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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10/21)

Chapter 4

2080년 10월 25일

뉴욕 타임즈 1면을 장식한 기사 제목

‘우주 건설회사 스타시티의 창립 50주년 파티 개막식,

세계 각지의 유명 인사들이 상공에 모이다!’

우주 건설회사 스타시티의 본사는 하와이에 위치했다. 멀리서 보면 크리스털 럭비공처럼 보이는 스타시티의 본사인 비행선은, 지상으로부터 약 1200피트 떨어진 상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현 스타시티의 회장 아브라함은 십 년 넘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그의 병색에 관한 소문이 돈 것도 어느덧 오십 년이었다. 다들 회장의 생사에 관해선 짙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감히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다만 해가 바뀔수록 커져 가는 스타시티의 위상이 아브라함 회장이 아직 굳건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암시해 줄 뿐이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걸린 연회장에는 약 삼천 명의 내빈들이 입장했다. 다들 연말 시상식을 떠올릴 법한 차림새들이었다.

“오, 알렉스 군!”

연회장에 나타난 알렉스는 여기저기서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에스트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얀색 정장을 입고 나타난 중년의 남자는 사샤의 아버지인 이반이었다. 멋스러운 은발이 인상적인 그는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지휘자 중 하나였다. 이반은 알렉스를 죽일 듯 노려보는 사샤와 그녀를 태연히 바라보는 알렉스를 번갈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두 사람의 눈싸움이 젊은 아이들의 흔한 사랑싸움 정도로 보였다.

“회장님께서는 잘 지내시는가?”

“예, 다만 아직 몸이 불편하셔서 오늘 자리에 참석하긴 힘드실 듯합니다. 당신께서도 굉장히 아쉬워하고 계시죠.”

“저런, 쾌유를 기원한다고 전해 주시게. 그나저나 우리 딸 하고는 서로 이미 아는 사이라던데?”

“그럼요. 사샤와는 학교에서 매일 보는걸요.”

알렉스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사샤는 기가 막힌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이반의 팔에 팔짱을 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우리가 알렉스 시간을 너무 뺏고 있는 것 같아요. 알렉스와 인사를 나누려고 기다리는 귀빈들이 많을 텐데, 우리는 이만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겠어요.”

“아, 내가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있었군. 반가웠네, 아브라함 군.”

짙은 녹색 드레스를 입은 사샤는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를 자랑하듯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알렉스는 두 사람이 돌아서자마자 매서운 눈초리로 사샤의 몸을 훑었다.

흥, 여우 같은 계집! 더 이상 아쉽지도 않다.

그때, 별안간 중앙 샹들리에의 불빛이 어두워지더니 홀 중앙에 푸른색 홀로그램으로 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안녕하세요, 내빈 여러분.

네모난 창 안에는 정체불명의 인사말이 떠 있었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홀 중앙을 향해 기웃기웃 모여들기 시작했다.

─ 스타시티의 창립 오십 주년 기념 파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측에서 핼러윈 데이라고 재미난 이벤트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다들 샴페인과 와인 잔을 들고 즐거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작 주인공인 알렉스는 의아한 눈초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찝찝한 표정으로 턱을 긁었다.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이벤트를 누가 기획한 거지? 전혀 들은 바가 없는데? 어둠 속에 도깨비불처럼 등장한 홀로그램. 핼러윈이라지만 이상하게 기분 나쁜 효과였다.

─ 스타시티의 아브라함 회장이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지가 올해로 십오 년째. 언론은 스타시티의 압력에 못 이겨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사실상 아브라함 회장은 이미 세상을 떴을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습니다. 회사의 주가 폭락을 우려한 스타시티가 진실을 숨긴 채 쉬쉬하고 있다는 주장이죠.

주최 측의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홀로그램 창이 예상과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내빈들은 웅성거리며 속닥이기 시작했다.

─ 아브라함 회장은 정말 사망한 것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모니터링을 하던 보안 팀은 갑작스레 직면한 돌발 상황에 우왕좌왕하며 허둥댔다. 그들은 연회장에 침입한 홀로그램의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던 보안 팀장은 알렉스의 굳은 얼굴이 화면에 잡히자, 격양된 목소리로 팀원들을 독촉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조명의 경우, 에너지 관리 시스템 자체가 해킹당한 걸로 보입니다. 현재 통제권을 되찾아 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만…….”

“저것부터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저 홀로그램 창부터!”

스타시티의 보안 팀은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들마저도 저 홀로그램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니 도무지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단 귀빈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연회장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부 시스템을 이용한 원리는 아닌 것으로 보여서…….”

“미쳤어? 내빈들을 내보내자고? 파티를 아예 망칠 셈이야?”

보안 팀이 그렇게 손가락만 빨고 있을 동안, 연회장에선 몇 년 전 기사가 팝업창처럼 번쩍번쩍 튀어나오고 있었다. 보안 팀장은 연회장을 중계하고 있는 화면에 바짝 다가가 눈을 비볐다. 부릅뜬 그의 동공에는 글자들이 주식거래 시장 숫자처럼 또박또박 맺혔다.

‘우주 건설회사 스타시티, 뇌 과학 분야에 투자액 200% 올리기로.’

‘솔로몬 프로젝트의 성공, 인류는 바야흐로 불멸에 다가서는가?’

기사 밑에는 다시 하얗게 반짝이는 글씨들이 홀로그램 창으로 떠올랐다.

─ 스타시티는 어째서 뇌 과학, 특히 뇌 이식 분야에 관심을 보일까요? 우주 사업 분야와는 전혀 동떨어진 분야인데 말입니다. 혹시 말입니다. 이것은, 사라진 아브라함 회장과 관련 있는 게 아닐까요?

난데없이 무대 조명이 알렉스의 얼굴을 비췄다. 깜짝 놀란 알렉스는 천장의 불빛을 응시했다. 그는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찡그리며 곁눈질로 정면의 홀로그램 창을 노려보았다. 그곳엔 그의 얼굴과 함께 게시된 의혹 어린 질문들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알렉스 아브라함.

-베일에 싸인 출생.

-그의 생모는 누구인가?

-과연 그의 생모는 ‘존재’하는가?

-그는 정말 아브라함 회장의 ‘아들’인가?

-아니면 회장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에 불과한가?

알렉스의 눈자위가 분노로 하얗게 굳었다. 그는 악다문 잇새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새끼가…….”

감히 스타시티의 후계자를 건드리다니, 배짱 한번 두둑했다. 찾아서 죽여 버릴 테다.

“어머!”

“저거 알렉스 아니에요?”

“설마…… 요.”

그때 홀로그램 속에서 영상 하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바이칼 호 근처, 뒤로는 진주를 품은 조개 모양의 카페가 보이는 곳. 바로 알렉스가 아담을 구타하던 날의 기록이었다.

아담의 얼굴은 모자이크로 가려진 상태였고, 쇠몽둥이를 든 알렉스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실성한 듯 잔혹하게 일그러진 그의 눈초리가 점차 확대되며 번뜩였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번졌다.

─ 비정상적인 폭력성. 공감 능력의 부재.

내레이션을 하는 괴인은 조롱하듯 덧붙였다.

─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 조작의 부작용들 중 하나죠? 두정엽 내측의 설전부 크기가 일반인들보다 작고, 전두엽과 측두근의 회백질은 경직된 채 구조적 이상을 보이는 것. 다른 말로 사이코패스,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고도 하던가요? 그래도 너무 그를 비난하진 마세요. 어쩌면 그는 어려서부터 심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구타, 성희롱 혹은 성폭력, 양육자의 부재 등과 같은 상황에 말이죠.

“누구야! 어떤 새끼냐고!”

알렉스는 괴성을 지르며 홀 중앙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홀로그램 창을 부서뜨리고자 허공에 주먹을 연신 휘둘렀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영상과 글귀들을 없애려고 팔을 휘저어도 실체가 없는 홀로그램은 그를 비웃듯 멀쩡한 형태를 유지했다.

“이거 왜 안 없어져! 왜 안 없어지냔 말이야!”

흥분한 채 고함치던 알렉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돌아섰다. 벌겋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는 희번덕거리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대며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였다. 분개해서 씩씩대던 그의 눈초리가 뭔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방금 전까지 분명 아무도 없던 곳에 거짓말처럼 녀석이 나타나 있었다. 살아 숨 쉬는 조각처럼 완벽한 외모의 소년은 테이블 위에 걸터앉은 채 미소를 머금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너…… 너 이 새끼!”

“이브는 어디에 있어?”

아담은 턱을 괸 채 빤한 시선으로 대뜸 물었다. 미려하다 못해 아름다운 눈초리에는 서늘한 달빛이 고여 있었다.

“내 여동생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어.”

흠칫한 알렉스는 인상을 쓰더니 쏘아붙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알렉스, 넌 늘 불안 속에 살고 있지.”

아담의 손에는 하얀색 캡슐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알렉스는 얼어붙은 눈으로 주춤 물러섰다.

“무엇이 널 그렇게 두렵게 만드는 걸까? 아브라함 회장에게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뿐이야. 명실상부 제국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지. 오랜 세월 독신이었던 아브라함 회장은 동성애자 혹은 무정자증이란 설마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게 돼. 그것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말이야. 아이의 생모에 관해선 소문만 무성할 뿐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어. 아니, 애초에 생모가 존재하긴 한 걸까? 알렉스 아브라함, 너는 과연 아브라함 회장의 아들이 맞긴 할까? 회장의 젊은 시절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기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어. 네가 젊은 시절의 아브라함 회장을 쏙 빼닮았다고 말이야. 빼닮은 정도가 아니라 흡사 쌍둥이처럼, 아브라함 회장 본인을 보는 듯하다고…….”

알렉스는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초조한 듯 입술을 축이던 알렉스는 곁눈질로 아담이 들고 있는 하얀색 캡슐을 흘끗거리며 불안해했다.

“천사의 입맞춤은 사신의 축복처럼 끔찍하더라. 나는 일찍이 악몽이란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는데, 네 덕분에 진귀한 체험을 했어. 그래서 답례로 나도 특별한 걸 준비했어.”

아담은 생긋 웃었다. 아름다운 여우가 웃는 듯했다. 홀린 듯 서 있던 알렉스의 귓가엔 이내 그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몽롱하게 다가왔다.

─자, 알렉스 아브라함. 네 머릿속엔 뭐가 들었나 한번 볼까?

얼굴 없는 인영들이 연기처럼 훅훅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령처럼 움직이며 일렁이더니 밀가루를 반죽하듯 형체를 이뤄 갔다.

─네 심연 깊은 곳에는 과연 뭐가 자리하고 있을까?

