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4/21)

Chapter 3

카레 향이 코를 찔렀다. 침대에 엎드린 채 자고 있던 유림은 부스스한 몰골로 기지개를 켰다. 군침 도는 냄새에 그녀는 멍한 눈으로 거실 쪽을 응시했다.

네, 다음 속보입니다. 지난달에 사망한 에덴 타워 수석 연구원이자 평의원이었던 A씨의 공석을 메꿀 후보로 노아 호크 대령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이에 대해 평의회 측이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낙원 뉴스 특별보도부장인 조셉 에반스 씨의 의견을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사가 틀어 놓은 뉴스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먹먹하게 흩어졌다. 유림은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그녀는 속옷만 입은 채 휘청휘청 침실을 나섰다.

눈을 지그시 감고 냄새를 따라가니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곡선으로 휜 그녀의 입꼬리엔 벌써부터 흐뭇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 계속 저어 주셔야 합니다.

“젓고 있어.”

리사와 케이의 말소리였다. 유림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게슴츠레 눈을 떴다.

케이가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입주한 이래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조리 기구들이 그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메이드 로봇으로 나타난 리사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 소위님께서는 난 대신 밥을 드십니다. 그리고 꼭 잡곡밥이어야 하고요.

케이는 그걸 왜 이제 말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 그냥 제가 할까요?

“카레는 잘한다고 했잖아.”

─ 바닥이 타고 있는데요.

그녀의 말에 그는 화들짝 놀라 국자로 냄비를 저었다. 리사가 옆에서 쉼 없이 종알대니 정신이 사나운 모양이었다. 리사는 국자를 냉큼 뺏어서 한 숟갈 후르르 맛봤다. 옆에 서 있던 케이는 미간을 좁게 구겼다. 잔뜩 굳은 눈초리가 제법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뜸을 들이더니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 간은 맞는데 재료가 하나 빠졌습니다.

“그게 뭔데?”

그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분명 아까는 빠짐없이 다 넣었다고 해 놓고서는 왜 이제 와 딴소리인지.

이 녀석은 홈 인공지능 중에서도 제일 멍청한 타입임에 틀림없다. 유림이 어떻게 세팅을 해 놓은 건지 성격과 유머 부분에서 극도의 짜증을 자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 사랑이 빠졌습니다, 중사님.

케이는 국자를 든 채 멍하니 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녀석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 소위님에 대한 사랑을 듬뿍 넣어 주십시오.

“시스템 종료하고 내 앞에서 꺼져. 지금 당장.”

─ 지금 그 말씀은 명령이십니까? 아니면 농담이신지? 중사님의 감정 변화 폭은 거의 미미해서 측정하기가 힘듭니다.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이나?”

─ 아 참, 중사님! 그전에 제가 제안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 소위님께서 막 기상하셨는…….

“시스템 종료라고 했을 텐데?”

─ 죄송합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현재 중사님께선 화가 나신 상태십니까?

케이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삼십 대 초반 유럽 여성의 모습을 한 리사는 자못 진지한 눈빛이었다.

─ 실은 최근 중사님의 감정 변화 데이터를 분석하는 중입니다.

“뭐가 우선순위인지조차 파악을 못하는 거 보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군. 시스템 종료가 아니라 아예 리셋을 해야겠어. 내가 직접 해 주지.”

케이가 국자를 내려놓고 팔을 걷어붙이자 리사는 정지 화면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그를 반박했다.

─ 모든 홈 AI의 중앙 시스템인 왓슨 3세는 주기적으로 낙원 전체 방화벽을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피라미드 구조로 저희를 통제 중인 왓슨 3세가 감염되지 않는 이상 저 또한 감염될 일은 없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이 분야 전문가이신 중사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메이드용인 제 몸체를 뜯고 열어 보셔 봤자 소용없습니다. 제 본체라고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는 아파트 자체에 탑재되어 있기 때문에…….

케이는 결국 리사의 머리 뒤에 위치한 전원 버튼을 꾹 눌러 버렸다. 졸지에 전원이 나간 리사는 입을 벌린 채 작동을 멈췄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케이는 그나마 속이 시원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리사는 곧바로 허공에 홀로그램 영상으로 나타나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 중사님! 제가 냄비를 계속 저으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또 국자를 놓고 계신데…….

“뮤트Mute.”13)

그는 지겹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디오가 자동적으로 꺼지고 리사는 멀뚱멀뚱한 가상 입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유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게 너무 웃겼다. 케이가 저렇게 약 올라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평소의 그는 예쁘장한 눈웃음과 입가에 걸친 느른한 미소로 그녀를 살살 애태우는 게 주특기인 남잔데, 좀 전에 리사와 투닥거리던 그는 거칠고 비뚤어진 십 대 소년 같았다.

우연히 엿본 그의 전혀 다른 모습에 유림은 낭창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케이는 움찔 뒤로 돌았다.

“일어났어요?”

유림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느새 리사와 아옹다옹하던 모습은 봄바람처럼 지운 채였다. 투명한 햇살이 그의 눈동자에 내려앉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조각처럼 반듯반듯한 얼굴 때문인지, 선이 아름다운 몸 때문인지 조리대에 선 그의 자세가 더없이 우아해 보였다. 허리춤에 묶은 앞치마가 조금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유림은 말없이 식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턱을 괸 채 기대에 찬 눈으로 냄비를 응시했다.

─ 소위님, 배고프시죠? 지금 바로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스스로 뮤트를 해제한 리사가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을 배경에 깔면서 말했다. 그릇에 음식을 담던 케이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유림만 믿고 까부는 저 메이드 시스템을 언젠가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거라고 다짐했다.

“어때요?”

케이는 능숙한 셰프처럼 식탁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유림은 한 숟갈을 크게 떠먹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그녀의 표정이 맛을 진중하게 음미하는 듯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케이는 속으로 웃으며 짐짓 느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케이.”

“네.”

그녀의 머리칼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리 동양인이라지만 동공이 저렇게 칠흑처럼 검을 수가 있나? 짙은 밤하늘이 펼쳐진 그녀의 눈동자 속엔 오롯이 그의 모습뿐이었다. 그게 묘한 두근거림을 안겨 주었다.

“다음에 또 해 줘.”

케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뺨에 발그레한 홍조를 띠운 유림의 입술엔 새콤한 곡선이 걸려 있었다.

“맛있네.”

케이의 눈길이 유림의 입술로 향했다. 입가에 묻은 카레를 혀로 할짝거리는 유림을 보며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식탁을 짚고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남은 카레를 날름 핥았다. 반쯤 감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만족스러운 듯 느른하게 웃었다.

“유림이 원한다면 얼마든지요.”

케이는 한 번 더 짧게 입을 맞춘 뒤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유림은 토끼처럼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언제부터인가 그와 하는 가벼운 입맞춤이 인사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두근거리는 애무와 타액을 섞는 행위가 짜릿하면서도 매번 기대가 될 정도로, 간격과 농도가 점점 잦고 짙어져 간다.

“애덤슨 중사.”

“네.”

“중사는 내가 좋은가?”

케이가 흠칫한 눈으로 유림을 바라보았다.

“시도 때도 없이 이런저런 엉큼한 짓은 다 하고, 심지어 더한 것도 하고 싶다며 당당하게 말하잖아.”

유림은 짐짓 괘씸하다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잠자코 있던 리사에게 불쑥 물었다.

“리사는 어떻게 생각해?”

─ 상황적으로나 행위적으로나 중사님의 행동을 분석해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호감을 표하는 남성들과 89% 일치하는 언행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요리까지 해 주고 있잖아.”

그녀는 카레에 밥 한 숟갈을 더 뜨면서 덧붙였다.

“내가 아는 사람이 그랬거든. 남자가 요리를 해 줄 땐 정말 그 여자랑 잘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밀러요?”

케이가 부드러운 눈에 호기심을 얹고 물었다. 유림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칫 정지하더니 굳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눈으로 당혹을 감추지 못한 채 긴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가 밀러를 어떻게…….”

그는 공중에서 힘없이 덜렁거리는 그녀의 숟가락을 잡아 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림이 자면서 부르던데요.”

유림은 진짜냐는 표정으로 리사를 쳐다보았다. 벽면 스크린에 떠 있던 리사는 유림의 시선을 회피하며 난감한 어조로 대답했다.

─ 가끔…… 그러십니다.

케이는 턱을 괴더니 생긋 웃으며 물었다.

“전에 만나던 사람?”

“아니.”

“그럼 짝사랑했던 사람?”

유림은 케이가 따라 준 우유를 단박에 들이켜며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밥을 먹을 때도 우유를 곁들이는 그녀의 미각 구조는 난해하고 신기했다. 마이 페이스인 유림은 고집스럽기도 하지만 엉뚱한 면도 많았다. 케이는 때때로 이 여자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싶었다.

그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질문에 굳은 눈을 일렁였다.

이해하고 싶은 걸까? 그녀를?

“오빠야.”

유림은 짧은 침묵 끝에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케이는 놀랐지만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를 응시했다. 느닷없이 자각한 묘한 감정과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는 질문에 내심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동요를 감추고 내색하지 않는 게 그의 특기라면 특기였다.

“태양의 도시에 있는 메리는 내 언니고.”

외양만 떠올려 보더라도 두 사람은 피가 섞인 친자매는 아닌 걸로 보였다. 케이의 머릿속에는 다시 일전에 보고받았던 ‘입실론: 메리’에 관한 자료가 스쳐 지나갔다.

유림과 마찬가지로 연맹군 전략국 소속 스파이인 블러디 마리아Bloody Maria. 현재 태양의 도시에서 입실론으로서 거주하고 있으며 정신감응 능력도 뛰어나다는 평이다. 그녀는 타인과 접촉하면 기억을 엿볼 수 있는 희귀한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

“케이는?”

유림은 대화의 화두를 그쪽으로 돌렸다.

“다른 형제라도 있어?”

낙원까지 와서 지옥의 용병 부대에 들 때는 누구나 말 못할 사정 한두 개씩은 있는 법. 때문에 유림은 여태까지 그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로스티아벤에 오기 전까지 케이가 뭘 했는지, 가족은 어디에 있는지 등은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또한 앞으로도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예고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터놓고 있었다. 뜻밖의 순간에 다가왔던 입맞춤처럼.

케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긴 눈으로 대답했다.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유림의 눈빛이 멈칫 일렁였다.

‘있었다’.

과거형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에 떠다니는 구름, 바람, 햇살에 떠밀리듯 일렁이던 그의 눈동자가 저물어 가는 노을처럼 흐리게 번졌다.

그는 여운이 남은 눈초리를 갈무리하며 유림 쪽을 향해 생긋 웃었다. 어둡던 눈빛엔 어느덧 예쁜 눈웃음을 걸고선,

“유림은 내가 좋아요?”

맞대응을 하듯 불쑥 물음을 던졌다.

유림은 잠시 골똘한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새까맣고 깊은 눈.

까만 눈썹과 어우러져 앙칼져 보이지만 사랑스러운 눈매다. 마주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로 향하게 될 정도로.

“좋다, 싫다로 구분하자면 좋은 쪽이겠지. 케이가 키스해 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유림은 일어나서 빈 잔에 우유를 콸콸 따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이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표정이었다. 그는 턱을 괸 채 비스듬히 그녀를 바라보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더한 게 필요해?”

유림은 술 마시듯 우유를 시원하게 들이켜며 말했다.

“군인에게 있어 연애 놀음은 쓸데없는 감정 소모야. 하지만 성적 욕구를 푸는 건 어떤 면에선 필수불가결의 행위지. 잡생각을 지워 주잖아? 더군다나 로스티아벤은 성행위를 군율로 금지한 것도 아니니까.”

군대에서 여성은 약자다. 그녀들은 남자들에게 있어 노리개 혹은 희롱의 대상이며, 잠시라도 경각심을 놓으면 삽시간에 잡아먹힌다.

대부분의 여성 장교들은 군 생활을 조금 하다 보면 크나큰 착각에 빠지고 만다. 사냥감인 본인들이 되레 사냥꾼의 위치에 서겠다고 다짐하는 것. 남자와 여자는 본능적인 욕구에 있어 발화점과 행위의 논리부터가 다르다. 여성들은 성행위를 위해 이성을 사냥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그럴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에.

남자들을 사냥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는 여장교들을 보며 유림은 생각했다. 그녀는 사냥꾼이 아닌, 사냥꾼을 도망가게 하는 맹수가 되겠노라고.

감히 전장의 성녀를 포획하겠다는 꿈조차 꿀 수 없도록, 가까이 다가오면 되레 잡아먹힐지도 모를 무서운 짐승이 되겠노라고.

그리고 그녀는 성공했다. 현재 로스티아벤 내에서 유림은 희롱의 대상이라기보단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케이에게 있어 난 어떤 존재지?”

유림은 한층 싸늘해진 눈초리로 낮게 덧붙였다.

“상관? 아니면…… 여자?”

이렇게 분위기가 급변할 때의 그녀는 더없이 매력적이다. 돌연 브루클린의 성녀 모드로 돌입한 그녀는 눈빛부터가 달라진다.

섬멸의 여신답게 날카로운 눈초리와 온정 없는 목소리. 육감적인 몸매에 타이트하게 붙은 전투복─물론 지금은 속옷 차림이었고 그게 더 마음에 들었지만─은 한 마리의 표범을 떠올리게끔 했다.

유림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쥐고 흔들어야 만족한다. 본인이 먼저 유혹해서 자극해 놓고는 작은 애무와 손길에 금방 흐느끼며 무너지고 만다.

도도한 여자.

민감하고 야한 여자.

정복하는 맛이 있는 여자.

끊어질 듯 튕기는 선들을 오가는 그녀는 확실히 남자의 속을 애태우며 즐겁게 했다.

그녀는 어떤 존재지?

“……숙제.”

유림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신이 던져 준 숙제라고 할까요?”

그녀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여성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고 하죠. 최초의 인류였던 아담에게 있어 이브는 신이 내린 축복이자 시련이었듯이.”

유림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가 머리 좋게 답을 회피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왠지 찬양받는 느낌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유림과 만나기 전부터 유림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어요. 주변에 있거든요. 브루클린의 성녀라면 숭배와 찬양부터 하고 보는 녀석이.”

“그게 누군데?”

케이는 끔찍하다는 얼굴로 눈초리를 구겼다. 리사와 싸울 때 외엔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케이가 저 정도로 진절머리를 낼 정도면 꽤 고약한 녀석인 게 분명했다.

유림은 쿡쿡 웃으며 물었다.

“그 녀석이 신이야?”

“신보단 사탄에 가깝죠.”

유림은 냉정한 눈으로 사색에 잠겼다.

‘정보국 사람인 걸까? 케이가 지칭한 사탄이란 녀석.’

연맹군 전략국의 작전부장인 밀러의 이름을 모르는 게 큰 단서였다. 해커라는 것도 그렇고, 케이는 정보국 출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흐음’ 하고 붉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유림을 보며 케이 역시 생긋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팽팽하게 맞서며 긴장감을 자아냈다. 서로 마지막 패를 테이블 밑에 숨긴 채 상대방의 수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 교환이 오고 가기를 여러 차례.

케이가 먼저 풀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눈 속에 잔잔한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숙제…… 손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여겼어요.”

눈앞의 그녀는 선악과였다. 보면 볼수록 탐하고 싶어지는, 그러나 결코 따서는 안 되는 금단의 과실.

“궁금하네요. 유림은 과연 내게 있어 축복일까요?”

그는 식탁 표면을 손끝으로 매끄럽게 쓸며 자문하듯 중얼거렸다.

“……아니면 시련일까요?”

이지러지듯 흘린 그의 눈초리엔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는 서늘하고 섬뜩한 느낌마저 드는 눈동자다.

일순, 그녀는 그의 가면 아래 숨어 있는 일면을 언뜻 훔쳐보게 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유림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식탁 위 꽃병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석연치 않은 어조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그곳에는 어느새 검게 변색된 장미가 말라비틀어진 채 꽂혀 있었다.

【집무관의 보고】

드레이크 앤더슨Sergent 27, 나츠 시게노Sergent 18 특별수사대SITF로 자대 배치 완료. 정유림 소위, 케이 애덤슨 중사는 포상 휴가 중.

