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전체 송신: 이브의 가면무도회에 초대합니다.】
(1) 일시: 2100년 3월 6일 오후 8시
(2) 장소: 황금의 바벨탑 내 공중 정원
(3) 복장: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 가면을 챙겨 오지 않으신 분들은 주최 측에서 가면을 제공해 드립니다.
어느덧 작전 당일이었다. 이브의 생일 파티 장소는 당초 알려진 대로 기억의 도시에서 행해졌다. 이것이 과연 우연인지 아니면 주최 측에서 의도적으로 꾸민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민들의 불안을 지우고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데에는 성공적이었다. 얼마 전 소돔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황금의 바벨탑의 매출은 급락했고, 그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건 소돔의 주인 솔로몬이었다. 때문에 에덴 타워의 사람들은 위즈덤의 대표인 솔로몬이 이브 측에 로비를 하였을 거라는 추측도 넌지시 주고받았다.
이브─본명은 제인 헬렌 왓슨─의 생일 파티는 황금의 바벨탑의 꼭대기 층에서 이루어졌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돔 경기장처럼 생긴 이곳은 공중 정원이라 불렸다.
공중 정원은 오직 공연과 파티 개최를 위해서 만든 곳으로 에어쉽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었다. 낙원의 주민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호스트의 입장에서든, 게스트의 입장에서든─ 공중 정원에 와 보길 바랄 정도로 이곳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런 공중 정원의 VVIP 대기실에선 제인의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 생일 파티예요. 내가 주인공이라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고요? 그럼 이 파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그녀의 앞에는 모델 이브의 얼굴을 본떠 만든 위장용 마스크와 가발이 걸려 있었다. 인공피부와 동일한 재질의 마스크로 이걸 가면처럼 착용하면 피부에 자연스럽게 흡착된다.
“그렇게 경호에 자신이 없어요? 오베론이 이러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 거예요?”
“미즈 왓슨,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호크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뒤에는 본래 경호 담당이었던 셰인이 곤란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나로 변장한 요원이 온갖 파티는 다 즐기고, 정작 주인공인 난 숨어 있으라는 거예요? 그럴 바엔 파티고 뭐고 다 취소해요!”
그때 출입문이 열리더니 유림이 모자를 눌러쓴 채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제인은 유림을 보더니 잔뜩 성이 나 있던 얼굴을 미약하게나마 풀었다.
대기실 내부를 한 바퀴 빙그르르 훑어본 유림은 모자를 벗으며 호쾌하게 인사를 날렸다.
“왜들 그렇게 심각한 얼굴들이시죠?”
제인이 몸을 일으키며 유림에게로 다가갔다.
“정유림 소위, 맞죠?”
“예, 처음 뵙겠습니다, 이브.”
유림은 가식적인 얼굴로 생긋 웃었다. 리사에 의하면 그녀는 본명으로 불리는 것보다 ‘이브’라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다. 예상대로 제인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당신이 경호를 해 준다니 그나마 안심이네요. 브루클린의 성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아주 진취적이고 고무적인 여성이라고요. 당신이라면 지금 이 사람들이 준비한 허무맹랑한 작전에 동의하진 않겠죠? 이딴 변장 마스크를 들이밀면서 날 대신해 다른 사람을 이브인 척 파티에 내보낸다지 뭐예요?”
“아, 사실 제가 그 다른 사람입니다.”
유림은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제인은 배신당한 표정으로 유림을 노려보았다.
“뭐라고요?”
그녀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난감한지 그녀의 매서운 눈총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유림은 방긋방긋 웃었다.
호크는 때마침 등장해 준 유림을 기특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슬그머니 뒷걸음을 치더니 “그럼 뒷일을 맡기겠네, 소위.”라는 말과 함께 잽싸게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셰인 역시 “정 교관, 수고!”라고 소리치며 미꾸라지처럼 얼른 퇴장했다.
제인의 얼굴은 다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울화가 치미는지 뿌리치듯 유림에게 잡힌 손을 거뒀다.
“짝!” 소리와 함께 손등을 맞은 유림은 이마에 참을 인忍을 새기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드레이크가 벽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유림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끼어들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파티의 주인공은 나야. 다른 사람이 무대에 오르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제인은 가녀린 목선에 핏대를 세우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유림은 따끔따끔한 손등을 매만지며 긁힌 상처에 맺힌 핏방울을 닦아 냈다.
왓슨가의 공주님 성격이 보기와는 달리 헐크 못지않다더니 과연 실망시키지 않는 성질머리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사실은 이벤트입니다.”
“이벤트?”
“제가 이브의 역할을 하는 동안 이브께서는 낙원의 관리자와 함께 깜짝 등장할 준비를 하시는 거죠. 메인이벤트는 그쪽입니다. 물론, 경호의 목적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 사람하고 내가?”
“예.”
잠시 생각하던 제인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웃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는 표정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유림이 급조한 이벤트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건 괜찮네요.”
순식간에 화가 가라앉은 제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유림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린아이처럼 변덕스러운 여자군.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렇다고 같이 울컥해서 발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럽지만 저 공주님한테 밉보여서 하등 좋을 게 없다.
그림자처럼 뒤에 서 있던 드레이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림에게 몰래 귓속말을 건넸다.
“소위님, 그런 이벤트는 계획에 없지 않습니까?”
“알게 뭐야. 대령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지금으로선 어떻게든 저 여자를 설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유림은 으쓱하며 신경 쓸 거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레이크는 ‘끙’ 하고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섰다. 부디 호크 대령님의 매서운 질타가 애꿎은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제인은 흐트러졌던 머리를 다시 올리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잿빛이 도는 옅은 금발과 맞춘 듯한 실크 드레스가 살결 위를 흐르며 그녀의 야리야리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때요?”
“예쁘네요.”
유림은 공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제인이 돌아서자 바로 시큰둥한 얼굴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슬슬 준비할 시간이었다.
유림은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와 가발을 집었다. 머리를 묶어서 가발 안으로 넣은 그녀는 제인의 뒤에 서서 거울을 보며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립스틱을 바르던 제인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서 있는 유림을 보며 소름 돋는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뾰로통한 눈빛으로 물었다.
“난 언제쯤 등장하면 되죠?”
주인공 자리를 뺏길까 봐 두려운지 제인은 재차 확인했다.
“일단 제가 나서며 적들을 좀 도발해 볼 생각입니다. 유인책을 써 보고, 주변이 완전히 안전하다 느끼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때 관리자인 아담과 함께 진짜 낙원의 이브가 등장해 주시면 됩니다.”
“좋아요.”
【집무관의 보고】
정유림 소위는 제인 헬렌 왓슨의 경호 임무 중.
팀 호크는 오베론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할 것, 스나이퍼들은 저격 위치로.
황금의 바벨탑 꼭대기에 위치한 연회장 ‘공중 정원’은 밤이면 특별한 경관을 빚는다.
글라스로 된 돔 형식의 뚜껑이 열리면 아름다운 밤하늘의 모습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는 거대 분수 쇼가 등장하고, 돔 천장에 배치된 수로는 물을 떨어뜨리면서 넘실대는 폭포 절벽을 형성한다.
높이 70m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돔 내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 줄뿐더러 조명과 함께 낭만적인 연출을 자아내는 역할을 했다. 화려한 불빛과 함께 레이저처럼 발사하는 분수 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움직였다.
오늘 파티의 테마는 가면무도회.
18세기 유럽의 느낌을 물씬 살린 분위기였다. 다들 치렁치렁한 드레스와 클래식한 턱시도를 입고 형형색색으로 디자인된 가면을 더해 한껏 멋을 부렸다. 아직 파티의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가장 이목을 끌고 있는 이는 최근 평의원직에 발탁된 노아 호크 대령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령님?”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호크는 낯선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 남자가 보조개를 넣은 채 웃고 있었다.
“조셉 에반스라고 합니다. 낙원 뉴스 특별보도부 편집장이죠.”
조셉이 가슴 부위를 톡 건드리자 허공에 그의 신원을 나타내는 명함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명함을 흘끗 본 호크는 접대용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평의원으로 탁용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잠시 개인 인터뷰 괜찮을까요?”
“그런 건 군 홍보부서에 따로 연락을 하고 날짜를 잡게.”
“앗, 잠시만요! 정 소위님으로부터 혹시 언질 못 들으셨는지요?”
돌아서던 호크가 멈칫하며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호크 대령님과의 단독 인터뷰를 약속해 주셨는데 말입니다.”
“정 소위가?”
“예.”
빙글빙글 웃는 조셉을 보며 호크는 묘한 눈빛을 지었다. 조셉이 턱짓을 하며 폭포수 뒤편에 위치한 산책로를 가리키자, 호크는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에 잔을 내려놓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아직까지 잠잠한 주변 상공을 살폈다. 돔 천장과 에어쉽에는 대기 중인 저격수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곧 이브가 등장한다. 다들 긴장을 놓지 말도록.”
호크가 귀에 착용한 통신기에 대고 중얼거리자, 대원들의 응답이 들려왔다.
─ 세인트3, 계속해서 엄호하겠습니다.
─ 세인트4, 위치에서 대기 중입니다.
─ 스네이크4, 적들의 머리를 날릴 준비 중입니다.
─ 스네이크2, 현재 적들의 낌새는 보이지 않습니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게. 오늘 밤은 위기이자 기회일 테니.”
─ Yes, Sir.
호크는 잠시 통신을 끊고 조셉과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파티는 화려한 개막식을 올리고 있었다.
“이브의 무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턱시도를 입고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돔 천장에서 소형 에어쉽에 올라탄 채 천천히 내려오며 소리쳤다.
뚜껑이 개방된 에어쉽은 이벤트용으로 특별 제작된 것이다. 마이크를 통한 그의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분위기는 바야흐로 한껏 무르익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특별한 분들이 오셨습니다. 낙원의 여신들, 태양의 도시에서 오신 입실론님들을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간혹 어떤 남자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미리 준비해 온 꽃들을 던지기도 했다. 그들은 가뭄에 콩 나듯 모습을 드러내는 입실론들의 행보를 빠짐없이 체크하며 따라다니는 열혈 팬들이었다.
스무 명의 입실론이 열 명씩 나뉘어서 두 대의 에어쉽을 타고 양측 하늘에서 등장했다. 시폰 재질의 긴 드레스를 입은 그녀들은 고대 로마의 여신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들은 눈 주변에 반짝이는 크리스털들을 가면처럼 붙여서 우아함과 신비로움을 더했다.
지상에 내려온 입실론들이 에어쉽에서 하차하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경호원들이 입실론들을 호위하며 군중들을 물리쳤다.
“자,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아,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낙원의 요정, 에덴의 축복, 우리들의 이브입니다!”
오두방정을 떠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연극을 하는 듯한 톤도 그렇고 저 과장된 몸짓도 그렇고. 어디서 봤더라? 기시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서 있던 유림은 얼굴에 쓴 은빛 가면을 제대로 고쳐 썼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무대로 이어지는 통로를 걸었다. 유리 바닥 밑으로 컴컴한 하늘과 불빛들이 보였다. 다리가 살짝 떨렸다. 고소공포증은 이미 오래전에 이겨 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문득문득 숨을 옥죄듯 전신을 덮쳐 오고는 했다.
괜찮아, 떨어지지 않아. 두려워할 것 없다. 침착하자.
이럴 때 옆에 그 녀석이 있어 줬더라면.
─유림.
다정한 음성으로 뺨을 어루만지듯 귓가를 녹여 줬겠지. 부드럽게 이름을 불러 주면서, 입가를 달콤한 입술로 애무하면서, 그리고 눈이 마주치면 얄궂게도 아름다운 눈동자에 웃음을 건 채로.
자연스럽게 케이를 떠올리던 유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모르게 또 그 녀석 생각을…….’
분했다. 텅 빈 집에서 종일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생각을 하던 걸로 모자라, 지금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조차 그의 목소리와 입술을 떠올리는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일부러 늦게 온 것도 케이와 마주치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작전상 동선이 겹칠 일도 없게 했다.
욱해서 내쫓아 버렸지만 정말 나가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내심 기대했지만 허탈하게도 케이는 끝끝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 또한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작전을 하다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냉정하게 대할 것이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곧 죽어도 그 녀석 앞에서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을 것이다.
유림은 입술을 사리문 채 발을 구르며 저주를 퍼부었다.
‘나쁜 자식! 비겁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인 새끼!’
역시 일찌감치 쫓아 버렸어야 했어.
유림은 후회 막심한 표정으로 이를 박박 갈면서 하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을 신은 채 비틀대며 걸어 나갔다.
“이브 님!”
“생일 축하해요!”
“축하드려요!”
화려한 폭죽이 바벨탑 위 검은 하늘을 밝게 수놓았다. 이브의 광고 영상이 홀로그램 입체 영상으로 연회장 곳곳에 상영되고 있었다.
로스트 헤븐.
선택받은 이들의 낙원.
이브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사람들이 꽃과 선물, 축하 메시지 등을 전달하고자 무대 앞으로 몰리며 북새통을 이뤘다. 안전을 위해 경호원들이 나섰고, 그 중심에는 셰인과 특보대원들이 있었다.
때맞춰 하얀 꽃무늬 등불들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그 사이로 입실론들이 대열을 이루어 걸어왔다. 그녀들은 무대로 올라와 유림에게 꽃과 선물을 전하며 포옹을 나눴다.
차례로 한 명, 한 명 따뜻하게 안아 주던 유림은 마지막 순번으로 다가온 입실론과 마주 섰다. 그녀는 입실론들 중에서 유일하게 양손에 하얀 실크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녀는 장갑을 낀 채 조심스럽게 유림과 포옹을 했다.