섬뜩한 속삭임이 살갗 밑으로 스며들었다. 하얀 연기 속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단번에 그를 알아본 알렉스는 허우적대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 아버지!”

남자는 알렉스처럼 장골에 듬직한 어깨를 갖고 있었다. 강인한 턱, 긴 팔과 다리. 얼핏 보이는 실루엣만 봐도 알렉스와 꼭 닮은 인영의 주인이었다.

알렉스는 털썩 주저앉으며 이를 딱딱거렸다. 턱이 다물어지질 않는지 안면 근육을 일그러뜨리며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 차려! 이건 저 녀석의 농간이야. 엔젤 키스처럼 악몽을 꾸고 있는 것뿐이야!’

그럼에도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저 가증스러운 놈은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송곳처럼 파고들어 헤집고 있었다. 온통 고통뿐인 기억을, 공포뿐인 순간을…….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해? 알렉스! 넌 그저 나열된 일련번호들 중 하나일 뿐이야.

숨이 막혀 왔다. 체벌의 방은 늘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자신은 온통 거울뿐인 방 안에 갇힌 채 알지도 못하는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자, 잘못했어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알렉스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대체 뭘 본 건지 그는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머리를 무릎에 처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브라함 회장인가? 저 가면은 뭐야? 얼굴을 볼 수가 없네.’

아담은 눈초리를 가늘게 흐리며 턱을 괴었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예상대로 알렉스는 오랫동안 폭행을 당해 온 듯했다. 그에게 폭력을 가한 이는 놀랍게도 그의 친부인 아브라함 회장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알렉스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감정의 편린들이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파생됐지만 그의 상상이 빚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회장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알렉스가 무의식중에 그의 얼굴을 가렸기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 때문인가? 부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어쩌면 아브라함 회장이 정말 괴팍한 취미를 지녔을지도. 정말 저런 연극용 가면 같은 것을 쓰고 알렉스에게 폭행을 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전자전인가? 아비와 아들 둘 다 똑같이 제정신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녀석!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알렉스는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양손을 모으고 싹싹 빌며 애원했다. 어찌나 손바닥을 세차게 비비는지, 그 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

“제발 살려 주세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아버지.”

살려 달라고 울먹이는 알렉스는 그제야 비로소 아이처럼 보였다. 그동안 커다란 덩치로 동급생들을 괴롭히고 온갖 악행을 일삼던 그의 껍데기 속에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외로운 소년의 모습이 숨어 있었다. 누가 때리는 것도 아닌데 그는 온몸을 동그랗게 만 채 팔로 머리를 가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격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뉘우치던 알렉스는 땀에 젖은 몸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변이 다시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호통을 치던 아브라함 회장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앞에는 초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담이 있었다. 기울어진 초승달에 걸터앉은 어린 왕자처럼, 그는 우주를 떠다니듯 자유롭고 유연해 보였다. 아담은 알렉스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그의 예쁜 미소에는 뭔지 모를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회장이 이리도 고요했던가?

“아, 일러 주는 걸 잊었네. 지금 내 모습은 너한테만 보이는 거야. 네 뇌파에만 개입한 자극이거든.”

알렉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담은 생긋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소. 그의 눈초리는 야들야들 흐르는 요물의 것처럼 소름 끼쳤다.

알렉스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 녀석이 저렇게 뻔뻔하고 유들유들한 놈이었던가? 늘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소년이었다.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인기는 많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병약해 보이는 약골 도련님으로 보였다. 한 대 때리면 코피를 터뜨리며 울먹일 것 같은, 그런 나약한 샌님 중 하나로 여겼는데.

‘녀석이 저렇게 잔인한 눈초리를 가지고 있었던가?’

타인을 괴롭히며 힘을 과시할 때의 희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담 페트로비치, 저 녀석은 다르다. 힘을 과시하려는 게 아니었다. 우위를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고, 삶의 재미를 느끼려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개미 한 마리가 버둥거리는 게 뭐 대수인가?’ 하는 시큰둥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턱을 괸 채 조금 무료하다는 듯 혹은 지루하다는 듯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저 녀석은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저놈이 집착하는 대상이라고는 오직…….

“마지막 기회야, 알렉스. 이브는 어디에 있어?”

알렉스는 움찔거리며 아담을 노려보았다. 그래, 저 녀석이 애지중지한다던 여동생, 이브 페트로비치다. 녀석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 같았던 소름 돋는 계집.

아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알렉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있잖아, 나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긴 처음이거든? 현재의 난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 정도로 굉장히 감정적인 상태야.”

네가? 그렇게 무표정한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하면서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라고?

“누군가에게 이토록 살의를 느낀 것도 처음이고. 진심으로 널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도 갈등하고 있어. 내가 볼 때 아브라함 회장은 네가 죽어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거든. 너는…… 대용품이 꽤 많은 존재인 것 같아. 즉, 네가 이 자리에서 숨져도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란 의미지. 어차피 회장에게 있어 ‘알렉스를 대신할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내 말 이해돼?”

“닥쳐!”

“아까 얼핏 엿들었는데 ‘나열된 일련번호들 중 하나일 뿐’이란 말은 무슨 뜻이야?”

알렉스는 잇새로 숨을 몰아쉬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가쁜 호흡을 담은 채 핏대를 세웠다. 그는 악물었다가 연 입술 사이로 울분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항복하듯 털어놓았다.

“시베리아 연구소로 데려갔댔어.”

아담을 죽일 듯 노려보는 그의 눈초리엔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됐지?”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했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저 녀석이, 생각을 알 수가 없는 저 오묘한 황갈색 눈동자가…… 아버지만큼이나 두렵게 느껴졌다.

“이제 만족하냐고!”

이제 그만 이 악몽 같은 대화를 멈추고 싶다. 머릿속에 돋보기를 대고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놈의 시선을 누가 좀 빼내 줘!

“글쎄.”

아담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 알렉스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다. 저 녀석이 저렇게 아이 같은 표정을 지을 리가 없어. 저 녀석은 악마야, 악마라고!

아담은 손에 쥔 회중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더 놀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었다. 느려 터진 보안 팀에서 이제야 통제권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역추적을 시도해 오는 걸 보니 슬슬 놀이를 마무리해야 할 타이밍이다.

“재밌었어, 알렉스 아브라함.”

“뭐?”

“생각보다 효과가 좋네. 이건 뭐라고 이름 붙이는 게 좋을까? 천사의 입맞춤…… 그거보단 더 황홀하지 않나 싶은데.”

아담은 돌아서며 우아하게 팔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하얀 가루가 반짝이며 흩어졌다. 알렉스는 코끝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향에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엔젤 키스.

저 녀석이 저걸 어떻게 가지고 있지? 설마 제조법을 알아냈나? 그건 불가능하다. 아니, 저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그렇다면 설마 엔젤 키스와 비슷한 약물을 만들어 낸 건가? 무서운 건, 이 모든 게 녀석이 보여 주는 환각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처럼 코로 흡입된 향은 알렉스의 머릿속을 흐물흐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뇌리엔 조곤조곤 타이르듯 경고하는 아담의 목소리가 경종처럼 울려 퍼졌다.

─가여운 아브라함 주니어,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네게 살의를 느끼고 있어. 나에게 감정이란 지정한 대상에 대해 수용하는 책임감과 비슷해. 즉, 나는 네게 체벌을 내려야 한다는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는 소리야. 너에 대한 내 감정의 결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실행될 거야. 만약 이브가 무사하지 않다면 그 시기는 더더욱 빨리 다가오겠지. 그러니 기도하도록 해, 알렉스. 네 아버지께 잘못을 뉘우칠 때처럼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편이 좋을 거야. 네 부친과 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 둘 다 타인에게 온색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일 테니까.

“닥쳐! 닥치란 말이야!”

소름 끼치는 녀석, 천사의 탈을 쓴 사탄 같으니! 네놈이 우리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건방진 새끼! 제까짓 게 날 어떻게 죽인다는 거야!

사샤는 유령에게 쫓기듯 뛰어다니는 알렉스를 딱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조차도 잠시뿐인 동정이었지만, 이 순간 웃음거리가 된 그가 불쌍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알렉스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실성한 사람처럼 고함을 질러 댔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 말을 걸기도 했다. 아무래도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잔뜩 겁에 질린 채로 말이었다. 그를 비웃듯 떠오르던 홀로그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거늘.

수군덕대던 내빈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얼굴에 아주 불쾌한 기색이 만연했다. 언뜻 보아도 알렉스의 언행은 마약을 한 상태와 비슷해 보였다. 내빈들은 고개를 저으며 쯧쯧거렸다. 회장의 아들이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아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스타시티의 미래가 어찌 되려나.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사샤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팔짱을 낀 채 혀를 차고 있었다. 사샤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주근깨 덮인 콧잔등을 찌푸리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먼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아, 안녕.”

고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에 연한 갈색 눈동자. 먹색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한눈에 봐도 재력가의 자녀로 보였다. 온몸에 두르고 있는 보석들, 최고급 소재의 원피스와 구두. 물론 사샤 역시 그에 뒤질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두 소녀는 서로를 견제하듯 바라보더니, 동시에 시선을 맞췄다.

“난 사샤라고 해. 사샤 피보바로바.”

“제인, 제인 헬렌 왓슨.”

그녀는 자랑스러운 어조로 풀 네임을 말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흡사 『작은 아씨들』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듯해 보이는 제인은 어느 왕국의 공주처럼 오만해 보였다. 사샤는 예의상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작 자신보다 한두 살 더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그런데도 일곱 살 난 이브보다도 철딱서니가 없는 느낌이라니.

‘그런데 왓슨이라면…….’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사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램지 왓슨 회장의 손녀?”

사샤가 조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진 제인은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사샤가 꽤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내친김에 사샤의 팔에 팔짱을 낀 제인은 친근하게 몸을 바짝 붙였다. 사샤는 곁눈질로 제인을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

“그런데 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응? 뭐가?”

“좀 전에 네가 그랬잖아.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그녀는 바닥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알렉스 쪽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제인은 갑자기 눈초리를 날카롭게 찢으며 쏘아붙였다.

“저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오만불손인 성격으로 모자라 호불호가 아주 극명한 소녀였다. 사샤는 난색을 감추며 변명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 워낙 유명 인사거든. 스타시티의 후계자라면서.”

“흐응.”

제인은 거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의 성질머리는 전 세계 사교계의 화젯거리인 모양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제인의 속삭임에 사샤는 귀를 기울이며 몸을 굽혔다. 주위를 흘끔거린 제인은 그녀의 귀에 손을 모으고 소곤소곤 말을 전했다.

“저 녀석 말이야, 아브라함 회장의 클론이래.”

“클…… 론?”

