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2권) (7/21)

Chapter 1

서기 2073년 12월 24일 오후 2시

러시아 시베리아 연구소

이날 러시아의 시베리아 연구소에서는 세기의 발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 뇌 과학 발달 기술 팀 연구진들이 지난 십 년간의 연구 끝에 성공한 장기 프로젝트의 결과였다.

프로젝트 명 ‘솔로몬’

이는 뇌의 전산화 작업 및 이식술에 관한 연구 및 개발 프로젝트다. 우주 건설회사 스타시티의 막대한 지원하에 활기차게 진행된 솔로몬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은 냉동 보존된 뇌의 신경망을 컴퓨터에 옮기고 전산화된 뇌를 다른 인체나 로봇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간 수많은 과학자들이 동물의 뇌 전산화에는 성공했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이유는 인간의 뇌는 동물보다 신경망 보존 작업이 훨씬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신경망 세포를 도식화하기 위한 전산 작업부터가 사람의 뇌인 경우에는 그 분량과 섬세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에 대부분의 연구팀들은 난항을 겪었다.

그런데 마침내 러시아 연구진이 인간의 뇌 이식 성공 사례를 발표하면서, 전 세계 최고 과학자들은 바야흐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발걸음을 목격하게 되었다.

“정말 성공할 줄이야……. 놀랍군.”

리 박사는 전자 담배를 입에 물며 감탄 어린 웃음을 흘렸다. 그는 유리관처럼 투명한 복도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로 제1 연구동과 제2 연구동을 잇는 다리가 보였다. 그 밑에는 프로젝트 발표를 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각계의 유수 인재들로 저마다 소속 집단을 대표하여 오늘 열린 프로젝트 발표에 초청받은 이들이었다.

노벨상을 받은 최고 권위의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 각 학계의 명망 있는 교수들, 대형 제약회사의 관계자들, 정치계의 거물들과 재력가들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광경이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리 박사 또한 대형 병원과 제약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왓슨 그룹을 대표하여 참석한 경우였다.

오늘 러시아 연구진의 발표는 분명 획기적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인체에 이식하는 단계까지는 못 닿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뇌의 신경망을 컴퓨터에 옮기고 전산화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인류 과학계에 있어서 커다란 도약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솔로몬 프로젝트의 성공은 대중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것이 분명했다. 이를 대중화시키기에는 수반되는 문제점들이 너무 많았다. 매번 부딪치는 과학과 윤리의 갈등, 수십 억이 될 이식술 비용을 일반인들이 지불할 수 있을 리가 없을뿐더러 빈부 격차가 이제는 사람 수명까지 좌지우지한다는 불만이 제기될 게 뻔했다.

이것은 인류가 불멸에 도전하는 프로젝트였다. 다른 인체, 설령 로봇에라도 완전 이식에 성공한다면 정·재계의 유명 인사나 부호들은 앞다투어 번호표를 받고 줄지어 대기를 할 것이다. 스타시티가 노리는 게 그거였다. 수명의 프리미엄화. 오직 상위 0.1 퍼센트의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불멸의 삶을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장사를 하겠다는 심산이리라.

‘뭐, 보아하니 그 단계까지 가려면 아직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그나저나 바딤은 어디 있는 거야?’

연구소에 도착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실컷 말해 놓고서는 아까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엄청난 발표를 앞두고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한 여자가 걸어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러시아 연구원이었다. 리 박사는 재빨리 담배를 끄고 그녀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혹시 바딤 페트로비치 박사 못 봤습니까?”

“아, 박사님이라면.”

잠시 고민하던 여자는 눈을 굴리더니 웃으면서 투명한 유리로 된 복도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햇살에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통유리 너머로 멀리 하얀 눈에 뒤덮인 소나무 숲이 펼쳐진 게 보였다.

“숲에 가셨을 거예요. 이번에 완성된 탐사로봇 프로토타입23)을 시험 주행해 보신다고 하셨거든요.”

시베리아 연구소는 시설 부지 전체가 돔으로 바깥과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문제없는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소 밖은 하얀 눈밭이었다. 멀리 보이는 침엽수림조차 설원으로 보일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세상.

“시험 주행을 연구소에서 하지 않고 왜…….”

리 박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박사님이시잖아요.”

페트로비치 박사를 일컫는 꼬리표는 많았다.

천재 물리학자, 나노 공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건축가, 세계 최고의 로봇 공학자 그리고 시베리아의 괴짜.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닌 그는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긴 청년이었다. 옥수수 밭에서 농사나 짓는 게 어울리는 인상이지만 그의 손에서 탄생한 인공지능 작품들은 늘 상상을 초월했다.

리 박사가 탄 에어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무 숲 입구에 도착했다. 에어쉽은 은색 날개를 젖히며 천천히 하강하여 지면에 착지했다. 시베리아 연구소의 에어쉽 외관은 전체적으로 은색 바탕에 푸른색과 빨간색 띠가 입혀져 있었는데, 이는 러시아 국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지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국가에 충성했다고.’

리 박사는 혀를 끌끌 차며 에어쉽에서 내렸다. 시베리아 연구소는 이미 우주 건설회사 ‘스타시티’ 소속이나 마찬가지였다. 솔로몬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그들은 시베리아 연구소의 건물을 직접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곳 보안과 연구진의 인사 부문까지 관여하지 않는 게 없었다.

바닥을 밟고 선 리 박사는 곧바로 ‘에취!’ 하며 재채기를 했다. 방한복을 착용했지만 뼈까지 시려 오는 추위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는 머리에 쓴 방한모를 고쳐 쓰며 코를 훌쩍였다.

─ 리신 박사, 어서 오시게.

소형 로봇 하나가 공중에서 반짝이며 날고 있었다. 리 박사는 피식 웃었다. 장난스러운 말투로 인사한 그것은 페트로비치 박사의 드론이었다. 그는 드론의 카메라에 대고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멀쩡한 연구소 놔두고 왜 눈밭에서 실험 주행을 하는 거야?”

─ 스마트 더스트를 써 보려면 이런 숲 속이 최적화된 환경이거든.

“스마트 더스트?”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 박사의 눈이 뭔가를 발견하고 커졌다. 장난감 헬기처럼 날고 있는 드론 뒤에서 누군가 흙을 밟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고 등장한 장신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바딤 페트로비치 박사였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시베리아 연구소와 스타시티 회사의 마크가 나란히 박혀 있었는데, 누군가 억지로 쥐어뜯으려고 시도한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늘어져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리를 본 바딤은 해맑게 웃으며 친구를 맞이했다. 두 사람이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서로를 얼싸안으며 반가움을 표한 이들은 천천히 산책을 하며 소나무 숲 안쪽으로 진입했다.

잠시 후, 빽빽한 소나무들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열띤 토론을 나눴다. 그간의 안부 인사도 생략하게 된 건 바딤의 어깨 위에서 날고 있는 드론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던 리 박사 때문이었다.

“즉 여기서 미세 나노 입자가 뿜어져 나오는 거거든. 이 미세 나노 입자들은 마치 우산처럼 주변 공간을 휘감게 되지. 이걸 스마트 더스트라고 불러. 숲에 깔린 스마트 더스트는 연구소에 있는 슈퍼컴퓨터의 눈이 되어 숲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돼.”

바딤은 손 안의 드론을 360도로 빙그르 돌려서 보여 주며 설명했다. 리는 나무 밑동에 앉은 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은 바딤의 손을 떠나 허공 위를 비행하는 드론을 좇아 두리번거렸다. 마치 바람 속에 떠다니는 나노 입자들을 찾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는 감탄에 젖은 눈빛으로 웃으며 말했다.

“연구소에서는 네가 무슨 탐사로봇 시험 주행을 하러 나갔다고 하던데.”

“이건 나 혼자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는 거야. 자칫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을 녀석이라서 말이지. 게다가 광역화 작업이 영 쉽지가 않아.”

한마디로 정부와 스타시티에는 비밀로 한 채 혼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란 말이었다. 잘만 만들면 정말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품 같은데. 눈을 반짝이던 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말해도 바딤은 듣지 않을 것이다. 물욕에 찌든 세상과는 거리가 먼 녀석인 데다가 돈과 명예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친구였다.

“너라면 뭐 문제없겠지. 광역화든 뭐든 말이야.”

리는 바딤의 어깨를 두들기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바딤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동갑내기 친구였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수재의 길을 걸어왔던 리와 달리 바딤은 농부의 아들이었다.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고 정석대로 지식을 쌓고 응용하는 리에게 있어, 자유분방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방식의 바딤은 불편한 가시 같은 존재였다.

학교 시험 성적은 늘 바닥이면서 이따금씩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교수들을 놀라게 해 교내 화제의 주인공이 되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의외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았는데, 아마도 부드러운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의 천재성이 그녀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듯했다. 반듯하고 빈틈없는 리와는 흑과 백처럼 달랐던 바딤. 그런 두 사람이 친해진 것은 우연히 수업을 같이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둘 다 전혀 관심이 없던 한 문학 수업.

모범생의 표본이었던 리조차도 땡땡이치는 걸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한 강의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면 이미 책이 넝마가 될 정도로 봤던 참이었다. 그의 대표작만 몇 주째 가르치는 교수의 강의는 순수한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어느 따사로운 오후, 리는 슬그머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밖에서 그와 딱 마주쳤다. 뒤늦게 수업에 달려오던 바딤 페트로비치였다. 그렇게 그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화살 같은 벗을 만나게 되었다.

─리신이지? 신 리인가? 어느 쪽이 이름이야?

─리가 성, 신이 이름. 중국은 성을 앞에다 붙여.

─그래? 그럼 네 나라 방식대로 부를게. 반갑다, 리신.

하지만 바딤은 걸핏하면 헷갈려 하며 그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더 발음하기 편한 ‘리’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본인도 딱히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리는 오히려 그게 더 특별하게 느껴지고 좋았다.

그날,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웃는 바딤을 보며 리는 생각했다. 이 녀석은 태양이다. 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분법적 사고로 나눠서 정의했다. 한쪽은 모기처럼 남의 양분을 빨아 가며 사는 기생충이고, 다른 한쪽은 남에게 양분을 베풀며 세상을 발전시켜 나가는 선구자들이었다. 바딤 페트로비치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그것도 제일 앞에서 모두를 이끌며 나아갈 선각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리는 자연스럽게 바딤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그의 자유로운 신념, 정의로움, 정직한 지식과 이타적인 사고방식까지.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는 바딤을 보면서 리는 더욱더 그와 다른 길을 가고자 노력했다.

비록 전공은 달랐지만 둘은 서로를 최고의 경쟁자이자 벗으로 여겼다. 과학계와 의학계가 각각 주목하는 인재였던 두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 후 그들은 각자 제 갈 길을 걸어가면서, 서로의 분야에서 으뜸이 되자며 굳게 다짐했다. 먼저 그 뜻을 이루게 된 건 바딤이었다.

잠시 옛 생각에 젖어 있던 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입은 코트와 바지에서 눈송이가 설탕 가루처럼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

“오늘은 사라가 빨리 들어오라고 했는데.”

“제수씨?”

바딤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는 피식 웃었다. 설마 바딤이 먼저 결혼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바딤이 아내인 사라를 만나게 된 장소는 바로 이곳 시베리아 연구소였다.

사라는 한국 출신으로 제1 연구동의 보안 팀장을 맡고 있었다. 태권도 솜씨가 일품이라는 그녀는 본래 생명공학을 전공했는데, 명석한 두뇌와 우수한 성적으로 꽤 촉망받는 인재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돌연 과학자의 길을 접고 군대에 입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 인생 최대의 실수가 아니었을까─물론 바딤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하고 리는 생각했다. 그녀는 바딤과 달리 굉장히 터프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결혼식 때 처음 본 그녀는 가냘프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여성스러운 이목구비의 미인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수씨가 임신을 했다고 했지?”

리 박사를 따라 에어쉽 쪽으로 이동한 바딤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꿀단지를 든 곰처럼 웃고 있는 친구를 보며 리는 “하여간…….” 하고 핀잔을 주며 웃었다. 아내 얘기만 하면 좋아서 히죽거리는 녀석이었다.

“딸이라 했나? 기대되겠네.”

“응, 사라를 쏙 빼닮았어.”

인공자궁이 대중화된 시대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인공자궁을 선택하여 출산을 했다. 그러나 바딤의 아내는 확실히 그런 일반적인 여성은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인공자궁은 안 하고 자연 출산으로?”

“응. 사람이 사람을 낳는 거지, 기계가 사람을 낳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사라는 인공자궁을 불신했다. 아기는 열 달간 엄마가 품고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엄마와 소통을 하다가 나와야지, 일렬로 진열된 차가운 유리관 속에서 배양되다가 때가 되면 나오는─흡사 공장에서 찍어 내는 안드로이드처럼─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에게 어떻게 모성애와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겠냐면서.

리 박사는 그런 사라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미 여러 논문을 통해 인공자궁에서 자라고 태어난 아기들이 산모의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들보다 건강하다는 게 밝혀진 상태다. 더욱이 인공자궁은 산모가 직접 아이를 품고 있는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물리적, 병리적 사고의 위험도 제로 수치에 가깝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본인의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자연 출산을 원하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기 이름은 정했어?”

에어쉽에 올라탄 리가 물었다. 그러자 그를 따라 올라타던 바딤은 돌아서서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그는 물그레한 눈빛을 지었다. 기대감과 행복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멀리 하늘 높이 날아오른 드론이 날개를 편 새처럼 활강했다. 그 뒤로 펼쳐진 석양이 자개구름 사이사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넓게 이어진 자개구름은 찬연하게 빛나며 천당으로 이어진 계단처럼 한 줄로 길게 늘어졌다.

