“나를 ‘신뢰’할 수 없어서 그래요?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 ‘유용’한 물건을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죠?”
유림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설령 함정이라 해도 냉큼 받아 챙겼을 것이다. 적이 내민 것이 곧 터질 폭탄이라 해도 때에 맞춰 잘 던지기만 한다면 써먹을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메리는 손바닥 위의 섀도우 칩을 말아 쥐며 말했다. 사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이만 갈까 하는데 메리는 어때요? 밖에 태워다 줄까요?”
“밖에요?”
“나갈 생각 아니었어요?”
메리가 멈칫하는 사이 그녀의 섀도우가 생긋 웃으며 앞서 나갔다. 태양의 도시 쪽으로 가 버리는 섀도우를 보며 메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사샤는 빙긋 웃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설마 내 정체도 알고 있는 건가?’
메리는 두려운 눈빛으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혹시 왓슨 3세를 만들었다는 익명의 과학자가 이 여자 본인인 건 아닐까?
“그렇게 겁먹지 말아요. 나는 고작 전직 무용수일 뿐이니까요.”
사샤는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섰다. 메리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사샤 씨도 ESP 능력이 있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건 왜요?”
“아, 그게…….”
“내가 메리 씨의 생각이라도 읽는 것 같아요?”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한 사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테두리에 크리스털이 박힌 문이 열리자 사샤는 메리를 잡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내가 쭉 좋아하던 사람은 조금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있으면 마치 발가벗은 것처럼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는 느낌이거든요. 눈빛에 영혼이 흡수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무한한 우주 속에서 빛조차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남자예요. 그런 사람 곁을 오랫동안 지켜 왔으니 내게도 어느 정도 그와 닮은 부분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올라타 있었다. 경비가 삼엄한 에덴 타워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메리는 사샤와 마주보고 앉아 멀어져 가는 S관 승강장을 바라보았다.
─ 왓슨 3세를 만든 익명의 과학자와는 둘도 없는 절친이랍니다.
그 말이 허풍은 아닌 모양이었다. 만일 그렇다 해도 저런 중요한 정보를 이리 발설해도 되는 것일까?
메리는 사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트에 앉아 버건디 색 립스틱을 바르던 사샤는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도와주시는 거죠? 그쪽은 제인 왓슨과 가까운 사이시잖아요.”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하던 사샤는 눈을 휘더니 시원하게 웃었다. 그녀는 립스틱을 내려놓고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말이에요. 내게는 동창이자 같은 뜻을 품은 친구가 있었어요. 나는 그 친구를 처음으로 믿어 준 사람이었고, 우리들 아지트로 데려온 장본인이었죠. 생각해 보면 난 그 친구의 은인이었네요. 그런데 우리가 계획을 실행하기로 한 날, 그 녀석은 우리 모두를 배신하고 말았어요. 덕분에 나는 두 다리를 잃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이를 잃었죠. 마지막 통신을 주고받던 당시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난 최근에야 비로소 그 말뜻을 깨달았어요. 그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요. 역설적이게도 복수를 다짐한 순간, 나는 그 친구의 옛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메리는 사샤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프로 아티피셜52)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의족이었다니. 하반신의 움직임이 실제 다리와 다름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자연스러워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웬만한 사람들보다 자세가 우아하기까지 했다.
“난 분명 제인 헬렌 왓슨의 친구예요. 적어도 제인은 그렇게 여기고 있죠. 하지만 낙원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라면, 그 빌어먹을 녀석을 잡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설령 제인의 두 다리를 앗아 가게 될지라도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제인이 굳이 이 사실을 알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우아하게 웃던 사샤의 입꼬리가 독을 품은 장미처럼 섬뜩해 보였다. 그러나 메리에게 있어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 유림, 굳이 네가 갈 필요는 없어.
─ 메리를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 반드시 돌아올게. 헤벨로, 우리들의 집으로.
─ 언제라도…… 언제라도 힘들면 돌아와, 나의 고양이…….
그 순간, 무너지듯 유림을 끌어안던 마이클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붉게 젖은 눈시울로 유림에게 금방이라도 입 맞출 듯 간절해 보이던 시선. 그 광경이 가슴이 아프면서도 통쾌했다. 유림이 반드시 자신을 따라와 줄 것이라 예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적진에 보낸 채 전전긍긍하게 될 마이클을 생각하니 당시에는 조금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아주 쉽게 말하면 나는 제인을 이용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모두 타인을 이용해요. 본인의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서요. 메리도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거라 믿어요.”
사샤의 말에 메리는 멍한 표정으로 에어쉽 문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해가 지기 전에 이곳에서 다시 보죠. 폐쇄 도시는 위험한 곳이니 조심히 다녀오도록 해요.”
닫힌 에어쉽 문 안쪽에서 사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메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흑조처럼 검은 깃털을 단 듯한 블랙 에어쉽은 상공을 날아 저편으로 사라졌다.
돌아선 메리는 A 연구동 쪽으로 걸어가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 제인이 굳이 이 사실을 알 필요는 없어요.
유림은 정말 몰랐을까? 마이클의 마음을,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휙 둘러보던 메리는 눈앞으로 날아오는 물체를 피하며 몸을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황당한 얼굴로 얼어붙었다.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허공에 뜬 채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입실론?’
아니, 입실론은 아니다. 후드를 쓴 여자들 역시 메리의 등장이 달갑지 않은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리며 상의를 하더니 그녀를 건물 내부로 이끌었다. 메리는 순순히 그들을 따르며 속으로 감탄했다.
훈련받은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오베론 외에 낙원에 이런 조직이 또 있었다니.
“메리?”
웁실론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유림은 보초를 서던 웁실론들에게 잡혀 온 메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림!”
메리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토했다. 분명 맞게 찾아왔는데 분위기가 예상보다 험악해서 겁이 나던 차였다. 혹시 유림이 이미 잘못된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덜컥 들었다. 잘못되기는커녕 대장처럼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메리는 웃음이 나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런 으스스한 장소는 이곳밖에 없지.”
유림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메리는 그녀의 목덜미를 보더니 생긋 웃으며 톡 건드렸다.
“봤거든. 널 문 델타의 기억.”
유림과 메리가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웁실론들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밧세바 곁에 모였다. 고대 그리스풍의 여신 드레스를 입은 메리의 옷차림. 누가 봐도 입실론이었다. 엘 카인의 후궁과 다름없는 태양의 도시 여자가 이곳까지 어쩐 일이란 말인가? 그녀들 입장에서는 께름칙한 방문이었다.
“어떻게 빠져나왔어? 선글라스 낀 안드로이드 녀석들이 또 따라붙은 거 아니야?”
“이번에는 아니야. 하지만 오래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신뢰할 수는 없지만 조력자가 생긴 듯해. 어쩌면 그녀도 연맹군 사람일지 몰라. 자세한 건 나중에 일러 줄게.”
“조력자?”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메리가 이렇게까지 위험부담을 감수한 적이 있던가? 유림은 불길한 눈빛을 지었지만 더 이상의 토는 달지 않았다. ‘신중하고 침착한 메리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는 믿음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어? 중사님!”
드레이크의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중앙 계단 쪽으로 쏠렸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케이가 유유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유림은 눈초리를 사납게 세우며 걸어갔다. 그녀는 대뜸 그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윽!” 하고 신음을 흘린 케이는 바로 무릎을 접은 채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오는 거야?”
“아, 유림…….”
“나츠가 부상당해서 인원도 부족한 마당에 멋대로 위치 이탈할 거야?”
케이를 찾으러 건물 전체를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른다. 유림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잔소리를 해 댔다. 케이는 그런 유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더 얼이 빠진 눈빛이었다.
“유림.”
“소위님, 이라고 부르라 했지? 몇 번을 말해, 몇 번을!”
“유림이 몇 살이었죠?”
뜬금없는 질문에 유림은 더 열 받아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제는 화를 내도 듣지를 않네? 주먹을 불끈 쥐던 유림은 케이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지하다 못해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의 묘한 분위기에 전의를 상실한 그녀는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스물일곱. 몇 월생인지는 나도 몰라. 왜?”
긴장한 채 듣던 케이는 힘 빠진 미소를 머금었다. 왜 저렇게 웃지? 가슴 먹먹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울었어?”
유림이 인상을 쓰며 묻자 그가 눈두덩을 손으로 짚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왜요?”
“아니, 눈이 좀 부었는데.”
“그럴 리가요. 잠깐 자다 와서 그런가?”
“잤다고?
유림이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케이는 눈초리를 예쁘게 휘며 얼렁뚱땅 변명했다.
“눈 뜨고 잤어요.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거든요.”
케이 녀석,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유림은 이제 그가 내뱉는 허황된 소리를 이해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선 샐쭉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신이 내린 숙제인지 뭔지를 풀고 있던 건 아니고?”
“그건 이미 풀었을지도요.”
유림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그녀의 눈에 붙인 거즈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더니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안 뗄 거예요?”
“이걸 왜 떼? 다, 다쳤다니까.”
“흐음…… 가벼운 상처라면서 오래도 붙이고 있네요.”
당황한 듯 말을 더듬던 유림은 변명할 구색을 찾는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케이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유림의 뒤로 걸어오던 메리는 케이를 보자마자 누군지 직감한 듯 미소 지었다. 난처해하던 유림은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아, 이쪽은 메리야. 태양의 도시 입실론이고 우리 언니. 그리고 이쪽은 케이, 내가 집에서 키우는 애완 사병이지. 얼마 전에 쫓겨났던가, 참?”
케이의 안색이 돌연 파리해졌다. 그는 유림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귓불에 입을 맞췄다.
“그만 용서해 줘요.”
“싫어.”
“키스 세 번 완료했는데, 이제 소원 들어주는 거예요?”
“한 시간 안에 하는 거 아니었어? 한 시간 예전에 지났거든?”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시간제한을 걸어 놓고선 잊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낭패 어린 얼굴로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유림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가 뭘 깜빡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허당처럼 보여도 은근히 철저한 녀석인데.
“도대체 위층에서 뭘 했기에 본인이 건 내기도 잊고 있던 거야?”
“위층에서요?”
그녀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케이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또 저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려는 심산이다. 그는 절대 깊은 속내까지 공유하지 않는다. 가까워진 숨결만큼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한 건 역시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유림은 손가락 끝을 모으며 힘을 주었다. 손마디 끝이 뼈를 하얗게 드러낼 정도로 꽉 쥔 주먹으로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홱 돌아서며 말했다.
“둘이 알아서 인사 나눠.”
메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반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케이는 메리와 눈이 마주치자 기계적으로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입실론 메리 님.”
“네, 애덤슨 중사님.”
메리가 장갑 낀 손을 내밀자 케이는 순순히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놓을 줄 모르는 두 사람 주변으로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메리와 케이는 서로를 뜯어보듯 시선을 나누며 대화를 나눴다.
“우리 유림이, 다루기 꽤 어려우시죠?”
그녀의 말에 케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메리는 선심 쓰듯 어깨를 으쓱하며 조언을 건넸다.
“몇 가지 팁이 있긴 해요. 유림의 기분이 언짢거나 피곤할 때는…….”
“달콤한 음식이 약이죠. 특히 스트로베리 케이크나 쇼콜라를 좋아하거든요, 우리 소위님은요.”
케이의 부드러운 음성에 메리는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우리 소위님’이라 강조하는 그의 말투에 묘한 경쟁의식이 엿보였다. 메리는 대충 사정을 알겠다는 듯 재미난 표정을 짓더니 쿡쿡 웃었다.
“유림이 심부름을 어지간히 시켰나 보네요.”
“네, 삼 분 안에 도착해서 입에 넣어 드리지 않으면…….”
대답하던 케이의 눈길이 드레이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유림에게로 닿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깔깔 웃는 유림의 모습에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얼차려라도 받나요?”
메리의 물음에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유림의 어깨를 털어 주는 게 보였다. 꽤 다정한 손길로, 친밀해 보이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짜증 섞인 눈빛으로 변한 케이의 미간이 곧추섰다. 그는 잇새로 웃음을 머금더니 주변에 다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그런 거면 쉬울 텐데요. 아주 중독성 강한 벌칙을 내리시거든요. 자꾸만 늦고 싶게 말이죠. 달콤해서 또 먹고, 또 맛보고 싶은 그런 벌칙.”
느른하게 웃으며 눈초리를 휘는 케이의 모습에 메리는 일순 넋을 놓았다.
‘왜 엘 카인이 떠오르는 거지?’
유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옳다구나 싶은 케이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어렸다. 그는 허리를 숙여 메리에게 더 바짝 몸을 붙였다. 그러자 유림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죽을 것 같지만 또 당하고 싶은 그런 고문이요. 본인의 욕구만 채우고 냉큼 달아나 버리는 게 얄밉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간만큼은 소위님을 마음껏 애무할 수 있거든요. 본인이 원할 때는 키스는 물론이고, 온몸을 사랑해 달라며 두 다리로 하반신을 조여 오는데 그게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만들죠. 제일 고통스러운 벌칙은 키스만 하는 거예요. 가르랑거리며 안기는데 일부러 그러는 게 명백한 얼굴이에요. 덮치고 싶은데 온 힘을 다해 자제하는 제 모습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메리의 뺨은 점차 붉어졌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윽한 음성 때문인지, 아니면 외설스러운 내용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목까지 열기로 뜨거웠다.
“아, 목욕을 할 때도 종종 같이 들어가서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유림이 던진 신발이 직격으로 케이의 안면을 강타했다. 메리는 깜짝 놀라 케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코가 부러진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로 엄청난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림이 던진 건 낡은 군화였다. 당사자인 유림도 당황했는지 던진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설마 이것도 못 피할 줄이야.’라는 표정이었다.
유림은 난감한 눈빛으로 미간을 좁혔다. 저 녀석의 한심한 반사 신경을 잊고 있었다. 오늘따라 움직임이 좋기에 발전을 좀 했나 싶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그러게 왜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나불거리고 난리야.’
그녀는 이 모든 게 케이의 후진 운동신경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며 인상을 썼다. 그래도 구시렁거리는 그녀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케이는 얼굴에 붙은 신발을 떼어 내더니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머지 한쪽 군화를 바닥에 털며 애꿎은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멀뚱히 서 있던 드레이크는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원수를 보는 듯한 케이의 살기 어린 눈초리를 보고 나서야 사태의 원흉이 본인이란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중사님, 얼굴 괜찮아요? 세게 맞은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케이는 걱정하는 메리에게 익숙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는 뺨에 묻은 흙을 털며 다시 유림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원래 소위님은 화가 나면 잘 할퀴거든요. 이쯤이야 익숙합니다.”
“유림은 저한테 이런 얘기하는 걸 굉장히 부끄러워해요. 그런데 두 사람이 목욕까지 같이하는 사이인 줄은 몰랐네요.”
“같이 안 한다니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유림이 다시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쳤다. 이미 그녀의 얼굴색은 홍당무 수준을 넘어서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채였다.
“내가 안 불러도 씻을 때마다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쓴단 말이야. 변케이, 변태슨 같으니.”
“아, 변태…… 제가요?”
케이는 미처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쿡쿡 웃었다. 오늘따라 더욱 얄미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유림은 갑자기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케이를 보며 뒤로 흠칫 물러섰다. 왜 다가오냐며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군화가 좀 큰 것 같은데 어디서 난 거예요?”
“나츠 거야.”
케이는 유림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몸을 숙였다. 그는 그녀가 던졌던 군화를 왼발에 신겨 주기 시작했다. 유림은 멋쩍은 듯 그의 어깨를 잡고 속삭였다.
“나 혼자 할 수 있는데.”
“결국 내가 두 번 하게 만들 거잖아요. 리사도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어요.”
유림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메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뭔 망신이야?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싶다.
“유림은 메리 앞에서 쑥스러움을 많이 타네요. 다른 부대원들 눈은 신경도 안 쓰면서.”
메리를 흘끗 쳐다본 케이는 중얼거리며 비스듬히 눈을 깔았다. 그러고는 서운하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질투 나네요.”
