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ologue(1권) (1/21)

prologue

인공 섬 ‘로스트 헤븐’ 내 동쪽

에덴 타워 지하 4층

‘왓슨 연구소’

절벽 근처에 위치한 첨탑의 최하층은 어둡고 조용했다. 비상 전기가 들어온 가운데 침입자를 저지하기 위한 붉은 레이저 광선이 복도에 사선으로 얽혀 있었다.

지상에서 하강한 엘리베이터는 누군가를 태운 채 육중한 문을 열었다. 그러자 허공에 부유하던 푸른 입자들이 좌우로 산개하며 직사각형 모양의 창을 형성했다.

손바닥만 한 안내 창에 나타난 홀로그램은 섬뜩한 붉은색으로 번뜩이며 침입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 경고: 제한 구역입니다.

소년은 허공에 뜬 경고 메시지를 쳐다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보안 코드 AP01.”

─ 보안 코드 확인.

“제한 구역 보안 해제.”

─ 보안을 해제합니다.

지뢰처럼 지그재그로 얽혀 있던 레이저 빔들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소년은 깨끗해진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하얀 유리 바닥으로 이루어진 복도 끝에는 엑스X자 모양의 두꺼운 걸쇠가 잠긴 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안드로이드 집무관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갈색 제복을 입은 집무관은 소년을 빤히 보더니 상냥하게 웃었다. 자신의 어깨만치 오는 그를 침입자라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 암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투명한 눈동자를 고즈넉이 던지던 소년은 장밋빛 입술을 열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E-V-E.”

─ 보안 질문에 답을 해 주십시오. 이브가 좋아하는 음식은?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소년은 쿡 웃었다. 너무 쉬운 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곡선으로 퍼지는 입매를 다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카레.”

그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멸균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작동되면서 소년의 몸을 하얀 연기가 에워쌌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새하얗게 펼쳐진 방에는 수십, 수백 개의 스크린이 반짝이며 그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환영 문구를 내보였다.

이곳은 ‘로스트 헤븐’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에덴 타워를 포함해 로스트 헤븐 전체를 총괄하는 슈퍼컴퓨터 왓슨의 본체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방 한가운데에 하얀 유리관으로 된 수면 캡슐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커다란 인큐베이터를 닮은 관 속에는 한 소녀가 잠든 듯 누워 있는 게 보였다. 검은 머리칼의 소녀는 우윳빛 피부에 긴 속눈썹이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소년은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브.”

가을 햇살처럼 투명한 그의 눈동자가 슬픈 빛으로 번졌다. 그는 유리관 앞까지 걸어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미안해.”

그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붉어진 눈시울이 어색해 보일 정도로 감정이 절제된 눈동자였다. 그래서일까?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이 더 애절해 보였다.

수면 캡슐이 열리고 이브의 손과 팔에 채워져 있던 수갑이 해제되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어루만졌다. 소녀의 팔에는 여기저기 주삿바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이브를 품에 안아 올렸다.

잠시 후, 그는 이브를 안은 채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브에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폐기시킨다. 연구원 녀석들이 절대 찾지 못하게 완벽하게 삭제하도록 해.”

─ 기밀 파일 ‘이브’의 삭제를 수행합니다.

이브를 구출해 나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500초 남짓. 슬슬 거짓 급보를 받고 각자 집으로 달려갔던 연구원들이 수상한 낌새를 감지할 무렵이었다.

어둠에 휩싸인 에덴 타워의 정문이 열렸다. 두꺼운 유리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발소리를 죽인 채 주위를 경계했다.

그때 창공에서 타워를 포위하고 있던 에어쉽들이 일제히 환한 불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지상을 향해 총을 겨눈 군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침입자에게 경고한다. 실험체를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경고한다! 실험체를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한편 건너편 상공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는 놀라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직 어린 소년 아닙니까? 놀랍군요……. 대체 저 아이가 어떻게 에덴 타워의 보안 시스템을 뚫은 겁니까?”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의 보좌관이 막 입수된 정보를 보고했다.

“침입한 소년은 페트로비치 박사의 장남이라고 합니다.”

“페트로비치 박사요? 그렇군요……. 그래서 가능했던 거군요.”

그는 보좌관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 천재 박사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그때였다.

