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노을 진 하늘이 점차 검기울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구슬픈 비였다. 나발루니예 언덕 위 저택에는 빗소리와 함께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이따금 번갯불 같은 게 스쳤고, 하늘 저편에서 구릉거리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로 반짝이며 비행한 에어쉽은 불 꺼진 저택 내부로 반딧불처럼 날아들었다.
비는 장례식이 치러지는 내내 쏟아졌다.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 사이로 빛 하나 비추지 않는 하늘은, 슬픔에 잠긴 페트로비치가의 심경을 비추는 듯 야속했다.
조문객은 조촐했다. 사라는 알혼 섬에 온 뒤로 사교 활동이라고는 전무했기에, 대부분이 바딤의 직장 동료들이었다. 시베리아 연구소 출신의 박사들이 줄을 이었고, 사라가 보안 팀 시절 함께 일했던 옛 동료들도 급히 달려왔다.
사라의 시신이 담긴 관은 저택 내부 아치형 창 앞에 놓인 촛대들 사이에 안치되었다. 하얀 대리석 관 안에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잠든 듯 평온해 보였다. 그 옆에서 바딤은 수척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는 듯 텅 빈 눈동자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착잡하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조문객들은 저택 밖에서 검은 우산을 펼친 채 삼삼오오 모여 수심에 잠긴 얼굴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눴다. 젊은 페트로비치 부인의 죽음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오랜 기간 병색이 짙었던 그녀를 페트로비치 박사는 왜 저택에 방치해 두었는가? 이들 부부와 친분이 있던 반즈 박사만이 종종 그녀의 상태를 검진했다고 했다. 의문스러운 건 그녀가 의사가 아닌 유전공학 박사라는 점이었다.
“바딤.”
리 박사는 사라가 죽은 이튿날 모습을 나타냈다. 바딤은 핼쑥한 얼굴에 수척해진 몰골로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도 마른 채 퀭해진 눈 밑에는 움푹 팬 그늘이 짙게 자리하고 있었다. 리는 말없이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충혈된 바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툭 맺혔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사과했다.
“늦게 와서 미안해.”
바딤은 울음을 참듯 입술을 깨물더니 손으로 눈가를 가리곤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잘게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어깨를 보면서 리는 안쓰럽다는 듯 미간에 힘을 주었다.
“리, 사라가…… 사라가……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할지…….”
흐느끼며 울음을 섞던 바딤은 결국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을 토해 냈다. 줄곧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다 큰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은 처절하고 서글펐다. 리는 착잡한 얼굴로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라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어선 안 돼.”
그 말에 오열하던 바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어조의 목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친 눈으로 리를 올려다보았다. 일자로 닫힌 입술 위로 리의 무표정한 눈초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딤의 낯빛이 불길함을 느끼고 어둡게 변했다.
“지금 그게 무슨…….”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사라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말라니.
“반즈 박사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리는 몸을 일으키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바딤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눈앞에 서 있는 친구의 표정이 순간 너무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과연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알고 지냈던 녀석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는 리 박사의 뒤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알아본 바딤의 동공은 붉은 핏줄들이 불거진 채 얼어붙었다. 양손을 앞에 모으고 숙연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여자는 조이 반즈였다. 반즈 박사가 입은 검은 재킷의 가슴에는 알파벳 ‘W’가 새겨진 왓슨 그룹의 로고 배지가 달려 있었다.
갑자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저택 내로 진입하더니 사라의 관을 에워쌌다. 바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리 박사를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리? 이게 대체 무슨…….”
아직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바딤을 보며 리는 답답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는 건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아랫사람을 시켰겠지만 상대는 그래도 바딤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입을 열었다.
“부디 협조해 줬으면 좋겠다. 상황에 따라서는 부검을 한 후 시신을 우리 쪽에서 보관하게 될 수도 있어. 형식적인 절차지만 동의서에 서명해 주는 것도 잊지 말고.”
바딤은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삼 일 밤낮을 눈 한 번 못 붙였다. 안 그래도 안개처럼 뿌연 머릿속을 누군가 거세게 휘젓는 것만 같았다. 주변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럼증이 일었다.
바딤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멍하니 턱을 떨어뜨리며 검은 안경을 쓴 사내들을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그리고 리 박사와 죄인처럼 서 있는 반즈 박사를 빤히 보더니 간신히 상황을 정리한 듯 더듬더듬 되물었다.
“그, 음, 그러니까…… 지금, 아니 네가…… 내 아내의 시신을 가져가겠다고?”
“이미 러시아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아 놓은 상태야.”
사무적으로 대답한 리는 러시아 정부의 공문을 허공에 띄웠다. 그걸 본 바딤의 눈이 뒤집히며 핏대가 섰다. 그는 벌게진 얼굴로 숨을 들이켜면서 폭발하듯 소리쳤다.
“정부가 뭔데 허락도 없이 내 아내의 시신을 마음대로 넘긴다는 거야!”
“박사님.”
반즈 박사가 조용히 나섰다. 그녀는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차마 바딤과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죄스럽고, 또 죄스러워서.
“사라는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어요.”
바딤은 말없이 눈만 굽어 뜬 채 반즈 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요?”
별다른 동요 없이 되묻는 바딤을 보며 반즈 박사는 되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알고 있었나? 그녀는 리 박사의 눈치를 살피더니 바딤에게 몰래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바딤은 벌건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볼 뿐, 그녀가 던진 신호를 읽지 못했다.
“절대 안 돼! 내 아내의 몸을 가져다가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누구도 내 아내의 털끝 하나 손댈 수 없어. 누구도 사라를 내게서 앗아 갈 수 없다고!”
바딤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리 박사 일행을 노려보며 사라의 관을 끌어안았다. 그의 부릅뜬 눈 주위로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리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순하디순한 친구가 맞는 것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격적인 언행이었다. 리는 거세게 맞서는 바딤을 차마 어쩌지 못한 채, 일단 직원들을 데리고 후퇴했다.
저택 밖으로 나온 리는 검은 우산을 펼치고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토론을 하고 있는 조문객들 쪽을 쳐다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의심 어린 눈초리를 뾰족하게 세운 채 바딤이 있는 저택을 쏘아보고 있었다. 마치 ‘저 가여운 남자가 아내의 죽음의 흑막이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펼쳐 보기라도 하듯이. 그 의혹의 눈총에서 자유롭지 않은 반즈 박사 역시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든지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리 박사는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로 기억을 더듬었다.
“한 오 년 전이었나? 바딤을 만나러 알혼 섬에 온 적이 있었어. 그때 사라는 이미 병환이 깊었던 것 같아. 끔찍하게 마르고 수척한 모습이었거든.”
그는 니코틴이 스며든 몽롱한 눈빛으로 무심히 말을 이었다.
“딸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행복하고 단란해 보였는데…….”
그는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선 무릎을 쳤다.
“그래, 딸이 있었지. 이브라고 했던가?”
벽 뒤에 서 있던 반즈 박사는 떨리는 손끝을 애써 깍지 끼며 힘을 주었다. 뒤늦게 이브의 모습을 찾으며 두리번거리던 리 박사는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보이는군. 사라가 감염된 시점이 언제랬지? 딸을 갖기 전이야, 후야?”
곁눈질로 반즈 박사를 보는 그의 눈초리는 미세한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롭고 예리했다.
“잘 모르겠어요.”
반즈 박사는 그의 시선을 회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리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졌다. 그녀는 아직도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반즈 박사의 뒤를 몰래 조사했던 보안 팀 보고에 따르면, 시베리아 연구소 시절 그녀가 사용했던 컴퓨터에는 시스템 초기화와 메모리 삭제를 실행한 흔적이 있었다고 했다. 조이 반즈와 사라 페트로비치가 주고받은 문서들은 이미 모두 폐기된 후였고, 삭제된 문서를 복구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현재 본사 기술팀에 문의를 넣은 상태라고 덧붙였다.
“반즈 박사, 이건 인류의 존망이 달린 중대사야. 시답지 않는 우정 놀음은 집어치워.”
조이는 괴로운 듯 한쪽 팔을 꽉 움켜쥐었다. 푹 숙인 그녀의 턱 끝은 괴로움에 앙다문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채근하듯 빤히 쳐다보던 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됐어.”
그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언덕 아래를 쳐다보았다. 알혼 섬 주민들이 비옷을 입은 채 모여 쑥덕대고 있는 게 보였다.
‘섬 주민들이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언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칠 년 전 돌연 휴직을 하고 알혼 섬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 페트로비치 부부. 그 시발점에는 그들의 딸, 이브의 탄생이 있었다.
과학계를 사랑한 남자였다. 그런 바딤이 세상을 등지고 연구소를 버린 채 가족과 은거를 시작했다는 게 그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딤의 아내인 사라의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는 소식이 돌았다. 모든 의문이 말끔하게 풀린 건 아니었지만 사라를 끔찍이 여기는 바딤이었기에, 그간의 행동들이 나름 설명되는 듯했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사라의 병환이 그렇게 심각했다면 바딤은 그녀를 연구소로 데려와 닥터들에게 보였어야 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알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 박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바딤은 사라를 의사들에게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사라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당사자인 사라가 원하지 않았다. 대학교 시절, 공대에서 떠오르는 유망주였던 그녀가 과학계를 등지고 무도인의 삶을 살게 된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만큼 과학계를 뼛속 깊이 불신하고 있었던 사라였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둘째, 사라보다 더 큰 문제인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었다. 남들이 보아서도 절대 알아서도 안 될 무언가가.
