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화. 용암세계로
그렇게 이준이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먼 하늘에서 채린을 선두로 천부 연맹의 강자들이 날아왔다.
“다른 곳에 있던 혼족의 잔당들도 전부 처리했어.”
채린이 말했다.
서천우는 이준과 함께 온 사람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자신이 평생 꿈에 그리던 경지인 투성에 오른 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습니다.”
서천우의 질문에 이준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대피시키거라. 이 흑각성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장천수가 말했다.
사실 장천수도 태령황제의 신전이 지하용암세계에 있을 것이라는 이준의 추측을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웠다. 구름불꽃을 봉인할 때 그 역시 용암세계에 갔었지만, 그 아래에서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학생을 갑자기 어디로 대피시키란 말이십니까? 아이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지켜줄 사람도 없습니다.”
서천우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문제없습니다. 모두 천상무덤에 숨어있으면 되니까요.”
그러자 이준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들어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장로들에게 학생들을 맡긴 서천우는 지체없이 아카데미의 의사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의사당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간략한 소개를 마친 뒤 자리에 앉았다.
“흑각성에 있는 많은 세력들이 이미 혼전에게 당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복수를 해주기는 했지만요.”
이준의 말에 서천우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비죽 솟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검은 군단의 실력으로 봤을 때, 흑각성 전체를 피바다로 만드는 것쯤은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 것 같았다.
“흑각성은 그들과 원한이 없을 텐데?”
서천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혼전은 중주의 세력이다. 중주와 왕래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까지 찾아와 난리를 피울 이유가 없었다.
서천우의 물음에 장천수가 그동안 중주에서 발생했던 일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당연히 그중에는 연합군과 혼족간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십수 년 만에 이렇게 멋지게 성장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서천우가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이곳을 떠날 때만 해도 고작 투황에 불과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투기대륙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세력과 당당하게 맞서고 있으니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원장님의 말씀은 흑강성이 이런 위기에 처한 것이 아카데미 밑에 위치한 그 용암세계 때문이라는 겁니까?”
천로와 백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마 그 용암세계 끝에 혼족이 원하는 물건이 있을 것이네.”
장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혼족 놈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흑각성에 사는 개미 한 마리조차 남기지 않고 죽일 수 있는 놈들이다.”
“이번에 온 자들은 정찰대에 불과합니다. 아마 머지않아 혼족의 본대가 쳐들어올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서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중주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에 투기대륙 최강 세력이 쳐들어올 것이라니,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오늘 자네들이 오지 않았다면 흑각성은 이미 피바다가 되고 말았겠군.”
서천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희 연합군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있는 이상 혼족도 함부로 가람 아카데미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이준이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카데미는 괜찮다. 사람이 무사해야지.”
서천우는 고개를 저으며 이준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드디어 어엿한 강자가 되었구나.”
“대장로님이 가르쳐주신 은혜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준의 말투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때 서천우가 이준을 많이 챙겨주었다. 그때의 이준은 그저 가한제국에서 쫓겨난 몰락한 가문의 힘없는 소년일 뿐이었다.
“허허, 자네가 우리 아카데미에 왔으니 난 의무를 다한 것이다.”
“허허. 이제는 족장과 마주 앉아 대화도 나눌 수 있다니,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어버렸어.”
곁에 있던 장천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준은 미소로 대답한 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당분간 조심하십시오. 혼족 강자가 출몰하는 순간 경보를 울리시면 연합군의 부대가 곧바로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그럼 오라버니는요?”
이은이 물었다.
“난 용암세계에 다녀올게.”
이준이 짤막하게 답했다. 용암세계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했다.
용암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에 서천우 등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이준의 실력을 생각하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용암세계는 베일에 싸여있는 곳이지만 지금의 이준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무사하게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오라버니. 같이 갈까요?”
이은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부족해. 아카데미를 지켜줘. 걱정 마.”
하지만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이은을 안심시켰다.
이준의 결연한 태도에 이은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요.”
이준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서천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계의 탑 1층.
이준이 용암세계의 입구에 도착하자, 무형의 화염이 모여 커다란 불길이 되었다.
“하하, 그 사이에 구름 불꽃도 많이 컸네.”
이준은 손에 있는 무형의 화염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허허, 구름 불꽃의 힘을 키우느라 애를 좀 먹었지.”
서천우가 웃으며 말했다. 구름불꽃은 가람 아카데미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였으니 작아진 불꽃을 다시 키우느라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했다.
이준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손에서 활활 타오르던 구름불꽃이 멀리 날아갔다.
“여기서 기다려.”
이준이 이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준은 이은의 진심 어린 걱정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곧바로 통로 안에 있는 용암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온 용암세계는 여전히 붉은빛으로 가득했다.
