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막 구운 토스트 향기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아침 햇살이 드리워진 가운데 케이는 거실로 걸어 나왔다. 로스티아벤의 공식 제복을 입은 그는 소매를 걷으며 주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선반에 냉장 보관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랐다.
“유림은?”
─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깨울까요?
케이는 대답 대신 그녀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는 은연중 즐거움이 비쳤다.
리사는 평소처럼 메이드복의 안드로이드 모습으로 식사를 준비했다. 오늘 아침 메뉴는 베이컨 에그 토스트였다. 식단은 대개 유림의 입맛에 맞춰서 짜여졌다. 케이는 뭘 먹든 불평이 없지만 그녀는 꽤 편식이 심한 편이기 때문이다.
식탁을 정리하던 리사는 갑자기 들어온 정보에 고개를 들었다. 허공의 홀로그램에 스케줄 표가 떠올라 있었다.
【알림】
방문객1이 있습니다. 에어쉽이 5분 안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를 참고해 주십시오.
예정에 없던 방문 일정이었다. 방문객이 누군지 살핀 리사는 식사 준비를 즉각 중지했다. 그녀는 서둘러 유림에게 알리기 위해 알림을 작성했다.
침실로 알림을 띄우려던 리사는 멈칫하며 프로세스를 정지했다. 일전에 그녀를 리셋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케이의 모습이 저장 메모리를 스쳐 지나갔다.
유림에게는 항상 다정한 척 연기하지만 뒤에서는 섬뜩한 눈초리로 묵언의 협박을 하는 케이였다. 흑과 백처럼 다른 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리사는 안드로이드도 간담이 서늘해질 수 있다는 걸 경험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그래도 알릴 건 알려야지’라는 결론을 지었다. 차라리 직접 문을 똑똑 두들기는 게 나을 듯했다. 하지만 침실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다시금 주저했다. 자꾸만 얼음장 같던 케이의 목소리가 경종을 울리듯 되감겼다.
─오늘 리사의 시스템을 리셋시킬까 하는데…….
─요즘 그녀가 제 명령을 너무 우습게 보는 듯해서요.
마스터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유림은 마음이 약해서 매몰차지 못했다. 고민하며 제자리에서 맴돌던 리사는 결국 다시 토스트 앞으로 돌아왔다. 유림의 짜증과 잔소리가 시스템 초기화보다는 낫다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제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소멸’은 피하고 싶기 마련이었다.
한편 유림의 침실로 들어온 케이는 하얀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자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새하얀 팬티만 입고 있는 유림은 상반신이 완전한 누드 상태였다. 탄력 있고 매끈한 등이 가녀린 날개 뼈와 곡선의 척추 라인을 뽐내며 유혹하듯 손짓했다.
“유림.”
케이는 벽에 기대어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예상대로 깊게 잠든 그녀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침대로 다가온 그는 그녀의 발가벗은 등 위로 사뿐히 올라갔다. 그는 침대 매트리스를 손으로 짚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소곤소곤 말했다.
“아침이에요, 유림.”
그의 말소리가 들리기는 하는지 유림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 케이는 반쯤 감은 눈으로 그녀의 하얀 목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입가에 달콤하고도 쌉싸래한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모습은…….”
목덜미에 ‘쪽’ 하고 입을 맞춘 그의 손이 부드러운 가슴을 살며시, 그러다가 단박에 힘을 주어 꽉 움켜쥐었다.
“참기 힘들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요?”
그는 유림의 탱탱한 엉덩이를 잡고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홱 뒤집었다. 그러자 몸이 붕 뜬 유림이 잠이 덕지덕지 묻은 채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흘겼다. 그녀는 잠결에 그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마를 팍 찡그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걸 보던 케이의 얼굴에 오기 어린 표정이 나왔다. 과연 어디까지 무시할 수 있나 보자는 눈빛이었다. 그는 거칠게 주무른 그녀의 가슴을 짜내듯 잡아당기며 몸을 숙였다.
“으음…….”
유림이 쾌감과 통증 사이를 오가며 몸을 비틀자, 그는 그녀의 가슴을 포도 알 삼키듯 덥석 베어 물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가슴 꼭지가 잡아 뜯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척수를 관통하는 쾌감에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림은 엉덩이를 들며 도톰한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 사이를 벌리고 파고들었다. 치아를 훑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평소 그녀를 애무하는 혀처럼 에로틱한 자극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혀 위를 문지르다가 치열을 긁듯 오가는 손, 가슴을 깨물며 멍들 때까지 빨아들이는 그의 입술, 달콤한 과실을 맛보듯 꼭지를 맛보다가 잘근잘근 씹고 사탕처럼 굴리는 혀.
온몸이 뜨거운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듯했다.
“케이.”
그녀의 다리가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유림은 엉덩이를 들어 하반신을 그에게 바짝 밀착시켰다. 들뜬 숨을 내쉬며 가슴을 들썩인 그녀는 입안에 침범한 그의 손가락을 핥고 빨다가 ‘앙’ 하고 깨물었다. 멈칫 고개를 든 케이가 탁한 눈을 일렁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스…….”
유림이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스해 줘.”
아릿아릿한 가슴은 그가 남긴 보랏빛 멍들로 가득했다. 비스듬히 입술 끝을 올린 케이는 사악하고도 아름답게 웃었다. 그는 느긋이 몸을 뒤로 젖혔다. 입술을 늘려 웃는 그의 얼굴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게 빤히 보였다. 안달이 나서 미치겠는지 유림은 짜증을 내며 허리를 튕겼다. 그 모습이 앙탈을 부리는 고양이처럼 새침하면서 관능적이었다.
그는 그녀의 하얀 팬티 위를 검지로 문질렀다. 가랑이 사이의 젖은 틈을 슬그머니 비빈 그가 목소리를 그윽하게 낮추며 물었다.
“뭘 해 달라고요?”
케이의 손가락은 벌어진 팬티 사이로 쏙 들어가 있었다. 유림은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이며 그의 손가락이 들락날락하는 느낌에 어쩔 줄 몰라 몸을 아래위로 뒤흔들었다.
흐느끼듯 신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케이의 눈은 탁한 물살이 흐르듯 일렁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인지 아니면 쾌감에 취한 것인지 유림은 흐릿한 눈을 몽롱하게 떴다. 케이는 심호흡을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새초롬한 얼굴로 예민하게 굴면서 뺨을 사랑스럽게 붉히는 그녀의 모습이 예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유림이 허리를 튕기며 그의 팔뚝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한껏 숨을 들이켜며 속삭였다.
“……범해 줘.”
그의 눈이 흠칫 커졌다. 멈칫한 다른 손가락은 그녀의 입술 사이에 먹힌 채였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상기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요?”
그러자 새침하게 눈초리를 세운 유림은 한술 더 떠서 그의 허리를 다리로 끌어당겼다. 일부러 몸에 힘을 빼고 있던 케이는 졸지에 그녀의 가슴 앞으로 쓰러지며 가까스로 매트리스를 손으로 짚었다.
그의 동공이 흐릿한 갈색으로 번져 갔다. 넘으면 안 될 선 위를 왔다 갔다 움직이는 풍랑 위의 배처럼.
“명령이야, 중사.”
주도권을 되찾은 유림은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도발하는 듯한 미소. 사랑스럽지만 발칙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였다.
케이는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지금 감히 누구를 쥐락펴락하려 드는 것인지. 그럼에도 그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쾌락에 취해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에 덩달아 이성을 잃지 말자고 본능을 억누르면서.
“분부대로.”
그는 부드럽게 유영하듯 그녀의 몸에 올라탔다. 케이는 유림의 쭉 뻗은 다리를 브이V자로 확 벌리며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충분히 젖어 있었다. 팬티가 그녀의 갈라진 살 틈새로 흠뻑 먹힐 정도였으니.
뽀얀 가슴 둔덕 위 분홍빛 정점이 먹음직스럽게 그를 유혹했다. 이미 충분히 엉망으로 만들어 놨음에도 또다시 유린하고 싶어질 만큼. 그는 유림의 왼 가슴을 거세게 주무르며 숨결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유림이 애가 타는지 그를 짐짓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애를 태울 셈이냐고 매섭게 질타하는 눈초리였다.
“예뻐서 조금만 보려고 한 건데.”
케이는 열기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태연한 척 쿡쿡 웃었다. 그의 찬사가 은근히 기분 좋은지 유림은 앵두처럼 입술을 모은 채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한 손은 슬금슬금 그의 허벅지 사이로 침투 중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의 욕망을 덥석 움켜잡았다. 흠칫 놀란 케이가 손으로 벽을 짚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목울대에 핏줄이 선 채 잔뜩 당황한 눈이 보였다.
“잠깐, 유림…….”
“여유로운 척하더니, 여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데?”
줄곧 뭔가를 억누르던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붉은빛이 스쳤다. 그는 옷을 벗더니 그녀의 팬티를 확 잡아 내렸다. 무지막지한 힘에 놀란 유림은 발버둥을 치다가 그의 손에 붙잡혔다.
“케이?”
무표정한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지며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범해 달라면서요.”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유림은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에 호흡을 맞췄다. 그의 혀가 그녀의 쇄골을 핥더니 간질이듯 가슴골 사이로, 배꼽으로,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이 허벅지 사이를 배회했다. 그의 입술 새로 나온 숨결이 도톰한 고살에 닿자 유림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녀의 다리 사이로 하반신을 바짝 밀착시켰다.