“출세했네? 이런 데도 다 오고.”
유림은 그녀에게 귓속말로 속닥였다. 상대는 조금 놀란 듯 에메랄드빛 눈을 치켜뜨며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놀라?”
유림은 목소리를 낮춘 채 쿡쿡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나야, 메리.”
“설마……. 유림이니?”
유림은 대답 대신 가늘게 웃었다. 지금 그녀는 가면 속에 감춰진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선 제인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메리는 신기한 듯 유림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이건 또 무슨 비밀 작전인 거야?”
“총알받이 작전.”
혹은 방패막이 작전. 자칫하면 개죽음당하는 작전.
유림은 그렇게 덧붙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또 위험한 역할을 떠맡았구나.”
메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유림의 손을 꼭 잡았다가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 꿈자리가 너무 흉흉해서 사실 종일 마음이 무겁던 차였다. 혹시 그건 유림에 관한 경고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불안감에 가슴이 더 쿵쿵 뛰었다.
메리는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유림, 이번에는 각별히 조심을…….”
그때 낯선 그림자의 접근을 발견한 메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며 몸을 움츠렸다. 유림이 가면 밑 콧잔등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이브.”
낮고 조금 굵은 목소리였다. 자매의 조우를 방해한 남자는 쥐색 턱시도에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유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대 한가운데로 침투한 그는 마치 본인이 주인공인 양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로 서 있었다.
6피트는 훌쩍 넘는 키, 은발에 가까운 애쉬드 블론드 헤어에 새파란 눈동자. 케이보다는 아주 조금 더 선이 굵지만 조각처럼 예쁜 인상인 건 비슷했다. 그러면서 조금 날 선 분위기를 두른, 창백한 인상이 몹시도 시린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유림은 주변의 소음이 차단된 채 장막처럼 내린 암흑 속에 그와 단둘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새까만 동공에 꽉 차게 들어선 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섬뜩할 만큼 정돈된 웃음이었다.
유림이 그를 노려보며 관찰하는 사이 메리가 그녀에게 다가와 귓가에 재빨리 속삭였다.
“엘 카인. 왓슨 제약회사의 전 연구개발팀 팀장이야. 지금은 왓슨 제약회사 대표이사로 알려져 있어. 신종 바이러스 치료제 지브G-EVE를 개발한 인물로 왓슨 그룹 내에서는 이례적으로 고속 승진을 했지. 왓슨의 신화를 쓴 남자야.”
유림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호크 대령과 비슷한 또래라 여겼는데 찬찬히 뜯어보니 훨씬 젊었다. 그리고 아주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런데 풍기는 분위기는 어쩐지 중후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름다운 미청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호크와 케이를 적절하게 섞어 놓은 듯한 인상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주변 입실론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못 박힌 듯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유림 역시 눈싸움을 하듯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의 강렬한 시선 속에 갇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와 흡사한 느낌을 알고 있었다. 붉은 선혈의 눈동자, 화이트 채플에서 그녀를 구해 줬던 정체불명의 남자.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감각과 소름 돋을 정도로 유사했다.
“선물, 드려도 될까요?”
유림의 앞에 다가온 엘 카인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긴 검지에는 다이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유림은 말없이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며 속삭였다.
“신선하군요, 검은 눈의 이브라니.”
유림은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가면 속 눈동자를 본 건가?
그때 잠시 음악 뒤에 숨어 있던 사회자가 다시 무대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등장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분께서 오셨습니다. 다들 너무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정말 어렵게 모신 분이니까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맞은편, 돔 천장 밑에 위치한 특별관람석에 ‘번쩍!’ 하고 불이 켜졌다. 전면이 모두 방탄유리로 된 테라스였다. 오각뿔 형태의 크리스털 테라스는 마치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다이아와 흡사한 형태였다.
그곳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영. 그의 옆에는 제복을 입은 군인 둘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평의원인가? 아니면 에덴 타워의 간부? 유림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뭐라고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너무나도 많아서요. 이분은 오랫동안 베일에 싸인 채 에덴 타워의 지배자로서 많은 여성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습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고, 각종 언론에서는 잊을 만하면 그의 정체에 관해 추측성 기사를 써 댔지만 누구도 그가 누군지 밝혀내지 못했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군중이 술렁이며 동요했다. 다들 “설마?” 하는 표정으로 기대에 찬 눈빛을 짓고 있었다.
유림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가면을 살짝 콧등에서 떼어 냈다. 정말 그자가 온 걸까? 연인인 이브를 축하해 주기 위해 드디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정했단 말인가?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흘끗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한 눈빛을 한 채 특별관람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이 모든 상황을 조롱하듯 비뚜름한 곡선이 맺혀 있었다.
“왓슨 3세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낙원의 사령탑, 그는 바로…….”
모두가 손에 땀을 쥐며 뒷말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하늘에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어라?”
“저게 뭐지?”
어디선가 시뻘건 불꽃 하나가 혜성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상공을 가르고 있었다. 다들 ‘축포라도 터뜨리나 보다’라는 생각에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유림은 커다란 눈으로 멍하니 불길한 포물선을 바라보았다.
‘저건 축포가 아닌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가로질러 온 불꽃. 마치 불덩이처럼 화염을 휘감은 그것은 순식간에 군중의 머리 위를 덮쳤다.
─ 유림, 피해!
귀에 꽂은 통신기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유림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서 재빨리 메리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돔 천장 밑을 향해 날아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그제야 뒤늦게 경악한 얼굴로 뒷걸음치다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콰쾅!
그리고 정확하게 특별관람석을 맞춘 불꽃은 굉음을 내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꺄아아악!”
“아아악!”
공포에 찬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산산조각 난 좌측의 돔 천장은 와장창창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글라스 덮개는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금이 간 채 조각조각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집채만 한 비수들이 우박처럼 사람들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린 불벼락처럼, 하늘에서 꽂히는 날카로운 흉기들의 향연이었다.
유림의 손을 잡고 뛰어가던 메리는 갑자기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멈췄다.
“메리?”
하이힐을 벗어 던진 채 맨발로 뛰던 유림은 홱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메리의 관자놀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왜 그래?”
“시신이…….”
메리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입실론을 가리켰다. 바닥을 내려다본 유림의 눈이 굳었다. 메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지었다. 숨진 입실론과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비명횡사한 입실론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여 주듯 눈을 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 정중앙에는 총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채였다.
피슉!
“엎드려, 메리!”
황급히 몸을 숙인 유림은 동공을 좌우로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메리는 그녀의 뒤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불편한 신발을 벗어 던지고 얼굴에 붙인 크리스털들도 떼어 냈다.
유림은 긴장한 자세로 턱에 힘을 주었다.
저격수다.
‘대체 어디서 쏘고 있는 거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하나둘씩 픽픽 쓰러지는 입실론들이 보였다. 사각지대에 숨은 스나이퍼는 정확히 입실론의 머리만 노리고 있었다.
유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고와 현란한 레이저 현수막들로 휘황찬란하던 하늘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몇몇 에어쉽들의 불빛만이 불안한 날벌레들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유림은 통신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세인트1이 전원에게. 상공에 저격수가 있다. 세인트4는 상대를 최대한 빨리 제거하고, 세인트3은 공주님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도록. 저격수가 노리는 건 입실론이다. 스네이크1, 듣고 있나?”
─ 스네이크1이다. 입실론들의 보호를 위해 이동 중이다.
─ 세인트4, 상대 저격수의 위치 포인트를 파악하고 있다.
한편 반대편에서 통신을 듣고 있던 호크는 미간을 구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폭파당한 특별관람석 쪽을 바라보았다. 흔적 하나 없이 잿더미가 되어 버린 사고 현장. 적은 낙원의 관리자를 노리고 폭격을 실행한 게 분명했다.
“인터뷰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군요. 대피 후에 다시 뵙도록 하죠.”
당황한 듯 인사를 한 조셉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호크는 눈초리에 살기를 담았다.
이쪽 산책로에는 무성한 정원수들이 동굴처럼 하늘을 휘덮고 있어서 상공을 확인할 수가 없다. 즉, 그가 산책로에서 하늘 쪽 시야를 확보할 수 없던 사이 포탄이 발사된 것이다. 이걸 과연 우연의 일치라고 봐야 할까?
“미즈 왓슨은?”
─ 안전하게 보호, 이동 조치 중입니다.
드레이크의 대답을 들은 호크는 재빨리 산책로를 빠져나갔다. 그러던 중 뭔가를 발견한 그의 눈이 흐릿하게 번졌다.
악다구니가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 홀로 가시나무처럼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의 주변에는 짙은 살기가 검은 소용돌이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호크를 발견하더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빙그르 돌아섰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검은 기운은 금세 부드럽게 사그라진 뒤였다.
“카인 님.”
“노아?”
“무사하셨군요.”
두 남자는 미소를 그리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엘 카인은 해사하게 웃더니 말했다.
“만일을 대비해 가짜를 세우자는 세르게이 총사령관의 판단이 현명했어.”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엘 카인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옆에 있던 호크는 자연스럽게 불을 붙여 주었다.
조금 전 주변을 잠식했던 짙은 어둠은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칠야가 어둠을 삼키듯, 태풍이 폭우를 지우듯, 그는 모든 것을 흡수하는 블랙홀이다.
“불찰? 실수와 불찰은 열성인자들이나 행하는 오류야.”
그의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넘실넘실 춤추듯 흩어졌다. 허공에 번지는 하얀 물결을 따라 그의 시선도 움직였다.
“노아, 네가 그랬지? 우리들은 선구자라고.”
엘 카인은 호크의 어깨를 잡았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눈초리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네 속셈이 뭔지는 궁금하지 않아.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나는 한순간도 널 믿은 적이 없어. 단 한순간도……. 네가 뭘 꾸미고 계획하든, 결국은 내가 유일한 권주眷主가 될 거란 건 기정사실이야.”
호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속이다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낙원도, 제 존재도.”
엘 카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호크의 뺨에 난 십자 흉터를 바라보더니, “돌아가야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명에 멀리서 에어쉽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군용으로 특수 제작된 에어쉽은 낮게 저공해 다가오더니 재빨리 그를 태운 채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주민들이 죽든 말든, 저 혼자만 빠져나가는 카인을 보면서 호크는 실망스럽다는 눈초리를 지었다.
그는 살벌한 눈동자로 무대 쪽을 돌아보았다. 통신기에서 다시 미약한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세인트1이다. 현재 입실론을 보호 중.
─ 스네이크4, 입실론의 신병을 넘겨받겠다.
유림과 셰인의 대화에 호크의 표정은 점차 어둡게 변했다. 상대는 말 그대로 ‘유령Ghost’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 어딜 봐도 회색 기사단이나 고스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통신기에 대고 나직이 물었다.
“포탄이 날아온 지점은 아직인가?”
─ 그게……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 보고에 따르면 발포 지점이 아군 소속의 에어쉽으로 나온다고…….
“폭격을 행한 게 아군이라고?”
호크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의 흉터가 분노로 일그러진 채 실룩거렸다. 적의 위치를 찾을 생각만 했지, 설마 그들의 칼날이 발치에서 이쪽을 겨누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 발밑 그림자에 숨어서 허를 찔렀단 말인가?’
호크는 어금니를 사리물고 싸늘한 눈으로 상공에 둥둥 떠 있는 에어쉽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같은 시각, 연회장 반대편은 아수라장과 다름없었다. 시체를 보고 놀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과 허겁지겁 몸을 피하는 이들 사이에서 유림과 메리는 몸을 낮춘 채 상황을 관찰했다.
“유령의 군주일까?”
“그럴지도.”
“특별관람석에 아담이 있었잖아. 낙원의 관리자 말이야.”
“나처럼 가짜를 세워 놨을 수도 있어.”
유림은 어디서 주웠는지 쟁반 하나를 메리의 머리 위에 씌우며 말했다.
“우리도 몰랐던 정보를 오베론 측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게 이상해. 이쪽에 정보원이 있지 않고서야…….”
그녀는 스스로의 말에 멈칫하며 인상을 썼다.
‘정보원?’
권력에 움직이고 돈에 배신을 때리는 게 용병들이라고는 하지만 평의회 직속 부대를 마다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특별보안대와 특별수사대는 출세의 지름길 중에서도 고속도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돈과 권력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병들이 달콤한 출세가도를 버리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메리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유림을 보며 소곤거렸다.
“난 괜찮으니까 일단 가 봐. 따로 임무가 있지?”
전투 능력은 유림이 훨씬 뛰어나지만 메리 역시 작전부 기동수색대 소속이었다. 웬만한 병사들보다는 전반적으로 우수한 대처 능력을 갖춘 일류 요원이다. 제 몸 하나는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여자였다.
유림은 메리를 응시했다. 메리는 걱정 말라는 눈빛이었지만 선뜻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그때, 몸을 숙이고 있던 그들 앞으로 반들반들한 구두를 신은 발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는 정확히 두 사람 앞에 멈춰 서더니 익살스러운 말투로 말을 건넸다.
“아름다운 아가씨들, 백마 탄 왕자님의 구출이라도 기다리고 있나요?”
말끔한 턱시도 차림의 남자였다. 빙그레 웃은 그는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저쪽에 구조 에어쉽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남자의 얼굴을 훔쳐 본 유림은 흠칫 놀라 돌아서서 가면과 가발을 고쳐 썼다. 그는 좀 전까지 무대에서 파티를 진행하던 사회자였다. 메리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가 내민 손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유림을 지키듯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구조 에어쉽? STF가 왔나요?”
그는 그녀의 뒤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유림을 확인하더니 빙긋 웃었다.