“아브라함 회장은 세포가 썩는 불치병에 걸렸대. 그래서 뇌만 축출한 다음 냉동 보존을 하고 있다나 봐. 아브라함 회장은 일찍이 클론을 잔뜩 만들어 놨는데, 최종 목표는 자기 클론에 다시 뇌 이식을 해서 부활하는 거래. 결국 쟤는 그걸 위한 소모품에 불과한 거지. 회장이 뇌 이식만 성공하면 쟨 몸뚱이만 내주고 죽을 운명인 거야.”

발돋음을 한 채 소곤거리던 제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편안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녀는 뽐내는 제스처로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클론은 수명이 짧잖아? 아마 저 녀석 말고도 제2의 알렉스, 제3의 알렉스들이 대기하고 있을 거라더라. 우리 할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아브라함 회장은 제정신이 아니래. 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이 이미 도를 넘은 지 오래라고 하시더라고.”

불로장생.

클론.

뇌 이식.

“에이, 설마…….”

사샤는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애써 웃음 지었다. 그러자 제인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며 쯧쯧거렸다. 궁금하다기에 알려 줬더니 반응이 시원치 않아서 짜증이 난 듯했다.

‘그런데 왓슨 회장의 손녀라면.’

사샤는 흐려진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리 박사라고 알아?”

“리 박사?”

제인은 보송보송한 인중을 검지로 톡톡 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불쾌한 얼굴로 이마를 찡그렸다.

“그 사마귀 같이 생긴 사람?”

“그래, 그 사람!”

맞장구를 쳐 놓고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사샤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붉어진 뺨을 손부채질로 식혔다. 싫은 사람이지만 사마귀라고 비유하자니 좀 미안했다.

“그 남자라면 카인이 아주 싫어하는 것 같던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가 안 좋은 건 확실해.”

“카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사샤가 묻자 제인은 기다렸다는 듯 ‘에헴!’ 하고 그에 대한 소개를 덧붙였다.

“엘 카인. 나중에 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차기 왓슨 그룹의 수장이 될 남자라고 할 수 있지.”

자신보다도 어린 꼬맹이가 벌써부터 결혼할 남자를 운운하다니, 사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인은 연회장 입구 쪽을 바라보더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난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아.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즐거웠던 핼러윈 파티였어. 안녕, 사샤 피보바로바! 다음에 또 만나.”

맹랑한 숙녀였다. 하지만 차기 사교계의 퀸은 저 아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온갖 가십거리는 다 꿰고 있는 걸 보아하니 말이었다. 사샤는 생각에 잠기며 입술을 곱씹었다.

제인 헬렌 왓슨.

그녀는 차기 왓슨 그룹의 안주인이 될 소녀의 이름을 잘 기억해 두기로 했다.

2080년 10월 31일 오전 6시 50분

러시아 시베리아 연구소 특별동 대회의실

10월의 마지막 날, 시베리아 연구소에서는 극비리에 비밀 회담이 이루어졌다. 연구소 특별동에 위치한 대회의실은 이른 아침부터 조심스레 불이 켜졌다. 커다란 타원형의 테이블 위에는 비밀리에 입국한 세계 정상들의 명패가 차례차례 꽂혀 있었다.

스타시티의 후계자 알렉스 아브라함,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풍문! 마약 복용이 원인인가?

회의실에 제일 먼저 도착한 남자는 스마트 워치로 홀로그램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는 느긋하게 앉아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건넸다.

“국장님, 어서 오십시오.”

두 번째로 도착한 이는 연맹국의 질병관리센터CDC를 책임지는 벤 프라이든 국장이었다.

“아, 그 왓슨 병원의…….”

“네, 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예전에 제노바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뵌 적이 있었죠.”

프라이든 국장은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리 박사가 앉아 있던 좌석의 명패를 보더니 물었다.

“왓슨 회장은 아직 요양 중이신가?”

유리로 된 명패에는 ‘램지 왓슨’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예, 아직 거동이 조금 불편하신 터라 제가 대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차근차근 호전 중이시니 조만간 회장님을 뵙고 안부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게나.”

거짓말이다. 왓슨 회장의 건강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이제 휠체어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수준이라고 하던데, 조만간 그룹 경영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굳이 일러 줄 필요는 없겠지.

리는 프라이든에게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총 서른네 명의 대표들이 착석했다. 시베리아 연구소 제1연구팀의 팀장이 회의 진행을 맡았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입장하자, 타원형 테이블 중앙에는 가상 입체 프로젝터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영상을 주목해 주십시오.”

입체 영상 속 장소는 이곳 시베리아 연구소였다. 하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이어서 벽과 천장이 모두 하얀 방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방 중앙에는 네모난 침상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주위에는 의료 기계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그 광경이 어쩐지 살풍경하게 느껴졌다.

그 가운데로 무채색의 환자복을 입은 소녀 하나가 등장했다. 그녀는 목줄이 묶인 짐승처럼 팔 여기저기에 주삿바늘이 꽂힌 채 침상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보시는 영상 속에 등장한 소녀가 바로 오늘 회담의 주제인 신종 바이러스 항체 보유자, 이브 페트로비치입니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눈이 하나같이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잠시 정적이 일었다. 누군가는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입체 형상이 되어 앉아 있는 이브를 향해 손을 대 보기도 했다.

침착하게 앉아 있던 일본 수상이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아리마 수상, 말씀하십시오.”

“그러니까 저 아이가 신종 바이러스의 생존자라는 말씀입니까? 여태까지 어린아이가 감염되었다가 살아남은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만, 더욱이 항체라니……. 지금까지 생존자들에게서 항체가 추출된 적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특별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생존자들에게선 항체가 발견되지 않아 치료제 개발이 어려웠는데, 놀랍게도 이 아이는 항원에 반응해 항체를 생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럼 치료제 개발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긍정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누군가 ‘맙소사!’를 외쳤다.

“치료제 개발은 누가 합니까? 시베리아 연구소가 할 생각입니까?”

“예? 말도 안 되죠! 이건 러시아 측에서 독단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런 중대한 사항을 몇 달 동안 숨긴 이유가 뭡니까? 신종 바이러스는 우리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역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명적인 사안입니다. 이에 관해 각 정부는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기로 조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각 대표들은 저마다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던 리 박사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혈안이 된 늙은이들한테 밥그릇 다 뺏긴 채 빈 깡통만 안고 갈 판국이었다.

“잠깐, 저자는 누굽니까?”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던 프라이든 국장이 처진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가 주름진 손으로 가리킨 영상 속에는 잿빛 코트를 입은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유유히 복도로 입장하는 게 보였다.

귀족적인 애쉬드 블론드 헤어, 카리브 해를 닮은 푸른 눈동자. 조각처럼 반듯하게 생긴 남자는 천사처럼 온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실험실로 들어선 남자는 곧 어렵지 않게 유리 벽 너머의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채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밖에서 원숭이처럼 뛰어다니고 논 소녀의 팔은 여기저기 긁히고 구른 자국들 천지였다.

반면 동그랗게 보이는 어깨선은 눈처럼 뽀얗고 깨끗한 피부를 자랑했다.

“카인 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지금 회의실에선 각국 정상들과 기업 대표들이 모여 회담을 나누고 있는데, 홀로 이렇게 오시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요.”

소장의 곤란한 처지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카인은 서느런 눈초리로 재촉하듯 음영을 드리웠다. 가슴이 선뜩해졌다. 소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옆에 서 있던 연구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젊은 여자 연구원은 그의 지시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슨 못할 짓이란 말인가? 실험체로 쓰이는 원숭이나 쥐들에게도 하기 힘든 짓을 저 어린아이에게…….’

그녀는 고개를 외면한 채 붉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방 모서리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서 미세입자로 된 백색 가스가 ‘푸슉’ 하고 살포되었다. 깜짝 놀란 이브는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스를 피해 벌떡 일어나 내달렸다. 그녀의 팔에 꽂혀 있던 튜브들이 뒤따라 길게 늘어나는가 싶더니 투둑 떨어져 나갔다.

‘많이 아플 텐데.’

연구원은 안쓰러운 표정을 내보였다. 반면 카인은 깊게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하!’ 하고 웃더니, 입가에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브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선홍색 루비처럼 강렬한 붉기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는 건지, 이쪽에 사람이 서면 바로 알아채더군요.”

연구원은 보충 설명을 덧붙이며 곁눈질로 창 너머의 이브를 흘끔거렸다. 시베리아의 하얀 설원을 연상시키는 피부색이었다. 뽀얀 눈밭에 핀 붉은 동백꽃처럼, 소녀는 동양적인 얼굴에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납게 치켜뜬 붉은 눈은 아름다운 단검처럼 곧고 예리했다.

검게 흐트러진 머리칼.

붉게 핀 눈동자.

카인의 입가엔 경련이 어렸다. 놀람과 감격이 어우러진 그의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진 듯 괴이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희열에 찬 눈웃음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황홀해 보였다.

“이 아이는 왓슨 연구소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 그건…….”

“타일러 소장.”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가 공기를 짓누르듯 소장의 이름을 불렀다. 그보다 나이가 갑절은 많아 보이는 소장은 주눅이 든 듯한 얼굴로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러면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 곤란하다는 눈빛이었다.

“러시아 대통령과는 제가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베리아 연구소는 일단 저 아이에 대한 모든 연구 및 실험을 중단합니다.”

“카인 씨,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회의실에서 회담이…….”

“아, 회담. 그렇지, 그런 게 열리고 있었죠.”

그는 소장을 향해 걱정 말라는 듯 생긋 웃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카메라 쪽을 응시했다.

회의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대표들은 모두 당황한 듯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누군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왓슨 그룹은 우리를 아주 눈뜬장님으로 만드는군요.”

대표들의 시선이 리 박사에게로 향했다. 이쪽은 명백한 허수아비였다. 무늬만 왓슨 그룹 대변인이지, 눈가리개 역할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하얗게 굳은 채 앉아 있는 리 박사를 경멸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며 쯧쯧거렸다.

“소문대로 영악하기 짝이 없군요, 엘 카인이라는 남자!”

프라이든 국장이 웃으며 외쳤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나머지 대표들은 쓴 미소를 주고받았다.

참 배알도 좋았다. 지금 가장 속이 쓰릴 사람은 벤 프라이든 국장 아닌가? 왓슨 제약회사가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고 나선 상황에서 CDC는 사실상 무용지물 상태였다. CDC 수장으로서 느끼는 압박과 패배감이 상당할 텐데, 어쩜 저리도 태연하게 웃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 안녕하십니까, 대표 여러분?