처음 본 순간부터 끌렸다. 잔잔한 불꽃이 점차 거세게 타오르듯 상대를 향해 불거져 가는 갈망과 관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이미 서로 느끼고 있었다. 매일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며 탐색하던 시선을 주고받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 어루만짐이, 기대는 몸짓이, 다정한 속삭임 하나하나가 그대를 향한 손짓이었음을.
케이는 유림의 허벅지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덮치며 몸을 내리꽂으려던 찰나,
─ 소위님!
다급한 음성 하나가 달콤한 분위기를 산산조각 내며 울려 퍼졌다.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든 유림이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리사가 앞치마를 두른 채 허겁지겁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너부러진 옷들을 훑다가 침대 밑에 돌돌 말린 채 떨어져 있는 유림의 팬티에서 정지했다. 잠시 말이 없던 리사는 뒤에서 누가 성큼성큼 걸어오자 온몸으로 문 앞을 사수하며 진땀을 뻘뻘 흘렸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손님이…….”
난처한 어조로 굽실대며 변명하는 리사를 가볍게 밀치고 들어온 이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은 아침부터 열기가 넘치는군.”
유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케이는 유림의 놀란 눈을 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는 리사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벌떡 일어난 케이는 무서운 속도로 유림의 다리를 잡아서 오므린 뒤 그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었다. 하얀 이불에 애벌레처럼 돌돌 말린 유림은 케이의 등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대령님?”
문에 팔을 댄 채 흥미롭다는 듯 쿡쿡 웃고 있는 인영은 다름 아닌 호크 대령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유림은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남자를 쳐다보며 주방으로 향했다.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던 그녀는 곁눈질로 다시 둘을 훔쳐보았다.
제대로 열 받았는지 굳은 눈초리로 커피를 마시는 케이와, 제 집처럼 편하게 걸터앉아 집 구경을 하고 있는 호크의 모습이 꽤 대조적이었다. 유림은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생활 보호 좀 해 주시죠?”
“아, 미안하게 됐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맞은편의 케이를 쳐다보았다. 케이는 아예 45도로 몸을 돌린 채 그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애덤슨 중사, 만나서 반갑군.”
“예.”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한 케이는 다시 커피 잔을 들고 그를 무시했다. 호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중사가 소위와의 시간을 방해받아서 심기가 불편한가 보군.”
눈초리를 가늘게 찢은 케이는 그걸 몰라서 묻냐는 표정으로 호크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돌연 생긋 예쁜 미소를 그리며 대꾸했다.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무리 열 받아도 그렇지, 저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건방을 떠는 거야?’
그녀는 케이의 귀를 덥석 잡더니 호크에게 황급히 해명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아직 신참이라 대령님을 못 알아 뵙고 헛소리를…….”
유림은 대뜸 케이에게 무섭게 을렀다.
“당장 사과드리지 못해?”
하지만 그는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명령 불복종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남잔데, 오늘따라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리며 반항을 하고 있다. 유림은 그의 귀를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평소 같으면 벌써 온갖 엄살을 다 부렸을 케이였다. 그런데 희한하리만큼 이번엔 아무런 반응 없이 호크의 얼굴만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주머니에 손까지 넣고 껄렁거리는 모습이 심히 비딱하고 불량스러워 보였다.
“애덤슨 중사!”
유림은 당황한 기색으로 그를 채근했다. 어느새 호크는 감정 없는 얼굴로 케이를 맞대응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유림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 두 사람은 그녀가 로스티아벤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호크는 케이를 제외하고 나면 그녀가 로스티아벤 내에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유일한 사람이었다. 목숨을 건 사지에서 쌓은 전우애인지, 아니면 서로를 인정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인지 둘은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전장의 검은 독수리.
제 병사들을 챙기기로 소문난 호크였지만 어느 지휘관이나 그렇듯 그 역시 냉철하고 무자비한 면이 존재했다. 로스티아벤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블랙 호크는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일뿐더러 감히 말도 붙이기 힘든 존재였다. 내 편이면 세상에 둘도 없을 철의 방패지만 적이 되면 가장 무서운 사람.
그녀에게 있어선 낙원의 관리자보다도 더 크고 겁나는 대상이었다. 분명 그를 좋아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은연중에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케이가 그와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유림이 협박조로 눈을 부라리자 케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리듯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호크는 헛바람을 흘리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그는 한참을 크게 웃어 댔다.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해야지. 하필 딱 그 타이밍에 오는 바람에……. 그렇지 않나?”
“네.”
케이는 망설일 것도 없다는 투로 답했다. 호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호크를 보며 유림은 비로소 안심했다.
“그런데 여기까진 불쑥 무슨 일이십니까? 어차피 조금 뒤에 회의가 있어서 뵙게 될 텐데요.”
호크는 거실을 구경하며 답했다.
“그 전에 일러 줄 게 있어서.”
“일러 줄 거요?”
그녀는 케이를 힐끔거렸다. 방금 전 거칠게 다룬 게 못내 미안한 모양이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유림을 보며 무표정하던 케이의 얼굴에 사르르 봄눈 녹듯 미소가 걸렸다. 그의 눈웃음을 본 유림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곁눈질로 호크 대령을 쳐다보았다. 그는 거실에 걸린 액자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사이 유림의 곁으로 다가온 케이는 그녀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눈을 치켜뜬 유림이 뭐하는 거냐며 입 모양으로 묻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도둑 키스를 날렸다.
쪽.
유리 꽃병에 비친 두 사람의 입맞춤.
검게 변색된 장미 꽃잎을 만지작대던 호크의 눈가에 미소가 맺혔다. 다정하게 포개진 두 그림자는 한 번 더 입을 맞추고선 자그락거리고 있었다. 투명한 꽃병에 비친 십자 모양 흉터가 미소로 옅게 번졌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장미의 목을 꺾으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주말에 황금의 바벨탑에서 파티가 하나 열릴 예정이야. 정 소위 자네도 참석할 준비를 하게.”
“무슨 파티요?”
유림은 뒷짐 지는 척하면서 케이와 몰래 손을 잡다가 뒤늦게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모델 이브의 생일 파티라는군.”
호크의 대답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혐오감 어린 눈초리를 짓더니 딱 잘라 거절했다.
“전 파티는 질색이라서요. 대령님 혼자 다녀오십쇼.”
“놀러 가자는 게 아니다. 임무야. 정 소위 자네가 그녀의 경호를 맡게 됐거든.”
가시 돋은 침묵이 이어졌다. 호크는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는 깍짓손에 턱을 괸 채 물끄러미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여자의 경호를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낙원의 홍보 모델인지 뭔지 하는.”
“그렇게 됐네.”
“이브의 경호대라면 두 줄로 세워도 에덴 타워를 열 바퀴 휘감고도 남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원자도 넘쳐 난다고요. 그중에서 대충 뽑아 쓰면 되죠. 그리고 그쪽은 특보대 관할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유림의 말투에 짜증이 묻어났다. ‘뭐 그런 것까지 시키냐’는 어조였다.
“필란 중위는 현재 부상으로 임무 대기인 상태다.”
“그래서 저보고 지금 중위의 대타를 뛰란 말씀이십니까? 애송이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요?”
유림은 자존심이 확 상했는지 격앙된 어조로 소리쳤다. 그녀는 단순히 셰인에 대한 악감정으로만 이렇게 날뛰는 게 아니었다.
애송이.
최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들은 후방 부대─낙원 내 치안 부대─에 있는 전투병들을 종종 이런 식으로 부르며 비아냥거리곤 했다.
매일 델타와 사투를 벌이며 목숨을 걸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 특보대 같은 녀석들은 전투의 ‘전’ 자도 모르는 어린애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정 소위, 진정하고.”
“진정은 무슨! 애덤슨, 짐 챙겨.”
옆에 서 있던 케이의 눈썹이 놀란 듯 휘어졌다.
“오늘 저녁부터 우린 휴가다. 리사, 잡혀 있는 일정 모두 취소시켜. 죄송하지만 정유림 소위는 일주일 간 낙원에 없을 예정입니다. 평의회 늙은이들한테는 그렇게 전해 주시죠.”
“저런……. 아쉽군. 입실론들도 올 텐데.”
서재로 향하던 유림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호크 대령은 유감이란 표정으로 턱을 쓱 매만졌다.
“낙원의 관리자도 온다던데?”
그녀의 눈이 동요로 동그랗게 커졌다. 유림은 돌아서서 호크를 쳐다보았다.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미간에 힘을 준 그녀의 모양새는 이미 반쯤 넘어온 기색이었다.
케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한 여자, 저렇게 또 호크의 술수에 넘어가고 있다. 대령의 계략이란 걸 알면서도 늘 당하고 마는 유림이 순진하고 귀여웠다.
“예전에 소위가 그러지 않았나? 낙원의 관리자를 만나 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대령님께서 본인의 권한 밖이라며 딱 잘라 선을 그으셨죠.”
유림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는 척 눈치를 살폈다. 호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이미 승낙을 확신한 듯 승자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호크가 얄밉지만 유림은 손톱을 깨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제 소돔에서 제거했던 토끼의 마지막 외침이 떠올랐다.
