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화. 신비생물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이준은 영혼의 힘을 이용해 앞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정화의 불꽃을 소환해 앞에 있는 용암을 손으로 만져보자,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의 힘이 느껴졌다.
‘용암지하에 숨겨진 공간이 있었구나.’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엄청난 공간의 힘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바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 공간은 혼천제와 고원 같은 인물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태령황제! 과연 투제는 다르구나!’
이준은 이 공간을 만든 것이 마지막 투제인 태령황제임을 확신했다.
만 년 동안 이런 능력을 지닐 수 있었던 사람이 투제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잠시 머뭇거리다 발을 앞으로 내딛자, 그의 몸이 그대로 용암지하 속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쉭-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한 텅 빈 공간이었다.
이준은 말없이 그 텅 빈 공간을 천천히 훑어보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이준의 눈에 반짝이는 광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광단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광단과 점차 가까워지면서 그 형체가 점점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광단의 정체는 바로 수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문이었다.
석문은 이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리고 석문 앞에는 아주 거대한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석문과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선 이준은 넋을 놓은 채 이 신기한 광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석문의 꼭대기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필체로 무언가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글을 읽는 순간 이준의 눈동자가 바늘구멍처럼 작아졌다.
“태령황제 신전! 드디어 찾았어!”
하지만 태령황제의 신전을 발견했다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 이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이준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지만 주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이준이 영혼의 힘을 퍼뜨리려는 순간, 광장 한가운데서 돌연 거대한 불기둥이 폭발했다.
“이건…….”
눈부신 불빛이 어두운 공간을 밝게 비추는 순간, 이준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기가 드는 것을 느꼈다. 그 공포의 근원지는 바로 거대한 불기둥과 함께 나타난 정체불명의 생물 때문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 생물은 이 텅 빈 공간에서 미동조차 없이 잠들어 있었다. 이준의 시선이 그의 몸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지만, 도저히 그 생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신비한 생물의 몸은 자금색을 띠고 있었고, 온몸을 뒤덮은 차가운 비늘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생물체의 크기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이렇게 거대한 것은 온갖 신비한 일을 겪어 온 이준조차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이 조용한 공간에 이런 무시무시한 생물체가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꿀꺽.’
이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이마에서는 어느새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거대한 생물체를 관찰했지만 정체가 무엇인지 도통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되겠어.’
이곳에 태령황제의 신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준은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생물체는 마치 시체처럼 미동조차 없었지만, 이것이 깨어나는 순간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공포가 이준의 온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이준이 막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거대한 생물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이준의 예리한 감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조금 전 그 움직임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서, 설마……. 깨어나려는 건가.’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이준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어두운 공간 속에서 굳게 닫혀있던 눈동자 두 개가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옅은 홍색으로 뒤덮인 눈동자는 이준의 몸보다 수백 배는 더 거대했다.
괴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이 빳빳하게 굳는 것이 느껴지며 이준의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영혼의 힘이 황제단계에 달하지 않았다면 놈과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을 것이다.
“그대여……. 황제의 옥은?”
괴물이 입을 여는 순간, 사방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거대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생물체의 눈동자는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물러나겠습니다.”
겁에 질린 이준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옥패가 없단 말인가?”
열쇠가 없다는 말에 이준을 바라보는 괴물의 눈빛에서 실망한 기색과 함께 차가운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젠장!’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이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뼈날개를 펼쳐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없으면, 죽어야지.”
그러나 이준이 몸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자금색 빛기둥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쾅!
다음 순간, 자금색 빛기둥과 거대한 영혼의 힘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며 거대한 굉음이 공간 전체를 집어삼켰다.
구웅! 구웅!
하지만 황천의 분노로도 빛기둥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당황한 이준은 황급히 다시 인결을 맺어 연달아 두 번 황천의 분노를 시전했다.
펑펑!
영혼의 파동이 다시 한번 빛기둥을 강타하자 자금색의 빛기둥이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졌지만, 그 여파로 인해 이준의 몸 역시 수백 미터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었건만, 괴물이 가볍게 날린 공격 한번을 막아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놈의 실력은 혼천제나 고원보다도 몇 수는 위였다.
“황제단계의 영혼이구나.”
괴물의 목소리에서 다소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이준은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바깥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쉭!
하지만 이준이 채 백미터도 가지 못했을 때, 그의 눈앞에서 공포스러운 자금색 빛기둥이 터져 나왔다.
“망할!”
그와 동시에 여섯 개의 화련이 솟아나 빛기둥을 막아냈다.
쾅쾅!
화련이 폭발을 일으키며 공간 전체가 불바다로 변했지만, 자금색의 기둥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다시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련조차 먹히지 않자, 이준은 곧바로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투기를 시전했다.
