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8/21)

Chapter 2

바딤과 사라는 아담을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미 홈스쿨링을 받고 있는 중이었지만 아무래도 학교에 갈 필요가 있다는 게 사라의 주장이었다.

너무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바딤의 모습에 아담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흐뭇한 얼굴로 그러라고 하는 그의 태도가 이브를 독차지할 마음에 기뻐하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강력한 경쟁자가 학교로 사라지니 이제부터야말로 제대로 아빠 노릇을 할 수 있겠다면서 그는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만 갈게요.”

아담은 조용히 의견을 피력했다. 바딤은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과일을 먹던 사라 역시 눈이 동그래졌다.

“왜?”

잠시 대답을 주저하던 아담은 거실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이브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아직 제가 없으면 이브가…….”

“그건 걱정 마라. 이브도 어느 정도 컸고, 나랑 타이탄이 눈을 떼지 않을 거니까.”

바딤의 말에 아담은 그게 더 걱정이라는 얼굴이었다.

“네가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으니 이브가 점점 더 어리광쟁이가 되잖아. 오빠랑 떨어져 있는 거에도 좀 익숙해져야지. 눈만 뜨면 ‘아담 어디쪄?’ 이러기 바쁘니 나 원참.”

어린 딸의 표정을 따라 하며 혀 짧은 소리를 하는 바딤의 모습에 사라는 마시던 과일 주스를 뿜었다.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툴툴거리는 바딤을 보며 사라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최근 느끼는 것이지만, 자식이 둘이 아니라 셋인 느낌이었다. 큰 아들, 작은 아들, 그리고 막내딸.

곰처럼 큰 첫째 아들은 매일같이 저렇게 질투하기 바쁜 반면, 둘째 아들은 이제 그런 시기 어린 시선에는 익숙해졌는지 아예 제 아버지를 달래고 어르는 수준에 이르렀다. 바딤의 이런 유치한 질투를 하루 이틀 겪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박사님.”

말없이 예쁜 얼굴로 거실의 이브를 빤히 바라보던 아담이 별안간 그를 불렀다.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바딤은 살짝 눈을 치켜떴다.

“스마트 더스트는 아직이죠?”

몇 년째 ‘광역화’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바딤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응시했다.

“제가 한번 해 봐도 될까요?”

아담이 눈을 마주치며 묻자 바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장난기가 사라진 그의 눈초리가 어느새 매서워졌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담을 바라보았다. 일 얘기를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까다롭고 철저한 바딤이었다. 그건 지난 세월 곁에서 쭉 지켜봐 온 사라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네가 해 보겠다고?”

“네.”

바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내색은 안 했지만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으며 ‘스마트 더스트’에 매달려 오고 있었다. 이제 이 벽 하나만 넘으면 될 것 같은데, 그 마지막 허들 하나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솔직히 살면서 이런 패배감을 맛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구렁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스마트 더스트는 그에게 있어 아킬레스건이었다.

바딤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불쾌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깨너머로 몇 년 보았다고 벌써 자만하게 된 거냐? 내 일생의 프로젝트다. 장난처럼 우습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렇게 딱 잘라 말한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담의 시선을 회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외면한 그의 속눈썹은 말 못할 감정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꽉 쥔 주먹에서 흘러나온 치욕스러운 기분. 어금니를 꽉 문 그의 동공은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충혈됐다.

바딤이 연구실에 아담을 데리고 들어가기 시작한 건 이브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였다. 아담의 흡수력은 놀라웠다. 기초 공학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홀로 깨우쳤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모든 연구 기록과 논문을 이해할 수준으로 성장했다.

아담의 천재성을 알아본 바딤은 몸소 그에게 영재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은 뛰어난 조수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달아서 돌아왔고, 그가 보지 못한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듯 짚어 주었다. 현재 타이탄의 다음 세대로 만들고 있는 슈퍼컴퓨터는 이미 아담과 공동 작업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걸 완성하게 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아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하면서, 그는 내심 묘한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절묘한 통찰력, 기발한 사고의 전환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 버린 듯한 지적 능력. 언제부터였을까? 자신보다 이 어린아이가 더 먼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담이 한 뼘 한 뼘 성장할수록 자신의 시야는 우물 안처럼 좁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그를 뿌듯하게 만들기보다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말 아담이 스마트 더스트를 완성하면 어떡하지?’

아담의 질문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뇌리를 스친 질문이었다.

‘아담이라면 성공할지도 몰라.’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과 굴욕감이 그의 영혼을 움켜쥐었다.

‘어쩌다가 이런 치졸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일까?’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스마트 더스트’는 영원한 미완의 작품으로 남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란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부끄러운 속내는 스스로를 벌레보다도 못한 졸렬한 인간으로 전락시켰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아담의 잔잔한 목소리가 바딤의 귓가를 어루만지듯 스며들었다.

“스마트 더스트가 박사님께 있어 얼마나 의미 있는 프로젝트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어요. 일생의 업적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보태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담은 투명한 눈동자로 바딤을 응시하더니 미안한 듯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바딤의 눈매가 일그러진 건 그 순간이었다.

‘어찌하여 신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이 아이를 내려 보내신 것일까?’

질투, 원망, 좌절, 그러한 감정들은 일생 겪어 보지 못하고 살았다. 다른 이들의 시기 어린 시선을 받는 건 늘 자신의 입장이었다. 그랬던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시기하고 원망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신께서는 나로 하여금 이 어린 소년을 이토록 증오하게 만드시는가?’

한편 사라는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팔짱을 낀 채 둘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남편의 속내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대견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담은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예쁠까? 뭐가 문제예요, 여보? 아담의 실력과 재능은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잖아. 당신이 이 아이를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나보고도 그랬잖아요, 예전 연구소 동료들보다 아담이 더 믿음직스럽다고.”

그녀는 바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딱딱한 얼굴로 곁눈질하던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사라는 그런 남편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당신 말이야. 혹시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지만 가장 귀하고 보람된 일이 뭔지 알아?”

바딤은 그게 뭐냐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라는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바로 한 사람을 완성시키는 일이야.”

그녀는 벽에 걸린 채 영상처럼 움직이는 아담과 이브의 사진을 보며 꿈꾸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입력된 공식과 수치대로 산출되는 아이는 없는걸. 그럼 그 아이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일 거야. 부모가 기대하는 기대치와 아이가 보여 주는 산물은 늘 어긋나기 마련이라잖아. 반대로 부모가 기대하는 바보다 월등히 뛰어난 아이도 존재하는 법이고 말이야. 스마트 더스트는 분명 당신의 업적 중 하나가 되어 역사에 남겠지. 하지만 아담과 이브는 우리들의 살아 숨 쉬는 역사가 될 거야. 저 아이들이 후손을 남기고, 또 그 후손이 후손을 남기고…….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는 거야. 왜냐하면 저 아이들은 우리들의 분신이고, 우리 사랑의 결정체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사라의 눈동자를 보던 바딤의 눈빛이 수면에 잠기는 노을처럼 깊게 일렁였다. 가슴에 잠식된 검은 액 덩어리가 하얗게 불식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사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나 보다. 그녀는 늘 그에게 벅찬 깨우침을 안겨 준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수치로 접근하는 그와 달리,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했다. 그녀가 내미는 온기와 사랑은 그의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었다.

바딤은 그런 아내를 품에 꽉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들이 후손을 남기고, 또 그 후손이 후손을 남기고…….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는 거야.

잠시 후,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바딤은 결정을 내린 듯 살며시 눈꺼풀을 열었다.

“타이탄.”

─ 네, 박사님.

“스마트 더스트의 공동 관리자로 아담의 이름을 넣도록 해. 오늘부로 아담은 스마트 더스트 관리에 있어서 나와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

─ 알겠습니다.

아담은 놀랐는지 커다란 동공으로 바딤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헛기침을 한 바딤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뭔가 떠오른 듯 뒤를 홱 돌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박사님이 뭐냐?”

“아…….”

아담은 뜨끔한 눈빛을 지으며 사라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바딤이 어려웠다. 그에게 있어 바딤은 아버지라기보다 연구실 내의 교수님 내지는 엄격한 선생님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아담은 사라에게 구조 요청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저 턱을 괸 채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어머니 소리는 잘만 하면서.”

바딤은 서운한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아담을 흘끔 쳐다보았다. 혼을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린 모양이었다. 아담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자 사라가 눈을 흘기며 팔꿈치로 잽싸게 바딤의 옆구리를 찔렀다. 흠칫한 바딤은 코를 훌쩍이더니 허공을 쳐다보며 슬그머니 아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이브 아닌 아담에게 다정한 손길을 나눈 것은. 아담 역시 적지 않게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어색한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내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의 눈을 피하며 뺨을 붉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라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뼈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의 손등 위로 눈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그녀는 행여나 두 사람이 볼까 봐 잽싸게 고개를 돌려 눈 주변을 훔쳤다.

“타이탄, 방금 두 사람 모습 잊지 말고 영상으로 남겨 놔. 알았지?”

─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등 뒤로 몰래 속삭이던 사라는 아담과 눈이 마주치자 빨개진 눈으로 활짝 웃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아담은 뭔가를 감지한 듯 조마조마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모처럼 생기를 띤 채 웃는 사라를 향해 차마 불안한 표정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에게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부디,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웃을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열세 살이 된 아담은 학교에서 체육과 문화 예술, 정치와 우주 물리를 배웠다. 그 외의 것들은 집에서 타이탄과 페트로비치 부부가 가르쳤다. 부자는 닮는다고 했던가? 피도 안 섞였는데 어쩜 저리 비슷할 수 있는지, 사라는 신기하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했다.