─모델 이브! 그 여자라면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본인 입으로 아담의 여자라고 말하고 다니니까.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호크는 리사가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토스트를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나흘 휴가요. 메리하고 단둘이.”
유림은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했다. 호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반쯤 먹은 토스트를 내려놓으며 잠시 고심했다. 유림은 기세를 몰아붙여 그동안 유감스러웠던 부분들을 잔뜩 얹어서 공격했다.
“그 정도는 해 주셔야죠. 애덤슨의 교육, 시험장에 난입했던 델타들의 처리, 반강제적인 부대 이동 등등 제가 희생한 게 좀 많습니까?”
“검토해 보지.”
확약은 아니었다. 유림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쀼루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호크는 깍짓손을 끼며 식탁에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설교했다.
“소위도 알겠지만 태양의 도시는 낙원의 성역이야. 거긴 낙원의 관리자 고유의 영역으로 평의회도 관여할 수 없지. 왓슨 연구소의 연구원들조차 관리자의 승인을 얻어야만 입실론들을 만날 수 있어. 그중에서도 입실론 메리는 워낙 귀중한 능력을 지녀서 특별 관리 대상이야. 정 소위 자네만이 내 책임 아래 그녀와 만날 수 있는 권한을 허가받은 상태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라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유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호크가 저렇게까지 확고한 자세를 취할 때는 아무리 떼를 써 봤자 소용없다. 오히려 거래가 수포로 돌아갈 뿐이었다. 메리와의 휴가는 포기해야 하는 건가?
호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 봐야겠군.”
말없이 서 있던 케이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를 보였다. 그는 자청해서 에어쉽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유림이 호크의 옷에 묻은 토스트 가루를 털어 주려고 하자 케이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서 제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대신 그의 옷을 성의 없이 툭툭 털어 주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령님.”
에어쉽에 올라타던 호크는 케이를 보며 짓궂은 미소로 말했다.
“어차피 한 시간 뒤면 또 볼 텐데.”
무표정하게 서 있던 케이는 ‘아, 그러냐?’라는 눈빛을 짓더니 비뚜름한 미소로 인사했다.
“그럼 이따 ‘또’ 뵙겠습니다, 대령님.”
그는 호크의 대답 따윈 들을 생각 없다는 듯 유림의 손을 잡고 거실로 향했다. 유림은 케이에게 끌려가면서 호크를 향해 어설픈 경례를 날렸다.
유리 벽으로 된 출입구가 닫히자 호크는 슬쩍 입을 열었다.
“리사라고 했던가?”
─ 예, 대령님.
“자네가 소위와 중사를 책임지고 늦지 않게 보내도록 하게. 좀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직무유기죄로 파기시킬 테니 명심하고.”
─ 염려 놓으십시오.
에어쉽에 승차한 호크는 유림과 케이 쪽을 바라보며 이륙했다. 케이는 유림을 끌어안은 채 아까 끊어졌던 분위기를 다시 이어 가려는 중이었다.
호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강이를 차고 가는 유림과 바닥에 엎어진 채 정강이를 잡고 구르는 케이의 모습이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호크의 방문으로 떠들썩했던 오늘은 특별수사대SITF의 첫 공식 일정 날이었다.
유림과 케이는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케이의 경우엔 아침 일찍 반듯하게 차려입어 놓고선 다시 입는 고생이었지만 말이다.
로스티아벤 공식 제복에 스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무직 여성들도 남자들과 동일하게 넥타이에 셔츠, 그리고 재킷에 바지를 입었다.
유림은 하얀 베레모를 고쳐 쓰며 긴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넥타이를 다시 매던 케이는 유림의 입에 리사가 다시 구운 토스트를 넣어 주었다. 그는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소스를 손가락으로 훔친 뒤 혀로 맛봤다.
유림은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그에게 건넸다. 그걸로 손가락을 닦은 케이는 유림의 뺨에 묻은 빵가루를 떼어 냈다. 서로에게 거울 역할을 하면서 분주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이었다.
─ 그러게 제가 깨울 때 일어나셨으면 이렇게 허둥댈 일은 없으셨을 텐데요.
“시끄러워, 리사.”
유림은 눈을 흘기며 신발을 신었다. 호크가 간 뒤 케이의 마사지를 받다가 깜빡 잠든 게 화근이었다. 케이마저 그녀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니 할 말은 없었다. 사실은 리사가 깨우는 줄도 모르고 깊게 잠들었다는 케이의 말이 신뢰가 가질 않았다. 호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케이였기에 일부러 늑장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들었다.
유림은 신발을 구겨 신으며 에어쉽이 대기하고 있는 현관으로 향했다. 흰색 재킷을 입은 두 사람의 팔에는 로스티아벤의 공식 문장인 황금 방패와 특별수사대 엠블럼인 검은 독수리가 합쳐진 문양이 박혀 있었다. 에어쉽에 점프해서 올라탄 유림은 출발을 외치며 닦달했다. 케이마저 탑승을 완료하자 에어쉽은 급부상하여 쏜살같이 창공을 가르며 날았다.
【집무관의 보고】
SITF 대원들은 S관 제7 회의실로 모여 주십시오.
에덴 타워 S관 승강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제7 회의실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했다. 회의실에는 이미 나츠와 드레이크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U자 형으로 펼쳐진 의자에 띄엄띄엄 앉아 어색한 침묵을 형성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림과 케이의 등장에 두 사람은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소위님.”
재빠르게 일어나 경례를 한 드레이크가 먼저 묵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는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중사님.” 하고 예의 바르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케이는 눈인사로 대체했다.
나츠도 뒤따라 일어서서 거수경례를 하며 인사를 올렸다. 유림은 하품을 하며 대충 인사를 받아넘겼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두 신입을 훑어보았다.
드레이크 앤더슨.
군인으로선 아주 훌륭한 인재였다. 반듯하고 성실하며 빈틈이 없다. 전반적으로 성적 우수, 굳건한 정신력, 통솔력도 있어 지휘관의 자질도 보였다. 동료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의외였다. SITF로 오기에는 너무 엘리트적이라고나 할까? 소문을 듣자 하니 막 입대한 햇병아리들은 평의회와 군 수뇌부로부터 반항아 집단 취급을 받는 이곳에 발을 들이는 걸 두려워한다고 했다. 블랙 호크와 브루클린의 성녀라면 로스티아벤의 전설적인 존재들이지만, 두 사람은 별종이자 괴물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둘 밑으로 간다고 해서 평범한 본인들이 유림이나 호크처럼 대단한 거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병들은 특별수사대보다는 셰인 필란이 있는 특별보안대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평의회가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한몫한 게 분명했다.
다음으로 나츠 시게노.
심신 허약, 그러나 저격 기술만은 일류.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앳된 인상에 예쁘장한 외모였다. 거기엔 동양인의 피가 한몫했다. 어린 시절부터 게릴라 병사로 뛰어 온 모양인데 가족 사항이나 개인의 과거는 묻지 않는 로스티아벤이기에 그의 자세한 이력에 관해서는 유림도 알지 못했다. 알 수 있는 건 오직 병사가 가진 현재 능력치뿐이었다. 용병대의 특성상 그들에게 충성도나 도덕심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더 높은 봉급뿐이라는 건 공식과도 같은 진리다.
─ 노아 호크 대령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전원 기립해 주십시오.
집무관의 음성에 네 사람은 칼같이 일어섰다. 약 5초 후 회의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전원 일제히 오른손을 들어 경례를 올릴 자세를 취했다.
유림이 대표로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그녀는 호크의 뒤로 나타나는 인물들을 보고선 표정이 굳었다. 셰인의 부대였다.
“다들 모였으니 자리에 앉지.”
호크가 단상에 오르자 특별수사대원들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유림만은 그대로 선 채 불쾌한 눈초리로 물었다.
“특보대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역시 브루클린의 성녀였다. 불편한 심사를 여과 없이 드러낸 그녀는 답을 듣기 전까진 순순히 앉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셰인과 특보대 측 팀원들 역시 거북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림은 오른팔과 오른다리에 보호대를 찬 셰인을 보며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걷는 자세를 보니 복부에도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필란 중위님께선 대체 누구한테 이렇게 호되게 당하신 겁니까? 육박전이었던 것 같은데, 흡사 복날에 개 패듯 일방적으로 맞은 꼴이지 말입니다.”
그녀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암살범을 잡으러 갔다가 역으로 당하고 오셨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사실이 아닐 거라 믿습니다. 천하의 필란 중위께서 그리 쉽게 당하실 리가 없죠. 그것도 일 대 다수 전에서 말입니다. 아, 일전에 사격장에서 솜씨를 뽐내던 꼬마는 어디 갔습니까? 설마 그 녀석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겁니까? 우유병이라도 사서 문병을 가야지 싶습니다. 그렇게 자랑하던 ‘실전’이 어땠는지 좀 들어 봐야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특보대원들 사이에 껴 있던 청년 하나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 우유병을 받을 장본인이었다. 그를 발견한 유림은 눈을 치켜뜨더니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는 얼굴이 복어처럼 부은 채 콧대엔 시퍼런 멍까지 들어 있었다. 젖이나 먹는 어린애 취급을 당한 게 치욕스러운지 그는 턱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멈출 줄 모르고 배꼽을 잡으며 웃어 대는 유림의 모습에 특보대 요원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셰인의 눈치를 살폈다. 셰인 역시 분개한 눈초리로 이를 갈고 있었다. 한참을 웃던 유림은 별안간 웃음을 뚝 그치더니 싸늘한 얼굴로 읊조렸다.