모래의 도시의 울부짖는 인어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시끌벅적했다. 간밤에 있었던 화이트 채플 내 아레나에서 벌어진 소동이 고스트들 사이에서 큰 화제였다.

선술집은 어젯밤 일어난 일에 관하여 정보를 주고받는 이들로 인해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유림과 메리는 그 속에서 용케도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물론 유림이 반 협박으로 뺏은 자리였지만 메리는 불만 없다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시끄러웠지만 떠들썩한 선술집의 소음은 두 사람에게 있어 훌륭한 차단벽이 돼 주었다.

“한마디로 너에게 끌리고 있다는 거잖아!”

메리는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지르듯 외쳤다. 유림은 당황해서 ‘쉬쉬’ 하며 메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메리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너무 낭만적이지 않니? 신이 내린 숙제라니! 그런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거야?”

“뭐가 낭만적이야? 약삭빠르게 답을 회피한 거지.”

그래서 결국 내가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애매한 분위기에 휩쓸려 제대로 묻지 못했다.

가만히 보면 본인이 불리한 상황은 매번 능구렁이처럼 요리조리 잘만 피해 가는 남자였다.

유림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곁눈질을 했다.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데드캣’이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졸지에 그녀는 고스트들 사이에서 유명인이 된 모양이었다.

메리는 여전히 들뜬 얼굴로 낭만을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케이의 얼굴이 궁금하다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나중에 보여 줄게. 그것보다…….”

유림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전환할 겸, 목소리를 낮췄다.

“저번에 말한 배달원 말이야. 밀러가 보낸 거 맞아?”

“그건 왜?”

“아무래도 배달원이 밀러를 모르는 눈치야. 정보국에서 보낸 녀석 같단 말이지.”

“정보국에서?”

“기본적으로 보안과 해킹이 주특기인 기술 사병 같은데, 밀러가 보냈으면 머리보단 몸 쓰는 녀석을 보내지 않았겠어?”

유림의 말을 가만히 곱씹고 있던 메리는 뭔가 눈치챈 듯 ‘설마!’ 하고 반문했다.

“배달원이 방금 그 애덤슨 중사야?”

유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드렁한 눈빛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은데 스스로 정체를 밝힐 생각을 안 해. 정보국에서 감시역으로 보낸 건가 싶기도 하고.”

연맹군의 정보국과 전략국은 기본적으로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일은 지구상에 핵폭탄이 터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드문데, 그럴 땐 서로의 공을 가로채기 위해 그 어떤 계략을 꾸미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정보국 그 노친네들이 이 남자한테 날 어떻게든 한번 자빠뜨려 보라고 귀띔을 한 것 같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어찌나 치근덕대던지. 흥, 그런 얄팍한 수로 전략국과 밀러의 이름을 더럽힐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건가? 하여간 발상 자체가 늘 구시대적이야.”

유림은 혐오스럽다는 어조로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그런 유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리는 쿡쿡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귓불은 빨갛게 물든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그러다가 홀딱 반했구나!”

“반하긴 누가 반했다고!”

“너 말고, 그쪽 말이야.”

유림은 심통 난 얼굴로 씨근덕대다가 얼음물을 들이켰다. 메리는 속으로 웃었다. 유림은 아닌 척했지만 그 남자가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아, 궁금해 죽겠다. 천하의 데드캣을 이렇게나 들었다 놨다 하는 남자의 정체가!

자존심 강한 유림은 애덤슨 중사 앞에서 상관이라고 온갖 센 척, 강한 척, 도도한 척은 다 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굉장히 순수하고, 사랑스러우리만큼 솔직한 여자였다. 어쩌면 그 남자는 벌써 그런 유림의 매력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메리는 턱을 괸 채 하나뿐인 여동생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이쪽에서 한번 덫을 쳐 볼까?”

그녀의 제안에 유림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메리는 주위를 살피더니 탁자에 허리를 바짝 붙이고 몸을 숙였다. 유림도 그녀와 얼굴을 맞댄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두 귀는 토끼처럼 쫑긋 세워져 있었다.

“오늘 밤 애덤슨 중사를 한번 낚아 보는 거야.”

“낚는다고?”

“사실 얼마 전에 토끼 한 마리가 레이더에 포착됐거든?”

메리는 소매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유림은 사진 속 인물을 보고선 오만상을 찌푸렸다.

“평의원 녀석들은 왜 이렇게 죄다 역겹게 생긴 거야? 미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네.”

“기억의 도시 내 ‘소돔’. 사진 속 의원이 요즘 들어 매일 밤 출입하는 곳이야. 얼마 전 태양의 도시에 방문했길래 부딪치는 척하면서 살짝 엿봤지.”

메리의 눈초리가 차갑게 번뜩였다. 베일에 싸인 평의원들의 프로필은 이렇게 그녀에 의해 조금씩 유출되고 있었다.

메리는 피부 접촉을 하면 그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는 평의원들의 정체를 획득할 때마다 히트맨14)인 데드캣에게 바로 정보를 유출했다. 그 뒤 토끼 사냥은 밤의 암살자, 유림의 몫이었다.

“소돔은 사창가지만 규모가 어마어마해. 평의회로부터 공식 허가를 받아서 운영하는 만큼 보안과 관리도 철저한가 봐. 그런데 이번 표적인 평의원 말이야. 성적 취향이 좀 독특하더라.”

유림은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구역질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리는 위로하듯 난감한 미소를 보였다. 울상을 짓는 유림을 보니 변태 돼지의 알몸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암담해진 모양이었다.

“에덴 타워급의 보안은 아니겠지만, 소돔은 변수가 많은 장소야. 여태까지 해 왔던 작전 중 가장 위험한 임무가 될지도 모르겠어. 대신 오늘 토끼 사냥으로 배달원이 장미를 들고 따라오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돼지의 알몸은 보기 싫지만, 유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창가 소돔의 포주는 ‘솔로몬’이라는 자래. 성별, 출신, 나이 그 어떤 것도 확인되지 않는 사람인데, 기억의 도시는 이자가 꽉 잡고 있다나 봐. 늘 황금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평의원들과 밀접한 교류를 갖는 듯해.”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겠네.”

적에게 최대한 노출되지 않는 게 관건.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신속하게.”

메리의 속삭임에 유림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답했다. 임무는 늘 사선을 오간다. 두 사람은 기도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동시에 그린 미소가 서로에게 위안을 안겨 주었다.

“그나저나 배달원은 지금 홀로 뭘 하고 있어?”

“훈련 중. 사격장에 보냈어.”

제대로 연습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유림은 이제 포기했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한테 또 웃음거리나 되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그녀는 놀림을 당해도 바보처럼 생긋 웃고 있을 케이를 상상하며 ‘끙’ 소리를 뱉었다. 셰인 일당과 마주치지 않아야 할 텐데. 괜히 브루클린의 성녀 밑에 있다고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매번 어미 새처럼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내심과 끈기 하나는 봐줄 만한 녀석이었다.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유림은 애써 불안을 떨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토끼는 관리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모르겠어. 적어도 내가 엿본 평의원의 기억에서 관리자에 대한 건 없었거든. 내가 본 그의 기억 분량은 고작 하루 이틀 치였어. 태양의 도시를 방문하는 의원들은 입실론들 능력에 대해 보고를 받고 오기 때문에, 사전에 대비를 하고 오는 경우가 많아.”

메리는 손으로 그녀의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칼을 돌돌 말아 꼬았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 하는 그녀의 버릇이다.

“소돔이 사냥터로 안성맞춤인 이유는 화이트 채플과 마찬가지로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야. 사창가인 만큼 온갖 치부가 드러나는 곳이기에 왓슨의 눈으로부터 제외시켜 주자는 법안이 얼마 전부터 시행됐잖아.”

유림은 냉소 띤 미소를 머금더니 “멍청하긴.” 하고 중얼거렸다.

“토끼는 오늘 밤 자정을 조금 넘겨서 소돔에 방문할 거야. 그자가 찾는 대상은 늘 정해져 있어.”

메리는 메모지에 펜으로 급히 글씨를 휘갈겨 써 내렸다. 불현듯 초조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그녀를 보며 유림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출입구 쪽에 선글라스를 낀 안드로이드 집무관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메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거다. 요즘 입실론들에 대한 감시가 한층 강화된 느낌이었다. 아니면 입실론들 전체가 아닌 메리만 감시당하는 건가?

당분간은 그녀와의 만남을 자제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메리는 유림의 손에 쪽지를 쥐여 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도 기도를 하듯 유림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늘 위험 한가운데에서 홀로 외롭게 사투하는 그녀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가실 새가 없었다.

“조심해.”

“걱정하지 마.”

언제 어디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작별 인사.

애틋한 눈길을 주고받은 자매는 서로의 손끝을 어루만진 후 재빠르게 인파 속을 빠져나갔다.

한편 사격장에 있던 케이는 무료한 눈빛으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편안하게 누운 채 그저 따분한 시간이 가는 걸 기다리는 중이었다.

“케이 씨?”

빼꼼 고개를 내민 나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이는 무기력한 눈동자를 치켜떠 불청객을 올려다보았다. 방탄복과 사격 장갑을 착용한 나츠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케이 씨도 사격 연습하러 오셨나 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와 마주쳐서 굉장히 기쁜 듯했다. 아이처럼 들뜬 나츠와 반대로 케이는 감흥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소위님은 같이 안 오셨어요? 소위님께선 괜찮으신가요? 그날 케이 씨에게 안긴 채 가셔서 걱정이 많이 됐어요.”

케이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하품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츠는 그의 뒤를 쪼르르 쫓아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안 하셨으면 같이 드실래요?”

케이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나츠는 케이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키로 오리처럼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불쑥 말했다.

“혹시 그 일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케이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는 곁눈질로 흘끗 나츠를 내려다보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뭐를?”

그가 고요히 물었다. 나츠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은은한 갈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호수처럼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입대 테스트에서 본 거요. 케이 씨가 델타를…….”

“맨손으로 죽였다고?”

어느새 그의 입가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생긋 웃는 얼굴이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아서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누가 믿을까, 그 말을?”

“믿거나 말거나 말하고 다닐 생각도 없어요!”

나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호소하듯 외쳤다.

“전 그저 케이 씨와 친해지고 싶을 뿐이에요. 케이 씨가 싫어할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요.”

케이는 의아한 눈빛을 지었다. 작은 소년은 그에게 이상한 동료 의식과 더불어 경외감까지 품은 모양이었다. 그런 건 딱 질색인데, 어쩐지 귀찮은 쥐방울 하나가 생긴 기분이었다.

─ 중사님, 소위님께서 방금 막 귀가하셨습니다.

때마침 스마트 워치에서 리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출입구를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식사는?”

─ 하고 오신 듯합니다.

그의 눈에 약간의 실망감이 번졌다.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배로 빨라졌다.

“제과점에 들를 건데 혹시 케이크 드시고 싶진 않은지 여쭤 봐.”

─ 먹고 싶으니까, 십 분 내로 사 오도록.

리사 대신 유림의 목소리가 불쑥 등장했다. 케이의 입가에 곡선이 피었다.

“알았어요.”

─ 십 분이야.

지각하면 또 무슨 벌칙을 내릴지 모르는 유림이었다. 홀딱 벗긴 채 과녁판에 세워 놓질 않나, 핀으로 머리를 이상하게 묶어 놓고 토끼뜀을 시키질 않나. 군소리 없이 그녀가 시킨 대로 한 케이였지만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며 바닥을 구르던 유림의 모습은 픽 웃게 만들곤 했지만.

“오 분만 늘려 줘요.”

케이는 짐짓 애원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청했다.

─ 안 돼. 이제 9분 55초 남았어.

유림의 표정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개구쟁이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어떻게 그를 놀려 줄까 고민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알겠습니다.”

케이는 통신을 종료하고 서둘러 사격장 밖으로 향했다. 뒤에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나츠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쫓았다.

한편 건너편 사격장으로 막 진입하던 셰인과 그의 일당은 에어쉽 정거장으로 향하는 케이와 나츠를 보고선 걸음을 멈췄다. 회색 통로를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분주해 보였다. 셰인의 입가에 못된 곡선이 맺혔다. 그가 슬그머니 몸을 돌려 케이와 나츠의 뒤를 쫓자, 그의 대원들도 킥킥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약 3분 뒤, 케이와 나츠가 탄 에어쉽이 도착한 곳은 바람의 도시 지상에 위치한 상업가였다. 이곳에는 고급 레스토랑들을 비롯해 카페와 베이커리, 고급 바 등이 모여 있었다. 모래의 도시 내 선술집인 울부짖는 인어는 군인들이나 찾는 곳이지, 바람의 도시 주민들은 대개 외식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면 이곳 상업가로 향했다.

─ ‘하늘을 나는 돼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늘을 나는 돼지The flying pig’는 유림이 단골로 찾는 제과점이었다. 낙원의 대부분 상점들은 가게 자체에 내재된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며 안드로이드들이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한다. 반면 하늘을 나는 돼지는 진짜 제빵사가 직접 빵과 케이크를 구워 주기로 유명했다.

유림은 기본적으로 사람 냄새가 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종종 전 시대의 향수를 느끼게 해 주는, 낭만과 역사가 배어 있는 장소들을 찾아 헤매곤 했다.

덕분에 이곳은 브루클린의 성녀가 드나드는 빵집으로 유명해져 매출이 껑충 뛰었다는 풍설이었다. 가게 주인인 폴은 매일 콧노래를 부르며 입가의 미소를 지울 새가 없다고. 대신 그는 보답으로 유림에게 전 상품 50% 할인권을 제공해 오고 있었다.

“이게 소위님께서 좋아하시는 케이크인가요?”

하얀 생크림이 구름처럼 덮인 새콤한 딸기와 과일들로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케이크였다. 나츠는 군침을 흘리며 눈을 반짝였다. 그는 아기자기한 컵케이크와 조각케이크를 보면서 소녀처럼 볼을 발그레 적셨다.

그런 나츠를 바라보는 케이의 얼굴은 ‘얘가 도대체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진열대에 포장되어 있는 빵과 비스킷, 초콜릿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소위님께 드릴 거면 이건 어떠세요?”

나츠가 가져온 건 브루클린 성녀의 피규어로 유명한 초콜릿이었다. 양손에 쌍검을 쥐고 무너진 잔재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유림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빚어져 있었다.

“꼭 중세 영웅 잔 다르크 같아서 멋지네요.”

나츠가 웃으며 말했다. 케이는 잠시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피규어를 바라보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적을 향해 달려드는 듯한 모습.

그 위로 누군가를 겹쳐 보듯 그의 눈빛이 기억 속 안개를 걸으며 흐려졌다.

“몇 개나 살까요?”

나츠는 본인도 탐이 나는지 피규어를 하나 더 집었다. 케이는 달콤해 보이는 초콜릿 피규어를 살짝 맛봤다.

리사의 팁에 의하면 유림은 한 달에 한 번, 여성이 민감해지는 그 시기에 마치 폭주를 하듯 슈가 홀릭이 된다고 했다. 특히 그녀가 사족을 못 쓰는 건 생크림 케이크와 초콜릿이라는 정보였다.

“오, 성녀의 기사님께서 오셨는가? 그건 성녀님 팬들을 위해 특별 제작한 것이니 성녀님께는 공짜야. 맘껏 가져가게.”

가게 주인인 제빵사 폴은 껄껄 웃으며 바구니에 피규어를 한 주먹 담아 주었다. 나츠는 설인처럼 커다란 그를 보며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케이는 생과일 음료도 함께 구매했다. 나츠는 바구니에 담긴 어마어마한 양의 디저트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위님께서 이걸 다 드시는 거예요?”

사실 케이 본인도 그녀가 정확히 얼마나 먹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워낙 식성이 좋은 유림이니 이 정도는 사야 혼나지 않을 것 같다고 추측할 뿐.

─ 중사님, 3분 남았습니다.

리사가 스마트 워치를 통해 조용히 남은 시간을 알렸다. 마음이 급해진 케이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상점 밖에 대기 중인 에어쉽을 향해 뛰었다. 나츠는 제 몸집만 한 상자와 종이봉투를 품에 안은 채 그의 뒤를 쫓아왔다.

“여어, 특별수사대님들!”