이준은 용암 위쪽에서 통로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골짜기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열심히 수련하던 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이 밑에 대체 뭐가 있는지 봐야겠어!’
곧이어 이준의 몸에서 정화의 불꽃이 솟아오르더니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용암이 곳곳으로 튀어 올랐다.
치익!
이준은 엄청난 속도로 용암 바다의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정화의 불꽃 덕에 주위에 있던 용암이 전부 증발하면서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용암 바다에 들어간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희미한 기운이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졌다.
‘용암괴물인가.’
이준이 가볍게 발을 구르자, 강한 영혼파동이 용암을 마구 헤집으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치익!
용암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새빨간 형체들이 사방을 빼곡하게 메운 채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은 도마뱀처럼 생긴 용암생물들을 천천히 훑어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곳에는 하얀색을 띤 도마뱀 인간 두 명이 있었다.
다른 도마뱀 인간보다 훨씬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 두 사람은 실력은 무려 반투성에 달했다.
‘천화존자님이 여기서 죽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도마뱀 인간들 때문이었구나.’
이준도 지금 정도의 실력이 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주먹 한 방에 천화존자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곳은 신의 무덤이다. 인간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수호자가 깨어나 널 죽일 것이다!”
그때, 도마뱀 인간 중 한 사람이 인간의 언어로 경고의 말을 던졌다.
‘신의 무덤? 수호자?’
두 단어를 듣는 순간, 이준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이준은 양팔로 가슴을 안은 채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싼 기괴한 생물을 바라보았다.
“그 수호자는 어떤 괴물이지?”
“인간, 당장 떠나라. 아니면 널 죽이겠다!”
새하얀 화염으로 만들어진 도마뱀 인간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서툰 말투로 다시 한번 경고를 보냈다.
순간 주위에 있던 도마뱀 인간들의 눈빛이 더욱 흉폭하게 변하더니 그들의 비늘이 빠르게 어두운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준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과거의 이준이었다면 혼비백산해 도망을 쳤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주위의 용암 괴물들은 물론이고 반투성 둘도 그저 우스운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게는 안 되겠어. 오늘 이 밑에 뭐가 있는지 꼭 확인해야겠거든.”
여유 넘치는 웃음소리가 용암세계에 울려퍼지자, 무시무시한 영혼의 힘이 이준의 미간에서부터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웅!
곧이어 용암 전체가 강하게 떨리면서 우웅, 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그 순간, 불길함을 느낀 하얀 도마뱀 인간 두 명이 입을 열기도 전에 눈앞에 있던 용암이 폭발하며 엄청난 파동이 두 사람을 덮쳤다.
펑!!
두 도마뱀 인간은 놀랄 틈도 없이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꺼져라!”
우레와 같은 고함소리가 이준의 입에서 터져 나오며 영혼파동으로 인해 끝을 모를 용암바다 전체가 거칠게 출렁였다.
펑펑펑!
수많은 도마뱀 인간들이 그대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이준은 누구 하나 죽이지 않았다.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칫 저들을 죽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이곳은 투기대륙의 마지막 투제 강자가 남겨둔 곳이 아닌가.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용암지하는 이준의 등장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괴물들은 모두 깜짝 놀라 멀리 달아난 뒤 겁에 질린 얼굴로 멀리서 이준을 지켜보았다.
“신의 무덤에 쳐들어오다니.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새하얀 도마뱀 인간이 피를 꿀꺽 삼키며 소리쳤다.
그들의 협박에 이준은 마음속으로 확신이 들었다. 이 녀석들이 말하는 ‘신의 무덤’은 아마 태령황제의 신전일 것이다.
이준은 말없이 발밑에 펼쳐진 거무스름한 용암을 바라보았다. 이곳 끝에 무서운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길…….’
이준은 단숨에 용암 지하 밑으로 헤엄쳐 내려갔다.
도마뱀 인간들은 결국 이준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들의 실력으로 이준을 막아서봤자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멍청한 인간, 제 발로 저승으로 걸어 들어가는구나!”
새하얀 도마뱀 인간은 분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는 용암 속에 섞여 멀리 사라졌다.
* * *
괴생명체의 방해에서 벗어난 이준은 더욱 속도를 높였지만 아무리 가도 눈앞에는 새빨간 용암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밑에 투제가 될 수 있는 비밀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분명 끝은 있을 거야.”
그렇게 바닥으로 내려가기를 한참, 주위의 용암이 적홍색에서 적흑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용암의 색깔이 바뀌면서 마치 용암 속에 이상한 에너지라도 있는 것처럼 이준의 속도도 훨씬 느려졌다.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정화의 불꽃이 가진 정화의 힘으로도 쉽게 정화시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