“우리 언니한테 샘내지 마.”
“원래는 내가 일등이었는데, 샘이 안 날 리가 없죠.”
“뭐가 일등이야? 설마 내가 케이를 메리보다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박사님보다도 내가 더 좋다고 했는데?”
“누가? 무슨 박사님?”
케이는 잠시 대답을 아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그의 눈빛에 유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무는 석양에 머무는 바람처럼 쓸쓸한데, 입가에 걸린 곡선은 더없이 다정했다. 뭔가 아주 그리운 걸 떠올리듯이. 한참을 말없이 그녀를 보던 케이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다른 형제자매는 또 없어요?”
“오빠가 하나 더 있어.”
군화를 다 신기고 마무리하던 그의 손이 멈칫 멈췄다. 굳은 눈동자로 유림을 빤히 보던 케이는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요?”
“왜 그렇게 쳐다봐? 설마 헤벨의 밀러가 누군지 몰라?”
“아, 그 오빠.”
그는 속상한 눈초리로 중얼거렸다. 유림이 잘 때도 간혹 잠꼬대로 중얼거리던 이름이다. 밀러 이야기만 나오면 유림은 눈을 반짝거리며 좋아했다. 그렇게도 좋은가, 그 남자가?
마이클 밀러.
헤벨의 함장이자 연맹군 전략국 작전부장인 유림의 의붓오빠.
“잠깐 자매끼리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메리가 케이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케이는 어깨 너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냉큼 유림의 팔을 잡아끄는 메리의 눈빛이 일순 그와 교차했다. 먹잇감을 뜯어보는 독수리처럼 날카롭고 공격적인 눈초리였다. 좀 전까지 뺨을 붉히며 같이 농담을 주고받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케이는 메리가 건드리던 어깨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묘한 눈빛을 지었다. 메리는 어느새 벗었던 장갑을 다시 끼고 있었다. 유림에게 너무 몰두한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다.
‘신체적 접촉에 의해 상대의 기억을 볼 수 있다고 했던가?’
웁실론들과 외모를 비롯해 능력까지 상당히 닮은 그녀였다. 하지만 엘 카인의 권속은 아니다.
‘설마 미카엘의 권속인가?’
알아볼 가치는 있을 듯했다. 의심 어린 눈초리로 메리를 보던 케이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는 밖에 나오자마자 바로 스마트 워치를 어루만졌다.
─ 안녕, 아담.
음성의 주인은 사샤였다.
“네가 데려온 거야?”
─ 메리? 맞아. 엘 카인이 그녀와 접촉했어. 어쩌면 네 존재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차라리 메리 쪽에서 움직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엘 카인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케이는 흐리흐리한 날씨를 올려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노아 호크는 어디 있어?”
─ 모래의 도시 형무소에 갇혀 있는 것 같아. 구출하려고?
“아니.”
케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사샤는 바로 숨을 죽였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가시처럼 돋은 살기를 내뿜는 게 느껴졌다.
“선수를 뺏길까 봐.”
─ 선수라니?
“내가 가기 전에 누가 먼저 구해 주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노아, 방주의 길잡이이자 유일하게 남은 부모 세대의 어른이었다. 멸족 위기에 처한 일족의 마지막 후손들을 데리고 먼 여정을 떠난 장본인. 그는 방주에 탄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모성에 도착할 무렵, 엘 카인은 반기를 들고 동족을 공격했다. 노아는 그것을 바람직한 ‘변화’라 칭하며 찬사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엘 카인에게 당한 이유는 규율에 복종하고 따랐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동족 살해는 중죄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노아였다. 그러나 신을 살해하는 게 금기라 한 적은 없지.
─ 설마…… 호크 대령을 죽이려는 건 아니지?
방주의 길잡이는 역할을 다했다. 낙원에 낡은 신의 제단은 필요치 않다. 이곳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성소였으니까.
“글쎄.”
낮게 중얼거린 그의 입가에 온기 없는 표정이 어렸다. 무감정한 눈초리는 흐릿하게 개어 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 능구렁이가 죽인다고 죽을지나 모르겠네.”
한편, 연구동 옥상으로 올라온 유림과 메리는 버려진 정원으로 향했다. 관리되지 않은 옥상 정원은 잡초가 무성했다. 메리는 불안한지 계속 주위를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에어쉽이 다니지 않는 하늘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밖으로 나와도 되는 거야? 왓슨의 눈에 걸릴지도 모르잖아.”
“괜찮아. 왓슨은 알아도 관리자는 알 수 없을 테니까.”
왓슨의 주인이 여기에 있는데 왓슨의 눈 따위가 뭔 걱정인가. 케이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메리는 무슨 이야기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유림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정원 내 다과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유림은 곧바로 본론부터 짚었다. 역시 제일 신경이 쓰이는 건 메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의문의 조력자였다.
“그 사샤라는 사람이 메리를 왜 돕는 건데? 평의회가 심어 둔 첩자일지도 몰라.”
“그건 아닌 것 같아. 본인 말로는 익명의 과학자와 아는 사이래.”
“익명의 과학자?”
들어 본 것 같은데 그게 누구였더라? 미간에 힘을 주는 유림을 보며 메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슈퍼컴퓨터 왓슨을 만든 사람 말이야. 로스트 헤븐도 그가 설계했다는 말이 있고.”
“아.”
끄덕이던 유림의 고갯짓이 멈췄다. 그러니까 바깥에서는 케이를 ‘익명의 과학자’라고 부른단 말이지? 생각해 보니 헤벨에 있을 때도 낙원의 설계자니, 익명의 과학자니 하는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던 것 같다. 대부분이 허무맹랑한 소문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게 케이에 관한 말들이었다니 새삼 신기했다.
“앞뒤 안 맞는 얘기 같기도 한데, 어쩌면 익명의 과학자는 낙원이 무너지길 바라는지도 몰라.”
메리의 말에 유림의 눈이 커졌다. 유림은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며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메리에게 사실대로 털어놔야 할지, 케이의 비밀을 지켜 줘야 할지 내적 갈등이 일었다. 메리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자칫 눈을 마주친다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바로 들킬지도 모른다.
“딱히 그럴 이유가 있어?”
유림은 은근슬쩍 물었다. 메리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 여자는 복수를 원하는 것 같았어.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했거든. 그리고 익명의 과학자는…….”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이를 잃었죠.
사샤가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 메리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뻔하다고 생각했다. 익명의 과학자 같은 특별한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누구든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그 남자는 그냥 모든 걸 파괴해 버리고 싶은 걸지도 몰라. 생각해 보면 익명의 과학자는 로스트 헤븐의 설계 이후 완전히 종적을 감췄잖아.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세우자마자 과학계에서 증발해 버릴 리가 없어.”
메리의 말을 듣던 유림의 머릿속에는 케이가 중얼거리듯 한 말이 떠올랐다.
─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좀처럼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들려준 개인사였다. 혹시 그의 여동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퍼즐을 맞춰 보듯 추리해 가던 두 사람은 난데없이 머리 위에서 들려온 폭격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메리, 저걸 봐!”
하늘에서 축포가 터지고 있었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불꽃들. 이윽고 커다란 불꽃 하나가 올라가더니 광활한 창공을 금빛으로 화려하게 물들였다.
“게이트53) 쪽이야.”
투어 관광객을 받을 시기가 아닌데 게이트가 열리다니 무슨 일일까? 얼마 전 테러 사건으로 인해 평의회는 게이트를 당분간 폐쇄한 상태였다.
남동쪽 하늘을 올려다보던 메리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일렁였다. 축포라기보다 경고로 보이는 폭죽 소리. 깊은 생각에 잠겨 속눈썹을 드리운 그녀는 홱 돌아서더니 유림의 어깨를 잡았다.
“유림, 헤벨로 돌아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번 테러 사건은 기억의 도시에서 일어났어. 거긴 낙원의 주민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은 곳이야. 테러 사건 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외부인일 거란 뜻이지. 그렇다면 이번 테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연맹국 측에서 군대를 보내왔을 수도 있어.”
유림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그녀는 다시 게이트 쪽을 바라보았다. 메리도 심각한 눈초리로 같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럼 지금 게이트에 연맹군이 와 있다는 소리야?”
“내 예상으로는 그래. 그리고 만약 연맹군이 왔다면 분명…….”
헤벨일 것이다. 그리고 헤벨이 왔다면 남태평양전대 총사령관인 그가 와 있을 것이다. 헤벨의 함장이자 전략국의 기둥 그리고 그들의 상관인 마이클 밀러 중령이.
“밀러가?”
“이건 기회야, 유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낙원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러니 너는 이참에 헤벨로 복귀하도록 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올 때 함께였으니 나갈 때도 함께야. 나 혼자서는 절대 안 가. 그리고 임무도 완수하지 못한 주제에 무슨 복귀를 한다고?”
“그건 나한테 맡겨. 내가 완수할 테니까, 넌 돌아가.”
유림은 짜증 난 얼굴로 이마를 찡그렸다. 메리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종종 유림을 설득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눈을 마주치며 가만히 온기를 전하는 것. 마이클은 애완 고양이를 어루만질 때 쓰는 수법 같다며 초를 쳤지만 유림은 유독 메리의 손길에 약했다.
“오늘 관리자 아담을 직접 만났어.”
“관리자를?”
놀라서 소리치는 유림에게 메리는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고 진정시켰다.
“그래, 만났어.”
“역시 엘 카인이야?”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널 찾고 있어.”
“나를 왜?”
황당한 얼굴로 묻던 유림은 뭔가를 떠올리고 멈칫 눈을 일렁였다.
“엘 카인이 나를 소환한 건 어느 여자의 기억을 들여다보게 하기 위해서였어. 여자의 어깨에는 총상이 있었고, 언어 능력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지.”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델타라기보다는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던 그녀.
“그 델타를 말하는 거지? 날 공격했던 이상한 델타.”
“내가 만난 그녀는 더 이상 델타의 모습이 아니었어. 나를 보고 살려 달라고 두 손을 빌었거든. 델타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사회적 행위잖아. 그녀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거야. 유림, 너를 물고 난 후에 말이야.”
설마 했던 예상이 적중하자, 유림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오른눈에 붙인 거즈를 천천히 떼어 냈다. 그러자 안쪽에 숨어 있던 붉은 동공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번에는 메리의 눈이 커졌다. 유림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조곤조곤 속삭였다.
“델타에게 물린 지 열두 시간도 더 지났어.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고열은 없었고 물린 상처도 아물어 가는 중이야. 쉽게 말하면 난 감염이 아닌 회복 증세를 보이고 있어.”
“넌 원래 상처 회복이 빠르잖아.”
멍이나 타박상은 말할 것도 없고, 베인 상처도 몇 시간이면 흔적도 없이 치유되는 유림이었다. 그 능력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 누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헤벨 내에서 유림이 데드캣이라고 불리는 이유 또한 이와 관련 있었다. 고양이처럼 날렵하고 유연한 그녀의 움직임 외에 고양이 목숨이 아홉 개라는 전설도 한몫한 것. 그 어떤 전투에서도 전장의 여신처럼 부활해서 돌아오는 유림을 경외하는 의미였다.
“말해 줘, 언니는 이 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잖아.”
처음부터 유림을 문 델타의 기억을 보고 온 메리였다. 멀쩡하게 서 있는 유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태도가 오히려 이상했다.
“메리!”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어. 헤벨에 왔을 때부터 넌 이미 항체를 가지고 있었거든.”
“항체? 왜 진작 말을…….”
“안 했냐고?”
메리가 맥을 끊으며 묻자, 유림이 멈칫했다.
“네 몸에 관해선 연맹군 최고 수뇌부도 몰라. 아버지와 마이클이 철저히 비밀에 붙였으니까. 헤벨의 인공지능인 아벨은 무조건 함장의 명령만 들으니 문제 될 건 없었지.”
“혹시 페트로비치 박사라고 알아?”
“페트로비치? 아니, 모르겠는데. 왜?”
“아까 내 상처를 봉합한 박사가 나한테 페트로비치 박사가 어쩌고 했거든. 혹시 내 과거와 관련 있는 사람인가 싶어서.”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이걸 알게 된 건 로스트 헤븐에 오기 직전이었거든. 아버지와 마이클은 내게조차 네 항체에 대해 비밀을 유지해 왔으니까.”
“그 박사가 난 입실론이 아니라고 했어. 입실론이 아닌 최초의 항체 보유자라고. 왜 다들 내게 비밀로 한 거야? 언니도 지난 몇 년간 내게 숨겨 왔다는 소리잖아.”
유림은 아직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메리에게 주기적으로 손을 내주는 까닭은 그렇게라도 과거의 파편을 엿보고 싶어서였다. 그걸 알고 있을 메리마저 함구했다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유림을 보던 메리는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마이클과 아버지는 널 지키고자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기억나니? 마이클은 널 로스트 헤븐 앞바다에서 발견했어. 분명 낙원에 붙잡혀 있던 거겠지. 발견 당시 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몹시 심약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해리성 기억상실 증세도 보였어. 네 존재를 상부에서 안다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 연맹군도 낙원과 다름없는 짓들을 했을 거야. 생체 실험을 했겠지. 아버지와 마이클은 그런 일들을 막고자 당사자인 너에게조차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한 거라 생각해. 네 정체는 스스로도 모르는 편이 훨씬 안전했을 테니까. 알았다면 네가 가만 있었겠어?”
“가만히 못 있지.”
유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이미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메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것 봐. 네 성격을 빤히 아는데 마이클이 네 등을 떠밀 거 아니면 일러 줬겠니? 네가 로스티아벤에서 델타 포획조로 뉴욕 최전방에 있을 때 오빠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어? 네가 감염될 확률이 있었다면 절대 널 그렇게 보낼 사람이 아니잖아. 헤벨의 고양이를 자기 목숨보다도 끔찍하게 여기는 남자인데.”
유림은 반박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벙어리처럼 듣고만 있었다. 메리의 말이 맞다. 만약 자신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주변에서 아무리 말렸어도 여기저기를 들쑤시면서 과거를 캐고 다녔을 게 분명했다. 연맹군이나 낙원이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였을 테고, 지금쯤 실험체가 되어 연구소 어딘가에 갇혀 있었겠지. 마이클과 아버지는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 사항을 극비에 붙인 것이다.
“그럼 날 낙원에 보내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네가 막는다고 안 갈 애니?”
“아니, 메리를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젓는 유림의 모습에 메리는 웃음을 지우며 입술을 다물었다. 유림이 이곳에 오게끔 그물을 친 건 자신이었다. 분명 그녀가 위험해질 거란 걸 알면서도 마이클의 곁에서 어떻게든 떼어 놓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죽길 바란 건 아니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헤벨로, 그리움에 사무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그 남자에게로. 이만하면 마이클도 많이 괴로웠을 테니까.
“혼자서는 안 간다니까.”
유림은 그만하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메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림의 고집은 아무도 못 꺾는다. 못 꺾으니 마이클도 결국 그녀를 낙원으로 보낸 게 아닌가?
유림은 메리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엘 카인은 언니를 신뢰해?”
“그건 모르겠지만 내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
“역시 메리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
위급 상황 시 대응력이나 순발력에 있어서는 유림이 메리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따라서 행동 작전에 그녀가 아닌 메리가 투입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밀러였어도 승인하지 않았을 작전이다. 유림의 생각을 눈치챈 메리가 반론했다.
“원래부터 아담을 암살하는 건 내 임무였어. 그래서 입실론으로 온 거잖아. 낙원의 관리자 곁에 갈 수 있는 여자들은 태양의 도시의 입실론뿐이니까.”
“어떻게 빠져나올 건데?”
메리는 손안에 쥔 금색 칩을 내밀며 보여 주었다.
“이게 뭐야?”
“조력자가 준 부적.”
조력자란 여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메리의 허파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어 놨다. 만나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려야지.
유림은 이를 바득 갈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섀도우 칩을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메리가 태연한 얼굴로 웃었다.
─ 어떻게든 되겠지.
