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화. 본체
곧이어 약족의 강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약산 주위를 물샐 틈 하나 없이 포위했다.
“혼허자, 이게 무슨 짓이냐!”
약족의 장로 중 하나가 소리쳤다.
“음. 다 완성된 것 같은데.”
하지만 혼허자는 여유롭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마치 수천에 달하는 약족의 강자들이 안중에도 없다는듯한 태도였다.
“아무 것도 안 했다. 약계 전체를 봉쇄시켰을 뿐이지.”
혼허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약전을 보기 위해 참가했던 강자들이 새파랗게 질린 채 공간두루마리를 찢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큰일이야…….’
이준의 입에서도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설마 혼족 놈들이 약전이 열리는 시기에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약단은 손가락에 끼어둔 반지를 그대로 부숴버렸다. 그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는 삼족연맹을 결성하면서 만든 특수한 반지로, 깨지는 순간 염족과 뇌족의 족장에게 신호가 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신호마저 공간 봉인을 뚫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허허. 약단 족장님,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마시지요.”
혼허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혼허자. 약족에는 염족과 뇌족으로 향하는 공간통로가 있다. 그 통로가 사라지면 약족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바로 알아차리겠지. 고족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영족과 석족을 처리할 때도 고족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요. 이번에 약족이 이 세상에서 증발해버린다고 그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자식이!”
약단은 천천히 상공 위로 떠오르자, 혼허자의 기운보다도 강한 7성 투성의 기운이 그대로 숨통을 짓눌렀다. 역시 약족의 족장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혼허자 선배님. 이건 혼족과 약족의 일이지 저희와 상관이 없습니다. 저희를 풀어주신다면 이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때, 약전을 관람하다 봉변을 당한 종파들의 종주와 장로들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데, 티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석족과 영족을 없애버린 혼족과 엮인다면 결말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허허. 당연하지. 약족이 아닌 자들은 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혼허자의 대답에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약계(藥界) 입구를 향해 황급히 날아갔다.
이준은 그들의 어리석음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혼족이 어떤 놈들인데 이 중요한 사건을 목격한 자들을 그냥 보내준단 말인가.
“으아악!”
화악!
아니나 다를까, 아득히 먼 하늘에서 검은색 빛이 반짝이더니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건……진짜 허무의 불꽃이잖아!”
이준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의 몸속에 있던 소애 역시 강한 위기감을 느낀 듯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큭큭큭. 약단. 오늘이 약족의 마지막 날이다.”
수백 명에 달하는 강자들이 검은 화염에 불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혼허자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빛 하나 통하지 않는 새까만 화염이 천지를 뒤덮자,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염력이 무언가에 의해 빠르게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주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저 약전에 참가했을 뿐인데 이런 봉변을 당할 것이라고 그 누가 예상했을까.
“공기 중에 허무의 불꽃이 떠다니고 있어서 조심해야 해요. 이건 염력으로 막을 수도 없어요…….”
이준이 약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지금 두 사람의 몸 주위에는 분홍색의 화염으로 형성된 보호막이 둘러져 있었다.
화염 장막 위에는 육안으로 보기 힘든 검은색 점이 사람들의 몸에 달라붙어 끊임없이 염력을 빨아먹고 있었다. 만식의 힘은 제 아무리 강한 염력을 가지고 있어도 막을 수가 없었다.
“혼족이 정말 작정을 한 모양이구나.”
약로가 말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정말 배짱이 대단하군요. 아직도 감춰놓은 힘이 더 있는 걸까요?”
약족과 염족, 뇌족이 연맹을 맺었으니 설령 혼족이라해도 섣불리 그들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준이었다.
하지만 오늘 상황을 보니 혼족은 삼족연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이런 배짱에는 그럴만한 실력이 뒷받침되어 있을 것이다.
“저희가 혼전을 칠 때도 조용하더니, 약족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네요.”
그제야 이준은 혼족 놈들이 왜 혼전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천부연맹에 손을 쓰지 못했는지를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약로가 물었다. 자칫하면 두 사람의 목숨이 모두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 상황을 지켜보다 스승님과 저는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는게 좋겠어요.
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애써 만든 천부연맹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약족을 위해 혼족과 목숨을 걸고 맞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약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약족의 사람이지만 약족에 대한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에게는 자신을 매몰차게 내친 약족보다 제자인 이준의 목숨이 훨씬 더 중요했다.
* * *
시야 끝을 뒤덮은 검은색 화염을 응시하던 약단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천지약진을 사용하라!”
약족 사람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천지약진은 이미 수천 년간 가동되지 않은 약족 최대의 진법이었다. 이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약족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우웅!
