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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799화 (799/818)

799화. 흑각성의 난

넓은 정원. 이준은 이솔과 장난 치고 있는 이한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같은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이솔은 그 사이 할아버지와 퍽 가까워져 있었다.

“스승님. 혼족은 아직 소식이 없나요?”

이준이 고개를 돌려 석정 안에 앉아있는 약로에게 묻자 곁에있던 이은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혼계를 감시하는 동안 한 번도 큰 움직임이 없었대요. 소수의 사람들이 외부로 나가거나 혼계로 돌아오고는 있지만…….”

이은의 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이면 태령황제의 열쇠를 완성했을 텐데, 어째서 움직임이 없단 말인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혼족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약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이준의 눈에 익숙한 두 개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큰 형님, 둘째 형님.”

그 두 사람은 바로 얼마 전 중주에 도착한 이정과 이찬이었다.

그 사이 이준은 이정의 다리를 치료해줬다.

중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두 다리 모두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절뚝거리기는 해도 자신의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적응이 된다면 이제 완전히 예전처럼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 녀석이 왜 불의 연맹을 전혀 신경 쓰지 않나 했더니, 중주에 더 대단한 연맹을 만들어뒀구나.”

이정이 웃으며 말했다.

이준은 무언가를 관리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불의 연맹을 만들었던 건 그가 떠나고도 이씨 가문을 지켜줄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중주에 천부연맹을 세운 것은 혼족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런 일들이 아니라면 연맹의 ‘연’자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불의 연맹은 잘 돌아가죠? 안 좋은 일은 없고요?”

“응. 중주에 비하면 완전 시골이잖아. 불의 연맹은 지금 대륙 서북부 지역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어. 물론 우리 연맹을 호시탐탐 노리는 녀석들도 있지만 말이야.”

“아, 참.”

그때, 이찬이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흑각성에서 소식이 왔다. 정체불명의 강자들이 나타난 것 같다는데, 혼전 놈들과 비슷한 차림이라 하더군.”

“혼전의 잔당이겠죠. 중주 밖에도 혼전의 분전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중주에 있는 분전만큼 중요한 곳은 아니에요.”

이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분전이 속속 무너지며 혼전의 잔당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그저 그들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그 녀석들은 흑각성의 내 수하들과 가람 아카데미 사람들에게 처리하라고 기별을 보낼게.”

바로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어떤 장소 하나가 번쩍 스쳐 지나갔다.

“가람 아카데미……. 지하용암세계!”

갑자기 큰소리가 들리자, 정원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 이준에게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야?”

채린이 물었다.

이준은 잔뜩 들뜬 얼굴로 채린의 손목을 낚아채며 물었다.

“천계의 탑 밑에 있는 지하용암세계 기억나?”

“용암세계? 갑자기 그곳은 왜?”

구름 불꽃을 흡수하기 위해 아카데미의 지하에 위치한 용암호수에 머물렀을 때, 태령황제의 옥이 빛나던 것이 이준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이준은 그곳에 살던 기괴한 생물에게 쫓기느라 제대로 확인조차 해보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하지만 세상 어디를 가도 태령 황제의 옥이 반응을 보인 곳은 그 곳이 유일했다.

“스승님, 연합군 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투성 강자 열 명을 즉시 소집해 주십시오. 이은과 채린, 너희도 같이 가자.”

이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린을 두고 다급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 어디 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 역시 놀란 눈으로 이준을 쳐다봤다. 늘 차분한 이준의 성정상 이런 표정을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가람 아카데미로 가야 해요. 그곳에 태령황제의 신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약로 등의 낯빛이 빠르게 바뀌었다.

“알았다.”

약로 역시 지체하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연합군 전체가 움직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순 없으니 계속 혼족을 감시 주십시오. 혼족 강자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저희도 곧장 흑각성으로 가야합니다.”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채린, 이은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세 사람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약로 역시 빠르게 몸을 돌려 의사당으로 향했다.

* * *

혼계.

검은 화염이 피어오르는 대전의 수위(首位)에는 혼천제가 가만히 앉아 바닥에 엎드려있는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식은?”

“보고 드립니다. 그 동안 명하신 곳과 비슷한 곳을 총 다섯 군데 발견했습니다. 그 다섯 곳을 면밀히 탐측한 결과, 가장 비슷한 장소 한 곳을 확정했습니다.”

흑색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말하라.”

혼천제의 차가운 두 눈이 반짝거렸다.

“흑각성이라는 곳입니다. 지금은 여러 세력들이 빽빽하게 채우고 있지만, 대체적인 지형은 말씀하신 것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흑각성이라…….”

혼천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안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곳과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장로가 누구지?”

“혼유 장로가 중주 외 지역의 총 책임자입니다.”

“중주 밖에 있는 모든 인원을 동원해 흑각성을 쓸어버리라고 전하라.”

혼천제의 말에 바닥에 엎드려있던 노인은 공손히 인사를 한 후 뒤로 물러났다.

“예!”

“태령황제의 신전……. 드디어 찾았구나!”

* * *

흑각성 외곽.

기다란 산길을 따라 흑색 의복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열을 맞춰 걸어가고 있다. 그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산길 끝에 위치한 거대한 문 앞이었다.

“어디서 온 녀석들이냐? 이곳이 흑각성이라는 것을 알고 돌아다니는 것이냐!”

문을 지키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흉흉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여길 지나가면 흑각성인가?”

가장 앞에 서있던 노인이 말했다.