“빙신들.”
그리고 털썩 자리에 앉아 무관심한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유림의 입꼬리엔 경멸 어린 미소가 남아 있었다. 특보대원들은 못 참겠다는 얼굴로 발끈해서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만!”
호크의 엄숙한 음성이 방 안의 기류를 짓눌렀다. 그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양측을 번갈아 보더니 더 이상의 분란을 용서치 않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SITF와 SSF19)는 일시적으로 한 팀이 되어 작전을 수행한다. 작전 지휘관은 셰인 필란 중위, 실전 지휘관은 정유림 소위, 기술 장교에 케이 애덤슨 중사, 총괄 지휘는 내가 한다.”
다들 놀란 듯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유림은 옆자리에 앉은 셰인을 흘끗 쳐다보았다. 셰인 역시 그녀를 곁눈질로 응시했다. 시선이 교차한 두 사람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외면한 뒤 인상을 썼다.
“따라서 앞으로 팀 내의 분쟁은 용납지 않겠다. 상관에게 무례한 언행을 보이거나 하극상을 일으키는 자는 군율에 의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니 명심하도록!”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불만스럽다는 얼굴이었지만 감히 블랙 호크에게 이견을 달 사람은 없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드레이크가 가만히 손을 들었다. 호크는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까닥했다.
“저희가 한 팀이 되어서 수행한다는 작전이 대체 뭡니까?”
호크는 대답 대신 뒤편의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이윽고 벽면 유리 화면이 반짝이더니 평의회의 공식 인장20)이 찍힌 지령서가 나타났다.
“평의회는 낙원 내 고스트들의 뿌리를 뽑기로 결정했다.”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지령서를 응시했다. 지령서 밑으로 잿빛 코트를 입고 후드를 쓴 남자들의 사진과 영상들이 떠올랐다. 그 앞으로 걸어 나온 호크 대령은 살벌한 눈초리로 나직이 말했다.
“유령의 군주와 회색 기사단의 말살, 그게 이번 ‘오베론 소탕 작전’의 주 목적이다.”
특수대와 특보대가 합동 작전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을 무렵, 기억의 도시에서는 은밀한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 진영의 비밀스러운 만남.
안드로이드 개발회사 위즈덤의 수장인 솔로몬과,
“또 그 루트로 오신 겁니까?”
회색 기사단의 주인인 유령의 군주의 접촉이었다. 유령의 군주는 기사단 사이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시니컬하게 웃었다.
“지하 미궁의 도면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자는 오베론의 군주뿐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완공되지 않은 미완의 비밀 통로니까.”
검은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대립하듯 마주 앉았다. 이곳은 소돔 내 위즈덤 대표인 솔로몬만이 출입할 수 있는 제한 구역, 거울이벽耳甓의 신전이었다.
벽이 온통 삼각형 모양의 거울 타일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모래의 도시와 기억의 도시를 물밑에서 주무르는 두 거물이 이렇게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솔로몬은 황금 가면을 살짝 들어 올리며 웃었다. 유령의 군주는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애써 평온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지하 미궁은 본래 대피로의 목적으로 설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모래의 도시의 잠수정 탑승구까지 이어져 있다고요. 기억의 도시, 에덴 타워, 모래의 도시를 잇는 지하의 땅굴이라니, 탐나는데요?”
“미궁 시공의 마무리 단계 무렵, 이곳을 통해 입실론 하나가 탈출하는 바람에 관리자가 공사를 전면 중지시키는 사태가 발생했지. 그 사건으로 인해 관리자는 아예 미궁의 지상 출입구를 폐쇄해 버렸어. 모래의 도시 쪽은 우리가 뚫어 놨지만.”
유령의 군주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모두 오베론의 통제를 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 한 곳, 솔로몬이 있는 소돔을 제외한다면.
서로의 영역을 노리는 들개들은 발톱을 감추고 웃었다. 두 세력이 맞부딪치면 어느 한쪽이 죽거나, 머리를 숙여야 끝나는 싸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둘 다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저희 상품을 써 보신 감상은 어떠십니까?”
“괜찮더군. 델타들을 아주 쉽게 처치하던걸? 물려도 감염될 걱정이 없는 안드로이드니 금상첨화고 말이야. 덕분에 아주 든든한 호위 기사들을 갖게 되었어.”
유령의 군주는 흐뭇한 눈으로 회색 기사단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는 솔로몬의 의도를 짚어 보려는 듯 슬쩍 물었다.
“이 전투 병기들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거지?”
“글쎄요. 본업이 장사꾼이니 팔아야겠죠.”
“우리에게만 독점적으로 납품하는 거 아니었어?”
“그럼 전부 구매하시죠. 저야 누구든 사 주기만 한다면 환영입니다.”
군주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솔로몬이 파는 병기형 안드로이드들은 너무 비쌌다. 현재의 오베론으로서는 대량 구매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이상 평의회가 힘을 쌓는 건 곤란해.”
유령의 군주가 중얼거렸다. 솔로몬은 손을 비비다가 깍지를 끼고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뭔가 긴밀하게 논의할 것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유령의 군주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베론의 목표는 뭡니까?”
“오베론의 목표?”
“유령의 군주, 당신은 고스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입니다. 모래의 도시 불법 체류자들은 다루기가 아주 까다롭죠. 그런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유일한 존재가 회색 기사단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당신에게 만들어 드린 회색 기사단이죠. 그리고 고스트들은 이 회색 기사단을 두려워하면서 영웅시 합니다.”
유령의 군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이 책략가가 또 무슨 중상모략을 하려고 이런 거창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지?
“마치 그 옛날 전설의 아서왕과 원탁 기사단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모래의 도시 범법자들은 당신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복종할 테죠. 그게 바로 평의회가 우려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오베론과 고스트들을 잠재적인 폭동의 씨앗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생의 길을 택해 왔던 건 당신이 낙원에 있어 필요악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낙원의 햇살이 닿는 곳에 고스트들이 활개를 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그들을 흡수해 주는 오베론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거죠. 그런데 이번 도박 경기장 사건으로 국면이 변했습니다. 오베론이 델타에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이 수면 위로 올라와 까발려진 이상 평의회도 더 이상 뒷짐 지고 보고만 있을 순 없게 된 겁니다.”
솔로몬은 심각한 눈빛의 유령의 군주와 시선을 교환하며 손을 비볐다.
“유령의 군주,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당신의 손에는 지금 엑스칼리버21)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 검으로 무엇을 베고자 하는 겁니까?”
군주는 잠시 말을 아꼈다. 그는 묵묵히 테이블 위 찻잔을 응시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회색 기사가 잔을 들어 그의 입에 직접 넘겨 주었다. 군주는 혀끝으로 눅눅해진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에덴 타워.”
솔로몬은 가면 눈구멍 너머로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낙원의 왕이 되고 싶습니까? 다음 세대의 아담이 되어서?”
“현 관리자 아담이 후계자를 지목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해. 그것 외에는 합당한 선택이 아니거든.”
“후계자요? 저는 당신이 누구보다도 낙원을 증오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맞아.”
유령의 군주는 보드라운 입술에 살포시 미소를 그렸다.
“증오하지. 증오하고, 또 증오해. 하지만 나는 살아남을 거야. 목표가 있거든. 우리가 낙원을 거머쥐게 되는 날, 나는 에덴 타워의 정상에 서서 주민들에게 공표할 생각이야. 내가 바로 낙원이 감추고 싶어 하는 ‘추악한 진실의 실체’라고! 그럼 다들 엄청 충격을 받겠지? 그렇지만 종국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될 거야. 저 괴물이 바로 낙원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솔로몬은 말없이 유령의 군주를 쳐다보았다. 흥분해서 숨을 몰아쉬던 군주는 회색 기사단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찻잔을 들이켰다. 술이라도 털어 넣듯 꿀꺽꿀꺽 찻물을 넘기는 모습이 속에 맺힌 화증을 삭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어때, 솔로몬? 당신이 원하는 건 뭐지? 이 시대 최고의 안드로이드 개발자라 불리는 당신이 왜 이렇게 조그마한 섬 따위에 집착하는 거야?”
우주 건설회사 스타시티가 세운 안드로이드 개발회사 위즈덤. 왓슨 제약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해도 모자람이 없을, 아니, 실상은 더 커다란 기업이었다.
위즈덤의 대표인 솔로몬은 스타시티 회장의 아들이고 명실상부 위즈덤의 최고 경영자이자 수석 개발자였다. 괴팍하긴 해도 그가 천재에 수완가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 보물이 있거든요.”
“보물?”
“로스트 헤븐을 움직이는 슈퍼컴퓨터 왓슨.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인류가 빚어 낸 가장 찬란한 유산이며 두 번 탄생하기 힘든 기적과도 같은 산물이죠.”
어조가 높아진 그의 목소리에서는 광신도와 흡사한 숭배 의식이 엿보였다. 유령의 군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테크놀로지 오덕 같으니!’ 그가 안드로이드를 아내로 두고 있다는 소문마저 진짜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왓슨 3세는 네가 가져. 난 그 슈퍼컴퓨터인지 뭔지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으니까.”
