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남겨진 기록】
2082년 2월 1일.
타이탄을 모델로 한 슈퍼컴퓨터 왓슨 1세 완성.
로스트 헤븐 내 스마트 더스트 설치 완료.
제1차 베타 테스트 실시.
2082년 3월 1일.
제2차 베타 테스트 실시.
【☞ 관리자 이름을 입력해 주십시오.】
Adam
【☞ 첫 번째 보안 질문을 입력해 주십시오.】
이브가 좋아하는 음식은?
매일 밤 꿈을 꾼다.
그곳에서 그녀는 알혼 섬의 나비가 되어 날고 있다.
“안녕, 이브?”
어떻게 자리에 앉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떠 보니 그 남자가 있었다.
“또 체중이 빠졌네.”
“…….”
“자꾸 식사 거부하면 또 억지로 영양제를 투입할 수밖에 없어. 이브는 주삿바늘을 싫어하잖아?”
엘 카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대화를 했다. 대개는 제 할 말만 쏟아 낸 채 말없이 그녀와 눈 맞춤을 시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곳은 어때? 전에 지내던 곳보다 마음에 들어?”
이브는 텅 빈 눈으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곁눈질로 흘끔 사면을 훑었다. 하얀 벽,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 중앙에 위치한 하얀 침대에는 인공 수면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유리 덮개가 달린 침대는 시체를 넣는 대리석 관처럼 보였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관. 그녀는 저곳에 누울 때마다 죽음을 상상했다.
“드리밍 플라워34)라는 테크놀로지를 들어 봤니?”
그는 그녀의 수면 기록을 살펴보며 물었다.
“꿈을 기록하고 형상화시키는 기술이야. 최면 상태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고 하던데, 그걸 들여올까 고민 중이거든. 아마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엘 카인은 귀족적인 말투를 구사했다. 몸짓이나 고갯짓, 눈짓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선이 아름답다. 그런 점은 문득 아담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웃는 모양새라든지 서늘하지만 예쁜 눈매와 이목구비는 전체적으로 아담을 닮았다. 불쾌하고 구역질 나지만 특유의 유려한 외모와 분위기가 닮은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무의식적인 세계를 궁금해하잖아. 매일같이 본인들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도 그걸 감추고 싶어 하지. 그러면서 남의 것은 엿보고 싶어 하고 말이야. 그런 게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었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그녀는 그가 하는 이야기의 80퍼센트는 보통 듣고 흘려버렸다. 어차피 그 역시 딱히 그녀의 대꾸를 바라고 주절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젠 그 이유를 알았다. 그에게 있어 그녀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본인의 생각을 관철시킬 뿐, 어차피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 따윈 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네 머릿속이 궁금해, 이브.”
엘 카인은 그녀를 향해 얼굴을 바짝 붙여 오며 말했다. 검붉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피에 잠긴 눈초리는 블랙홀처럼 빨려 갈 듯 깊었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읽을 수 없는 눈.
“무슨 꿈을 꾸는지, 그곳에서 넌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대화하는지, 매일 밤 네가 그리 애타게 부르는 사람은 누군지, 그자의 이름이 뭔지, 그곳에 내가 나타난 적은 없는지…….”
그의 목소리가 점차 사납고 날 선 채 가라앉았다. 검을 움켜쥔 손이 숨을 고르듯,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대상도 알지 못한 채 질투를 하고 있었다. 연하늘빛 눈동자가 먹구름 끼듯 흐려졌다. 탁한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격해지고 있었다.
“이브가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
그의 속삭임이 귓가에 스치자 살갗에 오도독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초리에 고인 열망이 역겨웠다.
“이브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기다리는 건 그만둬. 널 지치게 할 뿐이야.”
“틀렸어.”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카인의 눈이 커졌다. 뜻밖에도 입을 연 그녀의 모습이 기쁜지 그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곡선인지 일그러짐인지 알 수 없는 미소가 해사하게 번졌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적인 눈초리에 그의 표정은 다시 굳어 갔다.
“이브를 구하러 온다고 했어. 그러니까 여기서 나갈 거야. 아저씨랑은 같이 있지 않아.”
“누가 온다고 했는데?”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눈빛을 보던 그의 입술 새로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거슬리네.”
모친은 죽고 부친은 살아 있다고 했던가.
희망의 싹은 잘라 버리는 편이 좋다. 그녀가 부질없는 기약에 기대지 않도록.
그는 일어서면서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며 이빨을 세웠다. 손가락을 물어뜯을 기세로 사납게 눈을 치켜뜬 그녀의 모습에 엘 카인은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이브는 나만 있으면 돼. 알았지?”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퇴장했다. 이브는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일순 살기를 번뜩이던 그의 눈초리가 잊히지 않는다. 손가락 끝을 바들바들 떨던 이브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오므린 채 깨물었다.
“아담은 반드시 올 거야.”
에덴 타워의 최하층, 그곳에 갇힌 나비는 접힌 날개를 파닥이며 몸을 웅크렸다.
에덴 타워의 최상부 ‘태양의 도시’ 입실론 거주 지역.
에덴 타워 꼭대기에 위치한 둥근 고리형의 도시에서는 한참 평화로운 다과회가 열리고 있었다. 입실론들은 모두 공중 정원에 모여 새로운 주거지에 대한 평가를 나눴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로스트 헤븐의 생활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 밧세바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이천 년 후쯤이면 어떨까? 미래의 인류는 로스트 헤븐을 과거 아틀란티스처럼 전설 속 파라다이스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세의 고고학자들, 혹은 탐험가들 중 누군가가 중세 수도원의 탑에 갇힌 여인들처럼 이곳에서 여명을 부지한 우리들의 역사를 발견해 줄지도 모르지.
로스트 헤븐의 꽃이라는 우리들의 가련한 운명을.
“우욱!”
“밧세바 님!”
정원을 거닐던 입실론 하나가 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속이 불편하신가 봐요.”
현재 로스트 헤븐에서 활성화된 구역은 본사가 들어올 에덴 타워와 연구동들이 모여 있는 클리닉 센터뿐이었다.
밧세바는 방으로 돌아와 잠시 제자리걸음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달력 좀 띄워 봐.”
1월부터 한 달, 두 달, 십 주…… 월경이 없다.
그녀의 눈이 얼어붙은 채 커졌다.
“그럴 리가…….”
고민 끝에 그녀가 연락을 취한 사람은 리 박사였다. 그래도 로스트 헤븐 내에서 믿을 만한 존재는 이 남자뿐이었다. 어차피 로스트 헤븐 내에서 행하는 모든 검사는 왓슨과 스마트 더스트의 감시를 받을 테니까.
“축하해, 쌍둥이야.”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밧세바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충격과 환희가 교차한 그녀의 얼굴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벌써 십 주짼데 정말 몰랐단 말이야?”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아이라니…… 임신이라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리 박사는 피곤한 듯 눈을 주무르며 물었다.
“엘 카인이니?”
“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 그는 가슴이 묵직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확인 사살을 당하니 입속이 쓰렸다.
‘바보 같이, 바보 같이…….’
누구를 향한 비난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좌절한 채 주먹을 쥐던 그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패닉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을 했다. 다시 검사 기록을 살폈다. 고민에 잠긴 그의 손이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그는 서랍을 열어 손바닥만 한 거울을 세웠다.
“최근 뭔가 느껴진 건 없었고?”
밧세바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불과 몇 달 만에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진 여자가 앉아 있었다. 주름이 늘었다. 피부색은 칙칙해졌다. 눈 밑은 늘어지고 안질도 흐렸다. 입매는 점점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점점 빨라지네요.”
세월의 흐름이.
젊음의 소진이.
꽤 담담한 태도였다. 하지만 불안한 눈빛은 그녀의 자세처럼 꼿꼿하지 못했다. 육 개월 만에 한 검사였다. 보통 삼 개월에 한 번씩 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밧세바는 점점 검사를 미뤘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그래, 점점 빨라지고 있어.”
“늦추는 방법은 없다면서요.”
“아직은.”
그녀는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애를 낳기 전까진 괜찮겠죠.”
리는 잠시 침묵했다.
“일단 태아의 유전자 검사 결과부터 설명할게.”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그는 투명한 책상에 뜬 검사 결과를 보며 어떻게 말문을 떼야 할지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아이를 꼭 낳아야겠니?”
그의 질문에 밧세바는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녀는 몸을 일으켜 리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데이터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일찍이 학자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던 그녀였지만 이 정도 결과는 해석할 수 있었다. 일단 아이들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런 유전자 변형은 처음 봐. 살아서 태어나면 다행이겠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리 박사는 곁눈질로 밧세바의 표정을 살폈다. 데이터 화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턱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리문 잇새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낳을 거예요.”
“말했잖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WNT3 변형인데, 이 아이 같은 경우 팔다리마저 제대로 붙어 있을지 의문이야.”
아니, 팔다리는 없을 거다.
WNT3 유전자 돌변연이는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을 일으킨다. 태어날 아이는 팔다리는 물론이고 신체 각 기관에 심각한 기형이 존재할 것이다. 특히 폐는 기능을 하기라도 한다면 다행이다.
밧세바는 데이터를 닫고 돌아앉더니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나 때문인가요? 내가 입실론이라서?”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어쨌든 입실론이 임신을 한 경우는 처음이니까.”
“쌍둥이라면서요. 나머지 하나는요?”
“이 아이는 일단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물론 이 아이도 정상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 아이처럼 생명에 지장이 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굳이 그녀에게 미리부터 알릴 이유는 없었다.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 속일 테니까.
“나는 그것보다 바이러스가 더 걱정이야.”
“바이러스요?”
“신종 바이러스와 입실론은 공생 관계야. 바이러스는 숙주인 입실론을 공격하지 않는 것일 뿐 소멸된 건 아니지. 태아에게 영향이 미칠 수도 있어.”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치료제는 사실상 이미 완성 단계야. 복용하면 일단 바이러스 감염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임산부가 복용한 사례는 없지만.”
“임상 결과 부작용이 발견되었다고 들었어요.”
리 박사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밧세바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엘 카인 다음으로 에덴 타워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요. 입실론들 모두가 내게 와서 밤마다 속닥거리는데 이 정도 정보쯤은 당연한 거죠.”
어느새 그녀는 태양의 도시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정보력에선 이제 그와 거의 동등한 입장이 된 셈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 그녀는 전보다 더 의연하고 담대해졌다.
─그래서 그 일본인 인턴에게 반했다고?
─관심이 있다는 거지.
─뭘 망설여? 대시해 봐.
─너무 어려. 이제 열아홉이야.
─진짜 좋아하나 보네.
─날 무슨 쭉정이 보듯 한다고.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바딤과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되돌아가서 고칠 수 없는 과거의 편린이 갈비뼈 언저리를 시큰시큰하게 만든다. 한없이 어리고 귀엽던 소녀였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동년배 혹은 가까운 선후배의 모습이었다. 그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맺혔다.
“부작용이라기보다는 반작용이라고 보는 게 옳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치료제를 복용한 입실론들 중 상당수가 몇 달 뒤에 숨졌어.”
“공식 석상에서는 참가자들 모두 완치됐다고 발표하셨잖아요.”
“완치는 됐었지. 그리고 죽었어.”
“왜요?”
“네 말대로 치료제 임상 시험 결과, 두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어. 첫 번째는 치료제를 복용한 입실론들 대다수가 ESP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
밧세바는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얼굴이었다.
“두 번째는…….”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리 박사의 눈이 잠시 그녀의 손을 응시했다. 곱고 하얀 손. 그러나 마디마디 주름지고 접힌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입실론이었을 때보다 약 두 배에서 열 배 가까이 빨라지는 노화. 노화의 가속 정도는 개인마다 달랐어.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고.”
임상 시험을 거친 입실론들 중 약 15퍼센트가 한 달 안에 숨졌다. 사인은 급격한 노화로 인한 심정지 혹은 심근경색. 나머지 인원의 사분의 일은 의식이 없는 상태다.
“마치 묶어 두었던 시간의 흐름이 한꺼번에 닥친 것처럼 순식간에 늙더군.”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바스러지는 꽃잎처럼 시들며 가라앉았다.
“너도 알다시피 입실론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급격한 노화야. 입실론은 바이러스와 함께 ESP라는 초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노화는 그 능력에 대한 대가라는 게 지금까지 우리가 세운 가설이었어. 그렇다면 치료제를 복용하고 바이러스가 소멸한 이후에는 어떨까? 처음에는 바이러스와 함께 ESP 능력도 사라지고 노화 속도도 원상태로 되돌아올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밧세바는 리 박사 대신 중얼거리며 어두워진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리 박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네가 일전에 그랬지? 넌 바이러스로부터 선택받았다고.”
─그들은 잠재력 있는 여자들만 살려 줘요. ESP라는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자들만요. 그래서 우리의 죽음도 연기해 준 거죠. 쓸모가 있으니까.
“만약 네 말대로 정말 바이러스가 이미 죽었어야 할 여자들에게 시간을 벌어 주고 있던 거라면 그 이유가 뭘까? 왜 숙주인 여자들에게 초능력과 미모를 선사한 거지?”
밧세바는 말없이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정상이 아닌 태아들.
기적적으로 가진 아기들이지만 제대로 살아서 나오기도 힘들다고 했다.
최근 바이러스는 자멸하듯 그녀의 시곗바늘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선택받은 여자들을 살려 둔다. 그러나 목적 달성에 실패하거나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지면 늦춰 놨던 시곗바늘을 놓아 버린다. 쓸모가 없어진 골동품을 처리하는 것처럼.
“나도 실패작이라 여긴 걸까요?”
그녀가 거울 속을 쳐다보며 중얼거리자, 리 박사는 계속 배를 쓰다듬는 밧세바의 손을 쳐다보았다.
“박사님 말대로라면 우린 이미 죽은 사람들이네요. 송장과 다름없는 몸이 임신을 해서 죄 없는 아가들이 이렇게 됐나 봐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래도 낳고 싶어요.”
울컥한 목소리로 말한 밧세바의 얼굴엔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녀는 애원하듯 물었다.
“우린 정말 구원받을 길이 없나요?”
“그, 그게…… 치료제는 아직 더 개발 중이니까…….”
리 박사는 더듬거리며 붉어진 눈시울을 손으로 슥 문질렀다. 사실상 완성 단계라고 말한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밧세바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체념하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입 밖에 내진 않지만 입실론들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죽음의 유예 판정.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라앉아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라는 말이 맞아요. 영혼을 판값이죠. 우리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거예요. 잔존물 같은 삶…….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내 빛나던 청춘, 하얀 도화지 같던 인생을 망친 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리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위로를 해 주고는 싶은데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에 담긴 어둠은 짙고 깊었다. 무엇을 끌어안고 있는지, 얼마나 잠겨 버렸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아득한 구렁 속에 있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했다.
“아이들은 면역이 있을지도 몰라.”
사라는 임신한 상태에서 감염이 된 걸로 추측하고 있다. 그녀의 감염 경로는 아직도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확실한 건 사라의 경우 감염 이후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던 것과 달리, 이브는 바이러스로부터 무사했다는 것이다.
“면역이라…….”
밧세바는 추운지 몸을 떨며 일어섰다.
“이만 가야겠어요. 자리를 오래 비우면 의심을 받을 거예요.”
리도 동의했다. 그는 검사 결과를 끄다가 문득 물었다.
“네 ESP 말이야. 정확히 무슨 능력이었지?”
입실론들이 가지고 있는 ESP 능력은 일급 기밀이었다. 그녀들의 개인 주치의인 인공지능 의료 서비스 기기만이 정보를 보관할 수 있으며, 입실론에 관한 기밀 파일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은 엘 카인을 비롯해 극소수의 연구원들만 갖고 있었다. 아쉽게도 리는 그에 해당되지 않았다.
“단기 기억 조작이요.”
밧세바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전에 들어 본 척하며 넘겨짚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굳이 뭘 숨기나 싶었다. 어쨌든 그녀에게 있어 그는 앞으로도 요긴한 도움을 줄 인물이었다.
정작 대답을 해 주니 놀랐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저럴 때 보면 저 남자도 의외로 허점투성이다.
“왜 그 능력을 엘 카인에게 쓰지 않는 거야?”
“카인에게요?”
“능력을 써서 그가 널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아.”
밧세바는 황당한지 웃음을 터뜨렸다.
“할 수 있으면 벌써 했겠죠.”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첫 ESP 능력을 시도했던 그날의 기억을. 그 충격과 공포란…….
“그에게 우리 능력은 통하지 않아요. 일벌이 여왕벌 공격하는 거 봤어요?”
그녀는 그렇게 쏘아붙이더니 우울해진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잠시 후 밧세바는 짧게 목례한 뒤 나갔다. 리는 그녀가 떠난 뒤로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채 서 있었다.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그는 흐려진 눈빛을 가늘게 좁히더니 미간을 구겼다. 아랫배를 계속 매만지던 밧세바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책상을 내리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엘 카인.
그 남자를 만나야 했다.
* * *
“오셨습니까? 리 박사님.”
엘 카인은 빙그르르 돌아앉았다. 그는 가죽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손깍지를 끼고 리를 올려다보았다. 눈높이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이 남자는 아주 단순한 동작으로 상대를 제압할 줄 알았다.
리는 뒷짐을 지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위해 고개를 숙이는 건 부끄럽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치욕은 패배감이다. 그에게 주먹 하나 시원하게 날릴 수 없는 상황과 위치에 대한 좌절감.
“밧세바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래요?”
엘 카인은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지만 적지 않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사님께 말씀드리지 않을 생각인 것 같지만,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확실합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진단을…….”
“아니, 내 아이인 게 확실하냐는 말입니다.”
리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엘 카인은 의문 어린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기쁨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짜증, 혹은 분노. 어쩌면 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이 확신하더군요. 저야 이사님의 DNA 정보가 없으니 매치해 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지우라고 하세요.”
“예?”
그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아이, 지우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 하지만 그 아이들은 이사님의…….”
“그래서 지우라는 겁니다. 다른 수컷의 아이였으면 내가 왜 상관하나요?”
그는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아.” 하고 숨을 멈추더니 빙긋 웃으며 정정했다.
“다른 남자의 아이였으면 말이죠.”
“밧세바는 낳고 싶어 합니다.”
“안 됩니다.”
엘 카인은 흘끗 책상 위에 떠올라 있는 스크린을 응시했다. 슬쩍 곁눈질로 훔쳐보니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를 누군가의 모습이 켜져 있었다. 자세히는 못 봤지만 여성이었다. 그것도 아직 덜 자란 어린 소녀.
‘제인 왓슨인가?’
리가 추리를 하던 사이 카인이 다시 대꾸했다.
“내 아이를 낳을 여자는 이미 정해져 있거든요. 그러니 리 박사님께서 책임지고 포기시키세요. 제가 직접 하는 건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요. 그건 보통…… 대개의 사람들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잖아요. 그렇죠?”
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랄moral이란 게 없는 건가? 아니, 사람이 맞긴 한 걸까? 다른 남자의 아이였다면 상관 안 했을 거라고? 자신이 직접 하면 그건 모양새가 안 좋지 않겠냐고? 이 남자는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측은지심 같은 건 전혀 못 느끼는 건가? 몇 년간 살을 섞었던 여자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였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기계처럼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치가 떨려 왔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의자를 돌리던 엘 카인은 어깨 너머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뭐라고 했죠?”
“신종 바이러스. 그거 당신이 퍼뜨린 겁니까?”
친절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한층 가늘어진 그의 눈초리에 언뜻 오싹한 기운이 스치듯 감돌았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최초의 감염자는 밧세바, 그녀였죠. 그녀가 바이러스에 노출될 만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밖에 없습니다. 유일하게 성관계를 맺은 사람이었고, 동거하다시피 같이 생활했던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당신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신종 바이러스에 노출된 남성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만 무사합니다. 오직 당신만! 이게 우연입니까? 당신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남성 생존자입니다. 아니, 애초에 감염된 적이 있기는 했나 싶습니다만, 운이 좋았던 걸까요? 운만으로도 감염을 피할 수 있는 겁니까?”
“…….”
“당신이 왓슨 제약회사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종 바이러스 대책 팀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실론들을 모았죠. 생존자들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치료제 개발을 한다는 목적하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당신과 접점이 있더군요. 1차 접촉이 아니더라도 2차, 3차 접촉 끝에는 늘, 엘 카인 당신이 있었습니다. ‘신종 바이러스에 노출된 남자는 무조건 사망한다.’ 이 전제가 당신을 보호해 준 겁니다. 어쩌면 당신이 바로 신종 바이러스의 시발점일지도 모르는데!”
리는 숨을 몰아쉬며 엘 카인을 노려보았다.
“흥미로운 가설이군요.”
팔짱을 낀 그는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그는 움푹 파인 뺨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꽤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리 박사님, 당신은 역시 우수한 인력입니다. 이대로 잃기는 아까울 정도로요.”
리는 이를 악물었다. 가설이 맞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녀석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빛나는 웃음이 가득했을 그런 인생을.
“진짜 당신이 신종 바이러스를 퍼뜨린 겁니까? 맞다면 왜요? 대체 이유가 뭡니까? 무슨 짓거리를 꾸미고 있느냔 말입니다!”
─아이들은 면역이 있을지도 몰라.
─면역이라…….
뭔가를 곱씹듯 생각하며 중얼거리던 밧세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대체 엘 카인에 대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이 남자를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끊어 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박사님은 종교가 있습니까?”
엘 카인은 느닷없이 방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이곳은 에덴 타워의 최상층, 낙원의 관리자실이었다. 아직 단장이 마무리되지 않아 조금 휑한 느낌이 있지만, 벽 곳곳에 고가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미술품의 대부분은 신화 속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엘 카인이 직접 고르고 구매했을 법한 작품들. 천천히 걷던 그는 한 장의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제우스라는 신의 여성 편력은 유명합니다. 그는 본모습을 숨긴 채 수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했죠.”
그가 눈빛으로 가리킨 회화 속에는 광채를 두른 제우스와 그의 앞에 싸늘한 주검이 된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제우스는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그러게 왜 그랬어? 왜 나로 하여금 깰 수도 없는 스틱스 강의 맹세를 하게 했어? 헤라가 널 부추겼겠지. 그녀는 질투가 심하니까. 그렇다고 그 꾐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이 어리석은 여자야. 네 호기심이 널 죽음으로 몰아넣었구나!’
“이 그림은 제우스와 그의 연인인 세멜레의 이야기입니다. 제우스의 실체가 보고 싶었던 그녀는 그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 달라고 하죠.”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를 해 주세요. 무슨 소원이든 반드시 들어주시겠다고요!’
‘좋아,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를 하지. 자 아름다운 세멜레, 대체 네 소원이 무엇인데 그러느냐?’
‘제우스 님의 실체를 보고 싶어요. 제우스 님의 그 유명한 벼락도 함께요.’
“스틱스 강의 맹세는 신도 깰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제우스는 천상의 모습을 내보이고,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죽습니다. 신들은 때때로 인간을 벌하곤 했는데 이유는 언제나 간단했습니다. 그들의 언행이 주제를 모르고 선을 넘었기 때문이죠. 인간은 늘 신과 닮고 싶어 했어요. 절대자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그들의 모습은 꽤나 사랑스럽답니다.”
그는 잠시 쿡 웃었다. 리 박사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그들에게 헛된 욕망을 심어 주는지도 모릅니다. 좌절했을 때의 그들 표정은 정말이지, 신을 아주 즐겁게 해 주거든요.”
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는 회화 속 신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바이러스를 퍼뜨린 적이 없습니다.”
엘 카인은 미술품에 그려진 세멜레를 가엽다는 듯 응시했다. 누구를 빗대어 생각하는지 그의 눈동자에는 고조된 감정이 비쳤다. 겉보기에는 안쓰러워하는 눈빛. 그러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민을 가장한 조롱이었다.
“제우스는 그녀를 사랑해서 본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죽어 버린 겁니다. 제우스는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죽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너는 내 본모습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경고도 했습니다. 다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달래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멜레는 더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오히려 눈앞에 서 있는 그가 제우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괘씸한 의혹마저 가지게 되었습니다.”
엘 카인은 돌아서서 다시 리 박사를 응시했다. 고요한 그의 눈빛은 무심해 보였다. 그는 목소리를 낮춘 채 오싹한 어조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경고했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나는 널 죽이고 말 텐데. 농담이 아니야. 넌 죽고 말거야. 그런데도 정말 나를 원해?’ 그런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엘 카인!
─아름다운 엘 카인, 사랑해.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사랑해, 사랑해!
─차라리 날 죽여 줘…….
“그렇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죽어도 좋다는데, 본모습을 알게 된 순간 한 줌의 재가 될지언정, 끓어오르는 호기심과 소유욕을 참을 수가 없다는데.”
그는 한쪽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시원하게 터뜨리는 웃음소리는 공허하고 황량했다. 그것은 방 안을 광기로 가득 채웠다. 정신이 어지러웠다. 리는 주춤 뒤로 물러서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저,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웃음을 뚝 멈춘 그가 리 박사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를요?”
“그러니까…… 회의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내일…… 그래요, 내일 다시 찾아뵙죠.”
나가야 했다. 당장 저 남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 길로 나서서 밧세바를 데리고 도망치자. 그는 그녀를 죽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결코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엘 카인은 얇게 저민 눈초리로 도망치는 리 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서느렇게 직선을 그렸다.
“우리야.”
“예.”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남자가 차렷 자세를 하고 멈췄다. 리는 숨을 헉 들이켜며 뒷걸음질을 쳤다.
“드리밍 플라워, 아직 테스트 전이죠? 리 박사님께서 직접 체험을 해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안내해 드리도록 하세요.”
리 박사는 공포에 질린 눈초리로 머뭇거리며 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드리밍 플라워? 그게 뭐지?
“가시죠.”
우리야는 그의 양팔을 잡더니 사정없이 끌고 가기 시작했다. 리 박사는 몸부림을 치며 거세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거 놔! 난 체험해 보고 싶다고 한 적 없어. 그런 적 없다고!”
그러나 그의 체구보다 갑절은 큰 우리야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리 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엘 카인을 노려보며 눈자위를 뒤집었다. 그는 핏대가 선 목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멈춰! 내게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엘 카인은 말없이 커튼을 걷었다. 정면의 창가로부터 서녘의 빛이 붉게 타오르듯 번쩍 비쳤다가 사라졌다. 리 박사는 눈부심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놓으라고! 이거…… 으윽!”
퍽 하고 복부에 가해진 타격과 함께 시야가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가물가물 닫혀 가는 눈꺼풀 사이로 우리야의 냉랭한 눈초리가 보였다. 리는 부들부들 떨며 침이 뚝뚝 고인 입으로 중얼거렸다.
“엘 카인, 대체…… 네놈 정체가…… 괴, 괴물 같은…….”
엘 카인은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돌아섰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카펫처럼 깔리며 스며들었다.
“치워.”
경멸이 담긴 그의 눈초리는 호흡을 조일 듯 매서웠다. 그 눈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을 본 자들의 말로는 파멸뿐이다. 재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밧세바가 말하던 게 바로 이거였어.
네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광기 어린 외침만 아우성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생 어둠을 끌어안고 살게 될 것이라고.
진실을 알아도 내뱉을 수 없게 된 지금, 목구멍에 차오른 숨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뜨겁다.
잔존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슬프게 중얼거리던 밧세바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군……. 이것이 내가 영혼을 판 대가인가?’
* * *
【Breaking news: 다음은 경제 속보입니다. 스타시티 아브라함 회장의 담당 의료진이 한밤중에 비상 소집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아브라함 회장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걸까요? 얼마 전만 해도 스타시티 홍보팀은 ‘새로운 도약’이라는 주제로 안드로이드 개발 시장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한 바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개발 사업은 아브라함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설 예정이며, 새로운 회사의 이름은 ‘위즈덤’이 될 것이라고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회장의 외아들인 알렉스 아브라함마저 건강 위독설이 제기되면서, 위즈덤을 이끌어 나갈 인물이 누가 될지에 관해 첨예한 논쟁이 오가고 있습니다…….】
“뭘 보고 있니?”
커피를 타던 바딤은 흘끔 어깨 너머를 훔쳐보며 물었다. 아담은 담요 위에 맨발로 앉은 채 수많은 홀로그램들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곳은 천재 물리학자이자 프로그래머인 ‘K’의 세계. 푸른 가상 세계 속의 입자들은 그에게 끊임없는 정보를 물어다 주는 매개체들이었다.
“왓슨 본사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요.”
“재밌는 일?”
설마 또 이브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급속도로 불안해진 바딤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아담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드리밍 플라워가 약 일 년째 활성 상태예요. 대상은 성인 남성이고, 설정 값은 모두 최고 수치에 가상 좌표를 무한대로 찍어 놨네요.”
“드리밍 플라워라면 네가 전에 공개 입찰로 팔았다던 그거?”
“네.”
“왓슨 그룹에서 구입해 갔으니 그들이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아담이 말한 걸 곱씹던 바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잠깐만. 그 수치를 사람한테 적용하고 있다고? 최고 수치면 뇌가 터지고도 남을 텐데?”
“제정신은 아니겠죠.”
