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3/21)

Chapter 2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돔 형식의 유리 천장은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처럼 은은한 광채를 내뿜었다. 낮게 깔린 배경음악은 두 달 전에 새로 제작된 ‘로스트 헤븐’의 공식 홍보 영상에 삽입된 멜로디였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낙원을 떠올리게끔 했다.

여자는 구불구불한 금발을 빗질하며 방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광고 영상을 틀어 놓은 채 배경음악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있는 방은 널찍한 타원형으로 침실과 거실이 통 유리벽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녀의 취향을 고려한 듯 소파와 카펫 그리고 이불까지 한 결같이 보라색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보라색 소파에 몸을 털썩 묻으며 허공에 검지와 중지로 ‘딱!’ 하고 핑거스냅을 했다. 그러자 전면의 유리 벽에 틀어져 있던 광고 영상이 정지 화면으로 멈췄다.

“아까 그거 틀어 봐.”

─ 영상 자료 A1TEST5225를 실행합니다.

이윽고 어두컴컴한 화면에 군복을 입은 여자 요원이 등장했다. 날렵한 체구의 그녀는 양손에 은색 검을 쥔 채 하수로 내부를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델타와 맞닥뜨렸다. 검은 머리칼의 여자는 은빛 쌍검을 얼굴 앞에서 엑스X자로 교차시키며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델타의 목을 그었다. 안면까지 베어 낸 그녀의 검에는 시뻘건 델타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훌륭한걸?”

시청각 자료를 감상하는 금발 여인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저 여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 소위 말씀이십니까?”

측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자는 미간을 구기며 옆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키에 낯익은 얼굴을 한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좌우에 장식된 책장을 구경하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불쾌하다는 눈초리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숙녀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무례하군요, 호크 대령.”

여자의 질책에 남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능청맞게 대꾸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이래서 군인은 싫다니까요.”

그녀는 연하늘빛 눈동자를 차갑게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그러나 여자의 따가운 눈총에 이미 익숙한 호크 대령이었다. 그녀는 그런 호크의 뻔뻔한 태도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곳을 자유자재로 출입하다 보니 마치 본인이 타워의 주인이라도 된 듯 행동하는 모양인데, 착각하지 말아요. 그가 당신을 총애하긴 하지만 에덴 타워의 주인은 엄연히 ‘낙원의 관리자’인 그 사람이니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자는 살굿빛 루주를 바른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표했다. 저 남자와 친구가 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거라 다짐하면서.

“그나저나 보시고 있던 영상은 기밀 자료인데 어떻게 접근하신 겁니까?”

호크 대령의 질문에 여자는 당황한 듯 눈이 커졌다. 기다란 속눈썹을 몇 차례 깜빡인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댔다.

“당신이 알 바 아니에요.”

“군사 기밀입니다. 게다가 저런 끔찍한 장면은 낙원의 요정께서 볼만한 게 못 됩니다.”

“저 여자가 전장의 성녀라 불린다면서요?”

호크 대령의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실력은 있어 보이네요. 꽤 마음에 들어요.”

“그렇습니까?”

괜히 질투심 많은 그녀의 반발을 살 수도 있으니 호크는 유림에 대한 불필요한 칭찬을 자제하기로 했다. 그는 단답형으로 답하며 뒷짐을 졌다.

“내 개인 경호병으로 두고 싶어요. 저 정도 실력이라면 당장 데려와도 손색이 없겠어요.”

“그건…….”

호크가 당황한 듯 대답을 망설이자 여자의 눈빛이 다시 사납게 돌변했다.

“뭐죠?”

“정유림 소위는 우수한 에이전트입니다. 특히 델타와의 근접 전투에 있어서 그녀의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그런 정 소위를…….”

“한낱 내 경호병 따위로 쓰는 건 인력 낭비라고 하고 싶은 건가요?”

호크는 한숨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자기애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낙원의 요정이 웬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갖나 했더니 번거롭게 되었다.

“말해 봐요, 호크 대령. 낙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죠?”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고 대답할까? 그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속내가 빤히 보인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자답했다.

“에덴의 주인을 위해 존재하죠. 에덴의 주인인 ‘그 사람’을 보필하는 게 곧 로스티아벤의 사명이란 걸 잊은 건 아니겠죠? 따라서 그의 연인인 날 보호하는 것 역시 낙원을 지키는 이들의 최우선 과제인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어요?”

“경호병이라면 더 우수한 병사들을 붙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크 대령이 달래듯 말하자 여자는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머리빗을 던졌다.

“됐어요! 난 내 경호병 하나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는 거예요?”

“제인!”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요.”

독기 품은 눈초리를 마주 보던 호크 대령은 짧은 목례로 사죄했다.

“용서하십시오.”

“나가요!”

히스테릭한 음성을 뒤로한 채 호크 대령은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밉상스러운 거구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제인은 팔짱을 낀 채 허공에 엄지와 검지로 다시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며 광고 영상이 틀어졌다. 로스트 헤븐을 배경으로 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에메랄드빛 바다에 발목까지 담그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로스트 헤븐.

선택받은 이들의 낙원.

이브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녀는 만족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전 세계에 배포된 홍보 영상은 낙원의 모델 ‘이브’에 대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백옥처럼 깨끗한 피부, 은발에 가까운 애시드 블론드 헤어, 카리브 해처럼 깊고 맑은 푸른 눈.

낙원의 홍보 모델 이브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녀는 ‘로스트 헤븐’을 파라다이스화시키는 데 성공적으로 일조했다. 광고에는 이브의 뒤로 수십 명의 아름다운 입실론들이 등장했다. 에덴 타워의 상층부에서만 볼 수 있다는 에덴의 꽃 입실론들. 선택받은 여인들이 존재하는 지상 낙원 ‘The lost heaven’.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로스트 헤븐 투어 티켓을 예매했다. 향후 10년은 이미 예약이 꽉 차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매년 한정된 인원뿐.

제인은 발레를 하듯 우아하게 양팔을 뻗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영상에 나오는 자신의 얼굴 표정처럼 몽환적인 눈빛을 지으며 차가운 비소를 입술에 걸었다.

‘내가 낙원의 안주인이 되면 당신부터 잘라 버릴 거야, 호크 대령.’

제인은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2100년 2월 28일 오전 8시】

특별수사대SITF 비공식 훈련 시작.

모래의 도시 내 신병훈련소 사격장 제1관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험악한 고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25m다, 애덤슨! 표적 자동화 기능을 활성화시키고도 성공률이 고작 사십 퍼센트라는 게 말이 되나? 유치원생들이 갈기는 오줌 세례도 귀관의 총탄보다는 정확하겠다. 한심하기는!”

유림은 인상을 쓴 채 연신 호통을 쳐 댔다.

“무기 제자리에!”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앙칼진 눈초리를 치켜뜬 그녀는 인정사정없었다.

“얼차려 실시.”

그는 유림의 눈치를 슥 살피더니 총기 보관함에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머리에 댄 채 쪼그려 앉았다. 매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유림은 팔짱을 끼고선 매몰차게 쐐기를 박았다.

“토끼뜀 열 바퀴, 십 분 준다.”

“네!”

“정신 못 차리지? 열 바퀴 돌고 목표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명중시킨다. 두 번 말하게 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멀리서 토끼뜀을 하는 케이의 대답이 메아리치며 돌아왔다.

“다음에도 빗나가면 스무 바퀴다!”

짐짓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던 유림의 붉은 입술이 피식 하고 말려 올라갔다.

“저렇게 운동 신경이 없어서야.”

전장에 나갔다간 총알받이되기 십상이다. 어떻게든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게 만들어야 할 텐데. 골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유림은 사격장 출입구가 열리자 흘끗 시선을 던졌다.

“이게 누구야. 정 교관 아니신가? 애제자와 사랑싸움 중?”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낯익은 음성에 유림은 잇새로 못마땅한 소리를 뱉으며 이마를 찡그렸다.

“필란 중위님.”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는 흑발에 창백한 안색을 지닌 아일랜드 출신의 군인, 셰인 필란 중위였다. 그는 심한 매부리코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가졌는데, 그 때문인지 잔인한 인상을 안겨 주었다. 유림은 경멸조가 담긴 눈초리로 셰인과 뒤따라온 병사 둘을 쏘아보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훈련 중입니다. 방해하지 말고 나가 보시죠.”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거 같던데? 아무리 기술 사병이라도 그렇지 저런 머저리를 어디다 쓰려고?”

셰인이 큭큭거리며 웃자 양옆에 서 있던 병사들도 토끼뜀을 하고 있는 케이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멀리서 착실하게 토끼뜀을 하고 있던 케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평의회 직속인 신생 부대라. 게다가 총지휘관은 그 유명한 호크 대령이시고. 앞길이 탄탄대로시네, 전장의 성녀님?”

“누구처럼 평의회 늙은이들 엉덩이짝 닦아 주며 따낸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언제 먼지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파리 목숨 부대일 뿐이죠.”

유림이 짐짓 슬픈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곡선으로 휜 그녀의 눈웃음엔 명백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 셰인은 뺨을 실룩거리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평의회 직속 부대끼리.”

그렇게 말한 셰인은 피식 웃으며 뒤에 서 있던 후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부사관은 허리춤에서 재빨리 권총을 꺼내더니 제지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탕!” 하고 발포했다. 총구에서 튕겨져 나온 탄환은 유림의 콧등 위를 스쳐 나선을 그리며 날았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던 케이의 뺨을 칼날처럼 벤 뒤 하얀 벽에 콱 박혔다.

부사관은 권총을 빙그르 돌려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후임의 솜씨를 흡족하게 지켜본 셰인은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그래, 사격은 이렇게 하는 거지. 저런 가짜 모형으로 백날 연습해 봤자 소용없다니까.”

유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뻣뻣한 목을 돌려서 케이를 쳐다보았다. 총탄이 스친 그의 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뺨을 손등으로 슥 문지르더니 별거 아니란 듯 빙긋 웃어 보였다.

“정 교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특별보안대로 들어오는 게 어때? 저런 녀석과 무슨 수사대를 꾸려 나가겠다는 거야? 델타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못 잡게 생겼구먼.”

“도를 넘으신 것 같습니다, 필란 중위님.”

유림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셰인은 코를 훌쩍이며 콧등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가 폭발하기 직전임을 눈치챈 듯했다. 그는 이쯤에서 물러간다는 어조로 손을 흔들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도우면서 살자고, 성녀님.”

셰인 일행이 낄낄대며 사라지자 유림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눈초리로 사격대에 올라 총을 잡았다. 그녀는 과녁을 향해 미친 듯이 총탄을 갈기며 거친 숨을 골랐다. 화가 쉽사리 가시지 않는 눈치였다. 케이는 그녀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뭐하는 사람이에요?”

“평의회가 기르는 충견들. 특별보안대라지만 의원들 친위대나 마찬가지야. 낙원의 꼭대기에 있는 녀석들 말이라면 뭐든지 할 놈들이거든.”

두 사람이 소속된 SITF와 업무적으로 교집합이 많아 앞으로 많이 부딪칠 것으로 예상되는 부대였다.

케이는 조각 같은 얼굴을 살짝 기울이더니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물었다.

“평의회를 제외하고 낙원의 꼭대기에 위치한 사람들이라면…….”

유림은 빈정거리듯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낙원의 요정인 이브라든지.”

“모델 이브요?”

그가 즉각 알아듣고 반문하자 유림의 눈이 슬쩍 커졌다. 그녀는 검은 총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사격대 아래로 내려왔다.

“너도 남자라 이거야? 하여간 사내 녀석들은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

유림이 입술을 모으고 삐죽거리자 케이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질투하는 거예요, 유림?”

“시끄러워, 아직 훈련 중이야. 그리고 훈련 중에 상관의 이름을 멋대로 부르지 말라고…….”

발끈한 그녀의 다음 말은 케이의 입술 사이로 먹혀 버렸다. 그녀의 입술을 삼킨 케이는 뜨거운 숨결 사이로 나긋하게 속삭였다.

“하여간 사내 녀석들은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죠.”

속눈썹이 참 길다. 반듯하게 뻗은 콧날도 아름답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케이의 얼굴은 정말이지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유림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그의 혀는 부드럽게 춤을 추듯 진입해 치열 사이를 훑기 시작했다. 목 뒤에서 머리칼을 살랑살랑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키스 이상은 언제 허락해 줄 거예요?”

그가 유림의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며 물었다. 귓속으로 침투한 혀가 짜릿한 전극을 일으키며 척수를 타고 엉덩이 골 사이까지 파장을 내보냈다. 유림은 허벅지 사이에 힘을 주며 생긋 웃고 있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붉은 입술은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채로.

그녀는 홱 돌아서며 어깨 너머로 그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입술에 총구를 물려야겠군, 중사. 그럼 아주 기가 막히게 쏠 텐데.”

“아쉽게도 여긴 소위님 전용이거든요.”

그저 립 서비스라는 걸 알면서도 입매가 고물거리며 풀렸다. 유림은 애써 헛기침을 하며 엄중한 목소리를 꺼냈다.

“휴식 끝. 위치로.”

상관으로 돌아온 그녀의 명에 케이는 사격대 위에 올라 헤드셋을 쓰고 총을 잡았다. 유림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그를 응시했다. 사뭇 진지하게 목표물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케이는 놀랍게도 자세 하나는 누구보다 깨끗했다. 오랫동안 체조를 해 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곧고 우아하다.

하긴 생긴 것부터가 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귀족적이지.

벌써 여군들 사이에선 유명인 뺨치는 인기를 얻은 모양이었다. 월간 밀리터리지인 『Victory』에서 인터뷰가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고. 그럴 법도 했다. 저렇게 총구를 겨누고 있을 땐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였으니까.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햇살에 부서지는 듯한 신비로운 눈매도 한몫했다.

─ 방금 전 그 키스는 뭡니까?

케이는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곁눈질로 사격장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확인하고선 불쾌한 눈초리를 지었다. 그는 유림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춘 뒤 잇새로 나직이 으르댔다.

“누가 멋대로 훔쳐보랬어?”

─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설마 정 소위에게 진짜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무슨 헛소리를…….”

탕!

경쾌한 발포음이었다.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던 유림은 눈을 번쩍 떴다. 케이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리다가 정면에 쓰러진 목표물을 보고선 표정이 굳었다.

그는 총을 내려놓으며 슬그머니 곁눈질로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의자 팔걸이를 잡은 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케이는 헤드셋을 벗으며 말없이 모르는 척 표정 관리를 했다.

“케이, 너…….”

유림은 경이롭다는 얼굴로 걸어오며 유리 벽 너머 제거된 목표물을 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녀는 케이의 어깨를 잡으며 활짝 웃었다.

“그것 봐! 집중하면 할 수 있잖아!”

미소로 가득하던 유림의 표정 위로 의아함이 번졌다. 그의 얼굴이 평소답지 않게 당혹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느른하게 웃으며 상이라도 달라고 입 맞춰 올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얼굴이 잔뜩 굳었다.

“아니, 이건 집중이 흐트러져서…….”

“뭐?”

그는 말실수라도 한 듯 하던 말을 멈췄다. 유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첫 명중이 부끄러운가 보지?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잘했어.”