솔로몬은 ‘후후’ 웃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입니다.”
유령의 군주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는 추호의 미련도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베스타 신전에 숨어든 암살범 말이야. 누구야? 당신 로봇들은 봤을 거 아니야.”
솔로몬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그러자 상대는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이런 정보는 서로 공유하자고! 평의회의 머릿수를 줄이는 건 우리 둘 다에게 있어서 이득이잖아.”
“본래 정보라는 건 홀로 독점하고 있을 때 그 가치가 높은 법이죠.”
“치사하게 굴 거야?”
눈을 흘기던 유령의 군주는 ‘쳇’ 하고 일보 후퇴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고가의 정보를 순순히 흘릴 리 없다는 건 짐작했다.
“어쨌든 솔로몬, 이번에는 빚을 졌어. 네가 보내 준 다윗인지 뭔지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도 델타가 되어 있거나 조각난 시체가 되어 있겠지. 내가 어떻게 갚아 주기를 원해?”
“하하, 빚이라니요.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삭막하게 굽니까?”
“시끄럽고 원하는 바나 말해. 마음 변하기 전에.”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포석은 깔았다. 정석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대국이었다. 한쪽에서는 치열한 수상전이 벌어지고, 또 한쪽에서는 착실하게 집을 굳히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행마를 펼치며 기회를 엿보다가 과감하게 쳐들어가는 세력. 당신이 이 전세를 뒤흔들 한 수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소곤소곤, 솔로몬의 귀엣말을 듣더니 유령의 군주는 굳은 얼굴로 주저했다.
“이봐, 그건 전쟁 선포잖아. 관리자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걱정 마세요. 뒷일은 제가 알아서 수습합니다. 오베론 쪽에는 피해가 없도록 하죠.”
의심스러운 시선이 꽂혔다. 솔로몬은 태연한 자세로 빙그레 웃었다. 유령의 군주는 회색 기사단의 부축을 받아 탈것에 오르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솔로몬, 당신이 낙원 최고의 로비스트라는 건 인정하는 바야. 하지만 나한테 얕은 술수는 통하지 않을 거야.”
호의를 베푸는 자가 있다면 그자의 손을 베어라.
오베론의 슬로건이다. 유령의 군주가 고스트들에게 불신과 변절의 세계인 미들 타운에서 일러 주는 생존 법칙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고스트들 사이에서 구르며 큰 군주는 일찍이 그런 처세술을 터득했다.
회색 기사단이 떠나자, 솔로몬은 비로소 가면을 벗었다. 그는 문 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경호원 하나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화이트 채플의 챔피언인 다윗이었다.
“그때 너와 경기를 벌였던 그 여자, 영상 좀 띄워 봐.”
다윗은 허공에 화이트 채플에서 델타를 상대로 격전을 벌였던 유림의 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엊그제 소돔을 날렵하게 빠져나가던 암살자의 모습이 비교 영상으로 틀어졌다.
“분석 결과는?”
─ 체형, 몸동작, 격투 스타일, 음성 정보 등을 분석한 결과 97.8%의 확률로 동일 인물 추정.
복면을 쓴 암살자의 얼굴과 정유림 소위의 얼굴이 나란히 겹쳐졌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둘이 ‘동일 인물’이란 메시지가 경고 창처럼 깜빡였다. 멍하니 있던 솔로몬의 눈이 점차 커졌다. 그의 표정이 환희로 차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하!”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브루클린의 성녀가 낙원의 암살자였다니!’
빅 뉴스였다. 이건 정말 낙원이 떠들썩해지다 못해 뒤집힐 정도의 뉴스감이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걸까?’
솔로몬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생각에 잠겼다. 평의원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세력이라.
‘오베론인가?’
하지만 유령의 군주는 암살자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자존심 강하고 어린아이처럼 고집스러운 자였다. 눈속임을 하고자 정교한 연기를 펼칠 유형은 아니란 의미다.
‘오베론이 배후 세력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연맹군!
번개처럼 결론에 도달한 솔로몬은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도 흥미로울 수가! 낙원의 승전 영웅이 연맹군의 공작원이었다니! 그렇다면 입실론 메리도 한패란 의미인가? 그는 연신 무릎을 내리쳤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낙원 내에서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이 황금보다도 귀한 정보를 어디다 팔아넘겨야 하나? 하하하! 즐거움으로 가득한 웃음소리가 거울이벽의 신전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호크가 퇴장한 이후에도 특수대와 특보대는 여전히 회의실에 남아 작전 논의를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의자를 돌려서 마주 보고 앉았다. 각자 앉은 의자에 딸린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출입구 유리문이 열리더니 청소부가 들어와 테이블과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삽시간에 깔끔하게 치운 청소부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퇴장했다.
조용해지자 셰인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에덴 타워 내라 할지라도 지나가는 쥐새끼 하나 방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로봇 청소부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기 마련이었다.
“오베론은 현재 미들 타운 내부에 숨어 있는 게 확실해. 다만 미들 타운은 왓슨을 이용해 탐색할 수도 없을뿐더러, 계속해서 새로운 길이 생기고, 있던 길도 없어지는 마당이라 확실하게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돼.”
“정보원은요?”
“정보원?”
“특보대가 오베론 내에 심어 둔 쥐새끼 말입니다. 도박 경기도 알면서 쭉 눈감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쥐새끼 하나 심어 두지 않은 건 아니죠?”
유림의 지적에 그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는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무르더니 인상을 쓰며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정 교관. 로스티아벤 간부들 중에서 오베론의 사탕 바구니를 받지 않은 자는 없어. 너는 내게 항상 실전 경험이 없다고 으스대지? 하지만 이곳 낙원에서 넌 양손에 총을 쥔 어린아이와 다름없어. 무턱대고 적을 향해 쏘아 대는 게 능사는 아니란 뜻이야. 때로는 그 총으로 아군의 머리를 겨눠야 하는 게 정치란 거다. 너도 낙원에 온 지 벌써 이 년차야. 이런 것쯤은 알 때가 되지 않았나?”
“아, 그래서 뇌물을 받고 델타를 빼돌리는 걸 눈감아 주신 겁니까?”
유림은 셰인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부라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유림에게 멱살을 잡힌 채 허공에 번쩍 들린 셰인은 쿨럭거리며 황당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평의회 밑에 있다 보니 정치인이라도 된 것 같습니까? 웃기지 마시죠. 필란 중위, 우리는 군인입니다. 군인인 우리가 할 일은 낙원의 주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안녕을 지키는 일이지, 에덴 타워의 배때기나 불리는 게 아니란 소립니다. 총으로 아군의 머리를 겨누는 일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 와 있는 겁니다. 이곳은 수백 마리의 델타가 있던 맨해튼보다 더 끔찍합니다. 그곳에선 적어도 아군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믿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곳이었으니까. 전우와 함께 눈앞의 적을 섬멸한다, 오로지 그것밖에 없는 세계였으니까! 그게 바로 전우애고, 전우애가 없는 부대는 전멸할 뿐입니다.”
그녀는 홱 돌아서더니 멍하니 앉아 있는 특보대 대원들에게 쩌렁쩌렁 소리쳤다.
“잘 들어, 이 자식들아! 그런 썩은 정신으로 군에 있다간 결국 화장실에서 똥이나 싸다 죽게 될 거다! 모두가 네놈들 시체 위에 오줌을 갈겨 대며 웃겠지. 그런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평의회 의원들 불알이나 빨고 살도록 해. 말리진 않겠다.”
그녀는 경멸 어린 눈으로 셰인의 멱살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셰인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유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필란 중위는 그녀의 상관이었다. 유림이 잘못되는 건 아닐지 우려됐다.
다행히도 셰인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는 치부를 들킨 듯 벌게진 얼굴로 바닥을 노려보았다.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놀란 듯 유림을 쳐다보던 케이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어쩌면 좋을까, 저 여자를.
유림은 자리로 돌아와 새침하게 팔짱을 낀 채 허공을 응시했다. 쿡쿡 웃는 소리에 그녀는 흘끗 곁눈질로 케이를 쳐다봤다. 그는 옆으로 늘어난 입술에 걸린 미소를 가리기 위해 턱을 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었다. 달콤한 눈웃음으로 가린 욕망. 오늘 오전, 불청객으로 인해 해소하지 못했던 열기의 잔재였다. 유림은 민망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팀 블랙 호크】
세인트1: 정유림 소위 | 세인트2 : 케이 애덤슨 중사 | 세인트3 : 드레이크 앤더슨
세인트4 : 나츠 시게노 | 스네이크1: 셰인 필란 중위
스네이크2 : 토니 코즈메 하사 | 스네이크3 : 브레드 피트
스네이크4 : 데이비드 카터
잠시 휴식 시간이었다. 각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거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기도 하고, 막간의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회의실 밖에 나갔다 온 유림은 손부채질을 하며 단상 위로 올랐다. 뒤따라온 케이는 그녀의 귓가에 소곤대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구부린 유림이 매섭게 쏘아보자, 그는 생긋 웃으며 물러났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셰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구겼다.
“뭐하는 거야, 저 두 사람.”
“모르셨습니까? 전부터 소문이 쫙 돌았는데, 저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랍니다. 교관과 훈련병 시절 때부터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일대일 맞춤 훈련까지 한 사이잖습니까? 합숙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나한테 전우애가 어쩌니 하더니, 저것들이 군기가 빠져 가지고…….”