“이브.”

시베리아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바딤의 행복한 미소를 담으며 갈래갈래 흩어졌다.

“이브 페트로비치.”

리는 결국 약 한 시간에 걸쳐 바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사라 역시 오랜만에 친구와 시간을 보내겠다는 남편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오곤 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연구소 내에 위치한 술집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앉은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잔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그래서 그 일본인 인턴에게 반했다고?”

“반하긴 무슨, 관심이 있다는 거지.”

“한번 대시해 봐.”

“너무 어려. 이제 열아홉이야.”

머리를 벅벅 긁는 리의 뺨에는 옅은 홍조가 어려 있었다. 늘 냉소적인 친구의 색다른 모습에 바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좋아하나 보네?”

“날 무슨 쭉정이 보듯 한다고.”

리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울컥한 얼굴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술이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오랜 벗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지 연이어 술잔을 채웠다. 그러더니 결국 혀 꼬인 발음으로 나불나불 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동양 계집애가 어찌나 앙칼진지, 그런데 또 그 도도한 성격이 매력이란 말이야?”

“이제 열아홉이라며. 천천히 공들여 낚아 봐.”

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간당간당하다고……. 슬슬 뭔가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입지가 불안해.”

“넌 의사야. 성과 같은 게 뭐가 그리 중요해?”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 바딤을 보며 리 박사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인도주의적 과학자 아니랄까 봐. 이 녀석하고만 대화하면 자신이 물욕덩이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간 바딤과의 연락을 점차 피하게 된 것은.

별안간 실내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아예 술잔을 든 채로 밖에 나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리와 바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바딤!”

먼저 얼굴이 창백해진 건 리였다. 그는 술이 홀딱 깬 얼굴로 테이블을 짚으며 벌떡 일어섰다.

“저기 좀 봐!”

바딤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리가 가리킨 방향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하얗고 파란빛이 기류를 뚫으며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공습이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쳐나간 이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요!” 하고 외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겁에 질린 채 망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리와 바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윽고 그들은 ‘번쩍!’ 하고 시야를 덮친 눈부신 섬광에 눈을 질끈 감았다.

2073년 12월 24일 자정 무렵.

예고 없이 지구 대기권으로 진입한 유성이 원인 불명의 폭발을 일으키며 전 세계곳곳에 낙하한다. 그중 하나가 러시아 시베리아 연구소 근방에 추락한다.

─ 경고! 연구소 내 화재 발생! 위험 경보 제4 등급 알람을 시행합니다. 연구동 내 모든 분들께서는 지금 즉시 보안 대원들의 안내에 따라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연구소 내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 공기가 변해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리 박사와 페트로비치 박사는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방금 그 소리 들었어?”

“그래, 폭발음이었는데.”

“정말 공습인가? 테러라도 당한 거야?”

“설마…….”

오늘 시베리아 연구소에는 세계 각국의 요직에 앉은 이들뿐만 아니라 정·재계의 거물, 과학계와 의료계의 저명한 인사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 신변에 자칫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전쟁까지도 일어날 수 있는 형국이었다.

바딤은 바로 아내인 사라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마트 워치 너머의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초조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연이어 연락을 시도했다. 그때였다. 그의 연구실 동료 직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 페트로비치 박사님? 지금 어디 계세요?

바딤은 스마트 워치에 대고 조용히 대답했다.

“연구소 내에서 술 한잔 중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입니까?”

옆에 서 있던 리 박사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스마트 워치에서 울려 퍼지는 여자의 음성이 귀에 익었다. 그녀는 아까 복도에서 그에게 바딤이 소나무 숲에 있다고 언질해 줬던 연구원이었다.

여자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보고받은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잠자코 듣고 있던 바딤은 놀라서 되물었다.

“운석이요? 그걸 당국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까?”

여성과 통화를 하는 바딤은 황당하다는 어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아내의 안부부터 물었다.

“사라는요? 내 아내와 계속 연결이 되지 않는데…… 뭐라고요?”

바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한편 폭발음이 울리던 시각, 사라는 바딤의 연구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연구실에 작게 딸린 침실로 들어가 수면 모드를 취했다. 사방의 벽에 암막이 드리워지고 방음이 된 문이 스르르 닫히는 순간이었다.

【알림】

권역 내 미확인 개체 1 발견

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 침대에 눕던 사라는 밖에서 들려온 알람 소리에 도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조금 불러 온 배를 잡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침실을 나섰다. 박사의 연구실 책상 옆에 위치한 3D 입체 화면 위에, 젊은 남성의 얼굴을 한 인공지능 ‘타이탄’24)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주인인 페트로비치 박사를 찾는 듯한 눈치였다. 페트로비치 박사의 전용 컴퓨터이자 비서 역할을 수행하는 타이탄의 통제권은 박사와 그의 아내인 사라만이 행사할 수 있었다. 사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제어 보드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타이탄이 활기차게 인사말을 건넸다.

─ 안녕하세요, 사모님!

“안녕, 타이탄. 그런데 미확인 개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권역 내’라는 건 최근 남편이 개발하고 있는 스마트 더스트라는 시스템으로 감시하고 있는 지역을 일컫는 말일 터였다. 연구소 인근에 위치한 소나무 숲에서 스마트 더스트의 초기 모델을 실험해 볼 것이라고 했으니까.

─ 방금 전 미확인 생물체가 권역 내에서 새로이 발견되었습니다.

심각한 표정을 짓던 사라는 이마를 짚더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피식 웃으며 답했다.

“숲이잖아. 인근에서 떠돌다가 들어온 짐승이겠지.”

곳곳에 침엽수림이 위치한 지역이었다. 박사가 스마트 더스트의 초기 모델을 실험한 소나무 숲도 면적이 거대한 편이었다. 어디선가 동물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권역 내에 진입한 걸 타이탄이 발견한 게 아닌가 싶었다.

─ 97%의 가능성으로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 추정됩니다. 추정 연령 약 6세에서 7세 정도로 보이는 남아입니다.

“뭐라고?”

타이탄의 보고에 사라는 깜짝 놀라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타이탄은 스마트 더스트로부터 보고받은 정보를 근거로 어린 소년의 모습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3D 입체 영상으로 빚어진 소년의 형상은 수억 수천만 개의 나노 입자들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었다. 비록 가상으로 이루어진 실루엣이지만 스마트 더스트는 열 감지와 동작 반응 센서를 통해 목표물의 모습을 오차 없이 정확하게 재현해 냈다.

아이는 가엽게도 주위에 수북이 쌓인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지닌 어린 소년의 얼굴색은 어찌나 핏기가 없던지 이미 숨진 건 아닐까 우려가 될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이 엄동설한에 알몸이었다. 타이탄은 다행히도 아직 이 어린아이가 미약하게나마 호흡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장 구급대를 불러야…….”

사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다가 서둘러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의 비상 호출 버튼을 눌렀다.

─ 네, 응급 상황실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보안 1팀의 사라 페트로비치입니다.”

응급대원의 목소리가 팔찌에서 울려 퍼지자, 사라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남편 바딤이 했던 말이 번뜩 스치며 지나갔다.

─이건 나 혼자 극비리에 진행하는 프로젝트야. 당신을 제외하고선 연구소 내 누구도 스마트 더스트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돼. 알았지?

─ 네, 말씀하십시오.

그녀가 왼손에 차고 있는 팔찌는 비상 호출 버튼도 달고 있었지만, 주 기능은 연구소 직원들의 건강 측정과 식단 관리였다. 착용자의 체온, 심박동 수와 혈당 수치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건강관리 센터에 보내 주고 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구급대나 응급 관리실에서 착용자의 건강 상태를 바로바로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 아마 응급대원은 호출을 받자마자 사라와 태아의 상태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 페트로비치 부인?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실수로 그만 호출 버튼을 눌러 버렸네요. 미안합니다.”

─ 혹시 모르니 간호사를 보내 드릴까요?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 알겠습니다. 그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사라는 고무 재질로 된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손끝을 구부렸다.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그리고 에어쉽 승강장을 향해 바삐 걸었다.

보고 사항 1

포인트 NW 1.213.43

미확인 개체 발견.

미확인 암석 발견.

토양에서 오염 물질 검출.

미생물 반응 검사 중…….

운명이란 정녕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수없이 많은 우연들이 모여 하나의 기적 같은 만남을 이루는 것일까?

돌이켜 보면 그날의 푸른 섬광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다. 지구 대기권에 진입한 거대한 운석의 파편 중 하나가 시베리아 상공에 나타난 것도, 사라가 딸을 임신 중이었던 것도, 그로 인해 그녀가 순찰 업무에서 배제돼 있었던 것도, 바딤이 리 박사와 함께 따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한 퍼즐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운석은 지면에 충돌하기 전에 공중에서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시베리아 연구소의 초저주파 데이터 분석 결과, 운석 파편의 폭발 시 발생한 에너지는 최대 20억 메가줄, TNT 500킬로톤에 달하는 걸로 나타났다. 이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배가 되는 양이었다.

운석이 떨어진 곳은 시베리아 연구소의 소나무 숲에서 좀 더 북쪽에 위치한 얼음 계곡 쪽이었다. 한겨울이면 영하 60도까지 떨어지는 곳. 방한복 없이는 짧은 시간만 노출되어도 동사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숲의 어둠은 칙칙하고 눅눅했다. 그사이를 뚫고 들어온 에어쉽은 빽빽한 나무 사이사이를 날며 빛을 비추었다.

─ 약 10m 근방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바딤의 스마트 더스트는 아직 미완작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노 입자들의 광역화 문제와 지속력 부분에 있어서 보완해야 할 점들이 많다고 했다. 그 두 가지 문제점들만 해결해도 스마트 더스트는 유례없는 획기적인 시스템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착륙합니다.

사라는 의외로 키가 작았다. 신장이 약 158㎝인 그녀는 6피트180㎝가 넘는 바딤의 옆에 서 있으면 그의 어깨에도 채 닿지 않았다. 몸집도 아담해서 얼핏 보면 앳된 소녀처럼 사랑스러웠지만 오뚝한 콧날과 앙칼져 보이는 눈초리 때문에 ‘작은 흑표범’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걸을 수가 없네.”

숲 안쪽은 눈이 종아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하얀색 방한복에 우주복처럼 머리 전체를 감싸는 방한모까지 착용한 그녀는 흡사 우주 달 정거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처럼 보였다.

“앞 좀 비춰 봐.”

그녀의 명령에 에어쉽이 공중에 부양하더니 라이트를 켜 주위를 밝혔다. 그러자 사라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놓고 말았다.

“이게 대체…….”

빽빽한 소나무 숲 사이에 누가 원을 그리며 이곳만 뭉텅 잘라 낸 것처럼 나무들이 쓰러진 채 꺾여 있었다. 그 주위만 크레이터가 생긴 것처럼 땅도 움푹 꺼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었다. 그녀가 찾던 하얀 설원 속 주인공, 벌거숭이 소년이.

육안으로 가늠해 봤을 때, 대략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아이의 등과 오른팔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피부가 불그스름하게 익어 있었고, 왼 다리는 타박상을 입은 듯 멍든 채 부풀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추위에 알몸이라니, 동상에 걸린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얘, 괜찮니? 정신 좀 차려 봐, 응?”

사라는 소년을 품에 안았다. 깡말라 보이던 아이는 의외로 꽤 무거웠다. 소년의 몸을 들자 그의 주먹 쥔 손에서 손톱 크기만 한 돌멩이들과 한 줌의 재가 사르르 떨어져 흩날렸다.

에어쉽 문이 열리고 자동 부양 시스템이 장착된 들것이 알아서 날아와 대기했다. 사라는 그를 들것 위에 사뿐히 눕혔다. 의식이 없는 아이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소년의 얼굴을 응시했다. 예쁘장한 이목구비에 눈처럼 깨끗한 피부가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섬세하고 가냘파 보였다.

“체온하고 맥박 측정.”

─ 모두 정상 수치에 미치지 못합니다. 저체온증이 의심됩니다.

“연구소로 돌아가자. 응급처치 시행하고.”

─ 알겠습니다. 의료팀에 연락을 넣을까요?

“그래, 너무 소란 떨지는 말고.”

연구소로 귀환할 것을 명한 사라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상공 저편, 멀지 않은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좀 전에 들었던 폭발음과 관련 있는 것일까?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죄송합니다. 시스템에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목적지를 지정할 수가 없습니다. 통신 장애입니다.

“갑자기 웬 통신 장애지? 수동 운전으로 변환해.”

사라는 인상을 쓰며 직접 항로를 확인하기 위해 방한모를 벗고 앞좌석으로 옮겨 앉았다.

─ 죄송합니다. GPS 정보를 수신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 에러입니다.

“왜 이러는 거야? 운행 정지하고 수동 운전으로 변환하라고.”

그녀는 답답한 나머지 고함을 질렀다. 아니, 사실 답답한 게 아니라 불안감에 짜증을 낸 것이다.

─ 시스템 에러입니다. 재접속중입니다.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시스템 에러입니다. 통신 장애입니다. 오류 보고를 작성 중입니다…….

빽빽한 소나무 숲을 벗어나던 에어쉽이 갑자기 휘청거리며 이상 신호를 보이기 시작했다. 황급히 안전 손잡이를 잡은 사라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짓다가 점차 어두운 눈빛을 띠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스마트 워치를 켜고 바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예 발신 신호조차 나타나질 않았다.

“긴급 착륙하도록. 당장!”

비틀대던 에어쉽은 적색 알람을 울리며 탑승자에게 비상 탈출을 권하기 시작했다.

