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lude 2
초승달에 걸터앉은 소년은 밤하늘을 접어 종이배를 띄우듯 하늘을 걸어 다녔다.
우주를 달리는 기차.
달빛을 깔아 놓은 뱃길.
노를 젓는 안개.
소년은 환상을 펼쳐 놓는 것에 능숙했다. 그리고 그것에 현혹된 인간은 반드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소년의 첫 실험작은 실체 없는 마약이었다. 원리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 실제 모티브가 된 약물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것은 뇌에 치명적인 교란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좀 더 정교하고 거대한 시스템을 짜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도시였으며 철학이었고, 종교이자 병기였고, 또한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굴러 가는 작은 지구본의 축소판이었다.
로스트 헤븐 속에서 인간은 우주의 작은 먼지처럼 정처 없이 부유하는 존재일 뿐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늙은 별의 숨결 속에 흡수되어 결국 소멸하고 마는 덧없는 삶.
그가 빚어낸 모든 것들은 거대한 이상향의 허구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낙원을 향해 왓슨 3세가 조율하는 환영 속에서 허우적대며 신의 은총을 갈구했다.
남자는 사실 분간되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이 끝나지 않은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문득 시야를 덮쳐 오는 지난날의 기억이 전기 충격처럼 찌릿한 두통을 안겨 줄 때면, 그는 그제야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걸 깨달았다.
아담.
천재 물리학자였던 페트로비치마저 절망하게 만들었던 아이. 소년은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신처럼 입자와 광자의 세계를 가지고 놀았다.
소년이 원하던 건 오직 하나였다.
이브.
그녀는 그의 뼈와 살이었고 생명이었고 삶이었고 존재의 기록이었다.
지구를 맴도는 달처럼 소년은 오직 소녀의 주위를 돌며 공전했다. 소녀는 파도였다. 그녀는 끌어안았다가 풀기를 반복하며 그를 적시고 축여 주었다.
소녀를 잃은 소년은 충족되지 않는 갈증에 허덕이며 몸부림 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싹 메마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건조해져 버렸다. 껍질만 남은 고목나무는 버석버석한 호흡만 하며 신음을 흘렸다.
세상은 곧 사막이 될 거다.
널 잃은 대지는 모든 생명력을 소진하게 될 테니까.
소년은 텅 빈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과학자는 두려움에 몸을 오스스 떨었다.
이 모든 것은 드리밍 플라워가 보여 주는 악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도 공포에 비명을 지르며 탈출구 없는 환영 속에서 발버둥을 쳤다.
─ 만약 배신하면…… 아저씨가 탄 배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하게 될 거예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이던 소년의 경고는 그것 자체로 가혹한 고통의 낙인이 되었다. 모든 것이 파도에 휩쓸려 잊혀 가는데,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남아 괴로움을 지폈다.
─ 어쩌겠습니까? 죽어도 좋다는데, 끓어오르는 호기심과 소유욕을 참을 수가 없다는데.
밀랍 날개로 원 없이 날아오르다 추락한 이카로스처럼, 인간이란 본디 제 욕망에 살해당하는 존재다.
죽은 채 살아가는 지옥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은 낙원이 배출하는 배설물이다. 그는 낙원의 똥구멍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지독한 악몽은 낙원의 숨이 다하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테지.
과연 그 마지막을 지켜보는 날이 오기는 할까?
Chapter 1
2100년 3월 7일 오전 00시 12분 무렵
폐쇄 도시 내 A 연구동
“너 페, 페트로비치 박사의 딸이지?”
유림은 리 박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더니 눈이 가려운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올렸다. 그녀가 또다시 눈두덩을 문지르려 하자 리 박사는 냉큼 손을 잡았다.
“만지면 안 돼.”
“페트로비치가 누군데? 아, 왜 이렇게 간지러운 거야?”
그는 유림이 앉아 있는 수술대에 달린 거울을 내려 주었다. 거울을 바라본 유림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확히 말하면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서였다.
그녀는 일단 수술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리 박사의 어깨를 잡더니 벽 쪽으로 세게 밀어붙였다.
“이 망할 돌팔이가! 내 눈에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유림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소리치자 리 박사는 “읍! 읍!” 하고 고개를 저었다.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유림은 그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여기는 어디고?”
“여, 여기? 모, 몰라! 사, 살려 주세요.”
그는 유림의 손을 잡더니 애원하듯 울먹였다. 유림은 벌레를 떼어 내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 리 박사는 덜덜 떨며 손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고선 누군가와 대화하듯 중얼거렸다. 1인 2역처럼 홀로 주고받는 말이었다.
“말하지 않았어, 아무한테도……. 제, 제우스를 봤어? 아, 아니 몰라, 나, 나는 아무것도 몰라! 제, 제우스와 세멜레 이야기 알아? 모, 몰라. 말하지 않았어.”
유림은 몇 초간 그를 응시하더니 인상을 쓰며 팔을 풀었다.
‘정신이 나갔군.’
그녀가 팔을 풀자마자 리 박사는 머리를 부여잡더니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눈알만 빼꼼 굴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델타에게 물린 상처 부위를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통증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더럽게 아프다.
“이거 당신이 꿰맨 거야?”
그녀는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는 리 박사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초점 안 맞는 눈으로 이를 딱딱거렸다.
‘완전 돌았네. 바늘이라도 넣고 꿰맨 건 아니겠지? 뭐 저런 또라이한테 수술을…….’
케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유림은 굳게 닫힌 수술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서 리 박사가 말을 건넸다.
“걱정 마. 너는 감염되지 않아. 이미 우리가 수, 수없이 여러 번 델타의 피를 주입해 봤거든.”
“뭐? 언제?”
“오, 오래전에.”
유림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미치광이 녀석의 말 따위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괜히 사람 불안해지게.
“당신 나 알아?”
묘했다. 눈앞에 있는 미치광이 의사의 눈이 점차 또렷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이 방금 전보다 훨씬 명료하고 맑다. 유림은 팔짱을 끼고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겁먹은 다람쥐처럼 고개만 내밀고 있던 박사는 생각에 잠긴 채 답했다.
“페, 페트로비치 박사랑 나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머뭇거리며 다시 문장을 이었다.
“조금 잘 아는 사이였어.”
“페트로비치 박사가 누군데?”
“네 아버지.”
유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리 박사의 눈초리는 점점 더 날카롭게 변해 갔다.
덩굴처럼 엉켜 있던 머릿속을 누군가 가위로 시원하게 싹둑싹둑 잘라 주는 것 같다. 시원해. 아주 시원하다.
굳은 채 서 있는 여자의 모습도 훨씬 잘 보였다. 안개가 걷힌 머릿속엔 옛 기억이 철길 깔리듯 두루마리처럼 펼쳐졌다.
“너…… 기억 안 나는구나?”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이번에 주도권을 쥔 건 리 박사 쪽이었다. 우위를 선점한 그는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갈피를 못 잡는 유림을 보며 선심을 쓰듯 말했다.
“조이 반즈를 찾아가.”
“조이 반즈?”
“반즈 박사가 모든 걸 알고 있어.”
“뭘 알고 있는데?”
“네가 누군지.”
“내가 누군데?”
“최초의 항체 보유자.”
유림은 스위치가 꺼진 듯한 얼굴로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리 박사는 델타가 물어뜯은 그녀의 상처 부위를 살피더니 불안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다가는 그가 널 찾아낼 거야. 그 눈동자 말이야, 그에게 들켜선 절대 안 돼. 알았어? 보여선 안 된다고. 너,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데…….”
박사는 비틀거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다시 머릿속에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두개골을 품고 뇌를 조이며 미칠 것 같은 두통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열기구처럼 부풀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신종 바이러스의 항체 보유자다? 내가 입실론이란 말이야?”
“입실론은 항체가 없어. 그런 거 없다고.”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리 박사가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었다. 뭐가 웃긴지 혼자 허공에 대고 웃던 그는 갑자기 바닥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리고 지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입실론이 항체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그는 아이처럼 몸을 모으더니 눈을 감았다.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보던 유림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디 감히 브루클린의 성녀 앞에서 등을 돌려?’
그녀는 리 박사의 엉덩이를 향해 ‘퍽’ 하고 발길질을 날렸다. 그러자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엉덩이를 잡으며 “악!” 하고 스프링처럼 벌떡 튀어 올랐다.
“내가 꿀단지처럼 살살거리며 대화해 주니까 우습게 보여? 이 새끼가 빠져 가지고…… 알아서 각 잡고 대기해도 모자랄 판국에 자빠져 잠을 자고 있어?”
“아, 아파…… 자, 잘못했어요.”
그는 대번에 바닥에 정수리를 찧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예리해 보였던 눈초리와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림은 맥 빠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정신병자가 내뱉은 헛소리였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는데.’
오락가락 제정신이 아닌 듯해 보이는 남자. 이 남자가 하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유림은 리 박사가 입은 흰 가운에 박혀 있는 명찰을 응시했다.
「Doctor Lee.」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로스트 헤븐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로스트 헤븐 내부인 건 확실했다. 지하 미궁처럼 폐쇄되거나 감춰진 지역 중에 하나인 걸까? 도시의 옛 연구소에 사는 미치광이 과학자. 그는 어쩌면 로스트 헤븐의 숨겨진 이면을 알고 있는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숨어서 사는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테지.
안쪽의 소란을 들었는지 이중으로 된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문을 억지로 여는지 문짝이 거의 부서질 듯한 소음이었다.
유림은 순식간에 수술대 위 가위를 잡고 벽에 붙었다. 피를 많이 쏟았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면 방금 박사와 나눈 대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유림은 손에 쥔 뾰족한 가위의 끝이 들이닥칠 낯선 이의 안면을 향하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유림?”
다급한 음성의 주인을 알아본 그녀는 황급히 문 쪽을 돌아보았다.
‘케이?’
반가움에 발걸음을 옮기던 눈길도 잠시, 수술대 위에 달린 거울을 본 유림은 머뭇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붉은 구슬처럼 물들어 있는 눈동자. 잠시 분주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수술대 위에 있던 부착용 거즈를 집었다.
강화유리로 된 안쪽 문이 박살 난 건 순식간이었다.
유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케이가 산산조각 난 유리문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다가 유림을 발견한 그는 멈칫하더니 빠르게 걸어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바짝 마른 입술 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을 바짝 졸였는지 케이의 안색이 창백했다. 고개를 든 그는 그녀의 목덜미 상처 부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봉합은 잘된 듯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치료제는?”
케이가 바로 뒤따라온 노파를 곁눈질로 응시하며 물었다.
“변이가 이루어진 델타에게 직접 물린 경우는 치료제도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목덜미나 복부 등의 부위는 감염 속도가 빨라서 말이지요. 이놈들이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데 그사이에 무작위로 변이를 일으킵니다. 잠복기 역시 사람마다 다릅니다. 잠복기인 보균자와의 접촉으로 인해 감염이 된 경우에는 치료제가 듣지만, 일단 변이가 시작되면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백신이 없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유림은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사항이다. 놀랄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측 못했던 것도 아니니까. 사실 수없이 마음의 준비를 해 오지 않았던가? 한번 물리면 끝장이다. 병사들에게도, 그녀 스스로에게도 무수히 던져 왔던 말이었다.
반면 케이의 표정은 절망스러웠다. 그녀는 처참한 얼굴로 서 있는 그를 위로하듯 뺨을 어루만졌다.
“혹시 모르니까 넌 나중에 복용하도록 해.”
“난 상관없어요. 나는…….”
“불사신이라서?”
케이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농담할 기분이 아니란 듯이. 그를 보던 유림은 흐릿하게 웃었다. 자책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런 다정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대담한 그녀라 해도 죽음이 문턱까지 닥친 마당에 여유를 부리는 건 불가능했다.
문득 난장판이 된 출구가 그녀의 시야에 들었다.
부대원이 상관을 닮아 간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기분이 참 거시기했다.
‘그러고 보니 미궁에서 델타를 처치한 것도 케이였지?’
이 녀석에게 이 정도의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 저걸 맨손으로 때려 부쉈나? 이제야 좀 병사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걸까? 유림은 씁쓸하게 웃었다. 능숙하게 총기를 다루고 델타를 쓰러뜨리는 그의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데. 왠지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생각에 잠기던 그녀의 뺨을 케이의 손이 다가와 어루만졌다. 그는 유림이 오른쪽 눈에 붙인 거즈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건 뭐예요?”
“아, 눈두덩에도 상처가 생겼더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거짓말에 심기가 불편했다. 케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유림의 얼굴과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폈지만 눈 주변의 상처는 보지 못했다.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유림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일부러 속이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섣불리 털어놓을 수도 없어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 너 페트로비치 박사의 딸이지?
─ 너는 감염되지 않아.
─ 조이 반즈를 찾아가.
유림과 케이는 각자 사색에 빠진 채 골몰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던 밧세바는 이 틈에 리 박사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아?”
웅크리고 있던 리 박사를 다독이는 밧세바의 모습에 유림은 눈초리를 모았다. 그녀는 날카롭게 그들을 관찰했다. 둘은 꽤 친숙해 보였다. 미치광이 박사와 달리 저 노파는 지극히 정상이다. 유림은 케이만 들리게 중얼거리며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여자는 예전 태양의 도시 소속 입실론이고, 남자는 전 왓슨 그룹 소속 과학자예요.”
“아는 사이야?”
“비슷해요. 상황에 따라선…….”
케이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모른다고 외면할 수도 있는 사이죠.”
필요하다면 제거할 수도 있는 존재.
유림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우리가 연맹군 공작원인 것도 알아?”
“그건 몰라요.”
“저 남자, 부대로 데려가는 게 좋겠어.”
“제정신이 아닌 자예요. 괜한 문젯거리가 될 수도 있어요.”
“가끔 정신이 돌아오는 거 같던데…… 뭔가 수상해. 털면 엄청난 게 나올지도 몰라.”
케이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유림을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 저 남자를 데려가서 심문할 생각을 하다니. 이 여자는 제 목숨, 제 처지는 걱정되지 않는 것일까? 죽음이 코앞까지 들이친 마당이었다. 일 분 일 초가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그야말로 일각을 다투는 시점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고.
