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화. 투제의 근원
“태령황제의 내력이나 신분에 대해 알고 있는가?”
뜬금없는 물음에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태령황제와 그들은 같은 시대 인물들이 아닌데다, 그 이름조차 고적에서만 봤기 때문에 그의 내력과 신분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었다.
“내가 알기로 태령황제는 아주 신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있지요. 그 당시 대륙에는 수많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존재했지만, 그 누구도 투제가 되지 못했지요.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태령황제가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고원이 아주 오래된 기록을 떠올리며 말했다.
“태령황제가 투제로 승급하는 순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뜨고 천지가 무너지고 하늘 위에는 투기 대륙의 절반을 뒤덮는 불바다가 펼쳐졌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태령황제는 다시 종적을 감췄습니다. 본래대로라면 태령황제와 같은 피가 흐르는 혈족들 역시 투제의 피의 영향을 받아 8대 세력과 같은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야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요.”
“그렇다는 건 태령황제가 어떤 세력의 사람도 아니었고 그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요?”
이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의 혈족이 남아있지만, 누구도 그 존재를 모르는 것일수도 있고.”
고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촉곤에게로 향했다.
“형님, 혹시 제 말에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대충 비슷하다.”
멍하니 거대한 석상을 바라보던 촉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천지의 불꽃은 모두 23개가 있다. 그 모든 불꽃이 투기 대륙 최고의 보물로 손꼽히고 있지. 하지만 그 모든 불꽃 중 첫 번째 불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혹시 천지의 불꽃 중 첫 번째 화염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아니, 애초에 정말로 그런 불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냐?”
이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첫 번째 불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불꽃의 이름도, 특징도 알지 못했다. 그저 허무의 불꽃 위에 더욱 강한 힘을 지닌 신비한 불꽃이 있다는 사실만이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었다.
“촉곤 선배님은 무언가 알고 계십니까?”
그의 말에 촉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술을 뗐다.
“천지만물은 모두 영기를 가지고 있다. 천지의 불꽃 역시 그렇지.”
촉곤이 말했다.
“옛날에 한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이 세상에 태어나 천 년에 걸쳐 형태를 갖추고, 만년 동안 영기를 모았지. 그리고 다시 만 년의 시간 동안 수련을 하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모두가 알다시피 천지의 불꽃은 자신이 탄생한 지역에서 제 발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꽃은 다르다. 놈은 영기를 갖게 된 후 지하의 용암 속으로 들어가 천 년을 헤엄치며 다른 불꽃들을 잡아먹었지.”
“촉곤 선배님의 말씀은……. 다른 불꽃들을 모두 잡아먹어야 비로소 첫 번째 천지의 불꽃이 될 수 있다는 것 입니까?”
이준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말했다.
“그렇다. 나머지 불꽃 모두를 잡아먹고도 폭발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비로소 첫 번째 천지의 불꽃이라는 이름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촉곤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개를 통해 계속해서 천지의 불꽃을 흡수해 온 그였기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천지의 불꽃을 흡수할 때마다 불꽃끼리 서로 반발하고 다른 불꽃을 집어삼키려는 것을 그는 몇 번이나 보아왔다. 그런데 모든 불꽃을 흡수해야만 완성되는 불꽃이라니…….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첫 번째 천지의 불꽃의 정체가 그런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해봤습니다.”
이준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도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첫 번째 천지의 불꽃의 정체가 그런 것이라니…….
“놈은 모든 불꽃을 잡아먹은 뒤 스스로를 염제, 즉 화염의 제왕이라고 칭했고, 다시 수천 년의 수련을 거치고 나서야 세상으로 나왔지.”
말을 마친 촉곤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염제는 투기 대륙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후…….”
긴 숨을 내뱉은 촉곤이 석상을 바라보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령황제. 그것이 염제가 사용한 다른 이름이다.”
“태령황제가 바로 첫 번째 천지의 불꽃인 것이지.”
촉곤의 말이 끝나자, 광장 전체가 침묵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완전히 넋을 놓은 듯 말을 잇지 못했고, 촉곤은 다시 태령황제의 석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투기대륙의 마지막 투제가 인간도 마수도 아닌 천지의 불꽃이라니……. 감히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촉곤 형님. 그 말이 사실입니까?”
고원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내가 나보다 수천 년은 어린 후배들에게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나?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말이지.”
촉곤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투제를 만드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고원이 다시 가장 중요한 일로 초점을 돌렸다. 태령황제가 어떤 존재이든지, 그들이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혼천제와 맞서 싸울 수 있을지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태령황제의 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혼천제에게 빼앗긴 황제비약, 또 하나는…….”