“안녕하십니까, 어르신들.”
마을 노인들은 촌장 격인 무당 할멈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린 채 서 있었다. 그들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리 박사를 쳐다보았다.
“혹시 페트로비치 박사네 아이들을 본 적 있으십니까?”
등이 굽은 노파가 그를 보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서며 침을 퉤 뱉었다.
“재수 없게 그 집 애들을 왜 봐? 흥, 내가 저 집에 큰일 날 줄 알았어! 그런 악마를 키우고 있는데 어미가 제명대로 살 리가 없지.”
“악마요?”
노파는 불안한 눈초리를 하고 있는 주민들의 등을 떠밀며 돌아섰다. 흘끗거리던 그녀는 누런 자위가 둥둥 뜬 눈으로 나발루니예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저택 쪽을 빤히 응시하던 노파는 뭔가와 눈이 마주친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해 보이는 노인네는 아니었다. 리 박사는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급히 자리를 뜨던 노파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실핏줄이 선 눈으로 그를 흘겨보더니 나지막이 경고하듯 말했다.
“내 이제 늙고 병들어 신령님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 관상명운은 좀 볼 줄 알지.”
담뱃대를 입에 물던 리 박사는 푸른 안광이 번뜩이는 노파의 눈동자를 보고선 저도 모르게 담뱃대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노인네의 헛소리라 여기지 말고 귀담아듣게. 보아하니 젊은이는 신령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 보탬이 될 재주를 가졌으나, 뱃속에 먹구렁이 한 마리를 기르고 있구먼. 사탄은 도리를 버린 자의 영혼을 먹고 자라거든.”
노파는 알사탕처럼 툭 튀어나온 눈으로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낯가죽을 벗겨 안을 긁어 보는 듯 불편한 눈초리였다. 리 박사는 일순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쯧쯧.”
노파는 혀를 차더니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뭡니까?”
“결국 먹구렁이에게 몸뚱이건 머리통이건 다 내주고 잡아먹히겠구먼. 파멸에 이를 운명이야. 속에 품은 탐욕이 이미 걷잡을 수 없게 컸어. 그러나 다행히도 인복이 많아. 주변의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게. 그럼 그들을 통해 다시 신령님의 구원을 받게 될지도 모를 테니.”
리 박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관상명운이란 게 저렇게 되는 대로 씨불이는 거라면, 차라리 지나가던 들개 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쏴아아.
빗소리가 다시 굵어졌다. 어느새 노파의 모습도, 그녀를 따르는 주민들의 모습도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아지랑이처럼 사라져 버린 뒤였다. 멍하니 서 있던 리 박사는 나발루니예 언덕 쪽을 문득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슬픈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흙 위를 구르는 가랑잎처럼 빗소리에 춤추던 운율은 듣는 이의 가슴을 쥐어짜듯 짓누르고 알혼 섬 전체를 울린 뒤 잦아들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등과 어깨가 비에 젖어 체온이 떨어진 탓이었다. 그는 검은 우산을 비스듬히 기울여 자신의 모습을 가렸다.
정신 나간 노파로부터 괜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등 뒤에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시원한 빗소리에 진혼곡을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리는 담배를 다시 주워 물었다. 부질없는 시간 낭비였다. 관상명운이라. 그는 헛웃음을 짓고 돌아섰다.
* * *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오직 그에 관한 추억뿐이라 했다.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워 주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딤도, 그의 자녀들도 낯선 이의 온기는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실의 고통은 이들 셋을 더욱 몸부림치며 서로를 할퀴게 만들었다. 불 꺼진 나발루니예 저택은 기둥 하나를 잃은 채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브는 더 이상 밖에서 뛰놀지 않았다. 대신 말수가 없어지고 잠이 늘었다. 그녀는 사라가 퀼팅한 토끼 담요를 들고 온실에 들어가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바닥에 잔뜩 깔린 하얀 도화지 위에는 늘 검은색 크레용이 화난 듯 잔뜩 칠해져 있었다.
어린 소녀는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래서 괴로워했다. 아빠가 말하는 하늘나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엄마가 왜 죽어야 했냐고 물었다.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이브는 더욱 분노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고함을 쳤다. 눈이 벌게지고 숨을 씨근덕거릴 때까지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럴 때마다 바딤은 무표정한 얼굴로 딸을 외면했다. 그의 손에는 늘 술잔이 쥐여 있었다. 어쩔 때는 심지어 울부짖는 그녀의 목소리가 시끄럽다며 귀를 막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죄책감에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사라의 이름을 불렀다. 절망에 빠진 채 흐느끼며 술잔을 엎고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르기를 반복했다. 그런 바딤의 모습을 보던 이브는 참다못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든 게 아빠 때문이라고 비난 어린 마음이 들다가도, 망가져 버린 그를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쳤다.
울분과 원망이 서로를 삼키고 있었다.
그녀는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벼랑 끝으로 질주하는 열차처럼 무섭게 내달렸다. 활촉은 가시처럼 손가락 끝을 찔러 오는데, 누구를 겨냥해 활시위를 당겨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빠 왔다.
이브는 색종이로 만든 바람개비를 들고 언덕 위에 올라섰다.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바람개비를 내밀어 보았다. 잠시나마 뜨겁게 터질 것 같았던 가슴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엄마.”
울먹임이 터져 나오는데 정작 눈물은 흐르질 않았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마른 입술에 숨만 가쁘게 새어 나왔다. 이브는 쉰 목소리가 아예 잠겨서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허공에 대고 외쳤다.
“엄마!”
“엄마!”
바람개비는 영혼을 불러 온다고 했는데. 언덕 밑에 사는 꼬마들이 넌지시 일러 준 것이었다. 그들은 사라를 잃은 그녀를 측은해하며 색종이로 바람개비를 만들어 주었다.
─언덕 위에서 바람이 불 때 이걸 돌려 봐. 그리운 사람을 불러 올 수 있대.
거짓말.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그저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이란 걸 알면서도 바람에 내민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행여나 뺨에 스치는 바람결에 엄마 목소리가 묻어오는 걸 놓치기라도 할까 봐.
“추워, 엄마.”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리운 향기가 새어 나간다. 형체 없는 온기를 끌어모으고자 몸을 웅크려 보았다.
쨍그랑!
몸을 흠칫 떤 이브는 발끝을 오므렸다. 날카로운 마찰음은 저택 쪽에서 튕겨져 나왔다. 바딤이 또 술병과 잔들을 벽에 던진 모양이었다. 이젠 일상처럼 되어 버린 소음이다. 그녀의 입술은 하얀 석고 가루를 칠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이브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고사리 같은 손은 잊지 않고 바람개비를 졸졸 돌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 날개는 불안에 젖은 그녀의 동공 속에서 물레방아처럼 회전했다.
약속이 있다며 조금 늦는다던 아담은 황혼이 하늘을 다 물들일 무렵에야 올 모양이었다. 요즘 아담이 멀게 느껴졌다. 일전에 본 언니와 함께 있는 것일까? 설움에 아랫입술이 자꾸 삐죽이며 튀어나왔다. 내가 항상 첫 번째라더니, 다 거짓말이다.
웅크린 발치 옆에는 돌멩이들로 고정시킨 바람개비가 바닥에 꽂힌 채 산들산들 돌아갔다. 만 번을 돌리면 만 번째 바람에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만 개의 바람개비를 만들면, 만 번의 기도로 소망하면, 만 번의 밤을 기다리면…….
이브는 하얀 원피스 잠옷을 움켜쥔 채 땅바닥에 누웠다. 힘없이 뜬 눈꺼풀 사이로 저녁놀에 번진 눈이 일렁였다. 진홍빛 눈동자는 고독에 지쳐 보였다. 그녀는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하늘도, 태양도, 흙도 모두 진회색이다.
아니, 까맣다.
세상은 이제 온통 밤이었다.
이르쿠츠크의 리쩨이 사립스쿨은 정·재계뿐만 아니라 예술, 과학계 유명 인사들의 자제들이 다니고 있는, 일명 귀족 학교였다. 이르쿠츠크의 리쩨이가 유명해진 데에는 스타시티의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알렉스의 재학 사실이 크게 한몫했다. 때문에 학교 이사진과 선생들은 알렉스의 바르지 못한 품행들을 알게 모르게 눈감아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얼마 전, 알렉스와 그의 무리가 같은 학교 재학생을 학교 밖에서 구타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뉴스에 대서특필되는 대신, 모두가 검지를 입에 대고 쉬쉬하여 묻히게 됐다. 게다가 고맙게도 피해자인 아담까지 침묵해 주는 바람에 사건은 더욱 쉽게 유야무야 일단락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분노로 바르르 떤 것은 이사장의 손녀인 사샤 피보바로바뿐이었다. 그녀는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어른들의 구차하고 비열한 정치판을 목격하고 말았다.