아담은 신기할 정도로 체육에 소질이 없었다. 대신 제 아버지처럼 공학에 뛰어났다. 또한 예술적 감각도 탁월했다. 아담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면 종종 알혼 섬의 주민들도 나발루니예 언덕 밑에 모여 귀를 기울이고는 했다. 그러다가 연주가 끝나면 그들은 소리 없이 흩어져 모습을 감췄다.

아담은 학교에서 조용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늘 남들 눈에 띄었다. 또래 여학생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의 외모에 뺨을 붉혔고, 남학생들은 그를 견제하면서도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홀로 있을 때 그는 주로 창밖을 내다보며 턱을 괸 채 사념에 빠지곤 했다. 사실은 멍하니 이브 생각─주로 이브의 간식이나 저녁 메뉴 등 장보기 생각─이나 한 것뿐이지만, 급우들 눈에는 그가 철학적인 사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혼자 앉아 있는 아담을 보면서 주변 아이들은 누구 하나 선뜻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장막 같은 묘한 아우라가 존재했다. 혼자만 차원이 다른 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기품 있는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선망 어린 시선과 위화감을 형성했다.

자각하진 못했지만 그는 늘 관심과 시선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건 결코 그가 바라는 평화로운 일상이 아니었다.

어느 날이었다. 도서관에서 홀로 조용히 책을 읽던 아담의 앞으로 늘씬한 인영 하나가 걸어왔다.

“안녕?”

웃음이 밴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정다운 인사에 아담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펼쳐져 있던 책 페이지가 사라지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시야에 나타났다.

“나는 사샤라고 해. 네 이름은 아담 맞지?”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 밑에 입은 적갈색 체크 치마를 움켜쥐며 수줍은 듯 물었다.

검게 구불거리는 곱슬머리에 뽀얀 피부, 그 위에 연하게 도드라진 주근깨. 깊고 커다란 눈망울과 웃을 때 시원하게 보이는 치아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아담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담 페트로비치와 이야기를 할 때면 투명한 눈동자에 포박되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자아이의 얼굴이 어쩜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정교한 붓으로 그린 듯한 얼굴선에 반짝이는 구슬을 빚어서 넣은 듯한 눈동자. 장밋빛 입술은 예쁘다 못해 육감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사샤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혹시 이따가 시간 괜찮으면 수업 끝나고 같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아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빨간 불빛이 깜빡이는 스마트 워치를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변한 아담의 안색을 보면서 사샤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는 파리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말을 흘린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사샤는 멍한 얼굴로 홀연히 사라진 아담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구석에서 몰래 지켜보던 인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어조로 불쑥 말을 던졌다.

“대체 저런 녀석의 어디가 좋다는 거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으쓱이며 나타난 소년의 이름은 알렉스였다. 알렉스는 이 상황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쳇’ 하면서 아담이 나간 출입구 쪽을 노려보는 그의 눈매가 심상치 않았다.

눈부신 금발에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알렉스는 열넷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체격이었다. 또래보다 발육이 빠른 데다가 난폭하고 거친 성격의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폭군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그의 앞에서 고양이 앞 생쥐처럼 꼼짝도 못했다. 간혹 알렉스의 못된 성미에 반발하고 나선 학생들은 예외 없이 얻어터져 곤죽이 되곤 했다.

그럼에도 많은 여학생들은 그의 출중한 외모 때문에 난폭한 성정을 매력의 일환으로 여기며 좋아했다. 그런 그녀들을 마다하지 않고 건드리는 알렉스지만 그도 내심 마음에 쭉 담고 있는 상대가 있었다.

“쟤 완전 사차원이라던데. 방금도 스마트 워치에 대고 뭐라 뭐라 중얼거리면서 나갔잖아. 통화 모드도 아닌데 정신병자처럼 혼잣말로 말이야.”

“아담은 천재야.”

“천재들은 보통 괴짜에 찌질이지.”

“뇌까지 근육으로 찬 네가 뭘 알겠니?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힘자랑밖에 없으면서.”

“뭐…….”

사샤는 콧방귀를 뀌며 알렉스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런 사샤를 불러 세우던 알렉스는 이미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분한 표정을 짓더니 “제기랄!” 하고 벽을 주먹으로 쾅 쳤다. 씩씩대며 숨을 내쉬던 알렉스는 창밖을 흘끗 내다보았다. 하얀 셔츠에 적갈색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아담이 넥타이를 풀며 에어쉽 승강장으로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발걸음을 보아하니 서두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알렉스는 잇새로 ‘쳇’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사나운 동공에는 허둥지둥 아담의 뒤를 쫓아가던 사샤의 모습이 잔영으로 맺혀 있었다. 파도처럼 떠오른 분노가 그의 눈빛에 거세게 일렁였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사샤는 저런 괴짜 샌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것인지. 아무래도 그 녀석이 한심하게 나가떨어지는 걸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머릿속으로 아담의 얼굴이 피범벅으로 물들 때까지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때리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그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시니컬한 미소를 짓는 그의 눈빛은 소년치고 사뭇 오싹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좋아.’

살벌하게 웃은 그는 주먹을 털며 도서관 밖으로 향했다. 한결 기분 좋은 눈빛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에어쉽 승강장으로 향하던 아담은 도서관에서 꽤 멀어지자 다시 스마트 워치에 대고 입술을 열었다.

“이브는 찾았어?”

─ 네, 도련님.

“전에도 말했잖아. 이브의 위치가 안 잡히면 포인트 Z부터 체크해 보라고. 거기는 아직 스마트 더스트가 잡지 못하는 구멍 중 하나라고 몇 번을 말해?”

─ 체크를 했는데, 아가씨께서 이미…… 죄송합니다.

눈치 빠른 타이탄은 재빨리 사과부터 올렸다. 우뚝 걸음을 멈춘 아담은 불길한 예감에 대뜸 물었다.

“이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 그게…….

아담의 경우, 대답을 3초 이상 뜸 들이면 오히려 화를 더 키우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 몇 년의 데이터를 살펴보면, 평소 느긋하고 참을성이 많은 아담은 이브에 관한 일에 한해서는 이중인격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반대의 반응과 성향을 보였다. 때문에 타이탄 역시 아담에게 이브에 관한 일을 보고할 때는, 절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편이었다. 매도 일찍 맞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뭐?”

이윽고 너무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지른 아담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의 뒤를 막 쫓아온 사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파리해진 아담의 얼굴색을 보고선 머뭇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아담은 침착함을 되찾은 뒤 차분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이브는? 이브는 괜찮아?”

─ 무릎과 오른쪽 팔에 멍이 드셨고, 이마와 뺨에 찰과상을 입으셨습니다. 상처 부위 사진입니다.

허공에 사진이 뜨자 아담은 손을 움직여 휙휙 확인했다. 마지막 장에 핏방울이 맺힌 이브의 뺨과 긁힌 이마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는 얼굴을 구기며 속상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말괄량이 꼬마 숙녀께서 또 혼자 말도 없이 알혼 섬을 탐험하다가 구르고 넘어진 모양이었다.

“지금 에어쉽 승강장으로 가는 길이야. 당장 조퇴할 테니까 어머니께 말씀드려 놔.”

─ 멋대로 조퇴하시는 거면 나중에 혼나실 텐데요. 저번 달에도 수업 중간에 말없이 오셨다가 한 소리 들으셨잖아요.

“그거야…….”

한 번만 더 멋대로 무단 조퇴를 했다가는 알아서 하라고 으름장을 놓던 사라의 얼굴이 떠오르자, 아담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한편 좀처럼 대화에 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뒤에 서 있던 사샤는 살그머니 아담의 어깨를 향해 손가락을 쿡 찔러 넣었다.

“무슨 일 있니?”

“아.”

그녀가 온 걸 미처 몰랐는지 아담은 놀란 표정으로 사샤를 돌아보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녀는 뒷짐을 지며 얼굴을 붉혔다. 또래 이성에게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기는 처음이었다. 명실상부 교내의 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사샤였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의 등을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쫓아가다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담의 기품 있는 눈빛과 마주치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녀가 여기에 왜 있는지조차도 의문을 품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여동생이 조금 다쳐서.”

아담은 급한 표정을 짓더니 미안하다는 듯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번이나 먼저 자리를 뜨게 되는 것에 대한 나름의 사과인 모양이었다. 그는 고갯짓으로 짤막한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사샤는 덥석 아담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때로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까지 불필요하게 알아채는 그녀의 섬세함과 통찰력이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조퇴 허가가 필요한 거지? 그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그러자 돌아서던 아담이 번개처럼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는 차분했지만 반색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아까보다 그의 눈동자가 훨씬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사샤는 공작새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대신, 다음에 나랑 같이 케이크 먹으러 간다고 약속해.”

“그래.”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촉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멍하니 서 있던 사샤는 조금 허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쉽잖아?’

어쩐지 공허한 승낙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단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어째서 이 남자애가 이렇게도 좋아진 것일까? 중간중간 그의 스치듯 머무는 투명한 눈빛에 그녀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달콤한 커피 향처럼 가슴을 은은하게 적시는 눈동자였다. 비록 먼저 마음을 사로잡힌 사샤였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이 아이 역시 결국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노라고.