“예, 입실론님. 그리고 뒤에 계신 분은…… 이브 님이시군요?”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
메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변죽 좋게 웃는 사회자를 노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남자였다. 뒤에 서 있던 유림은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면서 메리가 끼고 있던 장갑을 슥 벗겼다. 그리고 신호를 주듯 그녀의 손등을 쿡 찔렀다.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아, 다른 입실론분들도 계십니다.”
메리는 화가 풀린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곁눈질로는 유림과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맨손을 내밀어 사회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실론답게 고압적인 태도로 명했다.
“안내하세요.”
“알겠습니다.”
메리의 손을 잡은 남자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사이 메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맨손 피부에 와 닿는 사회자의 손은 적당한 온기로 따스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낯빛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뜬 그녀의 동공은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메리는 충격 어린 표정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멈칫 바라보았다. 그녀는 돌연 그의 손을 확 뿌리치더니 뒤따라오던 유림을 향해 소리쳤다.
“이 남자, 안드로이드야!”
움찔, 멈춰 선 사회자가 싸늘한 눈으로 돌아섰다. 그는 안면 근육을 해괴하게 뒤틀면서 입술을 비릿하게 씹었다. 두 여자는 벌써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그의 눈에는 그저 가소롭게만 보였다.
입실론들은 특별한 능력들이 있다더니, 과연 놀라웠다. 이 몸이 안드로이드란 걸 꿰뚫어 볼 줄이야. 나름 이쪽에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었는데, 제 손으로 전쟁 포를 터뜨리는군.
“하는 수 없지요. 그럼 제2 단계를 진행해 볼까요?”
콰쾅!
두 번째 폭발음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중심을 잡기 위해 휘청거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도미노처럼 부서지며 해체되는 공중 정원을 보며, 사회자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 옛날 고대 폼페이의 최후를 보는 것 같군요. 멸망하는 도시는 언제나 아름답죠.”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말로는 비극적이지만 더없이 눈부셨다. 마치 폭죽이 터진 후 잠시 반짝이는 불꽃의 잔재처럼…… 그들의 짧은 절규는 삶보다 처절하고 역동적이었다.
“유림, 바닥이!”
타일처럼 차례차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메리의 외침에 유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떤 미친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공중 정원을 폭파시키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이곳에 초대받은 이들만 천여 명, 거기에다 경호원들과 직원들까지 합치면 사상자는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메리의 손을 잡고 뛰던 유림은 맞은편에서 낮게 날아오는 에어쉽 한 기를 발견했다. 특별보안대였다. 에어쉽의 한쪽 문이 열리고 셰인이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는 아래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이쪽이야, 잡아!”
“필란 중위! 받아 주십시오!”
유림은 고함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메리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발밑은 이미 우수수 내려앉고 있었다. 셰인은 공중에 붕 떠오른 메리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얼떨결에 셰인에게 매달린 메리는 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반대편 상공에서 스코프렌즈가 반짝 빛났다. 오싹한 느낌에 유림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에어쉽인가?
에어쉽에 걸터앉아 있던 저격수는 스코프렌즈에 눈을 바짝 붙인 채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열여섯 번째 목표물 발견, 제거에 돌입합니다.”
활짝 열린 에어쉽 문밖으로는 입실론 열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총구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저격수는 능숙하게 호흡을 멈춘 후 서늘한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그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피슉!’ 하고 소리 없이 목표물을 향해 발사됐다.
총구의 방향을 확인한 유림의 눈이 커진 것도 그때였다.
그녀는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해 허공에 뜬 마지막 타일을 밟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방패처럼 온몸을 내던져 메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꺄아아악!”
메리는 창백한 낯빛으로 공포에 휩싸인 채 비명을 내질렀다.
“유림!”
가느다랗게 뿜어져 나온 선혈이 실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동아줄을 놓쳐 버린 손은 하늘을 휘저으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아악! 안 돼! 유림!”
셰인은 울부짖는 메리를 억지로 잡아 태운 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탄에 맞은 유림은 이미 검은 하늘 밑으로 조그마한 인형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제길!”
셰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어질 저격에 대비해 황급히 문을 닫았다.
그 순간이었다.
스르르 닫히는 에어쉽의 문틈 새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훅 뛰어내리는 게 보였다. 그걸 본 셰인은 닫히는 문을 덥석 잡아 세웠다.
‘뭐지?’
그는 다시 머리를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사람이었다.
정체불명의 인영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수직으로 몸을 세운 채 아래로 똑 떨어지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는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셰인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에어쉽 문을 닫았다. 그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눈꺼풀이 몇 차례 잘게 떨렸다. 등골에 어름어름 소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검은 인영의 주인이 상공에서 이쪽을 흘끗 바라본 듯했다. 그리고 착각이 아니라면 스치듯 마주친 눈동자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
그날 소돔에서 마주쳤던 놈의 환영이라도 본 것일까? 다리에 쥐가 난 것처럼 종아리가 저릿했다. 아니, 후들거리는 거다. 셰인은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움켜잡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환영 따위가 아니다. 폐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의 공포심을 끌어낸 것은, 그때 보았던 그 핏빛 동공이 틀림없었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 녀석은 아직도 낙원에 있었다. 그렇다면 세 번 마주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셰인은 주먹을 꽉 쥐며 광대뼈 위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번에 마주친다면 반드시 이 손으로 녀석을 잡고 말 것이다. 반드시.
Breaking News: 뉴스 속보입니다. 3월 6일 토요일 저녁 9시 12분경, 기억의 도시 내 공중 정원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1차 공격 지점은 공중 정원의 특별관람석이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폭발 당시 특별관람석에는 낙원의 관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차 폭격이 있던 곳은 모델 이브로 알려진 제인 헬렌 왓슨 양이 있던 무대 근처라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낙원의 핵심 인사를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의견에 목소리가 모이고 있습니다. 현재 공중 정원은 부양 시스템에 손상을 입어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상자 수는 벌써 백 단위를 넘어섰습니다. 이에 평의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급히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위즈덤의 솔로몬 대표는 피해자 구조 작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화면에는 위즈덤의 안드로이드 부대가 투입되고 있는 상황이 보입니다. 한편 사건 현장에 있던 호크 의원은 혹시 모를 제3차 습격에 대비하여…….
─ 노아 호크다. 스네이크1부터 상황 보고를 시작하게.
─ 스네이크1, 현재 입실론 세 명을 보호 중. 에덴 타워 S승강장에 막 귀환 완료했습니다.
─ 스네이크3, 상대 저격수의 포인트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적들은 철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 세인트3, 미즈 왓슨은 안전합니다. STF로 신병 인도 완료.
─ 세인트4, 마찬가지로 적 스나이퍼 포인트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잠시 침묵이 내려 앉았다. 통신 너머로 긴장한 기류가 흘렀다. 다들 호크 대령이 잘게 내쉬는 숨소리로 그의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 정 소위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누군가?
셰인이 재깍 대답하고 나섰다. 다만 그의 목소리는 반응 속도와 달리 한풀 꺾여 있었다.
─ 접니다. 입실론 메리 님과 함께 있었는데, 정 소위는 2차 폭파에 그만…….
그는 차마 문장을 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리인 듯했다.
─ 죄송합니다.
셰인이 사과했다. 웬일로 그답지 않게 면목 없다는 어조였다. 어쨌든 그녀를 보호하는 건 스네이크 팀의 역할이었다. 팀 지휘관으로서 면책을 피할 도리는 없어 보였다. 호크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시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통신을 시도했다. 부드럽고 깊은 음성이 통신을 타고 흘렀다.
─ 세인트2가 전원에게.
다들 놀란 듯 조용해졌다. 통신을 보낸 이는 작전 내내 잠자코 있던 애덤슨 중사였다. 줄곧 모습은커녕 숨소리 하나 드러내지 않던 그가 뜬금없이 등장한 것에 대해 모두 의아한 기색이었다.
─ 적들의 퇴로를 발견했다.
누군가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 위치는 황금의 바벨탑 소돔과 이어진 지하 대피로다.
─ 지하 대피로? 소돔에 그런 게 있다고?
─ 그건 어떻게 찾아낸 거야?
토니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묻자, 케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정 소위님의 GPS를 추적했다.
셰인이 이상하다는 말투로 의문을 제기했다.
─ 정 소위의 GPS라면 우리가 이미 확인했어. 지금도 보고 있는데 추락 지점으로부터 이동 흔적은 보이지 않는 상태다.
─ 통신기에 부착된 GPS가 아니라, 그녀가 체내로 삼킨 GPS 쪽이다.
─ 체내 GPS? 그건 대체 어느 틈에…….
유림이 매일 아침 마시는 우유에는 초미세 위치 추적기가 함유되어 있었다. 물론 본인이 알고 마셨을 리는 만무했다. 리사와 케이만의 비밀이었으니까.
인체에는 무해한 것이고 오직 24시간만 유효한 장치였지만, 유림이 알았다가는 둘 다 죽은 목숨과 다름없었기에 철저히 함구했다. 시시때때로 모래의 도시를 방문하는 유림에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것을 대비해 쭉 먹여 오던 것이다. 그게 오늘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케이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다들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 그러자 케이는 아예 각각의 요원들에게 유림의 위치 정보를 송신했다. 컴퓨터 음성이 전원의 통신기에서 흘러나왔다.
─ 위치 정보를 수신합니다.
이윽고 모든 대원들의 눈앞에는 유림의 위치로부터 반경 1㎞를 표시하는 입체 지도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녀의 이동 경로가 붉은 점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녀가 있는 곳은 공중 정원에서 수직으로 하강해 위치한 황금의 바벨탑 지하였다.
“훌륭하다, 애덤슨 중사!”
호크가 찬사를 날리자, 스네이크 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양 입을 다물었다. 호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명했다.
“제군들, 토끼가 미끼를 물었다. 지금부터 반격을 실시한다.”
에덴 타워와 기억의 도시 각지에 흩어져 있던 팀 블랙 호크의 요원들은 통신을 통해 작전 재개에 응했다.
─ 팀 세인트, 출격 준비.
─ 팀 스네이크, 모래의 도시 최하층부로 이동합니다.
“적들에게 베풀 자비란 없다. 그들의 본거지를 초토화시키고 우리들의 성녀를 구출하도록.”
─ Roger that.
─ Copy that.
“세인트2는 현 위치에서 대기한다.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세인트1의 GPS 정보를 수신…….”
─ 바로 추격하겠습니다.
케이가 호크의 명을 뚝 자르며 말했다.
─ 지원은 토끼 굴 반대편으로 보내 주길 바랍니다.
“반대편?”
─ 그들이 주로 이용하는 출입구는 모래의 도시 쪽에 있습니다. 기억의 도시 쪽은 제가 몰도록 하죠.
“애덤슨, 경솔한 행위는 금물이다! 자네는 전투 요원이 아니야!”
호크의 말에 동의한 나머지 팀원들도 케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 중사님, 드레이크 앤더슨입니다. 소위님은 저와 나츠가 반드시 구출하겠습니다. 중사님께서는 우리 팀에 하나뿐인 통신 장교십니다. 중사님께서 안 계시면 소위님과 오베론의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 중사, 필란 중위다. 지금 나와 코즈메 하사가 그쪽으로 이동 중에 있으니 일단 대령님 명대로 대기하도록 해. 정 소위는 우리에게 맡겨.
케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팀원들이 계속 만류하자 그는 아예 귓속에 부착된 작은 점 형태의 통신기를 바닥에 툭 내버렸다.
─ 중사, 듣고 있나? 애덤슨!
─ ……중사님!
소탕 작전, 그딴 게 성공하든 말든 뭔 상관인가? 현재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유림의 생사뿐이었다.
케이는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쇠문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소돔의 지하로 긴급 정거장과 방공호가 위치한 곳이었다. 하얀 비상등이 켜진 시멘트 길을 따라가자 ‘대피로’라고 써져 있는 회색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아래에는 커다란 직사각형 쇠문이 위치하고 있었다. 쇠문 옆에는 출입구를 제어하는 지문 및 홍채 인식기가 설치된 게 보였다. 불이 꺼진 걸로 보아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케이는 문 중앙에 수동으로 열 수 있도록 달려 있는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과연.’
그는 아름다운 입술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리학적으로 성인 남자가 홀로 여는 건 절대 불가능한 구조와 무게였다. 그러나 바닥을 살펴보니 분명 누군가 열었다 닫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회색 기사단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케이는 오른손으로 잡은 손잡이를 좌측으로 간단히 끌어당겼다. 그러자 묵직한 쇠문이 끼익하며 입을 벌렸다. 문틈으로 어두운 안쪽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수평으로 당긴 팔을 채찍질하듯 옆으로 보내자, 약 5톤 무게에 달하는 쇠문이 미닫이문처럼 손쉽게 굴러 가며 드르륵 열렸다. 바닥 시멘트를 긁는 마찰음이 끽끽거리며 울려 퍼졌다.
지하 대피로 내부는 불빛 하나 없이 침침한 암흑 동굴이었다. 흡사 두꺼비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케이는 스마트 워치에 유림의 GPS를 띄웠다. 빨간 점이 그녀의 바이탈 사인처럼 깜빡이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그녀에게로 이끄는 붉은 점을 지침 삼아 망설임 없이 지하 미궁 속으로 뛰어들었다.
축 처진 몸에 달린 양팔이 시계추처럼 덜렁덜렁 움직였다. 망가진 꼭두각시처럼 사지가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먹먹한 귓가에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브는…… 아직…… 뭐라고? 추적은…… 솔로몬 쪽은…… 없어?”
가느다랗고 얇은 목소리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듯합니다. 전 브로커일 뿐…….”