─ 오늘 오후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특별 강좌가 열릴 예정입니다. 본교의 모든 학생들은 제1 강당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점심을 먹던 학생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었다. 예고에 없던 특별 강좌는 따분한 시간표에 얹어진 깜짝 이벤트였다.
잠시 후 별관에 위치한 제1 강당 앞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들까지도 모두 모여 소란을 피웠다. 강당 입구에는 3D 입체 현수막이 걸린 채 이목을 끌고 있었다.
신종 바이러스 예방 강좌 – 왓슨 제약회사
은테가 둘러진 가상 현수막 오른쪽 상단에는 왓슨의 로고인 ‘W’가 까만 잉크로 그린 듯 멋스럽게 박혀 있었다. 특별 강좌 현수막을 잠시 바라보던 아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당에 들어섰다.
약 칠백 명의 전교생 중 조퇴자와 결석자를 제외한 전원이 착석했다. 생물 수업 담당인 줄리앙이 강단 앞으로 나와 본격적인 강좌에 앞서 소개할 준비를 시작했다. 삼십 대 중반인 그는 고도 비만이었는데, 땅딸막한 키에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종종 학생들의 조롱거리가 되고는 했다. 그는 꽤 긴장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다들 점심은 맛있게 먹었나요?”
고요한 반응이 이어졌다. 줄리앙은 등이 축축하게 젖는 걸 느꼈다. 아이들의 냉담한 시선에서 그들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무슨 유치원생들도 아니고 ‘준비됐나요?’, ‘준비됐어요!’ 톤의 어조는 뭐람?’
다행히 몇몇 학생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노력하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무성의한 목소리로 “네.” 혹은 “예에.” 하고 대답했다. 반면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피에로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그를 비딱하게 응시했다.
“오늘 우리 학교에 아주 특별한 선생님이 오셨는데요. 혹시 여러분은 왓슨 그룹이 무얼 하는 곳인지 알고 있나요?”
앞쪽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더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왓슨 병원이요.”
“맞아요. 첨단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왓슨 병원은 왓슨 그룹의 대표적 계열사죠. 또?”
줄리앙은 적극적인 대답에 신이 났는지 상기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방금 아쉽게 선수를 뺏긴 여학생이 재빨리 손을 들더니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왓슨 제약회사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왓슨 제약회사는 최근 많은 좋은 일들에 앞장서고 있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신종 바이러스 감염자들에게 무료 진료 혜택 및 정기 검진을 제공하고 있죠. 또한 신종 바이러스의 항체 연구 및 치료제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기도 해요.”
아담은 따분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그러다가 그는 아예 책상에 엎드린 자세로 머리만 들었다. 신종 바이러스의 예방 강좌라면 이미 몇 달 전에 한 걸로 아는데, 굳이 특별 강좌란 명목하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이 극성을 피우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왓슨에서 기부금이라도 받았나?’
이런 의구심을 품는 건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반대편 뒷좌석에 자리 잡은 학생들 역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강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입체 영상이 되어 뒤쪽까지 걸어 다니는 줄리앙의 가상 아바타를 보며 경멸 어린 눈초리를 지었다. 혹은 낄낄거리며 배불뚝이 선생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기도 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아담은 입속에 얼음 바람이 스민 듯 입안이 서걱거리는 걸 느꼈다. 자세히 보니 저들은 알렉스의 무리였다. 별안간 흙을 삼킨 것처럼 목이 텁텁했다. 아담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도 알렉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엔젤 키스.
그런 건 처음이었다. 무의식중에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느낌. 내장 끝에 매달린 깊숙하고도 불쾌한 기억을 누군가 불쑥 잡아당겨 억지로 칼질하는 듯했던 엔젤 키스에 대한 공포는 알렉스에게로 고스란히 이입되었다. 그를 보면 기억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두려움이 파도처럼 일었다.
아담은 반쯤 감은 눈으로 멍하니 창밖의 눈부신 빛을 응시했다. 귓가에 스미던 소음이 점차 웅얼거리며 멀어져 간다. 윙윙. 파리 날갯짓소리처럼, 혹은 유리에 공기가 부닥치는 음색처럼.
“타이탄, 이브는 뭘 하고 있어?”
그는 귀에 리시버를 꽂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타이탄은 즉각 응답했다.
─ 온실에서 그림 그리기를 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 네, 도련님.
이브는 날개를 뜯긴 잠자리처럼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일찍이 그녀의 세상은 바딤과 사라, 아담과 타이탄이 전부였다. 사라의 죽음은 이브에게 있어 세상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충격이었다.
그래도 이브는 결코 울지 않았다. 아니, 울지 못하도록 스스로 체벌하고 있었다. 사라의 죽음은 그녀의 탓이 아닌데 이브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 게 오히려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유리처럼 투명한 그의 갈색 눈동자가 바스러지듯 슬픔에 구겨졌다. 당장 달려가 이브를 끌어안고 싶었다. 너는 소중하다고,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가끔 소망한다. 흙에 뿌리를 박은 저 나무들처럼 이브와 자신도 한 몸으로 묶여 영혼과 숨결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브 점심 거르지 않도록 챙겨 주고.”
─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브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갈까? 아니면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 갈까? 무얼 해야 이브가 웃을까? 일단 울어야 웃기라도 하겠지.
아담은 조각 같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벌써 며칠째 환하게 웃는 이브를 통 보질 못했다. 이브의 웃음소리, 사랑스러운 눈웃음, 흩날리는 머리칼에 풍겨 오는 바람 냄새, 그 모든 게 그리웠다.
그는 잠시 그녀에게 시간을 주고 있었다. 분노할 시간, 스스로를 할퀼 시간, 울음을 터뜨릴 시간, 그리고…… 꿋꿋하게 이겨 낼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아담은 느티나무처럼 그녀의 곁을 말없이 지켜 줄 생각이었다. 문득 그녀가 힘에 겨워 뒤를 돌아보았을 때, 두 팔 벌려 가득 안아 줄 수 있도록.
몽상을 그리며 낮잠을 자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것이. 이윽고 선선한 바람결이 창밖으로부터 불어오자, 학생들은 하나둘씩 책상에 엎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 생물 선생의 고루한 농담이 끝을 맺고 있었다.
“그럼…… 모셔 볼까요…….”
그리고 어디선가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졸린 눈으로─사실은 지루한 것에 불과했지만 졸린 척 흉내를 내고 있었다─ 창밖을 응시하던 아담이 힐끔 강단에 시선을 던진 것도 그 시점이었다.
진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수행원으로 보이는, 혹은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입장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군인처럼 반듯하고 똑발랐다.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교단에 선 남자는 양팔을 나란히 펼치더니 단상을 쥐어 잡았다.
남자는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하고 깡마른 인상이었다. 얼핏 보면 사마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쭉 찢어진 눈초리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얇고 날카로웠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좌우를 살피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남자가 말없이 학생들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강당 내부는 삽시간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단 십 초의 시선으로 분위기를 장악한 그는 이내 입가에 사무적인 미소를 빙그레 띠었다.
“안녕하세요, 리쩨이 스쿨 재학생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낯선 이의 목소리에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은 무거운 눈꺼풀을 게슴츠레 열었다. 딴짓을 하던 학생들도 하나둘씩 두더지처럼 고개를 들었다. 조금 놀란 듯, 혹은 신기한 듯한 얼굴로 일어난 그들은 수군거리며 강단 위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신종 바이러스 예방 강좌를 할, 리 박사라고 합니다.”
동그란 눈망울로 앉아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아담 역시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쉬이이, 이브. 착하지? 고개 들면 안 돼, 이브. 우리 딸…… 조금만 참아, 응?
황급히 딸을 안고 도망치듯 침실로 향하던 사라. 태연한 척 앉아서 손에 땀을 쥐고 있던 바딤. 그리고 벽 뒤에 몸을 감춘 채 숨소리조차 삼켜야 했던 소년.
갑작스레 방문했던 옛 친구는 다행히 그날 이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듁 년의 세월이 지나, 그는 다시 이들 가족을 방문했다. 오래전 장난감을 사 들고 왔던 손에 국화꽃을 쥔 채로.
육 년 전, 벽 뒤에 숨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아담은 그날 그들을 공포와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방문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다시 나타난 남자의 행각과 언사 또한 빠짐없이 뇌리에 새겨 넣었다.
‘사라의 시신을 탈취해 간 남자.’
학생들 하나하나에게 눈도장을 찍던 리 박사의 시선이 오른쪽 창가 맨 뒷줄로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담은 담담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리 박사의 눈초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는 현저히 차이가 날 정도로 오랜 시간, 창가에 앉은 아담을 응시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했다. 리 박사는 다른 학생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치 있게 수업을 이끌고 나갔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진득하게 한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담 페트로비치.
창틀에 내려앉은 단풍잎처럼 오묘한 색감의 정취를 안고 있는 소년. 꼬리뼈에서 번진 직감이 그의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것은 먹잇감을 앞둔 방울뱀이 입을 쫙 벌리고 웃듯 맹독을 품은 호의였다.
