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화. 생명의 불꽃
약전의 예선전 막이 내려갈 때쯤이 되어서야 눈을 감은 채 수련을 하고 있던 이준은 천천히 눈을 떠 약족의 연금술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이준에게 약전의 초대장을 건넨 약성지도 있었다. 약성지는 수년간의 수련을 거쳐 이번 대회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1등은 예상대로 정화세계 밖에서 만났던 ‘약천’이라는 자였다. 그는 9색 단뢰를 소환할 수 있는 연금비약을 제련해낼 정도의 뛰어난 연금술사로, 천재들로 가득한 약족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예선이 끝나자,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의자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이준과 마찬가지로 의자 위에 앉아있는 자들이야말로 약전의 진짜 주인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 이제 시작이구나.”
갑자기 뜨거워진 장내의 분위기를 느낀 약로가 슬며시 눈을 뜨며 말했다.
이준은 씩 웃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동안 보고만 있으니 손가락이 근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코 쉽지 않은 대결이 될 것이다. 특히 혼허자, 신농 어르신, 만화 장로는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실력자다.”
“약족의 족장은 어떻습니까?”
이준이 수석 위에 앉아있는 약단을 쳐다보며 물었다.
“족장은 나서지 않겠지만, 연금술 실력으로는 앞서 말한 셋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렇군요.”
이준과 약로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약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하. 여흥이 이제 본선으로 들어가겠네. 자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주목되자, 약단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약전에는 총 네 명이 출전하네. 네 사람은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겠지. 최후의 승자는 대륙 제일의 연금술사라는 명예를 얻게 될 것이네. 자, 그럼 대결을 시작하지.”
약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혼허자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거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허허. 명쾌하군요. 오늘 이곳에서 여러분을 가르쳐드리지요! 대륙에서 제일가는 연금술사라는 이름은 우리 혼족이 가져가야겠습니다.”
“허, 그 명예는 연금술의 고향으로 불리는 약족이 갖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만화 역시 물러서지 않고 혼허자를 바라보며 외쳤다.
만화 장로가 등장하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약족의 본거지에서 혼족이 최고 연금술사의 영예를 가져가겠다는 말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런 헛된 명성에 크게 관심은 없다만, 최고의 연금술사라는 이름이 너에게 넘어가는 건 우리에게 아주 큰 치욕이지.”
곧이어 약초로 엮은 지팡이를 짚은 신농 노인이 걸어 나왔다. 지팡이에 걸린 옥병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역시 혼허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만화 장로, 혼허자, 신농 노인이라니……. 세 사람 모두 연금술계의 거장이잖아. 이번 시합은 정말 볼만 하겠어!”
의욕에 불타는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들의 모습에 현장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지막은 누구지?”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돌의자 위에 앉아있던 검은옷의 청년을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이준은 번개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혼허자 선배님. 연금탑의 기술을 훔친 적이 있었지요. 연금탑을 대신해 제가 혼허자님을 제대로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이준의 도발적인 발언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부연맹과 혼족 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천하의 혼허자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제를 모르는구나. 네 스승인 약선도 날 가르칠 실력은 되지 않을 텐데 말이야.”
혼허자가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주제파악이 안되는군요. 당신 같은 사람은 스승님이 아니라 제 상대도 되지 못합니다.”
“하하! 아주 패기가 넘치는군! 그래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보자!”
말을 마친 혼허자는 곧바로 검은색 화염을 폭발시켜 약솥을 만들어냈다. 그가 만들어 낸 검은 화염 약솥에서는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무의 불꽃?”
순간 이준과 만화 장로, 신농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저 불꽃이 혼족의 손에 있을 줄이야…….”
“천지의 불꽃을 불러보게. 내 불꽃이 자네들의 불꽃을 원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혼 허자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끼불꽃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너무 자신만만하시군요.”
이준이 말했다. 혼허자에게서 느껴지는 불꽃의 기운은 틀림없이 혼전의 전주가 가지고 있던 새끼불꽃보다는 강했지만, 진정한 허무의 불꽃에 비하면 턱없이 약했다.
이준의 말에 혼허자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가진 것은 그저 평범한 새끼불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무의 불꽃의 새끼 불꽃은 평범한 새끼 불꽃 외에 천(天)급 새끼 불꽃과 지(地)급 새끼 불꽃으로 나뉘었고, 지금 그의 손에 있는 것이 바로 지급 새끼 불꽃이었다. 그리고 등급이 있는 새끼 불꽃의 위력은 평범한 새끼 불꽃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새끼 불꽃의 등급이 나뉘는 것은 허무의 불꽃만이 가진 특징이었으니 이준과 약로는 당연히 혼허자가 들고 있는 것이 특별한 새끼 불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불꽃을 잡아먹을 능력은 없어 보이는데.”
만화 장로가 코웃음을 치며 팔을 휘두르자, 검은 색을 띤 폭풍이 허공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폭풍이 아닌 화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음의 불꽃이군.’
이준은 이 불꽃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약성지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이 불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만화 장로가 그 불꽃을 다시 가져온 것 같았다.
“허허, 만화 장로. 자네의 불꽃은 갈수록 더욱 완벽해지는구려.”
옆에 있던 신농 노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된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군.”
그때, 신농 노인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에 불이 붙더니 액체 같은 녹색 화염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녹색 액체 사이에서 안개가 솟구치면서 나타난 생기를 가득 머금은 약재가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생명의 불꽃이잖아!’