잠시 후 그녀는 왼쪽 눈을 찡긋 감더니, 무용수처럼 우아한 자세로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걱정 마, 지금 바로 보내 줄 테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 이 학교 이사장이시거든.”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남겨진 사라의 일기】

일곱 살이 된 이브는 눈만 뗐다 하면 사고를 치고 다녔다. 말괄량이 녀석이 어찌나 겁도 없는지, 매일매일 어디서 떨어지고 굴러 다쳐 오기 일쑤였다. 그런 이브를 찾아오는 건 늘 아담의 몫이었다. 아담이 자리에 없을 때에는 스마트 더스트가 그의 눈이 되어 이브를 지켰다. 아직 미완의 작품이었던 스마트 더스트는 알혼 섬의 97%를 커버했다. 그러자 영특한 이브는 3%의 구멍을 찾아 숨기 시작했다. 두 남매는 매일같이 숨바꼭질을 했다. 이브는 스마트 더스트의 허점을 찾아 숨었고, 아담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술래가 되어 어린 이브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브!”

나발루니예 언덕 아래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갈파의 동굴이라 불리는 이곳은 본래 무당 할멈이 제의를 지내는 곳이었는데, 이제 나이를 먹은 그녀는 동굴까지 몸소 올 형편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갈파의 동굴은 알혼 섬 내에서 스마트 더스트가 작동하지 않는 소수의 구역 중 하나였다. 동굴 주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자기장이 감지되었는데, 그게 스마트 더스트의 진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곳은 이브가 아담의 눈을 피할 때마다 숨어드는 작은 놀이터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브!”

에어쉽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하여 착지한 아담은 해변과 맞닿은 동굴 입구를 향해 뛰었다. 그가 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이브가 또다시 밖으로 나와 숨어 버린 것이다. 오늘만 두 번째로 이브의 행적을 놓친 타이탄은 일찍이 제 잘못을 고한 채 아담에게 싹싹 빌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 타이탄이 두려워하는 존재는 바딤보다 아담이었다. 바딤은 인공지능에게 있어 약간의 불완전함은 인간들의 예측 불허의 측면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는 그들의 불완전함을 단순한 오류로 보지 않고 그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필수 요인 중 하나로 생각하여 가만 두는 편이었다. 반면 아담은 타이탄의 시스템에 작은 오류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바로 수정을 가했다. 그는 어떻게 보면 기계보다도 더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아담이 유일하게 쩔쩔매는 존재가 하나뿐인 여동생 이브였다. 천재 소년도 어린 여동생의 행동만큼은 제어하지 못했다.

“오늘 저녁은 카레를 하려고 했는데, 이브가 안 보이니 할 수 없네?”

─ 저녁 메뉴를 바꾸시겠습니까?

타이탄이 눈치 빠르게 묻자, 아담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야 할 것 같은데?”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헉’ 하고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근처에 귀여운 원숭이 한 마리가 숨을 졸이며 숨어 있는 것 같지?”

곁눈질을 하던 아담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번졌다.

“파스타로 할까?”

─ 메뉴를 변경합니다.

“안 돼!”

그 순간, 이브의 목소리가 황급히 울려 퍼졌다. 예상대로였다. 동굴 안에서 팔짱을 끼고 턱을 괴던 아담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음을 참았다. 그는 모른 척하는 얼굴로 천천히 동굴 밖을 빠져 나왔다. 그러다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고선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동굴 입구를 지붕처럼 덮고 있는 바위 위에 이브가 얼굴을 쏙 내민 채 걸터앉아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아담의 얼굴은 밀가루 반죽처럼 창백해졌다.

“거긴 또 어떻게…….”

“이브는 카레 먹을 거야.”

뚱한 표정으로 이마에 잔뜩 힘을 준 이브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아담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그녀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

“내려갈 테야, 지금.”

“뭐?”

당황한 아담은 안절부절못하고 주위를 살폈다. 황급히 타이탄을 부르려던 그의 시선이 뭔가를 포착하고 얼어붙었다.

‘맙소사!’

이브가 바위 끝을 붙잡고 엉덩이부터 지면을 향해 내리고 있었다. 물장구를 치듯 발을 버둥거리는 그녀를 보자마자 아담은 시체처럼 굳은 얼굴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바로 정신을 차린 그는 황급히 이브의 밑으로 달려와 팔을 뻗었다.

“위험하잖아,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내려갈 수 있어.”

인중과 턱에 힘을 준 꼬마 숙녀는 ‘흡!’ 하고 손에 힘을 주더니 벼랑 끝에 매달리듯 바위 끝자락을 붙잡았다. 그 밑에서 양팔을 벌린 채 기다리는 아담은 본의 아니게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기절할 듯 안색이 파리해진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였다. 이브의 검은 머리칼이 말 꼬리처럼 찰랑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담의 가슴도 덜컹거리며 쿵쾅쿵쾅 뛰었다.

“제발 조심해, 응?”

그는 애원하듯 소리치며 안절부절못하는 손을 뻗었다가 벌리기를 반복했다. 그야말로 속이 바짝바짝 타는 심정이었다.

“뛴다?”

재잘거리듯 말한 이브는 슥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담이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이브는 작은 이마를 힘껏 구기더니 눈 밑을 찌푸렸다.

“뛸 거니까 비키라고.”

“뭐?”

“방해되니까 아담은 저쪽에 가 있으란 말이야.”

이브가 한쪽으로 나오라며 턱짓을 하자, 아담은 충격받은 듯 멍하니 굳더니 비틀거리며 뒤로 한 발, 한 발 물러섰다. 생각해 보니 매번 밑에서 발만 동동 굴렀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브를 받아 낸 적이 없던 아담이었다. 때문에 딱히 항의할 입장도 못 됐다. 괜히 밑에서 받아 주겠다고 했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이브가 더 크게 다칠 가능성도 있었다.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아담은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물러섰다.

착지할 자리를 빤히 쳐다본 이브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녀는 새초롬하게 다문 입가에 보드라운 미소를 맺었다.

이브는 철봉에 매달리듯 유연한 몸을 앞뒤로 흔들며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빨리 반동을 이용해 공중으로 휙 날아올랐다. 그 광경을 본 아담은 너무 놀라서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부석이 되어 얼어붙고 말았다. 반면 여유롭게 공중에서 빙그르르 제비 돈 이브는 몸을 동그랗게 말더니 완벽한 자세로 지면에 ‘착!’ 하고 착지했다.

─ 전보다 훨씬 안정적이십니다, 이브 아가씨.

타이탄이 칭찬을 하며 치켜세우자 우쭐해진 이브는 승전하고 온 어린 아마존 전사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타이탄과 대화를 나누며 까르르 웃었다. 그러다가 정면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담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얼어붙었다.

“이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아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담은 항상 다정하고 상냥한 편이었지만 저런 목소리와 눈빛을 할 때는 절대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이브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사리 같은 손을 모은 채 눈을 좌우로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담이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의심 어린 빛을 띠었다. 또 저 영특한 머리로 무슨 잔머리를 굴리려고?

“이리 와, 이브.”

그가 미간에 힘을 준 채 그녀를 부르자, 눈치를 살피던 이브는 슬그머니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미소를 본 아담은 반사적으로 눈의 힘이 슬쩍 풀렸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이브는 눈을 데룩데룩 굴리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양팔을 벌린 채 “오빠아!” 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구 엉킨 긴 머리를 휘날리며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이브의 모습에 아담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 커졌다.

“뛰지 마, 천천히 와!”

저러다 또 넘어질라, 무릎 까질라. 화난 척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다시 조마조마한 기색을 띠었다. 돌처럼 굳어 있던 모래가 싱그러운 빗방울에 진흙이 되어 녹아내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흐르는 물에 씻긴 화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담의 품속에 쏙 안긴 이브는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의 보드라운 뺨에 볼을 마구마구 비볐다. 아담은 그런 이브를 끌어안으며 언제 화났냐는 듯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늘 그래 왔듯 이브의 깜찍한 애교에 그의 머릿속은 다시 하얀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위험한 곳에 올라가지 말랬잖아. 또 다치면 어머니 아버지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아담이 비밀로 해 주면 되지.”

개구쟁이 이브는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그를 흘겨보더니 간지럼 타듯 까르르 웃었다. 원숭이처럼 그의 어깨에 매달려서 빙그르르 도는 그녀는 곡예를 하듯 유연하고 가볍게 움직였다. 그녀는 그의 팔이며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재롱을 부렸다. 방울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키스 세례를 하는 이브에게 아담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항복하며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비밀로 해 줄게.”

이브는 그럴 줄 알았다며 배시시 웃었다. 늘 알면서도 져 주는 아담.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그만큼은 절대적인 그녀의 편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불가항력으로 끌려 다니는 아담은 그럼에도 행복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이브의 머리칼에서는 바람 냄새가 났다. 알혼 섬의 자유로운 향기. 발그레한 뺨에서는 꽃 내음이 풍겼고, 생기가 도는 입술은 항상 윤기로 반짝였다. 그리고 석류처럼 붉은 눈동자는 언제나 섬을 에워싼 바이칼 호수를 응시하고는 했다.

“이브는 언제 갈 수 있어?”

“알혼 섬 밖에 가 보고 싶어?”

“응.”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녀에게 있어 알혼 섬은 너무나 좁았다. 아담이나 바딤이 에어쉽을 타고 섬 밖으로 갈 때면 이브는 그저 침울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려 깊은 그녀는 자신이 떼를 쓰면 사라가 슬퍼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한 번도 억지를 부린 적이 없었다.

“엄마, 아빠는 왜 이브를 섬 밖에 못 나가게 해?”

아무리 그녀가 영리하다 한들 모든 걸 이해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바딤과 사라의 깊은 속마음을,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어린 그녀에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이브가 결혼할 때쯤 되면 보내 주시지 않을까?”