그 시각 학교 위 옥상에서는 알렉스와 요한이 담배를 태우며 함께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햇볕 아래 벌렁 누운 채 허공에서 재생되는 영상 하나를 연이어 감상했다.
“요한.”
그의 부름에 요한은 벽에 기대고 앉은 채 힐끔 시선을 던졌다.
“이 계집애,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냐?”
알렉스가 보고 있던 건, 그날 아담을 구하러 왔던 이브의 모습이었다. 그날 함께 있던 무리의 남학생 중 하나가 몰래 녹화한 것이다.
“정상은 아니지.”
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싶은 것이리라. 더 이상 귀찮은 일을 만드는 건 질색이었다. 얼마 전 일로 제일 고생한 것도 그였다. 학교 선생들과 입을 맞춰 상황을 덮은 것도, 스타시티의 임원인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은 것도, 또 그룹 회장인 알렉스의 아버지께 상황 보고를 한 것도 모두 자신이었다.
도대체 몇 번을 돌려보고 있는 건지.
알렉스는 성난 다람쥐처럼 돌진하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붉은 눈은 금방이라도 영상 속에서 튀어나와 그를 포박할 듯 생생했다. 소름 끼쳤다. 그런데도 저 흉측한 눈이, 자꾸 보면 볼수록 어딘지 모르게 그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죽었다며?”
실핏줄이 선 이브의 눈을 확대해서 보던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담배를 끄고 구강청정제로 입가심을 하던 요한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걔네 엄마 말이야. 신종 바이러스 감염이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알렉스는 경멸조로 비웃었다.
“바람피운 거 아니야? 남편인 페트로비치 박사는 멀쩡하다더라.”
“신종 바이러스가 반드시 성관계로만 전염되는 건 아니야.”
요한은 신중한 어조로 반박했다. 물론,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대부분 성관계로 전염되는 게 맞긴 하지만. 그는 옥상에 마련된 세면대에 입 헹군 물을 뱉었다. 그리고 알렉스에게 이만 내려가자며 턱짓을 했다. 슬슬 특별 강좌도 끝날 무렵이었다.
“이 꼬맹이도 감염된 거 아닐까?”
“뭘 그렇게 신경 써?”
보다 못한 요한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더 이상 그 소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관여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비정상적으로 붉었던 그녀의 눈에 대해서 괜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때로는 눈을 감고 귀를 막는 편이 현명한 순간들도 있는 법이다. 본능적으로 위험 요소라고 판단했던 아이였다. 깊게 얽히지 않는 편이 좋았다.
“모르겠어.”
알렉스는 반쯤 뜬 눈으로 이브의 영상을 멍하니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흑표범처럼 바닥에 엎드려 가르랑거리는 소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일 거슬렸던 건 그녀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들었던 아담의 존재일지도.
“그냥 짜증나.”
“뭐가?”
“몰라.”
알렉스는 욕설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지개를 펴며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특별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강당 안에서 학생들이 개미 떼처럼 줄지어 나오는 게 보였다.
“사샤네.”
알렉스의 옆으로 다가온 요한이 난간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강당 앞에서 누구를 기다리듯 서성이고 있었다. 알렉스는 청록색 눈 사이 미간을 좁히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제 그를 짐승만도 못한 괴물 취급을 했다. 볼 때마다 역겹다는 듯 구역질을 했고, 모진 눈빛으로 말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눈앞에서 그 약골 녀석이 그렇게 처참하게 맞는 걸 봤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아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두 사람은 전보다 더 가까워 보였다. 그들의 두터워진 신뢰 관계에 있어 교각 역할은 한 건 그 자신이었다.
“감염자는 신고하는 게 의무지?”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요한은 걱정 반, 귀찮음 반인 표정으로 물었다. 살쾡이처럼 독기가 오른 알렉스의 눈에는 증오보다 더한 오기가 칠해져 있었다.
난간에 팔을 걸친 요한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겉모습은 이미 성인과 견주어 부족할 게 없는 알렉스. 그러나 속은 일곱 살 어린애와도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은 그에게 있어 시시껄렁한 놀이에 불과한 게 분명했다. 애들처럼 지렁이의 몸을 쭉 늘려서 끊는 데 재미를 느끼고, 개미를 손가락으로 비벼 죽이는 데 희열을 느끼는 그런 순수한 장난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저 괴롭히는 상대가 또래 아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었다.
요한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가 꾹 감았다. 다시 눈꺼풀을 여니 초점이 멍했다. 요즘 자주 두통을 느꼈다. 몇 발자국 떨어진 하얀 세면대에는 그가 뱉은 입 헹군 물이 거품처럼 남아 있었다. 배수구 주변으로 모여드는 거품 속으로 시야가 함께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일었다. 알렉스와 함께 있는 순간순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가끔 숨이 막혔다. 저 작은 배수구 속에 머리를 처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 꼬맹이, 아주 단단히 겁을 먹겠는데?”
알렉스는 새로운 장난거리를 찾은 아이처럼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허공에 뜬 홀로그램의 검색창에 연맹국의 CDC 및 러시아 보건복지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바로 연관 정보 검색 창들이 허공에 팻말처럼 우르르 나타났다.
‘신종 바이러스’, ‘왓슨 제약회사’, ‘시베리아 연구소’ 등의 단어들이 이미지 폴더로 정리되어 떠오르자, 알렉스는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사실 그는 뭔가 하나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놀라운 수준의 집중력과 집요함을 보이는 편이었다.
“가자.”
고민 끝에 사냥감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는 기대가 되는지 양손을 비비며 피식거렸다. 그런 알렉스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던 요한은 족쇄가 채워진 가축처럼 하릴없이 따라나섰다. 알렉스의 그림자 뒤에 껌처럼 따라붙은 자신의 발이 보였다. 요한은 뺨을 홀쭉이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가축.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축생이다. 짐승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주인이 당기는 목줄이 이끄는 대로 족적을 이룰 뿐. 그리하여 네 이빨은 죄를 남기지 않는다. 요한 가르두치, 너는 괴로움에 몸을 비틀 필요가 없다. 너는 그저 이블리스가 기른 최우수 품질의 산양에 불과할 뿐이니까!
수업이 끝나자, 몇몇 학생들은 단상 앞으로 나가 질의 시간을 가졌다. 단 두 시간의 강좌로 리 박사의 추종자가 된 아이들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밀물처럼 강당 밖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아인슈타인이 살아 돌아와서 강의를 한다 해도 관심이 없을 족속들이었다. 아담 역시 주섬주섬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섰다.
“거기 맨 뒷자리 남학생!”
흠칫 놀란 어깨가 걸음을 멈췄다. 아담은 제자리에 선 채 허공을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귀찮음, 못마땅함, 불길함 등이 섞인 눈동자가 침전되듯 가라앉았다.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등을 보며, 리 박사는 단상에 기대 픽 웃었다.
“그래, 자네 말이야.”
예상대로 자신을 부른 게 맞았다. 아담은 오뚝 선 콧날 위 미간에 인상을 썼다. 번데기처럼 주름진 이마 아래 한숨이 흘러나왔다. 강사가 부르는데 별수 있겠는가? 마지못해 돌아선 그의 긴 속눈썹은 짜증을 밴 채 잘게 흔들렸다. 질문을 하려고 남은 학생들의 따가운 눈총이 그의 몸에 와르르 꽂혔다.
아담 페트로비치.
얼마 전 우주 항공 물리학 시간에 선생마저 당혹하게 만들었다는 천재 소년이다. 사실 불씨는 담당 수업 교사가 먼저 던졌다. 그는 세계적인 과학자, 바딤 페트로비치를 부친으로 둔 아담에게 부친의 전공인 나노학에 대해 물었다.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건만, 아담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나노 테라피의 부작용을 논제로 꺼냈다. 잠시 심도 있는 논쟁이 오고 갔다. 실제론 아담 혼자 자문자답한 형상이었지만.
교사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화제를 돌리려 애를 썼다. 제가 던진 돌에 제 발가락을 찧은 꼴이었다. 열세 살 소년의 학식의 깊이는 이미 박사 과정의 수준을 넘나들었다. “아버님께서 아주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셨구나.” 그는 그렇게 대화를 갈무리했지만 아이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그 속에서 아담도 생긋 웃고 있었다. 천사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그러나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괜한 불씨를 만들었던 선생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 아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변했다. 쓸데없는 소모전 같은 논쟁이었다. 간혹 몇몇 교사들은 돌부리를 차 보듯 그를 툭툭 건드린다. 그리고 제 발에 걸려 호되게 넘어지고 나서야 교훈을 얻고 피해 간다.
아담의 무미건조한 표정을 보며 소름이 돋은 건 같은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로봇처럼 감정 없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그를 두렵다는 듯 쳐다보았다.
일부러 그런 게 분명했다. 두 번 다시 귀찮은 질문 따위는 던지지 못하도록 칼침을 꽂은 느낌이랄까?
