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화. 신전 출몰
세 사람을 패퇴시킨 고원은 굳이 그들을 쫓지 않고 혼천제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것은 결국 태령황제의 신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천제…….”
혼천제와 소용돌이치던 용암 바다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고원의 몸이 갑자기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눈 깜짝할 새에 혼천제의 뒤에서 나타났다.
쾅!
다음 순간, 천지의 에너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거대한 주먹이 혼천제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하하!”
하지만 혼천제는 웃음을 터뜨리며 공간을 무너뜨려 간단하게 고원의 주먹을 받아낸 뒤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늦었다, 고원. 태령황제의 신전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거라!”
혼천제의 손에는 태령황제의 옥이 꼭 쥐어져있었다.
고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아래를 향했다. 용암바다 위로 솟아났던 소용돌이는 어느새 몇 배나 커져있었다.
쾅쾅쾅!
소용돌이가 커지며 엄청난 크기의 용암기둥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뜨거운 열기와 용암 기둥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에 의해 연합군과 혼족 모두에게서 잇달아 사상자가 발생했다.
파도가 몰아치는 용암바다를 보는 혼천제의 눈빛에 광기가 어렸다.
그의 손에 들린 태령황제의 옥은 무언가에 반응하는 듯 빨갛게 달아오르며 쉴 새 없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쏴아!
하늘 높이 용암 기둥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빠르게 회전하던 소용돌이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더니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거대한 석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석문을 뒤덮고 있던 용암이 빠르게 떨어지며 신비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석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낀 사람들은 순간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그들의 시선이 석문 위에 적힌 여섯 개의 선명한 글자 위에 멈췄다.
“태령황제 신전!”
혼천제의 두 눈에서는 광기에 가까운 기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천 년을 찾아다니던 전설속의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찾아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드디어 찾았구나!”
“저게 그 태령황제의 신전인가…….”
고원은 살짝 넋을 놓은 표정으로 용암 위로 우뚝 솟은 석문을 바라보았다.
석문에서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그것이 진짜 투제의 비밀이 담긴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태령황제의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 8대 세력이 수천 년간 경쟁을 벌였으나, 결국 누구도 얻지 못했었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나 8대 세력 중 4개의 세력만 남은 지금에서야 이 신전이 나타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모든 사람들은 경외감을 감추지 못하고 석문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후…….”
이준의 입에서도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 신전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지만, 몇 번을 보든 석문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공포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혼천제는 저 안에 있는 황제비약을 꺼내려 할 텐데……. 그 괴물은 왜 안 나타나는 거지?’
이준은 긴장한 눈빛으로 용암바다의 주위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거대한 괴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혼천제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태령황제의 옥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눈부신 옥패 위에선 신비한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옥패에서 빛이 반짝이자, 만 년 동안 굳게 닫혀있던 석문에서도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투제의 비밀을 풀 수 있다는 생각에 혼천제의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찢어졌다. 하지만 그가 발을 앞으로 내딛으려는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흥, 고원.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내가 투제가 되는 순간, 고족은 끝장이야.”
혼천제가 잽싸게 그와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신전을 여는 게 그리 쉬울 것 같나?”
하지만 고원은 그림자처럼 혼천제의 뒤를 바짝 따라잡았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혼천제가 신전을 열지 못하고 하겠다는 기백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너……!”
혼천제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혼천제와 자신의 실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니, 고원이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면 그 역시 목숨을 걸고 맞서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고원을 상대하는데 시간을 빼앗긴다면 누군가가 먼저 태령황제의 신전으로 들어가 황제비약을 차지해 버릴지도 몰랐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투기 대륙 최강의 두 강자의 추격전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설령 이준과 허무대인이라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의 대결에는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다.
쏴아아!
그때, 또 한차례 용암 바다에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용암 바다를 바라보니 파도가 치기는커녕 이상할 정도로 수면이 잠잠했다.
가만히 용암 바다를 바라보던 이준이 돌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용암에서 멀리 떨어져요. 빨리!”
이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잔잔하던 해수면에서 수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파도가 일며 섬뜩한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천지에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에 고원과 혼천제 역시 그대로 얼어붙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 정체불명의 울음소리에서 그들보다 더 강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잠시 후, 용암바다 밑에서 흉악한 기운이 솟아나며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위압감이 담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홍색 용암이 천지를 집어삼킬 기세로 몰아치고, 뜨거운 열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찼다.
양측 대군은 모두 황급히 뒤로 물러나 말없이 발아래에 깔린 용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그 아래에 무언가 공포스러운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원과 혼천제 역시 행동을 멈추고 용암바다를 바라보았다.
용암 바다 밑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현 투기대륙의 최강자인 두 사람조차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꽈르릉!
하늘 높이 치솟았던 용암이 폭포처럼 바다로 쏟아져 내리는 순간, 거대한 물살이 솟구치며 주위의 모든 산을 집어삼켰다.
