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797화 (797/818)

797화. 정적

이준이 산봉우리 위에 나타나자, 산봉우리 위에 있던 천부연맹의 강자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를 맞이했다.

“맹주님!”

“수고했다.”

이준은 빠르게 천부연맹 강자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이한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이한은 자신을 향해 몸을 숙인 이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훌쩍 자라 투기대륙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세력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 아들의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샘솟았다.

“준아……. 다 컸구나…….”

이한이 거친 손으로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이준을 비웃고 조롱할 때도 그는 결코 자신의 아들이 다시 일어서리라는 것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느새 늙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준 역시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짧은 재회를 마친 이준이 옆으로 살짝 비켜서자, 그 뒤에는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이 서있었다.

“아버님, 이은이에요. 기억하세요?”

이은은 이한을 향해 절을 올리며 말했다.

“이은?”

어여쁜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이한은 그때의 그 신비로운 여자 아이를 떠올리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은이는 이제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에요.”

이준이 헤헤, 하고 웃으며 말했다.

“녀석! 역시 아비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이한은 크게 기뻐하며 이준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 이 분은?”

잠시 기뻐하던 이한이 곁에 있던 채린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꽃처럼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엇다.

“어……. 채린이에요. 이쪽 역시 아버지 며느리입니다.”

이준이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마른 기침을 하며 말했다.

“허…….”

이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아버지도 채린이에 대해 들어봤을 겁니다. 또 다른 이름은 메두사 여왕이에요.”

“메두사 여왕?”

순간 귀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것만 같은 느낌에 이한은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메두사 여왕이라면 가한제국 전체에 악명이 자자한 뱀인간들의 여왕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여자가 갑자기 자신의 며느리라니, 이준이 투성이 된 것보다 메두사가 자신의 며느리라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아버님. 가한제국에서의 일은 이제 모두 지난 일입니다. 채린이라고 불러주셔요.”

채린이 이준을 가볍게 흘겨보며 말했다. 지나간 일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채린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이준은 멋쩍은 듯 씩 웃으며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 우선 천부연맹으로 돌아가요. 그곳에서 아버지의 손녀가 기다리고 있어요. 큰 형님과 작은 형님도 모두 불러야겠어요.”

“손녀?”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이한의 마음속에 또다시 큰 파도가 일었다.

연합군 부대가 천부연맹으로 돌아오면서 중주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3대 고대 세력과 이미 중주를 휘어잡고 있는 천부연맹이 손을 잡았으니, 그 기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사이 연합군과 혼족의 결전에 대한 소식이 중주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장천산맥에서 벌어졌던 전쟁은 그야말로 투기 대륙의 주인을 정하는 싸움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모두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혼족과의 결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에 중주의 모든 세력은 천부연맹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싸움의 승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 * *

대군이 성운계로 돌아오면서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래도 약로를 비롯한 경험 많은 선배들이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준 덕에 연맹주가 된 이준이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을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이솔이 부리나케 달려 나와 이준의 품에 뛰어들었다.

“자, 솔아. 할아버지께 인사 해야지.”

이준의 말에 이솔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이한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이솔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초췌한 이한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아이고, 착해라.”

아버지의 밝은 표정에 이준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자, 할아버지한테 안기렴.”

이한은 온화하게 웃으며 이준에게 안겨있던 이솔을 껴안았다.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이 얼굴에 닿자, 아이는 작은 얼굴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수염, 아파.”

“허허허.”

“아버지, 우선 들어가 쉬세요. 당분간 시간이 있으니 제가 몸 좀 봐드릴게요.”

손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한을 말없이 바라보던 이준이 웃으며 말했다.

“채린아. 가한제국에 있는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을 데려와 줘.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고 전하고.”

이준이 채린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에 채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공간을 가르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멀어지는 채린의 뒷모습을 보며 이준은 십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마침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큰 형님, 작은 형님. 약속 지켰습니다.’

* * *

치열했던 싸움이 끝난 후, 한동안은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대혼족 연합군은 물론이고 중주의 크고 작은 모든 세력들이 알고 있었다. 이 평화는 아주 잠깐이며, 곧 투기대륙 전체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군이 휴식기를 갖는 동안에도 연합군의 고위층 관계자들은 매우 분주했고, 고원은 성운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혼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족은 태령황제의 옥을 모두 모았음에도 좀처럼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연합군은 혼족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동시에 그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고 있는 혼전의 분전들을 하나 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혼전의 분전 중 9할 이상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고, 극소수의 분전만이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어찌됐든 불과 3일 동안 중주에 있는 모든 분전은 전부 폐허로 변해버렸고, 혼전에게 가장 중요한 천전과 지전마저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중주를 주름잡던 혼전은 그렇게 허탈할 정도로 짧은 시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혼전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에 중주의 수많은 세력들은 연합군의 실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를 실감했다.