하긴, 뼛속까지 군인인 여자다. 이미 죽음 따위는 예전에 각오했을 가능성이 컸다. 로스트 헤븐에 잠입한 순간부터 그녀는 살아나갈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연맹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주저 없이 바칠 여자니까.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 죽지 마라, 중사.
그에게는 그토록 강요했던 삶을, 본인은 명예로운 죽음이란 변명하에 저렇게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홀로 남는 자의 상실감이란 지독히도 끔찍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쪽도 강요해야겠다.
더 이상 죄책감이나 고민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이상은 한계였다.
“뭐, 뭐하는 거야?”
“유림이 원하던 거요.”
케이는 유림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받치더니 그녀의 몸을 가볍게 품에 안아 들었다.
“그게 뭔데?”
그는 저편의 행성처럼 신비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평소 잔잔하던 그의 눈길이 풍랑을 일으키듯 몰아쳤다. 심연 속으로 어두침침한 눈동자를 끌어당기며 시선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뭘 거 같아요?”
유림은 몸을 움츠리며 손끝을 모았다. 그의 서늘한 열기가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짜릿한 느낌과 함께 모골이 송연해진다.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는 유림을 보며 케이의 눈은 더욱더 짙게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혀끝이 입술 사이를 간질이며 들어와 치아를 뿌리까지 건드린다. 입 안쪽을 더듬던 그가 입술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한숨 쉬듯 긴 숨결을 묻혔다.
하아…….
넘어온 열기가 전신을 삼키며 퍼져 나갔다. 유림은 엉덩이 골 안쪽이 찌릿찌릿해지는 걸 느꼈다. 발가락 끝을 오므렸다. 그래도 꼬리뼈의 간질거리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힘을 꽉 준 미간에 케이의 머리칼이 스치듯 닿았다. 질끈 감은 눈꺼풀 사이로 다가온 반듯한 콧날이 보였다. 목덜미를 빨아먹는 미끄덩한 감촉에 숨을 참고 명치를 조였다. 그의 혀가 핥고 간 농락이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놀라서 수축했다. 몸이 한 번 튕기듯 들썩였다.
몽롱한 시야 너머로 얼핏 백발의 노파가 보였다. 그녀는 망을 보듯 복도 끝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케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노파는 그가 번쩍 안아서 옮기는 유림을 빤히 쳐다보았다. 등골에 얼음을 비비듯 기분 나쁜 눈초리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유림은 일순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어느새 복도를 걸어 이동한 케이는 말끔한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녀를 침구 위에 눕혔다. 유림은 그제야 그가 하려는 게 뭔지 깨달았다.
“뭐하는 거야?”
유림이 손을 뻗어 케이의 턱을 쭉 밀어젖혔다. 그러나 의외로 강력한 그의 완력에 바로 밀렸다. 유림은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이렇게 힘이 셌던가? 평소에는 한 방에 나가떨어져서 바로 엎드리는 놈인데.
“해야겠어요, 지금.”
“여기서?”
“지금 아니면 이런 곳에서조차 못하게 될 테니까.”
막무가내로 그녀를 눕힌 케이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그는 말없이 유림을 내려다보더니 어두워진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중단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케이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쇄골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더듬었다. 안쪽으로, 둥그런 둔덕을 쓸며 배꼽 아래로, 더 깊게 갈라진 밑으로 침입했다.
그러자 유림의 손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며 쏘아붙였다.
“나 죽을까 봐 그래? 마지막으로 소원이라도 들어주려고?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고장 난 버스 마지막으로라도 타 보겠다는 심산이야?”
케이는 그만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아파서 신음이 터져 나올 뻔한 유림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역시 종래에 본 적이 없을 정도의 서늘한 눈초리로 유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낮게 젖은 목소리가 잇새로 조용히 새어 나왔다.
“유림을 죽게 하지 않아요. 다른 녀석의 권속이 되게 놔두지도 않을 거고.”
“권속?”
“그래, 권속.”
케이는 유림의 팔을 잡아당겨서 델타에게 물렸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것은 걱정이라기보다 질투 어린 표정에 가까웠다. 아끼고 아끼던 것에 누군가 먼저 지문을 남긴 게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눈빛. 다정하고 예쁜 미소 아래 감춰져 있던 소유욕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유림은 내 것이니까.”
그의 숨결이 피부를 적시자 유림은 잠시 멍한 눈을 떴다. 그의 너른 어깨에 기대 있던 그녀는 어깨 너머로 깨진 액자를 보았다. 먼지가 쌓인 책상, 뒤로 넘어간 의자. 누군가의 연구실이었을 이곳은 불이 꺼진 채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곳은 낙원의 그늘 중 한 곳이다. 그들은 뱀의 똬리 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동작 정지.”
유림의 말에 케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막 쇄골에 입을 맞추던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말 딱 ‘정지’ 자세를 취했다. 반사적으로 멈춘 손을 내린 케이의 눈이 유림의 눈과 마주쳤다. 유림은 화가 나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제정신이야?”
“유림?”
“소위님, 이겠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낀 케이는 몸을 일으켰다. 훈련병 때 버릇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정 교관의 비딱한 눈빛과 가시를 문 입술에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
“전시 상황이야. 중사는 지금 놀러 나왔나?”
“유림, 아니 소위님, 그게…….”
“훈련병 시절에 뭘 배웠어? 내가 상관에게 말대답이나 하라고 가르쳤어?”
몰아붙이듯 호통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케이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진짜 이 여자가 화를 내면 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지 자신도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냥 바보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그의 실체를 아는 이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랬다.
“군인은 무장 해제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총을 놓지 않는다. 군인은 대기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는다. 또한 군인은!”
마지막 말을 소리치듯 던진 유림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는 케이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한 걸음 다가왔다. 이건 그녀의 소신이고 자존심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임무가 목숨보다 우선이어야 한다.”
어둠이 깃든 케이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이를 악문 채 토해 내듯 말하는 그녀의 강단은 분명 아름다웠다. 브루클린의 성녀는 절대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죽음의 앞일지라도.
하지만 그는 달랐다.
군인 정신 따위는 개나 주라지. 연맹군이든 로스티아벤이든 인간이든 감염자든 누가 살아남고 승리할지 그건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위…….”
복도의 비상 전등 불빛이 어스름이 방 안을 비추었다. 유림은 미간을 좁혔다. 착각이었나? 순간 잔혹하리만큼 무심해 보였던 케이의 표정과 노을처럼 붉게 비쳤던 눈동자는…… 노곤함이 보인 환영이었나 보다. 금세 부드럽게 물든 갈색 눈이 그녀에게 빠져들 듯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관심 없는데.”
─ 중사는 그렇게 하도록. 내가 불러도 대답이 없으면 미련 따위 갖지 말고 중사는 필사의 힘으로 돌아가면 돼. 하지만 난 중사의 상관이다. 내 지휘 하에 있는 병사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야.
─ 그럼 유림의 목숨은 누가 책임지죠?
─ 글쎄. 신께 맡겨야 하나?
─ 신들은…… 그런 하찮은 일에 관심 없어요. 자기들끼리의 패권 다툼만으로도 바쁘거든요.
“나는 유림만 살아 있으면 돼요.”
눈 밑이 잘게 흔들렸다. 주먹을 옹그려 쥔 유림은 실망했다는 듯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단호한 입매 사이로 말했다.
“그럼 넌 총을 들 자격도 없어. 아군에게 피해 주기 전에 군복 벗고 제대나 해.”
그때였다.
삐이이이익.
호루라기 소리가 사이렌처럼 울려 퍼졌다. 유림과 케이는 홱 복도 쪽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삐이이이익!’ 하고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밧세바가 크게 동요한 기색으로 두 사람이 있는 방에 들이닥쳤다.
“침입자입니다.”
호루라기 소리는 폐쇄 도시 내 암호였다. 짧게 두 번 울리는 경보음.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긴 신호음.
“확인된 인원은 둘.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군복?
케이가 다가와 유림의 어깨를 안았다. 단번에 허리를 휘감는 팔에 유림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나는 유림만 살아 있으면 돼요.
다시 떠오른 목소리가 나직하게 뇌리를 적셨다. 유림은 참았던 호흡을 허공에 몰래 뱉었다. 사실 그 순간, 가슴이 질주를 하듯 빠르게 뛰었다. 그녀만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엔 흔들림도 여유도 없었다. 죽을 각오로 적지에 뛰어드는 병사의 결의처럼 오직 그것뿐이었다. 살려 내겠다는 강력한 의지, 소유욕 어린 입맞춤이 주는 떨리는 전율처럼.
유림은 흐트러지는 숨결을 삼키며 어깨를 폈다. 목 뒤를 어루만지는 케이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뺨을 감싼 채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런 긴박한 순간에 군인이 아닌 여자가 되는 자신이 한심했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대령님께서 보낸 녀석들일지도 몰라.”
케이는 조용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철 조각을 주웠다. 끝이 검처럼 날카롭게 갈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조용히 유림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하도록 하죠.”
그와 눈이 마주친 유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의 눈길이 잠시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한번 꽉 잡았다.
케이가 앞서고 유림이 그 뒤를 쫓았다. 거즈를 붙인 오른눈 때문에 배후 우측이 사각지대가 되어 버렸다. 케이도 눈치를 챘는지 오른손으로 그녀의 옆구리 쪽을 방어하며 걸었다.
입장이 뒤바뀐 느낌에 기분이 묘했다. 항상 새끼 오리처럼 맨 뒤에서 겨우 쫓아오던 녀석이 이젠 앞에서 그녀를 보호하며 이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주 커다란 방패를 착용한 것처럼 전에 없던 안도감이 들었다.
저 녀석이 비로소 한 사람 몫을 하게 된 건지 아니면 자신이 나태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뒤바뀐 이 위치가 정말 싫은 건지 아니면 좋은 건지 분간되지 않았다.
‘나는 이 자리가 좋은 걸까? 보호받는 여자가 되고 싶은 걸까?’
느슨해진 입매를 꽉 깨물자 씁쓸한 표정이 맺혔다.
밧세바는 리 박사가 있던 수술실 안쪽으로 들어가 피신했다. 케이와 유림은 각각 벽 뒤에 몸을 숨기고 복도를 조용히 곁눈질로 내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유림이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는 그녀의 뒤를 엄호했다. 몸을 낮춘 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떼던 유림은 고양이처럼 잽싸게 자세를 낮췄다.
“쉬이.”
그녀는 손을 뻗어 케이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둘은 중앙 계단 앞에 멈춰 섰다. 누군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등장한 인영은 어둠에 휩싸인 복도를 보더니 멈췄다. 이 틈이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유림의 손이 쇳조각과 함께 등장해 허공을 갈랐다.
“억!”
당황한 인영은 손에 쥔 것을 툭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목 언저리에는 유림이 찌른 흉기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제자리 차렷. 목에 구멍 나기 싫으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은 만세를 실시한다.”
“소, 소위님?”
얼떨결에 무릎을 꿇던 상대는 놀란 듯 입을 뗐다. 유림은 무기를 거두고 비상 조명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츠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안도감에 다리 힘까지 풀린 그는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런 그를 보던 유림은 계단 아래를 곁눈질로 확인하며 물었다.
“혼자야?”
분명 침입자는 둘이라 했다.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에 나츠는 고개를 저었다.
“드레이크 씨가 밑에서 대기 중입니다. 다만 움직이기 좀 힘든 상태라 제가 먼저 동태를 살피러 올라왔습니다.”
“대기? 부상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짐이 좀 있습니다.”
의아하게 번지던 유림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짐이라,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군. 나츠는 유림의 속내를 읽고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케이가 유림의 뒤로 다가와 나츠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나츠가 여기까지 살아온 게 용하다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케이 씨!”
반가움에 덜컥 외친 나츠는 그의 품에 덥석 안겼다. 케이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양손을 허공 위에 올렸다. 떨어지라고 중얼거린 것 같기도 한데, 나츠는 못 들었는지 웃으며 그를 더 꽉 껴안았다.
“사내놈들끼리 징그럽게 왜 그래?”
유림은 눈을 흘기며 유유히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먼저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보며 케이는 나츠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유림에게 괜한 오해를 받은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조각 같은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대체 얘는 자신한테 왜 이러는 건지 매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짜 유림의 부대에 속한 사병만 아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 버렸을지도. 기본적으로 남과의 신체적 접촉을 혐오하는 케이였다. 물론 유림은 예외였지만.
“놔.”
낮은 음성이지만 옅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나츠는 황급히 팔을 풀었다. 케이의 냉랭한 태도에 머쓱해진 그는 뒷목을 긁으며 뒤로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두 번 만졌다가는 피가 튀길 기세였다. 살벌하게 돌아선 케이는 유림의 뒤를 쫓았다. 뒤에 남은 나츠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중사님께서 한층 더 차가워지신 것 같다. 아니면 저게 원래 본모습이신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안심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그렇게나 싫다는 의미니까. 혹시 입대 테스트의 일을 아직도 신경 쓰고 계시나? 정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유메에게도 비밀을 유지했는데.
번져 가는 상념을 지우려는 듯 나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잖아. 호흡을 길게 내쉰 그는 미간에 힘을 모으고 뺨을 철썩 때렸다.
“어?”
바닥을 손으로 더듬더듬 짚던 나츠는 빈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떨어뜨렸던 총이 어디 갔지? 설마 그새 소위님께서 집어 가신 건가? 갑자기 눈앞이 싸해졌다. 그는 엎드려서 바닥을 기며 총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벽에 콕 부딪쳤다. 나츠는 이마의 혹을 어루만지며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혹시 케이 씨가 가져가셨나? 아니면 계단에서 올라올 때 떨어뜨렸나?
─ 실전 상황에서 총기는 네놈들이 딸칠 때 잡는 좆처럼 소중하다. 따라서 본인의 손과 총기는 늘 한 몸처럼 절대 분리되지 않도록 한다. 알겠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훈육하던 유림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나츠의 얼굴색이 잿빛에서 흙빛으로 파리하게 변해 갔다. 망했다. 나는 죽었다. 뭐가 되었든 나중에 소위님께 빨랫감처럼 두들겨 맞을 게 뻔하다. 케이 씨는 그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시겠지.
나츠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한 손에는 다른 짐이 들려 있었다. 축구공만 한 크기의 무언가를 감싼 보자기였다.
“아, 맞다.”