에어쉽들이 있던 상공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조종사들과 군인들은 기체 안쪽의 문을 열고 황급히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 자폭 시스템 가동.

─ 자폭 시스템 가동.

─ 비상 탈출 모드를 실행합니다.

─ 이 기체는 곧 폭발합니다. 탑승자들은 모두…….

느닷없이 실행된 자폭 시스템에 모두 허둥지둥 탈출을 감행했다.

남자가 타고 있던 기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재빠르게 낙하복을 활성화시킨 후 허공을 향해 뛰어내렸다.

어둠 속에 떠 있던 열두 기의 에어쉽들이 혜성처럼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큰 폭발음과 함께 추락한 기체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바람을 타고 온 불씨들로 인해 주변의 나무와 풀에 불이 옮겨 붙었다. 날아오는 파편들을 피하라는 고함 소리도 울려 퍼졌다. 화염과 연기가 검은 하늘 위로 치솟고 삽시간에 에덴 타워 주변은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돌변했다.

─ 이쪽은 헌터3, 침입자는 실험체와 함께 해안가로 이동 중이다. 추격하겠다.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뒤를 돌았다. 그는 짜증 섞인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더니 전자 담배를 물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하군. 손해가 막심하겠어.’

남자는 차갑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천재들은 장수하기 힘든 거다.

“죽이세요.”

뒤따라오던 보좌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아이는 필요 없습니다. 이브만 데려오면 됩니다.”

그는 상관의 명에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히 나의 이브에게 손을 대다니, 아무리 페트로비치 박사의 아들이라도 살려 둘 수 없다.

남자는 붉은 화염을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카리브 해의 바다처럼 푸르른 그의 눈빛은 흡사 마약이라도 한 듯이 황홀한 기색이었다.

“마치 검은 융단에 쏟아지는 핏물 같군. 흑黑과 적赤의 대비. 이브, 너를 떠올리게 해.”

에덴 타워 뒤에 솟구친 절벽에는 거친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절벽 끝에 다다른 소년은 이브를 안은 채 뒤로 돌았다.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이 천천히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 선 지휘관이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통보한다! 실험체를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불복 시엔 사살한다.”

꽤 먼 거리를 뛰어왔음에도 소년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주 침착한 상태였다. 소년은 품에 안은 이브를 내려다보며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총을 들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발포는 아직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행여나 실험체에게 맞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눈앞은 서늘한 총구.

등 뒤는 차가운 바닷물.

소년은 갈등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를 바라보던 지휘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그는 나직이 “사살해.”라고 명했다.

명을 들은 저격수가 상공에서 기체의 문을 열었다. 그가 탄 ‘헌터3’은 운 좋게도 다른 에어쉽들이 모두 폭발한 직후 출격한 덕에 살아남았다.

어린애군.

아직 어린 소년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그는 냉혹한 눈초리로 단숨에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 순간이었다.

힘없이 안겨 있던 이브가 눈을 번쩍 뜬 것은.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던 소년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치더니 탄환이 날아오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당황한 소년이 미처 대응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혹한 광경은 소년의 망막에 늘어진 영상처럼 맺혔다.

“안 돼애애애!”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소년은 덜덜 떨며 소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두 손이 붉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병사들은 당황하며 지휘관을 힐끔거렸다. 지휘관 역시 사고 회로가 마비된 표정이었다.

소년의 오열 소리가 너무나도 참혹해서 몇몇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지었다. 이브는 신음을 흘리며 눈꺼풀을 열었다. 양손을 피로 적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도…… 망쳐.”

뼈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몸은 마른 가지처럼 앙상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꿋꿋이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소년의 앞을 막아선 이브는 퀭한 눈에 힘을 준 채 곁눈질로 재촉했다.

어서 도망쳐.

내가 시간을 벌게.

소년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는 피에 젖은 그녀의 하얀 옷을 바라보며 울음 섞인 신음을 삼켰다. 그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둬, 이브! 제발…….”

네가 죽고 말 거야.

소녀는 돌아서서 머리 위의 상공을 노려보았다. 스코프렌즈 너머로 그들을 겨누던 저격수는 흠칫 놀라 뒤로 우당탕 자빠졌다.