유림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젖었다. 그녀가 메리에게 습관처럼 뱉던 말이었다. 저게 이렇게 들리는 거였구나. 메리는 매번 이런 심정으로 그녀를 꼭 안아 줬던 것일까?
“하지만 메리는…….”
“너처럼 강하지 않다고?”
“아니, 그게 아니고.”
유림은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블러디 마리아를 우습게 보면 안 되지. 그리고 언니가 되어서 늘 동생을 사지에 밀어 넣고 뒷짐 진 채 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유림은 동의 못한다는 눈초리를 지었다. 풋 웃던 메리는 헛기침을 했다. 지금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왠지 오늘이 아니면 다시 묻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어서.
“애덤슨 중사, 좋아하니?”
유림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메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유림은 금세 한숨을 머금고 턱을 괴었다.
─ 오지 마, 케이.
─ 상관없어요.
피 묻은 입가에 그의 입술이 닿던 순간, 이대로 숨이 멎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끝을 맺어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결심마저 들 정도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죽음은 전장 한가운데일 거라고 확신했다. 죽는 순간까지 칼날을 휘두르며 적을 베다가 기운이 다 떨어져서 눈을 감을 거라고.
“케이와 있으면 자꾸 여자가 돼.”
데드캣이 아닌 정유림이 된다. 적당히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혀를 섞고 입을 맞추던 때와는 달랐다. 그의 온기가 간절했다. 그에게 안기면 모든 고뇌가 녹아내리는 듯 안도감이 들었고,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이 치솟았다.
“전장에서 나도 모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지휘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이 남자가 살기를 바랐다. 설사 자신이 잘못될지언정 케이만큼은 무사하길 원할 정도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유림의 모습에 메리의 눈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유림의 이런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막내임에도 가장 듬직했던 아이. 어렸을 때부터 헤벨의 사병들과 구르면서 실력과 패기로 모든 이를 압도했던 유림이었다. 남성 장병들도 그녀 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실실거리며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가 곤죽이 된 녀석들로만 줄을 세워도 헤벨의 식당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나는 내 이상형이 밀러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었어. 케이처럼 저렇게 덜 떨어진 놈, 순 능글맞기만 하고 끈기와 독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데다가 아직까지 총도 제대로 못 쏘는 녀석…… 잘하는 게 뭔지 굳이 꼽자면 요리 정도랄까?”
공허한 목소리였다. 유림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의 메리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되어 버렸네.”
결국 마지못해 인정하고 만 감정. 속이 시원하다는 눈빛이었지만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을 보니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마이클이 굉장히 질투하겠는걸?”
메리가 턱을 괴며 웃었다.
“오빠가 왜?”
“생각해 봐. 본인은 죽을 고통으로 몇 년을 기다렸는데, 돌아온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하면…… 가슴이 찢어지다 못해 울지도 몰라. 그 인간, 애덤슨 중사를 총 쏴서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어.”
“설마.”
천사 같은 밀러가 그럴 리 없다. 군인이지만 폭력과 어울리지 않는 햇살처럼 부드럽고 밝은 사람인데. 메리는 유림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넌 마이클의 진짜 얼굴을 몰라.”
폭력적이지 않다고? 거친 면모가 없다고? 그런 나약한 사람이 헤벨의 함장 역을 해낼 수 있을까? 온갖 모략과 함정이 득시글대는 전략국의 작전부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가 얼마나 독하게 자신의 마음을 감춰 왔는지, 오빠라는 위치에서 얼마나 치밀하게 연기를 해 왔는지 유림은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메리는 눈웃음이 담긴 시선으로 전할 수 없는 독백을 대신했다. 손사래를 치던 유림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밀러는 몰라도 케이는 걱정이네. 저 녀석 특기가 웃으면서 상대방 약을 살살 올리는 건데.”
은근히 못돼먹어 가지고, 리사한테 하는 것만 봐도 케이가 얼마나 이중인격인지 알 수 있었다. 밀러한테 그 심술을 안 부릴 리가 없지. 호크 대령한테도 웃는 얼굴로 이죽거리며 속을 뒤집어 놓는 녀석인데.
“두 사람이 마주치는 건 역시 피하는 게 좋겠어.”
중얼거리는 유림을 보며 메리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메리를 흘끔 본 유림이 불쑥 물었다.
“대체 뭘 봤는데 그래?”
메리가 놀라서 유림을 쳐다보았다. 유림은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바짝 맞댔다. 메리의 눈을 뚫어져라 직시한 그녀는 다시 물었다.
“케이와 접촉했잖아. 뭘 봤는데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역시 유림이다.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지휘관으로서 그녀는 순식간에 상황을 읽는 판단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돌발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과 순발력은 마이클뿐만 아니라 호크 대령도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아닌 척했지만 멀리서 그녀와 케이를 언뜻언뜻 지켜보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메리는 유림의 손을 잡더니 조심스레 속삭였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을 엿볼 수 없던 사람은 너 하나뿐이었어.”
지금 이 순간도 유림에게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유림은 메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안식처였다. 편안하게 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손.
“애덤슨 중사에게서 뭘 보고 놀란 게 아니야. 오히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에 충격이었지. 이렇게 지금 네 손을 잡은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
“뭐?”
유림의 눈이 커졌다.
“두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그의 기억을 엿보는 것에 실패했어. 안드로이드 같지는 않아. 하지만 뭔가 있는 것 같아. 너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거든. 중사와 접촉했을 때는 오히려 내가 집어삼켜지는 느낌을 받았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감각이랄까? 그러더니 머릿속에서 날 이렇게 ‘팟’ 하고 튕겨 냈어.”
메리는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속삭였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하얗게 질린 채 유림을 끌어안았다.
“여태까지 네가 말한 애덤슨 중사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어. 내가 지금까지 접촉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섬뜩한 느낌을 안겨 준 사람이야.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접촉만으로 내게 직접적인 ‘감각’을 선사하고 ‘감정’을 일으킨 건 그가 처음이었어.”
공포였다.
편안한 어둠을 주는 유림과 달리, 그는 스스로 그녀의 능력을 차단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네가 아무리 나를 들여다보려 해도 소용없다는 듯이, 그는 암흑 속에 걸터앉아 그녀를 느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간파당한다는 게 이토록 소름 끼치고 두려운 일인 줄은 몰랐다.
“걱정하지 마, 메리.”
유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메리를 진정시키듯 말했다.
“케이는 날 절대 해치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아?”
“알 수 있어. 메리가 아득한 두려움을 느꼈듯…… 나와 그 사이에도 주고받은 감정이 존재하니까.”
유림은 메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갛게 웃었다. 메리는 불안한 얼굴로 다시 입을 뗐지만 금세 다물었다. 유림의 눈빛에 담긴 신뢰는 이미 그녀가 아닌 애덤슨 중사를 향해 더 무겁게 기울어져 있었다.
한편 연구동 상공에는 검은 에어쉽 하나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사샤는 찻잔을 들고 향을 맡으며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담은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야?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인데. 그렇지 않아, 왓슨?”
─ 마스터의 감정 변화는 측정이 불가하니 저로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긴, 측정과 예상이란 게 가능한 남자는 아니지.”
사샤는 차 한 모금을 마시더니 블랙 스완54)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누군가를 찾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에어쉽 천장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사샤는 깜짝 놀라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케이가 에어쉽 위에 올라탄 채 서 있었다.
“아담? 그 위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생각.”
“무슨 생각?”
귀찮은 어조로 대답한 케이는 반듯한 이마를 구기더니 털썩 자리를 깔고 드러누웠다. 사샤는 황당한 얼굴로 밖을 살폈다.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거람? 서서히 착륙 중이던 에어쉽은 지상으로부터 최소 팔십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 A 연구동 옥상에 계셨던 듯합니다.
“저기서 온 거라고?”
사샤는 멍하니 옥상을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높이도 높이지만 거리부터가 사람이 물리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간격이 아니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매번 그의 능력을 볼 때마다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샤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흘렸다.
“마이클 밀러 중령이라고 연맹군 소속인데 혹시 만나 본 적 있어?”
밖에서 들려오는 케이의 목소리에 사샤는 다시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안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고 싶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존재니까. 바람은 계절을 돌아 다시 불기를 기다리는 것이지, 가둔다고 머무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진즉에 깨달았다.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사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거든.”
“왜 유명한데?”
“젊고 잘생긴 데다가 능력 있는데 아직 독신이거든. 엘 카인처럼 공식적인 약혼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여자들이 노릴 법하지.”
“능력이 좋다는 건 군인으로서 우수하다는 건가?”
“그렇겠지?”
케이의 눈빛에 짜증이 어렸다. 밀러인지 뭔지 얘기만 하면 배시시 풀어지던 유림의 얼굴을 생각하니, 창자가 꼬이는 것처럼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런 표정은 자기 얘기를 할 때만 보였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으려나?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젊은 독신인 헤벨의 함장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누구일지 불 보듯 뻔했다. 메리의 말만 주워서 대충 이어 붙여도 눈에 보이는 그림인데, 정작 당사자인 유림은 모르는 눈치였다.
저런 둔한 면은 박사님을 닮은 건가? 사라는 운동신경만큼이나 눈치도 잽쌌는데 유림은 그 방면으로 재능이 없다.
케이는 불쾌한 얼굴로 털썩 앉더니 턱을 괴었다.
‘마이클 밀러라.’
그녀와 지난 십오 년을 함께한 남자.
‘없애면…… 유림이 슬퍼하겠지?’
안 그래도 지금 그를 원망할 거리가 천지인데, 여기서 하나라도 더 추가되는 건 곤란했다. 점수를 쌓아 놔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무덤 파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뭔가에 끙끙 앓아 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가끔 이브가 다쳐서 타이탄이 사진을 보내 줬던 때가 떠올랐다. 수업 시간임에도 어찌나 속이 타던지 시계 초침만 일 분에도 수십 번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 초조함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케이는 날 절대 해치지 않아.
─ 그걸 어떻게 알아?
─ 알 수 있어. 메리가 아득한 두려움을 느꼈듯…… 나와 그 사이에도 주고받은 감정들이 존재하니까.
케이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어렸다.
─ 마스터, 엿듣는 건 안 좋은 취미입니다.
“엿들은 게 아니고 들려온 거지. 왓슨, 바로 이동할 거니까 에어쉽 하나 가져와.”
─ 형무소로 가십니까?
“그래. 가져갈 게 있으니 불가시 모드로 옥상에 대기한다.”
─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져가실 것이라면 정 소위님인가요?
왓슨의 말에 케이는 당혹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 틀렸습니까?
“틀린 건 아닌데 정답도 아니야. 물론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고 싶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여자가 아니라서.”
─ 그렇군요. 하지만 그건 집안 내력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집안 내력? 네가 뭘 안다고?”
─ 제가 타이탄과 완전한 동일 모델은 아니지만, 계보를 잇는 만큼 페트로비치가에 대해서는 나름 빠삭하답니다.
왓슨의 말에 케이는 불쾌한 듯 눈초리를 흘렸지만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저 녀석의 밉살스러움도, 저렇게 가끔 거만한 집사처럼 나불거리는 기능도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니 욕을 해 봤자 누워서 침 뱉기였다. 어쩔 수 없다. 박사님도, 사라도, 이브도 모두 타이탄을 사랑했던 만큼 어느 정도 그의 특징을 남겨 두고 싶었다.
“십 분 안에 처리해야 되니까 서두르지.”
─ 왜 십 분입니까? 지금부터 카운트할까요?
“유림의 인내심은 십 분이 최대거든.”
에어쉽 뚜껑 위에 선 케이의 눈이 붉은 물감을 뿌린 듯 물들기 시작했다. 석양처럼 붉기로 아름답게 젖어 가는 눈. 가까워지는 지면을 보던 케이는 허공을 바라보더니 구십 도로 몸을 뚝 떨어뜨렸다. 이윽고 공기를 가르는 파풍과 함께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상공에서 사라졌다.
* * *
나츠는 일본식 이름으로 여름을 뜻한다고 한다. 그는 동양인치고도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같은 동양계이자 여성인 유림보다도 가늘고 호리호리하니 말 다 했다. 아직 열일곱밖에 안 되었다고 했던가? 미성숙한 심신이라 그런지 사실 전장에서 가장 위태로워 보이는 병사였다. 중성적인 얼굴에 가느다란 목소리. 얼핏 보면 성별조차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으음.”
수술 후 처음 눈을 뜬 나츠는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고개를 벌떡 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재빨리 바닥에 발을 디뎠다. 줄타기하듯 위태로운 삶을 걸어온 소년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시야를 확보하자마자 발견한 인영에 긴장을 곤두세웠다. 다행히도 그림자의 주인공은 적이 아닌 아군이었다.
“드레이크 씨?”
“좀 더 누워 있지 그래?”
“아, 아닙니다.”
드레이크는 벽에 기댄 채 피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츠는 뭔가 허전한 느낌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반신이 벗겨져 있었다. 총상을 입은 복부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가슴팍은 원래 입고 있던 보호대가 착용되어 있다. 흘끗 나츠를 쳐다본 드레이크는 그의 군복을 던지며 말했다.
“소위님과 중사님께서 몇 번이나 들어오신다는 걸 만류하느라 고생했다.”
“아, 감사합니다.”
나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옷을 잡더니 앞가슴을 가렸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돌리며 팔짱을 꼈다.
“입어. 이쪽 보고 있을 테니까.”
“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나츠는 살짝 붉어진 뺨으로 심호흡을 했다. 뒤돌아 서 있는 드레이크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 지평선처럼 듬직한 어깨, 탄탄해 보이는 등 근육. 남자다운 몸이다.
복부의 통증 때문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돌아서 있던 드레이크가 곁눈질로 나츠 쪽을 흘끔 보며 물었다.
“도와줄까?”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이외에 간간이 끙끙거리는 소리만이 날 뿐이었다. 나츠는 고요히 서 있는 드레이크의 등을 간혹 쳐다보았다. 매너를 지키고자 돌아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다.
“왜 남자 행세를 하는 거야?”
딱히 시비조는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듯한 목소리였다. 드레이크의 시선은 여전히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츠는 “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왓슨은 어떻게 속인 거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속인 게 아니에요. 저는 정말 남자니까요.”
나츠가 딱 잘라 대답했다. 드레이크는 황당한 얼굴로 돌아섰다. STF의 상징인 황금 날개 로고가 박힌 전투복. 그걸 입은 나츠는 좁은 어깨선의 각을 맞췄다. 자그마한 체구,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섬세한 얼굴,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
“그럼 대체 그 가슴은…….”
대뜸 묻던 드레이크는 아차 싶은지 말끝을 흐렸다. 대놓고 물어보기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나츠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궁금하시면 다음에 같이 사우나나 한번 가시죠. 달릴 거 제대로 달려 있는 남자니까요.”
드레이크의 시선이 나츠의 가랑이 사이로 흘끗 향했다. 그는 난해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가슴 봉긋한 녀석이 사타구니에 남근도 박혀 있다는 건가?
“잠깐.”
그가 앞을 지나쳐 걷는 나츠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세웠다.
“하나만 더 묻자.”
“뭡니까?”
나츠가 예민해진 목소리로 날카롭게 반응했다. 더 이상의 논쟁은 회피하고 싶다는 눈초리였다.
“넝쿨에 휘감긴 성배.”
미간을 구기고 있던 나츠의 얼굴이 놀란 듯 굳었다.
“네 배꼽 위에 새겨진 문신 말이야. 오베론의 회색 기사들이 몸에 새긴 것과 같은 모양이던데 아닌가? 성배는 기사단의 상징이었지, 아마.”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못하는 나츠를 보며 드레이크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빙고인가? 하여간 어수룩한 녀석.
“나츠 시게노, 너였구나. 아군의 에어쉽에서 쏜 포탄의 주인공.”
악몽이 되어 버린 이브의 생일 파티에는 이례적으로 낙원의 관리자가 모습을 나타냈었다. 아담이 등장한 특별관람석에는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누군가 ‘축포다!’라면서 붉은 포물선을 그리는 불빛을 가리킨 순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글라스 돔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츠는 의외로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는 침묵한 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이미 대답을 들었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어차피 근접전에서는 그가 전적으로 유리했다. 총기가 없는 나츠를 제압하는 건 그에게 있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미안하지만 소위님께 알려야겠어.”