그냥 괴짜인 천재였다면 이렇게까지 주변 시선이 적대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부족한 사교성과 개인주의적인 행동은 오히려 그의 천재성을 돋보이게 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그가 교내 최고의 미녀인 사샤 피보바로바와 교제 중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를 우러러보던 시선은 시샘과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뀌었고, 감탄과 찬양 어린 말들은 의혹과 소문을 낳는 쑥덕거림으로 변질됐다.
“신종 바이러스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리 박사는 방금 전 남학생에게 받은 질문을 그대로 아담에게 던졌다. 질문을 했던 남학생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리와 아담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자 리는 싱긋 웃으며 남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계산된 미소 하나가 단번에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건 육안으로도 명료했다. 남학생은 흡사 교주를 바라보듯 열의에 차오른 눈빛이었다.
“일명 천재 소년의 상상력에 기대를 걸어 보고 싶은데.”
리의 발언에 질문을 했던 소년은 빈정이 상했는지 아담을 홱 째려보았다. 결국 또 관심을 받는 건 저 녀석이냐는 듯이.
아담은 말없이 서 있었다. 답변을 생각 중인 건지, 대답을 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느긋하게 기다리는 리와 달리 학생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닦달하듯 그를 쏘아보았다. 고요히 침묵하던 아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생존.”
“생존?”
아담은 강단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다시 침묵했다. 그는 강단과 이어진 높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조각처럼 예쁜 소년의 지루함 깃든 눈빛은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다. 리는 눈초리를 길쭉하게 내빼더니, 흥미롭다는 듯 채근했다.
“계속해서 날 즐겁게 해 보게.”
아담은 곁눈질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경주를 앞둔 선수처럼 차분하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신종 바이러스가 정말 외계에서 온 것이라면 어째서 지구에 온 것인지, 왜 하필 우리를 선택한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선 생존을 위한 치열한 발버둥일지도 모르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일 수도요.”
“그러니까 신종 바이러스는 생존을 위해 지구에 왔다?”
“바이러스는 숙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니 우리를 공격해 번식하고 있는 겁니다.”
변성기가 채 오지도 않은 듯 맑은 미성의 목소리였다.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그의 연한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재미난 논리이긴 한데,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일 뿐이야. 바이러스 자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건 비약인 듯싶은데? 아니면 자네는 신종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흑막이 따로 있다고 보는 건가?”
누군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흑막이래.”라고 키득거리는 그네들은 조롱 어린 눈길로 아담을 응시했다. 리 박사 역시 동조해 잠시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미소를 띤 채 이어 말했다.
“이를테면 외계인이라든지 말이야. 그런 이야기인가, 천재 소년 군?”
아담의 눈초리가 주변을 슥 훑었다. 곁눈질로 그와 눈이 마주친 학생들이 움찔거리며 뚝 웃음을 그쳤다. 얼음장처럼 냉랭한 그의 시선이 그네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적셨다. 간담이 서늘해진 학생들은 고개를 외면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근원이 외계인인지, 우주인인지, 인간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지전능한 존재인지,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습니다. 요는 그들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뭐든지 실체가 명확해지기 전까진 결국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죠. 박사님 말씀대로 전 그저 재치로 허구적인 상황을 전개해 본 것일 뿐이니까요.”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담은 그 속에 호젓한 가로등처럼 서 있었다. 그는 멍하니 쳐다보는 아이들을 보며 생긋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가 오히려 섬뜩해서 다들 얼굴이 굳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박사님께서도 꽤 바쁘신 몸 아니신가요?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한다는 그 연구, 어서 마치셔야죠. 그래야 동의서를 들고 와 친구를 협박한 보람도 있으실 테니까요.”
예쁘장하게 웃는 눈초리 속에 서늘한 칼날이 담겨 있었다. 홱 돌아서는 아담을 보며 리 박사는 당황했는지 눈을 치켜떴다.
“아담!”
그는 순식간에 강당을 나가 버린 아담의 뒤를 쫓아오며 소리쳤다.
“페트로비치 군!”
황급히 따라 나온 리는 강당 밖에서 아담의 뒷모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도서관 건물 근처까지 간 아담은 커다란 키의 소녀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리는 넓은 보폭으로 그들을 금세 따라잡았다.
“잠깐, 잠깐만!”
햇살 아래 쏘아보는 아담의 눈초리는 매섭고 깊었다. 그의 옆에 함께 서 있던 사샤 역시 달갑지 않다는 눈초리로 리를 쳐다보았다.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겠나?”
아담은 망설이는 듯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는 왼손에 찬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전에 찼던 모델은 스마트 더스트를 조작할 수 있지만 알렉스 때문에 망가진 상태였다. 현재 그가 차고 있는 건 구식으로 타이탄의 보고만 들을 수 있었다.
리신.
무시하는 게 상책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한 번쯤은 이 남자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한때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이 남자와.
“잠깐이라면.”
짤막하게 대꾸한 아담이 손목시계를 꾹 누르며 돌아섰다. 사샤는 조금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두 사람을 따라 걸었다.
세 사람이 함께 사라지는 걸 본 학생들은 수군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왓슨 제약회사에서 영향력 있다는 박사와 이사장의 손녀 그리고 교내 최고 천재라 불리는 소년의 조합.
“장학생인가?”
“스카우트해 가려는 걸지도.”
“쳇, 부럽다.”
시샘 어린 시선 속에서 투덜대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잘될 놈은 뭘 해도 잘되려나 보다. 교내 최고의 퀸카인 사샤를 낚아채더니, 그녀를 동아줄 삼아 벌써부터 승승장구하는 꼴이었다.
사샤는 익숙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세 사람이 함께 향한 곳은 교내 귀빈실이었다. 아담과 리 박사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그녀는 창가에 놓인 탁상 앞에 앉아 차분히 그들을 기다렸다.
현재 시각 오후 3시 45분.
사샤는 흘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이칼 호 쪽의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평화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알혼 섬의 작은 들고양이는 뭘 하고 있을까?’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던 이브의 얼굴이 떠오르자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뛰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오후였다. 사샤는 호기심 반, 걱정 반 섞인 눈빛으로 회의실 쪽을 응시했다.
회의실 안의 두 남자는 마주 앉은 채 첨예한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리 박사는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쥔 채 자상한 어조로 물었다.
“이브를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겠니?”
“아니요.”
아담은 딱 잘라 대꾸했다. 일말의 가능성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어조였다. 양손을 깍지 낀 리 박사는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의 왼손 검지에는 ‘W’ 로고가 박힌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감염 여부만 확인하려고 하는 거야. 여성의 경우엔 몇 년 후 반응이 나타나기도 하거든. 삼 년 이상 생존율도 높고.”
“이브는 감염되지 않았어요.”
“감염자 가족은 검사를 받는 게 원칙이야. 하지만 난 이 일을 아주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 언론에서 알면 떠들썩해질 게 뻔하니까.”
“저희 가족은 이미 타이탄에게 혈액 검사를 받았고, 검사 결과는 왓슨 제약회사와 시베리아 연구소에 보내 드렸습니다. 제 아버지의 비서이자 페트로비치가의 홈 AI인 타이탄은 러시아 정부에서도 인정하는 의료 서비스 기능을 탑재하고 있어요. 가족 모두 감염 여부에 관해서는 음성 판정을 받았고, 귀사에서는 이에 관해 아무 문제도 제기한 바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리 박사는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어린 녀석이 상당히 노련하다. 어수룩한 바딤과는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는 걸 재차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아담이 먼저 물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언제 돌려주실 거죠?”
“글쎄, 이게 우리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서.”
리는 커피 잔을 들며 빙그르 웃었다.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던 아담의 손끝 마디가 하얗게 굳었다. 째깍째깍, 여유롭게 들려오던 시곗바늘 소리가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오래전, 네 아버지에게 스마트 더스트를 완성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지. 바딤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여전히 그건 아쉬운 거래로 남아 있는 상태야.”
그는 손톱 끝으로 원목으로 된 탁상 위를 톡톡 두들겼다. 괜한 초조함을 더하는 소음이었다. 아담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동요 따윈 벌판을 가르는 한 줄기 바람처럼, 그에게 있어 한 줌의 일렁임으로 스칠 뿐이었다.
“스마트 더스트와 제 어머니를 두고 거래를 하자는 겁니까?”
바로 받아치는 아담을 보며 리 박사는 내심 감탄했다. 상대방이 원하는 바가 뭔지를 확실하게 캐치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확실히 영리하다. 판단력과 직관력뿐만 아니라 결정력과 배포도 갖췄다. 게다가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다.
“그렇다면?”
톡톡, 테이블을 치는 손가락의 강도가 커져 간다. 두드림의 속도 또한 초읽기를 하는 시계처럼 빨라져 갔다. 그에 맞춰 리 박사의 눈빛 또한 집요하게, 뚫어지게 상대를 주시했다.
몇 차례 교차한 시선.
속내를 핥듯 들러붙는 리 박사의 눈초리에도 아담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자세를 유지했다. 대단한 녀석이다. 리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사색 끝에 아담이 입을 열었다. 그가 꺼낸 것은 거래 조건에 대한 제안이었다.
“왓슨 연구소와 왓슨 제약회사로부터의 검사 결과에 대한 정식 회신 및 언론과 대중에 공식적인 발표를 원합니다.”
