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화. 파멸의 전투
약족 강자들이 목숨을 던져 자신의 후손들을 지키는 것을 바라보던 이준은 이족의 최후 역시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이준을 발견한 약단이 절박한 목소리로 애원하듯 외쳤다.
“이준! 우리가 목숨을 바쳐 자네들을 탈출시켜주겠네! 부디 우리 약족의 후예들을 지켜주게!”
이준과 가까운 곳에는 약단과 연이 깊은 신농 노인도 있었지만, 약단이 약족의 후예들을 지켜줄 마지막 희망으로 선택한 것은 신농이 아닌 이준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바쳐 족장의 의무를 다하는 약단의 모습에 이준은 불현 듯 자신에게 힘을 물려주기 위해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을 홀로 이공간에 갇혀 살아가던 이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족장님. 전 여기 남겠습니다! 저 잡것들을 모두 없애버리겠어요!”
약천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이미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퍽!
하지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그의 뺨을 강하게 휘갈겼다.
“네 이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장로와 선배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겠다는 것이냐!”
약천은 화끈거리는 뺨을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약영연 역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준의 말을 잘 따르거라. 너희가 약족의 마지막 희망이다! 이준! 내가 목숨을 바쳐 길을 열어주겠네! 그러니 제발 우리의 후손들을 거둬주게!”
말을 마친 약단은 이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으며 유성처럼 혼경과 혼탁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저 미친 녀석.”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약단을 발견한 혼경과 혼탁은 곧바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펑! 펑! 펑!
그 사이, 수많은 약족 장로들이 다시 날아가 미친 듯이 자폭을 하기 시작했다.
쾅쾅쾅!
하늘 전체가 뒤흔들리며 굳게 닫혀있던 공간이 점점 강하게 일그러지더니 결국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버리고 말았다.
“지금이야!”
바로 그 순간, 이준의 몸에서 분홍색 화염이 폭발해 순식간에 약천과 약영연 등을 감쌌다.
쾅! 쾅!
자폭한 약족의 강자들은 영혼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북왕을 소환해 후미를 맡긴 이준은 자폭 지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몸을 날렸다. 약족의 강자들이 자폭을 하며 만들어진 공간 장막에 균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준의 실력으로 그곳에 공간 통로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이었다.
약전을 보러왔던 종파 세력의 강자들 역시 이준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이 혼란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약족에 있는 모든 생명을 없애버리는 것이 목표인 혹족의 강자들이 그들을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혼족과 식영(食靈)을 발견한 이준은 곧바로 공격을 준비했다. 그때, 뒤에 있던 신농 노인이 약초지팡이를 던졌다.
약초 지팡이에서 녹색 화염이 퍼져나가자, ‘쉭’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더니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그림자들을 넝쿨처럼 휘감았다.
신농 노인의 도움을 받은 이준은 그 틈을 타 숨을 고르고 다시 속도를 높였다.
“허무대인, 이준을 잡아야 합니다. 저 녀석의 손에도 태령황제의 옥이 있습니다!”
이준이 공간 통로와 가까워지자 만화 장로 등에게 둘러싸여있던 혼허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허, 내가 몸이 여러 개라도 되는 줄 아느냐!”
허무의 불꽃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거대한 약계 전체를 봉쇄한 채 약제의 영혼의 파편을 제거하고, 식영까지 부리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또 다른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 맡기게, 혼경, 약단은 자네가 맡고. 혼자서 우리 두 사람을 막을 수는 없겠지.”
혼족의 최강자인 4마성 중 한사람인 혼탁이 웃으며 미친 듯이 발악하고 있는 약단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혼탁은 이미 전장을 빠져나가 이준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이준……. 우리 혼족을 몇 번씩이나 곤경에 빠뜨렸다지? 이제야 직접 네놈의 얼굴을 보는구나.”
단숨에 이준의 눈앞까지 날아온 혼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혼탁의 실력은 적어도 7성 투성 상급 수준은 되어 보였다.
“생명의 불꽃!”
혼탁의 등장에 신농 노인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하늘에 퍼져있던 녹색 화염은 네 발 달린 화염 마수가 되어 혼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생명의 불꽃이라. 허허.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이번에 널 잡아가면 생명의 불꽃도 내 것이 되겠군.”
거대한 손바닥으로 변한 염력이 녹색 마수의 몸통을 날려버리고 곧바로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생명의 불꽃으로는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신농 노인은 씁쓸한 마음을 가다듬고 빠르게 속도를 높였다. 천지의 불꽃이라고는 하나 파멸의 힘이 없는 생명의 불꽃으로 혼족의 최강자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쉭!
하지만 생명의 불꽃이 아주 잠깐 혼탁의 공격을 막아선 사이, 이준은 전력으로 공간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덕분에 이준의 뒤를 따라 약계를 빠져나가려던 강자들이 혼탁의 염력에 얻어맞고 피를 토하고 말았다.
뒤쪽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준은 그쪽을 향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혼탁의 공격을 피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했다.
‘북왕!’
이준이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리자, 대열의 후미에 서있던 북왕이 유성처럼 혼탁을 향해 돌진했다.
“응? 요괴잖아?”
혼탁은 자신을 향해 매섭게 달려드는 북왕을 놀란 눈빛으로 쳐다봤다. 자신에게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요괴는 그도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그래봤자 요괴지.”