─ 알려 드립니다. 탑승자들께서는 모두 에어쉽에서 즉시 비상 탈출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에 머무르는 건 위험합니다. 탑승자들께서는 모두 에어쉽에서…….

아무래도 에어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비상 탈출을 하기 위해 버튼을 누르려던 사라는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굳은 동공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뒷좌석에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아이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이 아이가 살 가능성은 희박했다. 어차피 죽게 될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건 미련한 짓이다.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복중의 태아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럼에도 어째서…….’

이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을 자처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라는 소년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전면 유리에 부딪쳐 오는 나뭇가지들을 응시했다. 임신을 하면서 없던 모성애와 거룩한 인류애라도 생긴 것일까?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도 이 작은 아이를 외면하고 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배 속에서부터 태동이 사내아이 못지않게 씩씩한 딸이었다. 딸도 엄마의 비겁한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사라는 파리한 안색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이를 안은 팔에 점차 힘이 들어갈수록 그녀의 미간도 굳어 갔다.

쿵!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나무에 부딪친 에어쉽이 덜덜거리며 침엽수들 사이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좌우로 흔들리는 에어쉽의 덮개 위로 눈덩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자그마한 돌멩이들과 나뭇가지들이 타라락 타라락 유리창에 부딪치며 마찰음을 빚었다. 바위처럼 무거운 눈뭉치들이 천장 덮개를 덮칠 때마다, 사라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소년을 안은 채 안전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다행히 실내에 장착된 에어쿠션이 터지면서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그래도 추락 과정에서 오는 충격을 모두 흡수하기에는 무리였다.

‘신이시여!’

그녀는 기도를 하며 눈을 꽉 감았다. 제발 이 아이들을 살려 주시길, 제발……. 그녀는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들의 마디 뼈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 인공자궁을 택하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던 신념에 돌연 물밀 듯 후회가 몰려왔다. 괜히 자신의 아집 때문에 죄 없는 아가가 생명을 잃게 되는 건 아닐지 덜컥 겁이 들었다.

─ 탑승자들께서는 모두 에어쉽에서 비상 탈출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본기에 머무르는 건 위험합니다. 탑승자들께서는…….

견고한 소나무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낙하한 에어쉽이 뒤꽁무니에서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엔진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사라는 수동 작동으로 에어쉽 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보라가 열린 문 사이를 뚫고 실내로 불어닥쳤다. 안면에 들이닥치는 칼바람에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양다리로 소년의 몸을 고정시키고 끌어안았다.

두근.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품에 고요히 안겨 있던 어린 소년의 속눈썹이 사르르 떨리며 움직인 것은.

혈색이 돌기 시작한 장밋빛 입술 사이로 들숨과 날숨이 평온하게 드나들었다. 이어서 그의 잠겨 있던 눈꺼풀이 차츰 열리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어둠에 잠긴 채 심연을 떠돌던 그의 의식을 일깨운 건 난생처음 접하는 생명의 고동 소리였다. 뇌리에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힘찬 심장 박동 소리는 차갑게 얼어 있던 그의 전신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으며 햇살처럼 스며들었다. 소년은 길고 긴 낮잠에서 깨듯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 몽롱한 눈으로 누운 채 위를 응시했다. 낯선 땅, 낯선 공기 속에서 그가 처음으로 본 광경은 한 여자의 치열하고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비로운 고동 소리를 담은 이 부드럽고 포근한 육체의 주인이 바로 저 사람인 듯했다. 고집스러운 눈매의 여인은 가녀린 팔로 유리처럼 차갑고 딱딱한 그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하며 간절히 기도를 하던 사라는 혼자 몸을 일으키는 남자아이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괜찮니? 일어설 수 있겠어?”

아이는 처음 걸음마를 떼는 송아지처럼 어설프게 발을 딛고 섰다. 그는 유리구슬 같은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사라의 눈이 돌연 경악으로 굳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뻗으며 “피해!”라고 외쳤다.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남겨진 사라의 일기】

2073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우리 부부는 한 신비로운 소년을 만났다.

콰쾅!

멀리서 들려온 폭발음에 바딤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방한복을 입은 채로 에어쉽 창문에 손바닥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타이탄!”

─ 네, 박사님.

“이게 무슨 소리지?”

─ 사모님께서 탑승하신 에어쉽이 기체 오류로 인해 추락 및 폭발 사고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타이탄의 한 치의 여과도 없는 보고에 바딤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연이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새, 생체 신호는? 아내의 생체 신호는 확인되었나?”

─ 확인 중입니다. 사고 지역에 전파 장애가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고 있습니다.

“대체 사라를 밖에 홀로 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늘 온유한 그답지 않게 흥분하고 난폭해진 모습이었다. 바딤은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자괴감과 죄책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늘 리 박사와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사라와 함께 있어야 했는데. 그녀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배 속의 아기에게 문제라도 생긴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 박사님.

타이탄은 늪에 발을 담근 사람처럼 정처 없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바딤을 일깨웠다. 방한복을 입은 채 멍하니 에어쉽에 앉아 있던 바딤은 타이탄의 부름에 번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 사고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래도 연구소에 미리 의료팀을 대기시켜 놓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어쉽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눈에 비친 건 짙은 어둠 속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였다. 타이탄이 에어쉽 라이트로 앞길을 비추자 정면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바딤은 주변에 떨어진 에어쉽의 잔재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 여보!”

목이 터져라 부르짖던 그는 이윽고 앞코가 완전히 박살 난 채 주저앉아 있는 에어쉽을 발견했다. 일순 다리가 휘청거리며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종아리까지 쌓인 눈밭 따위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눈길을 헤집고 달렸다.

“사라?”

박살 난 에어쉽의 문은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커다란 소나무 가지 하나가 마치 뾰족한 창처럼 내부를 꿰뚫고 침입한 게 보였다. 흉기처럼 폐부를 뚫은 나뭇가지의 모습이 꽤 섬뜩했다. 바딤은 허리를 숙이고 에어쉽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발견한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푹 꺼진 천장 덮개 밑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곧 창백한 얼굴로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사, 사라?”

그녀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볼록한 배를 끌어안은 채 에어쉽 잔해에 기대앉은 모습이, 아마도 의식을 잃은 듯했다.

“맙소사!”

바딤은 시야를 막는 나뭇가지를 일단 옆으로 꺾으며 밀었다. 곁눈질로 나뭇가지를 흘끔거리며 지나치던 그의 얼굴이 허공에서 흠칫 굳었다. 그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쇠촉처럼 뾰족한 가지가 끝부터 중간까지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설마…….’

바딤은 피투성이의 아내를 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의 붉어진 눈시울은 이미 촉촉이 젖어 있었다. 울컥 목울대가 차올랐다. 주먹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호흡도 가빠져 왔다. 두려움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쪼그린 채 에어쉽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소중한 아내를 조심스레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여보, 정신 좀 차려 봐. 응?”

다행히도 호흡은 하고 있었다. 바딤은 사라를 안고 뒷걸음치며 에어쉽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타이탄은 잽싸게 에어쉽을 대기시켜 놓고 페트로비치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로부터 ‘눈치탄’이라는 별명을 세례받은 인공지능답게 알아서 척척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타이탄은 제일 먼저 에어쉽 밖으로 부유 들것을 내보냈다. 최첨단 들것은 공기 중에 부드럽게 부양하더니 박사가 있는 사고 현장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사라를 데리고 가까스로 밖에 나온 바딤은 이미 대기하고 있던 들것 위에 그녀를 눕혔다. 방한모를 벗은 채 방한복만 입고 있는 사라의 얼굴과 배 쪽에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타이탄은 사라의 몸 상태를 체크하면서 들것에 탄 그녀를 발 빠르게 이동시켰다. 그리고 뒤늦게 따라온 바딤이 에어쉽에 탑승하자마자 보고를 올렸다.

─ 박사님, 안심하십시오. 사모님과 태아 모두 무사하십니다. 이건 사모님의 피가 아닙니다. 사모님께서는 가벼운 타박상과 긁힌 상처 외에는 깨끗하십니다.

바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사라의 피가 아니라니, 그럼 대체 누구의 피란 말인가?

─ 그리고 이 근처 일대에서 전파 교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란의 원인을 파악해 보려 했지만 에어쉽 내 장비와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연구소 서버에 접속할 수가 없어서 의료팀 대기 요청에도 실패하였습니다.

‘갑자기 전파 교란이라니. 그래서 아까 사라와 연결이 되지 않았던 건가?’

그는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사라가 정신이 드는지 잇새로 신음을 내뱉었다. 바딤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정신이 들어? 괜찮은 거야?”

“여보…….”

힘겹게 눈꺼풀을 연 사라는 남편을 응시하더니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눈빛으로 눈물 진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다가 차츰 또렷해지는 동공 속으로 기억을 더듬더니 창백한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아기는?”

“아기는 괜찮대. 그러니 걱정하지 마.”

바딤은 다정한 손길과 목소리로 놀란 그녀를 달랬다. 사라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그리고 놀랐을 아기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며 말을 걸었다. 바딤도 그런 사라를 보며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았다. 사라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남편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 아이는?”

“그 아이?”

그녀는 대답 대신 조바심이 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두 사람이 탄 에어쉽은 막 이륙하는 중이었다. 바딤도 의아한 얼굴로 아내를 따라 밖을 바라보았다.

“타이탄, 잠깐 이동을 멈춰 봐.”

그녀는 이륙을 정지시키더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에어쉽 잔해들 사이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두 사람의 눈에 뭔가가 잡혔다.

마치 크리스털로 조각한 인형처럼 예쁜 아이였어. 빛을 흡수하는 듯 반짝이는 투명한 피부에 섬세하고 귀족적인 이목구비. 그 아이의 몸을 덮고 있는 하얀 설원이 그의 몸의 일부분으로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단다.

훗날 사라가 딸 이브에게 남긴 일기 속에서 소년과의 첫 만남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딤은 이브에게 그 부분을 읽어 줄 때마다 본인이 느낀 정반대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오히려 전신을 엄습하는 섬뜩함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찾으러 왔다는 녀석이?”

바딤의 질문에 사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져 나간 에어쉽 날개 밑에서 등장한 어린 소년은 두 사람이 탄 에어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붉은 페인트 통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피 칠한 모습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복부 한가운데를 비롯해 몇몇 부위는 살색으로 깨끗했다.

토성과 목성을 섞어 놓은 듯한 오묘한 빛의 갈색 눈동자. 유리알 같은 눈에 비친 무감정한 모습에 바딤은 왠지 오싹해져서 고개를 외면했다. 반대로 소년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사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아이가 날 구한 거야.”

바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대답할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마치 홀린 듯이 정체불명의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뿐이었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분명 찔렸었는데…….”

사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재차 중얼거렸다. 사고 당시, 에어쉽의 열린 문으로 거대한 나뭇가지가 불현듯 불쑥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부른 배를 향해 송곳처럼 다가오던 순간, 우연인 것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알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겨우 예닐곱 살의 아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배를 보호하며 막아선 것이다.

─피해!

흉기처럼 들이닥친 소나무 가지는 소년의 복부 한가운데를 푹 하고 관통했다. 이후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에어쉽이 지면에 떨어지면서 엔진 폭발이 일어났다. 그 순간 얼굴과 몸에 튀던 선혈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멀쩡히 서 있다니, 대체 어떻게…….’

사라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나직이 명했다.

“어서 착륙해, 타이탄. 저 아이를 함께 데려간다.”

─ 알겠습니다.

페트로비치 부부는 일단 자택으로 귀환했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맨션은 시베리아 연구소 단지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거주하는 맨션은 200평 남짓으로 연구원들이 소유한 개인 맨션 중에서도 아주 넓은 축에 속했다. 애초에 이 맨션을 설계한 담당 건축가가 바딤 본인이었다. 그는 사라와 결혼한 후 집 내부를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맨션을 두 사람만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맨션의 거실 천장은 특수유리로 제작되었는데, 온전히 별을 좋아하는 사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딤은 그의 개인 연구실 면적을 줄이고 아내의 전용 헬스장과 운동 시설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남쪽에는 20평 남짓의 작은 온실을 만들어 그녀가 홀로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선사했다. 집 안 곳곳, 구석의 소품 하나하나에 사라를 향한 그의 애정이 묻어 있었다.

“아직도 접속이 안 돼?”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사라가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바딤은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아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옆에 와서 앉는 아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난해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눈을 좁히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타이탄.”

─ 네, 박사님.

정면에 위치한 벽 스크린 위로 타이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아이는 좀 어때?”

─ 일단 전신 스캔을 해 본 결과, 별다른 이상 증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체온이 조금 낮긴 하지만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사라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상처는?”

─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생채기나 멍도 없고, 회복 후에 나타날 수 있는 흉터나 세포 유착 등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라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헛것이라도 봤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 아이 눈동자가 일순 피처럼 붉게 보인 것 같았는데……. 말도 안 되지, 붉은 눈이라니…….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가만히 듣고 있던 바딤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사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안겼다. 소나무 숲 내 크레이터 주변에서 발생한 전파 교란. 그게 현재 그들의 집인 맨션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크레이터와 맨션의 공통 요인이 무엇일까? 바딤의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소년이 누워 있는 개인 연구실 쪽으로 향했다.

─ 박사님, 곧 방문객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현관까지 약 20초 남짓 거리입니다.

“방문객?”

바딤은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하느냐는 표정으로 타이탄을 노려보았다. 타이탄은 “전파 교란 때문에…….”라고 얼버무리며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이럴 때 보면 타이탄을 만들 때 유머와 눈치 레벨을 너무 높게 조정한 게 아닌지 후회가 일기도 했다.

