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유림의 교관 일지에 남겨진 메시지】
2100년 2월 25일 목요일 오전 7시.
케이 애덤슨 훈련병의 개인 교습 4주차.
입영 시험 최종 관문 당일.
쾌청한 날씨였다. 알람을 싫어하는 유림은 리사에게 늦잠을 자든 몸이 안 좋든 절대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벌떡 일어났다. 오죽하면 리사가 좀 더 수면을 취하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 제가 깨울까요, 소위님?
“아니, 내가 하지.”
우유를 한 잔 들이켠 유림은 서재에서 침실로 바꾼 건넛방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수면 모드인 방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침대 위에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 하나가 보였다.
가볍게 몸을 스트레칭 한 유림은 냉큼 침대 위로 올라탔다. 눈치 빠른 리사가 어느새 수면 모드를 해제한 모양이었다.
투명해진 벽은 아침 햇살을 가득 들여놓고 있었다. 긴 속눈썹에 반듯한 콧날 그리고 살짝 벌어진 조각 같은 입술. 유림은 잠든 케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몸을 숙였다. 늘 생각하지만 그의 몸은 탄성이 흘러나올 정도로 완벽했다. 짐승으로 비유하자면 기품이 넘치는 표범 같다고 해야 하나. 넓은 어깨를 따라 뻗은 쇄골 뼈를 보고 있자면 배 속이 간질거리며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운동신경만큼은 그렇게도 한심한 수준인 건지. 괜히 심술이 난 유림은 다짜고짜 그의 귓불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목덜미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케이,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아래위로 홀딱 벗긴 채 사격장 과녁에 걸어 놓을 거야.”
귓전을 울리는 달콤한 위협에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이미 몇 번이나 당해 본 것이라서 위협의 효과는 일품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킨 케이의 팔과 유림의 몸이 엉켰다. 당황한 유림이 그의 목을 끌어안자 두 사람은 ‘쾅’ 하고 바닥을 굴렀다.
“유림?”
케이의 몸 밑에 깔린 유림은 침대에 다리를 걸친 채 니은 자ㄴ 모양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를 노려보더니 무릎으로 퍽 하고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케이는 짤막하게 신음을 내뱉으며 배를 움켜쥐었다.
“상관의 이름을 멋대로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아…… 그랬죠. 그런데 일찍 일어났네요?”
잠이 덜 깬 그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매만진 케이는 언제 맞았냐는 얼굴로 예쁘게 웃었다. 그러고는 유림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호칭을 덧붙였다.
“……소위님.”
유림은 눈을 가로로 쭉 찢은 채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번 저 미소에 넘어가는 스스로를 탓하는 중이었다. 사실 케이의 목소리에는 설명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그의 중저음 톤의 부드러운 음색은 귓가에 닿을 때마다 부드럽게 안긴 채 애무당하는 것처럼 머릿속을 흐릿하게 만들곤 했다.
“3차를 무사히 합격했다고 방심하지는 마. 반쯤은 요행으로 패스한 거였으니까.”
“알고 있어요.”
그가 3차 관문을 패스한 것은 교관인 유림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앞서 1차와 2차 관문을 패스하고 온 케이는 최종 합격까지 두 개의 허들만 남게 되었다.
3차 관문은 휴식 없이 한 명씩 교체되는 다섯 명의 조교들과의 혹독한 싸움이었다. 전투 시간은 각각 10분씩 주어져 시험은 총 50분 동안 치러진다. 다행히 기술 병과일 경우엔 다섯 명 중 세 명까지만 버티면 합격이었다. 만약 상대를 제압할 경우 가산점이 주어진다. 물론 케이에게서 가산점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훈련 기록에 의하면 그는 두 번의 3차 관문 테스트에서 모두 첫 번째 대전 상대에게 쓰러져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두 시작한 지 120초를 채 넘기지 못했다고.
‘이 남자가 과연 10분을 버틸 수 있느냐’도 문제였지만 조교들 중 한 명이 STF3) 특수 부대 소속이란 게 더 큰 장애 요소였다. 만약 STF 요원이 첫 번째 타자로 나온다면 후속 타자와는 만나 볼 겨를도 없이 전투 불능으로 실격하게 될 터였다.
고민하던 유림은 미리 상대 조교들의 프로필을 입수했다. 이는 군율에 어긋나는 행위지만 어쩔 수 없었다. 꼼수라도 부리지 않으면 도저히 합격시킬 길이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대전 상대는 어려서부터 쭉 복싱을 해 왔던 녀석이야. 하체가 약하니 무조건 다리만 공격하도록 해. 두 번째 대전 상대는 날렵하지만 힘이 부족한 타입이야. 간격을 좁히면 불리하니…….
유림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케이를 보며 말을 멈췄다. 긴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지극히 초연한 것인지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덤덤할 리가 없지. 필시 극도로 긴장한 것이리라.
유림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욕심을 털어 냈다. 그녀는 털털하게 웃으며 케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냥 가볍게 몇 대 맞고 온다 생각하자. 매일 접한 내 주먹에 비하면 간지러운 정도일 테니까.
─제가 불합격하면 소위님께서 곤란해지시는 거 아니었어요?
유림은 돌아서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훈련병 주제에 상관의 일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근성으로 버티고 와. 합격하면 상으로 키스라도 해 줄 테니.
그때 그의 입가에 짓궂게 피어오르던 미소를 그녀는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흡사 사냥에 무관심하던 맹수가 별안간 의욕 찬 눈초리로 몸을 일으킬 때의 표정과도 같았다.
그날, 케이는 가볍게 3차 관문을 통과했다.
시험 결과를 모니터한 교관들은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냐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첫 번째 대전 상대는 5분이 지난 후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쓰러졌고, 두 번째 대전 상대는 혼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기절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두 상대 모두 대전 시작한 지 5분이 지난 후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으므로 시험 결과는 유효한 것으로 발표가 났다. 덕분에 이 운 좋은 사나이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 합격을 이루었다.
─그래서.
시험장을 나온 케이는 유림을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상은 언제 주십니까?
유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목적이 분명한 눈빛으로 빤히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회피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최종 합격하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르는 척 돌아서던 유림은 등 뒤에서 그가 쿡쿡 웃는 소리에 묘한 굴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붉어진 뺨을 보일 수 없어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애덤슨 훈련병. 소위님의 지시에 따라 오늘 아침 메뉴에서 커피는 제외했습니다.
느릿느릿 거실로 나온 케이는 오늘 시험 일정을 보고 있는 유림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잇자국이 난 귓불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술을 피식 늘렸다.
“드디어 오늘 상을 받겠네요?”
오른쪽 귓가에서 들려온 나른한 목소리에 유림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케이가 물 잔을 든 채 서 있었다.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엊그제 훈련 기록을 보니 실격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던데.”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서요.”
마치 볼에 입을 맞출 것처럼 귓가에 속삭인 그는 유림의 주먹이 날아오기 전에 재빨리 욕실로 향했다.
─ 심박동 수가 150% 상승하였습니다.
꼭 이런 상황이면 촉새같이 등장하는 리사에게 유림은 눈을 흘겼다.
─ 129, 128, 127…….
유림은 뜨거운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그가 두고 간 물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시 저 녀석을 이곳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만 해도 ‘저깟 가랑잎 같은 녀석이랑 잠시 지내 봤자 별일이야 있겠어? 벌점 50점이 중요하지.’라는 생각이었다.
‘설마 이런 자충수가 될 줄이야.’
유림은 귓가에 남아 있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욕실을 흘끗 쳐다보았다.
3차 시험을 앞두고 케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건 그녀 자신이 내린 결정이었다. 집무관이 귀띔해 주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그가 다른 훈련병들과 사병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그녀에게 개인 훈련을 받는다는 게 그들 눈에 밉상이 된 모양이었다. 혼자 특별 대우를 받는 것도 못마땅한데, 담당 교관이 브루클린의 성녀라니. 사내 녀석들의 질투가 그렇게 지독한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 남자, 의외의 고집과 근성이 있었다. 꽤 심한 괴롭힘이 이어져 왔던 것 같은데, 정작 유림을 만날 때는 항상 느른하게 웃으며 여유를 부려 왔던 것이다.
그런 점은 꽤 마음에 든단 말이지. 훈련소 나와서 이쪽에 들어오라니까 변죽 좋게 냉큼 들어온 건 어이없었지만.
유림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뻔뻔하기는. 생긴 거는 되게 순진하고 유약할 거 같은데 도대체가 감을 못 잡겠단 말이야?
‘그나저나.’
그녀는 방금 전 불쑥 등 뒤에 나타났던 그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무방비 상태였다고 해도 그렇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초 근접한 간격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운동치, 체력치, 반응치인 케이였는데.
유림은 소파에 누워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성과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던 탓일까? 지난 4주간 묘하게 들떠 있었다. 로스트 헤븐에 온 본래의 목적을 잠시 잊고 지냈을 정도로.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미간을 주물렀다. 아무튼 갑작스러운 훈련병 돌보기도 오늘로써 끝이다. 다시 평온하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최종 선발 시험이 치러지는 시험장 G관은 나선형 모래 도시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여긴 군전용 에어쉽과 안드로이드들을 정비하는 곳이기도 했다. 시험장에는 유림과 케이 외에 다른 교관들과 훈련병들도 잔뜩 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별다른 긴장감 없이 여유롭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낙원에서 시험을 치르는 이들은 모두 스카우트된 최우수 훈련병들이야. 시험은 사실 형식상 치르는 것이고 이미 ‘로스티아벤’과 계약된 에이전트들이지. 저들 중 몇 명은 너와 같은 팀이 될 거야. 기죽을 필요 없어. 쟤네 페이스에 말리지 말고 훈련받은 대로 하면 돼.”