케이는 일단 그녀를 향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섬뜩한 눈으로 헤드셋을 노려보았다. 헤드셋 너머로 들려온 헛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생각 없이 총구를 당긴 게 문제였다. 원래대로라면 목표물 근처에도 못 갔어야 할 총탄인데.

“25m 기본 사격 과녁은 가장자리도 못 맞추면서 80m 동체 사격은 어떻게 정확히 맞춘 거야?”

“운이에요. 소위님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거든요.”

유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말이 되냐는 얼굴이었다. 뭐, 상관없다. 운이어도 좋다. 그녀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섰다.

“어쨌든 계속해. 조만간 특보대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하니까. 오늘부터 특훈이다.”

“네?”

“특별 훈련이라고.”

유림은 몇 주 전 그가 훈련병 시절이었을 때 보였던 악마의 미소를 그리며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케이는 경직된 얼굴로 웃다가 복잡한 눈빛을 지었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 좋은 아침입니다, 애덤슨 중사님!

샤워를 마치고 나온 케이는 블랙커피가 든 머그잔을 들었다. 리사가 인사말을 건넸다.

─ 일어나셨습니까?

“소위님은?”

─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케이는 커피를 마시며 유유히 식탁 앞으로 걸어왔다. 식탁에 놓인 유리 화병 안에는 시든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눈초리로 말라비틀어진 장미를 잠시 바라보았다.

유림이 잠들어 있는 침실은 실내 채광과 온도가 여전히 수면 모드로 맞춰진 상태였다.

어제 케이는 처음으로 비행 목표물 사격에 성공했다. 유림은 크게 기뻐하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리사에게 맥주를 대령하라 시켰다. 잠시 후 그녀는 소파에 앉아 차가운 맥주 캔들을 연거푸 원 샷하며 “내일 오전 훈련은 취소다! 대신 모래의 도시에 갈 거니까 준비하도록!”라는 말을 던졌다.

취해서 발그레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던 그녀는 이윽고 속옷만 입은 채 곯아떨어졌다. 인사불성이 된 그녀를 업고 침대로 향하는 건 당연지사 케이의 몫이었다.

잠든 채로도 웃음꽃이 핀 유림의 얼굴을 보며 케이도 피식 웃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빨리 성공할 걸 그랬나?’

계산적으로 성공시킨 사격이었다. 이쯤 되면 한 발 정도는 맞혀야 그녀가 특훈에 집착하는 걸 그만둘 것 같았다. 아무리 운동 센스가 없는 녀석이라도 이런 무식한 훈련을 받으면 죽기 살기로 한 발 정도는 맞힐 듯했다.

그는 식탁에 앉아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하얀 식탁이 스크린 모드로 변환되면서 푸른 도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머그잔을 내려놓고 다시 도면 위를 터치했다. 이번에는 스크린에 떠 있던 설계도가 입체 도식화되기 시작했다. 푸른색 홀로그램 영상이 허공에 펼쳐지고 리사가 음성 안내를 덧붙였다.

─ 오늘 소위님과 함께 방문하게 되실 모래의 도시의 도면입니다.

거대한 나선형의 지하 도시. 상층부는 로스티아벤이 군 시설로 쓰고 있지만 하층부는 통제되지 않는 무법지대다.

이곳은 STF의 요원들도 가기를 꺼리는 지역이었다. 모래의 도시 최하층부에는 델타를 수감하는 수용소가 존재하는데, 입대 테스트에서 훈련병들을 죽인 델타들이 본래 감금되어 있던 곳이다.

델타의 운송은 잠수정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용소 옆에는 활주로와 이어진 전투기 격납고가 자리하고 있다. 케이는 입체 도면을 360도 회전시켜 둘러보며 꼼꼼히 둘러봤다.

“사건 당일 수용소 내 영상 자료는 남아 있지 않을걸?”

등 뒤에서 ‘하암’ 하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자,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유림이 졸린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서 있었다.

“증거를 폐기한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보다는 접근 권한이 높다는 거겠지.”

그녀는 또 속옷만 입은 모습이었다. 유림은 케이의 흘끗거리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왔다.

─ 좋은 아침입니다, 소위님.

리사가 밝은 어조로 인사했다. 유림은 “그래.”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식탁 앞에 섰다. 그녀는 케이의 손에서 머그잔을 낚아채 식은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케이는 피식 웃으며 식탁에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브래지어에 팬티만 입은 그녀의 몸은 육감적이었다. 적당한 탄력과 군살 없는 근육. 십일 자 복근에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의 라인까지.

“뭘 그렇게 봐?”

유림이 허리를 숙여 케이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그는 커피처럼 흐려진 눈동자에 생긋 미소를 담으며 답했다.

“유림을 만지는 내 손이요.”

그의 대답에 유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감쪽같이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손을 재빨리 뿌리쳤다. 그녀는 눈을 흘기며 그의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해커가 아니라 소매치기를 했어야 해.”

유림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스크린에 뜬 케이의 프로필을 훑었다. 전적이 화려했다. 보안을 뚫는 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세계 각국의 기밀 기관을 한 번씩은 털어 본 솜씨였다.

“이거 설마 왓슨 3세도 털어 본 거 아니야?”

“글쎄요.”

농담으로 던진 말에 그가 모호하게 답하자 유림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케이를 쳐다봤다.

“진짜 해 봤어?”

“로스트 헤븐의 보안은 명실상부 세계 톱클래스예요. 발표를 안 해서 그렇지, 실제로 왓슨 3세가 여태까지 해커들로부터 공격받은 횟수는 상상을 초월할걸요?”

“그래서, 성공했어?”

그는 구렁이처럼 능글맞은 웃음으로 답을 회피했다. 유림은 벌떡 일어나더니 앉아 있는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녀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고 등에 폴짝 업혔다.

“얼른 말하지 못해?”

“유, 유림!”

케이가 휘청거리자 유림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귀를 깨물었다. 그가 “윽!”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웃으며 그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벨트 버클을 열자 케이의 눈이 허공에서 움찔 정지했다. 그녀의 순진한 도발이 바짝 약 오른 이성의 끈을 탁 풀어냈다.

그는 등 뒤에 매달린 유림을 앞쪽으로 잡아당겼다. 케이의 팔에 잡혀서 빙그르르 끌려온 유림은 그와 마주 본 채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유림의 엉덩이를 식탁 위에 걸치고 두 허벅지를 벌려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기울여 깊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밀어내던 유림의 손도 차차 그의 목을 감았다.

달콤한 키스였다. 입술을 덮고 삼키며 다시 사탕을 머금듯 한 입에 맛보는 입맞춤. 살결을 빨고 무는 소리가 숨소리와 함께 야릇하게 섞여 나왔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방어벽을 뚫나 보지?”

“잘 아네요.”

“왓슨은 나처럼 키스로 녹일 순 없었을 텐데?”

“왓슨의 모델은 여성이에요.”

순간 유림의 눈이 반짝이며 또렷해졌다.

“왓슨 3세가?”

“아주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모델로 설계했죠.”

“그게…… 누군데?”

케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입술을 뗀 그는 뭔가에 홀린 듯 허공을 응시했다.

돌연 한없이 우울해진 그의 낯빛을 보면서 유림의 표정도 굳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유림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다가 머릿속에 즉흥적으로 떠오른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실체가 없는 인공지능에 모델까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야.”

얼빠진 듯 있던 케이의 시선이 유림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체가 없긴 왜 없어요.”

그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림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프트웨어에 관해선 하나도 모르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리사 같은 인공지능은 가상세계에서만 존재할 뿐이잖아. 청소형 로봇이나 메이드 로봇에 빙의하듯 탈 때도 있지만 그건 실체라고 할 수 없지.”

“왓슨 3세는 로스트 헤븐 그 자체예요.”

그는 고가의 조각품을 만지듯 그녀의 허리선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또한 로스트 헤븐도 왓슨 3세 그 자체죠.”

낙원의 먼지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는 슈퍼컴퓨터 왓슨 3세. 그녀는 지배자처럼 군림하며 이 섬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정원을 손질하는, 높다란 사다리 위의 정원사처럼.

유림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어렵고 철학적인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식탁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의 쭉 뻗은 팔과 단단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흡족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도 꾸준히 운동은 하나 봐? 몸은 STF 요원들 수준이야.”

“유림의 몸도 환상적이에요.”

케이가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만지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조금 잠긴 듯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육감적으로 울려 퍼졌다. 귓속을 간질이는 그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와 척추 사이에 짜릿짜릿한 자극이 흘렀다. 유림은 가슴을 향해 올라오는 케이의 손을 덥석 잡더니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초리를 반쯤 접으며 그의 얼굴에 바짝 다가와 유혹적인 미소로 속삭였다.

“신체적 교감은 내가 원할 때 해.”

어련하실까. 어떤 상황에서든 고삐를 쥔 사람은 본인이어야 하는 여자였다.

“중사는 내가 원할 때 응해 주면 되고.”

“아…… 예.”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유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날렸다.

그녀가 콧노래와 함께 욕실로 사라지자 케이는 허탈한 듯 벽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가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서 리사의 음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 또 실패하신 모양입니다.

그는 피식 웃더니 싸늘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실패라니, 아직 시작한 기억도 없는데.”

리사는 침묵했다. 인공지능인 그녀는 비록 감정을 느낄 순 없지만 감정 측정 능력은 탁월했다.

그녀는 그가 단 한 번도 기쁨, 설렘, 행복 등의 온색 감정을 표현하는 걸 목격한 바가 없었다. 그는 늘 고요한 호수처럼 일정한 온도로 잔잔했다. 그와 안드로이드를 나란히 세워 놓는다면 겉보기 정보만으로는 구별하기 힘겨울지도 몰랐다.

절제력이 완벽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건 인공지능인 그녀조차도 계산의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케이는 짙어진 눈을 비스듬히 깔며 유림이 사라진 쪽을 곁눈으로 가리켰다.

“어젯밤부터 계속 방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진짜 늦잠을 잔 건 아닐 텐데.”

─ 새로이 팀에 합류할 후보자들의 프로필을 최종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흐음…….”

그는 유리 표면처럼 매끄러운 눈동자를 반쯤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보자 정보를 교란시키도록.”

─ 좀 더 구체적으로 명령해 주시겠습니까?

“당분간은 내가 그녀와 단둘이 팀을 할 수 있도록 팀원 보충을 지연시키란 뜻이다.”

케이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설명했다. 리사는 그제야 이해한 듯 재빠르게 답했다.

─ 알겠습니다.

한편 욕실에서 나온 유림은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말했다.

“후보생들 프로필 열어 봐.”

신생 부대인 특별수사대의 팀원은 현재 단둘뿐이었다. 인력이 전적으로 부족한 상태. 따라서 새로운 팀원을 선발하는 게 급선무였다. 되도록 유능하고 다방면에서 우수한 인재로 말이다. 따라서 유림은 일단 급한 대로 호크 대령이 뽑아 놓은 목록부터 검토하고 있었다.

리사는 거울을 에워싼 채 허공에 프로필들을 띄웠다. 유림은 젖은 머리를 틀어 올리며 한 병사의 프로필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전투복을 입을 때나 착용할 법한 스포츠 브라를 입었다.

“이 녀석, 최근 전투 기록 영상들 좀 추려 놔.”

─ 알겠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동요로 일렁였다.

성인 남녀가 폐쇄된 공간에서 함께 지내면 성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고 순리였다. 호르몬이 유도하는 끌림에 감정적인 소모를 하지 않는 게 효율적이라는 건 이미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지론. 그럼에도 매번 그와의 접촉에 어린 소녀처럼 긴장하고 설레는 스스로의 모습이 못마땅한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의 상관이었다. 뭇 병사들이 우러러보는 전장의 성녀이며 로스티아벤 내 월간 잡지 『실드』에서 남성 에이전트들이 뽑은 ‘가장 섹시한 여자 1위’에 몇 번이나 오르기도 했다. 성적인 매력은 그녀에게 있어 우수한 전투 능력과 함께 곧 또 하나의 무기였다.

군에서 여성이란 입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남성들은 호시탐탐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볼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놀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선제압이 필수였다. 적당한 유희를 바란다면 기꺼이 응해 주겠다. 단, 고삐를 쥐고 흔드는 것은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

‘그저 어수룩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처음에는 그저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유희일 뿐이었다. 이 정도로 근사한 외모의 사병은 보기 드문 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놀려먹는 재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늘 뻔뻔하게 생긋 웃고 있는 케이의 모습에 그녀가 점점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는 불호령 하나에도 꼼짝 못하는 주제에, 야릇한 분위기만 되면 냉큼 주도권을 채 간다.

유림은 동그란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심기일전을 하듯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방문 밖으로 나섰다.

통유리로 된 거실 벽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엔 대기 중인 에어쉽이 보였다. 하얀 에어쉽 옆에는 케이가 집사처럼 곧은 자세로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림은 에어쉽에 올라타며 명했다.

“출발해.”

케이도 이어서 탑승하자 풍뎅이 날개처럼 열려 있던 에어쉽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리사의 얼굴이 전면 유리 위에 입체 형상으로 나타났다.

─ 어서 오십시오, 소위님. 목적지를 지정해 주십시오.

“모래의 도시. 늘 가던 곳으로.”

─ 정거장 SC03으로 이동합니다.

리사는 에어쉽의 자동 항해 시스템의 목적지를 세팅한 후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유림은 눈을 감으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짧은 휴식을 취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케이는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았다. 날씨가 좋았다.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삭막한 지하 도시로 가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쾌청한 하늘이었다.

“이런 날에는 비키니를 입고 해변에서 선탠을 즐기며 술이나 들이켜는 게 정석인데.”

유림이 팔베개를 한 채 중얼거렸다. 아쉽다는 어조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건조했다. 전쟁터를 앞둔 병사가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총구를 겨누듯 묘하게 비장한 각오가 어린 기색이었다.

“그래서, 오늘 방문의 목적은 언제쯤 말해 줄 생각이에요?”

케이는 부드러운 어조로 짐짓 자연스럽게 물었다. 유림은 방어적인 자세로 앉아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요히 입술을 열었다.

“모래의 도시 하층부는 일명 개미집이야.”

로스트 헤븐 내 불법 체류자들과 범법자들이 암암리에 스며든 이곳은 심지어 왓슨 3세의 감시망에서도 권외였다.

‘왓슨의 눈’은 기본적으로 스마트 더스트Smart Dust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스마트 더스트는 극도미세입자보다도 작은 에너지원으로 인체에 무해한 에너지파 센서였다. 이 스마트 더스트는 낙원을 우산처럼 감싸며 ‘왓슨의 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왓슨 3세는 낙원 내 존재하는 수많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있어. 스마트 더스트가 미세한 정보 하나까지도 절대 놓치지 않기에 낙원의 치안이 이만큼 완벽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스마트 더스트가 통용되지 않는 곳들이 간혹 존재하는데…….”

“이를테면 모래의 도시 하층부라든지?”

케이가 눈치채고 반문했다. 유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갔다.

“모래의 도시 하층부는 정식 정거장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에덴 타워와 이어진 전산망과 통신망들은 모두 단절된 상태야. 이곳에 거주하는 고스트Ghost8)들은 식량과 마약, 무기 등을 화폐로 이용하고 있지. 물물거래 시장과 비슷한 것 같아.”

“바로 위인 모래의 도시 상층부에는 용병대인 ‘로스티아벤’이 있는데, 그들은 왜 고스트들을 내버려 두고 있는 거죠?”