에어쉽에 올라타려던 케이는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인상을 쓰며 돌아봤다. 시간 없어 죽겠는데 누가 또 발목을 잡는 건지.

제과점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 에어쉽 하나가 착륙해 있었다. 반들반들한 에어쉽 외벽에 기댄 채 서 있던 사내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로스티아벤 제복을 입고 나타난 남자들의 정체는 셰인 일당이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그들은 거들먹거리며 걸어와서는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야말로 군복을 입은 불량배 집단과 다를 바 없었다. 험상궂게 변해 가는 분위기에 나츠는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셰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츠를 훑어보더니 이내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선 조소를 머금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회피하는 나츠의 턱을 잡아들었다. “맞네, 맞네!” 셰인과 함께 온 세 명의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번에 특별수사대로 발령받은 신입 에이전트 중 하나잖아? 특별수사대는 신병을 얼굴로 뽑나 봐? 정 소위의 취향이 이렇게 비실비실한 녀석일 줄이야.”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케이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딱히 볼일이 없으면 비켜 주시죠.”

그는 부사관 한 명의 어깨를 밀치고 에어쉽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에게 떠밀린 부사관은 그가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손으로 쳐 냈다. 손에서 떨어진 상자를 본 케이는 황급히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지만 이미 한발 늦은 상황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 상자가 툭 열렸다. 상자의 옆면으로 튀어나온 케이크는 바닥에 무너지듯 쏟아졌다. 하얀 생크림은 뭉개진 채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됐다. 그걸 본 케이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이게 뭐야? 브루클린의 성녀 모형 초콜릿인가?”

셰인은 어느새 나츠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 안에서 멋대로 초콜릿을 꺼내 와작 깨물어 먹고 있었다. 머리 부분만 쏙 베어 먹은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목 없는 성녀의 초콜릿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맛있는데?”

케이는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벌벌 떠는 나츠와 달리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케이를 보며 셰인은 못마땅한 눈초리를 지었다. 반응이 시답지 않으니 놀려먹는 재미도 없었다.

그는 광대뼈를 실룩거리며 미간을 굳혔다. 입에 낀 초콜릿을 퉤 뱉은 그는 살벌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이번 화이트 채플의 아레나 사건, 거긴 원래 특보대 구역이야.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낚아채면 곤란하지. 우리 입장이 뭐가 되겠어?”

케이는 사무적인 어조로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글쎄요. ‘특보대는 그동안 델타를 이용한 도박 경기를 눈감아 주고 있었다’라는 혐의를 받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뭐?”

케이는 천천히 다가와 셰인의 귓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귓불에 닿는 서늘한 음성이 부드럽게 충고하며 말했다.

“아레나에서 오베론의 기사 하나를 포획했습니다. 코어15) 해독을 마친 후 저장된 메모리를 보니 흥미로운 영상이 있더군요. 녀석의 메모리에 중위님을 비롯한 특보대의 얼굴이 여러 차례 등장하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셰인의 얼굴이 굳었다.

‘코어 해독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퍼뜩 고개를 드니 온화한 눈빛으로 차갑게 웃고 있는 케이의 모습이 보였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름다운 악마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그런 소문이 돌긴 했다. 브루클린의 성녀가 책임지고 담당하여 합격시킨 기술직 요원은 호크 대령이 힘을 써서 데려왔을 정도로 유례 없는 천재 엔지니어라고.

“이걸 평의회에 보고해야 하나?”

케이는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연기임이 분명했다, 이쪽을 보면서 조롱하는 듯한 눈웃음을 치는 게. 셰인은 분한 눈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그는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후임들을 이끌고 걸어갔다.

이상하게 소름이 돋는 녀석이었다. 귓가에 다가온 입술만으로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오싹한 느낌을 선사했다. 딱히 살기를 느낀 것도 아닌데 흡사 냉동고에라도 갇힌 양 온몸이 떨렸다.

등 뒤에서 빤히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셰인은 굳은 턱에 힘을 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피어올랐다. 투명한 눈동자가 감정 없이 싸늘하게 그의 등을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녀석의 시야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어리둥절한 부대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쫓았다. 꽁무니를 빼는 하이에나처럼 쪽팔렸다. 부대원들 앞에서 체면만 제대로 구겼다.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졌지만, 그는 모두를 이끌고 에어쉽에 탈 때까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에어쉽 문이 닫히고서야 셰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창밖을 훔쳐 본 그는 “젠장.” 하고 욕설을 지껄였다.

‘대체 저 녀석 정체가 뭐지?’

안드로이드의 코어를 해독했다니. 그건 해당 제조업자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허세일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 버렸다.

셰인은 심호흡을 하며 세수하듯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허공을 바라보며 길게 호흡을 내쉬던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부사관에게 발끈 성질을 부렸다.

“그 표정은 뭐야! 내가 우습나?”

“죄, 죄송합니다.”

졸지에 화풀이 대상이 된 부사관은 꾸벅거리며 잘못을 빌었다. 나머지 부대원들도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꼭 다물었다.

셰인은 그제야 속이 좀 후련해졌는지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는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특별수사대의 케이 애덤슨이라. 브루클린의 성녀로도 모자라서…… 쳇, 호크 대령! 그야말로 양손에 검과 방패를 거머쥐었군.’

한편 하늘 높이 멀어지는 에어쉽을 보며 나츠는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케이크, 다시 사야겠네요.”

망쳐진 결혼식장의 흔적처럼 새하얀 케이크는 뭉개진 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케이크는 제가 다시 사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나츠는 당혹감에 젖은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케이는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를 헤집듯 집요하고도 소연한 눈초리였다. 슬픔에 잠긴 듯해 보이기도 하고, 분노에 차오른 것 같기도 해 보이는 건 투명한 눈동자가 반사하는 빛의 깊이가 시시각각 달라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케이 씨?”

케이는 깊은 사념에 잠긴 채, 나츠의 부름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뭉개진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나중에 오빠랑 결혼할 거야.

이따금 물결치는 기억 속 목소리는 가슴에 멍울을 남기듯 망치질을 하고선 수면 밑으로 되잠기곤 한다.

순백의 드레스 위에 떨어진 붉은 핏방울처럼 선연하던 그녀의 모습.

탕!

수중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핏줄기.

그 속에 하염없이 가라앉던 창백한 얼굴.

나츠는 애틋한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그리도 먹먹한 눈빛을 하고 서 있는지. 섣불리 말을 걸었다가는 그의 예쁜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흐를 것만 같아서, 차마 상념에 잠겨 있는 그를 방해할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서 맴돌며 고민하던 나츠는 손가락을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마 소위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소위님’이라는 단어에 케이의 눈이 어설프게나마 초점을 되찾았다. 그는 몽롱한 눈으로 나츠를 바라보았다. 나츠는 애써 그를 위로하려는 듯 활짝 웃었다. 비록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 소위님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그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소위님의 이름만 한 것이 없어 보였다.

“제가 얼른 가서 새 걸로 다시 사 오겠습니다!”

쏜살처럼 출발한 나츠는 베이커리를 향해 뛰었다. 케이의 눈동자가 다시 무너진 눈덩이 같은 생크림 케이크를 쳐다보았다. 그 속에는 목 없는 성녀 모형의 초콜릿이 하얀 크림에 파묻힌 채 콕 박혀 있었다.

에어쉽이 도착하고 통유리로 된 벽이 출입구로 개방되자 리사는 뻐꾸기시계처럼 보고를 올렸다.

─ 애덤슨 중사가 도착했습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들어서던 케이는 움찔 굳었다. 어디선가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복을 입은 유림이 바닥에 정좌를 하고 앉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을 꼿꼿하게 펴고 앉은 그녀는 그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초리에 남아 있는 건 바닥난 인내심이었다. 그녀는 리사가 재고 있던 초시계를 바라보더니 살벌한 미소를 머금고 잇새로 말했다.

“8분 31초 지각.”

뜨끔한 케이는 모르는 척 식탁에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그는 슬그머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폴 아저씨가 잠시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좀 늦었어요. 그나저나 유림, 이거 봤어요? 아저씨가 브루클린 성녀를 기념해 만든 초콜릿 피규어라는데.”

“봤어, 얼마 전에 메일로 보내 주셨으니까.”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다 떨어져서 블루베리로 사 왔어요. 그리고 또, 유림이 좋아하는 바나나 생과일주스도 있어요.”

“난 블루베리 안 좋아하는데.”

케이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일단 주스부터 꺼냈다.

“그럼 다시 사 올까요? 유림이 블루베리를 안 좋아하는 걸 깜빡했네요.”

케이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유림은 벌떡 일어나더니 걸어왔다. 그녀는 대뜸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유림과 눈이 마주친 케이는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유림은 팔을 들더니 그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멈칫 정지한 그의 입술이 뭔가를 말할 것처럼 살짝 벌어졌다가 망설이며 다물었다.

“왜요?”

“평소답지 않아서.”

옅은 갈색 눈동자가 풍랑에 흔들리듯 고요히 일렁였다.

“어수선하잖아, 케이답지 않게.”

케이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응시했다. 긴 속눈썹은 바람에 흩날리듯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잘게 동요하는 그의 마음처럼.

“무슨 일이야?”

유림은 반대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에 케이는 맥없이 팔을 스르르 식탁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무 일도…….”

내일 다시 해가 나고, 비가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눈사람 같은 기억의 잔영이다. 그러나 다시 눈이 오면 쌓이고 마는, 추운 날의 상흔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유림은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를 짓더니 말했다.

“안아 줘, 케이.”

그녀의 난데없는 명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즉각 팔을 벌렸다. 그는 갈대처럼 몸을 숙인 뒤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유림은 그의 너른 어깨에 기댄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각한 벌, 지금 줄 거야.”

흠칫한 케이는 돌연 불안감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뺨에 닿는 유림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곁눈질로 귓가를 살랑거리는 그녀의 머리칼과 귓불 그리고 보드라운 뺨을 차례차례 쳐다보았다. 그러던 그의 눈꺼풀이 비스듬히, 그러다가 반쯤, 셔터가 내리듯 서서히 감겼다. 그녀가 그의 뒷머리를 나긋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기분 좋았다. 평소와 달리 장난치듯 보들보들 간질이는 유림의 손길에 그는 편안한 잠에 들 듯 눈을 감았다.

유림은 그의 얼굴을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로 기울였다. 케이는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에 한쪽 뺨을 댄 채 머리를 기댔다.

“8분 31초 동안 이러고 있기.”

“이게 벌이에요?”

케이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그래. 단, 허튼수작이나 엉큼한 짓을 했다간 얻어터질 줄 알아.”

그는 아늑한 숨을 내뱉으며 미소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벌이네요.”

취하듯 중얼거린 케이는 목덜미를 간질간질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에 입꼬리를 곡선으로 끌어올렸다. 뺨에 닿는 그녀의 어깨가 그 어떤 베개보다도 편안했다. 하얀 목덜미에서 풍겨 오는 상큼한 체취도, 들락날락 내쉬는 그녀의 숨결도…….

이렇게나 따뜻하다.

몽글거리는 감각에 취한 듯 기분이 몽롱해져 갔다.

“사실.”

케이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처음에 샀던 케이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그의 목소리는 마치 녹아서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아쉬워하는 소년처럼 침울했다.

“유림이 제일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는데.”

“괜찮아, 블루베리도 한번 먹어 보지 뭐.”

“나는 하얀색이 싫어요.”

별안간 그가 잠긴 목소리로 처연히 속삭였다.

“유리처럼 약하고 다치기 쉬운 색이거든요.”

“나도 싫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 것인지 유림은 시니컬한 어조로 말했다.

“모델 이브인지 뭔지가 허구한 날 광고에서 하얀 원피스만 입고 나오거든. 재수 없어.”

그녀는 조롱 섞인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실제로는 성격이 아주 더럽다던데 요정이니 천사니 웃기고 자빠졌네.”

“그러는 유림도 성녀잖아요.”

“난 괜찮아.”

“왜요?”

“난 성녀가 아닌 걸 온 세상이 알고 있잖아. 걘 아니고.”

케이의 입술 사이로 쿡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낙원의 요정은 개뿔. 낙원의 마녀지, 그게.”

그녀의 마지막 한 방에 그의 입매가 비실 풀렸다. 그는 이내 못 참겠다는 듯 통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나직한 울림을 담은 시원한 웃음소리에 유림의 눈썹이 의아함을 담고 꿈틀거렸다. 이마를 짚고 선 그는 이제 눈물까지 빼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유림은 앙증맞은 코를 찌푸리더니 ‘흥!’ 하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그런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너무 웃은 나머지 가슴을 들썩였다.

속살을 에어 내고 아로새겨 묻은 기억.

그것은 시시때때로 소슬바람처럼 불어와 가슴 한 귀를 적셨다. 살갗을 파고드는 칼날에 아물 날이 없던 상처는 무던히 덧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햇살을 머금은 듯 보송보송한 그녀의 온기가 모든 것을 품에 안은 채 소각시켜 주고 있었다.

가녀리지만 단단한 보호막.

그는 유림을 완전히 품에 결박하여 가두면서, 그녀의 향기 속을 파고들었다.

─ 8분 31초 지났습니다, 소위님.

리사의 목소리가 불쑥 정다운 공기를 깨뜨리며 등장했다.

“아, 그래?”

보고를 받은 유림은 케이를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미련 없이 떨어졌다. 홱 돌아선 그녀는 성큼성큼 식탁으로 향했다. 황당한 듯 허공을 빤히 쳐다보던 케이는 텅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돌연 완벽했던 그림이 퍼즐처럼 산산조각 난 기분이었다.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케이는 반듯한 이마를 찌푸리며 이 허망한 기분의 원흉, 리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케이의 섬뜩한 눈초리를 본 리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변명했다.

─ 죄송합니다, 중사님. 하지만 벌칙은 벌칙입니다. 8분 31초가 끝나는 순간이 사실 이번 벌칙의 백미입니다.

유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웃음이 구구절절 얄미운 소리를 해 대는 리사를 향한 것인지, 입가에 잔뜩 묻은 생크림을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미?”

─ 일명 ‘상실감 안겨 주기’ 벌칙입니다.

케이의 창백한 얼굴에 잠시 충격이 어렸다.

쇼크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의 눈가가 점차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실체가 없는 것 따위한테 이렇게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어 오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유림.”

“왜?”

“오늘 리사의 시스템을 리셋시킬까 하는데 괜찮아요?”

생크림 케이크에 초콜릿을 찍어 먹던 유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스템 리셋은 안드로이드나 개인 홈 AI에게 있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혀를 끌끌 차더니 리사가 가엽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리사 역시 당황한 어조로 재빨리 끼어들었다.

─ 중사님, 농담이었습니다.

“요즘 그녀가 제 명령을 너무 우습게 보는 듯해서요.”

─ 일전의 교란 작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억울합니다. 제가 미처 실행하기도 전에 윗선이 개입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케이의 눈이 흠칫 흔들렸다. 식탁에 앉아 가만히 듣고 있던 유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교란 작전이 뭐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케이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 리사를 노려봤다. 저걸 지금 농담이라고 한 건지, 아니면 제 딴에 복수라고 한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인 주제에 인간처럼 성격이 형성되고 재치가 늘어 가고 있다는 점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수상쩍다는 듯 둘을 빤히 쳐다보던 유림은 거실로 내려와 가볍게 발을 내디뎌 걸었다.

“뭔데? 둘이 대체 뭔 작당을 꾸미는 거야?”

그녀는 냅다 케이의 등에 올라타더니 방심한 그의 목을 휘감기 시작했다.

“유림?”

그녀가 매번하는 기습 공격쯤은 눈 감고도 알아채는 케이였지만 이번에도 짐짓 놀란 척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당황한 연기를 펼쳤다. 그에 신이 난 유림은 즐거워하며 아이처럼 그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녀는 돌연 그의 귓불을 깨물며 말캉한 혀를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돌발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듯 케이의 몸이 흠칫 굳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녀의 육탄 공격에 그는 무너지듯 바닥을 짚으며 무릎을 꺾었다.

유림이 케이의 귀를 입에 머금고 세차게 빨자 그의 잇새로 잠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격한 반응은 쉽게 보이지 않는 케이인지라 그녀도 의외였는지 눈이 반짝이며 커졌다.

