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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803화 (803/818)

803화. 대전 임박

성운계.

거대한 석탑 위에 한 사내가 가만히 앉아 영혼의 힘을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었다.

구웅!

그때, 공간이 빠르게 일그러지더니 한 사람이 뒷짐을 진 채 그곳에서 걸어나왔다.

그를 보는 순간, 석탑에 앉아 있던 사내가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혼천제!”

“그때의 네 사람 중 이제 자네와 나 밖에 안 남았군. 세월이 참 빨라.”

혼천제는 고원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 두 사람의 죽음은 자네와 관련이 깊고 말이야.”

혼천제는 굳이 고원의 말을 부인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에게 협조한다면 투제가 된 후 꼭 보답하겠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꼬임에 넘어갈 고원이 아니었다.

“내가 승낙할 거라 생각하는가?”

“나에게 인정받기는 참 어려운 일인데, 아쉽게 됐군.”

그러나 혼천제 역시 고원이 그런 답을 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왜 투제 강자들이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는지 아는가?”

혼천제의 물음에 고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투제가 되면 그 해답을 알게 되겠지.”

혼천제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은가?”

고원이 살기로 눈을 빛내며 외쳤다.

그러나 혼천제는 그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태령황제의 신전이 흑각성에 있는 모양이지?”

고원의 질문에 혼천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역시 알고 있군.”

그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고원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무언가 확신이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부인해봤자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자네 편이 아닌 것 같군.”

고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어지는 고원의 말에 혼천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상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설마 이번에도 그 이준이라는 놈인가?”

고원은 씩 웃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말 골치 아픈 녀석이군.”

혼천제가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몰락한 이족의 후예 하나가 이렇게 매번 혼족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녀석을 얕봤다간 아주 크게 다칠 것이다.”

고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이현보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보다 더 그릇이 큰 녀석이니 말이야.”

“뭐?”

혼천제의 눈썹이 들썩였다.

“큭큭, 확실히 우리 넷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이현이었지. 하지만 그놈도 내 손에 죽었어. 그놈의 후손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내가 흑각성에서 그 사실을 증명해주지.”

혼천제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아 빠르게 사라졌다.

말없이 혼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원이 곧바로 성운계에 있는 의사당으로 날아가 뇌영 등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모든 연합군은 즉시 흑각성으로 향하라. 이번엔 반드시 혼족을 막아야 한다!”

* * *

가람 아카데미.

기다란 가로수 길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십대 특유의 생기를 가득 머금은 채 오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곧 들이닥칠 거대한 전쟁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듯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이준은 하늘 높이 뻗은 나무 위에 누워 모처럼 달콤한 휴식을 갖고 있었다. 양팔로 자신의 머리를 받친 채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세월 참 빠르네…….”

가람 아카데미에서 수련하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아직도 눈에 선한데, 자신은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었다.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야.”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유달리 긴 다리를 가진 여자 하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 예쁘네.”

이준의 한마디에 이옥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째 십년이 넘도록 놀리는 방법이 변하질 않네.”

하지만 이준은 그저 빙긋 웃으며 다시 하늘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조용한 분위기가 좋았다.

아버지가 납치된 그 날 이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어본 날이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수련하는 것만이 혼족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당하면 이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언제나 그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이번 싸움은 아마도 혼족과의 기나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결전을 앞둔 이준의 마음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준이 또다시 말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눈을 감았을 때, 이옥이 들릴락말락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응? 고마울 일이 있었나?”

갑작스런 감사 표시에 이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이씨 가문에서는 후배든 선배든 다 너를 신처럼 생각하고 있어. 누가 뭐라 해도 멸족을 당할 뻔한 이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건 너니까.”

“흐음……. 신이라……. 쓰레기에서 신이라니, 너무 띄워주는거 아냐?”

“소심하긴, 어릴 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야?”

이옥이 이준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시덥잖은 농담을 몇 분 정도 더 주고받은 뒤, 이준은 이옥의 입을 통해 자신이 중주에 있는 동안 이씨 가문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혁과 이안은 몇 년 전에 가한제국으로 돌아갔어. 지금은 가한제국에서 꽤 주목받는 젊은 강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몇 년 전에 족장 선거가 있었어. 근데 모두 투표 종이에 네 이름을 적어서 내는 바람에 장로님들이 참 난처해지셨지. 가한제국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말이야.”

“…….”

혼자서 한참을 떠들던 이옥이 옆을 돌아보자, 이준은 어느새 두 눈을 꼭 감은 채 아기처럼 곤히 잠들어있었다.