혼탁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손을 흔들자, 그의 손에서 백 미터가 넘는 염력이 솟아나 북왕의 매서운 공격을 가볍게 받아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강한 염력 파동에 북왕은 그대로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북왕의 실력으로도 7성 투성을 상대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소애야!’
이준이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외치자, 이번에는 소애가 빠르게 나타나 그의 영혼과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다음 순간, 정화의 불꽃이 폭발하며 이준의 피부와 뼈, 내장까지 전부 분홍색 수정으로 뒤덮였다.
“화련!”
곧이어 이준의 손에서 여섯 가지 색의 이화가 엉킨 채 회전하며 융합되기 시작했다.
“가라!”
오색 연꽃으로 변한 이준의 불꽃이 화염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꼬리를 하늘에 남기며 혼탁에게 날아가 폭발을 일으켰다.
쾅!
파멸의 힘이 느껴지는 화염 폭풍이 천지를 헤집으며 수백 미터나 떨어져있던 식영들도 뜨거운 열기에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하지만 화련의 힘으로도 7성 투성인 혼탁을 쓰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역시 듣던대로 대단한 위력이군. 그러나 이 정도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 자, 마지막 기회를 주마. 조용히 태령황제의 옥을 내놓으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지!”
화염폭풍 속에서 검은 기체가 솟아나더니 그 중앙에서 혼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준의 낯빛이 빠르게 변했다. 인화일체와 화련을 동시에 사용했건만, 혼탁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가 없었다.
“저 녀석의 기운이 불안정해지고 있군. 그래도 자네의 공격이 효과가 없진 않았던 모양이야.”
신농 노인이 말했다.
“이준. 여길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약족 강자들이 전멸하는 순간 우리도 끝이다.”
약로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갑게 웃고 있는 혼탁을 바라보았다.
“신농 선배님, 약천. 저에게 잠시 천지의 불꽃을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준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신농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약초 지팡이를 이준에게 넘겼다. 약천 역시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갈색 화염을 소환해 이준에게 건넸다.
거북이 모양의 갈색 화염은 바로 천지의 불꽃 중 열세 번째 불꽃인 현무의 불꽃이었다.
전신이 분홍색 수정으로 뒤덮인 이준의 오른손에는 녹색 화염이 들려있었고, 왼손에는 현무의 불꽃이 들려 있었다.
여섯 개의 천지의 불꽃에 잠시 빌린 두 개의 불꽃까지, 총 여덟 개의 불꽃이 모이는 순간, 이준의 몸에서 천지를 녹여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열기가 폭발했다.
갑자기 주인의 손을 떠나게 된 두 개의 불꽃은 본능적으로 거칠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불꽃을 몸에 지니며 화염에 대해 강한 저항력을 가지게 된 이준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대폭발이 일어나 몸이 넝마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준이 분홍색 화염으로 두 개의 불꽃을 감싸자, 정화의 힘이 두 개의 불꽃을 뒤덮으며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던 난폭한 기운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두 개의 불꽃을 잠잠하게 만든 이준은 빠르게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섯 개의 천지의 불꽃을 꺼내들었다.
여섯 개의 화염은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서서히 융합되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생명의 불꽃과 현무의 불꽃을 빨아들였다.
쾅!
여덟 개의 화염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에서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강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인화일체를 통해 소애와 융합하면서 지금 이준의 화염 통제력은 불꽃의 정령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 있었지만, 본래 제 것이 아닌 화염 두 개를 융합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시킨 이준은 영혼의 힘을 이용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화련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이준의 염력과 영혼의 힘, 소애의 화염 통제 능력이 더해지자 무려 여덟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이 융합된 화련이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북왕에게 발이 묶인 혼탁은 이준의 손에 들린 화려한 연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에너지를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것이 정말 5성 투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투기란 말인가……. 과연 우리 혼족을 몇 번이나 곤란하게 만들만한 실력이구나.’
다급해진 혼탁은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북왕의 몸을 강하게 내리쳤다.
강한 충격에 북왕의 가슴팍이 움푹 내려앉았지만, 요괴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일격에 북왕을 날려버린 혼탁이 살기로 눈을 빛내며 이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자를 막아야 한다!”
약로는 황급히 주먹을 휘둘러 염력을 날려 보냈지만, 혼탁은 시선조차 돌리지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염력을 떨쳐냈다.
쉭-!
약로의 공격을 가볍게 뿌리친 혼탁이 이준을 향해 몸을 날리자, 이번에는 신농이 날아와 붉은 염력을 쏘아댔다.
“흥.”
하지만 본래 전투가 특기가 아닌 신농이 혼탁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혼탁이 가볍게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신농의 붉은 염력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터져 나왔다.
“푸흡!”
“흥, 신농. 감히 너 따위가 내 앞을 막아서?”
혼탁이 악마처럼 사악하게 웃으며 이준을 향해 새까만 손을 뻗었다.
치이익!
이준의 가슴팍에서 불꽃과 피가 튀며 옷이 까맣게 타버렸다. 용황갑옷이 없었다면 혼탁의 공격에 의해 이준의 가슴에는 이미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이준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오히려 공격에 성공한 혼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죽어라.”
혼탁의 공격에 당한 이준이 반동을 이용해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혼탁이 반응을 보일 틈도 없이 이준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나오며 파멸의 힘이 가득한 빛기둥이 폭발했다.
빛기둥이 솟아나는 것과 동시에 주위에 있던 모든 것이 재로 돌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