케이가 물었다. 아직 낙원의 실정에 대해 잘 모르니 의문을 가질 법도 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걸 귀찮아하는 유림이지만 웬일인지 이번엔 친절한 어조로 답해 줬다.

“고스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어. 수는 많아졌는데 전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지. 그들은 ‘로스티아벤’ 내부에도 잠복해 있다고 해. 뿐만 아니라 낙원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는 것 같고. 말 그대로 유령Ghost이 돼 버린 거야. 모래의 도시 하층부에는 그들만의 룰이 생겨난 지 오래야. 낙원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스트들을 통제하는 집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정도가 돼 버린 거지.”

“고스트들을 통제하는 집단이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범법자들에게도 위계질서는 있는 법인가 봐. 그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자들이 존재하는 건 분명해.”

바로 이게 오늘 두 사람이 모래의 도시를 방문하는 목적이었다.

“그 녀석들이라면 아마 누가 델타를 시험장에 풀었는지 알고 있을 거야. 모래의 도시의 실질적인 주인인 ‘유령의 군주’라면 말이지.”

유령의 군주.

유림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두고 그렇게 표현했다.

케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스트니, 유령의 군주니, 범법자들의 질서니 하는 얘기들이 그에게는 딱히 큰 문젯거리로 다가오지 않는 듯했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은 무심했다. 권태에 젖은 채 세상을 굽어보는 무료한 이처럼 그는 공허한 눈으로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응시했다.

빠르게 하늘을 주행하던 에어쉽이 하얀 터널을 지나 모래의 도시에 진입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모래의 도시의 다운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정거장 SC03에 정차했다.

─ SC03입니다. 발판을 확인한 후 안전하게 하차해 주십시오.

유림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타이트한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 배지도 달지 않고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는 평범한 이십 대 여성처럼 보였다. 케이 역시 제복을 벗고 하얀 셔츠에 검은색 팬츠를 입은 채 모자를 눌러썼다.

“‘울부짖는 인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림은 단골 선술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침없는 어조로 주문부터 던졌다.

“21세기의 추천 메뉴 B.”

─ 21세기의 추천 메뉴 B를 선택하셨습니다.

케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유유히 주위를 구경했다. 유림은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내부를 관찰하더니 마지막으로 광선 메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런 고전적인 느낌의 선술집을 좋아하나 보죠?”

“좋잖아. 옛 생각 나고.”

“옛 생각이라면, 로스트 헤븐에 오기 전 말인가요?”

유림이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녀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한 채 그를 쳐다보았다. 케이는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림은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슥 걸어갔다.

“유림?”

그의 중저음 목소리는 이따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정곡을 찌르곤 했다. 그것은 설명하기 힘든 케이만의 매력이기도 한데, 지금처럼 투명한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다가 눈웃음을 칠 때 더 강하게 발휘되곤 했다. 부드럽고 예의 바른 어투. 그러나 묘하게 육감적인 음성.

유림은 케이의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멋쩍어진 그녀는 괜히 큰소리로 웨이터를 불렀다.

─ 주문하시겠습니까?

테이블에서 웨이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간단하게 하우스 맥주를 시켰다.

─ 다른 음식을 함께 주문하시겠습니까?

실물로 존재하는 웨이터나 바텐더는 없다. 선술집 자체가 거대한 인공지능이며, 손님 하나하나의 바이오데이터를 확인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유림은 케이를 다시 흘끗 쳐다보았다. 웨이터가 음식 주문을 재촉할 때에는 이유가 있었다. 손님이 공복상태라는 의미다. 결국 케이는 유림이 아까부터 아쉬운 듯 바라보던 ‘21세기의 추천 메뉴 A’를 함께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유림은 말없이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반면 케이는 의자에 기대고 앉아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유림.”

“왜?”

그녀는 고개도 숙인 채 대답했다. 속마음을 들킨 소녀처럼 툴툴거리는 기색이었다. 케이의 눈에 쿡 미소가 스쳤다. 그러다가 뭔가 발견한 듯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뒤에 누가 와요.”

유림은 흘끗 뒤를 돌아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불쾌한 눈초리로 포크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남자 둘이 건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둘 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었다.

한 명은 백인으로 머리를 삭발한 채 관자놀이부터 목까지 문신을 새겼다. 적어도 6피트는 넘는 신장에 우락부락한 어깨와 팔 근육이 제법 험악한 인상을 선사했다.

다른 한 명은 마른 체격의 흑인이었다. 그는 한쪽 눈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옆의 녀석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데다가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거인이었다.

“어이, 형씨들.”

마약상이다. 모래의 도시에선 종종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유림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그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울부짖는 인어에는 꽤 자주 얼굴을 비추는 그녀인 데다가 모래의 도시에는 군인들도 많이 돌아다녀서 가끔 안면이 있는 이들과 마주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녀가 브루클린의 성녀란 걸 알면 애당초 접근해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이들은 유림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좋은 게 있는데 흥미 좀 있나?”

“좋은 거?”

유림이 흥미가 동한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자 남자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들은 주위를 슥 살피더니 허리를 숙이며 나직이 물었다.

“단속 나온 참새들은 아니겠지?”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유림은 콧방귀를 뀌며 너스레를 떨었다. 흑인 남자가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올리더니 그녀의 망막을 재빠르게 스캔했다.

─ 일치하는 주민 정보가 없습니다.

유림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췄다. 그러자 백인 남자는 오해하지 말라는 투로 손사래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와 신장이 비슷한 케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아무도 모르게 스마트 워치와 주머니 속을 오가며 바삐 움직이는 중이었다.

“요즘 단속이 심해서 말이야. 위에서 자꾸 짹짹이들을 보내거든.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우리도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대신 최상급으로 주는 거야.”

“당연하지, 우리를 뭐로 보고.”

그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오라는 눈치를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림은 케이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휘둥그레 뜬 눈을 보였다. 케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자 그녀는 감탄한 듯 피식 웃었다.

대체 그 짧은 순간에 주민 정보는 어떻게 건드린 건지, 감쪽같은 솜씨였다.

마약상들을 따라 어두운 철거 구역 사이사이를 걸은 지가 이십여 분.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늘 아래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을 이끌고 온 대머리 문신의 사내는 누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이쪽이다.”

후미진 뒷골목에 위치한 구식 철조 건물이었다. 전기마저 끊겼는지 사방을 둘러봐도 빛줄기 하나 없었다.

텁텁한 연기와 메스꺼운 쓰레기 더미 사이에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대마를 피며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신분 확인 절차는 비밀스럽지만 간단했다. 삐쩍 마른 남자가 잔뜩 엉킨 수염을 손가락으로 풀면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암호는?”

그러자 백인 마약상이 낮게 중얼거리듯 답했다.

“낙원의 여름…… 오베론의 꿈.”

“통과.”

유림은 얼핏 들은 암호 문구를 곱씹으며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요즘에도 저런 출입구가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낡고 오래된 쇠문이 수동으로 조작되어 열렸다. 마약상은 씩 웃더니 유림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속삭였다.

“‘화이트 채플’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것을 본 케이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의 엉덩이를 주무른 사내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림은 잇새로 욕설을 지껄이며 남자가 사라진 쪽을 노려봤다.

“망할 놈, 얼굴 외웠어. 다음에 와서 곤죽으로 만들어 줄 거야!”

“지켜보는 눈이 많아요, 유림.”

케이는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달랬다. 그리고 방금 전 사내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며 투명한 눈동자를 무표정하게 식혔다. 유림은 다음에 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녀석의 존재 자체가 먼지처럼 사라져 있을 테니까.

정말 마약을 사러 온 게 아니니 마약상들을 계속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두 사람은 곧장 화이트 채플 중심부로 들어섰다.

유림은 이마를 짚으며 ‘맙소사!’를 외쳤다. 범법자들의 원더랜드라는 화이트 채플. 소문으로는 익히 들어왔지만 눈으로 직접 실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거대한 돔 형식의 철조 건물은 본래 종교상의 목적으로 설계된 것으로 보였다. 냄비를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의 천장은 반은 크리스털로 나머지 반은 허물어진 채 철골만 남아 있었다. 바닥은 하얀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는데 2층부터는 작업을 하다 말았는지 철골과 어설픈 판자들로 마무리해 놓은 상태였다.

중앙에서 도르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돔의 크리스털 천장에 이어진 도르래에서 철창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와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철창 안에 델타가 갇힌 채 으르렁대는 게 보였다. 높다란 천장에는 수십 개의 철창들이 매달려 있었다. 각각의 쇠창살 너머에는 델타들이 손발에 쇠고랑을 찬 채 감금되어 있었다. 유림은 희열에 찬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케이, 제대로 온 것 같아.”

“조심해요, 유림.”

그가 예리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며 경고했다.

“이곳은 왓슨의 눈이 닿지 않는 공간이에요. 모든 게 21세기 초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 말인즉슨 해커인 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유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안간 분위기가 떠들썩하게 돌변했다. 두 사람은 군중이 모인 쪽을 바라보았다.

“다들 모이셨습니까!”

검은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소리쳤다. 운두가 높은 마술사 모자에 연미복을 입은 남자는 기다란 지팡이를 휘두르며 2층 발코니에서 요란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드디어 여러분께서 고대하시던 날이 돌아왔습니다. 여기 여러분께서 보시는 녀석이 바로 ‘살육자’라 불리는 ‘델타7’입니다!”

어디선가 팡팡 폭죽 터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낮게 내려온 철창 속의 델타가 울부짖으며 쇠창살을 잡고 흔들었다.

“오늘 밤 자정, 화이트 채플의 아레나9)에서 살육자와 챔피언의 타이틀 방어전이 열립니다!”

“살육자!”

“살육자!”

군중들은 발을 구르고 맥주잔을 부딪치며 환호했다. 그들은 ‘델타7’의 칭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사회자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철창 밑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무대인 듯했다. 쇠판이 뜨겁게 달궈지자 델타7은 괴로운 듯 펄쩍 뛰며 엄니를 드러내고 고통을 부르짖었다.

유림은 경멸 어린 표정으로 눈 밑 근육을 실룩거렸다. 그녀는 재빠르게 군중들을 훑어보았다. 헤진 옷을 입고 모자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녀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그들은 ‘로스티아벤’ 소속 병사들이었다.

“마약과 도박이라.”

명백한 군율 위반이다. 갈증이 온 유림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훑었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 간파한 케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구시대적 주문 방식이에요. 웨이트리스가 펜과 메모지를 들고 직접 주문을 받는 거죠.”

유림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가슴골을 훤히 드러낸 채 사내들과 몸을 문대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웨이트리스였다. 남자들은 허벅지까지 말려 내려간 여자의 스타킹에 팁으로 탄약을 꽂아 넣고 있었다. 낄낄대며 웃는 그들은 군인이었다. 군수자원이 지하수처럼 흘러 모래의 도시 사이사이로 빠져나간다. 평의회와 낙원의 관리자는 정녕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유유자적 걸어간 케이가 어느새 웨이트리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유림은 괜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곁눈질로 그들을 관찰했다.

“브루클린의 성녀께서 화이트 채플까지 어인 발걸음이십니까?”

등 뒤에서 불쑥 낯선 목소리가 등장했다. 유림은 재빠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총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몸을 반 바퀴 돌려 등 뒤 사내의 목에 총구를 갖다 박았다.

남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턱 바로 밑 피부에 차갑게 와 닿는 총구를 흘끗 내려다보고선 얼어붙었다.

“누군데 날 알고 있지?”

유림이 속삭이듯 위협했다. 인상을 쓴 그녀의 미간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워워, 진정하십시오. 이래 봬도 기자입니다. 전장의 성녀 얼굴쯤은 알고 있다고요.”

“기자?”

“네, 낙원 뉴스 특별보도부 편집장 조셉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조셉은 해맑게 웃었다. 어두운 피부색과 흑발,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는 중동계 쪽 유대인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 마른 체격이지만 웃을 때 깊게 파이는 보조개가 선해 보이는 인상을 더해 주는 남자였다. 다만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제외한다면.

“그럼 조용히 가던 길이나 가는 게 좋아. 내 쪽에 기웃거려 봤자 건져 낼 가십거리 따윈 없을 테니까.”

유림은 사나운 눈초리로 경고하며 총구를 거뒀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정치인과 기자들한테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편이었다.

한편 케이는 웨이트리스에게 직접 주문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유림과 함께 있는 조셉을 보고선 걸음을 멈췄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입대 테스트의 사고, 오리지널 델타였다죠?”

조셉을 무시하고 가려던 유림의 발걸음이 멈칫 주춤거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침묵 어린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게다가 시험장을 폐쇄하고 재접속하려는데 시스템이 ‘관리자 권한’을 요구했다고요.”

그녀의 표정이 점차 안 좋게 변해 갔다. 유림은 싸늘함을 넘어서 험상궂게 변한 눈빛으로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조셉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편한 곳을 긁어 댔다.

“대체 누가 델타를 푼 걸까요? 델타 수용소에서 빼돌린 건 확실한데 말입니다. 저 천장에 매달린 철창에 갇혀 있는 델타들은 또 어디서 온 걸까요? 소위님께선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크윽!”

조셉은 유림에게 멱살을 잡힌 채 쿨럭거렸다. 그녀는 오른 손으로 그의 숨을 조이며 붉은 입술에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네가 군사 기밀을 어디서 주워듣고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맹이만 도려서 내뱉도록.”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유림의 이마가 천천히 누그러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래의 도시의 범법자들은 ‘오베론’이라는 조직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델타를 가지고 도박 경기를 벌이는 것도 오베론의 짓입니다.”

오베론.

어디선가 들어 본 단어였다.

─낙원의 여름…… 오베론의 꿈.

화이트 채플에 들어설 때 마약상이 문지기에게 건네던 암호.

유림은 조셉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었다. 그녀는 유유히 팔짱을 낀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층 풀어진 그녀의 눈빛은 비로소 대화할 마음이 생긴 기색이었다.

“그럼 오베론이 입대 테스트 시험장에 델타를 풀었다는 거야?”

“아마도요.”

“왜?”

“누군가 시키지 않았을까요?”

“누가?”

“그걸 제가 알았다면 벌써 뉴스에 특종으로 보도하고 있겠죠.”

정작 중요한 건 모른다는 소리잖아.

유림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조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왓슨 3세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은 모래의 도시만이 아닙니다. 낙원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 협력하며 공생 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력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왓슨의 눈을 완벽하게 피하는 게 점차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유림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지금 낙원의 불법 체류자들인 고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카더라’로만 듣던 유령의 군주의 실체에 대해 이렇게 상세히 듣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정보를 어떻게 수집했는진 모르겠지만 로스티아벤에서도 들을 수 없던 이야기다.

“에덴 타워 측에 이들의 조력자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게 누군지 그 숫자가 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베론을 비롯한 어둠 속 세력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죠.”

유림은 골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짓더니 짤막한 결론을 내렸다.

“일단 오베론의 수장을 만나야겠어.”

“오베론의 수장은 만나기 쉬운 자가 아닙니다.”

그는 검지로 뺨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죠.”

“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을 좋아해.”

그녀는 도발적인 눈빛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조셉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본능적으로 남자의 승부욕을 건드릴 줄 아는 여자였다.

