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화. 1대 2
이준과 고원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먼 하늘에서 혼천제가 천천히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고원. 내가 투제가 되는 순간 나의 앞길을 막았던 자들은 단 한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고족의 피를 보존하고 싶다면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하지만 고원은 말없이 웃으며 손을 들어 고족의 강자들에게 공격을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이거 정말 아쉽게 되었군.”
고원의 반응에 혼천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눈부신 광단이 그의 저장반지에서 나와 머리 위로 떠올랐다.
광단 안에는 낯선 노인의 영혼이 들어있었다.
그 노인이 등장하는 순간, 마지 지진이 일어난 듯 천지의 에너지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령황제…….”
고원과 이준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어두워졌다. 이런 기세를 뿜어낼 수 있는 영혼이라면 투제인 태령황제 외에 달리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령황제의 옥을 사용해 태령황제의 영혼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인가…….”
고원이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쾅!
혼천제가 태령황제의 옥을 쥔 채 영혼의 힘을 폭발시키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먼지바람이 휘몰아쳤다.
가람 아카데미는 혼천제의 손짓 하나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대지가 무너져 내리며 지하에 감춰져 있던 용암 세계가 겉으로 드러났다.
새빨간 용암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는 온통 용암 바다가 되고 말았다.
“혼천제가 태령황제의 신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공격!”
고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뇌영과 염신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몸을 날렸고, 형형색색의 빛이 혼족의 대군을 향해 날아갔다.
“결진(結陣)!”
그 순간, 혼족의 진영에서 검은 안개가 퍼져 나오는 쇠사슬이 서로 교차하며 거대한 검은 그물을 만들어냈다.
펑펑펑!
눈부신 빛들이 끊이지 않고 쇠사슬 대진 위로 쏟아지면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검은 안개가 빠르게 옅어졌다.
흑각성에 남아있던 일부 강자들과 세력들은 이 광경을 보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용암바다가 되어버린 흑각성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들은 그제야 상대가 자신들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혼천제는 두 눈을 감은 채 용암지하 속에 숨겨진 신전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하!”
혼천제가 신전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고원은 곧장 혼족의 대군에게 돌진해 그들이 만들어 낸 쇠사슬을 모조리 끊어버렸다.
“끌끌, 고원. 내가 상대해주지!”
고원이 전선에 등장하자, 검은 안개를 뒤집어 쓴 허무대인이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뒤에는 죽음의 대진을 만들었던 노인 두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허무대인의 영혼이 황제단계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혼자 고원을 상대하는 것은 여전히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단계의 영혼이라니, 혼족이 너를 위해 공을 많이 들인 모양이구나.”
고원의 한마디에 허무대인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손을 들어 검은 화염을 폭발시켰다. 그와 동시에 두 노인 역시 전력을 다해 염력을 폭발시켰다.
“셋이서 날 막아보겠다는 것이냐?”
고원이 가볍게 손가락을 뻗자, 삽시간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두 노인 중 하나가 피를 토하며 날아가 버렸다.
“하!”
하지만 고원이 다시 공격하려는 순간, 검은 화염이 그의 염력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나에겐 만식의 힘도 소용없다.”
곧이어 강한 영혼의 힘이 섞인 염력이 고원의 몸에서 분출되며 검은 화염을 산산이 흩어버렸다.
허무의 불꽃을 분쇄한 고원의 주먹은 그대로 허무대인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다.
고원과 세 사람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사이, 남은 두 노인이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열한 놈. 죽음의 문을 내놓아라!”
“혼원천?”
눈앞에 나타난 두 노인의 얼굴을 본 이준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걸렸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이준에게 죽음의 문을 빼앗겼던 혼원천이었다.
“우리 혼족의 일을 망쳐놓다니, 오늘 반드시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혼원천은 독기가 잔뜩 오른 상태였다.
자신이 이준에게 죽음의 문을 빼앗기는 바람에 혼족의 대군이 후퇴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날의 실수로 인해 혼원천은 혼계로 돌아가 큰 처벌을 받아야만 했고, 이번 전쟁에서 그 때의 실수를 만회하지 못한다면 전쟁이 끝난 뒤 혼천제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도 몰랐다.
두 노인을 바라보는 이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8성 투성 강자 두 명을 붙인 것만 봐도 자신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혼족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7성 투성에 황제단계의 영혼까지, 실질적인 전투력으로 따진다면 8성 투성을 훨씬 뛰어넘은 이준을 쓰러뜨리는 것은 두 사람이라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준의 시선이 두 노인을 지나 흑각성의 하늘 위로 향했다.
하늘 위에서는 연합군과 혼족의 대군이 어지럽게 뒤엉켜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대지에서는 붉은 용암이 쉬지 않고 치솟고 있었다.
‘내가 이 두 사람을 붙잡고 있으면 연합군들도 한결 편해지겠군.’
이준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에도 하늘에서는 수백 개의 그림자가 떨어지며 용암에 녹아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죽어라!”
혼원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앞으로 뻗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검은 안개가 이준을 덮쳤다.
“날 너무 우습게 봤군.”
하지만 이준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분홍색 화염이 폭발하며 검은 안개를 깔끔히 불태워 버렸다.
“혼생천, 저 녀석을 죽여라!”
이준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자 위험을 느낀 혼원천은 황급히 혼생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신의 손가락!”
혼생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안개가 커다란 손가락으로 변해 허공을 가르며 이준에게 날아왔다.
“금강유리체!”
그 순간, 이준의 몸이 순식간에 수백 미터가 넘는 거인으로 변하고 피부에서 눈부신 금색 섬광이 터져 나오며 검은 손가락을 막아냈다.