“회신과 발표?”
“‘바딤 페트로비치 박사와 그의 두 자녀들은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바가 없다’라는 사실을 왓슨 그룹 홍보팀에서 언론에 공식적으로 발표해 주시죠. 그리고 저희 쪽에는 왓슨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바이러스 감염 여부에 대한 검사 결과를 충분히 검토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회신을 보내 주셔야겠습니다. 물론 연구소의 직인을 찍은 공식 문서로 말입니다.”
리 박사는 난감한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적진의 방패 속으로 숨어들겠단 건가? 손을 잡을 테니 갑옷을 내어 달라?
꽤 곤란한 요구였다. 애초에 그에게 악수를 제안한 이유는 아담과 이브, 두 녀석 모두 다 탐났기 때문이다. 살코기를 뜯기 위해 뼈를 내줄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살만 취하기에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엘 카인,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리는 자신도 모르게 라이벌인 사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매번 한 걸음, 한 걸음 그 남자보다 뒤처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엘 카인, 그가 차기 왓슨 그룹의 실질적 우두머리가 되는 게 기정사실이 될 판국이었다. 신종 바이러스 대책 본부를 만들고, 새로운 본사 이전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고 있는 엘 카인은 램지 왓슨 회장의 신뢰를 발판 삼아 왓슨 그룹을 차근차근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물론 리에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사라의 시신을 옮겨 온 반즈 박사가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단서를 잡고, 그가 스마트 더스트를 완성시켜서 가져오면 왓슨 회장도 두 사람을 다시 견주어 보게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보아하니 거래의 전제는 스마트 더스트의 완성인 듯한데, 그 점은 어떻게 해결할 셈이지? 바딤은 스마트 더스트를 포기한 것 같던데.”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리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담의 대답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아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찾았다. 아담은 테이블을 짚으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알혼 섬의 출입이 통제됐대!”
“알혼 섬이? 왜?”
“모르겠어. 근처 상공은 모두 통행 불가란 소식이야.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
사샤는 방금 전 확인한 속보를 회의실 내에 띄우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행로를 통제하고 있는 게 경찰이 아니고, 러시아군 특수부대라는 소식이야.”
“군 소속 특수부대?”
굳은 채 서 있던 아담은 제일 먼저 리 박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리는 어깨 위로 손을 올려 결백을 주장했다. 자신도 모르는 일이란 눈치였다. 그는 곧바로 등을 돌리더니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사정을 알아보려고 손쓰는 리 박사를 보며 아담의 표정은 갈피를 잃은 듯 모호해졌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사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념에 잠긴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이브.”
그의 입술 사이로 툭 튀어나온 이름에, 누군가와 조용히 통화를 하던 리가 흘끗 아담을 쳐다보았다.
‘이브?’
아담은 황망한 얼굴로 허둥지둥 뛰어나갔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의연하던 소년은 혼백이 나간 듯 다급한 표정이었다. 리는 사라진 아담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사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창가에 기댄 채 손톱을 깨물며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리와 눈이 마주친 사샤는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래요?”
그는 잠자코 그녀를 보더니 딱히 숨길 필요는 없다는 듯 순순히 답해 주었다.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이야.”
“신고요?”
“감염자 신고.”
사샤는 놀란 눈으로 숨을 들이켰다. 토독, 그녀가 물어뜯은 손톱이 와인색 카펫 위로 쌀눈처럼 떨어졌다. 그 위를 밟은 리 박사의 발걸음이 초조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그는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어루만지며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머금었다. 피곤에 휩싸인 눈초리가 한껏 찌푸려졌다.
대체 어디서 누가, 먼저 선수를 친 것일까?
* * *
알혼 섬의 여름은 백야다.
태양이 어둠을 오독오독 삼키고, 밤은 빛의 장막을 두르는 시기.
황혼은 천천히 저물어 새벽녘에 다다라서야 어둠 속으로 산개해 흩어진다. 쪽빛 하늘에 펼쳐진 붉은 노을은 지평선처럼 끝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창공에 존재하는 사막처럼 보였다. 하늘 위에 뜬 미지의 세계는 페트로비치가의 푸른 저택 위를 신비롭게 에워쌌다.
거실 쪽 유리 벽 위로 타이탄이 ‘삑삑’ 긴급 메시지를 띄웠다. 그러나 적요에 잠긴 저택은 붉게 번쩍이는 알람 소리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깰 줄 몰랐다. 창 너머 보이는 자개구름 사이사이에서 박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경건하고 아름답다. 중세 낭만주의 기법 화가들이 그린 명화들이 문득 떠오를 법한 광경이었다. 저 속에서 아기 천사들이 합창을 하며 문득 나타나진 않을까?
공상에 색을 입히며 미소를 머금게 하던 하늘에서 별안간 검은 사제들이 등장했다. 어둠을 입힌 듯 시커먼 에어쉽들이 오색 빛깔 구름을 뚫고 알혼 섬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낯선 방문자들의 출현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알혼 섬 주민들은 아연한 얼굴로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또 무슨 일일까?’
다시금, 평화롭던 바이칼 호수 위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알림】
저택 상공에서 미확인 비행 물체 다수 발견.
통신을 시도하시겠습니까?
온실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엎드려 있던 이브가 눈을 뜬 건 바닥에서 느껴진 미세한 진동 덕분이었다. 그녀는 바딤이 사 준 토끼 인형을 안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불안에 휩싸인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이게 무슨 소리야, 타이탄?”
그녀는 입을 작게 모은 채 소곤소곤 물었다. 온실 허공에 타이탄이 입체 형상으로 나타나더니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쉬이’ 하며 주변을 살폈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이브의 표정이 굳었다.
─ 나오지 마세요, 아가씨.
“무슨 일인데?”
─ 사태를 파악 중입니다.
바딤은 연구실 내 침대에 누워 고주망태가 된 채 잠들어 있었다. 타이탄이 가사용 로봇을 보내 그를 흔들어 깨워 봤지만 소용없었다.
한편 상공에 뜬 다섯 기의 에어쉽은 저택을 철저하게 포위했다. 검은색 중형 에어쉽 내부에는 러시아군 특별 기동대 대원들이 탑승 중이었다.
─ 팬서130)이 전원에게. 래빗은 저택 내부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부터 레드 래빗Red Rabbit의 포획 작전31)을 실시한다. 팬서2와 팬서3은 진입을 허가한다. 팬서4는 목표물의 위치를 확인하라.
─ 팬서4, 저택 내 열원 감지. 대기합니다.
─ 팬서2, 저택 진입을 시도합니다.
─ 팬서3, 뒤따라 진입합니다.
원을 그린 다섯 기의 에어쉽이 천천히 하강했다. 그중 세 기의 문이 열리고,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 셋이 민첩한 움직임으로 지면에 뛰어내렸다.
그때 대원들이 귀에 꽂고 있던 통신기가 켜지더니 본부의 지령이 하달됐다.
─ 본부에서 대원들에게 알린다. 페트로비치가의 저택 시스템을 해킹하는 데 실패했다. 저택에 탑재된 자체 방화벽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강력해서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각 이후로 대원들의 무력 진입을 허용하는 바다.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도록 한다.
요원들은 침묵과 눈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그들 귓가에 작전 지휘관의 엄숙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 방심은 금물이다. 어린아이지만 감염자라는 제보가 있는 만큼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저택 내부는 스산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그들이 저택을 부수고 들어온 곳은 천장까지 아치형 유리창으로 이어진 바이칼 호수 방면이었다. 노을에 비친 요원들의 그림자가 안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방범 경보조차 울리지 않는다. 설마 그사이에 본부에서 저택 시스템을 해킹하는 데 성공했나? 겉보기엔 평화로워 보이는 저택의 적막은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 대장, 감염자들은 초능력 같은 걸 쓰지 않습니까?
살금살금 한 걸음을 뗀 팬서2가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 그러니 본부에서 각별히 조심하라는 것 아니겠나?
─ 정확히 어떤 능력을 쓰는 겁니까?
감염자 포획 작전은 처음인 팬서2는 겁을 먹은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팬서4가 웃으며 대답했다.
─ 사람을 공중으로 날려 버리기도 한다는군.
─ 환영 같은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던데?
이어진 팬서5의 장난 어린 덧붙임에 누군가 가슴을 졸이듯 숨을 들이켰다. 밖에서 대기 중인 녀석들은 신이 났을지 몰라도, 안에 들어와 있는 요원들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 어린애가 감염자란 건 처음 들었습니다. 어린아이와 노인들은 감염되면 무조건 사망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 지금까지는 그랬지.
팀의 리더인 팬서1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말미에 다시 한 번 “지금까지는 말이야.” 하고 덧붙였다.
─ 팬서4가 전원에게. 목표물의 열원을 포착할 수가 없다. 적외선 투시뿐만 아니라 시야 자체가 차단된 것처럼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본부와의 통신도 끊긴 상태다.
─ 나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시야 확보를 할 수가 없는데 저택 내부는 이상 없나?