하지만 이준을 비롯한 연합군의 강자들은 혼전을 붕괴시켰음에도 조금도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습격한 분전에서 영혼의 근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혼족이 사실상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으며, 오랜 세월 혼전을 통해 수집해 온 가장 진귀한 자원을 모조리 회수하는데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껍데기뿐인 승리를 거둔 연합군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혼족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 * *

혼전 청소작전이 끝날 무렵, 이정과 이찬이 미리 설치해두었던 공간통로를 통해 성운계에 도착했다.

드디어 악마 같은 혼족 놈들의 손에서 벗어난 아버지의 모습에 이정과 이찬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이한을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울먹였다.

한동안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준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복귀했다. 혼족에게 태령황제의 옥을 빼앗긴 이후로 그는 줄곧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지난 번 전쟁에서 그는 허무대인이나 혼천제와는 감히 손조차 섞지 못했다.

하지만 다가올 더 큰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그 역시 8성 투성, 더 나아가 9성 투성급과도 싸울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했다.

물론 이 짧은 시간 안에 승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참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이준은 결국 소애의 몸속에 봉인된 구현금비뢰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황제단계에 이른 영혼의 힘을 이용해 구현금비뢰를 흡수하는 것, 그것만이 그가 짧은 시간내에 9성 투성에게 맞설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천상무덤 깊은 곳. 이준은 평원 위에 외로이 서있는 석비 앞으로 다가갔다.

평원 주위에는 투성급 에너지체들이 즐비했지만, 그들 중 누구하나 이준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가 천상무덤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떠나, 황제단계의 영혼 하나만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에너지체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었다.

천상무덤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에너지체들은 대부분 대륙을 주름 잡던 강자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살아있을 때의 일이지, 지금은 그저 천상무덤의 힘에 기대 연명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천상무덤에는 여전히 수십 명의 투성 에너지체가 존재했지만, 누구 하나 이현과 비견할만한 존재는 없었다.

가장 아쉬운 점은 그들은 천상무덤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준이 천상무덤의 주인이 되었다 해도 전쟁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적을 천상무덤 안으로 넣을 순 있겠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이 석비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혈도. 아무도 방해할 수 없게 날 보호해줘.”

이준이 천상무덤의 주인이 되면서 혈도성자 역시 자연스레 그의 수하가 되었다. 그러니 혈도를 부르는 호칭도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혈도성자는 자신이 천상무덤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도움을 주었으니, 앞으로 이곳의 관리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게 이준의 생각이었다.

“예.”

붉은 옷을 입은 에너지체가 이준을 향해 정중히 답했다.

혈도성자 역시 이준이 자신에게 천상무덤의 관리를 맡기려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이 무덤 안에서 에너지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그래도 꼬리보다는 머리가 낫지 않겠는가.

혈도에게 명령을 내린 이준은 빠르게 인결을 맺어 소애를 소환했다.

언제나처럼 이준의 어깨 위에 나타난 소애는 주인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알아서 금빛 번개를 토해냈다.

꽈르릉!

금빛 번개를 소환하는 순간,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눈 깜짝할 새에 수천 미터에 달하는 금빛 뇌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 몸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천상무덤 안의 에너지체들이 앞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뇌룡과 마주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크르릉!

금빛 용의 눈에선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뇌룡은 그저 순수한 에너지의 결정체 일 뿐, 영성도 지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얼마나 더 날뛸 수 있는지 보자고.”

이준의 손모양이 다시 한 번 바뀌자, 그의 미간에서 거대한 영혼의 힘이 쏟아져 나와 뇌룡의 몇 배에 달하는 거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크르릉-

지능이 없는 구현금비뢰마저 거인의 위압감을 느낀 듯 움찔거리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잠시 뇌룡을 바라보던 거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거대한 손을 뻗어 뇌룡의 목덜미를 움켜잡으려 했다.

거대한 손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뇌룡의 입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콰릉!

눈부신 전광이 폭발하는 순간,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황제단계의 영혼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태연하게 손을 뻗어 뇌룡을 움켜쥐었다.

쾅!

거인에 의해 붙잡힌 뇌룡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지고 말았다.

번개의 용이 사라진 자리에는 점성을 띤 금색 액체가 작은 못을 이루고 있었다.

훅!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이준의 어깨에서 뛰어오른 소애가 분홍빛의 약솥으로 변하더니 빠르게 금색 액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금색 액체를 집어삼키자, 약솥에서 곧바로 분홍색 화염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이준의 손짓을 따라 수만 가지의 약재들이 저장반지 밖으로 나와 하늘을 가득 메우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