아담은 그녀를 무릎에 앉힌 채 엉킨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주며 말했다.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이던 이브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이브는 아담하고 결혼할 건데?”

이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나랑?”

“응.”

그녀를 빤히 보던 아담은 이브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힘껏 끄덕이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이브는 아담의 신부가 될 거야.”

작은 주먹에 힘을 꼭 주고 다짐하는 그녀를 보며 그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너무 사랑스러우면서 동시에 굉장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쿡쿡 터져 나오는 미소가 그의 행복한 심정을 대변하며 울려 퍼졌다.

그런 아담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이브도 같이 헤헤 웃었다. 왠지 몰라도 아담이 굉장히 행복해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스스로 뭔가 뿌듯한 일을 한 양 덩달아 기분 좋아졌다.

그렇게 한참 웃던 아담은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박사님이 알면 날 죽이려 드실 거야.”

─ 네, 그러실 거라 생각합니다.

타이탄이 촉새처럼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 대답했다. 눈치탄이라 불리는 그는 간혹 재치를 지나치게 부리다가 혼이 나고는 했는데, 지금이 바로 딱 그러한 상황이었다. 막상 타이탄이 맞장구를 치자 불쾌해진 아담은 차가운 눈빛으로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타이탄에게 나지막이 명했다.

“방금 대화 기록이나 지워.”

─ 알겠습니다.

“영구 삭제해. 괜히 백업에 남기지 말고.”

─ 당일 13시 7분 22초부터 13시 9분 58초까지의 기록을 영구 삭제합니다.

아담의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가만히 듣고 있던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아담은 밖에서 아빠를 박사님이라고 불러? 집에서는 아버지라고 하면서.”

“음.”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아담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브를 바라보더니 생긋 웃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미묘한 어조로 다정하게 되물었다.

“글쎄…… 왜일까?”

오묘한 미소로 답하는 그를 보면서,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기가 가득한 투명한 눈동자 속에 그 대답이 들어 있는 게 분명한데, 모호하고 아름다운 미소로 답을 감춘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이브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아담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에 그녀가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흘러들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느 음악 소리보다도 그가 사랑하는 음색이었다.

Breaking News: 미국 동부에서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삼십 대 남성이 감염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출국을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의료진은 감염자가 출국한 지 약 40시간 후에 첫 번째 발작을 일으켰으며, 현재 상태가 매우 위중한 편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한편 CDC는 신종 바이러스의 치사율이 여전히 94%에 달하고 있으며, 남성 감염자의 경우 한 번 감염된 이후에는 회복된 케이스가 전무하다고 발표해…….

사샤는 많은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가 주로 듣는 수업은 무용, 음악 그리고 역사였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미녀인 그녀는 성적 역시 발군이었다. 모든 면에서 너무나 완벽했던 탓일까? 의외로 그녀는 실제 데이트 신청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즉, 오늘 아담과의 만남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생애 첫 데이트인 셈이었다.

“사샤,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인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평상시보다 풍성해 보이는 머리칼이 그녀의 작고 하얀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다. 사샤는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대체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 거야? 시곗바늘이 멈춘 것만 같았다. 벌써 애꿎은 입술만 세 번째 덧바르는 중이었다.

평소 하릴없이 거울만 들여다보는 여학생들을 경멸하던 그녀가 오늘만큼은 거울 공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울과 창밖만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한 약속이라도 있니?”

옆자리의 소녀는 궁금증을 못 참고 다시 물었다.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사샤는 그저 비밀스러운 미소만을 보였다. 그때 수업 종료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사샤는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벌떡 일어났다.

“사샤?”

마침 수업을 정리하려던 역사학 교수 레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흔세 살로 러시아와 프랑스 혼혈인이었는데, 아직 미혼이었다. 레오는 다른 학생들보다 사샤에게 유난히 친절하게 대했다.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오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그저 이사장의 손녀인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뿐이었다. 사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니?”

그는 잔뜩 상기된 사샤의 뺨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겨우 마흔셋인 그는 벌써 머리가 은발로 하얗게 세어 있었다. 레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몇몇 여학생들은 키득거리며 영락없는 할아버지라고 쑥덕거렸다. 사샤는 그런 그녀들을 곁눈질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들은 잽싸게 장난기를 지우고 사샤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별일 아니에요, 교수님. 그저…….”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발견했는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사샤는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더듬더듬 의자에서 나오며 말했다.

“저…… 교수님, 수업은 끝난 거죠?”

“그래, 어디 몸이 안 좋기라도 한 거니? 어라, 사샤?”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사샤는 이미 뒷문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학생들과 레오는 바람처럼 사라진 그녀의 빈자리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시선들을 주고받았다.

그사이 사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는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뭔가를 발견한 듯 창밖에 손가락질을하며 주변 여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소녀들은 흥분으로 고조된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모여들었다. 공깃돌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몸을 쭉 뺀 그녀들은 창밖을 훔쳐보며 흥미진진한 광경에 눈을 빛냈다.

“아담!”

사샤는 예쁘게 정돈한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잊은 채 부리나케 뛰었다. 행여나 그가 약속을 잊고 먼저 가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이 난 탓이었다. 다행히도 아담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돌아본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평온하고 차분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저녁놀의 바다처럼 잔잔하고 안온한 그의 눈빛은 때때로 소년의 탈을 쓴 청년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 특유의 아우라는 주위 사람들의 숨을 앗아 가는 묘한 힘이 있었다. 사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눈부신 보석에 영혼을 뺏긴 것처럼 그의 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담은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서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갈까?”

사샤는 발그레 젖은 뺨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담은 장밋빛 입술에 스치듯 미소를 머금었다.

아담은 또래 소년들보다 몸집이 작았다. 반면 모델처럼 키가 큰 사샤가 아담 옆에 서니 그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남들이 보면 옆집 누나와 동생 같다고 웃을지도 모를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두근거리고 좋을 뿐이었다.

사샤는 작은 보폭으로 걸으며 그의 팔에 슬그머니 팔짱을 끼워 넣었다. 아담이 놀란 듯 멈칫 서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부끄러움을 감추며 활짝 웃어 보였다.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에 극도로 예민한 아담이었지만, 일순 그의 머릿속에는 이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어제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그녀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만 참자, 이브를 위해서.

그렇게 되뇌인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반면 도서관 옥상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알렉스에게는 단 하루를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는 말을 섞는 것조차 벌레와 소통하듯 혐오감을 표출하던 그녀가, 저 녀석 앞에서는 수줍게 닫힌 꽃봉오리를 열 듯 몸을 움츠리며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얼음장 같은 눈동자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부르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에어쉽 준비해 놔.”

옥상에는 그와 항상 몰려다니는 패거리들이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어쩌려고?”

“어쩌긴.”

성정이 사나운 알렉스는 걸핏하면 버럭 화를 내고 소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패거리 중에서 그나마 야생마 같은 그의 고삐를 쥐고 조율하는 존재가 요한이었다. 요한은 알렉스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그는 차분한 성격에 성적도 우수한 모범생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그가 알렉스 패거리의 한 명이란 사실을 미스터리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괜히 일이 커지는 게 아닌지 우려가 된 요한의 물음에 알렉스는 잇새로 잔혹한 미소를 머금으며 한 단어, 한 단어 끊어 내듯 내뱉었다.

“다시는 사샤 주변에 얼씬 못하도록 저 녀석 몸뚱이에 깊은 가르침을 새겨 줘야지.”

그 말에 뒤에서 쭈그리고 앉아 하품을 하던 남학생이 킬킬 웃더니 핀잔을 주었다.

“저런 약골은 잘못 건드리면 진짜 골로 가.”

“골로 가면 골로 가는 거지 뭐.”

“저 녀석, 무슨 유명한 박사 아들이지 않아?”

요한은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이에 다소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학생이 다시 혀를 날름거리며 비웃었다.

“어이, 알렉스는 대제국 스타시티의 후계자님이시라고.”

스타시티란 이름이 나오자 요한은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이 녀석 정도의 배경이면 뭐가 두렵겠는가? 일개미처럼 평생을 바지런히 굽실거려야 하는 그와는 태생부터 다른 놈이었다. 요한은 쓴웃음을 감추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바닥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페트로비치 박사의 저택 거실 벽면에는 뉴스 헤드라인들이 하나둘씩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기사 내용은 대체로 몇 년째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것들이었다.

동시에 조용한 집 안 어디선가에선 웅얼거리는 소리도 새어 나왔다. 사라와 종종 이메일을 주고받는 조이 반즈 박사의 목소리인 듯했다. 듣기로 그녀는 얼마 전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서 시베리아 연구소를 나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연구실에서 나온 바딤은 하품을 하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개미 하나 지나다니는 소리 없이 고요하다. 조금 오싹할 정도였다.

“타이탄, 사라와 이브는?”

그러다가 그는 ‘아!’ 하며 스스로 이마를 찰싹 때렸다. 타이탄은 지금 스마트 더스트와의 연동을 위해 시스템 점검 및 업데이트 중이었다.

“사라! 이브!”

온 집 안을 헤매던 바딤의 발걸음이 온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둘이 나란히 낮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고 있을 두 사람을 떠올린 바딤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우리 공주님하고 왕비님께서는 잘 주무시고 계시려나?’

그는 웃으며 살금살금 온실로 들어섰다. 요즘 이브와 통 놀아 주지 못했는데, 오늘 간만에 딸과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온실 문이 활짝 열리고 행복하게 웃던 그의 눈가는 싸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사라?”