이준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노인이 꺼내든 것은 천지의 불꽃 중 다섯 번째 불꽃인 ‘생명의 불꽃’이었다.
생명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불꽃으로, 다른 불꽃들이 파멸의 힘을 가진 것과는 반대로 만물을 생장시키는 기운을 가지고 있어 약재의 씨앗을 넣으면 약재가 더욱 빠르게 성장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생명의 불꽃을 가진 자는 충분한 양의 씨앗만 가지고 있다면 아주 손쉽게 약재를 조달할 수 있었다.
생명의 불꽃의 또 다른 이름은 ‘장생의 불꽃’이었다. 이 불꽃을 가진 자는 불꽃의 생명력을 흡수해 자연스럽게 엄청나게 긴 수명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다만 파멸의 힘이 없다보니 전투에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준도 생명의 불꽃에 대해 들어보긴 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생명의 불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가볍게 들이쉬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혼허자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만물은 전부 수명이 정해져있다. 하지만 저 생명의 불꽃만 있다면 자신의 수명은 정해진 것보다 훨씬 더 길어질 수 있었다. 누구라도 탐낼만한 불꽃이었다.
“신농, 운이 좋군. 부럽구만 그래.”
만화 노인이 부러운 눈빛으로 생명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명의 불꽃은 성체가 되면 높은 지능을 갖게 되므로 평소에는 화염 상태로 나타나지 않고, 평범한 약재 모양으로 변해 조용히 흙속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간다.
심지어 생명의 불꽃이 바로 곁에 있어도 하찮은 약초로 착각하고 그냥 지나치는 일도 비일비재할 정도였다.
“허허. 운이 좋았지. 약재를 캐다가 우연히 찾았다네.”
신농 노인이 뿌듯한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본래 다툼을 좋아하지 않기에 생명의 불꽃에 가장 잘 맞는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준 군이 정화의 불꽃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신농이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하. 선배님처럼 저도 운이 좋았습니다.”
그때, 이준의 어깨 위로 소애가 나타났다. 소애는 무심한 표정으로 하늘 위에 떠있는 화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불꽃의 정령이잖아!”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제 아무리 뛰어난 화염 통제력을 가진 연금술사라 해도 불꽃의 정령만큼 화염을 잘 다를 수는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불꽃의 정령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투기대륙 최고의 연금술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혼족이 그렇게 오랫동안 정화의 불꽃을 쫓았는데, 결국 저 녀석 손에 들어갈 줄이야……. 아니야, 오히려 잘된 일 일지도 모르겠군. 저것도 곧 우리 혼족의 것이 될 터이니.’
혼허자의 눈빛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허허허, 자네도 참 운이 좋군. 나도 예전에 정화의 불꽃을 얻으러 갔다가 하마터면 정화세계에 갇힐 뻔 했었거든.”
신농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화세계에 가본 적이 있던 이준은 그의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 역시 정화성자의 영혼이 없었다면 도망가기 바빴을 것이다.
“모두 준비됐으면 제련을 시작하게.”
멍하니 소애를 바라보던 약단이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그 순간, 소애가 입을 쩍 벌려 분홍색 화염으로 거대한 약솥을 만들어냈다.
이준이 화염 약솥을 꺼내자 남은 세 사람 역시 각자 거리를 둔 채 자리를 잡았다.
혼허자가 검은 약솥을 꺼내 자리에 앉는 순간, 셀 수 없이 많은 약재들이 햇빛을 가릴 정도로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며 진한 약향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멀리 떨어져있던 만화 장로도 죽음의 폭풍의 불꽃을 이용해 화염 약솥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 수준의 연금술사들은 굳이 약솥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손에 있는 천지의 불꽃으로 언제든지 최고 품질의 약솥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네 사람 중 가장 기세가 등등한 사람은 신농 노인이었다. 신농 노인이 그 녹색 화염으로 이루어진 불바다 속에 들어가 앉자, 기이한 향을 머금은 약재의 씨앗들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불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화염 속으로 들어갔던 씨앗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신농 노인의 지시에 따라 녹색의 화염이 극히 순수한 녹색의 액체로 응축되어 약재 속에 스며들었다. 녹색 액체에 젖은 약재는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 불과 십분 만에 완벽한 희귀 약재로 변해버렸다.
‘정말 굉장하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연금술사들이 저 생명의 불꽃을 꿈에도 그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물론 약재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데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고는 하지만, 약재가 성체로 성장하는 데 최소 백 년 정도 걸리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멍하니 신농을 바라보던 이준은 정신을 가다듬은 뒤 저장반지에서 수많은 약재들을 꺼내 화염 약솥 위에 올렸다. 얼핏 봐도 수백 종은 되어 보이는 약재들을 펼쳐놓은 모습에 보고만 있어도 감탄사가 절로 새어나왔다.
“자, 가자.”
이준의 어깨 위에 있던 소애가 화염 약솥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화염 약솥 위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더니 하늘 위에 떠있던 수백 종의 약재가 한꺼번에 빨려 들어갔다.
“이 많은 약재들을 한 번에 연소시킨다고?”
약족 장로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저 약재들은 각각 필요한 제련 성분도 다 다른데, 저렇게 동시에 화염 약솥에 부어버리다니, 대체 이런 제련 방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귀빈석에 앉아있던 약로는 말없이 미소를 지은 채 이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