─ 팬서1, 이쪽은 이상 없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대기조와 전투조 간의 통신은 끊기고 말았다. 잠시 멈춰 서 사태를 파악하던 팬서1은 수신호로 나머지 대원들에게 뒤따르라는 명을 내렸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목표물이 확인되었던 지점인 저택 내 온실로 향했다.
─ 아가씨, 천장에 유리창 보이시죠?
타이탄의 속삭임에 이브는 위를 쳐다보았다. 성인의 머리통 하나가 들어갈 법한 원형 유리창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 제가 받쳐 드릴 테니 저기로 빠져나가세요. 통풍구와 이어져 있습니다.
“타이탄, 저 사람들은 누구야?”
가사용 로봇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던 이브가 불쑥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토끼 인형의 귀가 꽉 잡힌 채 대롱대롱 따르고 있었다.
─ 러시아군 소속 특수부대입니다.
“러시아군? 군인 아저씨들이 왜 우리 집에 온 건데?”
유리창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은 이브는 개구리처럼 몸을 버둥거리며 빠져나갔다. 밑에서 혹시 모를 추락에 대비해 집게 팔을 벌리고 있던 타이탄은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 뭔가를 훔치러 온 것 같습니다. 군인이라고 다 착한 건 아니니까요.
동그란 창문 위로 얼굴을 쏙 내민 이브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코끼리 담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놓고 가는 게 아쉽다는 듯 유심히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 저택 밖 에어쉽 승강장으로 가세요, 아가씨.
인기척을 느낀 타이탄이 재촉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일사불란하게 들어온 대원들은 등을 마주한 채 삼각형을 그리며 각기 총을 겨눴다.
─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 Clear.
─ 아악!
팬서3이 고함을 지르며 우당탕 넘어졌다. 그는 왼쪽 정강이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뒤로는 집게형 손에 피를 묻힌 가사용 로봇이 뒤로 후진하며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팬서2는 급히 총구를 들어 총탄을 갈겼다.
타다당!
─ 빌어먹을!
바닥에 빗줄기처럼 이어진 총탄 자국 뒤로 로봇은 이미 잽싸게 모습을 감춘 뒤였다.
난잡한 소음에 침대에 누워 있던 바딤은 스르르 눈꺼풀을 열었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총소리?’
그는 북극곰처럼 커다란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탕탕!
다시 이어진 총격 소리.
게슴츠레하던 바딤의 눈이 번쩍 커졌다. 저택 내에 누군가가 있었다.
“타이탄? 이게 무슨 소리야, 타이탄!”
그는 벽에 귀를 붙이고 숨소리를 죽였다. 타이탄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브는?’
번쩍이며 든 생각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는 헛헛한 눈동자로 연구실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와장창!
유리창 같은 게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후다닥 움직이는 발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바딤은 재빨리 출입문 버튼을 누르고 튀어 나갔다. 정신없이 온실로 뛰어간 그는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는 특수요원을 보고 주춤거렸다.
“당신 누구야? 우리 집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요원은 다리를 질질 끌며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는 바딤을 향해 흘끔, 경계 태세를 갖추며 다른 대원들에게 통신을 전했다.
─ 페트로비치 박사가 딸을 찾으러 온실로 왔다. 래빗 포획을 서두르기 바란다.
─ Copy that.
그들의 통신 대화를 듣던 바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전투복을 입고 총을 든 군인들, 래빗 포획, 토끼를 잡으러 왔다.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과 함께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이브…….”
몇 주간 늘 술기운에 젖어 정신이 몽롱했던 기억뿐이었다. 난장판인 시야 속에는 언제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딸의 모습이 있었다.
걱정과 원망 섞인 눈초리로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곤 했던 이브. 결국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애처로운 모습으로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던 아이였다. 최근 몇 주간 그 아이와 제대로 대화는커녕 눈인사나 했던 적이 있던가? 사라를 꼭 닮은 이브를 보기가 괴로워 피하기에 급급했을 뿐이었다.
─우리 딸.
─우리 이브, 부탁해…… 여보.
사색이 된 바딤은 유령처럼 넋이 나간 채 집 안을 돌아다녔다.
‘사라, 우리 딸이 안 보여. 뭔가 잘못된 거 같아.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그동안 당신과 한 약속도 잊고 뭘 어떻게 살았던 걸까? 우리 딸, 우리 공주님을 지켜 주기로 당신과 약속했는데…… 여보! 우리 이브 좀 지켜 줘.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 줘!’
두려움에 손발이 떨렸다. 머릿속에선 자꾸만 이브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탕!
또 한 번 들려온 총격 소리. 덩달아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배회하던 바딤의 눈동자가 불현듯 창밖을 쳐다보았다.
위이잉.
에어쉽의 엔진 발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얼어붙은 그의 동공은 불길한 예감으로 커져 갔다.
그로부터 약 삼 분 전, 저택의 지붕 위에는 한 소녀가 잠옷 바람으로 서 있었다. 요원들은 그녀를 지상에서 올려다보며 천천히 접근 중이었다. 이빨을 드러낸 맹수에게 접근하듯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붉게 반짝이는 눈은 그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섬뜩했다. 차분하고 서늘한 소녀의 눈초리는 금방이라도 요원들의 얼굴을 베어 버릴 듯 시렸다.
─ 팬서4, 포획 준비 완료됐나?
─ 에어쉽이 작동하질 않는다. 화면에 스마트 더스트SMART DUST라는 문구가 떠 있는데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 팬서5, 이쪽도 마찬가지다. 스마트 더스트가 뭐지? 시스템이 아예 다운된 것 같다.
─ 해킹인가?
─ 그건 아니고, 시스템 자체 오류 같은데.
에어쉽 오작동으로 인해 요원들이 머리를 맞대던 그 순간, 별안간 주변 공기가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듯한 파동이 일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청아한 목소리가 바람을 쥐어짜듯 비틀며 송곳처럼 날아들었다.
─나가.
흠칫 놀란 요원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내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붕 위로 향했다. 소녀는 그 위에서 하늘을 걷듯 바람을 휘감은 채 서 있었다. 꼿꼿하게 편 등과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녀는 누가 봐도 이 영역의 지배자였다. 요원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집에서 당장 나가란 말이야!
작은 맹수가 발톱을 세웠다. 그녀가 잇새로 내보인 송곳니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위협적이었다. 핏빛 눈동자에 담긴 얼음장 같은 살기. 대원들은 홀린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납고 위험한 짐승, 그럼에도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가?
그 와중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리더가 통신기를 붙잡고 말했다.
─ 팬서1이 전원에게…… 아무래도 래빗이 ESP 능력을 쓰고 있는 듯하다.
머릿속에 각인된 소녀의 붉은 눈이 공포심을 자아냈다. 환각을 보여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가, 호흡이, 전신을 지배하는 듯 떨쳐 낼 수 없을 뿐.
─ 모, 몸이 뜨겁습니다.
─ 저도 숨을 못 쉬겠습니다.
그건 대장인 팬서1도 마찬가지였다.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의 혈류가 역류하는 듯 뜨거웠다. 안구가 뽑히는 것 같았고 정수리 부근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요원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타이탄은 가사용 로봇을 이용해 저택 밖으로 나왔다. 저택 시스템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 마비된 상태였다. 그가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건 이제 이 가사용 로봇뿐이었다.
─ 아가씨, 에어쉽으로 가세요. 섬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아가씨께서 전속력으로 달리실 경우 승강장까지의 예상 시간은 약 15초 정도입니다.
“안 돼. 아빠가 아직 집 안에 있잖아.”
─ 저들이 노리는 건 아가씨입니다. 박사님은 상관없어요.
“내가 없어지면 저 사람들은 분명 아빠를 해코지할 거야. 아빠를 지켜 줘야 돼.”
─ 일단 아가씨부터 피한 후에…….
이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담이 그랬어, 아빠는 지금 마음에 병이 들어서 아픈 거라고. 엄마를 사랑한 만큼 가슴속에 상처가 난 거라고. 그런 아빠를 우리가 기다려 줘야 한댔어. 지켜 줘야 한다고 말이야!”
담담한 듯 말하던 이브의 목소리가 살짝 울먹임에 젖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담담한 척 코를 훌쩍이며 일어섰다. 저런 강단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제 모친, 사라였다.
타이탄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인공지능이 향수를 느끼는 게 가능할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기계적 결함의 반증인가? 명령도 없이 사라에 관한 메모리를 뒤적이던 그는 로그를 지우며 침묵했다.
─ 팬서4! 래빗을 포획한다!
저격수인 팬서4가 에어쉽 문을 수동으로 벌컥 열었다. 그의 어깨에는 기다란 마취총이 걸쳐 있었다. 깜짝 놀란 이브가 홱 돌아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팬서4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숨을 멈추더니, 가까스로 ‘탕!’ 총구를 당겼다. 이브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그에게 소리쳤다.
“나가라고 했잖아!”