유림은 케이의 어깨를 짚더니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아 그의 정면으로 안겼다. 케이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소파 위로 털썩 누웠다. 그의 위로 말 타듯 올라탄 유림은 그가 입은 셔츠를 찢어 내듯 벗겼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혀끝으로 간질이듯 애무하기 시작했다.

케이는 탁해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턱에 힘을 준 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자극하면 참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말하라고. 교란 작전이 뭔데?”

유림은 이를 세우며 그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더니 흡입하듯 빨아들였다. 케이는 움찔거리며 상체를 들썩이다 소파 가죽이 뜯어져라 움켜쥐었다.

“유림하고…… 단둘이 있고 싶어서.”

그녀는 그의 쇄골을 어루만지며 고양이 같은 눈으로 “그래서?” 하고 되물었다. 그의 잇새로 억누른 숨결이 터지듯 새어 나왔다.

“리사에게 유림이 새로운 팀원을 충당하는 걸 늦춰 보라고 명령했어요.”

케이는 결국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놓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는 민망한 듯 고개를 홱 외면했다. 유림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깔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더니 기분 좋은지 눈을 감았다.

케이는 굳은 눈으로 유림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른한 자세로 입술을 핥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케이.”

“네?”

둥글고 탱글탱글한 그녀의 가슴이 복부에 닿아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스프링처럼 튕겨 나갈 듯한 욕망의 끈을 가까스로 붙잡은 채 억누르며 대답했다.

유림이 소곤거리며 뒷말을 속삭였다.

“……아이.”

그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던 케이의 눈이 점차 커졌다.

“……에스, 에스.”

Kiss.

유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얼마나 참았는지 격하게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는 케이의 손은 벌써 그녀의 가슴을 거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사실 그조차도 놀라운 이성으로 내리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유림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탁한 눈빛으로 미칠 듯 흔들리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그녀는 입술을 핥는 그의 혀에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림의 모습에 케이의 눈에도 예쁜 곡선이 걸렸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녀의 입술 사이를 깊게 파고들었다. 그는 뺨과 목에 잔 키스를 남기며 뜨거운 숨결로 애무를 이어 갔다.

“하아, 케이…….”

유림은 녹아 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비틀었다. 귓가와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의 움직임만으로도 구름 위에 누운 듯 황홀함이 번져 왔다.

─그러다가 홀딱 반했구나!

문득 뇌리를 스치는 메리의 목소리에 유림의 눈이 일렁였다. 피식 웃고 있는 케이의 얼굴이 보였다. 이 얄궂은 남자는 몇 차례 그녀의 입술과 가슴을 잡아먹듯 삼키고 탐하더니 벌써 여유를 되찾은 모양이었다.

아닌 척해 봤지만 역시 메리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의 손길과 입술에 길들여져서는, 하루라도 예쁨을 받지 못하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고양이처럼 이렇게 가르랑대고 있으니.

케이가 투명한 눈동자에 은근한 미소를 걸고 이름을 부를 때면 어느새 가슴이 파도치듯 설레었다.

─유림은 내가 좋아요?

유림은 앙칼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사과를 베어 물듯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놀란 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심술궂은 눈초리를 지으며 작은 복수를 다짐했다.

‘신이 내려 줬다는 그 숙제, 어디 한번 잘 풀어 보시지.’

그런 유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는 그녀의 부푼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뭔가 조금 더 갈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천천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는 첼로처럼 듣기 좋은 울림의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8분 31초 벌칙, 한 번 더 해요.”

“엉큼한 짓 금지인데?”

“그 조항은 삭제하고요.”

“그럼 벌칙이 아니잖아, 바보.”

쉽지 않네.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언제 바꿔 놨는지 무음 모드가 된 리사가 벽면 스크린에서 종알거리는 게 보였다. 케이는 여전히 리사에 대한 분노가 풀리지 않았는지 뾰족한 시선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저 멍청한 게 요즘 직분을 망각하고 누가 ‘마스터’인지조차 잊은 모양이었다.

그는 털썩 그녀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냥 이렇게 온기를 안고 싶을 뿐.

오늘따라 나사가 하나 풀린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유림은 케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자포자기한 얼굴로 바람 빠지는 듯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한가로운 일상이었다.

밤이 오기 전 한낮의 짧은 평화.

서로의 숨소리와 온기만이 오롯한 다정한 오후.

유림은 케이의 등을 한 아름 감싸 안으며 나긋이 속삭였다.

“8분 31초…… 시작.”

어느새 깊은 밤 자락이 내린 시각.

숨죽이듯 낮춘 목소리가 조곤조곤 어둠 속에서 시를 읊듯 속삭였다.

사랑은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가치와 품격을 부여하지.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거든. 그래서 날개 달린 천사 에로스는 장님으로 그려져 있는 거야.

케이는 소파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여성의 목소리를 음미하듯 듣고 있었다.

때문에 사랑에 빠지면 분별력이 사라지고 말아. 날개는 달려 있는데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조급함에 서두르기만 하거든. 그래서 큐피드가 어린애잖아. 왜냐면 선택을 할 때마다 그는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간단 말이야.

오디오북 소리였다. 작품 제목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케이의 시선이 슬쩍 유림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앉아 있는 그의 허리를 꼭 감은 채 순수한 소녀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강물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이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헬레네의 대사군.”

밤새 들은 그는 지겹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 예, 중사님. 셰익스피어의 작품 『한여름 밤의 꿈』에는 사랑에 관한 명대사가 많습니다. 중사님께서도 뭔가 느끼는 바가 없으십니까?

“글쎄. 유령의 군주가 왜 하필 요정왕 오베론을 자칭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외에는.”

리사는 한숨과 같은 숨소리를 자아냈다. 케이는 따분한 눈빛으로 벽면 스크린에 떠 있는 큐피드 사진을 쳐다보았다. 눈가리개를 하고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있는 사랑의 신 에로스. 그가 당기고 있는 활시위 끝 화살촉이 그에게는 섬뜩한 납 덩어리로 다가왔다.

─ 눈먼 날개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하지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못합니다. 어린애처럼 허둥대고, 그 사람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져 논리적인 사고 따위는 할 수 없게 된답니다.

케이는 비웃듯 조소를 머금었다. 셰익스피어는 참사랑을 말하지만 그에게 있어선 유치하게 들리기만 했다. 결국 사랑은 인간을 어리석은 존재로 만든다는 거 아닌가?

‘시인과 광인과 연인은 모두 미치광이들이다. 꿈과 착각에 빠진 채 머릿속은 끝없는 상상에 가득 차 있다…….’

작중 비유를 떠올린 케이는 알 듯 모르겠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는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거머쥐려는 듯 허공에 팔을 뻗었다. 그러나 빈손은 먼지만 일으키고 돌아왔다. 그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눈초리로 체념했다.

그때 잠결에 움직인 유림의 손이 그의 손을 낚아채며 잡았다. 그녀는 케이의 팔을 가슴팍으로 끌어안으며 인상을 쓴 채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케이.”

그런 유림을 멀뚱하니 내려다보던 케이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결코 그녀에게는 보여 주지 않는 차갑고 무미건조한 눈초리. 그러나 서늘한 눈초리를 누그러뜨리며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리는 그의 손길에는 장난기가 다분히 배어 있었다.

─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중사님을 미치게 만드는 그 감정이.

“미치게 하는 감정?”

리사는 케이가 불쾌해하며 반박하기 전에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 저는 궁금합니다. 사랑이란 게 어떤 감정일지. 아마 저 같은 인공지능은 평생 느낄 수 없겠지요.

케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리사를 바라보았다.

평생.

프로그램에 불과한 그들에게 있어 과연 삶이란 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정녕 일생이란 의미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일까? 삶의 종결은 죽음으로 매듭지어지는데 그들에게 있어 탄생과 죽음이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는지. 어찌 보면 그 자신이나 그들이나 덧없는 삶에 흐르는 시간만을 무심히 지켜보는 존재라는 점에서 닮아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사념에 빠져 있는 사이, 리사는 분석한 자료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 유령의 군주와 요정왕의 공통점을 굳이 꼽아 보자면, 둘 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라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리사가 화면에 띄운 자료를 본 케이의 눈이 굳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키며 혼란스러운 눈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 동일 인물이라는 확증은 없습니다. 그러나 메타포를 근거로 한 추론에 의하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케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황당하다 못해 아주 발칙하기까지 했다. 그는 냉소를 머금은 채 아깝다는 눈빛을 지었다.

‘코앞에서 놓쳤군.’

유령의 군주, 그래서 오베론이란 이름을 사용했나?

그때 유림이 몸을 뒤척이며 눈꺼풀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든 그녀는 그의 허리를 안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던 케이는 앉은 자세로 미소를 지었다.

“일어났어요?”

“지금 몇 시야?”

훤할 때 잠든 것 같은데 어느새 창밖은 컴컴한 하늘이었다.

“자정이 넘었어요. 더 자요.”

“자정?”

유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눈을 비비더니 굴러 떨어지듯 바닥에 미끄러지며 앉았다. 깜짝 놀라 그녀를 잡아 주려던 케이의 손은 허공을 배회했다.

유림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펴더니 엉덩이를 하늘로 든 채 스트레칭을 했다. 복숭아처럼 볼록한 그녀의 엉덩이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케이는 왠지 모르게 허전해진 손을 응시했다.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고즈넉한 시선을 던지며 턱을 괴었다. 그녀는 또 팬티와 브라만 한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유림의 그런 모습은 익숙하다 못해 미소를 머금은 채 감상해 줄 경지에까지 오른 상태였다.

유림은 금세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마치 운동이라도 하러 가는 듯한 차림새다.

“나갔다 올게.”

리사가 예정에 없던 스케줄에 질문을 던졌다.

─ 어디에 가십니까?

“모래의 도시. 일 분 뒤 출발할 수 있도록 에어쉽 대기시키고.”

─ 알겠습니다.

유림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까만 캡 모자를 눌러쓰고 머리를 높이 묶었다. 케이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하얀 바지에 검은색 티셔츠. 그도 유림만큼이나 무채색 옷을 즐겨 입는 편이었다.

“훈련소에 가는 거예요? 이 시간에?”

“땀 좀 빼고 오려고.”

케이는 유림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웃음 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나도 해 줄 수 있는데.”

“뭘?”

“땀 빼게 해 주는 거요.”

그의 손이 살그머니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배꼽을 만지며 슬금슬금 기어 올라온 손은 그녀의 가슴 둔덕을 감싸 쥐었다. 귓바퀴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뺨을 애무하는 입술. 가만히 서 있던 유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어느새 속옷 안까지 침범해 가슴 정점을 굴리는 그의 손가락 장난에 퍼뜩 정신이 든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케이!”

그가 쿡쿡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유림은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더니 홱 돌아섰다.

“다녀와요.”

통유리로 된 벽면 출입구가 미닫이처럼 열리고 에어쉽이 발동하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새침하게 눈을 흘기는 것 외에는 말 한 마디 없이 가 버렸다.

유림의 에어쉽이 검은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 케이도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에어쉽 준비시켜.”

─ 중사님께선 어디를 가십니까?

그는 뻔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리사를 응시했다. 그녀가 나가고 바로 뒤따라가는 걸 보면서 그렇게 눈치가 없냐는 듯이.

리사는 그제야 알아챈 듯 재빨리 허공에 GPS를 띄웠다.

─ 정유림 소위의 위치를 추적합니다.

이윽고 홀로그램으로 뜬 낙원의 입체 영상도에는 유림의 에어쉽이 이동하는 경로가 붉은 점으로 나타났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케이는 그녀의 이동 경로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 황금의 바벨탑, 기억의 도시로 향하고 있습니다.

역시 모래의 도시로 가는 게 아니었다. 어쩐지 이상했다. 좀 전에 유림의 몸을 더듬었을 때, 그녀의 허리 안쪽에 권총과 단검이 장비돼 있었다. 훈련장에 가는 것치고는 꽤 중무장을 한 차림새지 않은가? 게다가 재킷 안쪽에는 방탄 티셔츠까지 입고 있었다.

‘피의 마리아가 내린 지령인가?’

오늘 모래의 도시에서 만난 메리가 뭔가 임무를 전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곧바로 유림의 뒤를 쫓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가 탄 에어쉽이 쏜살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낙원의 환락가 ‘기억의 도시’는 바벨탑을 모델로 건축됐다. 그래서 주민들은 기억의 도시를 ‘황금의 바벨탑’이라고도 불렀다.

기억의 도시는 에어쉽을 탄 채 상공에서 내려다볼 때부터 눈이 부셨다. 화려한 불빛과 황금 도벽은 마치 보물을 숨겨 놓은 전설 속 고대 도시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비감을 자아냈다.

당신의 그리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억의 도시로 오세요! 향수로 구멍 난 가슴을 기쁨으로 채워 드립니다.

번쩍거리며 등장한 입체 영상 광고가 번갯불처럼 스치듯 눈앞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팔베개를 한 채 벌렁 누워 있던 유림은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의 도시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건 카지노와 유흥업소들이었다. 밤낮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유동 인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인력이 안드로이드로 이루어져 있다.

기억의 도시에 착륙하기 위해서는 바벨탑 전용 에어쉽으로 바꿔 타야 한다. 전용 에어쉽들은 몸체가 전부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관광객들에게 화려한 도시의 외관을 구경시켜 주기 위해 주변 하늘을 한 바퀴 돈 후 승강장에 정차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에어쉽이 부유하는 허공 위에선 폭죽이 터지듯 광고 영상이 끊임없이 등장하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쾌락의 거리 소돔에서, 현재 특별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낙원의 관리자, ‘아담’18)이라면?” 단 하룻밤, 낙원의 왕이 될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유림은 게슴츠레한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형형색색 불꽃들에 휩싸여 멀어지는 광고 영상 속에 ‘소돔’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는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시각 오전 00시 15분.

유림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바람의 도시 쪽을 돌아보았다.

과연 케이가 쫓아올까? 졸린 듯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하여간 야한 짓 할 때 빼고는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의욕도 없고 사내다운 기운도 없고. 그러면서도 그 녀석과의 힘겨루기에서는 묘하게 늘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유림은 복잡한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오늘 토끼 사냥은 어찌 보면 무리수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정도로 급조된 계획.

유림은 또렷한 눈동자에 예리한 단검처럼 살기를 머금었다. 불가능한 임무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게 히트맨인 그녀가 할 일이다.

에어쉽은 황금의 바벨탑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질주하며 하강했다.

기억의 도시를 세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신기루, 쾌락 그리고 안드로이드’라고 말할 수 있다. 기억의 도시는 크게 ‘소돔’과 ‘고모라’로 나뉘는데, 쾌락의 거리라 불리는 소돔은 사창가였다.

낙원에서는 실제 주민들이 성 접대부로 일하는 게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소돔에서는 성 접대용 안드로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혹은 가상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성적 쾌락을 공급했다. 처음에는 ‘로봇과의 섹스’가 웬 말이냐며 뉴스와 미디어가 들썩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잡음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히려 안드로이드 매춘부에 중독된 남자들은 더 이상 실제 애인이나 아내를 찾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돔의 서비스는 성공적이었다.

한편 환락의 거리 고모라는 합법적 도박이 가능한 카지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낙원에서 유일하게 도박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연중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이곳의 딜러나 웨이터들도 소돔과 마찬가지로 모두 안드로이드들이었다.

“어서 오세요! 소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첫 방문이시군요? 최초 방문객에게는 무료 체험 1회 쿠폰을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가 나와 유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림은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남자는 황토색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황금색 코인들이 가득했는데, 각각의 코인들은 태양, 달, 바람, 파도, 꽃, 화로 모양 등이 새겨져 있었다. 가만히 코인들을 들여다보던 유림은 눈치를 살피며 낚아채듯 화로의 문양이 새겨진 코인을 집어 들었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유림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가 비켜선 길 뒤쪽을 응시했다. 마치 고대 로마의 좁다란 골목길처럼 생긴 곳이었다. 음침하지만 비밀스러운 마굴처럼 보이는 골목이 나름 흥미를 끌었다.

유림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서 있는 거리는 레스토랑과 여러 가지 관광 상품들을 파는 상점들로 밝고 떠들썩했다. 반면 남자가 서 있는 곳 뒤쪽은 시간이 멈춘 듯 썰렁하니 적막만이 흘렀다. 간혹 사제복을 입은 자들이 종종걸음으로 휙휙 지나다닐 뿐이었다.