어지럽게 너부러진 꽃송이들 사이로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꺾인 팔이 보였다. 그 옆에는 풀어진 해초처럼 검은 머리칼이 힘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라!”

정신없이 달려간 바딤은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핏기 하나 없는 사라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입가에는 정체 모를 검은 피가 굳은 채 맺혀 있었다. 그는 일단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댄 뒤, 가슴에 귀를 붙이고 맥박부터 확인했다. 느릿하지만 숨이 붙어 있었다.

그는 사라를 급히 안아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팔과 다리가 목각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 덜렁거렸다. 손끝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거무튀튀했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마른 채 까칠까칠했다.

“맙소사! 안 돼…… 여보, 정신 차려!”

그때 문 앞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브가 동상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걸 보니 놀이방에서 혼자 놀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딤이 사 준 인형의 귀만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이브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딤이 경황없는 얼굴로 허둥지둥 사라를 안고 나가자, 이브는 그가 툭 치고 나간 어깨를 불안한 듯 잡으며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어, 엄…… 마?”

젖은 채 떨려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본능적으로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지한 듯했다.

“엄마? 아빠?”

석류처럼 붉은 그녀의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잠시 후 밖에서 에어쉽 발진 소리가 들려오자 이브는 인형을 내던지듯 놓으며 바딤을 쫓아 나갔다.

그렇게 폭풍이 몰아친 듯 한바탕 난리가 났던 집 안은 순식간에 텅 비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에는 살짝 열린 서재의 문틈 사이로 사라에게 온 음성 메일이 재생되며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 사라? 잘 지내니? 나야, 조이. 일전에 내가 말한 것들은 페트로비치 박사님과 상의해 봤어? 현재 왓슨 제약회사에서는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을 무료로 돌봐 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동의를 얻어 치료제 및 백신 개발에 힘쓰고 있어. 너도 하루 빨리 이곳으로 와서 치료를 받는 게 좋을 듯해. 일전에 타이탄이 보내 준 네 혈액 검사 및 조직 검사 결과를 봤는데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객혈이나 토혈은 없었니? 네가 감염된 바이러스는 다른 환자들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변종으로 보여서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학회에 보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에어쉽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이브는 기류에 정신없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걷어 내며 승강장 쪽으로 뛰어나왔다.

“아빠!”

“이브, 지금 당장 아담에게 연락해라! 알았지?”

바딤은 문 열린 에어쉽 밖으로 몸을 내밀며 소리쳤다. 응급 상황 모드Emergency mode가 작동된 에어쉽 내부에서는 사라가 누운 채 호흡기를 달고 있는 게 보였다. 이브는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걸 꾹 눌러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급발진을 한 에어쉽이 쏜살같이 상공으로 날아오르자, 이브는 뺨에 묻은 닭똥 같은 눈물을 쓱쓱 닦아 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충혈된 눈에 애써 힘을 주며 소리쳤다.

“타이탄! 시스템 점검 중지해, 당장!”

─ 업데이트 67% 완료. 시스템 점검 및 업데이트를 중지하시겠습니까? 중지할 경우,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합니다.

“알았으니까 중지하고 당장 아담한테 연락해. 엄마가 많이 아프단 말이야!”

이브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자, 거실 벽 스크린에 타이탄이 입체 영상 모습으로 나타났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도련님과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스마트 워치를 몸에 착용하고 계시지 않는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울먹이고 있던 이브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사라와 판박이였다. 평소 온화한 성품의 사라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바딤보다 훨씬 단호하게 일을 처리했다. 보안 팀 내에서 그녀의 별명이 작은 흑표범이었던 이유 역시, 한번 화가 나면 180도 돌변하는 그녀의 엄격한 성미 때문이었다.

타이탄은 마지막으로 저장된 아담의 위치를 GPS로 나타내며 다시 보고했다.

─ 바이칼 호수 근방에 위치한 디저트 카페입니다. 도련님께선 약 15분 전까지 이곳에 계셨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공에 뜬 입체 영상 지도를 골몰히 살펴 본 이브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교 중에 딴 길로 샌 적이 없던 아담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언제나 재깍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었는데.

그녀의 눈빛이 불길한 기운을 띠었다. 이브는 오동통한 손을 마주 잡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짧게 명했다.

“에어쉽 준비해, 타이탄.”

─ 안 됩니다, 아가씨. 박사님께서 아가씨께서는 절대 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하신 걸 잊으셨습니까?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잖아!”

그녀의 붉은 눈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날카로이 빛났다. 역시 사라의 딸다웠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하는 재빠른 판단력은 타고난 본능이었다. 이브는 초조한지 엄지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아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던 우리 두 사람.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신변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타이탄.”

이브가 앵두 같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재촉하자, 침묵하던 타이탄은 전자음 같은 신음 소리를 끙끙거리며 흘렸다. 그는 마지못한 어조로 한숨을 쉬듯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아가씨.

* * *

사샤와 아담을 태운 에어쉽은 어느 카페 앞에 착륙했다. 그들이 온 곳은 평소 사샤가 자주 가던 디저트 카페였다. 반짝이는 바이칼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아담한 카페는 진주를 입속에 품고 있는 조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얀 조개 속에 위치한 영롱한 진주알처럼 원형 유리 벽으로 이루어진 카페는 들어서자마자 달콤한 향내를 풍겼다.

“뭐 먹을래?”

“아, 스트로베리…….”

무심코 대답하던 아담의 목소리가 우뚝 멈췄다. 그는 유리로 된 테이블에 떠 있는 메뉴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브는 스트로베리 캐럿 케이크!

습관이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딸기 좋아하니?”

사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아담은 묘한 미소를 머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그는 단것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저 달콤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끔 먹는 것뿐이었다. 이브가 좋다면 뭔들 못 먹으랴. 돌도 씹어 먹으라면 씹어 삼킬 수 있었다.

생각에 잠긴 채 한층 다정한 눈빛을 짓는 그의 모습에 사샤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가슴속 깊이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 행복에 젖은 미소. 그 순간 그녀의 가슴에는 미묘한 질투심이 서렸다.

“참, 여동생은 이제 괜찮니?”

“응, 괜찮아.”

건성으로 대답한 아담은 다시 딸기 케이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민에 잠긴 듯한 눈초리였다. 사샤는 서운한 표정으로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바로 옆에 나란히 서 있는데 공기처럼 무시당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의식은 줄곧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디가 안 좋았었는데?”

사샤의 질문을 못 들었는지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꽤 진지한 눈으로 메뉴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망설인 끝에 아담은 ‘포장 주문’을 선택했다. 아까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딸기 케이크였다.

“누구 주려고?”

사샤가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담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자 규격과 디자인을 선택하며 대답했다.

“동생.”

이번 달에는 별로 군것질시킨 게 없으니 괜찮겠지? 타이탄 말로는 이브가 또래보다 발육이 빠르고 체질상 살이 잘 찌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단걸 너무 좋아하는 그녀가 매번 걱정되었다. 이가 튼튼해서 다행이지. 차라리 한두 개 썩었으면 무서워서 덜 먹을 텐데. 그나저나 이브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낮잠 자고 있으려나? 타이탄에게 한번 물어볼까?

“동생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 동생 이름이 뭐야?”

멈출 줄 모르는 사샤의 거듭된 질문에 그의 시선이 드디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집요한 그녀의 행동이 조금 성가신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또 짧게 답했다.

“이브.”

막상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일순 당황한 사샤는 “으응?” 하고 되물었다.

“이브 페트로비치, 내 동생 이름.”

그 순간, 사샤의 눈이 뭔가를 깨닫고 살짝 커졌다.

아담과 이브.

마치 운명처럼 서로에게 묶인 듯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남매인 두 사람한테 지금 내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렇구나, 한번 만나 보고 싶다.”

그녀는 태연한 척 웃으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아담 여동생이라면 아주 예쁠 것 같아.”

그런 사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담은 딱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브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그녀에게 괜한 반감이 들어서 되레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물론 사샤는 그런 속사정을 상상도 못할 테지만. 아마도 알면 정신병자라고 질색을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예뻐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보석.

아담은 복잡한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괴었다. 그는 무료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며 또 딴생각─정확히 말하면 이브 생각, 그가 종일 하는 잡생각의 90%는 늘 이브다─을 했다.

‘이브는 뭘 하고 있을까? 오늘은 제발 얌전히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반짝이는 바이칼 호수를, 아니, 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의 시선은 금방이라도 훌쩍 가 버릴 듯 멀게 느껴졌다. 불안해진 사샤는 저도 모르게 마주 앉은 그의 손등을 살그머니 건드렸다. 그러자 아담은 무심하게 늘어진 눈초리로 그녀를 비스듬히 흘겨보았다.

사샤는 생각했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의 투명한 눈동자는 섬뜩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하다고. 감정이 없기에 편견이 없어 보였고, 편견이 없기에 세상을 거울처럼 맑게 비추는 눈동자였다. 그 속에 오롯이 그녀만 비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담, 넌 그런 걸 느껴 본 적 있니?”

그 사람이 나만 생각하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담았으면 하는 것. 내가 그 사람을 가지고 싶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나를 가졌으면 하는 것.

“고양이는 말이야. 껴안으려고 하면 손을 할퀴고 냅다 도망쳐 버려. 밤에는 내 머리맡에 와서 몰래 잠들면서 막상 쓰다듬고 예뻐해 주려고 하면 찬장 위로 올라가 버리거든. 사랑의 술래잡기라고 해야 하나? 애정을 받지 못해 갈구하는 게 아니라, 주지 못해 애가 타는 심정 같은 거…… 혹시 아니?”