실험실 쥐처럼 생체 실험을 당하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담은 잠시 이름 모를 대상에게 연민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것이니 의당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솔직히 저 이름 모를 남자가 죽든 말든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바딤도 이브와 관련된 일이 아니란 걸 확인하자마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는 다시 커피 향을 쫓아 킁킁거렸다. 커다란 덩치로 곰처럼 몸을 굽히는 바딤을 보며 아담은 눈을 흘겼다.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쿡쿡거리는 소리에 바딤은 눈초리를 실그러뜨리며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담은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며 모르는 척 앞을 쳐다보았다.
“왜 웃냐?”
망할 놈의 아들 녀석이 또 자신을 비웃었다. 아무 일 없는 척하는 표정 연기가 압권이었다. 단정한 옆선에 골몰한 시선, 저놈이 또 제 아버지 말을 무시하네?
“왜 웃냐고.”
바딤이 다가와 발로 그의 허벅지를 툭툭 걷어차며 물었다. 그러자 아담은 예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진하게 되물었다.
“제가요?”
“이 자식이!”
거칠게 내려놓은 머그잔 속에서 커피 물이 튀었다. 바딤은 아담을 뒤에서 덮치더니 그를 어깨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늘 태연한 아담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딤은 그대로 평소 연마한 레슬링 기술을 넣었다. 그는 몸을 뒤집어 ‘U’자로 구부리며 아담의 몸을 소파 위로 처박았다. 덩치는 크지만 의외로 몸은 유연한 바딤이었다. 아담의 입에서 짧게 비명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그는 담요와 소파 사이에 드러누운 채 멍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가벼워? 요즘 운동은 하는 거냐?”
바딤은 킬킬거리며 놀리듯 물었다. 하지만 장난을 치듯 건넨 말과 달리 그의 눈빛엔 곧 걱정이 어렸다. 조만간 열다섯이 될 아담은 또래 아이들보다 현저히 작았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작고 발도 작다. 그리고 가늘었다. 손목도 가늘고 허리도 가늘고 손가락도 가늘다.
너무 햇빛을 안 보나? 매일 운동은 꼬박꼬박 하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렇게 호들랑하니 섬섬약질인 거야? 투명한 피부에 조각 같은 얼굴선. 머리만 기르면 딸이라고 하고 다녀도 믿을 정도였다. 한창 사춘기 무렵일 나이였다. 그럼에도 고마운 것은 아담 본인이 중성적인 외모에 전혀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평범을 뛰어넘은 아이긴 하지.’
바딤은 말없이 누워 있는 아담을 슬쩍 보더니 툭 건드리며 물었다.
“아프냐?”
“네.”
재깍 튀어나온 대답.
“엄살은.”
그러나 말과 다르게 그의 눈초리는 다시 슬그머니 아담의 눈치를 살폈다. 요즘 느낀 거지만 이 녀석은 은근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긴다. 타인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녀석인데, 그 무관심이 흥미로 이어질 땐 꽤 짓궂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악의로 이어지면 상당히 잔혹한 성미도 발휘했다. 가끔은 아버지인 자신도 두려워질 정도로.
이윽고 바딤의 시선이 누워 있는 아담을 따라 천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2080.07.21.
바딤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숨과 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벌써 삼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들의 집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사라가 내고 간 구멍.
이브가 남기고 간 구멍.
그날의 총격이 남기고 간 구멍.
바딤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담은 더 이상 케이크를 사 오지 않았다. 바딤은 사라의 옷가지들을 정리한 뒤 온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아담은 이브의 담요와 인형을 박스에 넣고 다락방에 올려놓았다. 술잔이 깨지는 소리도,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도 사라진 나발루니예 언덕에는 고적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런데 말이다.”
“네.”
“왜 닉네임을 K라고 지은 거냐? 드리밍 플라워를 팔 때 K라는 가명으로 팔았잖아.”
“아, 그거.”
잠시 허공을 골몰히 응시하던 아담은 장밋빛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행성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석양빛에 가만히 물들고 있었다.
“익숙해서요.”
“익숙하다고?”
“꿈에서 들었는데, 누가 저를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누가?”
“절 공격하는 녀석이요.”
바딤은 기가 막힌지 코웃음을 쳤다.
“어린애구먼.”
하지만 돌아선 그의 눈빛은 곧 웃음기를 지웠다. 아담은 잠을 자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꿈도 꾸지 않는다. 꿈이라는 게 뭔지 알기나 하나 싶다.
드리밍 플라워를 임상 시험할 당시, 아담은 자진하여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참여시켰다. 임상 시험을 마치고 너무나 고요하게 앉아 있는 아담을 보며 바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는 아이니 당연히 드리밍 플라워도 실패했거니 싶었을 뿐.
혹시 그때 뭔가를 본 것일까?
드리밍 플라워는 무의식 속에 자리한 욕망 혹은 두려움을 보여 준다. 그것은 흔히 대상자의 경험이나 기억에서 빚어진 조각들로 평소에는 수면 아래 깊숙이 잠겨 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뭘요?”
“널 공격한 녀석 말이야. 설마 맞고만 있던 건 아니겠지?”
아담은 기억을 떠올리며 가만히 시선을 옮겼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부유하는 행성처럼 오묘한 빛을 띠었다.
“뭔가 거대한 폭발 같은 게 있었어요. 그 녀석을 말리기 위해서 누군가 인위적으로 일으킨 것 같았는데…… 결국 다 함께 추락했죠.”
바딤의 눈이 커졌다.
폭발과 추락.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다 함께? 몇 명이나 있었는데?”
“모르겠어요.”
“추락한 뒤로는? 어떻게 됐어?”
바딤은 바짝 다가와 물었다. 아담은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끝이에요.”
그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대에 차 있던 바딤의 얼굴이 좌절한 듯 무너졌다.
“잘 생각해 봐. 어디서 추락했는데? 누구와 함께 있었는데?”
“기억 안 나요.”
“드리밍 플라워로 한 번 더 시도해 보면 기억나지 않을까?”
“아시잖아요. 저한테는 그 무엇도 두 번 통하지는 않는다는 걸.”
얄궂은 대답에 바딤은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이상하게 꿈 이야기에 집착하는 그를 보며 아담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혹시나 해서.”
그래, 정말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그날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을까 싶어서. 운석 폭발과 함께 등장한 신비로운 소년의 정체는 그에게 있어서 아직도 풀 수 없는 미궁 속의 수수께끼였다.
“신경 쓰지 마라. 그냥 물어본 거니까.”
익명의 과학자 K가 된 뒤로 아담은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집에 머무는 시간도 많아진 만큼 두 사람이 대화하는 빈도수도 많아졌지만, 이브와 사라가 없는 집은 무채색의 공간처럼 적적하기만 했다.
“학교……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니?”
“별로요. 어머니께서 원하신 게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가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아담은 다시 바닥에 깔린 담요에 털썩 앉더니 은하수처럼 부유하는 홀로그램들 속을 들여다보았다. 고독해 보이는 뒷모습. 바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돌아선 그는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너도, 이브도 내겐 다 소중한 자식이니까.”
아담은 낯선 표정으로 바딤을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딤은 픽 웃었다. 가끔은 어리광을 부려도 좋을 텐데, 하여간 냉정한 녀석.
그래도 얼핏 보였던 아담의 멋쩍어하는 태도에 얕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젠 그도 잘 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아들은 감정을 보이는 게 너무나 미숙할 뿐이라는 걸. 아마 사라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산만한 손가락 움직임, 턱을 괴며 시선을 회피하는 자세, 모두 아담이 난색을 표할 때 나타나는 미세한 변화들이었다.
부모이기에 읽을 수 있는 아이의 작은 변화는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 준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낯설고 신비롭기만 했던 소년의 진짜 부모가 된 심정이었다.
“아버지도 제게 있어 소중한 분이세요.”
한참을 망설이며 맴돌던 혀끝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담은 부채처럼 펼쳐진 홀로그램 속에 표정을 감춘 채 앉아 있었다. 바딤은 의외라는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얼굴 표정이 환해졌다.
“……세 번째로요.”
그 말에 싱글벙글 웃던 그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미간을 좁힌 그는 아담을 흘겨보더니 “세 번째?” 하고 되물었다. 아담은 뻔하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그를 돌아봤다. 그는 섬세한 얼굴을 기울이더니, 귀찮다는 기색으로 설명을 이었다.
“이브와 어머니 다음이니까 당연히 아버지는 세 번째…….”
“알아! 아는데 그 말을 굳이 붙여야겠냐고!”
“착각하실까 봐요. 혹시라도 제가 아버지를 이브보다 더 우선순위로 친다고…….”
“그만해, 그 정도면 됐어.”
바딤은 커다란 손으로 아담의 입을 덥석 막아 버렸다. 그럼 그렇지, 이 얄미운 녀석이 웬일로 감동적인 말을 하나 했다. 그는 아담을 찌릿 노려보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딤의 등을 가만히 보던 아담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삐지셨나?’
사라나 이브와 달리 속이 두부처럼 여린 남자였다. 토라지기로는 세계 제일이다.
“이브 영상 볼 건데 같이 보실래요?”
아담은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영상을 실행시켰다. 흘끔거리며 시선을 던지던 바딤은 못 이기는 척 찔끔찔끔 다가왔다. 그는 어느새 아담의 어깨를 조르듯 흔들며 이것저것 요청을 넣었다.
“처음 수영복 입고 물놀이한 거, 그거 틀어 봐! 그때 내가 입혔잖아. 그 꽃무늬 디자인도 내가 직접 했는데…… 진짜 귀여웠어, 그치?”
“전 다른 거 볼 건데요.”
“다른 거 뭐?”
“이브가 처음 말문 텄을 때요.”
“아 됐어, 넌 허구한 날 그거만 보더라. 혹시 아빠보다 아담을 먼저 말했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다음이 엄마였고…… 아빠는 언제 말했더라. 혹시 기억나세요?”
바딤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본인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무 굴욕적이라 인위적으로 잊었는지도. 천진한 얼굴로 예쁜 눈을 깜빡이던 아담은 입가에 슬쩍 곡선을 띄웠다.
“수영복 보죠. 사실 저도 그걸 보고 싶었어요.”
어후, 얄미운 녀석.
천사 같은 얼굴로 매번 사람 약을 바짝 올리니,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담? 박사님? 계세요?”
예고 없이 등장한 목소리에 아담과 바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별일 아니란 듯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이 집에 그들을 제외하고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은 어차피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사샤는 머리에 쓴 하얀 손뜨개 모자를 벗으며 상기된 얼굴로 집 안에 들어섰다.
“나 참, 손님이 왔는데 두 사람 다 나와 보지도 않아요?”
사샤의 불만에 저택 홈 AI 시스템이 허공에 나타나 그녀를 맞이했다.
─ 사샤 아가씨의 출입 권한에 대해서는 박사님께서 전적으로 제게 위임하셨습니다. 박사님과 도련님께서는 굳이 매번 아가씨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나와 보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신 바…….
“시끄러워, 타이탄.”
사샤는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휙 지나가던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멈춰서 말을 고쳤다.
“아, 이젠 왓슨이라고 불러야 하나?”
─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박사님께서도 가끔 혼동하시니까요.
“지금은 왓슨이지만 너는 타이탄이기도 하잖아. 아니야?”
─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곧 폐기될 왓슨 2세와 이미 폐기된 왓슨 1세는 모두 타이탄을 모델로 설계됐고, 전 왓슨 2세를 잇는 새 모델이니까요. 다만 제가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성형 모델이라는 점이죠. 아직 완성형은 아닙니다.
사샤는 복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싱거운 유머를 치는 거라든지 저 고리타분한 말투는 영락없는 타이탄인데, 왓슨 1세부터 매번 지들은 다르다고 우겨 대니 할 말이 없다. 무슨 놈의 인공지능들이 이렇게 자의식이 강한 건지. 그런데 여성형이라고? 성별은 왜 갑자기 바꾼 거람?
“그나저나 대체 박사님하고 아담은 뭘 하느라고…….”
거실로 입장한 그녀의 눈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예상대로 둘 다 집에 있었다. 놀고 있었으면서 나와 보지도 않았다는 거지?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두 부자는 뭐에 홀린 사람들처럼 소파에 앉아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녀도 몇 번이나 본 적 있던 이브의 수영장 편이었다. 사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럴 때 보면 바보 이인방이 따로 없다.
“아무리 봐도 날 쏙 빼닮았어.”
“네?”
아담이 황당한 어조로 되물으며 바딤의 북슬북슬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이브를 모욕할 수가 있지? 일단 혈연적으로는 이브가 그의 딸이란 건 인정한다. 물론 혈연관계라는 것에 그 어떠한 의미도 두진 않지만─왜냐하면 때때로 바딤이 혈연을 내세워 이브와 자신이 더 가깝다는 유치한 주장을 해 대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이브의 외양이 그와 닮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담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담은 혐오스럽다는 눈초리로 미간을 찌푸렸다. 바딤은 그런 아담을 보며 낄낄 웃었다.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통쾌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유치하지만 아들 녀석에게 가끔은 한 방 먹이고 싶은 아비의 심정이랄까? 하여간 이브에 관해서라면 매번 까칠해지는 녀석이었다. 그런 점이 꽤 귀엽지만.
“우리 딸, 보고 싶네.”
웃음을 터뜨리던 바딤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아담의 눈빛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식었다. 흐린 눈으로 중얼거리던 바딤의 눈초리가 늪에 잠긴 듯 어둑어둑해졌다.
두 사람이 매일 영상을 보는 이유. 단순한 그리움에서만은 아니었다. 절치부심의 태도로 매일같이 잊지 않기 위해서다.
리 박사는 돌연 연락을 끊었다. 아예 자취를 감췄는데 도무지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또 속은 것일까?’라는 생각에 배신감을 느끼기보단 뒷목이 서늘해졌다. 직감적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예감이 들었다.
“리 녀석,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분이라면 숙청당했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불쑥 등장한 목소리에 아담과 바딤은 뒤로 홱 돌아보았다. 아담은 경보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바딤은 주먹을 쥐며 일어섰다. 그러자 사샤가 황급히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며 진정시켰다.
“저랑 같이 온 손님이에요. 소개부터 했어야 했는데 그만 깜빡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현관 쪽에서 창백한 인상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과거 알렉스의 옆자리를 지키던 모범생과 꼭 닮았다 싶을 정도로.
“요한 가르두치.”
검은색 니트를 입은 아담이 뒤쪽에서 걸어 나오며 물었다.
“네가 우리 집에는 어쩐 일이야?”
“오랜만이야, 아담.”
그의 인사에 아담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요한은 난감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담은 삼 년 전과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다른 별에서 온 어린 왕자처럼 남달랐던 소년. 키가 한 뼘은 더 클 나이인데, 그는 여전히 작고 호듯했다. 조각품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선. 남자한테 가슴이 뛴다고 하면 변태라고 하겠지만, 녀석에겐 기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성적인 감흥을 떠나, 존재 자체의 신비로움이었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가 없는 녀석이다. 껄끄럽고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는 소년, 아담 페트로비치.
“의뢰를 하러 왔어.”
“의뢰?”
“익명의 과학자 K에게.”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부풀었다. 사샤는 난처한 표정으로 동공을 갈팡질팡 움직였다. 바딤은 그녀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묻는 눈초리를 던졌다.
“제가 말한 게 아니에요. 요한은 아담이 익명의 과학자 K란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절 찾아와서는 K에게 의뢰할 것이 있으니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안 그러면 왓슨 그룹에 모든 걸 폭로하겠다고 해서요.”
아담은 “흐음, 폭로?”라고 중얼거리며 요한을 빤히 응시했다. 늪에 잠긴 저격수의 총구처럼 고요하고 섬뜩한 시선이었다. 요한은 등골이 오싹하게 반으로 접히는 느낌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당황한 그는 두서없이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스타시티 창립 오십 주년 파티, 기억해? 그날 알렉스는 마약 따위 하지 않았어. 알렉스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봤는데 환영을 봤다더라. 그리고 아담, 너를 만났다고 했어.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가 미친놈처럼 혼자서 지껄였다고 했지만, 자기는 분명 너와 대화를 나눴다고. 그런데 그 느낌이 엔젤 키스에 취했던 때와 너무 흡사했다는 거야. 그러고 얼마 후 난 공개 입찰 사이트에서 익명의 과학자 K가 만든 드리밍 플라워라는 걸 발견했어. 공개 시뮬레이션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건 알렉스가 설명했던 것과 완전 똑같잖아?”
아담은 큐브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쯤 감은 채 시선을 깔았다. 다른 두 사람이 위기를 느끼고 긴장에 휩싸인 것과 달리, 정작 당사자인 그는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게 오히려 요한의 애간장을 더 바짝 태웠다. 마른 입술을 축축하게 적시던 그는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알렉스는 폐기 처리된 것 같아.”
세 사람의 시선이 흠칫 모였다. 이번에는 아담도 조금 의외였는지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그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요한은 안도의 미소를 머금었다.
“폐기 처리?”
사샤는 오싹 소름이 돋은 얼굴로 되물었다.
“사람을 폐기 처리한다니, 무슨 기계도 아니고.”
“글쎄. 그걸 정말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요한은 비틀린 표정으로 자문하듯 중얼거렸다. 과연 아브라함 회장에게 있어 인간의 존엄성이란 게 유의미한 개념일까? 그가 숭배하는 건 오로지 과학기술과 지식뿐이었다.
─아브라함 회장의 클론이래.
비밀스럽게 속삭이던 제인 왓슨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사샤는 파리해진 입술로 불안한 듯 몸을 떨었다. 갑자기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훈육의 방에 간 뒤로 이 년 넘게 소식이 없어. 보통 길어야 한 달이었는데.”
“이 년 넘게?”
“그래, 창립 기념일 이후로.”
요한은 꽤 초조해 보였다. 까슬까슬한 피부 위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동공은 쫓기는 사람처럼 계속 주변을 확인했다. 사샤는 대충 사정을 알고 있는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의뢰부터 들어 볼까?”
바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협박성 의뢰를 하러 온 사람치고는 제 발 저리는 모습인 게, 뭔가 사연이 있나 보네.”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요한의 낯빛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담이 아닌 바딤도 의외의 날카로운 면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네 사람은 정사각형 테이블 앞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스타시티는 단언컨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기업체일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 회장이 집착하고 있는 게 뇌 과학과 안드로이드 개발 분야인데…… 언론에는 보도된 적 없지만 그는 줄곧 생체 실험을 하고 있어요.”
“생체 실험을 안 하는 기관이 있다면 그게 더 희한한 거겠지.”
바딤이 비관조로 덧붙였다. 그게 신기하다면 네가 너무도 순진한 거라는 듯이. 과거 시베리아 연구소에 있을 때 이미 온갖 끔찍한 일을 다 목격했던 바딤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곳에 발을 담갔다 나온 사내로서, 그 자신도 저들을 떳떳하게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소문이지만 스타시티가 화성 신도시를 건축할 때엔 외계인을 납치해서 생체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브라함 회장 자체가 외계인이라는 설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괴담은 셀 수 없이 많아요.”
“제일 유명한 게 ‘아브라함 회장은 불로장생의 연구를 하고 있다’라는 거였지?”
“박사님께서도 아시는군요. 그건 이미 실행 단계에 있습니다. 심지어 최종 단계에 아주 근접해 있죠.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
“누군가 최근 아브라함 회장의 새 몸체가 될 클론들을 다 못 쓰게 만들어 버렸거든요.”
“누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요한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실룩이며 웃던 그의 입가가 일그러지더니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엎드린 그의 정수리를 보던 세 사람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여기저기 머리숱 없는 빈 공간이 보였다. 게다가 드문드문 스스로 쥐어뜯은 것처럼 보이는 흔적도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던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초리였다.
“아버지처럼, 알렉스처럼 살 수는 없었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십 년 전에 뇌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 이후론 인공뇌를 단 채 살고 계시죠.”
“인공뇌?”
요한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깊은 원한에 사무친 그의 미소는 복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인공뇌를 단 사람은 로봇과 다름없습니다. 성격, 행동 양식을 다 지정해 놓은 상태에서 기억만 복사해서 넣는 거니까요. 그냥 우리 아버지의 몸과 기억을 갖고 있는 로봇인 거죠.”
바딤은 팔짱을 낀 채 듣고 있었다. 인공뇌는 아직 불완전한 기술이라 보편화된 수술이 아니었다. 사실상 대다수의 의료진들은 추천하지 않는 치료법이었다. 간혹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 등에게는 인공뇌를 주입하기도 한다고 듣긴 했다만.
요한은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의 눈시울이 빨갛게 젖어 들었다.
“저도 곧 같은 수술을 받게 될 겁니다. 아버지처럼 인공뇌를 달고 살게 되겠죠.”
“뭐? 너는 왜?”
“몇 년 전부터 생긴 두통 때문에 진단을 받으러 갔더니 뇌종양이라고 하더라. 지금은 약물치료 중이지만 결국엔 수술을 받는 것밖에 방법이 없대. 수술하면 뇌에 부분적 손상을 입을 확률이 70퍼센트 이상이라 하고……. 나는 그냥 내가 운이 나쁜 줄 알았어. 대충 이렇게 그 자식의 똥개로 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지. 아브라함 집안의 몸종으로 사는 게 우리 집안의 팔자라 생각하며 체념했으니까. 그러다가 알렉스가 폐기되어 사라지고 본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진실을 알게 된 거야. 스타시티의 이사회 소속 간부들 중 절반 이상이 우리 아버지처럼 뇌 수술을 받았다는 걸.”
지난 이 년 간, 요한 가르두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스타시티에서 일을 해 왔다. 그는 우수한 인재였다. 그는 곧 인정받아 스타시티의 본사 홍보팀에 배치됐다. 그의 아버지는 모든 게 아브라함 회장께서 우리 집안을 돌봐 주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요한 가르두치의 생각은 달랐다.
“아브라함 회장은 인간을 장난감 병정 인형이라 생각해. 자기 마음대로 이리 끼워 보고, 저리 끼워 보고, 팔다리를 빼 봤다가 머리를 뽑아 봤다가 하는 거지. 제일 소름 끼치는 건 본인의 신체에도 그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는 거야.”
“설마 아브라함 회장이 일부러 네 머릿속에 종양을 만들었다는 거야?”
“그래.”
“에이, 설마…….”
사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피해망상 수준 아닌가? 아브라함 회장이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이득이 뭘까 싶었다. 요한은 그런 사샤의 생각이 빤히 보이는지 힘없이 웃었다.
“겪어 보지 않은 자들은 모르겠지. 상상도 못할걸? 회장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처음엔 그냥 이사회를 제 맘대로 주무르고 싶어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어. 하지만 본인의 신체와 클론까지 분절하고 폐기하는 걸 보면서 그가 제정신이 아니란 걸 깨달았지. 신新인류라고 해야 되나? 새로운 종의 지배자가 되기를 꿈꾸는 건지, 본인 스스로가 새로운 인류가 되고 싶은 건진 알 수 없지만 불멸을 꿈꾸면서 돌아 버린 건 확실해. 제일 무서운 건 그 인간이 생각하는 게 터무니없음에도 불과하고 불가능하진 않다는 거야. 어떤 형태가 되었든 그 사람에게는 그것을 실현시킬 권력과 재력이 있으니까.”
“경찰에게 알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겠지. 상대는 세계 최대 부호인 노인네였다. 사샤는 말끝을 중얼거리며 흐렸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아담은 이제 조금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긴 이야기도 지겨웠고, 왜 그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게 만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듣자 하니 아브라함 회장한테 걸리면 바로 처형당할 시한부 인생 같은데, 괜히 우리까지 엮이게 하지 말고 알아서 나가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까 보다가 끊긴 이브의 영상이나 마저 보고 싶었다.
“아담 페트로비치, 너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더라. 학적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네가 존재했다는 기록 자체가 먼지 하나까지도 소멸된 상태였어.”
‘당연하지. 대외적으로 왓슨 3세는 바딤 페트로비치가 혼자 만들어 낸 것이고, 익명의 과학자 K와 아담 페트로비치의 접점 따위는 없어야 하니까.’라고 굳이 소리 내어 대답하진 않았다. 아담은 이제 그가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
“내 기록도 그렇게 없애 줘. 나에 대한 모든 걸 지워 줘. 그리고 새로운 신원을 만들어 줬으면 해.”
“내가 왜 그렇게 해 줘야 하는데?”
“네가 익명의 과학자 K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말했지? 리 박사는 숙청당했다고. 그 칼날이 이곳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잠시 섬뜩한 기운이 방 안을 갈랐다. 바딤은 굳은 얼굴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줄곧 밋밋한 얼굴로 듣고 있던 아담의 눈초리도 비스듬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난 요한의 안광에는 광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절망으로 가득 찬 그늘 속에서 한풀이를 하듯 소리쳤다.
“여태까지 네가 만났던 정·재계, 과학계의 지배자들, 혹은 그들 자녀들 중 하나라도 정상인 녀석이 있었어? 모두 다 미친 사이코 새끼들이지. 이번에 로스트 헤븐의 개발 총책임자로 발탁되었다는 남자 말이야. 그놈도 미친놈이라고 하더라. 다들 쉬쉬하지만, 리 박사를 없앤 게 그 남자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그런 인간이 과연 순순히 네 여동생을 내줄 거 같아?”
“…….”
“나는 어릴 때부터 먹이사슬 꼭대기에 목숨 줄이 대롱대롱 묶인 채 살아왔어. 그래서 피라미드 정점에 선 인간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지. 제 손에 쥔 건 차라리 바스러뜨릴지언정 절대 놓아주지 않는 놈들이야. 이쪽 세계는 말이야, 최고에 오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바닥을 누비는 게 나아. 적어도 자유롭잖아. 사자 발톱에 잡힌 하이에나는 쥐새끼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거야.”
요한은 간절한 표정으로 아담과 바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겁하지만 최후에는 정말 협박이라도 해 볼 계획이었다.
아담은 턱을 괸 채 요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물에 잠긴 행성처럼 고요한 시선. 간담이 서늘해진다. 요한은 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좋아. 네 의뢰, 받아들일게.”
갑작스런 수락에 놀랐는지 요한은 굳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돌변한 아담의 태도에 그는 떨떠름하니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돈은 필요 없어.”
“그럼 사례는 어떻게…….”
“아브라함 회장은 널 찾아내면 죽이겠지. 뭔가 계획이라도 있어?”
“군대에 들어갈 생각이야. 아브라함 회장은 아마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꽤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을 테니 일단 모습부터 바꾸고.”
요한은 얼굴을 주무르더니 각오가 담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기록은 지워도 사람들의 기억을 지울 순 없는 노릇이니까.”
흐음. 아담은 책상에 양팔을 올리고 엎드린 채 턱을 괴었다. 아버지는 버릴 생각인가? 하긴, 제 목숨 연명하기도 급급한데 로봇인지 뭔지로 변해 버렸다는 아버지 생각은 할 틈도 없을 테지.
“사자 발톱인지 뭔지에서 꺼내 주도록 할게. 하지만 거기까지야. 이후 네가 쥐새끼로 살든 하이에나로 살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바딤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 역시 갑자기 요한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아담이 이해되질 않았다. 초지일관 관조적인 태도를 보여서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가만히 들어 보니 요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리 박사가 정말 정치 싸움에서 밀려 잘못된 것이라면, 그들도 시급히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너도 나에게 해 줄 게 있어.”
“뭔데?”
아담은 조각처럼 다문 입술을 잠시 잘근잘근 물었다. 그의 눈초리가 언뜻 바딤을 응시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을 뺏겼다. 두 번째로 소중한 이도 잃었다. 세 번째로 소중한 사람은 지켜 내고 싶었다. 그 사람마저 잘못되면 그녀가 몹시 슬퍼할 테니까.
“피라미드 꼭대기.”
요한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거기로 올라가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건 좀 힘들 텐데.”
“그래서 너한테 묻고 있잖아.”
요한은 난감한 표정으로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담이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슬픔에 잠긴 듯한 기색으로, 나긋한 음색을 담아.
“나는 말이야, 사자가 물어 간 토끼가 보고 싶어서…….”
그는 역광에 비친 눈동자를 비스듬히 숙였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
그리움에 젖어 들던 눈빛에 일순 검붉은 기가 어렸다. 깊고 진득한 감정이 요동치듯 솟아올랐다가 수면 아래로 조용히 가라앉는다. 요한은 숨이 조이는 느낌에 호흡을 멈춘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잊었다.
이 녀석도 미친 사이코 새끼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단, 여동생 한정으로 발현되는 미친놈이었지만 말이다.
왓슨 연구 단지는 로스트 헤븐 북쪽으로 이전되었다. 새 연구 단지는 친환경적인 환경과 최신 과학 장비로 인해 임직원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따라 단지 내 분위기가 흉흉했다. 곧이어 담배 갑처럼 늘어져 있는 연구동들 사이사이로 겁에 질린 사람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키이이익!”
“끼에에에엑!”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새어 나오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주저앉았다. 덜덜 떠는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와장창!
강화유리가 깨지면서 연구동 밖으로 유리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무언가 창문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본 사람들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윽고 깨진 창문 사이로 남자 하나가 “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그물처럼 몸이 걸리던 그는 잔디밭 위로 ‘쿵!’ 하고 떨어졌다.
“이봐! 괜찮아?”
떨어진 연구원의 가운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황급히 달려온 동료 직원은 추락한 연구원의 머리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가운을 벗기던 중 그는 깜짝 놀라며 “우욱!” 하고 구토를 했다. 복부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 무언가에 잡아 뜯긴 것처럼 내장까지 쏟아진 상태였다.
“살려 줘!”
