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화. 투제의 결투 (1)
“그럼 지금은 어떻게든 저 녀석을 막아야 하겠군.”
촉곤이 고개를 들어 연꽃을 밟은 채 서있는 혼천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원. 내가 저 녀석을 맡고 있을 테니 연합군을 재정비하게.”
말을 마친 촉곤은 주저 없이 하늘 위로 뛰어오르며 곧장 거대한 용으로 변신했다.
“용족의 왕이라니, 너라면 내 지루함을 조금은 달래줄 수 있겠구나.”
혼천제가 본모습으로 돌아간 촉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용족의 왕이라면 내 탈 것으로도 부족함이 없겠구나. 어떠냐? 내 탈 것이 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쾅!
혼천제의 말에 촉곤은 대답도 없이 자금색 빛을 뿜어냈다.
“쯧쯧, 버러지 같은 것이 자존심을 세우는구나.”
혼천제는 고개를 저으며 대충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대충 휘두른 손짓 한 번에 촉곤의 자금색 섬광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곧이어 혼천제가 귀신처럼 거대한 용 위에 나타나 가볍게 발을 구르자, 단단한 용비늘이 유리처럼 깨져나가며 황금색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촉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고,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새까맣게 무너져 내렸다.
쾅!
혼천제가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는 순간, 거대한 자금색의 용이 그대로 산 위로 추락했다.
고원 이상의 실력을 가진 촉곤이 벌레처럼 짓밟히는 모습에 사람들의 낯빛이 다시 어둡게 내려앉았다.
“시시하구나.”
촉곤을 짓밟은 혼천제가 다시 연꽃 위에 앉아 겁에 질린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중주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참에 중주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곳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혼천제가 중주 전체에 퍼져있는 핏빛 구름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핏빛 구름이 미친 듯이 넘실거리며 무수히 많은 붉은 번개가 지상을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쾅쾅쾅!
파멸의 힘이 가득한 번개가 대지 위로 폭우처럼 쏟아지고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가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쫙쫙 갈라지며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혼천제!”
“하하하하!”
분노한 고원이 시뻘겋게 눈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혼천제는 그를 비웃듯 계속해서 벼락을 내리치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연합군, 모두 집결해라!”
고원이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낙뢰가 쏟아지며 연합군의 절반 이상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얼마나 많은 강자들이 죽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남은 강자들을 최대한 한곳으로 집결시켜 낙뢰를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채린은 이솔이 이 끔찍한 장면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를 품속에 넣은 채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오나요?”
이솔은 작은 얼굴을 채린의 품속에 묻은 채 물었다. 이솔의 작디작은 몸은 공포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걱정 마. 우리 솔이를 지키기 위해 꼭 오실 거야.”
채린이 이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품속에 있는 이솔의 몸에서 무서울 만큼 강한 힘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그 힘은 단숨에 채린의 힘을 넘어섰다.
펑펑!
그 순간, 이한, 이정, 이찬 등 이씨 가문 사람들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그들의 기운이 미친 듯이 폭등했다.
“피의 힘이다! 투제의 피가 활성화되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린 고원이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음 순간, 텅 빈 공간 속에서 화려한 화염이 솟아오르며 거대한 화염 장막이 천부연맹 주위를 모조리 감싸기 시작했다.
쾅쾅!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화염장막과 낙뢰가 맞부딪히자, 그 무시무시한 붉은 번개가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잠시 후, 하늘을 뒤덮었던 화염이 화려한 화염을 뒤집어쓴 사람으로 변했다.
전신이 화염에 뒤덮인 사내의 얼굴은 확인한 순간, 고원과 연합군 강자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싸움이 시작된 이후로 처음으로 보이는 밝은 표정이었다.
“이준!”
화려한 화염이 노을처럼 하늘을 불게 물들이고, 뜨거운 화염이 중주 전체를 장악하면서 지면을 물들였던 피바다가 엄청난 속도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맹주님! 이준 맹주님이다!”
“맹주님이 나오셨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화염 장막에 홀린 듯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에 펼쳐진 거대한 화염장막은 순식간에 수만 명의 사람들을 모두 감쌀 수 있을 정도의 넓이까지 퍼져나갔다. 두껍게 뭉쳐있던 화염이 넓게 퍼지자, 화염 속에 있던 형체 역시 점점 뚜렷해졌다.
* * *
“이준!”
화염장막 밖.
혼족의 강자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눈을 비비며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하늘 위에 나타난 형체는 헛것이 아니었다.
“투제……?”
혼천제의 붉은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투제가 되기 위해 수천 년을 기다려왔고, 황제비약을 흡수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죽여 그 에너지를 흡수한 끝에 간신히 투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황제비약도 없는 이준이, 그것도 반년 만에 투제가 되어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하하, 당신만 투제가 되라는 법은 없잖아?”
곧이어 화염이 흩어지고 검은 옷의 청년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같이 검던 그의 두 눈동자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화려한 빛깔이 감돌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수많은 색깔이 다채롭게 섞인 화염 인결이 새겨져 있었다.
인결에서 확산되는 기이한 힘에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용암마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태령 황제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분을 이기지 못한 혼천제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렇다.”