렌즈를 관통해 뇌리를 파고드는 소녀의 눈동자는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아, 악마다! 저 아이는 악마의 딸이야!’

저격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입안의 껌을 퉤 뱉으며 재빨리 총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조종사는 식겁해서 그를 말렸다.

“그만두십시오! 명을 못 들으셨습니까. 여자애 쪽은 다치게 하지 말라고…….”

“시끄러워!”

그는 목에 건 차가운 금속 십자 목걸이에 짧게 입을 맞추며 기도를 올렸다. 그의 충혈된 눈은 렌즈 너머 소녀의 목덜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야들야들한 꽃사슴의 것처럼 가늘고 보드라운 목선이었다.

저격수 쪽을 바라보던 이브는 소년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뛰는 그녀의 그림자 위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브!”

“뛰어! 어서!”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송기 ‘헌터3’에서 무언가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저격수가 겨누고 있던 스코프였다.

피슉.

두 번째 사격. 소리 없이 날아온 탄환은 여린 소녀의 몸을 꿰뚫었다. 이윽고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소년은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들,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소리와 목구멍을 막은 오열로 인해 고통스러운 호흡.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부릅뜬 눈알은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마치 다리를 잘린 짐승처럼 흐느적거리며 넘어진 이브는 빠르게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녀는 흡사 언젠가 역사 시간에 들었던 영웅 잔 다르크 같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소녀는 소년에게 기대듯 안겨 재촉했다.

“뛰어!”

소년의 턱으로 눈물이 흘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브, 나의 이브.

그녀는 늘 강인했다. 그보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방패의 역할은 항상 그녀 쪽이었다. 그가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인지, 그녀가 그를 구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처럼.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들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초점을 잃은 소녀의 눈동자에 작은 희망이 차올랐다. 낭떠러지 끝에 다다른 그들은 나락처럼 깊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설마 하는 생각에 이브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의 동공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가 그를 향해 거침없이 가녀린 양팔을 뻗어 오고 있었다. 이브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혹시 기억하고 있어?

뇌리 속에 울리는 그녀의 속삭임. 허공에서 나풀대는 소녀의 옷자락이 소년의 시야를 가렸다. 그것을 떼어 내려고 팔을 움직이던 소년은 문득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담에 크면 오빠의 신부가 될 거라고 했던 거.

첨벙!

소녀는 검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둡고 추운 수면 밑으로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그녀의 하얀 몸이 보였다.

─그랬더니 오빠가 참 바보 같은 소리를 했잖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녀와의 거리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그녀의 주변으로 핏빛 아우라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소녀가 잃어 가는 생명력이었다.

소녀는 힘없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사랑해, 아담.”

소년은 절규하며 팔을 뻗었다.

‘이브!’

동시에 그의 이마에 떠오른 각인이 번쩍이며 빛났다. 절벽 위로 몰려들었던 병사들은 해수면을 가르고 뿜어져 나온 섬광에 질끈 눈을 감았다.

‘로스트 헤븐’ 내 에덴 타워의 하층부에 위치한 왓슨 연구소에서는 긴박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 살려 줘.”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뒷걸음치는 남자는 사뿐사뿐 다가오는 그림자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응시했다. 자객은 차가운 눈초리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불룩한 배에 늘어진 턱살. 마치 도살 직전의 돼지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 같군.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도, 돈을 원하나? 얼마든지 주겠다.”

무표정하던 자객의 표정에 경멸이 스쳤다.

“돈?”

냉정한 암살자는 우아하게 팔을 들었다. 그 손에는 한 자루의 총이 쥐여 있었다.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었는지 핏발 선 눈동자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건가? 자네가 이곳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내 심박동이 멈추면 그 즉시 왓슨 3세가 로스트 헤븐 전체를 수색할 걸세. 탈출할 새 없이 붙잡히고 말 거라고!”

남자의 겁박에 상대는 조롱 어린 곡선을 입가에 그렸다.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습에서는 여유로움까지 느껴졌다. 미소를 띤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던 자객은 천천히 허리를 구부린 채 남자에게 나긋하게 속삭였다.

“왓슨 3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야. 여기 계신 모 연구원님께서 보안을 해제해 주신 덕에 아주 편안히 들어왔거든. 누가 알았겠어? 수석 연구원이란 녀석이 이렇게 연구 자료를 빼돌려서 제 잇속을 채우고 있었다는 걸.”