사실 쾌락의 거리 소돔으로 통하는 입구는 거리 곳곳에 있었다. 빛이 닿는 곳은 고모라,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거리는 모두 소돔으로 통하기에.

“신의 은총을.”

남자는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런 그를 스쳐 지나가는 유림의 눈초리는 무심했다.

좁고 어두운 골목에선 어디선가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멸망한 도시 폼페이의 사창가 골목을 재현해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벽면에는 낙서와 기괴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고, 바닥에는 남자의 성기를 그려 놓은 부조가 화살표처럼 방향을 일러 주었다.

멀리 불빛이 흔들흔들 손짓을 하듯 아른거렸다. 그곳에는 붉은 두건을 쓰고 신전의 사제 복장을 한 여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인들의 손등에는 화로 문양의 문신이 새겨진 게 보였다.

유림은 그들에게 황금색 코인을 건넸다. 그러자 여인들은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들 뒤에 위치한 거대한 문이 웅장한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베스타16)의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황금색 코인은 소돔의 신전을 이용할 수 있는 입장권 내지 통행증이었다.

소돔은 낙원에서 안드로이드를 생산하는 기업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각각의 신전들을 체인점처럼 상인들에게 내주고 서로 경쟁해 고객을 유치하게끔 했다.

유림이 도착한 곳은 화로의 여신을 테마로 한 베스타의 신전이었다.

출입구는 고대 로마의 신전 입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유림은 그들을 따라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이 끼익 하고 닫히자 안쪽에서 타닥거리는 화롯불이 시야를 밝혔다.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실내를 구경하던 유림은 번쩍이는 빛에 깜짝 놀랐다. 눈부신 섬광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유림은 눈을 질끈 감고 팔로 빛을 가렸다.

잠시 후 다시 어둠이 깔리자 그녀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쳐다봤다. 실내가 어느새 드넓은 우주처럼 암흑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 베스타의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타입을 선택해 주십시오.

반짝이는 은하수와 행성들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성인 남녀들이 헐벗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가상 시뮬레이션이었지만 실제 사람과 다름없을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였다. 그들을 훑어보던 유림의 눈길이 잠시 한 남자에게 머물렀다.

─ 이십 대 남성, 갈색에 반곱슬 머리카락, 갈색 눈동자, 피부색 밝음, 신장 6.13피트, 어깨가 넓고 호리호리한 체형, 얇고 긴 눈초리, 부드러운 호감형 인상으로 하시겠습니까?

깜짝 놀란 유림은 멍한 눈으로 주춤거렸다. 허공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는 케이를 떠올리게끔 했다.

“안녕하세요?”

듣기 좋은 울림의 낮은 목소리. 설마 이것도 취향을 분석해서 빚어 낸 시뮬레이션인가?

─ 고객님께서 매력적이라 생각하시는 남성의 보이스를 재현했습니다. 어떠십니까? 만족하시면 ‘다음’을 터치해 주십시오.

케이를 닮은 가상 속 남자는 눈초리를 휘며 생긋 웃었다.

‘완전 그 녀석하고 판박이잖아.’

유림은 섬뜩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원하시는 인터코스 유형17)을 선택해 주십시오. 가상현실 수면형과 안드로이드 체험형이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로봇과 성행위라니. 광고를 보긴 했지만 실제로 와서 체험해 보니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할 생각도 없지만, 어쩐지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는 심정이다. 유림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드로이드 체험형으로.”

─ 예, 감사합니다.

잠시 후, 정면에 다시 여사제들이 등장했다.

“이쪽입니다.”

어느새 우주처럼 펼쳐져 있던 은하 공간은 사라지고, 고대의 신전 내부 모습이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대리석 기둥들이 높다랗게 세워진 가운데 여사제들은 자그마한 쪽문을 열어 주며 등불을 내비췄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유림은 어색한 몸짓으로 모자를 고쳐 쓰고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안쪽으로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벽에 걸려 있는 등불들은 코앞을 겨우 비춰 줄 만큼 불빛이 약했다. 양옆으로 오래된 나무 문들이 보였다. 겉보기엔 이래도 내부는 최첨단 시설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총총걸음의 여사제를 따라가던 유림은 걸음을 멈췄다. 출입문 위에는 푸른 보석으로 된 조개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 바로 옆방을 손으로 지목했다.

“이 방으로 하고 싶은데.”

그녀를 안내하던 안드로이드 사제는─마치 진짜 사람인 양─ 의아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는 인간의 감정을 읽고 흉내 내는 능력이 탁월한 듯했다. 군에서 보던 안드로이드 집무관들이나 헌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감정 교감 능력이 아주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는 로봇들이었다. 안드로이드인 걸 몰랐다면 진짜 사람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푸른 보석의 방들은 VVIP실들로 현재 모두 예약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선택하신 푸른 초승달 방은 다음 예약 손님 때문에 앞으로 이십 분밖에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상관없어.”

유림은 나무로 된 문짝을 톡톡 치며 대답했다.

“이십 분이면 충분하니까.”

결국 그녀는 푸른 조개 방 옆에 위치한 푸른 초승달 방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밖이 예스러운 고대 로마 풍인 것과는 달리 내부 인테리어는 현대적이고 심플했다. 기본 설정으로 되어 있는 방은 전체적으로 하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바닥은 유리처럼 글라스 소재였다. 물론 본인이 원한다면 각양각색의 주제에 맞춰 내부 인테리어 역시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방에 들어온 유림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더니 복습을 하듯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밤 00:30분, 화로의 여신, 푸른 조개 방, 환기구.’

낮에 메리가 급히 휘갈겨 써 준 메모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등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남성 안드로이드였지만.

그는 좀 전에 그녀가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 본 녀석이었다. 갸름한 얼굴,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투명한 커피색 눈동자에 감도는 은은한 미소. 그는 멍하니 서 있는 유림에게 다가오더니 거리낌 없이 그녀를 휘감듯 껴안았다. 그리고 귓가를 어루만지듯 애무하며 속삭였다.

“시작할까요?”

게다가 말투마저 소름 돋을 정도로 케이와 흡사했다. 어느새 그에게 안긴 채 침대에 눕혀진 유림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흘끗 유림을 내려다본 그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유림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는 느른한 미소를 짓더니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왔다. 그리고 그녀의 마스크를 벗기며 입을 맞추려 하자, 유림은 경직된 몸으로 그의 손을 쳐 냈다.

“긴장한 거예요? 걱정 말아요.”

메리도 엿볼 수 없는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순간순간 상대의 신체적 반응을 수집하여 조합한 행동 패턴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유림은 심히 불쾌함을 느꼈다.

“따라 하지 마.”

“네?”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던 안드로이드는 ‘퍽!’ 소리와 함께 주먹을 얻어맞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유림은 얼얼한 주먹을 허공에 털면서 쏘아붙였다.

“그 녀석인 척 흉내 내지 말라고.”

그녀의 짜증에도 그는 금세 바닥을 짚고 일어서더니 생긋 웃었다.

“이런 걸 좋아하시는군요. 그럼 이런 테마는 어떠세요?”

실내조명이 어두워지고 벽면에서는 해괴한 기구들이 등장했다. 쇠사슬과 채찍, 흡사 고문 기계를 닮은 듯한 성기구들. 모자로 가린 유림의 미간에 일자 주름이 깊게 패었다.

아무리 정교한들 로봇은 로봇이었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상대에게 바로 방긋거리며 웃는 그를 보며, 유림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됐으니까 나가.”

스스로 수갑을 채우던 안드로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가 있으라는 말 안 들려?”

“다른 상대를 불러 드릴까요?”

천진난만한 게 아니다. 그는 그저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 가엽게 여길 이유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져 왔다.

유림은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그녀는 흘끗 천장을 바라보았다. 모서리 쪽에 환풍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안드로이드에게 출구를 가리키며 명했다.

“잠깐 나가 있어. 한 십 분 정도면 돼.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는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출입문 밖으로 그가 사라지자 유림은 벌써부터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적 소모가 컸다. 소돔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영리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실존하지 않지만 마치 실존하는 듯한 대상을 눈앞에 대동시켜 의식과 이성을 흐릿하게 만든다. 염원을 현실화시킨 듯한, 그러나 상대는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안드로이드다.

낙원의 주민들이 소돔에서 본인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푸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건실한 사회적 위치와 그간 쌓아 온 덕망을 잃지 않기 위해 숨길 수밖에 없었던 추악한 음욕을 유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곳.

소돔은 그런 장소였다.

오늘의 사냥감인 토끼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겠지.

‘현재 시각 오전 00시 35분.’

토끼 굴로 이동할 시각이다. 유림은 의자 하나를 가져와 밟고 올랐다. 환풍구 덮개를 올린 그녀는 가뿐한 몸놀림으로 통로 안을 향해 기어 들었다. 몸집이 큰 사람은 들어올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은 통로였다. 엎드린 채 기어서 옆방으로 온 유림은 덮개 틈 사이로 실내를 내려다보았다.

안드로이드가 셋, 목표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씻고 있는 모양이군.’

그녀는 아래쪽 방 환풍구 덮개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안드로이드들이 즉시 반응하여 위를 쳐다보았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유림은 전광석화와 같이 가운데 녀석을 덮치며 뛰어내렸다. 그녀는 전투용 장갑을 낀 손으로 단숨에 그의 목뒤를 찢어 코어와 연결된 전선을 뜯어냈다. 수액을 내뿜으며 치직거린 안드로이드는 입을 뻐끔거리며 쓰러졌다.

뒤이어 그녀는 나머지 안드로이드들의 안면에 양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안구에 검이 박힌 그들은 그 와중에도 저항하려는지 팔을 뻗어 유림의 목을 졸랐다. 그러자 그녀는 그들을 잡은 채로 몸을 뒤집어 회전시켰다. 물구나무서듯 공중에 높이 뜬 그녀의 다리가 배후에서 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리고 동시에 안구에 박아 넣었던 칼자루를 손바닥으로 한층 더 깊게 꽂아 넣었다.

녀석들의 머리통이 깨지면서 우윳빛 수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제야 그들은 인형처럼 너부러지며 쓰러졌다. 유림은 쿨럭거리며 목을 손으로 주물렀다. 한꺼번에 셋을 소음 없이 제압하려니 아무리 그녀라도 꽤 버거웠다.

유림은 가쁜 숨을 고르며 단검을 회수했다. 허리춤에 다시 칼을 꽂아 넣던 그녀는 제압된 안드로이드들을 재차 확인하다가 눈이 커졌다.

물론 로봇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외형은 10세에서 12세 미만의 소년들이었다.

그때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끊겼다. 유림은 벌떡 일어나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유리문이 열리자 가운을 입은 남자가 수증기와 함께 뒤뚱거리며 등장했다.

“우리 귀염둥이들, 아빠 기다리느라 심심했지?”

오늘의 목표물인 토끼 등장이다.

평의원은 흥분한 표정으로 실크 가운의 앞섬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보기만 해도 역겨울 정도로 축 처진 가슴과 뱃살이 드러났다. 남자는 허리에 손을 얹고 사타구니를 앞으로 내밀며 껄껄 웃었다.

“자자, 아빠가 오늘도 맛있는 막대사탕을 주도록 하지. 누가 먼저 맛볼 테냐?”

반응이 썰렁했다. 의원은 눈을 치켜떴다. 방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조용하고 스산했다. 그의 늘어진 눈초리가 방바닥을 훑었다.

헉 하고 놀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엉망이 된 채 쓰러져 있는 안드로이드들을 발견하고선 얼어붙었다. 바닥에 흰 죽처럼 쏟아져 내린 수액과 찌그러진 바가지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머리통. 남자는 머뭇거리며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모퉁이 뒤에서 검은 모자를 쓴 그림자가 발소리를 죽인 채 등장했다. 시퍼런 칼날을 휘리릭 돌린 그녀는 검은 마스크 아래 비웃음 띤 어조로 말했다.

“막대사탕 같은 소리 하네.”

“누, 누구냐!”

놀라서 돌아보던 의원의 안면으로 번개 같은 발차기가 날아왔다. ‘퍽!’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그의 턱을 가격한 유림은 허공으로 곧게 뻗은 다리를 천천히 접으며 우아한 나비처럼 양다리를 모았다.

“허, 허억…….”

침이 질질 흐르는 턱을 부여잡은 그는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유림은 그가 벌리고 앉은 가랑이 사이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린애 손가락처럼 가늘고 뭉툭한 것이, 사탕보다는 허연 소시지 같은데?”

검은 마스크 위로 냉혹한 암살자의 눈이 드러났다. 붓꼬리처럼 휜 눈초리는 사냥감을 내려다보며 흡족해하는 암사자처럼 보였다. 겁에 질린 의원은 즉각 상대를 알아보았다.

“설마 너…….”

틀림없었다. 얼마 전 살해당한 수석 연구원 사건 이전부터 뉴스 헤드라인을 줄줄이 장식하며 에덴 타워의 고위직 관리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녀석.

그놈이다! 설마 여자일 줄이야!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는 축 처진 엉덩이 살로 바닥을 쓸며 뒤로 주춤주춤 기었다. 그가 멀어지는 만큼 유림은 사뿐사뿐 다가왔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

“누, 누구? 나는 아닐 거야. 내겐 네가 찾는 것 따윈 아무것도 없어.”

그는 공포에 찬 얼굴로 애원하듯 말했다.

“나는 무늬만 평의원이야. 그냥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라고! 오늘 이건 못 본 걸로 할 테니, 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줘!”

“낙원의 관리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그녀는 관심 없다는 듯 말허리를 뚝 자르며 말했다.

“그럼 살려 줄지도 모르지.”

유림은 새침한 눈초리로 웃으며 변덕스럽게 말했다. 남자는 울상인 얼굴로 말했다.

“그는…… 아무리 나라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래? 아쉽네.”

그녀가 방아쇠를 건 손에 힘을 주자 남자는 황급히 바닥을 기어 왔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사정했다.

“자, 잠깐만!”

대부분의 사람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한없이 나약해진다. 필사적이면 필사적인 만큼 추해진다.

유림은 몸을 낮춰 앉았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 댔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의 인중에 맺힌 땀을 보던 유림은 마지막 기회를 주듯 물었다.

“신종 바이러스, 그건 왓슨 제약회사가 일부러 퍼뜨린 건가? 치료제를 팔기 위해서?”

“그, 그건 아닐 거야. 듣기론 왓슨가 내에서도 감염자가 나왔다니까.”

유림은 잠시 침묵했다.

“관리자 아담, 그를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자들은 누구지?”

평의원은 숨을 몰아쉬면서 다급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두툼한 손은 털이 북슬북슬한 허벅지를 긁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게…….”

정작 중요한 건 아는 게 없군. 본인 말대로 그는 허수아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핵심 인물들을 감싸기 위한 보호막 같은 존재.

유림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일말의 여흥마저 사라진 비정한 암살자의 눈빛만이 남았다. 그녀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철컥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모델 이브!”

총구를 당기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평의원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살려 달라고 싹싹 빌면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라면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본인 입으로 아담의 여자라고 말하고 다니니까.”

“아담의 여자? 허풍 떠는 건 아니고?”

워낙에 사치스럽고 허영심이 많은 여자였다. 유림이 못 미더운 눈치를 보이자 평의원은 글썽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힘없이 내저었다.

“그는 인간도 아니야.”

“뭐?”

“그는 ‘신’이야. 감히 우리 같은 것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대지.”

‘이게 너무 겁을 먹어서 돌았나?’

유림은 기가 막힌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훔쳐보았다. 현재 시각 00시 40분. 슬슬 마무리를 맺어야 할 시점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만 퇴장할 시간이라서.”

“자, 잠깐만! 더 있어! 입실론들은 아담을 위해 존재하는…….”

푸슉.

유림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이마에 구멍이 난 채 털썩 쓰러지는 남자를 보며 아쉬움이 남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 했던 것 같은데.”

그때 별안간 욕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놀란 유림은 경계 태세로 홱 돌았다. 알몸의 소년이 욕실 문 앞에 선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보더니 고개를 비딱하게 갸웃거리며 동공을 번뜩였다.

녹색으로 빛나던 동공은 다시 유림을 응시했다. 그는 경직된 표정으로 기계식 음성을 내뱉었다.