나츠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
“소위님께…… 폐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에요.”
“네 본의가 무엇이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소위님께서 의심을 받게 되었지.”
나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드레이크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애덤슨 중사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굉장히 실망하시겠군.”
케이의 이름이 나오자 나츠의 동공이 파도치듯 일렁였다. 흔들리던 초점은 바르르 떠는 턱과 함께 조각나듯 평정심을 잃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보고 드리고 올 테니까.”
“드, 드레이크 씨!”
문을 열고 나가려던 드레이크는 멈칫하며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나츠의 손이 그의 소매 끝을 간절히 붙잡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닿은 검은 눈동자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울고 그래?”
“변명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게…….”
드레이크는 나츠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메의 말은 절대적이에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철칙 같은 겁니다.”
“유메?”
“제 누나예요. 쌍둥이 누나요.”
소녀는 너무나 깊고 고독한 구렁을 갖고 있었다.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영혼은 십수 년 전부터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도 해방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렁 속에서 증오에 찬 눈으로 손을 내미는 이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쌍둥이 동생인 나츠마저도 그녀를 구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둘은 같은 배 속에서 탯줄을 공유한 채 태어났지만 그녀의 구렁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제 누나는 몸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태어나자마자 미궁에 버려진 저희가 살아남아 빠져나온 곳은 모래의 도시 하층부, 미들 타운이었습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들개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어요. 남들이 먹다 버린 걸 발견한 날은 운이 좋은 거였죠. 어린 저는 무엇이든 했습니다. 살아남을 수만 있 다면 무엇이든요. 다행히도 몸뚱이조차 정상이 아닌 저희들에게 크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가끔 유메를 장난감 삼아 가지고 노는 이들은 있었지만요.”
“너는?”
“네?”
조용히 듣던 드레이크가 불쑥 물었다. 그의 시선이 나츠의 가슴을 응시하더니 하반신으로 옮겨 갔다.
“널 가지고 놀던 사람은 없었고?”
“전…….”
나츠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전 남자니까요. 괜찮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등으로 얼른 눈가를 훔쳤다.
“유메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해요. 우리를 이곳에 버린 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는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거라 생각하죠. 하지만 유메의 행동은 점점 도를 넘고 있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유메의 증오에 날개를 달아 준 건 솔로몬, 그 남자였다. 부유 체어를 선물하면서 온갖 감언이설로 유메를 꼬드겨 거래를 할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하기는, 솔로몬이 없다 해도 낙원을 뒤엎고자 한 유메의 뜻이 꺾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울어서 죄송합니다. 저기…… 주, 중사님께는 제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
더듬더듬 눈치를 살피며 말하던 나츠의 눈이 커졌다. 드레이크의 팔이 그를 천천히 끌어안고 있었다. 투박하지만 등을 다독여 주는 손길에 나츠는 멍하니 이끌려 안겼다. 귓가에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좀 전과는 판이하게 자상했다.
“괜찮아. 어린애는 가끔 울어도 돼.”
함께 사지를 넘었던 전우이니만큼 이 정도의 위로는 괜찮을 거라고 드레이크는 스스로에게 변명 중이었다.
“그렇다고 네가 한 일을 눈감아 준다는 건 아니야. 중사님께는 가서 직접 말씀드리도록 해.”
“네. 고맙습니다, 드레이크 씨.”
나츠는 결국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드레이크는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기분이 애매했다. 여자를 안고 있는 건지, 사내놈을 안고 있는 건지, 그냥 애를 안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는 뒤를 흘끔 보더니 뒷걸음쳐서 문에 몸을 기댔다. 누가 이런 광경을 보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군복을 입은 사내 녀석 둘이 껴안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 게다가 어리기까지 하지. 그는 몸으로 문을 막은 채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콰광!
불현듯 들려온 폭발음에 나츠와 드레이크는 끌어안고 있던 자세에서 후다닥 떨어졌다. 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굉음은 먼 곳에서 들려온 것처럼 크지 않았지만 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질 만큼 위력이 있었다.
멋쩍은 얼굴로 나츠를 보던 드레이크는 까무잡잡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세게 쓸어내렸다. 심장이 쿵쾅댔다. 방금 전 폭발에 동조한 건가? 그렇다고 치는 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나츠 때문에 가슴이 뛰었던 거라고는 죽어도 인정할 수 없으니.
“일단 나가자.”
순식간에 군인의 얼굴로 돌아온 드레이크가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고개를 끄덕인 나츠는 눈물을 닦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유림과 메리는 이미 연구동 밖에 나와 있었다. 사샤의 블랙 스완은 A 연구동 입구에 착륙한 상태였고, 웁실론들은 경계 태세로 사샤의 에어쉽을 에워싼 상태였다.
“소위님.”
드레이크와 나츠가 나오자 유림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나츠를 발견한 그녀는 화색을 하며 반겼다.
“나츠, 몸은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미치광이 의사가 제 몫을 하긴 하네.”
“소위님, 그런데 방금 그 소리는 대체 뭐였습니까?”
드레이크의 질문에 유림이 말을 떼려는 순간, 검은 에어쉽 문이 열렸다.
“모래의 도시 쪽에서 일어난 폭발음이에요. STF는 벌써 출동했다고 하는군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유림의 눈초리가 살벌해졌다. 긴 흑발에 백인 여자. 창백한 낯빛이지만 우아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다. 사샤와 눈이 마주치자 유림은 미간을 구겼다.
“그 유명한 브루클린의 성녀를 직접 뵙다니 영광입니다.”
사샤는 에어쉽에서 내리며 손을 내밀었다. 유림은 그녀를 빤히 쳐다볼 뿐 악수를 무시했다. 머쓱해진 사샤는 내민 팔을 거두며 말을 건넸다.
“경계하시는 것 같은데, 전 그쪽 편이랍니다.”
“당신이 메리가 말한 조력자인가?”
유림의 질문에 메리가 눈짓을 보냈다. 물 흐르듯 걸어온 사샤는 자연스럽게 메리에게 팔짱을 꼈다. 그 광경을 본 유림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어딘지 모르게 사샤의 행동에서 계산적인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조력자라, 그럴지도요.”
“낙원의 설계자와 아는 사이라는 게 진짜야?”
“그럼요.”
확인해 봐야겠다. 미간을 좁히며 눈을 구긴 유림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는 어딜 간 거야?”
다들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이 남자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위치 이탈을 해? 그녀의 입가에 폭발 직전의 미소가 떠올랐다. 명령 불복종을 밥 먹듯 해 대는 걸 보니, 제 상관이 ‘브루클린의 성녀’라는 걸 잊은 모양이다.
“메리 씨는 저와 함께 가시죠. 슬슬 복귀하지 않으면 위험할 거예요.”
“아, 네.”
메리가 사샤에게 이끌려 에어쉽에 올라타자 유림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자꾸만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에어쉽 문이 닫히려는 순간, 유림은 팔을 뻗더니 사샤의 손목을 턱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에어쉽 안쪽에 앉은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잘 들어.”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경고가 새어 나왔다.
“행여나 메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사샤는 유림과 눈을 마주친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유림은 외눈박이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나마 멀쩡히 남아 있는 양팔마저 의수를 쓰게 만들어 줄 줄 알아. 나는 여자든 노인네든 때리고 눕힐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기억해 뒀으면 해.”
말을 마친 유림은 꽉 잡고 있던 사샤의 팔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사샤는 빨갛게 부은 손목을 내려다보더니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명심하도록 하죠.”
그녀의 산뜻한 대답에 유림은 불쾌한 표정으로 에어쉽에서 물러났다. 사샤는 보답이라도 하듯 문을 닫으며 말을 흘렸다.
“호크 대령을 구하러 갈 생각이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폭발이 일어난 지점은 모래의 도시에서도 심해에 위치한 최하층, 블랙 호크는 그곳 특별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거든요.”
고마운 정보였지만 빚지는 기분에 썩 유쾌하지 않았다. 유림은 아직 열려 있는 문 안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조심해, 메리.”
“걱정하지 마.”
고개를 빼꼼 내민 메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평소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대사를 주고받는 두 사람. 유림의 눈 속에 불안한 안개가 꼈다. 석연치 않은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메리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내밀었다. 유림은 장갑을 받으며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헤벨의 고양이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샤는 조소를 머금었다. 찻잔을 들고 호르르 차를 마시던 그녀는 머릿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신의 가호라. 그딴 것에 의지하는 순간 사지가 잘린 채 유혈이 낭자하는 꼴을 보게 될 텐데. 거기서 운이 좋다면 나처럼 목숨만은 부지할지도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저렇게 순수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다. 둘 다 영리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유림의 경우엔 운동신경도 대단하지만 날카로운 눈썰미가 있었다. 아마 타고난 감각일 거다. 자신의 양다리가 의족이란 걸 이렇게 단시간 내에 알아본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기도 했고, 시종일관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걸 보니 본능적으로 뭔가를 감지한 모양이니까. 그런 건 가르친다고 길러지는 게 아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여러분.”
사샤의 정중한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블랙 스완이 이륙하기 시작했다.
유림은 쏜살같이 멀어지는 흑조를 바라보며 메리의 장갑을 움켜쥐었다. 함께 창공을 올려다보던 드레이크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거의 군용기 급으로 잽싸군요. 얼핏 보니 껍데기도 철갑이던데요. 25구경 기관총으로 쏴도 끄떡없을 듯해 보였습니다. 거의 실전 군용기에 옷만 입혀 놓은 자가용 수준이지 않습니까?”
“밧세바!”
유림의 목소리에 지팡이를 짚은 밧세바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리는 뭐 저런 거 없나? 철갑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가시 모드 정도는 장착된 수준이면 좋겠는데?”
“에어쉽 말입니까?”
“그래. 참고로 난 빨강이 좋아. 저런 거무칙칙한 색 말고.”
밧세바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유림을 쳐다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어차피 불가시 모드로 있을 건데 색이 무슨 소용인지요?”
“어차피 남들은 보지도 못할 속옷 색깔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이치 아니겠어? 어쨌든 난 빨강이 좋다고! 케이한테 시키면 되잖아? 뭐든 십 분 내로 뚝딱 해치우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이 녀석은 대체 어디 간 거야?”
밧세바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 짚더니 빈 웃음을 터뜨렸다.
“그 참, 이렇게 될 줄 아셨던 건지. 중사님은 소위님의 행동 패턴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가 보군요.”
“무슨 소리야?”
“따라 오시지요.”
좀 전에 메리와 있던 A 연구동의 옥상이었다.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가로질러 가니 에어쉽 착륙지가 눈에 띄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는 불가시 모드로 대기 중인 에어쉽이 뚜껑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빨간색이네?”
유림의 입꼬리가 배시시 말려 올라갔다. 마음에 쏙 든다는 표정이었다. 에어쉽에 올라타자마자 영상 통화가 이루어졌다.
─ 유림.
“어디야, 케이?”
화질이 좋지 않았다. 노이즈도 있는 게 전파 방해를 받는 것 같은데, 폐쇄 도시라서 그런가?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지기를 반복하는 케이의 모습 뒤로 보이는 영상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 십 분 안에 돌아가려 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게 됐어요.
“그니까 어디냐고?”
─ 형무소요.
유림이 말을 멈칫 멈췄다. 그녀는 잠시 흔들리는 동공에 초점을 맞추더니 불길한 낌새를 눈치채고 물었다.
“설마 그 폭발, 네가 한 짓은 아니겠지?”
─ 아쉽게도 한발 늦었어요. 블랙 호크는 이미 탈출하고 없었거든요.
유림은 당황한 채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냥 던져 본 질문이었데, 진짜 케이가 한 짓이라고?
─ 탈옥한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으니 완전히 놓친 건 아닐지도 몰라요. 지금 낙원 전체를 스캔 중이니까 이것만 하고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평소와 다르게 케이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짜증이 배어 있는 톤이었다. 누가 보면 호크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난 줄 알겠다. 혹은 제가 구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인가?
‘케이가 대령님을 이렇게까지 생각했었나? 독단적으로 구출하러 갈 만큼?’
유림은 스스로도 황당한지 웃었다. 누가 봐도 호의보다는 적개심을 내보이던 케이였다. 그녀와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받아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그가 호크를 좋아하지 않는 건 확실했다. 이제 와서 제 지휘관이 되었다고 갑자기 의리를 지킬 녀석도 아닌데 무슨 심보지? 게다가 저렇게 요란한 방식이라니, 평소의 케이답지 않았다. 아니면 슬슬 교육의 효과가 나타나는 건가? 저렇게 화끈한 방식은 영락없는 유림 그녀의 스타일이었다.
“혹시 그 목 잘린 안드로이드를 데려가셨습니까?”
옆에서 조용히 듣던 밧세바가 난데없이 끼어들며 물었다. 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 데리고 오긴 했는데 중간 어디에 떨어뜨린 것 같군. 옆에서 쉼 없이 떠들어 대니 시끄러워서 말이지.
옆에서 듣고 있던 웁실론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좀 전까지 그녀들은 유림의 명으로 유령의 군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휙 지나간다 싶더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눈치채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녀들 앞에는 소녀만 남고 사회자의 목은 사라진 채였다. 여자들은 유림에게 책잡힐까 봐 두려운 표정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반나절 넘게 유림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은 ‘브루클린의 성녀의 성질은 아주 지랄 맞다’였다.
“그 안드로이드는 이번 테러를 일으킨 용의자의 꼬리이자, 대령님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야. 그걸 네 멋대로 가져가더니 심지어 중간에 떨어뜨렸다고?”
─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유림의 말대로 이 녀석은 배후의 꼬리에 불과하니, 꼬리를 끊고 도망가기 전에 잡아당겨서 몸통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케이의 표정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평소처럼 생긋 웃으며 태연하게 말하고 있군. 유림은 팔짱을 끼며 위협조로 말했다.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 유림은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내 말은 안 들을 거죠?
“지금 누구보고 오라 가라야? 요즘 아예 상관이 누군지 잊은 모양인데 이왕 그렇게 밖에 꺼내 놓은 간덩이 아예 발목에 한번 차고 다녀 보지그래? 하루도 지나지 않아 터진 축구공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줄 테니.”
─ 왜요?
“내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찰 거라서.”
케이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에 유림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바짝 졸라고 협박한 건데, 되레 귀엽다는 듯 웃는 건 뭐지?
─ 어쨌든 눈에 띄지 않게 와요. 그거 주인 있는 에어쉽이라 격추당하면 잔소리 듣거든요.
“잔소리? 누구한테?”
─ 있어요, 잔소리꾼. 그리고 내가 갈 때까지 절대 에어쉽에서 내리지 말 것. 이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해요. 알았죠?
“지금 또 누구한테 명령을…….”
다정한 목소리로 당부하던 케이는 유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신을 뚝 끊어 버렸다. 유림은 황당한 얼굴로 앞을 빤히 쳐다보았다. 와, 이게 점점 가관이네? 만나면 어떤 벌을 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짜릿할 정도로 분노가 일었다.
“오, 이거 브루클린의 성녀 피규어 초콜릿 아닌가요? 에어쉽 주인이 소위님 팬인가 보네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던 드레이크는 초콜릿을 좌우로 돌려보더니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드레이크의 옆 좌석에 올라탄 나츠는 눈치를 살피며 주머니의 총을 움켜쥐었다. 유림은 턱을 괸 채 밖을 내다보았다. 언짢은 기색이 그녀의 이마에 핏줄로 살짝 도드라져 있었다. 에어쉽에 착석한 밧세바는 오베론의 군주를 무릎에 앉혔다. 나츠와 눈이 마주친 오베론의 군주는 아랫입술을 물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불가시 모드로 변형한 에어쉽은 바람처럼 날아 모래의 도시로 향했다.
【집무관의 보고】
평의회 전용 대회의실.
현재 접속한 의원 수 아홉 명, 긴급회의 중.