남자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엎드려서 두 손을 모으고 손이 닳도록 빌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요…… 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한 발 뒤로 물러선 자객은 총구를 겨누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섬뜩했다. 눈앞의 먹잇감을 두고 희열을 느끼는 듯한 맹수의 눈웃음.

“아, 안 돼…….”

마치 한 마리의 표범처럼 아름다운 살육자였다. 목숨을 앗아 가는 상대에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살려 줘, 제발!”

연구원의 동공에 비친 자객의 그림자가 점차 커져 갔다. 얼어붙은 채로 공포에 휩싸인 그는 턱을 덜덜 떨며 어금니에 힘을 꽉 주었다.

탕!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지자 그는 외마디 비명 소리도 없이 털썩 쓰러졌다. 총알이 꿰뚫은 그의 이마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토끼 제거 완료.”

에덴 타워에 비상경보가 울려 퍼진 것은 그로부터 90초 후였다. 에덴 타워 수석 연구원의 죽음에 급히 평의회가 소집되었고 타워 앞에는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한편 멀리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그림자는 후드를 쓰며 조용히 뒤를 돌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저 여자야?”

그러자 그가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 워치에서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마음에 안 드십니까?

“글쎄…… 뭐, 네가 추천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 일단 직접 한번 보시죠.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총 면적 10,312 제곱킬로미터의 인공 섬 로스트 헤븐은 오늘도 평온한 아침을 맞이했다. 푸른 하늘에 양떼구름처럼 공중에 떠 있는 아파트들. 이곳은 낙원 내 과반수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바람의 도시였다.

하얀 소라처럼 빛을 차단하고 있던 아파트들이 하나둘씩 투명한 유리 벽으로 바뀌기 시작하자, 그 속에서 주민들이 기지개를 펴며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간혹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이미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따로 현관문이 없는 바람의 도시 아파트들은 커다란 유리창으로 된 벽이 출입구의 역할을 한다. 출퇴근용 에어쉽Air Ship이 도착하면 유리 벽이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밀리면서 입구를 열어 주었다.

유리로 된 럭비공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아파트들 속에는 그녀도 있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정유림 소위님.

게슴츠레한 눈을 뜬 유림은 하얀 잠옷을 배꼽까지 올리면서 하품을 했다.

“좋은 아침, 리사.”

─ 심박동 수 체크, 혈압 정상, 체온 정상, 혈당 정상. 생리 1일째, 철분이 부족합니다. 식단을 새로 조정합니다. 평소보다 수면 시간이 21분 짧습니다.

유림이 화장실로 향하자 활기찬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지난주에 구입한 재스민 향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래.”

샤워를 하면서 어느 때처럼 뉴스를 듣던 유림의 눈이 멈칫 흐려졌다.

“리사! 볼륨 좀 키워 봐.”

─ 변사체로 발견된 40대 남성은 타워 에덴의 수석 연구원인 A씨로 밝혀졌습니다. A씨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어제 저녁 약속이 있다는 말을 한 뒤…….

수석 연구원 A씨는 타살로 추정.

몸싸움의 흔적은 없어.

에덴 타워의 보안 시스템은 어떻게 뚫렸나.

헤드라인 뉴스들은 모두 어젯밤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욕실 벽면 스크린으로 기사를 보던 유림은 샤워 부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자동 건조 기능이 그녀의 몸의 물기를 털어 내었다. 유림은 세면대 앞의 거울을 바라보며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 오늘 기온은 섭씨 24도, 습도 34%입니다. 자외선 차단막을 형성합니다. 오전에 교관 회의가 있습니다. 유니폼을 착용하시겠습니까.

“평상복.”

─ 새로운 디자인이 입고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홀로그램이 형성되면서 눈앞에 옷들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ZEN3. 그게 좋겠어.”

─ 소재와 특수 기능을 확인해 주십시오. 마지막 치수 측정일로부터 72일 경과하였습니다. 새 치수를 측정합니다. 가슴둘레 9㎜, 허리둘레 11㎜, 엉덩이둘레 8㎜ 증가하였습니다. 새로운 치수에 맞춰 프린트를 시작합니다.