“허, 이곳이 어디인 줄 알면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돌아다녔단 말이야?”

우두머리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소리쳤다.

“맞는 것 같군.”

그의 말에 흑색 의복 군단의 우두머리가 씩 웃으며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라.”

“예!”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그림자가 문을 지키던 투사들을 휩쓸고 지나가며 사방으로 피안개가 흩뿌려졌고, 거대한 산문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습격이다!”

그 순간, 강한 폭발음이 산 전체를 뒤흔들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제각기 손에 들린 무기를 마구 휘둘러댔다.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단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시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전부 죽여라. 당장 다른 부대들을 소환해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모두 쓸어버려.”

검은 옷의 무리를 이끄는 사내는 그 말만을 남기고 곧바로 검은 안개와 함께 흑각성의 더욱 깊은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오늘은 가람 아카데미에 신입생 환영식과 재학생 승급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에 아카데미 내에서는 전통에 따라 성대한 행사가 개최되었고, 아카데미 전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빠져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크고 작은 연무대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서는 젊은 투사들이 각자의 재능을 뽐내며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연무대 중앙에는 노인과 청년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조각 석상 두 개가 높이 서있었다.

청년의 모습을 한 석상은 이곳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석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언제나 궁금해 했다.

“선배님. 저 석상 중에 한 사람은 원장님일 거고, 저 사람은 누구예요?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데?”

활력이 넘치는 소녀들이 수려한 외모의 여자를 둘러싼 채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사람은 가람 아카데미가 낳은 최고의 천재지. 너희가 이렇게 편하게 흑각성을 통과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저 사람이 만든 세력 덕분이야. 예전에는 매년 신입생이 들어올 때마다 흑각성에서 목숨을 잃곤 했지.”

소녀들 사이에 둘러싸인 여자가 거대한 석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되게 대단한 사람처럼 들리네요. 그럼 저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한 소녀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미 가람 아카데미를 떠났어. 한 장로님 말씀으로는 중주에 갔다고 하더라. 투기대륙 최고의 강자들이 있다는 그 곳 말이야.”

한편, 서천우 대장로는 높은 석대 위에서 활기로 가득한 광장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준 그 녀석은 어떻게 컸으려나. 그 녀석이라면 중주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릴 수 있을 터인데…….”

서천우가 석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람 아카데미에서는 오랜 시간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냈지만, 이준과 비교하자면 누구 하나 빼어나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대장로님.”

그때, 누군가가 서천우에게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돌리자, 사내 하나와 여인 둘이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두 여인 중 하나는 유독 새하얀 피부에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 옷을 입은 채 기다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땋아 묶고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은 커다란 검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차가운 얼굴의 사내였다.

사내의 등에 걸려있는 커다란 검에서는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세 사람은 바로 이옥, 윤영, 그리고 오하늘이었다.

세 사람은 현재 가람 아카데미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옥만 해도 2년 전에 투종이 되었고, 윤영과 오하늘은 투존을 눈앞에 둔 투종 최고급 수준의 강자가 되어 있었다.

“저 녀석이 또 보고 싶으세요?”

윤영이 못 마땅한 듯 입을 비죽이며 물었다.

“이제 저도 저 녀석 못지 않게 강해졌다니까요?”

윤영의 말에 이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준은 십년 전에 이미 투존에게 덤볐어. 이제 겨우 투종 최고급 수준이 됐으면서 무슨.”

이옥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석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선 윤영 못지않게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꾸 이준 편들래? 어차피 그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윤영이 성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툴툴댔다.

“다 크고도 어찌 그때와 다를 게 없느냐.”

서천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떠들썩하던 광장이 순간 조용해지더니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현재 서천우는 가람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원장인 장천수는 도통 돌아오질 않으니, 일부 장로들은 그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러…….”

자리에서 일어난 서천우는 광장에 모인 앳된 얼굴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여는 순간, 하늘 끝에서 강한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피 냄새와 역겨운 썩은 내가 코끝을 찔렀다.

“오하늘.”

서천우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들은 모두 경계 태세에 돌입하라!”

살기를 느낀 오하늘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학생들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온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며 섬뜩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림자들이 속속 가람 아카데미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가람 아카데미에 축제가 있는 날입니다. 외부인을 들이기 어려우니 돌아가시지요.”

서천우가 하늘에 나타난 검은 형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의 몸에서 전해지는 강한 피비린내에 산전수전 다 겪은 서천우 대장로마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제?”

서천우의 말에 선두에 있던 노인이 씩 웃으며 망토를 천천히 걷었다. 메마른 얼굴을 밖으로 드러낸 노인은 서천우를 내려다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사람들을 흑각성에서 내보내라. 2시간이면 충분하겠느냐?”

“갑자기 나타나 이게 무슨 행패요?”

서천우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상대방의 실력을 확실하게 알 수만 있다면 말 대신 주먹이 나갔을 테지만, 그의 실력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짐작할 수 없으니 감히 먼저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쯧쯧,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됐다. 내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주려했으나 네가 거절했으니 모두 죽이는 수밖에.”

“혼유 장로님. 저 석상, 이준 그 녀석인 것 같습니다!”

그때, 노인의 곁에 있던 사내 하나가 광장 위에 놓인 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허……. 감히 우리 혼전에 해를 끼친 놈의 석상을 세워놔? 안되겠구나. 한 놈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 버려라!”

혼유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검은 안개가 가람 아카데미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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