케이는 그들을 쭉 훑어보더니 염려 말라는 듯이 생긋 웃었다. 그의 느긋한 태도에 비해 유림은 걱정 가득한 눈빛이었다.
“최종 시험은 실제로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 무리하지 말고 팀원들에게 적당히 묻어가도록 하자.”
최종 시험의 유형과 난이도는 작년부터 새롭게 바뀌었다. 현재 전 세계에 파견된 로스티아벤 병사들 대부분은 ‘델타’라는 돌연변이들과 교전 중에 있었다.
델타는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살아남았으나 바이러스로 인해 인격을 상실하고 신체에 이상 변화가 온 자들을 뜻한다.
왓슨 그룹은 자회사가 세운 용병대의 전력을 투입해 델타들을 포획하고 낙원으로 데려와 그들을 치료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따라서 최종 시험은 델타를 모델로 만든 안드로이드들과 모의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훈련병들은 일곱 명씩 한 조를 이뤄 시험을 치른다. 정해진 시간 내에 델타를 모두 쓰러뜨리면 합격이다.
단, 한 팀에 전투 불능이 된 팀원이 네 명 이상이면 팀 실격으로 전원 불합격 통지를 받는다. 세 명 이하일 경우는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팀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훈련병들만 합격 통지를 받는다.
─ 조 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훈련병들은 소속된 조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 훈련병들은 제각기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눌러 허공에 뜬 화면에서 배정된 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1조네?”
유림은 케이와 함께 배정된 조원들의 이름을 재빠르게 훑었다.
“나츠 시게노, 드레이크 앤더슨, 하워드 쿠퍼…….”
팀원들 대부분이 세계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용병대 출신들이다. 유림은 안심한 눈빛을 지었다. 최종 관문은 어느 정도 조 추첨 운이 따라 줘야 했다. 특히 케이처럼 보급병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이제 열쇠는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교관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관전실에서 그의 합격을 기원하는 일뿐이었다.
“케이!”
유림의 외침에 케이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교관 유니폼을 입은 그녀가 달려오더니 그의 어깨를 잡고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뒤에서 병사들의 환호와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유림은 입 닥치라는 듯 곁눈질로 주위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다들 흠칫해서 합죽이가 된 양 일제히 입을 다물고 딴청을 부렸다.
유림은 생긋 웃으며 케이에게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행운의 여신이 주는 가호로 삼도록. 검은 베레모를 쓴 귀관을 기다리고 있겠다!”
말은 마친 그녀는 민망한지 황급히 돌아섰다. 그러자 케이가 뒤에서 재빨리 유림의 허리를 낚아채 안았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합격 후 주시는 상은 이것과 별개입니다. 그건 행운의 여신께 직접 받아 가도록 하죠.”
케이의 시선이 미리 점찍어 놓는 양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돌아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돌변해 시험장 입구로 유유히 걸어갔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유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그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제1조의 시험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시험장 문이 닫혔다. 시험장 내부 천장에 붉은 등이 들어왔다.
훈련생들은 모두 대기 상태.
시험 시작 5분 전이다.
회색 벽면의 대기실에는 여섯 명의 훈련병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케이는 빈자리로 향했다. 그때 덩치 큰 흑인 병사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걸었다.
“네가 브루클린의 성녀 이거냐?”
그는 검은 새끼손가락을 올리며 낄낄 웃었다. 팔뚝이 유림의 허리 두께만 한 녀석이었다. 케이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 여자와 같이 합숙을 한다며? 말이 합숙이지 둘이 매일 밤 재미 봤을 거 아니냐고! 이거 군율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 성녀도 성욕은 있는 모양이야. 그래도 그렇지, 이런 비실비실한 놈이랑 떡을 치고 싶을까? 그런데 성녀면 처녀여야 하는 거 아니야? 어이, 네이슨! 너 가톨릭이지?”
“군대에 성녀가 어디 있냐, 멍청아! 군은 성별로 나뉘는 게 아니야. 작대기와 구멍, 그 둘로 나뉘는 거지.”
옆 의자에 다리를 올린 채 앉아 있던 네이슨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러자 흑인 병사는 다시 낄낄대며 웃었다.
“푸하하! 브루클린의 구멍이라니!”
케이의 시선이 물끄러미 천장으로 향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곳곳에 초소형 감시 카메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기실의 상황은 교관들이 모두 모니터링하고 있을 터였다.
“입조심해, 하워드. 상대는 네 상관이 될 사람이라고.”
보다 못한 누군가가 경고를 날렸다. 하워드는 “쳇!” 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케이를 노려보았다.
“우리 팀은 너 때문에 여섯 명이 한 조가 된 거나 마찬가지야. 네놈이 실격되든지 말든지는 상관없어. 우리 앞길에 방해만 되지 말라고! 알아듣겠어? 성녀의 개!”
그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자리에 착석했다. 케이는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벽을 응시했다.
잠시 후, 훈련병들이 앉은 의자들이 벽 뒤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갈라진 벽 안쪽에는 전투복과 전투화 그리고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시험을 칠 훈련병들은 시험 전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고, 이상이 없을 시 즉각 모의 전투로 투입된다.
─ 검진을 시작합니다. 훈련병들은 정면에 준비된 침상에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주십시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안면 근육을 수축시켰다. 부릅뜬 눈에는 굳은 각오가 어려 있었다. 잠시 후, 천장의 전등이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제1조, 훈련병 전원 검진 완료.
모의 전투장으로 이동 조치 중.
【최종 선발 시험 조별 모의 전투 확정 제1조】
자레프1:드레이크 앤더슨 | 자레프2:하워드 쿠퍼 | 자레프3:네이슨 파커
자레프4:우딘 헤르만 | 자레프5:쟝 르노 | 자레프6:나츠 시게노
자레프7:케이 애덤슨
관제실에서 시험장 내부를 지켜보던 유림의 눈이 커졌다. 1조의 모의 전투장은 낙후된 지하 하수도가 배경이었다. 실제 존재하는 도시 하수도를 본 딴 시뮬레이션 방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훈련병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시작하게.”
총감독인 허쉬 대위의 명령에 따라 제1조의 최종 관문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과제】
델타를 모두 제압한 후, 하수도에 갇혀 있는 감염자들을 안전하게 후송하라.
1조는 두 팀으로 나뉘어서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 수색대인 선발팀과 보급대인 후발팀이다. 케이는 후발팀 소속이었다. 선발팀이 적을 제압하면 후발팀이 뒤따라와 구조 작업을 실시한다.
20세기에 건설된 하수도 시설은 어둡고 음산했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쥐가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긴장한 사병들의 숨소리. 시궁창 냄새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전투장 속에서 훈련병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선발팀에서도 선두에 선 하워드가 또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우리 조에서 낙오될 놈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다들 알고 있겠지? 퉤! 그 녀석을 제외한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고!”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은 케이를 쳐다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후발팀 마지막에 붙어 따라가고 있던 케이는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하워드의 웃음소리에 허공을 쳐다보며 하품을 쏟아 냈다. 멍한 눈빛의 그는 졸린 표정이었다.
“저렇게 소란을 떨면 적들이 모여들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중얼거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케이와 마찬가지로 후발팀 소속인 나츠 시게노였다. 그는 왜소한 체격의 일본인이었는데, 숨을 죽이고 걷는 모양새가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겁이 많이 보였다.
입구로부터 약 800미터 떨어진 지점.
세 갈래로 갈라진 길이 나타났다. 마침 선발대로부터 숨죽인 통신 메시지가 들려왔다.
─ 이쪽은 자레프2. 포인트 201에 타깃 두 마리가 보인다.
─ 자레프4다. 포인트 210에 타깃 발견.
─ 자레프1이 모두에게. 전원 전투 준비! 적에게 틈을 보이지 마라. 한 번 방심하면 끝장이다.
선발대와 후발대 모두 총구가 긴 M7 소총을 양손에 움켜쥐었다. 적외선 탐지 모드에서 몸을 웅크린 채 이쪽을 노려보는 델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실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수도 천장을 기어 다니는 델타의 거친 숨소리에 아군들은 심호흡을 하며 서로의 등을 맞댔다.
키이익! 끼꺄갸갹!
끼이이이익!
하수도에 메아리치는 델타들의 울음소리를 신호로 ‘탕!’ 하고 날카로운 총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 이놈들 꼭 도마뱀처럼 움직이는데?
─ 으아아악!
누군가가 끔찍한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 제길, 우딘이 당했다.
첫 번째 교전은 짧고 혼란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연기처럼 움직이는 델타들은 빗발치는 총탄들을 맞고도 끄떡없었다.
그들은 돌풍처럼 들이닥쳐 혼을 쏙 빼놓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 다들 무사한가?
하워드는 총으로 벽을 치더니 발을 구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이게 입대 테스트 레벨이라고?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잖아! 저것들을 총으로 어떻게 맞혀?”
“어이, 우딘! 정신 차려!”
“쳇, 벌써부터 실격자 출현인가?”
조장인 드레이크는 쓰러진 우딘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당황하여 일어서더니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모두를 쳐다봤다.
“죽었어.”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머지 조원들은 놀라서 우딘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쓰러진 그의 군복은 너덜너덜해진 채 핏물이 흥건했다.
우딘의 목덜미는 마치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살점이 떨어져 나갔는데 눈대중으로 봐도 수차례나 당한 흔적이었다.
“맙소사!”
참혹한 광경을 본 훈련병들은 쇼크 상태에 빠져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로 공격당했단 말이야?”
이상했다. 고작 훈련병들이 치르는 입대 테스트치곤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가? 아니, 이건 이미 모의 전투 수준이 아니었다. 실전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부상은 입을 수 있지만 죽을 수 있다고는 안 했잖아. 델타를 모델로 한 로봇들이라면서?”
“시험은 어떻게 되는 거야, 계속하는 거야?”
“설마…… 사람이 죽었는데.”