엘 카인의 정중한 목소리에 회의실 내 모든 시선이 그를 날카롭게 주목했다. 영상 속의 그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이사회에 소속된 국가 정상 여러분들은 다 모이신 것 같군요. 거기에 연맹보건기구, 세계 3대 제약회사 및 의료 서비스 기업들까지……. 아주 좋습니다. 그럼 짧게 말씀드리도록 하죠. 귀하신 분들을 모시고 시간을 끄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리 박사는 깍지 낀 손에 부르르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수치심과 모욕감을 억누르기가 힘들 것 같았다.

─ 여러분, 이건 사사로운 이익을 따질 사항이 아닙니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매년 누구로부터 신종 바이러스에 관련된 정보를 받고 계십니까? 매년 여러분들께 감염자들의 혈액 샘플과 생존자들의 바이오 데이터를 보내 주는 게 누굽니까? 전 세계에서 신종 바이러스에 대해 가장 많은 표본 집단과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 게 누굽니까?

그는 연설하듯 묻더니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자답했다.

─ 저희 왓슨 제약회사입니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회의실의 고요함이 결코 대표들의 수긍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주름진 미간, 굳게 다문 입술. 그들은 저항 대신 침묵으로 불편한 심기를 대신했다.

─ 이 아이는 왓슨 제약회사에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이의는 없으실 거라 믿습니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인류의 존망을 염려하고 계실 테니까요. 그럼에도 혹시나 반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 왓슨은 반대 국가나 기관에서 발생하는 감염자의 수용을 즉시 중단할 것이며, 앞으로 이어질 신종 바이러스 연구 결과에 대해 그 어떤 정보 공유도 없을 것을 미리 공지 드립니다.

엘 카인은 입술만 늘려서 웃었다. 그러더니 정색한 표정으로 빤히 카메라를 응시한 후 실험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표들은 바짝 약이 올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건 명백한 협박 아닙니까?”

프랑스 대통령은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국 수상은 뺨을 긁더니 기가 막힌 듯 허허 웃었다.

“언제 체스나 한판 같이 둬 보고 싶은 친구군요.”

“지금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옵니까?”

늘 그렇듯 옥신각신하는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수상의 모습에 다른 대표들은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한편 이브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서서 유리 벽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를 관찰하던 카인의 눈초리는 인위적으로 생긋 곡선을 그렸다.

“안녕?”

그의 속삭임이 들린 것인지 이브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그녀는 어린 아마조나처럼 전투적인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저 핏빛 눈동자는 진짜였다.

죽은 물고기처럼 멍한 감염자들과는 달리, 생기로 반짝이는 레드 베릴의 눈동자.

고귀하고 진귀한 보석이다.

“저, 카, 카인 씨? 회의실의 대표단분들이 전하길, 일단 논의를 나눠 보겠다고 하십니다. 잠시 이쪽에서 기다리심이…….”

“기다리다니요?”

“예?”

“지금 당장 이송할 생각인데 뭘 기다립니까?”

“지, 지금 당장 말입니까?”

“저들이 논의를 나눠 봤자 결론은 어차피 동일할 겁니다. 그러니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고작 늙은이들의 체면 차리기에 불과한 것인데요, 뭐.”

빙긋 웃으며 말하던 엘 카인은 소장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자, 금세 칼 같은 눈초리로 돌변해서 협박했다.

“지금 당장 그녀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소장.”

“아, 예에.”

소장은 바로 돌아서서 허둥지둥 걸었다. 그의 등은 이미 진땀으로 흥건히 젖은 상태였다.

염통이 시체물에 담기는 기분이 이런 걸지도. 저놈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가식적으로 보이는 눈웃음이 어찌나 섬뜩한지, 똥줄이 뽑히는 기분이었다.

엘 카인은 실험실 앞으로 바짝 붙더니 손으로 유리 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투명한 차단벽 너머에 서 있는 그녀를 어루만지듯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는 기대에 가득 찬 미소를 머금은 채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그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문을 여세요. 그녀와 직접 대화를 나눠 보고 싶군요.”

하얀 방의 문이 열리고, 잿빛 코트의 신사가 입장했다. 소녀는 생각보다 더 여려 보였다. 창백한 안색을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잔 듯 아주 예민한 눈초리였다. 엘 카인을 본 이브는 몸을 낮춘 채 뒤로 물러섰다. 송곳니를 내보인 채 적개심을 내뿜는 그녀의 행동은 작은 들고양이처럼 날 선 모습이었다.

“너무 가까이 가진 마십시오. 흥분하면 ESP 능력을 발휘합니다.”

“ESP? 정확히 어떤 능력을 쓰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 연구 중입니다.”

카인은 속으로 비웃었다. 연구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벌써 다 밝혀졌겠지. ESP 능력은 초자연적인 힘이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애초에 초능력이라 분류되지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아저씨한테 인사해 주지 않을래?”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이브는 적대적인 눈초리만 보였다. 그는 러시아어로 “안녕?” 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신경질적인 기색으로 입술을 실룩거릴 뿐이었다. 엘 카인은 연구원 쪽을 돌아보며 애석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말을 못하나?”

“기본적으로 영어, 러시아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것 같습니다. 대화는 이해하지만 언어적 반응을 보이진 않습니다.”

“아하.”

말만 알아듣는다면 입을 열게 하는 건 쉽지. 그는 쇠로 된 의자를 드르륵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 채 턱을 매만지며 싱긋 웃었다.

“네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감염되었다는 걸 아니? 아, 모친은 이미 죽었다고 했지.”

거침없이 말하던 그는 슬쩍 이브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눈 밑에 미세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친부는? 감염되어서 죽었나?”

“검사 결과 음성이랍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는 이브를 향해 친절한 어조로 “그렇지?” 하고 되물었다. 그의 자극에도 이브의 적개 어린 눈초리에는 변함이 없었다.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던 카인의 입가가 서서히 다물렸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브를 빤히 쳐다보더니 시답지 않은 연기는 집어치운 듯 짜증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있잖아, 자꾸 그렇게 못되게 굴면…… 아버지도 영원히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순식간에 돌변한 눈빛으로 서늘하게 속삭였다. 180도 달라진 그의 태도에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던 이브의 동공이 붉게 확장된 채 굳었다.

“그건 너무 슬프잖아, 그렇지 않니?”

그는 잿빛에 가까운 은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섬뜩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흡사 청혼이라도 하듯 내민 손이었다. 그녀의 얼굴 반을 가리고도 남을 커다란 손, 하지만 구렁이가 건네 준 선악과만큼이나 위험해 보이는 제안.

이브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주춤 물러섰다.

‘이 사람…… 무서워.’

본능이 속삭인다. 저 손은 실험실의 주삿바늘보다도 잔혹한 족쇄가 될 것이노라고.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 발 또 물러섰다. 내민 손을 할퀴어 버릴지언정 잡기는 싫다는 눈초리였다.

“또 못되게 굴려고 하네?”

카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이 사람,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웃는 눈초리나 입매, 이마와 턱선 모양 같은 게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다. 뉴스나 영화 같은 데에 나왔던 사람인가?

“아저씨는 이브를 구해 주려고 하는 거야. 혹시 이브는 아버지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이브는 멈칫 미간을 구겼다. 그는 발끝을 오므리는 그녀의 맨발을 보면서 쿡쿡 웃었다. 고민에 빠진 듯 이마에 힘을 준 소녀가 못내 귀엽다는 듯이.

“쓸데없는 고민을 하네. 어차피 결국엔 내 말대로 하게 될 텐데……. 그래, 뭐 아기 고양이는 원래 경계심이 많은 법이니까.”

그는 느긋한 자세로 몸을 기대며 생긋 웃었다.

같은 시각, 연구소 특별동으로부터 1㎞ 떨어진 지점에서는 에어쉽 하나가 불가시 모드32)로 착륙한 채 대기 중이었다. 새롭게 짓고 있는 연구원 숙소 건물들 사이에서 미세한 엔진 바람이 일었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보진 못했다. 지나가다가 본 이들은 그저 얕은 먼지바람이 스치는 것이라 여길 뿐이었다.

─ 도련님, 아가씨의 위치가 잡혔습니다.

“이브가 실험실에서 나왔다고?”

에어쉽 밖에서 잠깐 동태를 살피던 아담은 타이탄의 목소리에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근 5일, 아담은 하루에 몇 분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는 며칠 새 아주 대대적인 작업을 벌였다. 바로 알혼 섬에 있는 스마트 더스트 시스템을 시베리아 연구소 주변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다행히도 시베리아 연구소 내 옛 바딤의 연구실에는 그가 쓰던 서버가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일단 타이탄의 서버를 그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스마트 더스트의 통제 권역을 재설정했다. 새롭게 설정된 권역은 시베리아 연구소 전체와 그 주변 1㎞ 근방. 연구소의 보안 시스템을 해킹하고 들어가는 것쯤은 두 사람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작업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아버지, 타이탄이 한 보고 들으셨어요?”

─ 그래, 들었다. 어쩔 셈이냐?

아담은 고민에 빠진 눈으로 에어쉽 밖을 응시했다. 그때 타이탄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 아가씨의 모습 보내 드립니다.

연구소 밖으로 나온 이브의 모습이 스마트 더스트에 의해 실시간으로 잡혔다. 그녀는 연구소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는 무인차량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달걀 모양의 무인차량은 겉면 전체가 특수 강화유리로 이루어져 있어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무인차량은 연구소 내에서 다른 연구동이나 에어쉽 승강장으로 이동할 때 쓰이는 교통수단 중 하나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브는 차분한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과 검은 정장을 입은 수행원이 따라가는 게 보였다. 제일 신경 쓰이는 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나란히 걷고 있는 잿빛 코트 남자의 존재였다. 대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좀 더 확대해 봐, 타이탄. 둘의 대화는 들을 수 없는 거야?”

─ 조정하겠습니다.

잡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한층 선명해진 화질과 또렷해진 음성이 상황을 중개하기 시작했다.

이브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카인의 손을 말없이 응시했다. 머릿속으로 손목을 뚝 잘라 버리는 끔찍한 상상을 해 본다. 저 남자가 잡고 있는 손이 구더기로 썩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그렇게 싫어하지 마.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그가 또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서늘한 눈매는 섬뜩할 정도로 웃음기 없이 차가웠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이 사람은 거짓된 감정을 연출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알혼 섬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해 왔던 그녀였기에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표정 연기 따위는 그녀의 눈에 오히려 이상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다만 그는 의외로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하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딸이라도 있나? 그렇다고 보기엔 꽤 젊은 편 같은데.

“탑승하시죠.”

연구원은 무인차량 앞에 도착하자마자 손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젊은 남자 연구원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이브 쪽을 힐끔거렸다.