분노에 찬 소녀의 목소리는 그들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대기가 물결을 치며 파동을 일으켰다. 소용돌이치듯 일어난 광풍은 요원들의 이마를 때리며 흩어졌다. 머리가 깨지는 듯 강력한 두통이었다. 반고리관이 붕 뜨는 듯 균형 감각이 사라졌다. 안 그래도 괴로워하던 지상의 대원들은 주저앉더니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브는 오른쪽 어깨에 꽂힌 마취탄을 보더니 분노에 찬 눈으로 에어쉽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어깨에 마취탄이 꽂힌 채로 지붕 위를 달렸다. 그리고 단번에 도약하여 팬서4가 타고 있는 에어쉽으로 뛰어들었다.
말도 안 되는 거리를 날아서 뛰어드는 이브의 모습에 팬서4는 황급히 총을 내리고 팔을 들어 막았다. 극심한 두통으로 머리가 띵띵 울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에어쉽 발판에 올라탄 이브는 여전히 오른손에 토끼 인형의 귀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나머지 한 손으로 휘청거리는 팬서4의 머리를 밀었다.
“으악!”
그는 기우뚱거리며 중심을 잃더니 에어쉽 밖으로 실족해 떨어졌다.
“마크!”
건너편 에어쉽에서 상황을 보던 팬서5가 마취총을 들더니 재빨리 이브를 조준해 쏘았다.
탕!
한 번 더 울린 총격 소리. 가녀린 소녀의 어깨에는 한 번 더 총탄이 꽂혔다.
─ 아가씨!
땅 위에 서 있던 타이탄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숨이 헉 하고 막혀 왔다. 사지에 힘이 쭉 빠지더니 호흡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졌다. 이브는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꼿꼿하게 세운 척추는 힘을 잃은 듯 흐느적거렸다. 에어쉽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자위가 뒤집히고 스르르 풀린 목이 뒤로 꺾이자, 이브는‘허억’ 숨을 뱉으며 입술을 열었다.
“타, 타이탄…… 어지러워…….”
토끼 인형이 귀를 펼친 채 너울너울 떨어졌다. 이브의 긴 머리칼이 장막처럼 펼쳐진 채 하늘을 날았다. 허공에 붕 뜬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노을 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 아담…….
감긴 눈 사이로 보이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방울 사이사이로 울먹거림이 터져 나왔다.
─ 무서워. 나 무서워.
아담의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뺨을 어루만져 주는 상냥한 손길, 잠들 때면 이마에 입을 맞춰 주는 부드러운 입술도.
─ 헤어지기 싫어. 헤어지는 건 싫어…….
밑에서 대기하며 지켜보던 팬서5는 날렵하게 이브를 낚아채 에어쉽을 향해 달렸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 래빗의 신병을 확보했다. 본부로 귀환한다.
─ 팬서3, 무사한가?
타이탄에 의해 다리 부상을 입었던 요원은 절뚝거리며 저택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목이 부러진 채 사망한 팬서4를 보고 흠칫 굳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동료를 애도하듯 바라보더니 이를 악물며 시선을 거뒀다.
─ 전원, 본부로 귀환한다.
검은 에어쉽들은 급발진을 하며 상승기류를 일으켰다. 그 뒤로 허겁지겁 뛰어나오는 바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공에 뜬 에어쉽을 보자마자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그는 벼랑 끝에 선 채, 에어쉽 꼬리에 잔영처럼 남은 구름을 보며 울부짖었다.
“안 돼! 이브!”
딸을 빼앗긴 사내는 머리를 쥐어 뽑으며 처절하게 무너졌다.
“흐어어어! 이브!”
그는 오열했다. 돌려 달라고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갈래갈래 쉰 목소리가 빗발처럼 날아들었지만 에어쉽은 하늘 저편으로 빠르게 멀어져 갔다.
─ 지옥행 열차를 탄 기분이군.
식은땀을 흘리며 상처를 지혈하던 팬서3이 중얼거렸다. 팬서2가 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가까스로 살아남아 지옥으로 향하는 기분이 어때?
─ 글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 다행이라…… 그렇군.
두 사람은 팬서4의 죽음을 다시 상기하며 잠시 대화를 멈췄다. 그러자 팬서5가 일침을 놓으며 껴들었다.
─ 농담들은 그만둬.
그녀는 비장한 목소리로 남은 대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듯 말을 덧붙였다.
─ 지금 우리는 누군가에게 지옥을 선사하고 오는 길이니까.
검은 표범, 팬서에 탄 각 대원들은 불편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이브를 데리고 비행 중이던 팬서5는 입술을 깨물며, 주저앉아 광자狂者처럼 포효하는 바딤을 힐끔거렸다.
신이시여.
부디 우리가 그에게 남은 삶의 마지막 파편을 바스러뜨린 것은 아니었기를.
통행 해제는 약 세 시간 후에 이뤄졌다. 초조함에 에어쉽 앞에서 왔다 갔다 맴돌던 아담은 군이 철수하자마자 부리나케 귀가했다.
“타이탄!”
알혼 섬의 출입이 제한되던 와중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타이탄과 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타이탄의 시스템 다운, 원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해킹.
국가 정보기관 보안 프로그램 수준의 방화벽을 탑재하고 있는 타이탄이었다. 그런 타이탄을 무장해제시켰다는 것은, 상대 역시 일류 프로그래머란 의미였다.
【알림】
현재 시스템을 복구 중입니다.
복구 31% 완료.
스마트 더스트 활성화 중.
상공에서 저택을 내려다본 순간, 아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건의 흔적들. 바이칼 호를 바라보고 있는 아치형 창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승강장에 대기시켜 놓은 에어쉽들은 자리에서 이탈한 채였다.
“아버지!”
에어쉽에서 내린 아담은 곧바로 언덕 위를 향해 달려갔다. 바딤은 그곳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로 그의 공허한 눈동자가 보였다.
“이브는요?”
스마트 더스트에도 이브의 위치가 잡히질 않았다. 타이탄이 시스템 복구 중이었기 때문에 히스토리도 확인할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바딤은 턱을 딱딱거리며 떨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담은 이를 악물었다.
“정신 좀 차려 보세요.”
“…….”
“제발 정신 좀 차리시라고요!”
그는 울분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아담은 무릎을 낮춰 바딤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제야 바딤의 눈동자가 힘없이 그에게로 향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계속 도망만 치실 거예요? 그런다고 어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아담은 잠시 울컥했는지 말을 멈췄다. 그는 바닥을 짚고 있는 바딤의 손을 쳐다보았다. 굳은살 박힌 커다란 손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유리 조각에 베인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에 박힌 흙과 돌멩이들이 피에 엉켜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아담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 채 바들거리는 그의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펴 주기 시작했다.
“이브가 잡혀간 거죠?”
그래, 안다. 이 모든 게 당신에게 있어 너무나 버거운 현실이라는 것을,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남편과 아버지라는 명찰을 떼면 당신도 아직 삼십 대 철부지 남자일 뿐이다. 평생을 연구실에서 과학과 놀던 당신에게 있어, 잇속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세상 풍파는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냥 손 놓고 계실 거예요? 이브를 이대로 그냥 뺏기실 거냐고요!”
움찔 턱을 든 바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브란 이름에 그는 눈뜨고 악몽을 꾸는 듯 괴로워 보였다.
바딤도 나름 필사적이었다. 지옥 불을 통과하듯 끔찍한 이 현실을 버티고자 그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이대로 이렇게 무너지고 포기하신다면.”
잠시 숨을 멈춘 아담은 절망에 빠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바딤의 고통을 이해해 줄 여유 따윈 없었다.
아담은 고개를 풀썩 떨어뜨리는 바딤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 매몰차게 말했다.
“전 아버지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돌아선 아담은 손가락 끝에 묻은 바딤의 피와 눈물을 옷에 슥 닦아 냈다. 저벅저벅 걷는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바딤은 끅끅거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눈초리에 담긴 환멸과 회의가 그에게 있어선 되레 한 줄기 희망과 위안이었다. 나약한 아버지의 엉덩이를 걷어차 줄 정도로 자란 녀석의 존재가 든든했다. 부친의 뺨을 때려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할 놈이었다. 바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흐르는 눈물 사이로 이를 악물었다.
‘그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브를 되찾아야지. 사라, 당신도 이곳에 있었다면 그렇게 소리쳤겠지? 신기하게도 여보, 우리 아이들은 모두 당신을 쏙 빼닮았어. 다행이야, 약해 빠진 내가 아닌 당신을 닮아서. 정말 다행이야…….’
언덕 끝에 오른 아담은 멍한 눈동자에 끝없는 수평선을 담았다. 서걱거리는 입안에 바람이 스며들었다. 메마른 바람결에 바닥에 꽂혀 있던 바람개비가 뽑힐 듯 흔들렸다. 알록달록한 종이 날개가 바람을 타고 스륵스륵 돌아가고 있었다.
다물린 그의 입술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 사이로 스치는 바람개비 날개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떨어지는 눈물에 젖어 돌아가는 종이 날개가 입술에 닿으며 흐느끼듯 바람 소리를 흘렸다.
쉬릭쉬릭.
조각 바람에 숨죽인 울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스르르 몸을 숙인 아담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황혼에 태양이 잠겼다. 바람이 노래를 멈췄다. 산들바람에 춤추던 바람개비가 움직임을 그쳤다.
백야는 끝났다.
이브가 없는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