“소문에 의하면 오베론의 수장은 화이트 채플에서 열리는 도박 경기에 매번 참석한다고 합니다. 물론 실제로 봤다는 사람과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어디선가 관람을 하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게 뭔데?”

조셉이 능글맞은 눈빛으로 뜸을 들였다. 유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여간 기자와 정치인 놈들은 하나같이 음흉한 녀석들이다. 이들이 비싼 혀를 놀릴 땐 반드시 거래가 필요했다.

“공짜는 없다 이거군.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

조셉의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춘 채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노아 호크 대령님과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십시오.”

“대령님과?”

“그리고 또 하나. 조력자의 윤곽이 드러나면 제가 단독 보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 또한 소위님께 제가 가진 모든 정보를 공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특종은 폭탄이야. 기자 양반이 다칠 수도 있어.”

유림이 혀를 차며 경고를 섞었다. 그러자 조셉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미묘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저희 두 사람, 이미 시한폭탄을 실은 배에 승선하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타이타닉 호와 진배없죠.”

유림의 눈빛이 서서히 침몰하듯 일렁였다. 이 녀석, 그저 평범한 기자가 아니다.

예리한 눈썰미와 현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무엇보다…… 이 남자는 낙원의 양면성을 고발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별안간 그가 마음에 들었다. 낙원 뉴스의 조셉이라, 외부의 생쥐 한 마리 정도는 알아 둬도 괜찮지 않을까? 조만간 이자에 관해서 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건은 약속할 수 없지만, 대령님과의 인터뷰는 한번 검토해 보도록 하지.”

“검토가 아니라 약속을 해 주셔야죠.”

“정보부터.”

두 사람은 잠시 치열하게 눈싸움을 했다. 아니, 기 싸움이다. 조셉은 감탄했다. 고양이처럼 치켜세운 그녀의 눈초리는 고집스러웠다. 쉽게 물러서지 않는 뚝심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예쁘장한 눈매에선 전장의 성녀가 아닌, 전장의 마녀라고 봐도 무방할 독살스러운 기색까지 엿보였다. 그저 폼으로 거친 로스티아벤 병사들의 교관 노릇을 해 온 게 아니었다.

결국 그는 피식 웃으며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오늘 열리는 도박 경기에 소위님께서 선수로 참여하시면 됩니다.”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유림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챔피언이 되면 오베론의 수장 및 간부들과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되지 못하면?”

조셉은 당연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델타의 엄니에 갈기갈기 찢기겠죠?”

유림은 철창에 갇혀 있는 ‘델타7: 살육자’를 쳐다보았다. 평범한 녀석은 아니었다. 몸집도 비정상적으로 큰 데다가 굉장히 흉포했다. 고문과 조롱으로 잔뜩 흥분해 있는 상태인 걸 보니, 본경기 땐 눈이 뒤집혀서 상대에게 덤벼들 것이다.

“챔피언이 되면 어마어마한 상금을 획득하게 됩니다. 게다가 오베론의 간부가 될 자격까지 주어진다고 하니, 여기에 목숨을 거는 고스트들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일단 선수 등록을 하는 게 우선입니다.”

유림은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델타와의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은 대개 고스트들 사이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녀석들이죠. 다들 이 바닥에서는 깨나 인정받는 주먹들이란 소립니다.”

“고스트들에게 인정받아야 경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야?”

유림은 ‘흐음’ 하고 팔짱을 꼈다. 병사들이나 건달들이나 힘의 우열을 가리는 섭리는 비슷했다. 일명 동물의 왕국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지배받는 세계. 그녀로서는 친근한 방식이었다.

“나쁘지 않네.”

그녀의 입가엔 이미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셉은 턱짓으로 델타7이 갇혀 있는 철창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유난히도 많은 군중들이 몰려 있었다. 거칠어 보이는 남자들이 맥주잔을 든 채 환호하며 원을 그린 게 보였다.

“벌써 시작된 것 같군요.”

조셉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마치 에스코트를 하듯 정중한 자세였다. 그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던 유림은 마지막 확인차 물었다.

“그런데 호크 대령님은 왜 만나고 싶다는 거야?”

조셉은 느긋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정치적인 이유에서죠. 지난 몇 년간 최전선에서 화려한 실적을 올린 호크 대령은 최근 군부 쪽에서는 신세력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자로서 줄을 연결해 놓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군부의 신세력.

유림은 조셉의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정 힘드시다면 브루클린의 성녀와의 단독 인터뷰도 좋습니다.”

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불쑥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던 유림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조셉의 입술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 나타난 그림자 하나가 불쑥 팔을 뻗어 둘 사이에 차가운 맥주잔을 들이댔다.

“주문하신 기네스 두 잔 나왔습니다.”

남자는 유림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그녀가 뒤로 주춤 끌려가자 그는 재빨리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들고 있던 맥주잔에서 맥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조셉은 축축해진 등을 더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빈 맥주잔을 든 채 생긋 웃고 있었다. 그의 등에 쏟고 남은 맥주가 투명한 잔 위에 방울방울 맺힌 게 보였다.

“이봐, 조심해야지!”

조셉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소리쳤다. 웨이터인가 싶어 돌아본 유림의 눈이 커졌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투명한 눈동자. 케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손님? 화장실은 저쪽입니다.”

그는 쏟아진 맥주로 인해 끈적끈적해진 조셉의 손을 잡고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쫓아냈다. 조셉은 맥주로 엉망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일단 유림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잠시 후 이어서 할까요?”

“그러죠.”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은 순식간에 인파 속에 섞여 사라졌다.

그녀는 높다란 테이블에 팔걸이를 한 채 기댔다. 그리고 비딱한 눈으로 케이를 응시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누가 두고 간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조셉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셉과 부딪쳤던 팔을 만지작거리며 섬뜩한 눈초리를 지었다. 유림은 그의 낯선 모습에 입을 막 떼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낙원 뉴스의 기자래.”

“기자요?”

케이는 기자가 그녀에게 무슨 볼일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유림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방금 전 조셉을 향하던 그의 살기 어린 눈초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케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누군지 알아보더라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데, 확인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

“기자인 건 확실한가요?”

“글쎄. 지금 당장은 확인할 수 없으니…….”

유림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넘겼다. 그녀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손등으로 턱을 훔쳤다.

“따라 와.”

“유림? 어디 가는 거예요?”

느닷없이 성큼성큼 움직이는 유림을 보며 케이는 그녀의 손을 저지하듯 잡았다. 그러자 유림은 걱정 말라는 듯 이를 드러내고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선수 등록하러.”

그녀가 곁눈질로 가리킨 곳에서는 흡사 싸움판과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맥주잔을 들고 모여 있는 관중들의 중심에선 두 남자가 혈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유림은 잔뜩 얼어 있는 그의 어깨를 치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유림, 설마…….”

“걱정 마, 너보고 하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빛냈다. 엉덩이에 꼬리를 붙이고 고양이 귀를 한 웨이트리스 하나가 손님과 지분거리며 깔깔대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그녀가 벗어 놓은 고양이 가면이 뒹굴고 있었다. 가슴골을 훤히 내놓은 웨이트리스는 근육질 남자와 키스를 하며 몸을 비비느라 가면을 도둑맞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유림은 고무 밴드로 된 고양이 가면을 얼굴에 쓰고선 어깨를 스트레칭하며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녀를 말리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 케이는 쓴 미소를 머금었다. 점차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있었다.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여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서서 팔짱을 꼈다. 그러다가 문득 감지된 시선에 고개를 돌려 슥 왼편의 발코니 쪽을 올려다보았다. 붉은색 벨벳 커튼 틈새로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자자, 오늘 밤 화이트 채플을 대표할 기사는 이대로 ‘블랙 피스트’가 되는 걸까요?”

발코니 위에 선 사회자가 양팔을 쫙 펼치며 고양된 어조로 소리쳤다. 격투가 벌어지는 건 그의 발밑이자, 델타7이 갇혀 있는 철창 아래였다.

벌써 연달아 세 명의 남자를 쓰러뜨린 거구의 사내는 거의 어린애 머리통 크기만 한 주먹을 내보이며 울부짖었다.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주먹 하나로 상대의 턱을 부숴 버리는 그의 괴력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대를 걱정하거나 동정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블랙 피스트는 과연 새로운 챔피언이 될 수 있을까요? 살육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블랙 피스트의 주먹을 피하기란 쉽지 않을 듯하군요.”

거인처럼 커다란 사내는 검게 그을린 주먹을 내보이며 발을 굴렀다. 테이블과 술잔들이 흔들릴 정도로 땅이 울리고 바닥의 먼지가 일었다.

“흐음, 검은 주먹이라서 블랙 피스트?”

낭창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군중은 놀란 얼굴로 파도처럼 갈라졌다. 그곳엔 잘록한 허리를 내보이며 선 유림이 쿡쿡 웃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입술 옆에 마이크를 장착한 사회자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맞이했다.

“이런, 새로운 도전자의 등장 같군요. 화이트 채플에선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이렇게 예쁜 고양이가 있었나요?”

누군가 술에 취해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을 불며 희롱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자는 들어가!”

“대신 우리가 예뻐해 줄게.”

사내들은 가냘프지만 탄력적이고 육감적인 그녀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쁜 고양이님, 당신을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기다란 운두모를 쓴 마술사가 발코니 위에서 묻자, 유림은 그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뒀다. 그녀는 땅을 짚고 제비 돌아 무대의 중심으로 살포시 착지했다. 마치 리듬체조를 하듯 가볍고 아름다운 몸놀림이었다.

일순 관중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내뱉었다. 정적과 긴장 속에서 그녀는 여유롭게 다리를 쭉 찢어 스트레칭을 하듯 허공에 올려 보냈다. 그리고 웃음 밴 목소리로 나긋하게 답했다.

“데드캣.”

한편 반대편 발코니에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남자가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다가와 물수건을 건넸다. 그는 맥주로 끈적끈적해진 손을 닦아 내며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예상대로 행동해 주고 있었다.

“이봐, 보수는?”

걸쭉하게 쉰 목소리가 벨벳 커튼 뒤에서 들려왔다. 유림과 케이를 이곳에 데려온 마약상들이었다.

“옆에 준비해 뒀으니 챙겨 가세요.”

남자가 손으로 바닥에 놓인 가방을 가리키자 마약상들은 굳은 미간을 풀었다. 그들은 냉큼 사각 케이스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마약 봉지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사내들은 그제야 입가에 흐물흐물한 미소를 그렸다.

“고맙수, 일거리 있으면 언제든 또 불러 주쇼.”

그들이 나가자 남자는 옆에 서 있던 웨이터에게 눈짓을 보냈다.

“처리해.”

“알겠습니다.”

기계적인 톤으로 대답한 웨이터는 반듯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바람처럼 커튼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눈빛으로 묻자 웨이터는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목표 대상을 추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추적할 수가 없다니?”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방금 전에 나간 놈들이 사라지긴 어디로 사라져?”

“죄송합니다.”

잠시 계산을 하던 웨이터는 그에게 다시 보고했다.

“아직 화이트 채플 내에 있다면 300초 안에 찾는 게 가능합니다.”

“찾아와. 그리고 확실히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남자는 다시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고양이 탈을 쓴 유림은 어느새 거구의 사내와 대치를 하고 있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선 여유까지 느껴졌다. 델타들을 섬멸하던 전장의 성녀에게 있어 저런 건달을 상대하는 건 애들 장난 수준이겠지.

커튼 뒤로 나간 웨이터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재빠르게 계단을 통해 발코니 아래로 사라졌다.

웨이터가 사라지자, 발코니를 덮은 천장 위에 잠복해 있던 인영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미처 완공되지 않은 철골들 사이에 걸터앉아 남자와 웨이터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중이었다.

“들었어? 주어진 시간은 300초라는데.”

그의 말에 백인 마약상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양팔로 우람한 몸을 감쌌다. 그는 십자로 교차된 철골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코앞에는 동료인 흑인 남자가 입가에 거품을 문 채 죽어 있었다. 시체의 목에는 목 졸린 흔적이 퍼런 멍으로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다. 두 마약상은 커튼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힌 채 허공으로 몸이 붕 뜨는 걸 느꼈다.

둘 다 6피트를 넘는 신장에 각각의 몸무게만 200파운드가 넘는 덩치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괴한은 그런 두 사람의 목덜미를 한 손에 하나씩 잡은 채로 구석에 버려진 철재와 목재, 판자 등을 밟고 천장까지 이동했다.

번개 같은, 아니, 가히 빛의 속도와 비견될 만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몸부림 한 번 칠 겨를 없이 질질 끌려갔다.

마약상은 악마를 쳐다보듯 눈앞의 남자를 훔쳐봤다. 남자의 겉모습은 어느 예술가가 혼신을 다해 빚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투명하고 밝은 갈색 눈동자, 크리스털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머리칼, 신화에 등장하는 남신처럼 완벽한 미모의 괴한은 해사하게 웃었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그의 미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섬뜩한 눈으로 순식간에 동료를 목 졸라 죽이던 모습과는 빛과 그림자처럼 다른 모습이었다.

“당신은…….”

마약상은 그제야 눈치챈 듯 동공이 커졌다. 그는 울부짖는 인어에서 검은 머리칼 여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군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약하고 멍해 보이던 자였는데.

천사의 탈을 쓴 얼굴 아래 숨어 있던 건 사탄보다도 무자비한 악귀의 모습이었다.

“300초.”

나직하고 부드러운 울림에 마약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러니까 뭘 말하라 하시는 건지…….”

“방금 전 너희들에게 이걸 준 남자에 관해서.”

케이는 하얀 플라스틱 가방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저, 정말 모릅니다. 그냥 보수가 두둑한 일거리가 있다고 해서 온 건데…….”

퍽 소리와 함께 안면에 주먹이 날아왔다. 코가 우드득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입안에선 피가 줄줄 터져 나왔다. 마약상은 부러진 이빨을 뱉으며 울먹였다.

“사, 살려 주세요.”

“250초.”

그는 흠칫하며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 기억의 도시에서 온 사람 같았습니다.”

“기억의 도시?”

“옆에서 시중을 들던 웨이터 놈이 안드로이드입니다. 기억의 도시에서나 볼 법한 고가품이었어요. 화이트 채플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기종이라고요. 군납용도 아니고요.”

그는 필사적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머리를 굴려 본 게 처음일 정도로, 아는 건 뭐든 쏟아 냈다.

케이의 눈초리가 가늘게 흐려졌다.

‘안드로이드라.’

와아아!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케이는 철골 사이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유림이 블랙 피스트를 발아래 꿇린 채 갈채를 받고 있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필요도 없이 가뿐하게 쓰러뜨린 모양이었다.

케이는 다시 마약상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시체의 목을 쥐었던 손으로 마약상의 어깨를 쥐며 물었다.

“그자가 우리를 불러오라 한 이유는?”

“저, 정확히 말하면 서, 선생님께선 목록에 없었습니다.”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어깨를 쥔 케이의 손이 곧 자신의 목을 조르진 않을지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군 소속이라는 검은 눈의 여자만 데려오라고 지시를 받았으니까요.”

“왜?”

케이의 눈초리가 홱 아래로 향했다. 화이트 채플을 꽉 채운 인파 속에서 마약상들을 찾아 헤매는 웨이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자세로 서서 좌우 90도로 움직이며 동공으로 주변을 스캔하고 있었다.