말발굽 형태의 테이블에는 속속들이 ‘접속’ 시그널이 켜졌다. 홀로그램 모습의 평의원들은 저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채 등장했다.
테이블 중심의 상석에는 우리야가 앉았다.
“다들 모래의 도시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듣고 오셨으리라 믿습니다.”
모래의 도시는 낙원의 남서쪽 절벽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스티아벤의 본부가 있는 만큼 철저하게 요새화된 도시다. 모래의 도시는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나선형으로 층층이 이어져 있는데, 잠수정이 드나드는 심해 최하층에는 델타 수용소와 범법자들을 구금하는 특별 형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폭발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이곳 특별 형무소였다.
여성 안드로이드 집무관은 군청색에 은색 단추가 달린 제복을 입고 짤막한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현재 사망자는 다섯 명, 부상자는 열한 명입니다. 이 중 중상자가 세 명, 나머지는 경미한 부상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모래의 도시 특성상, 집계되지 않은 고스트들 중에서도 피해자 수가 상당할 거라 예상됩니다. 형무소의 피해는 약 97퍼센트로 사실상 완전 괴멸된 상태입니다. 폭발 원인에 관해서는 현재 조사 중인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폭발 시 발생된 에너지는 엘로힘과 흡사한 에너지원으로 판독되었습니다.”
“엘로힘?”
“연맹군 정보국 측 연구 자료실에 등록된 내용으로 조약에 의해 우리 측은 검색만 가능합니다. 내용 열람은 ROU 정보국에 협조 요청이 필요합니다. 요청하시겠습니까?”
“일단 보류하지. 용의자 판독은?”
“죄송합니다. 용의자 정보는 아직 수집된 게 없습니다.”
“미사일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폭탄에 다리가 달려서 혼자 걸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용의자 정보가 없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모래의 도시 하층부는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곳입니다. 관리자 집무실로 보고된 내용 외에, 저희 집무관들이 보고받은 내용에는 아직까지 용의자에 관한 사항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노아 호크는 어찌 됐나?”
집무관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안드로이드 주제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우리야의 평소 패턴 분석 결과에 따른 행동이었다. 약 5초 정도 뜸을 들인 뒤 대답하는 편이 우리야의 화를 덜 산다는 걸 아는 것이다. 물론, 대답이 부정적일 경우에 한에서였지만.
“설마 탈출한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만.”
“송구합니다.”
우리야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힘줄이 선 이마를 짚더니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 공중 정원의 피해 내역은 좀 어떻습니까?
“공중 정원의 부유 시스템은 현재 복구 중에 있으나 전체 파손율이 칠십 퍼센트가 넘습니다. 현재 위즈덤으로부터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있습니다.”
─ 위즈덤이라면 스타시티 산하의 안드로이드 회사 말입니까? 왜 그들이 보고를 합니까?
홍보부의 클라크 장관이 못마땅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다른 평의원들도 동의하는지 웅성거림을 얹었다. 최근 기억의 도시에서 수입을 올리고 있는 위즈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수면 밑에서 힘을 실어 주는 분위기였다. 잠시 지켜보던 우리야는 묵직한 음성으로 잡음을 눌렀다.
“위즈덤의 수장 솔로몬은 이제 우리의 친구이고, 동료이고, 파트너입니다. 테러 당시 위즈덤의 구조 작업이 낙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번 테러 용의자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를 한 인물도 솔로몬이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는 낙원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개발한 병기형 안드로이드 오백 기를 로스티아벤에 무상으로 공급하겠다고 약조까지 했죠.”
홀로그램에 비친 평의원들의 표정이 저마다 굳었다. 그들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교환하는 이들의 눈빛에는 불신의 씨앗이 남아 있었다.
─ 세르게이 총사령관, 이번 상황 대처에 있어 거리낌 없이 손을 내준 위즈덤에게는 우리 모두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자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죠. 우리는 솔로몬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대제국 스타시티의 후계자라는 소문만 돌 뿐,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혹시 총사령관님은 실제로 그를 만나 본 적이 있는 겁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금의 바벨탑 솔로몬은 사리사욕에 영혼을 판 장사치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낙원의 동료이고 파트너라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중앙으로 나온 집무관이 파란색 홀로그램 보고서를 펼쳤다.
“또 뭔가?”
“델타 수용소의 격벽이 파손되어 델타들 중 일부가 수용소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특별 형무소와 마찬가지로 모래의 도시 최하층에 위치한 델타 수용소.
세계 각지로 파견된 STF가 생포해 온 델타들이 구금된 장소였다. 비공식적인 집계지만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는 델타의 숫자만 오십여 마리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 델타가 수용소 밖으로 탈출했다고요?
─ 맙소사, 또 말입니까?
─ 몇 마리나 나온 겁니까?
이성을 잃은 의원들은 두려움에 언성을 높였다.
“아직 모래의 도시 밖까지 나간 것 같진 않습니다만, 현재 정확한 확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민 피해는?”
“모래의 도시 하층부는 일반 주민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야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되물었다.
“모래의 도시 하층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고스트들의 거주지가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인명 피해가 꽤 클 거라 예상됩니다.”
“고스트들은 낙원의 주민도 아닌데 뭣 하러 신경 쓰나?”
냉정하게 뱉은 우리야의 말에 의원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암, 고스트들은 말 그대로 유령이다. 낙원의 그늘 속을 떠도는 덧없는 존재들일 뿐, 그들이 아무리 많이 죽어도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테러의 배후가 오베론임이 밝혀진 마당에 고스트들이 형무소 폭발 건과 무관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의원님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같은 의견입니다.
“이참에 낙원의 골칫덩이들을 모두 처리하도록 하죠. 몰아세울 명분도 있고, 좋은 기회입니다.”
─ 모두 처리요? 하지만 그건…….
“관리자께서도 이미 승인하신 일입니다.”
다들 놀랐는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걱정되는지 서로를 살피며 헛기침을 해 댔다.
고스트들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낙원에 있어선 필요악적인 존재였다. 곧은 성목에도 굽은 가지는 존재하는 법. 완벽한 낙원조차도 빛이 비추는 한 그늘이 없을 수는 없다. 낙원의 주민이라고 검은 욕망이 없겠는가? 모두가 바라는 이상향이란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고, 고스트들이야말로 그에 있어선 적임자였다.
─ 그런데 델타들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델타에게 물린 고스트들이 델타로 변이하는 것도 곤란하지 않습니까?
“특보대가 나가 있습니다. 필란 중위에게 연결해 보게.”
집무관은 “예.” 하고 대답하더니 허공에 특별보안대의 로고인 ‘SSF’를 띄웠다. 지구본처럼 원 안에서 파랗게 돌아가는 로고를 보며 의원들은 긴장한 눈빛을 지었다. 그때 집무관이 돌아서더니 목례와 함께 다시 보고했다.
“죄송합니다.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연결할 수가 없다니?”
“모래의 도시 하층부에 통신 자체가 연결되지 않습니다. 형무소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현재 불가능합니다. 시스템 오류인 것 같습니다.”
─ 그럼 탈출한 델타들의 상황도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겁니까?
─ 현재 나가 있는 특보대와 STF 요원들은 델타가 탈출한 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 아닙니까?
우리야는 잇새로 욕설을 뱉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짙은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야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평의원들도 불길한 눈빛을 지으며 몇 달 전의 악몽 같았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입 용병들을 뽑기 위해 열었던 입대 테스트. 그곳에 난입했던 델타들과 먹통이 되었던 상황실. 이후 진입한 STF 요원들이 속속히 발견했던 훈련병들의 시신들.
그때의 위급했던 상황 속에서 길을 뚫어 준 것은 브루클린의 성녀와 블랙 호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더 이상 그들 수중에 없었다.
“제가 가도록 하죠.”
─ 총사령관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럼 여러분들께서 가 주실 겁니까?”
우리야가 쏘아붙이며 되묻자 평의원들은 말문이 막힌 채 시선을 회피했다. 다들 몸을 일으킨 우리야를 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서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호크 대령도, 브루클린의 성녀도 없는 이 상황 속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이제 우리야밖에 없었다.
“제가 함께 가 드리도록 하죠, 세르게이 총사령관님.”
나긋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정적에 파문을 던졌다. 회의실 상석에 앉아 있던 우리야는 놀란 얼굴로 입구를 쳐다보았다. 개폐된 문 사이로 한 남자가 입장하고 있었다. 남자가 입은 갈색 군복은 로스티아벤의 제복이 아니었다. 밝은 금발에 맞춰 제작한 듯 조화롭게 어울리는 군복의 왼팔 상단에는 금장과 함께 낯익은 마크가 박혀 있었다.
두 개의 머리를 한 황금 독수리. 쌍두독수리는 한쪽 발톱에 칼을, 다른 한쪽 발톱에는 올리브 가지를 쥔 채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국제 연맹국 산하의 군대인 연맹군의 문장이다. 두 개의 독수리 머리는 각각 연맹군의 전략국과 정보국을 상징했고, 칼과 올리브 가지는 무력과 평화를 뜻했다.
접속 중이던 다른 의원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검은 화면 뒤로 사라졌다. 냉큼 모습을 감춘 의원들은 예정에 없던 방문객의 얼굴을 보고선 소스라치게 놀라며 술렁였다.
─ 당신은…….
─ 이곳에는 어쩐 일로…….
남자의 군복 가슴에 붙은 별 두 개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는 정갈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리야 옆에 섰다. 그리고 모습을 감췄지만 회의실을 보고 있을 의원들을 향해 인사말을 올리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연맹군 전략국 내 작전부 산하 남태평양전대 총사령관인 마이클 밀러 중령이라고 합니다. 낙원의 평의회 의원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좀 전에 로스트 헤븐 내에서 2차 테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력을 드리고자 급히 걸음을 했습니다만, 결례를 범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을 가린 의원들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내부에서 여전히 영상 회의 중이던 의원들은 저자가 무슨 꿍꿍이냐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침묵 속에서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밀러는 곁눈질로 흘끔 우리야를 응시했다. 중요한 건 의장인 그의 의중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밀러 중령님.”
우리야는 선뜻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를 청했다. 밀러도 선한 웃음으로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나누도록 하죠. 상황이 꽤 시급합니다.”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상황이 이러니 인사는 다음에 다시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들은 괘념치 말라며 친절하게 응답했다.
─ 저희는 괜찮습니다.
─ 두 분 다 무사히 귀환하시길 기원합니다.
─ 두 분께 이브의 가호가 있기를.
돌아서던 밀러의 걸음이 멈칫 멈췄다. 그는 입가에 기분 좋은 곡선을 띄우며 나직이 말했다.
“이브의 가호라……. 듣기 좋군요. 고맙습니다.”
두 남자가 퇴장하자 의원들은 다시 테이블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언짢은 표정을 주고받았다. 난감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한숨을 쉬며 쉽게 접속을 끊지 못했다.
로스티아벤의 노련한 호랑이와 연맹군의 젊은 독수리의 만남이라니! 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불안감이 회의실 내를 압도했다.
─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너무 마음 졸이지 맙시다.
─ 그렇습니다. 그럼 여러분들, 총사령관님께서 귀환하시면 다시 뵙도록 하지요.
─ 그럽시다.
이곳은 로스트 헤븐이다. 세계 최고의 용병 부대와 기술력을 지닌 유일무이한 낙원.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는 믿음이 그들 가슴속에 내심 자리하고 있었다.
서로의 불안감을 잠식하듯 위안을 주고받던 의원들은 차례차례 접속을 해제했다. 큰일은 없을 것이다. 늘 그러했듯 이브의 가호가 낙원을 지켜 줄지니.
한편 모래의 도시 최하층에 위치한 특별 형무소 앞은 무거운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현장은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처참했다. 셰인은 터널처럼 구멍이 뻥 뚫려 있는 형무소 입구를 보며 할 말을 잃은 듯 서 있었다. 형무소 입구는 ‘T’ 자 형태의 레일로드를 통해서 들어가는데, 에어쉽 승강장부터 이어진 레일로드는 죄수만 올려놓으면 알아서 움직여 형무소 내부까지 연행한다. 레일로드를 덮는 강화유리는 용의자가 도주를 시도할 시 전기 쇼크를 가하게끔 되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입구가 박살 났다면 레일로드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레일로드는 중간이 뚝 끊긴 채 꺾여 있었다. 지진이나 태풍을 맞은 것처럼 지면이 내려앉은 채였다.
“호크 대령은 이미 탈주를 한 듯합니다.”
“그런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던 셰인의 눈가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델타 수용소와 앞뒤로 나란히 붙어 있는 특별 형무소는 낙원 내에서 에덴 타워 S관과 맞먹는 수준의 보안 등급을 자랑한다. 무기는커녕 몸에 작은 철못 하나도 지니지 못했을 호크 대령이 어떻게 이런 구멍을 내고 유유히 탈출했을까?
모래의 도시는 중앙이 비행로이기 때문에 뻥 뚫린 나선형으로 지하 깊숙이 지어진 도시였다. 때문에 비행로에 등록된 에어쉽이나 나사처럼 이어진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화이트 캡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도시 내를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다.
깔때기처럼 아래로 좁혀지는 모래의 도시에는 지상과 연결된 상층부와 잠수정이 있는 해수 밑 하층부 외에도, 중층부라 불리는 미들 타운이 존재했다. 미들 타운은 낙원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지역으로 미궁처럼 미완성 지대였다. 그곳은 개미굴처럼 연결된 범법자들의 소굴인데 왓슨의 눈이 닿지 않아 STF의 특수부대원들조차 순찰하기를 꺼렸다.
얼마 전 도박 경기가 이루어진 화이트 채플도 바로 고스트들의 주거지인 미들 타운에 있었다. 낙원의 고스트들 대부분은 이곳 미들 타운에 숨어 지냈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하층부 가까이까지 내려와 형무소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불법 개조 에어쉽들에 올라탄 그들은 낄낄거리며 박수를 쳐 댔다. 아무래도 폭발이 일어난 사고 현장을 구경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개중 몇몇은 당당하게도 훔친 화이트 캡을 하층부까지 몰고 와 그 안에서 술을 마시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바득 간 셰인은 조용히 대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특보대가 앞으로 나오자 함께 온 STF 요원들은 조용히 총을 잡았다. 셰인은 내부 통신을 켜고 읊조리듯 말했다.
─ 스네이크1이 전 대원들에게. 지금부터 눈에 보이는 고스트들을 무작위로 사냥한다. 대항하는 녀석들은 사살해도 좋다는 평의회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아군의 등만 빼놓고는 마음대로 갈겨도 좋다. 다들 알겠지만 이 녀석들은 어제 일어난 공중 정원 테러를 일으킨 녀석들과 한패고, 형무소를 깨부순 범인들도 저들 사이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감히 로스티아벤을 우습게 보고 낙원을 어지럽히는 녀석들에게 질서를 가르쳐 주도록.
─ 예, 중위님.
─ Roger, Sir.
멀찍이서 구경하던 고스트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굳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셰인 부대와 STF 요원들을 바라보았다. 터널처럼 구멍 나 있는 형무소 앞에 특수요원들이 일제히 그들에게 총구를 겨눈 채 서 있었다.
─ 격발!
셰인이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탕탕!’ 하고 총성이 발포되기 시작했다.
“으아악! STF의 공격이다!”
“피, 피해!”
겁먹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어쉽 뚜껑 위에 올라타서 맥주를 마시던 고스트들은 화들짝 놀라 우왕좌왕 창문 사이로 몸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꽁지 빠지게 날아가는 에어쉽들을 보던 셰인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활짝 열려 있던 중앙 비행로의 덮개가 사방에서 닫히며 하늘을 덮었다. 상공이 막히자 당황한 고스트들의 에어쉽들은 비행로를 차단한 격벽 주위를 맴돌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뒤를 따라붙은 특별보안대 소속 에어쉽은 고스트들의 에어쉽들을 겨냥했다. 그리고 그들의 엔진을 향해 기관총을 ‘투다다다!’ 쏘아대기 시작했다.
