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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808화 (808/818)

808화. 황제비약

“후…….”

이준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면 천지의 불꽃 중 첫 번째 불꽃을 제외한 모든 불꽃들을 한군데 모아 놓을 수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곳에 있는 천지의 불꽃들은 모두 힘을 잃은 것 같아. 형태만 갖춘 평범한 화염과 다를 게 없는 걸.’

이준은 지나왔던 돌기둥을 돌아보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있는 불꽃을 전부 흡수할 수만 있다면 8성, 아니 9성 투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의 어깨 위에 앉아 두 번째 돌기둥을 바라보는 소애의 작은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모두 드러났다. 막연함, 고통, 그리고 공포까지.

이준은 말없이 소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틀림없어. 정화의 불꽃은 이곳에서 달아난 거야.’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이준의 추측이었다.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당사자인 정화의 불꽃과 허무 대인마저 정확한 것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황제비약은?”

혼천제가 돌기둥에서 시선을 거두고 허무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허무대인은 아무 대답 없이 광장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우뚝 선 석전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쏴아아!

그때, 허무대인이 입을 벌려 석전을 가리고 있던 안개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자 기이하게도 광장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람들은 급히 고개를 들었고, 끝이 모이지 않을 만큼 커다란 석상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석상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석상의 주인공은 바로 태령황제 신전의 주인인 태령황제였다.

석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몇몇 강자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석상 주위에는 수많은 광단들이 춤추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건 수련법과 무투기인가?”

이준은 광단 속에서 아주 오래된 두루마리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두루마리 하나하나가 1격 무투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고원과 혼천제 등 투기 대륙의 정점에 선 강자를 유혹할 수는 없었다. 광단을 천천히 훑던 그들이 그대로 시선을 돌렸고, 황제비약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활기가 넘치는구나.”

그때, 노인의 목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석상 위에는 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령황제!”

검소한 차림의 노인을 보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귀신에 홀린 듯 소리를 내질렀다. 노인의 모습은 석상과 완전 똑같았다.

‘죽지 않았어?!’

온몸에서 강력한 기운을 퍼뜨리는 노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아닌 가 의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혼천제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허무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허무대인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태령황제가 아니다. 저게 바로 황제비약이다.”

그의 말에 혼천제, 고원 모두 놀란 얼굴로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허무,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석상 위에 있던 노인이 기가 차다는 듯 허무대인을 바라보며 꾸짖듯이 외쳤다.

“뭐가 뭐하는 짓입니까?”

허무 대인이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내가 너와 정화의 불꽃을 속박에서 풀어주지 않았으면 네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그때 네 입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을 텐데.”

그 노인……아니, 황제비약이 소리쳤다.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무의 불꽃과 이준 어깨 위에 있는 정화의 불꽃에게 향했다.

허무 대인은 눈썹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아무 기억도 없습니다. 허나…….”

갑자기 말을 끊은 허무대인이 기괴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이번에 당신을 구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황제비약은 아무 말 없이 허무 대인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준의 어깨 위에 있는 정화의 불꽃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화의 불꽃. 넌 그때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느냐?”

소애는 당황한 얼굴로 이준의 어깨를 꼭 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난 당신을 본 적이 없어요…….”

황제비약은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 곁에 있는 석상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신 짓입니까…….”

“함께 가시지요.”

허무대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흥, 너희가 원하는 것이 나의 몸이더냐?”

황제비약이 차갑게 묻자, 허무대인의 입가에도 싸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공격!”

펑!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혼천제가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나가 황제비약을 향해 염력으로 뒤덮인 주먹을 날렸다.

“우습군.”

하지만 황제비약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했을 뿐인데 그를 향해 날아들던 혼천제의 공격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상황이 어렵게 됐어. 우선 혼천제가 가져가기 전에 먼저 잡자고.”

촉곤이 조용히 말했다.

“예. 너희는 나머지 사람들을 지켜보거라.”

고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 등의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말을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하늘 높이 뛰어올라 황제비약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혼천제, 허무대인, 촉곤, 고원 네 사람이 한 번에 달려들었지만 황제비약은 꿈쩍도 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러 네 사람을 모조리 튕겨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9성 투성 넷이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라니, 황제비약이 투제라도 된단 말인가?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하자, 혼족의 수많은 강자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나서기 무섭게 염신을 비롯한 연합군 측의 강자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혼족의 강자들은 이를 갈면서도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쾅쾅쾅쾅!

하늘 위. 다섯 개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엉키며 무시무시한 에너지 파동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진정 놀라운 것은 투기대륙 최강의 4인과 그들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황제비약이 맞붙고 있음에도 공간이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태령황제의 힘이 얼마나 강했기에 만년이 지나도록 이토록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는 이공간을 창조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굳은 얼굴로 혼란스러운 전장을 바라보던 이준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황제비약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촉곤은 고원과 함께라면 단시간 내에 황제비약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직접 맞서 싸워보니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혼천제와 허무 대인은 그들과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방해를 해댔으니 더욱 손속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혼천제와 허무대인 역시 둘의 힘만으로는 황제비약을 어쩔 수 없었으니, 전황은 점차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 * *

하늘 위. 황제비약이 차가운 얼굴로 손을 들어 올리자, 짙은 약향이 천지에 가득 퍼져나갔다.