─ 인식 번호 AIB21473. 푸른 조개 방에서 살인 사건 발생. 피해자 정보 송신 중. 즉각 지원 요청을 바랍니다.

곧이어 경고 센서가 울리기 시작했다. 유림은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바로 출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어느새 두꺼운 격벽이 내려와 있었다. 그녀가 기어 왔던 환풍구 내에도 좀 전까진 없었던 뾰족한 창살 같은 것들이 돋아 있었다.

소년은 알몸으로 격투 자세를 취하며 경고했다.

“본기는 용의자 제압에 돌입합니다. 용의자는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십시오.”

방 안에 완벽히 갇힌 유림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실책이었다. 설마 남색男色 소아성애증 새끼가 욕실까지 애를 데리고 들어갔을 줄이야.

“본래 안드로이드 대전은 내 특기 분야가 아니지만.”

그녀는 감정을 지운 눈으로 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소년을 보며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상대가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날도 오게 될 줄은 몰랐네…….”

한편 기억의 도시 거리를 서성이던 케이는 좀 전에 유림도 만났던 금발의 사제에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푸른 눈의 사제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코인이 가득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현재 소돔에서는 즐거운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1회 무료 체험 코인을 드리고 있으니 한번 체험해 보고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케이는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황금색 코인들을 응시하며 어떤 것을 고를지 생각에 잠겼다. 그를 보던 금발의 사제가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대신 세일리아의 축복을 그대에게.”

멈칫한 케이가 고개를 들며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제를 바라보다가 화로 문양이 새겨진 코인을 낚아채듯 집었다.

금발의 사제는 방긋방긋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의 뒤로 쾌락의 거리 소돔이 으슥한 분위기와 함께 등장했다.

거리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어슬렁어슬렁 걷던 케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사르르 훑어보았다. 베르타의 신전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여사제 복장의 안드로이드들은 손님들을 이동시키며 거리를 통제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케이는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스마트 워치에 입술을 대며 나직이 속삭였다.

“리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 소돔의 베스타 신전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특별보안대가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 중입니다.

그는 굳은 눈으로 신전 쪽을 급히 돌아보았다. 베스타 신전 건물 전체에는 경고등처럼 붉은 불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유림은?’

그녀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그럴 만한 이유는 아마도 단 하나.

‘교전 중인가?’

그의 시선이 상공으로 향했다. 하늘 위에는 황금의 바벨탑 주위를 날아다니는 에어쉽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빠른 속도로 기억의 도시를 향해 날아오는 에어쉽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사건 보고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는 특별보안대였다.

서늘한 눈초리로 에어쉽을 바라보던 케이는 생각에 잠긴 채 깊은 눈을 조용히 일렁였다.

뉴스 속보입니다. 방금 전 소돔의 베스타 신전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피해자는 현직 평의원인 B씨라고 합니다. 듣자 하니 용의자는 아직 사건 현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하죠? 현장에 나가 있는 취재원으로부터 자세한 소식 전해 듣도록 하겠습니다.

기억의 도시 곳곳에 떠오른 가상 홀로그램 스크린에 취재원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시청했다. 취재원의 얼굴 뒤로는 베스타 신전이 붉은 경고등에 휩싸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취재원 PN13호입니다. 이곳은 낙원 내 유일하게 성 접대 서비스를 하고 있는 쾌락의 거리 소돔입니다. 소돔은 안드로이드 개발회사인 위즈덤이 운영하고 있는데요, 오늘 이곳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소돔의 지부 중 하나인 베스타 신전에서 평의원 B씨가 살해당해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위즈덤 측은 현재 용의자를 포위하고 도주로를 차단한 상태입니다. 또한 안전을 위해 베스타 신전을 격벽 폐쇄하고 실내의 고객들을 신속히 대피시키는 중입니다…….

유림은 경고 사이렌이 울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검을 움켜쥐었다. 바닥과 벽에는 격렬했던 총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주 보고 선 소년의 알몸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앞서 쓰러뜨렸던 세 명의 안드로이드와는 움직임부터가 달랐다. 제대로 먹힌 공격이 하나도 없었다. 완벽하게 방어하면서 반격의 틈을 놓치지 않는다. 군인으로 치자면 STF의 특별요원 수준이었다.

“투항하십시오. 당신은 포위되었습니다.”

그는 경고했다. 그리고 주먹을 쥔 채 격투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유림의 눈이 그의 자세를 눈여겨보며 가늘게 흐려졌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몸놀림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이 정도 실력이라면 델타를 상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델타?’

─우리들의 챔피언 ‘작은 전사 다윗’입니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영상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생각났다.

함성 소리와 함께 등장했던 은빛 투구의 주인.

눈앞의 상대는 화이트 채플의 도박 경기장에서 그녀가 대치했던 챔피언과 매우 흡사했다. 유림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읊조렸다.

“전투형 안드로이드.”

만약 이 녀석이 화이트 채플의 챔피언인 ‘다윗’과 같은 수준의 기기라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델타 몇 마리를 손쉽게 제압하던 다윗의 솜씨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유림이었기에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제압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일대일로 접전을 벌인다면 시간이 꽤 많이 소모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유림은 총을 내려놓고 양손을 들었다. 그녀는 체념하듯 말했다.

“투항한다.”

소년 안드로이드는 주먹을 내려놓고 초록빛 동공을 깜빡였다. 그는 잠시 유림을 관찰하듯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을 등 뒤로 보낸 채 바닥에 엎드려 주십시오.”

유림은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바닥에 엎드렸다. 그녀는 몸을 숙인 채 잠시 꿈틀거리더니 양손을 등 뒤로 보냈다. 소년은 벽에 걸려 있던 수갑을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채울 심산인 양 냉큼 가져왔다.

그는 수갑을 가지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이었다!

빈틈을 엿보던 유림은 벌떡 일어나 나무에 오르듯 소년의 어깨를 타고 올랐다. 그녀의 입에는 어느새 소형 타이머 폭탄이 활성화된 채 물려 있었다.

타이머 폭탄이 ‘삑삑’거리며 알람을 울려 대기 시작했다.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약 5초 남짓. 안드로이드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유림은 버둥거리는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은 채 폭탄을 그의 옆구리에 붙였다.

안드로이드가 폭탄을 내려다보자, 그녀는 순식간에 몸을 뒤집어서 바닥을 손으로 짚고 공중에서 회전했다. 그리고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옆에 보이던 의자를 집어 안드로이드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어?”

미처 대응하지 못한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는 폭탄을 겨우 떼어서 손에 쥐었지만 유림이 던진 의자에 맞고 ‘퍽!’ 소리와 함께 문 쪽으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그가 쥐고 있던 폭탄이 붉은빛으로 번쩍이며 마지막 알람 음이 ‘삑─’ 하고 길게 울렸다.

유림은 민첩하게 미끄러지듯 침대 밑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쾅!

요란하게 터진 폭탄은 굉음과 함께 충격파를 남겼다.

후두둑.

무너진 천장에서 잔재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자욱한 먼지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유림은 바닥을 기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스스로 대담하다고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조금 전 상황은 아무리 전장의 성녀일지라도 식은땀이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칫 머뭇거리거나 타이밍을 놓쳤다간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고깃덩이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폭발로 인해 출입구 쪽 벽이 뚫려 있었다. 사실 그녀가 폭탄을 쓴 목적은 안드로이드를 처리하려는 것보다도 탈출로의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유림은 비틀거리면서도 정신을 부여잡고 일어나 출구를 향해 뛰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발목을 덥석 잡았다. 좀 전의 폭발로 인해 머리의 반 이상이 날아간 전투형 안드로이드였다. 그는 왼팔과 어깨 그리고 얼굴 반쪽만 남은 상태로 몸뚱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소년은 산산조각 난 턱을 바들거리면서도 그녀의 발목을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번뜩거리는 눈알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집념이었다. 유림은 초록색 수액이 질질 흘러나오는 그의 머리통을 공 차듯 발로 뻥 찼다. 그리고 발목에 매달려 있는 그의 끊어진 손모가지를 거칠게 떼어 냈다.

통로를 차단하고 있던 두꺼운 격벽은 동굴처럼 구멍이 난 채 뚫려 있었다. 그녀는 그 사이를 다람쥐처럼 날쌔게 빠져나갔다.

탕!

기습 공격이 날아왔다.

유림은 민첩한 반사 신경으로 몸을 회전시켜 피했다. 정면에서 날아온 총탄이 그녀가 쓴 검은 모자를 스치고 날아갔다.

“용의자가 도주합니다.”

“탈출로를 차단합니다.”

유림은 눈을 부릅뜨고 섰다. 주먹 쥔 손목엔 핏줄이 도드라졌다. 눈앞에는 전투복을 입은 안드로이드들이 열 맞춰 서서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녹색으로 번쩍이는 눈을 깜빡이며 이구동성으로 기계 음성을 뻐끔뻐끔 내뱉었다.

─ 무기 등급을 선택해 주십시오.

─ 전투 레벨을 선택해 주십시오.

─ 제압 작전을 실행해 주십시오.

잇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예측 못한 변수들이 이렇게 연이어 터질 줄이야! 아무래도 오늘 멀쩡히 살아 나가기는 글러 먹은 듯했다.

소돔을 경영하는 건 세계적인 안드로이드 개발회사, 위즈덤이다. 위즈덤은 몇 년 전부터 로스티아벤에 군용 안드로이드를 독점적으로 납품하기 위한 로비를 해 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돔은 눈가리개용일 뿐이었나?

이들이 수면 밑에서 도면을 그리고 있던 건 잔인한 살육 병기, 전투형 안드로이드였다. 위즈덤은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들만의 군대를 생산해 오고 있었다. 유림은 창백한 얼굴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둘, 넷, 여섯, 여덟…… 스물둘, 스물넷…….’

눈대중으로만 봐도 수십이 넘었다. 아직은 시험 단계에 불과한 출고 전 상품들로 보였지만, 유림은 이미 그들의 능력치를 몸소 경험한 터였다.

화이트 채플의 다윗과 방금 전 소년 안드로이드.

비록 프로토타입이라 할지라도 전투 능력이 다윗과 동일하다면, 그녀에게 이 무지막지한 병기 부대를 타파할 방도는 없다. 폭발 무기는 방금 전 써 버린 소형 타이머가 전부였고, 갖고 있는 건 호신용 총 한 자루와 작은 단검 한 자루뿐.

유림은 이를 꽉 물었다.

잡히면 모든 게 끝장이다. 메리도, 밀러도…… 그녀 자신도.

유림은 천천히 총을 꺼내 본인의 턱을 겨누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심호흡을 했다.

낙원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다짐하지 않았던가? 언제 어디서든 그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노라고.

망설일 틈 따윈 없었다. 군인은 망설여선 안 된다. 결의를 다진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찰나였다.

“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기류를 갈랐다. 안드로이드들도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악다구니와 비명이 뒤섞인 채 난리법석이었다.

유림은 무너진 격벽 아래에서 통통거리며 튀어 오르는 잔재들을 응시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려 퍼지는 정체불명의 소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소음의 정체를 눈치챈 유림은 숨을 깊게 들이켜며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거리는 서로 밀치며 대피하는 사람들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소돔 앞에서 황금색 코인을 나눠 주던 금발의 사제는 눈을 찡그리며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공에서 에어쉽 한 기가 긴 꼬리구름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수면에 머리를 꼬라박는 새처럼 방향을 잃은 에어쉽은 하늘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수직으로 무섭게 하강했다.

“에어쉽이 떨어진다!”

“추락한다! 모두 피해!”

“꺄아악!”

유성처럼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에어쉽의 비상 탈출구가 열렸다.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은 주황색 낙하복을 착용하고 허공을 향해 죽기 살기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사건 보고를 받고 달려오던 특별보안대였다.

“부, 부딪친다!”

황금의 바벨탑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강풍이 일었다. 굉음과 함께 떨어진 에어쉽은 주변 건물들을 도미노처럼 쓰러뜨리면서 연속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콰쾅!

땅이 울릴 만큼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이내 거대한 불길이 활활 치솟았다. 시커먼 연기가 기억의 도시 상공을 뒤덮으며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허둥지둥 달리면서도 궁금함을 못 참고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가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통제가 철저한 낙원에서 에어쉽의 추락이라니,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에어쉽이 떨어진 곳은 다름 아닌 소돔의 베스타 신전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긴급 속보로 평의원이 살해당했다고 보도되던 문제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군중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웅성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에어쉽이 정해진 항로를 벗어난 걸로 모자라서 오작동으로 추락하다뇨!”

“그러게 말이에요.”

스마트 더스트를 통해 낙원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왓슨 3세. 낙원 내에선 작은 전구 하나조차도 왓슨의 통제를 받는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완벽한 우산이라고 믿고 있는 왓슨 3세야말로 낙원의 맹점이었다. 로스트 헤븐의 유일한 보안 체계인 왓슨을 뚫는다면 낙원의 모든 것이 뚫린다.

치명적인 양날의 검. 그것이 바로 낙원의 슈퍼컴퓨터 왓슨이었다.

유림은 쿨럭이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무겁고 시야가 핑그르르 돌았다. 귓가가 먹먹했다. 멀리서 구조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 고개를 든 그녀는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안드로이드들의 모습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유림은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이를 사리물었다.

‘아직은 세간에 공개할 수 없다는 거겠지.’

어찌 되었든 원인 모를 에어쉽의 추락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녀는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 오자 허물어진 벽 사이로 뛰어내렸다.

“움직이지 마.”

철컥, 어둠 속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착지한 유림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력으로 저항할 경우엔 사살도 주저하지 않겠다. 얌전히 무기를 내려놓고 체포에 협조하도록.”

그녀는 마스크 쓴 얼굴로 흘끗 곁눈질을 했다. 사실 목소리만으로 이미 누군지 눈치챈 상태였다.

그녀와는 늘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 특별보안대 지휘관인 셰인 필란 중위였다. 정면을 보니 특보대 요원 두 명이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산 넘어 산이라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던가? 연맹군 작전부 기동수색대에서도 손꼽히는 에이스, 데드캣이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숱한 전장을 헤쳐 나온 그녀를 얕보면 곤란했다.

유림은 주위를 빠르게 스캔했다. 검은 복면 아래 그녀의 눈초리가 예리하게 빛났다.

양팔을 드는 척하던 유림은 재빨리 벽면에 튀어나온 철골에 매달렸다. 철골을 잡은 채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킨 그녀는 허물어진 벽 사이로 튀어나온 철골들을 밟고 순식간에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격발!”

셰인은 쫓아가며 소리쳤다. 특보대 대원들은 그녀의 꽁무니에 대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무너진 벽 사이로 기어 들어간 유림은 건물 반대편을 향해 빠르게 질주했다. 그녀의 등이 훤히 노출되자 셰인은 놓칠 새라 재빨리 총을 겨눴다. 자동 조준 기능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겨눈 그는 이를 앙다물며 의기양양한 눈빛을 지었다.

화제의 암살범을 잡다니, 특진감이다!

그가 희열에 차서 방아쇠를 잡은 손에 힘을 주던 순간이었다.

‘뭐지?’

별안간 서늘한 바람이 등골을 쫙 훑었다. 셰인은 부르르 떨며 슬그머니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웬 남자 하나가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어, 어느 틈에…….’

본능적으로 적임을 감지한 셰인은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의 눈이 붉게 번쩍였다. 셰인은 몸이 오싹하게 얼어붙는 걸 느꼈다. 상대는 마치 우아한 체조를 하듯 팔을 뻗더니 그의 복부를 향해 번개처럼 빠른 타격을 날렸다.

“크헉!”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충격에 몸을 구부린 그는 수십 미터 밖까지 튕겨져 날아갔다. 벽에 ‘쿵!’ 하고 부딪친 셰인은 그대로 고꾸라지며 정신을 잃었다.

한편 반대편 벽에 서 있던 대원들은 폭발에 휘말린 것처럼 붕 날아간 대장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방금 셰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혼란스럽게 서 있던 그들은 느닷없이 정면에 나타난 괴한을 보고선 혼비백산한 얼굴로 총을 들었다.

붉은 눈.