그는 기가 막힌 듯 “쳇!” 하고 눈 밑 근육을 비틀었다. 하여간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콤비였다.
“소위님하고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나츠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했다. 케이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유림 앞에서 예쁘게 웃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나츠의 옆에 앉아 있던 드레이크는 유림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고양이를 좀 예뻐해 주러.”
“S관에 고양이가 있어요?”
눈치 없이 되묻는 나츠를 보며 케이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옆모습에서 귀찮으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아우라가 풀풀 풍겼다.
나츠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드레이크는 뭔가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웃었다. 복숭아처럼 부풀어 오른 유림의 입술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한편 유림은 시큰둥한 눈으로 병사들을 쭉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알싸한 입술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질문을 던졌다.
“결국 우리가 오베론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겁니까?”
부상당한 오른팔이 간지러운지 셰인은 팔을 벅벅 긁으며 답했다.
“전력을 투입해서 미들 타운 전체를 뒤집어 버리지 않는 이상 그렇다.”
“그렇게 되면 도시가 아예 날아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주민들 피해가 나올 수도 있고, 일단 오베론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델타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도요.”
“근데 저쪽도 델타는 통제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그럼 섣불리 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특보대 측에도 멀쩡한 놈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방금 대답한 병사는 데이비드 카터, 특보대의 막내라고 했다.
유림은 그를 보며 생글 웃었다. 그런 유림과 눈이 마주친 데이비드는 얼굴을 발그레 적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케이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아까부터 유림을 흘끗거리며 눈을 반짝이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브루클린 성녀의 팬인 모양이다. 그는 대장인 셰인 모르게 그녀에게 열심히 하트를 보내고 있었다. 제 병사가 성녀에게 코가 꿰인 줄도 모른 채 셰인은 코를 풀며 말했다.
“오베론도 이를 갈고 있을 거야. 짐작해 보건대 유령의 군주가 자존심이 좀 센 게 아니거든. 이번에 당한 걸 두고두고 되새김질하고 있을 거다. 보복전을 해 올 가능성이 높아.”
“선제공격을 해 올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지. 고스트들에게 면이 설 만한 액션을 취할 수도 있다는 의미야. 화이트 채플에서 죽은 고스트들이 한두 명이 아닌데 가만히 있으면 오베론과 회색 기사단의 위신이 영 말이 아니잖아. 다들 유령의 군주가 로스티아벤과 에덴 타워에 한 방 먹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모델 이브의 생일 파티.”
유림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그녀의 말에 주목하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브의 생일 파티라면 조만간 있을 낙원 최대의 행사였다. 시기상으로도 과시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눈앞에 이렇게 좋은 먹잇감이 있는데 오베론이 놓칠 리가 없겠지. 유림은 단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저격수를 중심으로 조를 짜지. 나츠!”
“에…… 예엣!”
갑작스런 호령에 그는 긴장한 듯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셰인은 유림이 멋대로 그를 지목한 게 다소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쓰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봐, 기술과 경험이라면 우리 쪽 토니가 한 수 위야.”
“토니? 아, 우유병?”
유림은 아까 전 놀려먹던 병사임을 알아채고는 쿡 웃었다. 토니는 홍당무가 된 얼굴로 애꿎은 테이블 위만 노려보았다. 속으로는 언젠가 저 빌어먹을 성녀의 입 구멍에 총구─그의 대물─를 쑤셔 넣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었다.
“우유병이 꽤 분해 보이는 것 같네? 자꾸 나한테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속상해?”
유림은 야지랑스러운 눈웃음을 머금고 그를 달래듯 말했다. 그녀는 그의 약을 더 바짝 올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나긋하게 제안했다.
“그럼 어디 한번 실력을 펼쳐 봐. 기회를 줄 테니.”
그녀는 단상에서 내려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토니는 기다렸다는 듯 사나운 눈빛으로 대응했다. 독살스러운 눈초리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기세였다. 유림은 그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홱 돌아서서 손뼉을 쳤다.
“공정하게 대결을 통해 가리는 게 어떨까요? 누가 팀 블랙 호크의 제1 저격수인지 말이죠.”
“찬성.”
셰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아까부터 얼어붙은 채 서 있던 나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낯빛이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대결을 벌이기 위해 일동은 일제히 모래의 도시로 이동했다. 안드로이드 집무관이 시험장 설정을 하는 동안, 유림은 관제실에서 나츠와 토니에게 경기 규칙을 설명했다.
“제한 시간은 삼십 분. 목표물 아닌 상대 신체에 직접적으로 발포를 할 경우엔 실격패다. 목표물은 델타의 형태를 한 3D 입체물이야. 공격을 받아도 딱히 신체적 피해는 없을 거다. 하지만 실전이라 생각하고 방어나 회피에 실패했을 경우 마이너스가 된다. 이는 동률일 경우 불리하게 작용될 거야. 목표물의 움직임은 오리지널의 80%로 조정한다. 열 마리 중 먼저 여섯 마리 이상을 맞추는 자가 최종 승리다. 이상, 질문?”
둘 다 없는지 침묵 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좋아, 그럼 준비됐나?”
“예.”
“준비됐습니다.”
두 사람 모두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림은 본분을 다했다는 표정으로 으쓱하며 둘 사이를 지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나츠의 눈길이 벽면에 기대어 서 있는 케이에게로 닿았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케이의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츠는 얼굴이 빨개져서 황급히 돌아섰다. 주먹을 쥔 손이 심장 박동에 맞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츠의 왜소한 어깨를 잠시 바라보던 케이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유림은 집무관이 준비해 놓은 맥주를 들이켜며 아리송한 눈으로 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케이 씨?”
나츠는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정수리에 손을 툭 얹은 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온화한 눈빛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곡선은 남자가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때처럼 델타가 덤빈다고 눈 감지 말고.”
진정시키듯 어루만져 주는 손길,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주는 응원.
“떨지만 않으면 돼.”
나츠는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자에 앉아 있던 유림은 옆에 서 있는 드레이크의 팔을 툭 건드렸다.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저 둘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나츠가 쫓아다니는 거에 가까웠다. 애덤슨 중사는 귀찮아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아지와 주인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
“나츠와 함께 입대 테스트를 치렀었지?”
“예.”
“어땠어? 기가 좀 약해 보이는 녀석 같은데.”
“역량은 뛰어난 병사라고 생각합니다만…….”
“다만?”
드레이크는 까만 눈을 가라앉히며 잠시 고뇌했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열일곱의 병사. 용병대에 들어오기엔 심약하고 겁이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뭔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이곳에 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소년의 눈빛에선 때때로 나락에 떨어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심연이 엿보였다.
“사연이 많아 보입니다.”
유림은 그게 대수냐는 표정으로 콧잔등을 찌푸렸다.
“사연 하나 없이 여기 오는 놈이 어디 있어? 로스티아벤에 입대하는 녀석들치고 지옥 근처에 가 보지 않았다고 자부하지 않는 놈은 없지.”
그녀는 차가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며 기분 좋은 탄성을 내질렀다.
“드레이크.”
“예.”
그는 자신의 어깨에 걸처진 그녀의 팔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낙원에서 서슴없이 총을 잡을 수 있는 건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이 세상에 낙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유림은 치켜세운 눈초리를 매력적으로 생긋 휘면서 “그렇지 않나?” 하고 물었다. 그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는 맥주잔을 던져 버리듯 내려놓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나츠와 함께 있는 애덤슨 중사 쪽이었다.
아닌 척했지만 결국 같이 있는 두 사람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드레이크는 한 마리의 표범처럼 걷는 유림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온몸에 꽉 달라붙는 전투복이 단순히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그녀 자체를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다.
“낙원 따위는 없다…… 라.”
역시 그녀는 맨해튼에서 자신과 만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선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 중 하나였던 걸까?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이쪽에선 반가운 일이었지만 묘하게 아쉬웠다.
“나츠, 이건 우리 팀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야. 마음껏 실력 발휘하고 와.”
“예, 소위님.”
나츠는 기뻤다. 케이뿐만 아니라 유림까지 그에게 와서 두둑하게 응원을 실어 주니 왠지 두 사람에게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자신감이 차올랐다.
한편 드레이크는 말없이 조용히 그들을 관찰했다.
유림에게 스킨십을 하는 케이의 행동에는 확실히 소유욕이 담겨 있었다. 남자라면 누가 봐도 한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그 모습을 흘끗거리는 셰인과 그의 부대원들은 빈정거리면서도 딱히 시비를 걸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케이에게 기선 제압이라도 당한 듯 기를 못 펴는 눈치였다.
유림이면 몰라도 케이에게까지 꼼짝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이해되질 않았다. 지휘관인 셰인마저 그를 슬금슬금 피해 다니고 있었다.
─괴물이야, 드레이크! 그 녀석은 괴물이라고!
입대 테스트 사고 때, 들것에 실려 갔던 하워드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됐었다.
그의 병문안을 갔던 드레이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워드는 케이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벌벌 떨며 발작을 일으켰다. 그건 명백한 공포였다. 그에게 있어 ‘애덤슨’은 델타보다도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하워드는 그의 얼굴과 다리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케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외상 후 스트레스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된 그는 결국 도망치듯 로스트 헤븐을 떠나고 말았다.