그녀의 말에 아담의 연갈색 눈동자가 번지는 물감처럼 흐려졌다. 가만히 상념에 잠기던 그는 무슨 기억을 떠올렸는지 착잡한 눈빛을 지었다. 정말 몇 번이나 할퀴고 물려 봤다는 듯 심란한 표정이었다.

‘있구나.’

사샤의 눈초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예뻐하는 고양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어쩌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단순한 질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향한 이 오롯한 마음이 사랑이란 예쁜 말로만 포장될 것은 아니라고.

불어오는 실바람을 손으로 쥘 수는 없듯이, 져 가는 노을의 정취를 그릇에 담을 수 없듯이. 아담, 너는 그런 존재인 걸까?

열네 살의 사샤는 그날, 생애 처음으로 강렬한 소유욕을 경험했다. 그것은 날것의 감정이었고 다듬어지지 않는 정서였다. 그것은 어쩌면 소녀인 그녀가 여자가 되는 첫 발걸음의 순간이었는지도 몰랐다.

우울한 기분도 잠시, 두 사람밖에 없던 하얀 조개 카페에 돌연 불청객이 난입했다.

“안녕, 사샤?”

한적한 오후의 낭만을 깨뜨리는 음습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알렉스였다. 사샤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허리를 숙였다. 진하게 풍기는 텁텁한 향수 냄새에 절로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지금부터 나와 아담은 함께 갈 곳이 있으니 사샤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위협 아닌 위협이었다. 사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반면 아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알렉스와 그의 무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는 창가 쪽을 향해 살짝 기울인 채, 긴 손가락과 손바닥으로는 여전히 턱을 괴고서.

“그렇지, 아담?”

표정에 변화 한 번, 몸짓에 미동 한 번 없는 아담을 보며 알렉스는 눈초리를 매섭게 부릅떴다. 겁을 먹었을 게 분명한데 왜 티가 안 나지? 먹잇감은 자고로 벌벌 떨며 조아려야 제맛인데, 저 녀석은 도대체가 사냥할 재미를 주지 않는다.

보다 못한 사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쏘아 붙일 기미를 보이자, 반듯한 자세로 창밖을 보며 침묵하던 아담이 고요히 입술을 열었다.

“그냥 있어, 사샤.”

“하지만…….”

알렉스와 시선을 교환한 아담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어느새 인공지능 웨이터가 테이블 앞에 와 있었다. 주문과 계산 기능만 탑재된 로봇인지라 인간의 팔다리 움직임만을 흉내 낼 줄 아는 기계에 가까웠는데, 그 와중에 웨이터 의상까지 차려입은 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는 아담이 주문한 조각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놓더니 꾸벅 허리를 조아리고 사라졌다. 기다렸던 조각 케이크 포장 상자를 쥔 아담은 차분한 얼굴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함께 갈 곳이 어딘데?”

“가 보면 알아.”

한쪽 눈을 찡긋한 알렉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섰다. 그의 패거리인 남학생들 네 명은 아담을 연행하듯 양쪽에서 팔을 잡고 이끌었다. 출입구에 서 있던 로봇 웨이터는 마지막까지 깍듯하게 90도로 인사하며 아담을 배웅했다.

─ 감사합니다. 또 방문해 주세요.

알렉스가 아담을 데려간 곳은 카페에서 그다지 머지않은 호숫가였다. 사샤는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따라왔다. 요한은 혀를 끌끌 찼다. 차라리 돌아가서 발 빠르게 어른들을 불러오는 게 나을 텐데, 순진한 그녀는 알렉스가 얼마나 악질인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냥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상대로 으스댈 줄이나 아는 불량배 정도로 생각했겠지. 그는 불안에 젖은 눈으로 주위를 살피는 사샤를 애석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사샤의 시선은 계속해서 알렉스가 양손에 쥐고 있는 돌멩이로 향했다. 부싯돌을 치듯 양손에 쥔 돌을 거듭 맞부딪치는 그의 행동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불안하게 뛰었다.

“이게 뭔지 알아?”

반짝이는 바이칼 호수를 뒤로한 채 바위에 걸터앉은 알렉스가 꺼낸 건 작은 알약이 들어 있는 캡슐이었다. 맞은편에 선 아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건 말이야, 천사의 입맞춤Angel kiss29)이라고 하는데 고문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아. 상처도 상흔도 없거든. 일종의 환각제지. 엔젤 키스는 네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 보여 줄 거야. 의식 깊숙한 곳, 그 밑바닥까지 헤집어서 말이야.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고문이지.”

알렉스는 잔인하게 웃으며 기대된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광기와 희열로 얼룩진 그의 표정에서는 비뚤어진 보복심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고문’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익히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는 상대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기대하며 이미 흥분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절대 깰 수 없는 악몽이 뭔지 말이야.”

그러나 그를 차분하게 바라보는 아담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알렉스를 더 화나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고고한 성자처럼 투명한 눈빛으로 그를 흡사 짐승 혹은 벌레를 보듯 쳐다보았다.

“무섭지 않은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두려움을 못 느끼는 거야?”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던 알렉스는 캡슐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를 바득 갈았다. 그는 고개를 번뜩 들더니 번개처럼 다가와 아담의 정수리를 쥐어 잡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뽑을 듯 잡아당겨 고개를 뒤로 젖힌 알렉스는 아담의 턱을 잡고 억지로 벌렸다.

“그만둬, 알렉스!”

다른 남학생들에게 붙잡힌 채 서 있던 사샤가 몸서리를 치며 소리쳤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닥쳐.”

그는 이미 아담의 입속에 억지로 캡슐을 밀어 넣고 있었다. 쿨럭거리며 거부하던 아담은 그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턱을 닫고 삼키게 하자 결국 기침을 하면서 고꾸라졌다. 목울대를 부여잡으며 쓰러진 그는 삼킨 캡슐을 뱉고자 구역질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동시에 아담이 차고 있던 스마트 워치가 ‘삑─삑─’ 하고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알렉스의 시선이 스마트 워치로 향했다. 그는 삑삑거리는 스마트 워치를 노려보더니 아담의 손목에서 그것을 끊어 내듯 떼어 버렸다.

“이건 대체 뭐야? 누가 요즘 이런 촌스러운 시계를…….”

그 순간, 아담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주먹을 꽉 쥐더니 알렉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게 없으면 타이탄으로부터 이브와 저택에 관한 보고를 들을 수 없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담은 이를 악물고 덤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둘의 체구 차이는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었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던 아담은 ‘퍽!’ 소리와 함께 알렉스의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코피가 나는 얼굴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던 아담은 다시 한 번 그의 발길질에 쿨럭이며 쓰러졌다.

“시계…… 내놔…….”

아담은 바닥을 기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사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악에 받친 눈으로 알렉스를 노려보는 아담의 모습이 날개를 찢긴 천사처럼 처절했다.

사샤는 눈에 차오른 눈물을 훔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속수무책으로 맞는 아담의 모습에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비릿하게 웃은 알렉스는 손가락을 풀더니 아담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는 창백한 아담의 얼굴을 사정없이 난타하기 시작했다. 눈이 풀린 아담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알렉스의 주먹질을 겨우 받아 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피와 구토가 튀어나왔다. 아담은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엔젤 키스의 약효가 돌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가 경련을 일으키며 전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알렉스, 제발 그만해!”

사샤가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눈물이 오히려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담의 어깨를 잡고선 연달아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곁눈질로 사샤를 지그시 응시하는 그의 눈초리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만둬, 알렉스!”

숨을 몰아쉬던 아담이 앞으로 몸을 푹 꺾었다. 그는 그대로 털썩, 의식을 잃고 말았다.

─네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 보여 줄 거야. 의식 깊숙한 곳, 그 밑바닥까지 헤집어서 말이야.

옆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요한은 팔짱을 낀 채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일명 ‘정신고문제’라고 불리는 엔젤 키스는 사실 적국 스파이나 흉악 조직원들을 심문 및 고문하기 위해 만들어진 약품이었다. 심신이 미성숙한 청소년에게 섣불리 투여했다가는 자칫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자아낼 수도 있었다.

정신을 잃은 아담은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입가 주위에는 좀 전에 한 구토로 인해 타액과 분비물이 묻어 있었다. 뒤집힌 눈깔 사이로는 흰자위가 얼핏 보였고 경련은 점차 심해져 몸 전체가 튕기듯 심하게 들썩였다.

요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슬슬 말려야 하나?’

그는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꺼내 매만지며 눈초리 사이로 미간을 좁혔다. 가엽게도 아담은 이미 천사가 초청한 악몽 속에 갇혀 버린 듯했다.

─엘! 뭐하는 거야!

─어째서 내가 아니라 너지? 어째서 방주의 길잡이는 내가 아니라 널 선택한 거냐고! 넌 우리 중에 제일 약하고, 제일 어린데! 단지 네가 그들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족 모두가 널 따라야 한다는 거야? 네가 없다면 모두 어쩔 수 없이 날 추대하게 될 거야. 너만 사라진다면…… 그래, 모성에 도착하기 전에 너만 없어져 준다면!

─그만둬! 엘!

─이거 놔, 미카엘! 죽어, 죽어 버려!

무슨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스프링처럼 몸을 튕기며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그 광경을 연극처럼 느긋하게 관람했다.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성인군자처럼 고고한 척 맑은 눈으로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던 저 녀석의 이면에는, 남들이 모르는 질척질척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에 가까운 공포 어린 기억임이 분명했다.