좀 전에 발코니를 순식간에 빠져나갔던 움직임을 볼 때 마약상 말대로 그는 안드로이드가 맞는 듯했다.

“모, 모릅니다. 자세한 건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냥 여자만 유인해서 데려오라고 했어요.”

“나에 관한 언급은 없었고?”

케이의 눈초리를 보던 남자는 직감적으로 뭔가를 예감한 듯 울먹였다. 그는 케이의 발치에 넙죽 엎드리며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기억을 아예 지워 버리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시, 시키는 일은 뭐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안타깝게도.”

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300초가 지나 버렸네.”

숨을 들이켜던 마약상의 눈자위에 충혈된 핏대가 섰다. 케이는 손을 일렬로 모은 채 검을 휘두르듯 허공에 채찍질했다. 눈앞에 긴 손가락들이 칼날처럼 절도 있게 지나간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슉.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 철골 위로 쓰러졌다. 그의 머리통은 냄비 뚜껑처럼 매끈하게 잘려 나갔다. 수평으로 잘린 정수리에서 피와 뇌수가 흐르듯 쏟아졌다.

그 모습을 감흥 없이 보던 케이는 다시 천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림은 어느새 산처럼 쌓인 채 쓰러져 있는 사내들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해 대고 있었다. 그녀를 인정하지 못한 몇몇이 홧김에 덤벼든 모양이었다.

“데드캣!”

“데드캣!”

그녀는 군중의 환호성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블랙 피스트의 허리를 의자처럼 깔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유림의 모습은 여왕처럼 거만했다.

그런 그녀를 반구형의 천장 위에서 지켜보던 케이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는 격자무늬처럼 놓여 있는 철골 사이를 걸으며 손끝에 묻은 핏방울을 공중에 털어 냈다.

고의였을까?

보란 듯이 허공에 혈흔을 흩뿌린 것은.

그는 천천히 이동하며 곁눈질로 먼지에 뒤섞여 가는 핏방울들을 느긋하게 응시했다. 어둠 속으로 퇴장하는 그의 눈초리엔 위에서 떨어지는 핏물을 포착한 웨이터가 달려오는 모습이 잡혔다.

케이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주변 사람들을 밀치며 거칠게 달려온 웨이터는 손을 뻗어 가까스로 핏방울을 받아 냈다. 손끝에 묻은 피를 본 그는 황급히 천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까부터 케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림은 티 나지 않게 흘끗거리며 그의 종적을 찾았다. 그러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녀석은 나타날 기색조차 없었다.

“오늘 밤 경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사회를 보던 마술사 복장의 남자였다. 유림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의 눈엔 그가 마술사가 아닌 조련사로 보였다. 관중들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우리에 갇힌 델타들로 서커스의 무대를 장식하는 맹수 조련사.

“출전 자격이란 게 원래 이렇게 얻기 쉬운 거야?”

유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회자는 빙그레 웃으며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축배를 치켜들었다.

“대중은 서프라이즈를 좋아합니다. 또 대중은 스타를 좋아하죠. 당신이 오늘 나타난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여성이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모두가 열광하는 건 당연합니다. 오늘 밤 아레나를 장식할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데드캣!”

유림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그와 맥주잔을 부딪치며 관중을 훑었다.

‘케이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왓슨의 통제를 받지 않는 화이트 채플 내에서는 스마트 워치를 통해 그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유림은 무심코 반대쪽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오페라 극장의 부스처럼 벨벳 커튼이 쳐져 있는 발코니는 비밀스러운 성역처럼 보였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그곳을 빤히 응시했다.

유림의 눈이 흠칫 커졌다. 공중에 매달린 철창들 사이에서 무언가 휙 추락하고 있었다. 심연처럼 어두운 그녀의 동공에 먹물이 똑 떨어진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꺄악!”

경악 어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쿵!’ 소리가 난 곳엔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는 사체가 너부러져 있었다.

털썩!

또 하나의 시체가 떨어졌다. 다들 입을 막은 채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몰려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유림의 안색도 굳었다. 죽은 두 사내의 얼굴은 그녀도 낯이 익었다. 그중 한 명은 정수리 부분이 절단된 채 피와 뇌수가 흘러나와 엉망이었다. 유림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그녀와 케이를 화이트 채플로 안내한 마약상들이었다.

“주, 죽었어!”

“살인이다!”

그때 어디선가 회색 후드를 입은 자들이 군중을 뚫고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시신들을 둘러싸고 벽을 만들었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시체보다도 회색 후드를 입은 자들을 더 두려워하는 듯 눈 마주치기를 피했다.

“오베론의 기사들이군.”

“유령의 군주가 보냈나 봐.”

사람들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쑥덕거렸다. 유림은 얼굴에 쓴 고양이 가면을 고쳐 썼다. 눈구멍 사이로 바라본 회색 사내들의 얼굴은 머리에 쓴 후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모자 아래,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만이 언뜻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잠시 시신을 살폈다. 뒤쪽에서 회색 기사 두 명이 들것을 가져왔다. 관중들은 알아서 그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유림의 눈초리가 회색 기사단의 손목으로 향했다. 그들의 손목 안쪽에는 성배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가시덩굴에 휩싸인 술잔 형태의 성배.

그녀는 숨은 의미라도 찾으려는 듯 눈에 힘을 준 채 문신을 노려보았다.

“오베론을 상징하는 문장이죠.”

친절한 속삭임이 낮은 목소리로 답을 일러 줬다. 유림은 인기척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어깨 너머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조셉이 빙긋 웃으며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화려한 선수 등록식은 잘 봤습니다. 역시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솜씨더군요.”

레몬처럼 톡 쏘며 받아칠 줄 알았던 유림이 예상외로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그는 의문 어린 눈빛을 지었다. 가면을 쓴 그녀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왠지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자신이 뒤에 다가와도 모를 정도로 그녀는 다른 곳에 주의를 뺏겨 있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한여름 밤의 꿈」을 아십니까?”

유림은 여전히 딴 곳을 보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애초에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 않던 조셉은 자연스럽게 자문자답을 이어 갔다.

“오베론은 한여름 밤의 꿈이란 작품에 등장하는 요정왕의 이름입니다.”

그제야 가면 속 유림의 눈동자가 흘끗 그에게로 돌아서며 반응했다.

“의외로 꽤 낭만적인 조직명이지 않습니까?”

조셉은 다시 죽은 마약상들의 이야기로 화두를 돌렸다.

“말단이지만 저들도 일단은 오베론의 관리하에 있었을 겁니다. 사건 조사도 뒷수습도 그쪽에서 행하겠죠. 사실 미들 타운10) 내에서는 범죄 사건이 워낙 빈번하게 일어나는 터라 크게 놀랄 일도 아닙니다. 특히 화이틀 채플에선 방심하면 갈취당하고, 약하면 목숨마저 잃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명예로운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방심했을 뿐이고, 상대보다 약했을 뿐입니다.”

매일매일이 치열한 전쟁터와 다름없는 삶.

고스트들이 사는 도시는 그렇게 본인의 작은 잇속을 위해 상대의 목숨을 연기처럼 앗아 가는 곳이었다. 유림은 팔짱을 낀 채 의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낭만적인 오베론과 유령의 군주는 잘 매치되지 않는데?”

“요정왕 오베론은 태어날 때부터 주술에 걸려 요정치곤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흉측한 외모로 알려져 있죠. 개인적인 의견으로 오베론은 요정왕보다 유령왕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만.”

“흐음.”

유림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거칠고 무식한 범법자들의 지배자에게 낭만적인 면모가 있다는 건 흥미로웠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깃들었는진 알 수 없었다.

어느덧 회색 기사단이 사고 현장을 거의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잘 교육된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시신들을 들것에 옮긴 기사단은 병정 인형들처럼 두 줄로 열을 맞춰 이동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 맞춰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퍼포먼스처럼 인상적이었다.

그때 사회자가 다시 나타나더니 유림과 조셉의 어깨에 양팔을 걸쳤다. 그는 마술 봉을 돌리며 유쾌한 어조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 이만 아레나로 이동하실까요?”

“벌써?”

“대기실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죠. 긴 밤이 될 테니까요. 혹은 마지막 밤이 될지도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구밀복검. 입에 꿀을 바르고 배 속에 칼을 감춘 듯한 남자였다. 분장을 지운 광대처럼 불현듯 돌변할지도 몰랐다. 유림은 가면 속에 감춘 입술을 사리물었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는데.”

“혹시 일행이라도 있으십니까?”

조셉이 관중을 훑으며 넌지시 물었다. 가오리처럼 쭉 찢어진 그의 눈초리는 가면 속 그녀의 속내를 헤집어 보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유림은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잡념을 툴툴 털 듯 가면을 살짝 코끝에 걸치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이만 이동하지.”

“가시죠.”

사회자와 조셉은 서로 안면이 있는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걸었다. 그들을 따라 걷는 유림의 손에서는 진땀이 흘러내렸다. 검을 들고 싸울 때보다 묵직한 피로감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미소 뒤로 보이는 그들의 하얀 치아가 델타의 덧니보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것은, 갑작스레 케이가 사라진 것에 대한 불안함이 빚어 낸 감각일지도 몰랐다.

유림은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녀는 두 사람과 함께 웨이트리스 무리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작은 복도의 입구로 향했다.

화이트 채플의 명물인 아레나는 한층 아래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웅장한 아레나의 첫인상은 체스판을 연상하게끔 했다. 아레나의 바닥에는 흑과 백의 격자무늬가 타일처럼 깔려 있었는데, 하얀 대리석의 화이트 채플 인테리어와 잘 어울렸다. 아레나의 양쪽에는 오래된 성당에서나 볼 법한 대리석 관과 그 옆을 지키는 중세 기사단의 석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몸 한가운데에 창칼을 세우고 선 그들의 모습은 엄숙하지만 패배자를 석관으로 인도할 사자使者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석상들이 90도로 끼릭끼릭 움직이며 창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경기장 바닥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고 화염 폭죽이 수직으로 솟구치며 ‘펑!’ 하고 터졌다.

“아레나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연미복을 입은 사회자는 천장에서 도르래에 감겨 내려오는 철창들과 함께 등장했다. 그는 정 가운데에서 내려오는 철창 위에 서 있었다.

천장에서 화려한 조명들이 불을 밝혔다. 군중들은 환호성을 외치며 밀물처럼 쏟아져 입장했다. 그들은 화려한 아레나의 개장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열광했다.

개중에는 얼굴과 몸에 분장을 한 이도 있었고, 마약과 술에 취해 옆 사람과 성적 행위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짐승처럼 엉키는 이들을 보며 낄낄대는 관중들이나, 점잖게 서서 독한 술을 삼키는 이들이나 피를 갈구하는 광기 어린 눈빛을 품고 있는 건 동일했다.

“오늘 화이트 채플 아레나에서는 챔피언의 타이틀 방어전이 열립니다. 자, 여러분! 화이트 채플의 챔피언을 맞이해 주십시오. 우리들의 챔피언 ‘작은 전사 다윗’입니다!”

소개말과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레나 왼편 석상 뒤로 챔피언 다윗이 등장했다.

그는 작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체구에 은색 투구를 쓰고 등장했다. 아레나 위로 날렵하게 뛰어오르는 챔피언을 보며 관중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다윗!”

“다윗!”

한편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림은 새로운 가면과 의상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삐죽삐죽 잡아당기고 있었다. ‘데드캣’에 어울리는 의상을 급조해서 준 듯했다.

좀비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가면은 눈이 퀭한 고양이가 입을 꿰맨 그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수복처럼 몸에 딱 달라붙는 의상은 전투복 기능을 하기에 재질이 형편없었다. 델타의 발톱이 스치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살점까지 딸려 나갈 판국이었다.

엉덩이 사이에서 넘실넘실 움직이는 꼬리와 머리 양쪽에 단 고양이 귀는 움직이는 데 상당히 거슬렸다. 유림은 출입구 옆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허공에 겁을 주듯 맹수처럼 ‘어흥’ 하고 손톱을 휘두르는 시늉을 해 봤다.

‘이게 뭐야, 핼러윈 분장도 아니고.’

턱이 무너진 좀비가 허기져서 덤비는 모습 같다.

유림은 머리를 높게 올려 묶으며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래도 여전히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는 미간의 주름을 지우지 못했다.

의상은 포기한 채 몇 시간 동안 머무르던 대기실이나 슥 훑어보았다. 7평 남짓의 대기실은 의외로 아주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의료 장비가 두드러졌다. 단순한 수면실이 아니라 웬만한 의료 처치가 가능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유림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스마트 워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당연히 케이로부터 연락도 없었다.

‘무사히 아레나에 와 있으려나?’

마약상들의 죽음이 가슴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설마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것은 아니겠지? 영 미덥지 못한 녀석이라 불길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밖에서 관중들에게 불을 지피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오늘 아레나에 처음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전사! ‘데드캣’이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내밉니다. 두 사람 중 ‘살육자’의 목을 먼저 베는 자는 누구일까요?”

“데드캣!”

“데드캣!”

관중들의 호응은 엄청났다. 이미 블랙 피스트를 때려눕힌 유림의 소문을 들었는지 그들은 목청을 높여 그녀를 불러 댔다.

유림은 출입구로 향했다. 하얀 소독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안면을 강타했다. 그녀는 쿨럭거리며 인상을 쓰고 천장을 노려봤다. 암만 봐도 선수 대기실이라기보다는 환자들을 격리시키는 병동에 가까웠다.

아레나에 오르기 전, 무기가 진열된 가판대가 보였다. 총기와 도검, 둔기 등이 종류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유림은 그중에서도 날이 잘 선 일본도를 골랐다. 쨍 하고 빛나는 예리한 칼날에 그녀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쳤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초리에 흐르는 서늘한 살기. 검을 잡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주변의 소리는 노이즈처럼 수면 아래로 잠긴다.

유림은 총기류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사격 실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전장에서 그녀는 늘 양손에 날렵한 검을 쥐었다. 피로 물든 은날의 검은 그녀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하나의 심벌이었다.

경기장 앞에는 개미 떼처럼 모인 사람들이 허공에 손을 높이 든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림은 번쩍이며 어지럽게 움직이는 조명들 사이로 군중을 훑었다. 맨 앞줄, 최고의 명당자리에서 술잔을 쥔 채 웃고 있는 조셉의 모습이 보였다.

‘썩어 빠진 기자 새끼.’

그녀는 당당하게 무대 위로 등장했다. 무대를 장식하는 화염 때문에 공기가 뜨거웠다. 가면을 쓴 얼굴과 목에 벌써부터 땀이 나기 시작했다.

무대 중앙으로 온 유림은 가면을 다시 고정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엔 ‘작은 전사 다윗’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아레나 룰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잘 보시면 바닥이 체스보드처럼 흰색 타일과 검은색 타일로 교차되어 있지요? 데드캣은 검은색 타일을, 다윗은 흰색 타일만 밟을 수 있습니다. 반대되는 색상의 타일을 밟으면 각 선수들이 신고 있는 신발 밑창으로 전기 충격이 가해집니다.”

정사각형 모양의 타일은 가로세로 보폭으로 서너 걸음 정도의 넓이였다. 사회자의 설명을 듣던 유림은 앙다문 잇새로 거친 욕설을 흘렸다. 천장에서 내려온 철창들이 바닥에 착지하고 있었다.

