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2화. 공격
“이 산은 약족의 한 선배가 수백 년의 노력 끝에 일궈낸 비옥한 땅이다.”
약로가 착잡한 표정으로 산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시냇가로 천천히 내려가며 말했다. 그 맞은편에는 수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아치형 문이 우뚝 서있었다.
이 아치형 문은 바로 약족의 거처로 통하는 공간대문이었다. 약로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공간대문을 지키고 있는 약족의 강자들에게 옥편을 보여준 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가자. 약전은 약족에서 가장 큰 대회라 약족에 종속된 종파들도 참관이 허락될 것이다. 이때가 바로 약계가 가장 떠들썩할 때다.”
약로가 공간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강자들 중 하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넌 누구냐! 이 안쪽으로는 약족의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단번에 이준이 이 주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약족에 종속된 종파의 강자들은 심지어 종주라 해도 예의를 갖추기 마련인데, 이준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문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준과 약로를 바라봤다.
“약족의 초대를 받아 천부연맹에서 왔습니다.”
말을 마친 이준이 가볍게 앞으로 발을 내딛자, 사나운 기운이 폭발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스러운 기운에 공간대문 앞을 지키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곧이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부연맹의 약선! 그렇다면 저 자가 바로 혼전 전주를 쓰러뜨린 이준이겠군!”
“이준이 연금탑 연금대회의 우승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연금술에도 조예가 아주 깊다더군.”
“허, 그래도 이곳에 있는 연금술사들의 상대가 될 수 있겠나?”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문지기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이준은 최근 8대 세력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몰락한 이족에서 저런 인재가 나왔다는 것은 8대 세력 중 하나인 약족의 일원들에게도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들은 이준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에 들린 옥조각 하나를 문지기를 향해 내던졌다.
옥조각을 받아 든 문지기는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다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눈부신 빛기둥이 솟아나더니 곧 거대한 대문에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들어가시지요. 입구로 들어서면 두 분을 안쪽까지 안내해줄 사람이 서있을 겁니다.”
문지기가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라해도 약족의 태상 장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한 실력을 가진 이준에게 시비를 걸 배짱은 없었다.
잠시 후, 약로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비장한 눈빛으로 발을 내디뎠다.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두 사람의 시야가 확 밝아지더니 푸른 잎이 무성한 평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평원 위에는 족히 백 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초대형 비행 마수들이 천천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때, 갑옷을 입은 약족 사람이 빠르게 다가와 두 사람을 마수 위에 태웠다. 마수의 등에는 이미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올라타 있었다.
이미 8대 세력 중 하나인 고족의 땅에 가본 적이 있었던 이준은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자, 매서운 강풍이 몰아치며 약계를 향해 마수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날아갔다.
30분쯤 지났을까, 마수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이준의 시선이 먼 하늘을 향했다.
하늘에 넓게 깔린 구름 위로 높게 솟은 거대한 산 하나가 보였다. 그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대전과 건물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짙은 약향이 풍기는 연기 기둥이 건물 사이로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수는 산을 한바퀴 돈 후 천천히 광장으로 내려앉았다.
약로는 사방에서 보이는 익숙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곳곳에서 약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준은 말없이 스승의 곁을 지켰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조금은 익숙한 목소리가 이준과 약로 귀에 들려왔다.
“누가 이렇게 규칙을 모르나 했더니, 너희들이었군. 약선, 약족에서 쫓겨난 놈이 이렇게 뻔뻔하게 돌아오다니 놀랍구나.”
한 노인이 조롱 섞인 표정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두려운 듯 뒷걸음질을 쳤다.
“약만기…….”
이준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광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양쪽으로 빠르게 흩어지자, 그 사이에서 서서히 걸어 나온 사람들이 하찮다는 눈빛으로 약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열의 가장 앞에는 칼끝처럼 날카로운 입술을 가진 노인이 서있었다. 바로 정화세계 밖에서 마주쳤던 약족의 장로, 약만기였다.
“약선? 큭, 우리 약족에서 쫓겨났던 사람이잖아?”
“늙었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여기까지 찾아와서 망신을 자초하는군. 큭큭.”