그는 자책하듯 제 머리를 주먹으로 연이어 때렸다. 소위님께 이것에 관해 보고를 올리는 것도 잊었네. 누가 명치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나중에 홀딱 벗겨진 채 사격장 과녁에 걸리는 건 아닐까? 소문에 의하면 소위님께서는 병사들을 그런 식으로 체벌하신다고 했다.
괜히 억울해진 나츠는 떨어뜨렸던 보자기 뭉치를 벽을 향해 ‘퍽’ 하고 날렸다. 그러자 보자기 안에서 “으윽!” 하고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름의 화풀이를 하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잠시 후 보자기 안에서 구시렁대는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츠는 조용히 하라는 듯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보자기 속 주인이 겨우 입을 다물자 그는 두 사람을 쫓아 계단 아래로 발을 구르며 뛰었다.
한편 1층으로 내려온 유림은 직감에 의존해 드레이크를 추적하고 있었다. 안면에 상처를 입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시야의 반이 사라진다는 것은 역시 불편했다. 중앙 계단 양쪽으로 복도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양쪽 다 어스름한 비상 조명이 안개처럼 번져 있었다.
“갈라질까?”
유림의 말에 케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둘은 동시에 외쳤다.
“왼쪽.”
“왼쪽이요.”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왼쪽 복도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감지한 인기척이었다. 드레이크는 왼쪽 복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녀의 야생의 감이 그렇게 확신했다.
유림은 똑같이 왼쪽을 선택한 케이에게 칭찬을 날렸다.
“제법인데?”
“그럼 상으로 키스 한 번…….”
“싫어.”
고양이처럼 등을 꼿꼿하게 편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휙 걸어갔다.
─ 접촉은 내가 원할 때 해.
느낌이 좋아도 본인이 주도하지 않으면 괜한 심통을 부린다. 제 손으로 고삐를 쥐고 흔들어야 만족을 하는 여자니까.
케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유림의 어깨를 잡고 순식간에 입술을 훔쳤다. 그녀의 입가에 아이스크림이라도 흘린 양 입꼬리를 혀로 날름 핥으며 마지막에는 볼에다가 ‘쪽’ 하고 도장을 남겼다.
당황한 유림은 뒤늦게 허공에다가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채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유림은 황당한 표정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오른쪽 어깨, 사각지대죠? 방금 못 봤잖아요.”
“봤어.”
“정말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오른쪽 눈에 붙은 거즈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거즈 겉면을 손가락으로 긁는 걸 느낀 유림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의 손을 쳐 냈다. 케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잠자코 ‘흐음’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안에서 리 박사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래서 눈에 상처를 입었나? 유림이 뭔가 숨기고 있는 건 확실했다. 아직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을 해야 할지, 속상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유림은 눈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정말 눈두덩에 상흔이 있다면 그곳을 건드렸을 때 아파서 몸부터 움찔거렸을 테니까.
‘뭘 숨기는 거지?’
케이는 공허한 눈빛에 잔잔한 물결을 띄웠다. 서운함으로 가득한 표정인데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한 듯 멍했다. 애써 담담한 척 고개를 든 그는 유림이 의심하기 전에 얼른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금세 나긋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봤는데도 못 피한 거예요?”
그건 그것대로 우습지 않느냐는 듯한 미소. 그것도 저렇게 해사하게 웃으며 말하니 유림은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못 피한 게 아니고.”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세 번이요.”
“뭐?”
“세 번 더 키스할 거예요. 여기 오른쪽 입술과 뺨에 각각 한 번씩, 그리고 오른쪽 귓불에 하나 더.”
“웃기고 있네. 방금 전에 요행으로 한 번 성공했다고 상당히 건방진 발언을 한다?”
“성공하면 진짜로 상 줘요.”
“무슨 상?”
아무래도 교육을 잘못시킨 것 같다. 훈련을 하도 못 따라와서 레벨 하나 올라갈 때마다 보상을 줬더니, 이제는 뭐 하나 성공할 때마다 보상을 달라고 한다. 그걸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였다. 저렇게 뻔뻔한 눈빛으로 느른하게 웃으면서 잘도 말이지.
얼굴을 확 갖다 붙인 케이는 금방이라도 입 맞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을 제시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거.”
“그게…….”
‘뭔데?’라고 유림은 끝까지 묻지 못했다. 척추 끝이 서늘하게 젖고 엉덩이가 다시 간질거렸다. 골반 사이로 차오른 열기가 순식간에 솟구쳐 뺨을 후끈후끈하게 지폈다.
겉보기엔 노을이 그려 낸 화폭 속의 존재처럼 서정적인 남자였다. 예쁘게 생긋 웃으면서 제대로 하는 거 하나 없고, 약해 빠져서 허구한 날 부대의 후방만 맡는 녀석.
착각이었다. 여태까지 그녀는 액자 속 그림만 봤을 뿐, 그려 낸 손의 주인을 보지 못했다. 진정한 일면을 보기 위해선 붓을 쥔 화가의 손을 낚아챘어야 했는데.
“만약 성공하면.”
그래서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제 막 보인 이 남자의 손을 잡고 따라가면 어떤 얼굴을 보게 될지. 얼핏 보인 진득진득한 눈빛, 그 야만적인 욕망은 사실 그가 감추고 있던 실체가 아닐까?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곳이 폐쇄 도시든 쓰레기 더미 속이든 그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땀에 젖은 알몸으로 짐승처럼 헐떡이며 서로의 팔다리를 얽은 채 굴렀겠지.
그런데 자꾸 마음과 달리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를 원하게 된다. 귓바퀴를 녹이는 달콤한 속삭임이 안개처럼 몸을 에워싼 채 시야를 가렸다.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 깊은 심연으로 호흡의 열기를 끌어안고서 잠겨 간다.
유림은 홀린 듯한 얼굴로 뒷말을 중얼거렸다.
“기회는 주지, 기회 정도는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케이가 허리를 숙였다. 오른 뺨에 그의 입술이 스치듯 닿더니 긴 손가락이 턱을 움켜쥐었다. 그는 저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그녀의 아랫입술을 ‘앙캉’ 베어 먹고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두 번 남았어요.”
또 한 번 눈뜨고 코 베인 유림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같은 각도, 같은 위치, 같은 수법. 동일한 수법에 또 당했다. 그녀는 자존심이 완전 무너진 채 그를 쳐다보았다. 천하의 정유림이 남자 하나에게, 그것도 케이 애덤슨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 녀석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된 거지?
케이가 유림의 어깨를 잡았다. “유림.”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녀도 정신을 번뜩 차리고 벽에 등을 붙였다. 그는 어둠에 가려진 바닥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낌새를 눈치챈 유림도 천천히 시선만 움직였다. 이윽고 케이는 고개를 들더니 전방 30m 끝에 위치한 화장실 전등을 바라보았다.
“케이?”
“숙여요!”
잽싸게 몸을 낮춘 유림은 바닥을 짚고 엎드린 채 위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활촉 같은 것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며 뒤쪽으로 날아갔다.
댕그랑!
뭔가에 부딪친 듯한 금속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막혔던 숨이 터지듯 흘러나왔다. 유림은 태연한 얼굴로 반듯하게 서 있는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북치듯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물었다.
“괜찮아?”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쇠꼬챙이를 집으며 걱정 말라는 듯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벽에 맞고 떨어진 거예요.”
“대체 누가…….”
쇠꼬챙이를 바라보던 유림은 놀라서 말꼬리를 흐렸다. 날카로운 쇠촉 끝이 휘어 있었다. 유림은 케이의 손을 흘끗 쳐다보았다. 손으로 막는 것처럼 보였는데 착각인가? 그녀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댕그랑!’ 하고 들린 금속 마찰음은 한 번뿐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허공에서 쇠꼬챙이가 붙잡힌 듯한 바람소리를 들었는데.
“유림.”
케이가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여기서 기다릴래요? 안쪽 한번 확인하고 올게요.”
“뭔데? 델타야?”
동체시력이 우수하다고 자부하는 유림도 확인하지 못한 대상이었다. 둥둥 떠다니는 풍선도 맞추지 못하는 남자가 방금 전 그걸 봤을 리는 없다. 자신이 못 봤는데 그가 포착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림은 그에게 물었다. 왠지 그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델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때 화장실 안쪽에서 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 고개를 든 유림이 떨어져 있던 쇠꼬챙이를 잡았다.
“가자.”
케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자, 유림은 일말의 재고 여지도 없다는 듯 못을 박았다.
“너 혼자 들여보내라고? 그게 더 불안하니까 빨리 따라와.”
“네.”
어차피 안 들을 줄 알았다. 뒤에서 순순히 보호받을 바에는 차라리 총알받이가 되어 장렬하게 전사할 것을 선택할 여자였다. 빠르게 포기한 케이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따라온 나츠가 단거리 저격용 총을 쥔 채 엄호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도 방금 전 상황을 봤는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츠는 케이에게 뒤는 맡기라는 눈빛을 보냈다. 앞서 가던 유림도 나츠의 엄호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눈짓을 보내더니 남자 화장실 안으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케이는 나츠에게 대기하라는 수신호를 보내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벽 뒤에 숨어 있던 것은 사람이었다. 얼핏 봤지만 드레이크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작은 체형. 실루엣밖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여성이다.
이십 평 남짓의 내부는 동굴처럼 깜깜했다. 육안으로는 한 치 앞도 확인되지 않는 상황. 유림은 벽을 짚어 배후를 확보했다.
뭔가가 온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흉기.
본능적으로 직감한 유림은 오른쪽으로 구르며 피했다. 중간에서 무언가에 뚝 잡힌 그것은 바닥에 ‘쟁그랑’ 하고 떨어졌다.
날카로운 금속 소음. 좀 전과 마찬가지로 쇠꼬챙이일까? 이것들은 대체 어디서 구해 오는 거지? 일순 미궁 바닥에 굴러다니던 자재들이 떠올랐다. 아니면 모래의 도시에서 들여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
인기척도 없이 날아드는 공격.
이 무거운 것들을 어떻게 소리도 내지 않고 던져 대는 것일까?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상대가 어느 방향에서, 어떤 호흡으로 움직이는지 종잡을 수가 없으니.
“케이!”
“유림, 움직이지 말아요.”
그가 바로 옆에서 속삭였다. 그때 밖에서 대기하던 나츠가 전투 상황을 눈치채고 합류하며 말했다.
“엄호하겠습니다.”
나츠가 비춘 라이트 불빛이 시야를 밝혔다. 유림은 눈을 찌푸리며 앞을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케이는 언제 이동했는지 화장실 중앙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 한 명이 제압당한 채 끙끙대고 있었다.
“멈춰!”
배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홱 돌아선 유림은 화장실 입구에서 낯선 여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여자를 놔줘라. 안 그러면 이 남자는 죽는다.”
다섯 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로잡힌 남자는 드레이크 앤더슨이었다. 여자들은 각각 그의 머리와 목에 총구 및 흉기를 겨누고 있었다. 그는 양손을 올린 자세로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를 놔줘.”
우두머리로 보이는 듯한 여자가 말하자 유림은 무표정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거절한다.”
“이 남자가 죽어도 좋다는 건가?”
유림의 반듯한 미간에 잠시 침묵이 어렸다. 케이와 나츠는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며 쳐다보았다. 유림은 콧방귀를 뀌더니 눈썹을 치켜 올렸다.
“로스티아벤은 반란 분자와 협상하지 않는다.”
유림은 케이가 포박한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에 쥔 흉기로 포로가 된 여자의 목을 살짝 찔렀다. 동료의 목에서 핏방울이 똑 떨어지자 여자 두목은 놀란 듯 주춤거렸다.
“서로 머릿수를 하나씩 줄이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목을 더 깊게 찌르는 유림을 보며 당황한 두목이 소리쳤다.
“자, 잠깐 기다려!”
“싫은데?”
유림이 생긋 웃으며 답하자, 여자의 눈이 분노로 뒤집혔다.
“이 남자도 죽이겠다.”
드레이크는 빳빳하게 선 채 유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비장한 눈빛을 전했다.
“명예롭게 죽도록. 시신은 거둬 주겠다.”
목울대를 울렁인 드레이크는 잠시 멍한 눈빛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여두목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 진심이야?”
“내가 내 부하 목숨을 두고 농담이라도 하는 것 같나?”
유림은 그게 더 기분 나쁘다는 눈초리로 살벌하게 되물었다.
여자는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레이크를 냅다 밀고선 유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케이가 방어하듯 앞을 가로막으며 왼손으로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드레이크가 총구를 겨눈 양옆 여자들의 손목을 정확히 꺾어 비틀었고, 마지막으로 유림이 달려드는 두목의 복부를 무릎으로 가격하며 쓰러뜨렸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손발이 척척 맞는 팀워크에 유림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녀석들이 제법 한 팀다운 면모를 보이는 듯했다. 우두머리 여자는 바닥에 쓰러지며 쥐었던 칼을 놓았다. 유림은 후드를 쓴 두목의 뒤통수를 누르며 칼로 정확히 목을 겨눴다.
“자, 이제 너희가 말하는 협상이란 걸 해 볼까 하는데 어때?”
드레이크에게 손목을 잡힌 여자들은 고통에 주저앉았다. 나머지 여자들은 후드를 쓴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요 멤버들이 전부 제압당하자 그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츠가 총구를 들면서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소위님!”
뺨을 스치며 날아간 파편이 화장실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가까스로 유림을 밀친 케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무표정한 눈동자는 조금 화가 난 듯 암갈색으로 일렁였다.
“제압 완료했습니다.”
나츠가 ‘달칵’ 하고 방아쇠를 걸며 말했다. 그가 몸을 낮춘 채 총구를 겨눈 상대는 방금 전까지 케이에게 잡혀 있던 여자였다. 그녀는 혼란을 틈타 바닥을 기어서 화장실 칸막이 사이로 이동해 있었다. 기회를 엿봐 공격을 시도한 모양이었다. 유림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초리가 아쉽다는 듯 날카롭게 올라갔다.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소위님. 이들은 ESP를 씁니다.”
드레이크가 양손에 빼앗은 총을 쥐며 말했다. 어느새 여자들은 화장실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초능력? 입실론인가?”