“하의는 검은색으로.”

─ 알겠습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사는 아파트 자체에 탑재된 인공지능이다. 집사이자 메이드이자 요리사라고 보면 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의 건강관리부터 시작하여 음식과 의복 취향, 즐겨듣는 음악과 쇼 프로를 체크하여 최적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적인 홈 AI였다.

─ 새로 도착한 메일이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음식을 입안에 구겨 넣으며 급하게 옷을 입던 유림은 허공에 뜬 메일을 멍하니 응시했다.

“새로운 훈련병? 게이트가 열렸다는 이야기도 없었는데?”

남자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흑갈색 머리에 연한 커피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커다란 신장에 넓은 어깨를 가진 바람직한 체형이었다. 유림의 입가에 흥미로운 곡선이 떠올랐다.

“오호, 미남이네.”

유림은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 에어쉽을 준비할까요?

“30초 후로 해 줘. 도착지는 모래의 도시로 세팅하고.”

─ 17분 후 에덴 타워에서 교관 회의가 있습니다.

유림은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풀어헤쳤다.

─ 이번 달의 벌점이 이미 100점을 초과한 상태입니다. 진급에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일이 잔소리 좀 하지 마.”

─ 스트레스 수치 120% 상승. 피부 미용에 좋지 않습니다, 정유림 소위님.

“리사!”

소리를 지른 유림이 현관으로 향했다. 스마트 센서가 그녀의 몸 상태를 체크하자 옅은 안개처럼 펼쳐져 있던 뿌연 가루들이 투명하게 변했다.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던 에어쉽이 풍뎅이 날개처럼 문을 위로 열었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달팽이 모양으로 둥둥 떠 있는 하얀 아파트들이 보였다.

“출발해.”

─ 에덴 타워로 말입니까?

“모래의 도시로.”

─ 벌점 3점이 추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림은 고개를 내저으며 짜증 섞인 눈빛을 지었다. 리사의 잔소리가 없으면 평화로운 아침이 아니지.

“새로운 훈련병이 왔다고 하잖아. 교관으로서 신병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어?”

─ 순전히 소위님의 사심에 의한 행동이라 여겨집니다만.

“잔말 말고 출발하라고.”

유림은 차 안의 소파에 드러누우며 눈을 감았다. 에어쉽의 양 날개가 닫히자 자동 항공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안정적으로 부양한 에어쉽은 매끄럽게 움직이며 모래의 도시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로스트 헤븐은 일찍이 거대한 제약회사였던 왓슨 그룹이 만든 인공 섬이다. 로스트 헤븐은 정치적 중립을 선포하고 자체적으로 용병 부대를 경영하고 있었다. 현재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 지브제로G-eve-zero를 독점적으로 판매하고 있는 왓슨 그룹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군수 산업에 진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용병 부대 ‘로스티아벤’1)은 현재 세계 최고의 용병군으로 그 위용을 떨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로스트 헤븐’을 ‘낙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낙원의 주민들은 지상 최고의 천국이라 불리는 로스트 헤븐에 입주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낙원에도 그늘은 존재했으니 ‘모래의 도시’는 낙원의 슬럼가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낙원에서 살고 있지만 결코 낙원의 주민이 될 수 없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 환영받지 못하고 영원히 아웃사이더 취급을 당하며 사는 그들에게 있어 낙원은 빌어먹을 장소일 뿐이었다.

─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섬의 동쪽 절벽에 위치한 모래의 도시 입구. 지하 도시인 모래의 도시는 수많은 출입구가 있는데, 이곳은 군 전용 출입구로 일반 낙원 주민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절벽으로 위장된 문이 열리고, 에어쉽을 탄 채로 이동하면 마치 개미굴처럼 오밀조밀하게 펼쳐져 있는 거대한 지하 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 신병 훈련소로 가시겠습니까?

모래의 도시는 용병들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에 낙원의 용병 부대인 ‘로스티아벤’의 사령본부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에이전트들은 대개 훈련병 선발 캠프가 있는 하와이에서 신병 교육까지 마치고 오지만, 간혹 이곳 로스트 헤븐으로 오는 이들도 있다. 이 경우에는 보통 기술 사병이거나 스카우트되어 온 최우수 훈련생이다.