“시끄러워! 이쪽은…… 란 말이야…… 무튼 빨리 연락해 봐.”
격앙된 목소리는 벽에 부딪치자 메아리치며 돌아왔다. 어둡고 폐쇄된 공간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정한 속도의 걸음걸이. 누군가 그녀의 몸을 옮기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유림은 눈을 감은 채 몽롱한 의식 속을 더듬어 마지막 기억을 재생했다.
몸이 붕 뜬 채 아래로 무섭게 추락하고 있었다. 바닥에 튕긴 공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인력에 의해 돌아오는 원리처럼, 그녀 역시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의 굴레에 끌려가는 중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바닥에 닿는 순간 ‘통!’ 튀어 오르는 공과 달리 으깨진 수박처럼 참혹한 몰골로 최후를 맞이할 것이란 점이었다.
─유림, 피해!
이번에도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케이의 목소리였다.
늘 절체절명의 순간에 환영처럼 나타나는 그의 실루엣. 잡힐 듯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처럼 이번에도 그는 윤곽 없는 바람이 되어 그녀를 이끌고선 사라져 버렸다.
피슉.
어깨를 관통한 탄환과 함께 허공에 붕 뜨던 몸. 아래로 떨어질수록 가속이 붙는 게 느껴졌다. 등 뒤에서 불어닥치는 파풍이 요란할 정도로 윙윙거렸다.
포기한 채 죽음을 각오한 유림은 허공에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전에도 이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녀는 스치는 기억을 좇아 갈가리 찢겨진 은빛 드레스 사이로 팔을 뻗었다. 그러다가 총상을 입은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져 “으읏.”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핏방울이 불나방처럼 허공에 날리다가 그녀의 뺨에 실처럼 긴 선을 그리며 달라붙었다.
후드득.
얼굴과 가면 위로 떨어져 붙는 핏줄기가 점점 늘어났다. 이대로 바닥에 떨어지면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모습으로 참혹하게 죽겠지? 그렇다면 부디 케이만은 자신의 시신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죽음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에게 보일 최후를 우려하고 있는 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정말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하강하는 동안의 단 몇 초가 몇십 분처럼 느릿하게 흘렀다. 주마등처럼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치며 의식을 스쳤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짐 싸서 나가.
사실 진심이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자존심이고 뭐고 버린 채 말이라도 해 볼 걸. 케이, 케이, 케이…… 이렇게나 널 좋아한다고.
위이잉.
눈부신 라이트와 함께 들려온 엔진 소리가 바람에 얽혀 심벌즈처럼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검은 상공을 가르고 나타난 에어쉽이 전속력으로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에어쉽 옆면에는 후드를 쓴 남자 두 명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팔을 뻗고 있었다.
─ 목표물 포획.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머리에 뭔가 부딪치는 느낌을 받았다. 두개골이 꽝꽝 울리는 충격파와 함께 유림은 흐릿한 시야 사이로 흩날리는 잿빛 코트를 발견했다.
‘회색…… 기사단?’
소리 없이 내뱉은 웅얼거림은 사고 회로가 꺼진 의식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회상을 마치자 머릿속이 한층 맑아졌다. 유림은 또렷해진 정신으로 눈꺼풀을 열었다. 이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그녀는 추락 중에 납치를 당한 것이다.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도 몸이 마비되거나 결박된 상태는 아닌 듯했다. 주변 공기가 차가웠다. 바깥이 아닌 실내다.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동공이 차츰 확장되고 있었다.
유림은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일단은 정신을 잃은 척하는 게 좋을 듯했다.
“누군가 소돔 쪽 출입구를 개방했습니다.”
“뭐? 누구? STF야?”
앳된 음성이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빨리 확인해 봐.”
“예.”
그때 유림을 안고 가던 이가 눈치를 챈 듯 걸음을 멈췄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젠장. 미간을 구긴 유림은 한쪽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사회자의 얼굴이 보였다.
‘연기가 어설펐나?’
이왕 들킨 거 유림은 내려오겠다며 버둥거렸다. 사회자는 안고 있던 팔을 냉큼 풀었다. 덕분에 바닥에 쿵 떨어진 그녀는 오른쪽 어깨의 통증을 호소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 맞다. 총상을 입으셨죠? 깜빡했습니다. 원하신다면 응급조치 정도는 해 드릴 수 있는데.”
“필요 없어.”
유림은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녀의 공격적인 태도에 사회자는 정중히 양손을 들었다. 해칠 의도는 전혀 없다는 평화적인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본 유림은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입매를 비틀었다.
‘깜빡했다고? 안드로이드 주제에?’
요즘 안드로이드들은 사람보다도 더 사람다운 게 특징인가 보다.
─이 남자, 안드로이드야!
관찰력이 뛰어난 메리조차도 육안으로 판별하지 못했다. 소름이 돋았다. 이자는 다른 안드로이드처럼 인간을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뭔가 달랐다.
그의 등 뒤로 열 맞춰 서 있는 회색 기사단이 녀석의 지휘를 받는 게 너무나 당연해 보일 정도로.
“너도 오베론 소속이야?”
“제가 기사단 중 하나로 보이시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유림은 눈을 얄팍하게 찌푸렸다.
‘이게 또 인간인 척하네.’
사회자는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재킷의 먼지를 털었다. 서커스도 아니고 갑자기 웬 재주 부리기야? 지금 이 상황이 녀석에게는 무대 위 쇼처럼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보던 그녀는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어디서 봤나 했더니…… 화이트 채플에서 봤던 도박장의 마술사다.
“아군에 숨어든 쥐새끼가 너였군. 그래, 어쩐지…… 아무리 오베론이라 한들 정보원 없이는 힘든 일이었어.”
유림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척하면서 통신기를 더듬었다. 젠장, 아까 추락하면서 떨어져 나간 듯했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주위를 곁눈질로 살폈다. 주위의 불빛은 사회자의 신발 밑창에서 새어 나오는 라이트가 전부였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그녀의 질문에 답하듯 누군가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그렇게 두리번거려도 소용없어. 여긴 낙원에서 제일 어둡고 깊은 곳이거든.”
아까 정신을 잃은 와중에 들었던 가늘고 높은 목소리였다.
회색 기사단이 파도처럼 갈라지면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자 그 사이로 부유 체어 하나가 강물을 유영하듯 날아왔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빛은 눈이 멀 듯 눈부셨다. 유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팔로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 들어 본 적 있어? 낙원 지하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피로가 존재한다는 거. 방공호 역할도 하는 이곳은 안타깝게도 시공 도중에 중단된 미완의 작품이지. 낙원의 관리자가 돌연 건설을 중지하고 출입구를 모두 폐쇄시켜 버렸거든. 당연히 왓슨의 눈도 이곳에선 무용지물이야. 낙원의 버려진 우물 같은 이곳을 우리는 라비린토스, 지하 미궁이라고 불러.”
미궁에 한번 발을 들이면 고스트들조차도 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모델 이브 따위, 에덴 타워 밖으론 홀로 나가지도 못한다는 여자가 도면도 없이 미궁을 탈출하기란, 델타에게 물리고 살아남을 확률보다도 낮았다.
“그러니 얌전히 있어. 자꾸 열 받게 굴면 여기에 확 버리고 갈 거야! 어둠 속에서 홀로 서서히 죽음과 대면하는 건 생각보다 무서운 일일걸? 인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고독이라잖아?”
어둠 속에서 허공에 둥둥 뜬 의자의 주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유림의 눈이 차츰 굳었다.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하.” 탄식을 내뱉었다.
사랑스러운 곱슬머리에 동글동글한 눈동자. 표독스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성질 고약한 소공녀의 초상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부유 체어 위에 반듯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장은 일반 성인 여성의 상반신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난쟁이처럼 작은 몸은 네모난 형태로 팔다리가 붙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깨는 있는데 팔이 없었고, 골반까지 있는 하반신은 자그마한 두 발이 허벅지가 있을 자리에 붙어 있었다.
“네가 유령의 군주라고?”
그녀는 유림이 화이트 채플에서 ‘델타7’으로부터 구해 냈던 소녀였다. 아직은 앳된 얼굴, 나츠의 또래 정도 되려나?
“남자일 거라 생각했어? 아니면 어린애라서 놀랐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가?”
소녀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돌연 사납게 치켜뜬 눈초리로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그것도 아니라면 고매한 이브에게 있어 나같이 흉측한 애는 너무 충격적이라 그러시나? 어? 그래? 말해 봐! 왜 아무 말도 못해? 아, 낙원의 요정님께서는 미궁에 사는 괴물과는 말도 섞기 싫으시다? 그래, 인정하기 싫겠지. 우리는 낙원의 치부를 드러내는 더러운 쓰레기니까!”
소녀는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다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금세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폐활량도 또래의 정상적인 아이들보다 달리는 듯했다.
소녀는 충혈된 눈으로 유림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녀는 자근자근 입술을 씹더니 잠겨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라비린토스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미궁에 들어온 영웅들을 몽땅 잡아먹었어. 나는 어떨까? 당신을 살려 둘까, 아니면 죽여서 잡아먹을까? 어떻게 생각해, 이브?”
유림은 얼굴을 매만지며 ‘아참, 그렇지’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그녀는 모델 이브였다. 저 아이의 분노는 낙원의 요정인 제인 왓슨을 향한 것이다.
유림은 소녀를 보호하고 있는 회색 기사들을 응시했다. 숫자는 여섯, 그들 각기의 능력은 델타 두어 마리를 충분히 상대할 정도다. 혼자서는 설령 자폭을 한다 해도 저들을 다 쓰러뜨리기엔 무리였다.
“글쎄. 그전에 영웅 테세우스가 구하러 오지 않을까?”
“흥, 나약한 공주님다운 대답이네.”
소녀는 경멸조로 쏘아붙였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증오심은 단순한 원망이나 복수심 같은 게 아니었다. 유령의 군주가 낙원에 가지는 혐오감과 집착, 그 상반된 정서의 바탕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회색 기사들 중 하나가 급히 다가와 소녀에게 귓속말로 보고를 했다. 달갑지 않은 소식인지 그녀의 얼굴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 광경을 보던 유림은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왜 그래? 테세우스가 진짜 오기라도 했대?”
소녀는 흘끔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입매를 들어 올리며 한쪽 얼굴 면을 비뚜름한 미소로 일그러뜨렸다.
예상외기는 했다.
어깨에 총상을 입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왓슨가의 공주님은 전혀 겁먹거나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나불나불 사람 속을 뒤집으면서 잘도 이죽거리고 있었다. 보나마나 살려 달라고 울면서 히스테리를 부릴 줄 알았는데,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거지?
‘뭔가 이상한데…….’
소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림은 계속해서 그녀를 도발했다.
“조심해, 미노타우로스. 공주를 납치한 악당의 말로는 늘 처참한 법이거든.”
유림이 던진 농에 소녀는 눈초리를 다시 사납게 치켜세웠다.
한편, 한쪽에서 두 여자의 말싸움을 지켜보던 사회자는 묘한 눈빛으로 웃었다.
모델 이브는 온실 속의 화초다. 아무리 태생적으로 배짱이 두둑한 여자라 한들, 본인이 납치된 상황 속에서 저 정도의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허세라고 치부하기엔 상대를 도발하는 솜씨가 아주 맹랑했다. 죽음의 문턱을 드나든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연륜이었다.
반면 유령의 군주는 매우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시간을 연신 확인했다.
“대체 어떻게 쫓아온 거지?”
소녀는 유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유림은 태연한 척 표정 연기를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경호원들은 아주 우수하거든. 낙원 내 최고의 실력자들로만 뽑았어.”
상황이 뜻한 바와 다르게 흘러가자 유령의 군주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부유 체어 위에서 악다구니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쿵쿵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부딪치는 그녀의 패악질에 유림은 놀란 눈을 깜빡였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스스로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아이였다. 저런 애가 어떻게 오베론을 이끌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잠시 후 숨을 몰아쉰 소녀는 유림을 쏘아보더니 신경질적인 어조로 물었다.
“관리자 아담이 널 구하려 보낸 거야?”
“그럴지도? 그는 날 특별히 여기거든.”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유림은 내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열심히 허세를 떨면서 머릿속으로는 타개책을 궁리하느라 바빴다.
위치 추적기가 붙어 있던 귓속 통신기는 어디로 갔나 보이질 않으니 본부 측에서 그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더욱이 지하에 이런 거대한 대피로가 있다는 건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아마 호크 대령도 지하 미궁의 존재는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대체 누가 온 거지?’
오베론의 군주는 이브의 경호 부대가 쫓아온 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 제인 왓슨은 현재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니 그녀의 경호 부대일 리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지휘 체계 없이 홀로 순발력과 기지를 발휘해서 순간순간을 타파해 가야 하는 실정이었다. 말 한마디에 목숨 줄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다.
침착해라, 정유림.
“관리자 아담은 널 각별하게 여긴다고 들었어. 너와 그 남자는 그러니까…… 연인 사이라고 말이야.”
이제야 그녀의 목적이 엿보였다. 유령의 군주가 원하는 건 낙원의 관리자인가? 아담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령의 군주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유림은 슬쩍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날 납치한 거야? 날 이용해서 그와 거래를 하려고?”
예상대로 소녀는 속내를 술술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이런 대화를 원했던 게 분명했다.
“인질 교환 조건으로 모래의 도시 자치권을 인정해 줬으면 해. 관리자가 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발표해야 할 거야. 이곳을 평의회의 지휘에서 독립시킨 뒤 우리 오베론이 새로운 행정 체계를 만들 거라고.”