유림은 우두머리 여자의 후드를 냉큼 벗겼다. 그러자 그녀의 이마에 선명하게 찍힌 낙인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건…….”
어스름한 조명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사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네 사람은 잠시 말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 여자들의 후드도 차례차례 벗겼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불로 지진 듯한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마 혹은 뺨에 선명하게 새겨진 흉터는 알파벳 ‘Y’를 닮은 형상의 문자였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는 살벌한 눈빛으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입실론이라 하지 마라. 우린 웁실론이다.”
“웁실론?”
밖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려왔다. 케이는 벽에 등을 붙였다. 드레이크는 휘리릭 나이프를 쥐었다. ‘딱, 딱’ 이어지는 지팡이 소리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유림과 케이는 발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리고선 눈초리의 힘을 풀었다.
굽은 등의 노파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츠가 조준한 총구에서 나오는 라이트 불빛에 눈을 찌푸렸다. 인상을 쓴 나츠는 당장이라도 발포할 듯할 기세였다. 유림이 고개를 저으며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가 총을 내리자 웁실론들을 지휘하던 두목 여자의 표정이 혼란스럽게 변했다.
밧세바는 화장실 내부에서 일어난 사태를 즉시 파악했다. 그녀는 내부를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들 그만합시다. 우리는 서로 적이 아니오.”
그녀의 뒤로 두 명의 여자들이 더 등장했다. 여자들의 품에는 드레이크가 수송 중이었던 ‘짐’이 안겨 있었다. 짐의 정체를 알아본 유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그쪽 군인이 데리고 있었다는데 맞습니까?”
“드레이크?”
유림이 쳐다보자 드레이크가 묵직한 목소리로 상황 보고를 올렸다.
“지하 미궁에서 오베론 측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 접전 끝에 오베론의 수장인 유령의 군주를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잡혀 온 유령의 군주는 의외로 침착했다. 유림은 그녀를 보며 공교롭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인연도 참 질기네.”
유령의 군주는 델타에게 물린 유림의 목덜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뭔가 말할 듯싶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 아이가 오베론의 수장이라고?”
밧세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그러는 당신은 너무 늙어 보이는데?”
팔다리가 없어 딱히 포박할 것도 없어 보이는 소녀. 딱해 보이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쏘아붙이는 목소리에서 성질머리를 알아본 밧세바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겉보기 나이는 중요하지 않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츠가 유림에게 속닥이며 귓속말을 전했다.
“소위님, 보고 드릴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데?”
그는 재빨리 복도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다시 들어온 그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걸어오며 허둥지둥 보자기를 풀던 나츠의 손 사이로 내용물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것을 본 유림의 눈이 굳었다.
사람의 목이다.
밧세바의 옆에 서 있던 웁실론이 라이트를 비추었다. 데굴데굴 굴러서 유림의 발치까지 간 모가지를 잡은 건 케이였다. 그는 잘린 목을 허공에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그때 잘린 목의 주인이 눈을 부릅떴다. 라이트를 비추던 웁실론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반면 목을 들고 있던 케이는 태연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진짜 사람의 목이 아니란 건 처음부터 눈치챈 상태였다. 케이는 잘린 목의 툭 불거진 눈알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서 밀어 넣었다. 안으로 눌린 눈알은 반동으로 인해 오히려 용수철처럼 튕겨 나왔다. 바닥에 통통 굴러 떨어진 제 눈알 한 짝을 바라보던 목의 주인은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케이 애덤슨 중사시군요?”
케이는 대답 대신 모가지 주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절단된 목 밖으로 끊어진 선들이 주렁주렁 나와 있었다. 그 사이로 수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드레이크는 잘라 온 사회자의 목에 관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편의상 핵심 부분만 잘라 왔습니다. 목만 잘라 왔어도 코어는 무사합니다. 인지 기능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대화 역시 가능할 겁니다.”
유림은 문득 기억의 도시에서 보았던 안드로이드들을 떠올렸다. 몸통이 박살 나고 턱이 무너져도 끝까지 발목을 잡던 손. 인공지능이었기에 더 섬뜩했던 집요한 생존력이었다. 그녀는 불쾌감을 털고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드로이드는 심문 대상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걸 잊었나? 고문도 협상도 불가능한데 왜 데리고 온 거지?”
“제 가치를 그렇게 폄하하시다니, 조금 섭섭합니다.”
한쪽 눈알을 잃은 채 사회자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소름 돋는 연기였다. 아니, 모방력이다.
“저는 안드로이드들을 통솔하는 책임자입니다. 군대로 따지면 대대장급이죠. 적 진영의 지휘관을 사로잡았는데, 제가 정녕 협상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까?”
“네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가 뭐지? 로봇도 공포를 느끼나?”
“전 로봇이 아닙니다.”
“목 잘리고 말할 수 있는 게 로봇 말고 또 있나 보군.”
“그 점이 매력적이죠. 육체적 한계가 없다는 것.”
사회자의 말을 가만히 듣던 케이의 눈빛이 느슨하게 흐려졌다. 기시감. 그것도 아주 불쾌한 기시감이 든다.
“낙원의 슈퍼컴퓨터 왓슨에게는 공간적 한계가 없죠. 그 옛날 인터넷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인터넷 서버에 접속하려면 매개체가 필요했습니다. 인터넷은 가상공간을 통해 물리적 벽을 허무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죠. 반면 왓슨은 스마트 더스트로 물리적 공간 그 자체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안드로이드인 전 인간이 가진 육체적 한계는 뛰어넘었을지 몰라도 그건 개인적 차원에 그칠 뿐입니다. 개체의 벽을 무너뜨린 제가 왓슨의 공간 지배력을 갖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완벽한 조합이 탄생할 겁니다.”
인공지능인 주제에 소유욕과 지배욕을 갖고 있다니. 아니, 그조차도 모방일 테지만 이 녀석은 너무나도 인간과 흡사하다. 과할 정도로 완벽하게 ‘자아’를 구축해 놨다. 제 업적에 대한 자부심과 진보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이게 정말 안드로이드인가?
유림은 흘끗 케이의 눈치를 살폈다. 녀석이 찬양하는 왓슨의 창조자는 정작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오히려 지루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한심하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그냥 관심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로서는 목 잘린 기계가 뭐라고 나불거리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어느 미치광이의 연설로만 보일 뿐. 기계와 궤변을 논하다니, 시간 낭비일 뿐이다.
“피노키오처럼 인간이 되고 싶나 보네. 꿈과 사상이 있는 고철이라니 대단하군.”
유림은 계속 뒤통수를 누르고 있던 웁실론 두목을 놓고 일어섰다. 그러자 웁실론들이 몰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여자는 눈을 흘겼지만 더 이상 유림을 향해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유림은 자세를 바로잡더니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드레이크!”
“예, 소위님.”
“상황 보고는?”
“소위님의 GPS 위치를 쫓아 미궁에 진입했을 때 현장 지휘권은 호크 대령님에게서 이미 세르게이 총사령관님에게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이후 총사령관님께서는 저희에게 미궁 내 델타의 존재를 이유로 철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만, 저와 시게노 대원은 명령에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명령 불복종은 징계감이다. 총사령관의 지시를 불이행한 경우에는 가중처벌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도 명령을 무시했어?”
유림은 붉은 입술에 느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응시했다. 그 모습에 홀린 듯 눈을 풀던 드레이크는 모호한 미소로 답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용병은 떠돌이다. 그들에게서 충성과 헌신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림은 드레이크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그를 훑어보았다. 먹잇감을 관찰하는 독수리처럼 날카롭고 신랄한 눈초리였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지?”
“본부에서는 미궁 내로 증원 부대를 보냈다고 했는데, 저희 외에 다른 사병들의 모습은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곰곰이 듣던 유림의 눈초리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입가에는 경멸 어린 미소가 어렸다.
“증원 부대로 델타를 보냈군.”
누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나츠였다. 일본계 소년병은 부정하듯 눈을 껌뻑이더니 말했다.
“총사령관님께서 말입니까? 왜 그런 짓을…….”
“그러게, 왜 그랬을까?”
홱 돌아서며 묻는 유림에게 나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한쪽 눈에 거즈를 붙인 유림의 모습은 바다 위의 용맹한 여적을 연상케 했다. 비단 그것은 나츠 혼자만의 상상이 아니었다. 넋을 놓고 서 있는 드레이크 역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까지 죽이려고 작정한 게 아닌 이상 어떻게 델타를 투입할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답은 간단하죠.”
사회자가 끼어들었다.
“당신까지 죽이려고 한 겁니다.”
유림은 케이의 발에 깔린 채 샌드위치가 되어 있는 사회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케이는 사회자의 머리를 축구공 삼아 발로 볼을 꾹 짓밟고 있었다.
“나를?”
기가 막혀서 되묻던 유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던 그녀는 흔들리는 동공 사이로 문득 정색하고 물었다.
“나를 왜?”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그럼 아는데 묻겠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내심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물끄러미 던지는 시선에 사회자는 한쪽 눈알을 굴리며 찌그러진 입술을 열었다.
“낙원의 암살자가 ‘죽은 척 위장한 고양이’란 사실이 밝혀졌거든요.”
유림은 한쪽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침묵했다. 허공을 빤히 보던 눈이 다시 케이의 발밑에 깔린 사회자의 목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밝혀졌는데?”
“글쎄요,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밉상스러운 녀석, 촉새같이 종알거리다가 꼭 중요한 대목에서 입을 다물어 버린다. 줄곧 잠자코 있던 케이가 입술을 열었다.
“솔로몬이에요, 유림.”
예쁜 얼굴에 붓으로 그린 듯 담연한 눈초리. 그는 그녀 대신 살기를 품고 있었다.
베스타 신전에서 평의원을 암살했던 그날은 너무 많은 노출이 있었다. 여기저기에 흔적을 뿌리고서야 간신히 빠져나왔던 사건 현장. 그곳에 남긴 수많은 족적과 지문들, 솔로몬은 당연히 확인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서 밑그림이 두루마리처럼 좌르륵 펼쳐졌다. 잘 생각해 보면 모든 사건들은 삐죽빼죽 튀어나온 톱니인 양 맞물린 채 연결돼 있었다.
조목조목 따져 보면 이와 같다.
첫째, 화이트 채플의 도박 경기는 위즈덤이 개발한 최신식 안드로이드와 델타 사이의 모의 전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유령왕의 경호 부대인 회색 기사단은 병기형 안드로이드로 이루어진 부대다. 즉, 유령왕은 줄곧 솔로몬으로부터 안드로이드를 공급받고 있었다. 둘은 평의회 몰래 물밑에서 거래를 주고받는 사이다.
셋째, 안드로이드 개발사인 위즈덤은 기억의 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병기형 안드로이드의 생산이 남들 모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평의원을 암살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 유림은 솔로몬이 숨겨 둔 전투 병기 부대를 발견했다. 그리고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솔로몬은 유림이 데드캣이라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다. 그는 화이트 채플의 도박 경기에서 그녀에 관한 정보를 이미 얻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넷째, 그렇다면 솔로몬은 유림의 정체─연맹군 스파이로 숨어든 암살범 데드캣─를 평의회, 혹은 군 수뇌부에 일러 줬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가 이런 고급 정보를 순순히 넘겼을 리는 없다. 필시 대가로 뭔가를 거래하려 들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위즈덤이 로스티아벤에 병기형 안드로이드를 독점으로 납품하는 것. 그게 아니라면 호크를 제거한 뒤 본인이 의원석을 차지하려는 심산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섯째, 평소 호크 대령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세르게이 총사령관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쳤을 리가 없다. 그는 호크 대령에게 이번 사건을 덮어씌웠다. 평의원 암살과 이브의 생일 파티 테러의 배후라니, 이보다 더 훌륭한 올가미는 없었을 거다. 그는 호크를 구금하고 유림도 즉시 체포하라 명했다.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의 일이 밖에 알려지면 곤란하니,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델타를 이용하여 그녀를 제거하려 한 걸까? 전투 중 사망보다 더 완벽한 구실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여섯째, 결론 및 추측을 말하자면 솔로몬은 유령의 군주를 버리고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과 손을 잡았다. 그는 비단 군권만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낙원까지 장악하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솔로몬의 행보의 끝은 그것밖에 없었다. 낙원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게 그자의 목표인가?
케이가 고즈넉한 눈초리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유림은 초조한 듯 제자리에서 좌우로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대령님을 구해야 돼.”
“방법이 없을 텐데요. 당신은 현재 수배가 내려진 상태고, 노아 호크 대령은 군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행은 빠르게 이루어질 거고, 최소 사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 위에 있는 발 좀 치워 주시면 안 됩니까?”
유림은 눈초리를 확 치켜세우며 짜증이 솟구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금니를 깨물고선 케이의 발밑에 깔려 있던 사회자의 머리를 발로 뻥 차 버렸다. 그의 목구멍에서 ‘꽥!’ 소리가 튀어나왔다. 발길질을 맞고 날아간 그는 화장실 칸막이 모서리에 부딪치더니 반대편 벽으로 통통 튕겨져 나갔다.
“아, 아프네.”
평소 단련을 했다지만 역시 맨발로는 좀 아팠다. 유림은 찢어진 드레스 밑으로 손을 넣어 발바닥을 주물렀다.
그 모습을 보던 케이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는 유림의 발등과 발가락 사이를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아파요?” 하고 물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의 옆선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완벽할 정도로 늘 정돈되어 있는 표정. 가끔은 이 녀석도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괜찮아.”
태연한 척 외면했지만 그녀의 파리해진 입술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델타에게 둘러싸여도 패기를 잃지 않는 브루클린의 성녀가 블랙 호크의 위기에 이토록 마음을 졸이다니.
케이의 눈빛이 탁한 물처럼 흐려졌다.
불쾌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그 유대감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언짢고 못마땅했다. 그녀를 칭칭 묶어 둔 노아 호크의 정교한 거미줄이 보인다.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이루어 놓은 정서의 족쇄.
몸을 일으킨 케이는 유림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정작 유림은 그가 입을 맞추는지도 못 알아챌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통나무처럼 굳은 몸은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호크에 대한 우려로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생각하지 마.
다른 남자는 떠올리지 마.
질투 어린 감정이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목구멍에 달라붙어 숨을 조였다. 골몰히 생각에 잠긴 그녀의 머리를 잡아 거칠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나만 봐.