옆의 남학생으로부터 쇠방망이를 건네받은 알렉스는 들썩거리며 자학하고 있는 아담의 등을 방망이로 퍽퍽 후려갈겼다. 뼈가 부러지고도 남을 강도였다.

“앞으로 사샤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마. 아니, 그냥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게 어때?”

본의 아니게 이 사건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샤는 새파랗게 젖은 낯빛으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덜덜 떨면서 알렉스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살기가 그득한 눈초리였다. 지금 손에 칼이 쥐어저 있다면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목덜미를 찔렀을 정도로.

‘나쁜 새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녀석이었다. 알렉스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흉악한 사이코였다.

그때 사샤의 눈이 뭔가를 발견하고 멈칫 커졌다. 상공에서 에어쉽 한 기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것은 주변을 수색하듯 독수리처럼 근방을 빙빙 돌며 뭔가를 찾아 헤맸다.

‘설마…… 아담을 찾는 건가?’

그녀의 눈동자에 희망이 깃들었다.

* * *

같은 시각, 바이칼 호 상공에서는 타이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연거푸 흘러나오고 있었다.

─ 조심하십시오, 아가씨.

에어쉽 문을 연 이브는 두루미처럼 목을 쭉 빼고 아래를 내다보았다.

“여기가 아담의 위치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이야?”

─ 그렇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작은 절벽 위에 위치한 하얀 조개 카페를 발견했다. 이브와 타이탄은 주변 구석구석을 살피며 아담의 흔적을 추적했다. 그러다가 휘갈기는 머리칼 사이로 뭔가를 발견한 이브는 작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타이탄!”

그곳에는 아담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몇 명이 모여 있었다.

─ 도련님으로 보이는 인물이 있습니다. 99.9%의 추정입니다.

“그럼 아담이란 소리잖아!”

다급해진 이브는 타이탄이 에어쉽을 완전히 착륙시키기도 전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당황한 타이탄이 그녀를 등 뒤에서 부르는 게 들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 도련님한테 또 혼나게 생겼습니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쏜살같이 낙하하는 이브의 뒤를 쫓았다.

개구리처럼 양팔 양다리를 쭉 뻗고 떨어지던 이브는 콩 벌레처럼 몸을 말더니,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아담!”

그녀는 바람처럼 뛰었다. 모래를 밟고 달리는 발은 헐벗은 맨발이었다. 뺨을 스치는 머리칼 사이로 고집스러운 눈이 유난히도 빛났다.

멀리 심한 경련과 구토를 하며 몸을 들썩이는 인영이 보였다. 그를 둘러싼 채 낄낄거리는 남학생들도, 그리고 발길질을 하며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는 커다란 덩치도.

아닐 거야.

절대 아닐 거야.

잠시 후, 그녀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불안감을 떨치려 애쓰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누군가의 손가락질에 알렉스는 한바탕 운동을 한 것처럼 땀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에도 닿지 않는 작은 소녀의 등장에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가 들고 있는 방망이에 묻은 피를 본 이브의 눈동자는 이미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흙과 모래로 뒤덮인 바닥엔 뭉개진 딸기 케이크가 터진 상자 밖으로 나와 굴러다니고 있었다.

격분과 노여움으로 인해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온몸의 피가 분노로 들끓는 기분. 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늘 붉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은 부글거리는 용암처럼 암적색으로 짙게 가라앉았다.

알렉스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소녀를 보니 언젠가 영화에서 본 흡혈귀가 떠올랐다. 사람인 듯 사람 같지 않은 기묘하고 오싹한 느낌 같은 것이, 혹은 이질적인 그 꺼림칙함이.

“꼬마야, 여긴 위험하니 그냥 가라.”

그는 인심 쓰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알렉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옆에 쓰러져 있는 아담을 이어서 바라보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꼬마야?”

성가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알렉스는 짜증스럽게 구시렁대며 발걸음을 떼었다. 제대로 겁을 줘야 도망갈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미 겁을 먹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된 건가?

“알렉스!”

그때 요한이 경고하듯 그를 붙잡아 세웠다. 왜 부르냐고 돌아선 알렉스는 요한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자 인상을 구겼다.

“왜?”

요한은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았다. 탁월한 정치 감각으로 일개 평사원에서 이사진까지 오른 제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는 무엇이든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데 우수한 재능이 있었다. 요한은 맨발에 부릅뜬 눈으로 서 있는 이브를 곁눈질로 살펴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만 가자.”

“뭔 시답지 않은 소리야?”

겨우 일고여덟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 소녀는 팔다리가 가늘고 호리호리했는데 동그스름한 뺨에는 아직 젖살이 가득했다.

‘다만 섬뜩한 것은…….’

소녀의 눈동자였다. 그녀의 눈두덩 주위로 몰린 혈관들이 마치 힘줄처럼 도드라져 튀어나와 있었다. 확대된 붉은 동공은 눈자위까지 뒤덮었는데 언뜻 보면 눈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짐승한테 파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한 모습이었다.

“무슨 병 걸린 애 아니야?”

“징그러워.”

“그러게,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알렉스! 이만 가자.”

불안한 얼굴로 요한의 곁으로 모여든 남학생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재촉했다. 그 뒤에 홀로 서 있던 사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동생이 조금 다쳐서.

어제 아담이 중얼거리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이브?”

그때였다.

“알렉스, 뒤!”

뭔가를 본 요한이 놀라서 소리치자 등을 벅벅 긁고 있던 알렉스가 놀라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는 조랑말처럼 무섭게 달려오는 이브를 발견했다.

“뭐, 뭐야!”

알렉스는 놀란 나머지 쇠몽둥이를 공중에 대고 휘둘렀다. 이브는 작은 체구로 미끄러지듯 그의 무릎 안쪽으로 파고든 뒤, 나무를 타듯 알렉스의 허벅지를 잡고 그의 등 위로 기어올랐다. 그녀는 단숨에 양다리로 그의 목을 조르듯 감쌌다. 그리고 허공에서 상체를 들어 올려 그의 머리를 팔로 감고 더 세게 졸랐다.

순식간에 목이 졸린 상태로 머리를 잡힌 알렉스는 ‘퉁강!’ 하고 쇳소리와 함께 방망이를 놓았다.

“크, 크흑!”

목덜미가 시뻘게진 그의 눈알은 튀어 나갈 듯 부푼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브는 그의 어깨에 목마를 탄 자세로 정확하게 허벅지를 조였다. 그녀는 숨 하나 헐떡이지 않은 채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브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목소리로 싸늘하게 속삭였다.

“우리 오빠를 저렇게 만든 게 너지?”

“무, 뭐? 쿨럭! 너 당장 내려오지 못해…….”

“아담을 괴롭히는 놈들은 내가 다 혼내 줄 거야.”

알렉스는 숨을 못 쉬겠는지 침을 흘리며 괴로운 듯 미간을 힘껏 찌푸린 채 이브의 종아리를 덥석 잡았다. 무슨 어린애 힘이 이렇게 센지 목구멍이 조이다 못해 목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너, 이거 모, 못 놔!”

숨을 헐떡거리던 알렉스는 그녀의 양다리를 잡고 뜯어내듯 당겼다. 어쨌든 힘으로는 알렉스가 훨씬 우위였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종잇장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가녀린 소녀는 부딪힌 충격이 컸는지 꿈틀거리며 쉽사리 일어서지 못했다.

“후우.”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된 알렉스는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을 몰아쉬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쇠몽둥이를 들었다. 저깟 계집애의 머리통쯤이야 방망이질 한 번이면 으깨질 수준이었다.

“망할 계집애……. 가만두지 않겠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흙을 움켜쥔 이브는 바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알렉스는 흠칫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뺨에서 핏방울이 또르르 떨어진 그녀의 얼굴에는 섬뜩하리만큼 살벌한 눈초리가 실려 있었다.

“저, 저게…….”

발칙하기 짝이 없다. 알렉스는 눈 밑 근육을 옴짝거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제압당한 현 상황이 못내 불쾌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럼에도 그의 발은 자꾸만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알렉스.”

유유자적 다가온 요한은 알렉스가 들고 있던 쇠방망이를 낚아채듯 뺏었다. 부드럽고 정중한 손놀림이었다.

“너도 체면이 있지, 저런 어린애랑 뭘 다투고 있는 거야?”

요한의 말에 알렉스는 잠시 이브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눈알 대신 핏덩이로 채워진 듯한 그녀의 눈자위는 몇 번을 보아도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괜히 목덜미를 한번 어루만져 본 그는 쭈뼛 선 털들을 쓸어 내듯 양팔을 툭툭 쳐 내렸다. 그는 요한의 등쌀에 못 이기는 척, “쳇.” 하고 돌아섰다.

“그만 가자. 이쯤 했으면 됐어.”

요한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마무리를 맺었다. 알렉스는 알았다면서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러나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밤톨만 한 계집하고 몸싸움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기선 제압을 당한 꼴이라니.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손으로 벅벅 긁은 그는 애꿎은 패거리 중 하나에게 성질을 부렸다.

“에어쉽은 어디 있어!”

“그게…… 갑자기 시스템 오류로 연결이 되지 않아서.”

“뭐?”

“아무래도 정거장까지 걸어가야 할 것 같은데.”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하는 소년에게 알렉스는 성난 황소처럼 날뛰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에어쉽이 갑자기 작동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면서.

─ 시스템 오류, 시스템 점검이 필요합니다. 시스템을 복구 중입니다……. 시스템 오류, 시스템 점검이 필요합니다.