“젠장, 교관들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한편 관제실에 있던 교관들도 패닉에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교전을 중계하던 화면이 갑자기 까맣게 꺼지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서버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화면에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떠오른 에러 문구는 번쩍이며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처음에는 여유롭게 상황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던 윌리엄스 대위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 갔다.
“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빨리 복구 안 해?”
“죄, 죄송합니다!”
우왕좌왕하는 교관들 속에서 유림은 손톱을 깨물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시뮬레이션용 델타들. 그들의 공격은 단순히 잽싸기만 한 게 아니었다. 고막이 터질 듯 울부짖으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그들의 몸놀림은 훈련용 로봇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림은 총감독인 윌리엄스 대위에게 다가가 물었다.
“대위님! 대전 상대가 시뮬레이션용 로봇들인 게 확실합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혹시 실수로 실제 델타들이 투입되거나 한 건…….”
윌리엄스는 미쳤냐는 표정으로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유림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때 대전용 로봇 중앙통제실로부터 집무관의 보고가 올라왔다.
─ 로버트 윌리엄스 대위님께 보고 드립니다. 현재 모의 전투장에서 훈련병들이 교전 중인 ‘델타’는…….
함께 보고를 받은 교관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번졌다. 벌떡 일어난 윌리엄스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넋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집무관의 보고】
우딘 헤르만 실격. 시험 종료까지 남은 시간 98분.
모의 전투장은 여전히 공포의 도가니 속에 있었다. 훈련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교관을 찾아 댔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차차 지쳐 갈 무렵, 누군가 침착한 목소리로 조원들을 달래었다.
“다들 진정하고 일단 우딘에게서 떨어져.”
조장인 드레이크였다. 그는 구릿빛 피부에 굵은 눈썹 그리고 아몬드형의 새까만 눈동자를 지닌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드레이크는 조원들을 둥글게 불러 모으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오리지널 델타들과 싸우는 중인 것 같다.”
누군가 손을 내저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교관들이 우릴 다 죽일 생각이 아닌 이상 그런 짓거리를 하겠어?”
“특수부대도 쩔쩔매는 게 델타라고.”
드레이크는 바닥에 앉아 양손을 깍지 낀 채 턱을 괴었다. 그의 진중한 눈빛을 본 조원들의 얼굴에서는 차차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는 뉴욕 출신이야. 맨해튼은 델타가 처음 발견된 지역이지. 난 실제로 몇 번이나 그들을 본 적이 있다. 빛처럼 빠른 스피드, 잔인한 공격 방식,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 틀림없어. 저들은 오리지널이다.”
드레이크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는 사연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전환됐다. 조원들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델타가 왜 여기에 있냐고!”
“잊었어? 로스티아벤은 정예 부대를 파견해서 델타를 포획한 후 낙원으로 수송해 오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실상 이 섬에는 엄청난 숫자의 델타들이 존재한다.”
멀리서 끽끽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워드는 흠칫 놀라 뒤를 향해 소총을 겨누었다. 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좌우를 경계하며 소리쳤다.
“또 몰려오고 있어!”
“뛰어!”
무리 지어 오는 델타들은 마치 박쥐처럼 움직였다. 기나긴 터널을 좌우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듯 그들을 몰아세웠다. 다시 세 개의 갈라진 하수로가 등장했다.
네이슨과 드레이크는 각각 좌우로 나뉘어서 도주했다. 하워드와 쟝은 미친 듯이 총탄을 갈기면서 정면을 향해 뛰었다.
탕!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뭔가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연 당황한 듯 델타들은 움찔 추격을 멈추더니 어둠 속을 기어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헉, 헉.
하아, 하아.
─ 갔나? 간 거야?
─ 그런 것 같은데.
─ 부상자는?
정신없던 두 번째 접전이 지나가자 모두 총구를 세운 채 주위를 경계하며 원으로 동그랗게 모였다.
“어이, 저기 좀 봐.”
쟝이 가리킨 쪽 하수로 물 위에 뭔가가 둥둥 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이들은 그것이 델타의 시체임을 발견했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거야?”
쟝이 내려가 시체를 뒤집자 하워드가 구역질을 하며 말했다.
“조심해! 감염될 수도 있다고.”
한때는 아름다운 여성이었을 그녀의 몸은 툭 튀어나온 등뼈에 철갑처럼 단단해진 피부로 덮여 있었다. 그 흉측한 외관은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괴물에 가까웠다.
두드러지게 발달한 턱과 어금니는 포식자의 잔인한 면모를 나타냈고, 네 발로 뛰기 좋게 발달한 팔다리 근육은 먹잇감을 사냥하는 데 필요한 점프력과 스피드를 뒷받침했다.
“미간을 정확히 맞췄어.”
쟝이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쏜 거지?”
그가 주위를 돌아보며 묻자, 나츠가 우물거리며 걸어 나왔다.
“제, 제가 쐈어요.”
남자치고는 조그마한 손에 커다란 저격 소총이 쥐여져 있었다. 작은 몸집에 소년 같은 외모를 지닌 나츠의 정체는 일류 저격수였다. 하워드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쪽에 하릴없이 소총을 쥐고 있는 케이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는 험상궂은 표정을 짓더니 잇새로 으르렁거리며 다가와 소리쳤다.
“네놈은 구경만 하고 있던 거냐?”
“아니에요, 사실은 케이 씨가…….”
나츠가 변명을 하려 나섰지만 하워드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그를 밀쳐 냈다. 하워드는 케이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고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으르렁대며 물었다.
“네 녀석, 통신병이었지? 관제실에 연락은 해 봤냐?”
“시도해 봤지만 통신 서버가 먹통이다.”
무표정하게 답하는 케이의 모습에 하워드는 흥분해서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게 만들어야 할 것 아니야! 엔지니어인 네놈이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못하겠다는 거냐? 차라리 여기서 뒈져 버려! 우딘이 아니라 네놈이 뒈졌어야 했어!”
하워드는 케이를 벽으로 밀어 넣더니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난 살아 나갈 거다.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여기서 뒈질 네놈 대신 브루클린의 성녀의 엉덩이를 마음껏 맛봐 주지. 이미 걸레짝이 되었을 구멍을 아주 못 쓰게 만들어 버리겠어! 듣고 있는 거냐! 쓸모없는 녀석은 죽어 버려! 죽어 버리라고!”
나츠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핏발 선 눈으로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하워드도 무서웠지만, 차분한 눈초리로 그를 응시하고 있는 케이의 모습도 소름 끼치게 오싹했다. 나츠는 보고만 있는 쟝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흔들었다.
“좀 말려 보세요. 저, 저 사람을 화나게 하면 안 돼요.”
“괜찮아. 하워드가 성격은 괄괄해도 군율을 어길 놈은 아니니까.”
쟝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그쪽이 아니고 제 말은 케이 씨를…….”
“저놈도 대단하네. 폭발한 하워드를 상대로 눈 하나 껌뻑하지 않잖아. 아니면 너무 겁먹어서 굳은 건가?”
‘겁먹었다고? 케이 씨가?’
나츠는 창백한 얼굴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어이, 하워드! 그쯤 해 둬! 정말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하여간 다혈질이라니까. 쟝은 투덜거리며 하워드를 말리러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나츠는 불안한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하워드와 쟝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줄곧 평온하던 케이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불쾌함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년의 구멍 양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박아 줄 테다! 그리고 안에다 시원하게 소변도 봐 주지! 볼만하겠지?”
하워드는 흰자위를 뒤집어 가며 케이를 죽일 듯 팔에 힘을 주었다. 브루클린의 성녀를 모욕하는 그의 발언은 수위를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다음 일은 아주 순식간에 벌어졌다.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를 지른 하워드는 얼굴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굴렀다. 마치 입 주위가 불에 타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 내던 그의 입이 피에로처럼 옆으로 쭉 찢어져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내려다보는 케이의 손가락에서는 핏방울이 똑똑 흘러내렸다.
그는 자연스럽게 하워드의 다리를 짓밟으며 걸어 나왔다.
우드득.
뭔가가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악! 그만둬!”
하워드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흐느껴 울었다. 그의 왼쪽 발목이 옆으로 심하게 돌아간 채 꺾여 있었다. 쟝은 할 말을 잃은 채 그 자리에서 굳었다.
케이와 눈이 마주친 나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니, 전율일지도 몰랐다.
서늘한 눈매를 관통하는 붉은빛의 동공.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건 바로 방금 전 어둠 속에서 델타를 죽이던 눈빛이었다.
그 시각, 관제실은 여전히 먹통이 된 서버와 씨름 중에 있었다.
“지금 저 안에 오리지널 델타가 있다고!”
중앙 서버는 온전했다. 다만 모의 전투가 시행되고 있는 시험장만이 에러가 난 상태였다. 접속을 시도할 때마다 뜨는 에러 메시지는 동일했다.
─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관리자 로그인을 해 주십시오.
이때 관제실 스크린에 별안간 아름드리나무의 의회 인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평의회의 의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윌리엄스 대위가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났다. 관제실 내 간부들과 사병들도 전원 기립하여 거수경례를 했다.
열두 명의 평의원들 중 여덟 명이 접속한 상태였다. 그들은 턱과 입술만 보인 채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 윌리엄스 대위, 상황을 보고해 보게. 훈련병 선발 시험에 델타가 나타났다는 것이 사실인가?
평의원들 중 유일하게 군 제복을 입은 자가 두 손에 턱을 괴고 물었다. 그가 입은 제복의 왼쪽 가슴에는 로스티아벤 총사령관의 상징인 네 개의 별들이 박혀 있었다.
“사실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현재 원인을 알 수 없는 에러로 인하여 시험장 서버와 연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평의회가 술렁였다. 에덴 타워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한 그들도 이 상황이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 어떻게 오리지널 델타가 시험장에 투입될 수가 있는 겁니까?