하! 이 어찌나 순진한 발상인가. 낙원 내에서 독립적인 자치권이라니, 아담은 그렇다 쳐도 평의회가 절대 승인할 리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소녀는 뭐냐는 듯 까칠한 눈빛을 지었다.
“네가 정말 유령의 군주야?”
유림은 드레스 자락을 찢어 왼손과 입으로 어깨를 묶어 지혈하며 물었다.
“만약 내가 미들 타운의 불법 체류자 중 하나라면 절대 널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 같거든? 고스트들의 세계는 무력이 전부라고 들었어. 비록 네가 그들 사이에서 뜬구름 같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몸으로 누구 하나 때려눕힐 수나 있겠어? 실력이 증명되지 않은 군주를 누가 믿고 따를까? 저 로봇 기사단들로만 질서를 유지하는 건 한계가 있을 거야.”
군대도 똑같다. 제아무리 가슴에 수많은 표창과 별을 달아도, 말뿐인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있어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었다.
최전선에서 앞장서 적을 섬멸하고 공적을 쌓아 직접 그들 눈으로 확인하게끔 하는 게 그들의 신뢰와 존경을 얻는 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지휘관은 누구보다도 선봉에서 제 사병들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뭘 의심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유령의 군주야. 내가 바로 화이트 채플의 주인이고 고스트들의 영적 지도자지.”
소녀는 발끈해서 말했다. 그 태도마저 유림은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그 이상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유림은 알겠다며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열심히 시간을 벌고 있는데, 사령본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출혈 때문에 정신이 멍해지고 있었다. 제발 지원 부대 좀 빨리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끼이익! 키아악! 끼아아아악!
깜짝 놀란 유림은 홱 뒤로 돌았다.
끼끼끼긱! 끼아악!
캬아아아악!
귀청을 찢어발기는 울음소리. 손톱으로 벽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절규의 주인공은…….
“델타다!”
소녀 역시 당황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부유 체어 위에서 짤막한 몸을 곧추세웠다. 회색 기사단이 그녀를 빙 둘러싼 채 상황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음성 분석 결과 99.2% 확률로 델타임을 추정.”
“델타가 어떻게 미궁에 들어와 있는 거야?”
미궁의 출입구는 각각의 도시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들 중 오베론이 뚫은 곳은 모래의 도시와 기억의 도시 쪽뿐이었다. 기억의 도시 쪽은 출입할 때마다 문을 개폐하도록 조치해 놨고, 모래의 도시 쪽은 드나들기 쉽게 입구를 허물어 놓은 상태였다.
“델타가 출현한 방향은 기억의 도시와 정반대편인 동쪽 지역입니다.”
“동쪽은 에덴 타워가 있는 곳이잖아.”
무슨 소리냐는 듯 소리치던 소녀는 멈칫 굳은 얼굴로 말을 멈췄다. 그녀는 유림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이브가 여기에 있는데 관리자는 어째서 델타를 푼 거지?”
그녀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다시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낙원의 관리자가 미궁에 델타를 풀었다. 그럼 좀 전에 우릴 쫓아 들어온 침입자는? 그자도 관리자가 보낸 거였잖아. 델타와 마주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추격대뿐만 아니라 이브도 위험해질 수 있는 짓을 왜…….
소녀는 피가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유림을 노려보았다.
“저 여자, 가면 좀 벗겨 봐.”
회색 기사단 중 하나가 다가와 유림이 쓴 가면을 홱 떼어 냈다. 그녀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소녀의 눈이 커졌다.
“이브의 눈동자는…… 푸르스름하지 않나?”
영상 광고에서 툭하면 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카리브 해의 보석이라고 칭송하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자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아무리 미궁 속이 어둡다 해도 사파이어색이 아닌 건 확실했다.
소녀는 분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짜잖아.”
그녀가 어금니를 으득거리며 소리치기 무섭게 회색 기사들이 유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은연중 전투 준비를 하고 있던 유림은 잽싸게 뒤로 땅을 짚고 제비 돌면서 그들 중 하나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집무관의 보고】
팀 스네이크가 화이트 채플에서 지하로 이어진 대피로를 발견. 오베론의 지하 미궁이라 간주, 소탕 부대의 진입을 허가한다.
그 시각, 호크는 모래의 도시에 위치한 사령본부에 와 있었다. 그는 모래의 도시 하층부에 도착한 대원들과 영상으로 작전을 논의했다.
“그럼 선발대로 드레이크와 나츠 자네들이 앞서고, 팀 스네이크는 후발대로 남도록. 정 소위의 GPS 신호는 살아 있나?”
─ 예, 아까부터 같은 위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좋아, 진입하게. 필란 중위에게 현장 지휘를 넘긴다.”
─ 스네이크1, 현장 지휘권을 넘겨받습니다.
호크는 통신을 끊고 화면을 응시했다. 낙원의 밑바닥에 대피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베론이 미완의 통로를 이용해 낙원을 누비고 다니고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만만치 않군.’
공중 정원을 폭발시키고 입실론 열다섯의 목숨을 앗아 갔다. 대담한 작전이었다. 평의회에 뒤통수를 맞은 것에 대한 보복 행위라고 덮어 줄 수가 없는 수준이다.
이건 전쟁 선포와 다름없었다. 이미 뉴스를 통해 공중 정원 테러는 전 세계로 보도됐다. 다들 평의회와 로스티아벤의 대처를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즉 이 기회에 오베론의 은신처를 덮치고 그들의 세력을 아예 뿌리째 뽑지 않으면 전 세계적으로 비난받을 거란 얘기였다.
그때였다.
사령부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병사들이 우르르 실내를 덮쳤다. 호크는 무장을 한 채 그를 에워싼 병사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호크 의원,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하군.”
병사들 뒤로 등장한 인물은 로스티아벤의 사령탑, 우리야 세르게이 장군이었다. 유일하게 가슴에 별 네 개를 달고 있는 그는 군부 내에서도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인물이다.
“자네를 살인 교사 및 테러 혐의로 긴급 체포하는 바일세.”
우리야의 말에 병사들은 일제히 총을 빼 들고 호크를 향해 총구를 척척 겨눴다. 호크는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살기를 밴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의 기에 압도당한 병사들은 흠칫하며 주춤거렸지만 손에 든 총을 버리진 않았다. 아무리 전설의 블랙 호크라 하여도 그들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우리야 총사령관을 이길 순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야는 흘끗 주위를 보더니 목의 단추를 하나 풀며 말했다.
“정유림 소위.”
그가 던진 이름에 호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응했다. 오히려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그녀는 왜?’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우리야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압적인 자세로 말을 이었다.
“그녀가 평의원들을 죽인 암살범이라는 제보가 입수되었네. 확인 결과 빼도 박도 못할 수준으로 거의 확실하더군. 대령은 평소 정 소위와 굉장히 가까웠다지?”
“그렇습니다만.”
“게다가 평의원이 살해된 직후, 죽은 의원의 공석을 차지한 것도 자네였고 말이야. 이걸 우연이라고 봐야 하나?”
“그러니까 지금 총사령관님께서는 제가 평의원직에 오르기 위해 정유림 소위에게 살인 교사를 했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추정되고 있는 상황이지.”
호크는 복잡한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제 대원들이 작전 중에 있습니다. 일단 지휘는 마저 하게 해 주십시오.”
“불허한다. 공중 정원 테러 사건의 배후로 귀관이 의심되는 와중에 작전 지휘를 맡길 순 없다는 게 윗선의 판단이야.”
호크는 답답한 눈빛으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오베론의 은신처를 찾았습니다. 이대로 그냥 흘려보내실 겁니까?”
“귀관과 오베론이 한패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텐가? 특별관람석을 폭파시키고 입실론들을 죽인 저격수가 있던 에어쉽은 바로 자네 부대 소속이었어. 이건 어떻게 설명할 셈이고? 게다가 평의원 살해 사건의 용의자인 정 소위는 이미 오베론과 접촉한 적이 있더군. 화이트 채플에서 말이야. 그리고 이것 또한 우연인진 알 수 없지만 자네 역시 그날 화이트 채플 아레나에 갔었다며? 아무도 모르게 다녀오려 한 것 같지만 운 좋게도 자네를 본 목격자가 있었지 뭔가? 일련의 궤적들이 모두 귀관을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네.”
“정 소위가 암살 용의자라고 제보한 게 누굽니까?”
“그건 말해 줄 수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 거라 생각하는데.”
우리야가 눈짓을 주자 병사들이 포위를 한층 좁혔다. 호크는 그를 원으로 빙 둘러싼 병사들을 보며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의 뺨에 난 상처 위로 눈 밑 근육이 꿈틀댔다. 그 모습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우리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체포해.”
병사 하나가 전기 수갑을 들고 오자 호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냉랭한 눈빛에 움찔한 병사는 우리야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평의회 측에서 자네를 존중하는 의미로 다른 이가 아닌 날 보냈다는 점을 알아주게.”
우리야는 미소인지 경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가를 비틀었다. 호크는 비릿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허울 좋은 소리.
천하의 블랙 호크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질질 끌려 나가는 걸 옆에서 비웃고 싶었던 것뿐이지 않은가?
호크는 천천히 다가오는 병사에게 순순히 양팔을 들어 올렸다. 병사는 그의 팔을 뒤쪽으로 보낸 뒤 은색 수갑을 채웠다.
“델타 투입은 완료했나?”
“예.”
얌전히 그들을 따라나서던 호크가 멈칫 서더니 뒤를 홱 돌아보았다.
“델타라니요?”
우리야는 흠칫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델타를 투입한 겁니까? 미궁에는 정 소위 외에 다른 병사들도 있다고 했을 텐데요.”
“전장에서 승리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한 일이야. 자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자네 부대원들의 숫자는 겨우 여섯일세. 그중 셋은 부상을 입고 있지. 오베론의 회색 기사단 실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만, 자네 부대로는 승산이 없어. 게다가 자네와 정 소위가 오베론과 한패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당신들이 델타로 무슨 실험을 하던 알 바 아니지만, 군사 작전에 그들을 이용하는 건 안 됩니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인데 어떻게 작전에 투입할 생각을 하는 겁니까?”
우리야는 말없이 호크를 쳐다보더니 피곤한 눈빛으로 내보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호크는 병사들을 밀치며 거친 어조로 외쳤다.
“세르게이 총사령관!”
“평화적으로 하지, 호크 대령. 내가 자네에게 폭력을 써야 하겠나? 그래도 인간적으로 대접해 줄 때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날 자극하지 말게.”
호크는 눈을 부릅뜬 채 우리야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어느새 지휘관석에 서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걱정 말게. 오베론은 내가 책임지고 근절시켜 줄 테니. 굳이 우리 병사들의 피를 볼 필요가 있나? 짐승들끼리 싸우게 두면 될 것을.”
호크는 자신의 몸을 붙잡고 있는 병사들의 팔을 슥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비틀며 돌아섰다. 그는 곁눈질로 우리야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우리야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지휘관석 스크린의 통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작전 중인 팀 호크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령본부가 전원에게 알린다.”
모래의 도시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대원들은 호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본관은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이다. 현 시점부터 호크 대령의 지휘권을 이어받아 작전 지휘를 하겠다. 귀관들은 내 지시를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잘 협조해 주기를 바란다.
─ 영광입니다, 총사령관님. 저는 현장 지휘관인 셰인 필란 중위입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어째서 호크 대령님이 아닌 총사령관님께서 작전 지휘를 하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미 대피로 안에 진입해 있던 드레이크와 나츠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숨을 죽인 채 통신을 듣고 있었다.
─ 호크 대령은 더 이상 작전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사정 설명은 후에 집무관을 통해 듣도록. 지금은 작전 수행이 우선이다. 현재 미궁 안에 진입한 대원들이 있나?
드레이크가 단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서전트 드레이크 앤더슨, 서전트 나츠 시게노. 현재 미궁 내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즉시 되돌아오게. 그리고 모래의 도시 대피로 쪽 입구는 아예 폭파시키도록 한다.
“하지만 안에 아직 소위님과 중사님이 있습니다. 현재 두 사람은 오베론의 핵심 간부와 함께 그들 은신처에 있을 거라 짐작됩니다. 호크 대령님께선 정 소위의 GPS를 추적해서 즉시…….”
─ 작전 내용이 변경됐다. 대피로에는 다른 부대를 투입했으니 살고 싶다면 당장 거기서 빠져 나와라.
나츠와 드레이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3D 투시 안경에 비친 겹겹이 쌓인 벽을 보며 고민했다. 이 어둠 속에 그들 외에 다른 부대가 있단 말인가?
키이이익!
끼아악!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총을 번쩍 들었다. 서로 등을 붙인 채 정면에 총구를 겨눈 둘은 호흡을 멈추고 좌우를 살폈다. 다시 멀리서 델타의 울음소리가 끽끽거리며 벽을 긁듯 울려 퍼졌다.
“세인트3이 본부에. 지하 대피로 내에 델타가 있다. 개체 수는 확인되지 않음.”
─ 팀 세인트는 지금 즉시 입구로 복귀하라는 명이다. 약 2분 뒤 대피로 출입구를 폭파하고 봉쇄한다.
나츠는 입술을 깨물며 총구를 움켜쥐었다. 드레이크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등을 쳐다보던 나츠는 별안간 통신기를 잡아 빼더니 어둠 속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드레이크는 황급히 소리쳤다.
“나츠! 뭐하는 거야?”
나츠는 잠시 뜀을 멈추더니 분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안에 중사님이 있어요. 소위님도 계시고요.”
“본부에서 복귀하라잖아.”
“드레이크 씨는 가세요.”