“아아아악!”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 소리였다. 연구동 A의 2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상태였다. 사람들은 숨넘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참혹하게 울부짖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끼이이이익!”
벽과 천장을 날아다니듯 기어 다니며 사람들을 공격하던 생물체는 이빨 사이로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본 건물 밖의 연구원들은 바닥을 기면서 필사의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덴 타워 S관 임원 회의실.
영상을 본 이사회 임원들은 모두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은 기색이었다. 타원형의 테이블에는 가상 입체 형상으로 접속한 임원들이 각기 검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델타입니다.”
“델타?”
“델타란 신종 바이러스 변형에 감염된 후 살아남았으나 변이를 거친 자들의 명칭입니다.”
신종 바이러스의 변형, 그리고 새로운 돌연변이의 출현. 모든 게 아찔한 공포였다.
“그러니까 저게 원래는 사람이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포획한 델타의 신원은 이십 대 후반 흑인 여성으로 간주됩니다.”
“어디서 포획한 겁니까?”
“맨해튼, 미국 뉴욕입니다. 뉴욕은 델타가 처음으로 보고된 곳이기도 합니다.”
사십 대 중반인 연구소장은 침착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의 검은 동공은 중간중간 흘끔거리며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금 저게 로스트 헤븐 내에서 날뛰고 있다는 거죠?”
“마취가 듣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탈출한 델타는 연구동 내 직원들을 무분별하게 공격했고, 연구원 중 다섯이 사망, 부상자는 그 배를 넘는다는 소식입니다.”
긴장 어린 침묵이 내렸다.
현재 그들은 화상회의 중이었다. 임원진 중 몇몇은 제들이 로스트 헤븐 내에 있지 않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머지는 겁에 질린 채 대뜸 물었다.
“그래서 저걸 저렇게 방치하고 있는 겁니까? 용병들은요? 분명 얼마 전에 거금을 들여 용병대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럴 때 투입 안 하고 뭐합니까?”
“걱정 마십시오. 이사님께서 계신 곳은 안전합니다. 델타가 연구동 밖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아니, 애초에 저런 걸 낙원 내에 들여오면 어쩌자는 거요!”
그때 비어 있던 자리 하나에 불이 켜졌다. ‘접속’이라는 글씨가 반짝이며 떠오르자, 모두의 이목이 새로운 접속자에게로 쏠렸다.
검은 바탕에 물음표만 뜬 화면. 심지어 명패마저도 공란이었다. 이사회에 저런 자가 있었던가? 임원들은 미스터리한 분위기 속에 등장한 새 접속자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 연구 단지는 로스트 헤븐 내 다른 도시들과 달리 아주 폐쇄적인 구조입니다.
변조된 목소리. 늘어진 테이프처럼 낮고 두꺼운 음성이었다. 성별도, 나이도, 인종도, 직종과 직함도 알 수 없는 의문의 등장인물에 이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었다.
─ 출입구를 열지 않는 이상 델타가 연구 단지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상에서는 말이죠. 정 걱정되시는 분들은 잠시 섬 밖에 나갔다 오셔도 됩니다.
“지상에서는?”
누군가 불안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이사회 소속입니까?”
돌연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불편한 심기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때 회의 내내 줄곧 침묵하던 엘 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사회 소속은 아닙니다만, 제가 초청했습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 중 낙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입니다. 단, 익명으로 활동하시는 분이기에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걸 조건으로 하시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요? 회의 내용이 유출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겁니까?”
“아, 그 점은 걱정 마시죠. 일찍이 우리와 한배를 탄 분입니다.”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엘 카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분은 바로…… 로스트 헤븐을 설계하신 분이니까요.”
얕은 술렁임이 일었다. 임원진들 중 눈치 빠른 이들은 대충 그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표정이 돌변했다.
익명을 조건으로 활동하는 과학자, 혹은 엔지니어, 혹은 건축가. 뉴턴,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다는 천재 물리학자. 현재 과학계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다는 그 인물인가?
“언론에 새어 나가진 않겠죠?”
“델타의 포획 자체를 극비로 해 온 것이라 언론 쪽은 잠잠합니다. 그 점 역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돌연변이라니요. 이제 겨우 치료제 보급을 시작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한창 기록적인 판매 이익을 창출해 나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들은 죽은 연구원들에 대한 애도보다 고꾸라질지도 모를 수익에 대한 애도를 앞세웠다.
“그래서 실험체 이브에 델타의 피를 주입해 봤습니다만, 화면을 한번 봐 주십시오. 이브 체내에 신종 바이러스 변형이 침투하자마자, 바로 항체가 생성되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브는 괴로운 듯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듯, 임원들은 환희에 찬 눈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저 소녀만 있다면 왓슨 제약회사는 무적이군요.”
“한마디로 불사의 몸, 그런 겁니까?”
“저 아이만 있다면 어떤 질병도 다 정복 가능하지 않을까요? 신종 바이러스에만 국한해 임상을 해 볼 게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발견한 양 회의는 축제 분위기였다. 좀 전에 죽어 나간 연구원들의 모습 따위는 어느새 잊은 모양이었다. 임원진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익명의 접속자는 말없이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껄껄대는 임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으그러지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한 놈도 놓치지 않고 모두 뇌리에 각인시키는 중이었다.
그는 평온한 눈에 담긴 살기를 죽이며 애써 안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누구도 알 수 없도록, 그렇게 조용히 숨을 바르쥐었다.
그때 테이블 중심에 앉아 있던 엘 카인 앞으로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올랐다. 창 안에는 카키색 군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새로운 군대 ‘로스티아벤’의 총지휘관인 우리야 세르게이 장군이었다. 우리야는 차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며 빠른 속도로 보고를 올렸다.
─ 대표님, 우리야입니다.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만, 현재 연구동 A 건물 앞에 특공대원들이 대기 중입니다. 이사회의 최종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 카인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그러자 접속 중이던 열두 명의 임원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카인 대표의 뜻이 우리 이사회의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카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정중하지만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느긋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사살은 불허합니다. 무조건 생포하도록 합시다. 마취탄은 듣지 않으니 실탄 사용을 승인합니다. 심장과 머리를 제외한 곳을 사격하고 인명 피해는 바로바로 보고하도록.”
─ 예, 알겠습니다.
누군가 조금 우려스럽다는 어조로 끼어들었다.
“델타 포획 때도 인명 피해가 적지 않았다는데 괜찮겠습니까?”
“로스티아벤은 용병들로 이루어진 군대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연봉을 받는 용병들이죠. 받는 만큼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깍지를 낀 엘 카인이 미소와 함께 정중히 되물었다. 그의 친절한 눈웃음이 더 이상 따지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했다. 께름칙한 표정을 짓던 몇몇 임원들은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우리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있으니 뭐가 문제겠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리의 여신은 ‘이브’인가요?”
나머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찝찝한 분위기를 날려 버리는 데에는 그저 호탕하게 웃는 것이 최고였다.
“행운의 여신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상황 수습이 로스티아벤의 손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한 임원진은 하나둘씩 로그아웃을 하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양 서로 앞다퉈 통신 종료를 했다. 다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거북한 자리를 모면하고 싶을 뿐이었다.
“여신 이브의 가호가 있기를.”
“이브의 가호가 있기를.”
마지막으로 익명의 설계자까지 로그아웃을 하자, 가상 회의실에 홀로 남은 카인은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표정 없는 가면을 쓴 것처럼 건조했다.
델타.
신종 바이러스의 변형.
입실론과는 다른 돌연변이.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턱을 괸 채 골몰한 눈으로 어둠에 잠겼다. 정면에 ‘핏’ 하고 무언가 떠올랐다.
노아 호크 대위.
이번에 맨해튼에서 델타를 포획하는 데 실질적인 공을 세웠다는 인물이었다. 엘 카인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병적에 입력된 남자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뺨에 깊게 팬 십자 흉터가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노아 호크…….”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혔다.
“설마 그 노아인가?”
방주의 길잡이 노아.
한 번도 실제 모습은 보지 못했다. 단순히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선도자인 노아의 능력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멀쩡히 살아 있었나? 그렇다면 왜 십 년이 넘는 세월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거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생사 따위는 금방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흥미로운 기색을 품던 눈초리는 이내 똬리를 틀 듯 살기를 휘감았다.
그날, 폭발한 방주에서 살아남은 일족이 있었다.
하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엘 카인은 델타와 호크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건반을 치듯 테이블을 두들겼다. 마치 재회의 선물을 건네듯 델타를 잡아 바친 노아와 갑작스레 이빨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그림자.
델타.
입실론과는 거울의 이면을 비추듯 정반대 성향의 감염자다.
“대체 누구의 권속일까?”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의문을 품은 채 기억을 훑었다. 긴 여정을 함께했던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방주를 폭발시켰던 그 밤으로.
웬일인지 로스트 헤븐 전체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듣자 하니 연구동에서 실험체가 소동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이사회는 종일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 중이었다. 사건을 숨기기 위해 카인은 왓슨 3세에게 잠시 스마트 더스트의 네트워크를 끊으라고 명했다.
“밧세바 님, 어딜 가시는 거예요?”
“설마 도망치시려는 건가요?”
평소 친하게 지냈던 입실론 몇몇이 눈치를 채고 다가왔다. 밧세바는 손가락으로 ‘쉬이’ 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지금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겁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수다를 떨고 있는 다른 입실론들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나눴다. 대다수의 입실론들은 이미 제인 왓슨의 앞으로 줄을 선 상태였다. 가끔 태양의 도시에 와서 여왕처럼 군림하며 지위를 확고히 하는 제인은 이곳에 올 때마다 밧세바를 괴롭혔다. 괴롭힘이라고 해 봐야 하루하루 늙어 가는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웃거나 뒷방 늙은이라 부르며 무시하는 정도였다.
지금도 밧세바와 그녀 주위의 입실론들을 흘끗거리는 다른 입실론들은 제인에게 고해바칠 이야기를 엮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방법은 있고요?”
그녀들의 질문에 밧세바는 태양의 도시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빠르게 속삭였다.
“지하 대피로입니다. 도시 설계를 맡았던 원래 과학자가 작년에 죽었잖아요. 그 뒤로 대피로 건설은 잠시 중단된 상태고요. 거긴 왓슨의 눈이 닿지 않을 거예요. 대피로는 잠수정 정거장과도 이어져 있다고 들었어요.”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그녀들은 울면서 밧세바의 팔을 붙잡았다.
“저희도요, 제발요.”
“밧세바 님과 함께 가게 해 주세요.”
순식간에 모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나 혼자도 살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 없어요. 자칫 개죽음만 당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 꼭 다시 만납시다. 그때까지 부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약속할 수 없는 기약이었지만.
“부디 살아남읍시다.”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처럼 혹은 언니처럼 기대 왔던 그녀가 떠나는 모습은 그녀들에게 있어서 절망을 의미했다. 하루가 다르게 악독해져 가는 제인 왓슨의 패악질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들은 밧세바가 빠져나가는 걸 돕기로 결정했다. 몇몇은 망을 보았다. 몇몇은 이쪽을 견제하는 다른 입실론 무리에게 말을 걸며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무사히 탈출하셔야 해요.”
“꼭 저희를 데리러 와 주세요.”
밧세바는 멀리서 눈빛을 보내는 입실론들과 마지막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에덴 타워 지하로 향했다. 아직 시공 중인 대피로의 입구는 타워 내에서 유일하게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미로 같은 이곳은 모든 도시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재로선 유일한 탈출로인 모래의 도시 잠수정과도 통해 있다.
캄캄한 대피로를 걷던 밧세바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 뭔가가 있었다.
크르르르.
괴수처럼 조용히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 어둠을 타고 벽을 기어 다니는 몸놀림, 거친 숨소리, 미역 줄기처럼 엉킨 머리칼.
‘뭐지?’
정체불명의 괴수는 천장에 바짝 몸을 붙인 채 고개를 틀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괴수는 물끄러미 관찰하는 시선을 던졌다. 밧세바는 얼어붙은 채 석상처럼 지면에 박혀 호흡하는 것조차 잊었다.
동공에 비친 거대한 이빨. 그사이에 낀 살점과 핏덩이가 보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저것은 지금 먹잇감을 눈여겨보는 중이었다.
악어처럼 천천히 입을 벌린 델타는 거대한 목구멍 사이로 혓바닥을 내밀었다. 날름거리던 혓바닥이 어금니를 핥았다. 탐색을 마친 델타는 고함치듯 비명을 지르며 개구리처럼 몸을 움츠렸다. 공포에 질린 밧세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수리를 스치는 날쌘 바람에,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였다.
탕!
날카로운 총격 소리와 함께 델타가 퍼덕거리더니 고꾸라지듯 천장에서 추락했다. 그녀는 “끼에에엑!” 하고 울부짖으며 뒷다리를 뒤틀었다.
탕!
다시 이어진 총성.
이번에는 앞다리에 총탄을 맞은 델타가 펄쩍 뛰면서 끽끽거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버둥 치는 모습이 불에 튀겨지는 도마뱀처럼 안쓰러웠다.
멍하니 선 밧세바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델타의 거친 숨소리 사이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터널처럼 이어진 대피로 저편에서 총구를 겨눈 채 다가오고 있었다. 각 잡힌 걸음걸이, 사냥꾼처럼 매서운 시선. 일류 저격수의 자세다. 제복을 입은 남자는 암흑을 몸에 휘감은 채 등장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밧세바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리야?”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밧세바 님?”
우리야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의 뒤로는 잔뜩 긴장한 채 걸어오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 중 몇몇은 부상을 당했는지 절뚝거리고 있었다. 정렬하고 선 병사들은 바닥에 누워서 크르렁거리는 델타를 보더니 경직된 자세로 침을 꿀꺽 삼켰다.
밧세바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연구 단지에서 일어난 소동의 원인이 이거였습니까?”
델타는 지친 듯 축 늘어진 채 바닥에서 숨만 쉬고 있었다. 일반 탄약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묘하게 사람의 형상을 닮았다. 밧세바는 환멸 어린 눈빛으로 우리야를 쳐다보았다.
“당신들…… 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단순한 사고입니다. 실험체 하나가 탈출한 것뿐이죠.”
이번에는 우리야가 반대로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눈초리를 던졌다. 그는 밧세바를 아래위로 훑더니 취조하듯 물었다.
“설마, 밧세바 님께서도 탈출 중이신 겁니까?”
그녀는 동요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물러섰다.
이제 다 끝났다. 우리야는 자신을 강제로 송환할 테고, 엘 카인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겠지. 제인 왓슨은 이 사건을 빌미 삼아 그녀를 제거하고자 할 것이다. 최근 제인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있는 엘 카인이 자신을 보호해 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여기서 죽어 버릴까? 첨탑의 꼭대기에 다시 갇힐 바에는,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지친 눈빛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그 순간,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우리야가 난데없이 뒤돌아 팔을 움직이더니 총탄을 갈기기 시작했다.
탕!
탕탕!
몇 발의 총성과 함께 그의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일제히 미간 정중앙에 정확히 총탄이 박힌 채로 즉사였다.
“당신 지금 뭐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밧세바는 경악에 찬 얼굴로 우리야를 응시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병사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델타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부하들을 사살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름이 돋았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눈빛에, 그리고 높낮이의 변화 없는 그의 어조에.
“그리고 밧세바 님 당신 역시…….”
그의 총구가 이쪽을 향하자 그녀는 호흡을 멈췄다. 죽음이란 늘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총구를 마주하니 숨이 막혀 왔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폐가 긴장으로 인해 석회처럼 굳어 가는 느낌이었다.
탕!
깜짝 놀란 밧세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란을 틈타 빠져나왔다가 델타를 만나 목숨을 잃으신 겁니다.”
그녀는 멍한 눈을 깜빡였다. 두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니 총탄 하나가 바닥에 박혀 있었다.
“왜?”
놓아주는 건가?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묻던 밧세바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야는 대답 대신 피 묻은 눈두덩을 닦고 있었다. 그는 총집에 은회색 총을 넣었다. 술래가 숨바꼭질을 하기 전 말미를 주듯 여유로운 행동이었다.
그녀는 주춤주춤 달리기 시작했다. 걸음 사이사이로 눈뜨고 죽은 병사들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다. 자신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한 그들을 생각하니, 죄책감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비겁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책망하는 목소리가 개처럼 헉헉대는 숨소리 위를 뿌옇게 덮었다. 다행히 어둠은 그녀를 위로하듯 금세 그들의 흔적을 지워 주었다. 등 뒤에서는 계속해서 총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미궁처럼 복잡한 구조의 대피로였다. 그녀는 미세하게 들려오는 기계음을 쫓아 뛰었다. 낮은 소음은 이정표처럼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길을 인도해 주었다.
팻말도 없는 승강장에 도착하자, 숨이 차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소형 잠수정은 이미 출항 준비를 마친 듯 불 켜진 상태였다.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당신만 탑승하면 유유히 이곳을 떠날 것이라며 손짓을 하는 양 불빛을 비추며 유혹했다.
이상했다.
누군가 준비해 놓은 철로를 밟듯 일이 너무 쉽게 풀리지 않는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총집에 총을 집어넣던 우리야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등을 떠밀 듯 애써 고개를 외면하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그의 모습이.
물끄러미 허공을 보던 그녀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틈새로 터져 나오는 호흡에 울음이 섞여 들었다.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함께 가게 해 주세요.
잠시 후, 잠수정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 천천히 걸어왔다. 밧세바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예상했다는 미소로 입매를 비틀었다. 제복을 입은 우리야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달린 금속 별들이 잠수정 라이트에 반짝이며 매끈한 표면을 자랑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긁어서 떼어 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 남자의 눈알에 박아 버리고 싶다고.
“떠날 수가 없어.”
그녀의 쉰 목소리가 폐쇄된 공기 속을 잔잔하게 유영했다.
“떠나지 않으면 죽습니다.”
“저걸 타면 살게 되나?”
“그렇습니다.”
“사는 게 뭔데? 금붕어처럼 숨만 쉬면서 부유하는 게 삶인가?”
그는 물끄러미 밧세바를 응시했다. 갈라진 머릿결 사이로 그녀의 공허한 눈초리가 보였다.
“탈출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아이들을 이곳에 묻어 두고, 그녀들을 뒷전에 남겨 두고 나는 대체 어디로…….”
그녀의 눈이 빨갛게 젖어 갔다. 따끔따끔한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메말라 버린 탓이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빨려 나갈 정도로 몇 번이나 피를 토한 탓이다.
“당신 말대로 난 여기서 죽는 걸로 하지.”
그녀가 헛헛하게 웃었다.
“여기가 좋겠어.”
내 종착역은.
“날 원망합니까?”
“당신이 뭔 죄가 있겠어. 다 ‘그’가 시켜서 한 것을.”
우리야의 얼굴이 버려진 폐품처럼 울컥 일그러졌다. 그는 아주 심한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밧세바의 손목을 으그러뜨리듯 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물었다.
“날 원망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인형처럼 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가 왜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되질 않았다. 왜 그렇게 속이 바짝 타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거냐고. 왜 되레 당신이 그렇게 원망스럽게 나를 노려보는 거냐고.
“원망 안 해, 너 따위.”
줄곧 침착하던 사내가 씩씩거리며 열기처럼 하얀 숨을 토했다.
“어째서?”
“예를 들어 지나가다 돌멩이에 맞았어. 그럼 당신은 돌멩이를 원망하나? 정작 돌 던진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내가…… 돌멩이라고?”
“군인치고는 이해력이 좋네.”
얼어붙은 우리야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본인의 바지춤을 뜯어내듯 주르륵 내렸다. 굳센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를 벌렸다. 벽에 쓸린 맨 엉덩이가 아팠다. 밧세바는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 그는 입을 맞추려는 듯 얼굴을 맞댔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입술을 물어뜯어 버렸다. 밧세바는 바로 후회 어린 눈빛을 지었다. 이 남자가 피 냄새에 흥분한다는 걸 잊었다. 우리야는 오싹하게 웃었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잡더니 사타구니 사이로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황홀한 눈빛이 미간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눅눅하게 엉겨 붙은 그의 입술 사이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찰팍거리며 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나를 원망합니까?’
그가 귓가에서 다시 묻는 듯했다. 밧세바는 치욕과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외면했다. 오기로라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너 같은 건 원망할 가치조차 없다.
바지춤을 정돈하며 돌아선 우리야는 옷깃을 세웠다. 그는 어깨춤을 털더니 가슴에 단 별을 손끝으로 한번 훑듯이 닦아 냈다. 한편 멍하니 선 채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던 밧세바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찌꺼기다.
그가 말한 게 이런 거였어.
“이걸 원했어? 엘 카인의 여자는 어떤 맛인가 궁금했나?”
우리야는 흘끗 곁눈질을 던졌다. 별다른 감흥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 늙어 가는 여자의 몸뚱이를 안아 보니 어때? 생각보다 별로지?”
그는 말없이 바닥에 ‘탕!’ 하고 총탄을 갈겼다. 깜짝 놀란 밧세바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시울을 글썽거리는 그녀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직 살고 싶은가 보죠?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입만 살기는. 군인이었다면 뺨을 갈겼을 겁니다.”
“왜 날 쫓아왔어?”
밧세바는 이를 바득 갈며 물었다. 쉽게 보내 주더니 다시 와서 목을 조르는 이유가 대체 뭘까? 수치심에, 모욕감에, 무너진 자존심에 정말 콱 숨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죽여 주지, 복수심을 주면서까지 삶에 대한 애착을 바락바락 쥐여 주는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땅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날 원망해야 돼.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도 말고.”
“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밧세바는 양손에 고개를 묻으며 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난 아직도 밤마다 그 애들의 울음소리를 들어! 팔삭둥이로 여름에 태어난 내 아기들, 분명 살아서 태어났었어! 내가 이름도, 이름도 지어 놨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품 안의 천사들은 떠나고 없었다.
“어떻게 죽였어?”
고개를 든 밧세바는 핏대가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내 딸, 내 아들! 어떻게 죽였냐고!”
“버렸습니다. 쓰레기 소각장에.”
그녀의 눈이 하얗게 굳었다. 흰자위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우리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마 최종적으론 불에 타서 죽었겠죠.”
“너…… 엘 카인! 둘 다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지 자식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그녀는 숨이 차는지 허억거리며 눈알을 뒤집었다. 목이 탔다. 누가 목을 조르는 듯 숨이 막혔다.
“내가, 내가 똑똑히 지켜볼 거야, 너희들 최후를!”
“좋은 생각입니다. 살다 보면 왜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는 날도 올 테죠. 그러니 죽지 말고 지켜보십시오. 꿋꿋이 살아남아서 말입니다. 입실론 밧세바 님.”
돌아선 그의 뒤로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구멍을 손톱으로 찢어 내듯 고통에 삭힌 절규였다.
“흐어어어!”
그녀는 양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제 자식도 지켜 내지 못한 주제에 죽지도 못하는 운명이 서럽고 비참했다.
“죽어! 다 죽어 버려! 엘 카인! 우리야아아!”
낙원 따위 지옥 불 위로 떨어져 버려!
연구동에서 델타가 소동을 일으켰던 날, 뒤늦게 입실론 하나가 대피로를 통해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낙원의 관리자는 시공 중이던 대피로를 즉각 폐쇄 조치했다. 한 달 후 그는 섬 북쪽에 위치한 연구 단지도 폐쇄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폐쇄된 연구 단지 내에서 여전히 은밀한 실험들이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약 석 달이 지난 2085년 8월. 로스트 헤븐에는 다시 한 번 유례없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당시 우리야 장군은 로스티아벤의 홍보와 모군 활동을 하기 위해 낙원을 출타한 상태였고, 에덴 타워를 지키던 연구원들과 직원들은 관리자로부터 급보를 받고 서둘러 귀가를 한 상황이었다.
서기 2085년 8월 23일 「뉴욕 타임즈」의 헤드라인
“왓슨 제약회사의 본사와 연구소가 있는 ‘로스트 헤븐’의 에덴 타워에 침입자 발생! 로스트 헤븐을 관리하는 슈퍼컴퓨터 왓슨을 해킹한 자는 누구인가?”
─ 이쪽은 준비 오케이야.
사샤의 목소리를 신호로 아담은 어둠 속에 잠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가락 끝이 떨릴 정도로 호흡도 가팔라졌다. 에덴 타워 전체에서 이브의 심장 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B4F 연구동입니다.”
이곳까지 오는 데 장장 오 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거대한 손아귀 속에서 돌고 도는 이브. 그리고 그 뒤를 숨차게 쫓아가는 우리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자 지난 이 년, 그들은 사바나의 맹수처럼 숨을 죽인 채 흔적을 지우는 데 주력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맹수는 오직 하나뿐이야. 그 녀석들은 절대 경쟁자를 같은 위치에 두지 않지. 사자의 눈을 피하고 싶어? 그럼 쥐새끼가 되어야지. 누가 봐도 페트로비치 박사는 위협적인 존재잖아? 리 박사를 생각해 봐, 너무 뛰어난 놈들은 제거되기 마련이야.
─로스트 헤븐의 정보는 계속 알아야겠어. 그들 손에 왓슨 3세를 넘기고 나면 외부에서 왓슨에 접속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해.
─기다려 봐. 곧 그들이 알아서 우리 쪽에 손을 내밀 테니까. 듣기로는 로스트 헤븐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드리밍 플라워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문이야. 그의 측근들은 로스트 헤븐의 설계를 스타시티에 의뢰하자고 했나 봐. 그런데 막상 본인은 익명의 과학자 K를 왓슨 회장에게 강력 추천했다는 것 같아.
리 박사의 실종, 바딤의 죽음, 낙원의 새로운 설계자가 된 익명의 과학자 K, 연맹군에 입대한 요한. 지난 이 년간 그려 온 궤적이 치밀하게 한 층 한 층 계단을 쌓아 갔다.
그리하여 비로소 이곳까지 왔다.
비상 전기가 들어온 최하층. 그 앞을 가로막아 선 인공지능 시스템이 딱딱하게 암호를 물었다.
─ 보안 질문에 답을 해 주십시오. 이브가 좋아하는 음식은?
몇 년 전, 그가 설정한 보안 질문이었다. 아담의 입가에는 어쩔 수 없는 곡선이 맺혔다.
─오늘 저녁은 카레를 하려고 했는데, 이브가 안 보이니 할 수 없네. 파스타로 할까?
─안 돼! 이브는 카레 먹을 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
─내려갈 테야, 지금.
고집불통 원숭이.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 하고, 혼을 내려 하면 배시시 웃음으로 때워 버리질 않나, 제가 애교를 부리면 다들 녹아서 넘어가는 건 알아가지고. 하여간 영특했다. 하루가 멀다고 넘어지고 굴러서, 늘 까진 무릎에 엉덩이는 흙투성이였던 개구쟁이 공주님. 그럼에도 소중하고, 소중했던 나의 이브.
“너무……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아담의 눈가에 투명한 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유리관 속에 잠든 듯 누워 있었다. 그는 그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무릎을 촉촉이 적셨다.
“늦어서 미안해.”
못 본 새 이브의 키는 한 뼘도 더 자랐다. 이목구비도 뚜렷해지고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 피부는 시베리아의 설원보다도 하얘졌다. 여전히 같은 이브긴 한데, 이상하게 낯설고 어색해서 두근거리는 느낌까지 들었다.
─ 아담! 재회의 감동은 나중에 느끼도록 하고. 서둘러, 분위기가 이상해.
사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 말에 그는 고개를 퍼뜩 들고 이브를 안아 들었다.
“지금 나가. 합류 지점 좌표 보내 줘.”
어둠에 휩싸인 에덴 타워의 정문이 열렸다. 아담은 두꺼운 유리문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창공에서 타워를 포위하고 있던 에어쉽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환한 불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침입자에게 경고한다. 실험체를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경고한다! 실험체를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순간 펼쳐진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금방 알아챌 리가 없는데.’
이브를 안은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은 것도 잠시, 그는 하늘을 보더니 침착하게 명령했다.
“왓슨, 전 기체에 자폭 시스템 가동.”
─ 자폭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차례차례 폭파되는 에어쉽 사이로 “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씨가 흩날리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아담은 통신기에 대고 물었다.
“어디야, 사샤?”
─ 맙소사! 아, 아담…… 조심해…… 요한이…….
통신기 너머로 ‘쾅!’ 하고 폭발음 같은 게 울려 퍼졌다. 얼핏 들려온 단말마의 비명 소리는 사샤의 목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샤? 사샤!”
뚝 끊겨 버린 통신은 더 이상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선 그는 무작정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브는 여전히 잠든 듯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요한이 왜?’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해안가로 가면 사샤가 보낸 무인 에어쉽에 합류해 탈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계획이 새어 나간 느낌이다. 저들은 마치 침입자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양 에덴 타워를 포위하고 있지 않았던가?
‘요한이 한 짓인가?’
잇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망할 자식이 결국 막판에 뒤통수를 친 것이다.
이브 구출 시점으로부터 약 30분 전,
연맹군 내 전략국 태평양전대 소속 잠수함
‘헤벨35): Abel’
“요한.”
“대, 대위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석식 시간이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식당에 있어?”
금발의 밀러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요한은 급히 돌아서며 등 뒤로 손을 감췄다. 그의 오른손 안에는 엄지만 한 크기의 통신기가 쥐여져 있었다.
“왜 그래? 오늘 종일 굉장히 초조해 보이는데.”