“네 전공이 항공 기술이잖아. 당장 고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이건 전문 기술자가 봐야 할 수준이야. 나로서는 도저히…….”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 뒤를 따르던 요한은 곁눈질로 흘끗 뒤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여전히 바닥을 양손으로 짚고 엎드린 채 그들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터인데,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마치 밀림에서나 볼 법한 어린 아마조나 같다고 해야 할까? 혹은 한 마리의 맹견 같았다. 그 뒤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작은 짐승처럼.

마침내 긴 소란 끝에 알렉스와 무리가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샤가 황급히 이브에게로 달려왔다.

“괜찮니?”

한숨 돌리려던 이브가 사샤를 보자마자 다시 고양이처럼 눈초리를 매섭게 올렸다.

“나는 사샤라고 해. 아담, 그러니까 네 오빠 친구야.”

이브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는지 경계 어린 표정이었다. 사샤는 쓰러져 있는 아담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이게 다 나 때문이야. 알렉스가 나 때문에 아담을…….”

이브는 아담의 손을 꼭 쥔 채 사샤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훌쩍이는 사샤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흙 묻은 손으로 그녀의 뺨을 토닥토닥 쓰다듬기 시작했다.

“울지 마.”

사샤는 원숭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되레 자신을 위로하는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브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아담도 곧 괜찮아질 거야.”

사샤는 아담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이브의 자그마한 손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아담은 경련을 멈춘 채 잠든 듯 고요히 누워 있었다. 여동생의 온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한층 진정된 모습이었고 호흡도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녀는 두 볼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담을 의사한테 데려가야겠어.”

약물 복용도 문제지만 심각한 구타를 당한 상태였다. 뼈가 부러져 장기가 다치진 않았을지 심히 걱정되는 바였다.

이브는 의사라는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는 그를 보호하듯 양팔로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담은 타이탄에게 데려갈 거야.”

“타이탄?”

─ 안녕하세요, 사샤 님. 처음 뵙겠습니다. 타이탄이라고 합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인사말에 사샤는 하늘에 떠 있는 에어쉽을 올려다보았다. 눈치 빠른 그는 그새 잽싸게 에어쉽을 근방으로 이동시킨 후 대기 중이었다. 문 열린 에어쉽 내부에서 타이탄의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 실례지만 우리 아가씨를 도와 도련님을 에어쉽 내부로 좀 옮겨 주시겠습니까?

“네?”

─ 저희 아가씨 혼자서는 무리여서요.

사샤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녀는 ‘혹시 안에 사람이 하나 더 있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에어쉽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 이곳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가 그녀의 속내를 읽고 대답하자, 사샤는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서며 ‘하!’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타이탄은 두 남매와 사샤를 태우고 알혼 섬의 나발루니예 언덕으로 돌아왔다. 사샤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아치형 창을 발견하고선 인상적이란 표정을 지었다. 벽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는 그곳은 바이칼의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집 전체가 따뜻한 난로처럼 온기를 품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고였다.

그때 작은 벨소리 같은 알람음이 울려 퍼졌다. 돌아서니 허공에 타이탄의 알림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윽고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 수신음이 잔잔한 음악 소리로 깔리기 시작했다.

【알림】

영상 통화1 수신 중

Video Calling From Dr. Petrovici…….

연결하시겠습니까?

‘페트로비치 박사라면 아담의 아버님이신데.’

사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담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게다가 샤워를 마친 이브는 거실에 눕혀진 아담의 옆으로 꼼질꼼질 기어가더니 잠들어 버린 상태였다. 사샤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허공에 떠 있는 바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척한 안색으로 통화 연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은 심하게 충혈된 채 붉었고, 머리는 쥐어뜯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었다.

‘아담 때문에 걱정이 되셔서 전화하셨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고민하던 사샤는 두 손을 맞잡고 결심한 듯 심호흡을 크게 했다.

“내가 받을게요. 연결해 줘요, 타이탄.”

─ 네, 사샤 아가씨. 통화 연결하겠습니다.

오후 5시 45분, 현재 기온 섭씨 16도.

아득한 어둠.

온기 없는 침묵.

그 속에서 불거진 소리 없는 아우성.

기억의 편린이 주는 공포의 전제는 고독이다. 꽤 오랜 시간, 광활한 혼돈 속을 떠돌았던 것 같다. 끝없는 악몽을 꾸면서 괴로운 숙면을 강요받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매번 눈을 뜨는 게 불쾌했다.

지금 이 순간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열자마자 아담은 생애 첫 호흡을 하듯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아치형 창 앞에 누워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쓰러진 자신을 집으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사라가 삐뚤빼뚤 어설픈 솜씨로 퀼팅한 담요가 몸을 따뜻하게 덮어 주고 있었다. 향초를 피웠는지 아로마 향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떠다녔다. 몸을 반쯤 일으키던 그는 한쪽 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브가 팔베개를 한 채 곤히 누워 잠든 게 보였다. 코까지 담요를 덮은 그녀는 아기처럼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멍하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코밑으로 담요를 내리고 뺨을 덮은 그녀의 머리칼을 정돈해 넘겨 주었다. 그러다가 이브의 볼에 난 생채기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겁도 없이 알렉스에게 덤벼들지 뭐야, 오빠를 구하겠다고.”

뒤쪽에서 난 목소리에 아담은 고개를 돌렸다. 사샤가 흔들의자에 앉아 머그잔을 쥐고 있었다. 그녀가 어깨에 덮고 있는 담요 역시 사라가 퀼팅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솜씨였지만 이브는 토끼가 수놓아져 있는 저 담요를 제일 좋아했다.

타이탄이 타 준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아담은 네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담을 보던 사샤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누가 널 여기로 데려왔을 거라 생각해?”

그는 좀 전에 사샤가 한 말을 다시 떠올리더니, 그제야 뭔가를 깨닫고 황급히 이브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망연한 눈으로 사샤를 다시 쳐다본 아담은 황당한 얼굴로 “타이탄!” 하고 불렀다.

“설마 이브가 섬 밖으로 나왔던 건 아니겠지?”

─ 도련님, 그게…….

“이브가 알렉스한테 덤볐다는 게 무슨 소리야?”

타이탄은 벌써부터 아담의 분노 지수를 읽고 제 발 저리는 중이었다. 집에서만 볼 수 있는 아담의 본모습을 보며 사샤는 묘한 심경을 담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야.”

그녀는 빨갛게 젖은 눈시울로 아담과 그의 한쪽 품에 안긴 이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비한 붉은 눈의 여동생도 그렇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곤죽이 될 정도로 맞았던 아담 역시 상처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몽둥이로 그렇게 맞았는데 뼈에 금 간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단다. 몸이 강철로 되어 있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 일일까?

아담과 이브가 나란히 잠들어 있던 사이, 사샤는 노을빛이 비추는 그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도저히 이들 남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래된 그림책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신비롭고도 기이한 기분이었다. 괴기한 성에 사는 아름다운 두 남매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다워.”

너도,

네 여동생도.

“무슨 일 있었어?”

사샤의 눈이 울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부어 있었다. 아담은 직감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다는 낌새를 눈치챘다. 사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며 몹시 괴로워했다. 심호흡을 한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아담.”

“말해.”

“너희 어머니께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뒷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흐느끼듯 말한 그녀의 이야기에 그의 미간이 굳었다. 싸늘한 한기가 등골을 훑었다. 사샤는 울음을 터뜨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담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브를 안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 그의 품에 있던 이브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웅얼웅얼 입술을 열었다.

“엄마? 엄마가 집에 왔어?”

“이브 깼어?”

아담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직 두 분 다 안 오셨어. 더 자도 돼.”

그의 말에 이브는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꿈을 꾸듯 물었다.

“엄마는 이제 괜찮대?”

잠결에 사샤의 말을 얼핏 들은 모양이었다. 아담은 선뜻 뭐라 대답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대?”

이브는 기대에 찬 얼굴로 재차 물었다. 아직 안 오셨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싶어 목을 쭉 빼고 현관 쪽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고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아담과 사샤를 번갈아 응시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직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이해하기엔 한없이 어린 그녀에게 대체 무어라고.

“아직도 많이 아프대?”

그녀는 다시 한 번 동그란 눈망울에 근심을 한가득 담고 물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아담을 보며 이브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담? 울어?”

어느새 그의 긴 속눈썹 사이로 후드득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악다문 잇새로 힘겹게 미소를 지은 아담은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먹임에 먹힌 목소리를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브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걱정스레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 이브의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보던 아담은 울컥 쏟아지는 눈물에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으시대.”

그는 먹먹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자 이브는 안도한 듯 작은 가슴을 “휴우.” 내려놓았다.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담요 속으로 파고들며 당부했다.

“엄마 오면 깨워 줘야 돼. 알았지?”

이브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이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담은 목멘 음성으로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작은 어깨에 뺨을 묻었다.

흐르는 눈물 사이사이 터럭에서 이브의 냄새가 풍겼다. 아니, 사라의 향기다. 사라의 온기다. 사라의 기억이다. 마를 새 없이 젖은 뺨 밑으로 숨죽인 오열이 터져 나왔다. 목젖을 태운 뜨거운 울음소리 대신 어깨만 말없이 들썩였다. 이 와중에도 이브를 꽉 끌어안은 그의 손길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행여나 품에 안은 이 온기마저 잃을까 봐…….

죄책감이 들었다. 사라, 그녀는 자신이 눈밭에서 거둔 짐승이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남겨진 기록】

2080년 5월 30일

사라 페트로비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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