핏빛 동공에 비친 그들의 얼굴에 공포심이 번졌다. 마취탄이라도 쏜 걸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턱과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면 신경이 마비된 건 아닌데, 어째서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거지?

대원들은 천천히 주저앉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간신히 팔을 움직여 머리를 부여잡았다.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이 관자놀이를 찢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는 그들의 머릿속에 누군가 답을 일러 주듯 속삭였다.

인간들은 그걸 경외라고 하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숭배하고 공경하면서도 갖게 되는 본능적인 두려움.

그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였다.

“아아악!”

털썩 쓰러진 특보대원들의 코에서는 붉은 선혈이 줄줄 흘러나왔다.

“사, 살려 줘…….”

손을 뻗으며 애원하던 대원들은 하나둘씩 정신을 잃었다.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케이의 눈동자가 서서히 부드러운 빛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온유하지만 감정의 기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한 눈동자.

그는 돌아서며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속이 비칠 것 같은 연갈색 머리칼이 부스스 흩어졌다. 그는 주위를 슥 둘러보며 입술 새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도둑고양이 아니랄까 봐 그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군.

그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건물 사이사이를 물 흐르듯 이동했다.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그림자 뒤로 만신창이가 된 채 쓰러진 셰인 부대가 보였다.

한편 가까스로 에어쉽 승강장에 도착한 유림은 지친 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털썩 누워서 멍한 눈으로 뻥 뚫린 승강장 위를 바라보았다. 컴컴한 상공을 뒤덮은 연기 속으로 쉴 새 없이 오가는 에어쉽들이 보였다. 사이렌을 울리며 날아다니는 걸 보니 구조대인 모양이었다. 상공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큰 수확은 없고 여기저기 노출만 됐네.’

스스로가 한심한지 그녀는 눈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쉬자. 이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정거장인 데다가 제일 마지막 플랫폼이니 누군가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에어쉽을 타고 빠져나가는 건 오히려 눈에 띄기만 하겠지. 무엇보다도 체력이 방전돼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동할 여력 따윈 남아 있지 않다.

그때, 조용했던 승강장 입구가 열리더니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워 있던 유림은 냉큼 몸을 뒤집었다. 그녀는 포복 자세를 취했다. 그런 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상체를 일으켰다. 네발로 소리 없이 기면서 그녀는 눈빛에 살기를 머금었다. 여차하면 공격할 기세로 무기에 손을 가져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유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왓슨이 벌써 자신의 정체를 파악해 수배령이라도 내린 것일까? 아니면 셰인 부대가 끝끝내 이곳까지 추적망을 좁혀 왔나? 그 등신들이 이렇게 잽쌀 리가 없는데.

발소리의 주인이 코너를 도는 게 보였다. 유림은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춘 채 대기했다.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모퉁이를 돌았다.

유림의 눈초리가 매섭게 빛났다. 그녀는 스프린터 자세로 표범처럼 뛰어 나갔다. 그리고 허공으로 점프해 몸을 뒤집으며 날아차기를 날렸다.

졸지에 안면 구타를 당한 상대는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바닥을 짚고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 유림은 남자의 머리를 잡은 채 2차 공격을 날렸다. 작지만 매서운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남자가 흠칫해서 몸을 뒤로 내뺐다. 비로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유림은 놀란 눈으로 동작을 멈췄다.

휘둥그레 커진 그녀의 동공 속엔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쪽 실눈으로 그녀의 주먹을 응시하는 케이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너…….”

유림은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유림, 이것 좀…….”

그가 난감한 눈빛으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그녀의 주먹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를 눕힌 채 올라타 있던 유림은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일어섰다. 케이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심호흡을 하며 생긋 웃었다.

“마라톤이라도 했어요? 땀범벅이네요.”

그는 그녀의 땀이 묻은 상의를 매만지며 물었다. 유림은 얄궂다는 눈초리로 케이를 쏘아보았다. 매번 느끼지만 맷집 하나는 세계 최고인 녀석이었다.

혼신을 다해 날린 발차기를 맞고도 저렇게 멀쩡하다니. 로스티아벤 최정예인 STF 요원들도 코피를 질질 흘리며 정신을 놓을 수준이었는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고 서서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케이는 쀼루퉁한 분위기의 유림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예쁜 고양이가 아무래도 단단히 골이 난 모양이었다.

“그 녀석, 절 닮은 것 같던데요.”

유림은 무슨 소리냐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관심 끌기에 성공한 케이는 입꼬리를 비긋이 늘렸다. 눈은 생긋 웃지만 입가엔 얄미울 정도로 느른한 여유가 걸려 있었다.

“베스타 신전에서 말이에요.”

유림의 눈이 동요하듯 흔들렸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더니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무슨 말이야?”

“소돔의 매춘 시스템은 고객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내는 성적 호응을 캐치해 내는 데 기반하고 있어요. 고객이 평소 의식 저편에 묻어 놓은 욕망을 최대한 실체화해서 구현해 내는 데에 목적이 있거든요.”

유림의 얼굴색이 점차 새빨갛게 변해 갔다. 그녀는 땀에 젖은 모자를 벗어 부채질까지 했다.

케이는 그녀에게 다가가 까슬까슬하게 벗겨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다정한 입맞춤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그녀의 입술을 삼키던 그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물었다.

“그 녀석하고 이런 것도 했어요?”

“안 했어. 로봇하고 무슨.”

“로봇이 아니었다면 했을 거예요?”

“하긴 뭘 해.”

“하면 안 되죠. 나하고도 아직 안 했는데.”

“케이!”

그가 입을 맞추며 웃었다. 발끈하는 그녀가 못내 귀엽다는 듯.

“장미꽃 준다고 아무나 덥석 믿고 따라가면 안 돼요.”

유림이 입술을 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깊고 검은 눈동자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그는 수수께끼 같은 눈빛으로 받아쳤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끌어올렸다.

“내가 안 왔더라면 어쩔 뻔했어요?”

“올 거라 생각했어.”

유림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확신이 실려 있는 눈빛이 다시금 빤히 그를 향했다.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 그게 배달원의 역할이니까.”

케이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한 걸음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생채기가 나서 피딱지가 생긴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에어쉽 폭발, 케이가 한 거지?”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어떻게? 왓슨의 보안을 뚫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을 텐데.”

케이는 잠자코 먼 곳을 바라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뚫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유림은 별안간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걸 느꼈다. 그의 눈빛이 낯설었다.

무겁고 고요한 그의 눈동자가 유리 호수처럼 매끄럽고 투명한 장막을 펼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숨을 앗아 가두듯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견고한 팔이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림은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필요가 없었다고?”

목뒤에서 케이의 서늘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도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알려 줘, 케이.”

조각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외모.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

천사처럼 완벽한 그 얼굴 속에 무얼 감추고 있는지.

“넌 대체…… 누구야?”

그는 유림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깍짓손을 꼈다.

지금쯤 평의회는 에어쉽 사고 뉴스로 인해 왓슨 3세의 보안이 뚫렸다는 걸 보고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불안하지가 않았다.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팔이 흔들림 없이 따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두근거리던 기다림 끝에 케이는 느릿하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낙원을 설계한 사람.”

유림의 눈이 얼어붙었다. 숨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밀치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왓슨 3세.”

흐린 날의 오후처럼, 그는 평온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그녀를 만든 사람이 나니까요.”

【집무관의 보고】

평의회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의원님들께서는 지금 즉시 에덴 타워의 제1 회의실로 집결해 주십시오.

에덴 타워에 비상이 걸렸다. 덕분에 직접 발걸음 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의원들의 에어쉽이 속속히 S관 승강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비상사태 시엔 보안상의 이유로 홀로그램 영상 참여는 불가하기 때문이다.

S관 제1 회의실에 ‘회의 중’이라는 불이 들어왔다. 의원들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회의실 중앙 스크린에 뜬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소돔에서 암살당한 평의원의 시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마 정중앙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저번 달에 숨진 수석 연구원의 경우와 아주 흡사했다.

중요한 건 에덴 타워의 고위 간부들이 연이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회의실에 둘러앉은 그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왓슨이 해킹당했다는 겁니까?”

누군가 부정하고 싶다는 듯 이의를 제기했다.

“에어쉽 자체의 기계적 결함으로 추락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안드로이드 집무관이 딱딱한 어조로 답변했다.

─ 어제 점검을 마친 기체입니다. 기체 결함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럼 역시 왓슨의 보안이 해제됐다는 겁니까?”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외부에서 낙원의 보안을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 내부의 소행이라는 거요?”

“자자, 진정들 하세요.”

흥분한 의원들끼리 언성이 높아졌다. 누군가 고조된 분위기를 식히려 애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일단 그 에어쉽에 타고 있었다는 특보대 대원들부터 불러서 자초지종을 듣는 게 순서 같군요.”

“듣자 하니 특보대 대원들은 모두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웬 괴한에게 습격당했다던데요?”

“괴한이라면 그 암살범이랑 동일 인물입니까?”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습격당했던 시점의 영상을 띄워 보세요. 낙원 내의 일이라면 왓슨의 눈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다시 집무관이 차분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 당시 자료는 삭제되었거나 누군가 일시적으로 왓슨의 눈을 차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해킹당한 겁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왓슨의 업무 수행을 마비시킨 게 틀림없어요.”

─ 78% 가능성으로 그렇게 사료됩니다.

집무관이 긍정하자 평의원들의 낯빛이 돌변했다. 그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한층 더 가열된 논쟁을 벌였다.

“그러니까 지금 평의회와 에덴 타워를 노리는 살인마가 멀쩡하게 낙원 내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겁니까? 게다가 적은 왓슨을 자유자재로 해킹할 능력도 갖췄고요?”

“일단 평의원들의 개인 경호원 수부터 늘려야 합니다.”

결국 제 목숨이 불안한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보다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두 명째입니다. 이게 무슨 망신이요? 세계 최고의 보안 시스템과 용병대를 구축한 로스트 헤븐의 명성에 금 가는 소리가 몇 번째냔 말입니다! 이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아야 합니다. 벌써부터 투어를 취소하겠다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지 않습니까?”

─ 총사령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집무관의 보고에 오가던 논쟁이 뚝 끊겼다.

의원들은 일제히 옷매무새를 만지며 일어섰다. 그들은 긴장한 얼굴로 회의실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하얀 유리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제복을 입은 오십 대 남자가 등장했다. 가슴에 박힌 네 개의 별, 로스티아벤의 총사령관, 우리야 세르게이 장군이었다.

평의회 의원들이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는 건 그들이 낙원 내 유일한 정치 기구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군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로스티아벤의 총사령관인 우리야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들 앉으시죠.”

그가 소탈하게 말하자 다들 예의용 미소를 지으며 착석했다. 우리야는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말발굽형 테이블을 좌우로 훑어보았다. 열두 석 중 아홉 석이 착석했다. 세 자리가 공석이란 의미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나는 오늘 죽어서 못 왔고, 하나는 늘 공석인 자리고 마지막 하나는…… 밉상스러운 얼굴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출입문이 열리더니 주인공이 나타났다.

“늦었습니다.”

하얀 해군복에 베레모를 쓴 거구의 사내. 그는 얼마 전 평의원 자리에 오른 노아 호크 대령이었다.

몇몇 의원들이 불편한 기침을 하며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특히 우리야는 팔짱을 낀 채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눈초리를 짓고 있었다.

호크는 그에게 쏠린 시선을 즐기며 유유히 가장자리에 앉았다. 시국이 어수선한 만큼 사적인 감정은 배제할 시점이다.

“다들 모였으니 회의를 재개하죠.”

우리야의 말에 의원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왓슨 3세가 해킹당한 건 낙원의 관리자께서도 인정한 부분입니다.”

우리야의 말에 평의원들은 술렁이며 서로서로 속닥였다. “관리자께서?”, “눈뜨고 당하셨다는 건가?” 불신과 불안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다시 논의는 우리야의 주도하에 심도 깊게 이어졌다. 한 중년 여성 의원이 조심스럽게 오래전 일을 들추고 나섰다.

“예전에 딱 한 번, 왓슨 3세가 해킹을 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십오 년 전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집무관은 2085년 8월 23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를 의원들 앞에 입체 화면으로 띄웠다.

『제약회사 왓슨의 본사와 연구소가 있는 ‘로스트 헤븐’에 침입자 발생! 로스트 헤븐을 관리하는 슈퍼컴퓨터 왓슨을 해킹한 자는 누구인가?』

“당시 왓슨을 해킹했던 범인은 십 대 소년이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냥 소년은 아니었죠. 페트로비치 박사의 아들이었거든요.”

바딤 페트로비치.

그는 인공섬 로스트 헤븐의 건설 총책임자로 낙원의 설계를 진두지휘한 인물이었다. 낙원 관리 시스템의 핵심인 슈퍼컴퓨터 왓슨 3세는 그의 인생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페트로비치 박사에게는 자식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아들인 ‘아담 페트로비치’, 둘째가 딸인 ‘이브 페트로비치’였죠. 그런데 첫째인 아담 페트로비치의 경우엔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안드로이드 집무관은 기밀문서인 ‘바딤 페트로비치’ 파일을 중앙 화면에 띄웠다.

페트로비치 박사의 사진과 아들인 아담, 딸 이브의 사진이 각각 입체 영상으로 나타났다. 누군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들과 딸이 부친을 별로 닮지 않았군요. 부친은 러시아계인데…… 혹시 입양된 아이들인가요?”

“박사의 부인이 동양인이었다고 합니다. 그게 어디였죠? 일본? 중국인가?”

“아들은 동양인으로도 안 보이는데요?”

“아들은 입양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때 그런 소문도 돌았죠. 왓슨 3세를 만든 건 페트로비치 박사가 아니라, 그의 어린 아들이라고.”

누군가 “설마요.” 하면서 가볍게 웃었다.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무거운 눈빛으로 호크 대령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시 페트로비치 박사의 아들과 딸의 죽음을 확인한 게 귀관이었던 걸로 기억하네만.”

혼자 딴짓을 하고 있던 호크 대령은 그에게 쏠린 시선을 느끼고선 인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확실한가?”

우리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재차 물었다.

“확실히 귀관의 두 눈으로 직접 시체를 확인했나?”

호크는 뺨에 난 십자가 모양의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평의회 내에선 그나 자신이나 똑같은 의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야는 굳이 계급장을 끌고 와 그에게 기어코 하대를 하고 있었다. 호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우리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호크도 태연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회의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평의원들은 눈치만 살피며 살얼음판 같은 침묵 속에서 숨소리를 죽였다. 우리야는 애꿎은 입술을 씹으며 한쪽 얼굴 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주먹 쥔 손에는 퍼런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그 폭발 속에서 아이들이 살아남는 건 기적에 가깝다고 봅니다. 시신은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었고요. 총사령관님께서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야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빛이었지만 더 이상의 토를 달진 않았다.

노아 호크 대령.

출신도, 배경도 모두 베일에 싸인 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 뛰어드는 전투마다 승전보를 울리며 하나의 전설이 되어 버린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별안간 정치판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하던 대로 한 마리의 늑대로 추앙받으며 최전방이나 배회할 것이지 분수도 모르고 에덴 타워에 말뚝을 박으려 하다니.

전부터 눈엣가시처럼 성가셨지만 이제는 정말 걸리적거리는 상대가 되었다.

누군가 두 사람의 기 싸움에 찬물을 끼얹듯 화제를 전환했다.

“집무관은 다음 보고를 해 보세요.”

─ 예, 의원님. 적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먼저 직접적으로 살인을 하는 히트맨이 있고, 왓슨을 해킹한 엔지니어가 있습니다. 살해된 평의원은 매일 같은 시각 소돔에 들렀죠. 이건 추측이지만 적 팀에는 낙원의 고위 관리들과 접촉을 할 수 있는 정보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적의 작전 팀은 최소 세 명, 혹은 그 이상이란 의미입니다.

“배후 세력은?”

─ 의심 가는 배후 세력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얼마 전 타격을 입은 모래의 도시 내 불법 체류자들의 조직 오베론입니다. 탈낙원을 모토로 삼는 이들이죠. 행동 동기는 굳이 설명드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낙원 전복이 목표인 범죄 조직이니까요. 다른 하나는 연맹군입니다.

평의원들의 얼굴이 굳었다.

연맹군은 국제 연맹국United Republic of Nations의 군대를 뜻하는 말이다.

