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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784화 (784/818)

784화. 뇌동혁

순간 대전 안에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혼족이 영족, 석족, 약족을 침략한 목표는 두 가지일 것이다. 피의 힘을 수집하고 태령황제의 옥을 빼앗기 위해서겠지. 혼천제의 인내심이 바닥났나보군.”

“아버님,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 이미 혼족의 손에는 네 개의 태령황제의 옥이 있습니다.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머지 옥을 모두 빼앗으려 할 텐데, 놈들이 모든 옥을 손에 넣는 순간 투기 대륙의 누구도 감히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이준이 고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

“아버님. 이제 8대 세력 중에 세 개의 세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준이 적막을 깨고 말했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어봤자 영족, 석족, 약족과 같은 결말을 겪고 말 것입니다!”

이준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내 고원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들어 이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다. 염족, 뇌족의 족장에게 연락을 취하거라.”

고원의 결정이 고족의 장로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가며 고계 전체에 긴장감이 흘렀다.

고원의 명으로 수많은 강자들이 중주 전체로 흩어져 혼족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사이, 이준은 가만히 고계의 깊숙한 산에 틀어박혀 흑주비약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고요한 산 속. 대나무로 지은 집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주변을 빼곡하게 메운 대나무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녹색 물결을 만들어냈다.

“오라버니. 필요한 약재들을 모두 이곳에 모아뒀어요. 빠진 게 있나 한 번 보세요.”

이은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약재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는 긴장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은아. 흑주비약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동안 네가 날 지켜줘야 해.”

말을 마친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소애가 나타나 분홍빛의 화염 약솥을 만들어냈다.

이준이 본격적인 제련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이은은 조용히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허허. 아가씨.”

그때, 한 노인의 웃음소리가 이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세형.”

세형이 이은의 곁으로 걸어와 이준이 있는 방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아가씨의 안목이 이 늙은이보다 낫군요. 이리도 대단한 분을 배필로 맞게 되실 줄이야.”

세형의 칭찬에 이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하는 것보다 이준을 칭찬할 때 기분이 더 좋았다.

* * *

이준이 제련할 연금비약은 모두 흑주비약의 난폭한 에너지를 정순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정화의 불꽃만으로 흑주비약의 에너지를 흡수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효율도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흑주비약의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흡수를 도울 연금비약이 필요했다.

이준은 이 연금비약들을 모두 제련하는 데는 불과 반나절 밖에 걸리지 않았다.

석양이 질 무렵이 되자, 색깔이 다른 연금비약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은 연금비약 세 개를 한 입에 털어 넣고 화염 약솥 안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곧이어 흑주비약 속에 담겨있던 난폭하고 거대한 에너지가 빠르게 이준의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 *

눈 깜짝할 새에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 이준은 흑주비약 안에 들어있던 방대한 양의 에너지를 모조리 흡수한 상태였다.

꼬박 하루가 더 지난 뒤, 약솥 안에 있던 이준이 서서히 눈을 떴다.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분홍색 약솥이 사라지며 해일과도 같은 염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약솥에서 나온 이준의 실력은 이미 6성 투성 중급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끼익-.

그때,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이은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오라버니.”

이준은 멋쩍게 웃으며 팔뚝 위에 그려진 황금색 용문양을 문질렀다. 지금까지는 구현금비뢰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6성 투성 중급이 된 지금이라면 조금 버겁지만 문양 안에 담긴 힘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염족과 뇌족 사람들이 모두 도착했어요. 아버지가 오라버니도 회의에 참여하라고 하셨어요.”

“그래, 알겠어.”

뇌족과 염족이 도착했다는 말에 이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8대 세력 중 가장 먼저 몰락한 이족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이 바로 고족과 혼족이었다.

염족과 뇌족 역시 지금까지 피의 힘이 고갈되지 않은 덕에 훌륭한 강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고족, 혼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최근 혼족에게 몰살당한 약족, 석족, 영족보다는 강한 것이 바로 그 두 세력이었다.

이준이 대전 밖에 도착했을 무렵, 대전 주위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빠르게 대전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조용히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은이 가장 앞에 앉아있는 중년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왼쪽 맨 앞에 계신 분이 염족의 염신 족장이에요.”

새빨간 의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는 화염에 타오르는 듯 붉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고, 눈동자 역시 구슬을 박아 넣은 듯 부리부리한 눈동자 역시 빨간 색을 띠고 있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볼 때마다 공기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만 보면 사십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지만, 실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오래 산 할아버지예요.”

이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염족 족장은 화염을 다루는 수준이 신의 경지에 올랐어요. 아버지 말씀으론 저 분은 열일곱 번째 불꽃인 화산의 불꽃과 일곱 번째 불꽃인 선조의 불꽃을 가지고 있대요.”

“선조의 불꽃이 염족의 손에 있었구나. 그럼 두 개의 불꽃을 융합한 거야?”

“네. 그 불꽃은 제가 가진 제왕의 불꽃보다도 더 강하다고 들었어요. 정화의 불꽃보다는 조금 떨어지겠지만요.”