그는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명령 불복종은 중죄였다. 특히나 명령을 내린 이는 로스티아벤의 총사령관인 우리야였다. 그럼에도 나츠는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기색으로 확고한 눈빛을 지었다.
어차피 케이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목숨이다. 그는 평소 여리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단호한 어조로 외쳤다.
“저는 이곳에 두 분을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나츠는 3D 투시 안경을 고쳐 쓰고 미궁 안쪽을 향해 뛰었다. 그의 뒷모습을 놀란 듯 멍하니 바라보던 드레이크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나츠!”
그는 복잡한 한숨을 내쉬더니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잠시 갈팡질팡한 눈빛으로 주위를 보던 드레이크는 못내 총을 들었다. 그리고 나츠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델타.
신종 바이러스 변형에 감염된 여자들 중 살아남은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감염된 남자들은 무조건 사망한다. 입실론의 경우에도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의 델타는 2085년 겨울, 맨해튼에서 발견되었다. 델타는 신종 바이러스 변형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왓슨 제약회사는 그들의 항체로 백신을 개발하는 데에 실패했다.
연구에 따르면 델타들은 습기가 많고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둠은 오히려 무기였다. 후각과 청각이 두드러지게 발달한 그녀들은 암흑의 미로를 제집 놀이터처럼 여겼다.
끼이익─ 끼악.
키아아아악.
유림은 날카로운 고음의 울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이미 한차례 회색 기사단과의 격렬한 몸싸움으로 인해 가발과 인두겁은 벗겨졌다.
그녀는 얼굴에 덕지덕지 남아 있는 위장 마스크를 떼어 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도 북북 찢어 버렸다. 남은 회색 기사들은 다섯. 고작 한 명을 상대하고 나니 체력의 반 이상이 고갈된 느낌이었다. 어찌 보면 델타보다도 까다로운 상대였다.
남은 기사들 역시 유림을 흘끗 쳐다보더니 델타의 동태를 살피는 눈치였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유림은 심각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서로 소통을 하고 있어.”
울음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길을 찾아서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기사단과 오베론의 군주에게 제안했다.
“잠시 휴전하지?”
“휴전?”
소녀가 비딱한 눈초리로 되물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유림은 그녀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는 아까부터 어둠 속을 힐끔거리며 불안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화이트 채플에서 그 악몽을 겪었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긴 힘들겠지.
유림은 팔짱을 끼고 서서 답답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저 소리 안 들려? 한두 마리가 아니야. 게다가…….”
왠지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타들의 최대 약점은 낮은 지능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부족한 조직력과 전술만 보강한다면 엄청난 적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일단은 공동의 적부터 해치우죠. 데드캣이 한편이 되어 준다면 당신도 꽤 든든할 겁니다.”
뒤편에 서 있던 사회자가 말했다. 소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와 유림을 번갈아 쏘아보더니 “데드캣?” 하고 되물었다.
“검은 고양이의 움직임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렵거든요.”
사회자와 눈이 마주친 유림은 뜨끔한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그제야 뭔가 기억이 났는지 유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설마 화이트 채플의 챔피언…….”
“적습!”
“후방입니다.”
회색 기사들의 외침에 유림은 좌르르 반원을 그리며 뒤로 돌았다. 사회자는 “데드캣!” 하고 외치며 그녀에게 검을 하나 던졌다. 유림이 얼떨결에 받자 그는 찡긋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브루클린의 성녀의 손에 검이 없으면 서운하죠.”
유림은 짜증 섞인 눈초리로 돌아섰다. 대체 저 약삭빠르고 가증스러운 녀석의 정체가 뭘지 생각 중이었다.
“델타야? 아니면 추격 부대야?”
유령의 군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열원 분석에 따르면 델타로 추정됩니다.”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아니 다섯 마리…….”
어둠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청이 떨어질 듯했다. 그들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시멘트 벽을 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구르며 달려오는 진동도 느껴졌다.
유림은 마치 이 년 전의 브루클린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손에 쥔 총검을 응시했다. 소총에 꽂아 쓰는 대검으로 낡은 구식의 탄띠용 검이었다. 실전에 써 본 적은 없는 종류였다. 델타의 두꺼운 피갑을 뚫을 수 있을까? 안면이나 목을 노려야 할 듯했다.
“나이트3, 전방에 적 열원 감지.”
모두 숨을 죽이고 정면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둠 속에서 델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쥔 손이 미끄러질 정도로 자꾸만 땀이 맺혔다.
콰쾅!
‘폭발음?’
예상치 못한 폭음에 아주 잠시, 아군의 주의가 분산됐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악어처럼 입을 벌리고 나타난 델타들이 순식간에 회색 기사 한 명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사지가 뜯긴 채 몸을 뒤틀던 그는 하얀 거품과 수액을 토해 내며 거꾸러졌다. 그게 시발점이 되어 이내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유림은 깨달았다. 델타들은 안드로이드를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인간이었다. 그들은 회색 기사단보다 유림과 소녀를 노렸다. 필사적으로 소녀를 보호하는 회색 기사단과의 충돌은 그 연장선의 일이었다.
유림은 한쪽 구석으로 눈길을 보냈다. 이 난투 속에서 홀로 평화로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사회자였다. 그는 모든 풍파를 비켜 가는 고목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심지어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처럼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델타들은 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옆을 슥 지나치면서 살기조차 띄우지 않았다.
역시 그는 안드로이드가 분명했다. 다시 봐도 소름 끼쳤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라니.
반면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유령의 군주는 갓 태어난 짐승 새끼처럼 그들에게 있어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또한 그들은 유림보다 유령의 군주가 더 약하다는 걸 눈치챈 지 오래였다. 이들은 유림이 제압하기 힘에 겨운 상대라는 걸 깨닫자마자, 합심하여 팔다리가 없는 소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좁은 통로에서 바닥과 천장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그들을 막는 건 회색 기사단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그때 뒤편에서 빠르게 천장을 기어 와 단번에 중앙까지 파고든 델타 하나가 고성을 지르며 소녀가 탄 부유 체어 위로 뛰어들었다. 유림은 순식간에 머리 위로 지나간 그림자를 보고선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정면에 대치 중이던 델타의 안면을 밟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밟고 방금 지나간 델타의 머리 위를 덮쳤다. 유림은 부유 체어 위로 착지한 델타의 어깨에 올라타 허벅지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 이어서 하늘 높이 든 대검으로 델타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단숨에 내리꽂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 얼어붙었다. 유림의 눈동자가 볼록하게 부푼 델타의 복부로 향한 채 충격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보름달처럼 둥그런 배에 검이 박힌 채 죽어 있던 델타7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렁그렁한 눈에 초점을 잃고선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그녀의 시체가.
“정신 차려, 데드캣!”
누군가 넋이 나간 그녀의 귀청에 대고 소리쳤다. 아, 얄미운 사회자의 목소리다. 번뜩 정신을 차린 유림은 억지로 힘을 주며 높이 쥔 칼자루를 델타의 머리에 푹 찔러 넣었다. 붉은 피가 튀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유 체어 아래를 기어서 빠져나가던 유령의 군주가 어깨 너머를 돌아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동그란 눈망울이 얼어붙은 채 흠칫 커졌다. 델타의 정수리에 박아 넣은 검을 뽑고 있는 유림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훅 나타난 것이 보였다.
“어…… 저기…….”
경고를 해 주고 싶었지만 방향을 가리킬 손이 없었다. 소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목청을 키워 보았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유림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괴로운 얼굴로 칼을 뽑고 있었다.
한순간의 주저가 활촉이 되어 돌아오는 법.
적에게 연민을 느끼는 거야말로 전장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호크 대령이 늘 강조하는 강령이었다. 전투에 뛰어들 때마다 그렇게 새기고 또 새기던 말이었는데, 일순의 나약함이 이렇게 그녀의 목을 조를 줄은 몰랐다.
죽음의 숨결은 찰나의 방심을 파고들어 그녀의 목뒤를 서늘하게 적시며 다가왔다.
“아아악!”
소녀의 눈은 충격으로 커진 채 눈앞의 광경에 못 박혔다. 유림이 비명을 지르며 목뒤를 덮친 델타와 엉켜 구르고 있었다. 피에 젖은 그녀의 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어느새 다가온 사회자가 소녀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데드캣…… 저 여자도 구해야…….”
화이트 채플에 이어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 준 유림이었다. 소녀는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사회자는 냉정하리만큼 단칼에 대답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뒤를 흘끔 보더니 미련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반면 사회자의 품에 안긴 소녀는 마지막까지 유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림의 등에 올라탄 델타가 커다란 엄니를 그녀의 목덜미에 박은 채 살점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악!”
목과 어깨 사이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이 혈관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상흔 부위는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유림은 멍하니 커진 동공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흐아앗!” 고성과 함께 칼을 휘두르자 델타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크르렁거리며 유림을 노려보더니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캬아아악!”
“키끼긱긱!”
“크커걱!”
반대편에서 기사단과 접전을 벌이던 델타들이 갑작스런 비명과 함께 양쪽으로 ‘쿵!’ 하고 우르르 나가떨어졌다. 벽에 거대한 몸을 부딪친 그들은 꽥 소리를 내며 일어서지 못했다.
뭔가가 ‘투르르’거리며 굴러왔다.
델타 한 마리가 목이 잘린 채 바윗돌처럼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나머지 녀석들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모가지가 일제히 덜렁거리며 반쯤 잘려 있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의 델타가 목이 잘린 채 즉사한 것이다.
누군가 그 시체 더미 사이를 우아하게 걸어왔다. 한쪽 팔이 뜯긴 회색 기사는 기계적으로 반응하며 공격 태세를 갖췄다.
“기억의 도시 입구 쪽 침입자 발견.”
유림은 몽롱한 눈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제거하겠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회색 기사는 총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뭔가 홱 움직이더니 회색 기사의 몸을 정확히 양 갈래로 갈랐다. 움직임을 멈춘 회색 기사는 공중에 하얀 수액을 분수처럼 뿜어내더니 해초처럼 흐물거리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의 실루엣은 팔다리가 길고 전체적으로 선이 아름다웠다. 그는 마치 악귀들을 멸하러 온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괴수들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혼전 속에서 그가 밟는 앞길만 흡사 투명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듯 윤광이 흐르는 착각마저 일었다.
유림은 꿈을 꾸듯 멍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환영이 아니겠지. 정말 너겠지?
“케이?”
유림의 가녀린 목소리에 그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서서히 돌며 그녀를 발견한 그의 입가에 은은한 곡선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재회의 환희도 잠시, 미소를 띠던 그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갈색 동공에는 델타에게 물린 유림의 모습이 충격과 함께 선명하게 맺혔다.
유림은 케이의 굳은 표정을 보고서야 번뜩 깨달았다. 그녀는 피에 젖은 두 손을 내려다보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유림은 슬픈 눈빛으로 애써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쪽으론 오지 마, 케이.”
그는 숨이 멎은 표정이었다. 좀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눈동자엔 세상이 다 끝난 듯한 절망이 어렸다.
고통스럽게 일렁이던 그의 눈빛이 충혈되듯 벌게졌다. 그는 단호하게 입술을 다물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안 돼.”
그녀는 델타에게 물어뜯긴 목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감염될 거야. 오지 말라고!”
피투성이인 채로 울부짖던 유림은 힘없는 몸으로 뒷걸음질 쳤다. 최대한 그에게서 떨어지려는 듯이. 그러자 케이는 달려와 그녀를 품에 와락 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여린 턱을 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읍!”
버둥거리던 유림은 그의 품에 쏙 안긴 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가녀린 턱에 또르르 맺혔다. 물어뜯듯 유림의 입술을 빨던 케이는 흐르는 핏방울과 섞인 눈물을 혀로 핥았다.
짧은 입맞춤은 옭아매는 격정처럼 입술에 흔적을 남겼다. 유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채 덜덜 떨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의 입술부터 뺨까지 붓으로 그린 것처럼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케이! 피, 피가…….”
유림은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무너질 듯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케이는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델타에게 물린 자국이 하얀 목선과 어깨 사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이를 사리물었다. 입가에 묻은 피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아…… 아아…….”
유림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어쩔 줄 몰라 흐느꼈다.
“진정해요, 유림.”
“이 멍청아! 감염되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했어! 대체 왜!”
그녀는 버럭 화를 내다가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자책을 하는 기색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눈물을 흘리는 유림을 보던 케이는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대는 과연 신이 내린 축복일까.
아니면 그를 벌하기 위한 시련일까.
“상관없어요.”
그가 흐릿하게 웃었다. 속이 비칠 것처럼 투명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 그 아름다운 눈으로 뚫어져라 응시하는 케이의 시선에 유림은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짙은 소유욕을 표현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안기는 건 어떤 느낌일까?
“유림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숭배하듯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하지 말라고 밀어내야 하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유림은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숨 막히는 키스를 나누는 그의 입술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듯했다. 입안을 더듬는 그의 혀가 불안과 공포로 달음박질하는 심장을 달래며 어루만져 주는 기분이었다.
“그만…… 정말 감염될 거야.”
유림은 어렵사리 그를 밀쳐 내며 속삭였다. 검은 속눈썹 끝에 방울방울 매달린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늘 총기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불 꺼진 방처럼 침침했다.
“난 감염되지 않아요.”
케이는 걱정 말라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유림은 또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리는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왜? 아예 죽지 않는다고도 해 보시지?”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그녀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농담이 나오다니, 어떻게 보면 대단한 녀석이었다.
“난 불사신이거든요.”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예쁘게 생긋 웃었다. 그녀를 안심시켜 주려는 의도였다면 절반은 성공이었다. 유림은 눈물진 눈으로 잠시나마 허탈한 듯 웃었다.