벌써 20초가 지났는지 집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거실 벽면에 타이탄 대신 리 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맨션의 현관 앞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 어이, 바딤! 안에 있어?

바딤과 사라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사라는 현관 쪽으로, 바딤은 연구실 쪽으로 후다닥 움직였다.

잠시 후 집 안으로 들어온 리 박사는 사라를 보자마자 악수를 청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리 박사님, 어서 오세요.”

상냥하게 웃는 사라의 뒤로 바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를 본 리 박사는 밉살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바딤 녀석이 제수씨와 연락이 안 된다고 낯빛이 하얗게 질려서 달려가더니 도무지 연락이 안 되더군요. 걱정이 되어서 한번 와 봤습니다. 집에 있었으면서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했었어?”

바딤은 의아한 눈으로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았다. 슬쩍 사라와 눈빛을 교환한 바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맨션에 발생한 전파 교란 때문일 것이다.

“둘 다 별일 없으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집이 많이 변했네요. 온실도 생기고…….”

리 박사는 여유롭게 실내를 거닐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위층을 올려다본 사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리 박사를 바딤에게 맡긴 그녀는 다과를 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바딤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골몰히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조작해 보는 중이었다. 대체 전파 교란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의 머릿속은 그 문제로 가득했다. 하여간 순간순간 뭐 하나에 빠지면 다른 할 일은 까맣게 잊고 마는 게 바딤다웠다.

바딤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리 박사는 어느새 위층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일전에 보지 못했던 방을 발견하고선 흥미로운 표정으로 기웃거렸다. 위층은 창고처럼 쓰던 공간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정리해서 꾸며 놨지? 기억을 되짚어 보던 그의 입가에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

‘아하, 아기 방인가?’

호기심이 동한 그는 살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다. 곧 태어날 공주님 방은 어떻게 가꿔 놨을라나? 바딤 저 녀석이라면 방 안에 작은 궁궐을 지어 놨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문틈에 가늘게 뜬 눈을 바짝 붙인 순간이었다.

“연구실은 이쪽이야.”

흠칫 놀란 리는 어깨 너머를 홱 돌아보았다. 어느새 뒤따라온 바딤이 그의 팔을 쿡 찌르며 아래층을 향해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리가 돌아서자 자연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여긴 그냥 손님방이고.”

“아, 난 또 아기방인 줄 알았지.”

“내려가자.”

리는 바딤에게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꾸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떠보듯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저 아인 누구야?”

그럼 그렇지. 눈썰미 좋은 그가 못 보고 지나쳤을 리 없었다. 대체 뭐라고 둘러댄담. 걸음을 멈춘 바딤의 턱 끝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보던 리의 눈빛도 묘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바딤의 분위기가 왠지 수상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목 근육이 뻣뻣하게 서 있다는 걸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때마침 부엌에서 과일을 가져오던 사라가 웃으며 대신 답했다.

“조카예요. 잠시 머물고 있어요.”

“조카요?”

친척은커녕 양친도 없는 사라였지만 리가 거기까지 알 턱이 없었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로운 눈빛을 지었다. 상냥한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더 물을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미소에 리 박사는 가느다란 눈초리를 접었다.

거실 테이블 앞에 모여 앉은 세 사람은 다과를 즐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리 박사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평소 냉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리였지만 사실 주량이 엄청났다. 고량주 애호가인 그에게 있어 맥주 정도는 음료수나 다름없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그가 현재 다니고 있는 왓슨 그룹의 스캔들로 이어졌다.

“그럼 램지 왓슨은 어린 손녀딸에게 재산을 다 물려주려고 한단 말이야?”

“그렇다는 소문이 있어. 막내 손녀를 그렇게 예뻐한다나? 누군지 몰라도 제인 왓슨을 잡는 녀석은 땡잡는 거지.”

바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을 던졌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애라며? 하긴, 열아홉 인턴이나 걔나 별 차이는 없겠다. 네가 가서 꼬드겨 봐.”

“이 남자들이 못하는 말이 없네.”

사라가 눈을 흘기며 바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찔렀다. 그러자 그는 바로 구십 도로 배를 접고 쓰러졌다.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 끙끙대던 그는 가련한 눈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정말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사라는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라며 그의 등짝을 찰싹 내리쳤다.

“바딤, 네가 만든 저 광역입자 나노 더스트 말이야. 저건 획기적인 상품이 될 거야.”

리 박사가 붉어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바딤은 턱을 괸 채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건 실패작이 될 가능성이 커.”

늘 긍정적인 바딤답지 않게 자신 없는 말투였다. 광역화를 비롯한 몇몇 문제점들이 장벽이 되는 모양인데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빈 잔에 보드카를 따르던 리는 잠시 진지한 눈빛으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차르트를 시샘하는 살리에리처럼 그를 쭉 지켜봐 왔던 리 박사였다. 살리에리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기해 왔지만 그가 볼품없이 낙담하고 무너지는 모습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겠지. 나는 널 질투해 오면서도 누구보다도 널 존경해 왔으니.

“모르지, 곧 태어날 네 자식이 업적을 완수해 줄지도.”

그는 술을 마저 따르며 말했다.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는 리의 말에 바딤은 사라의 배를 바라보며 풀어진 눈으로 웃었다.

“그래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잔뜩 취한 리는 비틀거리며 에어쉽에 탑승했다. 자고 가라는 바딤의 말에도 그는 손을 내저으며 끝내 사양했다. 아마 임신한 사라에게 부담이 갈까 봐 그러는 듯했다.

리 박사가 떠난 후 타이탄은 청소로봇들로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아 있는 사라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의 옆에 앉아 머리를 털어 내듯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복잡한 고민이 있을 때면 콧등이나 머리를 벅벅 쓸어 넘기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바딤은 결국 냉정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하품을 하는 사라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역시 저 애는 연구소로 보내는 게 낫겠어.”

사라는 잠이 홀딱 깬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비난조로 말했다.

“시베리아 연구소로? 그럼 어떻게 될지 당신도 뻔히 알고 있잖아.”

“어디서 온 건지, 병력은 있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아이야. 우리가 무턱대고 데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당신 정밀 검사는? 받아 봤어?”

바딤은 피투성이였던 아내의 모습이 못내 계속 걸리는 모양이었다. 사라는 걱정이 가득한 남편의 표정을 보며 안심시키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탄 말로는 깨끗하대. 아무 이상 없댔어. 아이도 무사하고.”

“그럼 다행이고.”

바딤은 아내를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뺨을 묻으며 어쩔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저 아이가 정말 우리 조카는 아니잖아. 잘 생각해 봐.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어차피 시설로 보내지게 될 거야. 가족이나 누군가가 애타게 찾고 있을 수도 있고.”

“알고 있어. 하지만 연구소는 안 돼.”

사라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연신 좌우로 가로저었다. 남편의 어깨를 쥔 그녀의 하얀 손가락 마디에는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우리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

“설마 내가 버젓이 연구소에 다니고 있는데 무슨 짓을 하겠어?”

이럴 때 보면 남편은 여전히 순진했다. 저 아이는 뭔가 특별했다. 하지만 시베리아 연구소에서 특별하다는 건 양날의 검처럼 위태로운 존재라는 의미였다. 천재인 남편은 양지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입장이지만 저 아이 역시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냥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가 가족을 찾아서 보내 주면 되잖아.”

“사라,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왜 우리가 할 일이 아닌데? 여보, 난 생명을 지켜 주고 싶어서 군대에 들어갔어. 손에 칼을 쥔 과학자보다는 총을 든 방패막이가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가 어째서 군인이 되었는지는 누구보다도 남편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그녀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과학계에 환멸을 느끼고 등을 돌렸다. 홍익인간의 이념하에 인류 과학의 발전은 나날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번지르르한 이상의 껍데기를 제거한 후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이면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부와 권력을 쥔 지배층들은 인류의 번영을 위한다며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했다.

‘선택받은 이들의 안녕’을 위해 희생당하는 건 늘 헐벗고 무고한 자들이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역사 속에서 성장의 수레바퀴 밑에는 늘 힘없고 억울한 자들의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고매한 기득권층은 그들 손아귀의 이권을 위해서라면 짐승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칼을 들었다. 연구소란 미명하에 도축장을 꾸려 놓은 이들이었으니까.

“내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이송시킬게.”

그는 다정하게 말하며 다시금 아내를 설득했다. 의롭고 마음이 따뜻한 사라의 신념과 가치관을 사랑하고 존중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바딤은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찝찝한 무언가가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위장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알았어.”

사라는 결국 단념한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자의 윤리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시베리아 연구소만큼은 저 아이를 위해 피하고 싶었지만, 남편이 저렇게 반대를 하니 그녀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내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춘 바딤은 고맙다며 웃었다. 그때 그녀의 등 너머를 본 그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그곳엔 사라의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은 작은 소년이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앙고라 재질의 상아색 니트가 그의 옅은 갈색 머리와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라 역시 뒤쪽을 돌아보았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침착한 눈빛과 반듯한 자세였다. 흙먼지를 씻어 내서 말끔해진 얼굴은 더욱더 귀티가 흘렀다.

‘대체 저 계단을 언제 내려온 것일까. 어떻게 몰랐을 수가 있지?’

바딤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보.”

사라가 조심스럽게 남편을 불렀다. 잠시 당황한 채 서 있던 바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행여나 자신의 큰 체구에 애가 겁을 먹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바딤은 한쪽 무릎을 굽힌 채 허리를 숙이고 앉았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 아저씨는 페트로비치 박사란다. 만나서 반갑구나.”

그는 바딤을 빤히 쳐다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슥 지나쳐 걸었다. 바딤은 당혹스러운 나머지 뭐라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자그마한 소년의 뒤통수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사라는 쿡쿡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이 맹랑한 꼬마는 호불호가 분명한 모양이었다. 딱 봐도 남편보다 그녀를 따르는 게 확연히 눈에 보였다.

“자식, 사내 녀석이라고 벌써부터…….”

구시렁거리며 일어선 바딤은 뒷목을 긁적였다.

한편 사라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타이탄이 벽면 화면에 띄운 데이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상처가 다 없어졌구나.”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반응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사라가 손을 뻗자 하얀 뺨을 살짝 실룩거리며 경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로 표정 변화가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년이다. 평범한 아이라면 낯선 곳에서 낯선 어른들과 있을 때, 보통 두려워하거나 울면서 엄마를 찾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 평범한 아이라면 그랬겠지.’

사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녀는 주방을 향해 몸을 돌리며 소년에게 넌지시 물었다.

“초콜릿 좋아하니? 아줌마가 따뜻한 코코아 한 잔 타 줄까?”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남겨진 사라의 일기】

바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아이를 만난 걸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길들일 때에는 먹을 것이 최고라더니, 역시 옛말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꼬마라는 말보다 소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아이는 한층 풀어진 자세로 식탁 앞에 앉았다. 그의 하얗고 작은 손에는 따뜻한 코코아 잔이 꼭 쥐여져 있었다.

“이 근처에 일반인 거주 지역은 없는데, 혹시 연구소를 방문한 귀빈들 아이 중 하나일까?”

─ 유전자 정보를 근거로 신원 조회를 실시한 결과 일치하는 데이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신원이 없다는 말이야?”

─ 네, 박사님.

사라와 바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아이는 태연한 얼굴로 코코아를 홀짝이고 있었다. 여러 번 대화를 시도했지만 소년은 대답은커녕 목소리 자체를 들려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상태라 판단했다.

“그나저나 신원이 조회되지 않으면 신고를 할 수가 없는데.”

“아예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 같아.”

쨍그랑!

컵이 깨지는 소리였다. 놀란 사라가 식탁 쪽으로 급히 다가갔다. 소년은 깨진 컵을 내려다보더니 순진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사라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팔걸이 밖으로 툭 튀어나온 그의 한쪽 팔이 컵을 바닥에 슥 버린 범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죄책감은커녕 아주 당당한 눈빛을 보였다.

“당신은 나와 있어, 내가 치울 테니까.”

뒤따라온 바딤이 사라를 번쩍 들어서 안전하게 의자 위에 앉혔다. 그사이 아이는 의자에서 사뿐히 내려오더니 그녀가 앉은 의자를 향해 다가왔다.

“움직이면 안 돼! 바닥에 깨진 컵 조각들이…….”

바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날카로운 컵 조각 위로 맨발을 디뎠다. 그의 발바닥에서는 벌써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였구나. 잠시만 기다려 봐. 구급약품을 가져올 테니까.”

사라가 격앙된 목소리로 바딤에게 외쳤다.

“아니야! 가져올 필요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약상자를 꺼내 오던 바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사라는 거실 바닥에 소년을 앉힌 채 발바닥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뭐에 충격을 받았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남편을 천천히 올려다본 그녀는 힘겹게 숨을 삼키며 침착하려 애를 썼다.

“상처가…….”

바딤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의 손에 잡힌 아이의 발바닥을 쳐다보았다.

“이미 다 나았어.”

핏자국 사이로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좀 전에 분명 베인 것을 확인했는데? 바딤은 사라의 손에서 소년의 발을 낚아채 직접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는 놀란 눈으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바딤은 소용없어진 구급상자를 툭 떨어뜨렸다. 소년은 그저 순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라의 배를 슥 한 번 만졌다.

“만지지 마!”

바딤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애를 밀쳤다. 옆에 있던 사라는 남편의 거친 행동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결혼 전부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없이 온순하고 다정한 이인데, 그의 이런 모습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애한테 왜 그래?”

“당장 연구소에 데려다 놓고 올 테니 그런 줄 알아.”