수면마취로 재운 것도 아니고, 손발을 묶은 것도 아니었다. 듣기로는 항체가 있긴 해도 감염자와 다름없다는데 초능력이라도 쓰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녀를 포획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러시아 특수부대 팀에서는 사망자도 발생했다고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혈액을 채혈하던 연구원 중 하나는─수면마취까지 해 놨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기현상으로 인해 고막이 파열되고 시력까지 손상됐다고.

“갈까?”

카인이 상냥하게 물었다. 겁에 질린 연구원은 뒤로 멀찍이 물러난 채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이브는 문득 돌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구소 내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수많은 시선들. 그들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이브는 묘한 평온감에 눈을 감았다.

‘이 냄새, 이 느낌, 마치 알혼 섬의 상공 같아.’

알혼 섬에 비치는 햇살은 그의 따뜻한 품속이었다. 싱그러운 바람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의 손길이었고, 절벽에 안기는 파도 소리는 밤마다 들려주는 그의 자장가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 주던 알혼 섬의 우산 ‘스마트 더스트’. 그건 그가 오롯이 그녀만을 위해 만든 마법의 장막이었다.

이브는 무인차량 창문에 가만히 한쪽 손을 대고 바짝 붙었다. 그녀는 유리 벽에 비친 허공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거울처럼 유리에 반사된 상공은 먼지 한 톨, 한 톨 검열해 보듯이 고스란히 그녀의 동공 속 망막에 맺혔다.

이브는 홱 돌아서더니 마른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포도 알처럼 커진 눈동자는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담이 근처에 오면 이브는 콧노래가 나와.

─그래?

─응,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아마 그건 내가 늘 이브가 좋아하는 걸 사 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오늘도 귀신같이 딸기 케이크 냄새를 맡고 알아챘잖아. 이브는 오빠보다 케이크가 더 좋은 거지?

─아니야! 이브는 아담도, 케이크도 모두 다 좋아.

─흐음, 이브는 언제쯤 오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게 될까? 나는 이브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이브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거 같은데. 이거 봐, 이브는 또 케이크 먹느라 내 말은 듣지도 않지…….

이브는 카인의 손을 뿌리치더니 머뭇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카인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비틀거리는 그녀는 경황이 없어 보였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는 바람에 쓸리듯 흔들렸다. 쓰러지는 갈대처럼 갈피를 못 잡던 몸은 이내 홱 돌아서더니 어딘가를 향해 달렸다. 놀란 카인은 맨발로 뛰어가는 이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주차된 무인차량의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긴 흑단 머리가 바람결에 휘날렸다. 순식간에 내달린 그녀는 연구동 사이의 텅 빈 공터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케이크 따위 없어도 알 수 있어.”

아담과 이브는 한 몸이잖아. 언제나 이어져 있는걸? 아담이 가까이 있을 땐 콧노래가 나와……. 왜냐면 이브가 행복하니까, 이건 아담의 온기니까.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술 위로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검은 심연에 먹힌 듯한 눈동자는 공허했다.

“그렇지, 아담?”

닿을 수 없는 희망은 가끔 잔인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지금 이 순간처럼.

“녀석들이 이브를 옮기려고 해. 지금 당장 빼내야겠어.”

─ 아담! 멈추거라!

바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 현재 이곳엔 세계연맹 이사회 소속인 각국 정상들이 모여 있어. 소란을 피우는 건 너무 위험해. 무모한 짓이야.

아담의 눈동자가 울컥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그는 눈시울이 빨개진 채 영상 속 이브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이브를 데려와야 해요.”

그녀의 눈동자가 빛 하나 없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태양의 흑점처럼 잠겨 있었다. 흡사 시체의 눈알처럼 죽어 가는 시선이다. 왜 이렇게 말랐어? 혈색도 안 좋고.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곳에서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거야?

“할 수 있어요. 제가 데려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 너만큼이나 나도 데려오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아버지!”

─ 안 된다고 했다.

바딤 역시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아담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먼저 달려 나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브 외에도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하필 오늘 옮길 줄이야!’

연구실에서 화면을 바라보던 바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며칠째 잠을 설친 그의 눈 밑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딤은 퀭한 시선으로 초조한 듯 화면을 응시했다.

“이브, 왜 그러니?”

어느새 다가온 카인이 허리를 굽힌 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이브는 잠에서 깨듯 눈꺼풀을 열었다.

“아저씨랑 가기 싫어진 거야?”

입술만 늘려서 웃는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웃을 줄 모르는 인형이 자꾸 사람 흉내를 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엄마가 보여 준 피에로 인형과 닮았다.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자동적으로 빨간 입꼬리를 올리며 익살스럽게 웃던 서커스 인형. 그 장난감은 지금도 징그럽고 오싹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자꾸 그렇게 못되게 굴면…… 아버지도 영원히 못 보게 될지 모른다?

장난치듯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초점을 잃었던 눈이 가까스로 정신 줄을 잡았다. 이브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괜찮아!”

그녀는 제자리에서 양팔을 흔들고 폴짝 뛰며 울부짖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엘 카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실성한 것 같진 않은데,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담도 멍한 눈으로 타이탄이 보여 주는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오면 안 돼! 무서운 피에로가 두 사람을 해칠 거야!’

엘 카인은 눈초리를 옆으로 길게 늘렸다. 그는 주변을 훑어보듯 돌아서며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브, 누가 왔니?”

그의 잿빛 코트를 보던 이브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두 눈에선 눈물이 울컥 차오르더니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참고 또 참았지만,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게 느껴지니 더 이상은 도저히 터져 나오는 설움을 삼킬 수가 없었다.

“마다Mada! 사랑해!”

이브는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아담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보고 싶어!”

눈물 콧물 빼면서 엉엉 오열하는 이브를 보면서, 엘 카인의 수행원은 딱하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친을 잃은 지가 얼마 안 되었다는군요. 마더Mother를 찾는 거 보니, 어린애는 어린애네요. 표정이 좀 섬뜩했었는데…….”

이브의 울음소리에 아담은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 사이로 숨죽인 채 이를 악물었다.

“이브한테 꼭 와야 해, 마다Mada!”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울부짖던 이브는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풀썩 넘어졌다. 땅을 짚고 일어서는 그녀의 눈은 눈물범벅이었다. 이브는 벌게진 얼굴로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버리지 마. 이브를 포기하지 마…….”

용감하고 씩씩하다지만 겨우 일곱 살 아이였다. 집에서는 한없이 어리광쟁이에 불과한 귀염둥이 막내딸.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대로 영원히 가족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매일 밤 불안에 떨던 참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집에 오고 싶을까?’

─ 도련님.

아담은 가까스로 흐느낌을 억누르고 있었다. 파랗게 튼 입술 새로 그의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브는 절대 사라를 마더Mother라고 부르지 않아.”

─ 예, 한국인이셨던 사모님께서 꼭 엄마라고 부르게 하셨죠, 한국말로요.

─사랑해, 마다Mada!

─사랑해! 보고 싶어…….

─ 도련님, 눈치채셨습니까? 마다Mada의 알파벳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래.”

─보고 싶어…… 마다Mada!

“아담Adam이 돼.”

그는 사리문 잇새로 힘겹게 대답했다. 비장한 눈초리에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눈뜨고 이브를 뺏기는 슬픔과 수모를,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와 후회를 골수까지 새겨 놓을 것이다.

발버둥 치며 소리 지르던 이브를 결국 보안 팀이 출동하여 결박했다. 흥분하면 ESP 능력이 방출될지도 모른다는 보고에 연구원들은 마취제까지 대동했다. 다행히도 카인은 그들이 쏘려던 마취주사를 가로채더니 바닥에 던져 버렸다.

주사기가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에 이브는 비로소 얌전해졌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확장되어 있었다. 뻣뻣한 동작으로 걷는 그녀의 입가에 핏물이 맺혔다. 여린 입술을 너무 세차게 깨문 탓이었다.

에어쉽 승강장 앞에는 왓슨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엘 카인을 보자마자 긴장한 듯 뻣뻣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환자 이송용 에어쉽이었다. 내부에는 수면용 캡슐과 의료 기구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이브는 그냥 편안하게 자면서 가면 돼. 걱정 마, 아저씨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주삿바늘을 본 이브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하얀 액체와 이어진 저 주삿바늘은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장시간 재우는 수면마취제다. 저걸 손등에 꽂는 순간, 의식이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 다시 깨날 수 없는 공포감마저 안겨 주곤 했다.

“싫어, 안 잘 거야!”

카인이 눈초리를 가늘게 좁혔다. 그의 표정을 본 이브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얌전히 있을게. 그러니까…… 주사 놓지 마.”

“그래? 착하네.”

주먹을 꽉 움켜쥔 이브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굵게 맺혔다. 치욕스러운 심정에 손이 덜덜 떨렸다. 아직 어리지만 자긍심과 자존심만큼은 누구보다도 높은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억지로 굴복했다. 그것은 소녀에게 있어 주삿바늘 자국보다도 더 큰 상처였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까?’

머릿속에 자포자기한 물음이 떠올랐다. 입술 끝이 오만 가지 감정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허탈함에 웃으려 해도 자꾸 울음이 번졌다. 광대처럼 우스운 표정의 소녀가 유리창에 비쳤다. 그녀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힘없이 에어쉽 밖을 보던 이브의 눈이 뭔가를 발견하고 멈췄다. 공허하게 비어 있던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유리 벽을 짚은 그녀는 숨죽인 채 미소 섞인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에 뜬 바람개비들이 오색 빛깔을 이루며 빙글빙글 날아오르고 있었다.

─ 반드시 구하러 갈게……. 그러니 이브도 포기하지 마.

“응.”

이브는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짐하듯, 약속하듯,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듯, 그녀는 재차 턱을 주억거리며 다부지게 대답했다.

“응!”

그녀의 영혼은 알혼 섬의 바람만큼이나 자유롭고 순수했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뛰어놀던 소녀에게 있어 하얀 벽의 실험실은 독배보다도 잔인한 처사였다. 그러나 사라의 피를 이어받은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지닌 아이였다.

“기다릴게.”

그녀는 유리 벽에 뺨을 댄 채 가만히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사실은 외롭고 무서웠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화가 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안간힘을 쓰며 울지 않고 버텨 온 이유는 저들에게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릎 꿇지 않아, 절대 지지 않아, 꿋꿋하게 버틸 거야.’

이브는 유리창에 남은 눈물자국을 손으로 지운 뒤 손등으로 눈을 슥슥 비볐다.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는 바람개비들이 보였다.

“포기하지 않을게.”

그러니 아담도…… 이브를 포기하지 마.

“타이탄.”

아담은 팔에 눈두덩을 묻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네, 도련님.

“아버지는?”

─ 이쪽으로 이동하고 계십니다.