이은이 말했다.

“게다가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두 개의 불꽃을 융합시킨 것이라 하더라고요.”

이어지는 이은의 말에 이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자신처럼 특수한 수련법을 가진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만으로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결합하다니, 과연 화염 통제 능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역시 염족의 족장은 다르네.”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은 뇌족의 뇌영 족장이에요. 염신 족장과 똑같은 8성 투성 강자예요.”

이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철탑같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거무스름한 피부에서는 강철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뇌영 족장은 싸움을 아주 좋아해요. 이현 선배님과도 결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했다고 들었어요.”

이은이 웃으며 말했다.

“응?”

이렇게 오래된 일을 이준이 알 리가 없지만, 당시 투기 대륙의 최강자로 손꼽혔던 이현에게 대결을 신청할 정도라면 뇌영 족장의 실력 역시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이은!”

이준과 이은이 구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한 사람이 슬금슬금 다가와 이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바로 이준과 함께 천상무덤에 들어갔던 흑연군의 둘째 수장, 고화였다.

“뭐예요?”

이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화가 울상을 하며 말했다.

“뇌족과 싸움이 났어. 좀 도와줘.”

“네?”

고화의 말에 이준과 이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쳐다봤다. 혼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지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뇌족의 젊은 놈들이 흑연군에게 시비를 걸었어. 우리가 나서서 말리지 않았으면 아마 싸움이 더 커졌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청양 오라버니는요?”

이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청양 형님도 당했어. 안 그랬으면 내가 너희를 왜 찾아왔겠어.”

“뭐라고요?”

순간 이준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뇌족의 젊은 강자들 중에 2성 투성 강자인 고청양을 쓰러뜨릴만한 실력자가 있단 말인가?

“설마 그 녀석이에요?”

이은이 순간 누군가가 떠오른 듯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강해졌을 줄은 몰랐어.”

“그 녀석이 누구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뇌동혁. 뇌족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불리는 사람이에요. 이미 뇌족의 차기 족장으로 내정된 사람이죠. 저와 혼담이 있었던 사람이기도 하고요.”

“흐음…….”

혼담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이준의 뇌리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은아, 좀 도와줘. 그 녀석을 이대로 돌려보내면 우린 완전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

고화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됐어요.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하지만 이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화를 흘겨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매제가 우리 흑연군의 기를 좀 살려주는 건 어때? 이제 자네도 반은 고족 사람이잖아, 응? 부탁 좀 할게.”

이은이 자신의 청을 거절하자 고화는 곧바로 이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설마……. 처음부터 오라버니에게 도움을 청하려던 건 아니죠?”

기다렸다는 듯 이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고화의 태도에 이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허 참, 네가 못 도와주겠다니까 우리 매제에게까지 부탁을 하는거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화를 보고 있자니 이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내 아내를 뺏으려 한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봐야겠습니다.”

* * *

고족의 대전과 멀지 않은 곳에는 훈련장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이 훈련장은 평소에 흑연군의 훈련 장소로 쓰이는 곳으로, 고족의 청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뇌족과 염족의 족장이 오면서 각 세력의 우수한 청년들도 함께 고계로 오게 되었는데, 고위층 관계자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젊은 강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훈련장에는 새까만 갑옷을 입은 흑연군의 청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흑연군은 고족의 가장 뛰어난 젊은 강자들만을 모아놓은 부대이니만큼 수많은 고족의 청년들이 흑연군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훈련장에 늘어선 흑연군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험악한 표정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이마에 번개 모양의 족문을 새긴 청년 십여 명이 오만한 표정으로 흑연군의 전사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큭큭. 소문만큼 강하진 않은 것 같은데?”

뇌족의 한 사내가 풀줄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조롱하듯 말했다.

“뇌운식. 그 입 다물어라. 그렇게 덤비고 싶다면 거절하지 않으마!”

고형이 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음. 너처럼 덩치 큰 녀석과는 싸워봤자 재미가 없어. 게다가 너희 흑연군의 대수장인 고청양이 이미 동혁 형님에게 패했는데, 이걸로 우리가 한수 위라는게 증명된 것 아닌가?”

뇌운식이라 불린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쳇. 우리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은 이은 아가씨다. 아가씨를 꺾기 전에는 너희들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지.”

흑연군의 한 총령이 차갑게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하하, 이은?”

은색 옷을 입은 뇌동혁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은 아가씨의 이름은 우리 뇌족에도 제법 잘 알려져 있지. 이번에 온 김에 한 번 만나봐야겠어. 조금 전 고화라는 놈이 그 아가씨를 찾으러 간 모양이지?”

“형님. 이은 아가씨와 혼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얼마나 콧대가 높은 계집이길래 형님과의 혼담을 거절했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막상 형님을 보면 형님과 살고 싶다고 매달릴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뇌운식의 말에 고청양을 비롯한 고족의 젊은 강자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돌았다.

이제는 사실상 이준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은은 오랜 세월 고족 젊은이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은을 다른 세력의 젊은 강자들이 조롱하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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