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화. 중주의 난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혼족이 사라진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연맹의 대전 안에는 연합군의 고위층들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하아…….”
우울한 분위기의 대전을 둘러보던 이준의 입에서도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한다니…….
어떤 시련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대체 왜 안 나오는 거야!”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한 뇌영이 탁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진정하게…….”
옆에 있던 염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뇌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러분.”
그때, 대전의 공간이 강하게 흔들리며 고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원이 나타나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소식이 있었습니까?”
고원은 엄숙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뻐하기도 전에 고원의 입에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혼족이 숨어있던 장소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버님, 그 말씀은…….”
이준의 질문에 고원은 말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중주 전체가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동을 느낀 사람들은 황급히 대전 밖으로 달려 나와 하늘 위를 바라봤다.
푸른 하늘 위에서는 어느새 검은색 광단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우웅-
곧이어 기이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하늘 위를 떠다니던 검은 광단이 검은 색 약솥으로 변화했다.
화염 약솥의 크기는 중주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이건…….”
광활한 대지를 뒤덮은 검은 약솥에서는 아주 익숙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혼천제는 이미 황제비약과 융합을 거의 다 마친 상태다. 그리고 황제비약을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 중주의 모든 사람들을 커다란 약솥 안에 집어넣고 불태워 흡수하려 하고 있어.”
고원의 서늘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 칼날처럼 내리꽂혔다.
고원의 말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찬숨을 들이마셨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구나.”
멍하니 고원의 말을 듣고 있던 뇌영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혼천제는 이미 황제비약과 완전히 융합했네. 이제는 나와 촉곤 형님이 함께 나선다 해도 저지하기 어려울 것이야.”
고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만약 이 시기가 황제비약을 흡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아니었다면 혼족에서 진작 이곳으로 대군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네.”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촉곤이 등장하면서 연합군이 유리해지나 싶었지만,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역전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나? 놈이 투제가 되는 모습을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놈이 투제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것 아닌가!”
뇌영의 말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제가 된다면 그 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니, 어떻게든 그 전에 막아내야 했다. 아무리 가능성이 낮다해도 투제를 상대하는 것 보다는 나을 테니까.
고원이 뒷짐을 진 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약솥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비약을 완벽히 흡수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거야. 공격하기 가장 좋은 시기가 올 때까지 우선 지켜보지.”
고원의 말에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마음이 다급하다 해도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된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기회에 연합군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 * *
한편, 중주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소동의 원인은 바로 하늘 위에 나타난 거대한 약솥이었다. 그 안에서 발산되는 파동에 수많은 강자들이 불안에 떨었다.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먼 하늘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나타나더니 마치 거미줄처럼 하늘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곧이어 거대한 진의 중심에 머리를 풀어헤친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혼천제!”
줄곧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연합군 강자들의 눈동자가 바늘구멍처럼 작아졌다.
“고원.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혼천제의 목소리에서는 이전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고원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수천 년에 걸친 싸움은 나의 승리로 끝이 나는구나.”
혼천제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중주를 뒤덮었던 거대한 진에서 수많은 빛기둥이 쏟아져 나왔다.
쿠우웅-!
빛기둥이 대지를 뒤덮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중주 전체가 강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중주의 어느 한 지역. 광활한 평원 위에 도시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도시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쾅!
하지만 떠들썩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 도시 한 가운데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더니 검은색 빛기둥이 뿜어져 나와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다.
펑펑펑!
대재앙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무언가 반응을 보일 틈조차 없이 곳곳에서 온갖 피와 살이 날아다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몸이 터져나가며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성문 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모여들면서 도시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성문 밖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대로 먼지처럼 사라졌고, 새빨간 피가 도시의 절반을 채웠다.
곧이어 사람들의 피와 살이 뭉쳐 새빨간 빛기둥으로 변해 하늘을 가르며 중주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진(陳)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핏빛 기류가 스쳐간 곳에는 코를 찌르는 역겨운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중주 전체가 한순간에 핏빛으로 물들며 공기에서도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 * *
천부연맹 총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 상공에서는 고원과 이준 등 연합군의 사람들이 어두운 얼굴로 피바다로 변해버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염신이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원이 손을 휘둘러 공간 균열을 만들어내자, 도시를 뒤덮었던 피가 모조리 그 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균열이 넓게 뻗어나가며 대지가 갈라지고, 지하에서 핏빛 진이 나타났다.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진에서는 음산하면서도 매서운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종말의 대진…….”
지하 속에 숨겨져 있던 진법을 발견한 염신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진법을 쓰다니…….”
뇌영이 이를 꽉 물며 읊조렸다.
종말의 대진은 범위 내에 들어간 모든 생명을 죽이고, 그 혈액에서 에너지를 채취하는 저주 받은 진법으로 아주 오래 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혼족은 비밀리에 그 진법을 전승해 온 모양이었다.
“혼전이 투기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며 영혼체를 수집하는 척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지하에 종말의 대진을 설치하고 있었나 보구나…….”
고원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지하에 설치된 거대한 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강제로 흡수한다면 혼천제가 황제 비약을 흡수하는 속도도 훨씬 빨라질 거예요.”
고원의 곁에 선 채 종말의 대진을 바라보는 이준의 표정 역시 전에 없이 어두웠다.
“하지만 종말의 대진 하나를 발동시키려 해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텐데……. 이 정도 수의 진법을 동시에 발동시키려면 혼족도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할 거예요. 아마도 이게 놈들에게 있어서도 마지막 수단이겠죠.”
“돌아가서 상의하자. 이번 일로 혼족은 모든 세력의 적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힘을 끌어 모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해볼 수 있을 게다.”
말을 마친 고원은 손짓을 하며 총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총부로 날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다 해도 혼천제가 투제가 되는데 성공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혼천제가 투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해.’
* * *
사람들이 연맹 총부에 도착했을 때, 대전 밖에는 보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촉곤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보람이 함께 서있었다.
“저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구나.”
촉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그 대진을 없애야만 놈이 투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고원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내려앉았다. 황제비약을 손에 넣기 전에도 투기 대륙 최강의 2인 중 하나였던 존재가 바로 혼천제였으니, 이제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때, 촉곤이 피식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 놈이 투제가 되더라도 우리도 투제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투제를 만든다고요?”
촉곤의 한마디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투제를 만들다니, 제 아무리 촉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수만 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투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염신이 기대와 의심이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현재 연합군은 궁지에 몰린 채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천제가 투제가 되는데 성공한다면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촉곤의 말이 사실이라면…….
“촉곤 선배님.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닌 건 알고 계시죠?”
이준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고원은 확실한 대답을 얻고 싶은 것처럼 말없이 촉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모두가 의심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촉곤이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시기에 농담을 하겠나?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우리도 투제 강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네.”
“확실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고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촉곤은 고개를 들어 태령황제의 신전에서 꺼내온 물건들을 가리켰다.
“사실, 태령황제의 신전에서 가장 귀한 물건은 황제비약이 아니네.”
“선배인의 말씀은……. 저게 그 귀한 물건이라는 겁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이준이 손가락으로 줄줄이 늘어선 천지의 불꽃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내가 저 불꽃들을 감상하고 싶어서 광장에서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겐가?”
촉곤이 손을 휘두르자, 사람들의 몸이 순식간에 광장 위로 이동했다.
하지만 돌기둥 위에 놓여있는 천지의 불꽃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신기한 물건이 있다는 겁니까?”
뇌영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촉곤은 뒷짐을 진 채 말없이 태령황제의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