“이브를 데려간 녀석, 누구야?”

─ 아가씨를 수송해 간 에어쉽은 왓슨 제약회사 소속의 기체입니다.

“왓슨 제약회사…….”

또 거긴가? 왓슨 그룹, 왓슨 제약회사.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지? 이브를 데려간 잿빛 코트의 남자. 어딘지 낯익은 실루엣이었다. 그 녀석이 핵심 인물인 걸까? 세계연맹 이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배짱 좋게 이브를 쏙 빼 간 녀석이다. 몸집만 크지 속은 어린애인 알렉스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일 거다. 아마도 현 왓슨 그룹의 실세는 저 녀석일 테지.

─ 우리끼리는 안 됩니다. 조력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너무나 거대해요.

“조력?”

아담이 붉게 충혈된 눈을 들며 물었다.

─ 네, 도련님. 인간들이 조직을 이루는 이유는 혼자선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바딤이 에어쉽 문을 열고 등장했다. 아담은 허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딤도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눈두덩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잠깐 나와 보거라.”

그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바딤의 옆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를 알아본 아담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적대적인 눈초리를 지었다.

─ 조력자의 등장이군요.

타이탄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핏’ 하고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구나, 아담 페트로비치 군.”

연구원으로 가장하고 잠입했던 바딤은 에어쉽으로 돌아오는 길에 브릿지에서 리 박사와 마주쳤다. 마주친 상대가 그였던 건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다른 대표들과 함께 있던 리는 한눈에 바딤을 알아보았다. 바딤은 가슴을 졸이며 모자를 눌러쓴 채 숨을 죽였다. 서로를 스치는 순간, 리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무슨 생각인지 그는 경비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바딤의 뒤를 따라왔다. 뒤를 힐끔 돌아본 바딤은 뱀처럼 따라붙는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짧은 순간, 두 남자가 교환한 눈빛에선 말없는 교섭이 이루어졌다.

“왓슨 그룹은 남태평양에 인공 섬을 하나 짓고 있어. 그곳으로 본사를 옮길 계획인 것 같더군. 왓슨 회장은 본사 이전과 함께 은퇴를 선언할 생각이야. 즉 새롭게 이전되는 본사의 리더가 차기 왓슨 그룹의 주인이 될 거란 소리지.”

아담과 바딤은 각자 서늘한 눈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둘 다 살기에 젖은 눈초리였다.

“바딤, 일전에 내가 부탁한 거 기억나? 왓슨 그룹의 새 본사 시스템을 설계해 달라고 했잖아.”

“그래.”

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모든 걸 빼앗긴 아버지와 아들은 오직 복수의 칼날만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은 절박했다. 이브를 위해서라면 무슨 이야기든 들을 기세였다.

“왓슨 그룹의 새 수뇌부는 혁신이 중점이야. 제일 중요한 건 보안인데, 그 어떤 곳보다도 강력한 보안 시스템이 필요해. 그리고 그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으면 좋겠어.”

“단 한 사람? 시스템 관리자를 뜻하는 거야?”

“가능하겠어? 내가 왓슨 그룹 본사의 유일한 관리자가 될 수 있도록 말이야.”

“만들어 주면 너는 뭘 약속할 수 있는데?”

바딤이 무표정한 눈으로 되물었다. 리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딸을 돌려주지. 너희 세 식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전한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할게.”

“이브를 먼저 빼내 줘. 그럼 시스템이든 스마트 더스트든 뭐든 만들어 줄 테니.”

리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바딤, 상황이 복잡해졌어. 네 딸이 항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왜 숨긴 거야? 그녀는 이제 모든 인류의 희망이야. 치료제 개발을 위해서는 이브가 꼭 필요해.”

“그럼 적어도 이브와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줘.”

“신종 바이러스 대책 본부에는 감염자 가족은 물론 생존자 가족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 몰라? 면회는 일절 금지야.”

“이브는 감염자가 아니야!”

“감염자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생존자지.”

바딤은 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만들어 달라는 본사 시스템은 인공 섬 전체의 두뇌가 될 슈퍼컴퓨터야.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무엇보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너 같으면 너처럼 야비한 녀석을 두 번 믿을 수 있겠어?”

“바딤.”

리는 한숨을 내쉬며 바딤의 어깨를 쥐었다. 마치 오래전 술잔을 부딪치며 웃음을 터뜨리던 그 시절처럼. 그러나 그의 손을 내려다보는 바딤의 눈초리에는 경멸이 묻어나 있었다.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너와 내가 같은 적을 두고 있다는 거. 적의 적은 내 친구라고들 하잖아? 뭐하러 각자 노를 따로 저으려고 해? 우린 같은 배를 타고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어. 함께 힘을 합친다면 말이야.”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담은 문 열린 에어쉽 의자에 걸터앉은 채 입을 열었다.

“타이탄, 기록했어?”

─ 예, 모든 대화 내용과 영상 자료를 녹화했습니다.

리는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였다. 타이탄이라면 페트로비치가의 홈 AI이자 바딤의 비서인 인공지능 말인가?

“가상 서버에 백업시켜서 옮겨 놔.”

─ 네, 도련님.

아담은 턱을 괴더니 리를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아시겠지만 난 아버지와 달라요.”

확실히 제 아비보다 꼼꼼하고 철저한 녀석이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놈 같으니. 어린 녀석의 눈빛이 매번 느끼지만 꼭, 소년의 탈을 쓴 요물처럼 섬뜩하고 시리다. 그런데도 묘하게 눈을 뗄 수 없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인류의 존망이나 사회적 관습, 윤리니 홍익인간의 이념이니 과학 발전의 기여…… 그런 것들엔 전혀 관심 없어요.”

아담의 눈동자는 공허하다 못해 텅 비어 보였다. 블랙홀처럼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가물가물하게 감았다 뜬 눈이 비뚜름하게 리를 응시했다.

“그쪽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알았어요. 협조해 드리죠. 그러니 그쪽도 우리와 한 약속 지켜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이 이상 바딤에게 빚지기는 싫으니까.”

리는 바딤의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그러나 한파처럼 찬 바딤의 눈초리는 여전히 서늘한 선을 긋고 있었다.

아담은 비스듬히 내리뜬 눈을 가늘게 흐렸다.

“만약 배신하면.”

그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깔린 달빛처럼 은은하게 속삭였다.

“아저씨가 탄 배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하게 될 거예요. 아주 깊고 어두운 강물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말이죠.”

* * *

2082년 1월 15일.

왓슨 그룹의 정기 총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전 세계 언론사들은 왓슨 본사 건물 앞에 모여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오늘 이사회 안건이 ‘본사 이전’이라는 주제이기 때문이었다.

말발굽 모양의 테이블에는 약 스물다섯 명 남짓의 중역들이 앉았다. 그 가운데 좌석의 주인인 왓슨 회장의 자리는 어김없이 빈 상태였고, 그의 대리로 참석한 엘 카인이 옆 좌석을 지키고 있었다.

“본사 이전 날짜가 앞당겨진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왓슨 연구소가 먼저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또 뭡니까? 치료제 개발을 거기서 한다는 겁니까?”

“본사 이전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적어도 내후년 이후입니다. 그전에 왓슨 연구소의 신약 개발팀과 신종 바이러스 클리닉 센터부터 이동시킬 계획입니다.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라고 일단 말씀드리도록 하죠.”

현재 왓슨 제약회사가 항체를 가진 여자아이를 확보했다는 것은 이미 전 세계 내로라하는 기업 수장들이라면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신약 개발 1차 임상 시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새로 이전하는 본사의 보안 시스템은 안전한 겁니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여기 계신 리 박사님께서 설명을 해 주실 겁니다.”

엘 카인은 자연스럽게 활촉의 방향을 리에게로 보냈다. 왼편 중간 자리에 앉아 있던 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중역진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회의실 테이블 중앙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왓슨 그룹의 미래이자 인류의 희망이 될 낙원, ‘로스트 헤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로스트 헤븐?”

로스트 헤븐

The lost heaven

“왓슨 그룹의 본사가 들어갈 인공 섬의 이름입니다. 일찍이 인류가 잃어버린 지상의 낙원을 다시 구축하겠노라는 의지를 담았죠. 왓슨이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되겠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홀로그램 속에는 인공 섬 로스트 헤븐의 위성사진이 3D 입체 형상으로 떠올랐다. 거대한 섬의 설계도면은 회의실 전체를 아우르며 천천히 360도 회전하기 시작했다. 중역들은 처음 공개되는 인공 섬 로스트 헤븐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왓슨 그룹의 본사는 이곳 에덴 타워에 들어서게 됩니다. 에덴 타워는 로스트 헤븐의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섬 전체의 관제탑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죠. 에덴 타워 상층부에는 입실론들이 거주할 특별 도시가 세워질 겁니다.”

리 박사가 손으로 홀로그램을 터치하자, 로스트 헤븐 동쪽 화면이 확대됐다. 거대한 에덴 타워의 꼭대기에는 토성의 띠처럼 둥근 고리의 형상을 한 공중 부유 구조물이 둘러져 있었다. 거기가 바로 입실론 거주 지역이었다.

“로스트 헤븐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신종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장소가 될 것이고, 오직 선택받은 이들만이 입주할 수 있는 생크추어리33)로 남게 될 겁니다.”

한편 회의실 밖에는 상아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지루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여성 세 명이 뒤따라 다녔다.

“무슨 회의가 이렇게 길어?”

“그만큼 중대한 사항이겠지요.”

왓슨 본사─왓슨 제약회사─의 내부 구조는 단순했다. 고층 건물 중심은 정사각형 모형으로 1층부터 39층까지 뻥 뚫려 있었고, 다섯 개의 유리관들이 박혀 있었다. 긴 육면체의 유리관 안에선 초고속 엘리베이터들이 쉼 없이 움직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본사 건물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왼쪽으로 보이는 아찔한 광경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난간 너머로 휑하게 뚫린 공중은 꼭대기에 달린 크리스털 장식 등으로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추락 사고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재작년에 32층에서 연구원 한 명이 난간 너머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구조됐다. 특별히 운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층층마다 설치된 구조용 동작 센서 덕분이었다. 사람 혹은 사물의 낙하가 감지되면 그 즉시 3층마다 설치된 안전그물이 거미줄처럼 튀어나온다.

“제인 아가씨, 그렇게 몸을 빼시면 위험합니다.”

뒤쪽에 서 있던 경호 팀장이 조심스럽게 나무라자,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던 제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녀는 지루하다는 눈빛으로 대리석 난간에 턱을 괴었다. 약 80미터 아래인 1층엔 개미처럼 오가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심한 일벌레들. 평생 이곳까지 올라올 일은 없을 하층, 아니, 하충蟲들.