“별거 아닙니다. 그냥……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참모가 되는 건 쉽지 않지만, 너라면 문제없이 해낼 수 있을 거야. 모두가 기대하는 재목이잖아, 요한 제이콥스 소위.”
임관을 하자마자 정식 보좌관도 아닌 주제에 잠수함, 그것도 태평양전대 핵심 전력이라는 ‘헤벨’에 탑승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아담 덕분이었다. 작년 연맹군이 개최한 가상 시뮬레이션 전략 배틀전. 요한은 그곳에서 최종 우승을 했다. 물론 우승을 한 건 아담이었지만, 그는 이 모든 걸 요한이 한 것으로 위장했다.
요한 제이콥스Johann Jacobs.
천재적인 전략가, 명성 높은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 각종 지휘전략 게임과 모형 전투 시뮬레이션 대회 우승 경력 등.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은 아담이 만들어 준 거짓 경력에 불과했다. 덕분에 그는 연맹군의 전략국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이클 밀러 대위의 강력한 추천이 빛을 발휘했던 모양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단독 정찰 나간다며?”
“예.”
“나도 같이 갈까?”
밀러의 제안에 요한은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저 혼자서도 괜찮습니다만.”
“그냥 나도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함장님께서 아시면…….
밀러는 뭘 그렇게 걱정하느냐는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같은 또래인 요한을 살뜰하게 챙겨 주는 편이었다. 그런 밀러의 친절이 요한은 못내 부담스럽기만 했다.
두 사람은 각각 은색 아크레인36)에 올라탔다. 아크레인은 일반 에어쉽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크기지만 속도는 그의 두 배 이상이었다. 아크레인의 최대 장점은 스텔스와 결합된 불가시 모드인데, 빠른 속도와 작은 사이즈로 인해 굴곡 현상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때문에 정찰기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 대위님께서는 수면 밑보다 상공이 더 좋으신 듯합니다.
─ 그렇긴 한데, 헤벨은 나의 집이나 다름없으니까.
통신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아크레인을 발진시켰다. 은색의 기체가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마치 돌고래처럼 부상한 아크레인은 그대로 불가시 모드로 진입하며 상공 속에서 투명하게 사라졌다.
─ 첫 단독 비행치고 훌륭한데?
─ 자동비행 모드입니다.
─ 아…….
─ 파일럿이 직접 조종하는 것보다 자동비행 모드가 더 안전하다는 건 이미 수차례 증명된 사실입니다.
─ 요한 넌 너무 안전지향주의야. 때로는 모험을 즐길 줄도 알아야지, 진정 남자라면 말이야.
─ 군인은 그래선 안 됩니다.
─ 아, 그래. 군인은 그래선 안 되지…….
밀러는 또다시 할 말을 잃은 듯 신음을 흘렸다. 요한은 피식 웃다가 공허한 눈빛을 지었다.
밀러의 부친은 잠수함 헤벨의 함장이었다. 어쩌다가 다른 부사관에게 듣게 되었는데, 그는 함장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 인생이란 참 모를 일이다. 일개 고아에서 운 좋게 군인 엘리트 집안에 입양된 그는 한순간에 수직으로 계층 이동을 했다.
함장은 미혼으로 메리라는 딸이 하나 더 있는데, 그녀 역시 입양아였다. 메리는 음탐사로 밀러와 같은 잠수함에 탑승하고 있었다. 밀러는 여동생인 그녀와 늘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아직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둘이 다정한 오누이 사이라는 건 확실했다.
─ 보여? 저게 로스트 헤븐이야. 왓슨 그룹이 만든 지상 최고의 낙원이라는 곳.
─ 예.
─ 로스트 헤븐에는 스마트 더스트라는 우산이 있는데, 그게 진짜 환장할 노릇이라니까? 파리 새끼 하나까지 다 잡아내는데, 도저히 숨어들 구멍이 없어. 완벽한 요새나 다름없지.
오늘도 다가설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였다. 밀러는 아쉬운지 쉽게 물러서지 못했다. 여기서 더 깊숙이 들어섰다가는 스마트 더스트에 의해 발각될 것이다. 발각만 되면 다행이지, 문제는 저 스마트 더스트라는 게 그 자리에서 해당 대상을 나노입자 단위까지 해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본체인 슈퍼컴퓨터와 시냅스처럼 나노 입자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데, 분석 속도가 타키온37)급이라고.
─ 저걸 만들어 낸 녀석은 대체 어떤 사고 회로를 가지고 있을까?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천재거나 괴물일 텐데.
괜히 뜨끔한 요한은 영혼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걸 만들어 낸 녀석? 사람은 아니라는 데에 내 좆을 걸겠다.
─ 봐, 요한. 로스트 헤븐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야. 전투 에어쉽들이 쫙 깔려 있잖아. 게다가 스마트 더스트까지 해제되어 있어!
─ 대위님, 귀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기다려 봐.
밀러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로스트 헤븐을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아닌가?
─ 일단 함장님께 보고부터 드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 그사이에 다시 저들이 우산을 펼치면? 순간적인 오류일지도 모르잖아.
그는 한 바퀴 돌고 온다는 말과 함께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렸다. 요한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게 내 팔자인가? 그는 조종대 옆 스크린에 뜬 밀러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조용히 해안가로 향했다.
어둠에 휩싸인 절벽에는 에어쉽 한 기가 바짝 붙어 있었다. 그는 상대 조종사와 통신 연결을 명했다.
“사샤?”
─ 요한? 온 거야?
“그래. 아담은 어디 있어?”
─ 이제 곧 에덴 타워에서 나올 거야. 그런데 저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에덴 타워를 완벽 봉쇄하고 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
─ 아무래도 정보가 샌 거 같아. 네가 저 녀석들 주의 좀 끌어 줄 수 있어? 연합군의 아크레인이 나타났다고 하면 병력이 좀 분산될 거야.
요한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난감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 어차피 에어쉽으로 아크레인을 쫓아가는 건 무리잖아. 그냥 혼동만 좀 주면 돼.
“미안해, 사샤. 그건 안 되겠어.”
그녀는 어리둥절하니 듣다가 “잠시만, 아담으로부터 통신이야.”라며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요한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너희들의 은혜는 잊지 않을게. 하지만 내 과거를 아는 너희들이 있는 한 나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거야.”
─ 요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안하다. 사샤, 특히 너에게는 정말 면목이 없어.”
─ 설마 너…… 네가 저놈들한테 정보를 흘린 거야?
사샤는 불안에 젖은 목소리로 “요한! 대답해!”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댔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다.
요한은 말없이 통신을 종료했다. 멀리서 득달같이 날아오는 에어쉽들이 보였다. 이제야 수색대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정보를 줘도 저 모양이니,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면 눈뜨고 코 베인 격으로 당했을 게 뻔했다.
그는 아크레인을 슬금슬금 후진시키며 이동했다. 사샤의 에어쉽을 발견한 수색대는 바로 격추 모드로 돌입하여 기관포를 조준했다.
투두두두!
요한은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다. 수색대의 에어쉽들은 절벽을 향해 난사를 하고 있었다.
투두두두!
쾅!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사샤의 에어쉽이 격추당했다. 폭발 충격에 아크레인 내부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요한은 차마 밖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사샤…….’
미약하게 남은 양심의 조각이 폐부를 찔렀다. 쓰디쓴 파열 같은 게 가슴 전체를 꽈악 쥐었다가 스며들 듯 퍼져 나간다.
원래 배신자들은 본인이 비열하고 교활하다는 걸 잘 안다.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나 이해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그들도 염치라는 걸 느낄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 밑바닥에 근본적으로 위치한 그들의 철학은 독락독무獨樂獨舞다.
어차피 뒤돌아서면 타인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삶이란 결국 홀로 즐기고 홀로 빚다 가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용서와 이해를 본인들 스스로가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그리하여 더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라고 변호를 한다.
‘나를 제외하고선 누구도 신뢰하지 말지어다. 그것은 아담, 네가 내게 가르쳐 준 철칙이기도 하니까.’
멀리 절벽 위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아크레인이 급발진을 하기 시작했다.
【경고】
정체불명의 에너지원 감지.
긴급 대피 모드로 전환합니다.
조종석 내부의 경고등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속도를 높인 그의 아크레인은 수면을 가르며 총알처럼 날았다. 요한은 황급히 손잡이를 잡았다. 속도 때문인지 기체가 심하게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흘끗 돌아본 요한의 동공이 조리개를 열며 휘둥그레 커졌다. 거대한 섬광이 수면을 삼키더니 반원을 그리며 폭발하고 있었다. 반동으로 커진 파도가 삼킬 듯 뒤꽁무니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은색 아크레인은 황급히 촉새처럼 튀어 올라 수면으로부터 멀리 날아올랐다.
【알림】
Arkrein automated system activated.
잠항 모드로 변환합니다.
불가시 모드 해제.
요한과 달리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밀러는 쿨럭거리며 눈꺼풀을 열었다. 눈두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든 그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정신이 멍했다. 앞을 쳐다본 그는 사방이 어두컴컴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물속이란 걸 깨달았다.
“요한 말대로 역시 자동비행 모드를 할걸 그랬어.”
만약 파도에 휩싸인 채 운 나쁘게 절벽이나 암초에 부딪치기라도 했다면, 이미 머리통이 깨진 채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소름이 돋는다는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벨38), 요한은?”
밀러는 인공지능에게 요한의 생사부터 물었다. 후임이 잘못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선임의 책임이다.
“무사해?”
─ 통신 장애로 인해 확인이 불가한 상태입니다.
“웬 통신 장애?”
─ 모르겠습니다. 오류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뭐?”
─ 기체 내부의 결함일지도 모릅니다. 좀 전의 충격으로 인해 물리적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기체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시스템 복구를 시작합니다.
알 수 없는 말을 던지던 아벨은 제멋대로 시스템 복구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복구 중에는 스텔스 및 불가시 모드로 변환하는 것 모두가 불가능하다. 꼼짝없이 십 분간은 여기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채 처박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설마 발각되진 않겠지?
‘그나저나 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절벽 위를 뛰던 소년과 소녀.
로스트 헤븐을 둘러보던 밀러는 섬 동쪽에 치솟은 타워 근처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곳에선 영화 못지않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는 검게 치솟은 연기 사이로 기체를 숨긴 채 지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소년과 소녀는 여린 짐승처럼 뛰고 있었다. 기다란 총구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총상에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소년을 구하는 소녀의 모습은 어린 잔 다르크처럼 용맹무쌍했다.
밀러는 숨이 멎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뭐랄까, 경이로웠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본인의 상황도 잊은 채 점점 그들에게 깊게 몰입했다.
‘위험해!’
저격수를 발견한 밀러는 속으로 외쳤다. 소녀가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총탄을 향해 뛰어드는 게 보였다.
─아아아악!
─뛰어!
소년이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너무나도 처절한 울음소리에 그의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제발 붙잡히지 마.’
두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밀러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말리는 아벨의 경고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추락과 함께 거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수면 아래에서 미사일이라도 터뜨린 건가? 그랬다면 아예 절벽이 무너져 내렸겠지.
이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에너지원이 감지되었다.
아크레인은 조각조각 깨질 것처럼 미친 듯이 흔들리며 파도에 휩쓸렸다. 경고등이 깜빡거리고 아벨은 기체 탈출을 권했지만 밀러는 충격파에 의해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 대위님.
한 마리의 고래처럼 유유히 물속을 부유하던 아크레인이 갑자기 불빛을 지폈다. 기억을 더듬고 있던 밀러는 조종석에 기댄 채 귀찮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왜 그래?”
─ 화면을 확인해 주십시오.
오로라처럼 번져 가는 핏줄기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춤추듯 너울거리는 머리칼. 기포 같은 것에 휩싸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령처럼 잔물결 사이로 넘실대며 부유하는 인영은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이었다.
“사람 같은데. 죽은 건가?”
─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구조하시겠습니까?
그는 잠시 고민했다. 헤벨이 로스트 헤븐을 감찰하고 있다는 건 일급 기밀이었다. 아크레인의 존재가 드러나는 건 최우선적으로 피해야 한다.
“그냥 무시하지.”
─ 알겠습니다.
“잠깐!”
방향을 보아하니 로스트 헤븐 쪽에서 떠내려 온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좀 전의 섬광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밀러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벨이 화면을 확대시켰다. 밀러는 대상에 초점을 맞춰 더 자세히 확대시켰다. 조금 흐릿하지만 인영의 형상이 점차 또렷해졌다.
물속에서 연기처럼 떠다니는 검붉은 핏줄기, 그 사이로 보이는 가녀린 몸체, 피로 어둡게 물든 하얀 원피스.
그는 아벨이 비추는 소녀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위님?
아벨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말없이 화면을 보던 밀러는 멍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해.”
─ 죄송합니다. 다시 명령해 주십시오.
그는 다급한 눈초리를 던지더니 좀 전과 달리 확고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지금 당장 구조하라고!”
* * *
【경고】
본 연구 단지는 폐쇄 조치가 내려진 곳입니다.
안전을 위해 관계자 외에는 엄밀히 출입을 금지합니다.
낙원의 관리자가 폐쇄해 버린 연구 단지 입구에는 경고 메시지가 붙여져 있었다. 단 몇 달 만에 살풍경해진 경관은 스산한 분위기를 조장했다. 어두컴컴한 게이트를 지나치자 버려진 에어쉽 한 기가 승강장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사건이 일어났던 A동은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였다. 말없이 걷던 남자는 잠시 서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미약한 피 냄새가 연구 단지 곳곳에 남은 채 공기 중에 감돌았다. 괜한 흥분감이 몰려온다. 맨해튼에서의 전투로 인한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음미하듯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조금 만족한 미소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허리를 약간 구부린 그의 등에는 한 남자가 정신을 잃은 채 업혀 있었다.
대부분의 실험실 문들은 박살 난 채 열려 있었다. 남자는 아무 방으로 들어가 실험대 위에 누군가를 눕혔다. 푸른 비상등이 켜진 건물은 전체적으로 음습하고 어두웠다.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방구석에서 누군가 부스럭거리며 인기척을 내는 게 들려왔다. 남자의 눈초리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바로 공격할 기세로 몸을 낮춘 채 살기를 곧추세웠다.
부러지고 무너진 화분들 사이에서 누군가 퀭한 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맥 빠지게도 상대는 야윈 몰골을 한 여자였다.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제복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야가 보냈나?”
그는 여자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었다. 고대 그리스 여신 풍의 긴 실크 드레스였다. 드레스 밑단은 걸레 자락처럼 찢어지고 헤졌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태양의 도시에서 입실론 하나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났다. 에덴 타워의 공식 발표로는 죽었다던데, 아니, 실종되었다고 했던가?
잠시 생각하던 남자는 오히려 잘됐다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 좀 맡기겠습니다.”
“맡기다니, 뭘?”
그는 하얀 실험대 위에 누워 있는 청년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일어나면 난폭해질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 본인의 몸에 손대는 걸 극히 싫어하니까 웬만하면 건드리지 마시길.”
알몸의 청년은 찢어진 셔츠로 하반신만 가리고 있었다. 밧세바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할 법한 남신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잠들었는지 숨소리만 내뱉는 그는 조각상이 숨 쉬는 듯 괜한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이 사람이 누군데?”
그때 어디선가 “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복 차림의 남자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위로 움직여 천장을 쳐다보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동일 인물이 또다시 “으아아아아!” 하고 울부짖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침상에 바짝 붙으며 해명했다.
“그냥 정신 나간 자요. 두려움에 그러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괜히 그가 올라가서 확인이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게 분명했다. 남자는 말없이 벽 귀퉁이를 쳐다보았다. 잠시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밧세바는 초조한 눈으로 깍지를 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고함을 지르는 미치광이의 존재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한 번만 더 그의 심기에 거슬리는 짓을 했다가는 위층의 박사를 죽이러 갈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층 친절해진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맡고 있으란 거요?”
다행히 그의 관심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고민하듯 날짜를 세더니 짤막하게 답했다.
“나흘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근데 당신은 대체 누구요?”
군부의 장교임은 틀림없었다. 로스티아벤의 총지휘관은 우리야 세르게이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우리야 같은 놈 밑에서 구두 밑창이나 핥을 소인배는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풍기는 아우라가 있다. 이 남자의 아우라는 수풀 뒤에 숨은 늑대처럼 은밀하지만 사납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느낌의 사내였다. 우리야와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를 속내에 품고 있었다.
“알면 피차 불편해질 겁니다. 제가 굳이 당신의 이름을 묻지 않는 것처럼.”
그의 대답에 그녀는 차분한 눈빛을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눈치와 담력만 늘었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밧세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분을 잘 부탁합니다.”
남자는 연구 단지를 걸어 나오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연구동을 휩쓸며 스산한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설마 스스로 각성을 해 버릴 줄이야.’
예상 밖의 전개였다. 각본대로 흘러가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건 정말 뜻밖이었다. 그리 약하게 해 둔 봉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덕분에 자신만 바쁜 몸이 되었다.
이쪽은 일단 안심이니, 슬슬 다른 쪽을 확인하러 가 볼까?
밀러의 아크레인이 헤벨로 귀환했다. 무사 귀환이라 축하할 법도 하지만, 격납고에 모인 엔지니어들은 쯧쯧거리며 그에게 미리 상황을 귀띔해 주었다.
“요한이 함장님께 불려 갔다는 말씀입니까?”
헤벨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이곳의 베테랑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사십 대였는데, 격납고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밀러와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 그들은 밀러를 제 아들처럼 귀여워하며 종종 담소를 나누고는 했다.
“그렇다니까. 함장님께서 아주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모양이야.”
“차라리 돌아오지를 말지 그랬어, 마이클…….”
“그러게. 그냥 그대로 실종되는 게 나을 뻔했네.”
“아니면 다리라도 하나 부러져서 오든가. 왜 이렇게 멀쩡한 거야?”
밀러는 홀쭉해진 얼굴로 멍하니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걱정을 해 주는 건지, 아니면 저주를 해 대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놀리는 건지 감이 오지를 않았다.
그때 아크레인의 내부를 확인하던 엔지니어 한 명이 물고 있던 담배를 퉤 뱉으며 소리쳤다.
“이게 웬 피야? 너 다쳤어?”
“아, 그거…….”
자신이 흘린 피가 아니라고 말하려던 밀러는 입을 다물었다. 소녀의 존재를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함정에 도착하자마자 비밀리에 의무실로 보내진 상태였다.
“코피가 터져서.”
그의 말에 엔지니어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피 자국이 아닌데?”
“그런데 저 녀석도 피라는 걸 흘리긴 하나? 쟤 저번에 격납고 차단벽에 끼었던 적도 있었잖아. 그때도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단 말이야.”
턱과 뺨에 듬성듬성 수염이 난 중년 남자가 일전의 일화를 꺼내며 말했다. 그는 처진 눈으로 의심스럽다는 듯 밀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란 말이야. 뼈에 철심을 박았나?”
“몰랐어? 저놈 외계인이잖아.”
“크립톤 행성에서 왔는지도 몰라.”
엔지니어 다섯 명이 작정하고 놀려 대는데 이길 도리가 없었다. 밀러는 질렸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야, 이거 뭔 피냐고! 보고를 올려야 할 거 아냐!”
“그냥 보고하지 마십시오. 사람만 멀쩡하면 됐지, 아벨도 가만히 있는데 왜 아저씨가 난리예요?”
“아저씨? 저 자식이 내가 짬밥이 얼만데 어디서 아저씨 소리야.”
“우리가 너무 오냐오냐했지.”
밀러의 반항 어린 대답에 엔지니어들은 발끈해서 잔소리를 쏟아 냈다. 밀러는 귀를 막은 채 격납고를 나섰다. 하나같이 걱정 섞인 소리라는 걸 알지만, 가끔은 도가 지나쳐서 문제였다.
─ 출입문 열립니다.
통로로 이어지는 출구가 열리자마자 누군가 달려와 그의 가슴팍에 폴짝 안겼다. 엉겁결에 껴안은 밀러는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칼을 보자마자 피식 웃었다. 왜 안 보이나 했더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밀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훌쩍거리던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버럭 잔소리부터 쏴 댔다.
“오빠 미쳤어? 대체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기나 해? 로스트 헤븐에서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은데, 오빠가 함장님 몰래 아크레인을 끌고 나갔다는 거야! 그런데 그대로 아크레인과 통신이 끊겼다고 해서 다들 오빠한테 큰일이 생긴 게 아니냐고…….”
기체의 통신 두절은 대체적으로 기체 실종을 의미했다. 실종된 기체에 탑승하고 있던 조종사의 생사는 대개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좀 전까지만 해도 헤벨 내부는 밀러가 탄 아크레인과의 통신 두절로 인하여 초상집 분위기였다.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대위님!”
메리의 뒤에서 멋쩍은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뒤로 병사들이 안심한 얼굴로 주르르 서 있는 게 보였다.
“다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군복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 금발의 대위라는 별명을 가진 밀러는 예쁘장한 얼굴과 달리 모험심이 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헤벨에 대한 책임감이 남다른 인물이기도 했다.
“요한은?”
그의 질문에 메리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찌푸리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문책받고 있겠지. 오늘 첫 정찰이었는데 그 사람이 오빠한테 동행을 부탁했다며?”
“요한이 내게 동행을 부탁했다고?”
밀러가 굳은 얼굴로 팔을 풀자, 메리는 갸우뚱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화가 난 듯 말없이 병사들을 지나쳤다.
“의무실로 가 봐.”
메리의 말에 밀러가 멈칫 뒤로 돌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함장님께서 의무실로 향하시더라고. 요한은 잠시 대기 상태일 거야. 징계는 피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의무실이라기에 나는 오빠가 다친 줄로만 알았는데…….”
메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을 흐렸다. 밀러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다.
헤벨의 의무실은 웬만한 군병원 못지않은 시설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의무실에서는 간단한 치료부터 대수술까지 가능한데, 모든 시술은 의료 전용 인공지능에 의해 이루어졌다. 함정 내 의무병은 존재하지 않지만 특수 상황의 경우에는 군병원의 의무장교에게 원격수술을 의뢰하여 진행할 수 있다. 의무실 옆에는 이 인용 회복실도 소유하고 있었다.
밀러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의무실 앞에 도달했다. 함장이 의무실로 향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데려온 소녀 때문일 것이다. 아크레인에서 일단 간단한 지혈은 해 두었는데, 괜찮을라나? 이상할 정도로 체온이 낮고 호흡이 느리던데. 사실 아까부터 소녀의 안부가 궁금해 엉덩이가 들썩거리던 참이었다.
고민하던 사이 의무실 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문 앞에는 검은 제복 코트를 입은 남자가 코까지 깃을 세운 채 얼굴을 묻고 있었다. 밀러의 눈이 굳은 채 그를 응시했다.
‘이런 자가 있던가?’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 또한 놀란 듯 동공이 커졌다. 이윽고 남자는 눈초리에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밀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틀어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닥하더니 어깨를 스치며 걸어갔다.
밀러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장신의 몸으로 좁은 통로를 압도하며 걸어가던 남자는 코너를 도는 순간 그를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얼핏 보인 남자의 뺨의 십자 상흔이 시야에 날아들었다. 폐부가 조여들며 숨이 막혔다. 밀러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심호흡을 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원인 모를 공포심에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 어서 오십시오, 마이클 밀러 대위님.
의무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그의 뒷목은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찝찝하고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사이 그가 데려온 여자아이는 수술을 받은 모양이었다. 안쪽으로 돌아오자 정면에 위치한 하얀색 수술대가 내려오고 유리 덮개가 열렸다. 안을 들여다본 밀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누워 있는 소녀는 복부와 어깨, 그리고 얼굴 전체를 미라처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전신의 피부 조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하는구나. 얼굴의 경우는 골격을 다쳐서 어쩔 수 없었다.”
부친인 아서 밀러 함장의 목소리였다. 그는 커튼 뒤에서 걸어오더니 뒷짐을 진 채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은발의 아서는 올해 쉰다섯으로 적지 않은 연령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젊은 사병들 못지않은 체력과 패기로 헤벨을 지휘했다. 또한 따뜻한 마음으로 헤벨을 그들의 집으로 만들어 준 온후한 함장이었다. 밀러 역시 그를 아버지로서 그리고 함장으로서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일단 수술은 잘된 것 같다만, 여자아이니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밀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얼굴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심각한 건 복부 쪽의 총상이었다.
“이마는 왜 저런 겁니까?”
붕대로 감아 놓은 그녀의 이마에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밀러는 곁눈질로 수술대 옆 화면을 훔쳐보았다. 아직 수술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었다. 화면을 읽던 그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며 물었다.
“각막 수술?”
눈도 다쳤었나? 다시 생각해 봐도 안면 쪽에는 별다른 징후나 문제가 없다고 했던 아벨의 보고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서는 밀러의 어깨를 짚더니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 아이가 로스트 헤븐 출신이란 건 극비 사항이다. 현재 너와 나, 그리고 아벨만 알고 있는 상황이지. 아이의 이마에서 나오는 빛의 원인은 현재 아벨이 분석 중에 있다.”
그때 함장 전용 라인으로 아벨의 보고가 들어왔다. 허공에 뜬 홀로그램 메시지 창을 바라보던 아서 함장은 “보고하도록.” 하고 짧게 승인을 내렸다. 오늘 발생한 사건에 대한 1차 보고였다.
─ 로스트 헤븐 근방에서 일어난 섬광 ‘엘로힘’39)은 해저에서 발생한 전기 에너지가 해수면의 공기 입자와 부딪치면서 생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크레인과의 통신 두절의 원인은 바로 이 섬광에서 발생한 거대 자기장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저에서 나왔다는 그 에너지의 원인은 뭔가?”
─ 불명不明입니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재해였을 가능성은?”
─ 가능성이 있습니다.
함장의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어렸다. 아벨이 화면에 띄운 수치상으로는 약 8%의 가능성으로 자연재해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꽤 낮은 수치다. 그럼 대체 그 섬광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혹, 로스트 헤븐에서 비밀리에 군사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덧붙이자면, 환자의 미간에서 발하는 빛으로부터 엘로힘과 동일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됩니다.
아서 함장과 밀러의 눈이 동시에 소녀에게로 향했다.
─ 지휘 본부에 보고하시겠습니까?
“잠깐 기다려.”
아서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보고는 미루도록 한다. 엘로힘과 이 아이에 대한 내용은 함장 권한으로 최고 보안 등급인 기밀문서에 붙이도록.”
─ 알겠습니다.
“함장님, 대체 저 아이의 정체가 뭡니까?”
“글쎄다……. 확실한 건 평범한 소녀는 아니라는 거지. 너도 그걸 알고 데려온 거 아니었더냐?”
아서의 말에 밀러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그녀를 본 순간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반드시 ‘내가’ 구해야겠다는 사명 의식마저 들 정도로 어떠한 운명이 느껴졌다. 그때 그의 뇌리에 좀 전에 스치듯 지나갔던 검은 코트의 남자가 떠올랐다.
“아, 그자는 누굽니까? 방금 전까지 의무실에 있었던 장신의 남자 말입니다.”
순간 바보같이 그냥 넘어갔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가 입고 있던 제복은 연맹군의 것이 아니었다. 즉, 아군이 아니란 뜻이다. 아군도 아닌 정체불명의 남자가 전략국의 핵심 전략이자 아직 공개되지 않은 기밀 함정 ‘헤벨’에 탑승하다니,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아서는 생각에 잠긴 채 침묵했다. 부친의 신중한 태도가 그의 입가를 바짝 메마르게 했다. 대체 누구이기에 연맹군의 하얀 호랑이 ‘아서 밀러’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난처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걸까?
“나는 그를 ‘검은 함장’이라고 부른다.”
“함장이라면 역시 군인이군요. 어디 군 소속입니까?”
아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예?”
“그를 처음 본 날, 네가 저 남자를 그렇게 불렀지 않느냐. ‘함장’이라고.”
밀러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혼란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정체불명의 남자가 사라진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워낙 오래전 일이니 그럴 법도 하지.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니까.”
“제가 저 사람을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라면 부친인 아서를 만나기 전이거나, 그 즈음의 일이다. 어째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검은 함장은 내게 널 잠시만 맡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널 양자로 들인다고 하자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지. 오늘 저자를 본 게 사실 십수 년 만인 건데…….”
정말 놀랍게도 남자는 그 긴 세월간 변한 것이 없었다. 외양적인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야 의학 기술을 빌린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아서가 느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기백이라고 해야 하나? 헤벨의 함장이자 전략국장인 그조차 무릎 꿇게 만드는 카리스마였다. 눈초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랄까, 주변 공기를 압도하는 에너지 같은 게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서의 시선이 다시 소녀에게로 향했다. 소녀의 이마에서 빛나는 각인의 빛. 그곳을 어루만지던 남자의 손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랜만입니다, 아서.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던가요?
장난을 치듯 인사말을 건네던 그의 손에는 옅은 빛이 맴돌고 있었다. 도대체 헤벨의 안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그놈의 귀신같은 솜씨는 여전했다. 그가 아서를 향해 돌아서자 소녀의 수술대가 올라가며 덮개가 닫혔다. 남자는 볼일이 끝났다는 어조로 검은 코트를 몸에 휘감으며 말했다.
─나흘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악마같이 웃으며 사라지던 사내는 선택지 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닮아 있는 상황이었다. 십삼 년 전, 다 죽어 가던 금발의 소년을 발견했던 그 밤의 모습과.
“마이클.”
