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7화. 불꽃의 광장
용족의 분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촉곤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한때 목숨을 걸고 자신을 섬기던 신하들이 모두 변절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였다.
“하아……. 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다. 그래도 용족이 완전히 몰락하기 전에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자신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에 촉곤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고개를 떨군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생각에 잠겨있던 촉곤이 고개를 들어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방금 전까지 이준을 죽이려 들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온화한 기운이 가득했다.
딸의 목숨을 구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용족의 멸망을 막아주었으니 이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어찌 차가울 수 있겠는가.
“정말 미안하네. 내 하마터면 우리 용족과 딸의 은인을 내 손으로 죽일 뻔 했군. 그리고 정말 고맙네. 내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네.”
“하하, 아닙니다, 선배님.”
“선배님이라 부르니 우리 사이가 너무 멀어 보이는군. 앞으로 나를 편하게 아저씨라고 부르게.”
촉곤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현보다도 선배인 그가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라 말하자 이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촉곤 아저씨.”
촉곤은 그제야 만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혼천제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허, 그럼 딸과의 약속을 지켜볼까?”
촉곤의 시선이 혼천제에게로 향하는 순간, 고원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태령황제의 옥을 모두 손에 넣고 마침내 투제의 비밀을 풀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너무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다가 나오자마자 몸을 풀 일이 생기니 좋구나.”
말을 마친 촉곤의 몸이 서서히 위로 떠오르며 그의 몸에서 자금색 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
한순간에 역전된 상황에 얼굴이 일그러졌던 혼천제가 외마디 기합소리와 함께 옥패를 들어 올리자, 빛기둥이 하늘을 가르며 그대로 석문 위에 닿았다.
쾅!
다음 순간, 옥패에서 터져 나온 빛이 점점 더 눈부신 빛을 발하며 미동도 없이 굳게 닫혀있던 대문에 서서히 금이 생겨났다.
균열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석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해일과도 같은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며 양측 대군의 진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조심해!”
이준이 영혼의 힘으로 밀려오는 에너지를 막아내며 외쳤다.
“드디어 열리는 것인가…….”
촉곤 역시 이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이공간에 갇힌 채 수천 년간 투제의 비밀을 풀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써보았지만, 끝내 그 문을 열지는 못 했었다.
“고원. 태령황제의 신전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가?”
촉곤은 서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안에 투제가 될 수 있는 물건이 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고원이 말했다.
“저 안에 황제비약이 있으니 투제가 될 수 있는 건 맞지. 혼천제가 그것을 얻는 순간 투제가 될 수 있을 것이네.”
순간 고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절대 혼천제의 손에 황제비약이 들어가게 두어선 안 됩니다. 저 녀석이 투제가 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끝장입니다.”
“신전이 완전히 개방되면 함께 안으로 들어가세.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저 놈을 잡아야 하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원과 촉곤을 바라보던 이준의 입가에도 안도한 듯 미소가 내려앉았다. 촉곤 정도의 강자가 도와준다면 이 전쟁의 승산은 적어도 곱절은 뛸 것이다.
쾅!
그 순간, 석문이 완전히 열리며 기이한 파동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문 안쪽에 투명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고원과 촉곤은 동시에 번개처럼 문을 향해 날아갔고, 혼천제와 허무대인 역시 이에 질세라 통로 안으로 빛처럼 빠르게 들어갔다.
“우리도 가자!”
뒤이어 이준이 수많은 강자들을 몰고 유성처럼 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위압감을 견디고 이 자리에 남아있던 양측 강자들이 모두 문 안으로 들어가자, 용암이 솟구치는 이곳도 텅 비어버렸다.
오직 오래된 석문만이 조용히 용암바다 위를 지키고 있었다.
* * *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공간.
아주 오랫동안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묵직한 적막만이 그들을 반겼다.
끝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거대한 땅덩어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힘도 빌리지 않고 둥둥 떠 있는 육지는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치익!
곧이어 거대한 공간통로 하나가 나타나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육지 위에 발을 디뎠다.
‘여기가 태령황제의 신전인가?’
이준은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하지만 황제단계 영혼으로도 천 미터 범위까지 밖에 탐측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황제단계의 영혼마저 큰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이은과 채린 등이 빠르게 나타나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 이상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양측 강자들은 갑작스런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양쪽으로 빠르게 흩어져 서로를 경계했다.
“시간 끌지 말고 가자고.”
허무 대인이 고원 등을 한 번 쳐다보더니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혼천제와 혼족 강자들을 이끌고 먼 곳으로 날아갔다.
“허무의 불꽃이 길을 알고 있다니…….”
고원이 놀란 눈으로 멀리 날아가는 혼족 강자들을 쳐다봤다.
어떻게 처음 온 곳에 이토록 망설임 없이 방향을 선택해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무의 불꽃이라고?”
촉곤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따라가자!”