목울대를 삼킨 그는 눈초리에 몰린 혈류를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풀었다. 그럼에도 붉어진 눈동자는 쉽사리 원상 복구가 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런 면을 들키고 싶지 않다. 포악한 질투, 이기적인 소유욕, 자제할 수 없는 욕망, 무자비한 비인간성.
유림이 알면 경멸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모두를 이끄는 의로운 방패이자 전장의 등불과도 같은 존재다. 과거 악마에게 대항하던 갑주의 성녀도 그녀처럼 용맹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앞에선 자신마저 일개 병사가 되는 기분이었다. 피 칠을 하고 앞장서는 그녀에게 어느새 그 자신도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채 따르고 있었으니까.
유림은 알고 있을까? 그녀를 숭배하는 만큼 집착도 커져 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떤 끔찍한 상상들이 펼쳐지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그가 잔인한 것인지 그녀가 잔인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각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마련이다.
받기 힘든 것을 주려는 자와 받아 주지 않는 자 중에서 누가 더 이기적인가? 그는 이제부터 그녀에게 받기 힘든 것들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손끝에 미세한 먼지가 모여들었다. 복도의 비상 조명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주변 공기가 이성을 잃은 그에게 동요하고 있었다.
케이는 급히 심호흡을 하며 자제력을 끌어모았다. 초조해 미쳐 버릴 것 같았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애써 감췄다. 추악한 질투 따위 보일 수 없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감고 입술 새로 호흡을 내뱉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은, 그녀가 내 권속이 아니다.
“진정해요, 유림.”
유림은 불안한 눈빛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호크 대령님께서 그리 쉽게 당할 분은 아니잖아요. 날 믿어요. 날 못 믿겠으면 왓슨 3세를 믿어요. 왓슨의 분석에 따르면 블랙 호크를 제거하는 건 군부를 해체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니까. 그 남자는 유림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하거든요.”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밤공기처럼 부드럽고 깊었다.
“두 번째 키스였는데, 잘 세고 있어요?”
스미는 듯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던 유림의 눈이 커졌다.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되죠, 소위님.”
“너…….”
화를 내려던 유림은 힘이 빠지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케이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진정됐다.
유림은 한쪽에서 잠잠히 지켜보고 있는 여자들을 쳐다보았다. 웁실론들은 밧세바와 함께 벽 쪽에 붙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녀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붙잡혀 있는 오베론의 군주가 보였다.
“웁실론이라고 했나? 이름이 뭐지?”
“실비아다.”
유림이 말을 걸자 우두머리인 여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곁눈질로 밧세바의 눈치를 살폈다. 실질적인 지도자는 이 여자가 아니라 저쪽의 노파다.
유림은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밧세바의 앞으로 다가갔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 있는 노파는 늘어진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당신들과 태양의 도시 입실론들은 서로 어떤 관계야?”
밧세바는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는 케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유림의 수술을 명한 뒤로는 저렇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고 있다.
─ 반드시 살려야 할 사람이지.
사실 그 한마디로 이미 그는 모든 걸 설명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 존재 자체로 의미 있는 사람이다.
“우리들은 최초의 입실론들입니다.”
거즈를 붙이지 않은 유림의 한쪽 눈이 슬쩍 커졌다. 그녀는 뺨을 긁으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밧세바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아직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초 유포자로부터 직접 감염된 뒤 살아남은 여자들이죠. 그리고 버려진 자들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혹시 권속이란 단어를 들어 보셨습니까?”
찌푸리듯 미간을 좁히던 유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케이를 쳐다보았다. 태연하게 서 있던 케이는 유림과 눈이 마주치자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알 듯 말 듯 오묘한 눈빛으로.
“우리는 권속입니다. 권주가 만든 무리죠. 권주란 오리지널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그들이 왜 권속을 만드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입니다.”
“그들? 하나가 아니란 소리인가?”
“최소 둘 이상일 겁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권속 무리가 둘이니까요.”
“둘이나 된다고?”
“델타와 입실론.”
유림은 잠시 눈을 뜬 채 얼어붙었다. 충격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디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오리지널 바이러스를 보유한 녀석의 권속이었는데 이후 그자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건가? 어째서?”
“쓸모가 없어졌으니까요.”
유림에게 잡혀 있던 우두머리 여자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마에 찍힌 낙인을 손톱으로 긁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는 늙고 병들어 갔습니다. 권속이 된 여자들은 새로운 능력을 얻지만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죠. 대가가 무엇이냐는 각 권주의 바이러스에 따라 다릅니다. 델타는 흉물스러운 외모를 얻고 지성을 잃게 된 데 반해, 우리들의 대가는 노화였습니다.”
“그 권주라는 자가 혹시.”
유림은 손에 쥔 흉기로 벽을 툭 긁었다.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낙원의 관리자인가?”
질문을 던진 순간 웁실론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를 바득 가는 여인들도 있었다. 낙인이 찍힌 얼굴들에는 증오심이 어렸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엘 카인.”
밧세바가 지팡이를 쥔 손에 턱을 괸 채 입을 열었다.
“그가 바로 낙원의 관리자이자 우리들을 감염시키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럼 지금 태양의 도시에 있는 입실론들의 정체는 뭐지? 새로운 권속?”
“그녀들은 얼핏 보기에 과거의 우리와 굉장히 흡사한 면이 있어요. ESP를 쓰는 것도 그렇죠. 과거 엘 카인의 권속이었던 우리 역시 초능력이 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들 모두가 ESP를 가진 건 아니라고도 하니, 아마 엘 카인의 직접적인 권속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유림의 질문에 웁실론들은 비릿하게 웃었다. 애증이 밴 눈빛에는 한때 그녀들이 몸 바쳐 사랑했던 남자의 그림자가 어스름이 비치는 듯했다.
“엘 카인은 이제 권속을 만들지 않아요. 더 이상의 권속은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요. 자신의 아이를 낳을 여성은 정해졌다면서.”
“흥, 제인 왓슨이겠지. 그 멍청한 여자!”
누군가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그러자 밧세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여자는 아닐 거다.”
그녀의 뇌리 속에 황홀한 얼굴로 웃던 남자의 광기가 스쳐 지났다. 붉은 눈의 소녀를 데려온 뒤로 그는 입실론에게로의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이브, 그 아이라면 몰라도.”
“이브? 그게 누구야?”
“이브 페트로비치. 유일한 항체 보유자였던 소녀의 이름입니다. 치료제 개발은 이브의 항체로 이루어졌죠. 엘 카인은 이브에게 완전히 미쳐 있는 상태였습니다.”
─ 너 페트로비치 박사의 딸이지?
유림은 손으로 거즈를 짚었다. 눈가가 욱신거렸다. 누군가 억지로 가시를 쑤셔 박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 언저리에서 북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트러진 퍼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두통을 일으켰다. 아주 오랜 시간, 기억 속에 고여 있던 파편들이었다.
“그래서 그 이브란 소녀는 어떻게 됐는데?”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뒤 엘 카인은 첨탑에 틀어박힌 채 낙원의 관리자가 되어 모든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태양의 도시에 거주하던 여자들을 하나하나 처단하기 시작했죠.”
─ 여기 있다가는 그가 널 찾아낼 거야. 그 눈동자 말이야, 그에게 들켜선 절대 안 돼. 알았어? 보여선 안 된다고.
“우리는 권주들의 싸움에 휘말린 겁니다. 그들의 권속이 되어 태풍의 눈에 휩쓸려 온 게지요. 델타도 입실론도 웁실론도 모두 희생양에 불과한 것. 이 모든 것은 권주들이 사라져야 끝날 전쟁입니다.”
비장한 음성의 눈초리가 향한 곳은 케이였다. 밧세바는 주름진 눈으로 게슴츠레 그를 쳐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던 케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티끌만 한 동요의 기색도 찾을 수 없었다.
권주.
눈앞의 남자 역시 그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권속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확실했다. 어쩌면 엘 카인보다 무서운 자일지도 모른다. 아직 그만큼 잔혹한 일면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더 불안했다. 엘 카인의 광기가 정말 이 남자에겐 없을까? 결국 둘은 동족이지 않던가?
“당신들이 원하는 건 엘 카인의 죽음인가?”
유림이 바닥에 앉은 채로 물었다. 웁실론들은 대답 대신 살기 어린 눈빛을 전했다. 그러자 유림은 비딱하게 웃으며 칼끝으로 허공 어딘가를 짚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곳을 겨누고 있군.”
한데 얽힌 호흡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팡이를 짚은 밧세바 뒤로 모인 웁실론들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마존의 여전사처럼 야만스럽게 웃는 유림을 경계하면서도 매료된 얼굴들이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 그것이 브루클린의 성녀였다.
“나츠 시게노, 드레이크 앤더슨.”
“예, 소위님.”
“자네들은 본부로 귀환하도록 한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입 밖으로 내지 않도록. 이런 일엔 휩쓸리지 않는 게 좋으니까. 너희들은 미궁에서 그 누구도 만난 적이 없다. 운 좋게 출구를 찾아 빠져나온 걸로 해.”
“저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던 나츠의 시선이 밧세바와 마주쳤다. 늙은 고목처럼 주글주글한 눈초리였다. 노파 역시 전사였다. 총칼을 쥐진 않았지만 굴곡진 풍파를 헤쳐 온 여인이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나츠의 눈빛은 포로로 잡힌 유령의 군주에게로 향했다. 소녀는 제 또래의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 시선을 받던 나츠는 결심한 듯 이어 말했다.
“저는 소위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옆에 서 있던 드레이크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대답했다.
“저도 같습니다. 계속 소위님을 모시게 해 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대답에 유림은 감격보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흉기를 든 손으로 목 언저리를 긁었다. 그러고는 안짱다리로 고쳐 앉으며 턱을 괸 채 비릿한 눈빛을 지었다.
“나는 목숨 줄이 여러 개여도 살아남기 힘든 빙판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오늘 이후, 너희들의 비명 소리를 들어도 돌아볼 수 없는 숲의 가운데로 진입하게 된다.”
“알고 있습니다.”
나츠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보며 유림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죽게 될 거다. 갓 스무 살도 못 넘긴 이 녀석은 분명 죽게 될 텐데.
“소위님께서는 제 이상형이십니다.”
“내가?”
옆에서 듣고 있던 웁실론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소년병 나츠의 수줍은 고백이 꽤 귀여운 모양이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고 제 말은 소위님을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소, 소위님처럼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손사래를 치던 나츠는 언짢아 보이는 케이의 눈초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감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썩 유쾌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게 아닌데. 중사님이 또 오해를 하신 듯했다. 소위님을 그런 식으로 연모하는 건 아닌데.
나츠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유림의 뺨에 입을 맞추며 끌어안던 케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밀착된 몸,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입술. 두 사람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눈치 없는 자신조차 둘 사이에 전과는 다른 열기가 흐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애덤슨 중사가 나약하고 덜 떨어졌다며 욕했지만, 나츠만은 그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중사님은 충분히 강했다. 소위님을 지켜 내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다.
나츠는 본인의 감정을 선망이라고 결론지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영혼을 채우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저 사람들은 찬란했다. 그 뒤를 걷고 있으면 자신 역시 빛을 걷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 한 걸음이 자신과 유메에게는 치명타일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는 용서해 줄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걸 느껴 본 적이 없으니까. 영혼의 반쪽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라면 분명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옆에 있던 밧세바가 가래 낀 기침을 토하듯 걸걸거리며 웃었다.
“데려가시죠, 지휘관님.”
유림의 눈초리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밧세바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걸고 있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들은 가슴에 불꽃을 담고 산다는데, 저 아이 가슴에 불씨를 던지셨으면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여름?”
“나츠는 일본어로 여름이란 뜻입니다. 그렇지요?”
밧세바가 쳐다보자 나츠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는 처음과 달리 푸근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짚어 냈다. 설마 저 노파도 일본 출신인가?
괜한 반가움이 일었다.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던 나츠는 다시 유령의 군주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흠칫 굳었다. 소녀는 입술을 깨문 채 부들부들 떨며 분노하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담고서 죽일 듯 나츠를 노려보던 그녀는 고개를 홱 외면했다. 당황한 나츠는 입을 벙긋하다가 다물었다. 드레이크가 감시를 하며 이쪽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일단 다들 이동하시죠.”
밧세바의 지시에 따라 웁실론들이 먼저 나가고, 유림과 부대원들이 뒤를 따랐다. 맨 마지막으로 나온 케이는 석연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선 걸음을 멈췄다. 그는 복도 끝을 응시했다. 앞서 가는 유림과 밧세바는 완전히 긴장을 푼 채 방심하고 있었다.
“유림!”
케이의 외침과 함께 어둠 속에서 바람이 일었다. 돌아선 유림의 한쪽 눈이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새까맣게 확장되었다. 파다닥 움직인 그림자는 벽을 밟더니 잽싸게 튀어 올랐다. 그 모습을 포착한 유림이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델타다!”
나츠와 드레이크는 동시에 총을 잡았다. 천장에 올라간 델타는 전선을 쥔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유림은 드레이크로부터 건네받은 단검을 움켜쥐었다.
유림이 다가오자 델타는 흥분한 듯 숨소리를 내쉬었다. 그녀는 개구리처럼 점프를 하며 벽을 밟았다. 벽 위에서 주르르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유림의 혼을 빼놓는 게 목적인지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어쩐지 모양새가 어설펐다.
유림은 남들보다 시력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접전일 경우 그녀는 스스로가 다른 장교들보다 판단력이 빠르고 정확하다고 자부했다. 눈앞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발견한 순간, 유림은 상대가 델타라고 확신했다. 델타는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녀석은 혼자였다. 아마 뒤에 남기고 온 동료들도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벌써 소리를 지르며 동족을 불러 댔을 테니까.
‘이상해.’
흥분한 게 아니라 숨이 벅찬 듯 녀석의 호흡이 거칠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의혹은 짙어졌다. 근방에 와서 보니 델타의 몸체가 이상하리만큼 가늘고 작았다.