─ 모래의 도시 불법 체류자들의 소행이 아닐지요?
─ 일단 주민들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그때 시험장 입구 쪽을 카메라로 살피던 부사관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보고 드립니다!”
“또 뭐야!”
윌리엄스 대위는 평의회의 눈치를 살피며 부사관에게로 다가갔다. 부사관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정면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타이트한 제복을 입고 홀로 시험장 입구에 나타난 이는 유림이었다. 그녀는 흘끗 상단의 카메라 쪽을 올려다보더니 손에 쥔 것을 게이트 앞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소위가 지금 뭘 하는 건가?”
부사관은 화면을 터치하여 확대했다. 그 역시 유림의 성미를 아는지라 못내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건!”
대위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게이트에 설치한 것은 소형 타이머 폭탄이었다. 아예 문을 부숴 버리고 진입할 생각인 것이다. 윌리엄스 대위는 창백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평의회 쪽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실시간으로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정 소위가 무력 진입을 시도하려는 것 같습니다.”
“막아! STF는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안드로이드 집무관이 다가와 보고했다.
“STF 요원들은 대기 상태입니다.”
“뭐? 당장 출동시키라 하지 않았나! 누구 마음대로 대기야!”
“내가 지시했네.”
묵직한 음성의 등장에 윌리엄스 대위는 난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 그는 재빨리 눈썹 옆에 손을 붙이고 경례를 했다.
“대령님!”
뺨에 새겨진 선명한 십자형 흉터, 2m에 가까운 거구의 신장. 로스티아벤의 전설적인 인물, 블랙 호크 대령이었다.
“정 소위 말에 따르면 본섬의 STF 요원들은 델타와의 교전 경험이 전무하여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만 한다더군. 지원 병력은 필요 없으니 관제실에서 방해만 하지 않도록 해 달래서 말이야.”
윌리엄스 대위는 “물론입니다!” 하고 물러서며 식은땀을 흘렸다. 교관들도 모두 뻣뻣하게 굳은 채로 거수경례 중이었다. 블랙 호크의 등장으로 인해 관제실 내는 사병이고 간부고 할 것 없이 전원 기합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관제실의 지휘권은 자연스럽게 호크 대령에게로 넘어갔다.
대위는 화면을 응시하는 호크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블랙 호크가 정 교관을 각별히 여긴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감쌀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잘못되면 괜히 자신만 독박 차게 될 분위기였다. 블랙 호크야 평의회와 줄이 닿아 있지만 그는 뒷배도 연줄도 없어 자칫 끈 떨어진 연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화면 너머에서 섬광이 일었다. 집무관이 빠르게 상황 보고를 올렸다.
“제1 모의 전투장 게이트 A에서 폭파 발생! 내벽 자동 복구 시스템이 실행 중입니다. 관제시스템 피해는 0.2%로 미비합니다.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
“저기, 정 소위님 아닙니까?”
돌풍과 같은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는 가운데 가녀린 인영 하나가 달려가고 있었다. 호크는 화면 속을 빤히 응시했다.
“대령님, 역시 지원 병력을 보내는 게 어떨까요?”
“그럴 필요 없다.”
다른 교관들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호크는 피식 웃더니 팔짱을 꼈다.
“제군들은 그녀가 왜 브루클린의 성녀라 불리는지 아는가?”
전 STF 델타 포획반, 미 동부 팀의 에이스였던 유림. 로스티아벤 내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만큼 재작년 브루클린에서의 유림의 활약은 전설적이었다.
“델타와의 교전에서 정 소위는 총이 아닌 검을 쓰기로 유명하지. 델타 포획용으로 만든 탄환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오직 소위만을 위해 맞춤 제작한 검이야. 은빛 칼날을 휘두르며 델타를 제압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죄인들을 인도하는 성녀처럼 성스럽고 아름다웠다는군. 당시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던 병사들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지. ‘전장의 성녀’. 후에 그녀가 참전했던 브루클린 지역의 이름이 덧붙여져서 자연스럽게 ‘브루클린의 성녀’라 불리게 된 걸세.”
블랙 호크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전원, 지금부터 화면에서 절대 눈을 떼지 말도록!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진풍경이 펼쳐질 테니 말이야. 전장의 성녀가 휘두르는 검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니 부디 놓치지들 말게.”
콰쾅!
멀리서 들려온 폭발음에 나츠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 이쪽은 자레프1이다. 폭발음이 들렸는데 다들 무사한가?
“드레이크 씨! 이쪽은 괜찮습니다. 그쪽은 두 분 다 무사하십니까?”
─ 네이슨 쪽으로 한 마리가 따라갔어! 누가 가서 좀 확인해 봐. 나는 다리를 다쳐서…….
통신음이 불안정하게 치직거리기 시작했다.
─ 포인트…… A에…… 후에…….
“드레이크 씨!”
가까스로 이어지던 말소리는 이내 뚝 끊기고 말았다. 나츠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서 있다가 케이의 모습을 찾았다. 눈앞에 있던 그가 어느새 터널 안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케이 씨!”
그는 강아지처럼 케이의 뒤를 쫓았다. 멀뚱히 서 있던 쟝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때 바닥을 기어 오던 하워드가 쟝의 발목을 덥석 붙들었다.
“기다려!”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본 쟝은 당혹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하워드가 울며 손을 뻗고 있었다.
“날 두고 가지 마.”
“하워드…….”
“이대로 델타와 마주치면 난 죽은 목숨이야.”
쟝은 망설이는 표정으로 케이와 나츠 쪽을 응시했다. 참 아이러니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가장 뒤떨어진다고 여겼던 두 사람이 선두에서 모두를 이끌고 있다니.
“미안하다, 하워드.”
“쟝?”
저 두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죽지는 않을 테지.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날 죽일 셈이야? 기다려! 쟝!”
달려가는 쟝의 등 뒤로 절규하는 하워드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편 케이는 폭발음이 들려온 쪽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중이었다. 나츠는 하수로 내부의 설계도면을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펼쳤다. 3D로 펼쳐진 지형이 굴곡진 길들을 입체로 나타내며 입구까지 탈출로를 붉은 선으로 나타냈다.
“네이슨 씨는 아마도 여기, 포인트 252쯤에 있을 거예요. 갈림길에서 우회전이요.”
“미쳤어? 그쪽에는 델타가 따라갔다고 했잖아!”
어느새 뒤를 쫓아온 쟝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입구로 돌아가자. 아까 났던 폭발음은 구조대일지도 몰라.”
내 목숨 부지하자고 부상당한 전우까지 버리고 온 판국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한 후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것이 우선이다.
“네이슨 씨와 드레이크 씨를 두고 가자고요?”
“별수 없잖아! 델타가 몰려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 우리라도 나가서 구조 요청을 해야 할 것 아니야!”
논쟁을 벌이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케이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케이는 결론을 내려 달라는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며 귀찮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 이 안에 있는 델타는 총 열한 마리다. 네이슨이 있는 포인트 252에 두 마리, 드레이크가 있는 포인트 225쪽에 한 마리, 우리가 들어왔던 게이트 쪽에 여섯 마리.”
“게이트에 여섯 마리나 있다고?”
쟝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 잠깐.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고…….”
“네가 하워드를 버리고 온 것보단 쉽게 알 수 있지.”
의문을 제기하던 쟝의 동공이 바들거리며 커졌다. 그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케이의 눈빛에 숨이 턱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어,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가…….”
쟝은 나츠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나츠는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를 지으려다가 하워드가 남겨졌을 쪽을 쳐다보았다. 쟝에게 뭐라고 할 용기는 없었다. 자신이라도 그 상황에선 어떤 선택을 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한편 케이는 울먹이는 쟝의 말 따위는 듣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반쯤 뜬 눈으로 천장과 주위를 살피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네 마리.”
쟝과 나츠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들은 얼어붙은 채 동공만 움직여 상하좌우를 살폈다.
그때,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바닥을 빠르게 기며 벽으로 점프했다. 그 소리에 놀란 쟝은 총을 겨누다가 발을 헛디뎌 물이 고인 하수로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쟝이 허우적거리는 게 보였다. 고작 가슴팍까지 오는 수심이었건만 그는 당황했는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발버둥을 쳤다.
“끄아아악! 아악! 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였다. 나츠는 황급히 총구를 겨눴다. 몸을 일으킨 쟝이 사색이 된 채 울부짖고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는 돌연 뭔가를 발견한 듯 수면 아래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쟝 씨?”
가까이 다가서던 나츠는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물속에 뭔가가 있었다. 하수로 바닥에 납작 누워 있는 그림자. 나츠의 눈이 공포로 커졌다.
델타다!
델타 하나가 잠수한 채 숨어 있었다. 쟝은 파리한 안색으로 수면 밑을 향해 미친 듯이 총탄을 갈겼다.
타다다다!
물보라가 일었다. 수면 아래에서 몸을 뒤집은 델타가 커다란 턱을 벌린 채 어금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쟝은 황급히 물을 헤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탕!
조준 자세를 하고 있던 나츠가 천장을 향해 발포했다. 재빠르게 피한 델타는 아치 모양의 터널 입구로 피하며 벽을 타고 사라졌다.
“살려 줘!”
하수구 밖으로 기어 나오던 쟝은 뭔가에 다리를 잡힌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아악!”
비명을 지른 쟝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살려 달라고 외치던 그는 꼬르륵거리며 수면 아래로 몇 차례 끌려갔다가 고개를 쳐드는 걸 반복했다.
수면 아래에서 악어처럼 벌린 입 사이로 번뜩이는 어금니가 으드득으드득 그의 관절을 물어뜯었다. 델타에게 하반신을 물린 쟝은 경련을 일으키며 눈자위를 뒤집었다.
하수로 물이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탁하게 번져 가는 핏물이 주는 상상은 섬뜩했다. 나츠는 새파란 입술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풍덩거리며 접전이 일어났던 수면은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잠시 후.
