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화. 용황
“안 돼!”
이준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본 이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허어……. 생각보다 결기가 있는 놈이구나.”
그러나 황제단계의 영혼을 가진 이준이 자폭을 하려함에도 사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금색의 빛으로 이준을 속박하려 했다.
“이준, 자폭은 안 돼!”
하지만 이준의 몸이 막 폭발하려는 찰나, 돌연 손바닥에서 눈부신 자금색 빛이 흘러나와 미친 듯이 솟구치던 그의 염력을 억눌렀다.
바로 보람이 새겨뒀던 용족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다.
곧이어 이준의 왼편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더니 황금색의 거대한 용이 나타나 이준의 몸을 황급히 감쌌다.
“보람아, 이거 풀어!”
우웅!
바로 그 순간, 사내의 몸에서 눈부신 자금색 섬광이 뿜어져 나와 이준과 보람의 몸을 감싸더니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날뛰던 이준의 염력이 거짓말처럼 잠잠하게 잦아들었다.
그리고 사내의 입에서 곧 믿을 수 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아……. 살아있었구나.”
보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사내는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방금 전까지 뿜어대던 무시무시한 살기는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져 있었다.
쉭-
그때, 고원이 번개처럼 날아와 두 사람과 사내 사이를 막아섰다.
“선배님!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이 아이를 죽이기 위해서는 저의 시체를 넘으셔야 할 것입니다.”
고원이 신비한 남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신비한 남자는 고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저 멍한 표정으로 이준과 보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보람의 피에서 나는 아주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바로 자신과 같은 피의 냄새였다. 사내의 유일한 혈육만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냄새였다.
“나의 핏줄…….”
사내의 중얼거림을 들은 고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누가 당신의 아이라는 것 입니까?”
그 사이 보라색 머리칼의 소녀로 돌아온 보람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온 거야?”
이준이 입에 묻은 피를 닦으며 물었다.
“지금 그딴 소리가 나와? 왜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거야!”
보람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용족은 얼마 전까지도 분열되어 있었잖아. 이런 일에 끌어들이기에는…….”
“이 멍청이가! 혼족에서 투제가 나오면 용족이 안정된다고 해도 놈들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당장이라도 이준에게 주먹을 날릴 기세로 성을 내던 보람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보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저런 무시무시한 강자를 알고 지낸 기억은 없었다.
“태령황제의 신전을 지키는 수호자야. 나도 왜 나를 죽이려는지 모르겠어.”
“일이 복잡해졌네.”
보람이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이자, 검은색 균열이 생겨나더니 그 틈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강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바로 용족의 장로들이었다.
“용족의 힘이 과거만 못한 것은 사실이나, 은인이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만큼 몰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분분히 고개를 숙이는 장로들의 모습에 이준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이준 선생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용족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을 것이고, 용황 폐하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준의 말에 장로들이 다시 한 번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 * *
“하하, 이준을 죽일 생각이라면 고원은 제가 막아드리겠습니다.”
혼천제가 고원과 대치중인 신비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끄럽군. 내 일에 끼어들지 말아라.”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
평소대로라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혼천제가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차마 화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촉화, 본황을 알아보겠느냐?”
혼천제가 입을 다물자, 사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균열을 찢고 나온 전설의 용족 장로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이놈! 용족의 은인을 해치는 자는 그 누구라 해도 우리의 적이다! 게다가 나는 네놈을 모른다!”
촉화 장로의 대답에 사내는 안타깝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보람의 뒤에 서있던 대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뿐이었다.
“전설의 용족에선 오랫동안 용황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바로 현임 용황이다. 어디서 용황의 이름을 들먹이느냐!”
보람이 차가운 표정으로 외쳤다.
“어…….”
보람의 말에 사내는 멋쩍은 듯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네가 용황이라니……. 그래. 네가 용황이어야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내의 언행에 보람을 포함한 용족의 강자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내를 알지 못했다. 삼대 용왕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다.
심지어 수천 년을 살아온 장로들조차 누구 하나 그가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마치 자신들을 알고 있는 듯 하다못해 친근감마저 느껴지는 사내의 저 언행은 무엇이란 말인가?
“선배님. 오늘은 우리 연합군과 혼족 간에 아주 중요한 싸움이 있는 날입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끼어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보람이 말했다.
“그래? 알겠다. 네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허허, 하지만 나에게 조금만 가까이 와줄 수 있겠느냐? 아니, 내가 가도 되겠느냐?”
