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화. 흑주비약
‘시간이 얼마 없어. 우선 이 비약에서 에너지를 빼야겠어.’
잠시 상황을 살피던 이준은 다시 혼허자의 비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비약이 있다면 성공률이 훨씬 올라갈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의 비약을 빼앗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연금비약을 섞었다가는 오히려 제련에 실패할 확률만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화의 불꽃이 가진 정화의 힘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소애가 있다면 그 어떤 물질이라도 순수한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애!’
이준이 마음속으로 소애의 이름을 부르자, 소애가 곧바로 혼허자의 비약을 집어삼켰다. 다음 순간, 소애의 몸이 빠른 속도로 팽창해 백 미터에 가깝게 자라났다.
치익!
소애의 몸이 팽창하기 무섭게 몸속에 있던 광단이 빛을 발산하더니 거대한 빛기둥으로 변했다.
“제길!”
자신의 비약과 연결되어있던 혼허자는 사색이 되어 검은 화룡에 염력을 불어넣었다.
검은 화룡이 꼬리를 휘두르자, 녹색 화염과 검은색 화염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느낀 이준은 곧바로 북왕을 소환해 검은 화룡을 공격했다.
북왕과 화염용이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준이 북왕을 소환해 혼허자를 막고 있는 사이, 소애의 몸속에서 빛나던 광단이 빠른 속도로 투명하게 변하며 그 안에 있던 에너지가 모두 정화되어 이준의 화염 약솥으로 들어갔다.
‘아직 부족해…….’
약솥 안 에너지가 어느새 액체처럼 점성을 띠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뭉쳐지지 않았다. 9레벨 흑주비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준. 9레벨 흑주비약 제련은 내 일평생의 소원이었네. 내 비약은 이미 혼허자 때문에 더럽혀졌으니 마지막 운명을 자네에게 모두 걸겠다!”
이때, 멀리 있던 신농 노인이 이준을 발견하곤 약솥에 있던 비약을 소애에게 넘기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뜻밖의 도움을 받은 이준이 환하게 웃으며 신농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쳇. 나도 수백 년 동안 흑주비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이번엔 꼭 한번 보고 싶군.”
만화 장로도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굳은 결심을 한 듯 자신의 비약을 이준에게 던졌다.
“감사합니다!”
만화의 행동에 이준은 처음으로 약족에게 호감을 느꼈다. 만화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 이준은 곧바로 그의 비약을 소애에게 던져주었다.
두 개의 연금비약이 흡수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두 개의 빛기둥이 약솥으로 쏟아졌다.
그러자 약솥 안을 휘젓던 액체 에너지가 빠르게 녹으며 중앙에 작은 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꽈르릉!
곧이어 화창한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새까만 번개가 구름을 가르고 쏟아졌고, 고막이 울릴듯한 굉음이 광장 전체를 에워쌌다.
이준이 고개를 들어 새까만 번개를 바라보자, 돌연 약솥의 뚜껑이 저절로 열리더니 짙은 약향이 사방으로 퍼지며 알록달록한 입자가 사방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신기한 현상에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자리에 앉아있던 약단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금 비다! 흑주비약이 나타났다!”
쏴아-.
광장에 빗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연금입자는 연금비약이 아니지만 순수 에너지가 모여있어 그것을 흡수하는 것만으로 꽤 괜찮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정말 성공했어…….”
이준의 손바닥에 연금입자가 떨어지는 순간, 그의 손이 감격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 한 개의 흑주비약을 만들기 위해 제련 중이던 연금비약 네 개의 에너지가 합쳐지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 사이 소애는 계속해서 각자 성분이 다른 약에 담긴 에너지를 빼내 모조리 순수한 에너지로 정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정화의 힘으로도 수천 개에 달하는 약재의 성분을 완전히 제거할 순 없었다. 그렇게 제거되지 않은 성분은 순수에너지에 섞여 이준의 연금비약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부작용은 일어나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서로 다른 약재들이 다른 약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연금비약을 더욱 완벽하게 가다듬어 주고 있었다.
꽈르릉-.
새까만 번개가 거대한 뱀처럼 구름 위를 헤엄쳐 다니는 광경에 사람들은 온 몸의 솜털이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쾅!
곧이어 분홍색의 약솥에서 거대한 빛기둥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거대한 빛기둥은 그대로 구름을 뚫고 올라갔고, 그와 동시에 새까만 번개가 빛기둥 안에 있는 광단을 향해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쾅쾅쾅!
약산 전체가 흔들리면서 귀가 멀어버릴 만큼 강한 굉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이준은 광단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 광단은 이제 곧 9레벨 흑주비약이 될 광단이었다.
다만, 진정한 흑주비약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비뢰를 받아내야만 했다. 흑주비약은 다른 연금비약과 달리 직접 비뢰를 맞아 그 힘을 흡수해야만 진정한 흑주비약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쾅!
그렇게 십 분 가까이 지났을 때, 번개와 광단이 만나며 일어나던 불꽃이 잦아들더니 거대한 광단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까드드득!
첫 번째 균열을 시작으로 빠르게 광단 전체에 금이 가며 그 안에서 눈부신 빛이 흘러나왔다.
꽈앙!
새까만 번개가 다시 한 번 광단을 강타하는 순간, 흑주비약을 감싸고 있던 광단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잠시 후,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짙은 약향이 하늘 가득히 퍼져나가더니 커다란 광단 하나가 약산 밖으로 번개처럼 날아갔다.
“흑주비약이 달아난다!”