이준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허무! 네놈이!”
혼천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허무 대인은 틀림없이 태령황제의 신전에 투제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무지로 변해버린 대지를 훑어보던 이준은 바닥에서 화려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다.
바로 혼천제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했던 촉곤이었다. 지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빛은 주인의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었다.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한 촉곤이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창백한 얼굴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디어 나왔구나. 조금만 늦었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촉곤 선배님. 우선 좀 쉬십시오.”
이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이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촉곤은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누구보다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혼족 대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을 테니 자네는 혼천제를 맡아주게. 이제 저 놈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자네뿐이야.”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밑을 훑었다.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버린 수만 명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황제비약을 흡수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 악마 같은 놈.”
이준이 말했다.
“끌끌, 쓸모없는 버러지들을 이용해 투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오히려 그 하찮은 목숨을 활용해 위대한 투제가 탄생했으니 영광으로 여겨야지.”
혼천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닥쳐. 내가 하늘을 대신해 당신에게 벌을 내리겠다.”
혼천제를 바라보는 이준의 얼굴에는 전에 없이 짙은 살기가 내려 앉아 있었다.
“하하! 좋다. 오늘 혼족이 망하는지 연합군이 망하는지 한 번 보자꾸나!”
혼천제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는 순간 섬뜩한 핏빛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온 천지를 뒤덮었다.
“혼족은 최대한 나와 멀리 떨어지거라.”
이어지는 혼천제의 말에 혼족 강자들은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투제 강자간의 전투에 휘말리는 순간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들만 상대하자니 시시했는데 아주 잘 됐구나. 너를 죽이고 내가 진정한 투제임을 증명하겠다.”
혼천제의 두 눈에서 흉악한 핏빛 기운이 마구 솟아났다.
“끝까지 해보자고.”
이에 맞서듯 이준의 눈동자에서도 화려한 화염이 폭발했다.
사람으로 빼곡하던 하늘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고, 저만치 달아난 강자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봤다. 이준과 혼천제 중 누구도 아직 움직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세만으로도 천지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쏴아!
핏빛 기운이 빠르게 하늘 위로 퍼져나가며 혼천제의 두 눈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쾅!
혼천제가 발을 구르는 순간, 천지가 뒤흔들리며 수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핏빛 에너지가 이준을 향해 해일처럼 달려들었다.
“와라.”
이준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주먹을 움켜쥐자, 굉음과 함께 대지가 반으로 갈라지며 새빨간 용암이 터져 나와 핏빛 파도를 강타했다.
콰앙!
곧이어 역겨운 피비린내로 가득한 핏물이 용암과 뒤섞여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투제가 됐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간단하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이준의 모습에 혼천제의 표정이 점점 더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혈마낙뢰!”
분노한 혼천제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하늘을 가리키자, 핏빛 구름이 요동치며 빠르게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쾅쾅쾅!
끝을 모르고 펼쳐진 핏빛 구름이 수축하는 순간 새까만 균열이 생겨나며 하늘이 무너지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핏빛 낙뢰가 폭우처럼 이준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낙뢰에서 느껴지는 원념과 한을 느낀 이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여서 얻은 힘이라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구웅-!
다음 순간, 화려한 화염이 물살을 가르듯 회전하며 하늘 높이 솟아나더니 화염 거인으로 변했다.
화염 거인이 입을 벌리자, 순간적으로 하늘 전체에 적막이 흐르며 휘황찬란한 화염이 터져 나와 핏빛 낙뢰와 맞부딪혔다.
꽈아앙!
충돌지점에서 터진 화려한 불꽃이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저 두 공격 중 어느 하나라도 연맹 총부 위로 떨어졌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두 사람 중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멍하니 두 투제의 싸움을 지켜보던 뇌영이 고원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고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모두 나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는 존재들인데, 이 대결의 결과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다만 투제가 되기 전의 실력은 혼천제가 더 뛰어났으니……. 혼천제가 조금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
고원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창백하게 변했다.
“걱정하지 말게. 이준 역시 태령황제의 전승을 받았으니, 결코 혼천제에게 뒤지지 않을 걸세.”
그러나 이어지는 촉곤의 말에 사람들은 조금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준의 승리를 비는 것뿐이었다.
“이준, 네놈이 투제가 되었다고 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때, 혼천제의 낯빛이 싸늘하게 변하며 그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흡인력이 터져 나와 중주를 가득 뒤덮고 있던 핏빛 구름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반 년 동안 중주의 하늘을 뒤덮고 있던 핏빛 구름이 사라지면서 따뜻한 햇살이 다시 대지를 밝게 비췄다.
몇 개월 만에 태양을 보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아직 기뻐할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 막 투기대륙의 운명을 건 전투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꾸드득!
곧이어 혼천제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하더니 단숨에 수천 미터에 달하는 거인으로 변해버렸고, 거대해진 그의 몸 위로 음침한 빛을 내뿜는 핏빛 갑옷이 생겨났다.
“하하, 이준. 어떠냐? 너도 투제의 몸을 만들 수 있겠느냐?”
혼천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중주 전체의 천지에너지가 폭풍에 휩쓸리듯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