“그러게 말이야. 장로님, 장로님이 이런 자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약족의 장로들이 약만기를 빼곡하게 둘러싼 채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약만기의 인정을 받는 순간 약족에서의 지위가 크게 올라가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늘 이런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약만기 역시 이러한 상황을 즐겼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준과 약로의 눈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약만기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그들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중주의 소식에 대해 귀를 닫고 산다 해도, 약선이 중주에서 얼마나 명성을 떨쳤는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현재 혼전을 무너뜨린 천부연맹의 맹주가 아니던가. 혼전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천부연맹의 실력이 고족과 혼족을 제외한 7대 세력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인 이준은 연금탑의 연금술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연금술사이자, 혼전의 전주를 쓰러뜨린 최고의 투사였다. 천부연맹의 맹주이자 이준을 제자로 두고 있는 약로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혼족이나 고족에도 없었다.
* * *
“스승님. 모든 일은 저에게 맡기고 비석 위에 이름만 새기시면 됩니다.”
약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작게 떨리는 수염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의 기운을 능히 읽어낼 수 있었다.
“기세등등하구나.”
자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워하던 약만기의 눈빛이 빠르게 식었다.
“낙오자는 약족의 비석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없다. 약선, 허튼 꿈 꾸지 마라!”
“장로님의 말이 맞다. 널 약전에 참가시켜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라!”
“낙오자가 비석에 이름을 새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장로님. 차라리 장로원에 통보해 저 두 사람을 쫓아내버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장로님 눈만 버리십니다.”
약만기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할 말 다 했나?”
이준이 약족의 아첨꾼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눈치가 없…….”
약만기에게 가까이 붙어있던 남자가 이준을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 위에서 거대한 힘이 폭발하더니 그의 몸을 납작하게 짓눌러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모두 넋을 놓고 말았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머리는 이미 바닥에 박혀있었고 이준이 그의 머리를 짓밟은 채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빠를 수가…….”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이준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조차 없었다.
“겁도 없구나. 이곳은 약족이다!”
약만기의 얼굴이 곧바로 살기로 물들었다.
퍽!
그때, 독설을 내뱉었던 또 한 명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약만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놀란 얼굴로 황급히 약만기에게 가까이 붙었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수십 개의 잔영이 번개처럼 나타나 그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순식간에 사방이 피로 물들었고, 조금 전까지 겁 없이 욕설을 퍼붓던 사람들은 시체처럼 신음조차 뱉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닥을 굴러다녔다.
“이준!”
분노한 약만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평생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네 놈이 완전히 미쳤구나! 천부연맹 따위가 감히 약족의 상대가 되리라 믿는 것이냐!”
약만기의 분노 섞인 고함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저 놈을 잡아와라!”
“예!”
약만기가 이준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나타나 매서운 염력이 솟구치는 창을 내던졌다.
쾅!
하지만 그들의 손을 떠난 창은 이준에게 닿기도 전에 분홍색 화염에 의해 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준을 둘러쌌던 수십 명의 사람들은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설마 정말로 혼자서 혼멸생을 쓰러뜨렸단 말인가?’
약만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화세계 앞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이준은 2성 투성 밖에 되지 않았다. 어떻게 몇 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약족의 땅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기엔 약족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약만기의 발끝에서 4성 투성 중급의 기운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하지만 이준은 당황한 기색 없이 고개를 저으며 태연한 표정으로 약만기를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목숨은 제 것이라고.”
“5성 투성?!”
수많은 강자들은 이준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5성 투성이라면 8대 세력 내에서도 최고의 강자라고 할 수 있었다.
“소문이 진짜였어.”
이준의 기운을 느낀 약만기 역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덤빈다 해도 5성 투성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쉭-!
그때, 5성 투성 강자의 기운을 느낀 수많은 약족의 강자들이 빠르게 몰려왔다. 상공해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 첫 번째로 보인 것은 바닥에 만연하게 깔린 피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감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무슨 일이 있든, 약족의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대죄였다.
“만기 장로, 이게 무슨 일인가?”
“마침 잘 왔네. 저 못된 놈이 감히 약족의 사람들을 공격했네!”
약족의 장로들이 나타나자 약만기가 곧장 손가락으로 이준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준? 이족의 그 이준 말인가?”
약족 장로들이 놀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멀리서 느껴지던 그 무서운 기운의 주인공이 몰락한 이족의 후예라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준. 약족과 이족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갑자기 우리의 땅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황색 의복을 입은 한 노인이 이준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말, 못 들어 보셨습니까?”
이준의 대답에 약족 장로들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이준의 시선은 여전히 약만기를 향해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약만기가 독기 어린 눈빛으로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스승님께 사과하십시오.”
“하!”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약만기는 가당치 않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약선보다 훨씬 높은 신분을 가진 자신에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과를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