밀러의 푸른 눈이 아서를 빤히 응시했다. 아서가 그를 이름으로 부를 때는 직함을 내려놓고 대화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예, 아버지.”
“너는 특별한 아이였다.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아이였어.”
그는 아주 어렵게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냈다. 부디 밀러가 곡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검은 함장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나는 널 내 자식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것만은 진심이다.”
무뚝뚝한 부친이지만 결코 매정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서는 늘 소리 없이 그를 감싸 주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고개를 끄덕이는 밀러를 보며 아서는 망설임 끝에 말했다.
“그래서…… 이 아이 역시 내가 거둘까 한다.”
“예?”
밀러는 놀란 얼굴로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헤벨이 거두자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혹시 검은 함장이 부탁한 겁니까?”
부친의 입가에 한숨이 맴돌았다. 대답 대신 아들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오랜 기억과 깊은 사연에 묵힌 그의 눈초리는 괴로움에 회오리치며 일렁이고 있었다.
“여동생이 하나 더 생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아서를 보던 밀러가 먼저 입을 열어 주었다. 검은 함장이 부탁한 것이든, 오롯이 아서의 뜻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난 십삼 년간 아서는 그에게 있어 훌륭한 아버지였기에.
두 부자는 말없이 대화를 갈무리했다. 어깨를 툭툭 친 손끝만으로도 서로의 깊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아서가 의무실을 떠난 뒤로도 밀러는 한참 동안 의무실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 거듭 떠오르는 거구의 남자, 검은 함장이라 불렸던 사내가 유령처럼 방에 남아 그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지?’
아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채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소년이 함장이라 불렀던 사내.
밀러는 파도처럼 고요히 일렁이는 눈으로 하얀 벽을 응시했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기억과 숨바꼭질을 하며 회복실에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나흘째 되는 날, 마침내 소녀가 정신을 차렸다. 깨어난 그녀는 눈과 입가만 제외한 채 여전히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멍한 눈을 뜬 소녀의 눈앞에는 두 남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메리와 설레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밀러였다.
“안녕?”
밀러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검은 멍울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밀러는 하늘색 눈동자로 예쁘게 생긋 웃더니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잘 잤어?”
벌떡 일어난 소녀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밀러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이를 악문 채 그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방심하고 있던 밀러는 그대로 ‘퍽!’ 하고 안면 타격과 함께 벌러덩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알림】
대기 중인 모든 병사들과 장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대회의실로 집합하도록 합니다.
본 지령은 함장실로부터 내려진 명령입니다.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그렇대. 본인 이름, 나이, 국적, 부모님, 살던 곳, 아무것도 말이야. 분석 결과 아벨 말로는 한국계와 러시아계 혼혈이라고 하더라고. 한국계 성씨로는 정 씨, 유 씨, 임 씨 성의 소유자들과 유전자 공통분모를 보이는데 특히 정 씨와 DNA 일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해. 러시아 쪽 DNA 맵핑으로는…….”
메리의 보고를 듣던 밀러는 뺨을 슬슬 문질렀다. 그를 쳐다보던 메리는 혀를 내두르더니 잠시 보고를 멈추고 말했다.
“그 조그마한 애한테 주먹을 맞고 넘어가다니, 좀 심한 거 아니야?”
“정, 유, 림.”
밀러는 대답 대신 뭔가 생각이 났는지 번뜩 외쳤다. 메리는 중간에 자신의 말을 뚝 잘라먹은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밀러를 미친놈처럼 쳐다보았다.
“어때?”
“그게 뭔데?”
“이 아이 임시 이름.”
“정유?”
“아니, 정유림이라고. 한국은 성을 앞에 붙인다며. 어때?”
“음, 유림이라. 나쁘지 않은데?”
통로를 걸어가던 두 사람은 회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자 아서 옆에 얌전히 서 있던 소녀가 눈초리를 치켜세우며 둘을 쏘아보았다. 얼굴에 칭칭 감은 붕대 뒤로 찰랑거리는 흑발에서조차 찌릿찌릿한 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메리는 부르르 떨더니 밀러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전했다.
“성질이 좀 고약해 보이지 않아? 잔뜩 경계하는 길고양이처럼 털을 삐죽빼죽 세우잖아. 그런데 얘 오빠 되게 싫어한다. 내가 아니라 오빠만 빤히 노려보는 것 같은데? 생긴 게 마음에 안 드나?”
밀러는 킬킬거리는 메리를 흘끗 째려보았다. 그는 조금 서글픈지 연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아니잖아.”
“못생기긴, 너무 잘생겨서 문제지.”
전략국 내에서 미남으로 소문난 밀러였다. 심지어 옆 동네인 정보국에서조차 그가 작전본부에 들를 때면 심심치 않게 ‘금발의 대위’를 구경하러 오는 판인데. 메리는 괜히 제가 자존심 상하는지 흑발의 들고양이에게 ‘메롱’ 하고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자 소녀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아서 함장의 팔에 팔짱을 꼈다.
“어머, 쟤 봐라? 우리 아버지한테…….”
아서는 인자하게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메리는 울상이 되어 옆에 서 있던 밀러를 쿡 찔렀다. 그녀는 불쾌해 못 참겠다는 어조로 소곤소곤 물었다.
“정말 저 심보 나쁜 고양이가 내 여동생이 되는 거야? 정말로?”
밀러는 대답 대신 소녀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딱 맞았다. 그러자 고양이처럼 사납게 올라간 그녀의 눈초리가 조금 의아한 듯 아래로 쳐졌다.
“나는 마이클라고 해. 마이클 밀러 대위.”
“…….”
“오늘 나하고 메리가 네 이름을 생각해 봤는데, 유림이라고 지어 봤어. 네 성씨는 정 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고. 아마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 분이 한국인이셨을 거야.”
소녀는 그의 연하늘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줄곧 심술을 부리던 그녀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불안이 어려 있었다.
“마음에 드니?”
아무 말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 못한 아서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유림, 나는 아주 예쁜 이름 같구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메리를 쳐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메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헤벨에 온 걸 환영해, 작은 고양이.”
대회의실에 모인 병사들은 작은 소녀와 함께 나타난 아서 함장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뒤이어 등장한 풍성한 뷔페 음식과 술병들에 이게 웬 떡이냐며 함성을 터뜨렸다.
“오늘 우리 헤벨에 새로운 식구가 생겼습니다! 이런 날 술과 음식이 빠질 수 없죠? 아, 정작 주인공은 미성년자라 마실 수가 없다고 합니다만 그건 우리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맨 앞자리 구석에 앉아 있던 메리는 턱을 괸 채 앉은 밀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밀러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왠지 아버지께서 오빠를 처음 데려온 날과 닮지 않았어?”
밀러의 입가에 소소한 미소가 어렸다. 사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기억을 잃은 아이, 불안에 젖은 눈빛, 따뜻한 손이 이끌어 준 곳에 모인 사람들. 새 가족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그를 반겨 주었다.
“다들 먹고 노느라고 내겐 신경도 쓰지 않았지.”
밀러의 중얼거림에 메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저 까칠한 고양이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헤벨의 일원이 되는 거니까.
그 소란 속에서 홀로 굳은 채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앉아 있는 유림을 보며 불안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설마 아니겠지.’
얼굴에 칭칭 감은 붕대. 눈초리와 입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보이는 눈동자 색깔이 검다. 이브는 분명 붉은 눈이었어. 그것만큼은 지금도 기억했다. 피처럼 선명하게 빛나던 동공.
요한은 덜덜 떨리는 손을 뒷짐 지며 감췄다.
‘그래, 아닐 거다.’
더 이상 이런 불안 속에 살고 싶지 않아 저지른 일이 아니었던가? 아담과 사샤는 죽었다. 확실하게 확인한 건 아니지만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제 요한 가르두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난 살아남았어.’
식은땀 속에 하얀 미소가 피어났다. 지긋지긋한 맹수 정글의 피라미드 속에서 드디어 벗어난 것이다. 저쪽에서 밀러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요한을 향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요한 역시 앞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밀러가 잔을 부딪치는 시늉을 하며 술을 털어 넣자 요한도 스스로를 향해 축배를 들며 속으로 외쳤다.
‘요한 제이콥스! 기뻐해, 넌 이제 해방이야. 비로소 자유를 손에 거머쥔 거라고!’
* * *
어둠은 그들과 아주 가까운 존재였다. 파괴와 분노는 그들의 본성이었고 혼돈과 무질서는 그에 따른 산물이었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일족은 점점 더 태초의 형태에 가까워져 갔다. 일족은 그게 곧 강해지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자만이고 오산이었다.
아득한 여정 속에서 방주의 길잡이는 아이들에게 태초부터의 긴 역사를 속삭여 주었다. 지루하고 고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그러나 아무리 흘려들어도 수천 번, 수만 번을 거듭해 듣다 보면 결국 외우기 마련이었다.
비스듬히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한 여자의 인영이 너울거리며 잡혔다. 본능적으로 잡고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여자가 흠칫 놀라며 뒤로 샤샤샥 뒷걸음질을 쳤다.
“맙소사, 아직 살아 있나 봐. 몸이 불덩이 같더니 이젠 얼음장처럼 차가운걸?”
“고, 곧 의식을 차릴 것 같아. 이, 일어나기 저, 전에 얼른 숨자, 응? 바, 밧세바 서둘러…….”
벽 뒤의 바퀴벌레처럼 모여서 속삭이던 인영들이 사라지자, 안면에 찬 공기가 부딪쳤다.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기운에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달빛이 스미는 창가 쪽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깨어 나셨습니까?”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두 뼘은 더 자란 신장과 반듯하게 펴진 어깨. 어색한 몸만큼 머릿속도 멍멍했다. 그 순간, 부채처럼 펼쳐지는 기억이 파도처럼 전신을 휩쓸었다.
─사랑해, 아담.
갈래갈래 파동 사이로 번져 가던 핏줄기. 시체처럼 붕 떠 있던 몸. 섬광과 함께 파편처럼 부서져 버린 인영.
살갗이 오스스 일었다.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휩쓸며 오싹한 느낌을 선사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붉게 젖은 눈시울 위로 혼란스러운 눈빛이 보였다. 아름답던 소년의 미성은 그윽한 저음으로 변해 있었다. 달밤의 정취를 담은 듯 은은하면서 깊은 목소리였다.
남자는 이제 눈높이가 비슷해진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각처럼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은 여전했다. 다만 날카롭고 반듯한 콧날과 남자다운 턱 선이 육감적인 매력을 더했다.
“어엿한 성체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제 봉인을 스스로 풀어 버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강건해지셨군요.”
그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이윽고 뭔가를 떠올린 듯, 그의 눈빛이 얽인 실타래를 풀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날, 나발루니예 언덕에는 거센 눈보라가 쳤다. 휘날리던 눈발 사이로 등장한 검은 손님. 사내는 칙칙하고 낮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우산 하나 없던 남자의 코트는 눈송이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반면 그의 눈초리는 광풍이 스민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특히, 사라의 배를 쳐다보던 시선은 소름 돋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보호하려 팔을 뻗을 정도로.
“너였군.”
아담은 손으로 지끈지끈한 머리를 주무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날 저택을 찾아왔던 남자다. 위험한 미소와 함께 일어난 섬광. 그리고 잃어버린 기억과 봉인.
“네 짓이었어. 네놈 때문에 이브가…….”
“납치되었다, 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담의 눈동자는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늘한 칼날처럼 날 선 핏빛 눈동자에는 섬뜩한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반면 그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남자는 평화로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래 당신의 능력이었다면 그녀를 지켜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엘 카인은 어떻습니까? 그의 추적도 피할 수 있었을까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엘이 알았더라면 그가 과연 가만히 있었을 것 같습니까?”
“동족 살인은 중죄다.”
아담의 말에 남자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려치며 “아아, 그렇죠.” 하고 감탄했다.
“제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계시군요. 장합니다. 당신은 의외로 반듯했으니까요. 반면 엘은 그렇지 않았죠. 동족상잔의 죄 따위 알게 뭐냐는 식으로 분란을 조장하고 피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분란이 아니라 반역이라고 해야 맞으려나? 그가 노린 것은 당신의 왕좌였으니 말입니다. 반인叛人의 말로는 대개 둘 중 하나죠. 단죄 혹은 혁명.”
“엘이 혁명가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일단은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엘과 미카엘은 함께 있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루하리만큼 길고 아득했던 여정이었다. 그 긴 세월을 버텨 온 방주는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한 녀석의 탐욕과 봉기로 인해.
이전의 기억은 분노를 끌어올릴 만큼 또렷한데 비해, 이상하게도 봉인 후의 기억은 뿌옇게 덧칠된 양 아른아른했다. 안개 저편으로 묻혀 버린 감각, 어째서 이렇게나 먼 예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시베리아의 눈밭 속에서 다가왔던 에어쉽의 뿌연 빛.
나발루니예 언덕과 백야의 바이칼 호.
아치형 창에서 쏟아지듯 떨어지던 달빛.
그리고 이브, 나의 이브.
선홍색 살기로 젖어 있던 눈에서 스르르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본래의 부드러운 다갈색 빛으로 돌아온 아담은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노아.”
“말씀하십시오.”
아담은 무릎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채 남자를 응시했다. 성체가 된 그였지만 여전히 예쁘고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어느 신화에서 여신들을 다툼으로 몰아갔던 미청년처럼.
“이브는 어떻게 됐어?”
아직 아이와 어른을 오가는 말투였다. 담담한 듯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노아는 잠시 창턱에 스민 달빛을 내려다보았다. 고민에 잠긴 노아의 표정을 흘끗 본 아담의 눈이 공허하게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잿더미에 덮인 것처럼 빛을 잃는다.
“죽었어?”
그가 다시 속삭이듯 물었다.
봉인이 풀리던 순간, 응집되었던 에너지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수면을 삼키고 상공으로 뻗어 나가던 빛줄기는 아마 정면으로 맞았다면 눈이 멀어 버렸을 것이다.
제우스가 세멜레에게 드러냈던 벽력의 섬광처럼, 그것은 평범한 인간에게 있어 치명적이었을 테니.
“어째서 그 소녀에게 그리도 집착하십니까? 고작 평범한 아이일 뿐이지 않습니까?”
절망적이다. 노아가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바스러져 간다. 아담은 생기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넌 이해 못해.”
그녀와 그의 유대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아담과 이브는 영원히 함께한다. 그녀가 없는 낙원은 그에게 있어 황무지에 불과할 뿐이었다.
“제가 갔을 때 그곳에 있던 건 피로 물든 물과 조각난 채 떠다니는 살점들, 그 사이를 부유하던 당신의 몸뿐이었습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담의 눈이 멍하니 얼어붙었다.
“떠다니던 살점들?”
“그렇습니다.”
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 사이로 고통에 일그러진 눈초리가 보였다. 가느다랗게 떠는 턱선 위로 빨라진 호흡이 새어 나오자, 턱을 따라 흐르는 물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붉어진 그의 눈시울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럴 리 없어.”
“…….”
“이브가 죽었을 리 없어.”
진득한 감정들이 공전하는 위성처럼 눈초리 끝에 남아 일렁였다. 부정하며 격분하던 그의 호흡이 밀려온 슬픔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아는 그런 그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본디 그들 일족은 감정이란 게 있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이기적이며 냉혹한 존재였다. 아담도 원래 방주에 있을 때까진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정적인 편이었다.
“굉장히 감정적이게 되셨군요.”
아담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해하듯 읊조렸다.
“이브의 얼굴이 잘 생각나질 않아.”
“찰나의 기억이니까요.”
“이브의 얼굴이 떠오르질 않는다고!”
울부짖는 그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봉인이 풀리면서 그의 머릿속은 곤죽이 된 것처럼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의 아이로 지내던 그 시간은 당신에게 있어 찰나에 불과합니다.”
─마다, 사랑해!
─이브를 데리러 와야 해.
─이브를 포기하지 마…….
영원 같던 시간이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순간이 별처럼 빛났다.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이브의 냄새, 웃음소리, 보드라운 손, 눈동자…….
연기처럼 흐릿하게 멀어져 간다.
아득하게 먼 과거의 일처럼.
암흑과도 같던 삶에 스며들던 단 하나의 빛.
‘이젠 없어…….’
이렇게 가슴이 쥐여 짜이는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폐부를 꽉 움켜쥐었다. 상실의 고통에 처절한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은데 울음을 터뜨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아담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소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얼굴엔 그을린 복수심만이 남았다. 탁한 눈빛에 거무튀튀한 살기들. 천사 같은 이목구비 위에 귀신의 형상이 어렸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묻는 노아의 음성에는 옅은 기대감이 감돌았다.
“엘 카인은 지금 어디에 있지?
노아는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달빛 너머로 등대처럼 서 있는 거대한 타워가 등장했다. 바로 며칠 전에 아담이 이브를 구해 탈출했던 에덴 타워였다. 아담은 손에 깍지를 낀 채 뾰족한 첨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널 잃은 내게 더 이상의 낙원은 없어.
그는 수면에 잠긴 달처럼 서늘한 눈으로 노아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의 눈빛은 사막처럼 건조했다.
아담과 눈이 마주친 노아는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핏빛으로 짙어진 그의 눈동자에서 비로소 각성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조각 같은 입술 새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 카인은 동족 시해자로서 일족 최대의 죄악을 저질렀다. 이에 나는 그를 처단하고 질서를 바로세우고자 한다. 방주의 길잡이는 나를 따르겠는가?”
오랜 시간 숙원하며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노아는 비로소 돌아온 방주의 주인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는 짜릿한 희열에 젖은 미소를 감추며 굵은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마스터.”
上 괴물의 탄생
서기 2063년 1월.
스타시티의 아브라함 회장이 자서전을 출간했다. 대필 없이 그가 직접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청소년들의 필독 권장 도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아브라함 회장은 자서전에 본인이 뉴욕 브롱크스Bronx 출신이라고 밝혔다. 그가 뉴욕 할렘가에서 마약을 팔아 콜롬비아 대학 학비를 마련했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세계 정점에 오른 자의 성공 신화. 그의 자서전 첫 페이지는 그의 모친인 레이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레이첼의 어린 시절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카고에서 가장 큰 갱단이었던 블랙 몬스터즈의 고위 간부였다. 커다란 저택과 정원, 흑표범처럼 날렵한 스포츠카. 그녀가 기억하던 집은 늘 부유하고 화려했다.
그녀의 부친은 경찰과 교도소 쪽 인맥이 많아서 갱단에 큰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백인이라는 이유로 갱단 내에서 늘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부 보수파들의 반발로 인해 조직은 둘로 갈라진 채 전쟁을 벌였다. 부친은 그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나이 고작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이후 모친은 급히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했다. 그들은 지인과 일체 연락을 끊고 빈민가에 쥐죽은 듯 숨어 지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어느 날이었다.
레이첼은 모친과 함께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본 뒤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허름한 자동차 한 대가 그들 앞에 급정거를 하며 나타났다. 창문이 열리고 난데없는 총격이 시작되었다. 레이첼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경찰을 불러 달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총성에는 꽤 익숙한 동네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대낮에 거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놀라기는커녕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며 조용히 외면했다.
강도들은 그녀를 보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첼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들이 손에 쥔 총을 쳐다보았다. 방금 사람 하나를 죽인 것치고는 태평한 분위기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보다 겨우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정도의 소년들이었다. 흑인 소년들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기준에 못 미친다는 듯 그녀의 가슴을 손짓으로 평평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비딱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블랙 몬스터즈는 어린애들을 해치지 않아. 조금 더 크면 우릴 찾아오도록 해. 아주 비싸게 쳐줄 테니까.”
그들은 부친이 속해 있던 조직 블랙 몬스터즈의 말단 조직원들이었다. 어린 녀석들이 얼마나 지하 경제에 깊숙이 잠겨 있던 건지, 살인과 강간, 인신매매 등을 아주 쉽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처럼 검은 사업을 벌이는 이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레이첼은 덜컹거리며 사라지는 낡은 차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멀어지는 갈색 차의 꽁무니에서 나온 매연이 모친의 시신을 에워쌌다. 몇 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게 웬 난리래?”
“얘, 어디 다친 곳은 없니?”
레이첼은 멍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쑥덕거리며 한숨을 내쉬는 주민들의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주위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었나? 도와 달라고 절규할 때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니 이제 와 부탁하지도 않은 걱정과 위로를 남기는 그들의 위선이 역겨웠다.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차로 병원에 데려다주는 게…….”
어른 행세를 하겠다고 팔짱을 끼고 선 이들 사이에서 레이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찰 따위 불러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안다. 어차피 오늘 이 사건의 목격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정작 필요한 순간에 당신들은 또 유령처럼 모습을 감출 게 아닌가?
“됐으니까 상관하지 마세요.”
차갑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태도에 주민들은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들은 곧 인상을 쓰며 그녀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더니 저 싸가지 좀 봐!”
“내 저럴 줄 알았어, 괜히 갱단하고 엮이나?”
“제 어미도 매춘부거나 마약중독자였겠지, 뭐.”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시선. 혓바닥에 독침을 꽂은 듯 쏘아대는 말투. 당신들 손에 총은 없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건 똑같다.
레이첼은 울컥하는 얼굴로 말없이 모친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그녀를 가엽게 여긴 누군가가 경찰을 불러 준 모양이었다. 경찰차에 올라탄 그녀는 석양에 잠긴 거리를 보며 숨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그날 레이첼은 세상이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사회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헐벗은 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헐벗은 자의 옷이 되어 주는 건 헐벗은 몸을 원하는 이들이 쥐여 주는 돈뿐이었다.
이후 그녀는 물어물어 뉴욕에 산다는 이모를 찾아갔다. 서른두 살의 이모는 뉴욕 외곽의 허름한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고 있었다.
“레이첼이라고?”
흑갈색 머리칼에 창백한 안색, 물 빠진 커피색 눈동자에 흐릿한 눈초리. 그녀는 레이첼을 보자마자 언니와 닮았다는 걸 한눈에 알았다. 이어진 모녀의 기구한 이야기에 그녀는 참담한 얼굴로 조카를 끌어안고 울었다. 형부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언니의 죽음까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기꺼이 레이첼을 맡았다. 그렇게 그녀에게는 다시 가족이 생기는 듯했다.
이모는 스트립 클럽 사장으로부터 뒷방을 빌려 잠자리를 해결하고 있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히스패닉이나 흑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몸을 흔드는 게 그녀의 하루 일과였다. 하지만 돈벌이는 그저 그랬다. 그녀의 주 수입원은 실상 가게 밖에서 정부 노릇을 해 주는 노인네들의 주머니였다.
“언니는 내가 무용수가 된 줄로만 알고 있었지. 늘 편지에 그렇게 썼으니까.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하고, 맨해튼 다운타운의 아파트로 이사를 갈 거라고 말한 적도 있었어.”
세탁물을 정리하던 레이첼은 담배를 피우며 말하는 이모를 쳐다보았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라이트가 깨진 손전등의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왜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난 깡패와 결혼한 네 엄마를 미쳤다고 비난했었어. 흑인들하고 불법 조직을 이끄는 형부를 범죄자 취급하고 치욕스럽게 여겼지. 그리고 혼자 고고한 척은 다 하면서 일류 무용수가 될 거라며 뉴욕에 온 거야. 그랬던 내가 어떻게 언니에게 손을 벌릴 수 있었겠어?”
그녀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언니가 그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 했을 거라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찾아가야지, 연락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면서. 미안함보다는 부끄러움에 차마 전화를 걸 수 없었다고 했다. 끝내 자존심에 수화기를 내려놓은 적이 백여 번은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십 년 전 나는 내가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거든. 설마 이렇게 늙은이들 거시기에 매달려 비참하게 살 줄 알았겠니?”
코웃음을 친 그녀는 방바닥에 담뱃불을 비빈 뒤 손전등 스위치를 꺼 버렸다.
잠시 후, 불 꺼진 어둠 속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레이첼은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추잡한 노인네들 중 하나가 또 이모를 찾아온 거라 생각했다. 그들이 애무를 할 때면 이모는 아기가 우는 것처럼 저런 소리를 쥐어짜 내고는 했다.
동이 틀 무렵, 까무룩 잠이 들었던 레이첼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변이 고요했다. 어젯밤 허공을 보며 웃던 이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닥을 더듬던 그녀는 빈 담뱃갑을 발견했다. 돌연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왜 이제야 깨달은 거지? 간밤에 이모가 피운 담배는 마지막 한 개비였다. 이모는 담배가 없는 걸 싫어해서 늘 미리 사 두고는 했는데.
화장실로 달려온 레이첼은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에 멈칫 멈췄다. 조명에 덜렁덜렁 매달린 몸뚱이가 싸늘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는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목이 푹 꺾인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모의 눈동자가 불 꺼진 등처럼 텅 비어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레이첼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입을 틀어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모가 너무 불쌍하고 가여웠다. 얼마나 외롭고 비참했으면 이런 선택을 하고 만 걸까?
이제 겨우 서른넷이었다. 화려한 무대 위의 조명을 꿈꾸던 그녀는 스트립 클럽 뒷방의 좁은 화장실 안에서 생을 마쳤다.
“미안해, 이모.”
울먹이던 레이첼은 차가운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기대기만 해서 미안해. 알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이모의 아픔을 눈감아서 미안해. 도와 달라는 절규를 못 들은 척 외면해서 미안해. 몸 파는 이모를 더럽다고 생각해서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모.
몇 년 뒤 레이첼은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이모가 죽은 뒤에도 스트립 클럽 사장은 그녀가 허드렛일을 하는 조건으로 뒷방에서 머무르게 해 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에 불이 나고 말았다. 경찰 말로는 방화라 했다. 단골인 히스패닉 노동자 중 하나가 술에 취해 불을 지른 것이다. 졸지에 모두가 길거리에 나앉았다. 레이첼도 거리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미드 타운 뒷골목의 길모퉁이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여성들이 란제리만 입은 채 서성이며 남자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레이첼은 공허한 눈으로 웃었다. 그녀는 아주 짧은 찰나에 결정했다. 어차피 휘어진 인생이다. 어디로 굴러 가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그래, 이제 그만 이 엿 같은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거다. 그녀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며 걸었다. 거리의 여자들 사이로 흘러드는 건 의외로 쉬웠다. 누구도 그녀를 초짜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과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몸을 팔기 시작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레이첼은 임신을 했다. 매춘부들은 각종 조언을 해 주며 그녀를 격려했다. 그녀들은 불법으로 시술해 주는 의사, 이럴 때 필요한 것들을 구해 주는 마약상, 그리고 장소를 제공해 주는 핍쇼나 비디오가게 뒷방들을 일러 주었다.
“이런 건 알고 있는 게 좋아. 어쨌든 네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
“남자들은 어차피 책임 따윈 나 몰라라 할 게 뻔해. 결국 다 우리가 떠안고 살아야 할 짐이 되는 거야.”
레이첼은 떨떠름했다. 여자들의 태도는 무서울 정도로 일관적이었다. 덕분에 양심의 가책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 레이첼은 이번에도 바로 약을 복용했다. 그러나 불운하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약이 듣질 않았다. 이후 그녀는 몇 번이나 중절수술을 하려 마음먹었으나 이번에는 돈이 없어서 하지 못했다.
1993년 9월, 어느 목요일 밤이었다. 퀸즈의 고가다리 밑에 위치한 성인용품 가게 안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돈은 그게 다야!”
“레이첼!”
뒤를 쫓는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녀는 도망치듯 허름한 가게를 빠져나왔다. 꼭 안은 품에는 잠든 사내아기가 안겨 있었다. 인적이 드문 밤거리는 스산했다. 레이첼은 불안한 눈초리로 주위를 힐끔거리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모퉁이를 돌던 그녀는 쓰레기통 옆에 기대서 잠든 노숙자를 발견했다. 꾀죄죄한 남자의 옆에 놓인 구걸용 깡통 두 개가 눈에 띄었다.
레이첼은 조심스레 그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자 부랑자 특유의 오줌 지린내 섞인 악취가 풍겼다. 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결국 쿨럭이며 기침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깬 남자는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금세 검게 썩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짤랑짤랑.
남자는 손톱에 때가 잔뜩 낀 손으로 구걸용 깡통을 흔들며 내밀었다. 레이첼은 인상을 쓰며 깡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찌그러진 통조림 캔 안에는 50센트짜리 동전들 몇 개와 1달러짜리 지폐 서너 장이 있었다.
“아저씨 이름이 뭐죠?”
“이름은 왜?”
불혹을 넘긴 남자는 사람과의 대화도 오랜만인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는 가증스러운 눈웃음을 치며 말을 덧붙였다.
“대니얼…… 대니얼 아브라함인데.”
노숙자들 대부분이 범법자다. 본명을 댔을 리 없었다. 눈치를 살피던 레이첼은 그의 몸을 확 밀치더니 잽싸게 깡통을 낚아챘다.
“이, 이년이!”
“당신 이름을 써 주는 값이야!”
벌써 저만치 달아난 그녀는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 질렀다.
“그러니 영광인 줄 알라고!”
그날, 레이첼은 아기에게 대니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왠지는 몰라도 아기에게는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름을 주고 싶었다. 차라리 거리의 부랑자 따위에게서 훔쳐 온 이름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신께서 분명 시궁창 같은 그녀의 현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안겨 주실 테니까.