“인화일체!”
뒤이어 천둥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이준의 몸이 빠르게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두 개의 신체강화 무투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의 힘이 황제단계에 이른 이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천의 주먹, 죽음의 광단, 황천의 손가락!”
이준의 엄청난 힘에 놀란 두 노인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이번에는 세 개의 1격 무투기가 연달아 펼쳐졌다.
“죽음의 비석!
그와 동시에 혼원천의 살갗을 뚫고 뿜어져 나온 죽음의 기운이 천 미터나 되는 비석으로 변했다.
세 개의 1격 무투기가 시커먼 비석위로 떨어지는 순간, 충돌로 인해 생겨난 거대한 에너지 파동에 의해 공간이 유리처럼 부서졌다.
연거푸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공격에 죽음의 기운이 빠르게 흩어지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비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쉭-
비석이 무너지기 무섭게 이준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이준이 혼원천을 향해 막 주먹을 내지르려는 찰나, 왼쪽에서 돌연 시커먼 돌기둥이 날아왔다.
쾅!
굉음이 울려 퍼지며 이준과 돌기둥이 반대편으로 튕겨나갔다. 한참을 뒤로 밀리고 나서야 멈춰선 이준의 목구멍에서는 비릿한 피냄새가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혼생천의 실력은 혼원천보다 조금 더 강했고, 혼원천과 싸우고 있는 와중에 협공을 해오니 이준의 실력으로도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혼원천의 손에서 어떻게 죽음의 문을 빼앗았나 했더니, 만만치 않은 녀석이구나.”
혼생천은 이준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힘을 합쳐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고!”
혼원천이 혼생천의 곁으로 날아오며 외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은 말없이 인결을 맺어 검은 색의 거대한 문을 불러냈다. 그가 사용한 것은 바로 혼원천에게 빼앗은 죽음의 문이었다.
“들어가라!”
죽음의 문을 소환한 이준이 두 손을 크게 휘두르자, 대문에서 강렬한 흡인력이 뿜어져 나와 두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감히 겁도 없이 꺼내드는구나!”
혼원천과 혼생천은 씩 웃으며 아무런 저항없이 죽음의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이준의 표정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두 사람이 죽음의 문을 되찾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 반응이었다.
* * *
잠시 후…….
죽음의 문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이준의 인결이 새겨진 영혼 바위를 찾으려던 그 때, 죽음의 문 안이 돌연 불바다로 변했다.
“안 돼. 어서 도망쳐!”
혼원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을 뒤덮은 정화의 불꽃이 거대한 화룡으로 변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황급히 염력으로 온 몸을 감싼 채 번개처럼 다시 죽음의 문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이 거대한 검은 석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환영이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구웅, 구웅, 구웅!
해일과도 같은 영혼음파가 연달아 터져 나오자, 두 노인은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뒤쪽으로 힘없이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죽어라! 더러운 혼족의 개들!”
곧이어 살기가 가득한 이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여섯 가지 색의 화염이 빠르게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허공에 열 개도 넘는 화염 연꽃이 피어났다.
“아, 안 돼!”
쾅!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죽음의 문 안에 있던 영혼 바위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무시무시한 영혼의 힘이 터져 나왔다.
이준의 영혼인결이 새겨진 바위가 부서지면서 죽음의 문 안에 존재하던 이공간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 찢어죽일 놈이! 죽음의 문을 없애버리다니!”
혼원천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죽음의 문을 손에 넣기 위해 수백 년을 바쳤는데, 새파랗게 어린 놈이 죽음의 문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완전히 없애버린 것이다.
* * *
광활한 용암 해역에 파도가 몰아치고, 수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소용돌이의 중심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하고도 신성한 파동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이준의 시선에는 불안과 공포가 가득했다.
태령황제의 신전 앞에서 봤던 그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 만일 그 괴물이 혼천제의 편에 선다면, 이 전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치익!
그때, 이준과 가까운 곳에 온 몸이 피로 물든 노인이 불쑥 나타났다.
“아직 안 죽었네?”
이준의 입가에는 함정에 빠진 짐승을 바라보는 사냥꾼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죽음의 문과 열 개도 넘는 화련의 폭발 속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이 조금 놀랍기는 했지만, 혼생천의 온 몸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의 손에 붙들려 간신히 살아나온 혼원천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넝마가 되어버린 혼생천은 독기 어린 눈으로 이준을 노려보다가 피를 한움큼 쏟아내고는 시체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 혼원천을 붙잡은 채 사력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준은 혼생천을 쫓아가지 않았다. 쉬지 않고 1격 무투기를 시전한데다가 연달아 열 개 이상의 화련을 만들어내느라 그 역시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태령황제의 신전이 곧 모습을 드러낼텐데, 이런 상황에서 이미 전투불능 상태가 된 두 사람의 숨통을 끊기 위해 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쏴아아!
용암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쏴아, 하는 소리가 하늘 전체에 메아리쳤다.
펑!
잠시 후, 하늘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세 개의 그림자가 고원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중 두 사람은 이미 온 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태였다.
애초부터 그들의 실력으로 고원을 막으려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허무대인……. 도저히 못 막겠습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창백해진 얼굴로 허무 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무 대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화염 역시 처음보다 크게 불안정해져 있었다.
허무 대인은 말없이 이를 악물고 두 사람과 함께 달아나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황제 단계의 영혼을 갖게 되면서 고원과 정면으로 맞붙어도 밀리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그였다. 하지만 실제로 고원과 맞붙어보니 밀리지 않기는커녕 두 8성 투성과 협공을 하고도 목숨을 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