그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혼족 강자들의 뒤를 쫓았다. 그 뒤에 있던 고원 등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빠르게 따라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끝도 없이 광활한 육지 위를 전력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십 분가 정도 지났을 때, 가장 먼저 앞서가던 혼족의 강자들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고원, 이준 등은 빠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평원 위로 오래된 석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석전은 땅을 지지대 삼아 높이 솟아 있었고, 오래된 기운이 쉴 새 없이 석전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석전 앞에는 거대한 광장이 놓여 있었다. 광장의 양쪽에는 수천 미터가 넘는 거대한 기둥이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이준 일행은 조심스럽게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광장의 바닥은 모두 단단한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양쪽 일행은 각각 좌우로 붙어 거리를 유지한 채 광장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사막을 걷는 개미가 된 것처럼 아무리 걸어도 도통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응?”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와중에 이준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돌기둥 꼭대기로 향했다.
그곳에는 진황색 화염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준은 그것이 단번에 천지의 불꽃 중 23번째 불꽃인 ‘현황의(玄黃) 화염’임을 알아차렸다.
‘왜 이렇게 약해진 거지?’
이준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현황(玄黃) 화염인 것은 확실하지만, 불꽃이 힘을 전부 잃은 것처럼 힘없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익!
이준이 의문을 가지던 그때, 그의 어깨위로 소애가 나타났다.
소애는 눈앞에 펼쳐진 광장을 보더니 넋을 놓은 듯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기……. 익숙해.’
머릿속에서 들려온 소애의 목소리에 이준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익숙해? 이곳은 태령황제의 신전이다. 어떻게 익숙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야?’
‘몰라……. 그냥 익숙해. 예전에 와본 것처럼 말이야.’
소애의 대답에 이준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전에 태령황제의 신전이 열렸다는 소식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애와 이준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애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소애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이, 뒤를 따라오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돌기둥 위에 있는 천지의 불꽃을 발견했다. 그러나 현황(玄黃)의 화염은 천지의 불꽃 중에도 상당히 낮은 순위에 속해있기에 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백 미터도 채 가지 않아 또 하나의 돌기둥이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돌기둥 위에는 마수의 모양을 한 새빨간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22위, 만수(萬獸)의 화염…….’
이준은 뭔가 눈치를 챈 듯 발걸음이 빨라졌다. 고원 등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다시 백 미터를 가자 돌기둥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이준의 예상대로, 돌기둥 위에서는 또 다른 천지의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불꽃들은 마치 장식품처럼 아무 힘도 없었지만, 이준은 그것들이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불꽃들은…….”
고원도 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앞으로 갈수록 더욱 강한 불꽃이…….”
이준이 작게 중얼거리며 멍하니 허무 대인을 바라봤다. 그 역시 소애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은 채 돌기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서요!”
이준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더욱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대지의 불꽃, 구름 불꽃, 해심염, 얼음불꽃의 정수……. 이준의 눈에 아주 익숙한 불꽃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태령황제가 천지의 불꽃을 모아왔단 말인가.”
천지의 불꽃 중 여섯 번째에 이름을 올린 팔황의 불꽃이 나타나자, 고원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설마 천지의 불꽃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전설급의 불꽃들도 이곳에 있단 말인가?”
염신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소애와 허무의 불꽃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천지의 불꽃이 보기 드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모든 불꽃이 하나씩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지의 불꽃 중 3위 안에 드는 불꽃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것은 온 세상에 단 하나씩 밖에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현재 정화의 불꽃은 이준의 손에 있고, 허무의 불꽃은 사람의 형체를 한 채 혼족을 돕고 있었다. 그렇다면 태령황제는 두 번째 정화의 불꽃과 허무의 불꽃도 가지고 있을까?
“가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염신 하나만이 아니었다. 혼족 강자들도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속도를 올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양측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듯 자리에 멈췄다.
광장은 이미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제 천지의 불꽃 중 네 번 째 불꽃인 제왕의 금빛 화염이었다.
거대한 돌기둥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첫 번째로 한 행동은 바로 돌기둥 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불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화의 불꽃과 허무의 불꽃 역시 돌기둥 위에 있지 않았다. 이는 태령황제도 그 두 개의 불꽃은 손에 넣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두 개가 마지막 돌기둥이다. 태령황제도 전설급 이화는 얻지 못했나 보구나.”
고원이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없이 텅 빈 돌기둥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이준의 머릿속에 문득 소애가 했던 말이 스쳤다.
소애는 이곳이 익숙하다고 말했다. 허무 대인은 이곳에 오자마자 마치 길을 아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렇다면?
무심코 고개를 돌린 이준의 눈에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허무대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이준의 온 몸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났다.
‘태령황제가 정화의 불꽃과 허무의 불꽃을 수집하지 않은 게 아니었어. 이 둘은 이곳에서 도망쳐 나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