신비한 남자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 같은 위엄을 내뿜던 그 사내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까닭 모를 해괴한 요구에 사람들은 보람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내가 정말로 보람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듯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보람이 보일락 말락 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의 얼굴에 전에 없이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네 어미와 참 많이 닮았구나…….”
“저희 엄마를 보셨어요?”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보람의 낯빛이 빠르게 바뀌었다.
사내는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천천히 보람에게 다가갔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보람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사내가 보람에게 다가와 손을 내뻗는 순간, 화려한 금빛이 두 사람의 몸에서 동시에 솟아나더니 빠르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보람의 뒤에 있던 장로들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
보람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틀림없이 보람의 몸에 흐르고 있는, 그리고 자신의 몸에도 흐르고 있는 피의 힘이었다.
사내의 정체는 수천 년 전 사라졌다는 용족의 용황임이 분명했다.
‘날 죽이려는 이유가 보람이 나에게 줬던 용의 피를 내가 용족에게서 빼앗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구나!’
이준은 그제야 사내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었던 깨달았다.
그러나 막상 보람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났음에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얘야…….”
차가워진 보람의 얼굴을 보며 자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어찌할 바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했다.
만 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 계속해서 말을 더듬거리며 보람의 손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전 고아예요. 부모님이 없습니다.”
보람이 또렷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람은 아주 어린 나이때부터 홀로 흑각성의 깊은 산 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덜 자란 마수의 풀잎을 잘못 먹는 바람에 서천우의 손에 이끌려 아카데미에서 살게 되었고, 늘 외톨이로 지내다가 이준을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 아이였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이준과 채린, 아라 외에는 거의 친구가 없었다.
용족에 돌아간 뒤에도 용황의 후계자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모든 고난 속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났으니, 어찌 그리 쉽게 마음을 열겠는가.
“내가 잘못했다. 못난 이 아비 잘못이다. 내가 태령황제의 신전만 탐내지 않았어도…….”
보람의 싸늘한 눈초리를 마주하자, 사내는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러댔다.
“얘야, 울지 마라. 모두 내 잘못이다. 뭐든 할 테니 이 아비를 용서해다오. 못 믿겠다면 피의 서약이라도 맺어주겠다.”
혼천제와 고원을 능가하는 강자가 쩔쩔매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용족의 강자들은 물론이고 혼족과 연합군의 강자들도 서로 눈치만 살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만일 보람이 그에게 연합군이나 혼족을 없애달라고 말한다면, 하는 생각이 모두의 머리를 스쳤다.
바로 그때, 보람이 손을 들어 혼천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사람을 죽여주면 용서해 줄게요. 내 친구이자 용족을 구해준 은인을 괴롭힌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넘쳐흘렀다.
“알겠다. 내 저놈을 죽여주마.”
사내의 한마디에 혼족의 대군들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용황 폐하, 정말 용황 폐하이십니까?”
줄곧 넋을 놓고 있던 촉화 장로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주 오래 된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온 몸이 떨리면서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그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허허, 난 또 본황을 완전히 잊은 줄 알았네.”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어찌 폐하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촉화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촉화가 훨씬 더 늙어 보였지만, 보람의 아버지가 전설의 용족을 장악하고 있을 당시 그는 아주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다른 장로들은 들뜬 표정으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 전 실종되었던 용황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준의 얼굴에도 용족의 장로들 못지않게 기쁨이 가득했다.
고원과 혼천제보다도 강한 실력을 가진 강자가 연합군에 가세한다면 이 어려운 전쟁의 판도를 단번에 뒤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황이셨군요. 몰라뵈서 송구합니다.”
상대와 보람의 관계를 눈치 챈 고원은 곧장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하하, 아닐세. 나이는 내가 자네보다 많지만, 자네 역시 한 세력을 이끄는 수장인데 어찌 함부로 대하겠는가. 촉곤이라고 부르게.”
촉곤 역시 예의를 갖춰 말했다.
“촉곤 형님.”
고원은 빙긋 웃으며 친근하게 용황을 불렀다.
“용황 폐하, 이준 선생은 저희 용족의 큰 은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서 용족을 몇 번이나 구해주었지요. 뿐만 아니라 이준 선생이 아니었다면 보람은 용족으로 돌아오지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촉화장로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위기? 감히 누가 용족을 위기에 빠트린단 말인가?
촉곤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가 용황으로 있을 때는 감히 그 누구도 용족을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촉화장로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가 실종된 이후 발생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