하얀 터널을 지나 에어쉽이 정차했다.

교관인 유림이 훈련소에 등장하자 사병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정 소위님!”

“안녕하십니까!”

유림이 대기실에 도착하자 군복을 입고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이 녀석이 새로 온 훈련병인가.”

유림은 훈련병을 인솔한 부사관에게 물었다. 그는 절도 있는 목소리로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림을 따라온 안드로이드 집무관은 그녀에게 훈련병의 기록을 보여 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새로 온’ 훈련병은 아닙니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그의 훈련 기록을 본 유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대 테스트에서 여섯 번이나 떨어졌다고?”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확히는 로봇인 집무관까지 포함하여 넷이었지만.

‘로스티아벤’의 에이전트 공식 모집 기간은 일 년에 단 한 번뿐이다. 높은 봉급에 훌륭한 시설, 게다가 세계 최고의 용병이라는 명예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름 좀 날린다는 용병들은 모두 앞다투어 로스티아벤에 지원했다. 그러나 낙원의 문턱을 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스티아벤의 입대 테스트는 험난하기로 유명한데, 1차 합격률은 2할도 되지 않는다. 일단 기초 체력 검사인 1차에 합격하면 캠프에서 합숙을 하며 2차와 3차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모의 전투인 최종 선발 시험까지 마치면 정식으로 로스티아벤의 용병이 된다. 3차와 최종 선발 시험은 통합하여 세 번까지 재시험을 치를 수 있다. 그러나 3번 이상 불합격 시 짐을 싸서 캠프를 나가야 한다.

단, 기술 병과에 지원한 자들은 횟수에 관계없이 재시험을 치를 수 있으며 1차와 2차 합격 기준점도 훨씬 낮다.

부사관은 한심한 표정으로 훈련병을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섯 번이나 낙방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계속 도전하다 보면 적당히 받아 줄 거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로스티아벤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듣자 하니 2차까지는 무난히 패스한 것 같은데 사격, 잠수, 비행 테스트에서는 훈련생 중 각각 최하점을 받았고,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여 쏘는 공포탄 테스트에서는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히 아군만 노렸다고 한다. 화룡점정은 마지막 정신력 테스트였는데, 1000m 상공에서 거꾸로 매달린 그는 게거품을 물고 졸도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어찌어찌하여 턱걸이로 합격한 셈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유림은 눈에 힘을 준 채 훈련병의 기록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기록을 덮은 그녀는 눈앞의 훈련병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케이 애덤슨 훈련병이군.”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그는 유림을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웃어?”

유림이 싸늘하게 되묻자 그의 얼굴이 굳었다.

“머저리도 아니고, 남들 두세 번이면 붙는 시험을 여섯 번이나 떨어진 주제에 웃음이 나오나?”

오자마자 욕을 먹는 케이를 보면서 부사관은 고소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네 녀석이 만나 왔던 교관님들은 소위님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을 거다. 어디 한번 ‘브루클린의 성녀’2)에게 뼈가 가루가 되도록 터져 보시지.

“내게 온 이상 더 이상의 불합격은 없다. 근성과 오기를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시체가 돼서 훈련소 밖을 나가게 될 거다. 알아듣겠나, 애덤슨 훈련병!”

그는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은은한 저음의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

고개를 돌리던 유림은 곁눈질로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매에 가을 햇살처럼 밝은 브라운 톤의 머리칼. 전체적으로 조각 같은 외모를 소유한 남자였다. 선이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우락부락한 녀석들만 모여 있는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이지적인 분위기를 갖춘 데에다가, 어딘지 모를 기품과 고상함까지 느껴졌다.

어째서 이런 녀석이 지옥의 용병 부대 로스티아벤에 있는 것일까?

“훈련병은 개인 물품을 정리하고 9시 정각까지 A관 사격장에 집합한다.”

하사관을 따라 걸어가는 케이를 보며 유림은 답답한지 머리를 마구 풀어헤쳤다. 미남이라고 좋아서 미팅도 불참하고 왔건만 맥이 탁 풀렸다.

“소위님, 상부로부터 내려온 지시 사항입니다.”