“마시면 안 돼요!”

이상한 냄새를 맡은 이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약향을 맡는 순간 체내의 염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황급히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약향이 몸속으로 많이 들어가지 않아 금방 안정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황제의 주먹!”

다음 순간, 황제비약이 두 눈을 치켜뜨며 네 사람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사람 머리만한 광단이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쏟아졌다.

펑펑펑!

광단이 나타나기 무섭게 천지의 에너지가 엄청난 속도로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온 천지가 화염이 넘실거리는 화로로 변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광단의 위력을 느낀 고원은 황급히 염력을 폭발시켜 자신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그가 방어에 들어가기 무섭게 천지에 가득한 화염이 엄청난 속도로 황제비약의 손에 있던 광단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파멸하라!”

짤막한 외침과 함께 천지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었다. 천지간에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는 고원을 비롯한 네 사람에게 달려드는 황제비약의 광단 뿐이었다.

크르릉!

위기를 느낀 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염력을 분출해 단단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펑펑!

네 사람이 합심해 만들어낸 방어막 위로 광단이 떨어지면서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고, 네 사람의 몸이 광장 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자리에 있던 강자들은 9성 투성 넷을 동시에 상대하는 황제비약의 위력에 완전히 할 말을 잃고 감히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날 데려가기엔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

황제비약이 비틀거리며 다시 하늘로 올라오는 네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흥, 기뻐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허무대인이 혼천제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태령황제의 옥을 나에게 주게.”

혼천제는 순간 망설였지만 결국 태령황제의 옥을 꺼내 허무대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교전이 계속되어봐야 달라질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옥패를 건네받은 허무대인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곧바로 검은 화염을 향해 먹처럼 검은 피를 내뱉더니 두 손으로 복잡한 인결을 그리기 시작했다.

광장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이준은 허무대인이 그리는 인결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 인결……. 태령황제의 석상과 완전히 동일해.’

구우웅!

인결이 완성되기 무섭게 옥패가 기이한 소리를 발하며 형형색색의 빛깔을 뿜어내는 광단으로 변화했다.

“화단의 고리? 네 놈이 어떻게 태령황제의 신급 인결을 알고 있는 것이냐!”

시종일관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황제비약의 낯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화려한 빛의 고리는 엄청난 속도로 황제비약의 머리 위로 날아가 순식간에 그의 몸을 뒤덮었다.

“으악!”

빛이 황제비약의 몸에 닿는 순간,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놈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피에서 피어나던 검은 화염이 화단의 고리에 붙으면서 눈부신 빛의 고리가 더욱 매섭게 황제비약을 옥죄었고, 황제비약은 결국 빠르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고원과 촉곤은 황급히 허무대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혼족의 손에 황제비약에게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하!”

하지만 혼천제가 있는 이상 그리 쉽게 허무대인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혼천제가 손가락을 연달아 튕기는 순간, 짙은 약향이 고원과 촉곤을 향해 날아오며 무언가가 폭발을 일으켰다.

쾅쾅!

“9레벨 보물비약을 터뜨리다니, 통도 크구나!”

두 강자는 번개처럼 몸을 돌려 빠르게 혼천제를 둘러싸고 양옆에서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혼천제 역시 목숨을 걸고 두 사람에게 맞섰다. 여기서 길을 터주었다가는 황제비약이 그들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판이니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을 붙잡아 두어야 했다.

“꺼져라!”

촉곤이 호랑이처럼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자, 높은 하늘 위에서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솟아나 무시무시한 기세로 혼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흡!”

화려한 자금색 용이 혼천제의 몸을 감싸고 있던 염력 방어막을 파괴하는 순간, 그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터져 나왔다.

“받아라!”

그 사이 황제비약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화단의 고리에 갇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완전히 연금비약의 모습으로 돌아간 황제비약이 허무대인에게 날아가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독수리처럼 날아들어 황제비약을 낚아챘다.

황제비약을 낚아챈 것은 다름 아닌 혼천제였다.

“황제비약을 내놓아라. 허무 대인이 함께 해도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잘 알 텐데.”

고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혼천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촉곤도 주먹을 꽉 쥐며 혼천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황제비약을 원하는가?”

혼천제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자신의 손에 들린 광단을 흔들며 외쳤다.

“훗.”

고원과 촉곤이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혼천제는 화려한 광단을 그대로 입속에 집어넣었다.

황제비약을 아무런 대책 없이 삼켜버리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9성 투성이라 해도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쳤군.”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이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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