* * *
레이첼은 악착같이 살았다. 비록 모든 게 서툴던 미혼모였지만 그녀 나름대로 기울어진 사다리 같은 삶 위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대니얼은 그녀에게 있어 단 하나뿐인 지지대였다. 아마 아이가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 이 고된 삶을 포기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대니얼이 기억하는 그의 어린 시절은 늘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환경이었다. 매춘부들은 낡은 아파트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함께 돌봤다. 그들은 순번을 정해 놓고 돌아가면서 베이비시터를 했는데, 늘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쳐 있던 몸으로 제대로 육아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육아 당번인 여자들은 대부분 무기력한 눈빛으로 담배나 뻐끔뻐끔 피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녀들은 주머니에 있던 성인용품 중 하나를 툭 던져 준 뒤, 그걸 쥐고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기나 할 뿐이었다.
아냐Anya는 도미니크 공화국 출신의 여자로 한때는 에스코트까지 했던 매춘부였다. 사십 대 중반인 그녀는 마담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넷이나 있었다. 당시 레이첼의 무리 중 한 명이 바로 그녀의 밑에서 일했다. 그런데 그녀가 본인의 육아 당번인 날 몸이 아파서 나오질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냐는 흔쾌히 그녀를 대신해 아이들을 봐주겠다고 했다. 털털하고 인상이 좋은 여자였다.
아냐는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눈을 얇게 빗뜨며 중얼거렸다.
“저 대니얼이란 애는 좀 특이하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히스패닉계인 매춘부들을 엄마로 두어서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홀로 귀공자처럼 금발에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자랑하는 아이가 있었다. 유독 눈에 띄는 외모와 분위기였다. 저 애가 레이첼의 아들인가? 오밀조밀하게 생긴 게 제 엄마와 달리 날카롭고 시원한 인상이었다.
“고작 네댓 살인 애가 저렇게 차분하다니 신기해라.”
레이첼도 기본적으로 남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머리는 좋은데 사회성이 없는 편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혼자 고립되는 타입이었다. 그런 모친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대니얼 또한 늘 아이들과 떨어져서 혼자 놀았다. 그는 주로 구석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홀로 레고를 조립하며 시간을 보냈다. 말을 몇 번 걸어 봤지만 무표정한 얼굴 외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이답지 않은 싸늘함에 오히려 당황한 건 아냐 쪽이었다. 아이를 찾으러 온 레이첼은 아냐의 얘기에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대니얼은 원래 혼자 노는 걸 좋아해요. 애기 때부터 울지도 않고 얼마나 순했는데요.”
“온종일 지켜봤는데 자기 아들은 다른 애들과 도통 어울리지를 않아. 보통 장난감 하나를 두고도 툭하면 싸우는 게 애들인데 얘는 다른 애들 물건엔 아예 흥미가 없더라니까? 간식도 가장 나중에 와서 조용히 집어 먹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욕심이 없는 애는 아니야. 저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거든. 저 아이는 일단 지그시 주변을 바라보며 관찰부터 해. 상황 판단을 하려고 하는 거야. 어린 게 시야가 넓기도 하지.”
“우리 대니얼이 똑똑하다는 말씀이시네요?”
레이첼이 뿌듯한 얼굴로 되묻자 아냐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대니얼은 레이첼의 두 다리 사이에 몸을 끼고 나무 뒤로 숨듯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어째서 이 작은 아이가 이렇게도 찝찝한 걸까? 아냐는 그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빤한 시선을 내려다보며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홱 돌아서며 레이첼의 귓가에 속닥였다.
“레이첼, 잘 들어. 어릴 때부터 저렇게 머리가 좋은 애들은 대부분 크게 잘못되는 경우가 많아. 좋은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정·재계에서 주목하는 인물이 됐겠지. 하지만 매춘부의 자식이 저렇게 비상한 건 좋은 게 아니야. 우린 저 아이 손에 쥐여 줄 게 없어. 어릴 때야 고작 책 몇 권으로 만족하겠지만 저 애가 커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잘 키워야 돼, 레이첼. 욕심 부리지 말고, 부추기지 말고, 거만하지 않게, 검소한 아이로 키워 내는 거야.”
아냐는 담배를 꺼내며 코트 깃을 세웠다. 어려서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내보이는 애들이라면 질릴 정도로 목격해 왔다. 환경이 이러하니 그들이 비뚤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렘가의 애들은 늘 치열하게 살았다. 빼앗지 않으면 뺏기는 세상이기에 매일이 전쟁이었고, 책보다 칼과 총이 익숙한 그들이 법과 규율을 지키며 산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저 아이의 눈은 호수처럼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바람에 물결조차 치지 않는 수면은 돌을 던져도 파문이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저 호수 밑바닥에는 대체 무슨 괴물이 잠들어 있기에 저리도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단 말인가?
“교회에 나오는 건 어때? 아들도 데리고 말이야.”
“생각해 볼게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레이첼을 보며 아냐는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녀는 단추를 채워 온몸을 꽁꽁 싸맨 뒤 마지막으로 흘끗 대니얼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엄마의 옷자락을 꽉 쥔 채 불안한 듯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냐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대니얼, 네 이름의 뜻이 뭔지 알고 있니?”
그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니얼은 신자의 이름이란다. ‘신께서 나를 심판하시리라’는 뜻을 갖고 있지. 네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미야. 그러니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내 말 알아듣겠니?”
말을 마친 아냐는 대니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대니얼은 머리를 거세게 흔들며 그녀의 손을 떨쳐 냈다. 흠칫한 아냐는 뒤로 물러서며 몸을 일으켰다. 무섭게 쏘아보는 눈초리에 목 뒤의 털이 뾰족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무슨 어린애가 저런 살기를…….’
불길한 표정을 짓던 아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 이상 말을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녀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그러고는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한편 다른 동료들과 함께 뒤에 서 있던 레이첼은 불쾌한 눈초리로 복도를 노려보며 분개했다.
“미친 거 아냐? 재수 없게 애한테 웬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전도하려고 별 쇼를 다 하네! 저 여자 자식들 중에 뭐 장애인인가 있다고 안 했어?”
“둘째 딸이랑 막내아들이 지적장애인이야.”
누군가 딱하다는 듯 말하자 레이첼은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
“그럼 그렇지. 그래서 저렇게 교회에 목숨을 거는구나? 기도하면 뭐 자기 애들이 멀쩡해질 줄 아나? 하여간 종교를 찾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모두 나약해 빠졌다니까.”
그녀는 대니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달랬다.
“아들, 저런 쓸데없는 말은 듣지 마! 대니얼은 말이지, 위대한 예언가였단다. 그는 신의 대리인 같은 존재였어. 그에게는 신을 대신해서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 아주 유명한 작명가가 지어 준 이름인데 어디서 부정 타게 지랄이야. 저 아줌마는 우리 대니얼이 똑똑하니까 괜히 질투 나서 저러는 거야. 알겠지? 그러니 다 잊어버리렴.”
레이첼은 주문을 걸 듯 속삭였다. 그녀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 같기도 했다. 대니얼은 말없이 복도 끝을 응시했다. 졸린 듯 감기는 그의 눈동자는 심연의 숲처럼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후 아냐는 두 번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첼은 그녀의 충고에 반발하듯 교육열에 무섭게 타올랐다. 세상에 제 아이에게 욕심내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처음엔 모두 제 자식이 천재인 줄 아는 법이다. 레이첼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를 부추기지 말라는 조언 따윈 이미 새까맣게 잊은 듯 그녀는 입만 열면 앵무새처럼 우리 아들은 특별하다고 말하고 다녔다.
대니얼의 책장에 책이 쌓여 갈수록 그녀가 집을 비우는 시간 또한 길어져 갔다. 레이첼은 늘 피곤한 낯빛으로 돌아왔다. 온종일 엄마를 기다린 아이를 안아 줄 여력도 없었다. 낡은 구두를 벗기 무섭게 그녀는 아무 데나 드러누워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지쳐 가던 그녀에게 보상처럼 뿌듯한 일이 생긴 건 대니얼이 열 살쯤 되었던 무렵이었다. 대니얼이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 입상을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고생들이 나가는 대회에서 어린 그가 선전을 한 건 놀라운 일이었다.
레이첼은 크게 기뻐하며 동네 사람들과 지인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그녀의 작은 아파트가 북적거리던 날, 대니얼은 레이첼의 옆에 앉아 로봇을 조립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작은 식탁 주위에 모여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얘 아버지는 교수였어. 뉴저지에 있는 그 프린스 대인가? 하여간 그 유명한 대학의 교수랬지. 이슬람교를 믿는다기에 내가 물은 적이 있어.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 이름은 그 동화책에 나오는 솔로몬인 거야? 그랬더니 그가 막 비웃는 거야. 그러고선 날 무식한 년 취급을 하더라고. 망할 안경쟁이 놈! 내가 정말 몰라서 물었을 것 같아? 노상 허름한 바지에 촌스런 안경을 쓰고 헥헥거리던 놈이 내 가슴만 보면 좋아 가지고 말이야. 몸에서는 곰팡이 썩은 내나 풍기는 주제에 감히 날 비웃어?”
주먹을 불끈 쥔 레이첼은 씨근덕대더니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식탁에 떨어진 맥주 캔이 명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렀다.
“하지만 똑똑하긴 했어. 그는 항상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 댔는데, 논문인지 학회인지 그런 것 때문에 바쁘다면서 늘 바지춤을 쥐어 올렸지. 대단하긴 하더라. 그러니까 대니얼, 너도 대학을 가야 해. 반드시 대학을 가야 한다고! 알아듣겠니?”
그러자 냉장고 옆에 기대서 듣고 있던 옆집 조나단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만둬, 레이첼. 지금 당장 먹고 살길도 막막한 상황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애 하나 대학 보내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좀 크면 대니얼도 나가서 일을 해야지. 중·고등학교 중퇴나 안 하면 다행인 거야.”
“닥쳐, 대니얼은 교수가 될 거야.”
그렇게 말한 레이첼은 “그렇지, 아들?” 하고 물었다. 대니얼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레이첼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숙인 대니얼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날 그의 기억 속에 담긴 레이첼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렸다. 대니얼은 그녀의 자랑거리였다.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이 교수가 되어 자신을 호강시켜 줄 거라며 떠들고 다녔다. 동료 매춘부들은 술 냄새를 풍기며 대니얼을 꽉 끌어안았다. 잘했다며 엉덩이를 두들기는 그녀들에게 대니얼은 짜증을 내면서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했다. 비록 엄마는 늘 바쁘고 옆집 조나단 아저씨는 멍청하고, 가끔 보는 아줌마들은 천박했지만, 딱히 나쁠 것 없는 삶이었다. 당시의 그에게 작지만 아늑한 일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훗날 대니얼 아브라함은 작은 의문을 품었다.
‘만약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아브라함은 냉정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작은 일상 따위에 고여 있기엔 그의 수심이 너무도 깊고 어두웠다. 본성이란 그리 쉽게 메워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따뜻한 볕에 말라 가던 못을 적실 비만 내려 준다면, 언제든 그의 내심은 범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니얼이 열네 살 되던 해였다.
삼십 대 중반이 된 레이첼은 빠르게 고객을 잃어 갔다. 이제 그녀가 주로 노리는 건 은퇴한 노인네들이었다. 그녀는 지독하게 지쳐 있었다. 대니얼이 들고 오는 수상 트로피도 더 이상 그녀에게 기쁨이 되어 주진 못했다. 아들은 이제 겨우 열넷이었고 대학에 가려면 앞으로 삼 년이나 남았다. 거기에 교수가 되려면 최소 십 년은 더 공부해야 한다는데, 그녀에게 있어선 눈앞이 캄캄해지는 이야기였다.
집에 돌아온 레이첼은 자주 멍하니 옛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깜깜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이 동네가 지긋지긋하다며 중얼거렸다. 종종 시카고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뉴욕은 너무 시끄럽고 어지러운 곳이라면서 현기증을 느끼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대니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시카고는 조부모님께서 살해당한 곳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그녀에게 있어 뉴욕이 시카고보다 끔찍한 장소가 될 수 있는지 그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 레이첼은 돌연 한 남자와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조셉이었다. 조셉은 로어 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40)에 있는 클럽에서 바텐더를 했는데 마약 유통의 창구 역할을 했다. 그는 레이첼보다 열 살이나 어렸고 매끈하게 생긴 얼굴 덕에 인기가 많았다. 때문에 조셉에게 흠뻑 빠져 있던 레이첼은 항상 불안에 휩싸였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가끔 대마나 피던 그녀가 코카인에 빠지기 시작한 건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이후 레이첼은 자주 몽롱한 정신으로 주절주절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기자였어. 이름은 기억이 안 나. 빼빼 마른 몸에 곱슬머리를 하고선 멜빵바지를 입고 다녔어. 그는 첼시에 있는 어느 잡지사인가 신문사에서 일한다고 했어. 겨우 내 또래 정도인 녀석이었는데 나도 참 순진했지. 그 녀석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었으니 말이야. 아마 길거리에서 일간지를 나눠 주거나 새벽에 신문 배달이나 다니던 놈이었을 텐데. 돈은 없었지만 꽤 재밌는 남자였어. 나중에 내 이야기를 기사로 실어 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보나마나 거짓말이었을 거야.”
“제 아버지는 교수라고 하셨죠?”
“교수? 무슨 소리야. 네 아버지란 작자는 사업가였어. 아직도 기억나. 그 남자가 손목에 차고 있던 금시계와 값비싼 구두, 똑 떨어지던 정장 바지. 아마 내가 만난 남자 중 가장 부자였을걸? 하지만 그놈은 딱 한 번뿐이었어. 나랑 딱 한 번 떡을 치고는 다신 오지 않았거든. 흥, 좀스럽기는.”
레이첼의 말은 매번 바뀌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만났던 수많은 남자들의 이력을 다 늘어놓으며 흐린 기억 속을 헤집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자식은 마술을 한다고 했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도 한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사기꾼 새끼였던 것 같아. 마술사랍시고 웬 이상한 모자와 장갑을 걸치고 온 것부터 수상쩍었는데, 카드를 보여 주면서 재롱을 부리다가 낄낄거리곤 했거든. 미친놈! 나는 그에게 날 고용하라고 했어. 무대 위에서 벗고 쇼를 하는 거라면 자신 있었으니까. 그랬더니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지. 레이첼, 이건 천박한 스트립쇼가 아니야. 마술쇼라고!”
어떤 남자를 얘기하든지 그녀는 늘 화가 나 있었다. 대니얼은 매일 밤 되풀이되는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 주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분노는 어느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게 아니었다.
조셉은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둘렀다. 평소엔 멀쩡하다가 술을 마시면 미친개로 돌변했다. 처음에는 물건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 수준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술에 취한 그가 던진 재떨이에 레이첼이 맞고 쓰러졌다. 레이첼은 옆구리를 움켜쥐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조셉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에게 닥치라고 소리쳤다.
그날부터 그의 손찌검이 시작됐다. 사정없이 날아오는 발길질과 주먹은 레이첼의 온몸을 퍼렇게 물들였고, 보다 못한 대니얼이 그를 말리자 화가 난 조셉은 두 모자를 함께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레이첼은 그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입술이 터진 채로 열 살이나 어린 연인에게 매달렸다. 울부짖으며 가지 말라고 애원하다가 머리채를 잡힌 채 침실로 질질 끌려가기 부지기수였다.
식탁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던 대니얼은 감흥 없는 얼굴로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모친을 위해 나서기를 포기했다. 갈비뼈가 부러져도 금방 발가벗은 채 조셉과 섹스를 하는 레이첼이었다. 말려 봤자 스스로만 허탈하고 바보가 될 뿐이었다. 때리는 조셉이나 맞는 레이첼이나 둘 다 미쳐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레이첼은 그에게 안긴 채 헐떡이면서 잘못했다고 울부짖었다.
“사랑해, 조셉! 아아, 조셉! 내가 다 잘못했어!”
“흐읏, 레이첼!”
허억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절정에 치닫자, 그녀는 찰팍거리는 엉덩이를 더 세게 아래로 내리꽂았다. 레이첼은 알몸으로 말을 타듯 움직였다. 그녀는 그의 사타구니 위에 올라탄 채 스스로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무러치듯 신음을 내뱉었다.
레이첼은 황홀함에 풀어진 동공을 바르르 떨며 열린 문틈을 응시했다. 그 사이로 연필을 잡고 빤히 쳐다보는 대니얼의 눈초리가 보였다. 경멸 어린 표정과 혐오스럽다는 입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아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보지 말라고 그렇게 수없이 말했는데도 저 아이는 왜 항상 똑바로 주시하고 있는 것일까?
“잘했어, 레이첼.”
조셉이 레이첼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만족스러운 듯 칭찬했다. 그녀는 바짝 엎드려서 그의 것을 입에 물고 핥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개처럼 엉덩이를 들어 봐. 그렇지, 그렇게! 하윽, 좋아…… 역시 넌 많이 해 봐서 잘한다니까…… 으윽, 또 나올 거 같아.”
그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잘게 흘러나오자 레이첼은 비로소 안도한 듯 웃었다. 정액으로 막힌 목젖에선 토악질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녀는 더 열심히 입을 벌리고 고개를 상하로 왔다 갔다 움직였다. 잠시 후 몸을 부르르 떤 조셉이 그녀의 뒤통수를 잡았다. 그는 그의 사타구니를 향해 그녀의 머리를 퍽퍽 처박았다.
“뱉지 말고 삼켜, 레이첼.”
더 이상은 한계였다.
대니얼은 조용히 일어서서 책을 덮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매번 때리는 건 저 녀석인데, 멍투성인 그녀가 왜 잘못했다고 비는 거지? 가해자는 실실 웃고 피해자는 머리를 숙인 채 참회를 한다. 대체 언제까지 이 광대놀음을 보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짜증이 솟구쳤다. 차분한 얼굴과 달리 주먹을 쥔 대니얼은 책과 노트를 옆구리에 끼었다.
“시끄러워서 공부를 할 수가 없네.”
그는 인상을 쓰며 제 방을 향해 걸었다. 짐승처럼 할딱거리는 저들의 신음 소리가 듣기 싫었다. 섹스란 매춘부들이 돈을 벌어먹는 수단이고, 사랑을 가장한 속임수며, 폭력을 용서받을 구실이었다. 그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여자가 왜 그것에 속고 있는 것일까? 사람의 욕망 중 제일 천박한 것이 육체적 탐미를 꾀하는 건데 왜 그걸 모르는 거냐고!
“더러워.”
대니얼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문을 닫았다. 그는 화풀이를 하듯 책과 노트를 던졌다. 책상 위에 좌르르 펼쳐진 하얀 노트 위에는 그가 휘갈겨 쓴 문장이 펜촉으로 난도질한 것처럼 쓰여 있었다.
“역겨워 죽겠단 말이야!”
대니얼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딴 짓거리에 환장하는 저질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다가 불현듯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사타구니에 불룩 솟은 살덩이가 불끈거리며 터질 듯 커지고 있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책상 위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를 집었다.
‘더러워, 더러워!’
대니얼은 벌게진 얼굴로 가쁜 숨을 내뱉었다. 다급한 손놀림과 함께 눈이 질끈 감겼다. 그는 아찔한 쾌감을 애써 억눌렀다. 저딴 것들을 보고 흥분하는 본능이라면 필요 없었다. 불필요한 에로티시즘의 일상. 그의 리비도41)는 꽃피기도 전에 겁탈을 당한 소녀처럼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잘려 나갔다.
“으으…….”
흐느끼듯 엎드린 그의 잇새로 공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Judge us, punish us, save us. 저희를 심판하소서, 벌하소서, 구원하소서.
You are wrong. 당신이 틀렸어.
There is no god. 신 따윈 어디에도 없어.
We will all die in the end!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거야!
─ 대니얼이 휘갈겨 쓴 노트
레이첼이 조셉과 동거를 한 지 일 년째 되던 날.
태풍으로 인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끝을 알리는 천둥소리에 대니얼은 미소를 머금었다. 독서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그가 소파에 누운 채 읽고 있던 책은 올리버 색스42)가 저술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였다. 사실 책 내용보다도 작가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지만 퍽 지루하진 않았다.
조셉은 벌써 일주일째 집에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또 어떤 년하고 붙어먹는 거야?” 레이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표독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대니얼은 그런 그녀를 무관심한 얼굴로 바라본 뒤 가물가물한 눈을 한번 느릿하게 깜빡였다. 축축해 보이는 천장에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바닥에 놓은 양동이에 차오른 물이 붉은 스탠드 조명에 벌겋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됐다. 이날 갑작스럽게 한 불어 퀴즈에서 만점을 받은 대니얼은 기분 좋게 귀가하는 중이었다. 빨간 벽돌로 된 구식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고장 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낡은 계단에서는 늘 그렇듯 노숙자의 소변 냄새가 났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봐줄 수 있다.
“아아악! 이 개자식! 나쁜 새끼!”
복도를 돌던 그의 귓가에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니얼은 가방을 집어 던지며 현관문으로 뛰어들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어두침침한 집 안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눅눅한 빨래에서 나는 걸레 냄새였다. 게다가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까지 합세해 코끝을 찡하게 괴롭혔다.
“흐흑…….”
레이첼은 식탁 밑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대니얼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부터 확인했다. 설마 그 난봉꾼 녀석이 돌아온 건가? 몸을 낮추고 거실로 들어오던 그는 바닥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레이첼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진 채 캄캄한 실내에서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휴대폰을 줍자 화면 위에 뜬 조셉의 페이스북이 보였다. 그는 제일 위에 업로드된 사진을 눌러 확인했다.
‘개새끼.’
사리문 잇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조셉이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짓궂게 웃고 있었다. 깔끔한 연미복에 나비넥타이, 왁스를 발라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 그의 품에 한 여자가 안겨 있는 게 보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가슴에 순결한 꽃다발을 한 아름 안았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사진의 댓글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들이 잔뜩 달려 있었다.
“이딴 걸 뭣 하러 보고 있어요!”
대니얼은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쳤다. 레이첼은 얼빠진 얼굴로 바닥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건 꿈이야. 조셉이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 녀석은 원래 이런 놈이었어요. 엄마를 이용한 거라고요!”
“시끄러워! 넌 네 방에 가 있어.”
“오히려 잘됐어요. 이제 이 빌어먹을 놈의 면상 따윈 볼일이 없겠죠.”
“닥쳐! 닥치라고!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뭘 아냐고요? 저 개새끼가 우리와 같이 산 목적이 엄마의 돈이었다는 걸 알죠. 저 녀석은 우리 집 부엌에서 몰래 크랙43)을 제조했어요. 마약 유통을 위한 장소로 쓴 거라고요! 저 녀석이 집에 오는 날은 코카인을 새로 공급받은 날이거나 엄마의 헌신적인 섹스가 필요할 때뿐이었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엄마를 사랑해서 온 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맨해튼에서 조셉이 다른 여자와 있는 걸 수없이 봤어요. 나 말고 옆집 조나단 아저씨도, 다른 아줌마들도 다 봤다고 했어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왜 엄마 혼자만 귀머거리처럼 듣지 않으려고 해요? 도대체 왜 이렇게 사냐고요! 저 새끼한테 맞고 사는데도 그렇게 좋아요?”
“그만해! 듣기 싫으니까 그만하란 말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대니얼 너만 없었다면…….”
두 사람은 쉰 목소리로 서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푸석한 머리칼 사이로 레이첼의 충혈된 눈이 보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일 듯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는 원망 어린 눈물이 차올랐다.
“내 불행은 모두 네가 가져온 거나 다름없어. 네가 태어나면서 내 인생은 완전 시궁창에 박혀 버렸단 말이야. 남자들은 애 딸린 미혼모를 여자로 봐 주지 않아. 어린 나이에 난 아줌마가 돼서 애 기저귀나 갈고 그렇게 살아야만 했어. 평생 이렇게 남편 없이 살 팔자가 된 거라고! 너 때문에, 네가 태어나서! 너만 없었다면…… 그랬더라면! 흐흑…….”
그녀는 바닥에 엎드리며 오열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대니얼의 눈이 울컥하며 일렁였다. 그는 양손에 꽉 쥐었던 주먹을 펴더니 성큼성큼 제 방으로 향했다. 얇은 문짝이 부서질 듯 쾅 하고 벽에 부딪혔다. 그는 큼지막한 스포츠 가방을 꺼내서 옷가지와 책들을 대충 쑤셔 넣었다. 빠르게 짐을 싼 그는 모자 하나를 들고 거침없이 현관을 나섰다.
“어딜 가는 거니?”
레이첼이 창백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이 원망과 불안에 휩싸인 채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행뿐인 자식은 이만 닥치고 꺼져 주려고요.”
그는 차가운 눈초리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지긋지긋하다고 하셨죠? 그럼 그놈의 시카고로 돌아가든지 알아서 하세요. 저도 이놈의 집구석이 지긋지긋해 죽겠어요. 엄마의 술주정도 진절머리가 나고 곰팡이 낀 벽지와 바닥도 역겨워 미치겠다고요! 제발 남의 탓, 세상 탓은 그만하고 본인의 집 꼴이 어떤지 좀 돌아보는 게 어때요? 아니면 이 썩은 내 나는 집도 제가 가져온 불행 때문이라고 하든가요. 엄마 좋을 대로 하세요. 이제 저 같은 건 없는 셈 치고 자유롭게 사셨으면 좋겠네요.”
사납게 쏘아붙인 그는 현관문을 열고 미련 없이 집을 나갔다. 레이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햇살이 한순간 환하게 비췄다. 그러나 곧바로 ‘쾅!’ 하고 닫힌 문소리와 함께 그녀의 아파트는 다시 어두운 적막 속에 휩싸였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그녀의 눈동자에 얼핏 비췄던 빛은 바스러지듯 툭 꺼져 버렸다.
【News and Events of 2009 in the U.S.】
1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새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감동적인 연설로 전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3월: 미국 실업률이 8.1%에 도달했다. 이것은 1983년 이후 기록된 최고 수치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4월: 아이오와 주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한 주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아이오와는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 주에 이어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한 미국 내 3번째 주가 되었다.
10월: 미 서부 지역에 이어 아이오와 등 중동부 13개 주가 의료용 마리화나 합법화 법안 마련에 착수했다. 작년 캘리포니아 주에서 뜨거운 논쟁이 된 마리화나 합법 논쟁이 다시 가열될 조짐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11월: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 3만 부대를 추가로 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탈레반 폭동을 사전에 대비하기 위함이며 내년 아프가니스탄 내 미군 수는 약 10만 부대에 이르게 될 것이다.
12월: 알카에다 소속인 나이지리아인이 디트로이트에서 폭탄 테러를 시도했다. 다행히 불발해 인명 사고는 없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 대통령, 실업률, 대법원, 전쟁, 테러, 법안 논쟁…….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건들은 그에게 있어 아득히 먼 세계의 이야기들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그럼에도 대니얼은 매일 뉴욕 타임즈를 챙겨 읽었다. 그는 집요한 눈초리로 기사 한 줄 한 줄을 따라가다가 밑줄을 친 뒤 가만히 곱씹었다. 때로는 기사를 찢어서 따로 스크랩을 해 두기도 했다.
2009년 취임한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이 남자의 부모는 알고 있었을까? 그가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인물이 되리란 것을? 오바마 대통령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으로 그가 두 살 때 부인과 이혼하고 케냐로 돌아갔다. 생물학적 요인 외에는 그의 인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인물이다. 바로 얼굴 모를 자신의 부친처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 대니얼 아브라함.
그는 오바마 대신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어 보았다. 스포트라이트, 고급 정장을 입고 웃는 그의 모습, 환호와 갈채, 앞다퉈 질문하는 기자들. 꿈처럼 막연한 상상을 해 보던 대니얼은 눈살을 찌푸리며 신문을 손에 구겨 쥐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쳇’ 하며 신문 뭉치를 쓰레기 더미 사이로 휙 던졌다.
“어이, 대니얼!”
좁은 뒷골목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스토랑과 술집에서 내놓은 쓰레기 봉지들 사이에 서 있던 대니얼은 눈을 치켜뜨며 돌아보았다. 덩치 큰 흑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옆집에 사는 조나단 아저씨였다. 그는 펑퍼짐한 아디다스 바지에 손을 넣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조나단은 여타 흑인들처럼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는데 뒤통수에는 해괴망측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예전에 어느 유명 조직의 높은 간부였다고도 하고, 형무소에서 형을 살다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원체 푸근한 인상 때문에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얼굴 오랜만에 보는구나. 어떻게 지냈어?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야?”
재작년부터 빠르게 성장한 대니얼은 조나단의 신장을 따라잡은 지 오래였다. 어렸을 땐 금발이었던 머리색은 짙은 갈색이 되었고, 옅은 청록색이었던 눈동자도 어두운 푸른색으로 침전했다. 럭비 선수처럼 커다란 골격 중에서도 남들의 배는 벌어진 어깨가 돋보였다. 엘리트 소년이 어째 위험한 불량배가 된 느낌이었다.
민둥한 머리를 긁적이던 조나단은 뒷문 앞에 걸터앉은 대니얼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더니 ‘치직’ 불을 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소식 들은 거냐? 조셉 녀석 실종됐대. 쳇, 멍청한 놈 같으니…….”
알고 보니 조셉은 그동안 코카인을 정제할 때 물을 더 섞어서 이득을 뻥튀기해 왔던 모양이다. 그걸 알아챈 조직이 몇 달 전 그를 끌고 갔다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그래요?”