“하여간 허풍은.”
피식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다리가 풀썩 꺾이며 휘청거렸다.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멍하니 천장을 응시한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기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림이 갈대처럼 쓰러지며 몸을 뒤로 젖히자, 케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유림?”
유림은 약에 취한 듯한 얼굴로 감기는 눈을 힘겹게 깜빡였다.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눈꺼풀에 힘을 주어 봤지만 힘겨운 모양이었다.
“케이, 나와 한 약속 기억하지?”
그는 대답 대신 다리에 힘이 풀린 유림을 얼른 품에 안았다.
“화이트 채플에서 한 것 말이야.”
─죽지 마라, 중사.
줄곧 침착하던 그의 동공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약속을 들먹이는지 괜히 불안했다. 유림은 스르르 눈을 감으며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두고 가.”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케이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었다.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가 그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해요?”
“명령이다, 중사.”
그의 눈이 흠칫 커졌다. 그녀는 정신을 잃기 전에 다짐을 받고 싶은 듯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할 리 없었다. 눈을 감은 유림은 마지막으로 힘없는 목소리를 허공에 흩뿌렸다.
“……어서 가.”
─어서 도망쳐.
─내가 시간을 벌게.
기억 속 앙상한 몸으로 소리치던 소녀의 목소리가 불현듯 울려 퍼졌다. 그 시절, 작고 어렸던 소년은 소녀의 방패 뒤에 숨어서 무엇 하나 하질 못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때의 무기력했던 소년이 아니었다.
툭 떨어진 유림의 팔이 털렁털렁 움직였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뺨에는 식은땀이 성글성글 맺혀 있었다. 델타에게 물린 여성의 말로는 둘 중 하나였다. 죽거나 살아남아 델타가 되거나.
그러나 그는 그 둘 중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림은 죽어서도, 델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놓았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다. 델타든 입실론이든 그녀가 다른 이의 권속이 되는 것 또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롯이 그의 것이다.
잠시 그녀의 어깨 상처를 바라보던 케이의 눈매에 결심이 어렸다. 이윽고 그는 어둠 속을 유영하듯 걷기 시작했다. 후에 유림에게 그 어떤 원망과 질타를 받아도 상관없었다. 이대로 그녀를 잃는 것보단 나았다.
유림을 안은 케이의 그림자가 미궁의 검은 안개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죽이고 있던 델타 한 마리가 개구리처럼 폴짝 튀어나왔다. 그녀의 입가엔 유림의 목을 물어뜯고 남은 피가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목구멍 사이로 으르렁거린 그녀는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둘이 사라진 방향 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슬금슬금 벽을 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Interlude
로스트 헤븐 북동쪽에는 일명 ‘폐쇄 도시’라 불리는 제한 구역이 존재한다. 이곳은 낙원의 주민들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북동부 지역을 폐쇄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설이 돌았다. 혹자는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오염 물질이 유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혹자는 지하에 은밀하게 군사 기밀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서라고 주장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구 왓슨 연구소가 위치하고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 폐쇄 도시였다고 한다. 구 왓슨 연구소에서는 신약 개발에 관련된 임상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실험체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연구소도 함께 문을 닫게 되었다는 일설이었다.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는 철조망 너머에는 흉가처럼 스산하게 서 있는 구 연구소 건물들이 바스러진 담뱃갑처럼 일렬로 위치해 있었다. 간혹 호기심 많은 모래의 도시 아이들이 무턱대고 폐쇄 도시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도 하는데, 그들 말로는 구 연구소 건물에 가끔 불이 들어온다고 했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고 일축하는 어른들 말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으스스한 유언비어를 자아냈다.
“폐쇄 도시의 망령을 본 적 있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꼽추 말이지?”
저들끼리 담력 시험을 하면서 기웃거린 철조망 너머로 얼핏얼핏 목격된 백발의 꼽추. 아른거리는 그림자로만 나타난 꼽추는 폐쇄 도시의 망령으로 불렸다. 확인되지 않는 풍설이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구 왓슨 연구소에서 사고로 죽은 과학자의 원령이래.”
“사실은 연구소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실험체라던데? 프랑켄슈타인처럼 말이야. 좀비가 돼서 살아 돌아다니는 게 아닐까?”
과연 진실이 무엇일지는 폐쇄 도시를 덮고 있는 철조망이 사라지지 않고서야 수면 위로 떠오르기 힘들 테지만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차 허무맹랑하게 커져만 갔다.
어둠에 잠긴 구 왓슨 연구소 A동 3층.
파스스…….
파스스슥!
거미줄과 먼지가 뒤엉킨 복도 중앙에는 푸른빛이 전기를 일으키듯 번쩍이더니 이내 거품처럼 사라졌다. 누군가 구 왓슨 연구소의 메인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에너지 부족으로 복도 경계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 듯했다. 푸른 홀로그램 시스템은 형체를 이루다가 무너지듯 먼지처럼 작은 입자가 되어 공중으로 분해돼 사라졌다.
“밧세바!”
암흑 속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쉰 채로 울려 퍼졌다. 그는 어둠 속을 헤엄치듯 휘청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 대 후반 무렵. 어깨뼈와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체형의 소유자였다. 그는 마른 장작처럼 가는 다리로 넘어질 듯 뛰어오더니 복도 중간에 위치한 유리문을 수동으로 벌컥 열었다.
“밧세바!”
“왜 이리 호들갑이야?”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의 왼 가슴에는 ‘Doctor Lee’라는 직책과 이름이 검은색에 은사가 섞인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천장에 들어온 희미한 등이 회색 방을 어스름하게 밝혔다. 꽤 안락해 보이는 공간의 구석에는 몸집이 작은 노파 하나가 전자 담배를 입에 문 채 뻐끔거리며 몸을 구부정히 숙이고 앉아 있었다.
노파는 자못 못마땅한 시선으로 리 박사를 응시했다. 그녀의 게슴츠레한 눈은 주름진 채 두툼한 눈꺼풀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허연 눈자위 위로는 누르스름한 기가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낯빛이었다.
그녀는 평화로운 독서 시간을 방해한 리 박사에게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잿빛이 뒤섞인 긴 백발은 쪽진 머리를 해서 올렸는데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해 보였다. 그럼에도 노파의 걸걸한 목소리에는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 있었다. 지팡이를 짚지 않고서는 걷기도 힘든 몸이었지만 늙은 여인은 눈빛만으로도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하는 법을 알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잖아!”
“지하 대피로 출입구가…… 여, 열렸어.”
담뱃대를 잡고 있던 밧세바22)의 손이 움찔 굳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리 박사를 쳐다보았다. 리 박사는 푹 꺼진 이마 위로 해초처럼 엉킨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는 새우처럼 마른 몸으로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다급하게 뛰어 온 탓인지, 아니면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로 흥분한 표정이었다.
“대피로가?”
밧세바는 의자를 잡아서 책상 앞으로 끌었다. 그녀가 투명한 책상 표면에 손바닥을 대자 벽면 스크린에 불빛이 들어왔다. 이어서 연구동 곳곳에 위치한 카메라 영상이 조각조각 나뉘어 사각 액자 형태로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길 봐!”
어느새 밧세바의 어깨 옆으로 다가온 리 박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3층 복도를 가리키는 카메라 앞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돌풍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괴한의 움직임은 어찌나 빠른지 감시 카메라는 미처 침입자의 윤곽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밧세바의 눈이 차츰 커졌다. 정지 화면으로 뭉그러진 침입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리 박사는 오들오들 두려움에 떨었다.
“델타야! 델타가 틀림없어!”
굳게 닫힌 대피로의 문을 열고 번개 같은 속도로 지하 3층에서 지상 3층까지 이동해 오는 침입자.
이런 몸놀림이 가능한 건 델타밖에 없었다. 비교적 차분하게 앉아 있던 밧세바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며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웁실론들을 대피시켜야…….”
그러나 이내 그녀의 표정이 불안하게 구겨졌다.
‘대피시킨들 그녀들이 델타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심신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칠십 대 노인과 다를 바 없는 여인들이었다.
쾅!
난데없이 문밖에서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지자, 리 박사는 흠칫 떨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복도 끝에 위치한 비상 통로 출입문이 날아가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그 두꺼운 철문을 날려 버리다니, 역시 이런 괴력이 가능한 건 델타밖에 없었다.
“밧세바, 도망쳐야 해.”
리 박사는 입을 오므리고선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핏줄이 선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밧세바는 일단 전등을 껐다. 그리고 지팡이를 꽉 쥔 채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경고음을 울리자. 소리로 이들을 유인하는 거야.”
“쉬이.”
노파는 구부러진 검지를 보랏빛 입술에 대며 리 박사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미간에 힘을 준 채 조용히 문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조용하다.
델타 특유의 울부짖는 소리나 바닥을 기는 듯한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바, 밧세바.”
“조용히 하라니까.”
“경고음을 울려야 해. 주, 주의를 분산시켜야…….”
리 박사는 극도로 불안한 증세를 보였다. 그는 손가락을 덜덜 떨면서 듬성듬성 흰 머리가 난 머리칼을 벅벅 문지르더니 이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도, 도망가야 해. 달아나야 해. 흐, 흐윽…… 죽게 될 거야.”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내던 리 박사는 허둥대며 컴퓨터 화면 밑 제어 보드를 터치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자, 밧세바는 깜짝 놀라 홱 뒤를 돌아보았다. 리 박사는 제가 건드려 놓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굳은 채 서 있었다. 귀가 좋은 델타가 그 작은 소음을 놓칠 리 없었다. 밧세바는 지팡이를 들며 소리쳤다.
“경고음! 어서!”
삐이이이이이.
건물 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장을 두근두근하게 만들 만큼 요란하고 위협적인 경보였다.
몇 초가 흘렀다. 과연 델타들이 경보 소리를 따라 바깥으로 뛰쳐나갔을까? 밧세바와 리 박사는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밧세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 박사는 몸을 낮추고 살그머니 출입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우당탕!
쇠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리 박사가 들어오면서 굳게 잠가 놨던 문이었다.
밧세바와 리 박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떨어져 나간 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은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라도 맞고 온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공기에 몸이 젖은 채로 소리 없이 고요히, 그러나 남자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는 빛을 잃은 등잔처럼 황량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본다면 유림은 평소의 툴툴거림은 제처 둔 채, 일단 그를 꼭 안아 주었을 것이다. 언젠가 나눠 주었던 부드러운 벌칙의 온기처럼.
“당신은…….”
밧세바는 불쑥 나타난 케이의 등장에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다가 눈초리를 길게 늘이며 케이가 품에 안은 인영을 쳐다보았다.
흑발의 그녀는 동양인이었다.
찢겨진 은빛 드레스에 피투성이 맨발. 여자는 의식이 없는 듯 축 늘어져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길게 엉킨 채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사투를 벌인 유혈의 흔적이 보였다.
“가, 감염자다!”
한쪽에서 유림을 뜯어보던 리 박사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치며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으로 달려가 몸을 붙였다. 그는 불안정한 눈빛으로 “끅끅!” 하며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온몸의 관절을 꺾으며 기이하게 웅크린 채 벽에 더 바짝 몸을 붙였다. 밧세바 역시 쉽게 손을 대지 못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케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델타에게 물렸다.”
밧세바는 유림의 머리칼을 들춰서 목덜미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내 매부리처럼 휘어진 코를 찡그리더니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상처의 깊이를 보아하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조각상처럼 미동 없이 서 있던 남자는 방 안쪽으로 향했다. 작은 코너를 돌자 책상 뒤로 낡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는 유림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늙은 밧세바는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기억 속 남자는 늘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한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그랬던 그에게서 저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삐이이이이이.
바깥에서는 여전히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밧세바는 블라인드가 쳐진 창밖을 흘끗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곁눈질로 케이를 응시했다.
그들을 공포에 빠뜨린 건 델타가 아니었다. 온유한 눈빛에 감정 없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저 남자다.
“누구?”
리 박사가 다가와 밧세바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박사의 알사탕처럼 툭 튀어나온 눈이 불만스럽게 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뒤에 눕혀진 유림을 말이었다.
“감염자는 이곳에 있어선 안 돼.”
그러자 리 박사를 흘끗 본 케이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옆에 서 있는 그녀 또한 감염자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그렇지 않나, 입실론 밧세바?”
그의 예상치 못한 지적에 리 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밧세바는 무거운 눈빛을 지은 채 침묵했다. 리 박사는 밧세바의 눈치를 살피더니 케이를 노려보면서 오징어를 씹듯 입술을 질겅였다.
“우리 대화를 어떻게 들은 거지? 델타도 아니면서…….”
밧세바만 들을 수 있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는데 그걸 듣다니. 그러고 보니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했던 움직임의 주인공도 저 남자였던 건가? 대체 누군데 밧세바에게 저렇게까지 무례하게 행동하는 거지?
의문 어린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던 리 박사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회피했다. 그러면서도 밧세바를 걸고넘어진 케이의 말에 구시렁대며 반박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입실론들은 델타와 달라. 다르다고! 그들은 선택받은 존재야. 저주받은 여자들과는 다르지. 그리고 밧세바는 더 이상 감염자가 아니야!”
입실론 밧세바.
한때 최초의 입실론이라 불렸던 그녀는 태양의 도시를 설계하고 입실론들의 낙원 이주 계획을 세웠던 로스트 헤븐의 초창기 멤버였다. 왓슨 제약회사에 있어서 절대적 공로자와 다름없는 그녀가 이렇게 백발 꼽추가 되어 폐쇄 도시 속에 숨어 살게 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녀가 원한 일이었다.