“그러지 마. 사람들이 얠 데리고 뭔 짓을 할 줄 알고!”

“그럼 어쩌자고? 당신도 봤잖아. 이 아인 정상이 아니야. 오히려 연구소에서 빠져나온 실험체일 가능성도 있어.”

“실험체라니! 애 앞에서 무슨 말을…….”

바딤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소년은 바딤에게 밀쳐져서 뒤로 넘어진 후, 홀로 담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는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그에게 있어 최우선은 아내와 배 속의 딸이었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작은 아이가 맹수라도 되는 양 불안하고 덜컥 겁이 났다.

“연구소 애라면 벌써 난리가 났을 거야. 하지만 그런 기미는 없잖아.”

“그거야 모르지.”

“우리가 자칫 이 아이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어. 잊은 거야? 이 아이가 우리 딸을, 나를 살렸잖아.”

반박하며 말을 잇던 사라가 갑자기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주춤거리며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겨우 가슴팍밖에 오지 않는 아이가 둥글게 부푼 그녀의 배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년은 고요히 울려 퍼지는 아기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며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계속 인형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이던 아이가 처음으로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아름다운지 두 사람은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사라는 명치부터 온몸에 퍼져 가는 뭉클한 감정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감정이 벅차올라서 목까지 울컥 치미는 기분이었다. 바딤 또한 멍하니 서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배 속의 딸을 끌어안고 있는 낯선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사라는 천천히 아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햇살을 머금은 듯 예쁜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아기가 인사를 하네? 느껴지니?”

가만히 눈을 깜빡인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빤히 그녀의 배를 쳐다보았다. 사라는 태동이 느껴지는 배를 어루만지며 배 속 아기를 대신해 말을 건넸다.

“이 아이 이름은 이브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이번에도 옅은 갈색 머리의 아이는 말이 없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할 뿐. 어린애의 눈이라고 하기엔 공허하고 삭막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니? 그럼 아줌마가 지어 줄까?”

그녀는 아이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오늘따라 격정적인 딸의 태동과 함께 결정했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우리 이브를 지켜 준 멋진 오빠니까, 아담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말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소년은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더니 앞머리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이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처음으로 이 아이에게서 ‘아이다운 모습’을 보게 된 듯했다. 비록 표정 변화는 없지만 나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 아담으로 하자.”

그녀는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아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남편 쪽을 응시했다. 바딤은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괸 채 바닥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당신 알아서 하라는 표정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기색이었다. 아마도 방금 전 그녀의 배를 끌어안는 소년의 모습에서 그도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사라는 침대에 누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바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조만간 이브의 순산을 위해 연구소를 떠나 별장으로 요양을 갈 계획이었다. 사라의 뜻은 이러했다. 일단 그때까지만이라도 아담을 데리고 있자는 것. 그리고 별장으로 간 후에 위탁을 맡기든, 보호시설에 보내든 하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구소에 아이를 보내는 건 도저히 못할 짓이란 게─시베리아 연구소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일말의 신뢰도 하지 않는 사라이기에─ 그녀의 의사였다.

아내에게 한없이 약한 바딤이었다. 결국 부부는 한동안 아담을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2074년 1월, 바딤 페트로비치 박사는 연구소에 출산 휴가를 냈다. 그리고 그는 곧 태어날 딸을 기다리며 가족과 함께 바이칼 호수 근처의 별장으로 떠났다.

* * *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 부랴트어로 큰물이란 뜻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로 남아 있는 이곳은 전 세계 담수의 20%를 담고 있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표면적은 북아메리카 5대호의 13%밖에 되지 않지만 물의 양은 5대호를 합친 것보다 3배나 많기 때문에 세계의 민물 창고라고 불렸다.

남북 길이가 72㎞인 알혼 섬은 바이칼 호수에 떠 있는 26개의 섬 중에 가장 큰 섬이었다. 드넓게 이어진 초원 뒤로 장대한 언덕길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에 오르면 알혼 섬의 상징인 샤먼 바위와 잔잔한 물결을 이루는 바이칼 호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알혼 섬에는 아직도 샤먼 의식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래서인지 샤먼 바위로 가는 길에는 장승이나 솟대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빨간 지붕 집들의 주인들은 지금도 오색 빛깔 천을 두른 솟대 앞에 서서 기도를 올리고는 했다.

페트로비치 부부의 별장은 바로 이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얀 벽에 파란 지붕을 올린 아담한 별장은 하늘에서 보면 손톱 달 모양처럼 곡선으로 휘어 있었다. 알혼 섬의 사람들은 구름 언덕 위 그들의 집을 모양새대로 ‘나발루니예’라 불렀다. 나발루니예란 러시아 말로 신월, 초승달이란 뜻이었다. 유일하게 에어쉽 승강장이 있는 박사 부부의 별장은 알혼 섬 주민들에게 있어 낯설고 이질적인 첨단 문명의 집약체였다.

사라와 바딤 부부가 알혼 섬의 별장에 온 것도 어느덧 이 주째.

섬의 기온은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다. 바이칼 호 전체가 꽁꽁 얼어붙는 시점이었다. 아름다운 얼음 호수는 커다란 은쟁반처럼 반짝이며 오늘도 아침 햇살을 환히 비추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사모님!

타이탄이 허공에 활기찬 아침 인사를 띄웠다. 바딤이 깰까 봐 소리는 무음으로 해 놓은 상태였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은 이곳에서도 매일 늦잠을 잤다. 사라는 하품을 하며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그녀의 앞으로 가사용 로봇25)이 잽싸게 굴러 오며 집게형 손으로 루이보스 차를 건넸다. 사라는 떨어지는 꽃잎이 새겨진 찻잔을 들며 루이보스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거실을 환히 비추는 커다란 아치형 통유리 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그녀를 위해 바딤이 만든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알혼 섬의 별장에서 이 창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하얗고 거칠거칠한 석재의 벽을 뚫어 만든 창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아치형의 창가에는 햇살이 쏟아지듯 내려앉았다. 밤이면 달빛이 망원경을 통해 투시하듯 들어와 통유리 창을 적시며 은은하게 바닥을 내리비췄다. 이곳은 그녀가 어릴 때 종종 가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었다. 신성하고 거룩한, 그러면서도 편안하게 마음의 끈을 늦추게 하는 장소.

“아가야, 너도 좋지?”

사라는 배를 어루만지며 보시시 웃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기댄 그녀는 의자를 앞뒤로 움직이며 햇살에 눈웃음을 걸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얼음 호수의 정경이 평온했다. 여름에 이 창을 활짝 열면 시원한 호수 바람이 뺨을 적시고 지나갔다. 그러면 그 뒤로 시베리아의 푸른 보석, 바이칼 호가 수면 위로 햇살을 반사시키며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의 경관과 함께하는 티타임.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는 아침이었다.

【알림】

익명의 발신인으로부터

사라 페트로비치에게 영상 편지 도착 1

열람하시겠습니까?

이른 아침의 평온은 의외로 쉽게 금이 가고 말았다. 기다리던 편지였지만 유쾌한 방문은 아니었다. 조용히 서재로 온 사라는 찻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방음 모드를 작동시킨 뒤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바깥의 방문 앞에는 ‘독서 중’이라는 등이 반짝 들어왔다. 행여나 바딤이 일어나서 불쑥 들어올까 싶어 한 예방책이었다. 잠시 문밖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던 사라는 심호흡을 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타이탄, 재생해.”

─ 네, 2074년 1월 13일 오후 11시 21분에 수신된 편지입니다.

불 꺼진 서재의 한가운데 놓인 원목 책상 앞에 입체 화면이 생성되었다. 그 속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등장했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호주 여자였다.

─ 안녕, 사라! 나야, 조이. 몸은 좀 어때? 아기는 건강하게 크고 있지? 다름이 아니고 일전에 네가 부탁한 것 말이야. 결과가 어느 정도 나온 것 같아서 말해 주려고. 휴우, 여기 내 눈에서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 보이지? 내가 요즘 이것 때문에 일 끝나고 매일 야근했잖아. 너 나중에 제대로 보상해 줘야 한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잠시 일어났다. 그리고 갈래갈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되돌아 앉았다. 조금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 내가 같이 보낸 자료도 함께 봐. 타이탄에게 보내 놨으니까.

화면이 양분되더니 영상 편지 옆으로 실험 영상이 함께 떠올랐다. 영상을 바라보는 사라의 눈은 긴장으로 굳어 갔다. 조이는 피곤한지 의자를 뒤로 깊게 젖히더니 이마를 짚었다.

─ 그런데 대체 이 혈액 샘플은 누구의……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자.

그녀는 물어볼 게 많은 눈빛이었지만 신중한 성격답게 말을 아꼈다. 잠시 미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조이는 “난 이만 자러 간다.”라면서 손을 흔들더니, 어두워진 화면 뒤로 ‘핏’ 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두 번째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조곤조곤 속삭이는 조이의 목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다. 그녀가 첨부한 실험 녹화 자료였다.

─ 혈액 샘플 ANGEL-122526)에 관한 실험을 시작한다. 실험 대상은 SPF5 동물27)…….

화면에 등장한 것은 하얀 실험쥐들이었다.

─ ANGEL-1225를 주입한 생쥐들이 상처 회복 능력과 세포 재생 능력 면에서 놀라운 변화를 보인다.

침착하게 녹음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선 떨림이 묻어나왔다. 그것도 잠시, 조이는 이내 착잡하고 어두운 톤으로 말을 이었다.

─ 주입 후 38분 경과, 실험체 1번 생쥐에게서 세포 괴사 진행이 발견. 40분 경과, 실험체 1번 사망. 나머지 개체들도 괴사가 진행되고 있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만히 손을 말아 쥔 사라의 동공이 잔물결을 그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 44분 경과, 모든 실험체 사망.

다음 실험 대상은 원숭이였다. 혈액 샘플 ANGEL-1225를 주입한 원숭이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죽기 전 뇌파 움직임이 700퍼센트 상승, 신체 능력의 강화, 또한 비약적으로 지능이 향상되는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세포의 변이가 빠른 만큼 노화가 급격히 촉진되었으며 일주일 뒤 치매 증상을 보였고 곧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영상 편지를 끈 사라는 두 손을 모으고 턱을 괴었다. 책상 앞에 앉은 그녀의 시선은 적막 속으로 빨려 갈 듯 고요하고 차분했다. 조이의 마지막 말이 오랫동안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본 혈액 샘플을 검사한 결과, ANGEL-1225는 미확인 바이러스를 보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초기 단계에서 세포의 성장을 급속도로 촉진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종래에는…….

서재에서 나온 사라는 흔들의자에 앉은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아치형 창문을 뒤로한 채 나무 의자에 기댄 아이는 마치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아담.”

눈을 감고 있던 아담이 살그머니 눈을 치켜떴다. 소년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항상 무표정인 탓에 늘 건조하고 서늘한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그럼에도 이 아이가 사랑스럽다고 여겨지는 건, 그녀의 배를 볼 때면 전혀 달라지는 분위기와 행동 때문이었다. 그럴 때만큼은 이 아이도 천생 어린애구나 싶어서 사라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담은 마치 선물 상자를 기다리듯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배를 하염없이 보기도 했다. 도대체 이 안에 있는 건 언제 나오는 거냐고 묻듯 그녀의 눈을 흘끔거리면서.

관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매일 하루에 꼭 한 번, 아담은 그녀의 배를 끌어안고선 아기의 태동과 심장 고동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오늘도 잠을 못 잤니?”

아담은 사라를 바라보더니 평온한 눈빛을 보였다. 그는 별일 아니란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눈을 감고 그녀의 배에 뺨을 맞댔다.

소년은 종종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힘들거나 피곤해 보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바딤은 농담처럼 덧붙였다. 숙면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거 아니냐고. 당시 그녀는 그게 말이 되냐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순 두더지 머리처럼 고개를 내민 의혹의 씨앗은 금방이라도 무럭무럭 자랄 듯 불거지기 시작했다.

통신 교란의 원인은 아담으로 밝혀졌다. 물론 눈에 보이는 증거나 접점 혹은 뚜렷한 단서를 찾지는 못했지만 아담의 정서나 기분이 불안정할 때 통신 교란이 일어난다는 건 확실했다.

아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는 사라의 눈이 불안한 미소를 머금고 일렁였다. 아까 조이가 보낸 영상 편지 때문일까? 죽은 쥐와 원숭이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참혹하게 죽은 그 동물들의 모습이 꼭…….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그녀 자신의 손이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식어 가는 듯 피가 통하지 않아 굳어 있었다. 사라는 황급히 손을 주무르며 마사지를 했다. 불길한 예감의 촉이 목 뒤에 서늘하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어떤 생각에 휩싸인 듯 성큼성큼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이프 하나를 꺼냈다.

─상처 회복 능력과 세포 재생 능력에서 놀라운 변화를 보인다.

머릿속에서 조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사라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단호한 눈빛을 지었다. 손에 쥔 나이프 끝이 허공에서 예리하게 빛났다. 펼친 손바닥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던 순간이었다.

“사라!”

깜짝 놀란 그녀의 손에서 ‘댕강!’ 하고 칼자루가 떨어졌다. 사라는 뒤를 돌아보며 바로 손을 움츠렸다.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 소리에 놀란 바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멍한 눈으로 바닥에 떨어뜨린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칼을 본 바딤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아…… 응.”

“위험하게 그런 걸 왜 들고 있어? 요리 같은 건 타이탄에게 시키면 되지.”

바딤의 말에도 사라는 여전히 나이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손바닥이 따끔한지 팔을 냉큼 들었다.

“베였어?”

“그런 거 같아. 따갑네.”

“조심 좀 하지.”