─ 숙이세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유림은 몸을 낮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웁실론들이 마름모꼴 대형을 이룬 채 복도를 가득 채우고 서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처음에 유림을 향해 쇠꼬챙이 공격을 하던 웁실론 여성이었다. 그녀가 후드를 벗자 핏줄이 불거진 눈이 보였다. 여자의 ESP 능력은 물리적 접촉 없이 사물을 움직이는 염력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쇠붙이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활시위에 튕겨져 나가듯 빠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짧고 괴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델타가 내지른 소리였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몸을 흔들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림은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여자?’
어깨를 끌어안고 헉헉대는 인영은 이쪽을 흘끔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잠깐…….”
유림이 말릴 새도 없이 나츠는 총을 잡고 달려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소리와 함께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델타일 거라 예상하고 먼 곳을 응시하던 유림과 부대원들은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복도 바닥 위에 나츠가 왼쪽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나츠!”
델타는 이쪽을 빤히 쳐다보더니 뒤돌아서 후다닥 뛰었다. 황급히 도망치는 델타의 입에는 총이 물려 있었다. 드레이크가 연달아 총탄을 발사했다. 짐승처럼 네발로 땅을 짚고 뛰던 델타는 어느새 두 다리로 기립하더니 바람처럼 내달려 사라졌다.
“리 박사에게로 데려가!”
밧세바가 소리쳤다. 유림은 나츠를 일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초리는 정체불명의 델타가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에덴 타워 B4F 왓슨 연구소 ‘1급 제한 구역’.
관리자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집무관이 모습을 나타냈다.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여성 집무관은 반듯한 미소로 낙원의 관리자를 맞이했다.
─ 어서 오십시오, 박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 카인은 불편한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다. 흘끔거리며 복도를 쳐다보는 눈초리는 피곤해 보였다. 애써 멀리했던 장소였다. 새장 속의 새가 날아가 버린 후부터 연구동은 그에게 있어 존재의 가치를 상실했다.
복도 끝에 도달하자 원형으로 된 시멘트 벽이 개폐되고 하얀 연구원복을 입은 여성이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죠, 반즈 박사?”
“예, 대표님.”
“그래서…… 첨탑 꼭대기까지 비상 호출씩이나 해서 나를 소환한 이유가 뭘까요?”
엘 카인의 짜증 어린 미소에 반즈 박사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는 여전했다. 애쉬드 블론드 헤어에 창백한 푸른 기의 눈동자, 반듯하고 정중해 보이는 외모 속에 언뜻 비치는 광기.
카인은 서늘한 눈초리로 소리 없는 협박을 이었다. 여기까지 행차하게 만든 것에 대한 보람이 없다면 각오하라는 뉘앙스였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곳은 주로 델타에 관한 연구 및 실험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반즈 박사는 왓슨 연구소의 총괄 및 왓슨 대학의 교수직도 겸하고 있었다.
“잡힌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원으로 된 잠금 장치의 걸쇠가 풀리고, 두꺼운 쇠 벽이 미닫이처럼 옆으로 구르며 열렸다. 동굴처럼 깊은 방이 모습을 드러내자, 엘 카인은 빤히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집무관이 조명을 밝혔다. 환해진 안쪽을 보던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흰 바닥에 뚝뚝 떨어져 있는 피였다. 하얀 방 모퉁이에는 어깨에 쇠꼬챙이가 박힌 채 몸을 움츠리고 앉은 인영이 보였다.
“델타인가?”
반즈 박사는 대답 대신 허공에 보고서를 띄웠다. 푸른 실선으로 이루어진 입체 보고서 세 장이 나란히 나타났다.
“본 개체는 폐기된 델타입니다. 엊그제 미궁에 투입한 델타 부대의 일원이죠. 오른쪽 사진은 폐기 전 실험체 EZ14이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게 현재 모습입니다.”
엘 카인은 오른쪽 EZ14의 사진을 먼저 확인했다.
육식 동물처럼 크고 날카로운 골격과 치아, 파충류에 가까운 피부, 듬성듬성 빠진 머리털과 굽어 버린 척추, 퇴화된 지능과 시력 등 그녀는 일찍이 인간의 존엄성을 완벽하게 상실한 상태였다.
“이게 이렇게 변했다고? 반대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완전히는 아니지만 인간에 가깝게 돌아온 상태였다. 두드러지게 발달했던 광대와 턱은 작아지고 굽었던 등은 펴졌다. 피부색은 온전히 돌아왔고 시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다리와 어깨의 근육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지금 상태로만 본다면 그녀는 확실히 델타보다 인간에 가까웠다.
“이걸 보시죠.”
반즈 박사가 다음으로 띄운 것은 기밀용 문서였다.
프로젝트 지브 제로G-eve zero
이브에게 델타의 피를 주입한 뒤 생성된 항체로 델타를 역치료한 케이스였다. 물론 엘 카인 본인도 잘 알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브 제로를 지휘한 게 그 자신이었다.
“본 케이스와 유사한 회복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브가 탈출하면서 지브 제로는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지브 제로는 다른 델타들에게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오직 변이를 이루기 전 감염자들에게만 효력을 보였다.
“모든 델타는 돌연변이입니다. 새롭게 형성된 델타는 이전 치료제로도 치료할 수 없죠. 따라서 EZ14 역시 지브 제로를 복용하여 회복된 건 아닐 겁니다.”
보고를 마친 반즈 박사는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그동안 제자리걸음만 하던 연구에 마침내 한 줄기 빛이 내려온 것만 같았다.
“……이브.”
카인은 홀린 듯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예?”
“이브가 한 짓이야.”
“하지만 이브는 이미…….”
반즈 박사는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그러자 엘 카인이 그녀의 어깨를 확 움켜쥐며 물었다.
“죽었다고?”
그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비딱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그 자체로 기적인 존재란 걸 잊었습니까? 모르겠어요, 반즈 박사? 이건 그녀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내게 알려 준 거죠.”
반즈 박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낙원의 관리자가 된 그가 망령에 사로잡혔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헛소리로 치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일리가 있는 유언비어였다. 불쑥 제인 왓슨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브가 아니라면 이런 건 다른 누구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요.”
“예,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 이브가 가능했다면 제2의 이브가 출현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엘 카인은 그녀가 제시한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강화유리 벽 너머의 델타를 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대화는 통합니까?”
“대화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언어 기능도 좋아질 겁니다. 다만 기억의 혼재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태양의 도시 여자들 중 타인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죠?”
“입실론 메리 말씀이십니까?”
“델타의 기억을 엿보는 것도 가능합니까?”
“아직 시도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불러 오세요. 지금 당장이요. EZ14의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말입니다.”
“하지만 입실론과 델타의 접촉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엘 카인은 팔을 들어 그녀의 뒷말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잇새로 작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잘 들어요, 반즈 박사. 그녀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요. 알겠어요? 입실론 열 명이 죽든 백 명이 죽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그런 용도예요. 저렇게 내가 쥐새끼처럼 그녀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걸 보면 모르겠어요? 전쟁터에서 적장이 전리품을 취하면 어떻게 하던가요? 예쁘게 장식해서 진열하든지, 아니면 한 번 사용하고 죽여 버리죠. 반즈 박사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죠? 그러니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창백한 얼굴로 듣고 있던 반즈 박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로 유리 벽 너머를 쳐다보자 EZ14가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엘 카인은 그런 그녀를 향해 온화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반즈 박사는 모골이 송연해지다 못해 토악질이 일었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그는 옛날 어린 이브를 보며 짓던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EZ14를 보며 웃는 그가 지금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엘 카인은 감탄 어린 눈으로 두 손을 모으더니 기다릴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가 성탄절 선물을 기다리듯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입실론의 팔다리가 잘리든 델타의 팔다리가 잘리든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이브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제2의 이브가 나타난 건지, 그것부터 알아오세요. 나는 오로지 그걸 알고 싶어요. 알겠습니까?”
“네, 대표님.”
반즈 박사는 손가락 마디 사이를 하얗게 옹그려 쥐며 짧게 대답했다. 제 손과 발은 아직 무사했다. 그녀로서는 그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
* * *
제인 헬렌 왓슨은 겁에 질렸다. 태어나서 그런 끔찍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테러라니! 그것도 낙원의 상징이자 지상에 강림한 천사라 불리는 그녀의 생일 파티에서 말이었다.
물론 자신은 제일 먼저 안전한 장소로 이송되었지만 여전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난리 속에서 누구도 그녀의 현재 상태나 안위에 관하여 손톱만큼의 관심도 내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상자의 숫자는 백 단위를 넘었다고 한다. 낙원이 설립된 이래 초유의 사태였다. 평의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세우고 연일 머리를 맞댄 채 논쟁 중이었다. 제인 왓슨은 코웃음을 쳤다.
대체 누가 감히 로스트 헤븐을 공격한단 말인가? 국제 연맹도 건드리지 못하는 지상 위 유일한 낙원을 말이다. 겁 없는 테러리스트들의 정체와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쏟아지는 언론의 의혹과 질문에 평의회는 짧게 대꾸했다.
그들은 무정부 괴뢰 집단이며 본 테러의 목적은 낙원의 고위 인사들을 해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이들의 배후에 관해서는 현재 조사 중에 있으며, 아직까지는 그 어떠한 정보도 언론에 공개할 수 없음을 밝힌다.
모든 것은 다 정치적 쇼맨십에 불과했다. 평의회는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녀석들은 모래의 도시 바닥에 사는 해충들이다. 일명 고스트라 불리는 해충들에 관해 종종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유령처럼 숨어 사는 낙원 내 불법 체류자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조직 오베론과 유령의 군주. 모두 깡그리 죽여 없애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는 족속들이었다. 이런 벌레 같은 것들 때문에 자신의 생일 파티가 엉망이 되다니 끔찍했다.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건 평의회에서조차 그녀에게 비밀로 한 채 이번 생일 파티를 이용해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할 계획을 꾸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양쪽 모두 그녀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했다.
제인 왓슨은 며칠째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개인 집무관으로 부리는 안드로이드 이외엔 누구도 방으로 들이지 않았다.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였지만 사실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사건 당일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이 한 번 다녀갔을 뿐이다. 예상은 했지만 비참했다. 조부인 램지 왓슨 회장은 오늘내일하며 죽을 날만 바라보고 있었고, 방계 친족들은 이 기회에 그녀가 사고사라도 당하길 바랐을 터였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데 그들이 찾아올 리는 만무했다.
테러리스트들이 노린 표적은 낙원의 관리자였다. 카인은 무사할까? 제인은 곧 헛웃음을 지었다.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지. 그는 처음부터 반란 분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 대역도 세우고 특수부대도 대기시켜 놓았겠지. 파티의 주역인 그녀에게는 귀띔 한마디도 없이!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열 살 먹은 어린애 다루듯 했다.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해 놓고선 정작 그녀에게는 입맞춤 이상의 것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결혼을 미루는 것도 같은 맥락 선상의 일이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야망을 위해 정치적으로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녀가 알면서도 이용당해 준다는 걸 엘 카인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런 관계였다. 결코 평등하지 않은 저울 위에서 한쪽이 호구처럼 죄다 퍼 주는 일방적 사랑.
그럼에도 제인은 폭주 열차 같은 그녀의 감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긴 세월 동안 맺힌 설움이 그녀의 고집을 더욱 단단하게 영글게 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었다.
【알림】
방문객(1)이 있습니다.
허공에 뜬 메시지를 본 제인은 눈가를 훔치고선 몸을 일으켰다. 평의회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든 그녀는 방문객의 모습을 확인했다. 하늘색 원피스에 커다란 꽃바구니. 제인의 얼굴색이 대번 화사하게 밝아졌다.
“사샤!”
“안녕, 제인.”
사샤는 빙그레 웃으며 또각또각 걸어왔다. 촉망받는 무용가였던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얼굴과 등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인공다리와 피부 이식술이 성공리에 행해져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듯해 보였지만, 그녀의 삶에 새겨진 흉터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깊게 남아 있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아, 그렇지. 미안해, 이브.”
매번 사과하면서도 사샤는 꼭 그녀를 ‘제인’이라고 불렀다. 영리한 그녀가 같은 실수를 계속할 리는 없고, 고의적인 행동이라는 걸 제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인은 한 번도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 활화산 같은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몸은 좀 어때?”
“네 눈에는 어떤 걸로 보이니?”
사샤의 질문에 제인은 툴툴거리며 거실 탁자 위에 꽃바구니를 놓았다. 그러자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가사로봇이 다가와 재빠르게 찻잔과 쿠키를 준비했다.
“아주 멀쩡해 보여. 심기가 불편한 것 빼고는 말이야.”
사샤는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힐끔거리던 제인은 그런 자세도 가능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
“춤만 못 출 뿐이야.”
농담처럼 가볍게 답했지만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제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밖에 모르는 그녀일지라도 사샤만큼은 동정했다. 음악가 집안에서 촉망받는 무용가로 자라던 소녀에게서 두 다리를 빼앗다니 신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차라리 목숨을 앗아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고 이후 사샤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괴팍해졌다. 겉으로는 여전히 우아하고 세련된 얼굴로 웃으면서 이렇게 가끔 제인에게마저 못된 심통을 부리곤 했다. 그런 면이 은근히 엘 카인과 비슷해서 제인은 그런 사샤가 싫지 않았다.
사샤 피보바로바는 현재 낙원 홍보 영상의 총감독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제인이 친구라 여길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였다. 제인이 사샤를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했던 건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스타시티의 창립 기념 파티에서부터였다. 아브라함 회장의 아들인 알렉스가 마약을 하고 연회장에서 난동을 피우던 그날부터 제인은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다.
─ 아가씨, 태양의 도시로부터 온 익명의 수신입니다. 연결할까요?
제인의 홈 AI인 앨리스가 벽면 화면에 나타나 물었다. 제인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던 사샤는 쥐색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무슨 일이야?”
─ 입실론 하나가 아담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달그랑!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샤는 놀란 얼굴로 제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험상궂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샤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해? 아담이 직접 자신의 방으로 부른 거야?”
─ 그런 것 같습니다.
제인은 “악!” 소리를 내지르며 쿠키가 담겨 있던 그릇을 집어 던졌다. 와장창 깨지는 고가의 그릇을 보며 사샤는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하여간 성질머리 하나만 보자면 알렉스와 쌍벽을 이루는 수준이라니까? 알렉스의 경우는 선전척인 유전적 결함에 의한 인격 장애였지만, 제인은 그릇된 자녀 교육에 의해 빚어진 결과물이었다. 어릴 때 양친을 잃은 손녀가 가여운 나머지 오냐오냐 기른 왓슨 회장의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오점이라고나 할까?