그들은 전부터 왓슨 그룹을 예의 주시해 오고 있었다. 왓슨 제약회사에서 신종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독점하고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인류의 복지와 안녕을 위한다는 연맹국URN은 호시탐탐 낙원의 연구원과 정보를 빼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급부상한 낙원의 용병대 로스티아벤을 경계하며 해체하라는 압박마저 가하는 상황이다.

우리야 세르게이 총사령관은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깍짓손을 끼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듣자 하니 요즘 연맹군 쪽에서 우리 의원님들께 은밀히 접촉을 시도 중이란 말이 있던데, 알아서들 잘 대처하시리라 믿습니다.”

누군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서로서로 뜨끔한 눈짓을 보내는 것도 보였다.

“오베론부터 털어 봅시다. 도박 경기는 닫았지만 이들이 델타를 더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주민들의 불안도 잠식시킬 겸해서 이번 기회에 오베론을 소탕했으면 하는데, 작전 지휘는 누가 좋겠습니까?”

누군가 총사령관에게 점수라도 딸 의향으로 손을 들었다. 빈센트 의원이었다. 그는 이죽거리며 호크 대령을 지목했다.

“마침 적임자가 새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군요. 낙원의 주민들 사이에서도 요즘 인기시라지요.”

다른 의원들도 맞장구를 치며 공감했다.

대중들 사이에서 블랙 호크와 브루클린의 성녀의 인기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내심 그에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던 의원들이었다. 사실 호크 대령은 주민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의원직에 올랐다. 그리고 그게 가장 적법한 절차라는 게 못내 분한 이들이었다.

“호크 대령.”

“예, 총사령관님.”

그가 일어서자 우리야는 매서운 눈초리로 명을 내렸다.

“그럼 회의 결과에 따라 귀관에게 오베론 소탕 작전의 지휘를 맡기는 바요. 평의원직에 오른 뒤 맡는 첫 임무인 만큼 건투를 빌겠소.”

“맡겨 주십시오.”

호크는 우아하지만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며 의원들에게 가식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같은 시각, 어두운 방에는 화면의 영상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얀 스크린 위로 호크 대령이 경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머지 의원들은 본인들이 일을 맡지 않아서 홀가분하다는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붉은 가죽 의자에 앉아서 영상을 시청하던 남자는 턱을 매만지며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한편 창가 쪽에 자리한 대리석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제인은 와인 잔을 들며 괘념치 말라는 듯 밝은 어조로 위로했다.

“신경 쓰지 마요. 곧 잡히겠죠.”

남자는 얼음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는 창밖을 응시하며 독한 술을 천천히 음미했다. 제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보라색 벨벳 가운을 입은 남자의 등이 차갑고 멀어 보였다.

“카인.”

그녀는 투정을 부리듯 질문을 던졌다.

“우리 결혼은 언제까지 미룰 거예요?”

흘끗 돌아선 그는 다소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어요.”

“지금도 결혼한 것과 크게 다를 것 없잖아?”

회피하는 듯한 어조였다. 제인은 벌떡 일어서서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간절함을 담아 속삭였다.

“난 모델 이브가 아닌 당신의 이브가 되고 싶어요.”

카인은 그녀의 팔을 잡더니 달래듯 어루만졌다. 그의 애무에 제인은 비로소 한 줄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겉으로나마 다정한 그의 행동만이라도. 비록 지금은 그의 주변에 수많은 꽃들이 만발해 있지만, 결국 최후까지 향기를 머금고 있는 건 그녀 자신이 될 것이기에.

“내 생일 파티는 잊지 않았죠? 이것마저 모른 척하면 화낼 거예요!”

이런 시국에 시답지 않은 이야기나 하는 여자. 세상만사가 본인 중심으로 돌아야 만족하는 족속의 대표 주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맹목적인 애정이 싫은 건 아니다.

“그럴 리가.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정말요? 그럼 그날…… 기대할게요.”

제인은 암시가 담긴 눈빛으로 웃었다.

“이번 생일 선물로 내가 갖고 싶은 건 오직 하나뿐이니까요.”

그녀는 얇게 세공된 금팔찌를 한 손으로 남자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이 그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카인은 무심한 눈으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머쓱해진 듯 그녀의 손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는 돌아서더니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걸었다.

“이만 갈게요. 쉬어요.”

마지막까지도 뭔가를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제인은 흘끗 곁눈질을 하며 기다렸지만 그는 술잔을 살짝 들어 보일 뿐, 다정한 눈인사조차 없었다.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간극.

그럼에도 그를 향한 마음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더 활활 불타올랐다. 그나마 낙원의 요정으로서의 자존심이 이 이상 머리를 굽히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제인은 입술을 깨물며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그림자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카인은 다시 편안하게 의자에 기댔다.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입술을 열었다.

“왓슨, 관리자 로그인.”

커다란 화면에 반짝이는 문구가 떠올랐다.

환영합니다, 아담!

배경으로 지정된 한 소녀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꼿꼿하게 일어선 채 하늘을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 그녀가 입은 하얀색 원피스와 대조적인 검은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리며 허공에서 아름다운 물결을 이루었다.

“기밀 파일 ‘이브’ 열람.”

화면에 파일명 ‘이브’가 떠올랐다. 어두운 방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이윽고 제복을 입은 여성이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 어서 오십시오, 아담. 파일 열람을 위해서는 관리자 인증이 필요합니다.

“진행해.”

─ 다음 보안 질문에 답해 주십시오. 이브가 좋아하는 음식은?

술잔을 움켜쥔 그는 미간을 좁혔다.

─ 현재까지 총 두 번의 오답이 있었습니다. 남은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오답이 세 번 연속으로 이어질 경우 보안을 위해 파일이 영구 삭제됩니다.

벌써 수백 번은 들어왔던 대사였다. 그는 지겹다는 듯 손짓으로 넘겼다.

“다음 질문.”

─ 이브가 좋아하는 음악은?

“다음.”

─ 이브가 좋아하는 동물은?

“다음.”

─ 이브가 좋아하는…….

보안 질문 목록을 만든 녀석은 뼛속까지 이브의 추종자였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는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어째서 그날의 광경과 이렇게도 흡사한 것일까? 어이없게 뚫려 버린 왓슨의 보안, 눈앞에서 자폭하던 에어쉽들. 관리자 로그인을 하지 않아도 왓슨에 자유자재로 접속할 수 있는 사람. 그럴 수 있는 자는 지구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바딤 페트로비치 박사.

카인은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난데없이 화면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이 바닥에 튀었다.

“우리야를 불러 와.”

─ 알겠습니다.

아담 페트로비치.

이브 페트로비치.

섬광과 함께 사라져 버린 소년과 소녀.

그는 충혈된 눈으로 한동안 보안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네가 왓슨을 만들었다고? 낙원의 슈퍼컴퓨터를?”

놀라서 되묻는 유림 앞에 케이는 예쁜 눈으로 말없이 서 있었다. 유림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입가에선 금세 웃음기가 사라졌다. 유림은 정색하며 심각한 눈으로 되물었다.

“진짜야?”

“네.”

“그런데 왜 평의회 밑에 있지 않고?”

“그들에게 있어 난 수배자예요. 오래전에 낙원에서 도망친 이력이 있거든요.”

“도망쳤다고? 왜?”

케이는 회피하듯 어두운 눈빛을 돌렸다. 에이전트들 사이에서 과거는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유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차오르는 호기심을 꾹꾹 억누르며 애써 인상을 쓴 채 말했다.

“못 믿겠어.”

“뭘요?”

“케이가 왓슨 3세를 만들었다는 거.”

밖은 여전히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난리였다. 승강장에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표정은 극과 극의 대비를 이뤘다. 차갑고 부정적인 유림의 눈초리와 유순하고 부드러운 그의 눈매가 교차하며 흑과 백처럼 어우러졌다.

조각상처럼 서 있던 케이는 난데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를 승강장 밖으로 이끌더니 비상 탈출로로 향했다. 사다리로 된 비상 탈출로를 지나자 넓은 옥상이 등장했다. 검은 하늘에는 여전히 빨간 사이렌을 단 에어쉽들이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위이이잉.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에어쉽 하나가 저공비행을 하며 날아갔다. 유림은 묶었던 머리칼이 바람에 풀어져 흩날리자 간지러운 듯 눈을 비볐다.

그때, 케이의 장밋빛 입술 새로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왓슨.”

다정다감하던 그의 눈빛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었다. 유림은 실 가닥처럼 얼굴에 붙는 머리칼 사이로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응시했다.

어둠 속으로 광풍이 불었다. 몰아치는 바람에 몸을 가누기가 힘든 그녀와 달리, 그는 가벼운 몸짓으로 우아하게 중심을 잡았다.

케이의 주변에만 바람이 일지 않는다. 그를 중심으로 모든 기류가 흡수된 채 바람 한 점 없는 진공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부터 기억의 도시에 있는 모든 에어쉽들의 운행을 정지한다.”

그윽하고 깊은 목소리가 밤바람에 실려 공중에 흩어졌다. 스마트 워치에 대고 속삭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느긋하게 선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듯 명했을 뿐이었다.

유림은 잠잠해진 바람 사이로 머리칼을 정리하며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잠시 기다리던 그녀는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일도 안 일어…….”

“위를 봐요, 유림.”

케이가 턱짓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상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십 대의 에어쉽들이 비행을 멈춘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공중에 멈춰 선 에어쉽들은 불빛마저 꺼진 상태로 어항 속에 잠든 물고기들처럼 둥실 떠 있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당황한 채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수동 항해 모드로 바꿔도 에어쉽들은 죄다 시스템이 먹통이 됐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어쉽들의 라이트를 다 꺼 놨기에 기억의 도시 내 주민들은 하늘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유림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유유히 걸어와 속삭이듯 물었다.

“낙원 전체를 멈춰야 믿어 줄 건가요?”

머뭇거리며 한 걸음 물러선 유림은 다시 한 번 하늘 위를 쳐다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다문 채였다. 유림은 멍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아니야, 됐어.”

그녀의 대답에 케이는 생긋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다행이네요. 시킬까 봐 걱정했는데.”

유림은 어이없다는 어투로 반문했다.

“뭐야, 그건 못해?”

“스마트 더스트를 이용해 왓슨을 통제할 순 있지만, 이건 일시적이고 물리적으로도 제한적이에요. 내가 있는 주변은 가능하지만 기억의 도시에서 바람의 도시에 있는 에어쉽을 떨어뜨리라고 명할 수는 없죠. 시도할 수는 있지만 관리자에게 걸리고 말 거예요.”

“스마트 더스트를 이용해서 왓슨을 통제한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

“스마트 더스트란 낙원 전체에 깔려 있는 미세먼지 같은 거예요. 이 보이지 않는 먼지 하나하나가 왓슨 본체에 연결된 시냅스 역할을 하고 있죠. 스마트 더스트를 통해 왓슨에 접속하면 부분적으로 통제권을 가져올 수 있는데 지속적이진 않아요. 각각의 시냅스들이 관여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에만 통하거든요. 관리자가 본체에 접속해서 해킹당한 시냅스들을 차단해 버리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죠.”

케이는 그 예시를 보여 주듯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에어쉽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느새 에덴 타워에서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정지되었던 에어쉽들은 승강장으로 강제 귀항하고 있었다.

“설마 스마트 더스트도……. 케이가 만든 거야?”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 유림은 알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을 두고 천재라고 하는 건가?

이런 엄청난 시스템을 만들어 내다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재능이었다.

“이만 갈까요?”

유림은 별똥별처럼 빠르게 하강하는 에어쉽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혼란이 가득한 밤하늘을 수놓는 불빛들. 그것을 즐기듯 관망하며 손을 털고 유유히 사라지는 남자. 그런 그의 손을 잡고 불안한 눈초리로 따르는 여자.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흘끗 뒤를 돌아본 유림은 멀리 보이는 에덴 타워를 응시했다. 고독한 첨탑은 어둠 속에서 등이 굽은 노인의 눈처럼 번뜩이며 홀로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뒤를 좇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기분이 오싹해진 유림은 케이의 등 뒤로 바짝 붙었다. 그러자 그가 곁눈질로 유림을 확인하더니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지켜보고 있어.”

그의 눈길이 유림이 불안하게 쳐다보는 쪽을 향했다. 꼭대기에서 붉은 경고등을 밝히고 있는 에덴 타워였다.

“아담, 그가 지켜보고 있어.”

케이의 눈동자가 호수처럼 말없이 일렁였다. 잔잔한 수면에 비친 그녀의 어깨가 새끼 짐승처럼 연약해 보였다. 전장의 성녀가 떨고 있다니, 다소 신선한 광경이었다.

“난 가끔 꿈을 꿔. 에덴 타워가 날 집어삼킬 듯 쫓아오는 꿈. 저 거대한 첨탑이 거인의 눈처럼 나를 쳐다봐.”

유림은 힘겨운지 잇새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끊어질 듯 이어 갔다.

“이곳은 악마의 낙원이야. 케이에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왓슨 3세와 스마트 더스트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케이는 유림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검은 낙원 속에 우뚝 선 에덴 타워를 응시하며 일말의 미련도 없는 눈빛으로 차갑게 말했다.

“내가 만든 낙원은 오래전에 죽었어요.”

존재 의의를 잃은 낙원은 추악하게 변질됐다. 애당초 이곳을 낙원이라 명명한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소녀는 매일 처절하게 고통받으며 몸부림쳤다. 그녀를 위해 만든 낙원은 그녀에게 있어 지옥보다도 끔찍한 철창이었다.

케이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림은 비로소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늘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처음으로 비릿하게 뒤틀린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녀는 안심했다. 이 미친 낙원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보다 더한 광기를 품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돌아가자.”

유림은 지친 기색으로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찝찝해 죽겠어. 얼른 샤워하고 싶어.”

“같이할까요?”

그는 그녀의 엉킨 머리칼을 다정하게 풀어 주며 짓궂은 음성을 덧붙였다.

“한배를 탄 기념으로.”

눈을 흘기던 유림은 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케이는 “윽.” 소리와 함께 허리를 꺾으며 다리를 잡았다.

“이따가 마사지나 해 줘. 오늘 고생은 다 너 때문이니까.”

“알았어요.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앞으로 모든 작전은 나와 상의하도록 해요. 오늘처럼 단독으로 행동하는 건 앞으로 더더욱 위험해질 거예요.”

유림은 대답 대신 입을 삐죽였다. 그녀는 정강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던 케이를 흘끗 보더니 그의 등에 냉큼 업혔다.

“업어 줘, 힘들어.”

그는 미끄러지는 그녀의 몸을 황급히 잡으며 제대로 등에 업었다. 유림은 이미 눈을 감고 그의 등에 뺨을 편안히 기댄 채였다. 졸지에 그녀를 업은 케이는 걸으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천하의 유림이 집 밖에서 남에게 몸을 맡긴 채 잠에 들다니.

그녀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의 등에 왼뺨을 대었다 오른뺨으로 바꾸기를 반복하며 몸을 비볐다.

최근 깨닫게 된 사실 중 하나인데, 유림은 굉장한 어리광쟁이였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호불호가 뚜렷하고 제 사람은 확실히 챙기는 성격이다. 게다가 한 번 마음에 든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소유욕을 확실히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본인을 예뻐해 주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애교와 응석을 부리는 여자였다.

신뢰받고 있는 걸까, 이 성질 사납고 제멋대로인 고양이에게?

─이곳은 악마의 낙원이야.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칼로 그은 듯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정곡을 찔려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맥없이 웃으며 말하던 유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럼 유림의 목숨은 누가 책임지죠?

─글쎄. 신께 맡겨야 하나?

신들은 낙원의 낮과 밤이 교차하듯 순백의 천사였다가 잔혹한 악마가 되기를 반복한다. 이곳은 그들의 이중적인 본성이 실물로 빚어진 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간은 탐욕스럽지만 한편으론 순진하기 그지없다.

낙원에서 신을 믿는 게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그들은 끝끝내 깨닫지 못할 것이다.

─죽지 마라, 중사.

잔잔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에 울려 퍼졌다.

케이는 등에 닿는 그녀의 아담한 온기를 어루만졌다. 잠든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는 밤하늘에 대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속삭이듯 말을 흘렸다.

“죽지 마요,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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