바딤은 사라의 손을 들어 확인하며 걱정 어린 잔소리를 했다.

“이쪽 손 맞아? 다친 곳 없는데?”

“그쪽 손 맞는데.”

손바닥을 들어 본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딤을 쳐다보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사라의 뺨을 귀엽다는 듯 꼬집었다.

“요즘 자꾸 멍하네. 그러다가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조심해. 이제 몸도 많이 무거운데, 무리하지 말고 나나 타이탄 불러서 시켜. 알았지?”

“알았어.”

마지못해 웃는 사라의 얼굴에 왠지 모를 초조함이 묻어났다. 곧 태어날 아기 때문에 예민해진 것이라 여긴 바딤은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이윽고 그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입을 맞추자 굳어 있던 사라의 눈에도 옅은 미소가 어렸다. 역시 남편 품속만 한 안식처가 없었다. 온몸을 잠식하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괜한 걱정이다. 타이탄에게 매주 검진도 받고 있고,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으면 벌써 나타났겠지.’

연구소로 돌아가면 조이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다. 바딤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시베리아 연구소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연구원이었다. 사라는 마지막 남은 불안감마저 털어 내고자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침실로 사라졌다. 그러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사용 로봇이 굴러 와 떨어진 나이프를 주웠다. 그는 칼날 끝에 맺힌 조그마한 핏방울을 휴지로 슥 닦아 냈다.

아담과 함께한 지 삼 주째. 그는 아주 얌전했다. 처음에는 꼭 무인도에서 만난 타잔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음식을 다 먹으면 그릇을 툭 바닥에 버린다든지, 문이 아닌 창문으로 바깥을 나간다든지, 옷을 벗을 땐 그냥 찢어서 벗는다든지 등등의 행동이었다. 꼭 폭력적인 행위가 아니더라도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의 행동에 페트로비치 부부는 종종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반면 학습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그 예로, 한 번은 바딤이 드론을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아담은 그 자리에서 옆에 있던 드론을 집어 재조립을 뚝딱 해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밖에 있던 에어쉽까지 분해를 시도했다. 어린애가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에어쉽의 문짝 하나를 잠자리 날개인 양 쭉 뜯어내는 것이다. 바딤이 허둥지둥 달려와 말려서 다행이었다. 그 자리에서 에어쉽 하나가 정말 머리, 가슴, 배로 삼단 분리가 될 뻔했다고.

그날 이후, 바딤은 작업을 할 때 종종 아담을 옆에 데려다 놓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엔지니어의 재능을 발견했다나 뭐라나.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두 남자를 보며 사라는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에도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이렇게 평화로운 날들만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새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조각구름처럼 펼쳐지는 평온한 일상. 그러나 그 안온한 시간은 오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그날은 갑작스레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다.

온 세상이 뿌옇게, 그리고 하얗게 휘덮이던 날. 눈을 부릅뜨고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오전에 이르쿠츠크28)에 나갔던 바딤에게서 연락을 받은 사라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거센 눈보라 때문에 그가 탈 에어쉽이 뜰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와. 미안해, 내가 괜히 카레를 먹고 싶다고 해 가지고…….”

─ 아니야, 눈보라가 좀 잦아지면 갈게. 집 밖으로 나가지 말고, 누가 와도 문 열어 주지 말고, 따뜻하게 하고 있어. 알겠지?

【알림】

방문객 (1)

과거 방문 기록이 없습니다.

망막 스캔 중…….

신원을 조회할 수가 없습니다.

언덕 위 ‘나발루니예’에 낯선 이가 찾아왔다. 휘날리는 눈보라 사이로 언뜻 보인 건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웬 손님이지?’

사라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한 배 위에 단단히 팔짱을 끼고 섰다. 그녀는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생각에 빠졌다. 타이탄은 화면에서 ‘박사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절대 집 문을 열지 말라 하셨다’며 종알종알 잔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덜컥 문을 열어 줄까 봐 우려한 나머지 그러는 듯했다. 바딤과 마찬가지로 마스터 통제권이 있는 사라인지라 그녀가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는 타이탄이었다.

─ 설사 박사님이 오셔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박사님 본인이시라면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오실 테니까요. 추론하자면 박사님이라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사람은 99% 가능성으로 박사님인 척하는 낯선 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바딤이 타이탄의 언어 감각 및 대화 지수를 또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말이 많아졌다.

“시끄러워!”

사라가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자, ‘총알탄’은 입을 쏙 다물었다. 눈치탄, 총알탄 모두 사라가 촉새 같은 인공지능 비서인 타이탄에게 붙여 준 별명이었다.

알혼 섬 주민이라면 타이탄이 신원 조회를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연구소에서 온 사람인가? 그런 말은 없었는데. 사라는 찝찝한 표정을 짓더니 돌아섰다.

“뭐, 아쉬우면 다시 찾아오겠지.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오시라 해.”

─ 휴우, 알겠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쉰 타이탄이 재깍 대답했다. 사라는 “웬, 한숨?”이라고 눈을 흘겼다. 이제는 컴퓨터가 한숨을 다 쉰다고 기가 막혀 하면서 말이었다.

“자, 우리는 하던 것 마저 해 볼까?”

사라가 허리를 잡고 뒤뚱뒤뚱 걸어오자, 거실 바닥에 앉아 있던 아담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입고 있던 하얀 스웨터에는 목공용 접착제가 잔뜩 묻어 있었다. 바닥에는 바딤과 함께 깎아 놓은 나무 조각들이 널려 있었는데, 둘은 엊그제부터 함께 작은 목마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곧 태어날 이브를 위한 것이라 했다.

어쩜 이렇게 하는 짓도 예쁜지. 사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담이 깎은 조각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 아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난데없이 스피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을 찾아왔다는 손님이 아직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

그녀는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화면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남자는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휘감고 있었다.

사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배를 감싸 안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아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는 작은 손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담은 불안한 눈빛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가 지그시 깨문 입술 사이로 긴장한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사라는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아는 사람이니?”

곁눈질로 화면을 흘끔거리던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놓더니 현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담!”

사라가 쥐고 있던 나무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빙그르 돌았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다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크리스털로 조각된 장미 문양이 양 갈래로 갈라지며 강화유리문이 열렸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어온 사라가 그 사이로 빠르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에 팔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힘이 풀린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이중으로 된 현관임에도 찬 기운이 느껴졌다. 외부 현관이 열린 모양이었다.

이미 현관 앞에 도착해 있는 아담의 옆에는 경비용 로봇이 서 있었다. 눈치 빠른 타이탄이 재빨리 대동시킨 게 틀림없었다. 로봇은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었다. 입꼬리를 느른하게 올린 채 아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신사가.

“안녕하십니까?”

이지적인 외모와 달리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남편인 바딤보다도 큰 신장에 넓은 어깨를 소유한 자였다. 사라는 낯선 손님과 마주하자마자 그의 체구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는 정신이 없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남자는 귀를 살짝 덮을 정도의 짧은 머리칼이었는데, 까만 머리칼이 검정색 코트와 어우러져 한층 무게감을 얹어 주었다.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인지, 아니면 묵직한 목소리 때문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뺨에 언뜻 보이는 흉터 때문인지, 그녀 자신이 경황없는 탓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 남자의 눈빛에 이리도 흉곽이 죄여 오는 것일까?

불안이 엄습했다.

“아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존재감이 대단한 사내였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며 다가올 때마다 검은 안개가 주위를 휘덮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장소까지 이동해 있을 줄이야. 덕분에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남자는 걸어오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자 아담이 경비용 로봇을 대동한 채 사라의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사라는 아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담은 이 남자의 방문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아담의 아버지 되시나요?”

“아담?”

그가 되묻자, 사라는 머쓱한 미소와 함께 “제가 이 아이에게 붙여 준 이름이에요.”라며 설명을 덧댔다. 남자는 그녀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한 표정이었다. 대신 그녀의 둥근 배를 보더니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설마?’ 하는 눈으로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아담을 응시했다.

아담은 사라보다도 차분하고 평온한 눈으로 물끄러미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왼팔은 사라의 임신한 배를 보호하듯 막아선 채였다. 그런 아담이 귀엽다는 듯 빤히 응시하던 사내는 별안간 “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이해를 했나?”

아직 어린 그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어려운 숙제였는지도 모른다. 남자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그는 미안하고 아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한쪽 무릎을 굽혔다. 아담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주 틀린 답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의 선택이 옳은 답일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는 곰곰이 턱을 쓸며 생각에 잠기더니 커다란 손을 들었다. 그의 넓은 손바닥은 아담의 얼굴을 한 손으로 다 가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건 반칙이지만, 현재 상황이 당신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건 사실이니까요. 이번 한 번만 도와주는 겁니다. 당신의 답이 정답일지 아닐지는 저도 궁금하니 말입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당장 그 손 놓지 못해요?”

사라가 소리를 지르며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손으로 아담의 머리통을 움켜쥔 남자의 입꼬리엔 오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발버둥 치는 아담의 정수리를 잡고 쥐어 뽑듯 허공에 들어 올렸다.

번쩍!

알혼 섬의 주민들은 그날, 나발루니예 언덕 전체를 뒤덮는 섬광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그것은 눈보라를 뚫고 하늘을 비출 만큼 거대한 빛이었다.

정신을 차린 사라는 바닥에 쓰러진 아담을 발견하고선 비명을 내질렀다. 때마침 집으로 귀가하던 바딤은 그녀의 비명 소리에 에어쉽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장바구니를 던진 채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활짝 열려 있는 외부 현관 사이로 들어와 아내의 이름을 외쳤다.

“사라!”

“바딤! 아담이…….”

그는 벽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라의 몸부터 부축했다.

“무슨 일이야?”

경비용 로봇은 양단 분리가 된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바딤은 그 앞에 쓰러진 아담을 발견했다. 그는 정신을 잃고 늘어진 아담을 업으며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는 얼굴로 사라를 쳐다보았다.

“웬 남자가 왔었어.”

“남자? 누구?”

“모르겠어. 아이를 찾으러 왔다고만 했어.”

그러고 보니 낯선 사내는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는 활짝 열린 외부 현관을 바라보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밖은 여전히 하얀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얘 이마는 왜 이런 거야?”

바딤은 등에 업은 아담을 곁눈질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말에 사라는 아담의 이마를 쳐다보았다. 인주로 새긴 것 같은 붉은 낙인이 이마의 살갗에 스며들듯 옅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 남자가 남긴 묵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는 당분간 부탁드리겠습니다.

긴장이 풀린 사라는 별안간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걸 느꼈다. 낯선 남자와의 기이한 만남은 만삭인 그녀에게 있어 큰 충격이었다. 사라는 배를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아 진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 아아악!”

“여보! 왜 그래? 괜찮아?”

“배, 배가…… 아기가…….”

그녀의 말에 바딤의 낯빛은 사색이 되었다. 사라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은 눈빛을 짓더니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끊어질 듯 말을 이었다.

“아, 아기가…… 나오려 해.”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남겨진 사라의 일기】

기이하게도 눈을 뜬 아담은 검은 신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신비로운 능력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눈보라는 다시 거세졌다. 이르쿠츠크의 의사들이 알혼 섬까지 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바딤이 말하길, 그가 올 수 있었던 것도 기적처럼 눈보라가 잠시 잦아진 덕분이라 했다.

결국 소식을 들은 알혼 섬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섰다. 다행히도 알혼 섬에는 아직까지 자연 분만을 하는 풍습이 남아 있었기에 산파를 자청할 유경험자들이 많았다. 그녀들의 손은 타이탄보다도 빨랐다. 순식간에 산실을 준비하며 바삐 움직이는 여인들의 목청소리에 바딤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인 양 불안한 표정으로 구석을 지켰다.

진통은 하루가 꼬박 넘게 이어졌다. 지독한 난산이었다. 사라는 기진맥진하여 울부짖을 힘도 없어 보였다. 체력적으로 강한 그녀였지만 많이 지치는 모양이었다. 바딤은 전전긍긍하며 산실로 탈바꿈한 침실 밖에서 제자리걸음만 수백 바퀴째였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 그는 몇 시간째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속을 태우며 소식만 기다렸다.

“산도가 좁은 데다가 산모가 힘이 없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나올 것 같은데.”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산파가 한숨을 푹 쉬며 걸어 나왔다. 기대하며 다가왔던 바딤은 실망 어린 눈빛으로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을 내다보더니 “하늘님이 노하셨나?”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큰 애는 아직도 의식이 없는 모양이야. 가서 한번 봐 봐.”

“큰 애요?”

멍하니 되묻던 바딤은 금세 아담의 이야기란 걸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넛방으로 온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아담을 내려다보며 타이탄과 연결된 벽 스크린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타이탄이 아담의 바이털 사인을 띄우며 보고했다.

─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맥박, 호흡, 체온, 혈압, 뇌파 수치 모두 정상입니다. 곧 깨어날 겁니다.

“그래?”

그는 깨끗해진 아담의 이마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이 아이도 잠에 들긴 하는구나.

가끔 한밤중 잠에서 깬 그는 거실로 나와 따뜻한 물을 마셨다. 그럴 때면 종종 흔들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담을 발견하고는 했다. 소년은 쏟아지는 달빛 아래 몸을 움츠리고 앉은 채 그를 빤히 응시했다. 가끔 그 모습이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바딤은 매정하게도 그를 홱 외면하고 말았다.