쾅!
하나둘씩 격추당한 에어쉽 속에서 고스트들은 발 빠르게 비상 탈출을 감행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폭발과 함께 화염 속에 갇혀 “아악!”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하지만 에어쉽에서 빠져나온 고스트들이라고 무사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특보대와 함께 온 STF 요원들에 의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선두로 선 셰인은 총구를 겨눈 채 나직이 물었다.
“형무소에 테러를 한 게 누구냐? 너희들 전부가 함께한 짓인가?”
“우리는 그냥 폭발 소리를 듣고 구경 왔을 뿐이다! 네놈들이 무능한 걸 가지고 엄한 사람들한테 덮어씌우지 마!”
탕!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소리치던 남자가 털썩 쓰러졌다. 남자의 부릅뜬 눈 사이 미간에 박힌 총탄 자국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옆에 서 있던 자들의 얼굴에는 삽시간에 두려움이 어렸다.
“무능? 뻔뻔하게 잡아떼고 있는 것들이 누군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로스티아벤 로고가 박힌 총자루를 쥔 셰인은 대원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양팔에 문신을 한 거구의 남자를 향해 총구를 다시 겨누었다.
“형무소를 저렇게 만든 게 너냐?”
“아, 아닙니다. 나는 모, 모르는…….”
탕!
그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옆으로 쿵 쓰러졌다. 마찬가지로 이마 정중앙에 총탄이 박힌 채였다.
정적이 내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에어쉽 엔진 폭발 소리 외에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셰인은 피식 웃더니 총자루를 손 안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스무 명 남짓의 고스트들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모르는 일이라고? 너희 고스트들이 전부 한패라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아? 오베론이 한 짓은 곧 너희 고스트들 모두의 뜻이라는 걸 어린애들도 안다. 여기서 너희 전부를 죽여도 뉴스에는 한 줄 기삿거리도 되지 않을 거야. 그런 존재야, 너희들은.”
셰인은 총구를 다시 들었다. 고스트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숨소리를 죽이자, 그는 더욱 희열에 찬 얼굴로 거만하게 웃었다. 이 순간이 좋았다. 그가 최전방이 아닌 낙원 특보대에 머무는 것도 바로 이런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전율 때문이었다. 겁먹은 표정,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 그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쾌감.
“중위님! 이것 좀 보십시오!”
토니 코즈메의 목소리였다. 형무소 내부를 조사하기 위해 진입했던 그는 안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급히 뛰어나오고 있었다. 토니가 공중 높이 든 구체를 확인한 셰인은 총구를 거두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한창 즐기고 있던 순간을 방해받은 그의 눈빛이 언짢은 기색으로 물들었다.
“뭐야, 사람 목을 들고 나온 거야?”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 같습니다.”
그는 목만 떨어져 나온 안드로이드의 머리통을 허공에 흔들며 말했다. 셰인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소란을 피웠다는 듯 퉁명스럽게 명했다.
“형무소에서 쓰던 서기관이나 헌병 중 하나겠지. 에어쉽에 가서 실어 놔.”
“형무소 소속 안드로이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얼굴을 한번 자세히 봐 보십시오. 좀 낯이 익지 않습니까?”
토니가 갸웃거리며 묻자 셰인은 그제야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유심히 살피던 사이,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토니는 무릎을 탁 치듯 깨달음에 소리쳤다.
“아, 기억났습니다! 어제 저녁 이브의 생일 파티에서 사회를 보던 남자 아닙니까?”
결국 제 놈이 자문자답할 거였으면서 뭘 자세히 봐 달라는 건지. 눈을 흘기던 셰인은 토니로부터 사회자의 목을 받아 들었다.
양쪽 눈알 중 하나는 어디 갔는지 안구째 빠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그을린 상태였다. 잘린 목에서 흘러나온 수액이 굳어 회로를 막았다. 그나마 남은 외눈 하나마저 불빛이 껌뻑껌뻑하는 게 조만간 방전될 기세였다.
“네놈이 왜 형무소에 있던 거냐?”
셰인을 본 사회자는 한쪽이 찢어진 입술을 열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대상, 인식, 셰인, 필란, 중위. 특별, 보안대, 소속. 특별, 수사대, 소속, 정, 유림, 소위에게, 심한, 열등감을, 품고, 있다.”
“뭐, 무슨…… 이게 지금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얼굴이 붉어진 셰인이 주먹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어깨 너머로 STF 요원들과 SSF 부대원들의 모습을 확인한 사회자의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었다. 그는 입에서 수액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로스티아벤 특수부대 STF, SSF 요원들 포착.”
안드로이드이면서 인간보다도 더 유려한 말솜씨를 자랑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오십 년 전 모델처럼 기계적으로 말을 내뱉는 모습에 토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스템에 에러라도 난 건가?
입가에 수액을 잔뜩 쏟아 낸 사회자는 눈에서 붉은 광선을 뿜어내더니 비뚤어진 턱을 끌어당겨 입을 벌렸다.
“회색 기사단은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또박또박 말하자, 셰인은 흠칫한 눈으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러는 동안 사회자는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회색 기사단은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 회색 기사단은 눈앞의 적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셰인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사회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입 닥쳐!”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
“주, 중위님! 저기 좀 보십시오.”
잔재 속에서 잿빛 코트를 입은 남자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투명한 공기 속에서 점차 윤곽을 그리며 또렷해졌다. 흡사 불가시 모드였던 에어쉽이 등장할 때 같았다.
회색옷의 남자들은 머리에 후드를 쓴 채 무리를 지어 원을 그렸다. 셰인은 주춤거리며 총을 꺼냈다.
“물러서!”
“5초 안에 멈추지 않으면 발포한다.”
토니와 데이비드도 각자 총을 들고 위협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럼에도 후드를 쓴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그들을 향해 가까이 걸어왔다. 토니는 그들이 걸친 옷을 바라보더니 두려움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회색 기사단인가?”
“일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스트들이 따르는 조직 오베론의 수장, 유령의 군주를 보필하는 녀석들이 있다고요. 모래의 도시 내 질서를 관장하는 실력가들인데 늘 잿빛 코트를 입고 다녀서 회색 기사단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토니의 옆에서 총을 쥐고 있던 데이비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오베론이 배후에 있었군. 긴장할 것 없다. 상대는 겨우 다섯이야.”
특보대 뒤에 대기하던 STF 요원 수십 명들은 셰인의 말에 “예!” 하고 대답했다. 반면 기사단을 본 고스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이제 살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리석네. 항상 생각하지만 특보대 녀석들은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약해 빠진 주제에.”
불가시 모드로 형무소 위 상공에 떠 있는 에어쉽에서는 한심하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림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혀를 찼다. 도대체가 훈련은 제대로 하는 건지, 자동조준 기능이 없는 총이라도 쥐여 주었다간 허공에 총탄을 갈기다가 비명횡사할 운명들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셰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실력이 없진 않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자각도 책임감도 없는 녀석이었다. 왈패 떼처럼 어깨에 힘이나 실어 준다고 소속 대원들을 챙겨 주는 게 아닌데. 총자루를 쥔 골목대장처럼 애들 사탕이나 뺏고 보람을 느끼는 소인배다. 정치 놀음하겠다고 의원들 뒤치다꺼리나 하더니, 결국 그 안일함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녀, 녀석들 움직임이 마치 델타 같습니다!”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중위님!”
특보대원들은 숨이 차오르는지 헐떡이며 외쳤다. 셰인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정면을 향해 총을 쏴 갈겼다.
‘피슉’ 하고 바닥에 튕겨진 탄약을 본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빛이 나는 검으로 총탄을 받아친 회색 기사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초, 총탄이 통하지 않는데 어떡해야 합니까?”
이미 2소대의 STF 요원들은 절반 이상이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불과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중위님!”
서로의 등을 붙이고 모인 특보대원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총을 움켜쥐었다. 셰인은 포위를 한 채 좁혀 오는 회색 기사단을 보며 코너에 몰린 채 창백한 입술을 깨물었다.
“저러다 진짜 죽겠는데? 이쯤에서 적당히 그만하지?”
유림은 밧세바의 무릎에 앉아 있는 유령의 군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유림은 쯧쯧대며 혀를 찼다.
“저 정도 하면 저 바보 일당도 알아서 꽁무니를 뺄 거야.”
그래도 일단은 낙원 제일의 용병이라는 STF 요원들인데 저렇게 수세에 몰린 걸 보니, 역시 회색 기사단은 우습게 볼 대상이 아니었다.
유림은 문득 화이트 채플에서 그녀를 구해 줬던 회색 기사를 떠올렸다. 바람을 밟듯 순식간에 이동하던 몸짓, 서늘한 시선에 맺힌 붉은 눈.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에어쉽 문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천천히 하강하는 에어쉽 아래로 레일로드가 보였다. 무덤처럼 하얀 돔 형식이었던 형무소 건물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붕괴했고, 그와 이어진 레일로드는 중간이 덜렁 끊어져 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유림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에어쉽 밖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 무슨 낌새가…….”
끼갸갸갹! 키아악!
“소위님!”
벌떡 일어선 드레이크가 유림의 팔을 황급히 잡아당겼다. 뒤로 자빠진 유림은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허공을 가로지르듯 점프한 델타가 울부짖으며 에어쉽 문밖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모래의 도시 최하층부 전역에 울려 퍼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고스트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혼백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델타다!”
“델타가 나타났다!”
다리에 힘이 풀린 고스트들은 겁에 질린 채 사방팔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특보대와 회색 기사단 역시 재빨리 흩어졌다.
셰인은 황망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행로는 격벽에 의해 차단된 상태였다. 거대한 철문이 조리개처럼 물린 채 닫혀 있는 게 보였다. 델타가 나타난 이상 전투보다는 탈출이 시급했다. 데이비드가 눈치를 살피며 셰인에게 속삭였다.
“중위님, 서둘러 격벽 해제를 요청해 주십시오.”
“불가능해.”
“예?”
“요청을 해도 열리지가 않는다고! 사령 본부와 평의회 쪽 통신도 끊겼어.”
“그, 그럼 어떻게 합니…… 크아악!”
되묻던 데이비드가 비명을 지르며 양팔을 휘저었다. 등 뒤에서 덮쳐 온 델타가 그의 어깨에 올라탄 채 머리를 덥석 물어뜯고 있었다. 쩍 벌어진 입으로 머리통을 뜯어낸 델타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빨을 드러내며 질겅질겅 살점을 씹었다. 육즙을 쭉쭉대며 맛본 그녀는 잔여물을 퉤 뱉었다. 미역처럼 엉킨 머리칼이 피와 살점에 섞여 바닥에 오물처럼 흩어졌다.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던 데이비드는 잘려 나간 머리 단면을 더듬더듬 손으로 짚었다. 그는 피로 흥건한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더니 흐느끼며 셰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주, 중위님 살려 주세…….”
네발로 뛰어오던 델타 한 마리가 그의 어깨를 물고선 몸을 흔들었다. 델타가 포효하며 날뛰자 데이비드의 몸은 종이 인형처럼 허공에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바닥과 무너진 석재에 부딪친 몸은 ‘우드득!’ 하고 뼈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데이비드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끄아악! 주, 중위님!”
셰인은 얼어붙은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눈에 핏대가 오른 데이비드는 팔을 허우적대며 그를 향해 울부짖었다. 셰인은 목이 멘 채 울음을 터뜨렸다.
“데, 데이비드…….”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데이비드는 팔다리 관절이 기이하게 꺾인 채 셰인의 발 앞에 쓰러졌다. 사과 한 입을 베어 문 것처럼 푹 파인 그의 머리통에서는 뇌수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괴물…….”
셰인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돌아섰다. 그는 에어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그런 그의 앞을 회색 기사들이 바람처럼 날아와 가로막았다. 셰인은 일순 그들이 안드로이드라는 것도 잊은 채 울분을 터뜨렸다.
“야, 이 새끼들아!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야? 저것들부터 처치해야 할 거 아니야! 너희 동료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데 나랑 체력 소모해서 어쩌려고? 고스트들이야말로 네 녀석들이 지켜야 할 놈들 아니었어?”
갈래갈래 쉰 목소리로 호소해 봤지만 회색 기사들의 움직임에 변화는 없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셰인에게 칼끝을 겨누며 다가왔다. 셰인은 충혈된 눈으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여기서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유림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대체 지금 뭐하자는 거야? 지금 우리가 서로 대치하고 총을 겨눌 때야?”
그녀는 비난조로 유령의 군주를 몰아붙였다. 유령의 군주는 그녀의 힐책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밧세바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그녀는 소공녀 인형처럼 얌전했다.
“당장 네 친위기사들에게 명해서 미들 타운 주민들부터 보호하라고 해. 기사단이라면 델타와 비등하게 전투할 능력이 될 테니까.”
“난 못해. 회색 기사들은 수장인 기사단장의 명만 따른단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오베론의 리더잖아. 기사단장인지 뭔지 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거 아니야?”
“그거와는 별개의 문제야.”
유림은 기가 막힌 얼굴로 잠시 오베론의 군주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나약한 어조로 읊조렸다.
“나도 답답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곁눈질로 시선을 든 그녀는 정면에 앉은 나츠와 드레이크 쪽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기사단장뿐이야.”
유림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걸 대장으로 두고 있으니 다 죽어 나가지. 지 친위대 하나도 못 다루면서 모래의 도시의 질서를 주관해? 여기저기서 뒤통수나 맞고 다니는 주제에 왜 네 무능력함 때문에 죄 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건데?”
소녀는 입을 꼭 다문 눈으로 고개를 숙일 뿐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짜증을 낸 유림은 홱 돌아섰다. 시야에 피범벅이 되어 산 채로 물어뜯기고 있는 병사들과 고스트들이 들어왔다.
“소위님, 뭐하시는 겁니까?”
“내려가야지. 여기서 손가락만 빨며 구경할 텐가?”
유림이 어깨를 잡아 세우는 드레이크의 팔을 뿌리치며 쏘아붙였다. 망설임 하나 없는 그녀의 눈빛엔 살벌한 기운이 흘렀다. 드레이크는 주춤거리며 손을 놓았다.
“안 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드레이크는 호흡을 내쉬며 나직이 말했다.
“소위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겁니다.”
“어머나, 침실까지 따라올 기세네?”
그가 당황한 얼굴로 멈칫하자 유림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서늘하던 그녀의 눈초리에 장난기가 섞였다. 전투가 놀이처럼 즐거운 듯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하강하는 에어쉽 문 앞에 선 유림은 뛰어내릴 자세로 몸을 낮추었다. 그때 나츠가 그녀의 곁에 다가와 팔을 잡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소위님.”
“넌 됐으니까 여기 남아서 엄호하도록.”
“아닙니다. 제가 자초한 일이니 제가 끝을 맺겠습니다.”
“자초? 그게 무슨 소리야?”
나츠는 불안한 눈초리로 앉아 있는 유령의 군주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가 괴로운 듯 고개를 돌리자 그의 입가에 미세한 곡선이 어렸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늘 하던 대로 하고 오겠습니다.”
유림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나츠는 이를 드러내고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애덤슨 중사님께서 소위님은 에어쉽에 계시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사실 소위님보다 중사님이 훨씬 더 무섭거든요.”
나츠는 누가 만류하기 전에 비상 탈출용 낙하산을 펼치며 뛰어내렸다. 뒤늦게 허공으로 팔을 뻗은 유림은 황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케이 못지않게 운동신경이 꽝인 녀석인데 저런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난 건지.
자칫 발을 잘못 디뎌 발목을 삐끗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기 무섭게 지상에서 몸을 굴려 착지하는 나츠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도 데굴데굴 굴러 레일로드에 잘 착지했다. 바닥을 짚은 그는 재빨리 무릎을 털고 일어나 내달리기 시작했다.
유림과 함께 에어쉽 밖을 내다보던 드레이크는 유령의 군주를 쳐다보았다. 안색이 아주 창백했다. 그는 잠시 턱을 긁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네 이름이 유메?”