물 위에 동그란 파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츠는 바짝 긴장한 자세로 수면 아래에 총구를 겨누었다. 물속에서 무언가 올라오고 있었다.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호흡을 내쉬면서 방아쇠를 당기던 그의 눈이 번쩍 커졌다.
‘쟝 씨?’
한 발자국 다가서던 나츠는 굳어서 멈추었다. 숨진 쟝의 몸이 엎드린 채로 둥둥 떠올라 있었다. 그의 오른팔과 왼다리는 찢겨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쏟아진 내장은 오물처럼 뭉쳐서 물 위를 배회했다. 나츠는 참혹하게 죽은 전우의 모습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꼬르륵.
기체 방울들이 올라오는 소리였다. 그는 턱에 힘을 주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검은 수면 위로 기체 방울들이 점차 모여들고, 그 속에서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쑥 올라왔다.
해초처럼 엉켜 붙은 머리칼, 툭 튀어나온 눈썹 뼈 밑으로 움푹 들어간 눈동자, 살기와 광기가 번뜩이는 동공.
쟝을 죽인 델타였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그녀는 나츠를 발견하자마자 발달한 광대뼈를 움직여 입을 벌렸다. 그러자 흉물스러운 어금니와 핏물이 흐르는 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그녀는 사납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집무관의 보고】
쟝 르노 실격. 하워드 쿠퍼, 드레이크 앤더슨 부상. 네이슨 파커는 생사 불명. 시험 종료까지 남은 시간 54분.
나츠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들은 포위된 상태였다. 좌우 천장에 델타가 두 마리, 배후에 한 마리 그리고 쟝을 죽인 델타가 정면 물속에 위치해 있다.
델타에 대한 이론 교육은 수차례 받았다. 시뮬레이션으로 모의 전투도 여러 차례 해 봤다. 이들은 지능이 낮아서 조직적인 행동력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언어와 지식을 상실한 그들의 학습 능력은 원숭이보다도 못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전과 이론은 달랐다.
“왜 공격하지 않는 걸까요?”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그들은 마치 대기 명령을 받은 병사들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리더 격으로 보이는 델타는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여전히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키이익! 끼이이익!
캬캬캬캭!
나츠는 귀를 움켜잡았다. 델타들의 비명 소리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동료들의 울부짖음에 델타들은 당황했는지 벽을 타고 움직이며 동요를 보였다.
탕!
타앙!
나츠는 빈틈을 보인 델타들을 향해 연달아 총을 쏘았다. 목뒤에 총탄을 맞은 델타 하나가 천장에서 미끄러지듯 굴러 떨어졌다. 그것을 본 하수로의 델타가 분노한 듯 울부짖으며 튀어나왔다.
그녀는 미끄러운 바닥에 납작하게 배를 붙인 채로 빠르게 달려왔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델타의 움직임에 나츠는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나다가 “우왁!” 하고 뒤로 자빠졌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법!
어느새 델타는 코앞으로 들이닥친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침을 본 순간, 나츠는 절망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을 각오한 채 터질 것 같이 뛰는 심장 소리 위로 떠오른 건 하나뿐인 가족의 모습이었다.
‘유메!’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에에엑!”
귀청이 떨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며 벽에 부딪쳤다. 나츠는 멈췄던 숨과 함께 부들부들 떨던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그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어야 할 델타가 고꾸라진 채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델타는 뭔가에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케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델타는 흠칫거리며 공격을 주저했다. 등을 동그랗게 말아서 세운 그녀는 위협을 한다기보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천장에서 그녀의 동료들이 우두머리 델타를 향해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보냈다. 그것에 힘입은 델타는 껑충 뛰더니 케이의 안면을 향해 으르렁대며 달려들었다. 케이는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델타를 바라보더니 고요히 한쪽 팔을 들었다.
고즈넉하게 가라앉던 그의 눈빛에 섬뜩한 살기가 어렸다. 투명한 동공에 어린 붉기가 갈색 눈동자를 신비롭게 장식했다.
아름답다.
나츠는 홀린 듯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기 하나 없는 손을 흉기처럼 곧게 핀 상태였다.
그때였다
슈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허공을 수평으로 가르며 움직였다. 가벼운 바람이 일기 무섭게 델타의 목이 댕강 하고 떨어졌다. 나츠는 반사적으로 케이의 손을 쳐다보았다.
케이 씨가 아니다.
그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총은 어디에 떨어뜨리고 온 건가, 애덤슨 훈련병?”
낭창한 목소리가 터널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짙은 석양빛으로 차갑게 얼어 있던 케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본연의 갈색으로 돌아왔다.
“병사가 전장에서 총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고 했을 텐데?”
싹둑 이등분된 델타의 몸을 걷어찬 주인공은 사뿐사뿐 핏자국을 피해 걸어왔다. 그녀는 은색 검에 묻은 델타의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예리한 칼날을 허공에 털어 냈다.
“유림?”
“정 소위님, 이겠지.”
유림은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내뿜는 거친 호흡은 쉬지도 않고 달려온 상태임을 입증했다. 거기에 분노까지 더해져 호흡곤란이 일어나진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그녀는 놀란 케이와 마주 보고 선 뒤 고글과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땀방울이 밴 미간 양측에 살기등등한 눈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림의 꽉 쥔 주먹을 본 케이는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그는 다급하게 허공에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자, 잠깐! 내 말부터…….”
눈앞에 날아오는 주먹을 맞고 픽 쓰러진 그는 뺨을 부여잡으며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달려드는 델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개죽음이라도 당할 생각이었어?”
반면 유림에게 연속으로 얻어맞는 케이의 모습에 나츠는 충격을 받은 채 눈을 껌뻑였다.
─ 시험장 내 훈련병들에게 알립니다. 돌발 상황으로 인해 입대 테스트를 긴급 중단합니다. 훈련병들은 교관들의 지시에 따라 안전하게 시험장을 벗어나 주십시오.
적색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기시켜 놓았던 STF 요원들이 드디어 투입된 모양이었다. 유림은 자신을 방패 삼아 개미 떼처럼 줄지어 들어오는 구조대 쪽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멀리서 비실비실한 총탄 소리들도 들려왔다.
‘남은 델타는 서넛 정도이니 그쯤은 알아서들 진압할 수 있겠지.’
그녀는 뺨을 감싼 채 얼빠진 표정으로 있는 케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팔다리는 일단 멀쩡히 붙어 있는 것 같고, 전투복에 피가 좀 묻었는데 본인 건 아닌 듯하고, 어디 물리거나 긁힌 자국도 없고.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눈빛을 지었다. 그런 유림을 바라보던 케이의 입가에도 곡선이 피어올랐다.
“걱정했어요?”
천연덕스럽게 생글생글 웃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속편한 얼굴로 앉아 있는 그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차며 소리쳤다.
“언제까지 자빠져 있을 생각이야! 당장 일어나지 못해?”
STF와 구조반이 사태를 정리 중이라지만 여전히 교전 중인 상황이었다. 유림은 주변을 흘끗거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땅을 짚고 일어선 케이는 유림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기댔다. 은근슬쩍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댄 그는 힘들다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유림은 그런 케이를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델타와의 교전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장한 일이었다.
마침내 관제실에서도 시험장 서버를 복구한 모양이었다. 호크 대령에게 상황 보고를 하던 유림은 한쪽 구석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나츠를 발견했다.
“거기 훈련병! 이름이 뭔가?”
넋 나간 얼굴로 있던 나츠는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나, 나츠 시게노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정유림 소위님!”
유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어보았다. 열여덟 정도 되었으려나? 아직 어린애 같은데.
“지금부터 구조대와 합류할 것이니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고 잘 따라오도록.”
“예!”
나츠는 앞장서는 유림을 쫓으며 얼굴을 붉혔다. 피투성이의 그녀는 눈이 부셨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이 나는 사람이 있다면 소위님 같은 분을 일컫는 말일 테지. 양손에 은빛 검을 쥔 그녀의 모습은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전장의 여신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유림의 등에 거의 업혀 있다시피 했던 케이는 몸을 떼더니 슬렁슬렁 그녀의 옆에서 걸었다. 하품을 하며 걷는 그의 모습은 무자비한 눈빛으로 델타의 숨통을 끊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니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나츠는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던지며 근사한 한 쌍이라고 생각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구조대와의 합류 지점에 도달했다. 곳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STF 요원들이 유림에게 경례를 하자, 나츠는 자신도 덩달아 거수경례를 하며 뻣뻣한 자세로 그들을 지나쳤다.
“나츠!”
멀리서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사람은 조장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 씨, 무사했군요!”
그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며 무용담을 털어놓다가 나머지 조원들의 생사를 물었다. 그때 구조대원들에 의해 실려 오는 사람이 있었다.
“맙소사, 하워드?”
드레이크는 입가를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리는 그를 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델타들은 죽이기 전에 상대를 고문이라도 하는 건가?”
하워드는 드레이크를 보고선 몸을 일으켰다. 욕설을 중얼거리며 인상을 쓰던 그는 드레이크의 어깨 너머로 뭔가를 보고선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흐, 흐아아악!”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유림은 하워드의 비명 소리에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귀신이라도 봤어? 날 보고 왜 저렇게 놀라는 거야?”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케이는 하워드를 보더니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는 유림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 친구 말인가요? 브루클린의 성녀의 열렬한 팬이라 하더군요.”
“그래?”
유림의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그녀는 “그렇다면 인사라도 해 줄까?”라고 흥얼거리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
하워드는 유림의 뒤를 따라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케이를 보더니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러 댔다.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심지어 들것에서 굴러 떨어지기까지 한 그의 발작에, 구조대원들은 결국 강제로 진정제를 투입했다. 유림은 경기를 일으키며 거품을 무는 하워드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감염이라도 된 거 아냐?”