대니얼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살아 돌아오긴 힘들겠지. 안 그래도 요즘 마약 시장 죽어서 난리인데 그딴 짓을 한 게 소문이라도 돌았다가는 완전 망하는 거거든. 아마 본보기로 처형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나단은 씁쓸하게 말하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대니얼은 반쯤 뜬 눈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듣더니 허공을 응시했다.
“흐음, 죽었구나…….”
“그런데 인마, 너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너도 조셉을 찾으러 왔어?”
“저요?”
되묻는 대니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설마요. 그 녀석이 없어져서 얼마나 좋은데요.”
“집에는 언제 들어갈 셈이야? 레이첼 안색이 요즘 통 좋지 않아. 매일 술 퍼마시며 울다가 겨우 잠든다고.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 봐.”
“아저씨가 우리 엄마 술 마시다 잠드는 건 어떻게 알아요?”
대니얼이 눈초리 끝을 날카롭게 모으며 물었다. 그러자 조나단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저번에 배가 아프다고 전화가 왔는데 걱정이 되어 가지고…… 아! 그런데 너 학교는 잘 나가는 거냐? 무단결석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허를 찔린 조나단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이번에는 빙글거리며 웃던 대니얼의 얼굴이 굳었다. 조나단은 말이 없어진 그를 쳐다보았다. 녀석이 공부를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유명 과학 경시대회들에서도 수상을 한 수재라고.
“글쎄요. 학교도 뭐 재미없고.”
대니얼은 바지를 털털 털며 일어섰다.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공허해 보였다.
“어렸을 땐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 교수란 게 되면 정말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럼 엄마도 기뻐할 것 같았고 뭔가 다 잘될 거 같았거든요.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죠. 엄마는 정신이 나가서 이제 제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데 말이에요.”
조나단은 욱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애초에 프린스턴 대학에 솔로몬이란 이름을 가진 교수 따윈 없었어요. 엄마가 대학 교수라 믿었던 그 남자는 길거리의 부랑자였거나 집에서 아내나 패는 알코올중독자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논문이니 회의니 나불거렸던 그 남자는 똑똑한 척했던 사기꾼에 불과했겠죠. 얼마나 엄마를 바보 취급했으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는 냉소적인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잠시 허전해 보이는 얼굴로 서 있던 대니얼은 까만 페인트칠을 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조나단은 건물 뒤쪽에 위치한 문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너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여긴 조셉이 일했던 술집 아니야?”
“바텐더가 클럽에서 뭘 하겠어요?”
“바텐더?”
대니얼은 눈초리를 찢어 웃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조나단을 뒤에 남긴 채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문 안쪽에서 키 작은 동양 남자가 하품을 하며 걸어 나왔다. 그는 나오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의 가슴에는 매니저라는 직함이 쓰인 명찰이 달린 게 보였다. 조나단은 허둥지둥 그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
“저 녀석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에? 누구요?”
“방금 들어간 녀석 말입니다.”
남자는 라이터에 불을 붙이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밤을 샌 건지 그의 몸에서는 담배 찌든 냄새와 땀 냄새가 풍겨 왔다.
“아, 대니요? 좀 됐죠. 에반스 후임으로 들어왔거든요.”
“에반스?”
“조셉이요. 조셉 에반스. 걔가 담당했던 건 이제 죄다 대니가 맡아서 하고 있어요.”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졸린 눈을 비비며 또 하품을 했다. 해가 중천에 뜬 오후 두 시. 그는 한눈에 봐도 지금 막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는 건가? 그럼 대니도 이곳에서 생활하려나? 조나단은 적갈색 벽돌 건물을 아래위로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곁눈질로 그를 살피던 매니저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툭 쳤다.
“물건 사러 온 거요?”
“물건?”
매니저는 히죽 웃었다. 선수끼리 왜 그러냐는 듯한 기색이었다.
“대니를 찾아온 거 보니 딱 그거 같은데? 요즘 대니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 자식 물건이 꽤 괜찮거든요. 여간 여우 같은 놈이 아니에요. 조셉은 끽해야 크랙이나 찔끔찔끔 파는 수준이었는데, 대니는 벌써 월척 언니들을 한 주먹 넘게 낚았어요. 딱히 섹스를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뭔 매력이 있는 건지…… 하여간 희한한 놈이에요. 남자고 여자고 저 녀석하고만 엮이면 호구처럼 지갑을 덥석 연다니까요?”
키득거리며 말한 매니저는 안에서 누가 부르는지 두루미처럼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그는 재빠르게 클럽 안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다시 조나단을 찾았다. 그는 조나단의 자루 같은 배에 뭔가를 쑥 찔러 주며 속삭였다.
“이거, 대니가 전해 주라던데요? 레이치44)에게 필요할 거라고요.”
그는 담뱃재를 바닥에 한번 툭 털더니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나단은 매니저가 쥐여 준 검은 봉지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든 비닐 봉투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조셉은 레이첼의 집에서 코카인을 정제했다. 아마 대니얼은 그가 부엌에서 크랙을 만드는 걸 여러 번 봤을 것이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조셉이 나중에 편법을 썼다는 것도 눈치챘을지 모른다. 대니얼이 가출하자마자 조셉이 실종된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조나단은 봉지 안에서 작게 접힌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대니얼이 넣은 건가? 꺼내서 펼쳐 보니 올 초의 신문 기사였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감동적인 연설…….”
중얼거리며 헤드라인을 읽던 조나단은 종이 위에 검은 펜으로 휘갈겨 쓴 글씨를 발견했다. 좁혔던 눈초리를 휘둥그레 뜨던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최초의 대니얼 아브라함이 될 거예요.」
귀여운 녀석!
크게 웃던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그는 뭔 상상을 했던 것일까? 이제 고작 열여섯인 소년인데. 아직 이렇게나 순수한 꿈을 꿀 나이인데. 불안했던 가슴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그는 두툼한 손으로 쪽지를 다시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가져가서 레이첼에게 보여 줘야지. 좋아서 웃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조나단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져 갔다. 그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대니얼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혀를 찼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아저씨다.
─아마 살아 돌아오긴 힘들겠지.
─흐음, 죽었구나…….
그 순간,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참 이상한 감각이었다. 몸속에서 솟구치는 희열이 정수리로 뽑혀서 기화하는 느낌. 경시대회에서 입상을 했을 때나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쾌감이 느껴졌다.
─대니얼은 말이지, 위대한 예언가였단다. 그는 신의 대리인 같은 존재였어. 그에게는 신을 대신해서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
불현듯 스친 레이첼의 목소리에 그의 입술 끝이 바스스 떨렸다. 환희에 찬 미소에 입 근육이 자아내는 경련이었다. 대니얼은 입을 가린 채 킬킬거렸다. 결국 폭소를 터뜨린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배꼽을 잡고 웃어 댔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오늘 ‘최초의 심판’을 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의 영혼 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다. 그게 뭔지는 그 자신조차 아직 몰랐다. 다만 참혹하게 살해당했던 그의 리비도가 부활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호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下 신新과 신神
인류의 뉴 에너지 개발은 21세기 초부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를 대중화시키는 데에는 아직 기술적인 장벽이 존재했지만 해결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2016년, 언론의 관심은 무인 자동차와 전기 자동차였지만 그것은 겨우 지나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이제 곧 지상 위를 달릴 운송 수단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에어쉽의 등장은 예정되어 있던 역사였다. 대대적인 도로 건설법의 재정비와 교통법규 시스템의 변화가 준비 중이었고, 인류의 삶은 땅에서 하늘로 도약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각국 정상들과 정·재계의 요인들은 뉴 에너지를 보급화시킬 적절한 시기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젊은이들에게 있어 기회의 시점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견고했던 계층적 피라미드가 일순 휘청거리고, 때를 엿보던 이들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무너진 상층부를 파고들기 마련이었다.
대니얼 아브라함 역시 그런 자들 중 하나였다.
대니얼은 2011년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마쳤다. 이때 그는 여러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는데 그 인맥은 이후에도 그에게 있어 평생의 도움이 된다.
그중에서도 에밀리 로즈는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여자였다.
대니얼은 단 육 년 만에 뉴욕 업 타운의 코카인 수요 90퍼센트 이상을 독점했다. 그는 상류층들의 취향을 잘 알았다. 그의 학벌과 유려한 말솜씨, 그리고 조금 비딱해 보이는 반사회적 경향은 여성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결벽증 수준으로 성관계를 꺼리는 점 또한 남녀 구분 없는 호감을 자아냈다.
나날이 달러를 쌓아 가던 그는 슬슬 돈을 굴리고 싶어 했다. 대니얼은 검소했다. 다른 마약상들과 달리 그는 고가의 스포츠카나 비싼 콘도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결벽증 때문에 여자에게 돈을 쓸 일도 없었다. 그는 마약 시장에서 손을 털고 다른 사업으로 이동할 궁리를 했다. 때마침 그에게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스카이 워크? 하이 라인45) 같은 걸 만들겠다는 거야?”
“그런 시민 공원 말고.”
담배 연기를 머금고 웃음을 터뜨리는 에밀리의 모습은 퇴폐적이었다. 공허한 눈동자, 건조한 웃음, 앙상한 쇄골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검은 레이스 슬립. 툭 튀어나온 날개 뼈 사이로 떨어지는 붉은 머리칼.
마천루가 보이는 그녀의 집 거실은 맨해튼에서도 최고급 콘도에 속했다. 에밀리는 에스코트 매춘부들을 관리하던 마담이었지만 일명 재벌가의 딸이었다. 또한 그의 오래된 고객 중에 하나기도 했다.
“다시 건설 붐이 일게 될 거야. 참고로 자동차 산업은 계속 곤두박질 칠 테니 디트로이트 근처는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아.”
“그런데 갑자기 웬 사업이야?”
“그냥. 심심해서.”
에밀리는 똑똑했다. 문화나 예술 산업을 지원한다면서 걸핏하면 부모가 준 돈을 꼬라박는 애들과 달리 그녀는 신중하게 돈을 만졌다.
“건설이라.”
“같이하지 않을래, 대니?”
그는 건조하게 웃었다.
“내가 돈을 좀 벌었다지만 그래도 당신들 사이에서 투자할 수준은 못 되지.”
“어머, 누가 너보고 돈을 투자하래? 자기가 돈 별로 없는 건 나도 알아. 그냥 자기는 사람들을 데려와 주면 돼. 왜 있잖아, 돈은 많은데 어디다가 써야 할지 모르는 애들. 그런 도련님들 잘 꼬드겨서 지갑 열게 하면 되는 거야.”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일을 추진하려는 거야, 엠46)?”
“요즘 내가 만나는 남자가 있는데.”
그녀는 비밀스럽게 웃으며 붉은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를 스윽 뿜어냈다. 뭔가에 취한 듯 몽롱하게 번진 눈동자는 기분 좋아 보였다.
“이 남자가 투자한 곳이 완전 대박인 거야. 뉴 에너지를 이용한 항공 자가용기. 잘만 하면 우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게 될 거야.”
맨해튼 상공에 스카이 워크로 이어진 환락가를 만든다는 건가? 듣기에는 근사하고 구미가 당겼다. 상류층은 새로운 놀이터에 혹할 거고, 하류층은 더 높아진 피라미드를 향해 손을 뻗겠지.
골몰히 생각에 잠긴 대니얼을 보며 에밀리는 살며시 다가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의 셔츠 깃을 명함처럼 구겨 쥐며 할짝할짝 속삭였다.
“침대로 가자, 대니.”
그녀가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며 유혹했다. 그 가슴골 사이로 땀인지 술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일반적인 남성이라면 땀도 술도 아닌 곧 제 하반신에서 튈 정액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녀가 노린 게 바로 그것이기도 했고.
에밀리는 김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입술을 떼었다.
“아직도 여자가 싫니?”
빙그레 웃은 대니얼은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향했다. 높은 아일랜드 식 테이블에 앉아 가슴 한쪽을 드러내고 있던 에밀리는 새로 담배를 꺼내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여자를 좋아해 본 적이 있기나 해?”
욕실 세면대에서 물 트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물고 있던 담배를 퉤 뱉으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바로 입술을 닦기는……. 내가 무슨 병균도 아니고, 어휴 저 강박증.”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오던 대니얼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사랑해, 에밀리.”
“사랑한다면 진작 페니스를 줬겠지. 내가 그걸 부러뜨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야?”
“나는 널 여자가 아닌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서 아끼고 있어.”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대니얼의 눈빛엔 ‘어때? 영광이지?’라는 천진한 생각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자기 그 사상 좀 버리랬지? 자기가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건 잘못된 시각이라니까? 인간은 진열된 상품들처럼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위선은 그만둬, 엠. 너도 나와 똑같잖아. 매춘부들을 외모와 몸매, 교양 수준에 따라 등급을 매기던 게 누구였더라? 정육점에 나열된 등심인 양 스페셜, 더블에이, 비플러스 이렇게 딱지를 붙이던 걸 분명히 봤는데 말이야.”
에밀리는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의 얼굴은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이었다.
“넌 사이코 새끼야.”
“넌 그런 사이코를 사랑하고 있지.”
“그래, 그러니까 명심해. 만약 나 아닌 다른 여자하고 먼저 섹스라도 하면 그때는 아무리 대니여도 죽여 버릴 테니까.”
“남자는 된단 소리로 들리네.”
그녀는 재떨이 담배를 꾸깃꾸깃 비비며 시니컬하게 웃었다.
“설마. 그 새끼 좆을 잘라 버릴 거야.”
“살아 있는 한 내 첫 섹스는 네가 될 거야. 약속할게.”
대니얼은 약속과 계약에 충실한 남자였다. 그를 사슬처럼 옭아매는 강박증은 구속력이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에밀리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뉴욕 미트패킹 디스트릭 고층 건물들 사이에 고리 모양의 원형 유리 터널을 놓아 각 빌딩을 연결하는 ‘스카이 워크’ 건설안을 계획했다.
대니얼은 특유의 수완과 인맥으로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사교계의 꽃인 에밀리는 대외적인 얼굴마담을 맡았고, 그녀의 약혼자인 케빈은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으며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그들이 최초 공개할 비장의 무기는 바로 보급형 모델 에어쉽 1호기. 전 세계가 그들을 주목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 * *
“한 오 년 만이지?”
에밀리가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그런가?”
운전을 하던 대니얼은 시니컬하게 대답하며 담배 연기를 피해 창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앉은 에밀리의 파란 눈은 창백하게 초점을 잃은 채 시카고의 거리를 응시했다. 일요일 오전의 시카고는 한산했다. 이곳 사람들은 휴일에도 부지런히 일어나 예배를 드리는 모양이었다.
“‘그런가’라니? 차갑기도 해라. 그래도 어머니인데.”
“난 교회가 싫어.”
에밀리는 인상을 쓰는 대니얼을 보며 비뚜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니얼은 세상 모든 여자들을 경멸했다. 한창 혈기왕성할 이십 대의 청년이 여성혐오증에다가 노 섹스 라이프라니 얼마나 희귀한 남자인가? 그녀는 처음에 그가 게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 내내 놀랍게도 그녀는 그가 그 어떤 연인을 만드는 것도 볼 수 없었다.
에밀리는 호기심에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여성혐오의 뿌리가 모친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아냈다. 그녀의 궁금증은 결국 그녀를 대니얼을 따라 시카고까지 오게 만들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오전 예배가 막 끝났는지 교회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에밀리는 차에서 기다리겠다며 담배를 한 대 더 물고 눈을 감았다.
“어머님께 안부 전해 줘. 어차피 기억도 못하시겠지만.”
대니얼은 홀로 흰색 자동차 문을 닫고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그가 타고 온 차는 순수 전기 자동차인 테슬라 모터스 S시리즈 중 하나였다. 환경운동가 흉내를 내고 싶은 명문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모델이다. 그거 하나로 그의 걸음걸이는 당당해 보였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적어도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텅 빈 예배당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성스럽게 비추고 있었다.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던 대니얼은 줄지어 기다랗게 놓인 의자들 맨 뒷줄에 털썩 앉았다. 그러다가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선 그를 쳐다보았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는 양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소년이 왼쪽 눈을 슬며시 흘기며 물었다.
“뭘 봐요?”
미성의 얇은 목소리는 불쾌한 어조를 내비췄다. 대니얼은 턱을 괴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뭘 기도하고 있니?”
“그건 왜 물어요?”
“그냥 궁금해서.”
소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아저씨 기자예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우리 엄마를 낫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대니얼은 즉시 관심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괜히 물었군, 듣기 싫은 신파 스토리다. 하지만 소년은 계속 말을 걸었다.
“우리 엄마 나을 수 있겠죠?”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어머니가 낫진 않아. 이러면 네 마음은 가벼워질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 보는 게 나을 거야.”
“우리 아버지는 병원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거기엔 의사 선생님들도 아주 많아요. 하지만 아무도 못 고친다고 했대요. 다들 포기하랬어요. 그런데 목사님만은 달랐어요. 하나님께선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했거든요. 하나님은…….”
소년은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대니얼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눈초리를 얇게 저몄다. 역시, 괜히 옆자리에 앉았다.
“저 목사님도 언젠가는 수명이 다해서 죽게 될 거야. 하지만 그가 믿는 주님께서 그걸 막아 주진 못할걸? 신이란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환영에 불과해. 네가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건 네 손에 달린 거지, 결코 하나님께서 쥐여 주는 게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능력한 인간들은 죽는 날까지 이걸 깨닫지 못하지.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신이란 존재에 투영해서 기도를 하거든. 전지전능한 신께서 내 바람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읊조리면서 말이야. 인생이란 쉽게 살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야, 알겠니?”
대니얼은 턱을 괸 채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소년은 충격을 받은 듯 양손을 모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하면 벌 받는댔어요.”
대니얼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예언을 하나 해 줄까, 꼬마야? 네가 죽음에 다다랐을 때 너는 신이 아닌 어느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게 될 거야.”
“제가요? 왜요?”
“왜냐하면 그 순간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신의 권능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손일 테니까.”
그때 예배당 문이 열리더니 교회 목사와 함께 한 여자가 나타났다.
“램지?”
체크무늬 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은 소년은 여자의 부름에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실내에서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잘못했어요, 어머니.”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던 대니얼의 눈이 커졌다.
핼쑥하지만 평범한 인상의 여자는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우아한 디자인의 원피스, 고가 재질의 가방, 흠집 하나 없는 구두 굽. 잘 보니 그녀의 아들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흘렀다.
클레어 왓슨.
시카고 출신의 재벌가인 왓슨 그룹의 안주인이다. 몇 번인가 신문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꼬마 녀석은…….
“우리 램지가 실례를 한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램지 왓슨인가? 왓슨가의 장자로 후계자가 되기 위해 엘리트 수업을 받고 있다는.
“그쪽은 성함이?”
“대니얼 아브라함입니다.”
램지는 제 어머니 옆에 달라붙은 채 그를 경계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전의 대화가 소년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심어 준 모양이었다.
“레이첼이라면 예배당 뒤편에 있을 겁니다.”
목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대니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램지를 지나치며 그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목사는 대니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클레어에게 조용히 설명했다.
“레이첼의 아들이에요.”
클레어는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머, 교수님!”
레이첼은 뚜벅뚜벅 걸어오는 대니얼을 보고선 반색을 하며 인사했다. 담담한 얼굴로 서 있던 그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스치듯 일렁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클레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목사에게 물었다.
“레이첼이 대니얼 씨를 왜 저렇게 부르죠?”
“글쎄요. 저도 모르죠. 두 사람은 몇 년이나 서로 만나지 않았거든요. 사실 레이첼은 대니얼의 존재조차 이미 까마득하게 잊은 지 오래예요.”
긴장했던 대니얼은 금세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 레이첼.”
“또 논문인지 회의인지 하는 곳에 다녀오셨어요?”
“세미나예요, 레이첼. 세미나.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세미나요? 무식한 제가 뭘 알아야죠…….”
클레어는 산책을 하며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말했다.
“레이첼은 교회에 올 때마다 우리 램지를 아들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처음엔 그녀에게 우리 램지만 한 아들이 있었는데 사고로 잃거나 한 줄 알았거든요. 치매라고 하셨죠? 아직 젊은데 참 안됐어요. 레이첼도, 그리고 대니얼 씨도 말이에요…….”
두 사람을 보던 램지는 얼굴을 찌푸리며 예배당 안으로 뛰어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눈을 꾹 감고 손을 모았다.
“램지? 왜 그러니?”
뒤따라온 클레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램지는 침울한 어조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저 아저씨는 레이첼 아줌마가 아픈데도 기도를 하지 않았어요. 레이첼 아줌마의 아들인데도 기도 같은 건 하지 말래요. 그런 건 소용없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대신 기도해 주려고요. 레이첼 아줌마는 좋은 분이니까요.”
“우리 램지는 참 상냥하구나. 그래, 램지가 대신 기도해 주렴. 대니얼 씨를 위해서도 해 주려무나.”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감고 있던 에밀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대니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대니?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 있었어?”
그녀는 대니얼의 시선을 좇다가 움찔 굳었다. 창밖으로 왓슨 부인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램지의 모습이 보였다.
“저 아이가 죽을 때…… 절실히 매달리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뭐?”
에밀리는 입술에 물려던 담배를 툭 떨어뜨렸다.
“세상은 불공평해. 저 녀석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졌어. 게다가 어머니까지 곧 죽을 거라니 얼마나 행운아야? 그녀가 저대로 죽는다면 램지는 외독자로서 왓슨 일가의 모든 걸 손에 쥐게 될 거야. 부친은 이미 노쇠했으니 더 이상 자식을 볼 일도 없겠지.”
에밀리는 손 떨림을 감추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치직, 치직. 연이어 불을 켜려는 라이터 소리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며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를 ‘후우’ 뿜어냈다. 씁쓸한 향이 두 사람 사이를 배회했다.
“저 꼬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저 아이에게 네가 상속받을 재산과 엄마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저 애는 분명 제 엄마를 선택할 거야.”
그녀의 말에 대니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밀리는 공허하게 웃었다. 그래, 넌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이곳에 모친을 버려 둔 너는 아마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에밀리는 달리는 차의 창밖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목격한 것을 지우려 애쓰면서 미간에 힘을 주었다. ‘저 아이가 죽을 때…….’라는 말로 시작하던 대니얼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녀는 갑자기 구토를 하며 몸을 숙였다.
끼이익.
급정거를 한 대니얼은 핸들을 놓고 에밀리를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잠시만 기다려, 멀미약 사 올게.”
에밀리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배를 움켜쥐며 빈 운전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기 직전의 소년이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상상하던 대니얼은 흡사 성관계 중 사정을 한 남자처럼 지독히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2023년, 3월 22일.
그토록 기다리던 스카이 워크의 준공식 날이었다. 대니얼은 갑작스럽게 레이첼의 사망 소식을 전해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안타깝게도 준공식 파티에 참석할 수 없었고, 언론의 소프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에밀리와 케빈뿐이었다. 특히 케빈은 보급형 에어쉽의 초기 모델인 제피로스를 선보이며 사람들의 환호성을 끌어냈다. 투자자들 역시 만족스러워하며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일약 재계의 스타가 되었다. 각종 토크쇼와 인터뷰는 오직 케빈에게만 밀려들었다. 대중은 스카이 워크를 케빈 워커의 작품으로만 기억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였다.
충격적인 소식이 각종 뉴스 채널의 속보로 보도되어 나왔다. 케빈 워커가 돌연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것이다. 에밀리 로즈는 언론 앞에 눈물바람으로 나타나 약혼자인 그가 평소에도 약물을 즐겨 복용했음을 밝혔다. 케빈 워커의 죽음으로 인해 각 방송사는 스카이 워크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자세히 다루었고, 그 결과 스카이 워크를 건설하는 데 실질적인 공을 세운 이가 대니얼 아브라함이라는 게 밝혀졌다. 마침내 그가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칠 년의 시간이 흘렀다.
에밀리 로즈와 대니얼 아브라함은 건설회사 스타시티를 설립했다. 뛰어난 안목과 대담한 투자로 상승세를 보이던 스타시티가 마지막으로 손을 뻗은 건 우주도시 개발 분야였다. 두 사람은 각종 사교 행사에 늘 함께 나타났다. 대니얼에 대한 에밀리의 깊은 애정은 익히 알려진 것이었고, 두 사람이 곧 결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젊은 날의 열정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축배를 올리던 밤은 유독 달이 하늘에 낮게 떠 있었다. 커다란 보름달이 저렇게 뚝 떨어질 듯 하늘에 걸린 날이면 에밀리는 술에 잔뜩 취한 채 마약을 했다.
─살아 있는 한 내 첫 섹스는 네가 될 거라고 약속할게.
“지금에야 밝히지만 그때 내가 말한 ‘살아 있는 한 내 첫 섹스’라는 건 ‘내가’ 살아 있는 한이란 뜻이 아니고, ‘네가’ 살아 있는 한이란 뜻이었어.”
대니얼은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에밀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손등 위로 툭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을 내려다보며 스스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슬픈 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에밀리는 꽤 좋은─쓸모 있는─ 여자였으니까.
“진심으로 노력했어. 노력했는데…….”
그는 허벅지 사이로 축 늘어진 음낭을 보며 괴로운 듯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대니얼은 목이 부러진 채 숨진 그녀의 몸을 침실 밖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팔을 잡고 자루처럼 옮기던 그는 짜증이 돋았는지 시신을 내팽개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생식 활동은 이딴 짓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어. 이런 미개한 짓 따윈 하지 않아도.”
그는 양손에 얼굴을 묻더니 잇새를 보드득보드득 문지르며 이 가는 소리를 내었다.
─대니, 설마 여태까지 날 거부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
─그런 게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동안 자기가 쭉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만 생각했단 말이야.
조용히 고개를 든 그는 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시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참함과 분노에 찬 눈초리는 충혈된 채 붉게 젖어 있었다.
─아니면 자기 혹시 진짜 게이 아니야?
─뭐?
─게이인 거지? 그렇지? 불능 아니지? 내가 여자라서 흥분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고자인 것보단 차라리 게이인 게 낫다는 거야?
─하, 됐어……. 그냥 해 본 소리야. 일단 병원부터 가 보자.
이 남자를 잃을 바에는 차라리 바람피운 걸 눈감아주는 게 낫다. 이 남자에게 버림받을 바에는 구타와 성폭행을 당하는 게 낫다. 이 남자와 섹스를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게 낫다. 이 남자가 불능일 바엔 차라리 불감인 게 낫다.
그게 ‘그녀들’이 내린 최후의 결론이었다.
【2030년 4월 뉴욕 타임즈 1면 기사】
에밀리 로즈, 실종된 지 석 달째.
자택 내에서 다량의 마약과 수면제 발견!
전 약혼자 케빈 워커의 죽음 이후 극심한 조울증을 앓아 온 것으로 밝혀져…….
서기 2045년, 미국이 달 식민지화를 선언한 이후 세계 각국의 정부는 앞다투어 우주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미 인류는 탈국가화가 진행 중이었다. 제들끼리 울타리를 치고 땅 나누기를 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인종과 종교가 하나의 기호이자 수식어에 불과해졌듯, 국가란 개인에게 있어 이미 이름표에 불과한 존재였다.
전쟁이 종식되고 등장한 연맹국의 탄생은 그 수많은 이름표들과 무너진 울타리들을 정리한 간소화 절차에 불과했다. 적어도 세계 도처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이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본인의 발밑을 내려다볼게 아니라, 머리 위를 바라볼 시점이 도래했다는 것을.
2059년 1월, 연맹국은 달 신도시 개발안을 발표했다. 이 역사적인 도시 건축의 설계는 전적으로 우주 건설회사 스타시티가 일임하게 되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과 기업들은 리스크가 큰 이 사업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들은 스타시티가 너무 위험한 도박을 하는 거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덕분에 스타시티의 주가는 점점 하락세를 찍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년 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달 신도시 제1차 건설안은 대성공을 이뤘다.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것은 아브라함 회장이 강조한 이동의 편이성이었다.
그는 스타시티 뉴욕 지사 근처에 달 정거장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스카이쉽을 운행했다. 그리고 잠재적인 투자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무료 투어를 제공했다. 아브라함 회장은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일단 한 번 달에 올라가 본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우주의 경치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투자자들은 순식간에 몰려들었고, 도시개발 제1구역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진행됐다. 제일 먼저 그가 달에 세운 것은 각종 호텔 리조트와 카지노로 이루어진 휴양 도시였다. 세계 각지의 부호들은 미리부터 큰 기대감을 안고 줄서서 예약했다.
바야흐로 아브라함 전설이 시작되는 듯해 보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라함 회장은 돌연 언론과 대중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치명적인 불치병에 걸렸다고 했다. 희귀암의 일종으로 종국에는 온몸의 근육이 썩어 가는 질환이라는데 현대 의학 기술로는 치료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세계 최고의 부호인데 냉동캡슐에 들어가겠지. 요즘 병 걸린 부자들 사이에선 그게 트렌드잖아.”
누군가 추측성으로 내뱉은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인 양 보도가 되었다. 누구도 그것의 진위 여부는 상관하지 않았다. 세기의 부호가 냉동인간이 되어서 영원히 살아갈 예정이라니! 영화 같은 이야기는 괴담이 아닌 낭만이 되어 대중을 흥분시킬 뿐이었다.
