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화. 원기체
“받아들이게. 자네가 혼천제보다 먼저 투제가 된다면 이 재난도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야.”
촉곤의 말에 이준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허허, 혼족과 혼천제는 우리가 온힘을 다해 막고 있겠네. 자네는 반드시 투제가 되어 돌아오게.”
염신이 웃으며 말했다.
“이 광장을 천상무덤에 넣고 싶습니다. 그곳이라면 저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더 늘어날 테니까요.”
이준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천상무덤이라……. 그렇게 하거라. 그곳의 시간은 바깥세상보다 몇 배는 느리니 시간을 더 벌 수 있겠구나.”
고원이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바로 움직이죠.”
이준이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 위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 단숨에 광장과 석상을 집어삼켰다.
“아버님,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 즉시 이 옥패를 깨주십시오. 그럼 곧바로 천상무덤 밖으로 나오겠습니다.”
이준이 옥패 하나를 고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고원 역시 흔쾌히 그 옥패를 받아들었다. 지금의 혼천제를 상대로는 그와 촉곤이라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이에게도 이 일을 알리겠다.”
고원은 옥편을 저장반지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모든 건 자네에게 달렸네.”
뇌영을 비롯한 연합군의 강자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이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제 투기대륙의 운명이 그의 어깨에 걸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올린 이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약솥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약솥의 중심에는 검붉은 피가 거대한 회오리로 변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혼천제. 기다려라. 반드시 투제가 되어 돌아와 주마.’
말없이 약솥의 중심을 노려보던 이준은 망설이지 않고 칠흑같은 균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준이 나올 때까지 버틸 수 있기를…….”
사라지는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원은 곧바로 사람들과 함께 대전으로 들어갔다.
* * *
아득히 먼 하늘 위. 피바다가 된 하늘에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피바다 안에서는 섬뜩한 에너지가 쉴 새 없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피바다 중앙에는 피로 이루어진 연꽃 하나가 떠있었는데,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 위에 앉아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모여 만들어 진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 담긴 에너지를 쉴 새 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응?”
그때,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던 남자가 돌연 눈을 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섬뜩한 붉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 파동은…….’
조금 전,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그의 영혼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 기운이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린 탓에 투제를 목전에 둔 자신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착각인가?”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서 그 불길한 기운의 정체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투제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쉭-
그때, 그의 뒤로 검은 화염을 뒤집어 쓴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바로 허무대인이었다.
“아직도 에너지가 부족하다. 더 많은 인간의 목숨이 필요해.”
혼천제가 저 멀리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허무대인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본래 혼천제와 그는 평등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천제가 황제비약을 손에 넣은 뒤, 허무대인과 혼천제의 관계는 더 이상 평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고까워도 어찌하겠는가. 이제 허무대인의 힘으로는 혼천제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을…….
“영족, 석족, 약족에서 잡아온 백성들을 모조리 대진에 집어넣어라. 그래도 부족하면 혼족의 백성들이라도 넣어라. 충분한 에너지가 있어야 내가 투제가 될 수 있다.”
혼천제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족의 사람들도?”
허무대인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장로들이 반대할 것이다.”
“반대하는 자들은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자네가 잘 알고 있겠지.”
악마의 그것처럼 붉게 변한 혼천제의 눈이 허무대인을 향했다.
“혼족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희생이다. 게다가 내가 투제가 되는데 실패한다면 어차피 혼족은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혼천제의 한마디에 허무대인은 분한 듯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걱정 마라. 내가 투제가 되는데 성공한다면 다음은 네 차례니까.”
혼천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허무대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공간을 가르고 사라졌다.
허무대인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혼천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혼족의 피의 힘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허무대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의 존재는 족장인 혼천제 자신 이상으로 혼족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혼천제가 죽어도 허무대인이 있다면 피의 힘이 이어지겠지만, 허무대인이 사라진다면 피의 힘 역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투제에 오른다면……. 이제는 허무의 불꽃을 대신할 존재를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끌끌…….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생각을 마친 혼천제의 두 눈이 음산한 빛을 발하며 중주 전체에 퍼져있는 에너지를 미친 듯이 흡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천제가 몸을 돌리는 순간, 아주 미세한 검은색 불씨 하나가 날아와 피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혼천제라 해도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불씨였다.
* * *
혼계에 도착한 허무대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거대한 피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주위에 서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안으로 떨어지며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피바다의 크기는 끝을 모르고 넓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허무대인의 손끝에서 자그마한 불씨 하나가 떨어져 끝없이 펼쳐진 피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천상무덤.
회색 빛 하늘 위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석상 하나가 놓여있었다. 석상에서 퍼지는 위압감이 천상무덤 전체를 뒤덮자, 투성급의 영혼체들마저 겁에 질린 얼굴로 줄행랑을 쳤다.
이준은 긴 한 숨을 내쉬며 태령황제의 석상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잠시 후, 천천히 상공으로 올라간 이준의 몸이 석상의 심장부에 생겨난 구멍 앞에 멈춰 섰다.