세상 모르고 잠든 이준을 바라보던 이옥은 긴 한숨을 내쉬다가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문 사람들도 네가 이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알고 있어. 지금 가문의 어린 녀석들이 모두 너에게 힘이 되어주겠다고 밤낮없이 수련에 열중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며 나뭇잎이 흔들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지금은 푹 쉬어. 곧 큰 싸움이…….”

이옥이 잠든 이준을 바라보며 계속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돌연 날카로운 영혼의 힘이 솟구치며 감겨있던 이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놈들이 왔어.”

이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이옥의 시선이 빠르게 하늘로 향했다.

“너무 빠른데.”

이옥이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녀 역시 이준이 말한 ‘놈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대장로님께 학생들을 대피시키라고 전해줘.”

“응.”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옥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이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고마워, 누나.”

‘누나’라는 두 글자에 이옥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준과 마주치면 매일 같이 싸우기만 했으니, 그가 자신을 누나라고 부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하, 착한 동생. 누나가 지켜보고 있을게.”

이옥은 이준을 향해 씨익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대장로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뒷짐을 진 채 멀어지는 이옥을 바라보던 이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제 정말 마지막 싸움인가…….’

쉭쉭!

잠시 후, 이준의 곁으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그림자들이 날아왔다. 이은, 채린을 비롯해 이준과 함께 온 연합군의 강자들이었다.

“혼족 놈들이 온 거야?”

두 여자가 하늘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돌려 아카데미의 광장을 바라봤다.

광장에서는 장로와 선생들의 지휘 아래에 학생들이 일사분란하게 모여들어 대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 조심해야 해.”

이준이 이은과 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오라버니도요.”

채린과 이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공간을 가르고 광장 위로 날아간 뒤 팔을 휘둘러 거대한 공간 통로를 만들어냈다. 바로 천상무덤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대장로님, 이 안에 있는 에너지체들에게 미리 말을 해두었으니 학생들이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누구도 아이들을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이준이 서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다.”

이준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넨 서천우는 곧바로 학생들과 함께 천상 무덤으로 통하는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모든 학생들을 천상 무덤 안으로 대피시킨 이준은 곧바로 다시 하늘 위로 올라가 먼 곳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하늘 끝에서는 검은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연합군도 도착했군.”

북쪽 하늘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허공을 가르며 가람 아카데미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남쪽과 북쪽에서 수백, 수천의 강자가 날아오는 것을 바라보는 이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혼족,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내주마.”

화창하던 하늘에 갑자기 밤이 찾아온 듯 검은 구름이 내려앉았다.

이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흑각성에는 여전히 많은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중주의 강자들에 비하면 흑각성의 무법자들의 실력은 하찮기 짝이 없었지만, 그들 최악의 무법지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이니만큼 적이 몰려온다고 곧바로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달아나지는 않았다.

물론 이준이 보기에 이는 지극히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떠나라고 종용할 생각은 없었다.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그들이 스스로 치를 것이고, 자신이 그것까지 책임져 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 * *

흑각성의 하늘을 가득 뒤덮은 혼족의 강자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당연히 혼족의 족장, 혼천제였다.

혼천제의 곁에는 허무대인이 서있었고, 다시 그 뒤로는 죽음의 대진을 만들어 모든 고대 세력들을 없애려했던 혼족의 네 선조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준이 혼족의 진영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아카데미 상공에 연합군의 강자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네 말대로 흑각성에 태령황제의 신전이 있나보구나.”

고원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합군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강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혼족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3대 고대 세력과 천부연맹의 강자들까지, 지금 연합군의 전력은 혼족을 상대로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길 정도의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 고대세력들의 힘을 모조리 모아왔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준을 본 고원이 웃으며 말했다.

뇌영이 말했다.

“이번에 지면 돌이킬 수 없으니 모든 강자들을 이끌고 왔다.”

염신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혼천제가 투제가 되면 모두가 힘을 합쳐도 막을 방법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모든 세력이 온 힘을 다해 혼족과의 전쟁에 임해야 했다.

“아, 참. 용암 세계에 가봤는데 거기에 태령황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보다 더 강한 괴물이 지키고 있으니, 혼천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신과 혼천제보다 강한 실력을 가진 괴물이라니, 고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준을 바라봤다.

“인간이 아닌 생물이 9성 투성이라니…….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구나. 아마도 나와 혼천제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생물인 것 같다.”

고원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태령황제의 신전을 지키는 수호자라면 그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것이니 현 시대 투기 대륙의 최강자 두 사람보다 강하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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