제인은 곁눈질로 옆에 서 있던 경호원, 진을 쳐다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한번 뛰어내려 볼래?”

“예?”

진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캐나다 출신인 그녀는 6피트가 넘는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웬만한 성인 남성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우수한 인력이었다.

“왜? 무서워? 괜찮아, 떨어져도 안 죽어. 실험 삼아 고양이도 한번 던져 봤는데 무사했거든. 동작 센서가 너무 예민해서 날벌레에도 반응하는 수준이래.”

“아, 아가씨…….”

당황한 진은 뒤에 서 있는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막무가내인 그녀를 말려 달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팀장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만 내보일 뿐이었다.

“내 말 안 들려? 왜 쟤 눈치를 봐? 뛰라니까? 이런 거에도 쫄면서 어떻게 내 경호를 하겠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너 아직 신고식도 안 치렀지? 이걸 네 신고식으로 치면 어때?”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요. 다른 걸로 대체하면 안 되겠습니까?”

“고소공포증? 그럼 평소에 에어쉽은 어떻게 타고 다녀? 땅에 붙어 있는 시간보다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날엔 어떡할 건데?”

제인은 말없이 굳어 있는 경호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별안간 험악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뛰라고!”

진은 엉겁결에 한쪽 다리를 난간 위에 걸쳤다. 담담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식은땀이 성글성글 맺히기 시작했다.

“안 뛰면 해고인 줄 알아. 이쪽 업계, 말 한번 잘못 돌면 밥줄 끊기는 거 알지?”

제인의 싸늘한 목소리가 가시처럼 와서 박히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요란한 센서 알람이 울려 퍼졌다. 층층에 설치된 붉은 경고등이 번쩍번쩍 사이렌처럼 돌아가고 안전그물이 에어백처럼 펑펑 터져 나왔다.

난간 너머를 흘끗 내려다보던 제인은 실룩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약 5m 아래, 그물에 걸린 진이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생명줄인 양 그물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아래를 쳐다보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공포심에 손아귀 힘마저 빠진 그녀의 엉덩이가 그물 중앙으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허둥지둥 줄을 잡던 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제인과 눈이 마주치자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겁에 질린 눈으로 힘껏 웃어 보이는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재미없어.”

제인은 주근깨가 잔뜩 박힌 뺨을 실룩이며 팽 돌아섰다. 지루해, 이 시간이 너무 따분해. 도대체 회의는 언제 끝나는 거지? 그깟 회의가 뭐라고 날 이렇게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

어느새 23층과 24층 난간 주변엔 본사 직원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경비원들에 의해 구출되는 진을 보며 제인이 서 있던 25층 난간을 힐끔거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하얀색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사락사락 쓸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경호원들 괴롭히는 솜씨는 여전하구나.”

상아색 피부에 자그마한 체구, 갸름하지도 동그랗지도 않은 얼굴, 먹색 붓으로 칠한 듯한 머리칼에 야리야리한 눈매, 일본 여자들 특유의 간드러지는 목소리 대신 허스키한 음성으로 단어를 적시듯 말하는 여자.

열다섯의 제인은 불쾌한 눈초리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안녕, 제인. 카인을 만나러 왔니?”

그리스 여신을 떠올리게끔 하는 이브닝드레스가 여자의 목을 고혹적으로 감쌌다.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어른 여자의 옷.

“밧세바.”

이름도 짜증 나.

“……였나?”

“본명은 아니지만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일전에 말한 적 있지.”

여자는 작은 입술을 오므리며 기묘하게 웃었다. 동양 여자 특유의 긴 눈매가 더 가늘게 휘었다.

“카인이 지어 준 이름 같은 거니까.”

“기르는 짐승에게도 이름은 붙여 주는 법이야. 하다못해 밧세바는 이름이 아니라 프로젝트 명이라며? 개목걸이가 그렇게 좋다니 할 말이 없네. 카인에게 있어 넌 실험체에 지나지 않는데.”

제인은 경멸조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밧세바는 가볍게 웃었다. 가녀린 체구에 맞지 않게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실험체와 사랑을 나누는 남자라니, 섹시하지 않니?”

제인은 귀까지 빨개진 채 밧세바를 노려보았다. 밧세바는 되레 그런 제인이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연상답게 여유가 넘치는 눈빛이었다.

그래, 저는 카인과 몸을 섞었다 이거지? 잠자리를 한 연인이라 이거지?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도 앞지를 수 없었다. 자신을 여자로 봐 주지 않는 카인에게 키스를 해 달라고 졸라도 늘 돌아오는 건 뺨에 닿는 입맞춤뿐. 난 언제쯤에야 그에게 여자가 될 수 있는 거지? 언제쯤에야…….

제인은 경호 팀장 쪽을 돌아보더니 애꿎은 화풀이를 하듯 고함쳤다.

“실험체 따위가 이렇게 멋대로 본사 안을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병균이라도 퍼지면 어쩌려고!”

“어머, 그러는 왓슨 양이야말로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녀도 괜찮겠어?”

밧세바는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숙였다. 확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 제인은 깜짝 놀라 주춤 물러섰다. 코앞에서 밧세바의 숨결이 느껴지자 제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급히 숨을 멈췄다.

“그러다가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네 말대로 ‘실험체’가 이렇게 눈앞에 서 있는데 말이야.”

밧세바는 생긋 웃더니 얼어붙어 있는 제인의 입술에 가볍게 쪽 입을 맞췄다. 제인의 갈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부들부들 커졌다.

“타액으로도 감염 가능하다지? 신종 바이러스 말이야.”

“너…….”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선 채 얼어붙었다.

“죽여 버릴 거야!”

밧세바는 후후 웃었다.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에 반달로 휜 눈매가 조롱하듯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두고 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아아악! 짜증 나!”

제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래층에 있던 직원들이 놀라서 천장을 올려다볼 정도였다. 한달음에 화장실로 간 제인은 흐르는 물에 입술을 씻으며 웩웩 구역질을 했다.

“주치의! 주치의 불러!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전화 넣어! 저 일본 계집애 당장 없애 버리라고!”

제인의 빽빽거림은 끊일 줄 몰랐다. 그녀는 분해 죽겠는지 흐느끼기도 했다. 돌아선 밧세바는 통쾌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보 같기는.”

그런 그녀의 입가엔 서서히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무엇이 그리 샘이 난다고. 사실 질투를 하고 있는 건 그녀 쪽이었다. 왓슨 회장이 엘 카인을 후계자로 키우는 게 기정사실화되면서, 손녀딸인 제인의 신랑감으로 그를 점찍은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제인 왓슨이 엘 카인을 흠모하는 것이야 이미 유명했고…….’

그녀는 난간 위를 올려다보며 처연해진 눈을 깜빡였다. 왓슨 본사의 꼭대기 층. 왓슨 그룹의 회장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는 엘 카인이 회장 대리로 들락거리며 공공연하게 그의 업무실로 쓰고 있지만, 어쨌든 왓슨 내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발길을 끊은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넘은 상태. 설상가상으로 그는 최근 그녀에게 유배를 선포했다. 다른 입실론들과 함께 내달 로스트 헤븐으로 이주할 준비를 하라는 것.

비공식적 최초의 바이러스 감염자, 밧세바.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감염되었는지는 아직도 세간의 미스터리였다. 현재 그녀 나이는 스물넷. 만약 카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창 촉망받는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쌓고 있었으리라.

‘세상 전부가 몰라도 엘 카인, 당신과 나는 알지. 내가 어떻게 감염되었는지를.’

신종 바이러스에 걸려도 살아남는 여자들이 있다. 왓슨 연구소는 그녀들을 입실론이라 부른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여자들은 왓슨 제약회사로 왔다. 신종 바이러스 연구와 치료제 개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혹시 모를 재발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왓슨이 건네는 보수를 차마 거절하지 못해서.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 신종 바이러스에 있어 생존자는 없다는 것을. 살아남은 그녀들 몸엔 항체가 없다. 바이러스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몸을 도사리고 있는 것뿐이다. 숙주인 그녀들을 공격하지 않고 공생하는 상태라는 게 맞는 말이었다.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갑절이 넘는 에너지를 쓰게 된다. 전신에 도는 기이한 활력, 혈색은 없는데 맑아지는 피부 톤, 종종 특이한 초능력을 발휘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의 시계는 남들보다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 39층, 회장실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밧세바는 고민하는 눈초리로 발걸음을 망설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두려운 기색으로 굳게 닫힌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그녀를 보더니 조금 커진 눈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는 얕게 헛기침을 한 뒤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회장님께선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당신은?”

“우리야 세르게이라고 합니다.”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였다. 남미 출신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억양을 보아하니 북미 출신 같기도 하고. 갸웃거리던 그녀는 ‘아!’ 하며 뭔가를 기억해 냈다.

“새로 왔다던 경호 실장?”

“예.”

아마도 군인 출신일 것이다. 그는 아주 잘 훈련된 도베르만처럼 충성스럽게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카인 씨를 보러 왔어요. 들어가도 되죠?”

“아, 그건 죄송하지만…….”

우리야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말을 줄였다. 험상궂어 보이는 얼굴에 잠시 난색이 스쳤다.

“오늘 이사님 일정에 밧세바 님과의 약속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아는 걸 보니…….”

그녀의 입김이 우리야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일어섰다. 밧세바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이렇게 내 앞을 막는 게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도 잘 알고 있겠군요.”

그때 옆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진회색 정장을 입은 남성이 반듯한 걸음으로 내렸다. 짧게 자른 애쉬드 블론드 헤어가 주홍빛 실내조명에 빛났다. 엘 카인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선 갸웃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어쩐 일이야, 밧세바?”

그녀는 긴 드레스 자락을 쥐어뜯듯 잡았다. 입술이 버석했다.

“오랜만이에요, 카인.”

“오랜만?”

그는 무심한 얼굴로 아래쪽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기억을 더듬는 중인지, 아니면 귀찮다는 어조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늘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잠시 들어가도 되죠? 올라온 걸 보니 회의는 끝난 것 같네요.”

밧세바는 혹시 거절당할까 봐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충성스러운 도베르만의 곁눈질이 느껴졌다. 그는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파인 등과 자그마한 엉덩이를 홀린 듯 쳐다보더니 갈증 나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스르륵 닫히는 문틈 사이로 밧세바의 드레스 자락이 ‘사락’ 빨려 들어가며 모습을 감췄다. 곡선을 그리며 사라지던 실크 드레스는 가녀린 몸매의 잔영이 되어 아른거렸다. 감칠맛을 남긴 그녀의 향기에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난 완전히 버려진 건가요?”