“글쎄요.”
유림의 어깨를 잡은 케이가 그녀를 살짝 안으며 속삭였다.
“아름다운 소위님을 보고 너무 좋아서 흥분했나?”
유림을 데리고 돌아가던 케이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하워드의 옆에 사색이 된 나츠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케이는 표정이 없는 눈으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나츠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하워드가 누워 있는 들것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도 와서 인사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줄 알았는데.’
나츠는 멀어져 가는 케이의 등을 보며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괴롭히거나 하진 않았어?”
“브루클린의 성녀가 담당 교관이라고 했더니 다들 잘해 주던데요?”
“보는 눈들은 있어 가지고.”
유림이 콧대를 세우고 걸어가자 케이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는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총총 걸어가는 그녀의 귀가 민망함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슬금슬금 유림의 뒤를 쫓아간 케이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귓불을 툭 건드렸다.
“더우십니까? 소위님 귀가 빨갛습니다.”
“시끄러워.”
속이 편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유림은 곁눈질로 케이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보통 델타와의 첫 교전을 경험한 병사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아까 비명을 지르며 졸도한 하워드란 녀석처럼 말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돼먹은 것인지 태연하다 못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혹시 생각보다 화려한 경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유림은 이내 ‘설마’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면 알수록 아리송한 남자였다.
“난 회의가 있으니 먼저 돌아가.”
뛰어가던 유림은 시험장 밖에서 기다리던 호크와 합류했다. 반대 방향으로 걷던 케이는 뒤를 돌았다. 호크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유림의 모습이 보였다. 케이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호크가 흘끗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잠시 후 먼저 돌아선 것은 호크 쪽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호크의 모습에 케이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이 피라미드 모양의 건너편 건물로 사라질 때까지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던 대상은 정확히 말하자면 유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던 호크 쪽이었다.
【집무관의 보고】
이번 모의 전투 사고로부터 생존한 1조 훈련병들은 부상 여부와 관계없이 전원 합격시키는 것으로 결정한다.
드레이크 앤더슨, 하워드 쿠퍼, 나츠 시게노, 케이 애덤슨 최종 합격.
피 묻은 전투복을 벗어 던진 케이는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자동으로 입력된 물 온도에 맞춰 샤워 모드로 변경된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욕실 스크린이 까맣게 변하더니 검은 화면 너머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오리지널 델타를 투입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부터는 귀띔이라도 해 주시죠. 이번에는 저도 꽤 당황했습니다.
케이는 물을 끄더니 피곤한 눈빛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 마스터께서 하신 일 아닙니까?
케이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벽에 기댔다. 아무래도 이번 일의 배후를 밝히는 것은 쉽지는 않을 듯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훌륭한 무대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해선 감사해야겠군.”
─ 정 소위 말씀이십니까?
“그래, 덕분에 그녀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어.”
─ 그렇군요.
“누가 한 짓인지 알아 봐. 평의회 쪽 움직임도 살피고.”
─ 알겠습니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케이는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커피 잔을 든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석양빛으로 물든 하늘에는 자개구름이 산개해 있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물끄러미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리사가 유리창에 접속하여 반짝이더니 조용히 보고했다.
─ 정 소위님께서 회의를 마치고 귀가 중이십니다. 약 2분 후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2분의 휴식인가.
케이는 지그시 눈을 감고 벽에 기댔다. 따뜻한 커피 몇 모금을 마시니 멀리서 유림이 탄 에어쉽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에어쉽이 도착하자 유리창으로 된 전면의 벽이 미닫이문처럼 열렸다. 하품을 하며 내린 유림은 케이를 보자마자 그의 커피 잔을 뺏어 후루룩 마셨다.
“왔어요?”
케이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유림을 반기며 다가왔다. 그녀는 커피가 쓴 지 이마를 찡그리더니 훌렁훌렁 옷을 벗기 시작했다. 허물을 벗듯 하나씩 떨어뜨리며 욕실로 향하는 유림의 모습에 케이는 그것을 하나씩 주우며 쫓아갔다.
“피 비린내 나는 것 같아서 찝찝해 죽겠어.”
브래지어와 속옷만 입은 유림은 욕실로 들어서더니 “아!” 하고 다시 문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회의 결과 1조 전원, 최종 합격시키기로 했어.”
“그래요?”
“목소리가 왜 그래? 별로 안 좋은가 보네?”
생각보다 무덤덤한 케이의 목소리에 유림이 오히려 아쉬운 소리를 했다. 문밖에 서 있던 케이는 들고 있던 유림의 옷들을 미련 없이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그 즉시 욕실로 직행했다. 브래지어를 벗던 유림은 난데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온 케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받아 갈 것이 있어서요.”
유림은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남들은 제가 이 정도의 상은 백 번도 더 받은 줄로만 알더군요.”
이걸 받기까지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는지, 오늘 피에로처럼 입이 찢어진 놈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짙은 갈색으로 물든 케이의 시선이 유림의 붉은 입술로 향했다. 노골적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유림의 눈이 커졌다.
“나중에 해, 나중에.”
그녀는 황급히 그의 어깨를 홱 밀치고 샤워부스 안으로 향했다. 반쯤 감은 눈을 한 채 서 있던 케이가 유림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의외로 엄청난 힘에 반 바퀴 돌아서 끌려온 유림은 그의 품에 쏙 갇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나중이라면 샤워한 후에요?”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는 키스보다 더한 게 하고 싶을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낮았나. 귓가에서 울리는 그의 나른한 울림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흘렀다. 바닥에 그녀의 브래지어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유림은 토끼 눈이 된 상태로 굳었다. 낯빛이 창백해진 유림이 뒤로 물러서자, 케이는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비틀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바보처럼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봤지만 몸이 점점 주저앉고 있었다. 유림은 반사적으로 케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눈꺼풀을 살짝 든 케이는 눈웃음을 지었다.
솔직한 여자다. 몽롱한 눈빛도 야한 숨소리도 경박하기보다는 사랑스럽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남자로 하여금 흥분과 만족감이 교차하는 희열을 느끼게 하는 여자. 그래, 보통의 남자들이었다면 분명 그리 여겼을 것이다.
몇 분의 긴 입맞춤은 두 사람의 호흡과 타액을 뜨겁게 뒤섞었다. 어느새 케이는 벽에 기대앉은 채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유림은 그의 허벅지에 올라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그의 셔츠를 누르며 부딪쳤다. 유림의 허리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은 서서히 올라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더…… 할까요?”
탁해진 눈빛.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물었다. 참을 듯 말 듯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인 케이는 유림의 가슴골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초대를 하는 듯한 부드러운 애무였다.
유림은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은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아주 부끄러운 것들을 할 작정인데.”
배꼽 밑에서 뭔가 짜릿짜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허벅지 안쪽이 경련을 일으키며 흥분에 불을 지폈다.
그냥 느낌일 뿐일까, 아니면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곳을 탐하고 있는 것일까. 흐느끼는 숨소리와 함께 쾌감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무릎에 힘이 탁 풀린 유림은 케이의 머리를 꽉 안으며 그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퍼뜩 정신이 돌아온 유림은 굳은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봉긋한 가슴의 정점을 살짝 깨문 케이가 턱을 괸 채 웃고 있었다. 그는 입술에 묻은 타액을 혀로 훑더니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어루만졌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씻어야겠어.”
그는 벌떡 일어서는 유림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쉬이 놓지 않는 그의 손아귀 힘에 유림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깊은 눈매였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암갈색 눈동자는. 망설이듯 입술을 연 유림은 짐짓 냉정하게 말했다.
“내일 오전이면 자대 배치를 받게 될 거야. 너와 내가 이렇게 함께 있는 것도 오늘로써 마지막일 테고.”
그것은 어쩐지 그녀 자신에게 못을 박는 것처럼 들렸다. 유림은 반대쪽 팔로 가슴을 모으며 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알몸을 보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도가 넘는 행위는 징계감이야, 애덤슨 훈련병.”
짐짓 무섭게 어르는 유림의 목소리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맨 등에 자신의 셔츠를 벗어서 걸쳐 주었다.
“마지막이란 말은 쉽게 쓰는 게 아니에요.”
케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음울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미래는 결코 뜻대로 되지 않거든요.”
유림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답을 회피하듯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욕실을 홱 빠져나갔다. 너무 쉽게 물러서는 그의 태도에 유림은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열기와 두근거림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던 밤이었다. 잠든 사이 혹시나 케이가 몰래 숨어 들지는 않을까, 슬그머니 침대 위로 올라오지는 않을까, 키스 후의 것들을 이어서 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망상을 하던 끝에 유림은 동틀 무렵에야 겨우 잠에 들었다.
그리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그녀는 텅 빈 그의 침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인사는커녕 쪽지 하나도 없던 방.
유림은 당황한 표정으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리사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흘러나왔다.
─ 괜찮으십니까, 소위님?
“뭐가?”
─ 스트레스 수치가 200% 상승하였습니다. 게다가 수면 부족으로 인하여 피부가…….
“그놈의 수치 이야기 좀 집어치워!”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 된 리사는 재깍 입을 다물었다. 도도한 눈매를 치켜세우며 쏘아 댄 유림은 쿵쿵대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밥도 거르고 나온 그녀는 곧장 모래의 도시로 향했다.
─ ‘울부짖는 인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술집에 들어선 유림은 눈앞에 자동으로 펼쳐지는 광선 메뉴를 응시했다.
“21세기의 추천 메뉴 1번.”
─ 21세기의 추천 메뉴 1번을 선택하셨습니다.
유림은 시퍼런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배은망덕한 놈, 음흉한 놈, 뻔뻔한 놈!’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그런 무능력한 놈을 최종 관문의 합격 문턱까지 끌어 준 게 누군데. 그녀가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단물 다 빨았으니 더 이상 볼일 없다는 건가? 그럴 거면 어제 그런 짓들은 왜 한 건데?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통이 터졌다.