동굴처럼 뻥 뚫린 구멍의 입구에서는 옅은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고원이나 촉곤 같은 강자마저 무릎을 꿇렸던 바로 그 빛이었다.
그때, 소애가 이준의 어깨 위에 나타나 정화의 불꽃으로 그의 온몸을 감쌌다.
“모든 게 여기서 결정될 거야.”
마음을 굳힌 이준이 힘차게 발을 뻗어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구웅!
옅은 빛을 통과하는 순간, 이준은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빠르게 훑어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가 자신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만 그 ‘무언가’는 이준을 훑어볼 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이준의 눈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그 순간 이준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주위에는 형형색색의 화염으로 이루어진 불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천지의 불꽃인가…….”
몸을 숙여 자주색 화염을 손으로 만져보자, 익숙한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별의 불꽃…….”
이준은 잽싸게 각양각색의 천지의 불꽃이 모여 있는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화염들이 친근함을 표현하듯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 녀석들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구나.”
그때, 웃음기 섞인 노인의 목소리가 불바다 속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이준은 급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화염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꽃봉오리가 열리고 있었고, 꽃봉오리의 중심에는 평범한 인상의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아무런 힘도 없는 노인들과 크게 다를 게 없어보였다.
노인은 꽃봉오리 안에 앉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제의 근원 속에 있는 노인……. 그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준입니다.”
이준은 격앙된 마음을 억누르며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보아하니 내가 남겨둔 신전이 열린 것 같구나.”
태령황제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끝없이 펼쳐진 불바다에서 또 하나의 화염 꽃봉오리 하나가 불쑥 솟아났다.
“앉거라.”
그의 말에 이준은 냉큼 다가가 꽃봉오리 위에 앉은 뒤 전설로만 전해듣던 태령황제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는 그제야 태령황제의 화려한 머리칼 위에서 옅은 불씨가 솟아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천지의 불꽃을 집어삼킨 존재라더니…….’
“투기대륙에 새로운 투제 강자가 나타났는가?”
태령황제가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까지는 선배님이 투기대륙의 마지막 투제 강자십니다.”
“역시 그렇구나…….”
그 대답이 크게 놀랍지 않았는지, 태령황제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저의 조상님께서 현재 투기대륙에는 특별한 에너지 하나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이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허허,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네 조상도 제법 훌륭하구나. 그의 말대로다. 네 조상의 말대로 투기대륙에서 사라진 무언가가 바로 투제의 열쇠지.”
“그게 무엇입니까?”
이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원(源)이다.”
“원이요?”
“고대 강자들은 이것을 ‘원기체’라고 불렀다. 천지에서 생겨난 특수한 에너지이지. 그 원기체를 흡수해야만 투제의 벽을 뚫을 수 있다.”
태령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든 공간의 탄생은 원기체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원기체는 재생될 수 없다. 즉, 원기체를 쓸 때마다 천지에 있는 원기체가 조금씩 사라진다는 말이다 수많은 투제들이 탄생하면서 그 원기체가 모두 소모되었으니, 당연히 새로운 투제가 나타날 수 없는 것이지.”
이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이유로 투제가 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저 늦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이 남기신 황제비약은 이미 누군가가 가져갔습니다. 그 자는 황제비약을 흡수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 있습니다. 자신이 투제가 될 수만 있다면 투기 대륙의 모든 인간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이준의 목소리는 돌을 올려둔 것처럼 묵직해졌다.
“황제비약에는 원기체가 조금 남아있다. 그 자가 그 원기체를 완전히 흡수한다면 투제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태령황제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난 자네가 이곳에 온 목적을 알고 있다.”
이준이 굳은 얼굴로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선배님. 이번 일은 문자 그대로 투기 대륙의 운명이 걸린 일입니다.”
“난 그런데는 관심이 없네.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을텐데?”
하지만 태령황제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래도 자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건, 내 힘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겠지. 내 힘을 무사히 물려받는다면 자네도 투제가 될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태령황제가 웃으며 손을 뻗자, 이준의 몸에 있던 분홍색 화염이 무언가에 끌려가듯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화염의 정령으로 변화했다.
“정화의 불꽃, 오랜만이구나.”
태령황제가 소애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반면 태령황제를 바라보는 소애의 눈빛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아직 날 많이 원망하고 있구나.”
그러나 태령황제는 그런 소애의 눈빛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곧장 이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천지의 불꽃을 흡수할 수 있는 수련법을 가지고 있나보지?”
태령황제의 말에 이준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아주 괜찮은 수련법이지. 나도 그 수련법의 도움을 받았기에 투제가 될 수 있었으니까.”
“설마 선배님이 불개를 만드신 것 입니까?”
이준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외쳤다.
“허허, 아니, 내가 만든 것은 아니네. 하지만 그 수련법 덕에 모든 천지의 불꽃을 삼키고 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
태령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만 년이 지나 나와 비슷한 존재를 만나다니…….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구나.”
태령황제가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끝이 보이지 않는 화려한 불바다가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20가지 이상의 색으로 빛나는 신비한 연꽃이 불쏙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