나츠는 뭔가 숨기고 있었다. 하워드의 병문안을 가자고 했었지만 그는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입대 테스트 날, 사고가 일어났던 당시 동료들과 반대편에 있었던 드레이크는 그들이 있던 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케이가 나츠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사실은 나중에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단순히 생명의 은인이라기에는 나츠가 케이를 따르는 정도가 과해 보였다. 그는 마치 하나의 종교처럼 애덤슨을 숭배하고 있었다. 혹은 어린 소녀가 앓는 풋사랑처럼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
‘브루클린의 성녀도 결국에는 일개 여자일 뿐이었나?’
맨해튼에서 본 그녀는 아마존의 여전사처럼 강인하고 아름다웠다. 양손에 은빛 검을 들고 달려들던 그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았다. 그런 그녀가 다른 평범한 여자들처럼 남자 하나에게 흔들리는 모습이 자못 실망스러웠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것이라 기대한 부분에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배신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유림이 남긴 맥주잔을 흘끗 바라보더니 남은 한 모금을 입가에 털어 넣었다. 고대 전사처럼 강인한 그의 얼굴에는 쓴 미소가 남았다.
정신없는 일과였다. 호크는 늘 그랬다.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일을 벌여 놓고는 귀찮은 건 그녀에게 하사했다. 성은이 망극하다며 구시렁거리는 건 항상 유림의 몫이었다. 오늘 회의도 결국 뒷정리는 그녀의 차지였다.
“하, 좋다.”
유림은 아이스 맥주를 마시며 기분 좋은 탄성을 내뱉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케이는 맥주를 쭉 들이켜는 그녀를 보면서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상큼한 얼굴로 아저씨처럼 행동하는 게 어설프지 않다는 점이 신기했다.
“벌써 몇 잔째인 줄 알아요?”
그는 이제 그만 마시라며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그러자 유림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다시 그의 손에서 맥주잔을 낚아챘다.
“이런 날에는 마셔야지. 아까 셰인과 우유병 얼굴 봤어? 그런 건 영구히 기념으로 남겨 놨어야 하는데.”
그녀는 맥주잔을 든 채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취한 듯 빙그르 돌며 케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츠 녀석은 천재야. 세상에 그런 묘기를 부릴 줄 알았겠냐고.”
제1 저격수 타이틀 경합 대결.
둘이 4:4로 동률인 시점이었다. 토니는 과격하게 힘으로 밀어붙였다. 나츠가 총구를 겨눌 때면 상대적으로 몸집이 큰 토니가 어깨와 팔을 써서 그를 넘어뜨리고 방해했다.
관제실에서 보던 유림은 분해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그녀가 한 소리를 하려던 참이었다. 화면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며 “뭐야!” 하고 소리쳤다.
토니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나츠의 총탄이 그의 총알을 허공에서 정확히 맞춰 떨어뜨린 것이다. 뒤쪽에서 엎드린 채 총구를 겨누고 있던 나츠는 보란 듯이 씨익 땀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토니가 충격에 머뭇거리는 틈을 타, 남은 두 마리의 델타를 연이어 격발시키며 승패를 갈랐다.
“그런데 아까 나츠에게 뭐라고 한 거야?”
“별말 안 했어요.”
“별말 아닌 게 무슨 말인데?”
“신경 쓰여요?”
그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은근히 물었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답해 줄 유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올망졸망하게 뻗은 콧대를 세우며 보란 듯이 홱 돌아서서 걸었다.
“별로.”
케이는 “흐음.”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로 쫓아와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질투한 거 아니었어요?”
“질투는 무슨.”
“나는 질투했는데.”
“누구한테?”
흥미가 동한 듯 유림이 돌아서자 케이는 긴 속눈썹을 드리우며 속삭였다.
“토니 코즈메 하사.”
“그 녀석은 내가 놀려먹은 거잖아. 날 죽일 듯 노려보던 거 못 봤어?”
“오늘 유림의 눈은 줄곧 코즈메 하사에게로 가 있던걸요?”
유림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시답지도 않은 이유였다.
“계속 신경 쓰는 게 보였어요. 상대가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유림의 관심을 받는 건…….”
“받는 건?”
“거슬리네요.”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케이는 문득 유림의 뒤를 쫓아간 소돔에서 셰인 일당과 마주쳤던 때를 떠올렸다. 기절한 셰인의 반대편에 있던 대원들 중에는 분명 겁에 질린 채 떨던 토니의 모습도 있었다.
그는 후회된다는 듯 잇새로 읊조렸다.
“역시 죽일 걸 그랬나 봐요.”
“뭐? 누구를?”
놀라서 되묻던 유림은 허공을 보는 케이를 낯선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불안한 기색을 눈치챈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웃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실로 향하는 그를 보며 유림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찜찜한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케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번 주말은 임무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호크 대령이 지시한 경호 임무, 그리고 SITF의 오베론 소탕 작전. 어쨌거나 핵심은 모델 이브였다.
“리사는?”
유림이 맥주잔을 든 채 잠잠한 집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 여기 있습니다, 소위님. 명령 대기 중입니다.
그녀는 벽면 화면에 뜬 리사의 3D 얼굴을 보면서 꺼림칙한 표정으로 물었다.
“리사 앞에서 하자고?”
왓슨과 에덴 타워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녀는 우려가 된다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케이는 안심하라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그녀는 괜찮아요. 이제 왓슨과 분리된 독립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는 리사의 시스템을 재구축했다. 에덴 타워에서 내려오는 정보와 명령은 여전히 인식하지만, 거꾸로 에덴 타워에 이쪽 정보는 보고하지 않는 체계를 설정해 놓았다.
케이는 조그마한 지구본을 돌려보듯 낙원의 네트워크를 홀로그램으로 한눈에 보여 주며 설명했다.
유림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명을 들어도 뭘 어떻게 한 건지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리사는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을 보더니 스크린을 까맣게 잠식시켰다. 그 위로 하얀 창과 함께 보고서가 떠올랐다. 먼저 이번 임무의 핵심 인물의 프로필 정보였다.
─ 모델 이브. 본명은 제인 헬렌 왓슨.
리사는 영상과 키워드를 띄우며 자료 보고를 시작했다. 대상은 낙원의 홍보 모델인 이브였다.
이윽고 그녀의 옛 사진이 나타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연한 갈색 눈동자. 콧잔등에 뿌려진 주근깨가 말괄량이 소녀를 떠올리게끔 하는 발랄한 인상이었다. 유림은 갸웃거리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지금하고 모습이 꽤 다른데? 애쉬드 블론드 머리색에 푸른 눈동자 아니었어?”
이에 리사는 그녀의 현 모습과 옛 모습을 나란히 사진으로 띄워 놓고 비교하며 말했다.
─ 수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홍채 수술로 눈동자 색을 영구히 변화시켰고, 머리카락과 피부 톤 또한 인위적으로 바꿨습니다.
유림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상업적인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수술 전이 훨씬 더 발랄하고 생기 있어 보였다.
─ 현재 그녀는 왓슨 그룹의 유일한 상속녀입니다. 램지 왓슨의 손녀딸이며 로스트 헤븐의 지분을 가장 많이 소유한 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사회에는 거의 참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램지 왓슨 회장도 손녀딸인 그녀보다 현 왓슨의 CEO를 더 신뢰한다고 합니다. 제인 왓슨 본인도 경영보다는 낙원의 홍보 모델 이브로서의 이미지 관리를 더 중요시 여기는 듯합니다.
그녀는 낙원의 요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아함, 깨끗함, 청초함을 핵심 이미지로 삼고 있었다. 또한 모델 이브로서 태양의 도시 입실론들을 대표하고 그들의 권리와 안위를 보호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유림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볼 땐 한 성깔 할 거 같은데.”
─ 제인 왓슨은 현 시점에서 낙원의 관리자와 가장 많은 접촉을 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낙원의 관리자의 경우 신비주의를 내세워 지금까지는 정체를 베일 속에 숨겼지만, 제인 왓슨이 스스로를 아담의 연인이라고 칭하고 다니는 만큼 조만간 그의 공식적인 행보가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관리자가 그녀의 생일 파티에 올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미야?”
유림이 빈 맥주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그렇습니다.
드디어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일까? 낙원의 관리자, 통칭 아담.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입실론인 메리조차도 아직 실체를 보지 못했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바이러스 치료제를 이용하여 낙원과 낙원 밖의 세계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는 악의 구원자.
케이는 상기된 얼굴로 들떠 있는 유림을 보며 차분하게 일렀다.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해요. 당분간은 눈에 띄는 행동보다 숨을 죽이고 있는 편이 좋으니까요.”
“알고 있어.”
제거 대상을 경호하는 임무라니, 그녀는 스스로의 처지가 기구하다며 툴툴거렸다. 언제쯤 이 싸움이 끝나는 것일까? 점차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모호해져 간다.
‘나는 데드캣인가? 아니면 브루클린의 성녀인가?’
선과 악의 구분 따위는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았다. 정의란 반드시 모두에게 이로울 수는 없는 법이란 걸 일찍이 깨달았다. 이곳에서 그녀는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밤의 암살자지만, 잠수함 헤벨에서의 그녀는 모두에게 있어 사랑스러운 작은 고양이였다.