“그걸 어떻게…….”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유메라면 나츠처럼 일본식 이름인 것 같은데, 그쪽 이름은 무슨 뜻이야?”
유림은 갑자기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흘끗 쳐다보았다.
“유메는 꿈이란 뜻이지요.”
조용히 앉아 있던 밧세바가 대신 대답했다. 무릎 위에 있던 유메가 동요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나츠는 여름, 유메는 꿈. 한여름 밤의 꿈처럼 서로 어울리는 이름이랍니다.”
밧세바의 설명에 유림의 눈빛이 굳었다. 일전 화이트 채플 잠입 때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암호는?
─ 낙원의 여름…… 오베론의 꿈.
유메는 죄인처럼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유림은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랬지. 넌 기사단을 움직일 수 없다고, 그건 기사단장의 권한이라고.”
유메는 침묵 어린 눈빛으로 답했다. 각오를 한 듯 순순한 태도였다. 그러나 꺼질 듯한 불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아까부터 에어쉽 밖을 흘끗거리는 그녀의 불안한 시선에는 저곳에 나가 있는 누군가를 걱정하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회색 기사단 제자리에.”
밖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에 모두들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목했다. 미풍에 퍼지듯 스며든 속삭임은 여리면서도 강단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밖을 쳐다본 유림의 눈도 커졌다. 기사단 전원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채 동상처럼 서 있었다.
“지금부터 기사단은 단장의 명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각자 위치로.”
제자리에 대기하던 회색 기사들이 양팔과 두 다리를 척 모았다. 그리고 중앙으로 모여 발맞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 자리엔 방금 전 레일로드로 뛰어내렸던 소년이 서 있었다.
‘나츠…….’
모든 게 다 꽝이었지만 저격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아이. 공중 정원에서 관리자를 향해 포탄을 쏜 건 아군의 에어쉽이었다.
─ 제가 자초한 일이니, 제가 끝을 맺겠습니다.
유림의 눈동자가 파동을 그리며 흔들렸다. 무슨 우여곡절이 있어서 저 어린 나이에 용병이 된 건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맑아 보이는 소년의 눈동자에 모든 물음표를 지웠다.
─ 그런데 두 사람은 이곳까지 어떻게 찾아온 거야? 미궁에서 길을 찾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 나츠 녀석이 한쪽 손으로 벽을 짚더니, 벽 짚은 손을 따라 신기하게도 길을 척척 찾아내지 뭡니까? 그야말로 미궁의 아리아드네 공주와 다름없었죠.
─ 아,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 눈을 감고도 길을 훤히 찾는데 도저히 초행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치 제집 앞마당처럼 수없이 들락거려 본 듯한……
─ 들락거리다니요? 출입구도 없는 미궁을 제가 어떻게 알고 와 본단 말입니까?
─ 그 정도로 놀랍다는 거지. 하여간 나츠 덕에 유령의 군주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소위님께서 미리 휩쓸어 놓은 상태라 수월했던 거지만요.
─ 진짜 우연이었습니다. 오베론과 마주칠 줄 알았다면 다른 길로 갔을 거예요. 거기서 그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유림의 눈길이 다시 유메에게로 향했다. 심술보가 가득해 보였던 소녀의 눈초리는 초조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지옥의 용병 부대라 불리는 로스티아벤에 오는 이들의 가슴속에 검은 웅덩이 하나쯤은 다 있는 법이다.
유림은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나츠, 네 웅덩이가 이거였니?
“회색 기사들은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인간들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지킨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델타는 모두 섬멸한다.”
얇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회색 기사들의 꺼진 눈동자에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다. 나츠의 눈동자도 그들과 공명하듯 비장한 기색을 품었다.
“드레이크, 우리도 내려가자.”
유림은 브루클린의 성녀 피규어 초콜릿을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말했다. 의무감에 채운 당분 보충이었지만 달콤한 초콜릿 향에 한결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
나츠 일은 잠시 잊어버리자. 일단은 이 상황을 정돈하는 게 우선이다. 유림은 스트레칭을 하듯 허리를 굽혔다. 어깨와 가슴을 유연하게 펴면서 에어쉽 밖으로 상체를 쭉 내밀었다. 드레이크는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중사님께서 소위님은 이곳에 꼼짝 말고 계시라고 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케이라면 어차피 내 성격상 이 시점쯤 움직일 걸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유림은 고양이 같은 눈초리를 휘며 붉은 입술에 생긋 미소를 그렸다. 드레이크는 얼굴을 바짝 붙이고 이야기하는 유림에게서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유림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기분 좋게 웃던 그녀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웠다. 그 모습에 드레이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 보니 그녀는 애덤슨 중사가 없어서 지루한 모양이었다. 평소 데리고 놀던 장난감이 없으니 자신을 대신 놀려먹고 있는 것이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비로소 평소 케이가 느꼈을 고충을 통감했다. 그녀의 유혹에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가는 순식간에 병신 취급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악마처럼 못된 구석이 있는 유림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보니 그간 유림을 능숙하게 다루던 케이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드레이크는 새삼 그에 대한 존경심이 솟구쳐 올랐다.
“셰인 녀석이 정말 싫기는 한데,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좀 가혹한 것 같지?”
중얼거린 유림은 팔을 펼치며 뛰어내렸다. 공중에서 꽃송이가 춤을 추듯 아름다웠다. 그녀는 몸을 가볍게 뒤집은 뒤 지상 위에 날렵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지면에 발을 대자마자 셰인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소위님, 잠깐…….”
드레이크는 유림의 뒤로 경주마처럼 따라붙는 델타를 발견했다. 그는 재빨리 총구를 겨눴다. “끼에엑!” 하고 울부짖는 델타의 복부는 납작했다. 임신했을 가능성은 일 퍼센트 남짓인가? 미안하다. 짧게 사죄를 읊조린 드레이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한숨과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탕!
머리 위에서 울린 총소리에 유림은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델타의 목덜미에 정확히 총탄을 맞춘 드레이크가 뒤따라 지상에 착지하고 있었다.
셰인을 발견한 유림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녀는 막 그를 덮치고 있던 델타의 목을 향해 칼날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어깨에 올라타 양다리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다른 한 검은 이미 델타의 목구멍 안쪽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있던 셰인이 놀라서 외쳤다.
“저, 정 소위?”
“필란 중위님, 거기 자빠져 누워서 뭘 하고 계십니까? 이런 곳에서 일광욕을 즐기시다가는 순식간에 골로 가십니다.”
유림은 생긋 웃으며 델타의 몸을 밟고 양손으로 칼을 쑥 뽑아냈다. 칼이 뽑히자 델타는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괴수가 된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반쯤 눈을 감은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셰인은 바닥에 떨어뜨린 총을 더듬더듬 찾았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쥐새끼가 나타나면 고양이가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잽싸게 엉덩이 들고 일어나시죠. 여긴 훈련소가 아니고 실전입니다. 전장에서 숨 돌리다가는 바로 죽습니다.”
따끔한 일침에 그의 얼굴은 민망함으로 일그러졌다. 이죽거리는 유림의 눈초리가 밉상이었다. 아니, 그보다 망신살이 뻗쳐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총을 쏠 거면 턱 밑 목덜미나 목구멍 안쪽을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 다른 곳은 총탄이 제대로 박히지도 않을 테니까요. 빔건55) 정도는 쏴야 먹히는 수준의 갑옷이거든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이론을 습지하고 있어도 강제 일광욕을 당하기 십상인 게 실전이죠. 그대로 관속까지 직행하고 싶지 않다면 자만하지 마십시오.”
유림의 입가에 맺힌 서늘한 웃음에서 한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녀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델타와 숱하게 대치해 봤다는 유림조차도 숨소리를 죽이는 모습에 셰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탈출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남은 델타들과 접전을 벌일 것인가?’
유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셰인이 비록 동네 왈패처럼 군다 해도 실력까지 어설픈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은 되니까 특보대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엄호하던 드레이크는 다른 곳에서 접전 중인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나츠는 약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회색 기사들과 함께 전투 중이었다. STF 요원들은 거의 전멸 상태. 남은 건 나츠와 기사단이 보호하고 있는 고스트들뿐이다.
‘케이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왓슨에게 명해서 차단된 비행로라도 열어 줘야 탈출을 할 게 아닌가? 이렇게 광활한 곳에서 델타와 싸우는 건 좋은 전략이 아니다. 일대일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저들이 떼로 몰려오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그녀일지라도 끝장이었다.
“정 소위,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 녀석들 수용소에서 탈출한 것 같은데 숫자가 점점 늘고 있어. 특보대 대원은 나까지 셋밖에 남지 않았어. 회색 기사들은 넷인 것 같고.”
“다섯입니다.”
주위를 확인한 유림이 정정했다. 셰인은 그럴 리 없다는 눈으로 다시 숫자를 세었다. 원래 다섯이었던 기사들 중 하나가 아까 델타 떼거리에 의해 쓰러지는 걸 봤는데 다섯이라니? 고스트들을 보호하며 전투를 벌이는 회색 기사들의 숫자를 세던 셰인의 눈에 한 명의 기사가 더 들어왔다.
잿빛 코트를 입은 남자는 델타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다른 회색 기사들과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아슬아슬하게 접전을 벌이는 기사들과 달리,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적당히 떼어 놓고 있었다. 발목이나 물고 늘어지는 강아지를 처치하듯 너무나 손쉬워 보였다. 상대는 델타였다. 총탄도 칼날도 쉽게 뚫을 수 없는 갑주와 강철도 씹어 먹는 엄니의 괴물인데.
셰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의문의 회색 기사는 낑낑거리며 바닥에 엎어진 델타의 머리통을 축구공처럼 뻥 걷어찼다. 그러고는 이쪽을 향해 유유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온다.’
셰인은 고개를 홱 돌려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막 달려든 델타 하나와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회색 기사는 깊숙이 뒤집어쓴 후드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유림이 인정하는 그의 유일한 장기가, 한 번 본 상대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관찰력과 직관력은 꽤 인정해 줄 만했다. 남들을 괴롭히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불한당이어서 그렇지 제 심기에 거슬리는 놈들은 어디에 숨든 족집게처럼 찾아내곤 했다.
그런 셰인이 처참하게 굴욕을 당하고 두 번이나 놓쳤던 상대의 움직임을 잊었을 리 만무했다. 우아하지만 무자비한 공격과 순식간에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는 능력까지.
‘저 녀석…….’
셰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구겼다. 그때 목 잘린 사회자가 눈을 벌겋게 번쩍이며 입을 벌렸다.
─ 돌발 상황 발생. 빠르게 접근하는 열원 감지, 폭격 후 이어질 충격과 2차 피해에 대비하십시오. 3초, 2초…….
그의 목구멍에서 딱딱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사회자의 목을 지키고 있던 나츠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는 황급히 격벽으로 차단된 비행로 쪽을 올려다보았다.
콰쾅!
천둥이 치듯 귀청을 흔드는 우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르르르!
비행로를 덮고 있던 격벽에서 잔재가 부딪치며 무너지는 소음이 뒤따랐다. 폭파 충격에 의해 지면은 파도를 타듯 거세게 흔들렸다. 기역 자로 꺾여 있던 T레일로드는 도미노처럼 바닥 타일을 으그러뜨리며 지면 아래 더 깊숙이 파묻혔다.
“소위님!”
나츠의 부름에 유림은 비행로의 격벽을 쳐다보았다. 파괴된 격벽 사이로 수십 개의 에어쉽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셰인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저건 블랙 팬서 아니야? 총사령관님의 직속 부대인?”
“저것들이 미쳤나!”
유림은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지상에 아군인 특보대와 STF 요원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격벽을 폭파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성처럼 떨어지는 돌무더기들 사이로 꽥 소리를 내며 깔려 죽는 델타들이 보였다. 이대로는 병사들도, 델타도, 고스트들도 다 개죽음을 당할 판국이었다.
반딧불처럼 속속히 날아드는 에어쉽들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유림의 눈이 얼어붙었다.
‘아크레인?’
푸른 삼각형에 황금색 돛이 날개를 달고 있는 문양의 은색 음속비행정. 그녀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헤벨의 아크레인이었다.
“정 소위, 위험해!”
셰인이 유림의 팔을 잡더니 확 끌어당겼다. 뒤로 넘어지는 유림의 코앞으로 거대한 격벽 덩어리가 쿵 떨어졌다. 지면에 부딪친 부스러기가 뺨을 향해 튀어 오르자 유림은 멍한 얼굴로 따끔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뭐하는 거야? 넋 놓으면 골로 간다고 훈수 두던 게 누군데!”
유림은 셰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한쪽 눈두덩 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위님, 괜찮은 겁니까? 머리에서 피가…….”
“됐으니까 일단 피하자.”
두 사람은 형무소 건물로 뛰었다. 그쪽은 델타가 튀어나오는 방향이었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격벽 잔재들을 맞고 즉사하는 것보단 낫다는 판단이었다.
“사령 본부로부터 미리 연락을 못 받은 겁니까?”
“받기는 뭘 받아! 통신이 아예 먹통이었는데.”
블랙 팬서 부대를 이끌고 나타난 선두의 에어쉽, 저건 틀림없는 세르게이 총사령관의 것이었다.
가까스로 건물 안쪽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었다. 셰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상공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 소위, 저것 좀 봐.”
블랙 팬서의 에어쉽들이 차례차례 폭발하며 허공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알림】
본기의 자폭 시스템이 가동되었습니다.
이 기체는 곧 폭발합니다.
비상 탈출 모드를 실행하시겠습니까?
우리야는 먹먹한 귓바퀴를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펑펑 터지던 폭발음 사이로 서둘러 비상 탈출을 한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직도 귓전에서 ‘삐’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먼지와 재로 따가운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 광경은 참혹했다. 격벽에서 떨어진 잔재들이 유성처럼 추락해 지상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그 밑에 깔린 병사들의 시체와 델타의 사체가 보였다. 타닥거리며 불붙은 채 굴러다니는 에어쉽들 대부분은 블랙 팬서의 것이었다.
“우리야 세르게이.”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의 발 앞에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든 우리야는 먼지와 연기로 뿌연 시야 속에서 총자루를 움켜쥐었다.
“누구…… 아, 회색 기사인가?”
그는 다행이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잿빛 코트의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아름다운 자세로 곧게 팔을 들었다.
“엘 카인에게 안부를 전해 주겠나?”
귓가에 나직이 스며든 음성의 끝에 옅은 웃음이 배어 있었다. 군모를 벗은 우리야는 묘한 분위기의 남자를 홀린 듯 쳐다보았다.
“안부?”
남자는 조각 같은 입술에 해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등골에 오싹한 한기가 스미는 게 느껴졌다. 정체불명의 기사가 턱을 살짝 들자 뒤집어쓴 후드 아래 붉은 동공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우리야의 눈이 커진 채 얼어붙었다. 그 순간, 푹 하고 흉부를 관통한 무언가에 그의 허리가 휘청거리며 꺾였다.
“크헉…….”
비명을 토한 입술 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야는 부들거리는 얼굴로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을 향해 일직선으로 펼쳐진 남자의 팔이 보였다. 순식간에 창처럼 꿰뚫고 들어온 손은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을…….”
생긋 웃은 남자는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펄떡펄떡 뛰던 심장이 주먹 쥔 손안에서 물주머니 터지듯 파열되며 쪼그라들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우리야는 “커헉!” 숨소리를 내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덜덜 떠는 아랫입술과 핏줄이 선 채 충혈된 눈자위만이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에게 보낼 선물로는 안성맞춤이군.”
정체불명의 기사는 피 묻은 손을 옷에 닦으며 후드를 벗었다. 바닥에 쓰러진 우리야는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천연덕스럽게 생긋 웃는 얼굴이 누군가를 떠올리게끔 했다. 특유의 소름 끼치는 분위기,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인간성을 상실한 잔혹한 눈동자.
“엘은 유독 이런 걸 좋아하거든.”
동족상잔은 금기, 그리하여 그들은 권속을 이용한 전쟁을 벌인다.