그때 그녀의 테이블 맞은편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유림.”
“메리!”
아담한 체구의 여자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출구를 등지고 앉았다. 그녀는 휴양지의 바다처럼 푸르른 눈동자에 한가득 미소를 담으며 유림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콧잔등과 뺨에 뿌려진 주근깨는 소녀와 같은 인상을 더해 줬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
“별거 아니야.”
유림은 손사래를 치며 콧방귀를 뀌었다. 황금 같은 휴가 첫날을 그 녀석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메리는 그런 유림을 보며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보나마나 또 짓궂은 신병대 녀석들이 그녀를 건드린 것일 테지.
“참아, 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런걸.”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생기가 도는 도발적인 입술. 활동적인 유림은 언제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어 사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예쁜 가슴 곡선에서 잘록한 허리선 그리고 동그랗게 솟아오른 엉덩이까지. 긴 포니테일 머리칼을 찰랑이며 걷는 그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마리의 앙칼진 검은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그녀가 메리는 늘 눈이 부셨다.
심드렁한 자세로 앉아 있던 유림은 다시금 떠오른 어제의 기억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지막이란 말은 쉽게 쓰는 게 아니에요, 좋아하시네.”
케이의 말투와 표정을 똑같이 따라한 유림은 콧방귀를 끼며 다리를 꼬았다.
“나쁜 자식.”
그녀의 붉은 입술이 분노로 씨근덕대는 것을 보면서 메리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누가 브루클린의 성녀의 속을 이렇게 긁어 놓은 것일까.
유림의 분노는 음식이 나오고서야 가라앉을 기미를 보였다. 볼이 불룩하도록 꾸역꾸역 입안에 음식을 처넣던 유림은 배가 좀 부를 때쯤에야 메리의 안부를 물었다.
“별일은 없어?”
“늘 똑같지 뭐.”
메리는 태양의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태양의 도시는 선택받은 여자들만 살 수 있는 도시였는데 일명 ‘입실론’4)이라 불리는 여성들을 위한 성역이었다. 그들은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진 자들로 낙원에서는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실상 이곳 로스트 헤븐은 철저하게 입실론들 위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낙원의 주민이란 정확히는 입실론을 뜻한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신종 바이러스 치료제인 지브G-eve를 복용한 후 극소수의 여성들은 면역체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들에게서는 몇몇의 특이 사항들이 발견되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ESP5) 능력이었다. 입실론들은 크든 작든 모두 ESP 능력을 가지고 있다. ESP는 간단히 말해서 초능력을 뜻한다. 대부분의 입실론들은 정신감응 능력이 뛰어난데, 메리의 경우에는 신체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기억을 엿볼 수가 있었다.
유림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던 메리는 웃으며 손을 놓았다.
“안 돼?”
“어째서일까.”
메리는 유림을 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유림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눈치로 뺨을 긁었다. 메리는 턱을 괴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주 강한 정신력을 지녔을 거야.”
그녀의 능력이 유독 유림에게만은 결코 통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적용되는 범위가 천차만별이기는 했지만 능력이 아예 통하지 않는 것은 유림뿐이었다. 유약한 사람일 경우에는 아주 오래된 기억의 조각까지 엿볼 수 있는 반면,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일 경우에는 바로 어제의 기억도 흐릿하게 보이고는 한다. 그러나 유림으로부터는 바로 1초 전의 영상도 보인 적이 없었다.
“말해 주는 걸 잊었는데 얼마 전에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었어.”
유림의 시선이 메리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부드러운 그녀의 눈매가 진중한 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메리는 오빠 이야기가 나오면 늘 이렇게 되고는 했다.
“오빠가 말이야, 얼마 전 비 오는 날에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에게 장미꽃을 사다 주었대. 드디어 슬슬 미쳐 가나 봐.”
“장미꽃을?”
“그것도 배달원까지 시켜서 말이지.”
유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짓더니 비아냥대었다.
“고양이가 과연 주인이 보낸 배달원을 알아볼라나?”
미소를 지은 메리가 말을 덧붙이려고 입을 떼던 찰나, 그녀의 등 뒤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유림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방어적으로 메리의 앞을 막아서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정유림 소위님.”
검은 제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남자는 그다지 친절해 보이는 인상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녀석이다. 유림은 메리를 뒤로 감추며 물러섰다. 그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더니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뒤에 계신 분은 입실론이시군요. 몰래 빠져 나오신 겁니까?”
메리는 흠칫 놀라 유림의 어깨를 잡았다. 유림의 눈초리가 사납게 빛났다. 자신뿐만 아니라 메리의 신원까지도 알고 있는 남자. 군 소속인 그녀의 GPS를 간단하게 파악해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누구시죠?”
메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선글라스가 메리의 망막을 스캔했다. 그러자 그녀의 신상 정보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입실론 메리님의 일탈 행위는 이번 한 번만 눈감아 드리죠. 에덴 타워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소위님도 따라와 주시지요.”
“나는 왜?”
유림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흘끗 돌아보더니 사무적인 어투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평의회의 소환입니다.”
에덴 타워Eden Tower.
높이 300층가량의 타워는 첨탑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은 로스트 헤븐의 중심이며 왓슨 그룹의 본사다. 로스트 헤븐을 관리하는 것은 슈퍼컴퓨터 ‘왓슨3세’6)인데, 이 왓슨3세의 본체가 바로 에덴 타워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에덴 타워는 크게 세 종류의 관으로 나뉜다. 하층부인 G그라운드관, 중층부인 M미들관, 상층부인 S스카이관.
하층부 G관은 왓슨 그룹의 본사 업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외부인이 많이 들락거린다. 반면 상층부 S관은 낙원 내에서도 극소수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곳은 낙원의 평의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평의회는 낙원의 시스템을 관리 감독하는 로스트 헤븐의 자치 기구인데, 군사권을 쥐고 있기에 낙원 내 가장 강력한 권력 집단으로 통한다.
에덴 타워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유는 타워 상층부에 존재하는 ‘태양의 도시’ 때문이다. 타워 상층부는 둥근 고리 모양의 테를 두르고 있는데, 이 고리 모양의 테가 바로 입실론들이 사는 태양의 도시다.
거대한 고리 형태의 관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공간이었다. 이 고리 위에 솟아난 첨탑의 꼭대기에는, 소문이지만 낙원의 관리자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노인의 지팡이처럼 휘어지고 구부러진 몸체에 솟은 타워. 유림은 이곳에 올 때마다 낙원의 상징이라는 이 건물이 흉물스럽다고 생각했다. 목을 젖혀 타워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정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모자를 고쳐 쓰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평의회의 호출이라니,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잘한 게 없으니 좋은 일로 불려 가는 건 아닐 것이다. 경질일까? 감봉? 아니면 징계? 설마 폭파한 시험장 게이트의 수리비를 청구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리사가 적립된 벌점이 얼마라고 했더라. 평화로운 휴가 첫날부터 사람을 왜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실까. 하여간 높으신 분들 머릿속에 배려와 자비 이런 단어들은 아예 없는 모양이다.
“이쪽입니다.”
평의회 서기관이라는 자는 아까부터 메리에게만 굽실거리고 있었다. 메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유림을 챙기며 웃었다.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이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평의회가 내게 무슨 볼일이라는 거죠?”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유림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더 물어봤자 답해 줄 위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얀 유리 상자처럼 생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서기관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때 처음 그의 얼굴을 본 유림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생각보다 젊고 핸섬했다. 그때 메리가 유림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드로이드야.”
유림은 대번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홱 돌렸다. 도대체 안드로이드는 왜 죄다 미남미녀로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S관 3층. 입력되었습니다.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손잡이를 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세 사람 모두 바닥에서 올라온 손잡이를 잡자, 엘리베이터는 안내 방송과 함께 상층부로 날아오르듯이 출발했다. 지상부인 G관에서 상층부인 S관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초 남짓이다.
─ S관 3층입니다. 태양의 도시 입구로 가실 분들은 이곳에서 하차하신 뒤 검역소로 향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덴 타워의 최상부인 S관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것처럼 반짝였다. 전면에서 투입되는 햇빛이 서로 빛을 반사해 내부를 환히 비춰 주는 구조였다. 높은 천장은 착시 효과인지 분명 막혀 있는데도 하늘이 투시되어 보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지상 쪽은 보지 않는 편이 건강에 이롭다는 평이다.
메리는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코디네이터를 따라 태양의 도시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 유림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관제실에 뜬 에러 메시지는 관리자 권한을 요구했대.”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동일한 추론이 그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관리자 권한을 실행할 수 있는 자는 낙원 내 오직 한 사람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떠오른 생각을 나직이 속삭였다.
“낙원의 관리자인가?”
“아마도.”
굳은 표정의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조심해.”
메리는 석연치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림은 메리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손을 아쉬운 듯 놓았다.
“걱정하지 마.”
메리가 사라지자 서기관은 유림을 이끌고 접견실로 향했다. S관에 온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아니, 세 번째인가? 마지막으로 왔던 것은 브루클린의 전투 건으로 평의회로부터 표창을 받으러 왔을 때였다.
이곳의 모든 것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하얗고 깨끗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하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본인들이 청렴하다고 위선을 떠는 평의회의 가식적인 모습의 단면일 뿐.
─ 정유림 소위가 도착했습니다.
유림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앞의 말발굽 형태의 단상을 올려다보며 손을 올려 경례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U자로 휘어진 단상에 실제로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 홀로그램의 모습으로 그녀와 대면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 목숨이 천금보다 비싸서 실제 모습을 드러내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인간들이다. 열두 명의 평의원들 중 아홉 명이 접속한 상태였다. 맨 오른쪽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대머리에 배불뚝이인 걸 보니, 빈센트 의원이군.