약족의 장로들이 빠르게 빛기둥을 만들어 산속으로 쏘자, 온 산이 부르르 몸을 떨며 거대한 빛기둥이 구름을 가르며 솟구쳤다.
쏴아아!
곧이어 모든 약족 사람들의 염력이 빛기둥으로 변해 대진 속으로 흡수되더니 약계 전체로 진동이 퍼져나갔다.
“대단한 걸.”
눈부시게 빛나는 대진에 이준은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빛기둥에서 느껴지는 힘은 얼핏 보기에도 8성 투성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천지약진이라니! 이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약로가 복잡한 표정으로 대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대진은 약족의 시조가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그의 영혼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영혼이 깨어난다면 혼족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약족의 시조라니…….”
이준은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약족의 시조는 바로 전설속의 투제 강자였기 때문이다.
“허허. 이게 바로 약족의 대진이군. 역시 영족과 석족보다 나은걸?”
대진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은 혼허자가 몸을 돌려 검은 화염이 있는 곳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허무 대인. 이 대진은 아무래도 대인이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검은 화염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그 안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걸어나왔다.
온몸이 화염으로 휩싸인 그의 몸에는 기이한 검은색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두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구우웅!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허무의 불꽃이 주인에게 인사를 올리듯 기이한 울음 소리를 토해냈다. 마치 주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 같은.....
“허무의 불꽃.”
영혼의 힘으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이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허무의 불꽃의 본체였다.
‘젠장, 정화의 불꽃보다 훨씬 더 강해. 겨우 한 단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이 정도로 힘의 차이가 역력할 줄이야…….’
허무의 불꽃의 힘을 느낀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졸아드는 것을 느꼈다.
검은 화염 속에 서있는 그림자는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처럼 흉흉한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검은색 화염이 화염비로 변해 대진 위로 쏟아졌다.
치이익!
빗줄기가 닿기 무섭게 대진에서 새하얀 연기가 마구 피어오르며 대진에 모여 있던 에너지가 만식의 힘에 의해 미친 듯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항복하면……살려주겠다……약족은……우리에게……쓸모가 있다…….”
푸른 잎이 무성하던 산을 눈 깜짝할 새에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검은 그림자의 목구멍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족이 그리 쉽게 무너질 것 같더냐!”
약단이 매섭게 소리를 치는 순간, 약산에서 여러 개의 빛기둥이 솟아나 다시 대진에 힘을 불어넣었다.
거대한 빛기둥 속에는 온갖 진귀한 연금비약이 들어있었다. 제 아무리 약족이라 해도 저 정도 양의 연금비약이라면 약계에 존재하는 모든 연금비약을 털어 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약제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무수한 연금비약들이 액체로 변해 대진 속으로 흡수되는 순간, 약단의 손이 번개처럼 기이한 인결을 만들어냈다.
쏴아아!
인결이 완성되자 대진 중앙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소박한 베옷을 입은 영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웅!
현장에 있던 모든 약족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그 영혼을 바라봤다.
“시조님!”
‘저 사람이 바로 약족의 시조구나…….’
시조가 등장하는 순간, 하늘단계 최고급 수준의 영혼을 가진 이준마저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수만 년이 지난 뒤에도 영혼 하나로 이런 위력을 뿜어낼 수 있다니. 전설속의 투제 강자의 힘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시종일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혼허자마저 약제의 영혼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힘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말았다.
“음. 약제(藥帝)구나.”
그때, 혼허자의 곁에 있던 검은 화염 속 사람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아쉽군. 고작 영혼의 파편만 남아있어서야 뭘 할 수 있겠나.”
“시조님 약족을 보호해주십시오!”
약단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약족…….”
베옷을 입은 노인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노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많은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후예마저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아래를 둘러보던 약제의 영혼이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몰락했다니…….”
노인의 말에 약단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마음에 차마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자는……. 허무의 불꽃이구나.”
약제의 영혼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대진 전체가 눈부신 빛을 토해내며 대진에 붙어 에너지를 빨아먹던 검은 화염이 눈 녹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억도, 영혼도 온전하지 않군. 요괴처럼 멍하니 서있는 저 자가 약제(藥帝)라니……. 끌끌. 아주 좋다. 약제의 영혼 조각이라면 수백만 명의 영혼을 모은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허무의 불꽃이 기이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쾅!
그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굉음을 내며 대지가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화염이 거대한 손가락 모양이 되어 대진 위로 강하게 돌진했다.
이에 베옷을 입은 노인은 곧바로 대진 위에 기이한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약솥을 소환해냈다.
우웅!
거대한 손가락이 약솥을 누르는 순간, 고막을 울리는 굉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과연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투제의 영혼은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큰 힘을 쏟아낸 약제의 영혼은 단 한 번의 격돌로 빠른 속도로 흐릿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