“말도 안 돼. 갑자기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야?”
제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테이블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십 년이 넘도록 태양의 도시 근처는 쳐다보지도 않던 남자였다. 입실론뿐만 아니라, 그 어떤 여자도 엘 카인의 흥미를 끄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건 그녀 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소리였다.
제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핏줄이 선 눈으로 소리쳤다.
“누구야? 카인이 불러들였다는 그 계집애가 대체 누구냐고!”
【알림】
입실론 메리 님은 브리지로 와 주십시오.
메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림 메시지를 재차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겁이 난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지시에 따라 브리지에 간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언을 듣게 되었다.
─ 아담의 호출입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갑자기 난데없는 관리자의 부름이라니, 무슨 이유에서일까? 혹시 정체를 들킨 것일까?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드로이드 집무관은 빙긋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메리는 베이지색 제복을 입은 집무관을 흘끗거리며 문 앞에 섰다.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바닥 밑으로 아찔한 상공이 보인다. 이곳은 첨탑의 꼭대기 층이자 로스트 헤븐의 정점. 낙원의 관리자가 거주하는 집무실이었다.
─ 어서 오십시오, 입실론 메리 님.
테두리에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유리문이 열리자, 어스름한 조명이 보석처럼 박힌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오리엔탈 문양의 붉은 카펫이 집무실까지 길게 깔려 있었다. 아직 밖은 한창 밝은데 안쪽으로 걸어갈수록 은은한 밤공기를 밟는 듯 고요했다.
“반갑습니다, 입실론 메리.”
메리는 놀란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색소가 거의 없는 금발의 남자가 단정한 슈트를 입은 채 서 있었다. 적보라색 벨벳 의자 팔걸이에 손목을 걸친 자세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진회색 재킷이 근사하게 어울리는 미남자는 생긋 웃더니 손을 내밀어 자리를 안내했다.
“이쪽에 앉아요.”
방 안 곳곳에는 고가의 명화들이 걸려 있었다. 창가는 모두 암막 모드로 빛을 차단한 상태였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크리스털 조명이 동작을 감지해 앞길을 비춰 주었다.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메리는 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테이블을 옆으로 밀더니 그녀를 향해 바짝 당겨 앉았다. 향수를 뿌린 것 같지는 않은데 좋은 향기가 났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체취였다.
“나는 엘 카인이라고 합니다. 낙원의 주민들은 관리자 또는 아담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가까이서 그를 본 메리는 얼어붙은 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많이 놀랐나요?”
“네? 아니…… 아닙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런 그녀를 보던 엘 카인은 밀어 뒀던 테이블 위로 커피 잔을 내주었다. 잔을 건네받던 메리는 손가락 끝이 그의 손과 닿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엘 카인은 생긋 웃으며 뒤로 몸을 젖혔다.
“고, 고맙습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커피 잔을 들던 메리는 굳은 눈으로 다시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그는 깍지 낀 손으로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은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들었어요.”
“네?”
“초능력 말이에요.”
“아…… 입실론들은 거의 다 ESP를 가지고 있어요. 저만 딱히 특별한 건 아닙니다.”
“아니요, 특별해요. 그녀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죠. 타인과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은 몹시 귀중한 케이스거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메리는 커피 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동그랗게 파문을 그리고 있는 잔 속의 커피 물이 보였다. 그 속에 기대로 가득 찬 엘 카인의 눈이 비쳤다. 아, 알았다. 그가 부른 이유를.
“제가 무엇을 봐 드리면 됩니까?”
엘 카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영리한 여자였다. 눈치도 빠른 것 같고.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뒤쪽에 붉은 벽지가 발라진 벽이 미닫이처럼 옆으로 움직이며 열렸다.
숨겨진 방 안쪽에는 손발에 족쇄가 채워진 여자 하나가 스틸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바닥을 보던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메리와 눈이 마주치자 울먹이는 얼굴로 양손을 모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조아리며 모은 손을 높이 들고 싹싹 비볐다.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메리는 흘끔 뒤를 돌았다. 엘 카인은 천사처럼 상냥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긴 눈초리를 휘며 웃는 모습이 자꾸만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메리는 잡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애써 고개를 외면했다.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좋은 인상을 남겨서 그와 가까워져야 한다.
“그 여자에게서 무엇이 보입니까?”
메리는 여자가 포갠 양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눈물로 가득한 눈망울이 겁에 질린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죄책감이 일었지만 눈을 감고 집중했다. 빨려 들어가듯 인도된 기억 속으로 영상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투가 있었어요.”
엘 카인의 눈이 커졌다. 조각처럼 아름답고 품위 있던 얼굴에 흥분이 어렸다. 입꼬리가 쫙 찢어져 올라가더니 귀까지 걸렸다. 그의 얼굴 전체가 함박웃음으로 곡선을 그리며 일그러지고 있었다.
“전투! 그래, 당연히 전투가 있었겠죠. 그다음은요?”
“한 사람이 크게 다쳤어요. 그녀가…….”
메리는 놀란 듯 눈을 떴다. 여자를 잠시 쳐다보았다.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끙끙대더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던 메리의 눈초리가 그녀의 어깨로 향했다. 총상을 입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붕대로 감은 어깨를 물끄러미 보던 메리는 마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상대를 마구 물어뜯었어요.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군요. 어린아이 같아요.”
“어린아이? 여자애인가?”
“네, 여자아이에요.”
엘 카인은 주먹을 꽉 쥔 채 격한 숨을 토했다. 기쁜 듯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극심한 흥분에 젖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실험체 EZ14가 축 늘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돌아선 메리는 여자의 손을 놓았다. 엘 카인은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메리는 차분히 설명했다.
“대상의 의식이 없으면 기억을 엿볼 수가 없습니다.”
“흐음, 그래요?”
엘 카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쪽으로.” 하고 어디론가 그녀를 안내했다. 서재로 보이는 방이었다. 허공에는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실루엣이 얇은 커튼처럼 겹겹이 걸려 있었는데, 슈퍼컴퓨터 왓슨이 낙원의 관리자에게 올리는 보고서들이었다. 보아하니 확인하지 않은 창들이 수십 개는 되는 듯했다.
실크 커튼처럼 부유하는 홀로그램 창들을 통과하니, 벽 하나를 가득 채운 사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눈, 검은 머리칼, 부러질 듯 가녀려 보이는 소녀는 이쪽을 흘끗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강단 있는 눈빛과 꽉 다문 입술은 야리야리해 보이는 몸과 달리 고집스러운 인상을 연출했다.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는 소녀였다.
“어때요? 그녀의 기억 속에 이 소녀가 있던가요?”
“아니요. 이 아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엘 카인의 눈동자가 반쯤 감겼다. 못 믿겠다는 기색이었다. 그는 잠긴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왓슨.”
메리는 천장 쪽을 쳐다보았다.
─ 호흡과 맥박은 모두 정상입니다. 손동작, 시선, 눈 깜빡임, 땀 배출 등에서도 불안 증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7% 미만입니다.
엘 카인은 낭패가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초조한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메리는 불쾌한 눈빛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절 못 믿으시나 보군요.”
“기분 나빠 하지는 말아요. 당신을 못 믿는다는 건 아니니까요.”
그는 화를 억누른 눈으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모습 그대로일 리는 없겠죠. 벌써 십오 년이나 지났으니까요. 그럼 메리가 봤다는 그 어린애 말이에요. 그녀는 어떻게 생겼던가요?”
“본 게 아니고 들었습니다. 시력이 많이 안 좋은 편이었어요. 그래서 주변 상황이나 인물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색맹도 있는 것 같고…….”
색맹과 좋지 않은 시력. 뇌리를 스친 생각에 메리는 무심코 질문했다.
“델타였던 건가요? 그 여성분.”
“그렇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엘 카인은 토라진 아이처럼 흥미를 잃은 눈빛이었다. 의욕이 꺼진 눈초리는 타다 남은 장작처럼 산만하고 탁했다. 그는 서재에 놓인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더니 마지막으로 물었다.
“델타가 물어뜯은 아이는 죽었나요?”
“물린 게 아이라고 말씀드리진 않았는데요. 여자애가 소리를 질렀다고만 했죠.”
메리의 말을 듣던 그의 눈이 점차 다시 커졌다.
“물린 건 성인 여성이었습니다.”
곁눈질로 이브의 사진을 본 메리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마뱀이 눈 깜빡임 하나 없이 먹잇감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메리는 그의 동공 속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한 발 물러섰다. 갑자기 왜 이러지? 도대체 감정의 기복을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였다. 등에 쭈뼛쭈뼛 소름이 돋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천성적으로 남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생긴 여성이었죠? 몇 살쯤으로 보이던가요? 눈동자 색은? 머리 색은? 아, 색맹이라 했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돌아섰다. 메리가 물었다.
“왜 그러시죠?”
“판단이 힘들어서요.”
카인은 의자에 앉아 빙그르 돌았다. 회전하는 의자 위에 몸을 기댄 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호흡, 맥박, 시선 그런 것들은 조금만 훈련해도 조절할 수 있거든요.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구분하는 건 사실 왓슨보다 내가 좀 더 잘해요.”
의자가 멈췄다. 반쯤 돌려진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곁눈질로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겁을 주면 어느 정도 솔직해지죠. 인간들은 그런 족속이니까.”
“절 못 믿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못 믿는다는 건 아니에요.”
나긋나긋한 말투인데 날 선 느낌이 들었다. 친절하지만 칼날을 갈고 있는 듯한 매서운 살기가 입을 마르게 했다. 메리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안 그러면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릴 게 분명했다.
“메리는 필요 이상의 말은 결코 하지 않는군요. 아주 현명합니다.”
다시 일어선 그는 환하게 웃으며 칭찬했다. 금발의 천사가 감주를 든 채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다.
“비밀을 지닌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묘하거든요. 메리, 당신처럼요. 당신은 나를 왜 그렇게 쳐다볼까요? 괴물 쳐다보듯 본단 말이죠.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를 홀린 듯 바라볼 것이다. 완벽하리만큼 아름다운 외모, 친절한 말투와 다정한 손동작. 이 남자는 어떻게 하면 여성들이 설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을 봤습니까?”
“네?”
그가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메리의 눈동자는 풍랑 위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유림처럼 육탄전에 강하지 못했다. 설령 유림이라 해도 이 남자와 맞서서 이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정보원이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적의 정보를 빼내서 고양이에게 생선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 그런데 만약 그녀가 직접 생선을 발견한다면?
이 남자는 최우선 암살 대상이다.
그가 만약 진짜 낙원의 관리자라면 이 자리에서 죽여야 했다. 그건 두말할 여지조차 없었다. 로스트 헤븐 잠입 부대의 목적은 왓슨 3세의 파괴와 낙원의 관리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설령 요원 스스로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해도, 최적의 기회가 왔다면 절대적으로 임무 완수가 우선이다.
‘하지만 그럼 유림은?’
천장을 기던 델타가 노린 것은 용맹하게 싸우던 여자의 목덜미. 여자는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쫙 찢어 올린 채 익숙한 몸짓으로 델타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메리는 그녀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델타를 상대로 그렇게 싸울 수 있는 여전사는 그녀가 알기론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아까 나와 손이 닿았을 때, 무엇을 봤나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엘 카인이 바짝 얼굴을 붙인 채 묻고 있었다. 눈앞에서 커다랗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를 본 메리는 숨이 막힐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 머릿속까지 볼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말해 봐요, 메리. 나의 ‘무엇’을 봤죠?”
그는 눈 속을 채운 피의 무곡이 휘몰아치듯 웃었다.
이 남자가 찾고 있는 대상은 분명했다. 기억을 엿본 델타가 물어뜯은 주인공, 어쩌면 사진 속 붉은 눈의 소녀와 연관이 있는 여자.
……유림이 위험하다.
한편 폐쇄 도시 쪽 사람들은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애만 태우고 있었다. 비상 전력 외에는 모든 시스템이 멈춘 상황 속에서 의사는 제정신이 아닌 미치광이 박사 하나뿐, 그를 도와줄 의료 전문 안드로이드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나츠는?”
유림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수술실에서 나온 밧세바는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해 보이는 안색을 보니, 리 박사가 수술을 하는 내내 옆을 지킨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미치광이 박사가 수술한 거야? 제대로 한 거 맞아?”
“당신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제대로 한 것 같습니까?”
밧세바가 유림의 상처 부위를 짚으며 물었다. 유림은 ‘쳇’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 여자, 이죽거리며 비딱하게 말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군이 쏜 총탄에 당한 겁니까?”
모두의 시선이 드레이크에게로 향했다. 그는 인상을 쓰며 억울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전 아닙니다.”
“아군의 총탄이 아니야.”
“그럼…….”
“델타다.”
잠시 공백이 내려앉았다. 다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웁실론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델타는 도구를 사용할 만한 지능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물론 안 되지. 보통의 델타라면 말이야.”
“보통의 델타라면?”
누군가 묻자 유림은 턱을 괸 채 이어 말했다.
“생김새가 묘했어. 델타라기보다는 어쩐지 인간에 가까웠던 것 같아…….”
“소위님을 노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소위님 주위만 얼씬거렸어요.”
델타들은 무리를 지어 움직인다. 그리고 각 무리에는 리더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화이트 채플에서 델타들을 통솔하던 델타7처럼, 리더는 동료들에게 공격 신호를 보내거나 불리할 땐 후퇴를 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작전을 짜거나 무기를 이용하는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케이는 어디 갔어?”
유림이 묻자 드레이크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아 있던 밧세바는 고갯짓으로 중앙 계단 쪽을 가리켰다. 위층에 올라갔나? 유림은 의아한 얼굴로 그쪽을 바라보더니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츠의 옆을 지켜 줘. 나는 애덤슨 녀석을 찾아올 테니까. 조금 이따가 대책 회의를 한다.”
“알겠습니다.”
A동의 꼭대기 층은 과거에도 격벽으로 엄중히 닫힌 제한 구역이었다. 대부분의 1급 제한 구역은 은밀한 실험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에덴 타워의 최하층부도 그랬고, 이곳 폐쇄 도시의 연구동 건물들 지하나 맨 꼭대기 층이 그랬다.