─ 정 소위.
“예.”
─ 어제 훈련병 선발 시험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 소위가 큰 활약을 했다고 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또 형식적인 표창 수여와 독려인가. 아니면 특진일지도. 유림은 퉁명스럽던 표정을 지우고선 억지 미소를 지었다.
─ 교전 영상을 보아하니 이제 실전으로 복귀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이던데 어떻습니까?
─ 아주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과연 전장의 성녀라 불릴 법합니다.
─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중앙에 앉아 있던 아이작 의원이 자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실은 오늘부로 귀관은 평의회 직속 기관인 SITF로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예?”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림의 입매가 굳었다.
─ 이번 사고 현장에서 보인 귀관의 활약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실전 투입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바, 평의회는 귀관을 STF 내 수사 기관인 SITF로 영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SITF의 총지휘관은 노아 호크 대령이 맡게 될 것입니다.
호크 대령이란 말에 유림의 눈빛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녀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물었다.
“SITF란 뭡니까.”
─ 로스티아벤의 정예특공대인 STF와 성격이 비슷한 특별수사대Special Investigative Task Force입니다. STF가 최전방에서 델타와 교전을 벌이는 데 반해, SITF는 로스트 헤븐 내의 특수 사건들을 담당하게 될 겁니다. 귀관은 이 신생 부대의 실전 지휘관으로서 실력 발휘를 해 주길 바랍니다.
보아하니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는 듯해 보였다. 그간 부상이니 뭐니 핑계를 대며 실전으로의 복귀를 미뤄 왔던 참인데, 어제 델타를 상대로 훨훨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였으니 뭐라 변명도 궁색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가 맡게 될 일은 뭡니까?”
“귀관의 첫 번째 임무는 이번 최종 시험에 델타를 투입한 범인 및 배후 세력의 색출이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블랙 호크의 모습을 확인한 평의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분은 끝났다는 태세로 전환하며 슬그머니 마침표를 찍었다.
─ 그럼 뒷일은 대령에게 맡기겠소. 그대들에게 ‘이브’의 가호가 있기를.7)
사라질 때의 속도는 아주 광속이다. 그들은 짧은 인사를 마치고 순식간에 접속을 끊어 버렸다. 유림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 언질도 없이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단비 같은 휴가 첫날부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요.”
“날벼락이라니, 공로를 세워 특진할 기회인데.”
“전 공로보다 평온한 일상이 더 좋습니다. 애당초 수사 같은 건 맞지도 않고요. 차라리 최전방으로 보내 주시죠.”
“귀관이 서 있는 이곳이 최전방이다.”
블랙 호크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단상 위에 걸려 있는 로스트 헤븐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조각배를 닮은 나뭇잎 모양의 섬. 이곳에선 지금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적은 이미 내부에 침투해 있다. 아주 치밀한 녀석이야. 도대체 언제 숨어든 것인지 꼬리조차 잡히질 않으니 말이지.”
슈퍼컴퓨터 왓슨 3세의 비호 아래 철통같은 보안이 이루어지는 낙원에 쥐새끼라니.
“짐작 가는 대상이라도?”
“목적에 따라 누구든 될 수 있다. 로스트 헤븐을 노리는 자들은 한둘이 아니니까.”
무표정일 때의 대령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 보인다. 특히 그의 뺨에 길게 난 십자 모양의 흉터가 그런 인상에 한몫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아직입니까?”
“이미 오전 중에 배치 발령을 받아 부대 이동 수속 중이다. 3인 1팀의 원칙으로 임시 팀원들을 선발해 두었지만 최종 결정은 소위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간 신병교육대의 교관이었던 귀관의 경력과 능력을 높게 사고 있으니, 신입 대원들의 발탁 권한은 전적으로 귀관에게 부여하는 바다.”
여기서 평의회에 거절 의사를 밝히면 블랙 호크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비록 계급은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그들 사이에는 끈끈한 전우애가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뿌리쳤을 텐데.
“이놈의 악연.”
돌아선 유림은 모자를 벗으며 툴툴댔다. 둘만 있을 때는 가끔 계급장을 떼고 편안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었다.
“빨리 청산하든가 해야지.”
“이왕이면 운명이라 칭해 주었으면 하는데.”
호크가 입술을 늘리며 웃자 유림은 느끼해 죽겠다는 눈빛을 지었다.
“불혹을 넘긴 남자와 운명의 타래에 엮이기는 싫습니다만.”
물론 그의 곱상한 얼굴은 결코 사십 대로 보이는 편이 아니었다. 호크는 웃음을 터뜨리며 유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가끔 보이는 그의 다정한 손길이 싫지 않으면서도 난감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팀원들 프로필은 보내 놓았으니 확인하고.”
“예예.”
유림은 손을 흔들며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댔다.
─ 어서 오십시오, 정유림 소위님.
“에어쉽 승강장으로.”
─ 소위님은 금일부로 S관 승강장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용 가능한 승강장 중 가장 가까운 곳은 S관 1층 B승강장입니다.
이제 S관 출입 권한까지 주어진 건가. 유림은 귀신같은 일 처리 속도에 혀를 내둘렀다. 투명한 유리벽에는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흘끗 바깥 하늘을 내다보았다. 잿빛 하늘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유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런 날씨는 싫다. 술이나 한잔 걸치고 갈까?
에덴 타워의 엘리베이터는 아래위 수직으로도 움직이지만 건물 내를 횡단하여 좌우로 이동하기도 했다. 특히 타워 내 에어쉽 승강장을 이용할 경우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승강장 입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꾸벅 졸던 유림은 문이 열리자 하품을 하며 내렸다. 에어쉽은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졸린 눈으로 걷는 그녀의 뒤로 검은 인영 하나가 스르륵 나타났다. 그림자는 기회를 엿보는 듯싶더니 갑자기 뒤에서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비명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번쩍 눈을 뜬 유림은 팔꿈치로 상대의 명치를 가격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뒤로 회전하여 상대의 안면에 주먹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진 인영은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제야 상대방을 알아본 유림의 눈이 커졌다.
“케이?”
그는 코피라도 터졌는지 끙끙대고 있었다.
“유림 주먹은 정말…… 잘못 맞으면 죽을지도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유림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손에서 뭔가를 쑥 내밀었다.
붉게 핀 장미 한 송이.
얼떨결에 꽃을 받은 유림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고쳐 썼다. 그가 쓴 검은색 베레모에는 ‘로스티아벤’의 상징인 황금 방패가 금사로 박혀 있었다.
“자대 배치를 받았거든요.”
“자대 배치?”
그는 눈을 휘며 예쁘게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케이는 눈썹 옆에 손끝을 세워 붙였다. 그는 부드러운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경례와 함께 인사를 올렸다.
“케이 애덤슨 중사입니다. 오늘부로 특별수사대에 배치되어 소위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유림의 시선이 흘끗 그의 제복 왼쪽 가슴으로 향했다. 그러자 선명하게 박혀 있는 마크가 눈에 띄었다.
SITF특별수사대.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까 만났던 메리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며 울려 퍼졌다.
─비가 오는 날 고양이에게 장미꽃을 사다 주었대.
─알아볼라나.
“……배달원.”
멍하니 중얼거리던 유림은 실눈을 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그의 배를 걷어차며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유림?”
“바른대로 말 안 해?”
“정말…… 쿨럭, 어, 없어요.”
케이의 얼굴과 목이 벌겋게 물들 쯤에야 유림은 서서히 팔에 힘을 풀었다. 그는 죽다 살아난 얼굴로 숨을 고르며 억울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이 꽃은 뭐야?”
그는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받은 상에 대한 보답.”
유림은 말없이 손에 쥔 장미꽃을 내려다보았다. 붉다. 선혈처럼 새빨갛게.
위이잉!
그녀의 등 뒤로 에어쉽 하나가 쏜살처럼 빠져나갔다. 바람개비처럼 엇물린 활주로 입구가 회전하며 열리자 시원한 빗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러자 유림의 눈동자가 빗소리에 부딪치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먹구름 낀 하늘과 쏟아지는 비. 그것들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잡으려 하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지독한 악몽.
“내가 말도 없이 가 버린 줄 알았어요?”
어느새 다가온 그가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한겨울 얼어붙은 손을 녹이는 따뜻한 커피처럼 적당한 온기를 지닌 채로.
“어쩌면.”
그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닫혀 가는 활주로가 천천히 빗소리를 차단해 주고 있었다.
“그냥 가 버린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위웅’ 하고 닫히는 활주로 입구 소리에 유림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뭐라고?” 하며 되물었지만 케이는 아무것도 아니란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리사에게 오늘 저녁 메뉴는 무얼 하라고 시킬까요?”
“우리 집으로 오려고? 왜?”
“거주소로 소위님의 자택 주소를 기입했거든요.”
유림은 황당하다 못해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전입을 해?”
“유림도 그렇게 하는 쪽을 원하는 것 같아서요.”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눈빛, 느른하게 걸린 미소, 투명한 가을 햇살로 빚은 조각상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선, 낮은 첼로의 선율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
가끔은 이 남자가 그냥 져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음에도 느긋하게 자신의 앞마당에 상대를 풀어 놓고 있는 느낌. 그런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를 감고 있는 남자.
유림은 새침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에어쉽에 올라타며 쏘아붙였다.
“오늘 저녁은 카레야.”
케이의 시선이 허공에 멈춰 섰다. 그는 고즈넉한 시선으로 유림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를 염치없는 놈이라고 타박하면서도 문을 열어 둔 채 있었다. 잠시 오도카니 서 있던 케이는 유림의 옆에 탑승했다.
차량 내에서 재즈 선율이 흘러나왔다. 유림은 손에 든 장미꽃을 내려다보았다. 서막을 알리는 불길한 종소리처럼, 빗방울에 녹아든 메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조심해, 유림.
─‘왓슨’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