우리야는 분노에 찬 눈으로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버텼다. 그러나 그의 동공은 이미 빛과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생명의 불길이 힘없이 꺼지자 버티고 버티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알림】
전투복 내 바이탈 사인 정지.
우리야 세르게이, 심장 파열로 사망.
즉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충격을 주었는데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엘 카인에게 있어 이자는 단순한 심복 그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 확실했다.
우리야의 시신을 뒤로한 채 케이는 산뜻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혈향이 코끝에 감돌아서인지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에 먹물을 떨어뜨리듯 파동을 일으키자 눈동자 색이 어둡게 섞이기 시작했다.
웅얼거리는 바람 소리에 묻어 어디선가 톡톡 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즈덤이 배후라고요, 위즈덤의 솔로몬! 왜 자꾸 애꿎은 절 체포하시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겁니까?”
가시 돋은 말투에 짜증이 배어 있는 것이 영락없는 유림이었다. 그의 입매가 저절로 곡선을 그리며 반응을 했다.
“지금 네 말을 믿으란 거야? 위즈덤이 미치지 않는 이상 자기 앞마당인 기억의 도시와 공중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냐고!”
“두 눈으로 증거를 직접 봐 놓고도 못 믿겠다고 하니 별수가 없네.”
“너 지금 나한테 말 놓냐?”
“혼자 중얼거린 겁니다만? 목 잘린 안드로이드가 회색 기사단에게 명령하는 모습을 봐 놓고도 그러시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오베론과 고스트들이 설마 스스로 저런 병기형 안드로이드들을 생산했겠습니까? 숟가락 들어 떠 먹여 줘도 삼키질 못하는 아이에게는 답답해서 수저를 거두는 법입니다.”
혀를 찬 유림은 부라린 눈초리로 쏘아붙였다. 셰인은 인상을 쓰며 “아오, 이걸 그냥!” 하고 허공에서 주먹만 움켜쥐었다.
논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유림은 줄곧 찾고 있던 케이의 흔적을 뒤쫓았다.
“이 자식은 또 어디에 졸도해 있는 거야? 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더니…….”
말로는 성질을 바락바락 내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조바심이 가득했다. 곳곳에 보이는 건 조각난 시체와 델타의 사체뿐이었다.
드레이크와 나츠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전투 때도 보이지 않던 케이인지라 저번처럼 몸을 잘 숨기고 있지 않을까 했지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 찾았어요?”
달콤한 목소리가 바로 옆 귓가에서 속삭인 것처럼 들려왔다. 심장이 쿵쾅 뛰었다. 유림은 호흡도 잊은 채 돌아섰다.
바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그가 서 있었다. 느른하게 휜 눈초리 아래 조각 같은 입매에는 해사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불안과 걱정에 일렁이던 유림의 눈동자에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케이!”
그녀가 소리치며 달려오자 그는 얼떨결에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놀랐잖아! 이번에야말로 어디 혼자 가서 개죽음당한 줄로만 알고…….”
“개죽음이요? 설마요, 난 불사…….”
“시끄러워.”
케이는 쿡쿡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뺨에 쪽 하고 닿는 입술에 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녹아들 듯한 눈웃음을 그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광쟁이 유림, 심술쟁이 유림, 변덕쟁이 유림. 그녀는 이 모든 모습들이 전부 다 사랑스럽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안대 속을 한 번만 보자며 괜히 또 거즈를 긁어 보던 케이는 유림이 당황하며 신경질을 내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몸을 재빨리 다시 잡았다.
“잘못했어요, 가지 마요.”
“거즈 건들지 마.”
케이는 알았다며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살그머니 입술을 삼키던 그는 점차 격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이 붉게 부어올라도 멈출 생각을 않자, 유림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속삭였다.
“그만해, 필란 중위가 보잖아.”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키스를 하던 케이의 눈길이 그제야 셰인을 발견했다. 못마땅한 표정의 셰인을 본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 유림을 보면서 미소가 끊이지 않던 그의 눈초리가 불쾌한 기색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죽을 줄 알았는데 잘도 살아 있네?”
셰인이 비아냥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케이를 보는 그의 표정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케이는 고개를 홱 외면하며 진노를 다스렸다. 일순 이성을 잃고 흘린 살기가 동공에 붉은 색채로 일렁이고 있었다. 호흡으로 진정시킨 그는 평소처럼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했다.
“유림.”
“왜?”
건성으로 대답한 그녀는 셰인과 케이 사이에 오가는 긴장 따위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내가 없을 땐 다른 남자한테 빈틈 보이지 마요.”
“빈틈? 내가 언제?”
“좀 전에요.”
격벽이 무너져 내릴 때 유림의 팔을 잡아당겨서 안던 셰인의 모습이 떠오르자, 케이는 살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화가 나서 예정에 없던 짓까지 해 버렸잖아요.”
그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눈초리에 애써 미소를 담고 말했다. 유림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림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보이고 싶다. 그녀가 이런 잔혹한 면모를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영원히 모르기를 바라는 바람이 더 크기는 했지만. 이율배반적인 마음의 충돌, 그 갈등의 교착점이 어디가 될지 본인도 궁금해지는 중이었다.
케이는 코트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감추며 옷을 벗었다. 물론 화가 났던 이유는 연기처럼 자취를 감춰 버린 노아 때문이었지만, 유림을 안던 셰인의 행동이 성난 감정에 기름을 부은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유림에게 상당히 미쳐 있거든요. 절제의 귀재인 내가 이성을 잃을 정도면…… 그건 정말 위험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거예요.”
케이가 유림의 어깨에 뺨을 묻으며 속삭였다. 그녀의 쇄골에 쪽 입을 맞춘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보다 진한 소유욕을 과시하는 그의 행동에 유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위험한데?”
케이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구보다도 관능적인 그녀는 때때로 허탈할 정도로 순수했다. 사실 그녀는 본인의 욕망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상대에게 한껏 불을 붙여 놓고서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물에 적셔 버리는 방식으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게 수컷에게 있어 얼마나 자극적이고 위험한 도발인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유림에게 입술을 맞출 듯 턱을 잡던 케이는 나른한 숨결에 젖은 눈빛을 허공에 떨어뜨렸다.
그녀가 순수한 짐승처럼 뭐가 위험하냐고 묻는다.
그는 좀 전에 무자비한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우리야를 잠시 동정했다. 물론 단순한 화풀이 대상으로만 삼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결국 그리될 운명이었다. 다만 그게 굳이 오늘이었을 필요는 없었지만.
셰인 필란 또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셰인의 사지를 절단 낸 채 뼈까지 갈아서 골백번도 더 도륙을 내 놓은 상태였다. 척추 뼈를 부수고 갈비뼈를 떼어 낸 뒤 허파를 쥐어짜고 두개골을 부쉈다.
“유림은 몰라도 돼요.”
달콤하게 웃는 케이의 눈웃음에 유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음직스럽게 젖은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베어 물듯 삼키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만 좀 하지?”
보다 못한 셰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러다가 여기서 몸도 나눌 기세였다. 유림은 피식 웃더니 케이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들이대는 남자는 홀랑 벗겨서 과녁에 꽂아 고자를 만든다는 전설의 브루클린의 성녀가 남자 앞에서 이렇게 애교를 부리다니. 셰인은 내심 그녀에게 실망했다는 눈초리를 감추지 못했다.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셰인을 보며 케이는 ‘역시 죽일까?’라는 생각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케이, 회색 기사단 옷은 왜 입고 있던 거야?”
“아, 이거요? 그냥 위장용이에요.”
유림의 물음에 케이는 별거 아니란 표정을 짓더니 화염에 휩싸인 에어쉽 잔재 속으로 코트를 휙 던졌다. 유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어갔지만 셰인의 눈초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케이가 던진 피 묻은 기사단 옷이 불 속에서 타오르는 걸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전투 내내 또 어디 숨어 있었지?”
“다 끝나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죠. 걱정했어요?”
슬며시 묻는 케이의 목소리에 유림은 눈을 흘겼다. 빤히 알면서 꼭 저렇게 육성으로 듣자고 묻는 건지.
“그러고 보니 델타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죄다 도망을 간 건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한두 마리 정도는 남아서 낑낑대고 있을 법도 한데, 모조리 사라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명령을 받고 일제히 철수한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정 소위, 저기 블랙 팬서의 대원들 아니야?”
삼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아남은 병사들이 머뭇거리며 모여들고 있었다. 맞는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인 유림의 눈빛이 일렁였다. 분위기가 어째 묘하다. 대원들이 크게 당황한 듯 어수선한 기색이었다.
“가 보죠.”
폭파된 에어쉽 잔재들이 고약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지나니 연기가 확 걷히고 시야가 맑아졌다. 황량한 공기 속에 위화감이 감돌고 있었다. 원을 그린 채 모여 있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충격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유림과 셰인은 동시에 놀란 표정으로 굳었다.
“초, 총사령관님?”
우리야가 처참한 모습으로 숨진 채 누워 있었다. 셰인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시신의 왼쪽 가슴인 심장 부위는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심상치 않은 술렁임이 일면서 주변 병사들이 양 갈래로 갈라졌다. 그들이 터 준 길로 제복을 입은 연맹군의 장교들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금발의 남자는 등장하자마자 주위 장병들을 압도하며 입을 열었다.
“본 작전에 투입된 부대의 지휘관, 혹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까?”
그의 다급한 눈초리는 순식간에 주변을 훑더니 셰인 필란의 앞에서 멈췄다. 로스티아벤 소속 병사들의 시선이 은연중에 그에게로 쏠린 것을 읽어 낸 것이다. 셰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스티아벤 특별보안대 소속 셰인 필란 중위입니다. 연맹군 쪽에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연맹군의 전략국 작전부 소속 마이클 밀러 중령입니다. 낙원 내 2차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르게이 총사령관과 함께 이쪽으로 출동했습니다만.”
밀러는 우리야의 시신을 보더니 말끝을 흐렸다. 얼핏 봐도 델타의 공격에 의한 죽음은 아니었다.
누군가 소란을 틈타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을 살해했다. 그리고 이건 연맹군 입장에서도 매우 불편한 사건이었다. 하필 자신들이 낙원에 들어와 로스티아벤과 공동 작전을 펼친 시점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으니, 자칫 성급하게 움직였다가는 괜한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발을 빼면 책임 회피를 하는 걸로 보일 수 있다. 밀러로서는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었다.
“중령님, 제이콥스 대위님으로부터 온 통신입니다.”
부관의 말에 밀러는 스마트 워치의 통신 버튼을 눌렀다. 헤벨의 제갈량, 요한 제이콥스 대위였다. 그는 밀러가 가장 신임하는 충복으로서 함장인 밀러가 부재할 시에는 요한이 실질적인 헤벨의 1인자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이지?”
─ 상황에 대해 간략히 보고받았습니다. 일단 귀환하십시오. 현재 장교들과 함께 대책을 논하는 중입니다. 이 사건은 연맹군과 낙원 사이의 관계 악화를 노린 누군가가 놓은 덫일 수도 있습니다.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 알았다.”
─ 조심히 귀환하십시오.
통신을 종료한 밀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셰인을 향해 돌아서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단 저희는 함정으로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의회는 아직 사태에 대해 듣지 못했을 테니 필란 중위도 귀환해서 보고부터 올리는 게 우선일 듯싶습니다. 이 사건은 전적으로 로스티아벤 내부의 일입니다. 따라서 저희 연맹군은 개입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밀러 중령님과 중령님의 부대 또한 현장에 있었으니 사건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일단은 말씀하신대로 함정에 귀환하도록 하십시오. 저희 쪽에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언론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연맹군 측에도 각별한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밀러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며 커졌다. 돌아서는 셰인의 어깨 너머로 보인 인영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굴에 얼룩덜룩 재가 묻은 유림이 건너편에서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뛰더니 뜨거운 숨이 목구멍까지 ‘훅’ 달아올랐다. 밀러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간신히 멈춘 채 제복을 움켜쥐었다. 턱 밑까지 올라온 목소리가 하마터면 새어 나올 뻔했다.
‘유림…….’
유림의 한쪽 눈에 붙은 안대를 본 그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유림은 짐짓 밝게 웃었다. 염려하지 말라는 듯 입 모양으로 ‘밀러!’ 하고 비밀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눈치챈 케이는 눈초리에 불쾌한 기색을 그렸다. 짠할 정도로 애틋한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의 입가에는 살벌한 미소가 번졌다.
‘이것 봐라?’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세상 어느 오빠가 여동생을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겠는가? 저건 누가 봐도 좋아 죽는 여자를 다시 만나 감격에 겨워하는 표정이다.
유림을 향해 행복한 미소를 전하던 밀러는 아까부터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시선에 주위를 훑었다. 멀리 볼 것도 없었다. 살촉 같은 눈초리의 주인공은 유림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남자는 아까부터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햇살이 스민 듯한 옅은 머리칼에 오묘한 빛의 눈동자. 조각상처럼 또렷하고 반듯한 이목구비는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모를 기품과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섬세한 외모지만 눈빛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이랄까, 혹은 너른 어깨선과 뼈대에서 느껴지는 선 때문인지 약해 보이기는커녕 섬뜩한 위화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파스텔 톤의 하늘과 불덩어리 같은 노을, 혹은 심해의 바다를 동시에 품고 있는 남자.
그는 밀러와 눈이 마주치자 보란 듯이 입가에 곡선을 머금었다. 건방지고 오만방자한 눈빛으로 웃은 케이는 팔을 뻗더니 유림의 허리를 천천히, 그리고 깊게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본 밀러의 입매가 경직되었다. 지중해 바다색처럼 선하던 눈동자가 움찔하더니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밀러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치솟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는 물끄러미 케이를 쳐다보았다. 못 본 사이, 나의 고양이에게 점수를 따 놓은 녀석이 생겼을 줄이야.
“중령님?”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셰인이 말을 건넸다. 번뜩 이성을 되찾은 밀러가 돌아서며 옅게 웃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 우리야의 시신을 쳐다보았다. 셰인은 착잡한 눈빛을 지었다. 밀러는 예를 차리기 위해 잠시 묵념하며 곁눈질로 케이를 다시 노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약 올리듯 생글거리며 유림을 끌어안는 그의 손을 말이었다.
“아주 불쾌한 선전포고를 했군요.”
“예?”
셰인이 의아하게 묻자 밀러는 케이의 손을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세르게이 총사령관을 살해한 범인 말입니다.”
다들 안타까움에 젖은 채 수군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살벌한 눈빛과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애써 돌린 밀러는 유림과 케이를 향해 마지막으로 시선을 던졌다. 케이는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야의 시신을 비스듬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감흥 없는 눈빛에 잠겨 있었다.
한편 유림은 밀러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저 반갑고 좋은 기색으로 가득 찬 채 두더지처럼 요리조리 고개를 내밀며 미소를 보이기 바빴다. 그런 유림을 보자 금세 마음이 풀어진 밀러는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그새 둘이 또 눈빛을 교환하는 걸 눈치챈 케이가 유림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불렀다.
“유림.”
“왜?”
“그만 웃어요.”
“뭐?”
다음 대사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었을 말인데, 정작 질투심에 눈이 돌아갈 것 같은 상황이 되니 분노로 머리가 하얘진다.
“예뻐서 참기가 힘들어요.”
“그럼 참지…….”
농담으로 받아치던 유림은 케이가 순식간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가져오자, 놀라서 후다닥 몸을 뒤로 젖혔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입을 맞출 듯 다가오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미쳐 있다고 말했잖아요. 미친놈에게는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그는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유림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요즘 들어 케이의 말 한마디에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건지.
‘저런 미친놈을 좋아하는 나는 뭐지?’
그사이 아크레인을 향해 걷기 시작한 밀러의 표정이 서늘했다. 늘 온화한 얼굴의 함장이 드물게 언짢아 보이는 기색이자, 장병들은 긴장한 태도로 몸을 더욱 꼿꼿이 펴고 다리를 붙였다. 아크레인에 올라탄 밀러는 밖에 정렬한 장병들을 향해 외쳤다.
“전원, 헤벨로 귀환한다!”
“Yes, S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