유림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읊어 보라고 손짓했다. 집무관은 저장된 대령의 육성으로 실감나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훈련병 케이 애덤슨의 담당 교관에게 전한다. 훈련병 케이 애덤슨은 특수 보직을 담당하게 될 예정으로 우리 군에게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될 사병이다. 지금부터 귀관의 최우선 업무는 케이 애덤슨 훈련병을 책임지고 이번 달에 열릴 최종 선발 시험에 합격시키는 것이다. 귀관이 담당 중인 훈련병들은 모두 다른 교관들에게 배정되었으니, 귀관은 케이 애덤슨 훈련병의 교육에만 집중하길 바란다. 만에 하나 훈련병이 불합격 통지를 받을 경우에는 귀관에게 그 책임을 물어 벌점 50점을 부여할 예정이니 이점 유의하도록. 이상 전한다.

“뭐?”

유림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멍하니 집무관을 응시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재생을 해 보았지만 내용은 동일했다. 벌점 50점.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유림은 손목의 스마트 워치에 대고 속삭였다.

“리사.”

─ 예.

“내 벌점이 지금 몇 점이라고 했지?”

─ 소위님의 이번 분기 벌점은 총 103점입니다. 벌점 100점 이상은 감봉, 110점 이상은 면담, 130점 이상은 진급 누락, 150점 이상은 전선으로 강제 투입입니다.

“전선 투입? 잠깐만, 나는 부상이…….”

“담당 군의관의 보고에 따르면 귀관의 부상은 완벽하게 치료되었으며 재활 훈련 결과를 보니 당장 최전방에 투입시켜도 될 정도로 훌륭하더군.”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림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령님!”

“오늘 회의에는 또 불참했더군. 그게 다 신병 훈련에 대한 넘치는 의욕에서 빚어진 것이라 여기기로 했네만.”

블랙 호크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노아 호크 대령은 190센티가 넘는 거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에 뺨에 길게 난 십자 흉터. 충분히 수술로 지울 수 있는 흉터였음에도 일부러 남겼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아마도 의외로 단정하고 수려한 그의 용모 때문일 것이다. 생김새에 안 어울리게 낮고 걸걸한 목소리만이 아직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가 40대 중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다.

“대령님이시죠?”

유림이 눈을 세모꼴로 부릅뜨고 따졌다. 호크 대령은 팔짱을 낀 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덤슨 훈련병을 제게 보내신 분이 대령님이시라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억측인가, 소위.”

호크가 인상을 찌푸리자 유림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관찰하며 빤히 쳐다보았다. 워낙에 평소에도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 특기인 사람인지라 의구심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불만 가득한 유림의 표정을 보며 호크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귀관을 지목한 것은 애덤슨 훈련병이네. 그가 꼭 자네에게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지.”

유림의 눈썹이 물결치며 일그러졌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훈련생 주제에 교관을 지목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지 않은가? 로스티아벤에 지원하는 자라면 그녀가 참전한 브루클린 전투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 봤을 터인데 말이었다.

호크는 유림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속삭였다.

“힘내게, 소위. 만약 애덤슨 훈련병이 테스트에 합격할 경우에는 상점 150점과 포상 휴가가 주어질 터이니 말이야.”

“아이고 신나라.”

유림은 영혼이 없는 대꾸를 던지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는 “교육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거수경례를 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크와 함께 왔던 잭슨 소령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어슬렁어슬렁 사라지는 유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블랙 호크가 나타나면 잔뼈가 굵은 간부들도 오줌을 질질 싸기 마련인데, 감히 대령님 앞에서 먼저 등을 보이다니.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필시 그녀를 향한 호크의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예상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호크 대령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소령은 토끼눈이 된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호크 대령이 브루클린의 성녀를 각별히 여긴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잭슨의 의문 가득한 시선을 감지한 호크는 그를 힐끔 응시했다.

“뭔가?”

“아, 아닙니다.”

어느새 본연의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온 호크의 눈초리에 소령은 역시 잘못 본 것이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미굴처럼 얽혀 있는 모래의 도시에서는 마주치는 사람의 80% 이상이 로스티아벤의 병사들이다.