유림은 천장을 물끄러미 보더니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잠자코 지켜보던 케이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곁눈질로 쳐다보자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낙원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오롯이 ‘데드캣’일 수 있다니. 가슴을 묵직하게 했던 돌덩이가 조금이나마 부식되어 가는 느낌. 유림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기대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뭐가요?”
“이렇게 있는 것.”
그의 눈빛, 손길, 냄새, 온기…… 육체적 결합이 없어도 이 모든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젠 케이가 없으면 굉장히 허전할 것 같아.”
그녀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짓이 멈칫했다.
유림은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뭔가에 집중할 때, 미간에 힘을 잔뜩 준 채 콧잔등을 찌푸리고는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소녀 같아서, 가끔 여동생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유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이트 채플에서 날 구해 준 남자가 있었어.”
그녀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붉은 눈을 한 남자였는데, 사람이었는지 안드로이드였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존재였는지는 사실 아직까지도 모르겠어.”
그만큼 가히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특보대는 날 쫓다가 괴한과 마주쳤다지? 고작 한 명에게, 그것도 무장도 안 한 상대에게 손 쓸 틈도 없이 당했다고 말이야. 난 어째서인지 그 둘이 동일 인물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유림은 다시 케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유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남자를 얼핏 봤을 때 일순 케이라고 생각했어.”
그러고는 “말도 안 되지?”라고 물으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기대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뺨에 닿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악기를 연주하듯 잔잔하고 아름답게 들렸다.
“케이였으면 했던 걸까? 애덤슨, 네가 날 구한 것이라고.”
케이의 눈동자는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동요한 기색을 억누르며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지가 너무 오래됐나 봐.”
괜히 쑥스럽기도 하고 간질거리기도 했다. 유림은 피식 웃으며 건조한 눈에 미소를 그렸다.
“그 남자를 생각하면 흥분돼.”
차갑고 냉혹한 눈이었다. 붉게 젖은 선혈의 눈동자는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포박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귀신처럼 오싹한 그의 동공 속에 갇힌 것처럼 숨결마저 얼어붙는 듯했던 느낌.
두려움에 몸은 떨렸지만 그 오싹함이 짜릿했다. 후드를 벗기고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무감각한 표정이라 느낀 게 상상이었는지, 정말로 얼핏 그의 모습을 본 것이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간밤의 꿈에 그 남자가 나왔다는 건 케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왠지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케이로부터 그 남자와 흡사한 느낌을 받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데자뷰를 보듯 언뜻언뜻 그에게서 악마처럼 잔혹해 보이던 핏빛 눈동자를 본다.
“케이.”
“네.”
이 남자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는 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유림은 그의 기품 속에 감춰져 있는 격정이 좋았다. 그녀를 범하고 싶다고 속삭이며 사악하게 웃는 미소가 좋았다. 그의 이중성은 유리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욕망을 자극했다.
유림은 살포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를 소파 위에 눕히면서 상반신에 올라탔다.
“여전히 뜨겁네, 이곳은.”
그녀는 골반을 흔들며 엉덩이로 그의 하반신을 문지르듯 비볐다. 남태평양의 바다처럼 고요히 작열하던 그의 눈이 삽시간에 태풍을 만난 듯 탁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유혹하듯 그의 손을 이끌었다. 풍만한 가슴에 닿은 손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직 성녀를 범할 기회는 남아 있는데…… 어쩔래?”
그녀가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미동 없이 가만히 있던 케이는 천천히 손을 빼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유림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중에요.”
“나중?”
그는 공허한 눈빛으로 그녀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칫 서성이는 손.
“잠시 잊었어요.”
망설이며 기울인 입술이 스스로를 저지하며 깨물었다.
“성녀는 범하는 게 아니라 지켜 줘야 하는 존재라는 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이 점차 불쾌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도도한 눈초리는 앙다문 입술 위로 그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심호흡을 하며 고요히 숨을 골랐다. 갑자기 수동적인 자세로 나오는 그의 모습에 유림은 불만스러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날 원하잖아, 나도 널 원해.”
그의 투명한 눈이 휘몰아치듯 일렁였다. 고개를 든 그의 흔들리는 망막 속에는 폭발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난 허세를 부리는 녀석이 제일 싫어! 위선자는 혐오를 넘어선 경멸의 대상이야.”
“허세가 아니에요.”
아니, 맞을지도. 분명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호크가 그 시점에 찬물을 끼얹어 준 것이.
─케이였으면 했던 걸까?
─애덤슨, 네가 날 구한 것이라고.
깨달음은 번개처럼 갑작스레 온다고 했던가. 화이트 채플에서 그녀를 구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에 납득할 수 없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 답이 떠오르고 말았다.
쓰러진 채 피투성이가 된 유림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장면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면서.
“유림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유림을…….”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혼자 강한 척 가시밭길을 헤치고 나가는 이 여자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유림의 화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비겁자의 행태로 비춰질 뿐이었다.
유림은 어금니를 물었다.
“내가 그렇게 나약한 것 같아? 중사의 눈에는 내가 한 번 자고 나면 버림받았다며 징징댈 여자로 보이나? 내가 중사에게 사랑해 달라고 구걸을 했어? 아니면 결혼이라도 하자고 하던?”
화가 나면 계급을 달아 명령조로 말하는 게 그녀의 특징이다.
“처음 만난 날부터 먼저 다가온 건 너였어. 애덤슨, 네가 먼저 내게 키스를 했고, 네가 먼저 날 자극했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뭐라고? 날 상처 주기 싫어서 자지 않을 거라고? 도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이 개자식아!”
퍽 소리와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를 보면서 유림은 기가 막힌 듯 씩씩거렸다.
겨우 주먹 하나에 저렇게 몸을 구르면서.
“날 지키겠다고?”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서는 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은 놓고 싶지 않다는 눈빛이었다.
평소처럼 생긋 웃으면서 능글맞게 키스해. 그것도 아니라면 ‘잘못했어요, 유림’ 하고 시무룩한 척 연기라도 해.
유림은 핏대가 선 목을 꼿꼿이 세우고선 케이의 변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멀쩡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응시할 뿐, 끝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얄미울 정도로 상처 하나 없는 눈빛은 오히려 무덤덤하기까지 했다.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우스꽝스런 광대가 되어 놀아난 느낌. 허탈함과 분노가 뒤섞인 울분이 심장을 꽉 조여들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짐 싸서 나가!”
고함을 친 유림은 싸늘한 축객령만 남긴 채 울분에 찬 얼굴로 돌아섰다.
에어쉽을 타고 지면에 내려온 케이는 빈손으로 털썩 하차했다. 그가 내리기 무섭게 에어쉽은 상공을 향해 떠올랐다. 그리고 하얀 구름처럼 떠 있는 주택들 사이로 쾌속 질주하여 멀어졌다. 높이 사라져 가는 에어쉽 뒤로 꼬리구름이 길게 번졌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케이는 한쪽에 심어진 가로수들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나무 기둥에 털썩 기대며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 버튼을 눌렀다.
─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정유림 소위는 계획에서 제외한다.”
─ 그게 무슨…….
통신 너머의 상대는 갑작스러운 명에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를 권속 후보에서 배제한다고 말했다.”
─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케이는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복잡해 보이는 눈동자에는 우울함이 맺혀 있었다. 해사하게 웃던 유림의 얼굴이 머릿속에 자꾸만 되감겼다.
─낙원에 온 걸 환영한다.
─죽지 마라, 중사.
─8분 31초…… 시작.
─케이가 없으면 굉장히 허전할 것 같아.
그는 주먹 쥔 손으로 가로수를 퍽 하고 내리쳤다. 답답한 숨이 연거푸 흘러 나왔다.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지가 너무 오래돼서.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백하듯 털어놓던 그녀의 모습이 바늘처럼 가슴을 콕콕 찌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를 어떻게 해야…….
“유림은 안 돼.”
─ 입실론들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대상은 그녀밖에 없습니다. 잊으신 겁니까? 정 소위뿐입니다. 게다가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녀를 안으려고 하지 않으…….
“배제해. 그녀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케이의 뜻은 확고했다. 그의 살벌하고 단호한 어조가 재고와 번복은 없다는 걸 드러냈다.
대화가 잠시 뚝 끊겼다. 그가 진심이란 걸 눈치챈 상대는 한층 조심스럽게 물었다.
─ 감염 때문에 그러십니까?
침묵이 이어지자 남자는 설득조로 이어서 말했다.
─ 강한 여자입니다. 괜찮을 겁니다.
“만에 하나 감염될 수도 있어. 만에 하나…….”
죽을 수도 있다. 현재까지 바이러스에 노출된 여성들 중 살아남는 건 3에서 4% 남짓. 특별한 여자라지만, 유림이 그 4%에 든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다. 설령 4% 안에 든다 하여도 전과 같은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델타처럼 될지도 몰라.”
아까 자칫 그녀를 안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순간의 본능을 억누르지 못했던 본인의 경솔함을 원망하며 그녀의 감염 여부를 매 분 매 초 확인하고 있겠지.
─ 처음부터 그런 것들은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변종이 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새삼스레 뭘 이제 와서 그러시는지…….
뭔가 깨달은 듯 남자는 불현듯 말을 멈췄다. 그는 입을 떼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하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 마스터, 혹시.
남자는 설마 하는 어조로 나지막이 물었다.
─ 정 소위를 진심으로 마음에 두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