케이와 밧세바의 눈빛이 다시 교차했다. 늙은 노파의 눈초리는 가늘게 늘어지더니 유림을 향했다. 밧세바는 노련한 시선으로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분석하듯 뜯어보았다.
날렵해 보이는 몸매, 발달한 근육, 손에 보이는 굳은살들과 허벅지 밑에 보이는 흉터.
여자는 군인이다.
밧세바는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굽니까?”
케이는 대답 대신 고요한 눈빛을 내주었다.
밧세바는 마치 잔물결이 치는 호수 아래로 얼음덩이가 가라앉는 것을 보는 듯한 환상에 젖었다. 검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자신의 발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 아니, 공포.
그것은 첨탑 꼭대기에 살고 있는 그 남자의 눈 속을 들여다볼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다만 그자의 눈동자 속에는 시린 눈보라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몰아쳤다면, 케이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 속에는 시베리아 벌판의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불꽃이 물처럼 흐를 수 있다면, 그 불살이 일렁이는 모습은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듯한 부드러운 암갈색 눈동자에 비치는 붉은 연기, 그 정제된 화염 속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자 했던 여인들은 한둘이 아니었을 테지.
“내가 모시는 상관.”
단정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박히는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밧세바는 잘못 들었나 싶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상관이라고? 이 남자가 누군가를 모신다니…….’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그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유림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케이를 보며 밧세바는 헛웃음을 흘렸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신비로운 청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더 눈부셨다. 아폴론의 현신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었던 그날처럼.
“상관이라면…….”
“꼭 살려야 하는 사람이지.”
그는 입매를 이지러뜨리며 웃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짓는 억지 미소였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그 황량한 눈빛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의 초조한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 속에 담긴 슬픈 온기의 정체, 그건 저 여자가 확실했다.
헛웃음을 흘리던 밧세바의 입가는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옆에서 동요와 심려가 뒤섞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어붙어 있는 케이의 눈초리처럼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델타에게 물려서 방도가…….”
“물린 지 겨우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어. 아직 늦지 않았다.”
밧세바의 눈썹이 의문으로 굽이쳤다. 델타에게 물리면 죽거나 그들의 동족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치료제도 없는 마당에 무엇이 늦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달리 케이의 표정은 확고했다. 반드시 살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일 정도였다. 부질없는 희망에 기반한 자기 최면인 것일까? 아니면 정말 다른 방도라도 있는 것일까?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던 밧세바는 질문을 하려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한 채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유림의 안색과 호흡이 한층 더 나빠진 게 그 까닭이었다. 이윽고 으스스한 기운이 방 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것처럼 차가워진 공기에 한쪽 구석에 서 있던 리 박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케이와 눈이 마주친 밧세바는 그가 내뿜는 싸늘한 기운을 포착했다. 서둘러 치료를 시작하라는 위협 아닌 재촉이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지팡이로 리 박사를 툭툭 건드렸다. 이미 겁먹은 표정의 박사는 괴물이라도 보듯 충혈된 눈으로 케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박사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상처 봉합부터 합시다.”
“시, 싫어! 감염자잖아.”
그는 자라처럼 하얀 가운 속으로 목을 움츠리며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케이가 다가와 리 박사의 팔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박사는 잡힌 팔이 아픈지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버둥거렸다. 이윽고 케이의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음성이 밤공기처럼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는 달래듯 제안했다.
“공평하게 이렇게 하죠.”
그는 고개를 조금 더 숙여서 리 박사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그의 싸늘한 숨결이 귓불을 적시자 박사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녀가 무사하면 당신도 무사할 거라 약속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힘주어 말한 마지막 단어를 리 박사는 저도 모르게 따라 읊었다.
“하, 하지만?”
“그녀가 잘못되면 당신도 온전하진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박하려던 박사의 눈이 움찔 멈췄다. 코앞에 다가온 갈색 눈동자가 핏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난 내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요.”
박사는 심장이 멈춘 듯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이 비슷한 말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약속 지켜요.
부드럽게 경고하던 소년의 미성이 머릿속에 두통처럼 울려 퍼졌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난 약속을 했어, 약속을…….”
뭔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기분이었다. 리 박사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제자리를 빠르게 빙글빙글 돌았다.
“약속을 했어, 아담과 약속을 했어…….”
그는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뭔가를 약속했고 그걸 끝마치지 못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불안이 엄습했다. 밤하늘에 걸터앉은 소년이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케이가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깜짝 놀란 리 박사는 “힉!” 하고 소스라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 박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 미치광이를 정말 믿어도 될까?
그는 백짓장처럼 파리한 유림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케이는 리 박사의 어깨를 두들기며 나직이 명했다.
“시작하시죠, 닥터 리.”
델타의 울음소리보다 섬뜩한 그의 속삭임이 경종을 울렸다. 박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구 왓슨 연구소 A동 5층 ‘Clean Room’.
리 박사는 유림을 5층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로 옮겼다. 봉합 수술 정도는 의료 기계가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폐쇄 도시는 전력 시스템도 제대로 돌지 않는 곳이었다.
계단으로 올라온 케이는 박사를 따라 비상문을 통과했다. 문 위쪽에는 ‘에어샤워: 무균복 착용’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바, 밖에서 기다려 주, 주십시오.”
수술대 앞에 선 박사는 장갑을 끼면서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케이의 시선을 피하며 거미처럼 앙상한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박사의 보랏빛 입술은 바짝 말라서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케이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서 있다가 마지못해 유리문 밖으로 나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고 서서 이중 쇠문으로 차단된 수술실 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22세기의 수술은 대부분 인공지능 시스템이 수행하는 편이었다. 인간이 직접 손으로 하는 수술은 과거의 유물로 취급받는 시대에, 정신도 온전하지 못한 미치광이 박사의 손에 수술 집도를 맡기고서 그의 마음이 평온할 리가 없었다.
어스름한 비상등 사이로 밧세바가 한발 늦게 도착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무표정한 케이의 얼굴을 흘끗 들여다보더니 바로 그의 불편한 심기를 읽어 냈다.
“너무 심려 마시지요. 그래도 한때 의학계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던 남자입니다.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상처 봉합은 문제가 아니었다. 감염 여부가 관건이다.
다리가 성하지 못한 밧세바는 지팡이에 의존해 걸어오더니 숨을 골랐다. 그녀는 박사와 유림이 있을 수술실 쪽을 흘겨보며 먼지가 자욱한 대기 의자에 앉았다.
케이는 ‘한때’라고 일컬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
“여전히 제정신은 아니더군.”
그러자 밧세바는 착잡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가여운 이카로스지요. 신이 되고 싶어서 한 날갯짓에 결국 자신이 미쳐 버린 꼴이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는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던 미궁에 아버지와 함께 갇히게 된다. 그들은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탈출하는데, 이카로스는 너무 높게 날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만하여 날아오르다가 결국 햇빛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여 죽는다.
일순 스스로를 태양신으로 여긴 걸까? 개미처럼 보이는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우쭐한 것일지도 모른다. 본인의 지식과 해박함에 방심한 이카로스는 안타깝게도 방종의 대가를 제 목숨으로 치렀다.
“박사의 모래시계는 여전히 금이 간 채 멈춰 있습니다. 내일이면 그는 또 오늘 일을 잊겠지요.”
그것이 리 박사가 지옥 같은 삶을 견뎌 내는 방식이었다.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힌 채 매일 악몽 속을 사는 남자. 그는 망가진 시계추 위에 앉아 흔들흔들 과거의 끈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었다.
폐쇄 도시의 망령에 얽매인 자는 아마도 리 박사, 그가 아닐까? 그는 폐허가 된 이 연구소처럼 과거의 영광과 고통 속에서 점차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밧세바는 말없이 고요한 케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햇살을 한 줌씩 담아 빚은 것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투명한 윤곽을 지녔다. 살랑이며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조각 같은 콧날과 장밋빛 입술.
볼 때마다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지만 그나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세월에 바스러진 젊음의 상실 덕일 것이다. 이를 다행이라 간주해야 할지 아니면 애석하게 여겨야 할지 그녀는 스스로가 우스울 뿐이었다.
“그 남자는 같이 안 온 겁니까?”
밧세바가 화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케이는 대답 대신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군부의 높으신 양반 말입니다. 다 죽어 가던 당신을 데려와 다짜고짜 맡겼던 그 사람, 그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낙원의 영웅이 되어 있더군요.”
리 박사와 달리 아직 정신이 또렷한 그녀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왓슨 3세가 해킹당하고 에덴 타워의 보안이 완전 해제되었던 그날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여러 차례 폭발음이 들렸고 하늘을 가르는 섬광도 목격했다.
그래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있던 차, 제복을 입은 군인 하나가 별안간 물에 홀딱 젖은 채 들이닥쳤다.
그의 등에는 소년이라 해야 할지 청년이라 해야 할지 모를 남자가 벌거벗은 채 업혀 있었다. 남자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그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곁눈질로 관찰한 남자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게 벌써 십오 년 전이라니.’
세월이 이렇게도 다르게 흐를 수 있는 것일까? 반백 년은 흐른 듯 늙어 버린 그녀와 달리, 그는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기억 속 그날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시간의 굴레가 당신만 피해 가나 봅니다.”
밧세바가 어스름한 미소로 말하자 케이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도 잠시 옛 기억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의 눈초리는 예전만큼 총명하지 못했다. 어깨선에서 찰랑이던 흑발은 푸석한 백발이 되어 엉켜 있었고, 동양인 특유의 신비로움을 자랑하던 얼굴에선 거칠거칠한 성질머리가 묻어나왔다.
“왜 돌아온 겁니까?”
밧세바는 걱정이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이 낙원에 있다는 걸 알면 그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 있어 당신은 이브를 훔쳐 간 도둑과 다름없으니 말이지요.”
“도둑?”
케이는 쿡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는 무표정한 눈으로 어둠에 잠긴 허공을 바라보며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도둑맞은 건 이쪽이지.”
밧세바는 불길한 눈초리를 지었다. 15년 만에 조우한 그는 아름다운 단도에서 날 선 대검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칼날에 독을 잔뜩 바른 채로.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는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던가?”
케이는 무심한 눈빛으로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쫓겨난 아담과 이브.
밧세바의 눈이 일렁였다. 그 말에 왜 자신이 뜨끔하게 되는지. 낙원에서 쫓겨났다고 죄인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모두가 결백하다고 이 사회가 완벽할 순 없듯이.
한편 수술실 안쪽에 있던 리 박사는 막 봉합을 끝마친 참이었다. 마지막 붕대를 감은 그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들이마셨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성글성글 맺혔다. 환자의 상처 부위가 생각보다 깊었다. 델타가 제대로 물어 박은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감염은 100% 확실했다. 팔다리면 몰라도 안면, 어깨, 목, 복부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델타에 물려 감염된 이들은 1단계엔 심신이 불안정해지고 공격적인 언행을 보이며, 2단계 초기엔 지적 능력의 퇴행과 언어 능력의 상실, 후기에는 육체적 변화까지 일어나기 시작한다. 세포 조직부터 시작해서 골격과 치아까지 변화를 이루며 감염자는 이 시기에 극심한 고통을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3단계, 신체 변화를 거친 감염자는 돌연변이종으로 각성하여 인간을 공격 대상으로 여긴다.
감염자들이 최종 각성까지 도달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개개인마다 차이가 존재했다. 연령이 어릴수록 그리고 심신이 건강할수록 변이 속도가 빠르다는 게 정설이었다. 박사는 눈앞에 누워 있는 유림 역시 변이가 꽤 빠른 축에 속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게 뭐지?”
가장 먼저 시신경이 퇴행하기 때문에 그녀의 눈 안쪽을 살피던 중이었다. 그는 뭔가를 발견했는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박사가 쓴 수술 집도용 안경이 자동적으로 유림의 각막과 시신경을 스캔하고 탐색했다.
집도용 안경이 띄운 3D 입체 영상을 보니 그녀의 각막과 홍채 사이에 수술로 삽입된 렌즈가 보였다. 그것을 본 리 박사는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그는 그녀의 눈에 마취용 점안액을 떨어뜨렸다.
이어서 유림의 눈 안쪽에서 뭔가를 집어 낸 그는 렌즈를 빤히 살피다가 다시 유림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놀라서 우당탕 뒤로 넘어갔다.
“뭐, 뭐야!”
그녀가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림은 인상을 쓰며 수술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리 박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엉덩이를 뒤로 슬금슬금 내뺐다. 그러자 유림은 그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화들짝 놀란 박사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던 그는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고 졸도할 기색이었다. 놓아 달라며 손을 뺐지만 그녀의 거센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여기가…… 어디지?”
유림이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그녀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듯 창백했다. 리 박사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이어진 그녀의 질문에도 그는 귀신이라도 본 듯 망연자실했다.
“누구냐고!”
유림이 버럭 소리치자 리 박사는 정신이 화들짝 돌아온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술에 취한 것처럼 흐리멍덩하던 그의 눈동자도 또렷하게 초점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늘 꿈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왔던 박사였다. 그랬던 그는 아주 오랜만에 지상에 발을 디딘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전신이 오싹하게 젖은 채 강물 속 기억을 꺼냈다.
“페, 페트로…….”
페트로비치 박사의 딸.
실험체 이브.
“살아 있었던 건가?”
유림은 오른쪽 눈이 간지러운지 손등으로 눈두덩을 세차게 문질렀다.
그녀가 실눈을 뜬 반대편 왼쪽 눈동자는 칠흑처럼 새까맣게 검었다. 그러나 깜빡거리다가 뜬 오른쪽 눈동자는 핏빛으로 짙게 젖은 붉은빛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