모래의 도시는 고대 로마의 유적지인 콜로세움처럼 도시 형태가 원형으로 발전해 있었다. 중앙은 하늘을 향해 뻥 뚫려 있는 도넛 모양인데, 이곳은 군 시설 비행로로 활용됐다. 중앙 비행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도시 대부분은 군사 시설 구역이며, ‘왓슨 3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지하의 낙후 지역에서는 낙원의 은밀한 거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중앙 비행로와 테처럼 둘러진 도시 사이에는 강화유리 벽이 설치되어 있어 주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 이 강화유리 벽은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처럼 도시와 비행로를 구분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화이트캡White Cab의 선로기도 했다. 벽면을 타고 이동하는 화이트캡은 군과 행정기관에 소속된 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었다.

─ 준 위엔 하사, 케이 애덤슨 훈련병, 어서 오십시오.

화이트캡에 올라탄 두 사람은 말없이 중앙 비행로를 내다보았다. 잠시 후 준 위엔 하사관은 헛기침을 하며 유림에 대한 찬양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자식, 행운인 줄 알아. 소위님께 교육받는 건 훈련병들 모두의 꿈이라고. 소위님의 입대 테스트 성적은 아직까지도 최고 점수로 남아 있는 괴물 같은 기록이지. 너도 소문을 들어서 알겠지만, 소위님께서 델타 열 마리를 홀로 잡아 오신 브루클린 전투는 그야말로 전설이고 말이야. 들어는 봤지? 브루클린의 성녀. 그게 바로 우리 소위님이시다. 다만 그때의 부상으로 인해 신병교육대로 오신 것은 정말 ‘로스티아벤’에 있어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지.”

케이는 끝없이 조잘대는 하사관을 바라보며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 하사관은 그런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는 케이의 머리를 향해 손찌검을 날리며 일침을 가했다.

“네 녀석이 잘못하면 소위님께서 징계를 받게 되시니까 똑바로 하라고!”

‘휙’ 바람 소리가 허망하게 흘렀다. 어라? 하사관은 소리 없이 허공만 가른 손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있어야 할 훈련병의 얄미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 맞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하사관은 깜짝 놀라 오른쪽 어깨 쪽을 돌아보았다. 케이가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사관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저놈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갈겼는데, 언제 오른쪽 뒤로 이동했단 말인가?

“글쎄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

“뭐?”

하사관은 흡사 귀신이라도 보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 제1 훈련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 부사관님께서는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하사관을 뒤로 한 채 유유히 걸어 나갔다.

A관에 도착한 케이는 입구를 지키는 안드로이드 헌병을 잠시 바라보았다. 겉모습만 봐서는 사람과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 안드로이드들은 이따금 상대방의 감정을 분석해 미소를 짓거나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케이는 단 한 번도 그를 향해 웃는 안드로이드를 본 적이 없었다. 헌병은 딱딱한 목소리로 케이를 맞이하며 문을 열었다.

─ 어서 오십시오, 케이 애덤슨 훈련병.

A관은 무기 전반에 대해 가르치는 훈련소였다. 사격장에 도착한 케이는 유리 벽 너머 멀리 위치해 있는 과녁판을 쳐다보았다.

후방의 벽 위에 위치한 시계가 9시 정각을 알리기 무섭게 유림이 등장했다. 언짢아 보이는 걸음걸이로 나타난 그녀는 주섬주섬 일어선 케이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긴 머리칼을 높게 질끈 묶은 상태였다. 커다란 눈망울로 케이를 빤히 보던 유림은 그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던 케이의 눈이 흠칫 커졌다.

“오늘부터 네 녀석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 정유림 소위다.”

유림의 입술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케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귀관이 나를 직접 교관으로 지목했다지? 대담한 안목만큼 훈련 역시 훌륭하게 따라와 주길 기대하겠다.”

잠시 후, 케이의 가슴을 툭툭 친 유림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입술에 머물러 있던 그의 시선도 따라서 이동했다. 검은색 제복을 입은 유림은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케이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가?’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웃은 케이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유림을 관찰했다. 상대에게서 주도권을 잡아야 만족스러워하는 여자라고 듣긴 했지만, 막상 당하니 뜻하지 않게 당황하고 말았다.

예측 불허의 돌발 행동을 하는 여자. 그녀는 사납고 예민한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서로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빛이 진지하게 얽혔다. 이윽고 가볍게 박수를 친 유림이 붉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환영 인사를 건네었다.

“낙원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애덤슨 훈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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