적은 델타7만이 아니었다. 아레나에 풀린 흉폭한 괴수들은 총 일곱 마리. 델타7, 통칭 살육자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자, 여러분은 어느 쪽에 승부를 거시겠습니까?”

아레나와 관중들이 서 있는 지면 사이로 두꺼운 쇠창살 벽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무대 왼쪽과 오른쪽 허공에는 각각 ‘데드캣’과 ‘다윗’의 얼굴이 그려진 가상 스크린이 형성되었다.

“살육자를 먼저 쓰러뜨리는 쪽이 오늘의 챔피언! 화이트 채플의 명예 기사직 타이틀은 과연 어느 쪽이 거머쥐게 될 것인가! 그럼 지금부터 베팅을 시작합니다!”

대리석으로 된 기사 석상들이 창칼로 바닥을 찍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자 뿔 나팔과 비슷한 소리가 아레나 전체에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환호하며 각자 응원하는 선수 쪽으로 우르르 몰렸다.

다른 델타들보다 몸집이 두 배는 커 보이는 델타7. 살육자라 불리는 그녀는 우람한 턱을 벌린 채 고인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몸집이 크기도 했지만 특이한 건 그녀의 복부 쪽이었다. 아랫배 부분이 풍선을 불어 넣은 양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갈기처럼 자라서 해초처럼 엉킨 머리칼 사이로 핏대가 선 채 부릅뜬 눈이 보였다. 그곳에 인성人性은 남아 있지 않았다. 괴수가 되어 버린 그녀의 동공에는 살육의 본능만이 남아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허기에 퍼덕이고 있었다.

“끼아아악! 캬악!”

살육자의 울부짖음에 다른 델타들이 동조하며 괴성을 부르짖었다. 그들이 드러낸 누런 엄니가 선홍색 잇몸 위로 번뜩이자, 관중들은 그들 못지않게 광기로 뒤덮인 눈을 희번덕거리며 “와아!” 고함을 내질렀다.

“죽여라!”

“싸워라!”

그들은 광신도처럼 소리 질렀다. 검투사가 된 유림과 다윗은 각각 맹수들을 향해 무기를 뽑았다.

일본도를 높게 든 유림은 빠른 속도로 도마뱀처럼 기어 오는 델타의 사지를 정확히 베었다. 그녀는 다리를 세로로 찢어서 땅을 짚고 뒤돌며 측면에서 다가오는 델타의 안면을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동강 냈다.

‘이런, 하얀 타일!’

흠칫한 유림은 반사 신경을 발휘해 지면 대신 델타의 시신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빙글빙글 돌며 바닥에 착지한 그녀는 체조 선수처럼 놀라운 균형 감각을 보였다.

유림의 반듯하고 잘록한 몸처럼 우아하게 뻗은 일본도도 조명에 아름답게 빛났다.

“데드캣이 순식간에 델타 두 마리를 베어 냈습니다. 한 마리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 같군요. 우아하고 날렵한 그녀의 움직임은 관능적이기까지 합니다. 한편 이에 맞서는 다윗은…….”

유림의 시선이 하얀 타일 위에서 격투 자세를 잡고 있는 다윗에게로 향했다. 그는 특이한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가 주먹을 쥘 때마다 장갑에서 쇠창이 솟아나와 번뜩였다.

다윗은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델타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는 작은 공처럼 튀어 올라 델타의 어깨와 팔을 잡더니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급기야 어깻죽지까지 뼈째로 뿌드득 잡아 뜯었다.

“놀라운 괴력입니다. 저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요? 전설 속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습니다!”

구강과 턱이 무너져 내린 델타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르렁대던 그녀는 한쪽 팔로 허우적거리며 다윗을 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는 이미 생쥐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뒤로 우회해 온 그는 델타의 척추 뼈를 사정없이 주먹질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잔인하다.’

어느 쪽이 인성을 잃은 괴물인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고 가혹한 공격이었다. 유림은 일자로 굳게 다물린 다윗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투구로 반쯤 가린 그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건 무표정한 그의 입매뿐이었다.

“동료가 당하는 모습에 화가 난 것일까요? 살육자가 앞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불룩하게 부푼 아랫배 아래로 발을 구르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처든 델타7은 목청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괴기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벽이 울리고 조명이 덜덜거리며 흔들렸다.

유림의 눈이 불길함에 젖었다.

‘뭐지?’

그녀는 여타 보았던 다른 델타들과 달랐다. 크게 울부짖은 델타7의 시선이 유림을 향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유림은 흠칫 몸을 떨었다.

고요한 시선.

분노와 광기로 혼탁하게 얼룩진 괴수의 눈이라고 하기엔 맑은 물처럼 또렷하고 깊었다.

델타와 시선을 교환하다니. 저들과 교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분명 가슴에 작은 파도가 일었다.

유림이 잠시 묘한 감각으로 여운에 빠진 사이, 군중들은 술렁이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야!”

“벼, 벽이…….”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 유림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아레나와 관람석 사이를 막아 두었던 쇠창살 벽이 어째서인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델타7이 엄니 사이로 침을 흘리며 관중석 쪽을 돌아보았다.

몸을 낮춘 채 다윗과 유림의 빈틈을 노리던 다른 델타들도 끼릭끼릭 올라가는 쇠창살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일 앞줄 관람석에 있던 사람들은 코앞에서 벽이 올라가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입을 쩍 벌리고 엉금엉금 다가오는 델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망연한 얼굴로 서 있던 유림은 뒤늦게 검을 들고 움직였다. 빠르게 군중을 훑던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옴짝달싹 못한 채 껴 있는 조셉의 당혹한 모습도 발견했다.

철창 위에 서 있던 사회자는 지팡이를 떨어뜨리며 주춤거렸다. 경기장의 델타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천천히 관중석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여, 여러분, 피하십시오!”

델타7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찌그러진 철창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앞발로 불룩한 배를 움켜쥔 채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이윽고 맹수가 포효하듯 거친 울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효포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델타들을 고무시키듯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쭉 빼 들었다. 마치 지휘관이 전투원들에게 ‘돌격’ 명령을 하는 것처럼 진취적인 모양새였다.

그와 동시에 숨을 죽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던 델타들이 개구리처럼 몸을 움츠렸다가 뒷다리 힘으로 허공을 향해 훌쩍 뛰어들었다. 엄니를 드러내며 입을 벌린 그들은 관중들의 머리통을 삼키고 사지를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뜨려서 입안에 구겨 넣었다.

와드득 와드득.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뒷목을 서늘하게 적셨다.

“아아악!”

“살려 줘!”

한 여성이 뺨 쪽의 안면이 움푹 파인 채 델타에게 잡혀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델타가 우물거리는 이빨 사이로 그녀의 살점이 엉킨 채 끼어 있었다. 여자는 생선처럼 파닥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이미 얼굴의 반이 두부처럼 으깨졌지만 그녀의 팔다리는 여전히 심한 쇼크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흑, 아악!”

백인 남자는 누워서 허우적대며 눈깔을 뒤집었다. 그는 산 채로 내장까지 파헤쳐지고 있었다. 델타는 돼지 창자처럼 이어진 그의 내장을 입에 물고 흔들었다. 그것을 눈앞에서 고스란히 바라보던 남자는 흐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관절을 튕기며 고통과 충격으로 부르르 떨기를 몇 차례, 그는 결국 도살된 가축처럼 숨을 거뒀다.

그 바로 옆에는 한 동양인 남자가 양팔이 뜯긴 채 배로 바닥을 비비며 기어 가다가 결국 다리마저 뜯어 먹히고 있었다.

“시, 싫어! 흐, 흐흑…… 살려 줘!”

그는 울부짖으며 눈앞에서 끔찍한 몰골로 죽어 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리통이 으깨진 수박처럼 반쪽으로 쪼개진 채였다. 여자는 미약하게나마 붙은 숨으로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델타의 뒷목에 검을 박아 넣던 유림은 정수리에 걸친 가면을 벗어 던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안정하게 깜빡이던 조명과 실내 불빛이 벼락 맞은 것처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뭔가를 눈치챈 그녀는 황급히 델타의 사체에서 검을 뽑았다. 그러나 미처 대응책을 강구할 새도 없이,

훅.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암전?’

바로 옆에서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유림은 움찔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아비규환의 현장을 덮친 암흑 속에서 델타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더 강한 포식자였다. 야행성 짐승처럼 낮보다는 밤에, 햇살보다는 그늘 아래서 사냥하는 것에 최적화된 몸이었다.

“키이익! 키아악!”

유림은 바닥을 기며 다가오는 델타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다행히 델타의 공격은 피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녀는 ‘아차!’ 싶은 깨달음에 황급히 타일에서 발을 떼었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은 시점이었다.

‘흰 타일!’

매섭게 덮친 전기 충격은 그녀의 입에서 ‘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뽑아내었다.

손 안에서 칼자루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귓가를 멍멍하게 울리는 델타의 울음소리는 뇌리를 강타하며 전신을 집어삼킬 듯 덮쳤다. 다리가 흐느적거리고 무릎이 푹 꺾였다. 뿌옇게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몸이 휘청하고 뒤로 넘어갔다.

“유림!”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 들려온 다급한 음성.

낮고 부드러운 음색의 그것은……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같은 시각, 연맹군 전략국 남태평양전대 지휘 본부에서는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었다.

“중령님! 밀러 중령님!”

벌컥 열린 사령실 문 앞에 한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등장했다. 전략국의 정기 회의에 참석 중이던 금발의 남성은 굳은 얼굴로 돌아서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후 긴급 보고를 전해 받은 밀러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게 무슨…… 배달원이 실종되었다니?”

“보고가 끊긴 지 벌써 수일째입니다.”

밀러의 눈이 일렁였다. 그는 초조한 기색으로 주먹을 쥐락펴락 움직이며 물었다.

“데드캣은?”

부사관은 머뭇거리다 침묵했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밀러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의 고양이는 무사한 겁니까?”

“아직 별다른 일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마리아 쪽에서 소식을 전했을 겁니다.”

밀러는 초조한 발걸음으로 사령실 내를 왔다 갔다 움직였다. 침착하려 애쓰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배달원이 위장한 신분은 뭐였습니까?”

부사관은 대답 대신 화면에 사진 하나를 띄웠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젊은 남자의 프로필 하나가 상세히 펼쳐졌다. 밀러는 그의 이름을 읽으며 되물었다.

“우딘 헤르만. 저자인가?”

“예, 본명은 알리 무하마드입니다.”

전직 실력파 용병으로 이번에 자진해서 잠입 수사에 지원한 인물이었다. 부사관은 밀러의 눈치를 살피며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작전 중 사망한 것 같습니다.”

“사망? 설마 발각된 겁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경위를 파악 중에 있습니다. 마리아의 보고에 따르면 얼마 전 낙원에서 훈련병들의 입대 테스트 도중에 큰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고?”

“시험장에 델타가 나타나 훈련병 중 몇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하마드도 현장에 있다가 휘말린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밀러는 잠시 침묵했다. 슈퍼컴퓨터 왓슨 3세의 철통 보안으로 유명한 낙원에서 델타 관리에 구멍이 생기다니. 아무래도 낙원 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그쪽도 우리 쪽만큼이나 시끄러운 집안이었다.

밀러가 몸담고 있는 연맹군은 국제 연맹국 소속으로 각국에서 병사들을 모병제로 뽑아 선출하고 있다. 연맹군은 크게 정보국과 전략국으로 나뉘는데, 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아서 작전을 함께 수행하는 일이 드물었다. 기본적으로 안보에 관한 정보국장과 전략국장의 견해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러는 전략국의 핵심 간부 중 하나로서 전략국 산하 작전부 총사령관이자 잠수함 ‘헤벨Abel’의 함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오늘 아침 데드캣으로부터 암호문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밀러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는 초조한 음성으로 부사관을 재촉했다.

“내용은?”

“해독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양이는 꽃보다 가시를 경계한다.

돌연 밀러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보고서를 빤히 바라보더니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누굽니까?”

부사관의 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천사 같은 얼굴로 늘 미소 짓던 상관의 눈초리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죽은 배달원이 유령이 되어 지령을 완수하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대체 누가 그녀에게 장미를 전했느냔 말입니다!”

밀러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고함치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허공을 무섭게 노려봤다.

“유림이 정체를 들켰어.”

누군가 중간에서 그들 사이를 교란시키고 있다. 유림과 메리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상대는 장난치듯 이쪽을 조롱하며 그녀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마리아에게 연락해야 돼.”

그는 허공에 뜬 유림과 메리의 사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의식을 잃기 전 문득 밀러 생각이 났다.

─유림, 널 보고 있으면 유연한 고양이가 떠올라. 코드네임은 데드캣 어때?

─오빠의 네이밍 센스는 너무 고약해. 죽은 고양이Dead cat, 피의 마리아Bloody Maria라니.

─그렇다고 예쁜 고양이라고 지을 순 없잖아. 암호명에 이렇게 피나 죽음에 관련된 단어를 붙이면 무사히 귀함하게 된다니까.

─그런 속설은 어디서 들은 거야? 참, 나 드디어 입실론으로 승인받았어. 곧 로스트 헤븐에 가게 될 거야.

그 순간 밀러의 얼굴은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하얗게 굳었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메리의 발언은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풍파를 일으켰다.

─평의회의 핵심 인사와 낙원의 관리자를 제거하는 것. 그게 이번 잠입 수사의 최우선 임무다. 가능하겠나, 데드캣?

─맡겨 주십시오.

비장한 마음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잠입 수사.

지금까지 연맹군 측에서 로스트 헤븐으로 보낸 요원들 중 살아 돌아온 이는 없었다.

─유림, 굳이 너까지 갈 필요는 없어.

간절히 애원하던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위로하며 속삭였다.

─메리를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 반드시 돌아올게. 헤벨로,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함정 헤벨. 그녀의 보금자리, 소중한 가족이 있는 곳.

─언제라도 힘들면 돌아와, 나의 고양이.

마지막 인사를 하던 그는 슬픈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허억!”

유림은 허파에 차오른 물을 내뱉듯 숨을 왈칵 내쉬었다. 마취를 하고 깬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끼이익! 키아아악!”

퍼뜩 정신이 든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휘청거리며 일어선 그녀는 늘어진 필름처럼 느릿하게 흘러가는 주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암전이 지속된 건 약 1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출입구를 찾지 못한 채 공황에 빠진 관중들은 어둠 속에서 팔을 허우적대며 아우성을 쳤다.

다행히도 그녀가 잠시 정신을 잃었던 사이 시스템이 복구된 모양이었다. 시야가 다시 환해진 게 보였다.

하지만 눈앞의 정경은 끔찍함을 넘어서 토악질이 날 정도로 처참했다. 수십 명의 관중이 고깃덩이가 된 채 너부러져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이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살점이 찢긴 채 조각난 시체들은 하나같이 죽기 전에 느낀 격렬한 고통을 비치듯 처절하게 몸부림을 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출입구는 바깥에서 폐쇄됐고 내부에 갇힌 이들은 꼼짝없이 델타의 먹잇감 신세가 되었다.

유림은 고개를 들고 이를 사리물었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델타와 공방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오베론의 회색 기사단이었다. 그들의 실력은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STF 요원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주 능숙히 델타를 상대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물 흐르듯 움직이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델타의 사지를 어린애 손목 비틀 듯 간단히 꺾었다.