비상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 어디선가 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푸른빛은 자주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노란색으로 바뀌고 다시 초록색으로 변했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격자무늬로 이루어진 대리석 바닥, 그곳을 비추는 환상적인 조명들. 케이는 의외란 표정으로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뜬 채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추억의 보물 상자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게 여기에 있을 줄이야. 게다가 아직 가동 중이라니, 그럼 드리밍 플라워는 지금도 누군가의 뇌파를 사용 중이란 얘긴가?
그는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의 도시에서 사용하는 가상 인터코스 프로그램도 드리밍 플라워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지만 여기에 남아 있는 건 오리지널 버전이었다. 정체불명의 과학자 K가 왓슨 그룹에 넘겼던 그 모습 그 세팅 그대로.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흘끗 돌아본 케이는 널따란 안쪽 홀로 진입했다. 상아색 바닥 위에 리 박사가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케이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상태를 살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박사?”
번쩍 눈을 뜬 리 박사의 동공이 공포로 휘둥그레 커졌다. 환해진 방 속에 등장한 천사가 날개를 단 악마처럼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여, 여긴 어떻게…….”
주섬주섬 일어난 그는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바닥에 코를 박고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또 꿈을 꾸는 건가?
“고개 들어.”
리 박사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놈의 망할 악몽은 매번 너무 현실적이다. 너무 리얼해. 그래서 도무지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꿈이란 걸 알면서도 그는 늘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구차하지만 치욕스러운 감정이 공포심을 지워 주진 못했다. 어쩔 수 없다. 리 박사는 울먹이며 양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죽인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해?”
케이는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사는 멍하니 손을 떨어뜨렸다. 저 표정,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입꼬리만 올려서 웃는 예쁜 미소, 인간미 없는 눈웃음. 저들이 처형을 내리기 전에 보이는 마지막 호의다.
“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카, 카인 대표님!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사, 살려 줘!”
그 순간 웃고 있던 케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차가워진 눈초리로 다리에 매달린 리 박사를 보며 ‘퍽’ 하고 걷어찼다. 그대로 벽까지 날아가 털썩 부딪힌 리는 바닥에 쓰러진 채 ‘쿨럭’ 기침을 토하며 배를 움켜쥐었다.
“그 녀석하고 착각하지 마.”
살기가 밴 목소리였다.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눈동자. 토성과 목성이 섞인 듯 신비로운 빛깔이 암적색으로 가라앉는다. 멍하니 케이를 보던 리 박사의 눈이 커졌다.
“아, 아담?”
“이제 좀 정신이 돌아왔나?”
케이는 정말 반가운 듯 웃었다. 물론 그 미소 속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기는 여전했지만.
“혹시 기억나?”
“기억? 뭐, 뭐가…….”
“배신하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리 박사는 생긋거리며 묻는 케이를 넋을 놓은 채 쳐다보았다. 왜소하고 창백했던 소년은 몰라볼 정도로 훌쩍 자라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딤 옆에서 무심하게 쳐다보던 아이가, 이십 센티는 더 커 버린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느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배신했어?”
케이는 천진한 얼굴로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저럴 때의 모습은 어릴 적과 똑같다. 무표정한 얼굴로 티 없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쳐다보는 눈초리. 도무지 어린아이로는 보이지 않던 태연함과 잔혹함.
“배신하지 않았어. 배신 같은 거 하지 않았다고!”
리 박사는 억울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내게 있어선 결과적으로 같아. 결국 이브를 되찾지 못했으니까.”
“이, 이브?”
“정말 다 잊은 거야?”
케이는 홀에 위치한 실험대 의자 위에 앉았다. 왕처럼 편하게 걸터앉은 그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담담하고 무심했던 소년의 눈빛에 새겨진 복수의 칼날이 달빛처럼 서늘하게 흘렀다.
“박사, 당신이 그랬지. 왓슨 3세를 완성시키면 이브를 돌려주겠다고. 약속대로 나는 왓슨 3세를 완성시켰어. 로스트 헤븐의 설계도 완벽하게 마쳤고. 하지만 당신은 이브를 돌려주지 않았어. 대신 어디론가 꼭꼭 숨어 버렸지. 우리가 한 거래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이.”
케이는 짜증난 눈빛으로 미간을 구겼다. 장밋빛 입술 새로 역겹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나왔다. 박사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다리를 덜덜 떨었다. 오줌이라도 지릴 기세였다.
죽일 가치도 없는 버러지 같은 놈.
차라리 고문을 하는 게 나을까? 살점을 하나씩 뜯어서 물고기 밥으로 주면서 말이다. 아니면 격벽 사이에 묶어 놓고 쇠문을 닫으며 압사시켜 죽일까? 그것도 아니면 눈알을 파고 혀를 뽑고 귀를 멀게 한 다음 온몸을 천천히 난도질할까?
온갖 살육 방법을 떠올리던 케이는 뭘 해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브는 죽고 당신만 살아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이, 이브도 살아 있어!”
리 박사의 말에 케이의 눈빛이 굳었다. 얼어붙어 있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분노한 나머지 웃음 아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감히 이브의 생사를 두고 말장난을 치려 해? 더 이상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이 남자의 세포 하나까지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이렇게까지 살의가 치솟는 것도 간만이었다.
“시체를 확인했어? 이브가 죽은 걸 직접 확인했냐고!”
리 박사가 애원하듯 물었다. 의자에서 내려오던 케이는 침묵했다. 아까보다 더 화가 난 얼굴이었다. 하지만 뭔가 걸린다는 눈초리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리 박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턱 끝에 땀이 성글성글 맺혔다. 그는 빠르게 바닥을 기어 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브는 살아 있어.”
“…….”
“살아 있다고.”
고요히 일렁이던 케이의 눈동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힐끔 아래를 내려다본 그의 눈초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죽지 않았…… 크헉!”
리 박사의 목을 움켜쥔 케이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리 박사는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목을 죈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살려 달라고 입 모양으로 뻐끔거리는 걸 보며 케이는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또 간사한 혓바닥을 놀려 살길을 찾으려 하는구나.”
리 박사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짜낸 계책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일순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브는 그에게 있어 절대적인 약점이었다. 살아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그를 무장해제시킨다.
누구든 이브를 빌미 삼아 그를 흔들려고 한다면 산 채로 폐를 쥐어뜯을 것이다. 맹세하건대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고문하다 죽일 것이다. 케이는 그의 목젖을 누른 손가락 끝에 천천히 힘을 주며 말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실제로 느껴 본 적 있어? 바로 이런 거야, 이런 느낌.”
리 박사는 창백한 얼굴로 허우적거렸다. 손아귀 힘이 대단했다.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숨 막혀 죽기 전에 목뼈가 부러져 죽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눈알이 뽑힐까?
케이와 눈이 마주친 리 박사는 숨을 헐떡였다. 붉고 커다란 동공. 핏물을 뚝뚝 떨어뜨린 것처럼 점 하나 없는 선홍색의 눈이다. 페트로비치의 딸, 그 아이의 눈처럼. 피로 젖은 듯 섬뜩했던 그녀의 눈처럼.
‘사람이…… 아닌가?’
리 박사는 컥컥거리며 눈알을 뒤집었다. 숨 막히는 입술 새로 끊어질 듯 말을 새어 나왔다.
“내가…… 봐, 봤어! 허, 허억…… 이브를…… 봐, 봤다고…… 쿨럭!”
툭.
손이 풀리자 허공에 떠 있던 리 박사의 몸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넘어오는 숨에 목과 폐부가 타는 듯 뜨거웠다.
케이는 리 박사를 서늘하게 응시했다. 어느새 그의 붉은 눈은 투명한 연갈색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자코 있던 그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어디서 봤는데?”
단정한 음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비열한 미치광이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미끼를 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이브인걸. 이브에 관한 건 저항할 수 없어. 리 박사도 그걸 알기 때문에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겠지.
“이브를 어디서 봤냐고 묻잖아.”
케이는 그의 정수리를 뽑을 듯 쥐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 뇌수부터 가랑이까지 몸을 절반으로 찢어 버릴 기세였다. 혓바닥이라도 잡아서 뽑아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자제하고 있었다.
“여, 여기에 있어.”
리 박사는 과호흡이 오는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벌게진 얼굴과 파리해진 입술을 보니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여기에 있다고?’
온몸에 잔경련이 일었다.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리 박사는 기침을 하더니 풀린 눈으로 ‘허억, 허억’ 천장을 보고 누웠다. 조바심이 난 케이는 몸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박사의 턱을 잡아 억지로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똑바로 말해. 이브가 여기 있다는 게 무슨 뜻이야?”
이브는 죽었다. 노아가 그렇게 말했다. 섬광 속에서 시체는 찾을 수조차 없게 갈기갈기 찢겨 버렸노라고.
상실의 고통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노아가 한 말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그녀가 피를 흘리며 멀어지는 것을 보았기에, 그 손을 놓친 건 자기 자신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며칠을, 몇 달을, 아니, 몇 년을 멍하니 보냈다.
리 박사는 빗뜬 눈을 흘겼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비밀스레 눈초리를 옮겼다.
“그녀는 낙원에 있어.”
케이의 눈이 커졌다. 눈앞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로스트 헤븐 내에 있다고!”
부릅뜬 눈으로 소리친 리 박사는 웩웩거리며 토악질을 했다. 믿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담이 코앞에 있는 그녀를 몰라보는 건 그의 책임이 아니니까.
“이곳에 있어, 이브가 낙원에…….”
흐느끼며 중얼거리던 리 박사는 초점을 잃더니 바닥에 스르륵 엎어져 정신을 잃었다. 케이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 노아, 이브는 어떻게 됐어?
초점 풀린 눈이 먼 곳을 응시했다.
─ 죽었어?
생각해 보면 노아는 그녀가 ‘죽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표현과 상황적 묘사로 죽음을 연출했을 뿐.
─ 이브의 얼굴이 잘 생각나질 않아.
─ 찰나의 기억이니까요.
입가에 서늘한 입김이 맺혔다. 잔물결이 이는 눈동자 속에는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파도치고 있었다.
─ 정유림 소위, 일명 브루클린의 성녀, 지옥교관. 연맹군 측의 스파이이자 입실론 메리와는 자매입니다. 최근 낙원을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평의원 연쇄살인의 주범이기도 하죠. 낙원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입니다. 최전방에서 그녀가 포획한 델타 수와 제압까지 걸린 시간은 아직도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이니…….
─ 훌륭한 전투 요원, 그게 다인가?
─ 정 소위는 조금 특별한 체질입니다. 입실론들의 정신감응 능력이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는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 감염된 적은?
─ 엄밀히 말하면 없습니다.
─ 그래서…… 지금 그녀를 나의 권속으로 맞이하라?
─ 예,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자면 억지로 관계를 맺는 건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을 얻어서 관계를 맺으십시오. 이건 제가 마스터께 드리는 숙제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파편들이 순식간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오늘 저녁은 카레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시선을 끌었고,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유림의 모든 것은 그의 기억 저편에 위치한 조각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며 무언가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지가 않아서 매번 답답하고 불안했다.
─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중사님을 미치게 만드는 그 감정이.
가끔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유림은 밤새 악몽에 시달린 뒤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유령처럼 거실을 배회했다. 몽유병 환자처럼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하는 듯한 얼굴로 창밖을 빤히 내다보고는 했다.
그녀가 공포에 젖은 눈으로 노려보던 대상은 늘 하나였다. 에덴타워. 사연을 모르는 이라도 한눈에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살기를 품고선, 유림은 이를 악문 채 그렇게 한참을 창가에 기대 서 있고는 했다.
─ 유림, 혹시 고소공포증 있어요?
─ 어떻게 알았어? 물 공포증도 있어서 바다나 강가 근처는 완전 쥐약이야.
─ 공중훈련 때요, 숨이 거칠어지던 걸요. 흐음, 소위님한테 약점이 다 있다니…… 적어놔야겠네요.
─ 죽을래?
수면에 잠긴 달처럼 농몽해진 눈빛이 점차 흐리게 내리 감겼다. 케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멍하니 대리석 바닥을 응시했다.
─ 아담이 근처에 오면 이브는 콧노래가 나와.
아침마다 우유를 마시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유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오래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에서 요리하던 사라의 모습과 겹쳐지며 눈앞을 가득 채웠다.
─ 이브는 스트로베리 캐럿 케이크!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 마다(Mada)! 사랑해!
케이는 목울대를 삼키며 잇새를 악물었다. 가슴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바닥에 비친 제 모습을 응시했다. 다 큰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울먹이며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포기하지 마, 이브를 포기하지 마…….
지난 십오 년 간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던 호흡은 이내 미친놈처럼 헛웃음으로 변했다.
“이브…….”
안타까워서 차마 내뱉지도 못했던 그녀의 이름이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속삭여져 나왔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굳은 채 경련했다. 참고 억누르던 신음이 오열에 섞여 흐느낌으로 터져 나왔다. 숨죽여 내는 울음소리가 텅 빈 공기를 가득 채우며 빗소리처럼 먹먹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간신히 진정한 케이는 손등으로 눈두덩을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조각처럼 매끈한 눈가는 붉기로 가득했다. 이를 악물고 주먹 쥐었던 손바닥은 손톱에 의해 핏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투명한 눈동자 속에 알혼 섬의 붉은 언덕 나발루니예가 비쳤다. 백야가 떠 있던 날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속 응어리를 적셨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하며 그를 어루만졌다.
복잡미묘한 눈빛은 마음의 준비를 하듯 허공을 응시했다.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차분하게 정리한 그는 울어서 잠긴 목을 가다듬은 뒤 몸을 일으켰다.
건물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긴장한 듯 굳어있던 케이의 눈초리가 멈칫 부드럽게 풀렸다.
─ 삼 분 준다. 늦으면 벌칙이야, 케이.
으름장을 놓던 유림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떠오르자 심장이 두근거리며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지금이라면 그 어떤 벌칙도 달콤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지난 십오 년 간 그가 견딘 암흑보다 더한 벌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낙원에 온 걸 환영한다, 애덤슨 훈련병.
조금 천천히 가볼까? 발걸음이 느릿하게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건조하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 위에는 어느새 옅은 호선을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