2073년 12월 31일
스타시티 달 연구소
2073년의 마지막 날, 하와이의 스타시티 본사 연구진은 달 연구소로부터 충격적인 영상을 받았다. 이 믿기 힘든 자료는 막 오랜 잠에서 깨어나 회복 중이던 아브라함 회장에까지 금세 전달되었다. 그는 불과 일주일 전 시베리아 연구소에서 세기적인 뇌 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수술은 다행히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몇 날 며칠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던 아브라함 회장은 이제야 좀 안정을 찾은 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난리들인가?”
올해 나이 여든.
대니얼 아브라함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브라함 홀’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온 그의 목소리가 높다란 천장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아주 중요한 사항이래요, 아버지. 무슨 외계인이라나? 달 연구소 근처에서 뭔가를 발견했대요.”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줄곧 아브라함이 깨기를 기다렸던 듯 기쁨에 찬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를 발견한 아브라함 회장의 심기는 급격히 언짢아졌다.
“누가 저 녀석을 여기에 들여보냈어? 06번, 넌 당장 나가 있어!”
스피커를 통해 나온 고함 소리에 소년은 움찔거리며 얼른 돌아서 나갔다. 그러자 문밖에 서 있던 다른 소년이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들어가지 말랬잖아. 06번, 넌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모른다니까.”
“04번, 아버지께서는 원래 저렇게 화를 잘 내셔?”
06번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소년은 쌍둥이처럼 그를 닮아 있었다. 04번은 슬픈 미소를 짓더니 동생처럼 여린 06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응. 무서우신 분이야. 하지만 우리는 그의 피와 살을 물려받은 아들들이니 그를 잘 따르고 모셔야 해. 언젠가 아버지께서는 우리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실 테니까.”
“거기 두 사람,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삼가라고 했을 텐데.”
서늘한 경고에 두 아이들은 흠칫 놀라서 어깨를 굳혔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안경을 쓴 채 딱딱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요, 요한 님!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요한은 표정을 풀더니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 살짝 열린 문틈으로 숨을 죽인 채 얼굴을 가져대었다. 그러자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이 비추는 아브라함 홀의 모습이 엿보였다.
─ 달 연구소로부터 받은 기밀 영상 ALM01을 재생합니다.
드넓은 우주를 부유하던 ‘무언가’가 스타시티 달 위성에 툭 부딪친 것은 억만 분의 일보다도 낮은, 기적과도 같은 확률이었다. 처음에 달 연구진들은 그것을 사람의 시체라 여겼다. 조각조각 난 몸뚱이의 파편이 원한에 사무쳐서 떠돌다가 이곳까지 온 것이라며 딱하게 거두었던 모양이었다.
─ 보이십니까, 회장님? 바이탈 사인이 살아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자의 머리통의 반은 날아간 채였고, 왼쪽 어깨와 심장 부근 그리고 좌측 골반만 남아 있는 몸이었다. 보통 갑작스러운 폭발에 의해 산산조각 난 시신의 몸이 이런 모양새였다. 이게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지? 아브라함 회장은 놀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 이게 다가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뭔가?”
─ 이것을 좀 보십시오.
그들은 머리통이 박살 나고 팔다리가 찢어진 몸뚱이를 보글거리는 시험관 속에 이틀간 보관했다. 그리고 이내 믿기 힘든 변화를 관측했다.
─ 보이십니까? 미세하지만 여기 두개골이 자라고 사이에 살점이 차올랐습니다.
연구진들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그들 역시 두려움에 찬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 신경세포가 사령탑의 지시 없이 자율적으로 세포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폐 절반 이상이 손상된 상태인데도 산소 운반 및 혈액 순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이건 대체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저희로서도…….
그날 이후, 아브라함 회장은 깨어 있을 땐 무조건 달 연구소에 접속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생명체에게 쏠려 있었다. 언론에서는 스타시티의 아브라함 회장이 외계인을 발견했다며 우스갯소리 같은 기사를 쓰기도 했지만 루머로 치부할 뿐,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 알파47)의 혈액을 투입한 후 열두 시간 경과.
실험용 쥐들이 털을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곤두세웠다. 그들은 “키이익!”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을 쳐 댔다. 그들이 시험관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유리관을 긁자, 파직 하며 유리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신경 전달 체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골격과 근육이 빠르게 변이하는 게 육안으로 확인됩니다.
침착하게 전달하던 연구원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나왔다.
─ 시험관이 깨지고 있습니다. 실험쥐들의 몸집은 두 배가량 커진 상태입니다. 골격근의 변화인지 체내의 문제가 원인인지는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세 마리 모두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공격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쥐라고 볼 수가 없었다. 실험쥐들은 해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끽끽거리더니─아마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순식간에 몸의 털들이 숭숭 다 빠졌다. 체내의 확장된 혈관이 팽창되기 시작했고 피부는 거북이 등딱지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저게 대체 뭐처럼 보이는가, 소장?”
달 연구소의 총책임자인 소장은 긴장한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런 건 처음 봅니다. 다만 알파의 혈액에서 미확인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는데 그게 원인이지 않을까 합니다.
“바이러스?”
그날의 실험은 아브라함 회장에게 있어 공포보다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알파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알파의 바이러스가 체액과 혈액으로만 감염된다는 걸 알아냈다. 공기 중에 노출되면 바이러스는 멸살되고 곤충을 통한 감염은 불가능하다.
상반신의 절반만 남은 알파는 오직 두뇌부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뇌가 완벽하게 재생 완료된 시점은 그로부터 약 5년이 지난 후였다.
2079년, 마침내 긴 세월 알파의 몸을 감싸고 있던 스테이시스 캡슐48)의 유리관이 열렸다. 드라이아이스 같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캡슐 안을 채우고 있던 푸른 액체는 관을 통해 빠져나갔다.
기다려 왔던 주인공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의 몸은 촉촉이 젖어 있었는데 캡슐로부터 연결된 줄들이 그의 머리와 심장 부위에 부착된 채였다.
약 오 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알파는 두개골과 뇌 그리고 안면 조직을 회복했다. 덧붙여 왼쪽 팔과 복부도 재생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는 두뇌부보다 훨씬 경과가 빨랐다. 아마 뇌조직의 재생이 제일 어려운 과정이었던 듯했다.
알파는 몸을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서서히 눈꺼풀을 열었다. 구릿빛 피부와 검은 머리칼에 걸맞게 그의 눈동자는 아몬드 형의 검은 눈동자였다.
─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 회장은 연구소의 회장 전용 안드로이드를 통해 말을 걸었다. 그는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경이로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갈까마귀에게 심장을 쪼여 먹히던 프로메테우스를 처음 영접한 인류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그는 지금 역사적인 현장 속에 서 있었다.
알파는 사뭇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회복된 목 근육을 움직여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아브라함의 말을 전달하는 안드로이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넌…… 누구지?”
연구실 전체에 울려 퍼진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거칠었다. 그의 눈동자는 검은 모래가 침전된 홍해처럼 석양빛을 불태우며 어둡게 일렁였다. 그 뜨거운 감정은 분노인가, 아니면 고통인가?
─ 나는 당신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은인?”
그는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더니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던진 시선 밑으로 입매를 느슨하게 끌어올렸다.
“이 쇳덩어리 안에 있는 건가?”
─ 나는 이곳에 없습니다. 나는 지구에 있습니다.
“지구?”
중얼거리며 되묻는 그의 표정이 안개처럼 모호하게 얼버무려졌다.
─ 이번에는 당신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런 몰골로 살아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알파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었다. 그는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뭔가 기억을 더듬다가 불쾌한 감정이 든 듯한 표정이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강하고 용맹한 분위기의 알파는 꼭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전사를 떠올리게끔 했다.
“생명의 은인, 네 이름이 뭐냐?”
─ 대니얼, 대니얼 아브라함입니다.
“그래, 대니얼. 너희들은 아직도 신이란 걸 믿고 있나?”
아브라함은 잠시 침묵했다. 안드로이드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지만 알파는 그의 당혹을 눈치챈 듯 야만스럽게 웃었다.
“그 옛날 너희들의 선조는 우리를 경외하며 권능을 숭배했지. 우리는 다시금 이 땅을 지배하고자 왔다.”
알파는 방금 ‘우리’라고 했다. 그 말은 동료나 동족이 더 있는 건가? 그와 같은 신체를 가진 이들이?
─ 그렇다면 당신들은 신입니까?
“노아가 말하기를 아주 오래전에 너희들 스스로가 우리를 그렇게 부르며 두려워했다는군.”
아브라함은 생각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수천 년 전 미개한 고대 문명의 인류가 이들을 보았다면 반응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신으로 모시며 경외하거나 재앙으로 여기며 도망치거나. 그 시절에는 자연재해를 신의 분노로 해석했으니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란 면에서 둘은 별 차이가 없었을 테지.
─ 나도…… 신이 될 수 있나?
알파의 입매가 굳었다. 그는 아브라함이 접속한 안드로이드를 물끄러미 보더니 피식 웃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 나는 불멸을 원합니다. 나도 당신과 같은 몸이 될 수 있습니까?
“글쎄.”
알파는 모호한 눈빛으로 웃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알파와 대화를 나눈 후 아브라함 회장은 본격적으로 인체 실험에 착수했다. 스타시티가 달 연구소로 납치해 온 이들은 대부분 거리의 노숙자들이나 범죄자들이었다. 연구원들은 그들의 몸에 알파의 피를 주입했다. 행여나 실험체들이 불사의 몸이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몇 년간 알파를 관찰한 결과, 아무리 불사의 몸일지라도 온몸을 세포 단위로 조각내서 분쇄해 버리면 재생하는 데에 꽤 긴 세월이 걸린다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다.
알파의 몸에는 특이한 성질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몸은 팔다리가 잘려도 잘린 부위가 본체와 가까이 있으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겨서 절단면을 접합시킨다. 잘려 나가 혈액과 산소가 운반되지 않는 살점은 썩기 마련인데, 알파의 몸은 그렇지 않았다.
잘린 신체 기관은 본체와 분리되어 있어도 일정 기간은 아무 문제없이 제 역할을 행한다. 그들은 본체와 다시 결합하기 위해 스스로 신경 다발과 세포 조직을 복구했다.
전신이 조각났을 경우에는 재생의 구심점이 되는 부분이 있는 듯한데 이 경우엔 심장 부위 혹은 뇌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 오 년간 알파는 기를 쓰고 머리부터 복구를 한 게 아니었을까?
아브라함은 종종 알파와 대화를 나눴다. 그의 상반신은 완벽하게 재생된 상태였고, 이제 하반신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살점과 장기들을 찾지 못해서 재생이 더욱 느린 것이라고 했다.
“베타는 모두 사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습니다.”
연구진은 총 오백 명의 남성베타과 오백 명의 여성감마에게 알파의 혈액을 주사했는데 그 결과는 참혹했다.
오백 명의 베타는 모두 고통 속에 몸부림을 치며 죽어 갔다. 창백해진 안색, 전신을 태우는 듯한 고열과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 버린 혈관들. 그들은 괴로움에 사지를 꺾으며 죽었고 그 결과 시체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다.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연구원들이 일 년간 매달려 봤지만 그 어떤 치료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현재 의학 수준으로는 치사율 백 퍼센트입니다.”
아브라함은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감마들의 경우는 결과가 조금 다릅니다.”
소장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 고요히 듣고 있던 아브라함 회장의 표정도 진중하게 변했다.
“오백 명의 피실험자 여성들 중에 세 명이 살아남았습니다.”
“셋? 그럼 생존율이 0.6퍼센트란 말인가?”
“하지만 이 세 명이 바이러스에 정확히 면역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바이러스에 의해 돌연변이…… 그러니까 살기 위해 변이가 일어났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변이?”
소장이 손을 들자 허공에 영상이 떠올랐다. 변이가 일어난 한 감마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다섯 평 남짓한 강화유리로 이루어진 방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엎어져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듯 그녀의 뒤통수에 달라붙어 있었고 피부색은 묘하게 어두웠다.
이윽고 하얀 소독복을 입은 그녀의 척추가 기이하게 구부러지더니 우둑우둑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나머지 두 명의 영상도 함께 틀었다. 괴성을 지르며 벌린 턱 사이로 보이는 엄니. 광대뼈가 길게 자란 얼굴은 파충류처럼 주둥이가 발달하고 부드러운 피부는 사라진 채 딱딱한 가죽을 휘둘렀다. 낮게 낮춘 몸은 짧아진 팔과 발달한 뒷다리로 바닥을 기어 다니듯 움직였다. 흉기처럼 발달한 손톱은 유리 벽을 깨부술 듯 긁어 댔다.
“실험쥐들과 닮았군.”
“저희는 그녀들을 ‘델타’라 부르고 있습니다. 델타는 사람을 보면 공격합니다. 인육을 탐하지는 않지만 살생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신경과 인지능력의 퇴화가 돋보이고 청각과 후각이 발달했습니다. 언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인간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저들끼리는 교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웬만한 칼이나 둔기로는 델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그만큼 피부 조직이 단단합니다. 델타01로 실험을 한 영상을 보시죠. 먼저 왼쪽 팔을 절단한 모습입니다. 24시간 후, 72시간 후, 일주일 후, 그리고 보름 후의 변화를 관찰한 것입니다. 보다시피 재생의 조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한 저항력 및 면역력은 인간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화상과 동상 실험을 한 결과…….”
“요점만 말하게.”
아브라함이 따분하다는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소장은 그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실험 영상 장면으로 건너뛰었다.
“델타01의 목을 자른 모습입니다.”
팔 하나와 다리 한쪽을 잘린 채 자궁까지 들어낸 그녀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약 반년간 온갖 바이러스 및 세균에 감염당하고 여러 가지 생체 고문을 당해 온 델타01은 최종적으로 목이 잘려서 죽었다.
“불멸은 아니었군.”
아브라함 회장은 실망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저건 신인류가 아닌 그저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했다. 설사 델타가 불멸이라 해도 저런 미개한 몸 따윈 필요 없었다. 저건 진화가 아닌 퇴행이다. 영원을 살아도 짐승의 삶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때 집무관 안드로이드가 메시지를 띄웠다.
“회장님, 요한 가르두치로부터 긴급 보고입니다.”
“무슨 일인가?”
“알렉스 도련님께서 교내 동급생에게 폭력을 가하신 모양입니다.”
“05번?”
“네, 04번은 유전적 이상이 나타나서 폐기 처리할 예정입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짤막하게 명했다.
“일단 좀 더 지켜보지. 아직 06번이 있으니까…….”
【알림】
달 연구소 내에서 다수의 폭발 사건 발생!
소장 권한으로 제한구역 폐쇄 조치.
긴급 구조 요청 수신 중.
사건은 갑작스레 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테러라도 당한 건가? 빨리 보고해 봐!”
─ 외부 소행은 아닙니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내부라니? 그럼 우리 연구소 안의 누군가가 직원들을 다 죽이고 폭발을 일으켰단…….”
그 순간 뇌리를 스친 깨달음에 아브라함 회장은 ‘설마’ 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파와 델타는?”
─ 실험실을 탈출한 뒤 소장에게로 향했습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순전히 그의 부주의로 빚어진 상황이었다. 이 정도 사태는 미리 예측하고 대비를 해 뒀어야 했다. 알파가 계속 호의적일 거라 믿은 그의 어리석음이 불러온 재앙.
아브라함은 파손된 안드로이드의 코어 시스템에 가까스로 접속했다. 그러자 가상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달 연구소의 상황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다만 평소와 달리 잡음이 심하고 시야는 이물질이 낀 것처럼 탁하기만 했다. 접속한 안드로이드의 상태가 몹시도 불안정한 듯했다.
연구소 내부는 흡사 돌풍이 휩쓸고 간 모습이었다. 특히 폐쇄된 제한구역은 폭발 후 화재까지 발생해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 문제는 이곳이 바로 알파가 있던 장소라는 것이다.
“오랜만이군, 대니얼 아브라함. 그간 성과가 좀 있었나?”
낮고 묵직한 음성의 주인은 바닥에 쓰러진 안드로이드를 향해 걸어왔다. 아브라함이 접속한 사무용 로봇은 사람으로 치자면 죽기 일보 직전의 수준이었다. 수액이 질질 흐르는 안드로이드의 동공은 다가오는 발걸음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하얀 소독복을 입은 알파는 덜렁거리는 안드로이드 목을 잡더니 90도 각도로 푹 꺾었다. 뒤로 목이 꺾인 채 그를 올려다보는 안드로이드의 눈동자가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 당신이 이런 겁니까?
안드로이드의 목구멍에서 지직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파는 피식 웃더니 여유롭게 대답했다.
“난 아니야, 그녀들이 그랬지.”
그의 어깨 너머로 몸을 낮춘 채 슬금슬금 기어 오는 델타 두 마리가 보였다. 그들은 알파의 허벅지에 온순하게 머리를 기대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입가에 고인 침 사이로 흐르는 피가 보였다. 바로 직전에 누군가의 살점이라도 물어뜯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연구원들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거든. 특히 소장의 경우엔 보자마자 갈가리 찢어 버리더군.”
그는 오른발에 기댄 델타의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이 녀석 배에는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손으로 가리킨 델타의 배는 유독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알파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아브라함, 네 애라도 임신시킨 거 아니야?”
아브라함 회장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리던 알파의 입가에 ‘어라?’ 하는 미소가 비뚜름하게 일어났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나?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정말 포기를 모르는구나. 그렇게까지 불멸을 원하나?”
─ 저는 제 나름대로 이미 불멸의 길을 터놓았습니다. 신新인류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물론 당신을 만나 잠시 다른 가능성에 흔들린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을 이용해 신新인류가 아닌 신神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신의 바이러스는 인간의 인지능력을 퇴화시키거든요. 그것만큼은 죽음보다 사양입니다.
신新인류.
지적 탐구 영역에 대한 열망.
“그러니까 넌 진화를 하고 싶은 거로군. 불멸도 그 선상의 일환인 거고…….”
알파는 흥미롭다는 눈빛을 지었다.
인간의 욕구는 본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욕망 또한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본능은 생존과 직결되는 선천적인 충동인데 반해 욕망은 개인의 이기심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존에는 개인의 생존과 종족의 생존이 있다. 자손을 낳고 번식을 한 개체는 집단적 시각에서 봤을 때 이미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때문에 인간은 번식을 한 이후엔 ‘종족 보존’을 개인의 생존보다 앞세우게 된다.
그러나 가끔 ‘집단적 본능’에서 벗어나 ‘개인의 욕망’에만 집중하는 개체가 나타날 때가 있다. 그들은 집단의 생존 따위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집단을 파괴하고 동족을 혐오하는 면을 보이는데 간혹 동족 사냥─생물학적인 죽음을 선사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을 행하기도 한다. 그런 잔인성까지 갖춘 개체는 사회의 존망을 위협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신新인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때문에 타인을 한겨레로 여기지 않고 타파해야 적, 혹은 진화하지 못한 열등체로 여긴다. 그들은 동족과 연결된 집단적 본능의 지시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를 몇 배나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결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동족을 멸족시키는 일일지라도.
“어쨌든 덕분에 나도 좋은 걸 배웠다. 내 권속의 배 속에 다른 수컷의 씨를 수태시킨다는 발상은 해 본 적 없으니.”
─ 아직 성공 여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전부터 묻고 싶었습니다만, 혹시 당신은 생식 능력이 없는 겁니까?
알파의 웃음소리가 그쳤다. 그는 무표정한 눈으로 말없이 아브라함을 응시했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그 순간 그에게 강한 동료 의식을 느꼈다. 한 번도 타인에게서 느껴 본 적 없던 친밀감이 우주 저편의 낯선 이방인을 향해 생애 처음으로 샘솟았던 것이다.
“나는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가장 약한 개체다. 모성을 떠나온 선조들의 직계 후손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래서 순수 혈통과는 생김새부터 달라. 그들은 대체적으로 옅은 머리색에 창백한 피부, 아주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졌거든.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그 반대의 얼굴이지.”
구릿빛 피부, 검은 머리칼, 아몬드형의 짙은 눈동자.
“난 그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 이곳까진 함께 왔지만 그들과 난 목적이 다르니까. 난 종족의 번영이 아닌 나 ‘개인의 생존’을 원하거든. 그러니 대니얼 아브라함, 네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아브라함은 안드로이드의 눈깔을 데굴데굴 움직여서 아래를 응시했다. 얌전히 숨소리만 내고 있는 델타들의 손과 입가에 아직도 흐르는 선혈이 보였다. 반면 알파의 손과 발은 깨끗했다. 그는 델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그녀들은 그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저게 바로 ‘권속’이라는 건가?
아브라함 회장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동료란 걸 만든 적이 없었다. 가족조차 그에게 있어선 같은 편이 될 수 없었고, 사랑이란 걸 흉내 내 보려고 했지만 자기애를 이길 수 없었다.
─ 거래를 하죠.
“거래?”
─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당신도 내게 협조를 해 주십시오.
“내가 뭘 해 주면 되지?”
─ 당신의 권속을 내게 주십시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의 인터뷰 中】
“원래 메시아란 말입니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법이지요. 그런 극적인 등장은 사람들을 더 감동시키기 마련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따르는 ‘신’이란, 한 손으로는 세상을 벌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구원을 내밀던 이율배반적인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을 벌한 자와 구원한 자가 동일하다는 것도 모른 채, 태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죄인처럼 손발을 싹싹 빌고 있습니다.”
-대니얼 아브라함 편/투데이즈 매거진 편집부
서기 2098년 7월 뉴욕 브루클린.
얼마 전부터 맨해튼에는 검은 용병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가시 모드를 장착한 에어쉽을 타고 다녔다. 맨해튼 하수도를 통해 이동하는 델타들은 언제부터인가 도심 한가운데에도 속출하기 시작했고, 검은 용병대는 그럴 때마다 나타나 번개 같은 속도로 델타를 쓰러뜨리고 사라졌다.
로스티아벤Los-Thea-ven.
그들은 왓슨 그룹 산하에 속한 특수사병들로 본래 임무는 인공 섬 로스트 헤븐의 수호 및 도내 치안 유지라고 했다. 그들의 등장으로 연맹군은 대중의 관심을 잃었다. 어느 슈퍼스타들 못지않은 인기를 독차지한 낙원의 용병대에 관해 뉴욕 타임즈는 1면에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STF라는 로고가 박힌 최첨단 소재 전투복은 구시대적인 연맹군의 군복과 그 세련된 맵시부터 달랐다. 그들은 주로 델타를 산 채로 포획하는 게 목표였다. 특히 얼굴에 십자 흉터가 있는 지휘관이 이끈다는 블랙 호크 부대는, 나타나기만 하면 승전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 실력과 인지도를 따라올 자들이 없었다.
뉴욕의 브루클린은 델타의 집단 거주 지역들 중 하나로, 현재 가장 많은 수의 델타가 살고 있을 거라 추측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나타난 건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한 마리의 길고양이를 닮은 실루엣이 무너진 아스팔트 도로 위를 나붓나붓 걸었다. 호리호리한 몸이지만 군살 없이 탄탄한 허벅지 뒤로 검은 긴 머리카락이 꼬리처럼 바람에 춤을 췄다. 밀도 높은 특수 재질의 검은 전투복은 그녀의 굴곡진 몸에 착 달라붙은 채 매끈한 선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로스티아벤의 정예부대 STF.
봉긋한 가슴에 부착된 검은 매 마크49)는 부대의 지휘관인 블랙 호크를 상징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기상을 뽐내는 매의 양 날개는 끝자락만 황금색이었다. 최정예부대인 STF를 상징하는 앰블럼이 황금 날개기 때문이다.
한편 폐허가 된 건물 옥상 위에 숨어 있던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인영을 발견하자마자 황급히 몸을 낮췄다.
‘로스티아벤의 특수부대인가?’
그는 난간에 바짝 붙어 도로 위를 내려다보았다.
‘몇 명이나 온 거지?’
다른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홀로 은빛 쌍검을 들고 나타난 여자는 주위를 빙그르르 둘러보더니 느닷없이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 옥상 쪽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란 그는 재빨리 난간 아래로 몸을 낮췄지만 뒤통수 아래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말도 안 돼.’
족히 사십 미터는 떨어진 거리다. 그 거리에도 불구하고 발견했다고? 요염한 태로 등장한 여자는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피식 웃고 있었다. ‘아, 거기 숨어 있구나?’ 하는 눈빛으로 여유를 부리면서.
남자는 붉게 일렁이는 동공을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목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팔에 돋은 소름이 가시처럼 뾰족하게 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칼에서 묻어난 땀이 손바닥을 촉촉이 적신 걸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친 거냐? 한낱 인간 여자에게 위축된 걸로 모자라 숨이 멎는 듯한 공포까지 느끼다니…… 한심하긴.’
지금 이 건물 내에는 지하까지 총 열다섯 마리의 델타가 잠복하고 있다. 반대편 공장 건물에도 약 열 마리 남짓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델타 전담부대라면 사전에 이미 열원 탐지로 광역 스캔을 마쳤을 텐데 어째서 다른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거지? 함정인가? 지금 델타들을 우르르 내보내면 저 여자는 분명 죽는다. 본인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어찌 저리도 태평한 얼굴로 적진 한가운데를 누비며 서 있을 수 있느냔 말이다. 아무리 미끼 역할이라도 그렇지, 저 여잔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 건가? 대체 이 위압감은 뭘까? 대체 그녀의 무엇 때문에 이렇게도 숨 막히는 기분이…… 어라?
‘어디로 갔지?’
고개를 돌려 슬그머니 난간 틈을 엿보던 그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사라졌다.
도로 위에서 비긋이 웃으며 약 올리듯 쳐다보던 그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한 것이다.
끼에에엑!
캬아악! 끽, 끼긱!
발바닥 밑에서 땅이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델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쾅! 폭발 소리다. 소음과 진동의 세기를 보았을 때 적어도 군용 소형폭탄 급의 무기. 이어지는 폭발음은 없다. 설마 자폭한 건가?
아무리 뛰어난 군인이라도 델타 열 마리를 혼자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이 건물은 천장이 높고 기둥을 제외한 벽은 모두 허문 상태라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 불리한 구조였다. 무모한 짓을 했군. 돌아가서 아군을 부르는 게 나았을 텐데.
콰쾅!
잠겨 있던 옥상 문이 레이저 총에 의해 반으로 갈리더니 단면이 크림처럼 녹아내렸다. 그 사이로 걸어 나온 여자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봐! 다친 곳은 없어?”
남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꿈인지 현실인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불가능할 게 분명한데 어떻게…….’
다급한 목소리로 묻던 여자는 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의 손목과 팔 그리고 목 등을 빠르게 확인했다.
“물린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그녀가 잡았던 손목의 혈관이 팔딱거리는 생선처럼 뛰었다. 가슴이 왜 이렇게 진정되지 않는 거지?
“설마…… 날 구하러 여기까지 온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양쪽 눈 시력 2.0 이상인 것에 감사히 여기라고.”
그녀는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은근 자랑 어린 어조였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보였다.
“이름이 뭐지?”
“……아, 알파.”
“알파?”
그녀는 특이한 이름이라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좋아, 알파. 내 이름은 유림이다. 로스티아벤 정예부대인 STF의 델타 포획조 중에서도 에이스인 몸이지.”
알파의 눈이 흠칫 커졌다.
로스티아벤 정예부대 델타 포획조의 에이스.
유림은 말없이 눈을 깜빡이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덥석 그의 턱을 잡았다. 당황한 그의 눈이 커졌다. 턱을 쥔 그녀가 더운 숨결이 느껴질 만큼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반질거리는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오늘 널 구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시다. 알겠나?”
그녀는 그가 방어 차원으로 턱과 입술에 힘을 꾹 주는 걸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목에 지브제로가 담긴 주사기를 푹 박았다.
“무슨 짓이야!”
당황한 알파가 퍼뜩 손을 뿌리쳤지만 유림은 유유히 빈 주사기를 뽑으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 찼다.
“사내새끼가 주사 한 방 가지고 호들갑 떨기는. 감염되었더라도 발현 전에 치료제를 주입했으니 괜찮을 거다. 밑에 의무반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 좀 앉아 있다가 내려가도록 해. 내려가는 길은 내가 이미 청소해 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럼 조심히 가라. 아…….”
‘그런데 이름이 뭐였지?’란 얼굴로 잠시 서 있던 유림은 머쓱한 눈초리로 뺨을 매만지더니 돌아섰다. 알게 뭐냐는 식의 표정이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걷는 그녀의 뒷모습은 방금 전 구했던 그의 존재 따윈 이미 까맣게 잊은 기색이었다.
그런 그녀를 아쉬운 듯 바라보던 알파는 ‘두근’ 하고 고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왼 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는 핏줄이 터진 눈가를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충혈된 동공을 크게 확장시켰다.
“으…… 크윽!”
그는 몸을 뒤집으며 눈 흰자위를 허옇게 뒤집었다. 온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피부에 비친 푸른 혈관들은 무섭게 팽창하며 불룩불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지브제로G-eve zero. 그걸 투여한 건가?
델타에 감염되었지만 변이가 일어나기 전 단계의 인간에게만 유효하다는 치료제. 온몸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 말은 즉, 최초의 바이러스를 퍼뜨린 숙주에게도 효과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아아아악!”
알파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서 몸을 굴렀다. 아브라함, 그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눌렀다.
아브라함!
대니얼50) 아브라함!
툭, 발버둥 치던 그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힘없이 감기는 눈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 내 권속으로 뭘 하려고?
─ 이 세상에 심판을 내릴 겁니다.
─ 심판?
─ 예, 신의 대리인으로서…… 당신이 허락만 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