유림은 묘한 눈빛을 지었다. 착각일까? 그녀는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다가 이내 착각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남자는 그녀의 주위 일정 반경만 맴돌며 델타를 제거하고 있었다.

마치 지켜 주려는 것처럼.

잠깐의 찰나, 유림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얼굴을 감추듯 황급히 고개를 외면했다. 그는 잿빛 코트를 펄럭이며 재빠르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스치듯 지나간 남자의 단정한 턱 선이 이상하리만큼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후드 속에서 언뜻 본 섬뜩한 눈초리는 피처럼 붉었다. 서늘하고 무감정해 보이는 눈동자. 그럼에도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림은 발 빠르게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잠깐만!”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경기장 무대 쪽으로 향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연기처럼 멀어지는 그의 움직임은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이런!”

유림은 난데없이 정면에 착지한 델타 한 마리의 등장에 뒤로 물러섰다. 초조한 마음에 델타의 등 너머를 흘끗 바라봤지만, 회색 기사단의 남자는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앞의 적이 우선이었다.

유림은 검을 잡으며 오른쪽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폐쇄된 출입구 앞에는 생존자들 몇 명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을 듬직하게 막고 서 있는 자는 아레나의 챔피언, 다윗이었다. 그리고 회색 기사단이 그 주위를 에워싼 채 하이에나처럼 덤벼드는 델타들을 막으며 생존자들을 지켜 내고 있었다.

유림은 날랜 동작으로 델타의 공격을 피해 앞 구르며 미끄러지듯 생존자들 무리에 가세했다. 다윗은 순식간에 그의 옆으로 와 공격 자세를 잡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장갑을 고쳐 꼈다.

“무사하셨군요!”

누군가 유림의 어깨를 잡으며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조셉이었다. 그는 다른 생존자들과 달리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듯 멀끔한 차림새였다. 유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가나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사필귀정, 권선징악 그런 건 다 옛말일 뿐. 약삭빠르고 비열한 놈들이 살아남는 세상이다.

생존자들 중 가운데 또 한 명, 그녀의 눈길을 잡아끄는 대상이 있었다. 둥지에서 보호받듯 성인들에게 빙그르 둘러싸인 채 움츠리고 있는 인영. 인형처럼 조그마하고 예쁜 소녀였다. 이제 겨우 열여섯 남짓 되었을까? 앳된 외모의 그녀는 곱슬곱슬한 머리칼과 동그란 눈매가 사랑스러웠다. 유림과 눈이 마주친 소녀는 말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최종 보스의 등장인가 봅니다.”

조셉이 던진 장난스러운 말투가 모두의 시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실실거리는 말투와 달리 그의 눈빛은 심각했다. 다윗이 한 발짝 앞으로 전진했다. 생존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아레나의 챔피언 다윗의 어깨를 불안한 듯 쳐다봤다. 모두를 가리기엔 좁고 왜소한 그의 어깨가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방패보다도 듬직하게 느껴졌다.

후방에서 암사자처럼 어슬렁거리며 사태를 지켜보던 델타7이 동료들의 사체를 밟으며 등장했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다윗을 바라보던 델타7은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그녀는 분을 못 참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짐승처럼 네 발로 뛰어 오는 그녀의 모습은 투우장에서 미친 소가 날뛰는 형상처럼 광기에 가까웠다.

용감한 다윗은 주먹을 들고 맞서 뛰어나갔다. 둘은 허공에서 격돌했다. ‘쿵!’ 소리와 함께 다윗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델타7의 앞발에 옆구리를 맞은 듯 늑골을 움켜쥐며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 뒤로 유림이 일본도를 높게 들며 뛰어올랐다. 그녀의 칼날이 혁갑처럼 단단한 델타7의 피부를 겨누었으나 스치듯 빗나갔다. 오히려 그녀의 칼은 빠르게 회전해서 날아온 델타7의 발톱에 ‘챙그랑!’ 소리를 내며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유림은 좌르르 바닥에 미끄러지며 뒤로 후퇴했다. 그녀는 얼얼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칼자루를 놓칠 정도라니, 힘과 속도 면에서 다른 델타들의 능력을 월등히 웃돌았다.

유림과 다윗이 각각 일격에 실패하자 회색 기사단이 우르르 덤볐다. 그러나 거인에 가까운 체격의 델타7은 사자처럼 엎드렸다가 부채를 펼치듯 몸을 튕기며 그들을 한 번에 뿌리쳤다. 생존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안고 엉엉 울었다. 그들의 앞은 훤히 뚫린 채 맹수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 준 모양새였다.

델타7은 크르렁거리며 다가왔다. 몇몇은 흐느끼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 ‘빌어먹을 신’이라며 저주를 하던 이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바닥을 싹싹 빌었다.

델타7의 눈은 증오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생존자들 중에서도 특정인을 노려보며 악어처럼 엄니를 벌렸다. 유림은 의아한 눈빛을 지었다. 저건 살의였다. 델타로서는 가질 수 없는 감정이다.

델타7의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앞발톱이 허공을 가르던 순간이었다.

“어, 엄마…….”

사람들 속에서 한 소녀의 울먹임이 머뭇거리며 새어 나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델타7의 움직임이 멈췄다. 포악한 숨소리를 내던 그녀는 생존자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소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소녀는 델타7을 보더니 겁에 질린 듯 순한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을 맺었다. 그녀는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 흐윽…… 엄마…….”

조셉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꽃잎 사이의 수술처럼 숨어 있던 소녀의 모습이 벌거숭이인 양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검을 찾아서 집어 오던 유림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녀는 칼자루를 꽉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서 델타7과 소녀를 지켜보았다.

소녀는 팔다리가 기형인 몸을 갖고 있었다. 뭉뚝한 어깨에 양팔은 달려 있지 않았고, 다리는 난쟁이처럼 비정상적으로 짧았다.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 양측 팔다리가 없는 선천적 유전 질환이었다.

소녀를 가만히 보던 델타7은 몸을 숙였다. 그녀는 울고 있는 소녀를 향해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조심스럽고도 미안한 몸짓이었다. 아니,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 젖을 먹이던 아이를 달래고 어루만지는 어미의 모습처럼.

델타7의 부푼 배를 바라보던 유림의 눈은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전장에 설 때마다 스스로 수없이 되뇌던 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델타에게 인간의 본성이 남아 있을 거라 기대하지 마라. 그들은 이미 감정도 지능도 잃은 가여운 짐승에 불과하다. 제군들의 총칼로 그들을 구원할지어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일말의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수많은 델타들을 베었다.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뭔가를 발견한 유림은 다급한 눈초리를 지었다. 델타7 뒤로 다윗이 숨을 죽인 채 배후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깨진 투구로 머리를 방어하며 날렵하게 허공을 날았다.

다윗은 온몸을 던져 주먹으로 델타7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 쥔 장갑에서 뚫고 나온 칼날이 델타7의 두꺼운 피갑을 꿰뚫었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델타7은 코뿔소가 울부짖는 것처럼 포효했다. 이윽고 델타7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비틀거리더니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숨을 쉭쉭 내쉬던 델타7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죽어 가는 물소처럼 힘없는 눈초리였다.

좀 전까지 울먹이며 엄마를 찾던 소녀는 어느새 냉정하리만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보다 짧고 뭉뚝한 다리로 서서 델타7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소녀는 사랑스러운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죽여.”

가늘지만 냉혹한 음성이었다. 그녀가 내린 명령에 한쪽 팔이 잘린 회색 옷의 기사가 나타났다. 그가 쓰러진 델타7을 향해 레이저 검을 들자 희열에 차서 번뜩이는 소녀의 동공이 보였다. 그녀는 깔깔대며 커다랗게 웃었다.

콰쾅!

출입구 쪽에서 터진 굉음이었다. 모두 놀라서 토끼 눈으로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유림은 커다래진 눈으로 홱 돌아봤다. 폭파된 문의 잔재 사이로 무장을 한 병사 두 명이 총을 든 채 진입하는 게 보였다. 앞장서는 병사의 손에는 레이저 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정면에서 마주친 회색 기사에게 총을 겨누며 무기를 내려놓으라 소리쳤다.

나머지 한 명은 왜소한 체격의 저격수였다. 그는 후방에서 지원 사격을 도맡은 자세로 긴장한 듯 천천히 진입했다. 두 사병이 입은 전투복엔 로스티아벤의 마크가 붙어 있었다.

“STF 요원이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평소에는 불청객이었을 그들이 더없이 반갑다는 어조였다. 로스티아벤의 특공대가 들이닥쳤다는 말에 회색 기사단은 잠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 ‘펑!’ 하고 연막탄을 터트렸다.

쿨럭거리며 눈을 가리던 유림은 자욱한 연기 속에서 부유 체어11)가 움직이는 걸 보았다. 여왕이 마차에 올라탄 것처럼 부유 체어에 오른 주인공은 델타7의 사살을 명했던 소녀였다.

그녀는 연기 속을 날며 유림을 향해 따가운 눈총을 던졌다. 허공에 날아오른 부유 체어 밑으로 엔진 바람이 일었다. 그녀는 이후 혼란스러운 틈을 타 회색 기사단과 함께 쏜살같이 현장을 빠져나갔다.

유림은 연기와 바람에 밀려 바닥을 굴러다니던 고양이 가면을 주웠다. 가면은 다 찢어지고 오른쪽 눈 부분만 남아 있었다. 누가 보기 전에 가면을 손안에 움켜쥔 유림은 고개를 들었다.

“흉측해라.”

“묘지 비석도 아니고.”

자욱한 연기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건 처참한 도륙의 현장이었다. 생존자들은 경멸에 찬 눈초리로 쓰러진 델타7을 노려보았다. 유림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델타7의 부푼 배에는 커다란 칼이 쐐기처럼 일자로 박혀 있었다.

동산처럼 볼록한 배에서 붉은 피가 샘물처럼 졸졸 새어 나왔다. 유림과 눈이 마주친 델타7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배를 움켜쥐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부푼 배에는 실밥 자국이 있었다.

‘생체 실험인가?’

임신을 한 채로 감염이 된 것인지, 감염 후에 아이를 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델타가 교배를 하거나 수태를 한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왜 너희는…….”

유림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델타7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지만 고통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유림은 일본도를 높게 들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너희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건지.’

입실론이나 델타나 신종 바이러스의 항체를 가진 존재라는 점에선 동등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극과 극처럼 대비된다.

전자는 존귀한 보호 대상으로 낙원의 상징이 되었고, 후자는 인류의 적으로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된 원인에는 흑과 백처럼 다른 둘의 기질과 본성에 있었다.

델타란 무엇일까? 이들은 왜 생겨났으며,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오로지 여성만 존재하고, 후손을 남길 수도 없는 생명체의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유림을 바라보던 델타7은 팔을 뻗다가 포기한 듯 툭 떨어뜨렸다. 기이하게도 바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삶을 되돌아보는 듯 회상에 잠긴 채로, 살육자라 불렸던 짐승의 눈동자는 재로 덮인 듯 침침하게 초점을 잃어 갔다.

푸슉!

유림은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전투복을 입은 병사가 광선 검으로 델타7의 목을 절단한 채 서 있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죽은 델타7을 내려다봤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묵직해 보이는 눈동자는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처럼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유림은 문득 그를 알아보고는 외쳤다.

“너…….”

그녀의 목소리에 구릿빛 피부의 병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유림을 보자마자 동요가 어렸던 표정을 싹 지운 채 자세를 고치고 거수경례를 ‘척!’ 올렸다.

“드레이크 앤더슨입니다, 소위님!”

뒤이어 그와 함께 온 저격사병도 토끼처럼 쪼르르 달려와 드레이크의 옆에 섰다. 그는 어수룩한 자세로 손을 관자놀이에 갖다 붙이며 그를 따라서 경례를 했다.

“나츠 시게노입니다!”

유림은 갑자기 등장한 두 사람을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그녀의 눈초리는 그다지 호의적인 기색이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두 병사는 턱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그들의 뺨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이 이곳엔 웬일이야?”

미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유림의 미간이 굳었다.

“설마 쇠창살을 올려서 델타를 풀고 암전을 한 게 귀관들은 아니겠지?”

“소위님과 중사님께서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도록 구조 지원하라는 호크 대령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며 보고했다.

‘이 망할 영감탱이가!’

유림은 매서운 눈빛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탈출은커녕 다 같이 개죽음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저런 무식하고 무모한 명령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리는 거야?

열 받아서 이마의 힘줄을 잔뜩 세우던 유림의 눈길이 다시 나츠와 드레이크로 향했다. 역시 이 두 사람, 낯이 익었다.

“둘 다 구면이지?”

“오늘부로 특별수사대SITF에 배치받은 서전트12) 드레이크 앤더슨입니다. 브루클린의 성녀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찬가지로 특별수사대에 배치받은 서전트 나츠 시게노입니다. 사, 사고가 있던 입대 테스트장에서 소위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나츠는 긴장했는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입술까지 바르르 떠는 모양새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비위가 약한 그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살점과 내장들을 보며 자꾸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느라 힘겨워 보였다.

델타가 난입했던 입대 테스트. 그러니까 이들은 케이와 함께 최종 시험을 치르고 사고에서 살아남은 훈련병들이었다.

드레이크 앤더슨.

나츠 시게노.

드레이크는 입대 테스트에서 조장 역할을 하며 침착하게 훈련병들을 이끌었고, 나츠는 어린 나이임에도 저격수로서 놀라운 기량을 발휘했다. 두 사람 모두 호크 대령이 준 추천 목록에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가 특별수사대원 선발에 있어 최종 검토를 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동의도 없이 실전에 투입해 버리다니.’

유림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원 부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사님은…….”

드레이크가 두리번거리며 케이를 찾자 유림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애덤슨 중사는 왜?

“함께 계신 것 아니셨습니까?”

“몰라, 화이트 채플에서 혼자 사라졌어.”

“이상하네요. 대령님께서 분명 소위님하고 중사님 모두 이곳에 있을 거라 하셨는데…….”

드레이크의 말에 그녀의 낯빛이 서서히 굳었다.

어두컴컴한 경기장 무대의 뒤편, 대기실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부스럭거리며 옷을 벗고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어둠 속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귀찮은 어조로 명한 그의 목소리에 한 남자가 쿡쿡 웃으며 등장했다. 케이는 잿빛 후드를 벗어서 뺨과 목덜미에 튄 델타의 피를 닦아 냈다. 그는 예상했다는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역시 네 짓이었나?”

“마스터께서 자청하셔서 정 소위의 호위 기사가 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나설 틈은 보이지도 않더군요.”

케이는 짜증 섞인 눈초리를 지었다. 그는 구깃구깃하게 접은 후드를 바닥에 내던지며 남자 쪽을 쳐다봤다. 자신이 없었더라면 정말 그녀를 위해 나섰을 것처럼 포장하는 남자의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유림이 다칠까 봐 걱정이 돼서 이곳까지 달려왔다고?”

“겸사겸사입니다. 화이트 채플의 명물인 아레나는 저도 종종 구경하러 오는 곳입니다. 순수한 도박 경기장이었던 아레나가 최근 본질을 잃고 누군가의 목적 달성을 위한 실험대로 쓰이는 게 슬프지만 말이죠.”

“실험대?”