곧이어 그의 손이 춤을 추듯 인결을 그리더니 온몸에 아름다운 분홍색 결정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자금색의 빛기둥과 맞닿기 무섭게 8성 투성의 공격마저 무리없이 막아내던 분홍색 수정체가 힘없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푸흡!”
이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변하면서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다시 용암 바다를 향해 달아났다.
“쯧쯧, 황제단계 영혼일지라도 7성 투성의 실력으로 내 손을 빠져나가긴 힘들 것이다.”
이준이 어두운 공간의 끝에 다다랐을 때, 지금까지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란 빛기둥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때, 괴물이 뿜어낸 자금색의 빛기둥 위에 이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닿았다.
구우웅!
금빛 혈액과 빛기둥이 닿는 순간, 익숙한 기운이 전해지며 괴물의 몸이 강하게 뒤흔들렸다.
구웅!
그 순간, 이준을 향해 달려들던 거대한 빛기둥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다.
목숨을 걸고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볼 심산으로 염력을 끌어올리고 있던 이준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잠시 망설이다가 황급히 몸을 돌려 용암 바다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거대한 괴물은 이준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자신의 빛기둥에 닿은 금색의 핏방울만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피에서……. 아이의 맛이 나는구나.”
조용한 공간에 천지를 뒤흔들 만큼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천 년 동안 암흑 속을 지배하고 있던 거대한 몸뚱이가 공간 위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괴물의 몸이 어두운 공간의 끝자락에 닿기 무섭게 영롱한 빛이 터져 나오며 놈이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막았다.
“태령황제, 이 개 같은!”
괴물은 오래된 석문을 노려보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의 몸은 한 치도 그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 * *
펑!
천계의 탑 지하.
용암세계로 통하는 통로 안에서 용암이 솟구쳐 오르더니 한 청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오라버니!”
이은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황급히 달려갔다.
“괜찮아.”
이준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용암통로를 쳐다봤다. 용암 지하에 이렇게 무서운 생물이 존재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슨 일인가!”
서천우, 장천수 역시 화들짝 놀라 이준에게로 달려왔다.
7성 투성에 황제단계의 영혼의 힘을 가진 이준이 이렇게 황급히 달아날 정도라면, 용암 바다의 지하에는 대체 무엇이 존재한단 말인가?
“장 선생님. 고원 족장님께 그 소문, 사실이라고 알려주세요.”
이준의 말에 장천수는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끄덕인 뒤 황급히 몸을 돌려 탑 밖으로 빠져나갔다.
“태령 황제의 신전이 정말 용암지하에 있는 거야?”
채린 역시 놀란 눈으로 용암통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도 한참을 이 안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응.”
이준은 용암 지하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 용암지하 속에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며, 그 안에 고원, 혼천제를 능가하는 엄청난 괴물이 살고 있다는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셔버렸다.
“그래도 놈은 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야. 만일 그 괴물이 나를 쫓아 바깥으로 나왔다면……. 가람 아카데미는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거야.”
이준은 조금 전의 일을 회상하며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연합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혼족이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정말 모든 게 끝장이야.”
이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괴물이 지키고 있는 이상 태령황제의 옥 없이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태령황제의 옥을 가진 혼천제가 그곳에 도착한다면, 그 거대한 괴물이 혼족의 편을 들지도 몰랐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혼족이 아예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말이다.
* * *
혼계, 대전 안.
“임무 실패라니?”
혼천제가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예……. 혼유가 흑각성에 도착하자마자 이준이 나타나 저희 혼족의 강자들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바닥에 엎드린 사람이 온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답했다.
“이준이 어떻게 알고 그곳에 온 것이지?”
“족장님. 이준은 흑각성에 있는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이었습니다. 이번에 아카데미가 위험해지자 이준에게 도움을 요청해 찾아온 것뿐이지, 저희의 목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흥, 그건 확신할 수 없지. 게다가 놈이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그렇게 빨리 올 수 있었던 거지?”
허무대인의 질문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던 혼유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네 말은, 이준이 태령황제의 신전이 흑각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허무대인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혼천제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글쎄, 확신할 수는 없지. 하지만 놈이 한때 그곳에서 머물렀다고 하니 그때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허무대인의 눈에서 검은 화염이 치솟았다.
“놈이 신전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그곳을 지키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좋지 않은 소식이야.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겠네.”
“그렇군. 빨리 끝내는 게 좋겠어.”
혼천제 역시 허무대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허무대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고원이 직접 혼계를 감시하고 있으니, 그의 눈을 피해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북 지역에 혼계와 연결된 공간통로를 설치해뒀네. 그때 자네가 흑각성으로 출동하게. 고원은 내가 막지.”
혼천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답했다.
“태령황제의 신전에 있는 황제비약만 손에 넣으면 저들도 우릴 막을 순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