엘 카인은 밧세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고인 웅덩이처럼 수울했다. 연한 하늘빛 눈동자는 모순되게도 늘 그렇게 어둠에 잠겨 있다. 그곳에 발을 담그는 자는 누구든 다시 빛을 거머쥘 수 없다. 그의 시선에 갇힌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였기에.

“한 해를 꼬박, 껍질을 벗기듯 자문하고 나서야 깨달았어. 당신이 원했던 게 무엇인지. 당신 곁에는 늘 여자가 많았죠. 나 말고도 당신과 잠자리를 가진 여성은 수도 없었으니까. 당신은 로테이션을 돌듯 돌아가면서 우리들과 사랑을 나눴어. 나도 그중에 하나였고…….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오래간 편이긴 했지만, 그건 내가 살아남았기 때문이야. 그렇죠?”

“…….”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당신은 미련 없이 날 잊었죠. 내가 너무 늙어 버린 거야.”

“넌 이제 고작 스물넷이야. 뭐가 늙었다는 거야?”

그가 웃음 밴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의 나이는 상관없어요! 입실론들에게 있어 시간은 달음박질을 하듯 흘러가 버리니까. 누가 지금의 날 스물넷으로 보겠어요? 서른넷이면 몰라도.”

밧세바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흐르는 누액이 담담했던 마음까지 비참하게 허문다. 그녀는 앙상한 뼈마디가 보이는 손으로 뺨을 훔쳤다.

“마지막으로 안아 줘요.”

카인은 조각처럼 반듯한 이마 위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군말 없이 로스트 헤븐으로 갈게요. 당신 말대로 최초의 입실론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살 테니까…… 비밀은 지킬게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역시 넌 영리해.”

말실수라도 한 걸까? 눈앞에 보이는 그의 섬뜩한 미소가 등골을 송연하게 적셨다. 카인이 저렇게 웃을 때면 늘 처벌이 뒤따랐다. 걱정과 달리 그는 다가와 그녀를 포근히 안아 주었다. 그리고 달래듯 속삭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못 이해한 것 같아. 넌 살아남은 게 아니야. 내가 살려 준 거지.”

“…….”

“넌 다른 여자들처럼 미련하게 사랑 타령 따윈 하지 않았어. 영특하게 눈치를 잘 살펴 왔지. 그런 너에게 오히려 난 감정과 가까운 것을 느꼈어. 감정이란, 내가 저지른 행위가 남긴 찌꺼기 같은 거잖아. 떼어 내려 해도 붙어 있는, 감각적인 기억의 편린 같은 것. 그걸 사람들은 뭐라고 하더라…… 음, 뭐 어쨌든 그래서 난 널 살려 두었어. 이해가 돼?”

그녀는 악다문 잇새로 숨을 붙잡았다. 행여 울음을 터뜨릴까 봐 앞니로 아랫입술을 눌렀다. 속이 문드러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그들이 나눴던 사랑을 ‘찌꺼기’라고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안아 달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 나는 여전히 널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밧세바는 가느다란 팔로 카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만히 눈을 감은 그녀의 속눈썹에 결국 눈물방울이 맺혔다.

“사랑해, 엘.”

혼효 속에 가느다란 숨을 섞어 속삭였다. 잠시 멈췄던 손길이 그녀의 호흡을 움켜쥐었다. 반항하듯 내뱉은 고백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옥죄어 온다. 목을 조르는 힘이 가해질수록 열락이 바짝 근육을 조였다.

그녀는 이미 어둠을 삼켰다. 그것은 그녀의 눈알을 파먹고, 내장을 녹이고, 사지를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헐떡이는 순간순간, 활개를 저으며 몸을 들썩이고 비틀어 본다. 썩어 문드러진 몸뚱이여도 있는 힘껏 파닥거려 본다.

이대로 피를 쏟은 채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더 이상 당신의 찌꺼기로 살아가고 싶진 않으니까.

혓바닥만 남은 채 암흑 속의 그를 핥았다.

“사랑한다고요.”

차라리 나를 그녀들처럼 죽여 줘.

죽여 줘, 죽여 달라고!

나를 죽여 줘, 엘 카인…….

눈을 뜨자, 어둠은 사라지고 없었다.

밧세바는 몸을 일으킨 채 한참 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물가물한 눈을 몇 차례 깜빡이고 나서야 허벅지를 더듬더듬 어루만졌다.

찌꺼기가 남았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를 대충 휘감고 걸어 나왔다.

“카인 씨는요?”

“먼저 나가셨습니다. 밧세바 님은 제가 연구소까지 모셔…….”

“제인 왓슨에게 갔나요?”

우리야는 잠시 빗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군요.”

엘 카인은 고아였다. 그의 후견인이 되어 준 것은 램지 왓슨 회장. 정확히 말하면 램지의 손녀딸인 제인이다. 소문에 불과하지만, 제인 왓슨은 엘 카인의 은인과 다름없다고 한다. 왓슨 그룹 소유의 섬에서 표류한 채 쓰러져 있던 그를 그녀가 발견하고 구해 줬다는 것이다. 이후 그녀는 조부인 램지에게 졸라 그를 왓슨가로 데려왔다.

엘 카인은 철저하게 손익에 의해 움직이는 남자였다. 그가 이유도 없이 어린애에 불과한 제인을 상대할 리는 없었다.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왓슨 그룹 전체를 삼키려는 심산이 분명하다.

제인 헬렌 왓슨.

불쌍하지는 않다. 그녀 역시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여긴 적은 없으니,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이게 어리석은 선택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에어쉽 승강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39층, 엘리베이터 문에 박힌 사파이어가 빛나고 문이 열렸다. 누군가 내렸다. 그를 본 밧세바의 눈이 커졌다.

“박사님?”

그녀를 발견한 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녀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대리석 바닥으로 이어진 회장실 입구가 보였다. 리는 언짢은 눈초리로 대뜸 물었다.

“카인 대표와 있었어?”

“네.”

그녀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입을 떼던 리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늘 그래 왔듯 말싸움으로 이어져 체력만 소진할 뿐이었다.

“곧 1차 임상 시험을 할 거야. 치료제가 완성되면 제일 먼저 너한테 투여할 거니까…….”

“필요 없어요.”

“왜?”

그는 밧세바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피로로 노랗게 뜬 눈에 짜증이 어려 있었다.

“대체 왜? 설마 아직도 엘 카인을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녀는 리 박사의 부릅뜬 눈동자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왜 어쩔 수 없는데?”

“이제 와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라고요?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요?”

밧세바는 괴로운 눈빛으로 뺨을 실룩이며 웃었다.

“난 선택받았어요. 바이러스로부터 선택받은 거죠. 그들은 잠재력 있는 여자들만 살려 줘요. ESP라는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자들만요. 그래서 우리의 죽음도 연기해 준 거죠. 쓸모가 있으니까.”

“엘 카인이 그래? 넌 선택받은 거라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박사님 마음은 늘 감사하지만, 저는 안 돼요. 아시겠어요?”

“너야말로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알죠.”

그녀는 힐끔 고개를 들었다. 리 박사의 안타까운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처절할 정도로 그녀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박사님 자신을 위해서잖아요. 알아요, 박사님께서 절 좋아하신다는 거. 제가 박사님 밑에서 인턴을 할 때부터 한결같은 마음이셨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를 위해서’라고는 하지 마세요. 박사님은 절 만나기 이전부터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셨죠. 그 소녀, 항체를 가졌다는 아이 말이에요. 박사님도 접촉을 시도하셨다면서요?”

“이브?”

“그래요. 그때 박사님은 누구를 생각하고 계셨어요? 정말 저를 위해서 그 아이를 만나고자 하셨어요? 엘 카인보다 그 아이를 먼저 손에 넣어서 이사회와 회장님으로부터 점수를 딸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건 아니고요?”

밧세바는 아무 말 못하고 서 있는 리 박사를 보며, 쓰린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말없이 한쪽에 서 있던 우리야가 그녀를 따라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리 박사가 황급히 엘리베이터 문을 움켜잡은 채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는 내가 정말 오로지 야망만을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니? 네가 왓슨으로부터, 엘 카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나는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저를 선택하시겠다고요?”

“그래!”

“정말 그러실 수 있으세요? 부와 권력, 명예 그 모든 걸 잃는다 해도요?”

리의 눈빛이 멈칫거리자 밧세바는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띠었다.

“제가 아는 박사님이라면 절대로 못해요.”

그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끝까지 저를 조롱하고 못 믿는 그녀에 대한 원망인 걸까? 아니면 끝끝내 그녀에게 확신을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책망일까? 그의 검은 동공에 맺힌 혼란이 맥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닮았다. 날갯짓을 퍼덕이며 날아오르려 버둥거리는 꼬락서니가 꼭 쌍둥이처럼 유사하다. 그래서 당신이 싫다.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너무 비슷하잖아.

밧세바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이는 리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현실성 없는 가정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박사님께서 정말 오롯이 절 위한 선택을 하신다면…….”

그가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홱 돌아섰다. 밧세바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닫았다. 그의 충혈된 눈가에 언뜻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때는 박사님 곁에 머물게요.”

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괴로운 듯 눈초리를 흐렸다. 연민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순 그런 말을 내뱉고 만 것은. 아니, 죄책감일지도.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이건 엘 카인에 대한 분노다. 당사자는 알아주지도 않을 치졸한 복수 같은 것.

문이 닫히자 유리관 속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옥상 승강장에 도달했다. 도베르만을 닮은 남자가 흘끔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밧세바는 인상을 쓰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우리야는 황급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긴장한 듯 양 허벅지에 주먹을 딱 붙인 자세로 서 있었다.

“가죠.”

그녀가 앞서 걸었다. 하얀 에어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어쉽에 올라타던 밧세바는 멈칫하더니 우리야에게 물었다.

“당신도 로스트 헤븐에 갈 예정인가요?”

“그렇습니다.”

“군인이었죠?”

“예.”

“뭔가 잘못을 저질렀나 보네요. 멀쩡한 군대를 놔두고 사기업 경호실에 온 걸 보니.”

“…….”

“로스트 헤븐에 가서는 뭘 할 생각이에요? 그곳에서도 경호 실장인가요?”

“군대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군대?”

“섬을 지킬 용병대죠.”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묵직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멀쩡한 군대는 좀 지루하더군요.”

“낙원에 군대라……. 재밌는 조합이네요.”

그녀는 섬호처럼 가느다란 눈초리로 이죽거리며 그를 흘겼다.

“예, 저도 기대됩니다.”

그녀가 비꼰 걸 이해하지 못한 건지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밧세바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한 남자, 메스껍다.

“연구소에는 혼자 가도록 하죠.”

사납게 쏘아붙인 그녀는 에어쉽 문을 드르륵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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