산 전체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탐욕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허!”
하지만 사람들이 흑주비약을 따라가려던 찰나, 차가운 기합소리가 그들의 귓등을 때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발걸음을 멈췄다. 혼전 전주를 쓰러뜨린 강자의 손에서 나온 9레벨 흑주비약을 훔치려면 목숨이 백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스승은 혼전을 쓰러뜨린 중주의 패자, 천부연맹의 연맹주가 아니던가. 이 정도라면 흑주비약을 손에 넣는 즉시 보물을 강탈한 장본인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그때, 이준의 등 뒤에서 청홍빛의 뼈날개가 펼쳐지더니 그의 몸이 빛처럼 빠르게 흑주비약의 앞에 나타났다.
“황천의 주먹!”
약산 밖으로 달아나던 광단은 이준의 주먹 한방에 빠르게 빛을 잃고 말았다.
광단이 사라지자, 그 안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흑발을 휘날리는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은 눈앞에 서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군. 연금비약엔 성별이 없는데. 조금 전에 변신한 거지?”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이준을 응시하던 여자는 순간 멈칫거리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9레벨 흑주비약이라 해도 이준에게서 달아날 수는 없었다.
잔영을 남기고 사라졌던 이준의 몸이 다시 나타나는 순간, 여인의 이마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지며 그녀의 몸이 다시 연금비약의 모양으로 돌아갔다.
이준은 옥병을 꺼내 몇 번이나 다시 영혼봉인을 걸고 나서야 9레벨 흑주비약을 그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준은 그들의 시선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북왕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혼허자를 바라보다가 북왕을 다시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하하. 다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북왕을 회수한 이준은 신농과 만화 장로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신농 노인과 만화 장로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혼허자의 눈은 이미 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열심히 만든 흑주비약을 빼앗겨 버렸으니 지금 당장 상대인 이준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기분이었다.
“이준, 자네의 연금술은 정말 대단하군. 이제부터 자네가 바로 투기대륙 제일의 연금술사이네.”
하늘을 채우고 있던 녹색 화염이 다시 약초 지팡이로 변해 신농 노인의 손에 쥐어졌다.
“약선이 대단한 제자를 키웠어……. 허허, 우리 약족이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던 것 같군.”
이어지는 약단의 말에 약족의 장로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약단 장로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때, 이준이 약단을 향해 말했다.
“말 안해도 알고 있네.”
약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약로를 바라봤다.
“약선. 오늘 보니 자네가 약족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인 것 같군. 비석에 이름을 새겨도 좋네.”
“감사합니다. 족장님.”
약로의 두 손이 감격으로 파르르 떨렸다.
“허허. 약단 족장님.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 있던 혼허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응?”
약단은 미간을 좁히며 혼허자를 노려봤다. 이준이나 약로를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약족에 있는 태령황제의 옥을 잠시 빌려주시지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빠르게 굳었다.
9레벨 흑주비약의 탄생으로 시끌벅적해진 광장이 일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혼허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약족 장로들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8대 세력이 8개로 나눠 가진 태령황제의 옥은 평범한 장로가 구경도 하지 못할 만큼 보물처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그런 귀중한 물건을 빌려달라니?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편, 이준은 혼허자가 분명히 무언가를 준비해왔다고 생각하여 바짝 긴장한 채 언제든 손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실력으로 혼자 약계에 쳐들어와 약족을 도발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느낌이 좋지 않아…….’
생각을 마친 이준은 빠르게 약로 곁으로 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넸다.
“조심 하십시오.”
약로 역시 표정이 굳어있었다. 그 역시 혼허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만화 장로는 이미 살기로 눈을 빛내며 약단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허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약단이 차가운 표정으로 혼허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하. 약단 족장님. 태령황제의 옥 같은 불길한 물건을 약족에 두면 재난만 일으킬 뿐입니다. 저에게 넘기시고 평화를 유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혼허자, 이 건방진 놈! 네 놈이 약족을 모욕하고도 살아남을 성 싶더냐!”
참다못한 만화 장로가 혼허자의 머리 위에 나타나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제 다 됐겠지.”
하지만 혼허자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곧이어 혼허자의 눈동자 속에서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용처럼 검은색 화염이 솟아나며 그의 기운이 빠르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펑!
하지만 혼허자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만화 장로의 주먹을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만화 장로의 몸속에 깃들어있던 화염이 혼허자의 몸속으로 흡수되며 만화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쏟아졌다.
“허허. 이만큼 놀아줬으면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나?”
혼허자의 눈동자는 어느새 검은색 화염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7성 투성……!”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혼허자의 기운은 이미 만화 노인을 훌쩍 넘어서 약족의 족장인 약단과 비슷한 수준까지 폭등해 있었다.
‘연금비약을 빼앗겼을 때조차 실력을 숨기다니……. 이놈의 진짜 목적은 역시 태령 황제의 옥이었구나. 하지만 설마 혼자 태령황제의 옥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던 약단의 낯빛도 어둡게 내려앉았다. 확실히 예상 밖의 실력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 실력으로 단신으로 약계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이는 아직 혼허자에게 무언가 감춰둔 패가 있다는 의미였다.
“영족과 석족 실종사건의 배후에 있던 범인을 찾았다고 염족과 뇌족에게 알려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족과 석족이 사라진 것이 정말로 혼족의 소행이었단 말인가!
“예!”
약족의 장로들이 빠르게 두루마리를 꺼내 찢어발기자, 공간파동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공간통로는 무언가의 방해를 받은 듯 강하게 요동치다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