케이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영을 눈초리로 가리켰다. 좀 전에 케이가 벗어 던진 회색 후드의 본주인이었다.

오베론의 기사단 소속인 남자는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를 무참히 뜯긴 채 입에서 거품을 질질 토해 내고 있었다. 하얀 죽 같은 액체가 그의 눈과 콧구멍에서도 줄줄 흘렀다.

“마스터께서도 이미 눈치채고 계시지 않습니까?”

케이는 아무 말 없이 죽은 회색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절단된 팔에선 붉은 피 대신 흔히 안드로이드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수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근 모래의 도시를 돌아다니는 안드로이드 숫자가 부쩍 늘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병기형 안드로이드라는 거지.”

케이는 발코니에서 보았던 웨이터 안드로이드를 떠올렸다. 겉보기에는 기억의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서비스직 안드로이드였다. 그러나 그의 예사롭지 않던 움직임은 분명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굵은 목소리로 낮게 덧붙였다.

“도박 경기장인 아레나는 병기형 안드로이드를 델타와 전투하게끔 해서 성과를 평가하는, 즉 일종의 연구실험소 같은 곳입니다. 종종 실제 사람을 선수로 올리기도 하는데 단순히 위장용일 뿐입니다. 오늘 정 소위와 다윗을 나란히 세운 것처럼 말이죠.”

“오베론이 병기형 안드로이드로 뭘 하려는 거지?”

케이가 중얼거리듯 던진 질문에 두 남자는 서늘한 눈빛으로 답을 주고받았다.

회색 기사단과 아레나의 도박 경기는 일종의 실험 샘플에 불과했다. 그들의 목적은 명쾌하리만큼 눈에 훤히 보였다.

군대 양성.

반란을 꾀하여 낙원을 정복하는 것이다.

“오늘 아레나에 델타들을 푼 건 상부의 지시인가?”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철두철미하다고 해야 할지, 비열할 정도로 겁이 많다고 해야 할지.

“평의회는 왓슨 3세의 보안이 뚫렸다는 것에 꽤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관리자 권한을 요구할 정도면 최고 보안 등급까지 뚫릴 뻔했다는 뜻이니…… 오베론이 너무 커지긴 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담대한 짓은 꿈도 못 꿨을 불량배 조직에 불과했는데 말입니다.”

케이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삭막하고 건조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안타깝다는 기색으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이런 짓을 벌여도 정작 낙원의 관리자란 녀석은 관심도 없을 텐데.”

“어쨌든 저는 본분을 다했으니 이만 에덴 타워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의회 노인네들이 눈 빠지게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잘도 왔다 갔다 박쥐 노릇을 하고 있구나.”

케이의 조롱에 남자는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걸었다. 마스터의 비뚤어진 심술에는 익숙하다는 태도였다. 비록 말로는 저렇게 비꼬아도 장난기 어린 케이의 눈빛엔 남자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 묻어났다.

“지금 빠져나가실 계획이십니까?”

함께 갈 거냐는 어조였다. 케이는 슥 주변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통로 벽의 타일 하나를 우드득 뜯어냈다. 안쪽으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법한 틈이 보였다. 너덜거리는 전기선들과 지직거리는 회로들에서 불꽃이 튀었다.

“따라 오시죠.”

그를 쫓아서 발을 떼던 순간이었다.

“케이!”

등 뒤에서 울린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 세웠다. 케이는 굳은 눈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돌아서서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출구 쪽을 응시했다.

“애덤슨!”

유림이 땀에 젖은 채 시신들 사이를 확인하며 그를 찾고 있었다. 대기실 연결 통로에서 나온 케이는 그녀를 쳐다보며 눈을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유림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휘청휘청 위태롭게 걸었다. 낯빛이 좋지 않은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

“이 바보 같은 게 어디 나자빠져 있는 거야!”

그녀는 성질을 부리다가 뒤에서 눈치를 보며 서 있는 나츠와 드레이크에게 초조한 얼굴로, ‘정말 중사도 여기 와 있는 게 확실하냐’고 재차 물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복잡한 심정을 표현하듯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눈두덩을 주물렀다.

“성녀가 기사를 찾는군요.”

머뭇거리며 서 있는 케이에게 남자는 피식거리며 말했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유림을 힐끗거리는 케이를 보며 눈가에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드린 숙제는 잘 풀고 계십니까?”

본인은 부인하는 듯했지만 케이는 점차 유림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고 있었다. 케이가 불편한 눈빛으로 침묵하자 남자는 알겠다는 듯 웃으며 돌아섰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는 케이에게 새 옷을 던져 주며 “잊지 말고 적당히 상처 몇 개는 내고 가십시오.”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던 케이는 “애덤슨 중사!” 하고 다시 외치는 유림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목소리에 조건반사처럼 허둥지둥 셔츠에 팔을 끼워 넣고 있었다.

“이 자식, 찾기만 해 봐! 사지 멀쩡하면 아주 내 손으로…….”

유림은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성질을 내다가 시체 하나를 발견하고선 움찔 멈췄다. 엎드린 채 죽은 남자는 케이와 비슷한 체격에 머리색까지 똑같았다.

시신이 입고 있던 흰 셔츠는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상처 입은 복부 밑으로 얕은 피 웅덩이가 고인 게 보였다.

유림은 애써 담담한 기색으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손끝이 차가워진다. 전우의 죽음이라면 수없이 봐 왔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마치 오늘 처음 경험하는 양 가슴이 쿵쿵 뛰었다.

“……케이?”

그녀는 몸을 낮춘 채 긴장한 손으로 시체의 머리를 잡았다. 천천히 얼굴을 뒤집었다. 눈 밑 근육이 두려움으로 자르르 떨려 왔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심호흡을 하며 안면을 확인하려던 차,

“절 찾으셨습니까, 소위님?”

나직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석상처럼 굳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딱한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셔츠를 입은 케이가 생긋 웃으며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를 본 유림은 벌떡 일어나서 눈초리를 사납게 치켜떴다. 케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이를 앙다문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심통 난 고양이처럼 보였다.

유림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몸 구석구석까지 날카롭게 검사하던 그녀는 그가 걷어 올린 소매 아래 묻은 피를 발견하고선 놀란 얼굴로 덜컥 물었다.

“이 피는 뭐야? 델타에게 당했어?”

“아니에요. 유리 조각에 긁힌 거예요.”

그가 다정한 음색으로 답했다. 유림은 도톰한 입술 사이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유림.”

“됐어. 무사하면 됐어.”

손사래를 치던 유림은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그의 양 뺨을 거세게 꼬집었다. 졸지에 그녀의 집게손에 만두피처럼 볼이 쭉 늘어난 케이는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대기실에서 문 잠그고 숨어 있었어요.”

그는 “으윽!” 신음을 내뱉으며 놓아 달라 애원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나츠와 드레이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키의 케이가 유림에게 볼을 쭉 잡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나츠는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케이의 뺨을 꼬집던 유림은 기운이 빠졌는지 힘없이 팔을 툭 떨어뜨렸다. 그녀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입술을 열었다.

“혹시.”

케이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네?” 하고 되물었다.

“아까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구해 준 게…….”

어렵사리 말문을 열던 유림은 예쁘게 생긋 웃고 있는 케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얻어맞은 주제에 변죽도 좋다.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는 그의 시선은 유림의 가슴과 가랑이 사이를 훑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고양이 옷은 델타와의 전투로 갈기갈기 찢어져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리고 있는 수준이었다.

유림의 미간이 부채주름처럼 확 구겨졌다. 그녀의 손이 이번에는 그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유, 유림?”

“내가 미쳤지! 그걸 너로 착각하다니.”

“착각이요? 무슨 얘기예요? 아까 정신을 잃었을 때 뭐라고요?”

“됐어!”

“자, 잠깐 이것 좀 놓고…….”

“토끼뜀 실시.”

케이는 귀가 잡힌 채 유림을 물끄러미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았다. 유림이 턱짓을 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토끼뜀을 하기 시작했다. 유림은 묵묵히 토끼뜀을 하는 케이를 흘끗 내려다보며 다시 지나가듯 물었다.

“혹시 오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거나…… 뭐 그런 적 없었어?”

“네?”

“아니면 눈에 염증이라도 생겼다거나.”

케이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그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이게 웬 바보 같은 짓이냐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케이가 델타를 그렇게 가지고 놀 듯 벨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검도는커녕 총도 제대로 못 쓰는 녀석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람?

유림은 복잡한 눈빛을 지었다.

뇌리에 각인된 듯 피처럼 선명한 남자의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잿빛 후드 아래 귀신처럼 섬뜩했던 그의 눈초리를 떠올리면 아찔한 두통마저 일었다.

“꾀부리지 마. 계속 안 해?”

유림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잠시 바닥을 짚고 쉬던 케이는 다시 귀를 잡고 제자리 뜀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쯤은 불만을 토로할 법도 한데, 그는 단 한 번도 명령 불복종을 하거나 투덜거린 적이 없었다. 오늘도 묵묵히 하라는 대로 억울한 벌을 받는 케이를 보며 유림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내 머릿속을 줄곧 잠식한 붉은 눈동자를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약 십 분 뒤, 두 사람은 나란히 무너진 벽의 잔재 위에 앉았다. 유림은 넝마가 된 옷 대신 케이의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상반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반라의 상태였다.

유림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의 몸을 훔쳐보며 배시시 웃었다. 군살 하나 없는 조각 같은 몸이다. 운동신경은 최악인 주제에 운동 효과 하나는 톡톡히 보는 녀석이었다. 여군들이 군침 흘릴 법도 하다. 그래도 그의 벗은 몸을 마음대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건 그녀뿐이라는 생각에 은연중 뿌듯했다.

“전투에서 소재지 불명인 병사를 찾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케이가 피식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유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일렁이는 눈으로 고즈넉이 허공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케이도 입가에 걸었던 곡선을 서서히 지웠다.

“중사는 그렇게 하도록.”

잠긴 목소리로 답한 유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는 검은 파도가 사념을 몰고 왔다가 밀려가며 철썩철썩 굽이쳤다.

“날 불러도 대답이 없으면 미련 따위 갖지 말고, 중사는 필사의 힘으로 돌아가면 돼. 오직 중사가 살아남을 생각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난 중사의 상관이다. 내 지휘하에 있는 병사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럼 유림의 목숨은 누가 책임지죠?”

“글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더니 잠시 위를 쳐다보았다.

“신께 맡겨야 하나?”

케이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흙더미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신들은…… 그런 하찮은 일에 관심 없어요. 자기들끼리의 패권 다툼만으로도 정신없으니까요.”

그의 대답에 유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난 유일신만 믿어, 멍청아.”

“아.”

케이는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유림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꾸만 가슴에 차가운 파도가 밀려온다. 마음이 허한 탓이다. 아까 본 델타7의 모습이 이상하게 지워지질 않았다. 밀려오는 파도가 어서 그 기억을 쓸고 가 줬으면 했다.

잠시 후 유림은 그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죽지 마라, 중사.”

케이는 잔잔한 눈길로 유림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그녀의 어깨가 작고 가녀려 보였다.

“내가 중사에게 내리는 유일한 명이다. 죽지 마.”

그는 잠시 혼란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목울대에 차오르는 이 느낌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죽지 말라니, 삶을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강요가 나쁘진 않았다. 정처 없이 떠돌던 공허한 가슴이 족쇄에 묶인 채 강제로 지면에 안착당한 심정이었다. 그 구속력이 기묘하게 심장을 옥죄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던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쉼 없이 나락의 구멍을 향해 발버둥 치던 날개를 접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했다.

케이는 유림의 정수리에 이마를 대며 긴 속눈썹을 내리감고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유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케이의 눈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일렁였다. 뿌옇게 흐릿해지는 이성처럼 그의 투명한 눈동자도 탁하게 흔들렸다.

케이는 홀린 듯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는 이내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입안을 휘젓는 혀가 달콤한 쾌락을 선사했다. 유림은 뜨거운 숨을 삼키며 케이의 목을 팔로 휘어 감았다. 혀를 섞는 움직임이 오늘처럼 조심스러운 적이 없었다. 키스만으로 몸이 녹을 것만 같았다. 뺨과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귓속과 목덜미를 간질이듯 애무했다.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다시 삼키기를 반복하던 그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로 옮겨 갔다. 그러고는 보드라운 살결을 빨기 시작했다.

유림은 참고 참다가 결국 야들야들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는 그 목소리마저 먹음직스럽게 삼켰다. 잔뜩 흐려진 눈이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케이는 입술 사이로 이를 살짝 내보이더니 그녀의 쇄골 위를 파고들 듯 깨물었다. 집요하게 가슴골까지 내려온 그는 이로 잘근잘근 살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풍만한 가슴을 손에 쥐고 알갱이처럼 오돌토돌한 꼭지까지 온 그가 홀린 듯 그것을 삼키자, 유림은 결국 흐물흐물한 신음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의 뽀얀 살결 위에는 도장처럼 선명한 장밋빛 낙인이 남겨졌다. 무언의 증표처럼 보이기도 했다.

케이의 품에는 유림이 초점을 잃은 채 너부러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를 맛보듯 빨았다. 붉은 키스마크는 이제 보랏빛 멍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건 점차 광포하게 변해 가는 그의 욕정을 대변하는 색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참기 힘든지 그녀의 가슴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가슴이 터질 듯 그의 손안에서 출렁였다. 유림은 케이의 목을 끌어안으며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귓속에 혀를 넣고 핥으며 달콤한 밀어를 속삭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솟구친 열기를 식히려는지 그녀의 가녀린 몸을 바스러뜨릴 듯 껴안은 채 꼼짝 않고 허공을 응시했다.

─죽지 마라, 중사.

밤바람처럼 고요히 불어오던 목소리였다. 눈빛을 마주하던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한 파동이 되어 가슴에 번졌다.

텅 빈 공중을 바라보던 케이의 눈동자가 멍하니 풀어졌다.

삶에 대한 의지.

생명에 대한 숭배.

그 모든 걸 가르쳐 주었던 존재의 상실은 그의 삶을 덧없게 만들었다. 이제 와 그에게 생에 대한 갈망을 다시 지필 자격이 있을까?

케이는 씁쓸한 눈빛으로 사념을 정리했다. 그때 맥없이 기대 있던 유림이 갑자기 몸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아이처럼 웅얼댔다.

“배고파.”

케이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며 물었다.

“뭐 먹고 싶어요?”

“……음, 카레?”

잠드는 와중에도 확실히 대답한 유림은 다시 노곤한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하여간 카레라면 사족을 못 쓰긴.’

케이는 피식 웃으며 유림의 머리를 가슴팍에 기울여 품에 뉘였다.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체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여잔데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탈진하게 만든 건지 의아했다.

─밀러…….

유림이 잠시 정신을 잃었을 때 중얼거렸던 이름이었다. 젖은 목소리로 그리움을 가득 담은 채 몇 차례나 애틋하게 불렀다.

불쾌함으로 흐려진 그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진흙탕에 튄 피처럼 그의 동공엔 삽시간에 섬뜩한 붉기가 감돌았다.

“케이 씨!”

멀리서 나츠가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을 한참 동안 찾은 듯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케이는 유림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가슴골이 보이는 그녀의 가슴을 꼼꼼하게 여며 준 후 새롭게 합류한 특별수사팀의 대원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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