곧이어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용암바다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자금색 비늘로 온몸이 뒤덮인 형체는 아직 그 일부만이 수면 밖으로 드러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정말 태령황제의 옥을 찾아 나를 그 망할 공간에서 꺼내줄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신비한 생물은 천천히 하늘을 둘러보다가 고원과 혼천제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 중 자신과 말을 섞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 둘 뿐이라는 것처럼.
“고족의 족장, 고원이라 합니다. 귀하는 누구신지요.”
고원이 괴물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물었다.
옆에 있던 혼천제 역시 고원이 저 신비한 존재와 손을 잡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평소와 달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고족? 혼족? 허, 그런 하찮은 세력이 태령황제의 옥을 찾아올 줄이야.”
괴물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고원과 혼천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과거 고족과 혼족이 대단하지 않은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만년도 넘게 지난 일이었다. 즉, 이 두 세력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존재가 적어도 만년 이상 살아왔다는 의미였다.
“그보다 누가 태령황제의 신전을 소환한 것이지?”
이어지는 괴물의 말에 혼천제의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하하, 옥패는 제 손에 있습니다. 바로 제가 신전을 소환했다는 말이지요.”
혼천제가 앞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러자 거대한 괴물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자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중년의 사내로 변화했다.
사내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자금색의 눈동자로 혼천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신세를 졌네. 자네를 도와야하겠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있어 나중에 보답하지.”
“휴…….”
사내의 한마디에 고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반대로 혼천제는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듯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사내는 혼천제 따위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이준이었다.
“네 이놈, 이리 오너라!”
사내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돌연 허공에서 거대한 황금색 손이 나타나 이준을 붙잡으려 했다.
‘망할!’
이준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황천의 분노를 급히 시전했다.
구우웅!
하지만 황제단계의 영혼으로 시전한 황천의 분노로도 황금색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배님! 이준이 무슨 죄라도 지었습니까?”
놀란 고원이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허, 내 목표는 저 녀석 하나다. 끼어들겠다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
신비한 남자는 한순간도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며칠 전, 그는 이준의 피에서 자신의 후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피의 힘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에게서 자신과 같은 기운이 느껴진단 말인가? 이는 저 하찮은 인간이 자신의 후손에게서 피의 힘을 빼앗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사내의 눈에서 감출 수 없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하, 이준, 고원! 이번에는 하늘이 네 놈들 편이 아닌가 보구나!”
이준을 바라보며 살기를 내뿜는 사내의 표정에 혼천제의 입에서 곧바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원의 낯빛이 다시 파랗게 변했다. 이준은 연합군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신의 사위였다.
만일 저 사내가 이준을 죽이려 든다면,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사내의 실력이 자신과 혼천제보다도 더욱 강하다는 것이었다.
“저 자를 막아라!”
고원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염신과 뇌영이 번개처럼 황금색 손에 붙잡힌 이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 역시 이번 전쟁에서 이준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
그러나 자금색 머리칼의 사내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치켜들자, 강렬한 음파가 터져 나오며 뇌영과 염신이 썩은 짚단처럼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네 목숨을 가져가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8성 투성인 염족과 뇌족의 족장을 쓰러뜨리는 사내의 압도적인 힘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쾅!
두 사람을 쓰러뜨린 사내는 곧바로 이준을 향해 살의가 가득 담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막 이준의 머리를 짓이기려는 찰나,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더니 이준의 몸을 감싼 채 번개처럼 달아났다.
“구색 이무기? 아직도 구색 이무기가 남아있단 말이냐?”
신비한 사내가 먼 하늘에서 나타난 구색구렁이를 바라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때, 저 멀리에서 눈부신 금빛이 폭발하더니 수백 미터에 달하는 금색 섬광이 신비한 남자를 향해 날아왔다.
섬광의 정체는 바로 이은의 불꽃인 ‘제왕의 금빛 화염’이었다.
펑!
하지만 사내가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자, 천지의 불꽃 중 네 번째에 이름을 올린 이은의 불꽃마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하찮군.”
사내는 이은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이준의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도망칠 수 없다.”
“가!”
그 순간, 이준이 번개 같은 동작으로 이은을 밀친 뒤 빠르게 인결을 맺었다.
인결이 완성되는 순간 그의 염력이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도 사내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준이 선택한 길은 바로 자폭이었다.
상대가 혼천제나 고원이었더라도 이준은 결코 이렇게 쉽게 자폭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혼천제나 고원보다도 강했고, 얼마나 더 강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그는 연합군보다는 혼족의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설령 그를 피해 달아나는데 성공한다 해도 자신이 없다면 결국 혼천제가 투제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가 투제가 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히고 혼천제가 투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황제단계의 영혼을 가진 자신이 자폭해 사내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뿐이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지만, 그것만이 혼천제가 투제가 되는 것을 막을 마지막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