너무 아름다운 건 주의해야 한다. 상대를 홀리는 아름다움은 대개 독성이 있다는 게 그가 생각하는 자연의 섭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담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언젠가 번데기를 벗고 나온 소년이 등 뒤로 펼친 날개에서, 독나방의 것과 같은 섬뜩한 무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정작 잠이 필요한 건 바딤 쪽이었다. 그는 안색이 안 좋은 얼굴로 피곤한 눈을 주물렀다. 답답한 가슴에서 연거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타이탄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바딤을 불렀다.

─ 박사님! 박사님!

“왜, 또…….”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던 바딤은 토끼 눈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핏대가 선 목으로 허둥지둥 방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문득 겁이 나는지 뒤를 홱 돌아보며 확인차 되물었다.

“타, 타이탄! 설마…….”

─ 네, 박사님. 축하드립니다! 예쁜 공주님이십니다.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흥분으로 두 주먹을 부르르 떤 바딤은 아내의 이름을 외치며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 호들갑 소리에 고요히 누워 있던 아담이 꼼지락거리며 머리를 들었다. 그는 이불을 젖히며 몸을 일으켰다. 한바탕 긴 꿈을 꾼 듯 몽롱한 눈빛이었다. 늘 조용하던 집이 북새통처럼 시끌벅적한 게 낯설고 묘했다. 잠시 거실 쪽에 귀를 기울이던 아담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엉금엉금 내려왔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따라온 작은 발걸음은 두려운 듯 멈춰 섰다. 감동 어린 눈물을 머금고 있던 중년의 여인들은 머뭇거리며 서 있는 그에게 손짓을 하며 웃었다.

“어서 가 보렴.”

“예쁜 동생이 생겼구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는 웃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침대 위에 지친 얼굴로 앉아 있는 사라와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바딤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의 품에는 아주 작은 무언가가 안겨 있었다. 아담은 석상처럼 굳은 채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를 발견한 사라가 빙긋 웃으며 손짓을 했다.

“아담, 일어났니?”

사라.

그녀는 병자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아주 행복해 보였다.

“안녕, 아담 오빠. 나는 이브예요.”

사라가 그녀의 검지보다도 작은 아이의 손을 건드리며 대신 인사를 건넸다. 원숭이처럼 쭈글쭈글한 아기를 내려다보는 아담의 눈이 점차 커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라는 살그머니 그의 손을 잡아 갓난아기의 손에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갓난아기는 손가락을 활짝 펴더니 그의 손가락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놀란 아담이 묘한 표정으로 아기를 쳐다보았다.

“이름을 불러 줘야 아기가 눈을 뜬단다.”

사라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바딤이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쉿!’ 조용히 하라는 표정으로 바딤을 쿡 찔렀다. 다행히도 순진한 아담은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예쁜 눈을 가만히 깜빡이며 이브를 내려다보던 그는 망설이듯 사라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단정하고 차분한 음색으로 울려 퍼졌다.

사라는 놀라서 커진 눈으로 멍하니 아담을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부를 줄이야. 바딤 역시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난생처음 들은 아담의 목소리에 감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며 벅찬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담은 뺨을 살짝 붉게 적신 채 갸웃거리며 이브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라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름을 불렀는데 왜 아기가 눈을 뜨지 않느냐는 듯이.

“지금은 아기가 자고 있나 봐. 내일 아침 한 번 더 불러 보겠니? 그럼 이브도 눈을 뜨고 반갑게 인사할 거야. ‘아담 오빠, 안녕?’ 하면서.”

그녀의 말에 아담은 머뭇거리더니 안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사라가 아기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자, 그 모습을 관찰하던 아담도 따라서 조그마한 이브의 손을 들더니 살그머니 입을 맞췄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방문을 나서다가 주춤거리며 돌아섰다. 그는 이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장면을 기억 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 넣고 싶었다.

방문을 닫고 나온 아담은 작은 온기가 닿았던 손끝을 매만지며 왼 가슴에 손을 대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에 희미한 곡선이 맺혔다.

이브.

이브 페트로비치.

아기의 심장 소리가 깃든 듯 그의 심장도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음악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간질거리는 왼 가슴부터 귓가까지 전율하듯 흘렀다.

그의 생애, 가장 벅차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 * *

페트로비치 박사는 돌연 장기 휴가를 냈다. 경호팀 소속인 사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해가 바뀌어도 시베리아 연구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페트로비치 박사의 아내인 사라가 병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평소 사라와 가깝게 지냈다는 조이 반즈 박사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하고 나섰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사라 페트로비치 제1 경호팀장은 전과 다름없이 아주 건강하다고 했다. 그러자 바딤이 속해 있던 팀 내부에서는 또 다른 의견이 제기되었다. 바딤 페트로비치 박사가 독자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연구원들은 그가 바이칼 호로 떠나기 전 연구소 근처에 위치한 숲에서 홀로 실험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노라며, 뒤늦게 발고 아닌 발고를 하기도 했다. 시베리아 연구소의 이사진은 행여나 페트로비치 박사가 다른 곳에서 스카우트를 받은 것은 아닌지 조용히 뒤를 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경쟁사와 접촉한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2075년 3월, 이브가 태어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넘은 시점. 페트로비치 부부는 여전히 알혼 섬에 머무르고 있었다. 시베리아 연구소 측에서 바딤에게 슬슬 복직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바딤은 가족과의 시간을 핑계로 삼았다. 그 해, 페트로비치 부부는 결국 아담을 정식 입양할 것을 결정했다.

나발루니예 언덕에는 점차 알혼 섬 주민들의 발길이 끊겨 갔다. 페트로비치 박사 부부는 예전처럼 그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더 폐쇄적인 생활을 했고 최대한 바깥으로의 노출을 자제했다.

그러면서 알혼 섬 내에는 흉흉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나발루니예 언덕의 박사 부부에게서 악마가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소문의 원천지는 언덕 아래에 사는 붉은 지붕 집의 노파였다. 그녀는 알혼 섬의 제일가는 무속인이었는데 상당수의 섬 주민들이 그녀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울타리 밖에서 무슨 이야기가 돌든 페트로비치 가족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담!”

“바딤!”

점심 준비를 마친 사라는 두리번거리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은 뒤 벗어서 뒤따라오는 가사로봇에게 건넸다. 거실 바닥은 장난감 블록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사라는 팔짱을 낀 채 바닥을 노려보다가 이번에는 페인트칠로 지저분해진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눈치챈 타이탄은 얼른 가사로봇을 보내 걸레로 벽을 닦기 시작했다.

“타이탄, 애들은?”

─ 박사님과 함께 계십니다. 온실입니다.

“거기서 뭐하는데?”

─ 그게…….

타이탄이 말을 흐리자, 사라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우리 집 두 남자가 요즘 밥 먹는 것도 잊고 푹 빠져 있는 존재라고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발걸음은 빠르게 온실로 향했다. 사라의 귓가에 먼저 ‘바보 1호’가 “까꿍!” 하고, 나이에 맞지 않는 재롱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브, 아빠 여기 있어! 아빠한테 와 봐. 아빠 여기 있어요.”

바딤이 토끼 인형을 들고 오두방정을 떨며 이브를 부르고 있었다. 덩치가 곰처럼 산만 한 사람이 덩실거리는 모습이 아주 볼만했다. 그의 맞은편,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온실의 한가운데에는 이제 막 14개월째에 돌입한 이브가 분홍색 내복을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동그란 눈을 깜빡이던 이브는 배시시 웃더니 포동포동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뒤뚱거리며 걷기 시작하자,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던 바딤과 아담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렇지! 잘했어, 우리 딸 정말 대단해! 아무래도 천잰가 봐.”

아빠의 칭찬에 힘입은 이브는 짧은 절구통처럼 통통한 다리로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자자, 아빠한테 오세요. 이쪽으로!”

바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딸을 열렬하게 응원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아담은 슬그머니 등 뒤에 감춰 두었던 딸기 바구니를 앞으로 꺼냈다. 먹음직스런 딸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바딤을 향해 아장아장 걷던 이브의 말똥말똥한 시선이 단번에 아담에게로 향했다. 요즘 딸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브였다. 아담은 예쁜 눈을 반달로 휘며 그녀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브, 딸기 먹자.”

이브의 조그마한 입술에 침이 가득 고였다. 아담은 늘 하던 대로 그녀를 향해 천사처럼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바딤의 미간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오빠한테 와.” 속삭이듯 말하는 아담의 다정한 목소리에 이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그를 향해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방심한 채 옆에 서 있던 바딤은 뒤늦게 다급한 얼굴로 “이브!”, “이브!” 하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미 이브의 동그란 눈동자는 아담이 딸랑딸랑 흔들고 있는 딸기에 못 박힌 상태였다. 쓰러질 듯 몇 발자국 내딛던 이브가 기우뚱 앞으로 엎어지자, 아담이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기쁜 듯 웃음을 터뜨리며 이브를 허공 높이 안아 올렸다. 꽤 무거울 법도 한데, 그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익숙하게 이브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었다.

“대단해, 이브! 너무 잘했어.”

아담은 방긋방긋 웃는 이브에게 연이어 칭찬을 쏟아 냈다. 그리고 침이 흥건한 그녀의 입술 사이로 딸기를 쏙 넣어 주었다. 이브는 아담의 품에서 웃음보를 터뜨리며 까르르 웃었다. 아담은 그녀를 비행기 태우듯 공중에 띄우고 또 띄웠다. 평소에도 많이 해 봤는지 솜씨가 베테랑이었다. 그런 둘을 질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바딤은 짐짓 매서운 눈초리를 지으며 걸어왔다.

“그건 반칙이다, 아담.”

“그럼 박사님께서도 다음번에는 딸기를 쥐고 불러 보세요.”

아담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받아쳤다.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서 있는 바딤을 향해 ‘그래 봤자 어차피 내가 이기겠지만’이라는 눈빛을 남긴 뒤, 이브를 안고 슥 지나갔다.

“하!”

바딤은 아담의 품에 안겨 까르르 웃는 이브를 보며 분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는 서러운 눈빛으로 풀 죽어 털썩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손에 쥔 인형을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토끼만 보면 좋아서 방실거리는 이브를 위해 사 왔더니 그녀는 하루 만에 인형을 외면하고 아담이 만들어 준 장난감에 푹 빠졌다. 그 순간만은 어린 딸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던 사라는 딱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당신은 아담한테 안 된다니까. 밤낮으로 이브하고 붙어 있는 애한테 무슨 수로 이겨? 일 년 내내 이브를 재우고 먹이고 씻긴 게 아담인데.”

“분명 내 딸인데, 왜 저 녀석이…….”

바딤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사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선 그녀는 온실에서 이브를 데리고 놀아 주는 아담을 보며 복잡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근 일 년 새 아담은 몰라보게 변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미숙했던 아이는 이브가 태어나던 날, 마치 영혼을 갖게 된 인형처럼 자연스럽게 울고 웃는 법을 깨달았다.

아담이 사는 세상의 중심축은 이브였다. 이브가 웃으면 아담도 웃었다. 이브가 울면 아담도 슬퍼했다. 이브는 그의 삶이었다.

이브를 향한 그의 시선은 때때로 너무나도 커다란 감격에 차 있어서, 오히려 부모인 두 사람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겨우 예닐곱 남짓의 소년은 언제 꽃을 피울까 기대하는 어린 왕자처럼, 턱을 괸 채 하루하루 설렘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의 장미를 지켜보았다.

어느 날 문득 사라는 미소 띤 얼굴로 바딤에게 말했다.

“아담은 이브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나 봐.”

아침 식사를 하던 바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저 어린애가 세상을 이해할 게 뭐가 있냐는 듯이. 사라는 햇살이 쏟아지는 아치형 창문 앞에 오순도순 앉은 아담과 이브를 보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 속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사랑을 처음 경험하는 아이야. 감정이란 게 무엇인지, 웃음이란 게 어떤 건지……. 당신 눈에도 아담이 이브를 통해 그 모든 걸 배우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아담에게 있어 이브는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삶의 지표 그 자체일지도 몰라.”

이브에게 인형을 흔들던 아담이 문득 식탁에 앉아 있는 사라와 바딤 쪽을 쳐다보았다. 사라와 눈이 마주친 아담은 표정 없는 눈에 서서히 옅은 온기를 띠었다. 그러고는 쑥스러운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사라는 그런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비로소 조금씩 아이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아담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변화가 반갑고 기뻤다.

“저 아이는 이브를 평생 지켜 줄 거야. 그러니까 바딤, 여보…….”

바딤은 사라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 굳었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질 듯한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가 왠지 가슴에 멍처럼 깊게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바딤은 얼어붙은 얼굴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 그러니 당신도 이제 저 아이를 그만 가족으로 받아 줘.”

【타이탄의 손상된 메모리에 남겨진 사라의 일기】

하루가 한 달처럼, 한 달이 계절처럼 흘러간다.

나의 시곗바늘은 점점 더 빠르게, 그리고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2076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알혼 섬 상공에 에어쉽이 뜨자, 섬 주민들은 다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러시아 국기가 입혀져 있는 국용 에어쉽이 아니라 검정색으로 광택을 입힌 개인기였다. 에어쉽 꼬리에 달린 조그마한 마크는 어떤 회사의 로고처럼 보였다. 섬 주위로 한 바퀴 원을 그린 에어쉽은 나발루니예 언덕으로 향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며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어이, 페트로비치 박사! 잘 지냈냐?”

화려한 등장을 한 에어쉽의 주인은 다름 아닌 리 박사였다. 편안한 차림으로 온 그는 좀 수척해 보였다. 안 그래도 마른 얼굴은 살이 더 빠져 있었고, 때문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눈썹 뼈가 날카로운 눈초리를 더 사납게 보이게 했다.

“온다는 말도 없이 웬일이야?”