촉곤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거대한 석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바로 태령황제가 남긴 투제의 근원이다.”
“투제의 근원……?!”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태령황제 신전의 가장 큰 보물이다. 황제비약은 두 번째지.”
촉곤이 웃으며 말했다.
“투제의 근원을 얻으면 우리도 혼천제와 마찬가지로 투제 강자를 만들어낼 수 있네.”
그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촉곤의 말대로라면 그들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럼 투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그 힘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겁니까?”
고원이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말을 다 뱉고 나니 문득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투제가 되는 것은 형님입니다. 형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저희의 목표는 그저 혼족과 맞서 싸우는 것이니 촉곤 형님이 투제가 된다 해도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투제가 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마음이 안 흔들린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분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것은 촉곤이니, 그가 투제가 되는 것이 옳았다.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내가 투제의 근원을 흡수할 수 있었다면 진즉 그렇게 했겠지.”
촉곤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태령황제가 남겨둔 물건을 어찌 그리 쉽게 얻을 수 있겠나. 만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갖은 수를 다 써보았으나, 결국 나는 그것을 흡수하지 못했네.”
“투제의 근원이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고원이 물었다. 그의 물음에 촉곤은 손으로 석상을 두드리며 위를 올려다봤다.
“바로 이 안에 있네. 허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지. 자네와 내가 힘을 합쳐도 어쩔 도리가 없을 걸세.”
사람들은 석상을 빙 둘러선 채 저마다 석상 위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나 아무리 오감을 집중해 보아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펑!
그때, 뇌영이 석상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하게만 보이던 석상은 8성 투성인 뇌영의 주먹을 버텨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몸을 저만치 날려버렸다.
“역시 보통 돌이 아니었군.”
심지어 뇌영의 주먹이 닿았던 부분은 흠집조차 나지 않은 상태였다.
“투제의 근원이 석상을 보호하고 있는 것 입니까?”
고원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 역시 석상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네.”
촉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제의 근원은 석상 안에 숨겨져 있다. 허나 이 석상을 깰 방법이 없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야하는 것이겠지요.”
고원이 말했다.
“그렇겠지. 게다가 투제의 근원은 아무나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마도 그의 정체가 천지의 불꽃이었으니, 천지의 불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준에게 향했다. 현재 투기 대륙에서 그보다 천지의 불꽃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흠……. 화염의 정령과 여섯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진 이준이라면 뭔가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원의 말에 이준은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투제의 근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갑자기 그의 어깨 위로 분홍색 화염이 솟아났다. 소애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뭔가가 달랐다. 딱 집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짙은 영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석상을 열 수 있어.”
소애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든 시선이 이준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뭐라고? 정말이야?”
이준의 질문에 소애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을 마친 소애는 그대로 천천히 공중으로 날아올라 석상의 심장부에서 멈춰 섰다.
곧이어 정화의 불꽃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하더니 석상의 심장부를 감싸기 시작했다.
구웅!
높이 솟은 석상 위에서 기이한 파동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꿈쩍조차 하지 않던 석상에서 변화가 일어나자, 사람들의 낯빛이 환하게 밝아졌다.
구웅!
잠시 후, 석상의 가슴 부위에 갑자기 동그란 구멍이 생겨나더니 이내 부드러운 빛이 뿜어져 나와 광장에 있던 사람들을 비추었다.
온화한 기운을 머금은 빛이 몸에 닿는 순간, 뇌영과 염신은 물론이고 고원과 촉곤마저 무언가에 짓눌린 듯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단 한명,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준이었다.
곧이어 광장 전체를 훑고 지나간 빛이 천천히 응집되어 이준에게로 향했다.
이준은 자신을 감싼 빛기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몸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파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그의 몸에는 여섯 개의 천지의 불꽃이 담겨 있었으니, 당연히 그의 염력에도 천지의 불꽃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태령황제는 본래 천지의 불꽃이었으니, 이준의 염력과 그의 염력은 상당히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준, 태령황제가 널 선택했나 보구나.”
이준을 감싼 빛기둥을 바라보던 고원이 조금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역시 천년 동안 투제가 되기를 갈망해왔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한다고 투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투제의 근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태령황제의 선택을 받은 자 뿐이었다.
게다가 이준은 그의 사위이기도 하니, 다른 사람이 투제가 되는 것 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다.
적어도 혼천제가 투제가 되어 온 천하를 자신의 발 아래 두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결과였다.
사람들은 모두 부러운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그들의 마음 역시 고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에게 저항한 모든 이를 영혼조차 남기지 않고 없애버리겠다는 혼천제보다는, 이준이 투제가 되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