바딤은 그를 집 안으로 들이며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리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사라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녀는 졸린 듯한 눈으로 고개를 들더니 힘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내가 몸살이 나서.”

바딤은 간단히 설명하며 그를 응접실로 이끌었다. 흘끗 뒤를 돌아본 리는 사라의 창백한 안색을 발견하더니 자못 충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

한눈에도 그녀는 야위어 보였다. 노곤한 눈빛에 혈색도 좋지 않았다. 동양인 특유의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도 세월의 풍파는 거스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보이다니. 푸석해진 머리카락과 얇아진 눈초리. 살이 많이 빠져서 더욱 그래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리 박사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타이탄한테 검사는 받아 보셨고?”

리 박사는 “내가 한번 봐 드릴까?”라고 물으며 걸음을 되돌렸다. 그러자 바딤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그는 별일 아니라며 온화한 표정으로 친구의 호의를 극구 사양했다.

“요즘 체력이 많이 약해져서 그래. 아내가 아기를 낳은 뒤로는 전혀 운동을 하지 않았거든.”

그러더니 리 박사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응접실로 이끌기 시작했다.

“커피 마실래? 아니면 차?”

“아, 나는 커피. 그런데 공주님은 어디 있어? 이름이 이브랬나?”

응접실로 가던 리 박사가 또다시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타이탄에게 명령하여 커피를 타기 시작한 바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낮잠 잘 시간이거든. 아들이랑 사이좋게 방에 있을 거야.”

“아들? 아, 입양했다던 아이?”

리는 본인이 말해 놓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행여나 아담이 듣기라도 할까 봐 눈치를 살피며 “미안, 내가 경솔했네.”라고 속삭였다.

“방에서 자고 있다고?”

아마 듣지는 못했을 거라며 스스로 위안하고 안도하는 리와 달리 바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곁눈질로 슬쩍 침실 쪽으로 꺾이는 복도를 쳐다보았다.

“그래, 신경 쓰지 마.”

그는 리 박사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커피 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한편 흔들의자에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사라의 눈길은 아이들의 침실 쪽으로 향했다. 이브의 손을 잡은 아담이 숨을 죽인 채 벽 뒤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치 빠른 아담은 역시나 한 발 떨어져서 상황을 신중하게 관망하는 중이었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일까? 그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방문객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게 응접실 쪽을 향해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아담의 시선이 사라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녀와 눈빛을 교환한 아담은 고사리 같은 이브의 손을 꼭 잡았다. 루비처럼 붉은 이브의 눈동자는 그저 천진난만하게 말똥말똥 아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딸을 보며 사라는 긴장한 듯 의자의 팔걸이를 말없이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이 힐끔 응접실 쪽을 바라보더니 아담을 향해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그걸 본 아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몸을 숙여 이브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브, 오빠랑 책 읽으러 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담을 쳐다보던 이브는 미간에 힘을 주더니 이내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토실토실한 뺨이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걸로도 모자라 알토란 같은 턱에 힘을 빳빳하게 준 상태였다. 명백하게 싫다는 의미였다. 작은 이마를 삼三 자로 구긴 이브는 콧김을 크게 내뿜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선 다짜고짜 사라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조그만 게 어찌나 잽싼지 당황한 아담이 미처 이브의 몸을 움켜잡을 새도 없었다.

“엄마!”

아직 어린 이브였지만 본능적으로 기류에 흐르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양팔을 벌린 채 사라의 품을 향해 뛰었다. 한편 바로 이브를 뒤쫓아 가려 했던 아담은 리 박사가 의자를 끌며 일어서자 잽싸게 어둠 속으로 물러섰다.

“이런, 공주님께서 일어나셨나 보네?”

리는 반가운 얼굴로 말하며 걸어 나왔다. 그런 그를 보며 사라는 딸의 얼굴을 가슴팍에 숨기듯 밀어 넣었다.

“그러게요.”

“제가 와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애가 깬 건 아니죠?”

“알면 됐어요.”

“네? 하하!”

사라는 리의 뒤에 서 있는 바딤과 몰래 시선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버둥거리며 고개를 들려는 딸을 가슴팍 안쪽으로 더 꼭꼭 당겨 안는 걸 잊지 않았다.

“쉬이이, 이브. 착하지?”

“우우…….”

그녀는 답답한지 자꾸만 고개를 드는 딸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고개 들면 안 돼, 이브. 우리 딸…… 조금만 참아, 응?”

사라의 애절한 음성에 끙끙거리던 이브의 움직임이 멈췄다. 살그머니 옷자락 사이로 엄마와 눈을 마주친 이브는 붉은 눈동자를 잠시 일렁였다. 그녀의 눈이 간절함을 담은 채 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브는 고개를 주억거리듯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얌전히 사라의 품에 안겼다. 그런 이브를 보며 사라는 울컥 북받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리는 그런 사라의 행동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말라비틀어진 사라의 손목에 꽂혀 있었다. 마치 죽은 고목의 나뭇가지처럼 수분을 잃은 듯 쪼그라든 사라의 몸. 리 박사는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기억 속 그녀의 몸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이었다. 얼마나 건강이 안 좋아졌으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그의 머릿속에는 신경 쓰지 말라며 애써 웃던 바딤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그 미소가 아프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풀리던 친구의 눈초리에 남아 있던 피로와 착잡함이 어째서 지금에야 보이는 것일까? 사라의 건강을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있을 사람은 남편인 바딤이었다. 그의 무거운 마음에 자신까지 돌을 얹고 싶지는 않았다. 리는 밝게 웃으며 사라의 품에 안긴 이브에게 말을 걸었다.

“자아, 우리 공주님, 삼촌이 선물로 장난감을 사 왔는데 한번 보실까요?”

뒤통수만 내보이고 있는 이브는 그의 말에도 엄마의 어깨를 꽉 쥔 채 요지부동이었다. 리 박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흘끗 바딤 쪽을 돌아보았다.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바딤은 리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이것 봐라? 아직 출시도 안 된 신형인데, 관심 없나?”

아이를 본 경험이 전무에 가까운 리는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브에게 관심을 보이면 보일수록 바딤의 미소는 점차 굳어 가고 있었다. 따뜻한 색을 머금은 그의 눈빛은 아무도 모르게 불안한 파도 속에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커피 잔을 꽉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그는 호흡도 멈춘 채 상황을 지켜봤다.

“애가 졸린가 봐요. 아무래도 침실에 가서 다시 재우고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사라의 말에 리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공주님께서 설마 이렇게나 낯을 가릴 줄이야. 사라의 성격을 닮았다면 벌써 자신의 등에 올라타서 목마를 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사라는 가녀린 몸으로 이브를 번쩍 어깨까지 안아 들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리 박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줄곧 엄마의 품에 오리처럼 고개를 박고 있던 이브가 살짝 이마를 들었다. 걱정 반, 민망함 반으로 서 있던 리는 빼꼼 고개를 든 이브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내 다시 쏙 숨어 버리는 이브를 보며 그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었다.

리는 바딤에게 손을 흔들며 방금 봤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본 바딤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난 채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다행히 리 박사는 그런 바딤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그저 이브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었으니 임무를 완수했다는 기분에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걸어왔다.

뒤돌아본 사라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리 박사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미처 느끼기 전에, 이브를 방 안 깊숙한 곳에 감췄다.

사라가 이브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자, 바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리가 집에 머무르고 있는 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진짜 온 목적이 뭐야?”

초조한 속내와 달리 바딤은 애써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히며 물었다. 리는 그런 친구를 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민망한지 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눈치챘어?”

“바쁘신 리 박사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외딴 섬까지 왔을 리가 없잖아. 뭐 때문에 온 거야?”

둔치인 바딤이 눈치를 챌 정도라니, 아무래도 자신이 조급한 티를 많이 내긴 한 모양이었다. 수척한 얼굴로 웃는 리를 보며 바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너 괜찮아?”

“괜찮고말고.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낯빛은 반대로 어두웠다. 마치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초조하고 조마조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자꾸만 손을 모았다가 오므리는 게 불안 증세 같기도 했다. 리는 심호흡을 하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침착하게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최근 왓슨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녀석이 있어. 본사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된 신입인데, 회장 눈에 들어서 고속 승진을 달리고 있지. 오죽하면 램지 왓슨이 양자로 삼는 게 아니냐고 할 정도로 회장 사저에도 수시로 드나들고 있거든? 하여간 본사는 이 녀석이 거의 장악했다고 보면 될 정도야.”

“이름이 뭔데?”

“엘 카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바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닥터야? 아니면 연구원?”

“둘 다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전문 경영인이지.”

바딤은 그럼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닌데 뭘 그리 신경을 써?”

너와는 진로가 다른 남자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투였다. 그런 바딤의 생각을 읽은 리는 힘 빠진 미소를 머금었다. 욕심이라고는 없는 녀석이니 백날 설명해 봤자 그의 야망을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아니, 차라리 몰랐으면 싶었다. 자신의 야욕을 안다면 경멸부터 할지도 모르니. 그가 아는 바딤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엘 카인, 그 남자가 이사회를 등에 업고 최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 왓슨 본사를 새로 옮겨 짓는다나 뭐라나. 특히 보안 시스템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눈치더군. 그래서 말인데…… 바딤, 나는 거기에 네가 참여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뜬금없이 거기에 자기가 왜 끼냐는 듯, 그가 커진 눈으로 되물었다. 리 박사는 커피 잔에서 손을 떼고선 열의에 찬 목소리로 들떠서 말했다.

“기억나? 예전에 네가 시베리아 연구소 앞 숲에서 보여 줬던 거 있잖아. 스마트 더스트라는 거 말이야.”

“아, 그거? 그건 미완이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러니까 이참에 완성시켜 보는 게 어때? 이건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니까? 완성되기만 하면 두 번째 노벨상은 따 놓은 당상이야.”

밀어붙이는 리 박사와 달리 바딤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친구인데 오늘 그는 다짜고짜 억지를 쓰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자신은 현재 휴직 중이긴 하지만 시베리아 연구소 소속이었다. 마음대로 다른 사기업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리 박사가 그런 그의 상황을 모르고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더욱 납득이 가질 않았다. 바딤은 팔짱을 끼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말해 봐, 그 엘 카인이라는 녀석하고 뭔가 있는 거야?”

“뭐?”

“네가 이러는 이유가 엘 카인이라는 남자 때문이냐고.”

늘 자신감에 차 있고 이성적이다 못해 냉소적이기까지 한 게 리신이라는 친구였다. 그러나 오늘 바딤이 관찰한 그는 묘하게 위축된 모습이었다. 시종일관 뭔가에 쫓기듯 초조한 행동을 보이는 것부터 수상했다. 특히 ‘엘 카인’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극도로 불안정한 눈빛을 내보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말투에선 엘 카인에 대한 열등감과 경쟁의식도 엿보였다.

“있기는 무슨…….”

바딤의 날카로운 질문에 리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흐렸다. 확신을 가진 바딤은 좀 더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이렇게 누군가를 의식하는 건 처음 봐. 대체 왜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 녀석을 이기려는 건데?”

장담하건대 리는 오늘 이곳에 회사 몰래 찾아온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엘 카인을 앞지르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의식하는 건 처음 본다고?”

잠시 멍한 얼굴로 되묻던 리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허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였다. 이마를 짚고 웃던 그는 씁쓸한 눈으로 바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듯한 친구의 눈동자를 보며 그는 허탈한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한 번도 뒤돌아본 적 없는 넌 전혀 알 수 없겠지. 아마 앞으로도 절대 모를 테지. 넌 내가 늘 네 옆에 동등하게 서 있는 줄로만 알 테니까.’

오랜 시간 품어 왔던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이제 와 토로해 봤자 홀로 비참해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우정이라는 술잔 속에 평생 이 독주를 감추고 살게 될 것이다.

바딤은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아니야? 내가 모르는 녀석이 또 있나?”

“됐다, 인마.”

리 박사는 물 잔의 물을 단숨에 들이켜며 복잡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예전에 얘기했던 여자 기억해?”

“여자? 글쎄, 너랑 그런 얘기를 한 것도 너무 오래돼서.”

“인턴.”

잠시 미간을 좁히던 바딤이 “아!” 하고 테이블을 쳤다. 그는 설마 하는 눈으로 속삭이듯 되물었다.

“일본인 여자?”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계 혼혈이지만.”

리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거뭇거뭇한 뺨을 쓸어내렸다. 자못 복잡하고 초조한 눈빛이었다.

“엘 카인이 그녀와 만나고 있어. 그렇게 도도하던 여자가 그 녀석한테는 홀라당 넘어가더군.”

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십 대 청소년처럼 분함을 참지 못하는 리를 보며 바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자존심 센 저 녀석이 얼마나 상처받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바딤은 말아 쥔 손을 입에 대며 억지로 헛기침을 했다. 그럼에도 자꾸 입가가 비실비실 풀리며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그 여자 이름이 뭐랬지?”

그의 물음에 리 박사는 몽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허공에 그리듯 턱을 괴며 공기 중에 목소리를 흘렸다.

“이름이라…….”

기록 일자: 미상 | 분류: 기밀문서

비공식적 기록이지만 최초의 신종 바이러스 감염자는 2078년에 확인되었다. 이십 대 여성이었던 최초 감염자는 왓슨 제약회사 내부의 직원이었는데, 이후 왓슨 제약회사는 치료를 빌미 삼아 그녀와 모종의 계약을 체결한다. 그녀는 계약 조건으로 왓슨에서 신약 개발에 성공할 때까지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조했다. 모든 기록은 감염자의 신상 보호를 위해 익명으로 남겨졌으며, 최초 감염자의 연구 자료가 담긴 파일명은 ‘밧세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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